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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덕(1858-1932)     신천 농민학교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천

 

왕재덕(王在德)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청상과부가 된 후 혼자서 3남매를 키우면서 굉장한 치재(治財)를 하여, 황해도 신천에 농민학교를 설립한 일제하 민족교육의 실천가이다. 또한 그의 아들과 사위는 항일민족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고, 왕재덕 자신도 적지 않은 군자금을 마련해주었던 한민족의 의로운 어머니였다.

왕재덕


1910년 12월 일제는 전국의 민족운동자를 체포하고자 소위 안악(安岳)사건을 꾸몄다. 이때 그의 아들 이승조도 안명근(安明根: 安重根 義士 四寸), 김구(金九) 등과 더불어 옥고를 치르고 울분으로 병사하였다. 또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은 그의 사위가 된다. 이처럼 항일민족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진 그는 1858년 6월 18일(陰)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부농인 왕시권(王時權)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나 언니가 죽어 실제로는 무남독녀였다. 18세에 같은 신천의 이영식(李永植)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남매와 유복자를 가진 채 과부가 되었다. 그는 그의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3남매의 교육과 치산(治産)에 남다른 힘을 썼다.

♠ 치산에 힘써 대지주로 성장
그가 과부가 되었을 때 그는 3백석을 추수하는 토지(약 3만원의 가치)를 유산으로 받았으므로, 한평생을 능히 편안하게 살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몸소 팔을 거두고 농사일을 비롯하여 돈이 되는 일에 머리를 쓰고 노력을 하여, 만년에는 만석지기 대지주가 되었다. 그가 여자의 몸으로 이처럼 큰 재산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우수한 농업경영 능력을 들 수 있다. 둘째는 몸을 돌보지 않는 자신의 노력이다. 셋째는 반드시 해내겠다는 투철한 투지와 근검절약의 생활이라 하겠다.

그가 7일경(耕)의 면화농사를 몸소 지을 때 일년이면 약 9천근(50포)의 면화송이를 따야 했다.
서양에서도 면화는 흔히 흑인 노예로 하여금 따게 하는 중노동이다. 그런데 부자집 마님이나 다름없는 그가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면화송이를 땄다. 어떤 때는 몸이 너무 피곤하여 흰 돌조각이나 사금파리를 땅에 떨어진 면화인 줄 알고 주운 일이 있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였다. 면화 농사는 노력한 만큼의 높은 이익이 나지 않음을 알고 그는 다시 좁쌀 농사에 착수하였다. 좁쌀은 평안도 일대에서 많이 소비되는 곡식이며, 면화에 비하여 농사손이 덜 가면서도 이익이 좋아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신천 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을 때도 추수한 벼를 그대로 파는 일이 없었다. 벼를 배에 실어 진남포의 정미소로 운반해 도정한 후 백미를 다시 평양(平壤) 등의 도회지에 내다 판다. 이처럼 산지(産地)에서의 산출로부터 대도회지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의 이윤을 수입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늘어나는 이윤으로는 값싼 황무지를 사서 개간하여 옥토(沃土)를 만들곤 하여 마침내 대지주로 성장한 것이다. 그가 토지를 매입할 때는 절대로 옥토를 사지 않고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초지(草地)와 같은 값싼 땅을 사서 그것을 개간하면 값비싼 땅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농지경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원래 황무지 개간은 너무도 힘드는 일이므로 옛날에도 권세가가 아니면 엄두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과부의 몸으로 해냈다는 것은 그가 가히 장부로서의 기개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토지를 생명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토지에 관한 일이면 그 상대가 누가 되건 결코 양보하는 일이 없다. 그는 무학이었지만 머리가 명석하여 자신의 토지 평수와 추수기와 현금출납에 환하여 장부책보다도 더 정확하였다. 또한 사리가 분명하고 교제에도 능하였으며, 후리후리한 키에 다소 억세게 생겼으되 깔끔하게 다듬어 쪽찐 머리 등 외모는 가히 남을 위압할 만한 풍모까지를 지녀 그는 한눈에 보아도 투지가 강한 여성으로 보였다.

한번은 토지 소유문제로 인하여 서울의 유력자와 소송이 붙었다. 상대방은 변호사까지 대고 소송을 하였으나 왕재덕은

‘법이 따로 있나, 경우가 법이지!’
하고 조리있게 항변하여 승소하였던 일이 있다. 또 군청에 제출한 토지증서가 몇 번씩 퇴각을 당하자 감농(監農)할 때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타고 관청에 들어가 담당직원 앞에 서류를 내놓고

‘여기 틀린 데만 골라서 기입해주시오.’
하고는 준비해간 담배를 군 서기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아무 말없이 끈질기게 앉아 기다려 서류를 완비해온 일이 있었다.
신천 온천 일대에는 왕재덕의 땅이 적지 아니 있었다. 그런데 구한 말 이래의 매국노의 한 사람인 세도 당당한 송병준이 신천 온천에 있는 초생지를 논으로 개간하는 데 왕재덕의 전답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여러 해 소송 끝에 승소하여 오히려 그 땅을 매입하고 말았다. 토지에 대한 그의 투지력은 세도 당당한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까지도 굴복시켰다. 조선철도회사에서 사리원 신천간에 철도를 놓고 철도 호텔을 신축하고 육군전지요양소를 설치할 때였다. 어느 일본인이 여관을 지으려고 대지를 샀는데 그 대지 한가운데에 왕재덕의 땅 99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본인은 그녀를 우습게 보았던지 그 땅을 정식으로 매입하지도 않고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강한 항의로 공사는 중단되고 싯가 50전의 땅값을 올려 10원까지 갔으나 결코 팔지 아니하여 일본인은 크게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철도회사에서 신천온천 역사를 지을 때도 역을 지을 땅을 팔라는 교섭을 받았으나 끝까지 버티다가 관청의 설득으로 싯가의 6배가 되는 값을 받고야 팔았던 것이다.

♠ 생활개선운동 펴고,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 제공
만석군으로서의 그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평상의 삶을 살펴보면 검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의복은 항상 목면으로 깨끗하게 입었고 평생 군것질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무엇이나 비합리적인 것은 개선, 개혁하여야 한다는 진보적 의식을 가졌으며 이를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실천가이기도 하였다. 생활개선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27년 그녀는 부인생활개선을 주장하였다.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는 큰머리를 올리느라 월자(月子)를 값비싸게 구입하여 썼다. 왕재덕은 이것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낭비라고 주장한 끝에 서울에서 비녀 80개를 사다가 부인 80명을 자기 집에 불러 모두 나누어 주었다.

농촌 부녀자들의 목화 고르기 작업 장면


또한 자신의 소작인들에게 금주ㆍ금연을 권고하여 새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또 흉년이 들 때면 소작료를 감해주고 극빈자에게는 곡식을 풀어 끼니를 잇게 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배려를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군자금을 건네주고 국내외의 비밀연락도 하였던 장부였다.

♠ 농업학교 설립, 전재산 헌납
왕재덕이 한평생을 토지로써 치부(致富)한 것은 일신의 영화나 자손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농업으로 성공한 그녀는 농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농촌을 구제하려면 농민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농촌계몽운동이 크게 일고 있었으며, 또 덴마아크가 고등농민학교를 세워 세계의 모범적인 농업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재덕은 농민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29년 그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신천 북부면 서호리에 있는 10만 평의 토지와 현금 1만 원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25평의 교실 2개와 직원실을 짓고 방 24개의 기숙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수원농민고등학교 출신을 교사로 초빙하여 40명의 학생을 입학시켜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 12일에 신천농민학교 인가를 정식으로 받았다. 이에 학생 수도 증가되었다. 다시 학교를 증축하도록 6만 원의 거액을 희사하였다. 그러자 교사의 수도 늘고 농사실험장도 만들었다. 이제 농민학교의 틀이 잡혀가 농민학교를 농업학교로 개칭하게 되었고 20만원의 재단법인도 설립하여 성공적인 농업학교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그는 자녀가 있는 분이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 남기지 아니하고 2천만 민족에게 남기었다는 것은 실로 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2년 5월 8일 그녀는 74세를 일기로 위대한 한 생을 이민족의 핍박으로 신음하는 한민족의 큰 별이 되어 이승을 떠났다.

글:박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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