미국의 식량정책은 오랫동안 부조리로 가득 차 왔다. 우린 매년 농업보조금으로 수백 억을 쓰는데, 그 중 대부분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작물을 심는 부유한 상업적 운영에 도움이 된다.  공급 과잉이 세계의 작물 가격을 하락시키고, 개발도상국의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한편 수백만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수혜자에게 하루 4달러 조금 넘게 제공되는 푸드 스탬프 덕에 기아에 시달리지는 않는 상태로 살고 있다. 


그래서 공화당이 이러한 모든 문제를 악화시킬 농업법을 요청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거의 너무 터무니없다. 국가 예산의 균형을 잡기 위한 추정 목적을 위해, 의회가 농업법의 장기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공화당 간부회의가 상원과 협상을 추진하는 방안은 국가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는 빈약한 원조를 삭감하고 부유한 소수의 미국 농민들은 계속 살찌우는 데 사용될 것이다. 


의회는 10년에 걸쳐 400억 달러의 푸드스탬프 혜택을 삭감하자고 제안했다. 2009년 경기부양법에 포함된 푸드스탬프 프로그램 인상 만료와 함께 이번달 이미 발효된 삭감에 50억을 더한다. 한편, 공화당은 지난해 전체의 일부인 149억 달러의 농업보조금을 허용하여 만족한 듯하다. 공화당의 제안은 직불금 -시장의 변동과 상관없이 특정 작물을 계속 재배하도록 권장하기 위해 매년 농민에게 설정된 비율로 지불- 부터 작물보험 보조금까지 정부의 지원을 전환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더 저렴하지 않을 수 있다. 더 나쁜 점은, 직불금과 달리 작물보험 보조금은 이 아낌없이 주는 형태를 받을 농민들의 소득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제안은 어떻게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이 경제학자들이 지대추구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부양되는지에 대한 완벽한 사례이다. 소수의 미국인들이 매우 부유하게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정치권력도 불균형한 크기로 급증했다. 소수의, 강력한 이윤 -이 경우 부유한 상업농- 이 국가 경제 파이의 더 큰 조각을 도용하여 자신만 혜택을 누리도록 시장을 왜곡하는 공공정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의 더 큰 조각은 다른 사람의 작은 조각을 취한다는 뜻이다. 파이는 더 커지지 않았다. 지대추구자들은 개별 미국인으로부터 손실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조금씩 취하는 데 숙달되어 있다. 그들이 각각의 개별 미국인들의 주머니에서 꺼내는 돈은 작지만, 지대추구자들이 취하는 총합은 거대하다. 그리고 이것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공화당의 농업법에 제안된 부조리한 계획은 특히 이 과정의 어처구니 없는 버전이다. 가난한 미국인에게서 맨손으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진짜 돈을 가져가고, 그 돈은 자신의 캠페인 기부금과 정치적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받을 가치가 없는 소수의 부유층에게 가져다준다. 거기에는 경제적 정당성이 없다. 이 법은 실제로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종류의 생산을 촉진하고, 가장 작은 소득을 지닌 사람들의 소비를 축소하여 우리의 경제를 왜곡시킨다. 또한 도덕적 정당성도 없다. 그것은 실제로 수백만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고통과 불안정성을 증대시킨다.


농업보조금은 80년 전인 1933년에 시작되었을 때 더 합리적이었다. 당시 미국인의 40% 이상이 농촌 지역에 살았다. 농가소득이 대공황이 시작되고 3년 동안 약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 상황에서 보조금은 빈곤퇴치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현재, 농업보조금의 목적은 전혀 달라졌다. 환경실무그룹(Environmental Working Group)에 의하면, 1995~2012년에 1%의 농가가 전체 보조금의 1/4 이상인 약 150만 달러씩 받았다. 보조금의 약 3/4이 단 10%의 농가로 갔다. 이 농가들은 1년에 평균 3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푸드스탬프라 부르는 연방정부의 보조영양프로그램(SNAP)으로 지난해 개별 수혜자가 받은 평균 혜택의 약 20배이다.


오늘날, 푸드스탬프는 빈곤퇴치 노력의 주요한 지원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해 미국 농무부의 종합자료에서 2011년 SNAP에 참여한 미국인 4500만 명의 80%는 빈곤 수준 이하의 가구소득이었다. (그 이후, 총 참여자 수는 약 4800만으로 확대되었다.) 그러한 지원으로도 그들 중 대부분은 식량불안을 경험했다. 즉, 일 년 중 어떤 시점에는 식탁을 음식을 올리는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푸드스탬프 프로그램과 농업보조금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둘은 이상한 협력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근거가 있다. 식량의 경제학의 두 측면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생산과 소비. 국가 안에 풍부한 공급을 갖고 있는 것이 그 국가의 시민들에게 잘 공급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부유한 자에 대한 농업보조금과 가난한 자에 대한 영양지원 사이의 근본적인 불균형 —농업법 제안이 직접적으로 촉진시킬 불균형— 은 이 확립된 경제적 사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증거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Amartya Sen은 심지어 기근이 반드시 공급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얻는 데 실패함으로써 일어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1943년의 벵갈 기근과 한 세기 이전에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에서 이는 사실이었다. 영국의 지주에 의해 통제되던 아일랜드는 시민이 기아로 죽을 때조차 식량을 수출하고 있었다.  


유사한 역학이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농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옥수수와 콩의 가장 큰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그럼에도 수백만 미국인들이 여전히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공화당이 현재 삭감하고자 하는 기아와 영양실조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빈곤층에서 취하여 부유층에 보조금을 준다.


미국의 식량정책과 관련된 모순적인 층이 또 있다. 과잉생산을 장려하는 한편, 농가에서 생산하는 식량의 품질과 다양성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옥수수에 대한 과다한 보조금은 건강에 해로운 많은 식품이 상대적으로 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가계가 빡빡한 사람들은 식료품을 사면서 영양가가 없는 음식을 선택하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국인이 재력과 어울리지 않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만율과 함께 제2형 당뇨병의 발생률이 높다는 기아의 역설에 직면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빈곤한 미국인들은 특히 비만의 위험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12억 인구 중 수천만 명이 매일 기아에 직면한 인도에 있었다. 첫 페이지의 머리기사에서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살 여유가 없기 때문에 미국인 7명 중 1이 식량불안에 직면했다고 시끄럽게 떠들던 때였다.  다음주에 내가 만난 인도인 친구는 이 소식에 당황했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여전히 기아가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당황스러움은 이해할 만하다. 부유한 곳에서 기아는 불필요하다. 내 인도인 친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미국인의 15% —그리고 미국 아이들의 22%— 빈곤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최저임금 7.25달러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1년에 약 1만5천 달러를 버는데, 4인가구의 최저생활비보다 훨씬 적고(2012년 2만3492달러) 3인가구의 빈곤 수준보다 더 적다.


이 냉혹한 그림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빈곤한 상태로 매우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경제 체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다. 


이는 미국이 일하려던 방법이 아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유명한 1941년의 “네 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그는 모든 미국인이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여 특정한 기본권을 가져야 한다고 공표했다. 이 개념은 이후 충분한 식량에 대한 권리를 기술하기도 한 세계인권선언에서 국제사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경제적 인권을 옹호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면서 —채택하는 방법으로— 미국 내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수백만 미국인의 높은 빈곤 수준으로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충족하려면 정부에 의지해야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숫자는 엄청난 경기 침체의 시작과 함께 극적으로 증가했다. 푸드스탬프를 받는 미국인의 숫자는 2007~2013년 사이 80%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미국인들 대부분이 엄밀히 말하면 빈곤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필요의 깊이에 미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2012년, 푸드스탬프 수혜자 5명 중 2명은 총소득이 빈곤선의 절반 이하였다. 그 프로그램으로 그들이 얻는 양은 매우 작아 수혜자 1인당 하루 4.39달러이다. 이는 살아남기에 충분치 않을 것 같지만, 그걸 받는 사람들의 생활에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예산정책우선센터(Center on Budget and Policy Priorities)는 2010년 푸드스탬프가 400만의 빈곤한 미국인 구제했다고 추산한다. 


기아와 영양부족에 대처하기 위한 기존 프로그램의 부적절성을 감안할 때, 그리고 엄청난 경기 침체의 여파로 인한 빈곤층의 규모를 감안할 때, 우리는 식량안보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원의 공화당 간부회의의 구성원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 같다. 불충분한 공공 교육을 제공받고 시장성 있는 기술이 부족한 빈곤층, 그리고 열심히 일을 찾지만 궁지에 빠진 경제 체제 때문에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미국인 7명 가운데 1명만 그걸 얻는다. 이러한 문제의 영향을 경감하기는 커녕, 공화당의 제안은 궁핍과 불평등을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공화당 제안의 비참한 효과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 이르를 것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푸드스탬프의 삭감과 결합된 농업보조금은 세계의 빈곤과 기아를 증대시킨다. 이는 미국의 소비를 감소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생산을 증가시켜 불가피하게 식량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수출은 세계의 가격을 하락시켜 세계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다. 농업은 세계의 농촌 지역, 특히 개발도상국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빈곤층의 생계에서 70%를 차지하는 주요한 원천이다. 


공화당의 제안을 채택하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경제에 울려퍼질 것이다. 간단히 자원이 감소된 빈곤한 가구는 성장이 막혀 버릴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공화당의 농업법은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부유한 농민에게 즉각적으로 수여되는 것에 상응하여 빈곤층은 삭감된다. 영양이 부족한 아이들은  —기아 상태나 나쁜 식단으로 질병을 지닌— 더 나은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학습을 못한다. 


푸드스탬프를 삭감함으로써 우리는 불평등의 영속을 보장하고, 그것은 기회의 불평등이란 최악의 상황 중 하나로 나타난다. 내가 이전 시리즈에서 썼듯이, 미국은 기회와 관련하여 놀랄만큼 나쁜 일을 하고 있다. 우린 자신의 잠재력에 걸맞게 살지 못하는 하층의 많은 사람들을 놔두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들이 국가 전체의 번영에 기여를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이러한 식량정책—우리 미래에 대한 관심, 특히 우리 아이들에 대한 국가 부채의 영향— 에 찬성하는 부정하고 몹시 냉소적인 주장인 공화당의 논점에 드러난다. 부채숭배의 강화에 힘쓰고 있다(하바드의 경제학자 Carmen M. Reinhart와 Kenneth S. Rogoff에 의해 부채-G.D.P에 성장둔화가 연결된다고 폭로됨. 90% 이상의 비율). 또한 공화당의 농업법은 미국의 어린이들과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친다.


이러한 제안이 법이 된다면 국가는 도덕적, 경제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http://opinionator.blogs.nytimes.com/2013/11/16/the-insanity-of-our-food-policy/#more-150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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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는 인구의 약 15%가 푸드스탬프를 지원받는다고 한다. 

이는 분명 1:99의 사회가 낳은 결과이겠지. 


한국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로컬푸드니 유기농이니 하는 먹을거리의 정의를 위해서는 경제민주화든 뭐든 소득의 재분배가 필수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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