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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많은 생물 종들처럼, 인간이란 종도 사실은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살아남고 도태되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이 공존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증거를 얻고 있다고 한다.

https://news.v.daum.net/v/20190905031244444




 매우 흥미롭다. 앞으로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오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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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4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풍토 

        -풍토론의 가능성을 열며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풍토는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를 꿰뚫는 핵심어의 하나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과 그 주변의 각지에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또 기후와 지형 같은 자연조건과의 관련 안에서 자연히 그 성격을 형성해 온 것이기도 하다. 풍토란 우선 그처럼 다양한 문화의 성립에 관련된 자연조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풍토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건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주저 <풍토>(1935)일 것이다. 이 책에서 와츠지는 문화 생성의 외적 제약이 되는 단순한 자연조건인 풍토가 아니라, 자연환경과 인간활동의 상관성을 명시하는 풍토라는 독자적 시점을 제기한다. 와츠지는 사회와 개인, 공간과 시간, 신체와 정신 같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주목하여 이들 두 항목의 어느 쪽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쌍방을 연결하는 이중성을 이중성으로 떠맡는 '사이(間)' 혹은 '관계()'란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독자의 윤리학을 수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和辻 1934). 그의 풍토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바로 그러한 '사이'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론에서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생업문화, 특히 농경과 그 역사가 풍토와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요즘의 지구환경문제도 응시하면서 그려본 것인데, 다른 면에서 각 권의 제목에 '계절풍' '사막' '목장' 같은 와츠지의 풍토론 용어를 채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을 비교문화론적인 시점에서 눈여겨 본 그의 시선을 실마리로 삼는다. 따라서 시리즈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와츠지가 말한 풍토란 어떠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함과 함께, 지금 풍토를 문제 삼는 의의와 그 가능성에 대하여 약간 검토해 두는 건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와츠지의 원풍경原風景과 풍토론  

와츠지로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온화한 풍모이다. 특히 만년의 용모이다. 만년의 와츠지 데츠오를 찍은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중에서 유명한 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가 촬영한 서재에서 서성거리는 와츠지의 사진일 것이다. 수북이 쌓인 도서의 그림자 너머로 겨우 어깨를 웅크리고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인이 그곳에 있다. 그 시선이 참으로 온화하여 어딘지 천진난만할 정도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온화한 풍모는 아무리 봐도 온화한 하리마播磨 출신의 사람다운 데가 있다. 더구나 도시민보다는 교외의 마을 사람다운 목눌한 멋이 있다. 와츠지 데츠로의 풍모는 하리마의 농촌 풍토에서 배양된 그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와츠지의 의론에서 생업문화, 특히 농경에 관한 기술이 표면화하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은 약간 졸속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풍토>에서는 농경을 시작으로 하는 생업문화는 주제로 논하지 않는다. 그의 직접적 관심은 예술과 종교의 풍토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와츠지는 농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슈播州 히메지姬路의 교외에 위치한 농촌, 옛 니부노仁豊野 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 차라리 농경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노동활동이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장 만년에 저술한 <자서전의 시행(自叙伝の試み)>(1961)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 1887-1906년(메이지 20년대부터 30년대) 지방 가정의 정경 -즉 차 덖는 일부터 베짜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대부분의 용품을 직접 제조하여 마련하던 과거의 지방 가정의 모습이 참으로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농경에 관한 기술도 빈번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와츠지의 눈에 비친 이런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인 나의 기억에는 모내기가 끝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이 별로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노동의 괴로움을 뚜렷하게 보인 건 모를 내고 1-2주 뒤에 시작하는 논의 김매기 노동이었다. 그것은 7월 중반부터 8월 상순에 걸쳐서 여름의 삼복 시기로, 그 기간에 심은 모의 뿌리 주변의 흙을 뒤집어서 잡초가 번성하는 걸 방지한다. 이 김매기를 3번쯤 반복하는 사이 벼는 맹렬한 기세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경작자들은 땡볕 아래의 논 안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을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 논의 옆에서 보고만 있지 못하고, 역시 마을 의사의 아들로서 이 노동으로 생기는 급병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위, 즉 일사병의 여러 가지 형태였던 것 같은데, 대개는 밤중에 명렬한 복통 등을 일으키고 너무 급하면 의사를 부르러 왔다. 논의 김을 매는 계절에는 매일 밤 한 명이나 두 명의 급병인이 발생했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나에게는 농경 노동 가운데 논의 김매기가 가장 맹렬한 노동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와츠지 데츠로 <자서전의 시행>)

와츠지의 생가는 '경작자'가 아니라 마을에 유일한 의사의 집이었다. 그 의미에서 농작업을 경험한 그의 시선은 결국 방관자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자의 대부분이 농가였던 '마을 의사'의 아들이었다면, 농업이 정말로 자연과 대치하는 인간활동이란 것을 일상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성인들의 가혹한 농경 노동을 지켜본 어린 와츠지의 긴장감은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이란 문장 안에도 남아 있다.

<자서전의 시행>에서 적고 있는 니노부의 일상은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의 원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부키와 아야츠리조우루리(操浄瑠璃)>를 시작한 뒤 그의 저작에는 니노부에서 보낸 어린 나날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다고 생각되는 주제와 에피소드가 때때로 얼굴을 내민다. <풍토>도 또한 그렇다. 예를 들면, 앞에 인용한 것 같은 일본 농작업의 가혹한 '김매기'에 대해서는 <풍토>의 안에서도 유럽의 목장 같은 풍토의 특성을 일본의 풍토 그것과 비교하며 다음처럼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여름의 건조함과 겨울의 습윤함은 잡초를 몰아내 온땅을 목장답게 한다. 이것은 농업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농업 노동의 핵심을 이루는 건 '김매기'이다. 잡초의 제거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경지는 금세 황무지로 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김매기는 특히 '논의 김매기'란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일본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 -따라서 일본의 주택 양식을 결정하는 시기, 즉 폭염이 가장 심한 삼복 무렵에 꼭 그때를 번성기로 삼는 꿋꿋한 잡초와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 싸움을 게을리하는 건 농업 노동을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마침 이 잡초와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다. 토지는 한번 개간되면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한 토지로 인간을 따른다. 틈을 보아 스스로 황무지로 전화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농업 노동에서는 자연과의 싸움이란 계기가 빠져 있다.

'김매기'를 잡초와의 '싸움'이라 하고, '일본 농업 노동의 핵심'이라 하는 와츠지의 기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사실을 전한다. 그렇지만 이 조금 단언적인 기술의 배경에 풀섶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니노부의 논두렁에서 어린 그가 숨을 죽이고 응시하던 광경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와츠지의 <풍토>가 이 책을 집필하기 직전 유럽에 유학할 때의 견문에 기반하여 생생한 기술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 책을 펴서 읽으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위의 두 가지 인용에서도 명확하듯이, 그 시선의 근저에는 유아기부터 소년기에 걸쳐서 그가 목격한 일본 농촌의 기억이 원풍경처럼 가로놓여 있다. 분명히 와츠지는 <풍토>에서 농경을 주제로 논하지 않았지만 유럽이든, '사막'이라 불리는 건조와 반건조지대이든 각각의 지역과 그 문화적 특성의 비교검토는 자신의 원풍경에 근거한 농경문화라는 시점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경문화론으로서 풍토론은

<풍토>의 권두에서 와츠지는 "인간 존재의 구조 계기로서 풍토성을 밝히는 일"을 이 책의 목적으로 하고, 그 구상의 배경으로서 베를린에 유학하며 우연히 만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든다. 즉 <존재와 시간>이 인간의 '주체적 존재 구조'로서 시간성을 논하면서도 공간성의 문제가 완전히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불복한 와츠지는 <존재와 시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풍토성이란 개념에 착목한 것이다. 사상사적으로는 이후에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1962)로 갔듯이, 시간에서 공간으로 좌표를 전환하는 것을 재빨리 시도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中村 1989).

그렇지만 이러한 점으로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오로지 추상적인 철학적 의론으로 가득찬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 <풍토>의 제1장 '풍토의 기초 이론'에서는 하이데거도 관여하는 당시 더없이 융성했던 현상학에서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관한 분석을 근거로 한 이론적 고찰이 전개되며, 말년의 대저 <윤리학>의 하권(1949)에서 <풍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재론했을 때의 의론도 또한 형식적, 윤리적인 느낌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와츠지의 저작을 손에 넣은 독자는 곧 깨닫는 바인데, 그러한 철학적 의론에서조차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통속적이란 생각이 들 만큼 알기 쉽다. 이 알기 쉬움이 무엇보다도 와츠지 저작의 매력인데(와츠지는 '일본어와 철학의 문제'(1935)에 한 문장을 남겨, 번역어로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본어로 철학하는 일의 가능성을 늘 추구했다), 그것은 의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체적 사례에 의한 것이다. 그 하나로 앞에 지적했듯이 농경문화에 관한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와츠지의 의론이 생업인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대하여, 이미 시마다 요시히토嶋田義仁의 명쾌한 의론이 있다(嶋田 2000). 시마다는 와츠지가 말한 풍토의 유형 가운데 하나인 '계절풍'을 '더위와 습기의 결합'으로 특징짓고, 그 선에서 일본적 풍토의 유형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의 열대 계절풍을 의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처럼 서술한다.

와츠지는 무슨 이유로 일본적 풍토를 열대 계절풍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았을까? 그것은 '와츠지의 계절풍이란 것은 순수한 기후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논'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인간 존재의 주체적 표현이 되는 풍토 개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마다 요시히토 '풍토 사상의 가능성 -일본적인 근원적 반성-')

농경문화의 시점에서 다시 의론을 전개하면 똑같은 계절풍이라도, 예를 들어 인도에 대해서는 같은 사례로 논할 수는 없으며, 거꾸로 '사막'과 목장을 같은 맥류 농경권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없을 것이다(이 책의 서론 및 대담도 참고할 것). 그러나 어느 쪽이든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와츠지의 풍토론은 지리학과 민속학은 물론, 농학과 민족식물학, 게다가 환경고고학과 연결되며 그 역사적 의의가 판명된다. 시마다는 야나기다 타쿠니오柳田國男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등에게서 발단하는 '벼농사 문화론',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와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등에 의한 '조엽수림 문화론', 또한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제기된 '너도밤나무, 졸참나무숲 문화론',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의한 '숲의 문화'론 등 일본의 일련의 풍토론적 문화론을 개관하고 그 전개에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을 자리매김한다.

와츠지가 고향의 선배 야나기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못했는데, 와츠지의 <풍토>는 야나기다의 벼농사 문화론을 근거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벼농사라는 건 풍토 그것이라 말하기보다도 어느 풍토에 입각한 농업기술이며 생업기술이다. 벼농사에 대응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와츠지는 그것을 '계절풍'으로 인식하고, 다시 세계사적 시야 안에 넣어 '사막'과 '목장'을 함께 풍토의 세 유형으로 다시 파악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논문)

시마다에 의하면, 이러한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의 공헌은 영역에 한정되어 오로지 일본의 사정으로 시종일관한 벼농사 문화론을 환골탈태시키고, 풍토론을 비교문화론적 의론의 장으로 전환시킨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철학자인 그의 의론에서는 취약했던 '자연과학적 기초'를 근거로 하여 그 뒤 조엽수림 문화론 이후의 풍토론에 의해 새로운 전개가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개괄하는 시마다가 제기한 시점은 자칫하면 와츠지의 철학적 고찰에 질질 끌려 그 구체적 내실에 대해서 좀처럼 명로한 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기존의 해석에 대해, 와츠지만이 아니라 풍토론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명쾌한 자리매김을 가져왔다. 시마다는 또 최종적으로 개인에게 귀착하는 정신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머지, 걸핏하면 풍토론을 단순히 환경결정론으로 멀리하려는 서양 근대사상에 대하여 평평하여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거주 환경에 응하여 공간의 이해가 중층적으로 전개된 결과 자연히 관심이 '자기 이외로' 향해 온 일본의 풍토론적 발상의 의의를 위상적으로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이 '산이 많은 나라의 풍토론'을 제기한다. 그 시점과 문제 의식은 이 시리즈에서 풍토를 문제로 삼는 데에도 시사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정말로 위상적인 의론으로 귀착하는 것에 의하여 시마다의 의론은 뜻밖에도 풍토론의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한다. 그 한계는 또한 농경과의 관련에서 본 풍토론이란 자리매김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그점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풍토를 문제로 삼는 것의 의의와 가능성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하겠다.


풍토론의 가능성

언젠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창으로 보이는 교외의 동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풍토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반짝이고, 콘크리트 건물이 겹겹이 무질서하게 이어지며, 지면은 아스팔트로 덮이고, 하늘에는 전선이 종횡으로 내달리고 있다. 특별히 오사카 근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어디에나 있는 풍경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풍토>에서 와츠지도 지적하고 있듯이, 풍토는 옛날에는 또 수토水土라고도 하여 자연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단어이다. 가지각색 인간의 생업도 또한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인간 문화와 관련된 자연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마을의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며, 기름진 들이 펼쳐진다. 이것이 풍토의 올바른 인상일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풍경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야기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 와츠지의 '원풍경'에 대하여 지적했는데, 아직도 풍토론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안에는 때때로 어딘가 목가적이기까지 한 전원 풍경으로 풍토의 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그러한 풍경을 원풍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현대의 우리에게 풍토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참으로 저 어수선한 현대 교외의 길거리에 풍토적 현상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풍토와 같이 인간 활동과의 관계성에 기반한 자연을 표현하는 '마을'과 '마을 산'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도시에서 괴리된 지역을 지시하는 장소적 한정을 수반한 단어이며, 생태계 전체에 걸친 인위적 관리를 전제로 하는 그 실태에서 보면 현대의 교외에는 이미 예전 같은 마을 산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라는 현상은 그러한 파악 방식으로 충분히 보아 온 것일까?

기존의 풍토론이 어느 쪽이냐 하면 도시보다 전원이나 농촌 같은 '시골'의 대상을 가장 자신있어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시마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문화연구의 대부분이 벼농사 문화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있으며, 최근의 풍토론 재평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지리학자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가 예외적으로 벼농사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풍토론은 역시 시골에 조명을 비추는 데 주목하는 제약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론은 이러한, 말하자면 장소적 한정과 한계의 근원에 머무는 것일까?    

노마 하루오野間晴雄가 지적하듯이 문제는 단순히 장소적 한정과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토론에는 '역동적인 경제관계'에 관한 의론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野間 2005).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진전을 고려하면, 농촌이든 도시든 경제문제를 빼놓은 채로는 충분한 의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하다. 그렇지만 다시 물음을 거듭하면, 기존의 풍토론에 경제적 시점을 보완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론을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와츠지가 열었던 비교문화론적 관점을 다루었던 풍토론의 가능성은 장소적 한정은 처음부터 굳이 말하자면 표층적인 자연과의 관계조차도 뛰어넘는 곳에 있던 건 아닐까? 그 범위 안에서, 교외는 물론 도시의 한복판에도 풍토는 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측면이 실은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와츠지의 <풍토>는 부제에 '인간학의 고찰'이라 하듯이 단순히 자연조건의 열거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자기 인식의 전형'이 되는 풍토를 밝히는 것이며, 단순히 객관적 대상으로 기상과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의 관점을 제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원초적인 자연을 무시하고 인간화하며 왜곡된 자연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경험에 근거한 근본적인 자연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일상생활과 자연의 관계이다. 그 의미에서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자연의 반대점에 있는 인위적 산물인 건축에 대하여 말한 다음의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건축이란 진짜 자연에 쌓아 놓는 제2의 자연이다. 건축을 직업으로 삼는 자가 환경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렌조 피아노 <항해일지>)   

          
만약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범위에서 도시의 건축 공간도 또한 '자연'이라 부른다면, 여기에도 또 풍토는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농경문화로 상징되는 시골 지역을 논하는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다. 그곳에서 적출된 의론을 어떻게 현대의 우리 일상생활의 문제와 접속시킬 것인가? -그러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도 풍토론에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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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연구결과.

현대의 산업화된 농업에서와 달리, 과거 농사를 지었던 농부들은 주로 선발 육종이란 방법을 활용하여 품종을 개량해 왔다. 간단히 말하여, 논밭에서 재배하던 작물 가운데 자연적인 돌연변이 현상으로 인해 이상하게 생기거나 독특한 놈이 나타나면 그 씨앗만 따로 받아서 특성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이용하여 품종을 개량한 것이다.




한 연구진이 채소 작물 일곱 가지의 토종 씨앗과 그 야생의 근연종 씨앗 사이의 크기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요약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야생종보다 토종의 씨앗 크기가 대략 2.5배 정도 큰 것으로 나타난단다. 이런 현상은 곡식류와 콩류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 씨앗 한 알 한 알에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지난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것이 누구의 것이라고 확언하는 집단은 과연 누구인가? 씨앗은 인류가 공용하고 공유하는 공공재가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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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궁금하던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기사.

만일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둘 수 없다면…


[토요판] 최정규의 우울하지 않은 과학
(4) 기술이냐 제도냐

고구마의 도입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의 사례는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낯익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라 할 만하다. 사진은 엥가 부족 모습. 위키피디아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초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농업이 결국에는 잉여를 가져다주었고 인구를 증가시켰으며, 거대 국가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농업의 시작이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로의 문을 연 계기였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농업은 누구의 눈에는 인류의 번영을 위한 축복의 계기였고,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로 달라도, 농경의 시작이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적 사건 중 하나라는 점에는 아마도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인류는 왜, 어떻게 농부가 되었을까?

농업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1000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막 물러갔을 때이다. 농업의 최초 흔적은 현재 중동 지방(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 지역)과 터키 남부 지역에서 발견됐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부 요르단 강 유역을 아우르는데, 그 모양이 초승달을 닮았다 해서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농부들이 출현했다.


마르크스, “기계방아가 자본주의 낳았다”

농경의 등장 전후로 큰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이 시기는 인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거주형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사적 소유권이 자리잡게 된 시점도 농업의 등장 시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래서 농업과 정착, 그리고 사적 소유 이 세 가지는 하나의 묶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시점에 따라 혹은 장소에 따라 이 선후 관계가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큰 틀에서 보면 이 셋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의 불평등의 씨앗도 이 세 가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농업이 생산성을 증대시켰다고 보면 모든 게 간단히 설명된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인류가 농업이라는 생산 방법을 채택하게 됨에 따라 인류의 생산력은 증대했고, 비로소 인류는 이른바 ‘잉여’를 갖게 되었다. 겨우 먹고사는 데 그쳤던 이전과 달리 잉여가 발생했고 사적 소유라는 게 생겼고 이로부터 일 안 하고 남이 일한 것을 착취해서 살아가는 지배계층이 등장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생산기술이 나타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그에 따라 새로운 경제적 (지배)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는 가설하에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다. 기술이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주된 동력이라는 관념은 매우 익숙한 관념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방아(맷돌)가 지주와 농노로 이루어진 봉건제를 낳았고, 기계방아가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루어진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말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관념에 잘 들어맞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심스 올리버는 미국 중부지역 평원에 살던 인디언 부족에 말이 도입되면서 평등했던 관계가 위계적인 관계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에 따르면 말의 도입은 버팔로 사냥을 수월하게 만들었고, 버팔로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부족도 함께 이동하는 거주 패턴을 가능하게 했다. 말이 도입되면서 정착해 생활하던 부족들에 비해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사냥을 주업으로 삼았던 부족들이 더 강성해졌다.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 말을 획득하는 능력이야말로 용맹함의 척도이고 지도력의 척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말은 부의 축적 수단으로 등장했고, 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부와 권력이 결정됐다.

또 다른 예로 폴리 위즈너는 뉴기니 고산지대 엥가 부족을 연구하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등주의적 질서가 고구마의 도입으로 인해 균열이 생기면서 불평등하게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마 경작이 가져온 높은 생산성이 사회적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간명해 보이는 이 가설은 몇몇 사례에서는 잘 들어맞을지 몰라도, 적어도 농경의 출발을 설명하기에는 힘든 것 같다. 인류는 농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야생 상태에서 곡물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다만 본격적으로 농부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농부로의 전환을 꺼렸던 이유는 농업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그 대체 방식으로서의 수렵 및 채취에 비해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초기 농업은 수렵·채취 방식에 비해 훨씬 더 고된 작업이었는데도, 같은 시간을 일했을 때 얻어지는 칼로리의 양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사냥을 하고 열매를 따 먹던 시절에 비하면, 허리 부러지도록 일하고 얻는 영양소도 다양하지 못했다.

페르시아만에서 요르단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외에도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한 곳은 꽤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도 ‘자발적으로’ 농업으로 전환한 사례가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농사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제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바텍 사례

카를레스 보익스와 프랜시스 로젠블루스는 고고학자들의 유골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서, 초기 농부들의 신장이 수렵·채취를 기반으로 살았던 이들에 비해 작았음을, 그리고 영양상태가 안 좋았음을 드러내주는 흔적들을 보았다. 빈혈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는, 뼈에 나타난 병변현상이나 골 질량 손실의 증거들, 그리고 치아를 둘러싸고 있는 에나멜의 부족 등이 그 증거였다. 샌타페이연구소의 새뮤얼 볼스는 현존하는 수렵·채취 부족들과 손도구를 이용해 농업을 하고 있는(그래서 초기 농부들과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농부들의 노동생산성을 계산해 보았다. 한 시간의 노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열량으로 비교해본 결과, 이들 농부들의 생산성은 수렵·채취 부족민들의 생산성의 63%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초기 농업의 경우, 노동생산성에서는 수렵·채취에 비해 떨어졌더라도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했을 터이니 토지 단위 면적당 생산성은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토지를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기술(수렵·채취)을 포기하고 토지 절약적인 기술(농업)을 채택한 것은 적어도 경제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들을 토대로, 잭 할런은 1992년 저서 <작물과 인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농업을 도입했을까? 주당 20시간만 사냥하면 나머지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도, 굳이 태양볕 아래서 고생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영양소도 풍부하지 못하고 또 공급도 안정적이지 않았던 작물들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농업이 도입된 이래 기아, 질병, 전염병이 등장했고, 밀집된 공간에 사느라 생활환경도 극히 안 좋아졌을 텐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담에게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벌을 내리면서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농사란 그만큼 고된 일이었을 거란 증거다.

지금까지 발견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농경이 독자적으로 등장했던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외에도 중국, 멕시코, 북부 페루, 고지대 뉴기니, 서부 아프리카 사헬 지역, 북미 동부 등 7개 지역 정도이다. 그 외 지역의 농경은 다른 곳으로부터의 정복이나 교류 혹은 농부들의 이주의 결과라는 말이다. 유사한 기후조건과 토양조건을 가졌더라도, 야생 작물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혹은 화전 농법을 사용하면서 농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더라도, 실제로 ‘자발적으로’ 농부로 전환한 부족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 북단 케이프 요크에 도착했던 제임스 쿡 선장은 그 지역이 토레스 해협 건너 뉴기니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도, 뉴기니에서와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북단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의아해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농경은 높은 생산성 때문에 자연스레 시작된 것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지는 듯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만들어 준 (선행)요인으로서 환경과 인구가 아니라, 규범과 제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농경이란 기술적 지식만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이미 지식은 충분했다) 제도적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래전 인류학자인 커크 엔디컷은 말레이시아 수렵·채취 부족인 바텍 원주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보고한 적이 있다. 이야기인즉슨, 바텍 주민 두 사람이 농사짓는 법을 전수받아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추수가 가까워질 즈음 다른 마을 주민들이 와서 맘대로 곡식을 추수해 가더라는 것이다. 벼농사를 지어보겠다던 이 두 사람은 몇 년 거푸 동일한 일이 생기자 결국 농사짓기를 포기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농경의 도입 실패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의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바텍 원주민들은 자연자원은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며, 가족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는 다른 이와 나눈다는 규범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두 사람의 벼도 마찬가지로 간주했던 것이다.

농사란 추수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농사란 당시 기술로는 손을 엄청 필요로 했기에 일년 내내 노력을 기울여도 좋은 결과가 나올지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한 불확실성은 제도적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땀 흘려 만들어낸 생산물이 내게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으면 1년 내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려면 바로 그런 점에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농사가 제대로 될지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최소한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둘 수 있다는.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했다

터키 서부지역에서 클라우스 슈미트가 발굴한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와, 현재의 시리아 부근에서 앤드루 무어가 발굴한 아부 후레이라 유적지는 인류가 농부가 되는 이른바 ‘제도적’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은 농경이 시작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정착촌을 이루고 있었던 증거와 함께, 집집마다 야생 곡물을 보관할 식량창고를 갖는 등 상당한 정도의 사적 소유가 갖춰졌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다. 경제학자인 대런 아제모을루는 그의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초기 의식용 건물을 보면서 이 지역에서는 농경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불평등이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불평등하에서 엘리트층이 착취를 손쉽게 하기 위해 저장이 가능한 곡물 생산으로의 이전을 강제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 두 곳에서 발견되는 사적 소유의 흔적들이 얼마나 불평등의 심화를 말해주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농경사회로의 전환 이전에 이미 이를 위한 제도적 여건으로서의 사적 소유가 꽤 진전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새뮤얼 볼스와 필자는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수리 모형을 짠 후 이를 기초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농업과 사적 소유의 진화를 재현해본 적이 있다. 우리의 시뮬레이션 결과는 다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 농업의 발생이 1000번 시행에 31번 일어날 정도로 쉽지 않았던 사건이었고, (2) 그 31번의 이행은 모두 사적 소유권과 함께 진화했으며, (3) 사적 소유가 농경에 선행해 농업생산을 이끌더라는 것. 말하자면, 아부 후레이라에서 나타났음직한 모습이었다. 농경의 시작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러 사회적 변화는 생산기술과 사회적 제도와 관련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식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과 제도의 상호작용을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 사회에서 주로 발견되는 평등적 관계와 공유의 규범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어떻게 해체되면서 위계와 사적 소유와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기술은 그대로인데, 규범 등의 제도가 변하고 새로운 제도가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의 길을 열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제도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때, 인류가 농부가 되는 과정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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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historic "pantries": This illustration is based on archaeological findings in Jordan of structures built to store extra grain some 11,000-12,000 years ago.


For decades, scientists have believed our ancestors took up farming some 12,000 years ago because it was a more efficient way of getting food. But a growing body of research suggests that wasn't the case at all.


"We know that the first farmers were shorter, they were more prone to disease than the hunter-gatherers," says Samuel Bowles, the director of the Behavioral Sciences Program at the Santa Fe Institute in New Mexico, describing recent archaeological research.Bowles' own work has found that the earliest farmers expended way more calories in growing food than they did in hunting and gathering it. "When you add it all up, it was not a bargain," says Bowles.


So why farm? Bowles lays out his theory in a new study in the journal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The reasons are complex, but they revolve around the concept of private property.


Think of these early farmers as prehistoric suburbanites of sorts. The first farmers emerged in less than a dozen spots in Asia and South America. Bowles says they were already living in small villages. They owned their houses and other objects, like jewelry, boats and a range of tools, including fishing gear.


They still hunted and foraged, but they didn't have to venture far for food: They had picked fertile places to settle down, and so food was abundant. For example, one group in what is present-day Iraq lived close to a gazelle migration route. During migration season, it was easy pickings — they killed more animals than they could eat in one sitting. They also harvested more grain from wild plants than they knew what to do with. And so, they built "pantries" — structures where they could store the extra food.




This granary uncovered in Jordan shows that people stored wild grain even before they were farming it.


These societies had seen the value of owning stuff — they were already recognizing "private property rights," says Bowles. That's a big transition from nomadic cultures, which by and large don't recognize individual property. All resources, even in modern day hunter-gatherers, are shared with everyone in the community.


But the good times didn't last forever in these prehistoric villages. In some places, the weather changed for the worse. In other places, the animals either changed their migratory route or dwindled in numbers.


At this point, Bowles says these communities had a choice: They could either return to a nomadic lifestyle, or stay put in the villages they had built and "use their knowledge of seeds and how they grow, and the possibility of domesticating animals."


Stay put, they did. And over time, they also grew in numbers. Why? Because the early farmers had one advantage over their nomadic cousins: Raising kids is much less work when one isn't constantly on the move. And so, they could and did have more children.


In other words, Bowles thinks early cultures that recognized private property gave people a reason to plant roots in one place and invent farming — and stick with it despite its initial failures.


Bowles admits that this is just an informed theory. But to test it, he and his colleague Jung-Kyoo Choi built a mathematical model that simulated social and environmental conditions among early hunter-gatherers. In this simulation, farming evolved only in groups that recognized private property rights. What's more, in the simulations, once farming met private property, the two reinforced each other and spread through the world.


Bowles' theory offers a more nuanced explanation that ties together cultural, environmental and technological realities facing those first farmers, says Ian Kuijt, an anthropologist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who specializes in the origins of agriculture.


But, he says, the challenge is to figure out who owned the property back then and how they ran it. "Was it owned by one individual?" Kuijt says. "Was it a mother and father and their children? ... Does it represent community or village prop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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