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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커지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이것도 양극화라 정의할 수 있다.

 

프랑스의 농촌 지역도 그러하여, 점점 빵집이 사라지고 있단다. 농촌에서 사라지는 게 어디 빵집 뿐이겠는가? 아이가 줄면서 학교도 폐교되고, 사람이 떠난 빈 집은 무너져 버리고, 버스와 택시도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신선한 빵"으로 대표되는 각종 상품과 서비스를 누리는 권리도 도시만의 것이 되고 있다.

 

https://www.nytimes.com/2019/11/10/world/europe/france-bakery-closures.html#click=https://t.co/f8cXJXxF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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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도 늙으며 여기저기 고장이 나는 것처럼, 인구도 고령화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도시도 노후화되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https://news.v.daum.net/v/20190626061105607?f=m


한국 사회도 이제 어느 정도 성장한 만큼(물론 급속히 성장하느라 성장통도 심했지만) 더욱더 성장하는 일보다는 잘 유지관리하며 늙어가는 일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신호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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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대방동 여성플라자에 다녀왔습니다. 
이곳 앞에는 스페이스 살림이라는 건물이 공사중이었습니다.
http://www.mcnews.co.kr/65087


우연히 알게 된 이 부지의 역사 또한 기구하더군요.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기지로 이용되다가 반환을 받아 2014년에는 도시 텃밭으로 이용되던 곳이랍니다. 순천시의 신대 도시농업 공원과 비슷한 길을 간 곳이지요. http://www.thedj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


도시 텃밭은 대부분 이렇게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1. 당장은 부지에 건물을 짓거나 이용할 계획이 없다.
2. 겉으로 친환경이나 생태적이라며 생색을 내기에도 좋고, 나중에 쉽게 밀어버리고 개발할 수 있는 텃밭을 만든다.
3. 적당히 이용하다가 많은 시민들이 부지의 개발을 원한다며 텃밭을 밀어버린다.


도시와 농사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요?
도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만 허용되는 공간이고, 흙은 도시 외곽의 저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걸까요? 
푸드플랜이 어쩌고 먹을거리 정책이 어떻고 이야기하지만, 실제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땅과 흙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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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찍 일어나서 하루종일 농장에서 지내며 열심히 일하고, 노동자와 파종, 수확, 판매, 교육을 관리합니다. 난 이 모든 일을 사랑한다."


쿠바에서 여성은 국가에서 먹을거리를 재배하고 분배하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Photo by Sarah L. Voisin/The Washington Post via Getty Images




쿠바의 옛 농업 체계—규모화, 기계화, "현대화"— 는 소련에서 꾸준히 공급되는 자원에 의존했다. 1989년 이전, 소련은 석유와 비료, 농약, 가축 백신을 포함해 막대한 양의 농업 보급품을 보내, 사탕수수와 담배, 커피, 바나나 같은 쿠바의 환금작물 생산에 연료를 공급했다.  쿠바 정부는 환금작물의 수출을 우선시하고, 국가에서 소비하는 쌀, 콩, 곡물, 채소 같은 농산물의 80%를 수입했다. 북쪽으로, 미국은 1960년에 처음 수립된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인 엘 볼로케오el bloqueo를 시행하여 식량과 의약품을 포함한 상품이 사회주의의 섬으로 이동하는 걸 금지했다.  1989년 식량과 농자재의 공급원이던 소련이 붕괴했을 때,  쿠바는 큰 경제위기에 정신이 번쩍 났다. 식료품점의 선반에 들여놓을 식품 수입 없이 어떻게 1100만의 쿠바 인민을 먹여살릴 것인가? 어떻게 디젤 없이 트랙터를 운전해서 땅을 갈아엎는가? 어떻게 농민들이 화학비료 없이 수확량을 높일 것인가?  농업 생산은 급격히 감소했다. 국가의 농장과 공장 들은 폐쇄되었다. 가축은 죽어나갔다. 예전의 환금작물은 들에서 썩었고, 그 결과 수출을 통한 소득은 급락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경제 위기를 엘 페리도 에스페셜El Período Especial 또는 평화의 시간 중 특별 기간이라 지칭했다. 그는 쿠바의 인민에게 자신이 가진 빈약한 공급품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일하자고 축구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일했다. 그들은 화분과 옥상 등에서 채소와 허브를 재배하고, 뒤뜰에서 아보카도와 망고를 심고, 토끼와 기니피그 같이 작고 효율적인 육류 공급원을 키우기 시작했다. 쿠바 정부는 사탕수수와 커피같은 호화로운 환금작물 대신 식량작물에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국내의 식량위기에 대응했다. 토양을 갈아엎을 중장비가 없어 정부는 긴 뿔이 달린 황소를 이용해 땅을 갈아엎기 위해 젊은 세대의 구아히로와 소농이 필요했고, 이 오래된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공립학교를 설립했다. 


1989-1994년, 대안적인 농업은 쿠바에서 비주류의 이념에서 현실로 변형되었다.  쿠바 정부는 국가의 학자, 연구원, 지속가능한 농업기술자 들에게 농촌 지역만이 아니라 도시와 근교에서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지역적이고 유기적이며유용한 방법에 대한 전문지식을 제공하라고 촉구했다. 1990년대 후반 —정부의 정책의 노력과 더 중요하게는 기존 농민과 신규 농민의 누적된 작업 덕분에— 식량 생산은 점차 증가했고, 인민의 영양 섭취가 개선되며, 식량위기가 완화되었다. 


도시농업을 처음부터 시작한 에디스Edith 같은 여성들은 국가에서 식량이 재배되고 분배되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키는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난 상크티스피리투스Sancti Spíritus의 길모퉁이에서 택시를 불렀다. “워, 워, 워!” 운전기사가 끙끙 거리며 가죽 고삐를 뒤로 당겨 엔진을 감속시켰다. 나무 벤치 둘과 노란 플라스틱 지붕을 씌운 승객칸을 끄는 밤나무 빛깔의 말이 멈추었다.  소련의 붕괴와 석유 위기 이후, 말 택시는 접근성 좋은 운송수단이 되었다. 자동차보다 연료와 유지 비용이 적게 들고, 유기 폐기물을 생산한다는 이점이 있다.  말의 엉덩이에 쌀자루를 접어놓고 똥이 길에 떨어지기 전에 담는다.  하루에 두 번, 운전기사는 상크티스피리투스에 건립된 퇴비 수집장소에 말똥을 부려 놓는다. 내가 승객칸에 탔을 때, 낭만적인 바차타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운전기사가 고삐를 가볍게 치자 거리를 따라 승객칸이 튀어오르고, 말발굽 소리는 음악에 맞춰 율동적으로 울렸다.  


운전기사는 자신의 택시에 소곤거리며 중앙광장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시농장 옆에 멈추었다.  Linda Flor, Beautiful Flower라는 커다란 간판 앞에는 에디스Edith라는 이름의 여성농민이 길가에서 기다리다 나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에디스의 친구들은 그녀가 150cm가 조금 넘기에 라치키타La Chiquita, 즉 꼬마라고 불렀다. 50세의 농부는 세련된 옷을 입고 몸에 딱 붙는 검은 장화를 신고 작은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고백했는데, 농사일 말고는 춤을 좋아한단다. 그녀는 한번에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을 매고, 가지를 치고, 심고, 바차타와 살사, 머랭, 룸바를 추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난 그녀의 따뜻함에 기대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움켜잡고 인사하며 두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Bienvenido, mi vida, 환영합니다”라 하고 “나의 삶”이란 쿠바의 애정을 표시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했다.  솜사탕 색깔의 주거용 건물 사이에 자리를 잡은 에디스의 도시농장은 2400평 규모이고, 길고 콘크리트로 바른 두둑에 꽃과 채소, 허브, 약초를 함께 재배한다. 그녀는 꽃을 재배해 증식하고 실험하는 걸 전문으로 했다.  “꽃이 내 영혼을 살려요!” 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했다. “영양은 위만 채워서 될 일이 아니라 영혼도 먹여살려야 해요.” 50가지의 꽃이 두둑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 있다. 분홍색 히비스커스, 큰 꽃의 해바라기, 장미와 카네이션의 다양한 색조 등. 농장은 균일한 소련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입방체의 아파트 건물과 매우 대조적이었는데, 쿠바 사람들은 카나리아 황색과 청록색, 라임빛 녹색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주민들은 햇볕에 말리려고 발코니에 빨래를 널어 놓아, 에디스의 작물과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20년 전에는 쓰레기장이었다는 걸 믿을 수 있나요?” 하고 에디스가 물었다.  “우린 무에서부터 농장을 시작했다. 무얼 재배할 흙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쓰레기를 버리고 소각했다. 지금은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여기를 작물과 꽃으로 바꿀 생각을 했나요?’라고 묻는다.” 1980년대 에디스는 상크티스피리투스의 고등학교에서 생물교사로 일했다. 그녀는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인한 시련을 기억했다. 식품 시장의 선반은 텅 비고, 식량배급소에서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도시민들은 채소나 곡물 같은 걸 광적으로 찾아다녔다. 에디스는 전쟁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긴 정전 사태를 견디거나 택시를 타려고 몇 시간씩 기다렸다. 그녀는 대량 생산이 중단된 이후 육류와 우유, 계란이 없어진 상태에 익숙해졌다. 정부는 배급제를 축소했다. 사람들은 돼지고기 대신 뿌리채소를 튀기고, 사용할 수 있는 커피의 양이제한되어 쪼개 말린 완두를 갈아 넣는 식으로 혁신했다.  특별 기간 동안, 쿠바의 성인은 몸무게가 4-14kg이 줄었다. 1990년대 영양 위기에 대응해 쿠바 정부는 에디스와 전국의 교사들에게 식량 생산을 위한 일련의 워크샵에 참가하라고 초청했다.  “그런 워크샵에서 난 농사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에디스는 재잘거렸다.  “난 상크티스피리투스에 있는 정부의 채소농장에 파트타임으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거기에서 씨앗 갈무리 방법과 증식 기술을 배웠다. 난 가장 힘든 채소 씨앗을 선발하고 다양한 꽃 품종을 육종하는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했다.”


1994년, 쿠바의 농업부 장관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는 국가 전역의 도시에서 식량생산을 제도화하는 것에 대한 잠재력을 인정했다. 특별 기간 동안 정부는 옛 국영 농장과 플랜테이션에서 대량의 식량을 재배하고, 도시로 농산물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연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애를 썼다.  식량위기의 해결책으로 카스트로는 국가의 도시농업 프로그램을 설립해, 쿠바인들이 마을과 도시에서 비어 있거나 방치된 공간을 식별하여 오르가노포니코organopónicos 또는 도시농장으로 변형할 수 있게 했다. 카스트로는 도시의 충분한 땅을 개조해 모든 도시민에게 5평방미터의 농지를 제공하고, 매일 300그램의 채소를 생산하게 하려 결심했다. 교사와 변호사, 간호사를 포함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쿠바 사람들은 하룻밤새 농부가 되어 뿌리채소와 잎채소, 과일, 약초, 사료를 재배하고, 육류와 달걀, 우유, 벌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도시농장에는 작은 판매대가 포함되어 있어, 농민들이 정부에게 많은 보조금을 받는 자신들의 농산물을 주변 지역의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 있었다.   


상크티스피리투스에서 에디스는 버려진 땅을 찾기 위해 인근을 걸어다녔다. 그녀는  “왠지”라고 하며 궁금함에 머리를 갸웃거리고 “어떻게든 이 버려지고 방치된 곳을 언젠가 바꿀 수 있다고 꿈꿨다!” 쿠바 정부의 승인을 받은 뒤, 에디스는 혁명을 위해 싸운 반란군 전사였던 아버지와 은퇴한 쿠바 남성들의 작은 모임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이 나를 도우려 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한다. “내 아들과 딸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여겼다.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아오, 엄마. 중노동 때문에 다칠 거예요. 손 좀 봐요, 머리는 어떻고! 무얼 하고 있는지 좀 보세요!’ 하지만 난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생물 교사는 처음부터 다시 구축하고, 자신의 유기적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이웃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농지를 둘러싼 주거용 건물의 모든 문을 두드렸다. 에디스가 자신들의 주변에서 먹을거리를 키우겠다는 결심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음식폐기물과 종이 등의 유기 폐기물을 그녀에게 주었다. 상크티스피리투스에 있는 분뇨 퇴비센터에서, 그녀는 택시 운전기사들에게서 말똥 자루를 수집했다. 그녀는 엄청난 양의 재료들을 쌓아 올렸다. 천천히 미생물들이 유기물을 분해해 폐기물을 검은 빛깔의 양분이 풍부한 부식질로 전환시켰다. 그녀는 퇴비를 두둑의 토양에 뿌리고, 새싹이 녹색의 머리를 흙에서 내밀어 빛나는 색이 펼쳐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Linda Flor는 점점 생산적이 되었다. 그녀의 직원들은 시내 전역에 먹을거리와 꽃바구니 리어카를 밀고 다니거나 거리의 작은 판매대에서 사람들과 직거래를 했다. 그녀는 농장일을 돕게 하려고 은퇴한 이웃들을 더 많이 고용했다. 1999년 상크티스피리투스에서 에디스와 다른 농민들이 지역민을 위해 약 50메트릭톤의 과일과 채소를 생산하여, 카스트로가 목표로 했던 매일 1인당 300그램을 초과했다.  


그 도시의 도시농부 대다수는 남성이지만, 에디스의 먹을거리에 대한 열정과 강한 직업윤리는 동료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다.  “때때로 여성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다거나 농업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편견에 맞서며 일해야 했다.”고 에디스는 인정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잘못된 생각에 계속 맞서 싸우며 일해 왔다. 난 결정을 내리고 모범으로 이끈다. 난 나의 사회와 심지어 정부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Linda Flor에서 농사지은 지 5년 째, 에디스는  Edith에게 농업부 대표단이 공식적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퇴비를 만드는 폐기물을 모으려고 지역사회와 함께 일한 방법을 관계자에게 설명하고, 씨앗을 선발하고 갈무리하며 파종하는 작은 작업 공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독창성과 수완에 감명을 받은 관료는 현재의 농지에 인접한 1200평의 토지를 추가로 수여했다.  2004년, 에디스는 상크티스피리투스의 지역 문화와 환경 재단이 주최한 워크샵에 참여했다. 이 워크샵은 지속가능하게 설계된 체계인 퍼머컬쳐를 쿠바의 도시와 농장 및 도시농업에 적용하는 데 중점을 둔 모임이었다. 그녀는 낭비를 최소화하고,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며, 다양성을 증진하고,효율을 높이는 이론에 푹 빠졌다. 에디스는 농촌과 기타 도시 지역에 살고 있는 쿠바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자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현지의 조직에 기술을 교육하여 전수하기 시작했다. 쿠바와 멕시코, 에콰도르, 캐나다, 영국, 프랑스, 스웨덴 출신의 학생들 수백 명이 상크티스피리투스를 방문해, 에디스의 멋진 농장을 둘러보고 유기적 퇴비 만들기 기술을 배운다.  “난 교실에서 가르치는 일이 갑갑하다고 느끼곤 했다. 그러나 지금 밖으로 나와 농장에서 가르치니 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학생들도 생동감을 느낀다. 나는 그들이 정보를 듣고, 배우고, 흡수하는 데 더 잘 적응한다고 생각한다”고 신중하게 에디스는 말했다.  “텃밭이 진정한 교실이기도 하다. 나는 쿠바의 여성, 농민, 교사가 되어서 매우 감사하다. 나는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농장에서 지내며 열심히 일하고, 노동자와 파종, 수확, 판매, 교육을 관리한다. 난 이 모든 일을 사랑한다. 나의 일이 나의 삶이다.”




http://www.yesmagazine.org/planet/farming-and-food-for-the-soul-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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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4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풍토 

        -풍토론의 가능성을 열며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풍토는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를 꿰뚫는 핵심어의 하나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과 그 주변의 각지에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또 기후와 지형 같은 자연조건과의 관련 안에서 자연히 그 성격을 형성해 온 것이기도 하다. 풍토란 우선 그처럼 다양한 문화의 성립에 관련된 자연조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풍토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건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주저 <풍토>(1935)일 것이다. 이 책에서 와츠지는 문화 생성의 외적 제약이 되는 단순한 자연조건인 풍토가 아니라, 자연환경과 인간활동의 상관성을 명시하는 풍토라는 독자적 시점을 제기한다. 와츠지는 사회와 개인, 공간과 시간, 신체와 정신 같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주목하여 이들 두 항목의 어느 쪽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쌍방을 연결하는 이중성을 이중성으로 떠맡는 '사이(間)' 혹은 '관계()'란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독자의 윤리학을 수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和辻 1934). 그의 풍토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바로 그러한 '사이'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론에서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생업문화, 특히 농경과 그 역사가 풍토와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요즘의 지구환경문제도 응시하면서 그려본 것인데, 다른 면에서 각 권의 제목에 '계절풍' '사막' '목장' 같은 와츠지의 풍토론 용어를 채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을 비교문화론적인 시점에서 눈여겨 본 그의 시선을 실마리로 삼는다. 따라서 시리즈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와츠지가 말한 풍토란 어떠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함과 함께, 지금 풍토를 문제 삼는 의의와 그 가능성에 대하여 약간 검토해 두는 건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와츠지의 원풍경原風景과 풍토론  

와츠지로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온화한 풍모이다. 특히 만년의 용모이다. 만년의 와츠지 데츠오를 찍은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중에서 유명한 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가 촬영한 서재에서 서성거리는 와츠지의 사진일 것이다. 수북이 쌓인 도서의 그림자 너머로 겨우 어깨를 웅크리고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인이 그곳에 있다. 그 시선이 참으로 온화하여 어딘지 천진난만할 정도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온화한 풍모는 아무리 봐도 온화한 하리마播磨 출신의 사람다운 데가 있다. 더구나 도시민보다는 교외의 마을 사람다운 목눌한 멋이 있다. 와츠지 데츠로의 풍모는 하리마의 농촌 풍토에서 배양된 그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와츠지의 의론에서 생업문화, 특히 농경에 관한 기술이 표면화하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은 약간 졸속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풍토>에서는 농경을 시작으로 하는 생업문화는 주제로 논하지 않는다. 그의 직접적 관심은 예술과 종교의 풍토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와츠지는 농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슈播州 히메지姬路의 교외에 위치한 농촌, 옛 니부노仁豊野 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 차라리 농경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노동활동이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장 만년에 저술한 <자서전의 시행(自叙伝の試み)>(1961)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 1887-1906년(메이지 20년대부터 30년대) 지방 가정의 정경 -즉 차 덖는 일부터 베짜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대부분의 용품을 직접 제조하여 마련하던 과거의 지방 가정의 모습이 참으로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농경에 관한 기술도 빈번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와츠지의 눈에 비친 이런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인 나의 기억에는 모내기가 끝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이 별로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노동의 괴로움을 뚜렷하게 보인 건 모를 내고 1-2주 뒤에 시작하는 논의 김매기 노동이었다. 그것은 7월 중반부터 8월 상순에 걸쳐서 여름의 삼복 시기로, 그 기간에 심은 모의 뿌리 주변의 흙을 뒤집어서 잡초가 번성하는 걸 방지한다. 이 김매기를 3번쯤 반복하는 사이 벼는 맹렬한 기세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경작자들은 땡볕 아래의 논 안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을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 논의 옆에서 보고만 있지 못하고, 역시 마을 의사의 아들로서 이 노동으로 생기는 급병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위, 즉 일사병의 여러 가지 형태였던 것 같은데, 대개는 밤중에 명렬한 복통 등을 일으키고 너무 급하면 의사를 부르러 왔다. 논의 김을 매는 계절에는 매일 밤 한 명이나 두 명의 급병인이 발생했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나에게는 농경 노동 가운데 논의 김매기가 가장 맹렬한 노동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와츠지 데츠로 <자서전의 시행>)

와츠지의 생가는 '경작자'가 아니라 마을에 유일한 의사의 집이었다. 그 의미에서 농작업을 경험한 그의 시선은 결국 방관자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자의 대부분이 농가였던 '마을 의사'의 아들이었다면, 농업이 정말로 자연과 대치하는 인간활동이란 것을 일상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성인들의 가혹한 농경 노동을 지켜본 어린 와츠지의 긴장감은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이란 문장 안에도 남아 있다.

<자서전의 시행>에서 적고 있는 니노부의 일상은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의 원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부키와 아야츠리조우루리(操浄瑠璃)>를 시작한 뒤 그의 저작에는 니노부에서 보낸 어린 나날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다고 생각되는 주제와 에피소드가 때때로 얼굴을 내민다. <풍토>도 또한 그렇다. 예를 들면, 앞에 인용한 것 같은 일본 농작업의 가혹한 '김매기'에 대해서는 <풍토>의 안에서도 유럽의 목장 같은 풍토의 특성을 일본의 풍토 그것과 비교하며 다음처럼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여름의 건조함과 겨울의 습윤함은 잡초를 몰아내 온땅을 목장답게 한다. 이것은 농업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농업 노동의 핵심을 이루는 건 '김매기'이다. 잡초의 제거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경지는 금세 황무지로 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김매기는 특히 '논의 김매기'란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일본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 -따라서 일본의 주택 양식을 결정하는 시기, 즉 폭염이 가장 심한 삼복 무렵에 꼭 그때를 번성기로 삼는 꿋꿋한 잡초와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 싸움을 게을리하는 건 농업 노동을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마침 이 잡초와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다. 토지는 한번 개간되면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한 토지로 인간을 따른다. 틈을 보아 스스로 황무지로 전화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농업 노동에서는 자연과의 싸움이란 계기가 빠져 있다.

'김매기'를 잡초와의 '싸움'이라 하고, '일본 농업 노동의 핵심'이라 하는 와츠지의 기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사실을 전한다. 그렇지만 이 조금 단언적인 기술의 배경에 풀섶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니노부의 논두렁에서 어린 그가 숨을 죽이고 응시하던 광경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와츠지의 <풍토>가 이 책을 집필하기 직전 유럽에 유학할 때의 견문에 기반하여 생생한 기술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 책을 펴서 읽으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위의 두 가지 인용에서도 명확하듯이, 그 시선의 근저에는 유아기부터 소년기에 걸쳐서 그가 목격한 일본 농촌의 기억이 원풍경처럼 가로놓여 있다. 분명히 와츠지는 <풍토>에서 농경을 주제로 논하지 않았지만 유럽이든, '사막'이라 불리는 건조와 반건조지대이든 각각의 지역과 그 문화적 특성의 비교검토는 자신의 원풍경에 근거한 농경문화라는 시점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경문화론으로서 풍토론은

<풍토>의 권두에서 와츠지는 "인간 존재의 구조 계기로서 풍토성을 밝히는 일"을 이 책의 목적으로 하고, 그 구상의 배경으로서 베를린에 유학하며 우연히 만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든다. 즉 <존재와 시간>이 인간의 '주체적 존재 구조'로서 시간성을 논하면서도 공간성의 문제가 완전히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불복한 와츠지는 <존재와 시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풍토성이란 개념에 착목한 것이다. 사상사적으로는 이후에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1962)로 갔듯이, 시간에서 공간으로 좌표를 전환하는 것을 재빨리 시도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中村 1989).

그렇지만 이러한 점으로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오로지 추상적인 철학적 의론으로 가득찬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 <풍토>의 제1장 '풍토의 기초 이론'에서는 하이데거도 관여하는 당시 더없이 융성했던 현상학에서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관한 분석을 근거로 한 이론적 고찰이 전개되며, 말년의 대저 <윤리학>의 하권(1949)에서 <풍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재론했을 때의 의론도 또한 형식적, 윤리적인 느낌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와츠지의 저작을 손에 넣은 독자는 곧 깨닫는 바인데, 그러한 철학적 의론에서조차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통속적이란 생각이 들 만큼 알기 쉽다. 이 알기 쉬움이 무엇보다도 와츠지 저작의 매력인데(와츠지는 '일본어와 철학의 문제'(1935)에 한 문장을 남겨, 번역어로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본어로 철학하는 일의 가능성을 늘 추구했다), 그것은 의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체적 사례에 의한 것이다. 그 하나로 앞에 지적했듯이 농경문화에 관한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와츠지의 의론이 생업인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대하여, 이미 시마다 요시히토嶋田義仁의 명쾌한 의론이 있다(嶋田 2000). 시마다는 와츠지가 말한 풍토의 유형 가운데 하나인 '계절풍'을 '더위와 습기의 결합'으로 특징짓고, 그 선에서 일본적 풍토의 유형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의 열대 계절풍을 의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처럼 서술한다.

와츠지는 무슨 이유로 일본적 풍토를 열대 계절풍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았을까? 그것은 '와츠지의 계절풍이란 것은 순수한 기후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논'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인간 존재의 주체적 표현이 되는 풍토 개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마다 요시히토 '풍토 사상의 가능성 -일본적인 근원적 반성-')

농경문화의 시점에서 다시 의론을 전개하면 똑같은 계절풍이라도, 예를 들어 인도에 대해서는 같은 사례로 논할 수는 없으며, 거꾸로 '사막'과 목장을 같은 맥류 농경권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없을 것이다(이 책의 서론 및 대담도 참고할 것). 그러나 어느 쪽이든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와츠지의 풍토론은 지리학과 민속학은 물론, 농학과 민족식물학, 게다가 환경고고학과 연결되며 그 역사적 의의가 판명된다. 시마다는 야나기다 타쿠니오柳田國男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등에게서 발단하는 '벼농사 문화론',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와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등에 의한 '조엽수림 문화론', 또한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제기된 '너도밤나무, 졸참나무숲 문화론',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의한 '숲의 문화'론 등 일본의 일련의 풍토론적 문화론을 개관하고 그 전개에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을 자리매김한다.

와츠지가 고향의 선배 야나기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못했는데, 와츠지의 <풍토>는 야나기다의 벼농사 문화론을 근거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벼농사라는 건 풍토 그것이라 말하기보다도 어느 풍토에 입각한 농업기술이며 생업기술이다. 벼농사에 대응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와츠지는 그것을 '계절풍'으로 인식하고, 다시 세계사적 시야 안에 넣어 '사막'과 '목장'을 함께 풍토의 세 유형으로 다시 파악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논문)

시마다에 의하면, 이러한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의 공헌은 영역에 한정되어 오로지 일본의 사정으로 시종일관한 벼농사 문화론을 환골탈태시키고, 풍토론을 비교문화론적 의론의 장으로 전환시킨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철학자인 그의 의론에서는 취약했던 '자연과학적 기초'를 근거로 하여 그 뒤 조엽수림 문화론 이후의 풍토론에 의해 새로운 전개가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개괄하는 시마다가 제기한 시점은 자칫하면 와츠지의 철학적 고찰에 질질 끌려 그 구체적 내실에 대해서 좀처럼 명로한 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기존의 해석에 대해, 와츠지만이 아니라 풍토론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명쾌한 자리매김을 가져왔다. 시마다는 또 최종적으로 개인에게 귀착하는 정신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머지, 걸핏하면 풍토론을 단순히 환경결정론으로 멀리하려는 서양 근대사상에 대하여 평평하여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거주 환경에 응하여 공간의 이해가 중층적으로 전개된 결과 자연히 관심이 '자기 이외로' 향해 온 일본의 풍토론적 발상의 의의를 위상적으로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이 '산이 많은 나라의 풍토론'을 제기한다. 그 시점과 문제 의식은 이 시리즈에서 풍토를 문제로 삼는 데에도 시사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정말로 위상적인 의론으로 귀착하는 것에 의하여 시마다의 의론은 뜻밖에도 풍토론의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한다. 그 한계는 또한 농경과의 관련에서 본 풍토론이란 자리매김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그점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풍토를 문제로 삼는 것의 의의와 가능성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하겠다.


풍토론의 가능성

언젠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창으로 보이는 교외의 동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풍토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반짝이고, 콘크리트 건물이 겹겹이 무질서하게 이어지며, 지면은 아스팔트로 덮이고, 하늘에는 전선이 종횡으로 내달리고 있다. 특별히 오사카 근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어디에나 있는 풍경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풍토>에서 와츠지도 지적하고 있듯이, 풍토는 옛날에는 또 수토水土라고도 하여 자연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단어이다. 가지각색 인간의 생업도 또한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인간 문화와 관련된 자연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마을의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며, 기름진 들이 펼쳐진다. 이것이 풍토의 올바른 인상일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풍경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야기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 와츠지의 '원풍경'에 대하여 지적했는데, 아직도 풍토론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안에는 때때로 어딘가 목가적이기까지 한 전원 풍경으로 풍토의 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그러한 풍경을 원풍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현대의 우리에게 풍토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참으로 저 어수선한 현대 교외의 길거리에 풍토적 현상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풍토와 같이 인간 활동과의 관계성에 기반한 자연을 표현하는 '마을'과 '마을 산'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도시에서 괴리된 지역을 지시하는 장소적 한정을 수반한 단어이며, 생태계 전체에 걸친 인위적 관리를 전제로 하는 그 실태에서 보면 현대의 교외에는 이미 예전 같은 마을 산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라는 현상은 그러한 파악 방식으로 충분히 보아 온 것일까?

기존의 풍토론이 어느 쪽이냐 하면 도시보다 전원이나 농촌 같은 '시골'의 대상을 가장 자신있어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시마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문화연구의 대부분이 벼농사 문화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있으며, 최근의 풍토론 재평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지리학자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가 예외적으로 벼농사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풍토론은 역시 시골에 조명을 비추는 데 주목하는 제약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론은 이러한, 말하자면 장소적 한정과 한계의 근원에 머무는 것일까?    

노마 하루오野間晴雄가 지적하듯이 문제는 단순히 장소적 한정과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토론에는 '역동적인 경제관계'에 관한 의론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野間 2005).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진전을 고려하면, 농촌이든 도시든 경제문제를 빼놓은 채로는 충분한 의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하다. 그렇지만 다시 물음을 거듭하면, 기존의 풍토론에 경제적 시점을 보완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론을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와츠지가 열었던 비교문화론적 관점을 다루었던 풍토론의 가능성은 장소적 한정은 처음부터 굳이 말하자면 표층적인 자연과의 관계조차도 뛰어넘는 곳에 있던 건 아닐까? 그 범위 안에서, 교외는 물론 도시의 한복판에도 풍토는 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측면이 실은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와츠지의 <풍토>는 부제에 '인간학의 고찰'이라 하듯이 단순히 자연조건의 열거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자기 인식의 전형'이 되는 풍토를 밝히는 것이며, 단순히 객관적 대상으로 기상과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의 관점을 제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원초적인 자연을 무시하고 인간화하며 왜곡된 자연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경험에 근거한 근본적인 자연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일상생활과 자연의 관계이다. 그 의미에서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자연의 반대점에 있는 인위적 산물인 건축에 대하여 말한 다음의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건축이란 진짜 자연에 쌓아 놓는 제2의 자연이다. 건축을 직업으로 삼는 자가 환경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렌조 피아노 <항해일지>)   

          
만약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범위에서 도시의 건축 공간도 또한 '자연'이라 부른다면, 여기에도 또 풍토는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농경문화로 상징되는 시골 지역을 논하는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다. 그곳에서 적출된 의론을 어떻게 현대의 우리 일상생활의 문제와 접속시킬 것인가? -그러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도 풍토론에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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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기사에 들어가면 NAFTA 라는 국가간 자유무역협정으로 멕시코와 미국의 농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멕시코는 미국의 저렴한 식량생산기지로 전락하고, 미국은 그를 위해 원재료를 공급하는 대규모 단작식 농업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멕시코의 소농들, 그리고 미국의 소농들은 자신의 농지를 버리거나 잃고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겠지. 멕시코 사람들은 자국의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드니,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이른바 3D 업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었겠지. 미국의 소농들은 땅을 팔고 도시로 이주해 빈민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겠지? 물론 국가간 자유무역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그로 인해 고통을 겪은 사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없겠지만, 다수를 만족시키기보다는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이 최소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http://www.npr.org/sections/thesalt/2017/08/07/541671747/nafta-s-broken-promises-these-farmers-say-they-got-the-raw-end-of-trade-deal?utm_source=twitter.com&utm_campaign=food&utm_medium=social&utm_term=npr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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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의 곡물을 분석하니, 그 곡물들이 부족한 양분으로 재배했다는 결과가 나옴. 그를 통해 그 당시 사회가 농업의 집약화가 아니라 농경지의 확대를 통해 도시의 밀집화를 해결했다는 그림을 그리는 논문. 하지만 곡물을 재배하는 환경의 변화나 광대한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면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예전에 경제학 강의에서 세종의 대단함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세종은 성장하는 인구의 더 많은 식량 수요를 외연 확대 -영토의 확장, 이웃 국가로의 진출, 침략 등- 가 아니라 농업의 집약화 -농서 간행, 농법 개량 등- 를 통해 해결했다는 점이라고 말이다.

흥미롭다.농사에 이용할 수 있는 자원 -분뇨, 퇴비 등- 은 한정되어 있는데 경작할 수 있는 토지는 넓었던 당시엔 이런 선택이 당연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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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행한 고고학 발굴은 세계의 초기 도시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했는지 기록된 고대의 수확물을 밝혀냈다. 


Nature Plants에 발표된 연구는 현재 시리아의 북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농업과 정치경제적 측면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옥스포드 대학의 연구진은 고대 곡물을 탄소 및 질소 동위원소를 이용해 분석하여 작물이 재배될 당시의 을 재구성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려냈다.  

그들은 초기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수요가 늘어나자, 농민들은 더 집약적으로 관리된 기존 농지로 자원들 —분뇨 같은— 을투하하기보다는, 더 넓은 면적의 토지를 경작하려고 노력했다. 

광활한 토지에 굶주린 농업은 강력한 가족관계와 사회제도에 의해 독점될 수 있는 경작지에 접근하고, 쟁기질에 전문화된 가축을 이용하는 능력에 크게 의존했다.  

따라서 이 연구의 결론은 소수의 통치자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경작지의 중요성이 어떻게 커졌으며, 도시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졌는지 밝혔다. 

프로젝트를 이끈 옥수포드 고고학 학교의 교수 Amy Bogaard 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고학 유적지에 묻혔다 발견된 각각의 곡물들은 그것이 재배된환경조건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여러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많은 곡물 샘플들을 연구하면 초기 도시들의 성장과 쇠퇴에 따라 농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특히 성장하는 도시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대처한 방법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린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초기 도시들의 성장이 농업 규모의 급진적 확장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 결과, 곡물들은 점차 열악한 토양 조건에서 재배되었다. 예를 들어, 거름과 양분의 보충이 더 적어졌다. 그건 광대한 도시 밀집지대를 개발할 수 있는 해결책이었지만, 환경이나 정치 상황이 바뀌면 위험에 빠졌다. 선사시대의 농민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조사하는 일은 현재 인구 증가와 환경 변화라는 유사한 압력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조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읽을거리: Manure used by Europe's first farmers 8,000 years ago

    더 많은 정보: Amy K. Styring et al. Isotope evidence for agricultural extensification reveals how the world's first cities were fed, Nature Plants (2017). DOI: 10.1038/nplants.2017.76



출처: https://phys.org/news/2017-06-ancient-grain-tale-ancestors-cities.html#j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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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에 실린 개인주의 야채가게를 실험한 분의 글...

도시에서는 1인가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때 참으로 중요한 실험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다품종 소량 판매가 주를 이룬다면, 농사의 규모가 작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도시농업과 관련하여 새로운 수입원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글쓴이의 말처럼 앞으로 이러한 가게들이 많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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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청춘들을 위한 낱개판매 청과물상 ‘개인주의 야채가게’가 지난 11월3일에 영업을 종료했습니다. 총 구매인원 210명, 총 판매금액 41만1150원으로 2만여 원 적자를 기록하며 100일간의 퍼포먼스는 막을 내렸습니다. 200명에 40만원이라는 기록이 너무 미약한가요? 느리고 느리겠지만 결국 모든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낱개로 파는 날이 올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게 언제냐면… 제가 ‘젊을 때’ 바뀌지 않을까요?(지금처럼 평균연령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아마 저는 60세 정도까지는 젊은이일 것 같아요. 그때까지도 “젊은 것들이…” 소리를 들을 것 같다고요.)

장을 보고 싱싱한 식탁을 차리는 것, 냉장고에서 썩은 걸 그대로 버리는 괴로움이 아직 모든 이의 공감대는 아니니까요. 특히 중년 남성분들이 돗자리 앞에서 갸우뚱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요, 대가족의 아이로 자랐고 지금은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들, 이 나라의 경제성장을 위하여 밤낮없이 일하던 산업화 시대의 역군으로 살아온 세대와 지금 저와의 세대차이일까요. 하지만 그분들도 아마 100세까지 사실 텐데 그때 노부부끼리, 혹은 혼자서 살다 보면 포도 한 송이, 사과 한 개만 사다 먹고 싶은 날이 반드시 올걸요! 

 

 
ⓒ유재인 제공
개인주의 야채가게에서 100일 동안 210명의 고객이 채소와 과일을 낱개로 구매했다.




개인주의 야채가게의 막을 내리며 저의 초심, 개업정신을 공유합니다. 삐딱하게 기성세대에게 날을 세운, 그러나 화염병과 팔뚝질이 아닌 고작 길에서 대파를 파는 것으로 시위를 했던 젊은이의 세상 탓, 남 탓입니다. 

‘개인주의 야채가게’를 개업하며

1인 가구의 수가 유례없이 늘어가고 있단다. 대형 아파트보다 도시형 생활주택이라 불리는 쪽방이 더 잘 팔린단다. 

가족·식구가 생략된 가정의 모습은 대부분 부엌, 거실, 침실, 서재 등등을 모두 요약해낸 어떤 네모스러운 공간이기 마련이다.

(중략)

우리의 대부분은 (그중 몇몇은 자발적으로) 가난하다.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때 검토할 모든 첫 번째 요인은 가격이다. 그것이 거의 모든 포기의 이유가 되긴 하지만 누구처럼 낭비하고 쓰레기를 잔뜩 만들며 민폐를 끼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있다.

우리에게 “더 치열하라고, 더 노력하라고, 꿈과 희망을 위해 전진하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그 목소리를 멘토라 쓰고 꼰대라 읽는다.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강남  땅에 레고처럼, 블루마블처럼 건물을 올리던 시대와 더 이상 땅 위에 새로울 것이 없는 시대의 차이점을 모르는가? 혼자 벌어 다섯 식구 먹여 살리던 세대와 혼자 벌어 혼자 먹어도 모자라는 세대의 차이점 말이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다.

대량생산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자격이 필요하다. 소비자는 과소비를 해야 한다. 과소비를 하지 않으면 소비자가 아니다. 큰 것, 더 큰 것을 만드는 사회에서 혼자 사는 사람은 소비자가 아니다. 감자 두 개가 필요하면 감자 한 봉지를 사야 하고, 대파 한 마디가 필요하면 대파 한 단을 사야 한다. 그제야 영수증을 상장처럼 받아들 수 있다. 감자 한 봉지를 사면 일주일 동안 감자만 먹어야 하고, 대파 한 단을 사면 냉장고 신선칸에서 냉동실을 거쳐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간다. 한 끼 7000원 돈도 아깝지만, 한 끼를 만들고 버려지는 잉여 재료들이 더 아깝다. 한 끼 만들어 먹은 소박한 만족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저걸 언제 다 먹는담. 또 쓰레기를 만들겠어’라는 사치스러운 죄책감까지 가져야 한다.

우리는 혼자 먹지만, 도무지 혼자서는 다 먹을 수가 없다. 온전히 혼자서도 잘 먹기 위해 우리는 나눠먹기로 한다. 완벽한 개인주의를 위해 우리는 협력하기로 한다. 싱싱함을 위하여, 신선함을 위하여, 건강함을 위하여 우리는 뭉쳐야 한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을, 낭비 없이 신선한 한 끼를 위해 개인주의 야채가게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존전략은 1+1보다 1÷10이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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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양한 주체의 협력은 시대의 흐름


2. 도시-농촌의 협력

3. 지역 생산자 간 협력

4. 합천 지역먹거리운동의 의미와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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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5일, 강동구에 있는 둔촌텃밭에 다녀왔다.

여기는 개장식할 때부터 해마다 봄가을에 오게 되는데 몇 년 사이 훌쩍 변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졌다.

사람들의 농사 실력이 해가 갈수록 야물어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처음 둔촌텃밭이 개장했을 때 사람들의 농사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물들도 다양해졌음.



쑥갓꽃. 쑥갓은 먹어도 맛있지만, 안 먹고 놔두면 이렇게 어여쁜 꽃이 핀다. 너무 예쁘다.



둔촌텃밭의 자랑스러운 시설이라면 역시 생태뒷간. 

사람들이 얼마나 이용하는지, 이용하니 어떤 생각이 드는지 등에 대해 조사해서 결과를 내도 참 재밌겠다.


농사에서는 거름의 자급이 참 중요하다. 거름을 자급한다는 것은 자원을 순환시킨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외부투입재에 대한 의존률을 낮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다.




또 하나는 낙엽퇴비. 이건 강동구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의 결과이다.

보통 지자체에서는 낙엽을 수거한 뒤 무게당 얼마의 비용을 주고 소각하여 처리한다.

그런데 강동구에서는 아직 전량은 아니더라도 수거한 낙엽의 일부를 구에서 운영하는 낙엽퇴비장에서 처리하여 퇴비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도시농업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말 그대로 자원의 재순환, 지자체 예산의 절약 등등이 실현되고 있다.



낙엽퇴비 더미. 낙엽에서 더 나아가 음식물쓰레기는 물론, 똥오줌까지도 지자체 차원에서 재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면... 진정한 생태도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낙엽퇴비 근접 촬영. 정말 잘 만들어졌다. 차에 가득 싣고 오고 싶네.




강동구의 도시농업이 활성화되는 데 일등공신은... 도시농업 활동가들에 있다.

그들이 텃밭에서 농사짓는 구민들을 지도하고 안내하고 인도한다. 

이들이 없이 명색만 도시 텃밭을 개장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강동구의 도시농업은 보급원의 중요성이 여실히 증명되는 사례인 셈이다.


텃밭에 상주하면서 사람들에게 농사와 일에 대해 자세하게 안내해주는 보급원. 그들의 존재는 도시농업의 안정과 활성에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보급원을 어떻게 육성하여 뒷받침하느냐가 참 중요한 일이다. 요즘 좋아하는 창조 경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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