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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를 타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와쿠이 토오루涌井徹 씨. 아키타현 오가타촌大潟村에서 2017년 10월 喜屋武真之介 촬영.


「이런 곳은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요.」

9월 말, 아키타현 오가타촌. 성인의 키보다 큰 잡초가 무성한 들판을, 셔츠 차림의 남자가 땀투성이가 되어 트랙터로 돌진한다. 잡초를 쓰러뜨릴 때마다 가쿵 가쿵 트랙터가 크게 흔들린다. 마을에서 55헥타르의 논을 소유한 대규모 벼농가 와쿠이 토오루 씨(69)이다. 

 국가가 쌀의 생산을 억제하는 '재배면적 축소 정책'으로 50년 가까이 방치된 약 20헥타르의 토지를 빌려서 개간하고 있다. 원래라면 벼베기로 바쁜 시기이지만, 와쿠이 씨는 여기에 벼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을 양파밭으로 바꿀 계획이다. 

 오가타촌은 전쟁 이후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였던 하치로 가타八郎潟를 간척하여 생겼다. 대규모 농업을 목표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와쿠이 씨도 1970년 니가타현에서 이주해 왔다.  그런데 쌀이 남아돌자, 국가는 이듬해인 1971년부터 재배면적 축소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따르지 않았던 와쿠이 씨는 '범죄자' '이단아'라고 불렸지만, 꾸준히 직거래 판로를 구축하고 소비자의 지지에 힘입어 그를 이겨냈다. 

 기자가 양파밭을 개간하는 와쿠이 씨를 취재하고 1주일 뒤, 와쿠이 씨가 일하다 트랙터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나는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다. 걱정하며 전화하자  남의 일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내는 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지요.」

 국가는 올해 생산된 쌀을 최후로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폐지한다. 와쿠이 씨는 「그 시점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양파밭의 개간에) 착수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가 드디어 와쿠이 씨를 따라가는 모양이지만, 그는 더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오가타촌 이단아의 인생과 그 생각의 일부를 살핀다.


눈이 내리는 농지에서 양파의 자람새를 확인하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2월 촬영. 



◆농업의 희망을 찾는 와쿠이 토오루 씨 

농업정책으로 분단된 마을 

 

「사과해야 합니다.」

 2009년 11월26일, 아키타현 오가타촌을 방문한 민주당 정권의 아카마츠 히로타카赤松広隆 농림수산상(당시)은 의견교환 모임에 참석한 마을의 임원과 농민들 앞에서 사죄했다. 이 마을은 '일본의 식량기지'를 만들고자 탄생했지만, 농업정책이 이주자들을 농락하고 마을을 분단시켰기 때문이다. 

 오가타촌은 하치로 가타를 간척하여 1964년 10월에 탄생했다. 쌀을 증산하는 '모델 농촌'이란 평을 받고, 전국에서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을 선발했다. 평균 경영규모가 1헥타르 정도였던 시대에 1농가에 제안된 농지는 10헥타르(이후 15헥타르)였다. 



 그런데 벼농사에 의욕을 불태우던 이주자들을 '재배면적 축소 정책'이 가로막았다. 국가는 식량관리법에 근거하여 농가에서 쌀을 매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했는데, 1인당 소비량이 1962년을 정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쌀값을 유지하기 위하여벼농사를 축소해 생산량을 조정하는 일이 1970년에 시작되어, 1971년 이후에는 쌀 이외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지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으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추진했다. 오가타촌도 농지의 거의 절반을 밭농사로 전환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일부 이주자들은 겨울철 농한기가 되자 밭농사를 짓는 선진농가를 시찰하고 다녔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十日町市에서 1970년에 이주한 와쿠이 토오루 씨(69)도 그 한 사람이었다. 칸토, 칸사이, 시코쿠……. 근사한 대처를 목격하고 「나도 할 수 있다」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도쿄 우에다역을 출발한 야간열차가 아키타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에는 은빛세계가 펼쳐졌다. 꿈은 눈의 무게에 눌려 점점 시들고, 오가타촌에 도착할 무렵에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멜론, 호박, 대두 등다양한 밭농사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눈 때문에 재배시기가 제한되는 데다가, 간척지는 배수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작물의 뿌리가 썩는 등 조건이 나빴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정리한 생각을 와쿠이 씨는 나중에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설국의 농업은 눈이 없을 때 노지에서 작물을 키우고, 눈이 있을 때에는 시설 안에서 가공을추진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무엇을 심고 무엇을 가공할지,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설국에 좋은 작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물'이란 얄궂게도 국가가 생산을 제한하려는 쌀이었다.


수확기를 맞은 논을 둘러보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0월 촬영. 


타작물 전환에 실패를 거듭한 와쿠이 씨 등은 제한면적을 초과하여 모내기를 실시한다. 하지만 현의 담당자는 그 과잉 재배한 분량을 푸른 상태에서 베어내라고 지도를 내렸다. 이른바 '풋베기'이다. 

 이주하면서 계약에서는 국가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농지를 반환(환매)하도록 요구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동료와 논의했지만 해결책은 없었고, 와쿠이 씨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가을에는 약 1주일 뒤에 수확할 벼이삭을 풋베기하라는 지도를 받아, 자신의 콤바인으로 베어서 논에 방치했다. 벼이삭은 90% 가까이 영글어 있었다. 니가타에서 함께 이주한 아버지 헤이고로平五郎 씨(2013년 사망)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건'은 그 무렵에 일어났다. 이앙기로 한 번 오갈 분량을 풋베기하지 않은 두 농민이 국가에게서 농지를 환매하라는 처분을 받은 것이다. 와쿠이 씨는 말한다. 「두 농가의 태도가 너무 완고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력을 행사했죠. 우리는 이런 압박을 받으면서 농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분노와 불안을 느꼈습니다.」

 오가타촌의 이주자 약 580명 가운데 와쿠이 씨 등 200명은 1983년 아키타 지방법원에 농사조정을 제기한다. 농가가자신의 토지에서 쌀을 재배하면 안 된다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농가마다 소유한 논 15헥타르에 할 수 있는 한 농사를 짓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유일한 집하업자에게서 수확한 벼의 매입을 거부당했다. 와쿠이 씨와 동료는 전화번보부를 펼쳐 전국의 미곡상에게 연락하고, 자신들의 벼를 취급해주는 가게를 개척했다. 이 쌀은 이른바「암거래 쌀」이라 불리는데, 현과 현의 경찰은 1985년 10월부터 2개월 동안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하여 암거래 쌀의 출하를 저지하려 했다.

 1987년이 되자 와쿠이 씨는 동료 몇 명과 주식회사 '오가타촌 아키타 코마치 생산자협회'를 설립한다. 계약 농가에서 농협도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구입해, 자사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독자적으로 개척한 고객에게 직거래를 시작했다. 신품종 '아키타 코마치'의 평가는 최상으로「산지 직송은 맛있다」는 평판을 얻는다. 하지만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준수하는 쪽에서는 '돈벌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마을에서 「암거래 쌀을 출하하지 마라」는 시위대가 몰려와 「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힐난하여 와쿠이 씨는 반론을 했다. 

 「재배면적 축소를 계속한다고 새색시가 옵니까? 훌륭한 농업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대두를 재배하던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의 미야자키 시다요시宮崎定芳 씨(78)는 와쿠이 씨에게 호통을 친 적이 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대항하는 지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등은 밭농사를 짓도록 연약한 지반을 없애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미야자키 씨 자신은 재배면적 축소에 협력하는 게 마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은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와 준수파로 분단되어, 반대파의 아이가 친구들에게 '암거래 쌀'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미야자키 씨는 말한다. 

 「서로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암거래 쌀이 사실상 추인을 받게 된 것은 1988년 1월 아키타 지검이 내린 판단이 계기였다. 암거래 쌀을 판매했다고 하여 식량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 3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쌀 수입규제를 심하게 비판하고, 국가가 농가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한계에 이르렀다. 불기소 처분을 알게 된 와쿠이 씨는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끝났다」고 느꼈고, 당시 식량청의 과장이고 나중에 농수사무 차관을 지낸 다카키 유우키高木勇樹 씨(74)도 「이제 식량관리법은 무너지겠다고 확신했다. 시대에 뒤처진 법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장 때문에 본심은 입 밖에로 낼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전쟁 이후 최악의 기록적 흉년이었던 1993년, 대량 판매점 사장이 오가타촌을 방문해 '1가마 6만 엔'이란 가격으로 사재기를 추진했다. 지난해까지 1가마 2만 엔으로 매입했던 와쿠이 씨는 「6만 엔은 무리이지만, 4년 동안 3만 엔에 구매하겠다」고 약속하고 생산자를 묶어 놓았다. 이듬해는 생산량이 회복되어 일반 쌀값이 떨어졌지만, 3만 엔에 계속 구매하겠다고 한 와쿠이 씨는 지난해의 쌀값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의 직거래 고객에게 <지금의 쌀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희망 가격을 알려 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내자, 90%는「지금의 가격도 괜찮다」고 답했다. 가격 인하 요구가 많으면 경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꾸준히 개척한 고객의 만족도는 높았다. 


오가타촌으로 이주한 직후 볍씨를 뿌리는 헬기 앞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 번째. 본인 제공. 


다카키 씨는 자성을 담아 말한다. 「소비자는 국가가 매입하는 정부미보다 농가에서 필사적으로 농사지은 『암거래 쌀』이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농업을 잘못 지켜서 농가의 창의성을 빼앗았다.」다카키 씨가 농수성의 관방장이었던 1995년, 식량관리법은 식량법으로 대체되는 형태로 폐지되고 암거래 쌀은 '암거래'란 딱지를 떼었다. 

 오가타촌의 분단이 해소된 것은 2010년 무렵이었다. 2009년 마을을 방문한 당시 아카마츠 농수상이 농업정책을 사죄하자,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에게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며 반발의 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재배면적 축소로 줄어든 벼농사 농가 등의 수입을 보전하는 '호별 소득보상제도'가 2010년 도입되고, 쌀가루용 등의 벼농사를 지어도 재배면적 축소로 취급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을 농가의 재배면적 축소 참가율은 지난해 49%에서 84%로 높아졌다. 분단 구도는 마침내 무너졌다. 


참치처럼 돌진


 「나는 참치처럼 멈추면 죽는다.」

 와쿠이 씨는 자신을 이렇게 비용한다. 생각이 나면 곧바로 행동한다. 기자가 취재하며 쌀 가공공장의 안내를 받을 때도 생산라인의 문제점을 발견하자, 현장의 직원과 이야기하느라 20분 정도 열중했다. 

 와쿠이 씨는 1948년 9월,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은 「까마귀에게 부딪치는 흙도 없다」고 할 만큼 농지가 귀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가의 셋째 아들로 논의 지분이 0.3헥타르였는데, 와쿠이 씨도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아버지와 시노가와천信濃川의 하천부지에 조금씩 흙을 날라 논을 1.8헥타르까지 넓혔다. 그럼에도 농사일로는 연간 100만 엔 정도 벌어 공사현장 등에 돈을 벌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자택 앞에서 사진을 찍은 와쿠이 씨(왼쪽 끝). 본인 제공. 


마음껏 벼농사를 짓고 싶다. 그런 꿈을 품은 아버지와 아들은 자연스럽게 오가타로 이주를 목표로 했다. 이주 조건 등을 듣고자 와쿠이 씨는 19세 때 혼자서 상경하여, 느닷없이 옛 농림성(현 농수성) 본청을 방문했다. 담당직원에게  「그렇다면 가나자와金沢의 호쿠리쿠北陸 농정국에 가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열차에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다. 

 이주자는 응모자 가운데 서류심사와 면접 등으로 선발했는데, 유부남이 유리하다고 들은 와쿠이 씨는 <이주한 뒤 현지 여성과 결혼을 희망한다>고 적은 결혼희망서를 작성하여 이주 응모서류와 함께 제출했다. 22세였던 1970년 12월 이주한 직후 먼저 온 이주자의 딸 아야코 씨(71)와 결혼했다.

 재배면적 축소는 올해로 끝난다. 하지만 와쿠이 씨의 시행착오는 계속된다. 

 사장을 맡은 오가타 아키타 마치코 생산자협회(종업원 수 160명)은 올해로 설립 30년을 맞이한다. 계약농가는 현재 약80호, 직거래 회원수는 약 5만 명에 이르는데, 최고일 때보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쌀의 생산부터 가공, 판매까지 다루고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떡과 찰밥, 찹쌀떡 등을 발매했지만, 가격경쟁에 밀리고 있다. 쌀가루를 사용한 가공시설도 신설했지만 기대만큼 매출이 많지는 않다. 최근에는 글루텐(밀가루에 함유된 단백질)을 쓰지 않는 음식을 먹는 테니스 선수의 몸 상태가 개선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며 쌀가루로 만든 글루텐 프리 파스타 등의 판매도 시작했다. 

 재배면적 축소 정책의 종료와 농가의 고령화, 그리고 환태평양 파트너쉽 협정(TPP) 참가 이후의 시대를 눈여겨 보는 와쿠이 씨는 지난해 더 수익성 높은 농업 모델을 만들고자 금융기관 등과 주식회사 '미라이 공창 팜 아키타(みらい共創ファーム秋田)'를 설립했다. 지금 주력하고 있는 건 쌀이 아니라 양파이다. 기계를 쓰면 대규모로 재배할 수 있고, 가공용 양파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쌀보다 수익성이 높다고 한다. 마을의 배수 대책도 추진하여 밭농사 환경도 조성해 왔다.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밭을 빌려서 집약적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목표로 한다. 

 「꿈과 희망이 있는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벼농사만 짓거나,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쌀, 쌀이라고 떠들던 오가타촌에서 하는 일에 영향이 있을까?」

 직접 양파밭을 개간하다 머리를 부딪쳐 부상을 당하는 등, 내년에 칠십을 바라보지만 참치처럼 돌진할 뿐이다. 걱정하는 소리도 있지만, 그러니까 투쟁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번 달 중순, 와쿠이 씨와 양파밭에 방문했다.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와쿠이 씨는 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설국에서 태어난 건 눈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 양파도 차가운 눈 아래에서 자란다. 봄이 지나 양파를 수확할 수있을까.」

 푸른 싹이 흙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https://mainichi.jp/articles/20171224/ddm/010/040/0600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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