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수

(주) 이장 대표이사


들어가며

나는 한 달에 5-6회 정도, 지역의 농업기술센터나 농촌마을로 농촌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러 다닌다. 이 자리에서 나 스스로를 바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내가 살아온 궤적을 더듬다 보면 이건 영락없는 바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학자처럼 한 가지 연구만 하고 한 분야에서 일했다면 아마 바보소리도 안 들었을 것이고 내 스스로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학에서 환경학으로, 환경학에서 농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이제는 학술연구는 뒷전에 둔채, 농업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뒹굴다 보니 지난 세월이 바보같기만 하다.


공학에서 환경학으로, 그리고 유기농업으로

80년대 초반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웃 활동을 했던 나는 산에서 쓰레기 비닐봉투 줏는 일이 싫어 자연적으로 분해되는 비닐봉투를 만들면 좋겠다 싶어 공업화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대학은 환경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경찰들이 학교를 들어와 진을 치기 일수였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감옥에 가거나 생명을 맞바꾸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였다.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그래서 나도 주로 대학본부 잔디밭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써클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저 그렇게 대학 4년이 지나갔다. 사명감이 투철한 이는 노동현장으로 갔고 어떤 이는 취직을 했고 어떤 이는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나는 노동현장에 갈 만한 자신도 없었고 취직하기도 싫었으며 대학원에 진학해서 다이어트용 감미료, 자외선 차단섬유를 만드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 꿈을 다시 떠올렸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는 환경공부를 하는 전문적인 대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대학원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지겹기만 하던 공학책과 달리 환경에 관련된 책은 재미있었고 실험실을 떠나 산으로 들로 나가서 하는 일이 신나기만 했다. 대기오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던 날, 갑자기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목표가 달성된 탓이라 생각했다. 그 허무감이 오래가면서 내가 공부한 것이 허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 공부는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기오염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사후약방문적인 처방을 할 뿐이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환경교육에 집중했다. 환경문제라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이 바뀐다면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까 해서였다. 환경교육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가 농촌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에게 똑같은 환경교육을 하게 하면 그 차이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물음을 내 스스로 만들어놓고 내게 놀라고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20년이 넘게 농업이나 농촌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나를 그 물음이 농업과 농촌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가 손쉽게 농업과 농촌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책이었다. 서점에서 농업과 농촌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내게 주는 메시지는 온통 ‘절망’뿐이었다. 그 동안 농업정책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고 농촌은 피폐되어 있었으며 농심은 이미 농촌에 없었다. 더구나 농산물 개방이라는 암초가 놓여있었다.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농업의 회생방법은 그다지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 즈음 내가 활동하고 있던 환경동아리 ‘초록바람’에서 여름캠프를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농촌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동아리 회원들과 농촌의 중요성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나 자신도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원 중에 한 명이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유기농업....3박4일의 초록바람 유기농업 캠프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환경과 사람을 살리겠다고 묵묵히 유기농업을 고집하고 노력하고 있는 유기농 생산자들을 만나면서 농업과 농촌을 살리고 더 나아가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았다.  


유기물 농업이 아닌 유기적인 농업으로

유기농업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환경과 관련하여 유기농업에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농대에 새로 진학하기보다는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대학원 입학 후 유기농업을 공부하겠다고 하니 지도교수, 선후배 할 것 없이 뜯어말렸다. 하지만 이미 대기오염과 관련한 책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나는 유기농업에 관한 책은 한번 잡으면 밤새워 읽어야 하는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유기농업의 개념과 역사를 더듬기 시작했다. 1700년대 후반,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체계이며 농부는 그 체계를 진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던 Thomas Jefferson, 토양중의 박테리아에 관심을 가지고 ‘흙은 살아있다’고 주장하던 Rodale, 독일의 철학자인 Rolf Steiner(1861-1925)의 생명동태 농업(Bio-Dyanamic Agriculture), 영국의  Albert G. Howard (1873-1947)의 『농업성전(Agricultural Testament, 1940)』, 일본의 후쿠오까 마사노부의 사무농법(四無農法, 혹은 자연농법), 고다니 준이치의 애농회(愛農會), 우리나라의 정농회와 한 살림 등에 관한 책과 자료를 보았다.

 

기본적으로 유기농업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영향이 최소화된다. 하지만 생태계는 보호되고 안정한 농산물을 만들 수는 있어도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대안도 유기농업일 수 있을까. 이는 유기농업을 유기물질을 사용하는 농업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유기적이라는 말을 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구성요소가 잘 조직되어 있어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둘 이상이 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둘이 아니라 둘 이상이 된다. 즉 우리 몸을 나누면 여러 가지 장기로 나눌 수 있지만 우리 몸은 장기의 단순한 집합을 넘어서 생명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개념에서 볼 때 유기농업은 우선 땅을 유기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땅에는 흙, 수분, 영양분, 미생물, 곤충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한 생명체처럼 활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유기농업이다. 그러면 조금만 토양을 헤치면 각종 곰팡이들로 구수한 냄새가 나고 개미, 굴파리, 응애 등이 분주하게 기어다닐 것이다. 여기서 개념을 조금 더 넓혀보자. 땅을 벗어난다면 농장을 유기체처럼 만들 수 있다. 축사에서는 거름이 만들어지고 그 거름이 논과 밭에 들어가고 그러한 과정에서 농부는 충분한 보상으로 보람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농장을  흐르는 개울 속에는 고기들이 헤엄치고 조그만 뒷산에는 작은 새가 지저귀며 자연의 풍성함을 나눠준다. 마지막으로 이제 유기농산물을 먹는 소비자가 농장을 찾아온다. 생산자와 눈인사를 나누고 팔을 걷어붙이고 논으로 들어가 피를 뽑는다. 저녁이면 모깃불이 피어나는 마당에서 농부와 함께 막걸리를 먹으며 이런 저런 세상이야기를 나눌 때 아이들이 요란을 떠며 모깃불가에서 뛰어논다. 그렇다. 진정한 유기농업은 흙과 농장, 주변환경뿐만 아니라 소비자까지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농업인 것이다. 

 

그 개념에 실마리가 있었다. 유기농업이 단순히 유기물질을 사용하면서 식품의 안정성만 높이려는  농업이 아니라 농업과 농촌을 되살리고 더 나아가 환경과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사회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방법은 도시와 농촌이 하나가 되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


유기농업에서 생태마을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충북의 유기농가들을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여 농부들과 인터뷰를 하고 논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 그 때까지 나는 누구나 하기 쉬운 유기농업 기술을 개발하면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었다.  더욱이 농업기술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술이라기 보다 토착적이고 지역적인 기술이다. 이러한 농업기술의 특수성을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사학위는 받았지만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론은 유기농산물을 팔리게 하는 것이었다. 유기농산물이 잘 팔리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업으로 전환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더 나은 농산물을 더 쉽게 생산하기 위한 기술도 개발될 것이었다. 증산정책에 혈안이 된 정부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인건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종교, 가치관에 따라 묵묵히 유기농업을 지켜온 생산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줄 수만 있다면 소비자들이 유기농산물을 사줄 것이라 생각했다. 인터넷을 활용하기로 했다. 환경사업 공모에 당선되어 비용도 마련했다. 일년동안 전국의 100여명의 유기농 생산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싸이트도 만들었다. 그 이름이 인터넷 이장이었다. 사이버 공간에 가상 유기농 마을을 만들고 생산자들을 소비자와 연결하는 마을이장의 역할을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홈페이지는 구축되었지만 생각만큼 유기농산물이 잘 팔리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농산물을 판매에 있어서 농산물을 품질과 정보도 중요하지만 물류가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기농산물의 경우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 각기 공간적으로 흩어져 있어 물류를 효율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인터넷 이장에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유기농산물을 구입하고 싶어도 전라도에서 한 물건, 경상도에서 한 물건 구입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농산물 가격보다 유통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다수의 생산자들이 다양한 생산물을 모아 소비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든다면 해결 가능성이 보였다. 생산자들을 모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공간이 어디일까 고민하였다. 내가 찾아낸 것은 바로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주민들이 함께 다양한 작물을 유기농업으로 전환하고 소비자들은 한 마을을 고향 삼아 농산물도 사먹고 주말이나 휴가철에 찾아갈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바라던, 진정한 유기농업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호주로 갔다. 호주에는 퍼머컬쳐(Permaculture)라는 생태마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육과정이 있었다. 두 주간의 교육과정을 포함하여 한 달간의 호주 체류었지만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호주에서 돌아와 지금은 우리나라 농촌마을을 생태마을로 발전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로,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하였다. 이제는 대학원 후배들과 환경동아리 초록바람 친구들을 중심으로 모인 직원 30명이 우리나라 농업과 농촌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우리보다는 우리의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는 회사가 되어 있다.


끝내며... 지역운동으로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했듯이 나는 바보같이 살아왔다. 일관된 한 가지 분야에서만 일을 하지 못했다. 이제 마을일에서 한계를 느낀다. 한 마을이 잘 가꾸어진다고 해서 생태마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을을 넘어서 지역 내의 인적, 물적 자원이 있어야 하고 이 자원을 잘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호주를 방문했을 때 크리스탈 워터즈라는 생태마을 인근 도시에 각종 협동조합과 지역화폐 등 다양한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이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지역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 8월 충남 서천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좌충우돌 생활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바보 짓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또 다시 저지를지 모르는  바보 짓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




<참고> 크리스탈워터즈와 퍼머컬처


1. 크리스탈 워터즈 생태마을


    크리스탈 워터즈는 1965년 일단의 전문가들이 259ha(약 80만평)에 조성한 생태마을이다. 이 지역은 목축을 위해 삼림을 베고 초지를 조성했다가 생태계가 파괴된 광활한 구릉지였다. 땅을 구입한 후 적절한 토지이용계획을 구상하였는데 0.5ha(약 1500평, 전체면적의 14%) 규모의 83개로 나누어진 대지와 회합, 교육, 생태관광 사업, , 방문자 숙소, 가내수공업 등에 이용하는 공동체 공간 15ha(4만5천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토지를 농경지, 삼림, 소하천으로 보전하거나 새롭게 조성하게 된다. 이러한 전체 토지이용계획 과정에 깊게 참여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태설계자인 맥스(Max O Lindegger)인데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이 곳에는 호주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이주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곳을 설계한 맥스, 생태전문교육기관인 SEED(Sustainability education and ecological Design)에서 일하는 모랙과 이반(Morag Gamble, Evan Raymond)를 비롯하여 전업농, 재택근무자, 농자재 판매업자, 예술가 등이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에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자신의 주거환경을 퍼머컬쳐에 의거하여 조성해야 하고 마을내의 야생동물과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주거형태와 공동체적 생활양식이 전 지구적인 생태환경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대안으로서 자리잡게 했다는 선구자적 업적으로 인해 1995년 UN에서 세계주거단지상(World Habitat Award)를 받기도 했다.


2. 퍼머컬쳐 디자인


    퍼머컬쳐는 permanent(영구적인)와 cultivation(경작) 혹은 culture(문화)의 합성어로  호주의 빌 모리슨이 보다 생태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농장을 경영하며 더 나아가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생활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영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인류문화를 만들고자 시도하고 있는 방법론을 일컫는 말이다. 퍼머컬쳐에 대해 크리스탈 워터 공동체에서 펴낸 교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퍼머걸쳐는 작은 발코니에서 농장에 이르기까지, 도시에서 야생지에 이르기까지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개념이다. 퍼머컬쳐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해주는 식량, 에너지, 집, 물질, 서비스 생산할 수 있는 환경과 제반 기반구조를 만들 수 있다.  퍼머컬쳐는 우리 주변의 환경과 자원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고 어떻게 우리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퍼머컬쳐의 목적은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퍼머컬쳐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세심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즉 닭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닭의 습성, 닭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닭이 생산하는 것 등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해두어야 한다. 그래서 닭의 습성에 알맞고 가급적 농장에서 나오는 것으로 닭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닭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농장에서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요소가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연결될 수 있게 설계하고 관리하는 것이 퍼머컬쳐의 핵심이다. 즉 닭장은 집과 가까워야 사람이 먹은 음식쓰레기를 닭에게 먹일 수 있고 채소 밭과 가까우면 닭이 채소밭의 곤충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한편 닭똥을 이용하기 위해 퇴비장과 닭장이 가까운 것이 좋고 닭장과 온실을 붙여 짓게 되면 겨울철 온실 난방비를 닭의 체온 덕분으로 절약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계획과정은 구역계획(Zonning)으로 체계화된다. 집과 가까운 쪽에 관리를 많이 해야 하는 축사, 퇴비장, 텃밭 등을 위치시켜 상호관련성을 증대하고 먼 지역일수록 관리가 덜한 과수, 조림지 등을 위치시키는 방법이 바로 구역계획이다.

 

    퍼머컬쳐가 농장설계와 운영에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구역계획, 토양관리, 작물관리 등 농장과 연관되는 분야가 많기는 하지만 건축, 수자원 관리, 도시 공동체 운영, 지역경제의 활성화, 공동체 복원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다양한 개념들과 방법을 퍼머컬쳐라는 개념하에 통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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