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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저수지 또는 마산방죽이라고 불리는 저수지를 말합니다.

아래에 관련 사이트와 그 내용중 일부를 적습니다.  참조하세요

 

1.

http://www.gunsansi.co.kr/history/history_data_4_1.html

 

옥구간척지의 관개를 위하여 1923년에 만들어진 탱크형 저수지다.  옥구저수지는 주변 제방 길이만도 6.087 m로 대규모며 특히 집수구역이 없이 빗물과 완주군의 대아저수지에서 농한기에 대간선 수로와 만경강 지류를  이용하여 용수를  공급받는 저수지이다. 본래 간석지였으므로 바닥의 높이가 거의 일정하다. 바로 옆에는 옥녀저수지가 있는데 그또한 탱크저수지로 규모가 조금 작다. 미면 간척지에 관개하고 있는 저수지다.

 

2.

http://www.gunsan.go.kr/t_culture/right_t_culture013.html

1998년말 현재 군산시의 면적은 376,366,813평방미터로 대략 1억 1,385만평 정도가 되는데 개항 당시와 현재의 지형 모습을 비교하여 보면 엄청난 면적이 간척과 매립사업을 통하여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와 60년대의 식량증산을 위한 간척사업과 70년대 이후에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매립사업을 통해 군산은 그 모습을 시시각각으로 변화시켜 왔으며 이를 발전의 기틀로 삼아 서해안시대의 중추도시로 성장해 가고 있다.

 간 척 : 간석지나 갯벌을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로 사용하면 간척지
 매 립 : 간척지에 흙을 더 돋우어 높여 시가지나 공업단지 등으로 사용하면 매립지


 일제시대의 간척

1920년 이전의 군산시의 서부지역은 입이도와 가래도, 내초도와 오식도 그리고 가도와 비응도, 무의인도 등 여러개의 섬이 있었고 은적사 앞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즉, 옥구군 일부와 옥서면, 그리고 산북동 평야의 거의 전지역이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불이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가 당시 섬이었던 무의인도(현재의 옥서면 옥봉리)까지의 6km와 어은리에서 알산도(미성동 옥선마을)까지 모두 14km의 방조제를 축조하여 2,500ha(750만평)를 간척하고 320ha는 옥구저수지로 하고 180ha는 수로와 도로 등으로 사용하는 등 500ha를 제외한 2,000ha(600만평)를 농경지로 간척하였다.

이 중 군산과 가까운 옥구저수지 북쪽의 1,000ha에 일본 농업이민 1,630명을 이주시켜 새로운 일본인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이 곳이 현재의 미성동 일부지역이며 남쪽의 1,000ha 에는 우리나라의 소작농 800호를 이주시켜 개간을 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나포면 옥곤리에서 서포리까지의 금강연안 십자뜰과 회현면 금광리와 학당리에서 대야면 죽산리와 접산리까지의 선을 경계로 만경강 하구까지 이르는 대야뜰 그리고 옥구읍 상평리에서 이곡리와 수산리까지 동쪽으로는 회현면 월연리와 금광리까지 이어진 수산 이곡 뜰도 간척사업을 통하여 새로 조성된 개척답이다.


 해방이후의 간척과 매립


 1960년대에는 내초도 동쪽의 미면간척지가 조성되어 국가유공자들에게 분배가 되었고 1985년도에는 162만평이 갯벌에서 지방산업단지로 탈바꿈되었으며 1994년에는 지방산업 단지와 연결된 군산국가산업단지 207만평이 매립되어 자동차공장이 입주해 있고 현재도 군장국가산업단지조성사업과 새만금사업등 대규모 매립사업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3. 
 http://www.gunsan.go.kr/port100/%EA%B8%B0%EB%A1%9D%EC%82%AC%EC%A7%84/H_open10.html

일본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수리개간업체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불이흥업주식회사이다. 이들은 1904년 한국에 들어와서 전라북도 익산군과 옥구군  지방에 농장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1920년부터 3개년에 걸쳐 당시 섬이었던 무의인도(無衣人島:현재 옥서 옥봉리)까지의 6km와 알산도(卵山)에서 어은리까지 8km등 총 14km의 방조제를 축조하고 개간 하게 된다.

 이곳은 기후조건이 좋고 중앙에 322정보의 대저수지(옥구저수지)가 있어 농경여건은 완전하였다.

 면적은 총 2,500정보로서 저수지등을 제외한 이용면적은 1,850정보였다. 군산부에서 원거리인 남부지역은 조선인에게 소작을 주고, 가까운 북부 1,000정보는 일본인을 이식(移植)하였다.

 

4.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66200

'군산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어디 물을 쓰나
일제강점기 때는 농업용수, 지금은 미군기지 생활용수로 쓰이는 마산 방죽
    배지영(okbjy) 기자     
  
 
▲ 군산 마산 방죽을 둘러싸고 있는 길. 
 
ⓒ2005 배지영
 
비는 사흘 내내 내렸다. 잦아드는가 싶으면 또 거세졌다. 일요일 한낮, 빗줄기가 잦아들 때 나갈 준비를 했다. 아이는 제발 집에 좀 있자고 했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집만 어지럽히면서 서로 싸울 게 뻔했다.

집에서 가까운, 군산시 옥구읍에 있는 마산 방죽에 갔다. 공식 명칭은 옥구 저수지이지만 그 이름 그대로 부르는 사람은 몇 명 없다.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에 빗줄기는 다시 거세졌다. 아이보고 차에 있으라고 해도 따라 나왔다. 흙탕물처럼 보이는 거대한 방죽에 목이 긴 새들이 날고 있었다.

방죽 옆은 평화로운 옛 시골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포장이 안 된 길 양 옆으로는 들꽃이 피어 있고, 수많은 잠자리 떼와 참새 떼들이 날았다 내려앉았다 했다. 걷다 보면 저절로 평온해지는 이 길에서 마산 방죽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사람들 가슴 속에서는 '한일 축구 경기'를 볼 때처럼 짐승 한 마리씩 튀어나올지 모른다.

 
 
▲ 옛 시골길 같은 길 옆으로 마산 방죽이 보인다. 
 
ⓒ2005 배지영
 
 
 
▲ 마산 방죽, 군산 미군 기지 생활 용수로 쓰인다. 
 
ⓒ2005 배지영
 
마산 방죽은 변변한 장비도 없던 일제 강점기 때 쌀농사를 지을 물을 얻으려고 사람들 힘으로만 팠다. 김제나 부안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3년 동안 팠다. 그 긴긴 시간 동안 어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더구나 한일병합이 되고 난 1920년부터 1923년에 걸쳐 맨 땅을 바다처럼 넓고 깊게 파들어갔는데.

마산 방죽이 없었을 적에 옥구읍 일대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모를 심을 수 있는 '천수답'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마산 방죽이 생기고부터는 그 물을 끌어서 농사를 짓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그 어느 곳보다 일본인 농장 지주들이 가장 많았던 군산은 항구를 끼고 있기도 하지만 들도 아주 넓다.

나는 대학 다닐 때에 마산 방죽을 처음 봤다. 그 때는 전국을 도는 데모대가 꼭 군산에 들렀다. 군산 사람들이 특별히 데모를 못해서 데모 법을 전수해주러 오거나, 특별히 데모 고수들이 많아서 한 수 배울 게 있어서가 아니었다. 군산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땅이라고 써 놓은 미군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산 방죽을 처음 본 날도 떼를 지은 데모대가 군산에 왔다. 전날, 선전물을 만드느라 밤을 샜던 나는 자취방에 씻으러 갔다가 잠들고 말았다. 뒤늦게 미군 기지에 갔는데 이미 학생 몇이 미군기지 안으로 들어가는 걸 시도했고, 데모대는 어디론가 쓸려가 버린 뒤였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버스를 잘 못 타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마산 방죽 옆을 바짝 붙어 지났다. 하도 넓은데다 고요하지도 않아서 바다인 줄 알았다.

 
 
▲ 처음에 봤을 때는 바다인 줄 알았다. 
 
ⓒ2005 배지영
 

 
 
▲ 미군 기지 생활용수로 쓰이기 전에는 방죽 근처에 매운탕집이 많았다고 한다. 
 
ⓒ2005 배지영
 
월요일 아침, 다른 날보다 어쩐지 부담스럽고 바쁜데 남편이 마산 방죽 물을 미군 기지에서 생활용수로 쓴다고 했다. 그것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쓴다고 했다. 어떻게 아냐니까 어디서 들었다고 자료는 찾아다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당장 알고 싶어서 시댁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궁금한 거 있어서 전화했어요."
"으응. 뭐라도 말만 해 봐라."
"근데 15년 전쯤부터 마산 방죽 물로 농사 안 짓는다고 하셨잖아요. 왜 그래요?"
"비행장 미국 놈들이 그 물을 쓴단다."
"그럼 농사는 어떻게 지어요?"
"걱정 없지, 저어~ 금강, 충청도에서 끌어다 농사짓지."

 
 
▲ 마산 방죽이 있는 마을 
 
ⓒ2005 배지영
 
아버지 말씀을 잊어버릴까 봐 적고 있는데 요새 뜬금없이 묻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옆에서 고향이 뭐냐고 물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 아빠하고 너는 군산이 고향, 엄마는 영광이 고향."
"아니지, 엄마 고향은 '군산 영광'이지."

아이는 전날도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아무래도 '군산 영광'이라고 못 박고 싶어서 또 그런 모양이었다. 이런 아이가 더 자라서 군산 안에 진짜로 있는 미국 땅 캘리포니아, '군산 캘리포니아'를 알게 되면 어떨까.

군산 소룡동에서 군산 미군기지까지 달렸다가 되돌아오면 그 길이가 마라톤 하프코스랑 딱 맞다. 그래서 거기를 서너 번쯤 달린 적 있다. 내가 집에서 차를 타고 나와 소룡동에서 몸을 풀고 달리다 보면 철조망을 둘러쳐 놓은 캘리포니아 땅을 분명하게 지나 미군이 보초 서고 있는 미군기지 정문 앞을 지나쳐서 되돌아왔다.

 
 
▲ 철조망을 사이로 이쪽은 전북 군산, 저쪽은 미국 캘리포니아다. 
 
ⓒ2005 배지영
 
쓰레기 분리수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에도,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분리수거 하기 시작할 때에도,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지겹도록 방송했다. 깔끔하게 제대로 내놓지 않으면, 시청에서 벌금이 나오고 쓰레기조차 가져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군산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쓴 물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버리고, 쓰고 난 기름도 '군산 캘리포니아' 옆 군산 땅으로 흘려보내서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그래 놓고도 소파 협정에 따르라고 친절한 척 한미행정협정 위원회에 문의하라고 한다. 위로금이라고 준 게 50만원이다.

월요일 낮에 오랜만에 햇볕이 따갑길래 마산 방죽에 다시 가 봤다. 예전에 군산 역에서 '군산 캘리포니아'까지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 놓았던 철로에는 잡풀이 나 있었다. 그 위에서 네 발 자전거를 타고온 꼬마 둘이 평온하게 놀고 있지만 이 땅의 부족한 '2%'는 채워지지 않았다. 공포 영화처럼 알게 모르게 붙어 있는 '군산 캘리포니아' 귀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군산은 군산이면서 군산이 아니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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