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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 중 가장 늦게 해독된 밀 게놈(유전체). 밀은 게놈 크기가 16Gbp(160억 염기쌍)로 사람(3.23Gbp)보다 5배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아침엔 부드러운 식빵, 점심엔 든든한 샌드위치, 저녁엔 맥주와 함께 피자 한 조각.
삼시세끼를 빵으로 해결하는 이들의 귀가 번쩍 뜨일 소식이 나왔다. 빵의 주원료인 밀의 게놈(유전체)이 완전히 해독됐다는 소식이다. 365일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사람은 ‘전분저항성’을 가진 빵을, 글루텐민감성 때문에 ‘그림의 빵’이던 사람은 ‘글루텐 프리(free)’ 빵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빵과 우리의 인연은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인류는 기원전 1만7000년 전부터 밀 종자를 껍질째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9600년 전부터다. 이라크를 길게 지나는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이 주요 생산지다. 기원전 4000년 전, 이집트에서 밀가루로 효모 발효 빵을 만드는 레시피를 만들면서 밀은 점점 더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밀은 명실공히 ‘곡식의 왕’으로 통한다. 220만4000㎢로 전 세계에서 재배면적이 가장 넓다. 북극에서 적도까지, 심지어 고도 4000m 티벳에서도 자란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주식으로 삼는다. 밀 100g의 열량은 327칼로리(cal)다. 흔히 탄수화물만 들어있다고 생각하지만, 밀알의 10~15%는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밀의 단백질과 비타민 함량은 쌀보다 높다.

 

곡물 중 가장 늦게 해독된 밀 게놈 

이토록 대중적이고 중요한 밀 게놈이 최근에야 완성됐다는 소식에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량이 밀보다 훨씬 적은(전 세계 기준) 벼는 2005년 게놈이 완성됐고, 늦었다는 옥수수와 보리마저도 2009년과 2017년에 해독을 마쳤는데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밀 게놈은 해독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괴물’이기 때문이다. 게놈 크기가 16기가염기쌍(Gbp·160억 염기쌍)으로 사람(3.23Gbp)의 5배다. 보리(5.1Gbp), 호밀(7.9Gbp), 벼(0.4Gbp), 옥수수(2.3Gbp) 등 다른 작물과 비교해도 밀 게놈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아침엔 보드라운 식빵, 점심엔 든든한 샌드위치, 저녁엔 맥주와 함께 피자 한 조각. 삼시세끼를 빵으로 해결하는 ‘빵순이’들의 귀가 번쩍 뜨일 소식이 나왔다. 빵의 주원료인 밀의 게놈(유전체)이 완전히 해독됐다는 소식이다. 365일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겐 ‘전분저항성’을 가진 빵을, 글루텐민감성 때문에 ‘그림의 빵’이던 사람들에겐 ‘글루텐 프리(free)’ 빵을 골라줄 수 있게 됐다.

밀 게놈은 반복서열이 약 85% 이상 차지한다. 염기쌍 160억 개를 한 줄로 세우는데, 일정한 염기서열이 반복되는 부분이 85%라고 생각해보면 밀 게놈을 최대한 길게 조각내서 맞춰 봐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이는 밀이 벼, 보리와 차례로 갈라져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종끼리 교잡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리의 게놈이 2배체(2n=14, HH)인 것과 달리 밀은 6배체(2n=6x=42, AABBDD)다.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식물 종(AA, BB, DD)이 마구잡이로 섞이면서 불필요하게 중복된 염기서열이 많아졌다. 

밀의 특성 좌우하는 유전자 ‘핫스팟’ 찾아 

국제 밀 유전체 분석 컨소시엄(IWGSC)은 13년 만에 이런 밀의 염색체를 모두 해독해냈다(통상 게놈을 95%가량 해독하면 완성이라 본다). 연구팀은 밀의 21개(21쌍에서 하나씩) 염색체의 염기서열, 유전자 기능, 유전자 발현 조절 등을 연구한 결과를 종합해 ‘사이언스’ 8월 17일자에 발표했다. doi:10.1126/science.aar7191 
 

2005년 출범한 IWGSC에는 68개국 2338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90% 이상 재배되는 빵밀의 한 종류인 ‘차이니스 스프링(chinese spring)’ 품종을 각각 연구했다. 이후 모든 연구를 조각처럼 모아 밀의 연속적인 염기서열과 10만7891개의 유전자, 400만 개의 분자 마커(변이가 생길 경우 기능이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는 DNA 염기)를 밝혀냈다. 

밀의 전체 염기서열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팀은 방대한 데이터를 해석하는 바이오인포메틱스 기술을 사용했다. 밀 게놈을 평균 길이가 76개 염기쌍인 긴 DNA 조각으로 절단하고 이것을 컴퓨터에 입력해 재조합하는 ‘샷건 시퀀싱(shotgun sequencing)’ 기술이 쓰였다. 

IWGSC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서용원 고려대 생명공학부 교수는 “덕분에 밀의 중요 특징을 결정짓는 유전자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유전자들끼리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발현되는지 밝힐 수 있었다”며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는 기간이 대폭 단축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쉽게 말하면 이번 밀 게놈 해독으로 밀의 수확량, 맛, 영양 성분, 성숙기, 스트레스 저항성 등을 결정짓는 ‘핫스팟’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형질들은 모두 유전력이 낮다. 하지만 핫스팟을 알고 있으면 교배와 재조합 과정을 통해 관련된 유전자를 개체에 집적할 수 있다. 

스파게티나 마카로니를 만드는 밀은 빵이나 면류에 쓰이는 보통밀이 아니라 ‘듀럼밀’이다. 듀럼밀은 보통밀과 품종이 완전히 다르고, 염색체도 4배체(AABB 타입) 28개다. -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알레르기 프리(FREE)’ 밀가루 빵 나올까 

품종 개량의 가장 큰 목표는 뭐니 뭐니 해도 맛 아닐까. 순수한 빵의 맛은 밀의 종자 저장 단백질인 글루텐이 결정한다. 밀알에는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이라는 크게 두 종류의 단백질이 있는데,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하면 이 두 단백질이 섞이면서 그물 모양의 단백질 네트워크인 글루텐을 형성한다. 

글루텐은 빵을 부풀게 하고 쫀득한 식감도 낸다. 효모가 발효하며 만들어낸 이산화탄소와 에탄올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두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글루텐 단백질이라도 중동, 중국 남부, 러시아 등 밀 생산 지역에 따라 글루텐의 성질은 조금씩 다르다. 서 교수는 “밀의 식감은 다양한 글루텐 유전자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며 “글루텐 단백질의 종류와 진화과정을 알면 더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글루텐 유전자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글루텐 단백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자를 알면 ‘셀리악’ 병을 앓거나 글루텐민감성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한 밀가루 빵을 만들 수 있다. 셀리악 병은 소장에서 일어나는 알레르기 질환으로 글루텐이 소장에 들어오면 면역체계가 소장을 공격하는 병이다. 미국에서는 인구의 약 1%가 앓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글루텐민감성이 있는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먹은 뒤 배탈, 복부팽만, 설사, 두통, 가려움증, 천식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한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글루텐을 비롯한 밀 속 단백질이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유력한 용의자로 꼽힌다. 이와 같은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평생 쌀이나 보리로 만든, 글루텐이 없는 빵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같은 빵이지만 밀가루 빵과는 식감이 확연히 다르다. 

서 교수는 “질병과 관련된 단백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자를 정확히 알면, 이를 제거한 밀 품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IWGSC 연구팀은 이번 논문에서 글루텐 관련 질병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밀 유전자 828개를 분석했다. 그 결과 글루텐 소화를 방해하는 유전자와 과민성 쇼크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밀의 배유(곡식에서 껍질과 눈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분 부분)에서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천식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도 찾아냈다. 

빵의 맛을 결정하는 밀의 글루텐 단백질 조합. 밀 단백질은 글루테닌과 글리아딘 두 개의 주된 단백질로 구성돼 있다. 글루테닌은 다시 고분자와 저분자로 나뉘는데, 고분자 글루테닌은 탄성, 저분자 글루테닌은 신장성에 주로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둘의 유전적 변이가 밀 반죽의 물성 변화와 가공성에 영향을 준다.

고온 스트레스에 강한 우리밀

환경순화적인 방법으로 수확량을 늘릴 비법도 유전자에 있다. 다양한 기후환경에서 자라는 밀을 가져다 파종부터 수확까지 어떤 유전자들이 발현되는지 확인하면 물과 농약, 비료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고도 환경에 잘 적응해 자라는 품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기후변화에 대응해 고온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품종이 필요하다. 당장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봄철 기온이 상승하고 강우가 잦아지면서 밀에 싹이 나는 비율이 5~15배로 늘었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이 5월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함에 따라 이삭 패는 시기는 약 2.8일, 이삭 팬 후 성숙기까지는 약 2.3일 단축됐다. 결과적으로 전체 생육 기간이 줄면서 기온 1도에 낱알 개수는 1㎡당 1119개 줄었고, 밀알 1000알의 무게는 1.2g 감소했다. 가뜩이나 몸값 비싼 우리밀이 경쟁력을 잃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서 교수는 “밀이 가진 고온 저항성 유전자를 연구함으로써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고온 다습한 한국은 고온 저항성 유전자를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한국은 밀을 10월에 파종해 이듬해 6월 초 수확하는데, 밀의 개화 및 성숙 시기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수확기 때 장마가 겹친다. 

이는 수확하기 전 밀알이 발아하거나 썩기 쉬워 불리한 조건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국에서 잘 자라는 밀 품종은 개화와 성숙이 빠르며, 고온 스트레스에 강하다는 뜻도 된다. 한국의 밀 품종을 이번에 완성된 밀 게놈 지도와 비교하면 고온 스트레스를 견디게 만들어주는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IWGSC 연구팀은 이번 논문에서 밀의 개화시기와 관련된 ‘PPD1’ ‘FT’ 등의 유전자들이 어떤 염색체에 어떻게 그룹지어 있는지를 상세하게 다뤘다. 서 교수팀도 성숙기간이 서로 다른 금강밀과 영광밀의 유전자를 분석해 수확시기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50년 전 세계 인구는 97억 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이 부담 없이 빵을 먹기 위해서는 밀 생산량을 지금보다 60% 더 끌어올려야 한다. 수확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밀, 기후변화에 잘 적응하는 밀, 병충해에 강한 밀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이유다. 밀 게놈 해독은 이를 위한 첫 걸음이라는 평가다. 

서 교수는 “밝혀낸 밀 유전자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연구해나갈 계획”이라며 “곡물 중 가장 큰 밀의 지도가 완성된 만큼, 유사한 유전자를 가진 벼나 보리에 대한 연구도 더욱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룰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영혜 기자 yhlee@donga.com]


https://news.v.daum.net/v/20181117140015459?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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