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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일본에서는 녹조가 생기는 논에 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꽂아 놓는 방법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움직임이 널리 퍼지고 있단다.


일본의 농민들이 이야기하기를, 녹조가 생기면 가장 큰 문제는 제초제가 통하지 않아 피와 같은 풀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점이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녹조의 발생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단다.


이러한 녹조가 발생하는 이유는 역시 풍부한 유기물 때문이겠다. 농사를 지어야 하니 논에 거름을 넣어야 하고, 그 거름이 양분이 되어 녹조가 쉬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농민들도 매년 논에 유기물을 많이 넣고 있는데, 이렇게 소나무 가지를 꽂은 다음부터 녹조가 발생하지 않거나 덜하다고 한다. 


또한 녹조의 발생이 물의 흐름과 수온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물이 가로세로로 넓게 퍼지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소나무 가지의 효과가 더 좋은데, 그렇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곳에서는 수온도 높고 효과가 덜하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즉, 논에 댄 물의 온도차가 높으면 높을수록 녹조가 훨씬 더 잘 발생한다고 한다. 논의 수평을 잘 잡는 것이 녹조의 발생을 줄이는 데에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겠다.


아무튼 그 원리가 무엇 때문인지 밝혀 보겠다는데 나까지도 궁금하다. 


동네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는 논의 물꼬에다 밤나무 가지를 가져다 꽂아놓으면 해충이 죽어 병에 덜 걸린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왜 그런지 밝히지 못하여 아직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지만, 언젠가 그러한 옛 농사법들의 원리가 꼭 밝혀지면 좋겠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주소로 들어가 보시길 바란다.


http://lib.ruralnet.or.jp/cgi-bin/ruralhtml.php?DSP=video!gn!201408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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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로 쉼터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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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봉 본래 이름 ‘매봉재’, 아시나요?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⑥ 꼭대기 바위 ‘매’ 닮은 모습

 

매화농장을 나와 마을 입구로 나아갔다. 들어오면서 본 멋들어진 소나무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아직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홀히 할 나무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그럴싸한 직함이나 외양을 보고 무엇을 판단하는 건 우리 사람만의 일일 것이다. 이 나무의 내력이 궁금해 하던 찰라, 밑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오시고 계셨다.

 

인사부터 드리고, 먼저 나무의 내력을 여쭈었다. 100년도 더 된 나무라고 하시는데, 정확하게는 마을 어른들도 모른단다. 아무튼 그 모양도 예쁘고 참 좋은 나무다. 나무는 어찌 그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헌데 이 일대는 이 나무만이 아니라 원래 소나무가 참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공장들이 들어선 안산고등학교 건너편이 다 솔밭이었단다. 아마 바닷가에 가면 방풍림이 있듯이 그런 숲이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안산고등학교 앞에 있는 육교 있는 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육교가 딱 갯다리 자리라고 한다. 그때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저 멀리 바다를 한 번 내다보면 속이 시원허니 좋았단다.

지금은 물론 아파트의 물결만 넘실거리고 있지만 말이다. 가만히 보니 안산에선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원래 바다이거나 뻘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어르신의 성함은 어윤석(丙子生)이라고 하는데, 6.25 지나 충청도 병천에서 안산으로 온 지 30년이 되었다고 하신다.

원래 태어나 자란 곳은 안성인데 왜정 때 병천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안산으로 온 것이란다. 지금은 논 2마지기에 밭 3000평 농사를 지으신다. 하지만 모두 소작이지 본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

땅도 모았을 법하신데 왜 아무것도 없냐고 여쭈니, 그렇게 부지런히 일해 다 자식들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냈다고 하신다. 부모님의 마음이 다 그런가 보다. 평생 남의 땅만 부쳤어도 후회는 없으시단다.

이 어르신께 재미난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지금은 수암봉이라 부르는 곳이 원래 매봉재라고 했다고 한다. 꼭대기에 있는 암석이 꼭 매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는데, 6.25 때 폭격을 맞아 부리 부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수인산업도로를 따라 지나다니면서 멀리서도 한눈에 띄기에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떻게 매를 닮았는지는 몰랐다.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었구나.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앉은 형상의 바위가 이제는 아픈 역사의 흉터를 안은 부리를 잘린 매가 되었다.

평생 배운 것이 농사라서 아직도 일을 손에서 못 떼고 있지만, 요즘은 농사지어 먹고 살기가 더 팍팍해졌다며 걱정이시다.

비료 값은 예전보다 5배 가까이 마구 오르고, 마땅한 판로가 있어 안심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산에 무슨 시장이 있어 내다팔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말이다. 이곳의 땅도 이제는 지역 사람들의 것이 아니란다.

개발이 되면서부터 값싸게 팔고 다들 외지로 나가, 땅은 다 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단다. 원주민은 싸게 팔았지만 그네들이 사서는 엄청 비싸게 거래가 된다며 이곳의 농사도 자기 대에서 끝일 거라고 씁쓸하게 말씀하신다.

  

한창 어르신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를 모르냐며 묻는다. 이유인즉 아무개가 식당에서 밥만 먹고 도망가서 찾으러 다닌단다. 참 살기 어려운 시절이기는 한가 보다. 나도 어서 발걸음을 옮기며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암으로 들어가 노거수를 살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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