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돈희-한국민속학사의 재조명.pdf


필자는 그동안 한국 민속학사와 관련된 선행연구 들에서는 한국 민속학의 학문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기원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현 시점에 더 중요한 일은 한국 민속학이 갖는 ‘역사복원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이론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한국 민속학이 지닌 이론적 문제점의 원인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다. 물론 실학이 한국 민속학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주장이 지닌 몇 가지 한계를 지적한다. 첫째 조선과 유럽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차이가 있었다는 점, 둘째 유럽 민속학자와 조선 실학자의 관심이 서로 달랐다는 점, 셋째 실학자의 민속학적 관심이 과연 학문적 내용이냐는 점이다.

필자는 한국 민속학이 실학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독특한 사회적 관계, 곧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근거로 리차드 M. 도슨이 한국 민속학 연구의 특징으로 지적한 역사복원적이라는 점과 민족주의적인 관점이 강하다는 점을 든다. 이를 증명하고자 그는 한국 민속학의 선구자라고 평가를 받는 최남선의 민속학 연구에 주목한다. 최남선의 민속학 연구가 정치·사회적 및 지적인 상황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지성사의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한국의 민속학이 “일본 민속학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종래의 민속학계 주장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먼저 필자는 최남선이 살았던 정치·사회적 배경을 분석한다. 그가 가장 크게 주목하는 것은 3·1운동 이후 실시된 1920년대 일제의 ‘문화동화정책’이다. 이 기간에 일련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문화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기 때문인데, 필자는 조선 민속학 연구가 바로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라 본다. 당시 그를 통해 탄생한 문화민족주의자들 사이에 “조선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조선의 전통문화 위에 서구의 가치와 제도를 접목시킨” 신문화의 창출이란 목표가 있었는데, 그 결과 조선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민속학 연구가 태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언급처럼 이때는 일제의 문화동화정책이 실시되던 시점으로, 그 정책과 민족문화운동의 상관관계를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 ‘공산주의 민족주의자’는 “체계적으로 사정없이 탄압제거”한 반면 ‘문화민족운동가’는 너그러이 대했는지, 또 왜 ‘문화민족운동가’의 대다수는 이후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는지 더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렇게 한국의 민속학 연구가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했다고 전제한 뒤, 일본 학자들의 조선연구와 그에 대한 대응논리로 민속을 연구한 최남선을 대조하여 살펴본다. 당시 일본에는 크게 두 가지 학적 연구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에도시대에 일어나 메이지시대까지 전해진 국학자 집단의 연구로, 이들에 의해 ‘日鮮同祖論’이 확립된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사학자에게 훈련을 받은 신진 사학자들로서 과학적 방법을 중시한 동양사학자 집단이다. 이들은 국학자 집단의 일조동조론은 부정하나, 조선의 사회와 역사를 ‘타율성’과 ‘정체론’으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최남선은 이러한 연구에 대한 반발로 폭넓은 대응논리를 연구한다. 필자는 그 가운데 최남선의 대표적인 민속학 연구 분야라고 볼 수 있는 「불함문화론」, 단군에 관한 논문들, 「살만교차기」를 선택하여 ‘지성사적인 측면’에서 상세한 분석을 펼친다.

최남선은 당시 인류학계에 유행하던 ‘Age-area 가설’을 활용한 「불함문화론」을 통하여 첫째, 조선 문화는 “중국과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별개의 문화라는 점”을 역설하여 조선인의 자주성을 고양하고, 둘째, “불함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조선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일선동조론을 반박하는 동시에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그리고 단군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는 “조선 민족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인 단군을 내세워 조선의 독자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일선동조론을 부정한다.

마지막으로 최남선은 그러한 성격의 단군을 무당과 연결시킨다. 필자는 최남선의 그 논리에 무속은 외래종교가 아닌 조선 고유의 사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 일본의 神道처럼 “민족의 구심점을 찾아서 강력한 민족접착제를 형성”하려는 점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도는 최남선이 ?계명?이란 잡지에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와 자신의 「살만교차기」를 함께 실은 이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필자의 주장처럼 한국 민속학이 일본 민속학의 영향이 아니라 일제의 영향으로 민족문화의 자각에 따라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왜 이렇게 최남선의 논리 전개가 일본의 그것과 유사한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앞서 말했듯이 “사회적 관계의 긴밀성” 때문에 “민속학의 학문적 유사성”이 보이는 것뿐일까? 필자의 사회적 관계의 긴밀성에 대한 논의는 납득할 만하나, 과연 민속학의 학문적 유사성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인지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일본과 한국의 초기 민속학이 유사하다는 사실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한국 민속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논리를 비약하고 있는 듯하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의 식민통치 등의 이유로 일선동조론이나 타율성, 정체론과 같은 논리가 필요했고, 조선은 그에 저항할 대응논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본다면 필자가 주장하듯이 한국 민속학은 일본 민속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필요에 따라서만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최남선의 논리 전개를 통해 보이듯이, 오히려 한국 민속학은 일본 민속학의 논리를 끌어다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두 나라의 민속학은 제국주의와 민족국가의 형성이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탄생한 ‘도플갱어’가 아닐까.

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에 일제가 끼친 영향은 참으로 거대하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사회에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이 그렇듯이, 일본의 민속학이 아닌 일본의 영향으로 한국 민속학이 태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본 민속학이 한국 민속학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이 한국 민속학의 정립과 발전을 위해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가 최남선의 민속학 연구에서 이어진 한국 민속학사의 흐름 ―민족주의적 관점, 무속을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보는 점― 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그때 형성된 물길이 해방 이후 그대로 한국 민속학으로 이어져 이론적 문제점을 낳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화의 이면에는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함께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은 그 두 측면을 살펴야 하는데, 최남선 이후 한국 민속학의 경우 필자의 지적처럼 특수성에만 빠져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최남선이 역사문헌적 방법론을 중시한 점이 야나기다 구니오의 주장과 다른 독특한 점으로서 꼽고 있는데, 일본 민속학의 방법론이 진짜 그런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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