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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1824년 북간도를 통해 처음 도입됐다. 감자는 대부분 삶거나 쪄서 먹고 있다. 국산 감자를 가공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감자칩, 감자떡, 감자탕용 등에 불과하다. 전분, 프렌치프라이, 군감자용 등은 대부분 수입해서 먹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페루와 볼리비아 경계에 있는 티티카카호 근처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기원전 400년경 감자를 재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 페루인들은 감자를 ‘빠빠’(Papa)라고 부르는데, 어머니신(Pachamama)으로부터 유래된 ‘감자여신’(Papamama)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다산숭배에 대한 의식과 식량으로서 감자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셈이다. 

잉카제국의 감자여신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유럽으로 감자를 처음 도입한 것은 1570년경이다. 미국에는 영국과 버뮤다를 거쳐 17세기 초에 도입됐다. 유럽인들은 감자를 처음 보았을 때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물이라는 이유로 악마의 선물, 만병의 원인이라고 여기고 사료나 죄수의 식사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척박한 독일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에 주목했다. 감자를 강제로 심게 해 기근을 극복하고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프랑스의 파르망티에는 프러시아에서 포로생활 중에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설득해 프랑스에서 감자를 대중화시켰다. 괴테는 감자를 “신이 내린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감자는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됐다. 조선말 실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24년이다. 북간도를 통해 개마고원으로 산삼을 캐러 다니던 청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 1832년 영국 상선 로드암허스트호에 의해 충청도 해안으로 전래됐다는 설도 있어 감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감자는 즉시 식량작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 쌀을 세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감자 재배를 그다지 장려하지 않았음에도 1879년에 강원도와 한성부에서 널리 퍼질 정도였다. 

감자는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에서 잘 자란다. 특히 재배 중 필요로 하는 물이 벼농사의 37% 수준이어서 물이 부족한 준사막지대, 고산지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알래스카, 그린란드와 같이 추운 곳이나 아프리카의 우간다, 케냐, 에티오피아 등 열대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또 1㏊당 벼 4.7t, 보리 2.4t, 옥수수 9t을 생산할 수 있는데 비해 개발도상국에서도 감자는 10~15t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당 평균 25t을 생산한다. 감자는 재배기간도 짧다. 벼가 5개월, 콩·옥수수·고구마 등이 4개월인데 비해 감자는 3개월 정도면 수확할 수 있다. 밭이 빌 때 다른 작물들도 재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감자는 땅에서 캐서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게 밀이나 옥수수와는 다른 장점이다.

감자 열매



감자는 다양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거의 완전한 식품이다. 거의 모든 필수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감자에 들어있는 비타민 B1은 쌀의 2∼3배, 비타민 B2와 B3는 쌀의 3배에 이른다. 또 비타민 C는 사과의 6배를 함유하고 있다. 채소류의 비타민 C 함량도 높긴 하지만 열로 가공하면 대부분이 파괴된다. 반면 감자의 비타민 C는 가열을 해도 전분입자들이 막을 형성해 손실이 많지 않다.

감자에 특히 많이 들어있는 성분이 칼륨(K)이다. 중간 크기의 감자 1개를 껍질째 먹을 경우 720mg을 섭취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칼륨함유식품인 바나나(400mg)보다 많은 양이다. 칼륨은 고혈압 개선에 효과가 있다. 감자의 이런 영양적 특성에 주목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우주선 내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BLSS(Bio-regenerative Life Support System)를 개발하고 있다. 이미 1988년 수경재배를 이용한 우주 식량으로서 감자의 가능성을 시험한 적도 있다. 

예전에는 속이 희거나 담황색인 감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붉은색, 자주색, 줄무늬 등도 개발됐다. 자주색이나 붉은색을 나타내는 성분은 항산화 기능성 물질로 잘 알려진 안토시아닌이다. 컬러감자는 항암작용을 하고 통풍을 개선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은 담황색이고 속은 흰색인 감자가 인기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는 노랑색을 황제의 색으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어서 속이 노란색일수록 인기가 있다. 속이 노란 감자의 색소 구성성분은 카로티노이드다. 감자의 카로티노이드 중에는 루테인, 제아잔틴 등 망막의 구성성분으로 시력 감퇴나 실명의 위험을 낮추는 성분이 들어있다. 특히, 루테인은 동물 실험에서 단시간 내에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효과를 보였다.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센터 이학박사 조지홍

문의 kdlrud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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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달과 농사>를 읽으며 인상적인 구절, 그와 관련한 생각과 기록을 남기려 한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달과 농업'의 관계에 대해 공부하려고 합니다. 

달이 작물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농사는 태양에만 의존할까요? 

아닙니다. 농사는 별의 노래(農)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별과 달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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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력과 간지력을 공부하면서 <달과 농업>이란 중남미의 책을 발견했죠. 

우리의 옛 농서에도 체계적이진 않지만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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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인간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죠.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성의 月經이 좋은 예입니다. 다달이 하는 거라면 왜 30일이 아니라 달의 공전주기와 주기가 비슷하죠?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역시 달과 공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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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지구, 태양이 어우러져 밀물과 썰물이 일어납니다. 그에 생명이 공명합니다. 

예를 들어 보름달이 뜨고 밀물인 때, 식물 안에서는 水昇 현상 -활발한 생명활동- 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씨앗을 그믐에서 보름 사이에 심으라고 했죠.


반대로 보름이 지나 그믐이 되며 썰물인 때에는, 생명의 기운이 잎과 가지에서 뿌리 쪽으로 하강하여 응축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수확이나 채종은 보름에서 그믐 사이에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조화를 맞춰 농사짓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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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인들의 달과 관련된 믿음 체계와 농업 및 일상생활에 대하여 훑어보고 있는데, 우리와도 유사한 점이 너무 많다. 

아주 흥미로워 미춰버리겠다. 덕분에 스페인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스페인어도 재밌는데 머리 아파.

아무튼 쿠바에 가서도 굶어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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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문화권마다 새해를 시작하는 달이 달랐다. 

고대 로마의 경우 3월(mars)이었고, 하나라는 음력 1월, 은나라는 음력 12월, 주나라는 음력 11월이었다. 

한편 잉카의 경우 지역마다 달랐는데, 고지대의 경우에는 6월이었다고 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내 생각에는 농사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본다. 

농사를 시작하는 시점보다 조금 먼저 새로운 1년을 시작한 것이다. 즉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기 직전이 바로 새해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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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달력을 공부하니, 마야인들은 시간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네, 종말론은 그들의 시간관을 잘 모르는 사람이 퍼뜨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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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엉터리로 만들어놓은 인간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카이사르를 흉내 내어 8월(augusto)을 만들며 달력을 망쳐놨어요. 

그런데 왜 이후 아무도 그걸 수정하지 않았을까요? 왜 2월은 지금도 28일까지밖에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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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잉카인들은 밤하늘에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나타나면 농사철이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좀생이별이라 부르며, 정월 보름 무렵 달과의 거리나 빛깔 등을 보며 풍흉을 점쳤지요. 

농사는 만국 공통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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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선 천인감응설에 따라 하늘에도 지상과 똑같은 세계를 펼쳐 놓았습니다. 

하늘에도 강과 밭이 있고, 부지깽이에 뒷간까지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해당 별자리에 변고가 생기면 지상에도 문제가 생긴다 생각했죠. 엄청나게 재미난 하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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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성립하려면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달력을 만드는 것이 기본입니다. 

마야, 잉카, 아스텍은 모두 문명이라 불리는 만큼 정교한 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동양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유럽 중심으로 공부해서 모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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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에서는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걸 큰 과제로 여겼죠. 

여기에는 다분히 농사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춘분 이후 첫 보름 다음에 오는 주일이 부활절인데, 그때야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 기운이 완연한 농사의 적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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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교회가 농사의 적기를 알려주지 못한다면 사회적으로 권위를 얻을 수가 없었죠. 

중세 농민들에게 교회는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처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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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 보통 입춘을 전후로 하여 설날이 옵니다. 양력으로 1월 중순~2월 중순일 때가 많죠. 

그런 다음 설부터 정월대보름까지는 겨울 기운을 몰아내고 봄을 맞이하며 축제 기간으로 들어갑니다. 

보름 동안 실컷 놀고 슬슬 농사일을 시작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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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후예인 페루인들은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는 모습, 산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 산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모습 등으로 시간과 1년의 흐름을 파악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이를 '풀달력'이라 부르며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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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ac Raymi; 잉카인들이 12월 동지에 거행하던 축제. 

태양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을, 즉 태양의 부활을 축하하는 행사다. 

조선에선 동지팥죽을 먹으며 새로운 해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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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달의 여신 익스켈Ixchel . 출산과 의술의 여신으로 여겨진다. 이는 임신 이후 9태음월(260일)이면 출산하기에 그럴 것이다. 

또한 그녀는 홍수와 큰비의 여신이기도 하다. 큰비도 달의 움직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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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문명에서는 인간이 옥수수로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그들의 믿음처럼 그 지역에서는 옥수수가 인간의 뼈와 살을 구성하는 중요한 먹을거리가 된다. 

농사도 옥수수를 중심으로 땅을 갈고 두둑을 지어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옥수수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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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태양 쪽으로 가면 태양의 중력에 의해 지구에서 더 멀어지고, 태양에서 멀어졌을 때에는 지구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달은 정확한 원을 그리며 돌지 않는다. 


인간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부부 사이에도 가까워질 때와 멀어질 때가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가까워져야 할 때와 멀어져야 할 때가 있다. 


가깝다고 한없이 가까워지고, 멀다고 한없이 멀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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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나 달에 의해 가려지는 걸 가리키는 蝕. 벌레가 먹는 걸 뜻한다. 

벼이삭을 벌레가 먹듯이, 해와 달을 벌레가 먹는 불길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식을 불길하게 여긴 것은 동서양이 모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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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셔날지오그래픽에서 "Earth's temperature rises slightly during a full moon."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아직 인간이 과학적으로 밝히지 못했을 뿐 역시 달은 농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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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위상 변화에 따라서 나무의 수액이 줄기를 통하여 잎으로 가거나 뿌리로 가거나 한다. 

이는 밀물과 썰물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달의 인력이 바닷물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에 함유된 물기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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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햇빛은 지표면에서 대부분 반사되어 날아간다. 

하지만 은은한 달빛은 땅속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그래서 땅속에 심은 씨앗은 이러한 달빛에 감응하여 발아가 촉진된다. 

중남미의 농민들은 이를 알고 파종 시기를 달빛이 강해지는 시점에 맞추어 결정했다. 특히 비가 막 내린 뒤 보름달이 뜰 무렵의 달빛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할머니들은 여전히 음력을 따져서 농사를 짓는다. 할머니들의 음력 농사법을 하루 빨리 조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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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라 하면 태양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태양만 중시하게 된 건 근대과학이 식물과 태양의 메커니즘만 밝힌 데 원인이 있을 겁니다. 아직 달과 식물의 관계에 대해선 모르죠. 

음, 어디 관련 논문이 있을까?


그나마 가장 유사한 논문으로는 <고대사회와 農時의 이해>가 있지만, 역사학 논문이라 탈락. 

죽은 자식 고추 만지는 내용 같습니다만.... http://t.co/rSMbu1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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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에서 보름이 될수록 식물에는 물이 오릅니다. 식물에 물이 오르면 그 모습이 통통하고 때깔이 고와집니다. 사람도 물이 오르면 참 어여뻐지죠. 식물의 경우 특히 겨울에서 봄이 될 때 그러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달마다 반복되는 것이죠.

반면 보름에서 그믐으로 가면서는 물이 내립니다. 즉 수분의 상승과 하강이 달의 위상 변화에 따라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서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인간의 월경도 달의 주기를 따르고 있는 것도 그 흔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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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농사법

 

 

 

 

 

 

고대의 선주민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낭만적인 생각은 1990년대에 부수어졌다. 연구를 통하여 수많은 문명이 농업으로 흙과 환경을 파괴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단밭을 만들어 토양침식을 막고, 나무를 심어서 황패해진 흙을 회복시킨 고대 문명도 있다. 바로 잉카이다.

 

 

페루 남부의 쿠스코에서 북쪽으로 12㎞, 해발 3300m의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은 성스러운 계곡의 지류로서 현재도 그러한데, 잉카 시대에도 이 성스러운 계곡은 옥수수 산지로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다. 여기에 마르카코차Marcacocha라고 하는 지름 40m 정도의 작은 호수가 있다. 규모가 작아서 넓은 내만보다 지역에 살고 있는 육상식물의 변화가 민감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호수 바닥의 코어에 있는 꽃가루를 분석하여 4000년 이상에 걸친 환경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빠따깐차 지역의 위성지도. 

 

 

잉카의 혼농임업

 

 

잉카에는 문자가 없다. 환경에 관한 문자 정보는 1530년 이후의 것만 얻을 수 있는데, 원주민이나 스페인 사람이 기록한 스페인어뿐이다. 잉카에 건너온 스페인 사람은 대부분 나무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을 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몇 천 개나 있는 잉카의 콜카qollqa(곡물 창고)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있다.

 

 

곡물창고인 콜카와 그 옆으로 이어진 계단밭의 모습.

 

 

잉카는 스페인에 의해서 1533년 멸망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기 전까지 제국은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앙부까지 퍼져 있으며, 인구는 3000만 명이나 되었다. 또한 잉카는 70종의 작물을 재배하고, 곡물 창고에는 10년이나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정도의 공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10년 분량의 연료용 땔감(lena rajada)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의 땔감이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나무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영국의 벨브로우톤Bellbroughton에 있는 고대 농법의 부활 농촌개발 프로젝트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http://www.cusichaca.org/)의 대표이자 고고학자인 앤 켄달Ann Kendall은 말한다. 연구자들은 잉카에 숲을 보전하는 체계가 틀림없이 있었고, 그것이 급경사의 흙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리마에 있는 프랑스의 안데스 연구기관의 알렉스 쳅스토우-러스티Alex Chepstow-Lusty는 목재를 생산하고 흙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혼농임업을 행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연료나 목재 수요를 충족하고자 숲을 중시하고, 토양이 침식된 땅에서도 잘 자라서 질소를 고정하는 오리나무(Alnus acuminate)를 산중턱에 심어 혼농임업(Alnus cultivation)가 시도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쿠시차카 트러스트의 스태프. 뒷줄 빨간 모자를 쓴 여인이 앤 켄달.

  

오리나무(Alnus acuminate)의 잎과 꽃.

 

 

나무를 심는 전통이 있었던 것은 케추아어의 천연림(sacha)과는 달리 재배되는 나무를 뜻하는 말키mallqui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말키는 죽은 선조를 뜻하는데, 그것은 숲을 지켜온 선조를 숭경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잉카의 사람들은 나무를 높이 평가했다. 잉카 문화에서 땔감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고관의 결혼식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도금된 땔감이 사용되었다. 서민의 결혼식에서는 고기와 코카가 신부의 선물이었는데, 그 이외에 우루트네Urutne라고 부르는 뿌리의 땔감이나 그것이 없으면 재목이 되는 토종 오리나무인 아리소aliso(Alnus acuminata)가 주어졌다.

 

아리소. 

 

 

 

잉카에서 숲은 국유지였다. 혼농임업은 황제 스스로 감시하였고, 위법으로 나무를 벌채하거나 불태우는 행위는 위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말키 카마요크mallki kamayoc 앞에 데리고 간 다음 판결을 내려 죽음으로 처벌했다고 한다.

 

 

잉카인들이 산림자원을 높이 평가하고 나무 심기를 행했다는 것을 실증하는 증거는 뜻밖에도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꽃가루이다. 잉카가 등장하기 이전의 코어에는 함유되어 있지 않았던 토종 오리나무인 아리소의 꽃가루가 서기 1100년부터 갑자기 나타난다. 아리소는 침식된 흙에서 잘 자라는 질소고정종이다. 물론 꽃가루 기록이 있다고 하여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나무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꽃가루 기록을 통해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나무를 모두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자생종 나무는 충매화라서 그 꽃가루가 호수의 침전물에 쌓일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소는 풍매화이다. 그래서 당시 그것이 존재했고, 날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서기 1100년의 마르카코차Marcacocha 호수 퇴적물을 보면, 계단밭과 나무 심기 등의 기술이 중요시되었다는 사실과 토양침식이 격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교란의 지표인 돼지풀(Ambrosia)도 일반적으로 없다. 또다른 증거도 있다. 만타로Mantaro 계곡에서 조금 북쪽에 있는 판칸Pancan 유적의 발굴 현장 근처에 위치한 표고 3600m에 있는 작은 호수 라구나 빠카Laguna Paca이다. 여기에서도 약 7.5m의 완전한 호수 바닥의 코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약 1000년 전부터 아리소가 급증했단 것을 보여준다. 꽃가루는 인구가 급증하고 목재 소비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소의 밀도가 비교적 일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구나 빠카. 

 

 

 

잉카는 그 토지 관리 계획에 따라 일관적으로 나무 심기를 시작한다. 이 조기 관리는 식량과 연료용 나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실용적인 것이었지 생물다양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잉카는 수많은 수종을 심고 수많은 작물을 재배했다. 그리고 나무 심기는 산지 구릉의 흙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쓰였다.

 

 

 

 

숲을 파괴한 스페인 사람

 

 

이와 같이 혼농임업은 안데스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530년대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면서 토지이용은 아주 달라지고, 산림자원은 지나치게 개발되어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뒤에는 계단식 농법도 나빠졌다.

 

 

산림자원이 급감한 것은 역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460년 잉카에게 정복된 완카족Wanka族은 그 뒤 스페인과 동맹을 맺는다. 이때 공급과 관련된 일이 결승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스페인어로도 베껴 적었다. 만타로Mantaro 계곡, 잉카의 행정 단위로는 라구나 빠카 근교의 아턴 과사Hatun Xauxa의 북단으로부터 1533년에 20,0071짐(fardo)의 쪼갠 땔감이 스페인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다. 이 짐의 단위는 인간이 등으로 나를 수 있는 양으로 12~15㎏에 달한다.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기 이전에도 완카족은 자신들의 수요를 채우면서 공물로서 대량의 목재를 잉카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1537년 이 짐의 양이 1,7000으로 뚝 떨어진다. 이는 일정 영역에서 급속히 벌채가 이루어져 산림자원이 급감한 것을 나타낸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겨우 2년 만에 아턴 과사를 떠나 1535년 리마로 이주한 이유의 하나도 계곡에 땔감이 부족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목재의 종류는 결승문자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리나무의 일종인 아리소가 땔감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지역에 심어져 있었던 아리소가 잉카가 정복하고 50년 뒤에는 감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좋은 숯의 원료였기 때문에 쿠스코에 가까스로 도착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후추나무(molle=Schinus molle)를 거의 베어 버렸다. 물론 그들도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자각하여, 1590년 쿠스코 근교의 계곡에 다시 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워 스페인 사람이 감독하여 2400그루를 심게 한다. 하지만 제련, 벽돌, 석회 제조, 제빵, 지중해 식의 난로와 대량의 목재 수요를 고려하면 이 정도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페루후추나무. 

 

 

 

스페인이 정복하고 100년 뒤인 1639년, 파드레 코보Padre Cobo는 인디안 한 세대가 1개월 동안에 쓸 연료를 스페인 사람의 가정에서는 하루에 다 써 버린다고 기술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전략적인 나무 심기로 관리되었던 잉카의 경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비옥한 토지는 스페인 사람에게 돌아갔다. 선주민들은 이전의 땅을 사용할 수 없어 생산성이 낮은 고지대로 쫓겨났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으로 토지 관리의 기반이 파괴되고, 새로운 병으로 급속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고 1세기가 되지 않아 페루의 원주민은 900만에서 60만으로 감소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도입된 가축과 작물로 인해 생물다양성은 사라지고, 토양침식이 진행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연료용으로 급속히 나무를 베어냈기에 아리소도 줄어들었다. 지금 마르카코차Marcacocha 근교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처럼 몇몇 멀리 떨어진 계곡에만 드문드문 남았다.

 

 

 

 

자연을 파괴하고 있었던 고대 농업

 

 

스페인 사람들과 달리 잉카는 환경 관리에는 성공했다. 인공의 계단밭, 관개 체계, 그리고 인구를 관리하여 토양침식을 일으키지 않고 성공적으로 식량을 생산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만 혹평하는 것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잉카 이전에 안데스에 살던 사람들도 똑같은 실패를 범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어의 최하층은 방사선탄소를 통해 1900~4000년 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채프스토우-러스티 등은 이 코어로부터 교란된 토양에 사는 잡초, 목초와 고대인의 주식이었던 퀴노아Quinoa의 꽃가루를 대량으로 찾아냈다. 프레잉카보다 400년이나 전부터 안데스에서는 농업이 성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1000년 전까지의 코어에는 주변의 산에서 암석이나 모래가 반복해서 호수로 흘러들어왔다. 산에서 홍수로 산사가 흘러온 것이다. 이 기록으로부터 당시의 농민들은 초보적인 계단밭밖에 건설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00년 전에는 한랭화와 토양이 나빠져서 계곡의 농업은 쇠퇴한다. 기후가 냉각된 것은 마르카코차에 농업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안데스 산지의 빙하가 확대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퀴노아를 지고 가는 페루의 여인(출처: 연합뉴스).

 

 

 

“그렇지만 토양침식은 계속되었습니다”라고 채프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명아주과(Chenopodiaceae)의 퀴노아quinoa(Chenopodium quinoa)와 같은 작물의 꽃가루는 발견되어도 나무의 꽃가루는 매우 드물고, 1300~1000년 전의 코어에서는 대량의 무기침전물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식생이 모자란 위약한 환경에서 방목압으로 토양침식이 일어난 결과이다. 곧 안데스에서는 쭉 숲이 파괴되어 심각한 토양침식이 문제가 되었고, 토지도 별로 생산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서서히 기온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티와나쿠Tiwanaku/와리Huari 문화가 계곡에 퍼지기 시작했다.

 

 

 

 

자연 파괴형 농업에서 계단밭 만들기로

 

 

서기 1470~1532년에 걸쳐 잉카제국은 혜성처럼 번영한다. 하지만 잉카가 이렇게 갑자기 발전한 이유가 그 우수한 사회조직과 기술에 있다는 설명은 충분히 않은 채 남아 왔다. 그런데 알렉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기후변동에 있다고 지적한다. 호수의 코어를 통해 서기 1100년 무렵부터 호수 주변의 경관이 크게 변하고 농업이 갑자기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초식동물의 똥을 먹이로 하는 절족동물 날개응애(oribatid mites)도 출현한다.

 

 

“날개응애는 라마의 똥을 먹었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응애는 호수 근처에 라마가 방목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토양침식이 급감하고, 옥수수와 다른 작물의 꽃가루나 씨앗도 나타난다.

 

 

“이때가 확실히 토양을 보전하는 기술에 의해 이 지역에서 농업을 행한 조직적인 노동이 시작된 때입니다.”

 

 

잉카는 높은 표고의 지역에 있는 하천과 호수에서 끝없이 물을 끌어들이고자 5.8㎞의 운하를 만들었다고 고고학자인 앤 켄달는 말한다. 그리고 무수한 계단밭도 갖추었다. 서기 1100년의 마르카코차 호수의 퇴적물을 보면 계단밭과 나무 심기 등의 기술이 중요시되었던 것과 토양침식이 격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의 거주지 발굴을 통해서는 계단밭이 건설된 것과 계곡의 인구가 현대의 약 4000명보다 4배로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양의 손실이 적어지고, 많은 사람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켄달 씨는 말한다.

 

 

“계단밭을 만들려고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계곡 바닥과 강바닥에 무너져 내려와 있던 흙을 구릉지로 되돌리고자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켄달 씨는 “몇 천 개의 계단밭을 만들자고 틀림없이 사람들이 얘기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계단밭이 기능하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도 그렇게 말한다.

 

 

잉카의 발전을 뒷바라지한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Epoch))라고 부르는 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는 그 뒤 약 400년이나 이어진다. 그때까지 몇 천 년이나 이어져 왔던 차가운 기후에서는 농사지을 수 없었던 고지대에서도 작물을 재배하게 되고, 산중턱에 계단밭을 만드는 일도 가능해졌다. 안데스의 빙하가 녹아 흘러 관개용수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안데스에서는 새로운 곳에서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농업용으로 계단밭이 마련되고 빙하가 녹은 많은 물로 새로운 관개 체계도 시작했습니다. 모두 기온의 상승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옥수수와 감자가 증산되어 잉카는 광대한 도로망을 정비하는 활동에 종사할 여유가 생기고, 과잉 생산된 식량으로 군의 정비도 가능했다. 1400년 무렵부터 잉카가 에콰도르부터 칠레에 이르는 영토를 급속히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아리소는 이 온난화 기간에 자연히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잉카가 의식적으로 혼농임업에 임하지 않았다고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코어는 적극적인 경영관리의 사례가 될 수는 없다”고 시카고대학 라틴아메리카연구센터의 알란 콜라타Alan Kolata 소장은 말한다. 그렇지만 콜라타도 계단밭 등의 고대 농업이 흙을 보전하고 작물 생산을 높였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나무 심기가 시작된 것도 기후가 차가웠던 서기 1000년 이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르카코차 호수 근처에는 서기 1000~1460년의 전형적인 유적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아리소의 꽃가루가 늘어나는 것과 발맞추어 빠따깐차 계곡에서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잉카는 나무 심기와 같은 보전 활동을 시작하여 나빠진 농토를 복구한 것이다.

 

 

 

 

돌려짓기와 묵히기로 감자의 병을 막다

 

 

그리고 잉카제국에서 행하던 농업도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오기 이전에 제국의 농민들은 토지를 묵히고, 감자를 돌려짓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산악 지역 우추크마르칸Uchucmarcan의 농민들이 행하던 것은 이런 방식이다. 먼저 농지에서 1~3년 농사를 지은 뒤에 8년 이상 휴한지로 놔둔다. 그리고 감자를 재배할 경우에도 그와 함께 안데스의 덩이줄기 종류인 오카oca(Oxalis tuberosa)나 마슈아mashua(Tropaeolum tuberosum)를 재배하고, 다음 1~2년은 울루크ullucu(tuberosum)를 재배하는 것이다(Brush 1977).

 

오카, 마슈아, 울루크.

 

마슈아.

 

 

 

하지만 감자에는 감자 시스트 선충(potato cyst nematode=Globodera rostochiensis)이란 성가신 문제가 있다. 선충은 땅속에서 늘어나는데, 예를 들면 마른흙 1g에 알이 100개나 존재하는 고밀도 상태가 되면 수확량을 60%나 떨어뜨려 버린다. 게다가 숙주인 감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시스트라고 하는 알 상태가 되어 길면 10년 이상이나 남아 있다. 시스트 상태가 되면 농약에도 강하고, 근절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중요하게 해온 것이 농토를 묵히기와 비숙주식물(nonhost)이다. 영국의 로탐스테드Rothamsted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7년 동안 묵히면 시스트 선충을 경제적 허용한계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Jones 1970, Jones1972). 또 비숙주식물을 재배해도 흙속의 선충 밀도가 30~50%나 줄어든다(Brodie 1984). 또 마슈아를 심는 것도 효과가 있다. 마슈아의 뿌리에서 시스트 선충을 쫓는 분비물을 내뿜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잉카와 프레잉카의 농민들은 몇 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농토를 오래 묵히는 것이 감자 재배에 필요한 일임을 배웠을 것이다. 잉카의 묵히기와 돌려짓기는 토양침식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건전한 병해 관리 체계에도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가뭄으로 줄어든 티와나크Tiwanaku 문명

 

 

나중에 잉카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제국이 발전하기 몇 세기 전부터 쿠스코 지역에 살던 수많은 부족 안에 있었음이 그릇의 양식을 통해 판명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제국이 채용한 것이 그들의 토지 경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기의 나무 심기와 자연 재생의 증거와 관련이 있는 서기 1100년에 관심이 있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그리고 잉카가 2대 라이벌인 와리Wari와 티와나크 문명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기후의 온난화와 건조화에 의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온난기에 따르는 기후변화로 티티카카 호수 지역에서는 가뭄이 심해졌다. 티티카카 호수의 퇴적물도 변하여 호수의 깊이가 낮아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고 있으며, 마르카코차 호수의 남동으로 200㎞인 퀠카야Quelccaya의 만년설에서 추출된 빙하 코어의 기후 자료도 이 시기에 얼음이 녹고 강수량이 뚜렷하게 줄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가뭄이 티와나크 문명이 붕괴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티와나크 문명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높은 두둑의 밭 체계였다. 서기 1100년에 이 높은 두둑 밭이 대규모로 버려졌다. 사람들은 토지를 구하러 북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북쪽의 쿠스코 지역에는 아직 계절에 따른 비가 내리고 빙하가 녹은 물로 보충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의 배꼽을 뜻하는 ‘쿠스코’의 설립과 관련된 잉카의 신화도 어떠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의 초대 황제는 도시를 설립할 장소를 찾고자 대지를 시험하려고 타팍 야우리Tapac Yauri라고 부르는 황금지팡이를 손에 들고 티티카카 호수에서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 지팡이가 대지에 꽂히는 곳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이 도시를 설립할 장소라는 상징이었다.

 

쿠스코를 설립한 잉카의 초대 황제 만코 카팍Manco Cápac. 

 

 

 

 

고대 농업을 부활시키다

 

 

영국 국제개발성(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이 발표한 숫자에 따르면, 페루의 2400만 명 가운데 49%가 빈곤하다. 그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은 안데스에 사는 선주민으로, 약 66%의 세대가 빈곤하다고 분류되어 있다. 그 주요 원인은 산림 파괴, 토양침식, 충분하지 않은 물 관리와 땅심의 약해짐이다. 그리고 화폐경제가 자원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아 농촌 지역사회나 도시와 농촌을 분극화시키고 있다.

 

 

“고대 잉카는 이상적인 고지대 농업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전략이 현재 페루의 농민을 돕는 데에 유효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쳅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이러한 고대의 전략은 지금도 실용적일지도 모른다. 쳅스토우-러스티에 따르면, 스페인 사람이 건너온 뒤에는 응애가 눈에 띄게 줄어 잉카 문명의 대부분이 파괴된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한다. 1600년 무렵에는 소, 양, 염소, 말을 스페인 사람들이 가지고 들어온 뒤부터 응애는 다시 늘어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이 잉카의 묵히기와 돌려짓기는 무의미한 관습처럼 생각되었다. 6~8년에 걸친 오랜 묵힘과 돌려짓기 농법은 팽개쳐지고, 안데스 산중의 고립된 지역사회에서만 행했다. 이후 페루에서는 감자 시스트 선충으로 큰 피해가 생겨 버렸다.

 

 

쳅스토우-러스티의 해결책은 아마존으로부터 동쪽으로 부는 습한 바람을 붙잡도록 오리나무 등과 같은 자생종 나무를 대규모로 ‘다시 심는 것’이다. 쳅스토우-러스티는 다시금 농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잉카의 운하와 계단밭을 수리해야 한다고 추천한다.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는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에서 고대의 방법으로 계단밭을 굴삭하고 그것들을 재건하는 계획에 자금을 대고 있다. 1995년 이후 현지의 농민들은 운하를 재건하고, 160㏊의 고대 계단밭에서 감자, 옥수수, 밀을 재배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토지에서보다도 계단밭은 수확량이 좋고, 비료도 적게 든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기능하고 무엇이 기능하지 않는지를 몇 백 년이나 배워 왔습니다.”

 

 

플로리다대학의 지리학자 마이클 빈포드Michael Binford 는 말한다.

 

 

“만약 그들이 해온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무언인가를 배우겠죠.”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hurston, H. David, Plant disease management practices oftraditional farmers, Plant Disease 74:96-102, 1990.

(2) Kevin Krajick, Ancestors of Science:Green Farming by the Incas?, Science Magazine, 17 July 1998.

(3) Alex Chepstow-Lusty and Per Jonsson, Inca Agroforestry:Lessons from the Past, AMBIO: A Journal of the Human Environment, pp. 322–328, March 15, 2000.

(4) Andy Coghlan, Hotter weather fed growth of Incan empire Jul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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