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일제의 권업모범장은 조선에 일본 품종의 벼를 보급하고자 했다. 그래서 1906년 4월 경기도 수원군 서둔전에서 농사짓는 사람 28명에게 일본 벼인 조신력, 近江, 信州, 都를 배부해 기른 결과, 조신력이 토종에 비해 24%, 근강은 9.4%, 신주는 7.5%, 도는 자연도태되었다. 그 결과 일본 품종에서는 조신력, 토종에서는 조동지가 가장 좋다고 선정했다.

하지만 조선 농민들은 일본 품종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은 일본종은 늦게 익어 곤란하니 토종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일제는 일본종인 다마금과 조신력은 모두 일찍 익으니 조금도 염려할 필요 없다고 강조했지만, 농민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토종을 심었다. 이에 권업모범장과 원예모범장에서는 조선의 토종을 조사하는 한편 일본종을 보급해 통일시키고자 했다.

1908년 농상공부 식산국의 조사에 따르면 다른 이름의 품종은 토종 464점, 찰벼 149점으로 모두 513점이었다. 1914년 조선에 있는 토종은 모두 2,500종이었다. 그리고 1928년 조사에 따르면 조선에 다른 이름 품종은 토종 464점, 일본종 139점으로 모두 603점이었다. 이들 토종은 까락 있는 종이 많고, 큰 알갱이가 적고 한 이삭의 알수가 많고, 새끼치기를 적게 하고, 짚이 길어 쓰러지기 쉽고, 도열병에 잘 걸리고, 가뭄에 강하고, 물기가 없는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대개 일찍 익는 특징이 있다고 파악했다. 곧 토종은 수확량이 적지만 가뭄이나 추위에 잘 견디는 점에서는 안정성이 높다.

점점 일본종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해 1918년 조선에 보급된 일본종을 보면 조신력 25,3000정보, 곡량도穀良都 20,1000정보, 일출日出 11,1000정보, 석백石白 1,6000정보, 금錦 2,6000정보로 모두 64,2000정보에 이르렀다. 그 뒤 1921년 조선에 보급된 일본종은 조신력, 다마금, 곡량도, 금, 석백, 고천수高千穗, 일출, 웅정雄町, 관산關山, 귀미龜尾, 소전대小田代, 적모赤毛 등이다. 이들의 특징은 조신력은 물을 안정적으로 댈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다마금은 땅이 험한 데가 적어야 하고, 곡량도는 초비梢肥한 곳이 알맞아야 한다. 이 점에서 조신력은 도열병에 약하고, 다마금은 가뭄에 강하고, 곡량도는 수해에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량품종 보급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했는데, 본장이 있는 경기도의 경우 조신력, 곡량도, 다마금, 석백, 일출을 장려종으로 선정했다. 황해도는 일출을 장려종으로, 함경도는 조와 콩 위주로 하고 논벼는 거의 재배하지 않다가 1925년 우량품종으로 소전대와 정월조생井越早生 을 장려했다. 강원도는 1913년 일출관 관산을 장려하다가 1916년 귀미와 다마금을 추가했다. 1차 보급계획을 시작한 1921년에 다시 금과 이세진자伊勢珍子를 더해 6종을 장려종으로 정했다. 경상남도는 도, 곡량도, 조신력(1929년부터 산구중신력山口中神力으로 바꿈), 다마금을 장려종으로 정했다.

 

이러한 우량품종들은 때마다 성쇄도 격심하여 1915년 가장 많이 심던 조신력은 10년 뒤인 1925년 곡량도에 그 자리를 물려준다. 그러고 한 10년 뒤인 1937년에는 은방주, 곡량도, 육우 132호 세 종류가 논벼를 기르는 논의 62.6%를 차지한다. 그러면 이를 통해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달성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품종 개량과 함께 수리시설이나 비료가 늘어야 수확량이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여러 여건은 품종 개량을 따르지 못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우량품종과 토종의 수확량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년도  우량종  토종  차이

1912  1.267   0.754  0.513

1913  1.348   0.792  0.556

1914  1.354   0.900  0.454

1915  1.214   0.765  0.449

1916  1.220   0.773  0.447

1917  1.181   0.717  0.464

1918  1.164   0.833  0.331

1919  1.004   0.641  0.363

1920  1.091   0.783  0.308

1921  1.059   0.747  0.312

1922  1.074   0.781  0.293

1923  1.070   0.770  0.329

단위 섬

 

처음에는 꽤 차이가 났지만 점차 줄어들고 있다. 우량품종이 열성으로 퇴행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여러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음 점, 특히 일본농법이 조선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량종은 토종에 비해 지력을 많이 쓰기 때문에 거름을 더 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다 보니 우량종을 심는 농민들은 판매 비료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고 그럴수록 가계는 자본에 압박을 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전북 지역에서 비료를 사는 데 쓴 돈만 들어보자.

1915년 7,2002원,

1920년 33,4015원,

1925년 82,3598원,

1929년 439,2837원,

1934년 574,0329원,

1935년 728,7516원,

1936년 1050,5385원.

이것만 봐도 거의 150배가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농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 농가에 평균 경영비는 337.070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비료값이 65.565원으로 약 21.56%를 차지했다. 농가조사개황조사라는 자료를 보면, 자소작농은 1932년 비료값으로 13.5원을 쓰다가 1937년에는 38.2원을 쓰고, 소작농은 1932년 8.7원을 쓰다가 1937년 28.7원을 쓰고 있다. 이를 통해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비료를 많이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료의 소비 증가와 함께 직접적으로 지주제를 강화하는 것은 비료값의 부담 관계이다. 비료값의 부담비율은 일반적으로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법과 공과금을 부담하는 방법, 볏짚을 나누는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정조의 경우 소작인이 모두 부담하고, 타조나 집조의 경우 수확물의 분배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소작료 지불 방법은 대개 타조가 일반적이었다. 그 경우 관례는 지주와 소작인이 반씩 부담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주는 사용할 비료의 종류와 양도 정하여 소작인에게 지시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당시 비료값 부담 관계에서 지주가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전액부담을 회피하고 소작인과 반씩 나누었고, 경우에 따라서 전액을 부담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메모 :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