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근대적인 벼 품종개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06년에 대한제국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 설치되면서부터 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준다는 미명아래 이와 같은 기관을 설치하게 하였지만 그 속셈은 한반도를 그들의 식량기지화함과 동시에 식민지화 하고자 하는 음흉한 계획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벼 품종개발의 역사는 일본의 벼 품종들을 들여와서 한반도에 적응성이 높은 품종을 선발하고 이를 널리 보급하는 일로 시작되었고, 과거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심어왔던 우리의 풍토에 알맞는 수 많은 재래종들은 거의 내팽게치다싶이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두 세차례에 걸쳐서 전국에 심겨지고 있는 우리 재래종을 수집하고 주요특성을 조사하여 이를 분류 정리하는 사업을 펼쳤지만, 이 재래도를 새로운 품종개발의 육종모재로 사용하여 우리의 풍토와 기호에 알맞는 장점을 살리는 육종연구는 그때 이 기관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일본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외면당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때 우리 재래도는 서서히 일본 품종의 침략에 잠식당하고 말았고, 우리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가꾸어온 우리 것을 계속 유지발전시키는 뿌리 있는 벼 육종연구는 처음부터 그 싹이 잘리어져 우리의 벼 육종사가 일본식민지의 굴레를 벌어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심겨졌던 우리 재래도들은 대부분 까락이 많고 키가 크면서 포기당 이삭수가 적고 이삭당 벼알수가 많은 이삭이 큰 특성을 나타내며, 쓰러짐견딜성이 약하고 도열병에 약하지만 대체로 조숙이고 가뭄에는 강한 특성을 보였다. 1911년과 1913년에 권업모범장이 재래도를 수집하면서 각 지역에 보급율이 20%가 넘는 중․남부지방에 비교적 널리 재배되었던 대표적인 재래도는 맥조(麥租)․다다조(多多租)․노인조(老人租)․두조(豆租)․황조(荒租)․조동지(趙同知)․팥벼․구황조(救荒租) 등 이었다. 재래도 수집 정리자료에서 보면 찰벼 품종수가 메벼 품종수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때 당시 대부분 밥맛이 떨어지는 쌀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찹쌀을 섞어 먹었기 때문에 요즈음보다 찰벼를 많이 심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중․남부지방에 널리 재배되었던 찰벼품종은 노인나(老人糯)․조도(棗稻)․돼지찰[豚糯]․점미---(粘米)․금나도(錦糯稻)․진조(眞租) 등 이었다.

  이들 재래도는 수집된 지역에 따라서 이름은 같으나 특성이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고 이름은 다르나 여러 가지 특성이 거의 같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오랜기간 동안 채종재배도 하지 않은 상태로 심어오면서 같은 품종에 대하여 농가가 임의대로 다른 이름을 부치거나 이름이 와전되어 잘못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추측된다.

  이들 이외에 주요한 재래종으로 거론 되었던 것은 대구조(大邱租)․모조(牟租)․왜조(倭租)․미조(米租)․남조(南租)․조정조(早丁租)․연안조(延安租)․용천조(龍川租)․이조(里租)․돈조(豚租) 등 이었다.

  권업모범장 초창 당시에 재래 논벼 및 밭벼를 수집하여 특성을 조사한 조선도품종일람(朝鮮稻品種一覽)을 보면 논벼 1,259품종, 밭벼 192품종으로 모두 1,451품종이나 수록되어 있지만 이들 중에는 동종이명(同種異名)이나 이종동명(異種同名)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벼품종의 분화가 이렇게 다양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재래종 중 그동안 많은 숫자가 보존과정 중에서 잃어버렸고 현재 258품종이 벼 유전자원 저온창고에 보관중에 있는데, 대부분은 자포니카이고 그 중 한양조(漢陽租) 등 소수의 인디카 품종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들 재래종들의 소출은 정확한 통계적인 자료가 없어서 확실히 알수는 없으나 권업모범장 초창기(1907~1909)에 조사 보고된 자료에서 재래종인 조동지와 점조의 수량성으로 짐작해 보면 ha당 2.0톤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기 시작한 1910년부터 우리의 재래종이 서서히 일본 도입품종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면서 일출(日出)․조신력(早神力)․곡량도(穀良都)․다마금(多摩錦)․고천수(高千穗)․도(都) 등 많은 품종들이 계속 장려되어 1920년경에 이들 도입 품종들이 전 벼 재배면적의 반을 넘게 되었고, 이후 계속하여 중신력(中神力)․은방주(銀坊主)․육우 132호(陸羽 132號) 등이 확대 보급되어 1935년에는 도입 품종의 재배면적이 약 82%까지 달하게 되었다. 이때는 단일 품종들이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는 특징을 나타내었는데 1920년경에는 조신력이 약 25만 정보를 차지하였고, 1930년경에는 곡량도가 46만 정보를, 1935년경에는 은방주가 50만 정보 이상의 재배면적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워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이 일본 도입 품종시대의 쌀 소출은 대체로 ha당 2.0~2.5톤 수준이었다.

  우리가 1915년부터 처음으로 인공교배에 의한 교잡육종을 시작하였으나 초창기에는 정착단계로 별성과가 없었고 1926년 이후 교잡된 잡종집단에서부터 우량 품종이 선발 육성되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최초로 개발 보급된 품종이 1933년의 남선 13호(南鮮 13號)와 1936년의 풍옥(豊玉)․서광(瑞光) 이었다. 그후 1945년 8. 15 광복을 맞이 할 때까지 일진(日進)․영광(榮光)․팔굉(八紘)․팔달(八達) 등 여러 품종들이 개발 보급되어 서서히 일본 도입 품종과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8. 15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의 와중속에서 우리의 벼 품종개발 연구사업도 잠시 주춤한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고시(高矢)․배달(倍達)․새나라․수성(水成)․팔기(八起)․농광(農光)․남풍(南豊) 등이 개발 보급되었고, 1962년에 농촌진흥청이 발족되고 농업연구기관의 인원과 시설이 보강되면서 벼 육종사업도 주곡자급달성이라는 기치를 내걸로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1960년대에 탄생한 주요품종들이 진흥(振興), 재건(再建), 신풍(新豊), 호광(湖光), 팔금(八錦), 농백(農白), 만경(萬頃), 밀성(密成) 등이었으며 이들 육성품종들이 점차 일본도입품종과 대체되어 1970년경에 국내육성품종의 보급면적이 60%를 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의 쌀 단위 수량은 ha당 3.0~3.5톤 수준으로 한 단계 높아졌지만 아직도 쌀이 부족하여 매년 수십만톤의 외국쌀을 사 먹어야 했다.

  병에 강한 벼 품종을 개발할 목적으로 주요 병해에 대하여 저항성인 남방계 품종을 육종모재로 사용하여 원연품종간 교잡을 시작한 것은 1963년경이었지만 원연품종간 교잡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경부터 였다.

  1967년 9월에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과 국제미작연구소(IRRI)간에 벼 품종육성을 위한 협력연구를 실시하기로 정식합의를 본 이후 병에 강하고 키가 작은 인디카 다수성 품종들을 활용한 원연교잡(遠緣交雜)이 많이 이루어 지게 되었고, 이러한 연구 성과가 1971년에 처음으로 키가 작고 잘 쓰러지지 않으면서 병에 강하며 직립초형(直立草型)으로 다수성인 “통일(統一)”이라는 품종개발로 나타났다. 이 통일품종은 기존 일반품종의 쌀소출 3.5~4.0톤/ha에 비하여 특히 비료를 많이 주어 소출을 올리고자 할 경우에 30%이상의 획기적인 증수를 나타내어 쌀 소출을 4.5톤/ha이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쌀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한 한국 녹색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통일품종은 저온에 약하고 벼알이 잘 떨어지며 쌀의 상품성과 밥맛이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벼 육종연구진은 이 단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통일에 이어 유신(維新)․밀양 23호․금강(錦江)벼․만석(萬石)벼․노풍(魯豊)․밀양 30호․밀양 42호․태백(太白)벼․한강(漢江)찰벼․청청(靑靑)벼 등 1980년까지 10년동안 무려 25개의 통일형 품종을 개발 보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벼 육종연구진의 노력으로 1976년에 드디어 오랜 숙원이었던 주곡의 자급을 이루게 되었고 이어서 1977년에는 우리의 쌀 생산량이 유사이래 최고인 660만톤에 이르게 되었고 ha당 쌀소출이 4.94톤으로 세계최고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는 1960년대 초 우리쌀 생산량이 300~350만톤에 불과하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재배면적은 별 변동이 없는데 무려 2배에 가까운 엄청난 수확량을 올린 것이다. 이러한 통일형 다수확 품종은 그 재배면적이 ‘78년까지 급속도로 증가되어 전 벼 재배면적의 약 76%에 달했다가 그후 ’80년 냉해에 의한 커다란 타격과 쌀의 시장성 열세로 인하여 급속도로 그 재배면적이 줄어 들게 되었고 드디어 ‘92년부터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쌀의 자급이 계속 유지되고 점차 양질미를 선호하는 소비패턴으로 빠르게 변화되면서, 내냉성이나 미질면에서 개선된 많은 통일형 내병충성 양질미 품종 즉 남풍(南豊)벼․풍산(豊産)벼․삼강(三剛)벼․중원(中原)벼․칠성(七星)벼․용문(龍門)벼․용주(龍珠)벼 등이 개발 보급되었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일반 양질미 품종에게 밀려나게 되었고 통일형 품종개발도 1986년 용주벼와 남영(南榮)벼를 끝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형 품종개발 연구는 중단되지 않고 앞으로 쌀이 부족되는 시기에 대비하는 동시에 값싼 가공원료미 공급을 위하여 수량성이 월등히 높은 초다수성 품종개발연구로 전환하여 계속 추진되었다.

  이 통일형 다수성 품종도 미질, 내병충성 및 내냉성 등이 계속 개선되면서 수량성도 통일 품종개발 당시 4.5~5.0톤/ha에 불과하던 것이 ‘80년대 후반에는 6.0톤/ha까지 높아졌다.

  ‘80년대에는 동진(東津)벼를 비롯하여 많은 일반 양질미 품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여 삼남(三南)벼․상풍(常豊)벼․오대(五臺)벼․섬진(蟾津)벼․화성(花成)벼․팔공(八公)벼․금오(金烏)벼․진미(珍味)벼․장안(長安)벼․계화(界火)벼 등 34품종이나 개발 보급되어 통일형 품종들의 자리를 매꾸면서 쌀의 지속적인 자급을 유지시키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개발 보급된 일반 양질미 품종들의 수량성은 대체로 4.8~5.2톤/ha 수준으로 높아졌고 전국 평균단수도 4.4~4.8톤/ha 수준을 유지하였다.

  ‘70년대 말부터 꽃가루배양에 의한 벼 품종육성이 시도되어 드디어 1985년 “화성벼” 개발로 그 막을 열게 되면서 실용화가 정착되고 그후 계속하여 화청(花淸)벼․화진(花珍)벼․화영(花嶺)벼․화중(花中)벼․화남(花南)벼․화신(花新)벼․화선(花鮮)찰벼 등을 육성․보급하게 되었고 벼 품종개발 기간을 10~12년에서 5~6년으로 단축시켰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특히 밥맛이 좋으면서 병에 견디는 힘도 강하고 소출이 많이 나는 양질미 품종개발에 역점을 두면서 쌀의 용도를 넓히기 위한 특수미 품종개발에도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90년대에는 밥맛에 있어서 일본의 양질미인 고시히까리를 능가하는 일품(一品)벼의 개발을 필두로 서안(西安)벼․안중(安中)벼․진부(珍富)벼․만금(萬金)벼․화영(花嶺)벼․대야(大野)벼․대안(大安)벼․금남(錦南)벼․일미(一味)벼 등 많은 양질미 복합내병성 또는 내재해성 품종을 개발 보급하였고, 직파재배에 알맞는 농안(農安)벼․주안(周安)벼․안산(安産)벼 등과 보통쌀알의 1.5배가 되는 대립벼 1호, 양조용 심백미인 양조(釀造)벼, 구수한 냄새가 나는 향미(香米)벼 1호와 향남(香南)벼 등 가공용 특수미를 개발하였으며, 쌀 부족시대를 대비하여 초다수성인 다산(多産)벼와 남천(南川)벼도 개발하였다.

  이제 자포니카 양질미 품종의 수량성도 5.0톤/ha을 대부분 넘어서게 되었고, 초다수성벼는 7.0톤/ha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수량성을 끌어 올려 놓았으며 앞으로 2004년까지 10톤/ha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우리의 단위면적당 쌀 소출은 이미 1976년부터 일본을 제치고 꾸준히 세계최고의 자리를 거의 지키고 있으며, 농가답에서 세운 다수확 기록은 지난 70년대부터 이미 8~9톤/ha 수준을 넘어섰고 ‘84년에 삼강벼로 세운 쌀수량 10.06톤/ha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세계최고의 다수확기록으로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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