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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 밀'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이야 워낙 유명해져서 전국 방방곡곡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고, 여기저기 널리 재배될 뿐만 아니라 상품으로도 꽤 많이 팔리고 있다. 밀의 존재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이야기만 듣다가 2012년 여름, <토종 곡식>을 저술하면서 조사하다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자료를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어떻게 찾을 수 없을까 알아보다가 진주 금곡 정미소에서 이 밀을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아 대표인 백관실 선생을 만나러 갔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또 한 명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석태 선생이다. 그 더운 여름에, 가는 길에 서석태 선생을 태우고 금곡 정미소까지 함께 가서 취재를 한 기억이 난다. 가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체했는지 어떤지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결국 그날, 내가 한창 조사하고 있는 와중에 앉아서 쉬시다가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다. 놀라고 당황하여 경황이 없었지만 먼 길을 왔기에 인터뷰는 마쳐야겠고, 사람은 쓰러졌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 함께 간 주소영 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저는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우니 대신 좀 부탁드린다고. 그리고는 응급차가 와서 함께 경상대병원으로 가서 바로 입원하시고 이후 위암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덕분에 살았다고, 혼자 거창 집에 있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쓰러져서 큰일날 뻔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날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 하고도 7-8개월이나 지났다. 저 세상에서도 주변에 사람들 모아서 재미나게 지내고 계신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를 기억한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데로 흘렀다.

앉은뱅이 밀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안완식 박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서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있었지만 다들 안완식 박사가 앉은뱅이 밀을 다시 찾았다고만 이야기하고 나의 일은 쏙 빠져 있으니 좀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아무튼 그런 사실 관계는 차치하고, 나는 그런데 왜 앉은뱅이 밀은 그렇게 키가 작아졌을지 궁금했다. 도대체 왜일까? 안완식 박사의 자료에 의하면, 앉은뱅이 밀은 남해안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품종명을 기록해 놓은 자료를 보아도 앉은뱅이 밀의 품종명이 나타나는 곳의 분포가 그와 일치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남해안일까? 여기서부터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는 바람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했다. 남해안은 보리가 한창 성숙하여 자라고 있을 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바다와 인접해 있는지라 더더욱 바람의 변동과 세기가 심했을지 모른다. 이른 자연 조건에서 살아남으려면 키가 큰 것보다 키가 작은 쪽이 더 살아남기에 유리했을 터이다. 그러니 자연히 농민들도 이런 특성을 보이는 밀을 선택하여 재배해 오지 않았을까? 이런 내용은 이미 <토종 곡식>에서 다룬 바 있다.

오랜만에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앉은뱅이 밀에 대한 내용이 참 많아졌다. 그런데 동아일보 김유영 기자는 '앉은뱅이 밀'이 기원전 300년부터 재배되었다는 걸 어떻게 저렇게 자신 있게 작성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161102/81119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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