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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de van Andel 씨가 수리남의 Paramaribo에 있는 시장에서 도정하지 않은 쌀 한 봉지를 구매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노예제의 가거를 새롭게 검토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 네덜란드 Leiden에 있는 Naturalis Biodiversity Center의 민족학자는 2006년 수리남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약용 및 제례용 식물을 조사했다. 그녀는 쌀을 포함한 약초와 제례용 식물을 판매하는 수백 명의 마룬Maroon 여성들로 붐비는 수도의 시장을 발견했다.

수리남의 마룬은 그 국가의 내륙에 있는 열대우림을 피난처로 정하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도주 노예들의 후손이다. 이질적인 경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초기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룬들은 살아남아 그 문화를 지속해 올 수 있었다. 오늘날 20만 이상의 마룬들이 있고, 대부분은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에도 적은 수가 있다.  

역사가들은 350년이란 대서양 횡단 무역 기간 동안 1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강제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추정한다. 이 항해에서 살아남은 1070만 명 가운데 약 30만 명의 노예들이 1668년부터 1823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수리남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급증하는 커피와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로 노동해야 했다.  

수리남에서 van Andel 씨는 노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 -쌀을 포함하여- 이 논의되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북미의 수익성 좋은 쌀 플랜테이션을 도왔던 벼와 농사법을 가져왔는가? 기존 이론의 대부분은 노예는 주인이 시킨 일을 수행한 무지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벼 해안"에 있는 국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작물에 대한 지식을 가져왔다. Wageningen University


그 논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번서아는 벼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프리카인 노예의 사례를 제시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벼 역사학자이지 지리학 교수인 Judith Carney 씨가 2002년 저술한 책 Black Rice에 의해 촉발되었다. 벼는 식민지 시대 초기의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작물의 하나였으며, 최대 25%의 수익을 올렸다. 아프리카의 쌀은 짙은색의 겉껍질이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3개월의 항해 동안 배에 가득 실린 노예들을 먹이기 위해 사용된 단단한 곡물로 제공되었다. 다수확의 아시아의 벼가 결국 플랜테이션을 장악하였지만, 아프리카의 쌀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은 신세계에서 탄탄히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경작술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오랫동안 활용하던 전통적 벼 농사법을 문서화하며 서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낸 Carney 씨는 신세계에서 벼농사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들이 파종, 도정, 요리하던 방법만이 아니라 벼를 경작한 미소환경을 아프리카 여성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그녀는 노예 소유주들의희소하고 편향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서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공들여 짜맞추었다."미국 혁명까지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농촌 지역처럼 절구와 절구공이로 도정을 했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전설에서는, 배를 타기 전에 여성들이 머리카락 속에 아직 도정하지 않아 씨앗으로 쓸 수 있던 볍씨를 어떻게 숨겼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연구는 "아프리카 대리인(African agency)"이라는 개념 -노예들이 적어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언어 구사력을 가졌다는 개념- 을 뒷받침했다. 

Carney 씨의 조사는 최초로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업의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주장한 듀크 대학의 노예사학자 Peter Wood 씨의 연구에 기초한다. "1974년에 그것은 진보적 개념이었고, 수십 년 동안 열띤 반응이 나타났다."고 Carney 씨는 이야기한다.

Carney 씨 역시 학술적 비판에 시달렸다.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노예 소유주는 아무도 자신의 노예가 벼를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그러다 van Andel 씨의 연구에 관한 말이 나왔다. 2006년 그녀의 수리남 여행에 관한 강연을 한 이후에 van Andel 씨는 Black Rice를 읽은 대학원생 청중에게 그곳에서 벼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해 보니, 사실 어딘가에서 제례용 쌀 봉지를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는 그 샘플이 아프리카의 쌀이라고 결정되었을 때 나중에 외쳤다. 명백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추적이 가능한 총알이었다. 


마론으로 알려진 도주 노예들은 수리남의 열대우림에 숨어서 독립을 유지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와 문화를 확립했다. Tinde van Andel


van Andel 씨를 비롯한 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한 흰쌀인 아시아의 벼가 미국의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널리 믿었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의 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식물 자체가 수리남에서 재배되었으며 쌀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걸 문서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녀는 수리남의 약용식물에 대한 현지조사를 끝마쳤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는 2008년 Paramaribo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표본을 찾기 위해 하루 만에 그녀는 약용식물 목록을 조사한 마을인 Mundje Kreek에 사는 친구 Berto Poeketie 씨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지역에서 검은쌀을 재배한다고 알려진 여성인 Emelina Koese 씨와 연결해 주었다. Koese 씨는 —그 지방에서 가장 널리 믿는 Winti 같은 종교를 지닌 여러 마을 주민들처럼— 외부인을 의심했고, 따라서 그녀의 지식을 낯선 이와공유하길 주저했다. 숲에서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Koese 씨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나무에 걸어 놓고 도난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초, 뼈, 천조각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 밖에서 큰삼각머리독사와 맞닥뜨리면 백인은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신호라고 Koese 씨는 해석했다. 결국 van Andel 씨는 식물체 하나와 사진 한 장만 원하며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곳은 내가 모든 중요한 제례용 식물이 뿌리째 뽑혔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마을의 바깥에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회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쌀의 활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량의 아프리카 쌀이 조상에게 제물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마법' 식물과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이 특별하게 하나에 관해 묻는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나누고 싶어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들이 당신도 무언가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과 대화하는 걸 가치 있다고 결정한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서 현재 아프리카 벼를 재배한다는 걸 확인했을 때, 아프리카의 벼가 노예 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와 관련된 쌀 농사법이 아프리카인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 Carney 씨의 이론이 지지를 받았다고 2010년 그 발견에 대해 발표한 Economic Botany의 편집장 Robert Voeks 씨는말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시작에 불과했다. 벼가 어떻게 수리남에 이르렀는지 탐험하고자 했던 van Andel 씨는 언어학과 벼 유전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노예들의 이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창이 열렸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 있으면서 떨칠 수 없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왜 마룬들은 인근의 토착민들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이용했을까? 그녀는 다른 이름과 응용법 및 준비는 아프리카의 유산과 혼합되었을 가능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2010-2012년, 그녀는 가나와 베냉, 가봉을 방문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수백 만 명의 노예가 강제 이주된 350년 동안 식물학적 이해에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무엇을 잊었으며, 무엇을 기억했고, 어떤 적응이 필요했는가?


Tinde van Ande 씨의 수리남의 벼에 대한 연구는 그녀를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데리고 갔고, 수리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식물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Christiaan van der Hoeven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을 다니면서 van Andel 씨는 수리남의 식물 이름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수리남의 수많은 식물명은 아프리카에 기반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수리남의 식물명 2350개를 서아프리카의 그것과 비교했다. 마룬의 토착어 가운데 40% 이상이 소리, 구조,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식물명과 닮았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인의 눈을 통해" 식물군을 보았다고 한다. 학술 문헌을 활용해 그녀는 다른 나라의 식물명과도 비교했다. 가장 이목을 끄는 유사함은 네덜란드가 노예를 구매한 주요 지역인 가봉과 앙골라의 식물명에서 발견되었다. 2014년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된 그녀의 논문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식물군의 상당 부분을 인지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노예가 신세계에 왔고 아무 역사가 없으며 텅빈 석판이었다는 건 구식의 사고방식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당신이 기억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이 된다. 열대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매우 다르지만, 식물 군집에는 겹치는 부분이 조금 있다. "열대우림의 종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지식이 마룬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Voeks 씨도 동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을 가져와서 남아 있는 종이나 속과 유사한 것들을 이에 겹치게 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생태학적 변화의 중요한 대리인이었다."

Van Andel 씨는 마룬의 벼가 유전자만 얻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걸 추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5년 남아프리카 Western Cape에서 열린 회이에서 van Andel 씨는 뉴욕대학의 박사후 연구원 Rachel Meyer 씨를 만나 마룬과 아프리카의 토종 벼의 게놈의 염기서열이 일치하는지 함께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2016년 10월,  Carney 씨를 포함한 연구진은 마룬 벼의 기원이 기니아 고원의 국가들, 특히 코트디부아르 서부에 있다고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Nature Plants에 발표했다. 네덜란드는 가나와 베냉, 중앙 아프리카에서 노예의 대부분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노예선의 기록에 의하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식료품을 확보했다고 나온다.

"우리의 연구는 인구 이동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식물의 염기서열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그녀는말한다.

마룬 벼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분야 -역사학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식물을 활용- 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생물분자 고고학자 Terry Brown 씨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의 작물의 기원을 정확히 찾아내고자 유전학이 사용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인간 이주에 대한 대용물로 식물이 사용된 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마룬이 재배하는 수리남의 여러 벼 품종은 서아프리카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 Tinde van Andel


인간의 이주를 추적하고자 식물의 유전학을 활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식물의 재생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덜 복잡하며, 경작의 흔적은 인간에게 식물의 가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은 '토요일 밤의 효과'가 있다. 수컷은 짧은 거리를 가서 이주하지 않고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붙어 있어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보여준다. 

노예가 경작한 신세계의 벼와 아프리카에 있는 그 기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 외에도, 새로운 유전적 기술들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농업의 기원이 갑자기 발명도었다는 개념을 뒤집었다. "우리는 이제 농업의 기원이 초기의 수렵채집민이 야생 식물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확립되기까지 8000-9000년이 걸린 오래 계속된 과정이라고 믿는다."고  Brown 씨는 말한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작물화된 보리와 밀의 게놈을 이용하여 그것이 단일한 근원의 개체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교잡된 것임을 증명한다. 

van Andel 씨에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노예제의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 그녀는 오크라부터 얌과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더 노력하여 다른 작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정말로 알고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이 물어봐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녀는 마룬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돕길 희망한다. 

이를 위하여 van Andel 씨는 최근 프랑스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민족식물학자 Marie Fleury 씨와 함께 수리남 동부에 이웃한 프랑스령 기아나의 마룬 공동체를 탐사하기 위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과학 및 탐사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았다. 이 연구진은 올해 여름 벼가 익었을 때 현지조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마룬의 문화는 그녀가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리남 마룬의 작은 집단이 네덜란드에서 그녀 근처에 살고 있다. 사실, 제례에 사용된 신성한 식물은 두 나라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되었다. 예를 들어 Winti가 1971년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관습이 살아 있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차별을 당했고, 때로는 숲에 살고 있는 퇴보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녀의 노력이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혀준다면, 마룬은 식물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이들 간과된 작물 품종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마룬의 경우, 벼 재배는 전통 종교 뿐만 아니라 역사도 살아 있어 사람들이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노예 국가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https://www.sapiens.org/culture/african-rice-new-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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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식물을 이용해 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이 농경을 시작한 것이 이른바 "신석기 혁명"이라 부르는 무렵이라고 보면, 식물을 이용한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더 오래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도 식물을 이용한 여러 유적과 유물들, 그리고 식물체들이 발굴되고 있다. 당시에는 수렵과 채집이라는 생업 양식을 통하여 야생의 식물을 먹을거리로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농경이 시작되면서는 양상이 달라진다. 야생의 식물을 이른바 작물로 길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야생의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는 과정을 가축화, 야생의 식물을 작물로 길들이는 과정을 작물화라고 한다. 서아시아 쪽에서는 그 지역에서 발굴되는 작물과 관련된 여러 유물을 통해 대략 1만 년 전을 전후하여 밀이 작물로 길들여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른 무엇보다 밀이 갖는 상징성과 중요성 때문에 그렇지 여타의 식물들도 작물로 길들여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https://seedinginnovation.org/milestones-in-plant-breeding/




아무튼 그 이후 농민들은 여러 가지 식물을 작물로 길들이게 된다. 인간이 한 식물을 작물로 길들이고, 또 그 작물에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일을 우리는 육종이라 부른다. 그러한 과정에서 활용하는 육종의 방법 가운데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도입 육종"이라든지, "분리 육종"이라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도입 육종은 말 그대로 한 작물이나 그 품종들을 외부의 다른 곳에서 가지고 들어와 재배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토종 씨앗을 수집하러 할머니들을 만나보면 한번쯤 듣는 이야기가 있다. 


"이거? 이거는 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거야. 친정 엄마가 이게 좋다고 해서 가져 왔지."


이런 이야기 아니면, 


"그거 내가 이웃 마을에 갔더니 그게 좋다고 해서 얻어다가 계속 심는 거지." 하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이렇게 어떤 작물의 씨앗을 외부에서 새로 가져와 재배하는 방식을 분류하자면, 도입 육종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분리 육종은 이런 것이다. 어떤 작물을 어느 논밭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우연히 자연적으로 돌연변이가 발생하든지, 아니면 자연 교잡을 통해서 요상하게 생기거나 맛이 다르거나 색이 다른, 아무튼 기존에 재배하던 작물과는 다른 특성을 보이는 개체가 생긴다. 그럼 눈 밝고 부지런한 농민 같은 경우, 그걸 그냥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그놈의 씨앗을 따로 받아서 잘 챙겨 놓았다고 이듬해에 다시 심는다. 그러면 거기에서 내가 원하던 특성을 지닌 놈도 나오고 아닌 놈도 나오고 제각각이다. 그럼 그중에서 또 내가 원하는 특성을 지닌 걸따로 골라내 씨앗을 받아 이듬해에 또 농사를 짓고, 다시 그 과정을 해마다 반복하다 보면 드디어 다른 특성이 아닌 내가 바라는 특성만 나타나는 품종이 생기게 된다. 이게 바로 분리 육종의 과정이다. 


과거의 농민들은 대략 이 두 가지 방식을 이용해서 새로운 품종, 이른바 신품종이라거나 개량종이라 부르는 걸 만들어 왔다. 농민이 곧 육종가인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던 방식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크게 변화하게 된다. 20세기에 일어난 변화의 뿌리는 1800년대의 인물인 멘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 중학교 생물시간부터 배웠던 그 수도사 그레고어 멘델이다. 완두를 가지고 흰꽃 붉은꽃 골라가며 무언가 해서 시험 문제에 등장하던 그 멘델이다. 작물 육종의 역사에서는 그를 빼놓을 수 없다.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부르는 그의 발견이 처음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어디 수도사가 심심풀이 땅콩처럼 행한 실험이겠거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1900년대에 들어와 다른 식물학자들이 비슷한 연구를 통해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전에도 이런 선행연구가 있었나 찾아보다가 멘델이 발표한 논문을 발견하게 되면 재평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멘델의 법칙의 재발견"이라고도 부르더라. 아래 도표를 보면 멘델의 유전법칙이 색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만큼 그의 발견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며 그 중요성이 높아서 그렇다. 


https://www.euroseeds.eu/sites/default/files/esa_plant-breeding-evolution_ppt_final.jpeg



멘델의 실험 이후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학문이란 게 다 그렇듯이, 모두 손을 놓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멘델과 유사한 실험이 있었고, 그를 계기로 멘델의 법칙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은 아니란 말이다. 꾸준히 계속해서 여러 연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중에 굵직굵직한 사건 몇 가지를 보면 1880년대에 있었던 라이밀 육종이 있다. 이는 밀과 호밀을 교잡한 신품종이다. 첫 교잡은 1875년에 있었고, 첫 타가수정은 1888년에 있었다고한다. 이게 중요한 건 예전에는 육종이란 것이 우연히,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교잡과 돌연변이의 발생에 의존했다면, 이 무렵부터는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발생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인류는 이를 기점으로, 수많은 육종 시도를 통해 새로운 품종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와 경험이 바탕이되어 190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녹색혁명"이라 평가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사건 하나라도 어느 날 갑자기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다시 위의 도표를 보자. 1900년에는 교잡 육종이란 게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어느 한 작물의 꽃에 있는 꽃가루를 다른 꽃에 수정시키는 것이다. 그를 통해 무엇이 탄생할지는 알 수 없다.유전자가 어떻게 조합이 되어 어떤 특성이 발현되느냐에 달린 문제니까 말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자연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거나 발견할 필요 없이, 내가 마음 먹으면 그걸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1920년이 되면 처음으로 "잡종강세"라는 현상을 이용한 육종이 시작된다. 이 무렵부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품종 또는 개량종의 대명사 F1 품종이 상품화되면서부터 종자 시장을 휩쓸게 되는 것이다. 잡종강세라는 건 어느 생물에게서나 다 일어나는 일로서, 흔히 부모보다 나은 자식이 태어나는 걸 가리킨다. 작물의 경우 A라는 작물 품종과 B라는 작물 품종을 교잡시키면 그 자손의 첫 세대, 즉 F1에서는 부모들이 지닌 유전적으로 우세한 특성이 발현되게 되어 있다. 이 현상을 이용해 A와 B라는 작물의 품종에 있는 인간이 바라는 특성만 F1에서 발현되도록 종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제 씨앗을 나누어 준다든지 함께 쓴다든지 하는 방식의 시대에서 이른바 상품성이 좋은 작물이 수확되는 종자를 사고파는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에도 육종법은 계속해서 새로운 발견과 발전을 거듭하여, 돌연변이 육종법 같은 방식도 나타난다. 이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X선이나 방사선, 화학약품 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식물에게서 수많은 돌연변이가 발생하도록 한 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놈을 하나의 품종으로 고정시키는 방법이다. 영화 X맨 같은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또 조직 배양 같은 방식도 있었지만, 영양체로 번식하는 식물 아닌 이상 별로 각광은 받지 못했다.


그보다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바로 유전공학을 이용한 육종법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멘델이나 그 이후의 학자들이 연구한 건 유전학(Genetics)이다. 아, 유전이란 이런 것이고, 유전자가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학문이 유전학이라면,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은 말 그대로 유전자를 인간의 목적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조작하고 가공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식물의 유전자를 이렇게 저렇게 조작하고 변경하여 인간의 입맛에 맞는 작물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온 것이다. 그렇게 개발한 작물이 처음으로 상용화된 것이 다들 잘 알다시피 1996년 미국에서부터이다. 지금은 그 영토가 엄청나게 확장되어 주로 신대륙이라 부르는 남북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구대륙이라 할 수 있는 유럽과 아시아 쪽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와 반발로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고 있다. 이들이 분포역을 보면 또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 흥미롭지만, 여기서는 그냥 1990년대에 처음 상용화되어 농지가 광대한 신대륙 위주로 널리 분포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가도록 하자.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탄생한 유전자변형 작물(GMO)를 파괴의 씨앗이니 악마의 작물이니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그러니까 일종의 프랑켄슈타인 같은 입장일 뿐이다. 모두 우리 인간, 그리고 우리가 모여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가 요구하여 탄생시킨 작품일 것이다. 우리의 사회와 시대적 요구, 그리고 인간이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할 것인지 합의하고 조율하여 접근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이런 걸 개발하여 재배하고 판매하는 것 자체가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따지는 건 소모적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쉽지 않은 문제로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최근 들어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육종법이 개발되었다. 중국의 허젠쿠이라는 과학자가 유전자 편집을 통해 아기를 만들어냈다는 소식은 다들 잘 알 것이다. 바로 그 방법을 식물에 활용하여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유전자 편집 작물이 상용화되어 등장할 날도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유전공학의 방법은 육종을 하는 인간이 의도하는 바를 매우 정확하고 빠르게 식물에게서 구현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주목을 받으며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분명 20세기에 들어와 산업사회가 무섭게 확장되면서 내건 기치 -생산성, 효율성, 균질성 등등- 가 인간의 경제와 문화는 물론 과학과 농업에도 구석구석 영향을 미친 결과이리라. 21세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여전히 20세기의 가치가 유효하게 그 세력을 더욱더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기이고 이전 세기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던 만큼 사람들이 새로운 기치에 합의하고 그를 표방할 것인가? 육종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일까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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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최초로 옥수수의 유전자 유전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됨.
1921년. 이중교배에 의한 교잡종 옥수수가 상업화됨.
1960년대. 1대 잡종에 의한 교잡종 옥수수가 퍼지기 시작함.
1980년대. 유전자 표식과 삽입에 관한 연구가 시작됨.
1996년. 미국에서 최초로 유전자변형 옥수수가 상업화됨.

옥수수의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지 불과 110여 년 만에 정말 엄청난 변화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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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짧고 뭉툭한 형태에서 오늘날 우리가 좋아하는 긴 자루와 즙 많은 알갱이를 지닌 옥수수가 되었다.




미국은 옥수수의 나라이다. 그러나 4천 년 전에는 멕시코에서 미국 남서부로 들어와 퍼진 외래종이었다. 새로운 연구에서 이 작물이 여행한 경로를 조사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유전적 변화를 재구성했다.


그 결과는 “유전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이해에 정말로 중요한 진전이며, 옥수수의 진화사이다”라고 이 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고대 아리조나 주의 초기 농업을 연구하는 뉴멕시코 대학의 고고학자 Bruce Huckell 씨는 이야기한다.


옥수수의 야생종은 멕시코 중부의 온습한 환경에서 자라는 풀의 일종인 테오신테teosinte이다. 이곳에서 6천~1만 년 전의 어느 때 처음으로 작물화되었다. 약 4천 년 전, 옥수수가 지금의 미국 남서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그러한 여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하나는 태평양 연안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남서부에서 재배되기 전 먼저 멕시코 중부의 더 춥고 건조한 고원지대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것이 바로 옥수수의 조상이라 하는 테오신테의 모습이다. 열매는 보잘 것 없고, 잎과 줄기만 무성하다.




옥수수가 여행한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코펜하겐 대학에서 원시 게놈학을 연구하는 M. Thomas Gilbert 씨와 동료들이 멕시코와 미국 남서부에서 가져온 고대의 옥수수 자루 32개의 DNA를 비교했다. 그들은 가장 오래된 미국 남서부의 옥수수 샘플 —3천 년 전의 것— 이 해안을 따라 자란 품종보다 멕시코 고원지대의 옥수수와 유전적으로 더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Nature Plants에 발표했다. 


그러나 더 최근에 가까운 샘플에서는 해안의 품종과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옥수수가 “처음에는 고원의 길을 갔다”는 것을 제시한다고 Gilbert 씨는 말한다. 그러나 아직 작물화의 초기 단계였던 그 작물은 아마 고도가 높거나 건조한 미국 남서부에서는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몇 백 년이 지나면서 농민들이 “시간을 들여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다른 곳의 품종과 교잡시켰다”고 그는 말한다.


연구팀은 현대의 옥수수가 향한 진화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농민들이 육종으로 옥수수에서 없애버린 첫 번째 특성은 야생 식물들이 보통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탁 튀어 나가는 탈립성이었다. 어떤 작물의 씨앗을 받아서 이듬해에 심으려고 한다면 “매우 매우 짜증나는 특성이다”라고 Gilbert 씨는 말한다. 그러고 나서 몇 백 년에 걸쳐, 농민들은 미국 남서부의 건조한 환경에서도 번성할 수 있도록 가뭄 저항성 옥수수를 육종했다. 마지막으로 불과 1천 년 전에 맛을 향상시키고, 영양성분을 개선하며, 또르띠야와 타말리 같은 음식을 만들기 쉽도록 가공하기 더 편한 알이 달리게 육종했다. “우리가 식료품점에 가면 볼 수 있는 옥수수처럼 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라고 Gilbert 씨는 말한다.


이 연구는 “옥수수의 확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전에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함을 보여준다”고 멕시코 남서부와 북부의 초기 농업을 연구하는 텍사스 대학의 고고학자 Robert Hard 씨는 말한다. 그러나 이 그림을 완성하려면 더 많은 고고학 자료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의 옥수수 원산지 사이의 지역인 멕시코 북부의 광대한 땅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고 Hard 씨는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이해에는 커다란 빈틈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원문: http://news.sciencemag.org/archaeology/2015/01/how-corn-became-c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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