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라 하면 온주温州 밀감을 가리키는데, 메이지 무렵까지 "밀감"이라 하면 소밀감小蜜柑을 가리켰습니다. 이 소밀감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주 밀감도 소밀감도 모두 똑같은 '밀감'을 부르는 이름인데,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어 적어 봅니다. 먼저, 소밀감은 정식으로는 기주紀州 밀감이라 부르고 학명도 Citrus kinokuni라고 합니다만, 여기에서는 소밀감이라 부르겠습니다.
밀감은 소밀감
에도 시대 초기 무렵, 와카야마의 상인 키노쿠니야 분자에몬紀伊国屋文이 폭풍우를 무릅쓰고 배로 밀감을 에도로 옮겨 에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폭풍 때문에 운송선이 움직이지 못해 에도에서는 대장장이의 신을 기리는 "풀무 마츠리"에 바칠 귤이 부족하여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카미가타上方에서는 에도로 보낼 밀감 화물이 정체되어 시중에 넘쳐 값을 후려 때려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옮기던 귤이 소밀감으로, 지금의 온주 밀감이 아닙니다. 소밀감은 정월의 공물로 쓰는, 잎이 붙어 있는 작은 밀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씨가 있고, 단맛이 나는 작은 밀감입니다. 크기는 30g 정도, 온주 밀감의 1/4 정도입니다. 혼本 밀감, 신眞 밀감, 3월三月 밀감, 기노쿠니紀の国 밀감, 야츠시로八代 밀감, 사쿠라지마桜島 밀감 등도 모두 소밀감입니다.
온주 밀감은 이부인李夫人
밀감이 소밀감이라면 온주 밀감은 무엇이라 불렀을까 하면, 이것은 이부인이라는 왠지 요염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중국 여성의 이름일지 신경쓰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세한 기술은 없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부인이라 하면 고대 중국의 한무제가 사랑했던 여성에 그 이름이 있고,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절세의 미녀였던 것 같습니다. 온주 밀감이 뛰어나게 좋은 성품을 지녀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작물에 여성의 이름을 붙인 건 귤에 상수부인이 있고, 밀감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있듯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부인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부인(=온주 밀감)이란 이름 때문에 중국에서 전해진 과일 같지만, 사실은 일본 원산 감귤입니다. 가고시마현 이즈미군出水郡에 있는 나가시마長島라는 야마쿠사天草 섬에 면한 섬이 발상지로, 씨앗에서 태어난 변이종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에서는 온주 밀감을 이부인이라 부르고, 에히메愛媛현에서도 온주 밀감이 최초로 다치마立間에 들어왔을 때 역시 이부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밖에 이부인李婦人, 쥬쿠진じゅくじん, 용신 등의 호칭도 있고,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가 저술한 <広益国産考>(1859)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이부인이란, 서쪽 지방에서 씨 없는 밀감이라 부르는 것과 약간의 차이도 없는데, 씨 없는 밀감 쪽이 이부인보다 맛이 좋고 전혀 씨가 없다. 이부인도 맛있지만, 약간 신맛이 있고, 씨가 하나나 둘 들어 있다."
씨 없는 밀감은 이부인에서 생긴 것처럼 생각되는데, 소밀감에도 씨 없는 게 있어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부인, 즉 온주 밀감은 영어로 사츠마 만다린(satsuma mandarin)이라 부릅니다. 메이지 9년(1876), 미국 플로리다로 도입되었을 때 묘목이 원산지인 가고시마현에서 운반되었기 때문에 사츠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한 그 뒤 묘목의 대부분이 오와리尾張의 종묘 산지에서 미국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오와리 사츠마(Owari satsuma)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의 탄생
<규원귤보桂園橘譜>(1828)에는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에 귤이 있는데, 타이코우太閤(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시 야나가와 후柳川候가 가져온 것으로, 이부인 귤이라 한다."라고 나옵니다. 또, <본초도보本草図譜>(1830)에도 똑같은 기술이 있어, 조선에서 가져왔는지 어떤지는 별개로 치쿠고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던 1600년 전후에 온주 밀감이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1936년 가고시마현 이즈미군, 나가시마의 타카노스鷹巣에서 발견된 이부인의 고목은 발견 당시 나무 나이 300년 정도로, 그 내력은 1600년 무렵. 게다가 고목은 접목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부모 나무는 앞서 야나가와에 전래된 시기보다 오래되어, 야나가와의 이부인 귤은 나가시마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는 무역선이 왕래하던 야츠시로해八代海에 면한 섬으로 전에는 아마쿠사 영역이었던 나카지마仲島의 것. 히고肥後와 히젠肥前에서는 온주 밀감을 "오오나카지마大仲島"나 "나카지마中島"라고도 부르고 있었다고 하여(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은 전국시대인 1500년대에는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후쿠오카번福岡藩의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崎安貞가 저술한 <농업전서農業全書>(1697)에는 귤橘과 감柑이란 이름은 있어도 이부인이란 이름은 없습니다. 메이지 무렵까지 귤은 주로 선물이나 증답용 물품으로서, 맛있는 과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씨가 없거나 적은 것이 선호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부인이 확산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온주 밀감으로 개명하다
이부인이 일본 원산의 귤인데 왜 온주 밀감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온주라고 하면 중국 저장성 원저우부温州府를 가리킵니다. 남송의 한언직韓彦直이 저술한 <귤록橘録>(1178)에는 "감귤은 소주蘇州, 태주台州에서 나지 않는다. 서쪽으로는 형주荊州에서 나오고, 남쪽으로는 민閩・광広・무주撫州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두 온주의 것이 으뜸으로 그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밀감은 온주부의 것을 최상이라 칭찬했습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서도 "온주 귤은 밀감이다. 온주란 절강의 남쪽에 있어 감귤의 명산지이다"라 하고, <규원귤보>(1848)에서도 감귤의 종류로 온주귤을 들며 그 맛좋음이 밀감 중에서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주라는 이름은 맛있는 밀감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메이지가 되어 국가에서는 통계상 이름이 제각각인 귤을 정리해야 했지요. 소밀감을 보통 밀감으로 하고, 이부인을 온주 밀감으로 했습니다. 전고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 온주부의 밀감에 뒤지지 않는 맛이기 때문에 온주 밀감이라 이름을 붙였겠지만, 온주부에서 전해진 밀감은 아닌 것입니다.
소밀감의 전래
그럼, 소밀감으로 이야기를 돌려 그 발상을 더듬어 봅시다.
소밀감에는 게이코景行 천황이 구마모토로 행차했을 때 씨앗을 하사해 오아마小天 마을 미즈시마水島에 심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게이코 천황의 1대 전에 해당하는 스이닌垂仁 천황의 명을 받은 다지마모리田道間守라는 사람이 불로불사의 나라에서 토키지쿠노카구노미非時香菓를 구하러 떠나서 10년의 세월이 걸려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겨울에도 과실이 달리는 감귤 또는 엄동설한에도 바로 옆에 있는 과실이란 의미일까요? 돌아온 다지마모리는 바로 전에 스이닌 천황이 붕어한 것을 알고 황제의 신령에 의지해 무사히 돌아왔는데 만날 수 없게 되자 비탄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다음 황제인 게이코 천황은 다지마모리의 충성을 어여삐 여겨 스이닌 천황의 능묘 옆에 매장하도록 명했다 하고, 가지고 돌아온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귤은 일본 원산의 감귤이고, 일부러 다지마모리가 해외까지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귤을 감귤류의 통칭이라 하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일본으로 전래된 시기를 알 수 없는 소밀감이나 등자(橙)가 아니었을까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전승처럼 게이코 천황이 다지마모리가 귀국한 뒤 소밀감의 씨를 구마모토에 심도록 했다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소밀감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소밀감이 그 당시에 전해졌다면, 그 달콤한 맛 때문에 각지에서 재배가 확산되었을 테고 쿠카이空海가 812년에 사가嵯峨 천황에게 헌상한 과실은 감자柑子가 아니라 소밀감이어도 괜찮았을 터. 소밀감 설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감자는 일본에 오래전부터 있던 추위에 강한 감귤로서 과실은 짙은 황색의 얇은 껍질, 크기는 40g 정도의 작은 열매이다. 쇼무聖武 천황 시대(725)에 당나라에서 전해진 것이 <속일본서기続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에는 그밖에 등자나 귤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덧붙여서, 소밀감이 심어진 장소도 구마모투현 이외에 다지마모리를 신사에 신으로 모시는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키츠모토橘本 신사와 사가현佐賀県에도 전승이 있는데 토키지쿠노카구노미의 씨를 하사했던 게이코 천황이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아버지라는 신화에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인 만큼 전승을 뒷받침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에히메의 소밀감 점묘点描
에히메의 소밀감에 대해서는 오미시마大三島에 있는 오야마즈미大山祇 신사의 大祝오호오리 직職인 미시마三島 씨가 음력 11월에 소밀감을 영주의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게 헌상해 미치나오에게서 "밀감(みつかん) 매우 매우 경사스럽다"라고 감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밀감은 "みつかん"이라고 부르고 그 가운데 "つ"가 생략되어 "みかん"이 되는데, 미시마 씨에게는 또 한 통의 고노 미치나오에게 온 감사 편지가 있으니 거기에는 "みかん"이라 적혀 있습니다. 이 문서는 마침 "みつかん"에서 "みかん"으로 변하는 과도기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밀감은 환자의 입에 맞는 귀중한 과실인 듯하여, "아이들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고맙습니다"라고 나옵니다. 문서가 작성된 시대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1540년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만, 특별한 과일이라 하는 만큼 소밀감이 재배되기 시작한지 그다지 긴 세월이 지나지 않은 듯합니다.
세토우치瀬戸内의 오미지마나 오시마大島에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기 하는 소밀감의 고목이 남아 있어, 항해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세토우치의 섬들을 거점으로 한 왜구와 수군이 가지고 돌아갔거나, 교역선이 순풍을 기다리며 들르는 등을 통해 소밀감 등의 감귤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도서 지역에는 자연히 교배되어 생긴 감귤이 많고, 안세이감安政柑이나 핫사쿠八朔 등도 그 종류입니다. 인노시마因島에 들어간 여러 종류가 자연교잡으로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미시마 씨의 문서로부터 50년 정도 뒤인 키타우와군北宇和郡 미마三間 지방에서 저술된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1564)에는 감귤의 종류로 "감자柑子, 구년보九年甫, 밀감樒柑, 유柚, 등橙" 등 8종을 들고, 그밖에도 종류가 많다고 적혀 있습니다. 밀감은 소밀감이며, 호칭도 "미츠캉みつかん"이 아니라 "미캉みかん"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귤류는 무가와 사원 등에서 심어도 좋지만, 농가는 유자와 등자 외에는 재배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다만, 판매하여 팔린다면 이야기는 다르다"라고도 합니다. 유자와 등자는 식초용으로 삼고, 집 주변에 자가용으로 심어도 괜찮았던 겁니다. 이외의 감귤은 유통하면 상품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도 시대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타군喜多郡이나 이요군伊予郡의 일부를 영역으로 한 오즈大洲 번주에게 촌장(庄屋)들이 소밀감을 헌상했습니다. 시모카라카와下唐川나 시모스카이下須戒, 마츠오松尾, 지세이知清가 있던 산간 지역에서 소밀감이 헌상된 것입니다. 밀감 재배는 해안선의 따뜻한 지역이 적합한데, 내륙부에서도 남향의 해가 잘 드는 좋은 토지를 선택해 재배했던 것이죠.
메이지 21년(1888)에 작성된 에히메현의 감귤 통계에서는 현 내의 밀감 생산량 3504섬 가운데 기타우와군北宇和郡이 1930섬, 기타군이 1097섬으로 두 군에서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오스 번 영역의 기타군은 현 내에서도 유수의 소밀감 산지였던 겁니다.
에도 시대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는 밀감의 산지로 "기주紀州 아리타有田, 살주薩州 사쿠리지마桜島, 예주豫州 마츠야마松山, 준주駿州,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를 들고, 예주 마츠야마 산물은 준주 산물보다 맛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에히메의 밀감이 유명해진 건 메이지 17년(1884)에 다치마立間의 이부인(온주 밀감)이 도쿄의 전국 중요 물산 공진회에서 1등상을 받고, 이듬해 1885년에도 대일본 농회의 전국 농산물 품평회에서 1등상을 받아 호평을 받기 이전 이미 에도 시대부터 맛있는 밀감 산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소밀감은 구마모토부터 가고시마, 오이타, 에히메, 히로시마, 와카야마, 시즈오카로 항로를 따라 확산되고, 게다가 대부분이 현재의 온주 밀감 산지와 겹쳐 있어 소밀감의 역사가 현재를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등장한 소밀감
메이지 중반 무렵까지 소밀감은 밀감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도대체 밀감이란 단어는 언제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요? 꿀에 절인 듯한 달콤한 것으로부터 밀감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만, 밀귤蜜橘이나 밀감樒柑 등 다양한 글자가 충당되어 최초로 사료에 나타난 것은 1418년, 고스코우잉後崇光院이 상황의 거처로 밀감 2홉을 바친 기술입니다. 이어지는 사료에는 "병중인 무로마치室町 도노殿가 밀감을 바라시어 조우코우잉蔵光院의 밀감을 100개 받아 헌상하고, 부족분은 감자柑子를 더했다."라고 해, 밀감은 무로마치 도노(장군)가 바라는 귀중한 과일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대명 무역을 활발히 하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다음 장군 시대이고, 소밀감 같은 달달한 과실이 재배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동안 밀감이란 글자는 사료에서 사라지고, 앞에 기술한 미지마 씨의 문서가 쓰여진 1540년 무럽까지 공백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미지마 문서의 다음, 즉 1500년대 중기부터 빈번하게 사료에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밀감이 밀감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고, 이요국伊予国에서는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1509년 영주)가 활약하며, 인노시마因島와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의 무라카미村上 씨 등의 미지마 수군이 큐슈와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대와 부합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상 전이라 생각됩니다.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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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民鑑月集 和名類聚楽抄 和漢三才図会 魏志倭人伝 古事記 日本書紀
원문 https://www.pref.ehime.jp/h35118/1707/siteas/11_chishiki/documents/kankiturekisi.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