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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명한 희귀 씨앗을 판매하는 사이트에 "두보르스키안 벼"라는 게 올라와 있다. 스키안? 러시아 쪽인가 싶어서 설명을 보니 러시아인가 우크라이나인가 그쪽에서 재배하던 벼로서, 헝가리 사람이 밭벼로 재배하던 것이라 한다. 

https://www.rareseeds.com/duborskian-rice/reviews/?fbclid=IwAR1E2wHvb6l5H-O1AZPhX4mIfTz2tQL9dZsrG0zWby7cy5mmJSKk2ooTi-o


어떻게 거기까지 흘러갔을까? 과거 일제강점기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짐보따리에는 볍씨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물론,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그곳에서 적당한 땅을 찾아 논으로 풀어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들 덕에 세계 농업사에서 벼 재배의 북방한계선을 가장 위쪽까지 끌어올린 일이 일어났다. 말이야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해주에서 벼농사를 짓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 쪽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그때에도 그들의 짐보따리에는 볍씨가 들어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추위와 배고품에 시달리면서도 볍씨만은 절대 까먹지 않고 그대로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강제 이주된 곳에서 고려인들은 또, 적당한 땅을 찾아 벼농사를 지었다. 그들의 근면한 농사는 중앙아시아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고, 소련 정부에게서 많은 상도 받았다는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난다. 

혹시, 우크라이나에서 헝가리로 건너온 것 같다는 이 볍씨가 당시 고려인들이 소중하게 가지고 갔던 그 볍씨에서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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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de van Andel 씨가 수리남의 Paramaribo에 있는 시장에서 도정하지 않은 쌀 한 봉지를 구매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노예제의 가거를 새롭게 검토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 네덜란드 Leiden에 있는 Naturalis Biodiversity Center의 민족학자는 2006년 수리남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약용 및 제례용 식물을 조사했다. 그녀는 쌀을 포함한 약초와 제례용 식물을 판매하는 수백 명의 마룬Maroon 여성들로 붐비는 수도의 시장을 발견했다.

수리남의 마룬은 그 국가의 내륙에 있는 열대우림을 피난처로 정하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도주 노예들의 후손이다. 이질적인 경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초기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룬들은 살아남아 그 문화를 지속해 올 수 있었다. 오늘날 20만 이상의 마룬들이 있고, 대부분은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에도 적은 수가 있다.  

역사가들은 350년이란 대서양 횡단 무역 기간 동안 1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강제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추정한다. 이 항해에서 살아남은 1070만 명 가운데 약 30만 명의 노예들이 1668년부터 1823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수리남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급증하는 커피와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로 노동해야 했다.  

수리남에서 van Andel 씨는 노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 -쌀을 포함하여- 이 논의되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북미의 수익성 좋은 쌀 플랜테이션을 도왔던 벼와 농사법을 가져왔는가? 기존 이론의 대부분은 노예는 주인이 시킨 일을 수행한 무지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벼 해안"에 있는 국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작물에 대한 지식을 가져왔다. Wageningen University


그 논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번서아는 벼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프리카인 노예의 사례를 제시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벼 역사학자이지 지리학 교수인 Judith Carney 씨가 2002년 저술한 책 Black Rice에 의해 촉발되었다. 벼는 식민지 시대 초기의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작물의 하나였으며, 최대 25%의 수익을 올렸다. 아프리카의 쌀은 짙은색의 겉껍질이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3개월의 항해 동안 배에 가득 실린 노예들을 먹이기 위해 사용된 단단한 곡물로 제공되었다. 다수확의 아시아의 벼가 결국 플랜테이션을 장악하였지만, 아프리카의 쌀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은 신세계에서 탄탄히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경작술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오랫동안 활용하던 전통적 벼 농사법을 문서화하며 서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낸 Carney 씨는 신세계에서 벼농사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들이 파종, 도정, 요리하던 방법만이 아니라 벼를 경작한 미소환경을 아프리카 여성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그녀는 노예 소유주들의희소하고 편향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서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공들여 짜맞추었다."미국 혁명까지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농촌 지역처럼 절구와 절구공이로 도정을 했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전설에서는, 배를 타기 전에 여성들이 머리카락 속에 아직 도정하지 않아 씨앗으로 쓸 수 있던 볍씨를 어떻게 숨겼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연구는 "아프리카 대리인(African agency)"이라는 개념 -노예들이 적어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언어 구사력을 가졌다는 개념- 을 뒷받침했다. 

Carney 씨의 조사는 최초로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업의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주장한 듀크 대학의 노예사학자 Peter Wood 씨의 연구에 기초한다. "1974년에 그것은 진보적 개념이었고, 수십 년 동안 열띤 반응이 나타났다."고 Carney 씨는 이야기한다.

Carney 씨 역시 학술적 비판에 시달렸다.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노예 소유주는 아무도 자신의 노예가 벼를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그러다 van Andel 씨의 연구에 관한 말이 나왔다. 2006년 그녀의 수리남 여행에 관한 강연을 한 이후에 van Andel 씨는 Black Rice를 읽은 대학원생 청중에게 그곳에서 벼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해 보니, 사실 어딘가에서 제례용 쌀 봉지를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는 그 샘플이 아프리카의 쌀이라고 결정되었을 때 나중에 외쳤다. 명백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추적이 가능한 총알이었다. 


마론으로 알려진 도주 노예들은 수리남의 열대우림에 숨어서 독립을 유지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와 문화를 확립했다. Tinde van Andel


van Andel 씨를 비롯한 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한 흰쌀인 아시아의 벼가 미국의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널리 믿었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의 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식물 자체가 수리남에서 재배되었으며 쌀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걸 문서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녀는 수리남의 약용식물에 대한 현지조사를 끝마쳤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는 2008년 Paramaribo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표본을 찾기 위해 하루 만에 그녀는 약용식물 목록을 조사한 마을인 Mundje Kreek에 사는 친구 Berto Poeketie 씨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지역에서 검은쌀을 재배한다고 알려진 여성인 Emelina Koese 씨와 연결해 주었다. Koese 씨는 —그 지방에서 가장 널리 믿는 Winti 같은 종교를 지닌 여러 마을 주민들처럼— 외부인을 의심했고, 따라서 그녀의 지식을 낯선 이와공유하길 주저했다. 숲에서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Koese 씨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나무에 걸어 놓고 도난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초, 뼈, 천조각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 밖에서 큰삼각머리독사와 맞닥뜨리면 백인은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신호라고 Koese 씨는 해석했다. 결국 van Andel 씨는 식물체 하나와 사진 한 장만 원하며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곳은 내가 모든 중요한 제례용 식물이 뿌리째 뽑혔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마을의 바깥에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회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쌀의 활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량의 아프리카 쌀이 조상에게 제물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마법' 식물과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이 특별하게 하나에 관해 묻는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나누고 싶어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들이 당신도 무언가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과 대화하는 걸 가치 있다고 결정한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서 현재 아프리카 벼를 재배한다는 걸 확인했을 때, 아프리카의 벼가 노예 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와 관련된 쌀 농사법이 아프리카인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 Carney 씨의 이론이 지지를 받았다고 2010년 그 발견에 대해 발표한 Economic Botany의 편집장 Robert Voeks 씨는말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시작에 불과했다. 벼가 어떻게 수리남에 이르렀는지 탐험하고자 했던 van Andel 씨는 언어학과 벼 유전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노예들의 이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창이 열렸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 있으면서 떨칠 수 없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왜 마룬들은 인근의 토착민들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이용했을까? 그녀는 다른 이름과 응용법 및 준비는 아프리카의 유산과 혼합되었을 가능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2010-2012년, 그녀는 가나와 베냉, 가봉을 방문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수백 만 명의 노예가 강제 이주된 350년 동안 식물학적 이해에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무엇을 잊었으며, 무엇을 기억했고, 어떤 적응이 필요했는가?


Tinde van Ande 씨의 수리남의 벼에 대한 연구는 그녀를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데리고 갔고, 수리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식물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Christiaan van der Hoeven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을 다니면서 van Andel 씨는 수리남의 식물 이름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수리남의 수많은 식물명은 아프리카에 기반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수리남의 식물명 2350개를 서아프리카의 그것과 비교했다. 마룬의 토착어 가운데 40% 이상이 소리, 구조,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식물명과 닮았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인의 눈을 통해" 식물군을 보았다고 한다. 학술 문헌을 활용해 그녀는 다른 나라의 식물명과도 비교했다. 가장 이목을 끄는 유사함은 네덜란드가 노예를 구매한 주요 지역인 가봉과 앙골라의 식물명에서 발견되었다. 2014년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된 그녀의 논문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식물군의 상당 부분을 인지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노예가 신세계에 왔고 아무 역사가 없으며 텅빈 석판이었다는 건 구식의 사고방식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당신이 기억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이 된다. 열대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매우 다르지만, 식물 군집에는 겹치는 부분이 조금 있다. "열대우림의 종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지식이 마룬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Voeks 씨도 동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을 가져와서 남아 있는 종이나 속과 유사한 것들을 이에 겹치게 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생태학적 변화의 중요한 대리인이었다."

Van Andel 씨는 마룬의 벼가 유전자만 얻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걸 추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5년 남아프리카 Western Cape에서 열린 회이에서 van Andel 씨는 뉴욕대학의 박사후 연구원 Rachel Meyer 씨를 만나 마룬과 아프리카의 토종 벼의 게놈의 염기서열이 일치하는지 함께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2016년 10월,  Carney 씨를 포함한 연구진은 마룬 벼의 기원이 기니아 고원의 국가들, 특히 코트디부아르 서부에 있다고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Nature Plants에 발표했다. 네덜란드는 가나와 베냉, 중앙 아프리카에서 노예의 대부분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노예선의 기록에 의하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식료품을 확보했다고 나온다.

"우리의 연구는 인구 이동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식물의 염기서열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그녀는말한다.

마룬 벼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분야 -역사학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식물을 활용- 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생물분자 고고학자 Terry Brown 씨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의 작물의 기원을 정확히 찾아내고자 유전학이 사용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인간 이주에 대한 대용물로 식물이 사용된 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마룬이 재배하는 수리남의 여러 벼 품종은 서아프리카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 Tinde van Andel


인간의 이주를 추적하고자 식물의 유전학을 활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식물의 재생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덜 복잡하며, 경작의 흔적은 인간에게 식물의 가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은 '토요일 밤의 효과'가 있다. 수컷은 짧은 거리를 가서 이주하지 않고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붙어 있어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보여준다. 

노예가 경작한 신세계의 벼와 아프리카에 있는 그 기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 외에도, 새로운 유전적 기술들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농업의 기원이 갑자기 발명도었다는 개념을 뒤집었다. "우리는 이제 농업의 기원이 초기의 수렵채집민이 야생 식물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확립되기까지 8000-9000년이 걸린 오래 계속된 과정이라고 믿는다."고  Brown 씨는 말한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작물화된 보리와 밀의 게놈을 이용하여 그것이 단일한 근원의 개체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교잡된 것임을 증명한다. 

van Andel 씨에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노예제의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 그녀는 오크라부터 얌과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더 노력하여 다른 작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정말로 알고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이 물어봐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녀는 마룬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돕길 희망한다. 

이를 위하여 van Andel 씨는 최근 프랑스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민족식물학자 Marie Fleury 씨와 함께 수리남 동부에 이웃한 프랑스령 기아나의 마룬 공동체를 탐사하기 위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과학 및 탐사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았다. 이 연구진은 올해 여름 벼가 익었을 때 현지조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마룬의 문화는 그녀가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리남 마룬의 작은 집단이 네덜란드에서 그녀 근처에 살고 있다. 사실, 제례에 사용된 신성한 식물은 두 나라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되었다. 예를 들어 Winti가 1971년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관습이 살아 있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차별을 당했고, 때로는 숲에 살고 있는 퇴보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녀의 노력이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혀준다면, 마룬은 식물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이들 간과된 작물 품종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마룬의 경우, 벼 재배는 전통 종교 뿐만 아니라 역사도 살아 있어 사람들이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노예 국가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https://www.sapiens.org/culture/african-rice-new-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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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조생종 벼들이 고려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린 이유가 본문에 나온다.

"한국의 시월과는 다른 이 지역의 기후는 아침 저녁이면 벌써 초겨울의 기온이다."


일본 농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의 벼들은 대부분 조생종이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겠다. 하나, 가능한 지역에서는 대개 맥류와 이모작을 행하기에 모내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일찍 여무는 품종이 유리했다. 둘, 관개 사정이 여의치 않기에 -빗물에 의존하거나 조그만 둠벙 등으로 해결- 6월 말에서 7월 초쯤 찾아오는 장맛비가 관개용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 그 시기를 전후하여 모내기하는 것이 유리했다.

지금이야 물 사정 때문에 모내기를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최근의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의 영향을 빼고- 모내기는 점점 더 빨라지고, 그만큼 재배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중만생종이 더 많은 선택을 받고 논이란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조생종은 강원도 지역처럼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곳이나, 추석맞이 햅쌀을 출하하려는 농가를 빼고는 잘 선택하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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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쌀>이란 책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과 함께 볍씨가 건너와 재배된 이야기입니다.  http://www.hup.harvard.edu/catalog.php…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책으로, <깊은 뿌리: 서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벼농사>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http://www.iupress.indiana.edu/catalog/807471


이런 이야기가 비단 아프리카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근대 조선인들도 겪은 일이지요.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된 고려인들의 벼농사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다음과 같이 일제강점기 만주로 떠나 벼농사를 지은 조선인들의 이야기가 있겠구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6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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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의 농업 관련된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의 발견. 

물론 그것이 의미는 있으나 가장 오래된 재배 벼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 볍씨를 가지고 한반도가 최고의 벼농사 지역이었다는 둥, 그래서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둥 하는 류의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마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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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5644


소로리볍씨 비해 가와지볍씨는 확실한 재배벼
소로리볍씨는 반재배단계와 초기농경단계 사이 순화벼
[1190호] 2014년 09월 18일 (목) 12:04:03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1회 가와지볍씨, 발굴에서 출토까지 
2회 벼농사 기원, 청동기에서 신석기로
3회 3천년 여주 흔암리볍씨와 뭐가 다른가  
4회 1만5천년 청원 소로리 볍씨와 뭐가 다른가   
5회 5천년 가와지볍씨, 지역문화브랜드를 향해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 기원을 밝히다

1991년 일산신도시 문화유적조사(단장 손보기)로 발굴된 가와지볍씨 12톨은 약 502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볍씨로 큰 브랜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을 개관해 시민들에게 가와지볍씨를 알리면서 브랜드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고양 가와지볍씨는 1991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가와지 유적의 신석기시대 토층에서 발굴된 4340전인 B.C 2300년 경의 자포니카 볍씨 4톨로, 미국 베타연구소의 연도측정 결과 5000년 전의 볍씨임이 확인됐다. 

고양시는 이 가와지볍씨가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임을 뒷받침하는 여러 연구논문과 함께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벼농사 가능성까지 열어주는 연구결과와 고고학적 성과들을 발표하며 발빠른 콘텐츠 선점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청원 소로리볍씨가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오래된 볍씨로 학계에 주목을 받아왔다. 이에 고양 가와지볍씨와 청원 소로리볍씨는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소로리볍씨, 가장 오래된 볍씨 확인돼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볍씨가 출토됐다. 바로 청원 소로리 볍씨다. 청원 소로리 볍씨는 1997~1998년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 예정지인 옥산면 소로리 문화유적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됐다. 당시 출토된 볍씨는 고대벼 18톨, 유사벼 41톨 등 모두 59톨로 확인됐다. 볍씨뿐만이 아니라 이 유적 일대에는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이 넓은 범위에 걸쳐 수습됐다.

  
▲ 고대볍씨(자포니카)의 출토 상태 모습



특히 출토된 볍씨는 바로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연구실로 보내져, 1만3000년 ~ 1만5000년 전의 절대연대값을 얻어 청원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볍씨임이 판명됐다. 

청원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고고학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진 것은 중국 호남성 옥첨암 동굴의 순화볍씨였다. 청원 소로리 볍씨는 이보다 3000~4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진 것이다.  

소로리 볍씨가 1만 5000년전 것으로 판명되자 일부 학계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그 의문은 크게 2가지였는데, 하나는 ‘1만 5000년 전은 구석기말 빙기의 끝무렵인데 한반도에서 아열대 식물로 알려진 벼가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또 그 벼가 야생벼인지, 재배벼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 소로리볍씨의 소지경이 잘라진 모습.


그 고증을 얻기 위해 당시 청주MBC 취재팀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통해 벼가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실험한 결과, 벼가 자연상태에서 최저 발아온도가 섭씨 20도로 알려졌지만, 실험결과 13도에서도 70%이상이 발아되어 생성되는 연구 결과를 얻게되었다. 냉해실험을 통해 따뜻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벼가 기후적응을 잘하는 식물로 1만5000년전의 학설이 긍정적으로 무게가 실려진 것이다.

이융조 교수 “재배벼 단정할 수 없다”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는 고대벼의 소지경 형태는 야생벼의 길쭉하고 뾰족한 것과는 다르게 짤림이 잘 되지 않았다. SEM 촬영결과 외부의 힘에 의해 잘라진 특징이 관찰되어, 재배벼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융조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는 그동안 1만3920bp(before present)의 연대값을 기초해 ‘약 1만5000년 전’으로 발표했으나, 이를 다시 미국 캠브리지대의 세계 공용 측정프로그램으로 계산한 결과 BC 1만5118년전으로 밝혀져 그 연대를 ‘약 1만7000년 전’으로 수정한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또한 “지금까지는 학명없이 ‘소로리볍씨’로만 불렀으나 ‘Oryza sative coreaca(오리자 사티바 코레아카)’ 즉, ‘한국의 고대벼’ 라는 학명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이융조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에 대해 “재배벼의 특징은 가지고 있지만 재배벼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단지 재배벼 이전 단계인 ‘순화벼’라는 명칭을 청원 소로리 볍씨에 부여했다. 이 이사장은 “소로리 볍씨의 연대가 1만7000년 전으로 측정된 것, 아생벼와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소지경의 절단면이 SEM으로 관찰된 점, 토탄 출토지점 옆에서 많은 구석기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 등 반재배단계와 초기 농경단계 사이의 순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벼라고 생각된다. 즉 소로리 볍씨는 한국 재배벼의 조상이며,순화초기의 벼라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조용구 충북대 식물자원학과 교수는 “현재 국내에는 잡초벼가 있을 뿐 벼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야생벼가 존재하지 않는 점, 또한 소로리볍씨는 현존하는 유적 실물 중 가장 연대가 높은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이는 인간이 야생상태의 벼로부터 차츰 파종하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자연 선발되는 단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서학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는 “청원 소로리 볍씨의 DNA분석 결과, 현재의 재배벼·유사벼와는 다른 39.6%의 낮은 유전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소로리볍씨와 야생벼와는 57% 정도의 유사도를 보이는 연구도 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야생벼는 낟알이 소지경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잘 떨어지는 탈립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야생벼의 소지경은 매우 매끄럽다. 이에 반해 재배벼는 소지경 상태가 매우 거칠다. 가와지볍씨의 소지경 상태를 전자주사현미경(SEM)으로 촬영한 결과 재배벼의 특성인 거친 단면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청원 소로리 볍씨는 재배벼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재배벼라고 단정할 수 없다.  

  
▲ BBC 뉴스(인터넷판)에 소개된 "세계 최고의 벼가 발견되다"(2013.10.21)
  

 

소로리볍씨가 가와지볍씨로 맥 이어져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을 비롯해 고 박태식 박사,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은 비록 적은 개체수이긴 하지만 온전한 청원 소로리 출토 볍씨 13톨과 고양 가와지 출토 볍씨의 크기와 볍씨 형태를 비교했다. 그 결과 소로리 출토 볍씨는 유전적으로 변이가 크게 분포하고 있으며,고양 가와지 출토 볍씨보다 약간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소로리 볍씨는 자포니카(japonica)에 가까운 편이었고,인디카(indica)에 가까운 것이 1톨,자포니카(javanica)로 추정되는 것이 1톨이었다.

  
▲ 볍씨의 유입경로(이융조, 박태식, 우종윤. 2013)
자포니카(japonica) 쌀은 모양새가 둥글고 굵은 단립형 쌀이다. 자포니카 쌀은 한반도, 일본, 중국 북부에서만 주로 소비가 되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 중 10% 가량뿐이다. 이에 반해 인디카(Indica) 쌀은 전 세계 쌀의 90%를 차지하는, 쌀의 대표적인 품종으로 ‘안남미’라고도 부른다. 태국쌀, 필리핀쌀, 베트남쌀 등이 모두 안남미이다. 인디카는 모양이 길쭉하고, 찰기가 없어서 밥알이 분리된다. 따라서, 밥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마시는 방식으로 먹는다. 

이들 연구자들은 소로리와 가와지의 두 출토 볍씨 사이에 있던 긴 공백에도 소로리 출토 볍씨가 가와지 출토 볍씨로 맥이 이어져 약간 작고 약간 긴 쪽으로 균일화되었다고 추정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에 의한 선택, 또는 벼를 재배해야 할 충분한 생존의 압력이 작용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앞으로 좀 더 많은 유물이 또 여러 곳에서 나와야 보다 확실한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여겼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들 연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남쪽지방에서 유입된 여러 가지 벼(고대벼와 유사벼의 4종류)가 우리 선조의 지혜와 자연선택에 의하여 자포니카에 가까운  재배벼인 고대벼로 종의 분화에 이르른 가와지벼는 당시 사회변화에 큰 영향을 주어 고조선을 비롯한 여러 국가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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