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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5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종이의 타파tapa 기원설' 재고

사카모토 이사무坂本勇

 

 

 

 

 

나카오 사스케의 '종이의 타파 기원설'

 

조엽수림 문화론을 제창하고, 조엽수림대에 있는 옻나무, 차와 나란히 꾸지나무에 관심을 쏟았던 나카오 사스케(1916-1993)은 <조엽수림 문화와 일본>(1992년 출간)에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외쳤다. 하지만 종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고, 큰 화제가 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렀다. 오날늘 읽으면, 그 미래를 쏘는 듯한 통찰력에는 감복한다. 

 

나카오는 현지조사를 거듭해 왔던 체험 속에서 "중국인의 한대에 있던 종이의 발명은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타파를 모방하여 낡은 의복을 폐물 이용했다고 본다면 모두 잘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종이의 기원을 타파 기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설이다. …… 종이는 조엽수림 문화가 그 뿌리에 해당한다"고 그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뒤 최근 몇 년의 일이지만, 인류에서 최초로 바다로 배를 저어 나갔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조사연구가 세계적으로 성행하여, 목표는 멀지만 가까스로 나카오의 새로운 설이 빛을 되찾는 물적 자료가 나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타이완이나 중국 남부를 연고지로 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사람들이 신석기시대에 최초로 만들었던 것은 종이가 아니라 '나무껍질 베'였다고 생각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제사의식용으로 '베'라든지 '종이'라든지가 혼연일체가 되었던 사용법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뒤에 기술하듯이, 조금 전까지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힌두교 성직자 집단에서는 나무껍질의 사용법은 베라고 보든지 종이라고 보든지,어느쪽이든 명백하지 않은 고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서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나 닥나무를 원료로 한 '시로니기테白和幣'(원형은 아마 짜지 않는 타파와 같은 것이라 생각됨), 뽕나무과의 아마떼를 원료로 한 마야, 아스텍의 '방혈 의식용 코덱스' '제사용 의상'이나 인도네시아, 태평양 제도의 '장신구'로 간주되듯이, 현대의 감상에서 본다면 '나무껍질 종이 Beaten Bark Paper'로서 취급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이 각지에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작용 도구의 측면에서, 또는 각지의 사용 사례에서 보아 '나무껍질 베용'도 '나무껍질 종이용'도 마찬가지이든지 매우 닮은 경우가 많으며, 기법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카오와 마찬가지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발상했던 연구자는 그밖에도 있으며, 타이완 중앙연구원 민족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지냈던 능순성凌純聲(1902-1981)과 딸인 능만립凌曼立 씨, 그리고 W. 에버하드Eberhard(1909-1989), P. 톨스토이 씨, 사카모토를 여기에서는 들어 놓는다. 

 

 

 

'종이'는 어떠한 기술적 변천을 했을까?

 

지금까지 '종이의 타파 기원설'은 묻혀 왔다. 그것은 이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극도로 적었던 점과, 최근의 화학 섬유를 사용한 종이가 등장하기 전에는 '종이는 물에 원료 섬유를 분산시켜 떠서 올리는 것'이란 정의가 있어,물에 섬유를 분산시키지 않는 파피루스, 양피지, 타파 등은 종이의 종류에 포함하지 않고 별개로 취급하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일본 공업 규격 JIS에서 '종이란 식물섬유 그외의 섬유를 서로 엉키게 해 교착시켜 만든것'이라 하여, 타파에도 새로운 정의에 따라 종이로서의 문호가 열렸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설명되어 왔던 종이의 기술적 변천에 대하여, 아직 원시적 제지법이라고 자리매김된 '종이 붓기 방법(pouring method)'는 지금도 네팔과 태국 북부, 중국에서 행하며, 또한 현재는 끊어져 버렸지만 베트남중부의 라그라이족 등에게서도 발견된 제지법이다. 이 방법에서는 나무틀에 베를 펴서 준비한, 뜨는 도구의 매수만큼 하루에 종이를 뜰 수 있다.

 

발전적 제지법이라 자리매김된 '종이 뜨기 방법(dipping method)'에서는 원시적 제지법에 가까운 정적인 <모아 뜨는 법>과 닥풀의 뿌리, 나무수국의 나무껍질 등에서 추출한 반죽(중국에서는 활수滑水)를 더하여 점성을 활용하는 약동적인 <흘려 뜨는 법>이 있다. 이 종이 뜨기 방법으로는 하루에 희망하는 수백 장을 뜰 수 있다. 

 

종이 뜨기 그것은 원료 식물, 물, 간단한 제지 기술이 있다면 어디에서나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기술적 변천, 전파 지도를 구축할 때 필수라고 하는 건 고고학과 역사학 등과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종이의 역사 연구자였던 다드 헌터(1883-1966) 등의 종이의 기원과 전파 지도작성 작업에서는 종이의 유물이 잇달아 발견되었던 북쪽의 실크로드에 연한 건조지대에 치우친 구상이 되어 버렸다. 유기물인 종이의 유물이 썩어서 발견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구상은 결과적으로 공백 상태가 된 채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시적 제지법 이전에 존재했던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와의 관계를 더듬어 찾을 수 없었다. 최근이 되어서 서서히 동남아시아 연구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새로운 조사 연구 자료가 더해져, 이 미완성인 상태로 방치되어 왔던 '종이의 기원과 전파' 지도에 새로운 구상을 가필하게된다. 남쪽의, 틀림없이 조엽수림대의 재평가가 될 것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

 

고대 이래 나무껍질 베와 나무껍질 종이(이후 나무껍질 베와 나무껍질 종이를 합쳐서 편의적으로 타파라고 함)가혼연일체가 되어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타파의 분포는 적도를 사이에 두고 약간 북위남위 각 25도 이내를 띠 모양으로 지구를 빙 일주한 지대로 굳어진다(그림1). 세계에 퍼졌던 타파의 기술·문화이지만, 지금까지지역별로 분단된 조사연구보고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타파의 기원이 되는 장소와 시기, 전파 경로 등 전체상에 대하여 현시점에서는 판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하나의 높은 파도로, 신석기시대부터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연고지라고 하는 타이완이나 중국 남부부터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지나 태평양 제도, 마다가스카르 섬 등으로 수천 년을 걸친 항해에 의한 이동에 수반하여, 타파가 세계에 확산시킨 게 확실할 것이다. 남쪽으로부터의 쿠로시오 문화를 받았던 일본에서도 나무껍질 베 기술을 지녔던 사람들이 도래했을 것이지만, 그 주요 이동 경로에는 위치하지 않고 직물 문화로 사라져 버렸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림1 세게에서 보는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의 확산 지도

 

 

 

타파라는 말에서는 뻣뻣함이라 한 미개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거친 나무껍질 제품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다. 타파는 뽕나무과 나무의 껍질을 벗겨 표피를 제거하여 생껍질인 채 그림2, 3과 같은 몽둥이(두드리는 도구)로 두드려서 펴고, 건조시킨 널판지 모양의 것이다. 거칠고 뻣뻣한 마무리의 나무껍질 제품은 니아스섬 등 각지에 존재하지만, 대체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지역에서 만들어진 타파는 하와이나 술라웨시에서 대표되는 것처럼 일본 종이라고 잘못 볼 만큼 균질하고, 0.05mm 정도의 두께인 것도 있으며, 뛰어난 만듦새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더구나 타파의 어원은 타이완 원주민 어휘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림2 타이완 대분갱大坌坑 유적 출토의 배턴 모양 석기 몽둥이(5500년 전 무렵)

 

 

 

 

 

 

 

 

 

 

 

 

그림3 라켓 모양 석기 몽둥이(현재도 술라웨시에서 사용)

 

 

 

유물로서 세계 각지에 남아 있는 타파 제작용 도구의 출토 또는 잔존 상황의 전체상을 밝히려 했던 조사연구는 아직 없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적 연고지라고 하는 타이완에서 개관하여 보자.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경로나 시기 등의 연구성과는 <오세아니아 바다의 인류 대이동>(2007, 국립민족학박물관 개관 30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그 기획의 시작이 되었던 <Vaka Moana-Voyages of the Ancestors>(2006 Auckland Museum 특별전 도록)에 상세하다. 술라웨시 지역에 관해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출판된 두 책이 있다.

 

오랜 시기의 타파용 석기 몽둥이로서는 타이페이 교외의 대분갱 유적에서 5500년 정도 전의 것이 출토된다(그림2). 유조有槽 석봉이라고 부르는데, 손잡이도 일체였던 배턴 모양 유형이다. 타이완에서 100개 이상 출토되는 석기 몽둥이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모두 이 유형이다ㅣ. 세계의 몽둥이 형상은 다종다양하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경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는 앞에 기술한 배턴 모양 유형의 것으로 재질은 석제와 목제가 있다. 두번째는 라켓 모양 유형(그림3)이다. 손잡이 부분은 등나무나 덩굴 등으로 별도로 붙인 것으로, 두드리는 부분은 석제인데 예외적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는 청동제가 있다. 라켓 모양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경로에서 고려해, 배턴 모양 유형이 기술 혁신된 모양이라 생각된다. 조각된 줄은 타파 제작의 작업순서에 응하여 최초의 단계는 폭넓은 것을, 최종 단게에서는 좁은 것을 사용하고, 줄 사이의 간격이 다른 몇 개를 세트로보유하고 사용한 사례가 많다. 세번째는 사슴의 뿔이나 목제의 잡다한 형태를 한 몽둥이의 유형이다. 대부분 어느 몽둥이에나 두드리는 면에 평행 또는 격자 모양의 줄이 새겨져 있으며, 나무껍질을 효율적으로 두드려 펴기 쉽게 하는 구조가 된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에 수반하여 세계에 확산된 타파 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뒤에 기술하듯이 3500년 이상의 역사가 이어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이다. 또한 격동의 파도를 받아 왔던 아프리카 대륙과 신대륙의 타파 제작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구적 규모에서 각 지역을 연결해 조사연구를 시작하면, 수수께끼가 서서히 해명되리라 기대된다. 언젠가는 마다가스카르섬으로 서기 500년 무렵에 도달했다고 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우간다 등에서 나무껍질 베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멕시코의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 몽둥이가 고고학자들이 보아 술라웨시섬에서 출토된 것과 '빼다 박은 것'이란 점 등을 검증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조사 과제로 상정되는 점은 타파용 몽둥이에는 '평소용'과 '특권계급·의식용' 두 종류가 존재(그림4)했을 공산이 높고, 타파 자체의 용도에서도 '평소용'과 '특권계급·의식용'의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 2008년 8월에 필자 등이 행한 일본·인도네시아 합동 현지조사에서 중부 술라웨시에서 발견된 '숨은무늬 모양 가공용 석기 몽둥이'(그림5)를 보유한 일족의 설명에서는 이 숨은무늬 모양은 샤먼용 모자 등에 한정해 쓰였다. 타파 만들기에 쏟은 그들의 에너지와 심오함은 타파를 제작할 때 몽둥이로 나무껍질을 두드리는 소리가 '음악을 연주한다'는 술라웨시의 마을사람 이야기와 연구자의 보고에서 추찰할 수 있다. 장인이 석기를 만드는 단계에서 두드릴 때 나오는소리의 울림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림4 왼쪽: 모양을 새기지 않은 청동제 몽둥이(자바), 오른쪽: 모양을 새긴 청동제 몽둥이(동자바)

 

 

 

그림5 숨은무늬 모양 가공용 석기 몽둥이를 든 할머니(중부 술라웨시)

 

 

 

 

하얀 나무껍질의 꾸지나무

 

타파의 원료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서는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를 가장 중시해 왔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타이완 원주민 및 태평양 제도에서 행한 민족학적 조사에서 '흰색' '부드럽고 상질인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꾸지나무를 최고의 타파 원료로 선택한 이유라고 하는 점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 '흰색'이란 특징은 신성함의 상징과 같으며, 종교의식과 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되어 갔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꾸지나무를 특별시하는 흔적은 몇 가지 있다. 특히 궁정 문화를 키운 교토에서는 많이 보인다. 헤이안 시대의 정원으로서 산조三条의 후지와라 사네요시藤原實能(1096-1157) 주택터의 물을 끌어들이는 정원 유구에서 꾸지나무의 열매가 발견된 일이 현지 발굴보고회에서 설명되고, 또 천황의 거처가 있는 교토 어원에는 궁가와 공가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단 점에서 곳곳에 꾸지나무의 식생이 보였을 것이다. 공()의 수호신을 기리는 카미교구上京区의 시라미네白峯 신궁 경내에는 수그루, 고노카와高野川에 걸린 키타조노北園 다리의 옆에는 암그루 꾸지나무 고목을 볼 수 있다. 레이제이케冷泉家에서는 나라 시대부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칠석 행사의 걸교전乞巧奠에서 꾸지나무가 곳곳에서 사용되며, 의식 중에 행해지는 축국은 '꾸지국(梶鞠)'이라 전한다. 에도 시대의 <습유도명소도회拾遺名所図会>(1787 간행) 제1을 보면, 거리를 연이어 걷는 사람들의 선두에는 칠석의 조릿대 가지에 큰 꾸지나무의 잎이 장식되어 있었다. 

 

집안의 문장에도 꾸지나무의 잎이 보이는데, 전국에서 1만 남짓한 스와타이샤諏訪大社의 상사上社, 하사下社의 문장은 꾸지나무의 잎이다. 유래로 <아즈마카가미五妻鏡>의 지쇼治承 4년(1180) 9월 10일 조에 "꾸지나무 잎 문장의 예복(直垂)을 입고, 흰 바탕에 얼룩 빛깔의 말에 올라탄 용사 하나, 겐지源氏 씨의 편이라 부르고, 서쪽을 가리켜 채찍을 높이 들었다. 이쪽 편에 대명신大明神의 계시가 내리는 곳이니 어찌 의지하지 않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뒤에 기술하겠지만 옛 자바 문학 안에 힌두교 성직자가 꾸지나무를 점유하고 재배하며, 꾸지나무로 만든 나무껍질 옷(Daluwang)을 입었던 일 등이, 연대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자바어 연구자 피죠는기술했다. 

 

꾸지나무 나무껍질의 흰색을 신성시하고, 특별히 다루는 가치관과 전승은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렸던 세계 각지에 널리 존재한다고 상상된다.

 

 

 

인도네시아의 타파

 

 

 

인도네시아의 타파가 세계적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연속적인 사용 흔적이 더듬어지는 '살아 있는 화석'인 것만이 아니라, 나무껍질 베 및 나무껍질 종이로 이용하는 것이 모두 매우 활발했단 점에 있다.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사람들이 지녀 왔던 나무껍질 베 문화는 술라웨시에서 기술적, 정신적으로 크게 비약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능적인 라켓 모양 석기 몽둥이(양면에 줄이 새겨져 있음)를 세트로 사용하는 양식이나, 빛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판연히 보이지 않는 '숨은무늬 모양 투명 무늬'를 나무껍질 베에 가공하는고도의 발상 등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나중에 하와이의 나무껍질 베에 가장 멋지게 개화하는 복잡한 '숨은무늬 모양'이나 '날염'의 뿌리는 술라웨시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때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지녀 왔던 타파의 기법은 섬에서 섬으로 옮겨가는 기술적 흔적이 연속되지 않고, 수천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것은 우연히 한 척의 작은 카누가 표착했다고 하기보다, 여러 집단이 의식적으로 목적지에 다다랐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작은 카누로 수십 일 걸려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던 고대의 항해기술과 그들이 사납게 놀치는 바다에서 미치고 굶어죽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녔단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편, 힌두교 문화에 의거하는 동자바의 마자파힛 시기의 유적에서는 다양한 사슴뿔로 만든, 또는 아름다운 장식이 조각된 청동제 몽둥이가 발견되고 있다. 당시 그곳에서는 타파 제작이 매우 성행하여 중히 여겼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 흐름은 자바의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등 와양 제작 집단에 계승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술라웨시의 기능적인 석기 몽둥이와는 완전히 모양과 소재가 달라 다른 경로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발리섬의 힌두교 성직자의 두건(케투), 어깨띠(슬른당), 허리띠(이깟 삥강) 등의 의복과 종교 달력(그림6), 또는장례(응아븐)할 때 사자를 감싸는 천(카장)용으로 울랑타가라고 부르는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가 전통적으로 쓰이며, 발리섬에 남겨진 힌두교 문화 가운데 마자파힛 시기 등에서 발견된 타파 전성시대의 유풍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앞에 기술했던 자바어 사전 등을 편찬했던 네덜란드 사람 피죠(Theodoor Gautier Thomas Pigeaud, 1899-1988)는 자바의 9세기 무렵의 서사시 <카카윈 라마야나>, 12세기의 <보마 카우야> <수마나산타카>, 다루왕의 원료가 되는 나무(꾸지나무)는 성직자의 집 주변에 심었다는 기술이 보이는 13세기의 <살마 다루와>, 다루왕의 생산, 판매, 사용은 독점적으로 성직자가 행하고, 판매의 세금은 성직자를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기술이 있는 14세기의 <라자파티군다라>, 15-16세기의 <단투 판게라랑>을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다루왕)에 관한 기술이 발견되는 자료라고 한다. 

 

 

그림6 힌두교 성직자가 쓰는 나무껍질 종이 달력(발리섬)

 

 

 

하지만 인도네시아에 힌두교를 전했던 인도에서는 나무껍질 베 문화가 존재했던 흔적은 보고되지 않는다. 이들은자바어 문헌 안에서만 이해해야 할까?

 

그뒤, 인도네시아에서는 힌두교에서 이슬람교로 대전환을 했는데, 나무껍질 종이 제작 기술 집단은 계승되어 매우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과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 남아 있던 수백 권의나무껍질 종이 문서는 모두 이슬람교의 성전과 교의에 관한 내용인 점으로부터, 엄청난 나무껍질 종이가 이슬람교 문화의 영향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에 있는 나무껍질 종이 제조는 1970년대에 종언하고, 현재는 반둥 근교의 가룻에 한 가족만이 그 전통을 남기고 있다.

 

당시의 꾸지나무 소비량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아마 한 권이 200쪽인 나무껍질 종이 문서를 제작하는 데에 뿌리 근처가 지름 20cm 정도의 어린 나무 25그루 정도가 쓰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1개소에서 연간 100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2500그루의 꾸지나무가 필요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이슬람 종교 집단의 세력을 생각하면, 나라 전체에서는 연간 수만 그루의 꾸지나무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묘한 점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는 임업과 식물의 일본인 전문가에게 들으면, 꾸지나무를 본 사람은 전혀 없는 데 가깝다. 나 자신도 각지를 돌아다닐 때 집요하게 조사했던 경험으로부터, 꾸지나무를 발견한 건 가룻 주변과 중부 술라웨시뿐이었다. 또한 인도네시아에서는 타파 제작자나 보고르 식물원의 사람들에게 들어도, 꾸지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사람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이나 타이완에서는 꾸지나무의 수그루, 암그루 어느쪽이나 꽃의 개화는 왕성하고, 많이 결실한다. 놔두면 쭉쭉 자손을 늘려 빈땅을 점거할 만큼 생명력이 강한 나무라고 생각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위화감이 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꾸지나무는 암수딴그루 나무이면서 태평양 제도에서는 수그루밖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보고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는 단순히 풍토의 문제일까? 

 

나카오 등에 의한 조엽수림의 대표적인 나무라고 이야기된 꾸지나무이지만, 아직 해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이 나무 무슨 나무?

 

정창원의 일본 종이를 조사연구한 쥬가쿠 분쇼寿岳文章(1900-1992)는 <정창원의 종이>에서 똑같은 뽕나무과의 꾸지나무와 닥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식물학적으로 꾸지나무와 닥나무는 다음의 여러 점, 곧 전자는 암수딴그루, 턱잎은 대형이고, 수꽃 이삭이 길게 늘어지는 데 반해, 후자는 암수한그루, 턱잎은 작고, 수꽃 이삭은 구형인 점에서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혼동되어, 정확히는 꾸지나무를 의미하는 한자인 楮나 穀이 닥나무에 해당되는 것처럼 된 것은 잎의 모양이 비슷한 점과 열매를 맺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질긴 껍질이 제지의 원료가 되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정창원 문서의 사경용지 그밖의 항에 자주 나타나는 곡지穀紙는 이미 닥나무와 꾸지나무가 혼동되어 버린 뒤의 용어이며, 엄밀하게는 닥나무의 종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정창원 문서가 형성된 나라 시대에 꾸지나무와 닥나무의 혼동은 이미 일어났다고 쥬가쿠는 지적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이 혼동은 한자 문화권 전역의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켐벨, 시볼트 등에 의해 일본에서 채집되어 학명이 명명된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나 잡종 닥나무, 덩굴 닥나무, 닥나무. 꾸지나무에는 Broussonetia papyrifera Vent., 잡종 닥나무에는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덩굴 닥나무에는Broussonetia kaempferi Sieb.라고 학명을 붙이고, 그리고 혼란한 와중에 다가오는 것이 닥나무이다. 예를 들면, 2004년 1월에 발행된 <식물 레퍼런스 사전>(일외日外 어소시에이트)에서는 닥나무를 덩굴 닥나무의 별명으로 다루고, 1997년에 발행된 <원색 목야식물 대도감>(북륙관北陸館)에서는 잡종 닥나무의 항은 없고 닥나무를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라 하고 있다. 2004년에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 식물종자도감>(도호쿠 대학 출판회)에서는 닥나무라고 하여 Broussonetia kazinoki x B. papyrifera를 들고, 꾸지나무와 잡종 닥나무의 교잡종으로 게재하게 되어 최근의 식물사전, 연구서는 이 학명을 사용하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고육책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식물학이란 좁은 영역에서의 독주는 아닐런가?

 

왜냐하면, 닥나무의 지방 이름으로 <일본 식물방언집성>(야사카쇼보八坂書房)에서는 다른 단어에 비하여 매우 많은 110개의 단어가 채집되어 있는데, 이것은 닥나무의 폭넓고 깊은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간파할 수 있다. 닥나무가 외래의 꾸지나무와 일본 고유의 잡종 닥나무의 교잡종이라 하는 설을 검증하려고 고고학의 분야에 눈을 돌리면, 꾸지나무의 열매라고 동정된 보고사례가 조몬 만기의 야하타자키八幡崎 유적(아오모리현 히라카와시平川市) 등에서 나오고 있다. 꾸지나무가 일본으로 이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00-3300년 정도 전인 조몬시대 후기인 것일까?

 

슬슬 나라 시대에 이미 혼동이 시작되었던 뽕나무과의 꾸지나무, 닥나무 등에서의 혼란을 해결하고자 관계된 전문가들이 계책을 강구하기를 바라는데, 주목되는 시행도 있다. 지금까지 베와 종이의 식물섬유를 분석, 동정하는데에는 현미경 관찰을 행하고, 시약으로 섬유를 염색하여 판별하는 등의 방법을 채용해 왔다. 일본의 국보나 중요문화재의 종이 분석도 이와 같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관찰자의 경험과 주관적 판단에 강하게 좌우되는 경향이 보인다. 몇십 년 뒤에 다른 관찰자가 다른 판단을 내리는 일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에 널리 이용되어 왔던 뽕나무과 식물 가운데 속 수준의 판별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면, 꾸지나무와 닥나무의 구별은 신의 조화라고 한다. 그 어려움에 광명을 비추는 것이 DNA 추출 분석법이다.이미 몇 가지 나무껍질 베와 고문서에서 DNA의 추출과 핵석이 행해지고, 지금으로부터 천년 이상 전인 헤이안 시대의 고문서에서도 유전자 정보가 추출·해석되어 속 수준의 객관적인 판별에 길을 열 것이다. 반드시 혼란을 극복하는 유력한 수법으로, 간편하게 사용하도록 이 분야에서의 조사연구가 높아져 가기를 바란다.

 

 

 

 

종이와 풍토

 

나카오의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재고하는 데에 중요한 지적이, 종이에 사용되는 식물원료의 지역 구분에 대해서이다. 나카오의 논고에 있듯이, 중국의 전한시대 등에 출토된 종이 유물의 원료가 '초본성 질긴 껍질 섬유'의 대마, 모시이며, 그 초본성 질긴 껍질 섬유를 사용하는 추세는 아라비아부터 유럽으로 퍼져 갔다. 다른 한편, 히말라야부터 일본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꾸지나무, 닥나무 등 '목본성 질긴 껍질 섬유'를 종이의 원료로 삼아 왔는데, 더 우수한 팥꽃나무과의 서향, 삼지닥나무, 안피나무 등의 '관목성 질긴 껍질 섬유'가 선출되어 갔다고 한다.지역, 풍토에 따라 수확할 수 있는 식물에 차이가 있으며, 이와 같은 구분이 이루어졌다. 

 

종이를 사용하는 쪽에서 생각하면, 이 각각의 '종이'로서의 차이는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제지 이후에 경전용 등으로 가공이 이루어진 '두드린 종이(打ち紙)' 공정 등, 원료만의 차이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있어 어렵다. 가장 오래된 일본의 종이 수집품인 정창원의 '일본 종이' 중에는 삼을 원료로 하는 것, 닥나무를 원료로 하는 것, 안피나무를 원료로 하는 것 등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927년에 찬수된 <정희식廷喜式>에 관영조지소인 지옥원紙屋院에서 하는 제지 공정이 상술되는데, 그 안에서도 삼(대마, 모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음)은 닥나무, 안피나무와 나란히 당시의 주요 원료의 하나라고 되어 있었다. 원료식물의 차이에 의한, 재단을 짧게 하고 길게 하는 등의 제지 공정에서 처리법의 차이는 명확하게 있었다. 나카오의 논고 가운데 기둥이 되는 바이지만, 그 긴요함이 되는 조엽수림 지역의, 묻혀 있던 오래된 문화층과도 관계되는 정보는, 앞에 기술한 다드 헌터 등 선인들의 조사연구에서 결여되어 미완성의 부분이 되었다. 초본성, 목본성 또는 관목성 질긴 껍질 섬유라는 풍토와 사람에기인한 원료의 차이에 의하여, 그것을 받아들여 누렸던 지역의 문화와 감성에 어떠한 변화가 생겨 갔을까? 새로운, 조엽수림대에서의, 종이 문명의 기원에 빛을 비추는 옛 문화층의 탐색도 포함된 조사연구를 계속해 가야 한다는 것이 현상이다. 

 

제지법과 크게 관계되는 것이 필기구일 것이다. 털붓을 사용하고, 펜을 사용는 등의 차이에 의하여 종이의 마감법은 크게 변한다. 옛날부터 '쓰는 것'과 '쓰여지는 것'의 상성은 중요하여, 필기구는 문화를 반영해 왔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신대륙 도달이 부정적으로 다루어져 온 상황에서, 마야 시기의 조각이나 상에 새겨졌던 '털붓'(그림7)은 동양에서 발견되는 것과 꼭 닮았기에 놀랍다. 마야 시기에 사용되었던 종이는 나무껍질 종이(아마테 종이)이며, 돌의 돋을새김이나 부장품에 '종이'의 사용을 보여주는 흔적이 점점 발견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조엽수림대에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탐구하려면, 3500년 정도의 시간축을 더듬어 찾아가는 술라웨시섬과함께 그리스도 탄생 무렵으로까지 '나무껍질 종이'의 제작, 또는 사용 흔적을 더듬어 찾아갈 확률이 높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정보는 힌트로 참고가 된다. 왜냐하면 습윤 기후의 조엽수림 지역에서 2000년 이상 전의 묻혔던 옛 문화층의 유물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림7 마야의 티칼 유적에서 출토된 뼈조각에 새겨진 털붓을 쥔 손(후고전기). Michael D. Coe, 2001 The MAYA 124쪽. 도판 68 Thames&Hadso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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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인도네시아의 한 열대우림. Sinar Mas 그룹이 소유한 제지회사의 벌목장이랍니다. 이래서 종이를 함부로 쓰거나 책을 거시기하기가 싫다는...



벌목장에 가까이 가서 보면 이렇답니다. 신이여, 저들은 아무 죄가 없나이다... ㅜㅜ




원래는 이런 평화롭고 아름다운 숲이라지요.




멋지다...




다들 아시다시피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에는 '숲의 사람' 오랑우탄이 삽니다. 숲이 파괴되면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가지요? 




또한 벌목장 근처는 수마트라 호랑이의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숲이 파괴되면 이들은 어디로 가지요? 조선 호랑아~! 너는 어딨냐~!




하지만 벌목장은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루 쉬면 돈이 얼마인데...




벌목한 나무는 이렇게 제지공장에서 종이로 만들어집니다. 멋지다.




열대우림의 파괴가 '숲의 사람'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닙니다. 그곳에서 동식물과 함께 살던 원주민들의 삶마저 뒤흔들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환경단체와 그린피스가 이러한 열대우림의 파괴를 막고자 싸우고 있다는군요. 보존과 개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일까요?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안다. 모든 것은 한 가족을 묶는 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http://t.co/e2RqqVhF 



참고로, 2010년 FAO에서 발표한 세계의 숲 지도를 보세요. 여기서 더 사라지지 않기를... http://t.co/kC4Tph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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