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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가서 보면 다들 입고 일하는 옷이 후줄근하다.

특히 할머니들 옷은 몸빼로 통일이라도 한 듯하다. 


몸빼. 그 바지는 어떤 바지인가?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작업복으로 보급이 된 옷이 아니던가.

그 옷이 100년 넘게 계속 작업복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농작업복에 패션을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미국에서는 그러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을 위한 농작업복이 팔리고 있다. http://redantspants.com




우리도 이런 걸 참고하여 하나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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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사람과 밥쌀과 떡쌀

1
오곡은 우리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는 귀중한 물품이올시다. 그 가운데도 쌀이라는 것은 우리 동양 사람의 피가 되며 살이 되며 또 뼈를 굵게 하는 물품입니다. 일시도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것이올시다.
쌀에는 메벼쌀과 찰벼쌀이 있으며 또 같은 메벼쌀에도 논에서 나는 것과 밭에서 나는 것과의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어느 것을 물을 것 없이 메벼쌀이라면 다 우리 동양 사람들이 상식으로 하고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2
그런데 우리 사람들이 왜 '쌀'이 아니면 살지 못한다 할까?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그 목숨을 이여갈 만한 건강을 암보하여야 되며 건강을 암보하는 데에는 담백질이라는 것, 전분이라는 것과 같은 영양분을 날마다 가지지 아니하면 살지 못한다는 데 '쌀'은 이러한 영양분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쌀을 먹는 것이오. 또 이것을 먹지 아니면 죽게 되는 것이올시다.

3
먹는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그러면 밥 먹는 밖에도 '반찬'이라는 것은 왜 먹어야 될까? 이것은 사람이 그 몸의 건강을 충실하게 암보하는 데는 영양분이 필요함과 동시에 그 영양분은 아무렇게나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분량'이 서로 '배합'이 잘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령 사람의 겅강에는 담백질을 하나를 가지게 되는 때에 전분은 넷이나 다섯쯤을 가져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쌀'이 가지고 있는 성분 가운데는 담백질보다 전분이 너무도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쌀밥 먹는 사람은 그 영양분의 배합을 적당히 취하기 위하여 쌀밥을 먹는 밖에 또 장국 김채 깍둑이 콩나물 찌개 물고기 즘생고기 닭의알 두부와 같은 담백질이 많은 것을 부식물로서 먹지 않으면 안 될 필요가 생기는 것이올시다.
문명한 나라 사람들이 '소젖'을 먹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라 합니다.

4
쌀을 좋은 쌀이라 좋지 못한 쌀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가르켜서 하는 말인가? 이것도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쌀' 그것을 놓고 볼 때 그 쌀의 바탕이 딴딴할지언정 연하지 아니하여야 되며, 그 다음은 무게가 무거울수룩 좋으며, 셋째로 그 빛깔이 반남아 투명하여 광택이 잘 나는 것이래야 좋으며, 넷째로는 그 생긴 모양이 똑바르고 쌀알이 고른 것일수록 좋으며, 다섯째로는 잘 마른 쌀이래야 좋다 합니다. 그러고 이 위에 말한 것과 반대되는 것은 다 좋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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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gri-history.kais.kyoto-u.ac.jp/East-Asian2008/proceedings.pdf



P-1 岩本純明 (도쿄농업대학)

근대 일본의 공업화와 농업 부문


P-2 구자옥(전남대 명예교수), 이은웅(서울대 명예교수), 이병렬(한국 기상청)

한국의 벼농사 재배 및 품종의 변천사 ―근대화 과정을 중심으로


P-3 王思明(난징농업대학 중화농업문명연구원)

한중일 농업 현대화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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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중・후 농업 수리시설의 부진과 유지관리를 둘러싼 藩과 村 자치 -山形五堰을 사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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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3 黄世瑞(화난사범대학)

민속풍정과 중국 전통농업 사회


AII-1 朴錫斗(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농업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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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농업 현대화 과정 속의 과학과 교육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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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 소주밀식小株密植 정책과 농민의 소식疎植 관행 ―역사생태적 지평에서 본 농업기술의 비교문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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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에 소재한 귀농운동본부의 실습 논. 여기만 총 600평이다. 이 정도만 해도 까마득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주르륵 늘어서서 그렇게 보이지, 기계로 하면 금방이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보(3000평)-단보(300평)-무보(30평)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면적 개념으로, 일본이 서양의 면적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생긴 단위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섬지기-마지기-되지기가 있었다고 넘어가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지기의 경우 1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로 지역마다 다르며, 특히 기름진 농지일수록 작물 사이의 간격을 드물게 심고 척박할수록 간격을 배게 심는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실제로 논의 경우 150~300평을 1마지기라 하고, 밭은 100~400평까지를 1마지라고 본다. 지역의 토질과 비옥도, 경사도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가 달라지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동네라도 어디는 1마지기에 150평인 반면, 어디는 200평인 사례도 있으니 말 다했다. 이렇게 마지기의 평수가 들쭉날쭉하니 정량화, 계측화가 필요한 현대적 토지 개념에서는 죽을 맛인 것이다. 그래서 일제가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부리나케 토지조사사업을 벌였을 것이다. 그래야 근대적 개념의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참고로 민족문화대백과에서 마지기에 대한 정의에는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마지기당’의 면적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논의 경우 전국적으로 한 마지기가 80평·100평·120평·130평·150평·160평·180평·200평·220평·230평·250평·300평 등 12개 유형이 있으며, 이 중 200평을 한 마지기로 적용하는 지역이 전국의 75% 가량이고 150평을 한 마지기로 쓰고 있는 곳은 17%, 나머지 10개 유형은 불과 8%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논의 한 마지기당 면적은 200평이 표준이며 주로 평야부에서 많이 쓰고 있고, 200평 이외의 규모는 산간부나 도서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밭의 마지기당 평수는 전국적으로 30평·40평·50평·60평·70평·75평·80평·100평·120평·150평·200평·230평·250평·300평·400평 등 15개 유형이 있으나 이 중 200평 한 마지기를 사용하는 지역이 전국적으로 43%이며, 100평 한 마지기가 24%, 500평을 쓰고 있는 지역이 9%, 300평을 쓰고 있는 지역이 8%, 기타 11개 유형이 16%의 지역에서 잡다하게 사용되고 있다.

밭에서도 논에서와 같이 200평 이외의 면적 규모를 사용하고 있는 지역은 주로 밭면적 비율이 높은 산간지대나 도서지역이다. 따라서 밭에서도 한 마지기당 사용 빈도가 높은 규모는 200평 규모이나 그 사용 빈도는 43%로서 논의 75%보다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기름진 농지일수록 마지기의 평수가 더 넓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강원도의 평수가 전라도의 평수보다 더 넓은 것인가? 왜지? 왜일까?


그것 때문에 4시간 넘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다.


그 결과, 나의 마지기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처음부터 오류는 농민들의 실제 농사관행과 나의 고정관념의 충돌 때문에 생겼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농민들은 보통 땅이 기름지면 작물의 간격을 드물게 심고, 척박하면 배게 심는 관행이 있다. 그러니까 마지기는 1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로서, 기름진 곳일수록 넓이가 더 넓고 척박한 곳일수록 더 좁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고정관념은 기름진 곳의 마지기는 더 작고, 오히려 척박한 곳이 더 넓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마지기라는 개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 이외의 사람들도 흔히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데, 강원도의 마지기 평수가 호남보다 더 넓으리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지역 안에서도 농지가 처한 조건에 따라서 마지기의 넓이가 달라진다. 그런데 경기도는 몇 평, 강원도는 몇 평, 전라도 몇 평 하는 식으로만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고정관념이 깨지게 된 결정적 요인은 "평야의 마지기가 산간 지역의 마지기보다 넓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였다. "기름진 농지=더 작은 평수의 마지기"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나도 그렇고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투입량이 아닌 산출량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기름지기에 땅이 작아도 많이 생산할 수 있고, 그것이 곧 편리와 효율성이란 관념 말이다.


아직까지도 헷갈리긴 하고 더 자세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긴 한데, 중요한 것은 '마지기'가 "1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를 가리키는 것이지 더 적은 농지로 더 많은 수확을 올리는 넓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뱀다리; 이에 대한 의문으로 <임원경제지> 번역팀의 홈페이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내용이 아주 좋으니 읽어보시길 바란다. 아래 링크를 걸어두었다. 


http://www.imwon.net/?mid=freeboard&comment_srl=5042&category=0&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desc&page=9&listStyle=list&document_srl=6378




마지막으로 임원경제지 연구소의 정명현 소장이 일러주시길, 

건 땅의 마지기가 더 적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수확량을 기주느로 보기 때문일 것 같네요. 수확량 기준은 조선 정부에서 쓴 '결부제'에서 사용한 방식입니다. 마지기는 파종량 기준이므로, 건 땅이 더 넓어야겠죠. 참고로 실록에는 논에는 '마지기'가, 밭에는 '~일갈이'로 구별해서 표현했습니다. 논밭에 모두 쓴 경우는 민간에서 서서히 쓰다가 요즘은 모두 쓰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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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33년도까지의 쌀생산과 관련한 당시 일본인의 논문이 있어 그 논문에서의 그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년도

쌀생산량

(만석)

단보당

생산량(석)

일본반출량

(만석)

반출율

조선내

쌀소비량(만석)

1인당 연간 쌀소비량(석)

일본

조선

1914

1,413

0.952

114

8%

1,299

0.98

0.69

1915

1,285

0.858

221

17%

1,064

1.11

0.72

1916

1,393

0.917

126

9%

1,268

1.08

0.68

1917

1,369

0.895

113

8%

1,256

1.13

0.73

1918

1,529

0.988

206

13%

1,323

1.14

0.68

1919

1,271

0.826

280

22%

  991

1.13

0.73

1920

1,488

0.957

199

13%

1,290

1.12

0.62

1921

1,432

0.935

339

24%

1,094

1.15

0.66

1922

1,501

0.964

314

21%

1,188

1.10

0.65

1923

1,518

0.979

405

27%

1,112

1.16

0.63

1924

1,322

0.839

486

37%

  836

1.12

0.60

1925

1,477

0.932

475

32%

1,003

1.13

0.52

1926

1,530

0.964

578

38%

  953

1.13

0.53

1927

1,730

1.080

646

37%

1,084

1.10

0.52

1928

1,351

0.890

701

52%

  650

1.13

0.54

1929

1,370

0.840

578

42%

  792

1.10

0.45

1930

1,918

1.154

516

27%

1,402

1.08

0.45

1931

1,587

0.948

903

57%

  685

1.13

0.52

1932

1,635

0.995

748

46%

  887

1.01

0.41

1933

1,819

1.072

789

43%

1,031

1.10

0.41

 

자료에 의하면 친일반역사상의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단위면적당 쌀의 생산량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왜놈들은 늘어나는 조선의 농민들을 더 노동집약적(!) 농사를 시켜

묵힌땅의 개간 등으로 쌀 농사가 가능한 논을 더 많이 확보했다고 합니다.

물론 조선인의 땅이 아니라 왜놈들의 땅으로 말입니다.

이렇게해서 더 늘어난 농지로 인하여 초기에 비해 좀 더 생산된 쌀을 모조리 일본으로 가져갑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이나 왜놈들이 가져갑니다.

 

친일반역사상에서는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여 농민들이 돈벌었다는데 헛소립니다.

일제식민지하에서 농사지어서 돈벌었다면 추운 만주땅에 농사지으러 떠나는 사람들은 바보였을까요?

 

이 시기를 지나면서 조선인 자작농의 숫자는 줄어들고 소장농은 늘어만 갑니다.

일하는 농민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조선내 쌀 소비량을 보면 조선인들이 1년간 소비하는 쌀의 총량은 더 줄어듭니다.

마찬가지로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의 급격히 감소 합니다.

 

biin님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이 넘쳐났다고 주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친일반역자들을 제외하고는 굶주릴 수 밖에 없었고

갈수록 소작쟁의가 늘어나는 이유가 통계자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 통계에서 빠진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 초기에는 관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소규모 자작농들의 수확과 소비가 빠져있습니다.

이때 빠진 통계는 나중에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됩니다.

실제로는 변화가 없어도 통계상으로는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음 그래프는 일제시대 경지면적의 증가에 관한 것입니다.

총독부의 통계연보에 나오는 수치에 의한 경지면적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경사도가 급합니다. 경지면적이 82%가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아주 완만한 증가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불도저로 산을 깍아서 논밭을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급작스레 늘었을까요?

1918년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는 해 입니다.

 

친일반역사상가들은 이것을 토대로 일본의 도움으로 토지가 이만큼 늘었다고 개소리를 합니다.

인구증가에서도 마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초기에는 왜놈들이 조선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장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토지나 인구에 있어서 누락분이 많았던 것입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토지대장에 등록되면서 통계수치만 늘어난 것입니다.

엉터리 통계로 경지면적을 일본이 늘려줬으니 고마워하라고 헛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며칠전 신문에 우리나라에 토지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주인없는 섬 1419개가  토지대장에 등록시킨다고 합니다. 이중에는 6만평이나 되는 섬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 섬들을 등록하면 없는 땅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되나요?

 

다음으로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조선의 인구가 2배나 늘었다는 거짓주장을 박박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근대적인 인구조사가 없었습니다.

호패제도가 있었기는 하지만 이는 군역 등 을 위한 것이지 인구통계 등이 목적일 수 없었고

관을 피해 살아가는 하층민들은 대량으로 누락될 수 밖에 없었기에 정확성을 믿기가 힘이듭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후 년말상주인구를 매년추계치로 작성하였습니다.

변동사항을 바탕으로 조사하는 것이며, 조선총독부가 초기에는 전국적인 수준에서의

행정장악력이 부족하였기에 누락된 인구가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1925년에 이러러 근대적인 인구조사인 조선국세(國勢)조사를 하기시작하면서 정확성을 갖추게 됩니다.

 

 

년말상주인구

(추계치)

5년간 증가율

국세조사

1910

13,128

 - 

 

1915

15,957

22%

 

1920

16,916

6%

 

1925

18,543

10%

19,020

1930

19,685

6%

20,438

1935

21,248

8%

22,208

1940

22,954

8%

23,547

단위 천명

 

표에서와 같이 2925년이 되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지 15년이 지난뒤에도 
두가지 인구조사는 5%에 가까운 오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1910년에서 1915년까지 5년 사이에 무려 22%라는 엄청난 인구 증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인구가 5년사이에 22%가 증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일제강점 초기에 전국의 방방곡곡을 세밀하게 장악하지못한 일본인들이 초기에 잘못된 인구총계를 만들었고 5년뒤에는 1010년의 기록에서 빠진 인원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 친일반역사상을 선동하는 자들은 일제강점 초기의 부실한 data를 이용하여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인구가 2배나 늘었으니 일본에게 감사하라는 개소리를 합니다.

 

초기 data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의 일제강점 초기의 인구를 여러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년도

석남국

김철

권태환

(신용하)

국세조사

1900

 

 

17,082

 

1905

 

 

 

 

1906

 

14,733

 

 

1910

15,474

16,309

17,427

 

1915

16,484

17,027

17,656

 

1920

17,532

17,629

18,072

 

1925

18,797

19,020

19,020

19,020

1930

20,218

20,438

20,438

20,438

1935

21,890

22,208

22,208

22,208

1940

23,341

23,547

23,547

23,547

1944

24,917

25,120

25,120

 

인구증가

61%

54%

44%

 

단위 천명, 2001년 길인성의 논문에서 재인용 함.

석남국 : 1966년 일본 논문

김철 : 1965년 일본 논문

권태환, 신용하 : 1977년

 

일제하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인구조사인 국세조사와 함께 검토해봤을때 
석남국의 주장은 사실과 가장 많이 떨어진 것입니다.

 

김철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54%의 인구증가가 있었고

권태환의 주장에는 44%의 인구증가가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요즘은 학계에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구변화를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은 권태환과 신용하(유명하신분이죠)의 추정치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식민지시기의 인구증가가 2배라는 것은 엉터리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반역선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강점을 찬양하기위해 엉터리 수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2UG8&articleno=11827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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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ニ於ケル主要作物分布ノ狀況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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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이 지금과 같은 자리(수원)에 세워진 것은 그 역사가 1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슬픈 역사이긴 하지만 그걸 말하려면 일제를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대한제국에게 농업 연구를 권장한 결과, 1906년 이곳에 권업모범장이란 기관을 설치한다.

그게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였는가는...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로 이 기관이 예속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때부터 일제는 자신의 발전한 농법을 조선에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힌다.

'모범적인 농업을 권한다'는 기관의 이름에서 바로 그것이 잘 드러난다.

 

지금도 농촌진흥청에 가면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농촌진흥청에 들어가 왼쪽으로 보면 이러한 비석이 서 있다. 잘 보면 이는 이정표임을 알 수 있다.

이쪽 건물은 권업모범장, 뒤쪽에는 다른 건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건 대정 oo년이라 새겨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하는 상징물인지 모르겠다. 

 

 

일제시대에 세워진 연구동. 아직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쓰는 걸 보면 참 일본놈들 무섭다. 

 

 

일제시대 건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원래 입구 쪽은 거의 쓰지 않는다. 앞으로 큰길이 뚫려 그곳으로는 통행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건물 안 계단에서도 옛 향기를 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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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3월 4일. 오늘은 일본에서 이하라 히로미츠井原宏光(75) 씨가 선감도에 가려고 한국을 방문한 날이다. 이하라 씨는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난 재한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선감학원이란 곳에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 왔는데, 그때 그의 나이 8살, 우리 나이로 9살이었다.

 

이하라 씨를 만나는 길에 중앙역 옆 안산천 위로 지나는 전철로.  

 

 

선감도는 조선시대에는 국유 목장으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그곳의 원주민들은 반농반어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을 게다. 이러한 곳이 변모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조선감화령이 발표된 다음부터였다. 조선총독부는 1923년 최초로 원주에 영흥학교라는 감화원을 세우고, 1938년에는 전남 무안군 고하도에 목포학원을 세웠다. 이곳의 목적은 8~18세의 부랑아, 고아, 넝마주이, 불량해질 우려가 있는 청소년들을 수용하고자 해서였다. 그렇게 선감도에 선감학원이 세워진 것은 1942년 5월 19일이었다. 이하라 씨는 원산 원흥학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이곳 선감학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국민학교를 오사카의 한곳에서 다니다 그를 따라왔다.

 

조선감화령의 의도와 목적은 어찌되었든, 결과만 놓고 보면 이렇다. 사회복지란 개념조차 없었을 당시 거리의 부랑아나 고아는 총독부 당국의 골칫거리였을지 모른다. 당시는 군軍 체제. 지금도 군대는 그때 배워서 깔끔하게 잘.. 이란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시대, 일제도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한다. 흠집은 없어야 하는 것, 그런 것은 없애야 하는 것. 자연스레 지우고자 했을 테다. 조선감화령이란 법령 자체가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테고...

 

그래서 선감학원 개발이 시작되었다. 당시 90가구 정도가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집마다 농지의 크기에 따라 보상금의 액수는 달랐다고 한다. 아무튼 평균으로 따지면 한 집에 3만원, 당시 땅값으로 따지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멀찍감치 떨어진 곳에 2000평 정도의 땅에 집을 구하는 값. 그런데 수치로  따져 그게 다일까? 

액수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용산참사가 돈 때문에 일어났을까?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결과만 놓고 볼 수밖에... 보상금이, 보상금으로 사람의 삶을 계산할 수 있는 경우가 있었던가?

더구나 그 당시는 돈으로 평생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라고 받는 게 지금보다 더 쉽진 않았을 게다.

 

선감학원에 부랑아라는 청소년들이 들어왔단다. 그 아이들을 이곳으로 모은 이유는 떠도는,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들을 자급자족시키려고 해서였단다. 그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농사 교사가 있어도, 지금도 그렇지만 청소년들 교육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명목이 좋아 부랑아들을 교육시킨다는 목적이었지, 난 그게 아니라고 본다. 이곳은 수용소였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다. 아이들을 모아다가 두드려 잡으려는 목적. 왜, 김춘삼이 이런 곳에 잡혀올까 걱정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역사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이라 해야 할지도... 그런데 묻고 싶은 건 그럼 역사는 무엇인가? 사료와 자료와 문서로 확립할 수 있는 무엇? 웃긴 소리일지 모른다.

 

일대에 선감학원에서 죽은 청소년들의 무덤이라고 설명하시는 홍 할아버지. 

 

 

함께 돌아보시는 이하라 상과 홍 할아버지. 이 일대에 대략 400여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단다. 그 가운데 이 분이 기억하시는 조선인 아이의 무덤은 50기 정도.

 

 

난 무덤을 보고 놀랐다. 이런 곳이 있다니. 아무도 무덤을 그 뒤에 수습하지 않았다. 물론 모두 고아에 넝마주이니 누가 수습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조선시대에 고아는 그래도 동네에서 책임지게 했다. 고아만이 아니라 과부, 노인 등을 책임지게 했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으로 보면 복지국가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오히려 미친 나라가 되었다.  

 

 

 

무덤마다 나무가 자란다. 나무는 사람이 죽으면 한 그루씩 자라게 하는 것인가? 나도 죽으면 나무 한 그루가 될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알아보니 볼록한 곳이 자라기 좋아서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사죄하러 왔다고 하는 이하라 씨.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사죄하는가? 이런 한 분이 사죄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 거시기... 그것만큼 바보 같은 협정이 어디 있는지... 철두철미한 군바리정신에서 가능했을까? 박정희의 빛이 큰 만큼 그늘도 그렇다. 그건 경중으로 따질 수 없는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지만 기억하는 듯하다. 그게 중요할지도 모른다. 국민성이니 뭐니 하건, 배를 곯지 않는다는 논리. 그게 중요했을지도... 더 창피한 일은 해방이 된 이후 이곳이 전쟁고아로 다시 채워졌다는 이야기. 배운 대로 한다는 그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이어졌으니...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보다, 그들이 제대로 사죄하는 일. 물론 용서가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럼 성인이 될지도... 아무튼 이하라 씨가 일본인의 사죄에 앞장선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마 괜시리 자기 어렸을 적 마음에 쌓은 죄책감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애초에 그만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떤 마음이셨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또 만나 뵙고 얘기할 수밖에.

 

 

잡목이 무성한 곳. 이곳에 빽빽하게 무덤이 자리하고 있단다. 나무 하나에 사람 하나, 그렇게 따지면... 눈물이 난다. 

 

일대를 대략 둘러본 다음 질문 시간을 가졌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하여 시간을 지냈다.

그런데 일본인 이하리 씨는 사죄를 위해 왔다. 그런데 조선인 홍 할아버지는 당시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왔다. 아버지를 부정하면 본인의 삶 자체도 무너지기 때문일까? 당시 선감학원 학생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대부분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로 도망가다가 죽었지, 세간의 소문처럼 맞아 죽거나 한 사람은 별로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과연 없었을까? 군사정권 시대를 지나면서 하나둘 밝혀지는, 소문으로 전해지던 일들이 사실로 밝혀지는 역사를 보낸 나로서는 믿을 수 없다. 그런 말씀조차 역사의 하나겠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없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삶의 한 단면이지 않을까? 아무튼 지주보다 마름이 더 그렇다는 말이 실감이 된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악랄했다는 모씨의 소설 구절이 다가오고, 조선인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 더 가슴 아프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게 가슴 아프고...더럽다.

 

간담회 시간에 질문을 주고받았다. 어느 분이 선감학원과 교관 자제들의 학교를 하나로 보았다. 난 그게 아니란 걸 알려야겠기에 질문을 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선감학원 원생과 학교를 같이 다니신 건가요? 또 일본인 선생님께서는 산해진미와 낙원이라고 선감도를 표현하셨는데 어떤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요?

 

그래서 얻은 답. 선감학원과 대부국민학교 선감도 분교장은 다른 학교다. 자세히 말은 안 해 주셨지만, 선감학원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그 내용이 계속 언급되는 것, 힘들게 하여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 이런 사실을 입에 올리시기 꺼려하셨다. 그 말씀 중간 중간에 있는 내용으로 이런 걸 상상할 뿐.

 

더군다나. 일본인 그분과 함께 당시에 1942~1945년 이 당시 하루에 세 끼를 꼬박꼬박 흰쌀밥을 먹었다는 것.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무리 선감도에 농지가 넓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분이 함께였다면 좋겠다.

 

일본인의 사죄는 받자. 우리가 왜 사죄를 받아야하는지 잘 알자. 그리고 제대로 사죄를 하라고 하자. 헌데 아직 일본인은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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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군산 곡물검사소의 모습.

 

일본으로 수출하는 미곡을 검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1910년 이전부터 제기되어, 1909년 목포상업회의소가 독자적으로 수출하는 매조미쌀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총독부도 미곡을 검사해야 한다고 인정하여, 1913년 6월 각 도의 장관에게 통첩하여 지방행정기관이 감독하여 상업회의소 또는 곡물동업조합이 수이출 미곡을 검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부산, 진남포의 3개 상업회의소와 평택, 대구, 김천, 왜관, 경산, 청도의 곡물동업조합이 매조미쌀 검사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총독부의 미곡검사는 대일 미곡 수출의 확대와 더불어 계속 강화되었다.

그러나 검사가 통일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사가 끝난 미곡을 가지고 부정행위를 하거나 수송하다가 미곡이 손상되는 일이 발생되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시장에서 조선 쌀의 상품 가치가 떨어져, 조선총독부는 1932년 9월 24일 「조선곡물검사령」을 제정하여  1932년 10월부터 국영검사를 실시하였다. 새로 시작된 국영검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종전에 도지사의 권한에 따라 지방비로 실시하던 곡물 검사를 총독의 권한에 따라 전국 통일적인 검사로 전환하였다. 이를 위해 총독부는 1932년 9월 29일 「조선총독부 곡물검사소 관제」를 공포하고 서울에 곡물검사소 본소를 설치하고 인천, 군산, 목포, 부산, 진남포, 원산의 6개 항구에 지소를, 그리고 그 외 지역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② 종전에는 매조미쌀 또는 흰쌀을 도내에서 이동할 경우 검사가 필요 없었는데, 새로운 검사령에서는 총독이 지정하는 곳에서, 또는 지정하는 곳을 거쳐 반출할 경우 반드시 곡물검사소의 검사를 받도록 규정하였다.
  ③ 검사관할구역을 종전에는 행정구역에 따라 구분하여 총 12개 도명道名 기호를 사용하였으나, 국영검사제도에서는 쌀의 생산 상태, 거래상권지역 등을 고려하여 진남포, 인천, 군산, 목포, 부산, 원산의 각 항을 중심으로 전국을 6개 경제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검사미에는 각각 정해진 검사소 기호를 표기하도록 하였다.
  ④ 품질, 건조가 불량한 미곡, 생산연도가 다른 쌀을 혼합한 미곡, 또는 적미·돌·흙·피粺·청미靑米·사미死米 등이 규정을 초과한 미곡, 그 외 용량, 중량, 포장 등 기준 조건에 미달하는 미곡은 수이출을 금지하였다.
  ⑤ 종전에는 돌을 제거한 미곡에는 돌이 없다는 표시를 하여 그렇지 않은 미곡과 구별하였는데, 새로운 검사령에서는 이에 대해 더욱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여 돌이 섞여 있을 경우 수이출을 절대 금지하였다.
  ⑥ 매조미쌀은 1, 2, 3, 4, 5등급, 흰쌀은 1, 2등급으로 구분하고, 그 이하의 등급은 불합격으로 규정하여 불합격품의 수이출은 금지하였다.
  ⑦ 검사에 합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검사 후 일정 기간이 경과한 것, 또는 병충해, 기타 피해에 의한 손상·변질한 것, 포장이 손상된 것, 포장을 바꾼 것, 검사 증명 도장·검사기호 등이 없는 것 등은 다시 검사를 받도록 하였다.
  ⑧ 같은 지소, 같은 등급품이라도 종종 가격이 다른 것이 있어 검사등급, 검사소 기호 이외에 품종에 따른 특별표기를 더욱 확고히 실시하였다.


  한편 1934년 10월에는 「조선 인籾 검사규칙」을 제정하여 벼의 희망검사를 실시하였다. 벼 검사는 먼저 1년 동안의 희망검사로 벼 약 400만 가마에 대해 실시된 후, 1935년 8월 6일자로 「곡물검사령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강제검사로 전환되어 매조미쌀, 흰쌀과 마찬가지로 지정 지역을 통과하는 반출 벼를 검사하고, 그와 함께 두메에서는 지주의 벼 또는 소농의 공동 판매 벼 등에 대해서도 희망검사를 병행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미곡검사 강화로 품질, 조제, 포장 등이 크게 향상되어, 일본 시장에서 조선 쌀의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곡물검사의 강화로 인한 이익이 지주와 곡물상, 중매인 등에게 집중되고, 소작인에게는 오히려 미곡검사 규격에 적합한 소작미 요구 등의 부담만 전가되어 새로운 소작문제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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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을 기다리는 학도병.

그의 표정이 어둡고 무겁다.

그 마음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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