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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지방이나 마찬가지로 거제도의 다락논들도 사람들의 엄청난 노동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다락논이나 계단밭을 만들기 위해서는, 논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나오는 돌이나 주변에서 가져온 돌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축대를 쌓고 또 쌓아 논밭의 형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과정이 필수이다.

이 축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그 엄청난 노력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까지 온몸이 뻐근해진다.


 



산골의 다락논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뒷도랑'을 파서 활용한다는 점이다.

뒷도랑은 산에서 내려오는 찬물을 그대로 논에 들일 경우 벼가 찬물로 인해 생육이 저해되는 걸 막기 위해 물을 한 번 빙 돌려서 햇볕 등으로 데운 다음 논 전체로 퍼지도록 하는 물길이다.

벼를 한 포기라도 더 심으면 심을 수 있는 공간을 과감히 포기하면서까지 뒷도랑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그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공간이 있고 없고에 따라 얼마만큼 수확량에 차이가 나는지는 농사짓는 분에게 물어보거나 과학적 실험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거제에 와서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니면서, 거제도의 이러한 다락논이 현재 하나둘 묵정논이 되거나 싹 밀려 관광 관련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농지와 개발,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관광객들을 위한 농업 경관의 보존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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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all supporting a hillside terrace used for farming outside Petra. 



(Phys.org)—A team of international archaeologists including Christian Cloke of the University of Cincinnati is providing new insights into successful and extensive water management and agricultural production in and around the ancient desert city of Petra, located in present-day Jordan. ongoing investigations, of which Cloke is a part, are led by Professor Susan Alcock of the Brown University Petra Archaeological Project (BUPAP). Ads by Google Tours & Hotels in Jordan - Guided Tours in Jordan for Groups and Individuals, Hotels, Car Rental - www.nawafir-tours.com Using a variety of tools and techniques, including high-resolution satellite imagery and optically stimulated luminescence (OSL) dating of soils, Cloke, a doctoral student in the Department of Classics at UC, and Cecelia Feldman, classics lecturer at UMass-Amherst, have suggested that extensive terrace farming and dam construction in the region north of the city began around the first century, some 2,000 years ago, not during the Iron Age (c. 1200-300 BC) as had been previously hypothesized. This striking development, it seems, was due to the ingenuity and enterprise of the ancient Nabataeans, whose prosperous kingdom had its capital at Petra until the beginning of the second century. The successful terrace farming of wheat, grapes and possibly olives, resulted in a vast, green, agricultural "suburb" to Petra in an otherwise inhospitable, arid landscape. This terrace farming remained extensive and robust through the third century. Based on surface finds and comparative data collected by other researchers in the area, however, it is clear that this type of farming continued to some extent for many centuries, until the end of the first millennium (between A.D. 800 and 1000). That ancient Petra was under extensive cultivation is a testament to past strategies of land management, and is all the more striking in light of the area's dry and dusty environment today. Cloke and Feldman will present their findings Jan. 4 at the Archaeological Institute of America Annual Meeting in Seattle, in a paper titled on the Rocks: Landscape Modification and Archaeological Features in Petra's Hinterland." Their research efforts are contributing to a growing understanding of the city, its road networks, and life in the surrounding area.

AGRICULTURAL SUCCESS FOLLOWED BY ANNEXATION Dating the start of extensive terrace farming at Petra to the beginning of the common era has important historical implications, according to Cloke, because this date coincides closely with the Roman annexation of the Nabataean Kingdom in A.D. 106. He explained, "No doubt the explosion of agricultural activity in the first century and the increased wealth that resulted from the wine and oil production made Petra an exceptionally attractive prize for Rome. The region around Petra not only grew enough food to meet its own needs, but also would have been able to provide olives, olive oil, grapes and wine for trade. This robust agricultural production would have made the region a valuable asset for supplying Roman forces on the empire's eastern frontier." Ads by Google Hydraulic Fracturing - The oil story no one's telling. How to invest in hydraulic fracturing - EnergyandCapital.com/Fracturing In other words, said Feldman, successful terrace farming and water management when Petra was at its zenith as a trading center added not only to the city's economic importance but to its strategic military value as well, because there were limited options in the region for supplying troops with essential supplies. TERRACES FOR FARMING AND DAMS FOR WATER MANAGEMENT on large stretches of land north of Petra, inhabitants built complex and extensive systems to dam wadis (riverbeds) and redirect winter rainwater to hillside terraces used for farming.   Rainfall in the region occurs only between October and March, often in brief, torrential downpours, so it was important for Petra's inhabitants to capture and store all available water for later use during the dry season. Over the centuries, the Nabataeans of Petra became experts at doing so. The broad watershed of sandstone hills naturally directed water flow to the city center, and a complex system of pipes and channels directed it to underground cisterns where it was stored for later use. "Perhaps most significantly," said Cloke, "it's clear that they had considerable knowledge of their surrounding topography and climate. The Nabataeans differentiated watersheds and the zones of use for water: water collected and stored in the city itself was not cannibalized for agricultural uses. The city's administrators clearly distinguished water serving the city's needs from water to be redirected and accumulated for nurturing crops. Thus, extensive farming activity was almost entirely outside the bounds of the city's natural catchment area and utilized separate watersheds and systems of runoff." These initial conclusions from the first three seasons of BUPAP fieldwork promise more exciting discoveries about how the inhabitants of Petra cultivated the outlying landscape and supported the city's population. The presence of highly developed systems of landscape modification and water management at Petra take on broader significance as they offer insight into geopolitical changes and Roman imperialism.

Read more at: http://phys.org/news/2013-01-unearths-terrace-farming-ancient-city.html#j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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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되살아나는 제국의 농법

 

 

 

 

 

 

빈곤, 게릴라, 알코올중독의 악순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잉카제국 시대의 인구는 1000~15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들어온 천연두와 홍역 등에 면역이 없던 선주민들은 잠시도 버틸 수 없었다. 약 100년 동안 인구는 20%로 격감하고, 페루의 인구가 잉카 시대 수준으로 회복한 것은 겨우 196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안데스의 마을들은 고립과 심각한 사회적 소외에 계속 시달린다. 농촌에는 근대적인 설비가 부족하고, 전통적인 유산 제도에 따라 형제들끼리 토지를 분할하기에 수확량이 낮은 영세 농업은 더욱 소규모화 되어갔다. 게다가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는 테러와 폭력의 바람이 불어왔다. 페루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인 팜파치리Pampachiri의 농민 후안 길렌Juan Guillen 씨는 이렇게 말한다.

 

 

“생존이 최우선 과제이고, 농업은 그 다음 두 번째였습니다.”

 

 

게릴라 조직인 ‘빛나는 길’과 페루 군 사이의 전투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많은 가족이 도시로 떠났다. 지역사회는 부서지고 젊은이들도 더 나은 삶을 구하러 리마나 다른 도시로 나가고, 많은 농촌에서는 농사땅이 버려졌다. 지역사회의 조직과 제도 체제도 약화되었는데, 정부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쭉 무시해 왔다.

 

 

그런데 지금 미미하지만 안데스에 다시 희망의 불씨가 켜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계속 도시로 나가고 있지만, 이 10년 동안 몇 가족이 도시에서 산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돌아와 농사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이런 움직임의 발단은 한 사람의 여성 앤 켄달 박사가 잉카 시대의 고대 계단밭을 재건하는 데에 정열을 태워, 1977년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사람들을 먹이는 100만㏊의 농지와 관개 체계

 

 

아직 대학원생이던 켄달 박사가 페루에 처음 방문한 때는 1968년이다. 잉카의 건축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그녀가 처음에 흥미가 있던 분야는 고고학이었다. 하지만 학위논문으로 잉카의 농촌 계획을 연구한 뒤, 농촌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1974년 이후에는 해마다 페루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원래 트러스트는 마추픽추 유적과 가까운 쿠시차카Cusichaca 계곡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려고 설립된 것이다. 쿠시차카 계곡의 발굴 조사를 통해 잉카가 생기기 전부터 골짜기에 많은 사람이 살며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초기의 계단밭과 관개수로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페루에서 가장 처음으로 위라Wira 또는 와리족Huari族이 계단밭과 초기의 관개시설을 구축한 것은 서기 600년 무렵이다. 계단밭을 만든 처음 목적은 토양침식을 막고자 해서였다. 하지만 계단밭과 관개 체계는 잉카 시대에 더욱 세련되게 발전했다. 예를 들면 쿠시차카 계곡에 계단밭을 만든 주목적은 잉카 시대 가장 신성한 작물이던 옥수수를 마추픽추에 공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쿠시차카 계곡에는 겨우 15세대만 자급 농사를 짓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토양학자와 식물학자, 환경학자의 조사를 통해 관개용수와 계단밭이 온전히 기능하던 잉카 시대에는 5000명을 먹여 살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쿠시차카 계곡의 농경지.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오기 이전 잉카제국의 농업 생산성은 매우 높았다. 페루의 안데스 산지에서 고고학 조사를 통해 예전에는 100만㏊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단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안데스 전역에 만들어놓은 수로가 본래대로라면 불모의 급경사인 계단밭에 물을 대어 몇 십만 명에게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쿠스코 주변의 수로 대부분은 몇 세기나 방기되어 무너져 있다. 계단밭의 75%나 버려지고, 쿠시차카 계곡에서도 계단밭의 대부분은 무너지고 방치되어 유적이 되었다. 사람들이 과밀화된 도시로 나가고 있는 것도 안데스의 농사땅이 인구를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계단밭이 기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선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를 당해 괴멸하다시피 인구가 감소하여 계단밭을 유지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회경제적인 변화 때문이다.

 

 

 

 

되살아난 고대의 계단밭

 

 

그렇다면 고대의 기반 시설을 다시 쓰면 어떨까? 고대에 계단밭에 물을 대는 데에 쓰였던 7㎞ 길이의 퀴슈아르파타Quishuarpata 수로를 수복하는 시범사업이 선정되어, 잉카의 유적을 고쳤던 경험이 많은 석공들의 지도로 현지 주민들도 이 일을 함께했다. 수복 작업은 1983년에 끝났고, 쿠스코대학 농업연구소 KAYRA와 협동하여 계단밭도 다시 손보았다. 그 성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용수를 끌어오는 것으로 몇 세기나 불모지였던 약 45㏊의 농경지를 되살리고, 전통적인 안데스의 곡류인 퀴노아quinoa와 키위차kiwicha, 옥수수, 콩 등을 생산해 자급만 하던 현지 주민들이 과잉 생산된 농산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수로를 고치고 있는 현지 주민들. 

 

 

 

우루밤바Urubamba 계곡의 농민들도 쿠시차카 계곡의 성공에 감동하여, 1987년 쿠스코에서 80㎞ 떨어진 파타칸차 계곡 근교의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에서도 트러스트에 지원을 요청했다. 오얀따이땀보에서도 낮은 생산성이 지역사회의 정체와 인구 유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국제개발성(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으로부터 자금 원조를 얻어 여기에서도 수로의 재건이 시작된다. 농민들은 현지의 교사 겸 석공의 지도를 받으며 일했고, 석공은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나아갔다. 재건에는 4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1994년 6.4㎞의 푸마마르카Pumamarca 수로가 부활하고, 약 160㏊의 계단밭에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계단밭을 온전히 경작하면 건기에도 350가족의 2000명 이상이 풍족히 감자를 생산할 수 있다.

 

 

 

키위차. 이름 모를 서양 여성 분께는 죄송. 

 

 

고고학과 전통 기술

 

 

켄달 박사는 말한다.

 

 

“수로는 크고 복잡하고, 서로 경사도 조금씩 다르고 배수구도 달리 있습니다. 적당히 물을 대려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건해야 합니다.”

 

 

현지 주민이 잉카 시대의 전통 기술로 수로를 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켄달 박사가 건축과 고고학에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잉카의 관개와 계단밭을 만드는 기술은 세련되었고, 그 건설에 투입된 노력에도 놀랄 만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약간 경사진 산중턱의 돌담은 농지를 안정시킨다. 강한 햇살로 낮에 달구어졌다가 밤에 열을 방출한다. 그것이 미기후를 만들어 작물을 서리 피해로부터 지킨다.

 

 

계단밭을 재건하는 과정.

 

 

전형적인 건설 방법은 점토질 흙바닥에 현장에 있는 큰 돌을 앉히고, 그 위에 작은 돌과 흙을 겹쳐서 쌓아 나아간다. 그리고 가장 위의 1m는 특별히 잘 고른 좋은 흙을 쌓는다. 그것은 계단밭이 있는 곳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노동자들이 등에 지고 일부러 운반해온 것까지 있다. 이 구조 덕에 계단밭에는 빗물이 천천히 스며들고, 배수성도 좋은 동시에 토양의 보수성과 온도를 높이고 미생물 활동도 촉진한다. 그 결과 싹이 빨리 잘 트고 작물의 생육을 자극하여 수확량을 높일 수 있다.

 

 

“습윤한 환경에서 유기물은 서서히 분해되어 순환합니다. 화학비료는 전혀 쓰지 않으며, 농약은 자연스러운 생물자원 체계를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본래의 유기농법입니다.”

 

켄달 박사는 말한다. 잘 만든 계단밭은 거의 완전한 생물자원 체계로서, 관개를 통해 토지 생산성을 배로 늘릴 수 있다.

 

 

수로의 재건에는 일반적인 다른 개발 프로젝트에서 쓰는 시멘트가 아니라, 점토·모래·돌·선인장과 현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재료만 썼다. 재건에 참여했던 오얀따이땀보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왜 근대적인 시멘트가 아니라 전통적인 점토를 쓰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켄달 박사는 말한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이 지역에서는 전통 기술이 바람직합니다. 점토는 시멘트보다 훨씬 물을 잘 머금고, 습도와 점성을 유지합니다. 시멘트는 지진이 나면 깨져서 산산이 부서져 버립니다.”

 

 

지금은 주민들도 전통 기술을 신뢰하고 있다. 수로 재건 프로젝트를 감독한 현지의 데이비드 카날David Canal 씨는 말한다.

 

 

“우리는 선조의 기술을 재발견했습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보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많은 기술이 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를 거절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방법이 더 알맞다면 우리는 그것을 써야 합니다.”

 

 

앞글에 나온 팜파치리는 약 2500명이 거주하며 목축업이 기간산업인 지역인데, 여기에서도 점토·돌·모래·선인장과 전통 기술을 사용해 수로와 계단밭을 재건하여 농민들의 수입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 프로젝트의 기술자 톰 니칼스Tom Nickalls 씨는 말한다.

 

 

“관개용수 덕에 농업 생산은 급증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하늘바라기(天水) 농업에서는 어느 지역에 농사를 3년 지으면 다음에 약 7년은 묵혀야 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물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렇지만 계단밭에 관개를 하면 적어도 해마다 한그루짓기는 할 수 있고, 때로는 두그루짓기까지 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곧 10년 동안 3번 농사짓는 대신 10~15번이나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트러스트의 더글라스 월쉬Douglas Walsh 씨는 말한다.

 

 

“우리는 농민들이 계단밭에 관개하는 것을 지원하고자 외부에서 가져오는 시멘트와 다른 자재가 아니라 현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재를 활용합니다.”

 

 

시멘트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실어 와야 하고, 값도 비싸 자급 농민들의 수입을 넘어선다. 하지만 고대의 기술을 쓰면 아무것도 들여올 필요가 없다. 프로젝트에 관여한 앞에 나온 농민 후안 길렌 씨도 고대 기술을 이렇게 평가한다.

 

 

“잉카 사람들은 우수한 농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인 농업을 이해하고 있었죠. 스페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이것은 후퇴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농업보다 광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역사회를 활성화시키다

 

 

가장 처음 계단밭이 재건된 쿠시차카 계곡에서는 지역사회 전체가 활성화되면서 주민들이 큰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런 성과는 지속될까? 10년 뒤 이에 대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현지의 학교는 커졌고, 최초의 예배당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도 늘어나 있었다. 젊은이들이 마을에 머물도록 할 유인책도 만들고 있었다. 이 시범사업의 실험을 통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간단하지만 참신한 개념이 등장했다.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지역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최소한도의 기술을 지원하여 가난한 농촌 지역사회도 과제의 대부분을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관개 수로의 재건 및 연구와 함께 트러스트는 실천적인 농촌 개발에도 착수해 왔다. 예를 들면 오얀따이땀보에서는 오랜 세월 토지를 적절히 관리하지 않아 환경이 나빠지고 있었다. 혹사된 토양은 심하게 침식되어 고대에 있었던 숲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농학자와 현장 기술자들은 현지 농민을 대상으로 토양보전 교육을 마련하고, 재래종 나무를 심는 대규모 계획도 세웠다. 1991년에는 처음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공동 연수와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현지 주민들은 마을 근처를 흐르는 강에서 물을 길어오고 있었는데, 그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전염병에 걸렸고 감자 중심의 식사도 빈약하여서 영양불량 상태였다. 프로젝트에서는 샘과 상류에서 오염되지 않은 물을 파이프로 끌어오는 값싼 비용의 상수도 계획을 지원하고, 이전에는 재배되지 않았던 양배추와 양상치, 양파를 생산하는 채소 텃밭도 장려했다. 채소 텃밭은 주로 여성들이 행하고 있는데, 식사의 질을 개선하고 생산물을 판매할 기회를 가져왔다.

 

 

 

 

 

또 오얀따이땀보 주변의 고립된 고지대의 지역사회는 관개용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온실과 환금용 채소밭이 도입되었다. 온실에서는 지금까지는 친숙하지 않은 고추, 토마토, 시금치, 래디시Radish 등의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데, 찾아온 사람들은 온실 안의 기온이 정글처럼 따뜻하다는 데에 놀란다. 다른 지역사회의 마을 사람들이 지원과 조언을 구하고자 오얀따이땀보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그들도 수로를 재건하고 온실을 만드는 기술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트러스트는 공동 연수를 통하여 몇몇 곳의 인근 마을 대표들을 훈련시켰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라고 데이비드 카날 씨는 말한다. 오얀따이땀보의 토지에는 새로이 도시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흡수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런데 쿠시차카 근교의 차마나Chamana에서는 평균수명이 늘어난 결과 새로운 가족은 늘어나지 않고 있다. 계곡의 외부 세계와 닿아, 의료와 가족계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인구는 안정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곤란한 승리의 은혜를 너무나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쿠시차카에서 재건된 계단밭에서 농사짓는 빅토르 파체코Victor Pacheco 씨와 그의 아내는 말한다.

 

 

켄달 박사의 쿠시차카 트러스트 프로젝트는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오얀따이땀보의 상류인 빠따깐차Patacancha에서 거의 10년을 활동해 왔다. 페루 농업성의 혼농임업 활동부국 프로나마체크스Pronamachecs와 협력하고, 농민과 농업 기술자 사이의 토론회를 통하여 계단밭을 재건하는 기술을 보급해 왔다. 또 대규모 선행 연구와 완전한 주민 참여에 바탕을 두고 개개의 가족·교사·지역사회의 대표와도 긴밀히 협동하고, 지방의 기관 및 마을부터 주 정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과도 관계하며, 성별·건강·영양·환경보호·여성의 권한 위양과 폭넓은 프로젝트에 종사해 왔다. 통합 프로젝트는 1997년에 종료되었는데, 이후에는 현지에 NGO가 만들어져 각 지역에서 많은 국제개발기관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다. 켄달 박사는 말한다.

 

 

“지역 개발에는 엄청난 자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데스의 생활을 조사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찾아낸 가장 잘 익은 영역입니다.”

 

 

 

쿠시차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현지 주민들.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다

 

 

하지만 켄달 박사는 과거의 전통을 존중하더라도 감상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한다. 또 트러스트도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2000년 전의 사람들에게 분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아주 적은 선택지밖에 없었고, 잘못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진보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박사의 고고학 연구는 현재의 환경 문제에도 빛을 던져준다. 예를 들면, 오얀따이땀보의 북동부에는 4000년이나 연속해서 농업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있다. 그런데 켄달 박사는 부대밭 농업으로 인한 난개발이 약 1000년에 걸쳐 그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막화했다고 지적한다. 꽃가루 연구를 통해 토양의 회복에 몇 세기나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당시와 지금의 문제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개발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고고학 연구는 미래에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박사는 사회경제적 인자와 마찬가지로, 기후 변동도 초기의 농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알아냈다. 예를 들면 와리와 잉카가 관개 체계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당시의 가뭄이었다.

 

 

고대 잉카제국의 기초를 형성한 것은 농업의 혁신과 그 성공이었다. 그리고 선주민들의 농촌 지역사회가 시간을 들여 어떻게 환경과 대화해 왔는지를 분석하여 우리는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이는 남미만이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확립된 기술은 현대를 아우르는 문제에도 간단하고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Sally Bowen, Bringing the Inca Canals back to life, People & the Planet,18 Apr,2001.

(2) Peruvian farmers learn from history, BBC World Service's Discovery programme, 22 May, 2003.

(3) Andean Farming Communities, Cusichaca Trust Website.

(4) Cusichaca Rural Development Projects, Cusichaca Trust Website.

(5) The Potential of Traditional Andean Technology-Using the Past to Serve the Present, Cusichaca Trust Website.

(6) Beginnings at Cusichaca, Cusichaca Trust Website.

(7) From Archaeology to 'Integrated Rural Development': The Patacancha Project 1987-1997, Cusichaca Trust Website.

(8) Agricultural Terraces and Irrigation Canals, Cusichaca Trust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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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농사법

 

 

 

 

 

 

고대의 선주민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낭만적인 생각은 1990년대에 부수어졌다. 연구를 통하여 수많은 문명이 농업으로 흙과 환경을 파괴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단밭을 만들어 토양침식을 막고, 나무를 심어서 황패해진 흙을 회복시킨 고대 문명도 있다. 바로 잉카이다.

 

 

페루 남부의 쿠스코에서 북쪽으로 12㎞, 해발 3300m의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은 성스러운 계곡의 지류로서 현재도 그러한데, 잉카 시대에도 이 성스러운 계곡은 옥수수 산지로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다. 여기에 마르카코차Marcacocha라고 하는 지름 40m 정도의 작은 호수가 있다. 규모가 작아서 넓은 내만보다 지역에 살고 있는 육상식물의 변화가 민감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호수 바닥의 코어에 있는 꽃가루를 분석하여 4000년 이상에 걸친 환경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빠따깐차 지역의 위성지도. 

 

 

잉카의 혼농임업

 

 

잉카에는 문자가 없다. 환경에 관한 문자 정보는 1530년 이후의 것만 얻을 수 있는데, 원주민이나 스페인 사람이 기록한 스페인어뿐이다. 잉카에 건너온 스페인 사람은 대부분 나무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을 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몇 천 개나 있는 잉카의 콜카qollqa(곡물 창고)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있다.

 

 

곡물창고인 콜카와 그 옆으로 이어진 계단밭의 모습.

 

 

잉카는 스페인에 의해서 1533년 멸망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기 전까지 제국은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앙부까지 퍼져 있으며, 인구는 3000만 명이나 되었다. 또한 잉카는 70종의 작물을 재배하고, 곡물 창고에는 10년이나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정도의 공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10년 분량의 연료용 땔감(lena rajada)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의 땔감이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나무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영국의 벨브로우톤Bellbroughton에 있는 고대 농법의 부활 농촌개발 프로젝트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http://www.cusichaca.org/)의 대표이자 고고학자인 앤 켄달Ann Kendall은 말한다. 연구자들은 잉카에 숲을 보전하는 체계가 틀림없이 있었고, 그것이 급경사의 흙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리마에 있는 프랑스의 안데스 연구기관의 알렉스 쳅스토우-러스티Alex Chepstow-Lusty는 목재를 생산하고 흙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혼농임업을 행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연료나 목재 수요를 충족하고자 숲을 중시하고, 토양이 침식된 땅에서도 잘 자라서 질소를 고정하는 오리나무(Alnus acuminate)를 산중턱에 심어 혼농임업(Alnus cultivation)가 시도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쿠시차카 트러스트의 스태프. 뒷줄 빨간 모자를 쓴 여인이 앤 켄달.

  

오리나무(Alnus acuminate)의 잎과 꽃.

 

 

나무를 심는 전통이 있었던 것은 케추아어의 천연림(sacha)과는 달리 재배되는 나무를 뜻하는 말키mallqui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말키는 죽은 선조를 뜻하는데, 그것은 숲을 지켜온 선조를 숭경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잉카의 사람들은 나무를 높이 평가했다. 잉카 문화에서 땔감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고관의 결혼식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도금된 땔감이 사용되었다. 서민의 결혼식에서는 고기와 코카가 신부의 선물이었는데, 그 이외에 우루트네Urutne라고 부르는 뿌리의 땔감이나 그것이 없으면 재목이 되는 토종 오리나무인 아리소aliso(Alnus acuminata)가 주어졌다.

 

아리소. 

 

 

 

잉카에서 숲은 국유지였다. 혼농임업은 황제 스스로 감시하였고, 위법으로 나무를 벌채하거나 불태우는 행위는 위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말키 카마요크mallki kamayoc 앞에 데리고 간 다음 판결을 내려 죽음으로 처벌했다고 한다.

 

 

잉카인들이 산림자원을 높이 평가하고 나무 심기를 행했다는 것을 실증하는 증거는 뜻밖에도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꽃가루이다. 잉카가 등장하기 이전의 코어에는 함유되어 있지 않았던 토종 오리나무인 아리소의 꽃가루가 서기 1100년부터 갑자기 나타난다. 아리소는 침식된 흙에서 잘 자라는 질소고정종이다. 물론 꽃가루 기록이 있다고 하여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나무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꽃가루 기록을 통해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나무를 모두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자생종 나무는 충매화라서 그 꽃가루가 호수의 침전물에 쌓일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소는 풍매화이다. 그래서 당시 그것이 존재했고, 날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서기 1100년의 마르카코차Marcacocha 호수 퇴적물을 보면, 계단밭과 나무 심기 등의 기술이 중요시되었다는 사실과 토양침식이 격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교란의 지표인 돼지풀(Ambrosia)도 일반적으로 없다. 또다른 증거도 있다. 만타로Mantaro 계곡에서 조금 북쪽에 있는 판칸Pancan 유적의 발굴 현장 근처에 위치한 표고 3600m에 있는 작은 호수 라구나 빠카Laguna Paca이다. 여기에서도 약 7.5m의 완전한 호수 바닥의 코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약 1000년 전부터 아리소가 급증했단 것을 보여준다. 꽃가루는 인구가 급증하고 목재 소비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소의 밀도가 비교적 일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구나 빠카. 

 

 

 

잉카는 그 토지 관리 계획에 따라 일관적으로 나무 심기를 시작한다. 이 조기 관리는 식량과 연료용 나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실용적인 것이었지 생물다양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잉카는 수많은 수종을 심고 수많은 작물을 재배했다. 그리고 나무 심기는 산지 구릉의 흙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쓰였다.

 

 

 

 

숲을 파괴한 스페인 사람

 

 

이와 같이 혼농임업은 안데스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530년대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면서 토지이용은 아주 달라지고, 산림자원은 지나치게 개발되어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뒤에는 계단식 농법도 나빠졌다.

 

 

산림자원이 급감한 것은 역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460년 잉카에게 정복된 완카족Wanka族은 그 뒤 스페인과 동맹을 맺는다. 이때 공급과 관련된 일이 결승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스페인어로도 베껴 적었다. 만타로Mantaro 계곡, 잉카의 행정 단위로는 라구나 빠카 근교의 아턴 과사Hatun Xauxa의 북단으로부터 1533년에 20,0071짐(fardo)의 쪼갠 땔감이 스페인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다. 이 짐의 단위는 인간이 등으로 나를 수 있는 양으로 12~15㎏에 달한다.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기 이전에도 완카족은 자신들의 수요를 채우면서 공물로서 대량의 목재를 잉카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1537년 이 짐의 양이 1,7000으로 뚝 떨어진다. 이는 일정 영역에서 급속히 벌채가 이루어져 산림자원이 급감한 것을 나타낸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겨우 2년 만에 아턴 과사를 떠나 1535년 리마로 이주한 이유의 하나도 계곡에 땔감이 부족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목재의 종류는 결승문자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리나무의 일종인 아리소가 땔감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지역에 심어져 있었던 아리소가 잉카가 정복하고 50년 뒤에는 감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좋은 숯의 원료였기 때문에 쿠스코에 가까스로 도착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후추나무(molle=Schinus molle)를 거의 베어 버렸다. 물론 그들도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자각하여, 1590년 쿠스코 근교의 계곡에 다시 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워 스페인 사람이 감독하여 2400그루를 심게 한다. 하지만 제련, 벽돌, 석회 제조, 제빵, 지중해 식의 난로와 대량의 목재 수요를 고려하면 이 정도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페루후추나무. 

 

 

 

스페인이 정복하고 100년 뒤인 1639년, 파드레 코보Padre Cobo는 인디안 한 세대가 1개월 동안에 쓸 연료를 스페인 사람의 가정에서는 하루에 다 써 버린다고 기술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전략적인 나무 심기로 관리되었던 잉카의 경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비옥한 토지는 스페인 사람에게 돌아갔다. 선주민들은 이전의 땅을 사용할 수 없어 생산성이 낮은 고지대로 쫓겨났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으로 토지 관리의 기반이 파괴되고, 새로운 병으로 급속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고 1세기가 되지 않아 페루의 원주민은 900만에서 60만으로 감소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도입된 가축과 작물로 인해 생물다양성은 사라지고, 토양침식이 진행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연료용으로 급속히 나무를 베어냈기에 아리소도 줄어들었다. 지금 마르카코차Marcacocha 근교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처럼 몇몇 멀리 떨어진 계곡에만 드문드문 남았다.

 

 

 

 

자연을 파괴하고 있었던 고대 농업

 

 

스페인 사람들과 달리 잉카는 환경 관리에는 성공했다. 인공의 계단밭, 관개 체계, 그리고 인구를 관리하여 토양침식을 일으키지 않고 성공적으로 식량을 생산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만 혹평하는 것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잉카 이전에 안데스에 살던 사람들도 똑같은 실패를 범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어의 최하층은 방사선탄소를 통해 1900~4000년 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채프스토우-러스티 등은 이 코어로부터 교란된 토양에 사는 잡초, 목초와 고대인의 주식이었던 퀴노아Quinoa의 꽃가루를 대량으로 찾아냈다. 프레잉카보다 400년이나 전부터 안데스에서는 농업이 성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1000년 전까지의 코어에는 주변의 산에서 암석이나 모래가 반복해서 호수로 흘러들어왔다. 산에서 홍수로 산사가 흘러온 것이다. 이 기록으로부터 당시의 농민들은 초보적인 계단밭밖에 건설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00년 전에는 한랭화와 토양이 나빠져서 계곡의 농업은 쇠퇴한다. 기후가 냉각된 것은 마르카코차에 농업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안데스 산지의 빙하가 확대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퀴노아를 지고 가는 페루의 여인(출처: 연합뉴스).

 

 

 

“그렇지만 토양침식은 계속되었습니다”라고 채프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명아주과(Chenopodiaceae)의 퀴노아quinoa(Chenopodium quinoa)와 같은 작물의 꽃가루는 발견되어도 나무의 꽃가루는 매우 드물고, 1300~1000년 전의 코어에서는 대량의 무기침전물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식생이 모자란 위약한 환경에서 방목압으로 토양침식이 일어난 결과이다. 곧 안데스에서는 쭉 숲이 파괴되어 심각한 토양침식이 문제가 되었고, 토지도 별로 생산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서서히 기온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티와나쿠Tiwanaku/와리Huari 문화가 계곡에 퍼지기 시작했다.

 

 

 

 

자연 파괴형 농업에서 계단밭 만들기로

 

 

서기 1470~1532년에 걸쳐 잉카제국은 혜성처럼 번영한다. 하지만 잉카가 이렇게 갑자기 발전한 이유가 그 우수한 사회조직과 기술에 있다는 설명은 충분히 않은 채 남아 왔다. 그런데 알렉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기후변동에 있다고 지적한다. 호수의 코어를 통해 서기 1100년 무렵부터 호수 주변의 경관이 크게 변하고 농업이 갑자기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초식동물의 똥을 먹이로 하는 절족동물 날개응애(oribatid mites)도 출현한다.

 

 

“날개응애는 라마의 똥을 먹었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응애는 호수 근처에 라마가 방목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토양침식이 급감하고, 옥수수와 다른 작물의 꽃가루나 씨앗도 나타난다.

 

 

“이때가 확실히 토양을 보전하는 기술에 의해 이 지역에서 농업을 행한 조직적인 노동이 시작된 때입니다.”

 

 

잉카는 높은 표고의 지역에 있는 하천과 호수에서 끝없이 물을 끌어들이고자 5.8㎞의 운하를 만들었다고 고고학자인 앤 켄달는 말한다. 그리고 무수한 계단밭도 갖추었다. 서기 1100년의 마르카코차 호수의 퇴적물을 보면 계단밭과 나무 심기 등의 기술이 중요시되었던 것과 토양침식이 격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의 거주지 발굴을 통해서는 계단밭이 건설된 것과 계곡의 인구가 현대의 약 4000명보다 4배로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양의 손실이 적어지고, 많은 사람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켄달 씨는 말한다.

 

 

“계단밭을 만들려고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계곡 바닥과 강바닥에 무너져 내려와 있던 흙을 구릉지로 되돌리고자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켄달 씨는 “몇 천 개의 계단밭을 만들자고 틀림없이 사람들이 얘기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계단밭이 기능하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도 그렇게 말한다.

 

 

잉카의 발전을 뒷바라지한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Epoch))라고 부르는 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는 그 뒤 약 400년이나 이어진다. 그때까지 몇 천 년이나 이어져 왔던 차가운 기후에서는 농사지을 수 없었던 고지대에서도 작물을 재배하게 되고, 산중턱에 계단밭을 만드는 일도 가능해졌다. 안데스의 빙하가 녹아 흘러 관개용수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안데스에서는 새로운 곳에서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농업용으로 계단밭이 마련되고 빙하가 녹은 많은 물로 새로운 관개 체계도 시작했습니다. 모두 기온의 상승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옥수수와 감자가 증산되어 잉카는 광대한 도로망을 정비하는 활동에 종사할 여유가 생기고, 과잉 생산된 식량으로 군의 정비도 가능했다. 1400년 무렵부터 잉카가 에콰도르부터 칠레에 이르는 영토를 급속히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아리소는 이 온난화 기간에 자연히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잉카가 의식적으로 혼농임업에 임하지 않았다고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코어는 적극적인 경영관리의 사례가 될 수는 없다”고 시카고대학 라틴아메리카연구센터의 알란 콜라타Alan Kolata 소장은 말한다. 그렇지만 콜라타도 계단밭 등의 고대 농업이 흙을 보전하고 작물 생산을 높였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나무 심기가 시작된 것도 기후가 차가웠던 서기 1000년 이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르카코차 호수 근처에는 서기 1000~1460년의 전형적인 유적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아리소의 꽃가루가 늘어나는 것과 발맞추어 빠따깐차 계곡에서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잉카는 나무 심기와 같은 보전 활동을 시작하여 나빠진 농토를 복구한 것이다.

 

 

 

 

돌려짓기와 묵히기로 감자의 병을 막다

 

 

그리고 잉카제국에서 행하던 농업도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오기 이전에 제국의 농민들은 토지를 묵히고, 감자를 돌려짓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산악 지역 우추크마르칸Uchucmarcan의 농민들이 행하던 것은 이런 방식이다. 먼저 농지에서 1~3년 농사를 지은 뒤에 8년 이상 휴한지로 놔둔다. 그리고 감자를 재배할 경우에도 그와 함께 안데스의 덩이줄기 종류인 오카oca(Oxalis tuberosa)나 마슈아mashua(Tropaeolum tuberosum)를 재배하고, 다음 1~2년은 울루크ullucu(tuberosum)를 재배하는 것이다(Brush 1977).

 

오카, 마슈아, 울루크.

 

마슈아.

 

 

 

하지만 감자에는 감자 시스트 선충(potato cyst nematode=Globodera rostochiensis)이란 성가신 문제가 있다. 선충은 땅속에서 늘어나는데, 예를 들면 마른흙 1g에 알이 100개나 존재하는 고밀도 상태가 되면 수확량을 60%나 떨어뜨려 버린다. 게다가 숙주인 감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시스트라고 하는 알 상태가 되어 길면 10년 이상이나 남아 있다. 시스트 상태가 되면 농약에도 강하고, 근절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중요하게 해온 것이 농토를 묵히기와 비숙주식물(nonhost)이다. 영국의 로탐스테드Rothamsted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7년 동안 묵히면 시스트 선충을 경제적 허용한계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Jones 1970, Jones1972). 또 비숙주식물을 재배해도 흙속의 선충 밀도가 30~50%나 줄어든다(Brodie 1984). 또 마슈아를 심는 것도 효과가 있다. 마슈아의 뿌리에서 시스트 선충을 쫓는 분비물을 내뿜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잉카와 프레잉카의 농민들은 몇 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농토를 오래 묵히는 것이 감자 재배에 필요한 일임을 배웠을 것이다. 잉카의 묵히기와 돌려짓기는 토양침식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건전한 병해 관리 체계에도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가뭄으로 줄어든 티와나크Tiwanaku 문명

 

 

나중에 잉카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제국이 발전하기 몇 세기 전부터 쿠스코 지역에 살던 수많은 부족 안에 있었음이 그릇의 양식을 통해 판명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제국이 채용한 것이 그들의 토지 경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기의 나무 심기와 자연 재생의 증거와 관련이 있는 서기 1100년에 관심이 있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그리고 잉카가 2대 라이벌인 와리Wari와 티와나크 문명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기후의 온난화와 건조화에 의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온난기에 따르는 기후변화로 티티카카 호수 지역에서는 가뭄이 심해졌다. 티티카카 호수의 퇴적물도 변하여 호수의 깊이가 낮아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고 있으며, 마르카코차 호수의 남동으로 200㎞인 퀠카야Quelccaya의 만년설에서 추출된 빙하 코어의 기후 자료도 이 시기에 얼음이 녹고 강수량이 뚜렷하게 줄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가뭄이 티와나크 문명이 붕괴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티와나크 문명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높은 두둑의 밭 체계였다. 서기 1100년에 이 높은 두둑 밭이 대규모로 버려졌다. 사람들은 토지를 구하러 북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북쪽의 쿠스코 지역에는 아직 계절에 따른 비가 내리고 빙하가 녹은 물로 보충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의 배꼽을 뜻하는 ‘쿠스코’의 설립과 관련된 잉카의 신화도 어떠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의 초대 황제는 도시를 설립할 장소를 찾고자 대지를 시험하려고 타팍 야우리Tapac Yauri라고 부르는 황금지팡이를 손에 들고 티티카카 호수에서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 지팡이가 대지에 꽂히는 곳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이 도시를 설립할 장소라는 상징이었다.

 

쿠스코를 설립한 잉카의 초대 황제 만코 카팍Manco Cápac. 

 

 

 

 

고대 농업을 부활시키다

 

 

영국 국제개발성(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이 발표한 숫자에 따르면, 페루의 2400만 명 가운데 49%가 빈곤하다. 그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은 안데스에 사는 선주민으로, 약 66%의 세대가 빈곤하다고 분류되어 있다. 그 주요 원인은 산림 파괴, 토양침식, 충분하지 않은 물 관리와 땅심의 약해짐이다. 그리고 화폐경제가 자원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아 농촌 지역사회나 도시와 농촌을 분극화시키고 있다.

 

 

“고대 잉카는 이상적인 고지대 농업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전략이 현재 페루의 농민을 돕는 데에 유효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쳅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이러한 고대의 전략은 지금도 실용적일지도 모른다. 쳅스토우-러스티에 따르면, 스페인 사람이 건너온 뒤에는 응애가 눈에 띄게 줄어 잉카 문명의 대부분이 파괴된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한다. 1600년 무렵에는 소, 양, 염소, 말을 스페인 사람들이 가지고 들어온 뒤부터 응애는 다시 늘어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이 잉카의 묵히기와 돌려짓기는 무의미한 관습처럼 생각되었다. 6~8년에 걸친 오랜 묵힘과 돌려짓기 농법은 팽개쳐지고, 안데스 산중의 고립된 지역사회에서만 행했다. 이후 페루에서는 감자 시스트 선충으로 큰 피해가 생겨 버렸다.

 

 

쳅스토우-러스티의 해결책은 아마존으로부터 동쪽으로 부는 습한 바람을 붙잡도록 오리나무 등과 같은 자생종 나무를 대규모로 ‘다시 심는 것’이다. 쳅스토우-러스티는 다시금 농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잉카의 운하와 계단밭을 수리해야 한다고 추천한다.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는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에서 고대의 방법으로 계단밭을 굴삭하고 그것들을 재건하는 계획에 자금을 대고 있다. 1995년 이후 현지의 농민들은 운하를 재건하고, 160㏊의 고대 계단밭에서 감자, 옥수수, 밀을 재배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토지에서보다도 계단밭은 수확량이 좋고, 비료도 적게 든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기능하고 무엇이 기능하지 않는지를 몇 백 년이나 배워 왔습니다.”

 

 

플로리다대학의 지리학자 마이클 빈포드Michael Binford 는 말한다.

 

 

“만약 그들이 해온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무언인가를 배우겠죠.”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hurston, H. David, Plant disease management practices oftraditional farmers, Plant Disease 74:96-102, 1990.

(2) Kevin Krajick, Ancestors of Science:Green Farming by the Incas?, Science Magazine, 17 July 1998.

(3) Alex Chepstow-Lusty and Per Jonsson, Inca Agroforestry:Lessons from the Past, AMBIO: A Journal of the Human Environment, pp. 322–328, March 15, 2000.

(4) Andy Coghlan, Hotter weather fed growth of Incan empire Jul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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