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동기간으로, 아마도 쌍둥이로, 줄기의 일부( “과학, 기술, 공학, 수학”)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세계의 가장 빛나는 경이로움에 관해서라면 —주머니 속의 슈퍼컴퓨터가 위성과 통신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은 긴밀히 결탁해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과학과 기술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발명품이 과학적 방법과는 무관한 순수한 도구이다. 바퀴와 우물, 크랭크와 방아, 기어와 배의 돛대, 시계와  방향타 및 작물의 돌려짓기 등은 모두 인류와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물건의 일부는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기 오래전부터 발명되었다. 나는 컴퓨터와 아이폰, 에코,  G.P.S.를 좋아하지만,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처음 사용할 때부터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으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늘 의지하고 있는 지금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도 의지하는 13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안경이 있다. 비누는 페니실린보다 더 많은 죽음을 예방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다.


“정상이 아니다(Against the Grain): 초기 국가의 내밀한 역사”에서 예일대학 정치학 교수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 씨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인 기술에 대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그 기술은 호모 사피엔스에 선행하며 우리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에게 속하니 매우 오래되었다. 그 기술은 불이다.  우린 두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불을 사용했다. 첫 번째로 가장 확실한 건 요리이다. Richard Wrangham 씨가 그의 책 “점화(Catching Fire)”에서 주장했듯이 우리가 요리를 하게 된 능력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게 해주고, 훨씬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근연종의 동물인 침팬지는 우리보다 3배나 큰 결장이 있다. 소화시키기 더 어려운 생식을 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리한 음식에서 얻는 여분의 열량은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약 1/5을 흡수하는 커다란 두뇌를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대부분의 포유 동물의 두뇌는 이의 1/10에 불과하다. 그 차이가 인간을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만들었다. 

불이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현대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경관을 우리의 목적에 맞게 변경하고자 불을 사용했다. 수렵채집인들은 이동하면서 불을 놓아 토지를 정리하고, 빨리 자라면서 먹이를 유인하는 새로운 식물이 자리를 잡도록 했다.  또 그들은 불로 동물들도 몰아냈다. 스콧 씨는 우리의 조상이 이 새로운 도구에 숙달된 시기부터 이러한 기술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는 인간이 지배하는 시기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스콧 씨는 우리가 불이란 기술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인류 역사의 95%를 차지하는 수렵채집인의 기간을 보낸 우리 조상의 독창성을 그리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콧 씨는 “인간의 불이 경관 건축의 수단으로 역사적인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결과가 ‘야만인’이라고 알려진 ‘문명화 이전’의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퍼뜨리며 성취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불의 중요성을 입증하고자, 그는 아프리카 남부의 특정 동굴에서 발견된 걸 지적한다. 동굴의 가장 초기의, 가장 오래된 지층에는 육식동물의 뼈 전체와 인간을 포함해 그들이 씹어 먹었던 여러 뼛조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불을 발견하고 동굴의 소유권이 이전된 층이 나타난다. 인간의 뼈가 전체가 되고, 육식동물이 뼛조각이 된다. 불은 점심으로 먹느냐 점심거리가 되느냐의 차이를 만든다.


해부학적으로 현대 인류는 대략 20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그 뒤 약 1만2천 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일반적으로 합의된 신석기혁명(Neolithic Revolution)이 일어난다. 스콧 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소와 돼지 같은 동물을 가축화하고 수렵채집에서 작물의 파종과 재배로 전환하는 농업 혁신의 “꾸러미”를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작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지금도 인류의 주식이 되는 밀, 보리, 벼, 옥수수 같은 곡식이었다.곡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의 탄생을 이끌었고, 그에 따라 국가가 발전하고 복잡한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정상이 아니다”에서는 널리 퍼진 이 이야기를 확 뒤집고 있다.  스콧 씨의 전공은 초기 인류의 역사가 아니다. 그의 작업은 국가의 형성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농민의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관심사가 그리는 궤적은 “농민의 도덕경제(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부터 “지배 당하지 않는 기술(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같은 그의 저서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는 정치학자들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가의 중심에 있는 관료들이 자신들이 관리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식의 중앙집권적 계획과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스콧 씨는 국가의 관심사와 주체의 관심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스탈린의 집단농장 프로젝트는 “국가가 농법을 결정하고, 농촌의 실제 임금을 결정하며, 생산된 어떤 곡물이라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걸 타당화시키고, 정치적으로 농촌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수백만의 농민을 학살했다.

스콧 씨의 새 책은 이러한 생각을 오래된 과거로 확장시키고, 우리의 역사가 일직선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존 연구를 끌어온다. 우리의 연대표는 훨씬 더 복잡하며, 표준적인 설명의 인과관계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순박한 상태’의 국가 중의 국가이기에, 오늘날 이라크 지역이기도 한 메소포타미아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순박한 상태”라는 단어는 초기의 정착으로부터 오염되는 일 없이 이러한 국가가 탄생하고, 어떠한 사회 조직이 처음으로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기록을 작성한 최초의 국가였고, 이후의 역사에 이중으로 관련이 있는 근동과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다른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최근 고고학 연구에서 들리는 중요한 소식은 “정착문화권” 또는 정착한 공동체에서 사는 일과 농업을 채택한 일 사이의 시간차에 관한 것이다.  예전 연구에서는 농업이 발명되면서 정착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여러 증거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동물과 곡식에 기반한 최초의 농경 경제에서 “두 가지 주요한 요소의 길들임 -가축화와 작물화-” 사이에는 4천 년이란 엄청난 격차가 있다.우리의 조상은 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농업의 가능성을 심사숙고하며 살펴보았다. 그들이 살아왔던 생활이 놀랄만큼 풍요로웠기에 오랫동안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중국 황하의 초기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이름들이 암시하듯 습지대였다. 신석기 시대에 메소포타미아는 바다가 현재의 해안보다 더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삼각주의 습지대였다.

이곳은 인간에게 관대한 경관이었다. 물고기와 그를 먹이로 삼는 동물, 주기적인 홍수 이후에 남는 비옥한 흙, 철새와 강가를 돌아다니는 이동성 먹이 등을 제공했다.  초기의 정착 공동체는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 대지가 다양한 먹을거리의 원천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 어느 먹을거리의 원천이 부족해도 다른 원천이 존재했다. 고고학은 길들임과 농업이란 “신석기 시대의 꾸러미”가 우리의 현대 마을과 도시 및 국가의 조상인 정착 공동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한 공동체는 인류가 집약적 농업을 행하기 이전에 습지대의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하나만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곡식 작물에 의존하는 게 훨씬 위험했으니,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 수천 년이 걸린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조상은 이러한 복잡한 식량 공급의 그물망에서 한 가지 작물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했을까? 스콧 씨는 기후의 압박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우린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는 명확하다. 첫째는 수천 년 동안 농업 혁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었다는 점이다. 화석의 기록에 의하면 농경민의 생활은 수렵채집인의 그것보다 더 힘들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들의 뼈는 먹을거리의 압박이 있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그들은 더 작고, 자주 아팠으며, 사망률은 더 높았다. 가축과 가까이에서 살아가면서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질병이 발생하여 인구밀도가 높은 정착 공동체에 혼란이 야기되었다. 스콧 씨는 그걸 마을이 아니라 “후기 신선기 시대의 다종 재정착 야영지(late-Neolithic multispecies resettlement camps)”라고 부른다. 누가 그곳 중 한 곳에 살기를 선택했을까? 제러드 다이아몬드 씨는 신석기 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에 관하여 놀랄만한 사실은, 이 시대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스콧 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증거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또 다른 결론은 곡식 작물의 경작과 초기 국가의 탄생 사이에는 중요하고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곡식이 인류의 유일한 주식이었던 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형성을 장려한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역사는 카사바 국가와 사고, 얌, 토란, 플랜틴 바나나, 빵나무 열매 또는 고구마 국가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곡식의 무엇이 특별했을까? 연말정산서를 작성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작물과달리 곡식은 과세하기 쉬웠다. 어떤 작물(감자, 고구마, 카사바)은 땅속에 달려서 세금징수원에게서 숨길 수 있으며, 발견되더라도 하나하나 캐서 보아야 한다. 다른 작물(특히 콩과)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익거나, 덜 익은 것이 익기까지 고정된 궤적을 따르기보다는 성장기를 살펴서 수확량을 산출해야 한다. 즉, 세금징수원이 한 번 와서는 안 되며 적당한 세금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스콧의 말에 의하면, 오직 곡식만이 “볼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과세할 수 있고, 저장할 수 있으며, 운반할 수 있고, ‘배급할 수 있다.’ ” 다른 작물이 이런 장점의 일부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곡식만이 그 전부를 가지고 있기에 곡식이 “주요한 식용 전분이자, 현물 과세의 단위이며, 지배권을 지닌 농경 달력의 기초”가 되었다. 세금징수원이 와서 농지를 평가하고 과세의 수준을 정한 뒤, 다음에 돌아와 제대로 수확량이 나왔는지 확인했다.

스콧 씨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이 농산물에 과세를 하고 잉여를 추출하는 능력으로서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계급제와 분업, 전문직(군인, 사제, 하인, 관료 등) 및 그들을 통할하는 엘리트를 지닌 복잡한 사회를 만들었다. 새로운 국가는 곡식 작물에 관개를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제를 포함한 강제노동의 형태를 요구했다. 노예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을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었기에, 국가는 전쟁을 벌이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냈다. 메소포타미아의 최초 국가들에서 보이는 인류 역사의 가장 초기의 이미지 중 일부는 목에 쇠고랑을 차고 행진하는 노예들이다. 여기에 초기의 정착 공동체에 빈번했던 전염병과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건강 상태를 더하면, 왜 신석기 혁명이 그 당시 살아오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재앙이었다는 최근의 합의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전쟁, 노예제, 엘리트에 의한 통치—모두가 또 다른 새로운 통제술인 글쓰기를 통해 더 쉬워졌다. 스콧 씨는 “수치 기록을 관리하는 체계적인 기술 없이는 초기 국가를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글쓰기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모든 좋은 것들 —그걸 문화와 오락과 소통과 집단의 기억을 위해 사용하는— 은 현재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것이 발명된 지 반세기 동안, 글쓰기는 전적으로 부기에 사용되었다.  “사회와 그 인적자원 및 생산물을 통치자와 신전 관리인들이 판독하기 쉽게 만들고, 그로부터 곡식과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한 표기 체계를 만들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스콧 씨는 초기의 점토판은 “목록과 목록, 그리고 또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빈도 순으로 기록의 주제를 보면 “보리(배급과 세금으로), 전쟁 포로, 남성과 여성 노예”였다고 한다.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을 탈출하고자 자살한 독일의 위대한 유대인 문화평론가 Walter Benjamin 씨는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말을 남겼다. 인류가 만든 복잡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에는 충분히 오래 바라보면 억압의 역사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뜻이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그것은 옳은 듯하다. 글쓰기의 발명부터 여러분의 독서모임까지 오래되고 충격적인 여행이었다.  

고대의 “암흑시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스콧 씨의 질문은 날카롭다. “누구에게, 어떤 점에서 ‘암흑’이었는가?” 역사의 기록에서는 초기 도시와 국가가 갑자기 파열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스콧 씨는 “국가 이전의 약 5천 년에 걸친 산발적인 정착문화권에서(일본과 우크라이나의 농경 이전 정착문화권까지 포함시킨다면 7천 년), 고고학자들은 정착했다가 버려지고 다시 정착했다가 또 버려진 수백 곳의 위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을 보통 “붕괴”라 일컫지만,  스콧 씨는 그 용어를 면밀히 검토하자고 요구한다. 국가가 붕괴하면 멋진 건축물은 건설이 중단되고, 엘리트가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쓰여진 기록은 보관되지 않으며,  대중은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이동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활수준이란 측면에서 붕괴일까? 인간이란 존재는 스콧 씨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약 1600년 무렵까지 주로 국가의 범위를 벗어나 살았다.  인류 정치 생활의 0.2%라 표시되는 그때까지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가의 특징인 세금징수원을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착문화 외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인류 역사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토마스 홉스가 말했듯이 만약 그 삶이 “괴롭고 잔인하며 짧다”면, 이는 우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작성하는 데 중요한 정보의 조각이다.  본질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를 향한 이야기라 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 시기에 가장 비참했으며, 우리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것이 나아졌을 것이다. 만약 그 시기에 우리 대부분이 가장 비참하지 않았다면, 문명의 도래는 더욱 모호한 사건이 된다. 회계원부의 한 세로행에서, 우리는 현대 과학과 의학의 영광 및 축적된 예술의 경이로움을 허용하는 복잡한 물질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또 다른 세로행에서는 전염병과 전쟁, 노예제, 사회의 계급화 및 무자비하게 전용하는 엘리트에 의한 지배와 사이몬 코웰(Simon Cowell) 같은 좋지 않은 것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살았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전통적인 수렵채집의 방식이 여전히 살아 있는 장소의 하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단편적인 모습만 보지 않고 살아 있는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수렵채집인과 매우 유사하지만 다르게 살았던 사람들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과학적인  “통제”를 통하여 환경의 지역적 우연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인류학자 James Suzman 씨가 정확히 그 일을 행했다. 그는 20년 넘게 아프리카 서남부의 칼라하리에 사는 부시맨들을 방문하여 그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연구를 수행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저서 “풍요로움 없는 풍부함(Affluence Without Abundance): 부시맨의 사라지고 있는 세계(The Disappearing World of the Bushmen)”에서 자세히 서술한 이야기이다.

부시맨은 오랫동안 인류학자와 과학자 들의 관심대상이었다. 약 15만 년 전,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인류가 출현한 지 5만 년 뒤호모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아프리카 남부에 살고 있었다. 부시맨, 또는 코이산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인간의 가계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the oldest growth on the human family tree. (Suzman 씨는 한때 경멸적으로 사용된 “부시맨”이란 단어는 현재 그들 스스로와 비영리단체에 의해 사용되며, 낭만적인 뜻으로 긍정적 측면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일부의 코이산은 “산San”이란 단어를 쓰는 걸 선호한다고 지적한다.) 유전적 증거에 의하면, 15만 년의 대부분 동안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현대 인류의 가장 큰 개체군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구개음의 혀를 차는 소리를 이용한다. 부드럽게 공기를 흡입하면서 앞니의 뒤쪽에 혀를 대고, 입천장에 혀를 밀면서 찬 다음 갑자기 아래쪽으로 보내는 식이다.  이는 혀를 차는 소리의 언어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 능력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Suzman 씨가 처음 부시맨을 방문한 건 1992년이다. 2년 동안 박사 과정의 연구로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가 가장 잘 아는 무리는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사이의 국경지대에 거주하며 8천에서 1만 명이 살고 있는  Ju/’hoansi이다.  (표음 기호 /’은 tsk를 나타냄)  Ju/’hoansi는 아프리카 남부에 사는 전체 부시맨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토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여 여전히 수렵채집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 북부의 무리와 자신들의 땅을 빼앗겨 현대의 생활방식으로 재정착한 남부의 무리로 나뉜다. 

주목할 만한 범위에서, Suzman 씨의 부시맨 연구는 “정상이 아니다(Against the Grain)”의 생각을 지지한다.  근대성과 만난 부시맨들은 비참해졌다. Suzman 씨는 비참한 재정착 야영지에서 쫓겨나고 소외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Ju/’hoansi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책에서는 글쓰기라 불리는 사악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고 있다. Suzman 씨의 부시맨 멘토인  !A/ae 씨는 “어떤 새로운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농장의 Ju/’hoansi  사이에서 수십 년에 걸쳐 위대하고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추정되는 고용 원부와 문서에 기입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원부가 지닌 비밀은 급여를 주거나 보류하고, 배급량을 지급하며, 어떤 특정 농장에 머물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결정할 권한을 지녔다.

수렵채집이 좋은 생활방식임이 밝혀졌다. 1966년의 연구에 의하면, Ju/’hoansi가 충분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일주일에 평균 17시간만 소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19시간은 가정의 활동과 잡일을 하며 보냈다. 수렵채집인의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하루에 2300으로, 권장량에 가깝다. 이 수치가 처음 확립된 당시, 미국에서는 일주일에 40시간의 노동과 36시간의 가사노동에 종사했다.  Ju/’hoansi 는 잉여를 축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한 먹을거리를 모두 취하면 그만둔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이 자신들의 필요를 제공할 것이란, Suzman 씨가 “단호한 신뢰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렵채집을 하는 Ju/’hoansi가 먹을거리 공급의 그물망으로 활용하는 것은 스콧 씨가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동물성 단백질과 함께 복잡한 먹을거리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거기에는  계절별 주기와 생태학적 적소, 기상 변화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다른 호저, 쿠두, 영양, 코끼리 및 125종의 식용 식물이 포함된다. 수렵채집인은 먹을거리의 지식에 관한 기록되지 않은 달력뿐만 아니라, 스콧 씨가 “달력의 도서관”이라 부르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가 제안하듯이,수렵과 채집과 길들여진 농업 사이의 복잡성 감소는 길들여진 농업과 생산라인의 판에 박힌 조립 작업 사이의 감소만큼 크다. 

여기의 뉴스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 무섭고, 우리의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생활이 상대적으로 훨씬 위대하다고 믿음으로써 우쭐대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수렵채집을 하던 조상에 관하여 해명하는 지식이 우리에게 유용한지 궁금해 할 수 있다. Suzman 씨도 똑같은 걸 궁금해 한다. 그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유명한 1930년의 에세이 “우리 후대의 경제적 가능성(The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 대해 논의한다. 케인스는 세계가 계속해서 더욱 부유해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높은 생활수준을 즐기면서 노동은더 적게 할 것이라 추측했다. 그는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도록“경제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부의 축적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때, 도덕률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년 동안 우리를 괴롭힌 많은 사이비 도덕률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가장 높은 미덕의 지위에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싫은 어떤 것을 높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가치로 화폐의 동기를 감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물로 돈을 사랑하는 것 -생활의 즐거움과 현실에 대한 수단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는- 은 반쯤은 범죄이며 반쯤은 병에 걸린 다소 구역질나는 병적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실제로 더 부유해졌지만, 도덕과 가치관에서 그러한 변화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것의 획득을 둘러싼 돈과 가치의 체계는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다. 탐욕이 여전히 정당하다. 

그날을 위해 살며 잉여를 축적하지 않는 수렵채집인에 대한 연구는 케인스의 제안처럼, 인간성이 더 많이 또는 더 조금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지 않기로 결정할 뿐이다. Suzman 씨는 잃어버린, 또는 그만둔 능력에 대한 열쇠는 수렵채집인의 맹렬한 평등주의에 있다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고기와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 수익이“공유에 대한 엄격한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채집된 식물과는 달리 사냥한 고기는 의례에 따라 매우 신중하게 분배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무례하게 굴면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의식을“고기를 모욕하기”라 부르며, 사냥꾼이 거만하게 굴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한 부시맨이 인류학자 Richard B. Lee 씨에게“젋은이가 고기를 많이 죽이면, 그는 자신을 우두머리나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자기의 하인이나 열등한 사람으로 여긴다. . . . 우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모욕은 “그의 마음을 식히고 그를 부드럽게 만들기”위해 설계되었다.  Suzman 씨는 이러한 수렵채집인에 대하여“이익이 되는 교환과 계급제, 뚜렷한 물질적 불평등이 용인되지 않는 그곳은 치열한 평등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개인의 이기심과 경계심의 총합”이라고 적는다. 


Suzman 씨는 이러한 평등주의에 대한 충동이 부유함과 과잉과 경쟁적인 획득은 없지만 자신의 조건에 맞게 풍족한 삶을 사는 수렵채집인의 능력 가운데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비밀 재료는 부러워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충동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듯이, “만약 이런 종류의 평등주의가 노동의 세계 이후를 포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면, 나는 그것이 깨지기 매우 어려운 너트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일족에게서 배울 점이 많지만, 우리가 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부러움을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활용하면 불만큼 유용한 기술이 될 것이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7/09/18/the-case-against-civilization/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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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채집보다는 농사, 특히 치즈의 출현과 함께 인간의 두개골 모양도 변화했다는 연구결과.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면서 그런답니다. 일본에 가서 수많은 교정전문치과를 보며 놀란 기억이 있는데, 요즘은 한국도 그런다. 이런 것도 모두 먹을거리에서 오는 영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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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궁금하던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기사.

만일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둘 수 없다면…


[토요판] 최정규의 우울하지 않은 과학
(4) 기술이냐 제도냐

고구마의 도입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의 사례는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낯익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만하다. 사진은 엥가 부족 모습. 위키피디아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초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농업이 결국에는 잉여를 가져다주었고 인구를 증가시켰으며, 거대 국가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농업의 시작이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로의 문을 연 계기였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농업은 누구의 눈에는 인류의 번영을 위한 축복의 계기였고,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로 달라도, 농경의 시작이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적 사건 중 하나라는 점에는 아마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인류는 왜, 어떻게 농부가 되었을까?

농업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1000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막 물러갔을 때이다. 농업의 최초 흔적은 현재 중동 지방(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 지역)과 터키 남부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부 요르단 강 유역을 아우르는데, 그 모양이 초승달을 닮았다 해서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농부들이 출현했다.


마르크스, “기계방아가 자본주의 낳았다”

농경의 등장 전후로 큰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이 시기는 인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거주형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권이 자리잡게 된 시점도 농업의 등장 시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래서 농업과 정착, 그리고 사적 소유 이 세 가지는 하나의 묶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시점에 따라 혹은 장소에 따라 이 선후 관계가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 보면 이 셋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의 불평등의 씨앗도 이 세 가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농업이 생산성을 증대시켰다고 보면 모든 게 간단히 설명된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인류가 농업이라는 생산 방법을 채택하게 됨에 따라 인류의 생산력은 증대했고, 비로소 인류는 이른바 ‘잉여’를 갖게 되었다. 겨우 먹고사는 데 그쳤던 이전과 달리 잉여가 발생했고 사적 소유라는 게 생겼고 이로부터 일 안 하고 남이 일한 것을 착취해서 살아가는 지배계층이 등장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생산기술이 나타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그에 따라 새로운 경제적 (지배)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는 가설하에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다.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주된 동력이라는 관념은 매우 익숙한 관념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방아(맷돌)가 지주와 농노로 이루어진 봉건제를 낳았고, 기계방아가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루어진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말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관념에 잘 들어맞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심스 올리버는 미국 중부지역 평원에 살던 인디언 부족에 말이 도입되면서 평등했던 관계가 위계적인 관계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에 따르면 말의 도입은 버팔로 사냥을 수월하게 만들었고, 버팔로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부족도 함께 이동하는 거주 패턴을 가능하게 했다. 말이 도입되면서 정착해 생활하던 부족들에 비해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던 부족들이 더 강성해졌다.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 말을 획득하는 능력이야말로 용맹함의 척도이고 지도력의 척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말은 부의 축적 수단으로 등장했고, 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부와 권력이 결정됐다.

또 다른 예로 폴리 위즈너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을 연구하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고구마의 도입으로 인해 균열이 생기면서 불평등하게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마 경작이 가져온 높은 생산성이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간명해 보이는 이 가설은 몇몇 사례에서는 잘 들어맞을지 몰라도, 적어도 농경의 출발을 설명하기에는 힘든 것 같다. 인류는 농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야생 상태에서 곡물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다만 본격적으로 농부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농부로의 전환을 꺼렸던 이유는 농업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그 대체 방식으로서의 수렵 및 채취에 비해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초기 농업은 수렵·채취 방식에 비해 훨씬 더 고된 작업이었는데도, 같은 시간을 일했을 때 얻어지는 칼로리의 양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 먹던 시절에 비하면, 허리 부러지도록 일하고 얻는 영양소도 다양하지 못했다.

페르시아만에서 요르단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외에도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한 곳은 꽤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자발적으로’ 농업으로 전환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농사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제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바텍 사례

카를레스 보익스와 프랜시스 로젠블루스는 고고학자들의 유골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서, 초기 농부들의 신장이 수렵·채취를 기반으로 살았던 이들에 비해 작았음을, 그리고 영양상태가 안 좋았음을 드러내주는 흔적들을 보았다. 빈혈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는, 뼈에 나타난 병변현상이나 골 질량 손실의 증거들, 그리고 치아를 둘러싸고 있는 에나멜의 부족 등이 그 증거였다. 샌타페이연구소의 새뮤얼 볼스는 현존하는 수렵·채취 부족들과 손도구를 이용해 농업을 하고 있는(그래서 초기 농부들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농부들의 노동생산성을 계산해 보았다. 한 시간의 노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량으로 비교해본 결과, 이들 농부들의 생산성은 수렵·채취 부족민들의 생산성의 63%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초기 농업의 경우, 노동생산성에서는 수렵·채취에 비해 떨어졌더라도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했을 터이니 토지 단위 면적당 생산성은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토지를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기술(수렵·채취)을 포기하고 토지 절약적인 기술(농업)을 채택한 것은 적어도 경제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들을 토대로, 잭 할런은 1992년 저서 <작물과 인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농업을 도입했을까? 주당 20시간만 사냥하면 나머지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도, 굳이 태양볕 아래서 고생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영양소도 풍부하지 못하고 또 공급도 안정적이지 않았던 작물들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농업이 도입된 이래 기아, 질병, 전염병이 등장했고, 밀집된 공간에 사느라 생활환경도 극히 안 좋아졌을 텐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에게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벌을 내리면서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농사란 그만큼 고된 일이었을 거란 증거다.

지금까지 발견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했던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외에도 중국, 멕시코, 북부 페루, 고지대 뉴기니, 서부 아프리카 사헬 지역, 북미 동부 등 7개 지역 정도이다. 그 외 지역의 농경은 다른 곳으로부터의 정복이나 교류 혹은 농부들의 이주의 결과라는 말이다. 유사한 기후조건과 토양조건을 가졌더라도, 야생 작물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혹은 화전 농법을 사용하면서 농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자발적으로’ 농부로 전환한 부족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 북단 케이프 요크에 도착했던 제임스 쿡 선장은 그 지역이 토레스 해협 건너 뉴기니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도, 뉴기니에서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북단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의아해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농경은 높은 생산성 때문에 자연스레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지는 듯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만들어 준 (선행)요인으로서 환경과 인구가 아니라, 규범과 제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농경이란 기술적 지식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이미 지식은 충분했다) 제도적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래전 인류학자인 커크 엔디컷은 말레이시아 수렵·채취 부족인 바텍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보고한 적이 있다. 이야기인즉슨, 바텍 주민 두 사람이 농사짓는 법을 전수받아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추수가 가까워질 즈음 다른 마을 주민들이 와서 맘대로 곡식을 추수해 가더라는 것이다. 벼농사를 지어보겠다던 이 두 사람은 몇 년 거푸 동일한 일이 생기자 결국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농경의 도입 실패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바텍 원주민들은 자연자원은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며, 가족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는 다른 이와 나눈다는 규범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두 사람의 벼도 마찬가지로 간주했던 것이다.

농사란 추수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농사란 당시 기술로는 손을 엄청 필요로 했기에 일년 내내 노력을 기울여도 좋은 결과가 나올지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한 불확실성은 제도적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땀 흘려 만들어낸 생산물이 내게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으면 1년 내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려면 바로 그런 점에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농사가 제대로 될지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최소한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둘 수 있다는.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했다

터키 서부지역에서 클라우스 슈미트가 발굴한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와, 현재의 시리아 부근에서 앤드루 무어가 발굴한 아부 후레이라 유적지는 인류가 농부가 되는 이른바 ‘제도적’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은 농경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정착촌을 이루고 있었던 증거와 함께, 집집마다 야생 곡물을 보관할 식량창고를 갖는 등 상당한 정도의 사적 소유가 갖춰졌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경제학자인 대런 아제모을루는 그의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초기 의식용 건물을 보면서 이 지역에서는 농경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불평등이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불평등하에서 엘리트층이 착취를 손쉽게 하기 위해 저장이 가능한 곡물 생산으로의 이전을 강제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 두 곳에서 발견되는 사적 소유의 흔적들이 얼마나 불평등의 심화를 말해주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농경사회로의 전환 이전에 이미 이를 위한 제도적 여건으로서의 사적 소유가 꽤 진전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새뮤얼 볼스와 필자는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수리 모형을 짠 후 이를 기초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농업과 사적 소유의 진화를 재현해본 적이 있다. 우리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다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 농업의 발생이 1000번 시행에 31번 일어날 정도로 쉽지 않았던 사건이었고, (2) 그 31번의 이행은 모두 사적 소유권과 함께 진화했으며, (3)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해 농업생산을 이끌더라는 것. 말하자면, 아부 후레이라에서 나타났음직한 모습이었다. 농경의 시작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러 사회적 변화는 생산기술과 사회적 제도와 관련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식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과 제도의 상호작용을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 사회에서 주로 발견되는 평등적 관계와 공유의 규범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어떻게 해체되면서 위계와 사적 소유와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기술은 그대로인데, 규범 등의 제도가 변하고 새로운 제도가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의 길을 열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제도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때, 인류가 농부가 되는 과정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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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분석이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왔다.
과거의 유골을 분석하니, 육류와 해산물 소비가 증가하는 것과 함께 곡식과 채소의 소비가 확 줄었다가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신석기혁명 즈음하여 그러한 양상이 역전된다는 연구결과이다.




과연 당시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잡아먹을 수 있는 동물과 물고기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급감했던 것일까? 너무 남획을 했는가?
아니면 농경의 효율성이 사냥을 포기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좋아진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많은 증거들이 발굴되어 분석될수록 더 세세하게 밝혀지겠지. 아무튼 너무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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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농사는 현재의 터키에서부터 남쪽(보라색 화살표)과 북쪽(노란색 화살표)을 통해 유럽으로 퍼졌다. 그런데 이번 Bouldnor Cliff의 바닷속 토양에서 복원한 DNA를 분석하니 영국에서 밀이 재배되기 2천 년 전에 전파되었음이 밝혀졌다.




영국 남부 해안에 살던 수렵채집인들이 영국 제도에 밀 농사가 싹트기 2천 년 전에 밀을 수입했다고 새로운 연구에서 제시되었다.


이러한 수렵채집인과 농민들 사이의 거래가 북서 유럽 전역에 농업이 확산되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영국 워릭Warwick 대학 고고유전학과(archaeogenetics)의 Oliver Smith 씨와 그 동료들이 제의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주 농민들이 유럽의 수렵채집인 무리를 급속히 밀어내거나 그들이 농경생활로 서서히 전환했다고 주장해 왔다. 


현재 와이트 섬의 침수된 지역인 Bouldnor Cliff라는 곳의 약 8천 년 된 토양에서 추출된 DNA가 밀이 작물화된 초기인 터키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과학자들이 2월 27일자 Science에 보고했다. 터키의 농민들은 10,500년 전 밀과 다른 몇몇 식물을 작물화했다. 작물 재배는 7,600년 전 프랑스 서부에서 영국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해, 400년 뒤 Bouldnor Cliff에 이르렀다. 그리고 영국에서 경작은 훨씬 뒤인 약 6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잠수부들이 밀 농사를 짓기 2천 년 전에 수렵채집인들이 밀 생산물을 얻었던 곳인데 현재는 침수된 지역에서 발견한 석기를 들고 있다.



Bouldnor Cliff에서 잠수부들이 석기와 기타 고대인들의 유물을 발굴했다. Smith 씨의 팀은 8천 년 전 해수면이 상승하기 전에 밀봉된 토탄지의 토양 샘플 네 가지에서 DNA를 얻었다. 복구된 DNA에서 나무, 풀, 허브만이 아니라 작물화된 밀이 나왔다. 과학자들은 Bouldnor Cliff에서 밀이 재배되었다는 아무런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Smith 씨 들은 놀랄 만큼 정교한 무역망이 적어도 일부 유럽의 수렵채집인과 발전된 농경민 사이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https://www.sciencenews.org/article/wheat-reached-england-far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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