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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으로 이해하는 절기력




지난 금요일 우연히 도시농부학교 3기 수업을 청강했습니다. 그날 주제는 ‘절기력과 한 해 농사’였습니다. 그날 강의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떠오른 것이 있어서 글을 올릴까 합니다.


절기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지는 않기에 순서대로 외울 수는 없지만, 일기예보라든지 달력을 흘끗 볼 때마다 눈에 들어와서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 벌써 우수가 지나 조금 있으면 춘분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과학시간에 배운 지식으로 춘분과 추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은 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사실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숨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가 잊어먹었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절기가 생기는 원인은 다들 아시다시피 하늘에 떠 있는 해 때문입니다. 해는 지구를 따라 1년에 약 360°를 돕니다. 물론 이것은 지구를 중심으로 봤을 때 그러하고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은 갈릴레이를 떠올리지 않아도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지구는 붙박이로 박혀 있고 해가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합시다.


만약 이 해가 지구의 적도를 따라서 돈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마 절기에 대한 설명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겁니다. 해가 지구의 적도를 따라서 일정하게 돈다면 지구의 복사열은 어디나 똑같을 것이고, 골치 아프게 절기가 생기지도 않고 날씨도 1년 내내 비슷했을 겁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어 봄여름가을겨울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그때그때마다 날씨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봄과 가을 정도만 서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일은 바로 지구의 자전축이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사실이라면 23.5°만큼 기울어져 있기에 발생합니다. 그래서 아래 그림처럼 하지 때는 해가 가장 높은 위치에 오고, 동지 때는 해가 가장 낮은 위치에 오기에 북반구에 있는 우리나라에 도달하는 햇빛의 양에 차이가 생깁니다. 그 차이가 바로 날씨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럼 그림을 한 번 보실까요.

 

 

천구의 적도․남극․북극은 지구의 적도․남극․북극을 연장한 것이니 그리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은 춘분점, 하지점, 추분점, 동지점과 23.5°만 보면 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학교 다니면서 한 번씩 들어보셨을 이야기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것과 음양이 무슨 상관인지 말하려고 뜸을 들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음양과 절기, 다시 말하면 지구와 태양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음양이라고 하면 주역이라든지 점집, 철학관, 동양철학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걸 굳이 이런 단어에 대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학이라고 봅니다. 서양에 서양식 자연과학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우리식의 자연과학이 있는 것이지요. 지금에야 서양 과학이 최고가 되어 과학이 아니면 말을 말라는 식으로 나오지만, 그런 걸 몰랐을 때도 우리는 잘 살았고 앞으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활과 경험에서 나온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음양이 서양 과학에 밀려 저 어두운 지하 깊숙이 습기가 가득 찬 퀴퀴한 골방에 갇힌 채 추상화되어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아무런 연관도 갖지 못한 채 점치는 사람들만 보는 그런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재조명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삶과 너무 밀접하고 그만큼 우리의 삶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편하고 편리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고 따지시기도 할 겁니다. 물론 서양에서 발전한 자연과학, 특히 과학기술 때문인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무어냐에 대해서는 함께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하고 편리하고 편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래서 얼마나 행복해졌는지는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중얼중얼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이제 음양과 절기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아래 그림을 보십시오.

 

 


눈치 빠른 분은 벌써 감 잡으셨을 겁니다. 위에서 보신 그림은 우리가 흔히 보는 태극기에 나오는 태극문양입니다. 그 태극문양에 절기를 배치한 그림입니다. 태극문양은 하나의 운동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만약 태극문양이 원을 절반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라면 죽어 있는 상태를 뜻할 겁니다. 하지만 태극은 정적으로 굳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활발하게 움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날씨도 그것과 똑같지요. 하루는 밤과 낮의 구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과 밤이 변하면서 시시각각 끊임없이 기온이 변하고 바람이 변하고 습도가 변합니다. 뭐하나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직은 세세하게 들어갈 단계는 아니니 다시 음양과 절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빨간 것은 양陽을, 파란 것은 음陰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쉽게 알 수 있듯이 양의 기운은 봄과 여름에 배치되어 있고, 음의 기운은 가을과 겨울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음과 양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확하게 절반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그것은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지 않은 상태일 때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구의 자전축은 기울어져 있기에 날씨, 다시 말하면 절기는 태극처럼 운동을 합니다. 이는 태극이 그렇기에 절기가 그런 것이 아니라 절기가 그렇기에 태극이 그런 것입니다. 태극이니 음양이니 하는 것들은 자연의 변화 현상에서 항상 그러한 사실을 뽑아서 하나의 상징 부호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태극이니 음양이니 하는 말에 겁먹을 필요 없으십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의 변화만 느낄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도통하시면 굳이 철학관을 찾거나 예배당을 찾지 않으셔도 그냥 그렇게 사실 수 있습니다.


그럼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만큼 음과 양이 서로의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론으로는 동지가 가장 추워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한과 대한이 가장 추운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쪽 용어로는 여기餘氣라 하여 남은 기운이 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수, 경칩 절기가 와도 꽃샘추위를 조심해야 함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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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는 한 덩어리의 혼돈이었는데, 어떠한 작용이 개입하면서 음양으로 분류가 되었다고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이쯤 오면 이미 상대적인 개념이 형성된다. 크고 작음이나 높고 낮음이나 맑고 탁함 등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이 음양이라고 생각된다. 아름답고 추한 것이 형성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음양이란 이렇게 선과 악이 나뉘는 것을 말한다. 선악은 이미 전체를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최초에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리라고 본다. 어쩌면 지금 궁리를 한다고 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을 것도 같고, 또 그럴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에 살고 있으며 지금의 이 대기에 가득한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는 이상, 지금의 현재의 우주에 대해서 궁리를 해보는 것이 더욱 이익이 많으리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음양으로 분리되어서 커다란 흐름을 만들면서 서로 대립과 보완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지구는 그 즉시로 폭발을 해버릴 것도 같은데,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질서 있게 흘러가는 듯 하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 눈에는 음양은 서로 대립을 하고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마음에 대립되는 마음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이것이 또한 인간의 모양임에 어쩌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양이라는 분리의 대립을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선악의 대립을 불러온다.

음양은 서로 대립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면 결국 그 정도밖에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음양의 마음은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함이다. 균형은 아름답다. 즉 기울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시이소오의 중심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올라가는 것은 양이고 내려가는 것은 음이라고 한다면 음과 양은 서로 오르락내리락 할 적에 재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둘 중에서 어느 하나의 기운이 지나치게 많거나 적다면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면 정말 재미없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시이소오를 연상해보라 무슨 재미로 매달려서 놀겠는가? 그렇지만 중심점이 있으므로 두 어린이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깔깔거리면서 음양의 균형을 즐긴다.

이러한 상태를 빌어서 음양이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말하거니와 우리가 배울 명리학(命理學)도 실은 기울어져있는 음양의 정도를 어느 곳에다가 중심점을 잡으면 바르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에 촛점을 맞춰보는 게임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처음으로)


 


 

음과 양이라는 이분 적으로 모든 삼라만상을 나눌 수가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모든 것에 대해서 음과 양으로만 나눌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표면적으로 볼 적에는 일단 음양이라는 대립되는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기본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을 창안했던 아인슈타인 선생이 탁월하다는 대접을 받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고, 또한 사실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 역학의 분야에 들어오면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면서. 사실 상을 받는다면 주역의 학자들이 받아야 할 것이라는 억지를 써보기도 한다.

주역이라는 것은 순전히 음(--)과 양(―)으로 표기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단순한 표시를 가지고서 이 땅위에서 벌어지는 삼라만상의 성쇠(盛衰)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음과 양으로 표시되는 상대적인 관계 외에 과연 또 다른 무엇이 없을 것인가를 가끔 생각해보데 된다.

이러한 것이 반드시 있다고 전제를 하고 싶은 마음인데, 이것을 일러서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라고 하던지, 또는 '음이면서도 음이 아니고 양이면서도 양이 아닌 것'이라는 말로 하던지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음과 양이라는 것 말고 그 사이를 흐르는 중간(中間)이라고 할 수가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음양의 구조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어떤 성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고서는 어쩌면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낭월이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1) 음양을 결합시키는 그 무엇

음과 양은 서로 대립을 하면서도 반목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음과 양은 서로 조화를 이뤄가면서 뭔가를 창조하는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질적인 성분이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과연 무슨 힘에 의해서일까?

낭월이는 이러한 성분을 중(中)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음양중(陰陽中)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음양중이라는 형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어떤 형상이 떠올라서 이렇게 나타내 보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음과 양이 있는 영역의 사이에 어떤 성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성분은 중용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데, 음과 양이 서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중간에 있는 형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분에 대해서는 단순히 음양의 대립되는 구조로만 살펴본다면 전혀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게 된다.

움직이는 성분은 음양이고 움직이지 않는 성분은 중간이라고 생각된다. 보통의 안목으로는 움직이는 것만 살피게 되지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을 살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마음도 움직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삼매(三昧)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본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비로소 움직이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실체를 드러낼 것이라고 추리를 해본다. 그러니까 이렇게 쉬임없이 흐르고 있는 마음으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러한 결론을 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달리 더 명확한 방법을 찾을 방법을 모르겠다.

비록 이러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하려면 도인의 경지에서 삼매에 몰두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상상만으로 어떤 결론을 유도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은 알겠으나, 상상을 하는 것조차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영역은 아마도 명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영원한 숙제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 영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어떤 설명을 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을 바로 인식한다면 비로소 음양의 대립되는 경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좀더 확대해석을 한다면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대 자유인이 된다는 말이다. 선이나 악이라는 굴레, 혹은 천당과 지옥이라는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경지를 역학에서는 중화(中和)라고 할 수가 있겠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 혹은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 이라는 말로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도 이 영역에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상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고, 이때에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윤회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하기가 불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만을 해본다. 지금의 우리는 다만 음양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정도로써 어찌 생각해보면 남의 다를 긁고 있는지도 모르는 중간(中間)에 대한 말씀을 줄인다. (처음으로)


 

 


 

1. 음양의 순환법칙

음양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돌고 도는 것을 일러서 음양이라고 한다. 낮과 밤이 서로 교차되듯이, 달이 차서는 기울고 하는 순환을 되풀이하듯이, 또 1년의 사계절이 항상 규칙적으로 순환을 하듯이 그렇게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삼라만상이 모두 이렇게 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정진(精進)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어느 한가지에 대해서 형상을 본다면 그 이면에는 보이는 것과는 반대가 되는 어떤 형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즉 순양(純陽)의 형태가 겉으로 보인다면 그 이면에는 순음의 성분이 잠자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순양에는 순양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렇게 음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순환하는 그림을 태극으로 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태극은 그래서 매우 신성한 음양의 균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 나라의 국기에서 이렇게 심오한 도형인 태극을 사용하게 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일설에는 음양오행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한반도의 고대사로 접어들게 된다는 글을 읽어보면서 아마도 원래의 태극 사상을 찾아낸 인간도 바로 우리 동이족이라서 그 주인의 자손들이 국기에다가 음양의 상징을 넣어서 사용한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면서도 정작 태극의 국민들은 음양의 참 이치를 모르고 그냥 주역에서 쓰는 팔괘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나보다 하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참 묘하다면 묘한 일이다.

陰極卽陽生 陽極卽陰生

음극즉양생 양극즉음생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양의 기운이 생기고

양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음의 기운이 생긴다.

이러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음양의 순환법칙을 음미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생긴다는 말은 기쁨이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말도 된다. 웃음이 나무나 벅차 오르면 눈물이 생기는 경우를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극에 달하면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겪어 봤을 것이다. 이러한 인생살이를 통해서 옛어르신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공부라고 본다.

주역에서 표시하는 64괘는 항상 나쁘기만 한 괘도 없고, 항상 좋기만 한 괘도 없다고 한다. 오늘 나쁜 의미의 괘상은 내일은 또 좋은 괘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면서 근신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좋은 괘는 내일도 좋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한 방면의 극에 달한 기운은 기울 준비를 한다는 말씀이다. 차면 기우는 법칙은 균형을 이루는 음양의 법칙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공자도 만년에 역경(易經)의 심오한 이치에 젖어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옛 어르신이 말씀하시기를 '공을 이룬 후에는 물러갈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자연의 법칙이랄지 조화랄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항상 자신의 일을 한 후에는 조용히 물러가고 다음의 타자에게 일을 전해주는 모습이 느껴지는데, 음양의 이치도 바로 이와 같아서 그렇게 서로 조화를 이뤄 가는 것이 아마도 자연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사람도 자신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서 과욕을 부리고 있을 적에는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음에서 양으로 움직여 가는 운동과 양에서는 또 음으로 움직여 가는 운동에서 정중동(靜中動)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점차로 운동이 복잡해진다는 의미도 포함되겠고, 또 멈춤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 음악에 '무궁동(無窮動)' 이라는 곡이 있는데, 끝날 줄 모르고 계속 연주되는 형식이다. 음양의 운동도 이렇게 진행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처음으로)


 


 

음양이 서로 견제를 하면서 급기야는 다시 새로운 형태로 분열을 시도하게 된다. 원래가 모든 삼라만상도 마찬가지로 서로 대립을 하면서 유지되는 듯 하다가는 다시 분열을 하게 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볼 적에 참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렇게 다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처음의 혼돈에서 음양으로 분리되는 것과는 또다른 복잡성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점차로 복잡해져가는 음양의 소식을 관찰해보도록 하자.

陰과 陽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또 서로를 돕는다. 이것이 자연(自然)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상황을 본다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즉 견제를 하는데 에도 정도문제가 있는 것이다. 100%의 견제도 있을 것이고, 약간의 겁을 주는 정도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서 그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차이점을 알기 쉽게 표시하는 것이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는 사상(四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주역에서 말하는 사상(四象)이론과도 원칙적으로 부합된다. 사상에서는 괘상의 형태로 나타내는데 표로 만들면 이렇게 생겼다.
 

.

四象의 卦象

陰陽比率

五行分類

太陽

---

---

純陽之氣

少陰

- -

---

陽中之陰

少陽

---

- -

陰中之陽

太陰

- -

- -

純陰之氣

여기서 보자면 太陽은 火와 같다고 보겠고, 少陰은 이름은 음이라고 하는 말이 뒤에 있어서 음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글자 그대로 '음의 기운이 적음'이라는 뜻인바 그 본체는 양이면서 음의 기운이 적게나마 들어있는 木과 같다고 보겠다. 또 少陽도 같은 이유에서 본체가 음인데 양의 기운이 조금 서린 뜻이니 金과 같다고 하겠으며, 太陰은 글자 그대로 水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게 오행으로 대입을 시켜보면 목화금수의 형태와 흡사하다.

이렇게 서로를 견제하면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오행의 기틀이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2차로 분열을 일으켜서 발생한 것이 바로 음양의 원류와 또 다른 음의 양과 양의 음을 탄생시킨 것이다. (처음으로)


 

 


 

음양이 서로 음중의 양과 양중의 음을 만들어 가면서 다시 대립을 하는 과정을 일러서 사상(四象) 운동(運動)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러한 것도 역시 대립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천지자연의 이치는 이것을 한가지로 통일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등장한 성분이 바로 전무후무한 중화(中和)의 이치를 가지고 있는 토(土)의 성분이 된다. 이 토를 모든 성분들을 조절해주는 중화제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역시 그 하는 행동을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토의 본성은 신(信)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행(四行)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지만 토에게만은 믿음을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 사상의 대립적인 구조에 끼여드는 토의 성분을 음미해보자.
 

.

음양의 비율

五行

명칭(名稱)

陰體

음의 기운이 전체를 장악했을때

(陰中之陰)

陽體

음의 기운에서 양의 기운으로

(陽中之陰)

陽體

양의 기운이 전체를 장악했을때

(陽中之陽)

中間

양과 음의 기운이 균형을 이룸

(陰陽中和)

陰體

양의 기운에서 음의 기운으로

(陰中之陽)

이러한 음양의 각기 다른 상황을 오행이라는 말로 설명을 하게 되는데, 그 각각의 비율차이에 띠라서 실제적으로 분명한 차이도 있게 된다. 그 각기 다른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단계로 五行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사주팔자(四柱八字)가 음양오행학(陰陽五行學)이 되는 것은 음양오행에 대한 공부를 하면 사주팔자를 잘 알 수 있다는 말도 된다는 뜻이다. 사실 음양의 비율을 잘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이 명리학이다. 그래서 음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양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저울질하는데, 저울질을 잘 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하듯이 음양비율의 정도를 잘 분석하는 학자가 깊이 들여다보고 멀리 내다본다.

표를 봐서 알 수 있듯이 양이 극에 달한 것은 불(火)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이 극에 달한 모양을 물(水)라고 한다. 또 양중에서도 음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나무(木)라고 하며, 음 중에서도 양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쇠(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화금수의 대립을 서로 조절해주는 조절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흙(土)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五行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개성이 없으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 토의 성분이다.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은 목화금수가 모두 음양의 형태에 따른 기호라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기본은 역시 음양이라는 법칙이라고 하겠다.

기본 구조는 이렇게 간단하다. 그런데 이것들을 인간의 일상생활에 그대로 대입하게 되는 사주공부를 하다보면 그렇게 만만한 구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필히 들기 마련이다.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사연들은 정말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려고 마음을 낸 초학자(初學者)에게는 대단히 혼란한 이론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하나하나 배워나가다 보면 능히 이해를 하게 되겠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얼른 신통방통한 예언을 해서 족집게도사가 되고 싶다는 허망한(!) 욕심을 갖고 있는 초학자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분류를 하다가 보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부류가 있어야만 이 '음양의 중간'에 해당하는 성분을 나타낼텐데, 그러한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구태여 있다고 한다면 형상에 구애받지 않고, 그 마음이 어느 곳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화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하면 말이 될 것도 같다. 아니면 성인(聖人)의 무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세간의 모든 욕망을 떠난 자유인은 성별에 의해서 자신의 욕망이 발동하지 않으므로 구태여 여자니 남자니 하는 말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치로 봐서 음도 양도 아닌 사람이기도 하고, 또 음이기도 양이기도 한 사람도 되는 사람은 음양이 중간인 성분으로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기본적인 혼돈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서 음양이 되었고, 그 음양은 또 더 많은 세월이 흘러서 더욱 복잡한 형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이렇게 해서 음양에 대한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비록 간단하게 말을 할 수도 있는 음양이지만, 조금 깊이 생각을 해보면 대단히 많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그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소흘히 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벗님도 이제 음양의 느낌을 잘 살리셔서 보다 조화로운 삶이 되시기 바란다. (처음으로)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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