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풍골 생명농원의 서승광 님을 만나서




서풍골을 찾아가다


서풍골, 서풍골이라 하면 나에겐 이렇다. 귀농통문에 글을 실으면 그 보답으로 귀농자의 농산물 가운데 하나를 받는다. 그때 내가 주로 고르는 것이 서풍골의 된장이다. 무엇보다 아내가 좋아하기에 늘 그걸 택한다. 귀농통문의 글값으로 서풍골 된장이 올 때면 좋아할 아내 생각에 왠지 뿌듯하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오늘은 그 서풍골 된장을 만드시는 서승광 님을 귀농통문의 특집 주제인 ‘가공’ 덕에 만날 기회를 얻었다.


요즘 농업은, 특히 1차 농산물만으로는 속이 새까맣게 타기 일쑤이다. 이건 무슨 널뛰기도 아니고 오르락내리락 가격이 춤을 춘다. ‘왜 그래요? 그런 속앓이 한 번 안 해봤으면 농민도 아니잖아요?’라는 소리가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권 이후에는 1차 농산물이 물가 상승의 원흉으로 찍히면서 가격이 오른다 싶으면 수입산을 들여오는 형편이 아닌가. 도대체 윗분들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귀농자가 한번쯤 가공이란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가공식품을 만드는 일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가공을 하기에 앞서 필요한 시설이며 여러 법적 규정들, 하나부터 열까지 생소하고 복잡하며 비용도 솔찮이 들기에 선뜻 나서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그러한 인허가 없이는 가공을 했더라도 판매하는 일이 쉽지 않다. 물론 알음알음으로 조금씩 내다파는 일은 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늘 맘 한구석은 찝찝할지 모른다. 저마다 처한 여러 조건과 사정에 속시원한 답을 주기는 힘들지 모르지만, 서승광 님이 된장을 가공하여 판매해온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서풍골 생명농원이 있는 논산의 가야곡면으로 향했다.


서승광 님의 집 벽면에는 진흙을 묻혀 찍은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다. 황토집을 짓다가 아이들과 재밌게 장난이라도 친 걸까?



성삼문의 절개를 기리는 농부, 서승광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엄청 밟았나 봐요?” 손님이 찾아온다는 연락에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다가 우리를 맞으러 마당으로 나온 그의 입에서 나온 말, 느릿느릿한 충청도 말투가 구수하다. 말씨에서 풍기듯 그는 이곳 가야곡면 육곡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그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농’을 목표로 ‘귀향’을 한 셈으로, 자신이 태어난 집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9년째라고 한다.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다가 나오셨다. 



“새주소가 시행되면서 여기를 ‘매죽헌로’라고 해서 처음에는 싫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삼문의 호가 매죽헌이더라구요. 그래서 지금은 참 좋아해요.”


그의 집 뒤로는 대나무숲이 자리하고 있다. 성삼문, 대나무, 서승광... 모두 같은 부류이다. 



이야기하는 중에 집주소가 특이하여 물으니 나온 그의 답이다. 성삼문, 그가 누구인가? 세조의 단종 폐위에 맞서 당신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며 맞서다 죽임을 당한 절개의 화신이 아닌가. 그런 성삼문처럼 그도 자신의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살고 있다. 그 원칙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게 아닌 가 싶을 정도이다. 직접 재배한 유기농 콩을 사용하고, 좋은 소금을 쓰고, 무쇠솥에 장작을 때서 콩을 삶고, 황토방에서 무농약 이상의 볏짚으로 메주를 띄우고, 정월에 재래 항아리에 메주를 갈라 대나무숲의 기운과 햇빛으로 발효시켜 된장, 간장을 만들고, 또 청국장을 만든다. 가장 기본 중의 기본, 그걸 지키겠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고 절개이다. 세상이 이상해서 원칙과 고집이 통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항아리 안에서 장이 익어간다. 만든이의 정성과 대나무숲의 기운과 햇빛을 머금고 장이 익어간다.



유기농 콩으로 장을 담그다


그는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에는 목사였다.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한 뒤 아내와 함께 강원도 태백에서, 그리고 인천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귀농을 결심했단다. 어릴 적 시골생활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조직생활과 잘 맞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니다. 사실 자신은 개신교보다 수행의 성격이 강한 불교나 천주교가 더 적성에 맞는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농사라는 수행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농사만큼 수행하기에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가야곡면에는 술 만드는 명인의 술도가가 있어 맛난 술을 마실 수도 사올 수도 있어 더 좋았다는... 뻑뻑주, 이름도 재미난데 맛도 좋다.



하지만 수행은 수행, 생활은 생활이다. 생계를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는 장 만들기라는 일을 선택했다. 거기에는 “귀농하기 전부터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에 대한 기억, 언젠가 전통 장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놓아본 적이 없어요.”라는 동기가 있었다. 역시 사람은 맛에 대한 기억이 가장 강력히 오래 남는가 보다.



어머니의 손맛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다. 올해 담근 햇장의 뚜껑을 감히 열어주셨다. 너, 나중에 보자. 맛나게 먹어주마. 



지금 귀농 생활에는 태백에서 목회활동을 했던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주중에는 한옥학교를 다니며 집짓는 법도 배워 지금은 별채로 쓰고 있는 건물도 직접 지었고, 또 가까운 정선 쪽에 된장으로 유명한 집이 있어 그곳을 오가며 장 만드는 일을 볼 수도 있었다고 한다. 참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태백에서 목회활동을 할 때 주중에 한옥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다는 솜씨로 짠 툇마루. 전통 방식 그대로 활용하여 짜맞춘 툇마루에서 그의 성품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농사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농사에 대한 욕심은 늘어나고 있다. 종중의 땅인 4000평의 산밭을 얻어 유기농으로 콩농사를 짓고 그 콩으로 된장, 간장, 청국장을 직접 만든다. 어떻게 보면 지독히 이기적이고 철저한 사람이다. 수행과 생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기 않은가.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처음에 몰라서 시작했지 알았으면 안 했을지 몰라요. 멋도 모르고 덤빈 거죠.” 고라니·멧돼지 같은 짐승 때문에, 굼벵이·노린재 같은 벌레 때문에, 풀 때문에, 순집기 실패 때문에, 날씨 때문에 고생하며 콩농사에 실패한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는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 애린 맘이야 왜 모르겠는가. 난 새가 내 콩의 떡잎을 따 먹은 걸 발견하고는 새에게 온갖 쌍욕을 날려주었는데 말이다.





어려운 콩농사지만 스스로 직접 농사짓기에 생기는 자부심도 있다. 현재 생협 같은 곳에서도 유기농 콩의 확보가 어려워 무농약 국산콩이면 재료로 인정해주는 현실이라고 한다. 그만큼 농부가 없고, 더구나 유기농 콩농사를 짓는 농부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기에 그럴 것이다. 서승광 님에 따르면, 논산에 농가가 1만 가구 정도인데, 그 중에 유기농업을 하는 곳은 단 4곳뿐이라고 한다. 자신이 논산에서 4번째로 인증을 받았단다. 실제로 한국의 친환경농산물 농지 가운데 유기농 인증을 받은 농지는 전체의 0.8%에 지나지 않는다.



좌충우돌 가공시설 짓기


그는 콩농사를 지어 수확한 만큼만 가공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헌데 이게 원칙이랄 것도 없는 것이, 사실 그 이상으로 판매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면서 웃음을 짓는다. 판매가 어려운 이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첫째, 된장 같은 장류는 기호성이 강하다는 점. 특히 한번 시중의 일반적인 장류에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전통 장류는 짜고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도시인은 생활이 바빠서 요리 자체를 잘 안 해 먹는다. 얼마 전부터 꾸러미 사업을 시작했는데, 바로 냉장고에서 꺼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면 버려지는 것도 꽤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새는 두 날개로 날듯이 농촌이 살려면 도시가 살아나야 하고, 도시가 살려면 농촌이 살아나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25kg, 55kg, 70kg짜리 2개의 가마솥이 걸려 있다. 여기서 하루에 300kg 정도의 콩을 삶을 수 있다. 경험해보니 최대 500kg까지는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가운데 솥이 안성맞춤에서 산 가마솥인데 크기도 가장 적당하고 질도 좋다고 한다. 불은 가스불은 절대 쓰지 않고 모두 장작을 땐다고 한다. 작은 부분 하나에도 그의 고집이 느껴진다.  



귀농하여 처음 6년 정도는 그가 손수 지은 집 안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콩을 삶아 메주를 띄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규모가 좀 더 커지면서, 그리고 처음 지어본 집이라 이런저런 욕심으로 여러 측면을 고려했더니 장을 만들기에 자질구레한 불편과 어려움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가공을 전용으로 하는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을 조금씩 할 무렵인 5년 전, 지자체의 담당공무원과 만난 자리에서 폐수정화장치에 2천만원은 필요하다는 얘기에 그냥 생각을 확 접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운이 닿았던지 그 담당공무원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면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담당공무원이 천안의 산업단지 안에 ‘공장설립지원센터(http://www.femis.go.kr)’가 있는데 그곳에 소규모 창업을 지원하고 일을 돕는다는 정보를 주었던 것이다. 공장이라 하면 기계를 이용하여 공산품만 만드는 공간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러한 가공식품을 만드는 곳도 하나의 공장이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 가공식품이라는 것도 조금씩 만들어 아는 사람에게만 파는 것이 아니라면, 합법적으로 여러 법적인 규정을 만족시키며 상품을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총 공사비 5천만원, 공사기간 8개월이 걸려 지은 가공시설. 흙벽돌 하나하나 손수 찍어서 쌓아올렸다. 보통 이런 시설을 짓는 데 2개월이면 충분하지만 신경을 써서 정성을 쏟은 만큼 기간도 오래 걸렸다. 



이 센터가 좋은 점은 모든 과정이 무료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공장설립을 지원하는 공기업이라 각 시도별로 기관이 하나씩 있으며, 공장설립이 곧 자신들의 실적과 이어지기에 모든 일을 무료로 성실히 처리해준다고 한다. 서승광 님도 이곳의 도움을 받아 가공시설을 가주는 일이 쉽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한 예로 앞서 그를 좌절시켰던 폐수정화장치의 경우에도, 하루 최대 5톤이 넘으면 폐수일 수 있지만 그 이하는 폐수로 취급이 되지 않는다는 사항도 이 센터의 조언으로 알게 되어 아무 문제없이 설치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솥이나 항아리를 씻은 물이 염분 때문에 폐수가 될 수도 있으나, 서풍골 같은 경우 소규모이기 때문에 하루에 100ℓ 이상 안 나오지 않느냐, 그리고 그 이상을 해야 한다면 하루에 몰아서 하지 말고 며칠에 나눠서 100ℓ 이하로만 닦으면 되지 않느냐는 답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꼼꼼한 조언(?) 덕에 현재 약 37평 정도의 가공시설을 지으면서 꼭 필요한 화장실용 정화조(5인용 20만원)만 묻고, 사무실로 쓸 공간 하나에 공정별 작업실과 세척시설만 설치하고도 제2종 근린시설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무료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장점이고, 이러한 과정이 창업으로 들어가 여러 세금도 면제가 되는 혜택도 있었다고 한다.







서풍골 생명농원을 평생직업으로


물론 가공시설만 짓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니다. 1년에 한 번은 식품위생법에 따라 위생 상태 등을 검사받아야 하고, 생산실적보고도 해마다 하도록 되어 있고, 지하수 수질 검사도 해야 하고, 제품의 품질검사도 의뢰해서 받아야 하고, 보건소에 가서 건강검사도 받아야 하며, 한번씩 관련 교육도 받으러 가야 하는 까다롭고 귀찮은 일도 함께 생긴다. 하지만 사람의 건강과 직결될 수 있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일인 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죽순처럼 자라고, 대나무처럼 번져라~



이러한 점에 대해 서승광 님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처럼 소규모로 가공식품을 만드는 일은 식품의약청에서 담당할 것이 아니라 농림부 주관으로 넘어가 전통가공식품 육성 등의 방법으로 소규모 생산·판매를 보장해주는 것이 좋다.” 여기에 더하여 슬로우푸드라든지 로컬푸드 등의 운동적인 성격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 장과 관련하여 우려스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현재 대기업에서 기존의 장류만이 아니라 전통 장까지도 사업화하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괴산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는 절임배추를 식품 관련 대기업에서 나서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런 일까지 있을 줄이야. 대기업은 정말 동네 구멍가게에 문방구까지 망하게 하더니 어디까지 욕망을 뻗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서승광 님의 바람은 그의 원칙처럼 단순하다. 앞으로 40~50년,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도로 규모를 유지하면서 한 가지 품목을 확대하기보다는 여러 품목으로 다양화시키면서 평생직업으로 서풍골 생명농원을 꾸려가겠다. 그리고 아이가 원한다면 그에게 이곳을 물려주고 싶다.

그의 맛난 된장처럼 그의 바람이 푹 익어 맛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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