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조선의 농촌에서는 공동작업을 행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고 농악을 두드리며 능률의 증진을 도모하는 일이 있다. 그 해 6월까지 강우가 많아 벼의 삽앙이 일제히 끝나면, 7월에 들어서부터 각 부락에서 활발히 논의 제초가 행해진다. 그때 논의 한 구석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적은 커다란 기를 세우고, 때로 “창가라 창가라” 하고 농악을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즉 두레패(두)이다.

두레패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60여 년 전, 당시 섭정 대원군이 조선 미증유의 대공사인 경복궁을 중건하였을 때 각 지방에서 다량의 목재를 운반시키고 또 다수의 인민을 모아 노역에 복역시켰는데, 각 지방인 중에 1명을 지정하여 감독의 일을 맡게 하고 그 감독자는 자기의 단체의 능률을 올리고 작업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농악을 이용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관한 (89)문헌은 불가증(不可證)으로 근거하는 바가 없지만, 수원군내에 있어서 두레패 창립의 최고(最古)는 경복궁중수의 해, 즉 갑자, 을축의 해이다. 이 구비에 의하면 가령 그 즈음 이전에 있었다고 해도, 이때 이후로 성행하게 된 것으로 상상된다.

지금 이 두레패의 조직을 보면, 일개 부락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서로 모여 하나의 계를 조직하고, 그리고 금전 혹은 곡물을 거출하여 농악을 구입하며, 잔여의 금곡(金穀)은 계의 재산으로 이식(利殖)하는 곳도 있다. 또 혹은 부락에서는 계 설립자 중 유력자가 금전을 내서 농악을 구입토록 하고, 그 돈은 계원의 공동작업에 의한 수입으로부터 반환하게끔 하는 곳도 있다. 두레패의계원은 부락의 장년자(壯年者)이므로, 청년으로 한 사람 몫의 어른이 된 자를 가입시키고, 또는 사정에 따라 계를 탈퇴하는 것도 임의(任意)이다. 따라서 해마다 그 인원에는 다소의 이동(異動)이 있다. 두레패계의 장(長)은 이를 좌상(座上)이라고 하여 계원 중의 최연장자가 되며, 또 영좌(領座)라고 칭하는 것도 한 명 있어서 두레패에 관한 사무를 처리한다.
두레패에 속한 악기는 농기 하나, 징 하나, 꽹과리(갱가리) 둘, 북 하나, 호적 하나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두레패는 그 계를 중심으로 하여 해마다 희망자를 모아 공동작업에 의해 논의 제초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인원이 20인이라고 하면, 각인은 자기의 경작면적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공동작업에 부치며, 그 전체 논 면적을 공동의 인원으로 며칠간에 공동제초한다. 매일의 식사는 공동인원 중 재산가에게 의뢰하여 순번으로 하루씩 술과 밥을 내게 한다. 그리고 제초가 끝나면 두레패원 중 최소면적을 표준으로 하여, 그 이상의 면적을 가진 사람은 1반보에 대해 대략 40전의 비율로 금전을 내게 하고, 작업 중의 음식값으로서 한 사람 앞에 하루 쌀 1승 대금과 술값을 그 중에서 제하며, 잔금을 공동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이 방식을 두렁넘이(두렁늠이)라고 칭하여 보통은 이에 의한다. 곳에 따라서는 공동작업에 부치는 면적을 평등으로 하여 식사는 각호 순번으로 제공하는 곳도 있다.
제초공동작업의 순서는 모내기의 전후, 논물의 심천(深淺), 기타 사정을 보아 영좌가 정한다. 공동작업이 끝나고 여력이 있을 때는 서로의 상담에 의해 계원 외에 타인의 논의 제초를 청부하고, 얻은 임금을 분배한다든지 혹은 계의 경비에 충용(充用)하는 일이 있다.

두레패는 원래 제초를 공동작업으로 하기 위해 조직되는 것이므로, 그만큼 상당한 이익이 있다. 먼저 노동시간에 대(90)해 보면, 보통 농가의 경우에는 오전 7시에 시업(始業)하여 식사 또는 새참(中休)을 위해 세 번 10분간 휴게하고 오후 7시 30분에 종업(終業)하여 하루 노역시간이 9시간 20분이지만, 두레패의 경우에는 6시에 일을 시작하여 휴게ㆍ종업은 대체로 위와 같아 하루 노동시간은 10시간 20분이 되는 것이다. 작업의 능률도 공동으로 하는 고로 일이 빨라 보통의 경우 하루 1반보임에 비하여, 하루 1반 3무보에 달한다. 기타 두레패의 이익 되는 바는, 세농자(細農者)도 농번기에 있어서 용이하게 제초를 마칠 수 있는 점, 시간의 여행(勵行)이 가능하여 작업이 민속(敏速)한 점, 작업장에 나올 때, 그것을 옮길 때, 가로(家路)에 오를 때에 모두 농악을 연주하여 행진하므로 저도 모르게 흥미를 일으키는 점이다. 그 불리한 점으로는 작업이 까딱하면 지나치게 조방(粗放)해진다는 점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두레패는 농촌에 있어서 일종의 단체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농악을 갖춘 점은 농촌오락적인 기분이 있다. 그러나 이에 따라 악습관도 생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농기창립의 신고(新古)에 의한 다툼이다. 농기는 창립의 전후에 의해 앞선 것을 선생이라고 칭하고 뒤의 것을 제자라고 하여 뒤인 것은 앞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 뒤에 창립한 두레패를 발견하면 군례(軍禮)를 받기 위해 농악을 울리고, 저쪽도 이에 응해 농악을 연주하며, 농기에 대해 농기로써 세 번 예를 행하고, 하나가 되어 유쾌하게 놀며 즐기는 것이다. 만일 이 예의를 행하지 않는 두레패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이러한 싸움은 오랜 동안의 관습이 되고 하나의 연중행사가 되어, 심할 때는 죽는 자가 나오는 일조차 있었다. 금일에는 경찰의 단속이 엄하므로 이러한 일도 없다.

두레패는 전술한 바와 같이 제초의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모내기가 일제히 끝난 해가 아니면 성행하지 않는다. 즉 해에 따라 소장(消長)이 있음은 당연한데, 대체의 경향으로는 십년 전 정도부터 점차 감소의 경향이 있다.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수원군 21면에 걸쳐 321의 두레패계가 있어 그 인원도 5,752인에 달하였는데, 지난 소화 4년에는 241계로 감소하여 인원도 3,859인으로 감소하였다(?). 즉 십년 전에 비해 수에 있어서 약 3할 3푼, 인원에 있어서 약 4할 9푼을 감소한 것이다.

두레패 감소의 이유는 농악에 의해 작업을 행하므로 일이 조방해져서 도리어 불리를 일으키는 바가 있는 점과, 농가에 빈부가 생겨서 공동작업에 불편을 초래한 점, 아울러 농촌도 종전에 비해 점점 복잡화하여 단결력이 약해지는 경향 있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728x90

'곳간 > 문서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여물  (0) 2010.05.07
2010년 오운육기  (0) 2010.02.25
석발미, 한백미  (0) 2010.02.18
군품과 자리품  (0) 2010.02.18
농업의 역사  (0) 2009.07.13
728x90

1935년 8월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언암리의 두레패 모습. 

728x90

'곳간 > 사진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달집  (0) 2008.08.22
울산, 민가  (0) 2008.08.22
영주, 부석사  (0) 2008.08.22
대전, 장승과 솟대  (0) 2008.08.22
서산, 인삼밭  (0) 2008.08.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