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8일. 아침 7시 30분에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다가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라 얼른 나갔다. 7시에는 만나야 시간 안에 갈 수 있던 걸 착각하고 있었다.

8시 넘어 괴산으로 출발. 먼저 지난번에 찾은 청참외를 확안하고자 상리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이름과 유래가 적힌 비석을 촬영.

 

 

 

 

윗시몇의 시몇은 수미터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동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수밑, 숨밑과 비슷한 발음을 하시던데 혹시 숲밑은 아닐지?

 

 

 

 

마을 유래비에서 바라본 윗시몇 마을 전경. 마을 유래비 내용을 보면 어느 도인이 좋은 수맥을 찾아주어 마음 편히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 유래비처럼 이 마을은 물이 좋다.

 

 

지난번 찾은 참외로 연출한 사진. 꽃과 잎과 줄기와 열매까지 모두 한자리에 나온다.

 

 

우리에게 줄 참외를 찾고 계신 이종윤 어르신. 

 

 

지난번에 본 대한이란 벼의 교잡종. 빨간 까락이 보인다. 연풍 지역의 논에서는 이러한 교잡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너무 많아서 지저분해 보일 정도다. 볍씨 갱신할 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산에서 끊임없이 찬물이 흘러 내려온다.  

 

 

'대한'이란 벼를 심은 논. 찬물이 흘러 들어오기에 뒷도구(물을 돌려서 수온을 올린 다음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도랑)를 쳤다.

 

 

논 바로 옆에 있는 우물. '우물 안에 내가 있소. 하늘이 들어 있소.'

 

 

다음으로 드디어 연풍면으로 넘어갔다. 처음 찾은 곳은 갈길 마을. 하지만 별 다른 것은 찾지 못하고 다음 금대 마을로 넘어갔다.

 

 

 

 

갈길 마을과 금대 마을. 이 두 마을을 합하여 갈금리라고 한다. 칡 갈 자에 가야금 금 자. 그걸 그대로 풀어 칡덩굴이 가야금의 현과 같다고 하는 해석도 있다. 헌데 우리나라에 '갈'이란 지명이 여기저기 있는 걸 보아서는, '갈'이란 고어의 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금대 마을의 모습. 다리 난간은 참깨 말리는 곳으로 전환되었다.  

 

 

금대 마을 입구에 자리한 수수밭. 온갖 종류가 뒤섞여 있는 좋은 학습장이라고 한다. 키가 큰 놈, 작은 놈부터 이삭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키 작은 수수와 키 큰 수수의 차이. 

 

 

금대 마을에 들어가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분들께 정보를 얻어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았다. 

 

 

고추 말리기가 한창이다.

 

 

이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는 지난해까지 옛날 자주감자를 심다가 매상도 안 해주고 힘도 들어 그만 없애셨단다. 지난해에만 왔어도 괴산 토종 자주감자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대신 완두와 엇그루팥을 얻었다. 엇그루팥은 그루팥의 일종인데, 알이 좀 더 굵은 느낌이다. 이것 말고 잔그루팥이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진짜 오래된 것인데 그것도 사라졌다고. 잔그루팥은 말 그대로 자잘하다는 뜻이겠지.

 

 

동네에서 얻어다 심는다는 완두콩.

 

 

엇그루팥.

 

 

엇그루팥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려고 밭을 찾아 나섰다.  

 

 

밭으로 가다가 죽어 있는 새끼 뱀을 보았다. 개미의 먹이가 되고 있는 중. 자연은 감정이 없다. 그저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일 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무에 날아와 쉬고 있다. 

 

 

엇그루팥을 찾다가 이상한 동부를 발견했다. 이 동부의 주인을 찾으려 동네를 뒤진 결과 다시 그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토종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다. 있는 집에는 이것저것 많이 있다. 

 

 

강가 귀퉁이 땅에는 부추도 계속 심어 오고 있다. 이 부추도 상시 심는 것. 거름을 많이 하면 넓적해진다고 한다.

 

 

 

 

금대 마을을 나와 적석리 쪽으로 달렸다.

 

 

후동을 찾아가려고 잠시 차를 세워 더위를 피하고 계신 어르신 두 분께 길을 물었다. 이 소나무는 200년 가량되었다. 

 

 

 

 

원래는 길 쪽으로도 가지가 뻗었으나, 썩어 부러져 가지를 쳤다고. 이 나무를 살리려 주사도 많이 줬단다.

 

 

후동과 양지 마을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사과 과수원만 가득. 연풍이 사과로 유명한 곳임을 실감했다.

다음은 양지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음지 마을로 향했다. 음지 마을은 마을 위로 34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면 모두들 떠났을 것이다.

이 마을의 위쪽에는 사방댐이 있는데, 군에서 등산로를 개발하면서 외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의 식수가 되는 그곳에서 목욕까지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모르는 곳에 가서 함부로 서리하지 말지어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지어다. 그곳도 모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 그곳만의 법이 있다.

 

 

음지 마을에서 멋진 댑싸리 하나를 발견. 

 

 

간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내린 큰비로 개울물이 무섭게 불었다. 

 

 

길이 뚫리며 생긴 변화의 하나. 외지인이 산에 들어와 함부로 산나물과 약초를 훔쳐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오래된 나무 전신주 하나가...

 

 

음지 마을에서 나와 종산 마을로 향했다. 34번 도로를 타고 적석터널을 지나 종산 마을로.

 

 

종산 마을의 어느 집. 장독대며 집 안이 정갈하다. 담장 위에서 자라는 호박이 정겨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할머니 혼자 사시며 집을 깔끔히 유지하고 계셨다.

 

 

할머니 댁의 마늘. 연풍 지역의 마늘은 유난히 알이 잘다. 추운 겨울과 관련이 있을까? 

 

 

할머니 댁에서 키 작은 자주빛 강낭콩을 발견했다. 색이 참 곱다.

 

 

종산 마을에서 발견한 대파. 내력과 유래를 찾고자 했으나 집에 주인이 없었다. 들에 일하러 가신 듯... 마당에서 주운 1만 원은 다음에 오면 깜짝선물로 찾아주겠다며 안완식 박사님이 처마 쪽에 몰래 숨겨 놓으셨다.

 

 

가지를 많이 치는 종산 마을의 대파. 

 

 

개량종 대파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슈퍼에 가서 사는 대파와 비교해 보시길... 

 

 

종산 마을에서 본 4륜 구동 트럭 세렉스. 대학 시절 강원도로 농활을 가면 흔하게 보던 트럭이다. 이곳도 산간 지대라 이런 트럭이 필요하다.

 

 

종산 마을까지 보고 연풍면 쪽으로 향하다가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주인 아저씨의 취미 생활로 맛뿐이 아닌 재미를 더하고 있는 연풍가든. 우리집 개의 이름이 연풍이인데, 이곳은 어디를 가든 연풍이다. 심지어 연풍 성지까지 있다.

 

 

점심을 먹고 유하리로 향했다. 버드나무와 관련된 한자말이다. 아마 이 골짜기를 흐르는 내의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았나 보다. 1914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명을 자신들이 알아볼 수 있는 한자로 전면 제정한다. 그 이후 우리의 지명은 한자에 오염이 되어 버렸다. 오전에 갔던 후동後洞만 해도 그렇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는 뜻으로 부르던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후동이라 했을 것이다.

유하리 오수물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 위쪽에 자리한 내응 마을에서는 무언가 나왔다.

 

 

내응 마을에서 찾아간 집. 앞마당에서 유월두를 말리고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그늘에 앉아 계시길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할머니 댁 안의 예전 외양간 같아 보이는 곳에는 할머니가 달아 놓은 씨앗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솜씨 좋은 실력으로 지은 듯한 이 외양간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는 치매가 와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신다고...

 

 

 

할머니 댁에서 얻은 흰동부. 첫날 괴산 장에서 샀던 그 동부와 비슷하다. 여기도 있구만 장터 할머니도 참...

 

 

검은깨. 알이 참 굵다.

 

 

밭에서 자라고 있는 흰동부를 찾고 싶어 길을 나섰다. 흰동부는 늦게 심을수록 좋다고 한다. 6~7월이 적당한 때. 일찍 심으면 덩굴이 너무 많이 져서 좋지 않다고. 앞으로 동부는 조금 늦게 심자. 덩굴이 뻗는 것일수록 그게 좋겠다.

 

 

내응 마을의 댑싸리. 쪼로록 함께 자라니 참 예쁘다.  

 

 

내응 마을 새마을 창고.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어디선가 이런 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분위기. 이곳이 바로 유럽 식으로 말하자면 마을 광장이다. 마을회관도 보건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네 할머니들도 이곳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흰동부를 심으신 분과 검은깨를 심으신 분을 찾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밭을 찾아왔다. 바로 눈앞으로는 중부내륙고소도로가 뻗어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다! 

 

 

안완식 박사님은 꽃이 핀 모습을 찾고자 분주하시고, 할머니는 동부의 순을 질러주느라 바쁘시다. 농사일이 다 그런가 보다. 할머니는 연신 눈에 보이는 풀을 잡고, 순을 지르고... 일이 눈에 보이자 손이 잠시도 쉬지 않으신다. 

 

 

흰동부가 자라고 있는 모습. 아쉽게도 분홍빛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논두렁에 심은 흰동부. 덩굴이 그리 심하게 뻗지 않으니 이렇게 키울 수 있는 거겠지.

 

 

할머니를 다시 광장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른 할머니와 함께 검은깨를 찾아나섰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검은깨. 앞으로 며칠 뒤면 베어 말려야 하겠다. 검은깨는 키가 2m 가까이 자란다. 가지도 좀 치는 편이고. 

 

 

검은깨의 꽃. 검은깨라고 꽃까지 검지는 않았다. 자주감자는 자주꽃, 흰감자는 흰꽃이란 노랫말과는 다르다. 

 

 

내응 마을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이런 광경이 나왔다. 

 

옥수수와 참깨를 말리고 있었는데, 참깨 중 하나가 갈색이 나길래 얼른 들어가 보았다. 헍데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찾으러 가려고 차를 돌리는 사이에 도랑에 앞바퀴 하나가 빠졌다. 이런, 다행히 차가 망가지거나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걸 어쩐다... 할 수 없이 힘을 합쳐 차를 들어올리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영차! 다행이다. 작은 차라서 그런가 쉽게 들 수 있었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도꼬마리가 하나 자라고 있다. 보통 도꼬마리는 키가 작은데 이건 키가 엄청 크다. 이것도 토종의 하나라고. 며느리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머리에 피부병이 생겨 고생했는데, 창포처럼 이 잎을 뜯어 삶은 다음 감았더니 싹 나았다고. 머리에 비듬이나 진물이 나는 등 문제가 생기신 분은 도꼬마리잎을 삶아 그 물로 머리를 감아 보시라. 우리네 민간요법이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차조기는 파뿌리와 대추 등을 함께 넣고 푹 고아 마시면 감기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할머니 집의 대문 앞에는 백일홍이 자라고 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것도 개량종이 아닌 독특한 것이라고 하신다. 할머니도 이게 참 예뻐서 동네는 물론 멀리 시집을 간 딸에게도 씨를 줬다고 하신다.

 

 

 

 

내응 마을을 나와 송오와 방화 마을을 뒤졌다. 날씨가 저기압이라 그런지 무척 힘이 든다. 방화 마을을 뒤지고는 잠시 숨도 돌릴 겸 자리에 앉아 쉬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차에 올라 쇠잿말로 향했다.

 

 

쇠잿말 길가의 어느 집에서 자라고 있는 황기. 진딧물에 개미들이 찾아와 단물을 빨고 있다. 

 

 

꽃마다 흔하게 찾아오는 곤충이 따로 있다고 한다. 황기에는 뒤엉벌이 그런 관계인가 보다. 

 

 

황기를 심으신 분을 찾다가 한 동네 할머니를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꺼내서 보여주신다. 

 

 

괴산의 특징은 집에 이런 상자텃밭을 많이 키운다는 점이다. 밭의 활용도도 무척 높다. 도무지 놀리는 땅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자투리 땅도 활용한다. 이 지역의 농사법을 조사하는 것도 무척 재밌는 일이 되겠다. 

 

 

할머니가 보여주신 덤불양대. 인천에서 맛있다고 얻어온 종류는 금방 상해 버리는 데 반하여, 이 덤불양대는 가을에 수확을 못해 겨우내 달려 있어도 전혀 상하지 않는다고. 그뿐이 아니라 맛까지 좋다고 하니 금상첨화이다.

 

 

냉장고에서 적두팥을 꺼내와 보여주시는 할머니. 농민은 가장 알맞은 보관법을 찾아낸다.

 

 

할머니 마당 한켠에 자라고 있던 조선오이. 그물망이 쫙쫙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이꽃. 

 

 

다 쓴 물건이라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닳아서 못 쓰게 된 댑싸리 비는 이렇게 다시 묶어서 계단 등을 쓰는 빗자루로 활용한다.

 

 

대문 입구 쪽에서 자라고 있는 덤불양대. 

 

 

쇠잿말에서 오늘의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가기 전, 길가에 특이한 수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마을 주민분께 물으니 옛날에는 방맹이 수수라는 것이 있었다고. 이건 신품종이란다. 실제로 송오 마을에 살고 있는 주인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물으니 장연 쪽에서 얻어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토종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수수. 그렇지만 재밌게 생겼다.

 

 

이 분들에게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이 왜 쇠잿말인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르셨지만 이 분들의 말을 듣고 유추하면 이렇다. 옛날에는 수안보에서 장이 크게 섰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는 방앗간이 없어서 곡식을 가지고 전부 수안보로 가서 찧어 왔다. 그런데 그곳에 바로 우시장도 섰다고. 그러니까 여기는 소를 사거나 팔아서 끌고 넘나들던 옛 고갯길인 셈이다. 그래서 쇠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미난 것은 쇠잿말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고개 하나 넘으면 장연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수안보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도 쇠잿말이다. 궁금하신 분은 3차 수집 조사 편을 참고하시라. 장연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 근처에 1000년이 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데, 그곳 바로 위가 쇠잿말이다. 장연에서는 그쪽 고개를 넘어 수안보로 소를 사거나 팔러 다녔을 게다. 마지막으로 더 재미난 사실은 장연의 쇠잿말도 그렇고 이곳의 쇠잿말도 그렇고 큰 도로가 이어져 뚫려 있다는 사실.

 

 

가운데 보이는 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골로는 수안보로 넘어가고, 왼쪽  골로는 장연으로 넘어갔다. 동네 주민의 말에 따르면 30분이면 수안보까지 갔다는데, 그건 뻥 같고 1시간 반에서 2시간쯤 걸리지 않았을까 한다. 방앗간이 없어 수안보로 다닐 때 버스에 곡식을 실어서 보내고 사람은 이 고개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가면 당시에는 길이 좋지 않아서 버스보다 사람이 더 먼저 도착했다고. 사람이 많이 다닐 때는 지금처럼 수풀이 무성하지도 않고 길도 잘 닦여 있어서 말 그대로 대로였단다. 지금은 이리로 아무도 넘나들지 않는다.

 

 

쇠잿말에서 흙살림의 윤성희 이사님이 합류했다.  시간은 6시가 다 되었을 무렵.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함께 향했다.

 

 

요동 입구에서 발견한 배나무. 안민동에서 이야기를 들은 청배의 특징과 비슷한 모습이다. 혹시 이것이 청배가 아닐까 하여 동네를 뒤졌지만 찾은 답은...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도 나가셨다고 한다. 이 배의 유래는 알 수 없는 것일까? 다음에 다시 찾기로 기약했다.

 

 

 

 

청배의 주인을 찾고자 산골짜기까지 올랐으나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괜히 갔다가 옴짝달싹 못하게 될 수도 있기에...

 

 

돌아 내려오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 산비탈이 모두 밭으로 개간이 되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

 

 

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요동을 나와 점심을 먹었던 곳에서 7시가 넘어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피곤하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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