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4일. 제주도 토종 수집 조사의 1차가 끝나는 날이다. 하늘은 오늘도 흐릿한 편. 햇빛이 그립다. 첫날 숙소에 남겨 놓고 왔던 내복을 다시 찾아 입고 돌아다녔다. 그만큼 제주의 날씨를 얕보았다고 할까?

마지막으로 어음리를 다시 한 번 들렀다. 이곳이야말로 그동안 다녔던 곳 가운데 뭔가 있을 만한 곳. 마지막 날까지 한숨도 돌리지 않고 토종을 찾기 위해 강행군을 했다. 그 결과 산무라는 걸 하나 발견했다.

 

어음리에서 발견한 산무의 꽃. 원래 밑에서 자라던 것이 어떻게 200m 이상 되는 곳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이 마을에서는 이걸로 김치를 담가 먹곤 했단다.

 

 

 

그리곤 잠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릴 겸 한림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고생고생하며 개발한 공원인데, 그저 그렇게 이름만 달고 있는 곳보다는 훨씬 알찬 내용을 담고 있어 재밌었다. 여러 이색적인 식물이 많았는데, 그래도 나에게는 민속촌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장식으로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아니면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방을 천천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 안완식 박사님은 저쪽에서 또 분주하게 다니시며 자료를 모으시고 있다. 

 

처마를 길게 낼 수 없는 제주 집의 특성 때문에 생긴 처마랄까? 지붕에 올린 짚으로 이렇게 길게 내려면 바람에 날려 제대로 간수할 수 없었을 게다. 그래서 집집마다 이런 식으로 처마를 따로 설치했다. 

 

물허벅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 이전에 100살이 가깝다는 할머니 집에서 본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물론 제대로 쓰이진 않는 박물관의 흔적일 뿐이지만, 이런 형태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제주는 따로 아궁이를 만들지 않고 돌을 놓고 거기에 솥을 얹었다. 왜 그럴까? 한참 고민하고 묻곤 했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 것도 있겠고, 설명을 들으니 제주의 특성이 빨리빨리 수습해서 도망가야 하던 시절 때문에 이런 형태의 부엌이 나오지 않았겠냐는 말도 있었다. 무엇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삶은 지금 보는 모습과 달리 엄청 척박했음이 틀림없다.

 

 제주의 말방아. 제주는 소 만큼 말이 흔해 말을 잘 부렸다. 농사를 지을 때도 그랬고, 이렇게 방아를 찧을 때도 그랬다. 물론 이런 것은 몽골의 흔적일 테다. 몽골이 고려 때 와서 남겨 놓은 것이 조선이란 사회를 지나면서도 남은 것은 섬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사람이 제주의 말을 연구하는 것일 테다.

 

 

한림공원을 차분히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제주도 여성 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이 찾아왔다.

다시 돌아가기 전에 제주에서 모은 토종 씨앗을 나눠 농민의 손에서 제대로 뿌리내리고 씨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도 유전자원센타에서 지원을 받았으니, 거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적당히 씨앗을 남기면서 최대한 제주에서 이 씨앗들이 퍼질 수 있도록 듬뿍듬뿍 퍼서 나누어주었다.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만 남기고, 살아 숨쉬는 대로 제주의 땅에서 제주의 하늘 아래 제주 사람의 손으로 남는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뜻이었다.

이 작업으로 한 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 큰 뜻은 없지만 남들도 다 가족과 함께 지낸다는 하루인 크리스마스이니 우리도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뭐, 그래야 하루만 쉬고 다시 제주로 올 테지만, 그 하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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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날씨가 흐리고 공기가 차갑다. 바람도 좀 분다. 남쪽나라 제주도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안 되겠다. 일단 옷부터 단단히 챙겨 입어야지.

 

8시 40분 어음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봉성리를 지났으나 거기는 별 거 없었다. 봉성리는 다들 큰 읍내로 출퇴근을 하시는가 보다.

 

결국은 찾은 어음리... 어음 2리 3129번지에서 일단 보리콩을 구했다. 뭍과 다르게 보리콩이란, 보리를 거둘 때 거두는 콩인지, 보리를 심을 때 심는 콩인지 잠시 헷갈린다. 뭐였더라???

 

 

 

이렇게 보리콩만 얻고 끝날 줄 알았다. 집이 워낙 정결하고, 뭐 알아볼 수도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끝날 수 없는 곳이란 걸 금방 깨달았다.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수확의 흔적들... 아래에 보이는 콩가리도 그렇다. 높이 쌓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사시면서 이런 콩가리를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역시나 할머니에게서는 이것저것 있는 곳이 있으니 가자며 곳간으로 이끄셨다.누가 알았을까? 이곳에서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종자의 거의 절반을 다 보았다.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양혜옥(74) 할머니. 평생 농사만 지으신 할머니이신지라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사진을 찍는 일도 어색하시기만 하다. 그냥 할머니... 그냥 할머니시다.

그렇다고 할머니만 이런저런 씨앗을 보여주신 건 아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낯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농사를 다 보여주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낯선 사람...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씨앗을 보여달라고 채근하는 것이라 느낄 만도 한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여주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마운지 이번 일을 통해서 새삼 절실히 깨닫는다.

 

 

계속 농사짓는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강형준(74) 할아버지. 늦더라도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본 오이의 모습도 심상치 않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이것도 토종이라고 하신다. 물론 꼭 집어 토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지만, 여름에 더울 때 생채를 해 먹는다며 짤막한 것이 외이고, 길쭉한 것이 오이라며 우리에게 차이를 꼭 집어서 설명해 주신다. 아, 그래도 이렇게 봐서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걸 어쩌랴? 일단 사진에 한 방 남겼다.

 

 

다음 더 재밌는 일이 남았다. 이건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내 평생 처음 갔지만 정말 큰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건이다.

정말이지 난 이걸 통해 제주도의 반은 다 돌아봤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이 집에서 개발시리를 배운 일이다.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지 할머니가 농사짓는 이야기로 넘어갔고, 곳간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조 이야기를 했는데, 검은흐린조를 심고 거두어서 먹는다고...

그래서 묻다 보니 답답하다 하시며 씨를 하려고 남긴 이삭을 들고 나오신다.

아~! 그래서 검은흐린조구나! 이게 검은개발시리조구나~!

 

 

시리는 ~처럼, ~같다는 뜻의 우리말이란다. 요즘은 이런 말도 안 쓰고 그런데 안완식 박사님이 넌지시 일러주셨다. 그러면 개발 닮은 조라는 뜻이라고 풀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개발이다. 개발 닮았다. 우리네 조상은 풀이름을 그 생김이나 특성을 닮은 한마디로 지었다는 것이 새삼 생각난다. 뭐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어음리에서 만난 토종 농가. 결국은 맛과 습관으로 계속 토종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많은 토종으로 농사짓는 집을 만나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씨앗을 받아 놓으신 거며, 농기구며, 집짐승으로 보면 정말 제대로 찾아온 듯하다. 어디를 가서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날지 모르겠다.

여기서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대파니, 산두(밭벼)의 메벼와 찰벼니, 두줄보리(맥주보리), 메밀, 들깨, 시불콩(세벌콩) 두 가지, 백편두, 제비콩을 얻었다.

 

 

 

 

오늘은 씨를 조사하고 얻는 것을 그쳤지만,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농사짓는 법을 하나하나 꼼꼼히 듣고 싶다. 그날이 올까? 굳이 내가 아니여도 좋은데... 꼭 다시 찾아가 뵙고 싶다.

 

 

다음 집을 찾으러 나가다 배추를 씻는 아주머니가 계신 걸 보고 차에서 내려 언제나 그렇듯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마침 아저씨도 계셔 슥 나오셔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네 집에 아쉽게 토종은 없으니, 혹시 모르니까 저쪽 할머니 집으로 가보자며 우리를 이끄신다. 오고 보니 아까 바로 그 집 바로 밑에 집이다.

이곳은 어음리 3039번지 이문자(84) 할머니 댁이다. 이제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듯하셨는데, 집 안은 깔끔하지만 집 밖은 미처 손이 다 가지 못한 느낌이다. 

 

이문자 할머니. 얼굴과 달리 고운 손을 보며 젊으셨을 땐 참 곱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시집 와서 계속 심었다는 고추를 꺼내 보여주셨다. 크기가 무척 작다. 이제와서 고추를 보니 맵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더운 나라 고추일수록 크기가 작던데 크기는 작으면서 무지 매울 걸 보면 매운 정도가 응축이라도 되는 걸까? 할머니는 고추를 음력 3월이면 심는다고 하신다. 나는 씨로 심으면서 곡우 무렵에 심으니 그럼 음력 5월쯤일 텐데, 따뜻한 곳이어서 그런지 빠르긴 참 빠르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오래사신 만큼 집 안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화로다. 변택호라고 써 놓은 화로는 내 기억 속의 그것과 달리 옹기 종류였다. 겉에는 페인트를 칠한 것인지, 아님 제주의 옹기가 원래 이런 색인 것인지 참 오묘했다. 아직도 불을 담아 쓰셔서 그런지 반질반질하게 보존상태가 참 좋다. 뭐든지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뽀얗게 먼지가 앉다가 스러져 사라지는 법.

 

예전에 제주 허벅 전시회에 갔을 때 느꼈던 제주 특유의 옹기가 생각났다. 제주는 흙이 달라 그런지 옹기도 참 별나다. 

 

 

이제 어음리를 뜰 시간이 왔다. 또 다른 곳에 있을 토종을 만나러 가야 한다. 안완식 박사님은 못내 아쉬우신지 나중이라도 여기를 꼭 다시 한 번 들르고 싶다고 하신다. 박사님의 그 바람을 일단 뒤로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섰다. 아니 근데 나가다 보니 나중에 또 오더라도 이곳은 한 번 들러야겠다는 곳이 보였다. 다시 차에서 내려 그 집으로 찾아들어갔다.

 

어음리 2963번지 부창(70) 할아버지 댁. 더 많은 걸 기대했으나 할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것만 꺼내서 보여주었다. 검은콩(쥐눈이콩)은 보통 것보다 크고 눈도 검다. 올해는 드물게 심었는데, 아무튼 많이 달린다고 하신다. 밥에 섞어 먹기도 하고, 그냥 갈아 콩국도 먹고 하는데, 콩나물은 안 된다. 6~7월쯤 늦게 심어도 빨리 익어서 좋다고 한다. 그 다음 백천이란 콩이다. 주남에 있던 것인데, 이건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걸로 콩나물을 길러 먹는단다. 마지막으로 열 몇 살 때부터 심던 줄콩까지 얻었다.

 

부창 할아버지 댁의 맞은편 집. 형식은 제주의 옛날 집인데, 사람은 살지 않았다. 농막 정도로 쓰고 있었는데, 태극기를 꽂아 놓은 모습이 신기해 한 장 찍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까?

 

 

이제는 진짜 어음리를 떴다. 토종이 엄청났던 그 집. 아마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최고가 아닐까 한다. 역시 두 내외분이 함께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남자나 여자 혼자 살면 그렇게까지 가지고 있기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다음으로 찾은 동네는 애월읍 납읍리라는 곳이다. 요즘 제주 올레길 걷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올레길을 제대로된 동네 골목길을 참 많이도 걸었다.

 

옛 올레. 사실 제주에서도 이제 이런 곳은 흔하지 않다. 차가 드나들기 좋게 시멘트로 바른 길이 더 많고 이런 길은 어쩌다 마주칠 뿐이다. 이 골목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떠오른다. 좁고 긴 구불거리는 골목, 그 옆으로 늘어선 낮은 담장. 이 길의 반대편에 있던 막다른 집에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살았다면 이 길은 사라졌을 게다.

 

 

그 올레의 한쪽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가 얼마나 마당을 예쁘게 가꾸셨는지 모른다. 문 앞에 다가가 조심스레 사람을 찾으니 한 아주머니께서 나오신다. 이야기를 들으니 원래 이 집 주인은 방 안에 계신 할머니인데, 이제 나이가 많으셔서 거동이 편하지 않으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가 100세나 되셨다고 한다. 대신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양계생(96)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었을 집. 자식들은 다 뭍으로 나가 살고 할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마저 이곳을 떠나시면 집도 스러질 날이 오겠다. 앞에 분홍색 바가지를 올려놓은 곳이 물구덕에 물을 길어와 등에 져 나른 뒤 올려 놓는 곳이다. 땅에 내려놓다가 깨질 우려도 있고 힘도 더 드니 이런 구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이곳을 물팡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엌에는 큰 물항아리를 두고 일상용수로 썼다.

 

언뜻 보기에도 여기저기 씨앗이 널려 있었다. 당뇨에 달여 먹으면 좋다고 하는 염주, 강낭 또는 태주부루기라고 불렀다는 옥수수, 차나룩(찰벼)이라 부르는 산디, 강낭깨라는 제주식 이름의 해바라기, 보리, 결명자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력이나 설명은 할머니께서 방 안에 누워계셔 듣지 못했다. 그건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방 안으로 남자 셋이 불쑥 들어가 휘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몸조리 잘하시라 밖에서 이야기만 드리고 집을 나왔다.

 

다음으로 간 집은 납읍리 1825번지의 양찬기(81) 할아버지 댁이다. 이 집에 오기 전 바로 앞집을 들렀는데 사람이 없었다. 그 집도 참 오래되어 보이는 번듯한 집이었다. 대문 바로 옆에 창고에 옛 물건들이 한가득 쌓여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한 장 찍었다.

 

멍석이 엄청 많은 걸 보니 농사 규모가 꽤 크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보았다. 천장에는 쟁기도 보인다. 꺼내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것도 주인이 계시지 않아 구경만 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래서 찾은 집이 양찬기 할아버지 댁이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곳에 와서도 예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혹시 옛날부터 심던 배추 없어요?" 아니 그랬더니 여기서도 그게 있다며 따라오라신다. 할아버지를 따라 광으로 들어가니 선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홀로 남으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씨앗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 뭐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할머니가 보통 이 부근에 씨를 놓고 썼다며 뒤적이신다. 안타깝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대가 끊길지 모를 씨앗을 가져가 보존하고 퍼트릴 테니 다행이다.

이 배추는 옛날에는 국도 끓여 먹고 김장도 해 먹던 것이란다. 100년쯤 됐을 것이라 기억하시는데,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심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심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그건 정확하지 않으니 일단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기록. 그것 말고 시금치와 무 씨앗도 얻었다. 사람은 가도 씨앗은 남았다. 이 씨앗도 지금에서 시간이 더 가면 사라지겠지만, 오늘은 우리가 가져가 보존할 수 있을 게다.

 

양찬기 할아버지 댁의 광에 있는 곳.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곳에서 이런저런 씨앗이 많이도 나왔을 텐데...

 

 

이제 차를 타고 납읍리를 떠나 상가리로 향했다. 상가리에 들어서니 커다란 폭낭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서도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로 물러나 찍었는데도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다. 이 나이의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1000살을 추정하고 있단다. 1000살. 이 어마어마한 시간을 한자리에서 보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자체로 신이라 할 수밖에...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무가 1000년을...

 

 

 

이 나무를 감상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어 사진에만 담고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이곳 1768번지 김창생(80)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호박 하나를 얻고, 그 집 골목에 있던 피마자의 씨를 채집하고, 돌고 돌았으나 별 다른 것은 더 없었다. 상가리에서는 나무 구경 하나 잘했다. 1000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상가리에서 장전리로 가는 길에 허름한 집에 들렀다. 할머니께서 마침 어딜 다녀오셔 만날 수 있었다. 보관하고 계신 많은 씨를 보여주셨는데 특이한 것은 없어 수집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나와 거문덕이라는 곳에 올라가다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을 뿐.

 

 

상가리를 떠나 장전리로 접어들었다. 꾸물거리던 날씨는 부슬비로 바뀌었다. 날씨도 꾸물거리고 어음리 이후에는 마땅한 곳도 없고 지친다. 일단 차를 세우고 오줌이나 싸면서 쉬려고 내렸다. 그런데 밭에 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게 또 심상치 않은 것인가 보다. 안완식 박사님이 얼른 이 무밭 주인이 누구인지 주변 좀 수소문해 보라고 하신다. 박사님께서 기다리던 것을 만났나 보다.

 

 심상치 않은 크기의 무. 옛날 제주의 단지무라는 것이 있었다. 오강단지처럼 짧고 불룩한 생김인데, 제주 사람은 그걸 먹었단다. 지금은 사라져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다니다 그걸 만나면 그 복원작업을 한결 손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찾은 집이 장전리 전 이장을 하셨던 양성진 아저씨의 집이다. 농진청에도 몇 번 오간 적이 있다며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수소문해 주셨다. 장전 197번지에 사는 강창하란 사람을 찾으라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일러주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서 찾아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인간 네비게이션의 실수. 그래서 유수암리라는 곳까지 올라갈 뻔했다. 유수암리는 이따 들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왜 벌써 왔을까나. 다시 내려가 처음부터 짚어 나갔다.

근사하게 지은 양옥집을 가지신 강창하 씨 댁에 도착해 말씀드리니, 단지무는 아니고 장에서 사다가 심은 것인데 남은 씨가 감귤밭에 있다며 함께 가자신다. 감귤밭에 도착해 씨를 찾아오시는 동안 피마자와 들깨 씨를 채집했다. 이 들깨는 키가 2~2.5m는 되는 것이 뭘 먹고 이리 큰지 모르겠다. 율무도 있길래 얼른 씨를 챙겼다.

남은 무 씨를 들고 나오셨는데, 영광무라는 종류였다. 영광무... 이후 일정에서 자꾸 만날 이름인지 이때는 몰랐다. 이 무가 사진에 있는 것보다 더 불룩해져서 자꾸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장전리에서 볼일을 다 마치고, 아까 가려고 했던 유수암리로 향했다. 부슬비는 계속 내리고 사기는 떨어지고 해가 넘어갈 시간도 다가오고... 이제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수암리는 생각보다 작은 동네였다. 중산간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별로 살지 않았다. 그나마 감귤이 집하장이 많아 더 그랬을지 모른다. 이곳에는 제주에서는 흔하지 않은 샘이 콸콸 나오는 곳이었다. 날이 을씨년스러워 그런가 맑은 날 보면 예쁘고 시원했을 샘이, 시커멓고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섭다. 물은 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뭐든 다 그렇지만 물이 성을 낼 때 보면 엄청 무섭다.

유수암리에서는 1939번지에서 강인자(67) 할머니를 만나 집 앞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던 수수와 꼭두서니를 얻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건 다 사다 먹거나 심는다고 하신다. 이 일대만 해도 감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이후 소길리로 갔다가 더 이상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시고 차를 돌렸다. 소길리에 가서도 별 게 없었다. 비만 내리고... 해안 쪽으로 내려가 숙소를 잡고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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