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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

 

시작하며

 

갈다라는 행위는 초기 인류의 식량 생산, 식량 확보의 과정에 없었던 행위이다. 수백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는데, 이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수렵'과 '채집'이란 방법으로 식량을 얻어 왔다. 수렵이란 활이나 덫 등의 도구를 써서 야생 동물을 잡는 행위이다. 채집이란 야생 식물이나 이동성이 부족한 소동물 등을 채취하는(또는 잡는) 행위이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깔려 있는 건 대략적인 계절성을 별도로 한다면 언제 무엇을 입수할 수 있을지가 예견하기 곤란하다는 점, 또 자원이 고갈되면 거주지를 떠나 집단별로 이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까?

이것에 갈다라는 행위(농경)이 더해진 것은 오래된 것을 어림잡으면 수만년 전, 새로운 걸 어림잡으면 1만년 전의 일로 여기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다만, 수만년-1만년이란 폭이 있는 이유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인류는 언제 갈다라는 일을 떠올렸던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하는 분야를 "농경기원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등장한 가설은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농경이 시작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정도 전의 '신석기시대'의 시작 무렵으로 상정했다. 특히 고든 차일드가 제창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란 개념은 농경기원을 하나의 '이벤트'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농경기원을 느린 변화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최근엔 꽤 유력하다. 영국 저널리스트 콜린 텃지Colin Tudge는 Neanderthals, Bandis and Farmers: How Aqriculture Really Began이란 팜플렛을 내고 거기에서 농경의 기원을 좀 더 오랜 시기부터 서서히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것은 "농업은 인간의 원죄"라는 번역서로 출판되었다. 

두 가지 사고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하나는 '농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크게 관계되어 있다.  차일드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이란 사회의 발전에 의하여 인간집단이 갈다라는 복잡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진화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한편 텃지는 인간의 집단이 어느 장소에 정주해 생태계에 교란을 가한 것이 넓은 의미로 보면 농경기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차일드의 설이 고전적인 고고학의 학설인데 반해, 텃지가 현대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학문 분야와 교섭하고 있다는 학문적 배경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농경이라고 하면 논 벼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농경기원론은 오랫동안 벼농사 기원론, 그것도 논 벼농사 기원론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벼농사는 외래의 문화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농경기원론은 오로지 벼농사가 언제 도입되었는지를 논해 왔다. 1990년대에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의 재발견 등을 계기로 조문시대 사람들의 삶이 관심을 끈 무렵부터 상황이 변했다. 논의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일본에서는 고고학의 독무대였던 이 분야에 환경고고학, 식생사학, 농학 등 자연과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학제가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 크다.

일본에서도 농경의 기원을 이벤트가 아닌 천천히 변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연구자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사키 다카아키佐々木高明는 이 변화를 '과정(Process)'이라 부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농경기원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씨앗을 심는 조몬인"을 저술한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의 업적일 것이다. 오바타는 고고학자이지만 다른 학문 분야의 성과에도 밝아, 그것을 흡수하여 조문시대의 일본열도에서는 원시적인 대두 재배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명해 보였다.

 

 

1. 인간은 왜 갈게 되었을까?  

 

갈다라는 행위

그런데 갈다라는 행위는 어떠한 행위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갈다라는 건, 협의로는 도구를 써서 초목을 베어내고 나아가서는 불을 지르거나 물을 넣는 등으로 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종자나 모종 등을 심어 밭에 침입하는 방해되는 식물이나 심어놓은 모종에 붙는 곤충 등을 제거해 최대한으로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다만 이 행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이나 그것을 뒷받침할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초목을 베어내는 도구가 있다. 유물로 출토된 도구류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출토된 농경도구 등을 유형화하여 그 옛것과 새것으로부터 도구의 기원이나 전파를 연구해 왔다. 또한 현재도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기구류를 유형화하는 수법도 사용해 왔다. 이 방법은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세계적인 성과의 집적도 인정된다(예를 들면, 벨트 1968).

불을 놓더라도 그에 곁들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정확한 지식 없이 산림이나 초지에 불을 놓으면 제어할 수 없어 큰 산불을 일으키게 된다. 안 좋으면 인명을 잃기도 한다. 갈게 된 토지가 경작지인데, 경작지나 그 주변의 환경은 생태학적으로는 교란 환경이다. 교란의 요인은 물론 인간 행위이다. 즉, 인간에 의한 교란 환경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생태학의 수법이 쓰여 왔다. 

심는 대상, 즉 재배되는 식물은 야생 식물이 아닌 작물(재배식물)이다. 재배식물의 기원을 농경의 기원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 농학의 분야이다. 이 분야에서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바빌로프 이래 고고학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농학과 고고학의 수법을 합친 식물고고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연구방법도 등장했다. 이는 출토 유물에 자연과학의 분석기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필자가 1996년 제창한 'DNA 고고학'도 또한 그 하나이다. 

간다는 행위에는 제사 등의 행사가 수반된다. 이들 여러 행사 등을 유형화하고 상호비교하는 것으로 농경의 기원이나 전파를 좇는다는 연구도 옛날부터 행해져 왔다. 이들은 주로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연구방법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방대한 성과의 축적이 인정된다. 

 

 

농경의 시작

그런데 인류는 왜 농경을 시작했을까? 즉, 갈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 있는데, 모두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아니다. '왜'라고 하는 질문은 그 사람 개인이나 사회의 이상이나 기호를 묻는 것이지, 만일 그것이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묻는 것일지라도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기록조차 없던 시대의 행위이다. 아무래도 유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왜 갈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구분하면 내인설과 외인설로 나눌 수 있다. 내인설은 인간 사회의 내부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로, 예를 들면 차일드도 그 하나이다. 예를 들면, 큰 종교시설에 인간이 정기적으로 모일 때 그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외적인 요인을 고려한 설도 있다. 1980년대 이후 부활을 보인 환경결정론은 그 대표이다. 이전에는 농경의 개시 요인으로 1만3700년 정도 전의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짧지만 급격한 한랭기를 드는 견해가 있었다. 그 뒤 농경의 시작이 이 시기보다 늦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농경이 천천히 진전되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다. 

어느 설이나 배경에 인구 증가와 식량난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동일하다. 식량의 압박이 사회를 농경으로 몰고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과론은 종교적 사고와도 관계되어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지기 쉬운 사고방식이다. 불교는 현세의 사건을 전생의 결과(업)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것도 일종의 인과론이다. 더욱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뒷받침한 사상적 배경인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 또한 기독교 사상이 뒷받침하는 인과론 위에 성립되어 있다. 인과론은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농경의 시작을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브라이언 사이크스Bryan Sykes의 소설 <이브의 일곱 딸>에서는 현생 인류의 근원이 된 일곱 여인을 가정하고, 그들의 일생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수만년 전의 이름 없는 여성의 삶을 증거로 복원하는 등은 현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이야기'로, 사이크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나 이야기를 사실무근으로 치부해도 될까? 현대 학문은 상상이나 이야기를 부당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확실히 상상에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100년 동안 정당한 설로 믿어졌던 설 등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거짓말인가 하면, 그리 생각할 근거도 또한 없다. 상상의 산물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가설로 취급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이브의 일곱 딸>에 등장하는 일곱번째 여성 자스민은 자기 근처의 꽃이나 식물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증거는 없지만- 갈다라는 행위의 시작은 이 여성의 일시적 기분이 시작이었다는 것이 된다. 즉 "우연히" 시작되었다는 설, "우연의 가설"이다. 나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인과론을 근대 합리주의에 따른 생각이라 한다면, "우연의 가설"은 양자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경작한 것일까?

갈다라는 행위는 그 뒤 꽤 일반화된 것 같다. 어느 토지에 있던 집단이 주변에서 식재료를 입수할 수 없게 된 때, 그때까지의 해결법은 그 집단 전부 또는 집단의 일부가 그 장소를 떠나 신천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세계 거의 모든 땅은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 집단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자원 고갈에 대응하는 방법은 갈다라는 것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덕스러운 농경이 인류의 생존에 필수 행위가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갈다라는 행위가 다음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도시가 탄생했을 때이다. 그때까지 갈다라는 행위는 자기 자신, 자기의 가족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위한 행위였다. 모든 개인이 자신과 그 집단의 먹을거리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도시민, 즉 특정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경작하지 않는다. 물론 그때까지 겸업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 먹을거리를 스스로 완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부양하는 생업이 새로 생겼다. 그것이 농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농업이란 다른 사람의 식재료를 생산하는 생업이다(佐藤 2016).

그 뒤 도시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었다. 일본에는 이미 고대에 최초의 본격적인 도시인 헤이조쿄平城京가 출현한 이후, 중세까지 교토, 가마쿠라 등의 도시가 탄생했다. 그리고 주로 그 근교에 농업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이 생겨났다. 지방에는 조세로 농산물 등을 납부할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똑같은 힘이 작용했다. 즉, 지방의 농업은 조세 때문에 식료품 생산을 위한 것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세계로 눈을 돌리자. 농업은 대륙마다, 또 같은 대륙 안에서도 지역마다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농경 도구나 작물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면, 작물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면 유라시아 동부에서는 벼, 대두나 토란 등이, 서부에서는 맥류와 십자화과의 작물 등이 우점했다. 반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등이 재배되었다. 

농경 기술에서도 큰 지역차가 인정된다. 유라시아 중앙부부터 서부에 걸친 반건조지대에서는 관개기술을 발달시켜 물을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동부의 몬순지대에서는 홍수 대책 등 '너무 많은 물'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연간 강수량이 400mm가 되지 않는 "갈" 수 없는 토지에서는 무리지어 사는 대형 초식 포유류를 길들여 그 젖이나 고기 등을 이용하는 유목이 발생했다. 이 생업은 그 뒤 수천년을 거쳐 농업과 융합해 목축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생업을 낳았다. 

유라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사이에 작물의 교환이 일어난 건 콜럼버스 등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이다. 그리고 대륙을 넘나드는 교역은 세계적인 대도시를 낳았다. 일본에도 히라도平戸, 나가사키長崎, 사카이堺 등의 도시가 융성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들을 이동하는 교역자들의 먹을거리 또한 주변 지역의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2010년 세계의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고 보도되었다. 즉,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자신이 먹는 식재료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가축을 위해 갈다

그런데 농업생산물은 인간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농업의 성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농업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가축의 사료가 된다. 농림수산성 자료에 의하면, 유럽연합 28개국의 1억8150만 헥타르의 농지 중 4%인 7만6100헥타르가 사료작물을 생산하는 경작지나 방목지로 사용되고 있다. 작물별 생산성이 다르기에 토지면적과 생산량이 완전히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유럽의 농업생산물 가운데 40% 정도가 가축을 위해 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수치가 불과 6.5%에 불과해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유럽의 목축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중앙아시아부터 서아시아에 기원한다고 생각되는 유목에서 발단하고 있다. 유목은 가축의 무리를 무리마다 관리하는 형태로, 원래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초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럽에 전개된 뒤, 그 먹이(사료)는 점차 농업으로 조달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중 안정적으로 가축을 사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축은 일본 열도에도 있었는데, 그 절대적 수가 적었던 것 등이 관계되어 농경지의 대부분이 인간을 위한 작물 생산에 이용되어 왔다. 특히 쌀은 일본인에게는 특별한 작물이란 것이 오랜 기간에 걸친 '진리'였다. 1970년대 무렵, '초다수확 쌀'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에 반대하는 이유의 하나가 '인간의 식량인 쌀을 가축에게 먹이는 것'에 있었다. 결국 이때의 초다수확 쌀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 무렵부터 가축 사육을 위한 쌀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급속히 확산되려 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쌀 기피현상이 심화되면서 쌀을 신성한 음식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희미해졌음을 보여준다. 

 

 

 

먹을거리 패키지

 

당질과 단백질

동물로서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 영양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당질, 지질, 단백질은 3대 영양소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인간은 이들을 균형있게 섭취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당질은 식물성 식품에서, 지질과 단백질은 동물성 식품에서 섭취해 왔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도 있어 당질을 젖 등 동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하고, 지질이나 단백질을 콩이나 밀 등 식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예외가 생긴 이유의 하나가 동식물 분포의 불균일함이다. 극지나 고산지대, 사막 주변의 건조지대에서는 식생이 부족해 안정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식재료는 동물성으로 한정된다. 젖 등의 동물성 식재료에서 당질을 섭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는 극지에는 지질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의 이유 등으로 특정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이른바 '금기'에 의해 동물성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동물 종을 기피하는지는 종교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매우 강하게 기피한다. 힌두교도 대부분이 동물성 식재료를 섭취하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은 단백질을 콩과 같은 식물성 식사를 통해 섭취하게 된다.  

3대 영양소를 무엇을 통해 섭취할지는 토지에 따라 다양하다. 왜냐하면 동물상과 식물상은 그 토지에 고유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륙의 중앙부에 바다의 물고기는 없으며 1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홋카이도에는 벼가 없었다. 식재료의 토지 고유성은 프랑스에선 테루아terroir 등으로 불린다. 일ㄹ본어로 고치자면 "풍토風土"일까?

 

 

당질과 단백질의 패키지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당질과 단백질(그리고 지질도)을 같은 곳에서 생산해 왔다. 이 현상을 당질과 단백질의 동질성이라 부르기로 하자. 일례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논이라는 생산의 장에서 벼(쌀)와 물고기(민물고기)를 생산하던 "벼논양어"가 그것이다. 그것을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게다가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장에서도 동일성이 유지되어 온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는 밥상 위에서, 예를 들어 '초밥'이란 요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초밥은 물론 지금 같은 초밥이 아니라 식해 같은 초밥 형태이다. 이와 같은 패키지는 일본 열도만이 아니라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중국 남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는 세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는 쌀 대신 서류(고구마, 토란, 빵나무, 마, 바나나 등)이 쓰였다. 또 동북아시아에서는 쌀을 대신해 잡곡이 사용되었다.

유럽에선 '보리와 젖'이란 패키지가 생겼다. 중세 이후에 등장한 삼포식 농업은 여름작물, 겨울작물, 휴한(휴경)이란 작부방식을 차례로 반복하는 농법으로, 이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한다. 이렇게 하여 2회 경작하고 지력을 잃은 토지에 가축의 배설물을 비료로 주어 지력의 회복을 도모한다. 

반면, 식탁에서 단백질은 가축에서 유래하는데 그 중심은 젖과 유제품이고, 고기는 그 다음의 식재료였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귀리와 젖을 조화시킨 '오트밀'로 요리되었다. 신대륙에서 감자가 도래하고부터는 '감자와 젖'의 패키지도 생겼다. 

중부 이남의 유럽에서는 맬과 젖을 조화시킨 여러 요리가 생겼다. 밀은 가루로 빻아 빵이나 파스타로 가공되었다. 덧붙여 파스타의 원료는 빵을 만드는 밀(학명 Triticum aestivum)과는 다른 마카로니 밀(Triticum durum)이라 부르는 밀이다. 

'쌀과 물고기' 등 단백질을 물고기에 의존하는 패키지와 '맥류와 젖'처럼 그것을 가축에게 의존하는 패키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을까? 전자에서 물고기는 천연자원이다. 그리고 후자에서 가축은 '인간이 만든 동물'이다. 이 차이는 사회의 구조나 그곳에서 거주하는 인간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따른다'는 사상이, 그리고 가축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사상이 뿌리를 내렸다. 

 

 

 

식물 소재의 패키지 

앞에서도 적었듯이,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식물성 식재료가 있다. 대두 등 일부의 두류나 밀이 그 대표일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제약으로 동물성 식재료를 생산, 소비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당질만이 아니라 지질, 단백질도 그러한 식물성 소재를 통해 섭취하고 있다. 마에다 카즈미前田和美에 의하면, 인도의 데칸 고원에서는 잡곡과 두류의 섞어짓기가 흔히 관찰된다. 인도는 잡곡의 세계적인 중심 가운데 하나로 아시아에서 기원하는 잡곡 등이 재배된다. 그리고 쌀 또한 이러한 잡곡과 함께 재배되는 경우가 많다(이러한 재배 시스템을 농학 분야에서는 섞어짓기라 함).

두류의 식물, 특히 덩굴성 종은 지주를 따라 위로 자라면서 생육하는데 잡곡이 그 지주 역할을 한다. 두류의 많은 종이 대기 중의 질소를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질소 고정균'과 공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소거름의 일부는 지주가 되는 잡곡에게 제공된다. 즉, 잡곡과 콩은 질소 고정균을 통해 공생하고 있다. 

밥상 위에서도 곡류와 두류는 동소성이 있다. 달 카레(콩 카레)나 프라오라 부르는 콩이나 채소를 섞어 지은 밥(프라오의 어원은 필라프인가 싶음) 등 곡류와 콩을 조화시킨 요리는 매우 많다. 

일본에서도 곡류와 두류의 패키지가 있다. 인절미는 쌀과 대두의, 팥떡은 쌀과 팥의 패키지이다. 세금도 그 일본식의 기본형이라 하는 '국 하나 채소반찬 셋'의 스타일인 '밥과 된장국'은 쌀과 콩의 패키지가 구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형 가축의 전래가 늦고, 또 원시종교 및 밀교와 절충된 일본 불교는 일본 요리의 한 형태인 정진요리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변화하는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

이와 같은 먹을거리의 패키지는 그 토지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데, 사회나 경제의 세계화에 수반해 그 형태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후에 일반화된 육식(특히 가축의 고기를 먹는 식문화)가 '쌀과 고기'라는 패키지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양식'의 메뉴인 '돈카츠 정식'이나 덮밥인 '소고기덮밥', 거기에 해군이 발명한 카레라이스 등이 그것이다. 싸과 고기의 패키지는 중앙아시아 기원이라 생각되는 양고기 스프로 섞어 만든 '필라프', 또는 '쌀과 젖'의 패키지아고도 할 수 있는 리조또 등을 들 수 있다. 

남아메리카 태생의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최초에 감자는 유럽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에 유럽 북부에서 당질 공급원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독일은 감자 요리의 메카처럼 불리고, 영국의 '피시앤칩스' 같은 '감자와 생선'이란 패키지도 낳았다. 

이처럼 먹을거리의 세계에 초래된 세계화는 일면에서는 조합(패키지)을 다양화시켰다. 요리인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요리가 점점 등장했다. 그동안 한정된 땅에만 있던 식재료와 그 조합이 이제 전세계의 식재료를 자유롭게 조합시키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이란 시대는 매우 풍요로운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식재료가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식재료 운반에 많은 에너지가 쓰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공업화하는 경작

 

관개와 화학비료

갈다라는 행위는 인간 행위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연 영위의 범위 안이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즉 관개하지 않고), 거름도 식물의 부식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배설물, 사체였다. 지금 말하는 '유기비료'이다. 관개 기술이 없으면, 경지는 제한된다. 거름이 제한되면 단위면적당 생산은 늘지 않는다. 

인류가 관개를 발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정도 전, 중앙아시아부터 지금의 이란에 걸친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 2012). 일본에선 카와치河内 평야에 큰 고분이 조영된 뒤에 팠던 '고시대구古市大溝'가 최고의 본격적인 수로가 아닐까 이야기되는 것 같다. 오사카 평야의 남부에 있는 사야마이케狭山池는 일본 최고의 댐식 저수지라고도 하며, 그 건조 시기는 7세기 초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일본에서 관개는 1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것이 된다(사토佐藤 2020).

비료를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단초가 된 것이 1906년에 하버와 보슈에 의하여 발명된 하버-보슈법이다. 이에 의하여 인류는 대기 중의 질소를 인공적으로 비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작물의 단위면적당 생산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화학비료의 다용은 환경에 부하를 주어 지구환경의 지속성을 해쳐 왔다. 비료의 제조에 다량의 석유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비료 반응성이 좋은 작물이나 품종만이 남아서 대량 생산되고, 기타 작물, 품종은 차례로 배제되어 갔다. 이것이 작물종이나 품종의 다양성을 빼앗고, 식문화의 균일화, 세계화를 일으켰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갈다라는 작업 그것도 변화시켰다. 이전까지는 갈다라는 작업은 문자 그대로 흙을 갈고, 그 흙과 물과 태양광으로 작물을 키우는 작업이었는데, 비닐을 쓴 비닐하우스에서의 촉성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윽과 비닐하우스는 대형화되고, 또 유리온실이 등장한다. 온실이라고는 하지만, 가랭하면 저온 온실도 된다. 이윽고 흙은 수경액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LED를 사용한 밀폐형 '식물공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재배의 3요소로 꼽히던 흙, 물, 태양광 가운데 흙과 태양광은 사용되지 않는다. 농업은 대지와 자연으로 뒷받침되던 산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동물성 식재료의 생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축산업은 원래 유목 문화가 발명한 착유나 거세 등의 기술을 이어받은 산업이었는데, 주로 유럽에서 가축의 먹이를 농업이 지원하는 산업으로 전환된다. 그 뒤에도 사육 기간의 단축이나, 또 많은 개체를 더 좁은 사육사에서 사육하는 밀식 사육이 점점 진행되었다. 

축산업도 또 동물의 생명을 먹는 산업에서 공장에서의 식육이나 우유 생산이란 산업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 윤리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한층 더 검토되어야 한다. 

 

 

갈다에서 가공하다, 운반하다

대량 생산된 식재료는 멀리 떨어진 대소비지 주변에 대량으로 운반되어 그것에서 가공하게 되었다. 공업화가 경작부터 요리하는 작업에까지 이른 것이다. 대량으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규격인 것을 한번에 생산해야 한다. 휘어진 오이나 크기가 제각각인 사과는 환영받지 못한다. 또 대량 생산은 생산되는 작물의 수와 품종의 수를 줄였다. 다양성이 줄어든 것이다. 

가공기술의 진보는 보존기술의 진보였다. 인류가 태고부터 알고 있던 가공기술은 가열, 건조, 소금이나 설탕 절임, 발효 등이었다. 공업화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하는 동시에, 통조림과 병조림, 플라스틱 용기나 식품보존료의 개발을 가져왔다. 일본에서는 발효를 이용한 가공기술은 무로마치 시대에 이미 확립되었고, 특히 술이나 간장 등의 조리료엣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된장은 지금도 약간은 자가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술이나 간장은 거의 외부화되었다(양조는 면허와 신고가 필요). 병조림이나 통조림은 19세기 초의 발명품인데, 플라스틱 용기나 보존료는 석유화학공업의 융성 이후, 즉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급격히 보급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저장성이나 수송거리를 뚜렷하게 향상시켰다. 

또한 병조림과 통조림은 전쟁터에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군대는 식량의 생산, 가공, 수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현대 일본인의 음식은 이러한 기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공은 더욱 중첩되고, 가공과 다음 가공 사이에는 수송이라는 과정이 끼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건 이렇게 여러 겹으로 가공되고 운반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먹을거리는 이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식재료의 장거리 이동에는 배나 항공기가 이용되지만, 수송을 맡고 있는 건 석유 등의 화석연료이다. 배로 이동될 때 식재료는 냉장 또는 냉동되어 운반된다. 냉장과 냉동에 쓰이는 전기도 현대사회에서는 화석연료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전기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시각이다. 내침 김에 쓰자면,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온난화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원자로를 냉각하는 데에는 공기나 해수가 사용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원자로가 발하는 열은 대기나 해수를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략 인간의 활동 중에서 열을 발하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이와 같은 먹을거리 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한지 아닌지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경작하는 인간과 먹는 인간을 연결하다

인류가 '갈다'라는 작업을 익혔을 때, 함께 먹는 집단(사람수)는 몇 십에서 많게는 몇 백까지였다. 갈다라는 작업이 나라를 만들게 되자, 그 수는 단숨에 늘어났다. 고분시대에 조영된 다이센大仙 고분(오사카시 사카이시)에서는 본체 공사에 2000명 이상이 종사했다고 한다. 그 주변에서 일했던 사람의 수는 아마 만 명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경작하는 사람들은 만 명 단위의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지원하게 된다. 당연히 먹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또 먹는 사람도 경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둘 사이를 잇는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식자재의 집하, 운반, 판매나 가공, 보존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형태로, 현대에는 이러한 형태가 극단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의 일이었던 요리 부분을 '가공'의 영역이 점점 대신하고 있다. 큰 역할을 한 것이 전자렌지 등의 가전제품이다. 손질한 재료를 냉동한 것을 전자렌지로 가열하면 요리가 완성된다. 전기와 가스 밥솥의 보급은 밭솥의 간편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완성된 반찬을 사오는 점심이 크게 늘고 있다. 또 점심의 대구어처럼 쓰이는 외식도 현대인의 먹을거리에서 빠질 수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장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에 여기에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최후의 경작 -맺음말을 대신하여

인류가 갈다라는 행위를 익힌 지 만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이후 인류는 지상의 미개척지를 차례로 개척해 농지로 바꾸어왔다. 그때까지 미개척지였던 곳은 차례차례 개척되어 마을땅, 마을바다가 되어 갔다. 이 시점에서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은 자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작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바다이다.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는 지금까지 대부분 천연자원이었는데, 최근 반세기 정도 사이에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양식의 확대이다. 양식기술 자체는 300년에 이르는 역사가 있다고 하는데,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50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뒤의 성장은 급속해, 현재는 총 어획고의 20%를 넘을 정도까지 되었다. 자원의 고갈이 알려진 가운데 양식은 앞으로도 그 어종과 생산량을 늘릴 것이다. 자원 관리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의 이치만으로 바다를 경작할 수는 없다. 이 공간에서 계속 살아간 해양 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삶이라고 해도 바닷물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양에 산재한 섬들이 삶의 무대였다. 이런 사람들의 사람을 살피지 않는다는 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수탈의 장소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해안지대에는 반드시 이러한 해양 민족과의 접촉이 있고 교역을 통해 삶을 지탱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의 일본 식문화가 이렇게 성립되어 온 것도 생각하면서 바다를 경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Colin Tudge(竹内久美子 번역), 2002, 『農業は人類の原罪である』, 新潮社
小畑弘己, 2016, 『タネをまく縄文人』, 吉川弘文館
総合地球環境学研究所(편집), 2012, 『地球環境学辞典』, 弘文堂
Emil Werth(藪内芳彦・飯沼二郎 번역), 1968, 『農業文化の起源 -堀棒と鍬と犂』, 岩波書店
佐藤洋一郎, 2016, 『食の人類史』, 中公新書、中央公論新社。
Bryan Sykes(野晶子 번역), 2006, 『イヴの七人の娘たち』, ヴィレッジブック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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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석관에서 잎사귀가 발견되어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3560년 전의 수박 작물임이 밝혀졌단다. 

수박의 원산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쪽으로 알고 있었는데, 칼라하리 사막이 원산지라네. 아무튼 이집트 쪽에도 옛날부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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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5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종이의 타파tapa 기원설' 재고

사카모토 이사무坂本勇

 

 

 

 

 

나카오 사스케의 '종이의 타파 기원설'

 

조엽수림 문화론을 제창하고, 조엽수림대에 있는 옻나무, 차와 나란히 꾸지나무에 관심을 쏟았던 나카오 사스케(1916-1993)은 <조엽수림 문화와 일본>(1992년 출간)에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외쳤다. 하지만 종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고, 큰 화제가 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렀다. 오날늘 읽으면, 그 미래를 쏘는 듯한 통찰력에는 감복한다. 

 

나카오는 현지조사를 거듭해 왔던 체험 속에서 "중국인의 한대에 있던 종이의 발명은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타파를 모방하여 낡은 의복을 폐물 이용했다고 본다면 모두 잘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종이의 기원을 타파 기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설이다. …… 종이는 조엽수림 문화가 그 뿌리에 해당한다"고 그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뒤 최근 몇 년의 일이지만, 인류에서 최초로 바다로 배를 저어 나갔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조사연구가 세계적으로 성행하여, 목표는 멀지만 가까스로 나카오의 새로운 설이 빛을 되찾는 물적 자료가 나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타이완이나 중국 남부를 연고지로 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사람들이 신석기시대에 최초로 만들었던 것은 종이가 아니라 '나무껍질 베'였다고 생각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제사의식용으로 '베'라든지 '종이'라든지가 혼연일체가 되었던 사용법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뒤에 기술하듯이, 조금 전까지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힌두교 성직자 집단에서는 나무껍질의 사용법은 베라고 보든지 종이라고 보든지,어느쪽이든 명백하지 않은 고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서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나 닥나무를 원료로 한 '시로니기테白和幣'(원형은 아마 짜지 않는 타파와 같은 것이라 생각됨), 뽕나무과의 아마떼를 원료로 한 마야, 아스텍의 '방혈 의식용 코덱스' '제사용 의상'이나 인도네시아, 태평양 제도의 '장신구'로 간주되듯이, 현대의 감상에서 본다면 '나무껍질 종이 Beaten Bark Paper'로서 취급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이 각지에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작용 도구의 측면에서, 또는 각지의 사용 사례에서 보아 '나무껍질 베용'도 '나무껍질 종이용'도 마찬가지이든지 매우 닮은 경우가 많으며, 기법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카오와 마찬가지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발상했던 연구자는 그밖에도 있으며, 타이완 중앙연구원 민족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지냈던 능순성凌純聲(1902-1981)과 딸인 능만립凌曼立 씨, 그리고 W. 에버하드Eberhard(1909-1989), P. 톨스토이 씨, 사카모토를 여기에서는 들어 놓는다. 

 

 

 

'종이'는 어떠한 기술적 변천을 했을까?

 

지금까지 '종이의 타파 기원설'은 묻혀 왔다. 그것은 이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극도로 적었던 점과, 최근의 화학 섬유를 사용한 종이가 등장하기 전에는 '종이는 물에 원료 섬유를 분산시켜 떠서 올리는 것'이란 정의가 있어,물에 섬유를 분산시키지 않는 파피루스, 양피지, 타파 등은 종이의 종류에 포함하지 않고 별개로 취급하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일본 공업 규격 JIS에서 '종이란 식물섬유 그외의 섬유를 서로 엉키게 해 교착시켜 만든것'이라 하여, 타파에도 새로운 정의에 따라 종이로서의 문호가 열렸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설명되어 왔던 종이의 기술적 변천에 대하여, 아직 원시적 제지법이라고 자리매김된 '종이 붓기 방법(pouring method)'는 지금도 네팔과 태국 북부, 중국에서 행하며, 또한 현재는 끊어져 버렸지만 베트남중부의 라그라이족 등에게서도 발견된 제지법이다. 이 방법에서는 나무틀에 베를 펴서 준비한, 뜨는 도구의 매수만큼 하루에 종이를 뜰 수 있다.

 

발전적 제지법이라 자리매김된 '종이 뜨기 방법(dipping method)'에서는 원시적 제지법에 가까운 정적인 <모아 뜨는 법>과 닥풀의 뿌리, 나무수국의 나무껍질 등에서 추출한 반죽(중국에서는 활수滑水)를 더하여 점성을 활용하는 약동적인 <흘려 뜨는 법>이 있다. 이 종이 뜨기 방법으로는 하루에 희망하는 수백 장을 뜰 수 있다. 

 

종이 뜨기 그것은 원료 식물, 물, 간단한 제지 기술이 있다면 어디에서나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기술적 변천, 전파 지도를 구축할 때 필수라고 하는 건 고고학과 역사학 등과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종이의 역사 연구자였던 다드 헌터(1883-1966) 등의 종이의 기원과 전파 지도작성 작업에서는 종이의 유물이 잇달아 발견되었던 북쪽의 실크로드에 연한 건조지대에 치우친 구상이 되어 버렸다. 유기물인 종이의 유물이 썩어서 발견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구상은 결과적으로 공백 상태가 된 채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시적 제지법 이전에 존재했던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와의 관계를 더듬어 찾을 수 없었다. 최근이 되어서 서서히 동남아시아 연구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새로운 조사 연구 자료가 더해져, 이 미완성인 상태로 방치되어 왔던 '종이의 기원과 전파' 지도에 새로운 구상을 가필하게된다. 남쪽의, 틀림없이 조엽수림대의 재평가가 될 것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

 

고대 이래 나무껍질 베와 나무껍질 종이(이후 나무껍질 베와 나무껍질 종이를 합쳐서 편의적으로 타파라고 함)가혼연일체가 되어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타파의 분포는 적도를 사이에 두고 약간 북위남위 각 25도 이내를 띠 모양으로 지구를 빙 일주한 지대로 굳어진다(그림1). 세계에 퍼졌던 타파의 기술·문화이지만, 지금까지지역별로 분단된 조사연구보고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타파의 기원이 되는 장소와 시기, 전파 경로 등 전체상에 대하여 현시점에서는 판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하나의 높은 파도로, 신석기시대부터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연고지라고 하는 타이완이나 중국 남부부터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지나 태평양 제도, 마다가스카르 섬 등으로 수천 년을 걸친 항해에 의한 이동에 수반하여, 타파가 세계에 확산시킨 게 확실할 것이다. 남쪽으로부터의 쿠로시오 문화를 받았던 일본에서도 나무껍질 베 기술을 지녔던 사람들이 도래했을 것이지만, 그 주요 이동 경로에는 위치하지 않고 직물 문화로 사라져 버렸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림1 세게에서 보는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의 확산 지도

 

 

 

타파라는 말에서는 뻣뻣함이라 한 미개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거친 나무껍질 제품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다. 타파는 뽕나무과 나무의 껍질을 벗겨 표피를 제거하여 생껍질인 채 그림2, 3과 같은 몽둥이(두드리는 도구)로 두드려서 펴고, 건조시킨 널판지 모양의 것이다. 거칠고 뻣뻣한 마무리의 나무껍질 제품은 니아스섬 등 각지에 존재하지만, 대체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지역에서 만들어진 타파는 하와이나 술라웨시에서 대표되는 것처럼 일본 종이라고 잘못 볼 만큼 균질하고, 0.05mm 정도의 두께인 것도 있으며, 뛰어난 만듦새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더구나 타파의 어원은 타이완 원주민 어휘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림2 타이완 대분갱大坌坑 유적 출토의 배턴 모양 석기 몽둥이(5500년 전 무렵)

 

 

 

 

 

 

 

 

 

 

 

 

그림3 라켓 모양 석기 몽둥이(현재도 술라웨시에서 사용)

 

 

 

유물로서 세계 각지에 남아 있는 타파 제작용 도구의 출토 또는 잔존 상황의 전체상을 밝히려 했던 조사연구는 아직 없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적 연고지라고 하는 타이완에서 개관하여 보자.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경로나 시기 등의 연구성과는 <오세아니아 바다의 인류 대이동>(2007, 국립민족학박물관 개관 30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그 기획의 시작이 되었던 <Vaka Moana-Voyages of the Ancestors>(2006 Auckland Museum 특별전 도록)에 상세하다. 술라웨시 지역에 관해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출판된 두 책이 있다.

 

오랜 시기의 타파용 석기 몽둥이로서는 타이페이 교외의 대분갱 유적에서 5500년 정도 전의 것이 출토된다(그림2). 유조有槽 석봉이라고 부르는데, 손잡이도 일체였던 배턴 모양 유형이다. 타이완에서 100개 이상 출토되는 석기 몽둥이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모두 이 유형이다ㅣ. 세계의 몽둥이 형상은 다종다양하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경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는 앞에 기술한 배턴 모양 유형의 것으로 재질은 석제와 목제가 있다. 두번째는 라켓 모양 유형(그림3)이다. 손잡이 부분은 등나무나 덩굴 등으로 별도로 붙인 것으로, 두드리는 부분은 석제인데 예외적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는 청동제가 있다. 라켓 모양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경로에서 고려해, 배턴 모양 유형이 기술 혁신된 모양이라 생각된다. 조각된 줄은 타파 제작의 작업순서에 응하여 최초의 단계는 폭넓은 것을, 최종 단게에서는 좁은 것을 사용하고, 줄 사이의 간격이 다른 몇 개를 세트로보유하고 사용한 사례가 많다. 세번째는 사슴의 뿔이나 목제의 잡다한 형태를 한 몽둥이의 유형이다. 대부분 어느 몽둥이에나 두드리는 면에 평행 또는 격자 모양의 줄이 새겨져 있으며, 나무껍질을 효율적으로 두드려 펴기 쉽게 하는 구조가 된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에 수반하여 세계에 확산된 타파 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뒤에 기술하듯이 3500년 이상의 역사가 이어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이다. 또한 격동의 파도를 받아 왔던 아프리카 대륙과 신대륙의 타파 제작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구적 규모에서 각 지역을 연결해 조사연구를 시작하면, 수수께끼가 서서히 해명되리라 기대된다. 언젠가는 마다가스카르섬으로 서기 500년 무렵에 도달했다고 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우간다 등에서 나무껍질 베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멕시코의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 몽둥이가 고고학자들이 보아 술라웨시섬에서 출토된 것과 '빼다 박은 것'이란 점 등을 검증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조사 과제로 상정되는 점은 타파용 몽둥이에는 '평소용'과 '특권계급·의식용' 두 종류가 존재(그림4)했을 공산이 높고, 타파 자체의 용도에서도 '평소용'과 '특권계급·의식용'의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 2008년 8월에 필자 등이 행한 일본·인도네시아 합동 현지조사에서 중부 술라웨시에서 발견된 '숨은무늬 모양 가공용 석기 몽둥이'(그림5)를 보유한 일족의 설명에서는 이 숨은무늬 모양은 샤먼용 모자 등에 한정해 쓰였다. 타파 만들기에 쏟은 그들의 에너지와 심오함은 타파를 제작할 때 몽둥이로 나무껍질을 두드리는 소리가 '음악을 연주한다'는 술라웨시의 마을사람 이야기와 연구자의 보고에서 추찰할 수 있다. 장인이 석기를 만드는 단계에서 두드릴 때 나오는소리의 울림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림4 왼쪽: 모양을 새기지 않은 청동제 몽둥이(자바), 오른쪽: 모양을 새긴 청동제 몽둥이(동자바)

 

 

 

그림5 숨은무늬 모양 가공용 석기 몽둥이를 든 할머니(중부 술라웨시)

 

 

 

 

하얀 나무껍질의 꾸지나무

 

타파의 원료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서는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를 가장 중시해 왔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타이완 원주민 및 태평양 제도에서 행한 민족학적 조사에서 '흰색' '부드럽고 상질인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꾸지나무를 최고의 타파 원료로 선택한 이유라고 하는 점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 '흰색'이란 특징은 신성함의 상징과 같으며, 종교의식과 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되어 갔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꾸지나무를 특별시하는 흔적은 몇 가지 있다. 특히 궁정 문화를 키운 교토에서는 많이 보인다. 헤이안 시대의 정원으로서 산조三条의 후지와라 사네요시藤原實能(1096-1157) 주택터의 물을 끌어들이는 정원 유구에서 꾸지나무의 열매가 발견된 일이 현지 발굴보고회에서 설명되고, 또 천황의 거처가 있는 교토 어원에는 궁가와 공가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단 점에서 곳곳에 꾸지나무의 식생이 보였을 것이다. 공()의 수호신을 기리는 카미교구上京区의 시라미네白峯 신궁 경내에는 수그루, 고노카와高野川에 걸린 키타조노北園 다리의 옆에는 암그루 꾸지나무 고목을 볼 수 있다. 레이제이케冷泉家에서는 나라 시대부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칠석 행사의 걸교전乞巧奠에서 꾸지나무가 곳곳에서 사용되며, 의식 중에 행해지는 축국은 '꾸지국(梶鞠)'이라 전한다. 에도 시대의 <습유도명소도회拾遺名所図会>(1787 간행) 제1을 보면, 거리를 연이어 걷는 사람들의 선두에는 칠석의 조릿대 가지에 큰 꾸지나무의 잎이 장식되어 있었다. 

 

집안의 문장에도 꾸지나무의 잎이 보이는데, 전국에서 1만 남짓한 스와타이샤諏訪大社의 상사上社, 하사下社의 문장은 꾸지나무의 잎이다. 유래로 <아즈마카가미五妻鏡>의 지쇼治承 4년(1180) 9월 10일 조에 "꾸지나무 잎 문장의 예복(直垂)을 입고, 흰 바탕에 얼룩 빛깔의 말에 올라탄 용사 하나, 겐지源氏 씨의 편이라 부르고, 서쪽을 가리켜 채찍을 높이 들었다. 이쪽 편에 대명신大明神의 계시가 내리는 곳이니 어찌 의지하지 않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뒤에 기술하겠지만 옛 자바 문학 안에 힌두교 성직자가 꾸지나무를 점유하고 재배하며, 꾸지나무로 만든 나무껍질 옷(Daluwang)을 입었던 일 등이, 연대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자바어 연구자 피죠는기술했다. 

 

꾸지나무 나무껍질의 흰색을 신성시하고, 특별히 다루는 가치관과 전승은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렸던 세계 각지에 널리 존재한다고 상상된다.

 

 

 

인도네시아의 타파

 

 

 

인도네시아의 타파가 세계적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연속적인 사용 흔적이 더듬어지는 '살아 있는 화석'인 것만이 아니라, 나무껍질 베 및 나무껍질 종이로 이용하는 것이 모두 매우 활발했단 점에 있다.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사람들이 지녀 왔던 나무껍질 베 문화는 술라웨시에서 기술적, 정신적으로 크게 비약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능적인 라켓 모양 석기 몽둥이(양면에 줄이 새겨져 있음)를 세트로 사용하는 양식이나, 빛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판연히 보이지 않는 '숨은무늬 모양 투명 무늬'를 나무껍질 베에 가공하는고도의 발상 등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나중에 하와이의 나무껍질 베에 가장 멋지게 개화하는 복잡한 '숨은무늬 모양'이나 '날염'의 뿌리는 술라웨시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때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지녀 왔던 타파의 기법은 섬에서 섬으로 옮겨가는 기술적 흔적이 연속되지 않고, 수천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것은 우연히 한 척의 작은 카누가 표착했다고 하기보다, 여러 집단이 의식적으로 목적지에 다다랐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작은 카누로 수십 일 걸려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던 고대의 항해기술과 그들이 사납게 놀치는 바다에서 미치고 굶어죽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녔단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편, 힌두교 문화에 의거하는 동자바의 마자파힛 시기의 유적에서는 다양한 사슴뿔로 만든, 또는 아름다운 장식이 조각된 청동제 몽둥이가 발견되고 있다. 당시 그곳에서는 타파 제작이 매우 성행하여 중히 여겼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 흐름은 자바의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등 와양 제작 집단에 계승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술라웨시의 기능적인 석기 몽둥이와는 완전히 모양과 소재가 달라 다른 경로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발리섬의 힌두교 성직자의 두건(케투), 어깨띠(슬른당), 허리띠(이깟 삥강) 등의 의복과 종교 달력(그림6), 또는장례(응아븐)할 때 사자를 감싸는 천(카장)용으로 울랑타가라고 부르는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가 전통적으로 쓰이며, 발리섬에 남겨진 힌두교 문화 가운데 마자파힛 시기 등에서 발견된 타파 전성시대의 유풍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앞에 기술했던 자바어 사전 등을 편찬했던 네덜란드 사람 피죠(Theodoor Gautier Thomas Pigeaud, 1899-1988)는 자바의 9세기 무렵의 서사시 <카카윈 라마야나>, 12세기의 <보마 카우야> <수마나산타카>, 다루왕의 원료가 되는 나무(꾸지나무)는 성직자의 집 주변에 심었다는 기술이 보이는 13세기의 <살마 다루와>, 다루왕의 생산, 판매, 사용은 독점적으로 성직자가 행하고, 판매의 세금은 성직자를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기술이 있는 14세기의 <라자파티군다라>, 15-16세기의 <단투 판게라랑>을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다루왕)에 관한 기술이 발견되는 자료라고 한다. 

 

 

그림6 힌두교 성직자가 쓰는 나무껍질 종이 달력(발리섬)

 

 

 

하지만 인도네시아에 힌두교를 전했던 인도에서는 나무껍질 베 문화가 존재했던 흔적은 보고되지 않는다. 이들은자바어 문헌 안에서만 이해해야 할까?

 

그뒤, 인도네시아에서는 힌두교에서 이슬람교로 대전환을 했는데, 나무껍질 종이 제작 기술 집단은 계승되어 매우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과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 남아 있던 수백 권의나무껍질 종이 문서는 모두 이슬람교의 성전과 교의에 관한 내용인 점으로부터, 엄청난 나무껍질 종이가 이슬람교 문화의 영향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에 있는 나무껍질 종이 제조는 1970년대에 종언하고, 현재는 반둥 근교의 가룻에 한 가족만이 그 전통을 남기고 있다.

 

당시의 꾸지나무 소비량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아마 한 권이 200쪽인 나무껍질 종이 문서를 제작하는 데에 뿌리 근처가 지름 20cm 정도의 어린 나무 25그루 정도가 쓰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1개소에서 연간 100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2500그루의 꾸지나무가 필요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이슬람 종교 집단의 세력을 생각하면, 나라 전체에서는 연간 수만 그루의 꾸지나무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묘한 점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는 임업과 식물의 일본인 전문가에게 들으면, 꾸지나무를 본 사람은 전혀 없는 데 가깝다. 나 자신도 각지를 돌아다닐 때 집요하게 조사했던 경험으로부터, 꾸지나무를 발견한 건 가룻 주변과 중부 술라웨시뿐이었다. 또한 인도네시아에서는 타파 제작자나 보고르 식물원의 사람들에게 들어도, 꾸지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사람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이나 타이완에서는 꾸지나무의 수그루, 암그루 어느쪽이나 꽃의 개화는 왕성하고, 많이 결실한다. 놔두면 쭉쭉 자손을 늘려 빈땅을 점거할 만큼 생명력이 강한 나무라고 생각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위화감이 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꾸지나무는 암수딴그루 나무이면서 태평양 제도에서는 수그루밖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보고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는 단순히 풍토의 문제일까? 

 

나카오 등에 의한 조엽수림의 대표적인 나무라고 이야기된 꾸지나무이지만, 아직 해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이 나무 무슨 나무?

 

정창원의 일본 종이를 조사연구한 쥬가쿠 분쇼寿岳文章(1900-1992)는 <정창원의 종이>에서 똑같은 뽕나무과의 꾸지나무와 닥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식물학적으로 꾸지나무와 닥나무는 다음의 여러 점, 곧 전자는 암수딴그루, 턱잎은 대형이고, 수꽃 이삭이 길게 늘어지는 데 반해, 후자는 암수한그루, 턱잎은 작고, 수꽃 이삭은 구형인 점에서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혼동되어, 정확히는 꾸지나무를 의미하는 한자인 楮나 穀이 닥나무에 해당되는 것처럼 된 것은 잎의 모양이 비슷한 점과 열매를 맺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질긴 껍질이 제지의 원료가 되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정창원 문서의 사경용지 그밖의 항에 자주 나타나는 곡지穀紙는 이미 닥나무와 꾸지나무가 혼동되어 버린 뒤의 용어이며, 엄밀하게는 닥나무의 종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정창원 문서가 형성된 나라 시대에 꾸지나무와 닥나무의 혼동은 이미 일어났다고 쥬가쿠는 지적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이 혼동은 한자 문화권 전역의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켐벨, 시볼트 등에 의해 일본에서 채집되어 학명이 명명된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나 잡종 닥나무, 덩굴 닥나무, 닥나무. 꾸지나무에는 Broussonetia papyrifera Vent., 잡종 닥나무에는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덩굴 닥나무에는Broussonetia kaempferi Sieb.라고 학명을 붙이고, 그리고 혼란한 와중에 다가오는 것이 닥나무이다. 예를 들면, 2004년 1월에 발행된 <식물 레퍼런스 사전>(일외日外 어소시에이트)에서는 닥나무를 덩굴 닥나무의 별명으로 다루고, 1997년에 발행된 <원색 목야식물 대도감>(북륙관北陸館)에서는 잡종 닥나무의 항은 없고 닥나무를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라 하고 있다. 2004년에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 식물종자도감>(도호쿠 대학 출판회)에서는 닥나무라고 하여 Broussonetia kazinoki x B. papyrifera를 들고, 꾸지나무와 잡종 닥나무의 교잡종으로 게재하게 되어 최근의 식물사전, 연구서는 이 학명을 사용하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고육책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식물학이란 좁은 영역에서의 독주는 아닐런가?

 

왜냐하면, 닥나무의 지방 이름으로 <일본 식물방언집성>(야사카쇼보八坂書房)에서는 다른 단어에 비하여 매우 많은 110개의 단어가 채집되어 있는데, 이것은 닥나무의 폭넓고 깊은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간파할 수 있다. 닥나무가 외래의 꾸지나무와 일본 고유의 잡종 닥나무의 교잡종이라 하는 설을 검증하려고 고고학의 분야에 눈을 돌리면, 꾸지나무의 열매라고 동정된 보고사례가 조몬 만기의 야하타자키八幡崎 유적(아오모리현 히라카와시平川市) 등에서 나오고 있다. 꾸지나무가 일본으로 이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00-3300년 정도 전인 조몬시대 후기인 것일까?

 

슬슬 나라 시대에 이미 혼동이 시작되었던 뽕나무과의 꾸지나무, 닥나무 등에서의 혼란을 해결하고자 관계된 전문가들이 계책을 강구하기를 바라는데, 주목되는 시행도 있다. 지금까지 베와 종이의 식물섬유를 분석, 동정하는데에는 현미경 관찰을 행하고, 시약으로 섬유를 염색하여 판별하는 등의 방법을 채용해 왔다. 일본의 국보나 중요문화재의 종이 분석도 이와 같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관찰자의 경험과 주관적 판단에 강하게 좌우되는 경향이 보인다. 몇십 년 뒤에 다른 관찰자가 다른 판단을 내리는 일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에 널리 이용되어 왔던 뽕나무과 식물 가운데 속 수준의 판별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면, 꾸지나무와 닥나무의 구별은 신의 조화라고 한다. 그 어려움에 광명을 비추는 것이 DNA 추출 분석법이다.이미 몇 가지 나무껍질 베와 고문서에서 DNA의 추출과 핵석이 행해지고, 지금으로부터 천년 이상 전인 헤이안 시대의 고문서에서도 유전자 정보가 추출·해석되어 속 수준의 객관적인 판별에 길을 열 것이다. 반드시 혼란을 극복하는 유력한 수법으로, 간편하게 사용하도록 이 분야에서의 조사연구가 높아져 가기를 바란다.

 

 

 

 

종이와 풍토

 

나카오의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재고하는 데에 중요한 지적이, 종이에 사용되는 식물원료의 지역 구분에 대해서이다. 나카오의 논고에 있듯이, 중국의 전한시대 등에 출토된 종이 유물의 원료가 '초본성 질긴 껍질 섬유'의 대마, 모시이며, 그 초본성 질긴 껍질 섬유를 사용하는 추세는 아라비아부터 유럽으로 퍼져 갔다. 다른 한편, 히말라야부터 일본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꾸지나무, 닥나무 등 '목본성 질긴 껍질 섬유'를 종이의 원료로 삼아 왔는데, 더 우수한 팥꽃나무과의 서향, 삼지닥나무, 안피나무 등의 '관목성 질긴 껍질 섬유'가 선출되어 갔다고 한다.지역, 풍토에 따라 수확할 수 있는 식물에 차이가 있으며, 이와 같은 구분이 이루어졌다. 

 

종이를 사용하는 쪽에서 생각하면, 이 각각의 '종이'로서의 차이는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제지 이후에 경전용 등으로 가공이 이루어진 '두드린 종이(打ち紙)' 공정 등, 원료만의 차이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있어 어렵다. 가장 오래된 일본의 종이 수집품인 정창원의 '일본 종이' 중에는 삼을 원료로 하는 것, 닥나무를 원료로 하는 것, 안피나무를 원료로 하는 것 등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927년에 찬수된 <정희식廷喜式>에 관영조지소인 지옥원紙屋院에서 하는 제지 공정이 상술되는데, 그 안에서도 삼(대마, 모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음)은 닥나무, 안피나무와 나란히 당시의 주요 원료의 하나라고 되어 있었다. 원료식물의 차이에 의한, 재단을 짧게 하고 길게 하는 등의 제지 공정에서 처리법의 차이는 명확하게 있었다. 나카오의 논고 가운데 기둥이 되는 바이지만, 그 긴요함이 되는 조엽수림 지역의, 묻혀 있던 오래된 문화층과도 관계되는 정보는, 앞에 기술한 다드 헌터 등 선인들의 조사연구에서 결여되어 미완성의 부분이 되었다. 초본성, 목본성 또는 관목성 질긴 껍질 섬유라는 풍토와 사람에기인한 원료의 차이에 의하여, 그것을 받아들여 누렸던 지역의 문화와 감성에 어떠한 변화가 생겨 갔을까? 새로운, 조엽수림대에서의, 종이 문명의 기원에 빛을 비추는 옛 문화층의 탐색도 포함된 조사연구를 계속해 가야 한다는 것이 현상이다. 

 

제지법과 크게 관계되는 것이 필기구일 것이다. 털붓을 사용하고, 펜을 사용는 등의 차이에 의하여 종이의 마감법은 크게 변한다. 옛날부터 '쓰는 것'과 '쓰여지는 것'의 상성은 중요하여, 필기구는 문화를 반영해 왔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신대륙 도달이 부정적으로 다루어져 온 상황에서, 마야 시기의 조각이나 상에 새겨졌던 '털붓'(그림7)은 동양에서 발견되는 것과 꼭 닮았기에 놀랍다. 마야 시기에 사용되었던 종이는 나무껍질 종이(아마테 종이)이며, 돌의 돋을새김이나 부장품에 '종이'의 사용을 보여주는 흔적이 점점 발견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조엽수림대에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탐구하려면, 3500년 정도의 시간축을 더듬어 찾아가는 술라웨시섬과함께 그리스도 탄생 무렵으로까지 '나무껍질 종이'의 제작, 또는 사용 흔적을 더듬어 찾아갈 확률이 높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정보는 힌트로 참고가 된다. 왜냐하면 습윤 기후의 조엽수림 지역에서 2000년 이상 전의 묻혔던 옛 문화층의 유물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림7 마야의 티칼 유적에서 출토된 뼈조각에 새겨진 털붓을 쥔 손(후고전기). Michael D. Coe, 2001 The MAYA 124쪽. 도판 68 Thames&Hadso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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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tomologytoday.org/2014/08/25/study-finds-honey-bees-originated-from-asia-not-africa/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연구진이 꿀벌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인류와는 달리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해서 세계 여러 곳으로 이동하여 확산되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이와 달리 꿀벌은 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약 30만 년 전에 유럽과 아프리카 쪽으로 빠르게 퍼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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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3장 

자연과학에서 본 벼의 기원    이시카와 류지石川隆二



벼의 기원과 분류


일본에 퍼진 벼


일본인인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쌀은 벼, 학명으로는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를 재배하여 수확한 것이다. 세계에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즉 고위도 지대부터 적도 바로 아래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재배 벼는 처음부터 이처럼 전 세계에서 재배되던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에서 불과 120년 전에야 간신히 늘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오모리현의 이나카다테田舍館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논터가 발굴되어, 일본 벼농사 역사의 매우 초기에 본국 최북단에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도 논의 아래를 파서 야요이, 고대, 중세와 단속적이자만 논터를 발굴하고 있다(그림 3-1). 곧, 벼는 1900년 정도에 걸쳐서 쓰가루津軽 지방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 아오모리현으로 건너와 있던 벼는 열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흔적이 식물 유체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의 도호쿠 재래종에 그와 같은 성질이 없기 때문에, 서일본에서 여러 번 벼를 가지고 들어온 뒤에야 간신히 홋카이도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벼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림3-1 아오모리현 마에가와前川 유적의 논터. 야요이, 고대, 중세의 복합 유적이며, 중세의 논터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온 연대는 아직도 논쟁거리이지만, 일반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900년에서 2500년 전이라 한다. 벼가 북진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중에서 홋카이도에 가지고 들어와 정착할 수 있었던 벼 품종은 꽃이 피는 시기에 까락이 붉어져서 '아카게(赤毛)'라고 불렀다. '아카게'는 자연 돌연변이가 자주 발생하여, 다양한 형질을 가진 계통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다. 재배에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로는 알곡의 끝에 있는 돌기인 까락이 사라진 '방주妨主'가 유명하다. 이 경우는 두 가지 유전자를 잃어서 '털'이 없는 벼가 되었다(그림3-2) 이와 같은 특수한 벼도 포함해 일본 재래종의 대부분은 일본형(자포니카)라는 품종군으로 분류된다.



그림3-2 벼의 북진에 도움이 된 재래종 '아카게'(좌)와 '방주'(우)



 

두 가지 품종군


재배 벼 전체를 보았을 때, 일본형과 대치되는 것이 인도형(인디카)이다. 이들 집단은 다양한 성질에서 다른 것이 알려져 있다. '왕겨털(稃毛)'이라는 알곡의 끝에 생기는 털의 길이를 비교했을 때 인도형은 짧은 부모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그림3-3). 일본형에서는 북상할 만큼 왕겨털이 길어지는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림3-3 알곡의 표면에 생기는 왕겨털. 북으로 가는 만큼 길어진다. 왼쪽은 일본형 품종, 오른쪽은 인도형 품종.




또한 화학약품인 페놀 용액(1.5%)에 알곡을 3시간 정도 담그어 보면, 품종에 따라 알곡과 용액이 검게 변색하는 것이 있다(그림3-4). 이 반응을 '페놀 반응'이라 하며,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지는 Ph라고 이름을 붙인 유전자가 제어한다고 알려져 있다. 검어지는 경우는 우성 유전자가 작용하고, 인도형 품종에 많이 보인다. 착색하지 않는 경우가 일본형이다. 다만 반드시 모든 일본형이 착색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카 히코이치岡彦一 박사(1916-1996)는 페놀 반응에 더하여 왕겨털 길이와 다음에 기술하는 새싹의 염소산칼륨 감수성 정도라는 세 가지 형질을 조합하여 품종군을 식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Oka 1988). 



그림3-4 알곡의 페놀 반응. 왼쪽의 알곡을 페놀액에 담그면 +형의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품종은 검어진다(오른쪽 위).



염소산칼륨 용액은 강한 독성을 나타내는 산화제이다. 벼의 새싹을 염소산칼륨 용액을 써서 기르면 곧 죽어 버리지만, 일본형 품종은 죽기까지 시간이 길고 '감수성이 약한' 경향을 나타낸다. 피해도(감수성)이 높은 쪽이 인도형인 경향이 강하다(그림3-5).



그림3-5 새싹의 염소산칼륨 반응. 일본형(좌)은 감수성이 약하기에 인도형(우)보다 죽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외의 형질에 대해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 품종군으로 나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재배 벼에서 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는 (1)하나의 모집단에서 재배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다른 집단으로 나뉘었다, (2)같은 야생종 집단 안에서 다른 형질을 가지고 있던 계통에서 각각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재배화되었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을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유적의 현상을 보는 한, 동아시아(현재의 장강 유역)에서 재배화된 일본형이 그 뒤 남하한 민족에 의하여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현지의 야생종과 만나면서 인도형의 재배화에 관여한 것이 추측된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다양한 유전자의 계보를 추적하여 밝힐 수 있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차이를 밝히는 일은 재배 벼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 벼에서는 앞에서 서술했듯이 형질의 변이가 명료하지 않고, 동질효소라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변이에서나 겨우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에서 보이듯이 유전적으로 달랐던 계통임이 보고되었다(Morishima and Gadrinab 1987).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야생 벼의 생식 영역


재배 벼와 비교해 야생 벼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벼는 오리자속이라 불리는 식물종의 집합(분류)에 속한다. 오리자속을 구성하는 식물종은 세계에 분포한다. 그 가운데 아시아의 재배 벼는 사티바라고 불리는 종에 속하고, 세계의 재배 벼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사티바종에 근연한 루퓌포곤종rufipogon이라 불리는 야생 벼(이하 루퓌포곤)는 열대 도서부(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부터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식물종의 분류는 새로운 유전정보가 더해져 변경된다. 오세아니아에 생식하는 메리디오나리스meridionalis, 아메리카에 생식하는 글루매파투라glumaepatula, 아프리카에 생식하는 바르시barthii 및 롱기스타미나longistaminata는 일찍이 페렌니스perennis라는 종 안의 오세아니아형, 아메리카형, 아프리카형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루퓌포곤은 꽤 높은 임성稔性(꽃가루가 기능하는 것)을 나타내 자손을 만든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사티바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져 재배종의 직접 선조가 되는 야생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상세한 내용도 Oka(1988)에 정리되어 있다.


야생종의 분류는 어렵고, 분류체계 그것이 연구자마다 다른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많은 연구자의 의견이 일치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종명이 변경되기도 한다. 루퓌포곤의 분류에서도 마찬가지 사례가 있었다.


아시아형의 루퓌포곤에는 두 종류의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이다. 한해살이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여러해살이는 종자도 남기지만, 자신에게 그 에너지를 축적해 놓으며 영양번식을 할 수 있는 생활사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해살이는 니바라nivara라는 종으로, 여러해살이 야생 벼인 루퓌포곤과 식별되기도 한다. 한해살이 야생 벼는 우기에 개화하고, 종자를 맺는다(그림3-6). 재배 벼라면 하나의 이삭에서 개화하는 '꽃'(벼에서는 이삭꽃이란)은 1주일 이내에 피고 지며, 모든 이삭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숙한다. 이것을 '생육의 균일화'라 하며, 재배에 필요해지는 현상의 하나이다. 한편, 야생 벼에서는 하나의 이삭 안에 최후의 이삭꽃이 개화할 무렵에는 끝쪽의 종자가 완숙해서 탈립해 버린다(그림3-7). 익은 이삭꽃이 이삭에서 지면으로 떨어지고 후세를 남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건기에는 식물 개체 그것은 죽어 버리지만, 지상에 떨어진 종자는 휴면성을 보이기 때문에 다음 우기가 되기까지 발아하지 않고 '동면' 상태로 살아 남는다.



그림3-6 라오스에서 발견한 한해살이 야생 벼(가운데). 건기에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그림3-7 야생 벼의 탈립성과 생육의 불균일화. 야생 벼의 알곡은 익은 무렵에 탈립하기 때문에, 조사하면서 공책에 올리기만 해도 탈립하기도 한다. 캄보디아에서.



  

한해살이와 비교해 여러해살이는 종자를 만들지만 그 생산성이 한해살이에 비해 떨어진다. 그 대신 남은 종자 생산 에너지를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이용한다. 벼 개체는 한해살이의 재배종이라도 '움돋이'를 뻗어 온갖 마디에서 싹과 뿌리를 뻗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가 죽어도 똑같은 유전자형을 지닌 조직이 살아 남는다. 이와 같은 번식 방법을 영양번식이라고도 한다. 똑같은 번식 방법을 딸기와 감자에서도 볼 수 있다. 여러해살이 벼는 몇 해에 걸쳐 식물 그것이 살아 남기 때문에 건기에도 물을 얻을 수 있는 연못의 중심부 등에 적응한다. 당연히 우기에는 연못의 수량이 늘어난다. 이 자극으로, 예를 들면 뜬벼는 짚(줄기)의 마디 사이를 늘린다. 그 결과 수면 위로 잎을 내밀고, 우기에 늘어난 수량에 견딜 수 있다(그림3-8).



그림3-8 캄보디아 씨엠립 교외의 반데이 스레이에서 학생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여러해살이 야생 벼. 마디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뒷쪽의 연못은 수심 1미터 이상.



발굴 자료와 문서에 의하면, 재배종의 선조종인 루퓌포곤은 장강 유역보다 약간 고위도 지대에서도 생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현재 루퓌포곤의 생식 영역은 중국에서는 하이난섬, 광시 치완족 자치구성, 광둥성, 후이난성, 장시성, 윈난성 등으로 한정된다. 개발과 몇 천 년 단위의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루퓌포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발이 진행된 태국에서는 생식 영역이 꽤나 감소했다. 한편, 일본에서 야생 벼가 생식하고 있었단 기록은 없으며 재배 벼만 대륙과 남쪽에서 섬으로 옮겨져 전파하는 등 여러 경로로 전해져 왔던 것 같다.


루퓌포곤의 남방한계는 남반구의 오세아니아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는 여러해살이 루퓌포곤과 한해살이 메리디오나리스가 생식하며, 지금까지 여러 계통이 수확되어 연구에 이용되어 왔다(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주립 하버리움(식물표본관)에서는 그들의 표본을 보관하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데 분류하면서 기술적인 문제로 메리디오나리스를 루퓌포곤이라 잘못 표기해 놓기도 했다. 형태학적으로는 이삭꽃 꽃밥(수술의 꽃가루를 가지고 있는 부분)의 길이가 2mm 이하라면 메리디오나리스, 4mm 이상이라면 루퓌포곤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게놈 수준에서도 기준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해살이 야생 벼. 유칼립투스가 살고 있는 연못에서 생식하고 있다.




재배 벼와 야생 벼를 구별하다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발견되는 '뜬벼' 성질은 아시아 갠지스강, 이라와디강, 챠오프라야강, 메콩강 등의 큰 강 삼각주 지대의 재배 벼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삼각주 지대는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 그러한 지역에 대응한 뜬벼 재배가 행해진다. 그럼 재배종에는 없고, 야생 벼에서만 볼 수 있는 형질은 무엇일까?


재배종과 야생종에서 서로 다른 형질의 하나로 종자의 크기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야생종은 재배식물에 비하여 수확 대상이 되는 종자와 식용부가 작은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재배, 수확하면서 서서히 큰 것을 선발하여 재배식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생 사과와 재배 사과에서는 10배 정도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도 재배 벼에 비하여 작은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어 루퓌포곤과 사티바를 비교하면 사과처럼 극단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그림3-10). 중국의 강소성 농업과학원의 탕릉화湯陵華 교수는 이 이유를 야생 벼도 재배 벼와 공존하여 종자가 대형화되는 유전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실제로 재배 과정에서 벼의 종자는 어떠한 변화를 나타내 왔을까? 지금도 그것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



그림3-10 야생종과 재배종 알곡의 크기. 왼쪽부터 루퓌포곤, 재배 벼인 인도형, 재배 벼인 열대 일본형. 야생 벼의 크기는 극단적으로 작지 않다.



중국의 유적에서는 연속적인 퇴적층에서 방대한 양의 볍씨를 얻을 수 있다(그림3-11, 3-12). 그와 같은 유물과 현재의 재래 야생종의 종자에 기초하여 탕 교수는 대략 70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종자의 크기 변천을 조사했다. 그 결과, 볍씨는 재배화 과정을 거치며 세로 4mm, 가로 2mm 정도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세로의 크기만 비교하면, 중국 재래 야생 벼는 700년 전에 이용되었던 '고대의 벼'보다 오히려 현대의 재배 품종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 7000년 전의 유물 중에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배화와 평행하게 야생 벼의 종자가 대형화하며 살아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3-11 강소성 고우高郵, 용교장龍蛟莊 유적에서 출토된 7000년 전의 탄화미. 탕릉화 교수 제공.



그림3-12 강소성 고우, 용교장 유적에서 출토된 5000년 전의 탄화미. 현재의 야생 벼보다도 작다. 탕릉화 교수 제공.




종자의 색과 재배화


종자의 색은 어떨까? 볍씨의 색은 바깥의 세포층(자세히 말하면, '열매껍질'이라고 부르는 표면의 세포층과 그 안쪽에 있는 배젖을 보호하고 있는 '씨껍질'이라고 부르는 세포층)에 착색이 있는 유형과 착색이 없는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는 모두 붉은색인데, 재배종에서는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이다. 이 형질의 차이는 착색에 관한 우성 Rc 유전자에 의하여 지배된다. Rc 유전자가 Rd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면, 종자 표면에 균일한 착색을 가져와 한결같은 붉은색 겉모습을 나타낸다. 또 Rc 유전자는 단독으로도 작동한다. 현미가 부분적으로 붉은 반점을 나타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그림3-13).



그림3-13 현미에서 보이는 쌀알 색의 변이. 왼쪽부터 RcRd형의 붉은쌀인 대당미大唐米(가고시마 토종) 및 아오모리현의 토종 적제赤諸. RcRd형의 붉은 반점 및 Rc형의 흰쌀(일본청日本晴)



흰쌀은 이들 착색층에 색소가 없어져서 생긴다. 요즘 연구에서 착색의 원인인 Rc 유전자 자체의 분자구조를 해명해(Sweeney 외 2006, Furukawa 외 2007) 흰쌀은 Rc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한 열성의 Rc 유전자로 변화한 것이며, 그 분자구조를 붉은쌀 계통의 그것과 비교하면 Rc 유전자 내부의 염기배열의 일부가 결실欠失되어 흰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게다가 인도형, 일본형의 품종을 막론하고 흰쌀은 똑같이 결실을 가지고 있었다. 야생 벼는 모두 붉은쌀만 있기 때문에, 재배 과정에서 흰쌀의 재배가 일원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붉은쌀의 성질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내부 배열을 바탕으로 재배종 가운데 붉은쌀을 비교한 바, 두 종류의 집단(A 및 B)으로 나뉘었다(그림3-14). A집단은 인도형의 붉은쌀과 모든 흰쌀로 구성되어 있다. B집단에는 일본, 한국 및 중국의 붉은쌀 품종이 포함된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붉은쌀에는 A집단도 있지만, 그들은 중세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인도형 품종(대당미)이다.



그림3-14 Rc 유전자 내부의 SSR 다형. A집단은 흰쌀 및 인도형의 붉은쌀, B집단은 일본형의 붉은쌀이 나타내는 유전자형이다.  



대당미는 애초 점성도占城稻라고 하여 11세기에 점성국占城國에서 복건성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벼와 계보를 같이한다. 문헌에 의하면 송나라의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년)에 작물의 다양화를 위하여 가뭄 저항성이 있는 조생종으로 황무지에 도입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중국의 메벼 계통이 되었다(寶月 1993). 이와 관련하여 점성국은 힌두교를 믿으며 지금의 베트남 중부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고대국가인데, 갠지스강 유역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중세에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대당미의 대부분은 붉은쌀로서, 밭벼로도 논벼로도 심어서 재배할 수 있는 특수한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유전적 형질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을 보이고 있다(Ishikawa 외 2002). 대당미는 동아시아 독자의 품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1) 야생 벼는 원래 모두 붉은쌀이며, 재배 과정에서 흰쌀이 되는 돌연변이가 한 계열만 발생했다.

(2) 재배 벼에는 흰쌀과 두 종류의 붉은쌀이 포함되어 있었다.

(3) 흰쌀과 A집단의 붉은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남하하여, 인도형이 성립하는 데에 관여하여 흰쌀 유전자를 후세의 벼에 건네주었다. 

(4) A집단의 인도형 붉은쌀인 점성도가 중국에 도입되어, 이윽고 일본에도 대당미로 건너왔다.

라고 할 수 있다. B집단에 속하는 일본형 붉은쌀과 인도형 붉은쌀이 같은 붉은쌀 유전자에서 파생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유전자 전체에 걸친 염기배열에 따른 부분상동성을 밝히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의 야생 벼에만 A 및 B 집단의 붉은쌀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붉은쌀의 성립이 다원적이었다는 점, 중국을 기존으로 두 방향으로 벼가 전파되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가 말하는 벼의 기원


인도형과 일본형은 같은 기원에서 성립한 것인가?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배열은 일정 비율로 돌연변이를 발생시켜, 유전암호로 정보를 담당하는 네 종류의 염기(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가 자리를 옮겨 다닌다. 선조가 똑같은 두 가지 자손에서 같은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비교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40만 년 전에 분화했다고 산출한 연구자가 있다(Zhu and Ge 2005). 유적 등에서 추정되듯이 벼의 재배가 시작된 것이 빨라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으로, 40만 년 전에 재배 품종이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있었다고 하는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또한 게놈 안의 네 가지 유전자만으로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다양한 형질로 식별되는 인도형과 일본형은 유전적으로도 고도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특수한 영역의 염기배열로부터 산출된 분기 연대라고 한다면 타당한 분기 연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예는 DNA의 분화와 품종 분화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의 전형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SSR이란 염기의 단순 반복 배열은 벼 게놈에서 높은 빈도로 발견될 수 있다. ACGT로 구성된 염기배열 안에는 예를 들어 ATATATAT 등이란 2염기부터 4염기의 배열로 이루어진 반복은 근연 품종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반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많다. SSR은 유전자의 위치를 밝히는 연쇄 해석과 품종 식별 등에 이용된다. 그래서 이 SSR을 사용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염색체 구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


벼 게놈은 12번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 염색체의 몇 가지를 횡단하듯이 SSR을 설정하고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반복수 조합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그림3-15). 그래프의 끝에서 끝까지가 제12염색체를 나타내고, 각각의 점이 SSR 표지자의 위치이다. 세로축의 1은 인도형, 일본형 품종에 똑같은 반복수를 나타내는 SSR을 공유하고 있는 것. 0은 같은 품종군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반복수밖에 안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그 결과, 염색체 수준에서 보는 한, 두 품종군은 같은 영역과 다른 영역이 혼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3-15 제12염색체에서 볼 수 있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에 분화된 염색체 영역. X축은 염색체 위치, Y축은 유전적인 분화 정도를 나타낸다.



이 설명으로 인도형은 일찍이 일본형과 교잡하여 유전적 조성의 일부를 교환했지만, 일본형 벼와는 다른 영역을 게놈에 지닌 채로 재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전적으로 다른 영역은 재배화 이전의 야생 벼 집단이 가지고 있던 차이를 나타내고, 40만 년이란 연대도 추정치의 하나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자(흰쌀의 유전자)는 인도형과 일본형 사이에 서로 교환한 염색체 영역에 실려 있다. 또한 공유하고 있지 않은(분화한) 염색체 영역에는 앞에서 언급한 페놀 반응의 유전자를 시작으로, 두 품종군을 특징짓는 유전자가 실려 있다. 그림에 보이는 가장 분화한 영역에서는 지금까지 두 품종군을 식별하는 지표로 이용되어 온 동질효소 유전자 Acp1이 실려 있다. 동질효소는 전기영동이란 실험방법에 의하여 비로소 분리,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 품종군에게 필요한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생존 능력에 관하여 중립이라고 생각되는 동질효소 유전자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할 것이다.


품종군에서 서로 다른 염색체 영역에 보이는 유전자로 페놀 유전자를 들 수 있다. 같은 유전자의 실려 있는 후보 영역을 위에 언급한 방법으로 조사하면, 페놀 유전자 후보로 폴리페놀 산화효소 유전자가 적어도 세 가지 이상 실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PPO1이라 불리는 유전자는 인도형에서는 정상인 유전자 배열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형에서는 그 유전자 배열 안에 트랜스포존이라 불리는 게놈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전이인자가 삽입되어 있었다(그림3-16). 그 때문에 유전자 기능은 손상되어 있다. 단, 일본형에서도 삽입되지 않은 품종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열대 일본형으로, 일찍이 오카 히코이치 박사가 열대도형으로 분류한 품종이다. 페놀 반응은 어디까지나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트랜스포존이란 다른 원인에 의해 기능을 상실했다고 추정된다. 유전자 내부를 보면 염기배열에 다양한 치환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전자가 알곡의 페놀 반응에 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하게 조사해야 하겠지만, 긴밀하게 연쇄하는 것은 연쇄 분석의 결과에서도 밝혀진다. 재래종에서 염기배열에 의한 계통수를 작성해 보면(그림3-17)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별도의 유전자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열대 일본형은 더욱 다르기 때문에 페놀 유전자에는 다원적인 계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림3-16 PPO1에 보이는 트랜스포존의 삽입.



그림3-17 PPO1의 염기배열로부터 작성한 계통수.



이상과 같이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간 유전자를 무수히 게놈 안에 가지고 있으며, 일본형으로 분류되는 품종군에도 서로 다른 기원에서 성립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칼리로 녹인 쌀!?


일본형 쌀은 알칼리액에 담그면 팽윤하여 '붕괴'한다. 쌀은 대부분이 녹말이다. 그 녹말은 아밀로오스,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글루코오스의 결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아밀로오스가 없어지면 찹쌀이 되고, 아밀로오스가 늘어나는 것과 함께 퍼석퍼석한 멥쌀이 된다. 이와 같은 성질도 벼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밀로펙틴 사슬의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는 수용성 녹말 합성효소 IIa(SSIIa)라고 불린다. 실은 이 유전자가 알칼리 붕괴의 정도를 결정하는 유전자이고, 열성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경우 쌀이 붕괴하기 쉽다(그림3-18). 인도형, 열대 일본형 및 야생 벼에서는 우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알칼리 붕괴가 어려운 표현형을 나타낸다. 알칼리 붕괴의 유무는 맛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배열 자료까지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 그 결과, 붕괴하기 어려운 유전자라도 서로 다른 염기배열을 나타내는 품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도 복수의 야생 벼가 재배화되어 각각의 지역에서 특징이 있는 재래 품종군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만 이 경우는 맛과 관련되어서 각 표현형이 선발된 뒤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현재 어느 재래종의 재배지역이 그대로 기원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야생종은 맛으로 선발되지 않기 때문에 각 지역 야생 벼의 유전자 염기배열을 조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맛의 쌀이 기원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3-18 배젖의 알칼리 붕괴성. 왼쪽이 인도형, 오른쪽이 일본형 품종의 배젖을 알칼리액에 담근 것.




엄마는 '하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벼도 세포질의 유전조성(미토콘드리아 게놈, 벼에서는 엽록체 게놈도 포함됨)은 엄마에게서 유래한다. 벼로 말하면, 꽃가루를 제공하는 부분이 아니라 난세포를 제공하는 부분에서 유래한다. 그 때문에 엽록체 게놈을 조사하여 모계열을 밝힐 수 있다.


PS-ID 배열과 ORF100은 엽록체 게놈의 일부로, 치바 대학의 나카무라 이쿠로中村郁郞 박사(이 책의 기고 3 담당)의 연구에 의하여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의 식별에 이용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PS-ID 배열은 시토신(C)과 아데닌(A)의 반복을 포함하는 350염기 정도의 배열이다. 이 mCnA(m, n은 C 및 A의 반복수)의 배열에 인도형은 8C8A 유형, 온대 일본형은 6C7A 유형, 열대 일본형은 7C6A 유형이 각각 특징적으로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원적인 모계열의 존재가 지적된다(그림3-19). 또한 ORF100 근방의 69염기의 결실도 인도형에서 특징적이며, 일본형에서는 볼 수 없다. 일부 야생 벼에서 이 결실을 지닌 것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은 별개의 모계열에서 재배화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카와카미 외(Kawakami 외 2007)는 엽록체 DNA에서 보이는 복수의 결실에 주목하여, 그 가운데 57k 영역의 분자적 다형에서 재배 벼에는 여섯 유형의 모계열이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그림3-19 PS-ID 영역을 포함한 RPL16 유전자의 염기 다형.




탈립성은 하나의 기원


벼에는 이삭꽃을 다는 이삭이 있고, 하나의 이삭꽃 안에 하나의 현미가 생긴다. 이삭꽃 기관에 해당하는 부분이 알곡인데, 알곡이 자연히 이삭에서 탈리脫離하는 형질을 '탈립성'이라고 한다. 재배 벼는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도 재배화에 따라 변화한 유전자이다.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여럿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야생종과 재배종 사이에 다른 유전자가 최근 발견되었다. 제4염색체에 실려 있는 탈립성의 유전자 SH3=SHA는 연구자마다 다른 유전자 이름으로 불러왔는데, 야생종에서 재배종으로 변하는 단계에서 돌연변이한 유전자임이 밝혀졌다(Li 외 2006).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면 곤란한 재배종에서는 비탈립성이란 '재배에 적합한 변이'가 선호되어 남아 있다. 이 과정을 인위 선택이라 한다.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앞에서 기술한 탈립성 유전자 내부에 똑같은 염기 변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이 변이에 의해 비탈립성이 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지금까지 둘은 동일한 변이에 의해 생긴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유전자는 어디에서 변이한 것일까?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은 현대의 중국 장강 유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예를 들어 대략 1만 년 전의 벼농사 유구라고 생각되는 상산 유적 등) 중국에서 초기의 재배 과정에 비탈립성이 획득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신뢰성이 높은 결론이다.



태풍에서 선발된 일본형?


탈립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인도형과 일본형에 차이가 발견된다. 인도형 쪽이 일본형보다 탈립하기 쉽다. 이 점에서는 인도형은 야생 벼와 같은 qSH1이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유전자 이름 안의 q는 양적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 자리(QTL)을 표시하는 기호이며, 탈립성(SHATTERING)의 제1염색체에 실린 유전자로서 그와 같이 이름이 붙여졌다(Konishi 외 2006). 인도형에도 일본형에도 각각 복수의 탈립성에 관련된 유전자 자리가 있는데, 인도형 쪽이 더 탈립하기 쉬운 건 그들 유전자가 지닌 탈립성 효과의 총계에 의한 것임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효과를 나타내는 유전자 자리로 알려진 것이 qSH1이다. qSH1은 인도형에서는 우성유전조차 탈립성 효과를 나타내는 데 반해, 일본형에서는 열성유전으로 탈립이 어려운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형에서는 알곡을 이삭에서 떼어낼 때 이삭의 일부인 이삭가지에서 떨어져 알곡에 붙은 채로 있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그림3-20).



그림3-20 탈립성이 다른 일본형과 인도형 알곡의 아래쪽. 왼쪽 일본형에서는 이삭가지의 일부가 달려 있지만, 인도형은 떨켜가 발달해 있기에 이삭가지가 남지 않는다.




그림3-21 야생 벼 떨켜의 전자현미경 사진. 떨켜가 발달해서 알곡 아래쪽은 세포가 골고루 늘어서 있다.




야생 벼에는 야생 벼에 특이적으로 볼 수 있는 제4염색체의 탈립성 유전자와 인도형에 많이 보이는 제1염색체의 qSH1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전자현미경으로 알곡이 탈립하는 부분(떨켜)을 보면 알곡이 이삭가지와 잘라져 떨어지는 걸 알 수 있다(그림3-21). 이에 대하여 인도형은 qSH1을 가지고 있지만 수확까지는 탈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곡하려 할 때 쉽게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qSH1은 '안이한 탈곡형'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3-22는 인도 시킴주의 탈곡 풍경이다. 수확한 벼를 땅바닥에서 건조하고, 원형으로 소를 걷게 하면서 알곡을 탈곡한다. 옆의 대나무 끝에는 천수국이 걸려 있다. 논의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꽃이 마를 때쯤이면 벼도 마른 알곡을 떨기 쉬워지기 때문에 탈곡의 적기를 가늠하는 데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의 남부에서는 소녀가 이삭을 밟아서 알곡을 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탈곡하는 건 일본의 벼에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림3-22 인도 시킴 지방의 탈곡 풍경




그 이유는 일본형 벼가 열성대립유전자로 작동하는 qSH1을 가지고 있어 '탈립이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리는 데에는 옛날부터 홀태 등의 전용 탈곡기가 이용되었다(그림3-23). 동아시아의 수확 시기는 마침 태풍이 빈발하는 때이다. 태풍의 강풍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탈립이 어려운 성질'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3-23 일본의 농기구, 탈곡기.




인도형의 기원


인도형은 한편으로는 야생 벼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형과 같은 재배화에 관련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 결과의 일면을 보면, 마치 인도형 재배종은 야생 벼에서 재배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을 고고학의 자료와 결부하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다. 


재배화가 동아시아에서 발생하고, 같은 지역에서 선발된 유전자(탈립성 SH3=SHA, 흰쌀 rc)가 일원적으로 생겼다. 그들은 일본형이었다. 그 사이, 비탈립성과 함께 흰쌀 유전자를 가진 계통이 남하하여, 동남아시아 어딘가의 지역에서 '인도형'의 성질을 가진 야생 벼와 교잡되어 인도형 재배종이 성립되었다(佐藤 1996, Dorian and Sato 2008).


인도형 품종으로 생긴 유전적으로 다양한 품종군에는 늦벼와 올벼, 뜬벼 성질과 천둥지기에서 재배할 수 있는 밭벼 등으로 재배되었다. 이와 같은 품종의 일부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11세기에는 중국에 도입되었다. 그 계통에서 중세에 일본으로 대당미로 전파된 점성도는 서일본에서 재배되었다. 그러나 내한성 등의 문제로 동일본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한편, 따로 븕은쌀 계통은 재배화의 유전자인 비탈립성을 가지거나, 다른 계열의 일본형 붉은쌀로 중국, 일본, 한국에 전파되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와타나베 타다요渡部忠世 박사가 연와煉瓦 유적에서 발견한 알곡 모형에서 볼 수 있다(渡部 1977). 동남아시아의 사원 유적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소재의 하나로 건축되었다. 이와 같은 유적이 인도부터 중국까지 인지된다. 벽돌에 섞인 알곡의 크기를 측정하고, 유적의 연대를 역사적으로 밝혀서 벼 알곡 크기의 변천을 추적할 수 있다. 알곡의 크기에는 인도형과 대응하는 가늘고 긴 알곡(늘씬한 유형), 밭벼와 열대 일본형과 대응하는 큰 알곡(큰 크기) 및 일본형에 대응하는 둥근 알곡(둥근 유형)의 세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松尾 1952). 이들 세 종류 알곡 모형의 벼가 10세기에 태국 차오프라야강 유역에서 혼재하며, 시대와 함께 늘씬한 유형이 평야부, 큰 유형과 둥근 유형은 태국 북부와 동북부에 한정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것은 인도형 재배종의 성립과 그 뒤 일본형과 재배 적지가 분화되는 모습을 알려주기에 매우 유의미한 자료이다.



인도형 야생 벼


인도형이 재배 벼와 야생 벼의 교잡으로 생겼다면, 인도형 재배종의 기원지는 인도형의 야생 벼가 생식하는 지역, 혹은 일찍이 생식했던 지역이 된다. 이와 같은 야생 벼는 어디에 존재했을까?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처럼 뚜렷한 유전적 형질의 분화는 야생 벼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엽록체의 DNA에 변이가 생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도 인도형의 염기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PS-ID 배열에 대하여 43계통의 루퓌포곤 변이를 조사했고, 인도형에서 특유한 유형의 배열을 보여주는 것은 4계통(태국 2계통, 인도네시아 1계통, 파푸아뉴기니 1계통)이었다. 이 4계통이 직접적인 선조종이란 건 아니고, 이와 같은 계통의 분포 지역과 유전자 배열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기원지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진화하는 벼 -교잡에 의한 유전자 변환



인도형 야생종과 일본형 재배종은 교잡했을까?


지금까지 재배 형질에 관여하는 탈립성과 흰쌀은 일원적으로 발생했다는 걸 기술했다. 그럼 게놈이 다른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공통의 유전자를 어떻게 하여 가지게 된 것일까?


타다오 씨가 벽돌 안의 알곡 모형의 변천을 자세히 조사했을 때, 한 시기 태국 평야부에서는 다양한 알곡 모형의 벼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존 상태는 나중에 해소된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공존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해외 학술조사에서는 야생 벼만이 아니라 재래종도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지의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재래종의 변이를 조사하기도 한다. 캄보디아도 그러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 나라에 흥미를 가지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뜬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뜬벼가 존재하는 곳에는 수확을 위하여 올벼가 함께 재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벼 품종이 존재하는 것을 '생태 품종(같은 곳의 다른 생활사 습성을 가진 품종군)'으로 분화되어 있다고 한다. 


생태 품종의 대표 사례는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아우스aus 품종군과 아만aman 품종군이다. 또한 똑같은 생태 품종을 캄보디아 똔레샵 호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우기는 5월 말에 시작해 8월에 소강되었다가 9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10월부터는 비가 거의 오지 않고, 가장 건조함이 격심한 때가 3월부터 5월 무렵이다. 재배종인 뜬벼를 필자가 처음으로 본 건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이었다(그림3-24).



그림3-24 앙코르와트



이 마을에는 각종 저수시설과 사원이 앙코르 유적군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여행자가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의 한 변은 1킬로미터 이상이다. 이 유명한 유적을 지나면 거대한 돌로 만든 불상이 서 있는 바이용 사원이 있다. 여기도 주변에 해자를 판 앙코르와트보다 거대한 복합 시설을 포함한 사원이다. 차가 통과할 수 없는 서문을 지나서 30분 정도 걸으면 서바라이라는 인공 저수시설이 보인다. 1020년에 완성된 서바라이는 동서 8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제방을 가진 인조 호수이다. 그 동쪽 끝에 가까워질 때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건 물소였다. 좁은 모래흙의 길을 지나면 벼들이 호수의 주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농가의 사람은 어디에 있지 하고 생각하면, 물에 허리까지 잠기어 벼의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느라 정신없었다. 근처에 떠 있는 배에는 베어낸 벼의 이삭이 실려 있으며 언덕에 올려 말리고 있었다. 말린 뒤에야 물소의 차례가 되어, 농가까지 운반할 것이다(그림3-25, 3-26).



그림3-25 1월에 서바라이에서 볼 수 있는 뜬벼 수확 풍경. 깊은 연못은 뜬벼의 논이며, 농부가 허리까지 잠긴 상태로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림3-26 서바라이의 수확 풍경에서는 물소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사진은 물소에게 지우는 수레.




이처럼 깊은 물 지대에서는 5월에 파종하여 9월까지는 물을 빼는 논 같은 곳에서 모를 기른다. 그 사이에도 재배 벼는 야생 벼와 공존하고 있다. 9월부터 급속히 수량이 늘고, 그 다음에는 물에 잠긴 상태에서 재배가 이루어진다. 물이 적은 때에는 다른 품종을 사용해 거의 같은 장소에서 여러 가지 품종을 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자는 자가채종이 기본이다. 12월에 방문했을 때 벼는 아직 대부분 물에 잠겨 있었다. 새해 무렵부터 차차 이삭이 나와, 꽃이 피고 익으며 수확이 이루어질 것이다. 9개월이나 기르는 뜽벼는 수확효율이 나쁘기 때문인지 현재는 홍수가 일어나는 곳에서만 재배한다. 


이 뜬벼의 특징은 세포질(엄마 게놈)이 일본형이면서 핵 게놈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거꾸로 세포질이 인도형이면서 핵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중간인 특징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뜬벼 재배 품종의 유전적 성질은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뜬벼 성질은 원래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유래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 재배 벼에 도입되어 그 후대의 유전적 분리에 의해 다양한 품종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서바라이의 뜬벼를 재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다(그림3-27). 이와 같은 환경에서 둘의 교잡으로 새로운 성질을 가진 재배 품종이 생겼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조생 인도형 품종의 출현도 이처럼 다양한 품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조생 아우스 품종군은 대당미와 유전적으로 유사하며, 둘도 인도형과 일본형 벼가 교잡하여 생겼음을 알 수 있다(Ishikawa 외 2002). 앞에서 서술했듯이 대당미의 원산지는 점성국인데, 이 나라는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국가였다. 벵골 지역도 당연히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면, 똑같은 재배 벼가 두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림3-27 8월의 서바라이. 위: 논. 아래: 이미 물에 잠겨 있는 논에서는 연꽃과 섞여 있는 야생 벼를 볼 수 있다.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유전적 성질은 캄보디아의 재래종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어느 쪽, 혹은 두 지역에서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다양한 형질 조합을 지닌 개체가 생겨서 인간이 이동할 때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겼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어디에나 정착하는가


벽돌의 알곡 크기 조사에서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한 시기에 태국 중앙 평야의 거의 같은 장소에 존재했는데, 이윽고 몇 세기를 거치며 각지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았다. 그 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라 생각되는 벼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운남성, 부탄 및 네팔 등 표고차가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벼는 고지대에 일본형, 저지대에 인도형, 또 그들의 중간지대에는 둘이 혼재해 있음이 알려져 있다(松尾 1992, 佐藤 1992, Sano and Morishima 1992). 자연식생에는 없는 재배식물이 이처럼 나뉘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필시 표고차에 대한 적응으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농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 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타지에서 가지고 돌아온 재배식물을 재배하여 최종적으로 그 땅에 적응한 것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사례가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귀환자가 가지고 돌아와 재배된 벼 품종으로 '개선凱旋'과 '전첩戰捷' 등이 알려져 있는데, 벼의 질병인 도열병에 강하기 때문에 이들은 일본에 정착했다. 일본에 건너온 대당미도 마찬가지의 경위를 더듬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대당미의 사례에서는 큐슈, 시코쿠 등을 중심으로 서일본에서는 농사지었지만 동일본 칸토우보다 북에 정착한 사례는 없었다(嵐 1974). 이것도 품종이 지닌 적응성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벼는 자연에서 교잡하는가


인도형과 일본형이란 두 가지 품종군의 기원이 교잡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교잡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 선명한 실마리를 주는 것이 '잡초 벼'이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하는 조건에서는 높은 빈도로 둘의 교잡이 발생하고, 그 후대는 탈립성 등에서 통상의 재배종과는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벼에는 있지만 야생 벼에도 재배 벼에도 없다. 이것을 '잡초 벼(weedy rice)'라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재배 농가에는 잘 알려져 있다.


미얀마를 조사했을 때에도 야생 벼가 재배 벼의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북부의 번화한 거리, 미치나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논 지대가 펼쳐져 있다. 논이 열려 있는 곳은 예전의 습지대를 개간했던 곳인 듯했다. 11월은 벼베기의 게절이라서 말라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논과 그 주변은 아직도 축축하여 아침이슬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을 벼베기를 하려는 것 같은 농민과 그를 돕는 젊은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가서 논에 모였다. 그때 우연히 논에서 눈에 들어온 이상한 것이 황금색의 이삭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검은색을 띠고 알곡의 끝에 가늘고 긴 '털'이 달린 야생 벼였다(그림3-28). 논 옆의 둠벙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림3-28 미얀마에서 볼 수 있는 야생 벼. 논 안에 살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건 공동 수확 작업을 하러 가는 현지의 여성들.



현지 사람은 야생 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을까? 들어 보면 되돌아 왔던 건, 지금으로서는 왠지 운치 있는 말 아닌가? 야생 벼를 '신의 벼'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납득했다. 여기는 불교의 나라, 신이라 해도 부처님이다. 파고다(절)이 있으면 맨발로 참배를 한다. 농민들은 '스스로 심지 않았는데 자라 온 벼는 신이 심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야생 벼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도처에 재배 벼와도 혼재하며 자연히 교잡할 기회가 늘어났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는 재배종에 유사하면서도 탈립성을 나타내는 잡초 벼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잡초 벼는 미얀마를 시작으로 부탄과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발견된다. 또 중국과 한국, 일본, 미국 등 온갖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는 야생 벼가 없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교잡에서 잡초 벼가 생겼음이 알려져 왔다. 잡초 벼는 야생종과 재배종이 근접하여 생육하고 있는 지역과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재배되는 지역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듯하다.



재래종에서 보이는 교잡 후대의 자손들


일본의 재래종에도 다양한 교잡의 '흔적'이 있다. 분자표지(단백질과 DNA에 의해 개체를 식별하는 지표)의 개발에 따라 일본의 재래품종의 독자성이 밝혀져, 바뀐 벼가 있다는 것이 점차 알게 되었다. 


초기에 활용딘 분자표지는 단백질의 전하성질 특성으로 동일한지 확인된 동질효소라는 유전자 연구였다. 일본 재래종 중에는 유전적 다양성에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재래 논벼 450 가운데 5계통, 재래 밭벼 200 가운데 5계통에서는 다른 것과는 다른 유전적인 성질이 나타났다. 아시아의 벼와 비교하니, 특수한 벼는 인도형에 대응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른 형질도 포함하면 일본의 재래품종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구별됨이 밝혀졌다.


(1) 전형적인 논벼 품종군=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부족함

(2) 논벼에 가까운 형질을 나타내는 밭벼

(3) 논벼와 유전적으로 분화된 밭벼

(4) 논벼와 밭벼에 공통되는 인도형 품종(대당미)


특히 세 가지 밭벼는 제11염색체에 실린 동질효소 유전자인 Pgd1 유전자형 이외에는 논벼에 매우 유사했다. Pgd1에는 복수의 대립유전자가 알려져 있어, 인도형이라고 판별된 대당미는 논벼 및 밭벼의 주요 품종군과도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형질을 보면, 인도형은 왕겨털이 짧고 가늘고 긴 알곡을 가지며 알곡의 페놀 반응은 +형을 나타냈다(표3-1). 한편 DNA 배열 단편의 장다형 패턴(RFLP)의 해석과 알칼리 붕괴성, 중배축 길이의 해석에서는 밭벼의 주요 품종군은 열대 일본형과 온대 일본형의 중간적인 성질을 나타냄이 밝혀졌다. 세포질의 다양성을 PS-ID에서 보았을 때도 온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6C7A형과 열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7C6A 두 종류가 발견되었다.



집단

품종군

Pgd1

공식수

왕겨털 길이

알곡의 길이-너비 비율

페놀 반응

 +

-

논벼

일본형

인도형

1

3

445

5

0.72±0.19

0.37±0.12

2.09±0.34

2.79±0.16

32

4

413

1

밭벼

일본형

일본형

인도형

1

2

3

26

169

5

0.65±0.12

0.44±0.14

0.34±0.13

2.14±0.16

2.38±0.21

2.93±0.09

5

131

4

21

38

1

표3-1 일본 재래 벼의 형태와 생리형질의 특성과 인도형(I)·일본형(J)으로 분류



이상에서 일본의 밭벼는 열대 일본형이 고위도 지대에 전파되었을 때 온대 일본형과 교잡을 일으키고, 적응형질에는 도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지 않았던 세포질에 대해서는 두 종류가 혼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재래 논벼의 PS-ID는 6C7A형이 점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인도형 품종 특이적인 8C8A형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세포질을 가진 계통의 핵 안 유전자형은 완전히 일본형이었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이 발생한 뒤에 핵형이 일본형이 된 계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동일하게 보이는 재래종에도 꽤 복잡한 과거의 교잡과 유전적인 분리를 거쳐 집단의 구성원이 된 재래종이 있는 듯하다. 


형태와 생리적인 형질로 인도형이라 판별된 집단 안에는 '당법사唐法師' 등 대당미에 속한 품종 이름을 볼 수 있다. 대당미는 황폐한 땅에 강하고, 그 때문에 논벼와 밭벼로 겸용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특징으로 가늘고 긴 알곡, 붉은쌀, 올벼 등을 볼 수 있다. 다만, 붉은쌀이란 성질은 봉납미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인해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재래 논벼와 밭벼에서 발견되는 대당미 관련 품종군의 특성을 보기 위하여, PS-ID와 ORF100 영역의 결실 유무를 조사했다. 인도형 품종군에서는 ORF100의 유전자 주변 영역에서 결실형을 나타내고, 일본형에서는 비결실형을 나타내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결실형의 엽록체는 8C8A형의 PS-ID를 함께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당미 품종군이라 밝혀진 논벼와 밭벼의 계통에는 ORF100 비결실형의 세포질을 가진 계통이 혼재해 있었다. 비결실형(일본형)이었던 세 계통의 핵 유전자형은 인도형이고, 핵과 세포질의 이질적 조합이 확인되었다(표3-2).



페놀 반응

공식수

ORF100

인도형(결실)

일본형(비결실)

+형

17

6

11

-형

19

14

5

표3-2 아우스 품종군에서 발견한 핵과 세포질 유전자형의 불일치성

  


아시아 재래종 벼의 특성과 비교조사한 결과, 대당미는 갠지스강 하류 삼각주 지대(벵골 지역)의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특성을 나타냈다. 똑같은 특징이 캄보디아의 재래종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으로 대당미, 아우스 품종군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이삭이 패는 특성으로 조생이라 선발된 품종이란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다만, 야생 벼에서도 두 세포질형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에 잡종 형성이 야생 벼와 재배 벼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같은 곳에서 적응 분화한 강한 감광성을 지닌 뜬벼는 야생 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조사가 기대된다.



잡초 벼의 보편성


 일반적으로 재배품종은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로 크게 나뉘는 게 사실이지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교잡한 계통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품종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많이 보이는 건 벵골 지역과 캄보디아이다. 재배종이지만 잡초 벼의 유전적 특성도 공통으로 있는 특징이다. 이들 벼의 유전적 특성과 과거에 교잡이 발생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다면 인도형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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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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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기원과 전파에 관한 아주 재미난 연구결과.

중국과 미국의 연구자들이 야생종부터 재배종까지 구할 수 있는 117종의 사과를 입수해 그 유전자를 분석했다고 한다. 
그 결과, 사과의 기원은 톈산산맥 일대이며 실크로드를 통한 인간의 왕래와 함께 서구와 중국으로 퍼졌다고 한다.

실크로드는 비단만 나르던 장삿길이 아니였다.
그리고 만약 성경에 나오듯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일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톈산산맥 일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곳이 인류의 낙원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재밌다.

뱀다리; 요즘 카자흐스탄에도 개발 바람이 불면서 야생종 사과들이 점점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관련 학자들이 그곳의 야생 사과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http://www.nature.com/articles/s41467-017-00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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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종자라 하면 흔히들 몇 백, 몇 천 년 전부터 한국 땅에서 재배해 오던 무엇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요. 아닙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콩과 팥 정도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가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긴 하니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작물, 거기에서 범주를 넓혀 식물은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만 맞으면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씨를 퍼뜨립니다.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작물이긴 하지만 토종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단법인 한국 토종연구회에서는 무엇을 토종이라 정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작물이 해당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잘 '적응'했냐 아니냐의 여부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이를 사람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만약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정착한 뒤 몇 세대를 거치며 나의 후손이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그 몇 세대를 지난 나의 후손은 한국인인가요, 아니면 미국인인가요?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음식도 잘 못 먹고, 한국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보다는 미국인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를 현재 한국에 많이 들어와 있는 동남아의 이주노동자들로 바꾸어 생각해보죠. 그들이 지금 당장은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음식도 잘 못 먹고 그러지만, 이곳에 정착하여 몇 세대가 지났다고 가정합시다. 그 후손들은 어떨까요? 생긴 건 좀 달라 보이지만, 그들은 동남아인일까요 한국인일까요?

토종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작물에게는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 즉 해당 지역의 자연환경에 적응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요소이지만, 사람에게는 그 지역의 문화에 적응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튼 작물이든 인간이든 '적응'의 여부가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식으로 삼고 있는 밥을 짓는 쌀도 저 멀리 외부에서 들어온 작물이고, 한국인의 정체성이라 이야기하는 김치의 재료인 배추와 고추 등도 모두 외부에서 들어와서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외부의,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심정적으로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배척하고 억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부유별이란 말을 남성과 여성에게는 구별이 있어 남성이 위고 여성이 아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말은 남성과 여성에게는 다름이 있으니 그를 인정하고 어우러져 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어울림의 기본인 것 같습니다. 그저 다른 것을 다른 것이라 인식하고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읽어 봅시다. <식량작물의 기원은 세계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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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땅이름(지명)이 참 재미납니다.

땅이름 안에는 역사와 문화 및 지역민들의 자연인식과 전통지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부터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재미난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한국의 지명유래집".
나중에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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