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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사를 읽어보면, 국산 농기계가 안 팔리는 건 업체들의 잘못이 크구만 왜 궁시렁거리는지 모르겠다. 

1~2년 쓰면 쉽게 고장나고, 작업도 일제에 비해 제대로 못하니까 외면을 받지.


자동차와 관련해서도 이 기사와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국산은 가격 대비 옵션이 풍부해서 좋지만 기본적인 성능이 좀 떨어지고, 일본 자동차는 가격이 비싸서 그렇지 잔고장도 없고 기본적인 성능이 좋다는 이야기 말이다.


아무튼 국내 농기계 업체들이 좀 제대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http://m.auto.daum.net/review/newsview.daum?newsid=MD20160502113603499&pag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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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순천의 농업 경제


1.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


조선은 강화도조약(1873)으로 강제 개항되어, 각 항구를 통하여 침투한 외국 상품 경제는 봉건적 모순과 위기에 싸인 조선 경제를 급격히 붕괴시켰다. 그에 따라 식민지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1894)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으로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일제는 전형적인 부등가 교환 방식을 통해 조선에서 쌀, 콩, 소가죽 같은 원료를 값싸게 수입하고, 석유와 광목 같은 공산품을 비싸게 수출했다. 이처럼 조선 경제는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하지만 지배층은 권력 투쟁에 눈이 어두워 새로운 사회 개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농업 경제는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제1기는 조선에서 지배와 착취를 준비한 기초 공작 단계로, 1906년 통감부 개설부터 1918년 11월 토지조사사업 완료까지다.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 농민의 농토를 강탈하여 근대 무산자 계급을 창출하고, 그들의 손안에 토지를 집중한 시기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식량이 모자라 겪은 고통과 일본의 쌀 소동(1918)의 영향으로 식량 자원의 중요성을 깨달아, 조선총독부가 조선에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산미증산계획을 수행한 1919년에서 1929년까지의 시기다.

제3기는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온 자본주의 국가를 휩쓸어 일본의 상공업 자본주의는 물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조선의 농촌 경제가 파탄을 맞았던 시기다. 조선으로 파급된 경제 공황은 열악한 농촌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일본, 만주, 사할린 등으로 이주했고, 소작쟁의는 심각한 사회․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부족한 식량 해결, 춘궁 농가 퇴치 및 농가 수지 균형을 도모한 1932년부터 1939년까지를 제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4기는 가혹한 전쟁 부담 시기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다.



 

1) 토지조사사업의 전개와 내용


일본은 명치유신(1868)을 통하여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급격하게 받아들이고, 근대화와 군사 공업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여 신흥 자본주의를 형성했다. 일제는 신흥국가로서 그들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빈약한 자본축적을 촉진하기 위해서, 더 값싼 식량과 공업 원료를 확보해야 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봉건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길을 선택했다. 일제는 상품 시장 개척과 식민지 침략을 도모하고자 군사적․침략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조선의 봉건적 경제 체제를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본은 이미 1905년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1910년까지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준비 공작을 마친 상태였다. 그들의 첫 번째 수탈 목표는 토지였으며,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토지에 근대적 사유 제도를 확립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상업 자본이 조선에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일본인의 토지 소유에 주된 장애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법률적으로 금지되었다. 둘째, 토지 사유권이 관습상 확립되어 있었으나, 법률로 보장된 일물일주一物一主의 배타적 사유권이 확립되지 않았다. 셋째, 토지의 상품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 일본인의 토지 매수에 대하여 조선 농민뿐만 아니라 봉건적 권력자와 양반까지 완강히 반항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 상업 자본의 토지 점유는 점차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조선의 법률을 어긴 것이라 법률적으로 보장받지 못하여, 토지 매매와 점유의 합법화가 강력히 요청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토지 소유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과 더불어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토지조사사업을 서두른 또 다른 이유는,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곧 일본은 조선총독부 특별 회계의 끊임없는 팽창을 충당하기 위하여 조세수입을 정비함으로써 총독부의 세원稅源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미곡의 일본 수출을 위해서는 토지개량 및 토지이용의 자유가 필요했다.

일본은 1906년에 조선정부를 강요하여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을 발포하게 하여, 일본 상업 고리대 자본에 종속된 부채 농민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토지조사사업은 호적 정비와 함께 토지 등기 제도를 도입하여, 토지의 소재, 지목, 지번, 지적, 소유자를 조사하고 지적도를 작성해 각 필지의 위치, 형상, 경계를 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가(임대가격), 지형, 지모地貌를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에 앞서 벌써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하여 7,745명의 일본인이 이미 토지를 소유했고, 그들의 토지 소유 면적은 7만6,935정보에 달했다. 결국 이때는 전 단계에서 강제 진출하여 조사한 토지를 총독부에 ‘신고’ 또는 ‘통지’하고 토지대장 등 각종 장부를 맞춰 소유권을 등기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면적

(1910. 6. 현재, 단위:명・정보)

항 목

택 지

산림・평야

소유자수

4,194

 1,141

 1,719

   691

7,745

소유면적

2,203

23,271

36,192

15,269

76,935

출전:권태섭, ������조선경제의 기본구조������, 1949, 62쪽.


그런데 1894년에 이미 조선 정부도 근대적 측량법에 따른 양전量田을 계획했으나 정변으로 중단된 사실이 있다. 또한 양전을 맡을 새로운 독립 기구로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을 1898년에 설치하고, 미국에서 근대적 측량 기사를 초빙하여 양전 기술을 습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등기 작업을 겸행했으나,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이 심해지며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여 중단되었다.

일제가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의 내용은 토지소유권 조사, 토지 가격 조사, 지형과 지모의 조사 등으로 분류된다. 약육강식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신고주의申告主義에 따라 진행된 토지소유권 조사는 권세가의 단순한 토지 수조권을 근대적 소유권으로 확정하고, 실질적인 토지 보유자인 농민의 경작권을 박탈했다. 그밖에 많은 역둔토驛屯土, 궁장토宮庄土 등의 국유지가 총독부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 결과 봉건 계급 대 농민의 관계는 지주 대 소작농 관계로 급전했다. 이처럼 봉건적 소유 관계가 근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로 바뀌었으나, 그것은 종전의 수조권자가 수조하던 절반 공납을 절반 소작료로 재생시켰고, 이로써 반半봉건적 소작 관계를 창출했다.

다음 표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뒤의 소작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은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자작 겸 소작농의 감소(13.5%)가 뚜렷하다. 소작농화 추세는 1913~1917년에 연평균 39.5%이던 것이 1939년에는 55.7%로 16.2%나 급증했고, 여기에 자작 겸 소작농을 합하면 무려 81%에 이fms다.


일제시대 조선 농민의 소작화 경향 (단위:천호・%)

5개년 평균

자작농

자작 겸 소작농

소작농

1913~1917

555

(21.7)

991

(38.8)

1,008

(39.5)

2,554

(100.0)

1918~1922

529

(19.8)

1,051

(39.2)

1,098

(41.0)

2,678

(100.0)

1923~1927

529

(20.2)

920

(35.1)

1,172

(44.7)

2,621

(100.0)

1928~1932

497

(18.3)

853

(31.5)

1,362

(50.2)

2,712

(100.0)

1933~1937

547

(19.2)

732

(25.6)

1,577

(55.2)

2,856

(100.0)

1939

539

(19.0)

719

(25.3)

1,583

(55.7)

2,841

(100.0)

    비고:괄호 안은 비율임.  출전:鈴木武雄, ������朝鮮の經濟������, 조선총독부, 1944, 246쪽.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지주 상황을 보면 다음 표와 같으며, 조선인은 100정보 이상 규모와 200정보 이상 규모가 다 같이 줄어들고 있다. 특히 200정보 이상 규모에서 조선인은 26%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일본인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제시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지주 변화 추세 (단위:명)

연 도

  구 분

1919

1925

1931

1936

100정보 이상

조선인

360

290

319

336

일본인

321

561

361

370

200정보 이상

조선인

186

45

49

49

일본인

169

192

187

191

    출전:주봉규, ������한국농업경제사������, 선진문화사, 1992, 208쪽.


1928년도 순천군의 일본인 농업경영자 조사 실태를 보면, 서원행태랑栖原幸太郞은 1914년 3월에 농장을 설립했다. 그가 소유한 경지면적은 밭 70정보, 논 20정보였다. 업종은 보통 농사였으며, 영농 방법은 소작이었다. 자하선농사滋賀鮮農 주식회사는 주식회사 형태로 경영했고, 밭은 300정보, 논은 100정보로 전자보다 훨씬 많은 400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영농종별은 보통 농사였으며, 영농 방법은 소작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이들 말고도 순천에는 100정보 이상의 조선인과 일본인 지주가 46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유 면적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순천군 일본인의 대지주 현황 (단위:정보)

구 분

  지 주

소유지 면적

영농종별

영농방법

창립시기

서원행태랑

 70

 20

 90

보통농사

소 작

1914년 3월

자하선농주식회사

300

100

400

보통농사

소 작

불 명

출전:조선총독부, ������朝鮮の物産������, 1927, 272쪽.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농민을 과소농화하고, 반봉건적인 소작농으로 변화시켰으며, 고율의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조건 때문에 급격하게 이농이 늘고 농민층이 빠르게 양극으로 분해되었다. 당시 조선 농업의 실태는 수도작의 경우 단보당 수확량이 현미 1~1.5석, 대맥은 1.5석, 소맥은 1석, 대두는 1~1.5석 안팎으로 일본의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증산할 수 있는 조선 농업, 특히 전남 지역을 미곡과 면화의 생산 기지로 만들려는 일제에게 토지는 야욕의 주요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1904년 간행된 ������조선농업론������에는 전남의 경지면적이 14만7,342결로, 전국 총면적 100만4,066결의 14.7%를 차지하고, 국가 재정의 17.9%를 부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토 수탈로 시작된 일본의 침략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10년 6월 현재 일본인 토지 소유자 7,745명이 토지 7만6,935정보를 소유했다. 특히 1908년 자본금 1,000만 원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10년에 1만1,035.5정보, 1920년에 7만7,297.1정보, 1930년에 무려 10만5,336.8정보를 소유하게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의 증가 추이 (단위:정보)

연 도

기 타

합 계

1910

 8,643.8

 2,300.6

  91.1

 11,035.5

1920

51,149.7

19,405.1

6,743.0

 77,297.8

1930

46,682.5

16,994.4

41,709.1

105,386.0

1931

46,584.8

16,887.8

60,092.8

123,565.4

출전: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33.


토지조사사업은 신고주의라는 방법을 택하여 강력한 세력이었던 지주의 수조권을 사유권으로 신고케 하여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소작농의 도지권賭地權은 토지소유권에서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그 결과 지주가 공공연히 도지권의 존재를 부인하고 소작농의 관습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나타나, 소작인들은 도지권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지주에 대항했지만 대부분 도지권 존재의 증거불충분으로 패소했다.

도지권 소유자들은 소송으로는 도지권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는, 도지권을 가진 소작인들끼리 함께 모여서 지주가 도지권을 인정할 때까지 4년 동안 소작료를 불납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자 이제는 지주가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부는 도지권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4년 동안 불납한 그 자체가 도지권을 소멸하게 했다고 판결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도지조합을 조직하여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저항했다. 예를 들면 1917년 대동강 연안의 대동군 남곶면 대이도리와 소이도리 등에서 리별 도지조합이 조직되었고, 1923년에는 연합 도지조합이 조직되어 지주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 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1911년 무렵에는 진주와 고성 지방에서 소작 거부와 불경작동맹 및 농번기 노동력 판매 거부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30년 무렵에는 결의서 및 진정서 운동을 전개했다.

다음 표를 보면 논의 소작료율이 최고 75%에서 최저 30%에 이르고, 밭은 최고 75%에서 최저 20%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이와 같은 고율의 소작료가 가능했던 것은 소작료 구성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작료의 구성 내용이 단순히 지대로만 구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소작료율이 대개 50%이다. 그러나 지대에 토지개량비와 수리비水利費가 들어가고, 종자, 농기구, 비료, 농약 등을 선대하고 그 원리금을 소작료에 포함하면 60~70%로 상승한다. 여기에다 조세 공과금을 포함하면 정조법은 58~90%, 타조법은 50~79%, 집조법은 50~80%에 이른다.


전남의 소작료율 현황 (단위:%)

구 분

 징수방식

최 고

보 통

최 저

최 고

보 통

최 저

정 조

타 조

집 조

70

70

75

50

50

55

30

40

30

60

60

75

40

50

55

20

30

30

출전:조선총독부, ������朝鮮の小作慣行������ 상권, 238~239쪽.




2) 산미증식계획의 전개와 내용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 완수되자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로 확보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1944년까지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수립한 산미증식계획은 당시 일본 경제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농업은 본래 협소한 농지에서 이루어진 영세 소농 체제이고, 1850년대부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자체 농업 생산만으로는 도저히 자급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연평균 소비량은 6,500만 석이었으나 생산량은 5,800만 석이어서 700만 석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여기에다 1918년 8월에는 쌀이 모자라 전국 365곳에서 약탈과 폭동 등 이른바 ‘쌀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겪은 식량난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절실한 당면 과제라고 느끼게 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계획의 목표가, 첫째 조선의 쌀 수요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서고, 둘째 농가의 경제 성장을 통한 반도 경제의 향상에 있으며, 셋째 일본 제국의 식량문제 해결에 있다고 하여 그들의 야욕을 은폐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쌀 증산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한계였으나, 조선은 관개설비灌漑設備가 불안정하여 토지개량사업을 일으키는 데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미곡 주산지였다.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일본의 쌀 자급자족을 실현하는 데 그 주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산미증식계획을 전개한 또 하나의 배경은 일본 국내의 유휴자본을 산미증식계획에 투입함으로써 일본 산업이 직면하고 있던 불경기를 해소하려는 것이었다.

1920년에 수립한 제1차 산미증식계획의 구체적 내용은 단적으로 일본인 투자가들을 지원하되 두 가지 기술적 방법, 즉 경종耕種의 개선과 수리시설水利施設의 확장으로 향후 15년 동안 920만 석의 미곡을 증산한다는 것이었다.

경종 개선은 재배법을 말하며, 미곡 품종의 개량과 비료 증시를 골자로 했다. 그리고 수리시설의 확장은 수리조합의 설치를 통한 저수지의 축조를 뜻하는 내용이었다. 산미증식계획에서 중점을 둔 것은 수리시설 개선이었는데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에 천수답天水沓이 매우 많았던 미작 실태에서 식부 면적의 확보는 수리시설 없이는 곤란했다. 그리고 품종개량과 시비施肥의 효과 역시 수리시설의 개선을 떠나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토지개량사업의 계획안은 향후 30년 동안 총 80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목표로 하되, 우선 제1기(향후 15년)에는 약 42만 정보의 토지개량과 관개 개선을 실시하여 920만 석을 증산하려 했다. 그러나 당초의 기대에 반하여 1925년까지 6개년에 9만 정보를 실시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제1차 산미증식계획이 실패한 것은 공사비로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고, 자금의 이자가 고율이었던 데 원인이 있다. 자금의 이자는 연 9푼 5리이거나 1할 1푼이었다. 당국은 1926년을 기하여 토지개량사업의 축소와 더불어 좀 더 치밀한 갱신 계획을 세운다. 제2차 산미증식계획은 1926년 이후 15년 동안에 기성답旣成畓 19만5,000정보의 관개 개선, 밭을 논으로 만드는 지목변경地目變更 9만 정보, 개간 및 간척지 6만5,000정보, 합계 35만 정보의 토지를 개량하고, 이로써 합계 816만 석의 산미를 증식하려 했다. 이 계획에서는 자금 조달을 기업가에게 맡기지 않고 일본 정부의 알선자금斡旋資金 이른바, 저리 자금을 도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업 예정 자금을 보면 총액이 3억5,162만2,000원에 달하는 거액인데, 그 내역은 토지개량사업에 3억325만 원, 토지개량사업 시행에 따른 총독부 인건비 844만2,000원, 농사개량사업에 4,000만 원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과 농사 개선을 통한 증산 계획에 중점을 두었다. 농사 개선 계획은 품종개량, 퇴비 장려, 적기 파종, 제초, 병충해 방제 등을 전개함으로써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토지 개량 계획은 관개시설의 개선, 지목변경, 개간, 간척 등으로 농지를 확장하여 증산을 기하려는 것이었다. 토지개량사업에서 1925년 착수 예정 면적은 16만5,000정보였으나 완성을 본 면적은 61%인 7만1,000정보에 그쳤다. 그리고 수리시설의 개선과 그 운영을 위해 수리조합 설치에 주력했는데, 1925년까지 조합수 66개소, 몽리蒙利 면적은 7만8,200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농사 개선에서는 우량종자의 갱신과 보급을 위해 각 도청 소재지에 종묘장을 설치하고 채종자採種者에게 보조금을 주어 장려하였다.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여 조선 풍토에 맞는 신품종 개발을 담당토록 하고, 자급비료와 함께 화학비료의 사용도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은 처음부터 민간 자본에 기대했던 만큼 자본의 회임기간回姙期間이 길고, 고율의 소작료로 당초의 계획을 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 1912년 이후의 산미증식 기간에 이루어진 쌀의 생산량과 수출량의 상호관계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쌀 생산고와 수출고 (단위:천석)

구 분

 연 도

생산고

지 수

추출량

지 수

1인당 소비량(석)

1912~1916(평균)

12,302

100

1,056

100

0.7188

1917~1921( 〃 )

14,101

115

2,196

208

0.6860

1922~1926( 〃 )

14,501

118

4,342

411

0.5871

출전:조선총독부 농림국, ������朝鮮の農業������, 1936, 36~39쪽.


1912~1916년의 평균 생산량은 1,230만2,000석, 1922~1926년 평균 생산량은 1,450만1,000석으로 10년 동안 지수 18의 상승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수출은 같은 기간에 105만6,000석에서 434만2,000석으로 지수가 무려 411로 증가하고 있다. 더구나 1인당 쌀 소비량을 보면 1912~1916년 평균 0.7188석이던 것이 1922~1926년 사이에는 0.5871석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산미증식계획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으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 자료라 할 수 있다. 곧 그것이 조선 농민의 소비를 극도로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2차 산미증식계획도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세계 대공황을 고비로 토지개량사업은 정체 상태에 빠졌다. 1937년 말 달성률은 시행 면적 46%, 사업 자금 47%, 작부 면적 43%, 증수량 34%, 그리고 반당 수확량 79%로 부진했다. 미곡 생산은 1920년에는 1,430여 만 석, 1936년에는 1,940만 석, 1938년에는 2,410여 만 석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 기간에 중점적으로 추진된 수리조합 설치는 통감부 설치 뒤 1906년의 수리조합 조례에서 비롯된 것이나, 1934년 10월 말 현재 전국에 196개 조합이 조직되고 지구수 202개, 사업 면적 20만7,380정보에 달했다. 그런데 수리조합 설치에 따른 수리조합비는 수리조합 몽리 구역 안에 있는 경우 법규상 지주나 조합원이 부담해야 하나, 소작인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수리조합이 설치됨에 따라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잦은 충돌 요인으로 나타났다.

일제 식민지 경제에서 지주 경제의 강화는 지주의 농민 지배 강화로 나타났고, 구체적으로 농민 경작권의 불안정으로 드러났다. 또한 신흥 지주를 주축으로 하는 지주층이 조선의 식민지 종속 경제화를 강화하게 했다. 그리고 지주 경제의 강화는 농민층 분화의 촉구 과정에서 이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산미증식계획은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 농민의 토지 상실, 일본인과 지주의 토지 집중을 촉진했다. 그리고 1930년대의 소작료의 증가, 조합비 부담과 농업 공황으로 조선 농민에게는 하등의 이익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민 경제의 궁핍과 토지 방매 현상을 촉진하여 농민층 분해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농촌진흥운동의 전개와 내용


농촌진흥운동은 일제시대 조선 농업 발전의 제3단계 시기인, 농산물 가격의 대폭락과 쉐레schere 현상의 격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농업 공황과 깊은 관련을 갖는 운동이다. 1930년대는 세계공황의 여파가 농민 생활의 극단적 위기를 낳았고, 1930년대 대풍작은 쌀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의 중소지주와 자작농의 몰락, 소작농의 이농 등 사회적 모순이 심각하게 표출되었다.

조선의 농가 290여 만 호 가운데 약 8할인 230만 호가 소작, 자작 겸 소작 계급에 속하는 소작농으로서, 이들 농가의 대부분은 해마다 단경기에 식량이 모자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호구지책을 강구했다. 또한 부채액의 누증은 조선 농민의 파멸과 몰락을 더욱더 가혹하게 했다.

1926년에 현미 가격이 석당 15.01원 수준에서 1931년에는 무려 56%나 저락하여 6.61원으로 폭락했다. 일반 물가지수는 1925년에 237.8(1910년 100)에서 1931년 147.5로 38%가 저락하여, 곡가의 폭락 현상과 농산물 가격의 저락이 일반 물가의 저락 현상보다 낮은 쉐레 현상이 나타났다. 1930년 당시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전 농가 300만 호 가운데 차금借金을 갖고 있는 농가가 58%인 173만 호에 달하고, 1호당 평균액이 65원이고 최고액은 420원에 달했다. 조선 농민 경제의 양상은 1930년대의 관제 통계에도 전국 총 농가의 절반 이상이 춘궁 농가이며, 특히 소작농은 2/3 이상이 춘궁 농가였다고 한다(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小作に關する參考事項摘要������, 1932, 61쪽).

농업경영은 조선 농가의 투하 자본량이 일본 농가의 약 1/3에 지나지 않았으며, 농업 총수입은 일본 농가 총수입의 1/2 이하였고, 수지 부족액은 무려 5배에 달하여 조선 농촌 경제는 빈궁과 침체에 허덕이고 있었다. 위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일제는 1932년부터 조선 농민에 대한 구제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32년에 경제 갱생 계획과 자작농自作農 창정創定 계획을 수립했다. 농촌진흥운동의 중점은 바로 1932년부터 실시된 자작농 창정 계획에 있다.

농촌진흥운동의 제1기는 준비 공작기로,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 농촌진흥위원회를 설치하여 농촌진흥운동의 중추기관화中樞機關化하고 많은 운동 지침을 하달하는 시기다. 자작농 설정 실시 요령에 따르면 자작농업자는 농촌의 중견 인물로서 소질을 갖추어야 하고, 근로애호 정신에 불타 있으며, 소작농업자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작농가에 대한 자금 대부 조건은 1호당 논 4단보, 밭 1단보를 표준으로 하여 금액은 평균 660원으로 하는 것 등을 정하고 있다.

농촌진흥운동의 제2기는 전개시기로, 1933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경제 갱생 계획 시행의 근본적 취지는 물질에 편중하거나 형식에 흐르지 말고 정신의 진작, 농민의 자각과 자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계획의 목표는 부족한 식량의 충실을 기하여 춘궁을 없애고, 현금 수지 균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부채를 정리하고 상환하게 하여 그 중압에서 구출한다는 이른바 갱생 3대 목표를 전개한다.

일본의 침략 정책은 조선 없이는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농촌진흥운동은 조선민의 저항의 불길에 언제 휘말릴지 모르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위한 심전개발心田開發에 주안을 두고 진행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농촌진흥운동은 농본사상 개발에 중점을 두는데, 농촌과 농민은 ‘건전한 국방의 역군’이며 농본주의와 천황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국가 존폐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농촌진흥운동의 실적 개요를 보면 주요 목표였던 식량 확보 실적과 부채 농가 퇴치 실적에서 미미한 정도의 목표만 달성했다. 결국 농촌진흥운동은 농업 공황에 대한 극복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운동이었으나,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발생한 일본 자체의 문제를 조선에 전가하면서 가장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측면에서 전개된 침략 운동이었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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