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에 만연한 '상호불신 문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해 분석한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거 한국도 해당하는 것 같아서 찌릿찌릿하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정확히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악명 높은 노예 무역이 횡행했다. 그런데 노예 무역 말기가 되면, 유럽인에 의해서만이 같은 마을의 사람이나 이웃, 게다가 친척과 가족에 의해서도 노예가 되어 경매에 부쳐졌다고 한다. 어떤 방법을 통해 노예가 조달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 자료는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지만, 1840년 어느 독일인 선교사가 시에라리온에서 거래되는 노예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자료가 있다고 한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144명의 노예 가운데 40%가 납치, 24%가 전쟁, 20%가 친척과 친구에 의해, 16%는 재판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마지막 두 방식으로, 이것이 바로 '지역사회 내부의 사람'에 의해 노예화가 자행된 결과이다. 이러한 가까운 사람에 의한 배신이 시에라리온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노예 공급지에서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게임 이론의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신이 최적의 생존전략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상호불신이 이른바 '균형' 상태가 되어 안정화된다. 일단 그러한 균형 상태에 이르면, 거기에 강한 외부 충격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 상태는 변화하지 않으며 지속되어, 그것이 결국 '문화'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세대를 넘어 계승되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연구는 이처럼 노예 무역의 결과 지역사회 내부에서도 '노예 사냥'이 행해졌고,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며 경험적으로 정착된 상호불신이 지금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널리 관찰되는 것임을 입증한 것이다.



조선 말기의 극도로 혼란한 상황, 일제강점기의 민족 탄압, 한국전쟁의 동족 상잔, 이후 군부독재 시기라는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는 어떤 크나큰 상처가 남은 것일까?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문다고 하지만 그 흉터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명목상 문민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부터 조금씩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제 불과 30년 정도 되었을 뿐이다. 이 상처가 잘 아물 수 있도록 관리를 잘해야겠다. 아직도 상처가 제대로 아물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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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겨 먹는 유명 기업의 달콤한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가 여전히 아동노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사실. 너무나 씁쓸하다. 

https://www.washingtonpost.com/…/hershey-nestle-mars-choc…/…



<나는 초콜릿의 달콤함을 모릅니다>를 함께 읽어 볼만하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0672612


이외에도 관련된 책이 국내에도 많이 출간되어 있다.


<나쁜 초콜릿>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866454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말해주지 않은 것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79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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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음식은 달아도 너무 달다. 어째 이렇게 달기만 한 것인지 놀라울 정도로 달다. 불고기도 달고, 음료수도 달고, 온통 단맛 투성이다. 단맛이 나지 않는 걸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단맛에 익숙해져 있고, 이제는 달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 생각할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과일도 특유의 시큼새콤한 맛보다 단맛을 기준으로 품질을 정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난 단맛을 좀 경계한다. 매실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설탕에 매실을 절여 매실액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조차도 너무나 달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단맛을 즐기게 된 것일까? 사탕수수라는 축복 같은 작물 때문일 것이다. 사탕수수가 대규모로 재배되면서, 그걸 가능하게 한 노예제도 덕에, 그리고 지금은 기계 덕에 당분을 충분히 공급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보면 그 역사적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훑어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미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살필 수 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았는가. 몸에도 정신에도 달콤한 맛과 말을 경계해야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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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사랑 (달콤하지 않은 이야기)




음료수의 바닥

그들은 없어졌다. 콜라 자판기, 과자 자판기, 튀김 냄비. 그것들은 미시시피 주 클라크스데일(Clarksdale)에 있는 몇 안 되는 초등학교 가운데 하나인 커크패트릭(Kirkpatrick) 초등학교의 복도에서 골목으로 옮겨져, 회색빛 쓸쓸한 하늘 아래에서 다른 쓰레기와 함께 놓여 있다. 행정관이 문제의 중요성을 처음 인식한 것은 7년 전이었다. 우리에게 델타 블루스의 황금기를 가져온 삼각주의 마을이자, 목화밭과 구비구비 강이 흐르는 평지에 여전히 아름다운 빅토리아 시대의 저택이 있는  클라크스데일은 비만과 당뇨병, 고혈압, 심장질환의 비율이 높은 미국의 건강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클라크스데일의 거주민 대부분의 조상들과 이곳으로 함께 온 작물인 사탕수수의 유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린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고 커크스패트릭의 교장 수잔느 월튼(SuzAnne Walton) 씨는 이야기한다.

클라크스데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월턴 씨는 나를 학교로 안내하여, 학교가 학생들을 돕고자 노력하고 있는 방법 -튀김 대신 구이, 사탕 대신 과일- 에 대해 이야기했다. 학생들 가운데 대부분은 학교식당에서 하루 두 끼를 먹는다. 그녀는 급식복을 입고 있었다. 건강 관리를 위한 학교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교사들이 월요일마다 입는 복장이다. 학생들은 흑인이 91%, 백인이 7%이고, 나머지 2%는 3명의 라틴계이다. “이 아이들은 주어진 것을 먹는데, 그게 너무 달고 저렴한 케잌, 크림, 사탕 같은 음식이다. 그걸 바꿔야 했다. 이는 학생에 관한 것이었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예를 들어 최근 오크허스트(Oakhurst) 중학교 1학년이 된 Nicholas Scurlock 군을 보자. Nick 군은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트를 타기에 딱 맞는 키인데 체중은 61kg인 5학년생이다. “그는 운동을 끔찍해 했어요”라고 교장 Walton 씨는 말했다. “뜀박질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들었죠.”

“물론 내가 평가할 문제는 아닙니다”라고 월튼 씨는 웃으면서 허벅지를 치며 덧붙였다. “나도 뚱뚱하니까요.”

학교식당에서 닉 군을 만났다. 그는 엄마인 Warkeyie Jones(38) 씨 옆에 앉았다. 존스 씨는 자신에게도 좋고 닉에게도 본이 되려고 식습관을 바꿨다고 한다. “난 하루종일 달달한 과자를 먹었죠. 책상에 앉아서 무얼 하겠어요? 하지만 이제는 셀러리로 바꿨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남자친구를 만나려고 그러느냐’고 해요. 그럼 난 ‘아니, 난 건강하게 살려고 이런다’고 맞받아치죠.”

물 한 컵에 설탕을 가득 붓고 5시간을 놔두어 보라. 당신이 돌아왔을 때, 컵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뚱뚱한 산업화된 국가이자, 전국에서 가장 뚱뚱한 주의 가장 뚱뚱한 마을 가운데 하나인 클라크스데일은 닉 셜록 같은 아이들의 몸에 설탕이 가라앉아 있는 미국 음료수의 바닥이다. 소년 모양을 한 달콤함의 유산이다. 


마지팬(Marzipan)의 사원

약 1만 년 전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한 뉴기니 섬의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거두어 혀에 맛이 느껴질 때까지 질겅질겅 씹으며 생으로 먹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의 일종으로, 사탕수수는 고대 뉴기니의 신화에서 자주 나타난다. 사탕수수의 줄기를 사랑하는 첫 번째 사람이 인류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종교의식에서 주술사는 코코넛의 설탕물을 마셨는데, 이후 신성한 의식에서 이는 콜라로 대체되었다. 

사탕수수는 섬에서 섬으로 천천히 퍼지다가, 마침내 기원전 약 1000년 무렵 아시아에 도착하게 된다. 서기 500년 인도에서 설탕이 가공되어 두통과 위경련, 발기부전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였다. 여러 해 동안 설탕 정제법은 장인에서 도제로 전해지는 비밀스런 과학이었다. 600년, 달콤함으로 손님들을 즐겁게 하려는 통치자가 있던 페르시아로 그 기술이 퍼졌다. 아랍의 군대가 그 지역을 점령하고서 설탕에 대한 지식과 사랑에 푹 빠졌다. 그건 팬에 물감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여기에서, 다음에는 저기로, 설탕은 알라를 숭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났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아랍인은 설탕과 그걸 생산하는 기술을 가져갔다”고 작가 Sidney Mintz 씨는 <달콤함과 권력(Sweetness and Power)>에서 적고 있다. “우리는 설탕이 코란을 뒤따랐다고 이야기한다.”

이슬람의 칼리프는 설탕을 가지고 위대한 공연을 만들었다. 국가의 부를 나타내고자 아몬드와 설탕을 기이하게 조합하여 만든 마지팬(Marzipan)이 대유행했다. 15세기의 작가는 칼리프의 명령으로 전체가 마지팬으로 된 사원을 묘사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경이로워 하며 기도를 올리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아랍인은 설탕 정제법을 완성하여 산업으로 만들었다. 그 작업은 잔인할 만큼 어려웠다. 밭의 열기, 낫의 섬광, 작업장의 끓이는 연기, 공장의 분쇄. 1500년 설탕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 작업은 최하층 노동자에게만 적합한 일이라 여겨졌다. 밭의 일꾼 대부분은 이슬람과 기독교 군대가 충돌했을 때 잡아온 동유럽인들이었다.

설탕과 처음 사랑에 빠진 유럽인은 아마 이교도의 땅에 있는 성지를 향해 서에서 동으로 갔던 영국과 프랑스의 십자군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고향에 설탕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을 가져왔다. 사탕수수는 온대기후에서는 별로 생산적이지 않기에 —열대의 비가 흠뻑 내리는 지역에서 번성함— 최초의 유럽 시장은 이슬람과 교역하는 곳에 세워졌고, 서쪽에 도달한 설탕은 귀한 향신료로 분류되면서 귀족들만 소비했다. 그러나 1400년대 오스만 제국의 확산과 함께 동방무역이 어려워졌다. 설탕의 마법에서 멀어진 서방의 권력집단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작은 남유럽의 설탕 제조업자와 거래하느냐, 터키를 격퇴하느냐, 또는 새로운 설탕 공급원을 개발하느냐. 

학교에서 대항해시대라고 부르는 시기, 전 세계에 유럽인을 보내 모든 지역과 섬을 탐사한다. 현실에서 사탕수수가 번성할 밭을 사냥하는 일은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 1425년 항해사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는 식민지의 초기 집단과 함께 마데이라로 사탕수수를 보냈다. 그 작물은 곧 새로 발견된 카보베르데와 카나리제도 같은 대서양의 섬으로 보내졌다. 1493년, 콜럼버스가 새로운 세계로 두 번째 항해를 출발할 때에도 사탕수수를 가져갔다. 따라서 카리브의 섬과 노예 농장에서 대규모 설탕의 시대의 동이 텄고, 뒤이어 대량소비와 뚱뚱한 아이, 비만인 부모, 전기카트와 함께 덜거덕거리는 XXL 츄리닝을 입은 사람들을 위해 도시의 외곽에 거대한 연기가 나는 정제소가 생겼다. 


설탕을 위한 노예

콜럼버스가 몇 백 년 뒤 엄청난 노예반란이 일어난 장소인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새로운 세계의 최초로 사탕수수를 심었다.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쿠바와 자메이카에 설탕 공장들이 들어서며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토착민들이 전쟁과 질병으로 제거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10만 명 이상의 노예들이 설탕을 휘젓게 하며 브라질에 가장 효과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더 많은 사탕수수를 심음에 따라 설탕의 가격은 떨어졌다. 가격이 떨어지자, 수요가 증가했다.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호순환이라 부른다.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면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17세기 중반, 설탕은 육두구와 소두구와 함께 분류된 고급 향신료에서 처음에는 중산층, 다음에는 빈곤층을 위한 주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설탕과 노예제도의 결혼이 완료되었다. 몇 년마다 새로운 섬 —푸에르토리코, 트리니다드— 이 식민지가 되어, 개간을 하고 사탕수수를 심었다. 토착민이 죽자 농장주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다 대체시켰다. 작물을 수확하고 가공한 뒤, 제품을 선박에 적재하여 완제품이 거래되는 런던과 암스테르담, 파리로 운송했다. 이곳에서는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데려온 많은 노예들도 거래되었다. 수백만 아프리카인들이 죽임을 당한 이러한 “삼각무역”의 잔혹한 측면은 중간항로로 알려졌다. 노예무역이 1807년 영국에서 금지될 때까지, 11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새로운 세계로 선적되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사탕수수 농장으로 보내졌다. 트리니다드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Eric Williams 씨에 따르면, “노예제도로 인종차별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종차별은 노예제도의 결과이다.” 즉, 아프리카인들이 열등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초기 설탕 무역의 번영에 필요했던 노예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열등하게 간주된 것이다. 

영국 최초의 설탕 섬은 바베이도스였다. 영국인 선장이 1625년 5월 14일 발견했을 때에는 버려져 있었던 그 섬은 곧 설탕공장과 농장의 숙소, 선술집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처음에는 담배와 목화가 재배되었지만, 카리브해에서 재배되던 것처럼 사탕수수가 재빨리 섬을 점령했다. 100년도 안 되어 밭의 토양이 악화되고, 지하수가 고갈되었다. 그 이후 가장 야심만만한 농장주들이 다음 섬을 착취하고자 바베이도스를 떠났다. 1720년 자마이카가 설탕 왕관을 획득했다. 

이 섬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수백 만의 카리브인들이 밭과 집, 또는 도망치다가 죽어 나갔다. 차츰 이 무역에 대한 죄의식이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개혁가들이 폐지를 설교했따. 가정주부는 노예가 재배한 사탕수수를 불매했다. <설탕: 달콤쌉쌀한 역사(Sugar: A Bittersweet History)>에서 Elizabeth Abbott 씨는 450g의 설탕에 대해  “우리의 살 56g을 소비하는 것이다”라고 군중에게 이야기한 퀘이커 교도의 지도자 William Fox의 말을 인용한다. 볼테르의 <캉디드>에서는 손과 발을 모두 잃은 노예가 자신의 장애를 설명한다. “설탕공장에서 일할 때 분쇄기에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 팔이 잘렸다. 도망가려고 하자 그들은 내 다리를 잘랐다.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그것이 유럽에서 당신이 설탕을 먹는 대가이다.”

그리고 아직 이 붐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설탕은 하루의 기름이었다. 더 많이 맛보고, 더 많이 원했다. 1700년 영국인은 1년에 평균 1.8kg을 소비했다. 1800년 보통 성인 남성이 8.2kg의 설탕을 먹었다. 1870년, 똑같은 달콤한 이를 가진 녀석이 연간 21.3kg을 먹고 있었다. 그는 만족했을까? 물론, 아니다! 1900년, 그는 1년에 45.4kg에 이르렀다. 30년에 걸쳐, 세계의 사탕수수와 사탕무 생산은 280만 톤에서 1300만 톤 이상으로 폭발했다. 오늘날 미국인은 연간 평균 35kg의 설탕을 소비하거나 하루에 티스푼 22개 이상의 설탕을 소비한다. 

요즘 바베이도스에 가면, 설탕의 유산들을 볼 수 있다. 바람으로 돌리던 풍차가 부숴진 설탕공장이 시간을 나타내고, 어두운 집들,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결코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도로, 관광객으로 가득한 호텔, 그리고 사탕수수가 여전히 프레스기에 던져지고 있는 몇몇 공장들, 원당, 끈적한 달콤함이 뚝뚝 떨어져 있다. 안전모를 쓴 남자들이 내 주위로 서둘러 지나다니는 정제소에 서서, 나는 손으로 쓴 글씨를 읽었다. 그 작물에게 지혜와 보호와 힘을 가져다주기를 신에게 간청하는 기도문이었다. 


범인

“질병과 그 첫째 원인에 대한 경로를 추적할 때마다 설탕으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 같다.”

콜로라도 덴버 대학의 신장학자 Richard Johnson 씨는 로키산맥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하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빛이 나는 눈을 지닌 큰 사람이다. “1900년에는 단 5%였던 고혈압 환자가 왜 지금은 전 세계 1/3의 성인이 가지고 있는가?”라고 그는 물었다. “왜 1980년에 1억5300만 명이 당뇨병이었는데, 지금은 3억4700만 명으로 늘어났는가? 왜 더욱더 많은 미국인들이 비만이 되는가? 주요 범인이 아니라도, 범인의 하나는 설탕이라고 생각한다.”

서유럽이 처음으로 설탕 붐을 경험한 1675년으로 돌아가, 영국 왕립학회의 창립 회원이자 내과의사인 Thomas Willis은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소변은 “꿀이나 설탕이 든 것처럼 놀랍게도 단맛이 난다”고 지적했다. 250년 뒤 컬럼비아 대학의 Haven Emerson은 1900~1920년 사이 당뇨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급증과 설탕 소비 증가의 상관관계에 대해 지적했다. 그리고 1960년대 영국의 영양 전문가 John Yudkin은 식사에 많은 양의 설탕이 심장질환과 당뇨병에 위험요소인 혈액의 지방과 인슐린의 수치를 높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간과 동물에 대한 일련의 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Yudkin의 주장은 식사에 너무 많은 포화지방으로 인한 콜레스테롤로 비만과 심장질환이 증가한다는 다른 과학자들의 비판으로 내쫓겼다.

그 결과, 지방은 20년 전보다 미국인의 식사에 더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미국의 비만은 더욱 증가했다.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존슨 씨는 주요 원인이 설탕, 특히 과당이라고 한다. 자당 또는 그래뉴당은 똑같은 양의 포도당과 과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당은 과일에서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설탕의 종류이다. 그건 또한 그래뉴당에 매력적인 단맛을 선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과당 옥수수시럽 또는 HFCS는 또한 과당과 포도당을 음료에 약 55 대 45로 섞은 것이다. 자당과 고과당 옥수수시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유사하게 나타난다.) 존슨 씨는 포도당은 몸 전체를 통해 세포에 의해 대사되지만, 과당은 주로 간에서 처리된다고 설명한다. 탄산음료나 사탕처럼 빨리 소화되는 형태를 너무 많이 먹으면, 간이 과당을 분해하여 트리글리세이드(중성지방)이라 불리는 지방을 생산한다. 

이러한 지방의 일부는 간에 남아서, 장기간 노출되면 지방질로 전환되고 기능장애를 일으킨다. 그런데 많은 트리글리세이드도 혈액을 밀려나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혈압이 상승하고, 조직이 차츰 인슐린에 내성이 생긴다. 췌장이 상황을 유지하려고 더 많은 인슐린을 들이부으며 반응한다. 결국 허리 부분의 비만과 고혈압 및 기타 신진대사의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대사증후군으로 알려진 상황이 시작된다. 검사하지 않으면 덤으로 심장마비의 위험을 높이는 2형 당뇨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 성인 인구의 1/3 정도는 국립건강연구소에서 설정한 대사증후군 기준에 걸릴 수 있다. 

최근 미국 심장협회는 식사에 너무 많은 설탕을 넣지 말라는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근거는 설탕이 영양가는 없으면서 열량만 제공한다는 것이다. 존슨 씨와 그 동료들에 따르면, 이는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과다한 설탕은 텅 빈 열량만이 아니라, 독성이다. 

“그것의 열량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대학 내분비학자 Robert Lustig 씨는 말한다. “설탕은 과다하게 먹으면 그 자체가 독이다.”

존슨 씨는 미국인의 통념을 언급한다. 미국인은 너무 많이 먹고 운동을 적게 해서 뚱뚱하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 많이 먹고 운동을 적게 하는 이유는 설탕 중독 때문인데, 이로 인해 더 뚱뚱해질 뿐만 아니라 설탕에 매진하며 활력도 떨어지고 있다. “텔레비를 보는 까닭은 텔레비가 너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며, “운동할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그건 너무 많은 설탕을 먹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너무 많은 설탕 섭취를 멈춰라. 사람들이 예전으로 돌아가면 부작용의 대부분은 사라진다. 문제는, 소비량이 폭증한 이유의 하나인데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설탕을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식품제조업자들이 음식에서 지방을 빼고 그 맛을 대체하려고 엄청난 양의 설탕을 넣어 더 건강한 음식처럼 보이게 하며 무지방 구운 음식이라고 내놓고 있는데, 그런 음식에 설탕이 더 많이 들어가 있다. 

이건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병들고 싶지 않아서 당신이 싫어하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병이 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과일이었다

설탕이 우리에게 그렇게 나쁘다면, 왜 우린 그걸 갈망하는가? 간단히 대답하면, 혈액에 설탕을 주입하면 뇌가 마약에 반응하는 것과 같이 쾌락중추를 자극한다. 모든 맛있는 음식이 어느 정도 이런 역할을 한다. 즉 그것이 맛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설탕은 아주 특별한 효과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중독성 약물이다. 

그러나 이는 왜 우리의 뇌가 잠재적으로 유독한 화합물에 유쾌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 존슨 씨가 알려준 답은, 우리가 유인원이었던 시절에 과당을 갈망했는데 그건 우리 조상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존슨 씨의 이야기를 우화를 빌려 바꾸어 보면, 아무리 최고의 이론이더라도 과학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처음 시작일지도 모르는 약 2200만 년 전, 유인원들이 아프리카 열대우림의 나무에 가득했다. 그들은 1년 내내 끊임없이 먹을 수 있는 천연 설탕을 지닌 나무의 과일로 생존했다.

아마 500만 년 뒤의 어느 날, 이 에덴동산에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다가 줄어들고, 빙하가 확대되었다. 조수에서 섬들이 드러나고, 몇몇 대담한 유인원은 아프리카 밖으로 건너갔다. 유목민, 방랑자인 그들이 유라시아를 덮은 우림에 정착했다. 그러나 추위는 계속되어, 가을에 낙엽을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숲이 열대의 과실수 숲을 대체해 나아갔다. 기근의 시기가 뒤따랐다. 숲에는 굶주린 영장류로 가득 찼다. “어떤 시점에 돌연변이가 유인원 사이에서 발생했다”고 존슨 씨는 설명했다. 그것이 유인원이 과당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만들었다. 적은 양이라도 지방으로 저장되게 하여, 땅과 음식이 부족한 긴 겨울에도 잘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돌연변이 유전자와 희귀하고 귀중한 과일의 설탕에 대한 건강한 갈망을 지닌 영장류가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와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유인원들을 낳았다. 그중에는 전 세계에 설탕을 사랑하는 후손을 퍼뜨린 종이 포하되어 있었다. “돌연변이가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강력한 생존요인이 되었다”고 존슨 씨는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영장류는 돌연변이가 있다. 난 흉년을 통해 우리의 조상이 생겼다고 본다. 그러나 설탕이 대규모로 서양을 강타하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의 세계는 과당으로 넘쳐나게 되었는데, 우리의 몸은 그에 대해 아주 아주 조금만 진화한 것이다.”

이는 엄청난 모순이다. 우리를 구했던 것이 결국에는 우릴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한 요리사

11살밖에 안 된 닉 셜록은 설탕의 시대를 사는 평균적 미국인의 완벽한 대역이다. 지방이 과다한 소년에게 광고업자와 사탕 판매원은 그의 간에 더욱더 저렴한 가격으로 과당을 섭취하도록 만들고 있다. 61kg의 5학년 소년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달콤한 독을 사랑한다. 학교식당에 앉아서 웃으며 “왜 그렇게 좋은 것이 당신에게는 그렇게 나쁜가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권력에 관한 것보다 덜 유혹적이다. 기껏해야 학교는 아이들이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몇 년 전 팝타르트와 피자가 커크패트릭 초등학교에서 제공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서는 메뉴가 개선되었다. 학교는 지역사회를 위한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텃밭과 산책로, 공원, 놀이터 등이 갖추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클라크스데일의 투쟁은 설탕의 장원과 사탕수수 노동자 사이에서 계속된 전투의 또 다른 전선이다. “이것이 부유층보다 빈곤층을 훨씬 어렵게 만드는 것이 비극이다”라고 존슨 씨는 이야기한다. “당신이 부유하면서 즐기기를 바란다면, 하와이로 휴가나 여행을 가서 쉰다. 그러나 당신이 빈곤하면서 기분을 내려면, 골목을 돌아나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산다.”

내가 닉에게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요리사요”라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시 엄마를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이렇게 고쳐 말했다. “건강한 요리사요.”



http://ngm.nationalgeographic.com/2013/08/sugar/cohe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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