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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이 있다. 알만 한 민속학, 인류학, 역사학 연구자들은 일본어 원서를 제본하여 하나씩 갖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조선의 농사법과 조선에 사는 농민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건너와 농사시험장에서 농학을 연구하던 사람이 쓴 것이다. 


그는 1910년대 말 당시 최고의 학과인 동경제국대학 농학과를 나온 뒤 조선으로 건너와 일자리를 잡는다. 그 이름은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당시 조선은 일본인에게 조선드림을 실현시킬 수 있는 땅이었다. 그는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다양한 실험을 행했다. 그가 남긴 실험결과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유럽과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가 지닌 학식과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이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가 더 소중한 것은 그가 행한 현지조사에 있다. 당시 그에게는 박사학위를 딴 기념으로 시험장의 직원들이 돈을 모아 사준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다. 그가 그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증언해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농업 분야의 자료가 빈약하기에 그가 남긴 사진은 더욱 값지다. 


그가 현지조사를 한 시기는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이다. 당시 우리 스스로는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색안경을 끼지 않고 조선의 농법과 농민을 자신의 조사노트에 그대로 실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조선을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사는 더러운 곳이 아니라, 결국은 대일본제국을 위한 것이지만 뭔가 배울 만한 점이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이는 그의 아들도 생생히 기억하는 바이다. 


그는 조선 팔도를 자신의 발로 돌아다니며 직접 농민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생활은 어떠한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현지조사 자료가 쌓이고 쌓여 원고지로 만 장이 넘는 분량이 쌓이도록 조사에 조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그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84) 씨는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늘 바빴다. 어쩌다 집에 돌아오면 조사자료 묶음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대신 그의 아들은 깊은 외로움에 힘든 시기를 보낸다. 더구나 어머니까지 어렸을 때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다카하시 노보루는 자기의 열을 다해 조선의 농업을 연구하다가 일본의 패망을 경험한다. 그는 당시 수원의 농사시험장에서 담당한 총무부장이란 중요한 위치 때문에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년 남짓 농사시험장 업무의 인수인계 때문에 조선에 남아 있는다. 이로 인해 자신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직접 가지고 돌아가기 힘들어지자, 본국으로 돌아가는 직원들의 짐에 한 부씩 한 부씩 나누어 보내기에 이른다. 본인이 들고 갈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기에 그렇게 자료를 보존하고자 본국으로 보낸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일부는 사라졌을 테고, 남은 일부는 어느 보관소에서 썩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자료를 하나씩 본국으로 보내고 자신도 미군에게 인수인계 작업을 마친 뒤, 1945년 그는 고향인 큐슈의 야메시(현재)로 돌아간다. 그때부터 새로운 일에 직면하게 된다. 패전 이후 황폐해진 일본의 농업을 되살려야 하는 건 물론, 자신이 청춘을 바쳐 연구한 조선의 농업자료를 다시 모아서 정리해야 하는 일이 주어졌다. 당시 일본은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다. 우리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비슷할 것이다. 교통도 불편한 시절 부하 직원들의 일자리도 알아보는 한편, 자신의 자료를 다시 모으려고 일본 땅을 동분서주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과로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귀국한 지 3~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회상한다. '방학이라 집에 돌아와 있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 우물에 가서 세수를 했다. 간밤에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마침 나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난 아버지의 명에 따라 물을 떠다 드렸는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손을 허공으로 뻗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 의사를 불러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오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도 없는 그의 아들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고, 전문학교(현재 대학)를 마친 뒤 안정된 직장을 찾고자 교사가 된다. 


아들은 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겐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을 친척집에 맡겨 놓은 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수학교사가 된 그는 한 여인을 소개받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마침내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리고는 친척집에 맡겨 놓았던 아버지의 유품을 찾아온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유품을 찬찬히 살펴볼 시간을 갖게 된 그는, 아버지의 유고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지도와 사진, 원고를 들춰보며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이건 농업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중요한 자료 같다...' 그래서 그는 자료에서 나온 아버지 동료들의 이름을 바탕으로 그들의 주소를 수소문한다.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을 방학과 휴일마다 찾아가서 만나며 아버지의 행적과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 


그들과 만나며 아버지가 미처 다 모으지 못한 아버지의 자료도 얻고, 또한 오치아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아버지와 조선에서 일하던 농업 전문가로서 아버지의 일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에게 연락하여 만난 뒤 본격적으로 자료의 정리가 시작된다. 다카하시 고시로 씨는 아버지의 유고를 모두 오치아이 씨에게 넘긴다. 유고는 현장에서 조사한 내용이기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 투성이인데, 그걸 하나하나 깨끗이 옮겨 적으며 정리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행한 조사이기에 한글도 사이사이에 나오는데 그 외국어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료를 정리하길 십여 년... 그 일을 주도하던 오치아이 씨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에 이른다. 다행스럽게 자료 정리는 함께하던 사람이 마무리한다. 그것이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출판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씨와 그와 친분이 있던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이들과 함께 출판을 목표로 다시 교정을 보고 원고를 정리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출간을 목표로 함께하던 출판사의 사장이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출판사를 이어받은 사장의 아들이 이 작업을 계속 추진하였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유고는 조선 땅에서 어렵사리 일본으로 건너간 지 50년 만에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다. 


다카하시 노보루가 조선에서 조선의 농법과 농민의 생활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7~8년. 그리고 그 자료를 본인의 짐에 짊어지고 귀국한 동료들. 그걸 찾아내 정리한 일본인들의 노력... 그 일을 가능하도록 동분서주한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눈물겨운 노력이 이 책을 탄생시켰다.  따지자면 수많은 일본인의 땀과 노력,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 책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사라진, 찾을 수 없는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 일본인 덕에 남았다는 역설적인 우리의 근대사. 이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인도도 그렇듯이 제국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의 슬픈 현실이다. 아무튼 어렵사리 책이 나오자마자 고시로 씨는 이 책은 조선에서 행해진 조사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조선을 위해서 쓰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 권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또 한 권은 김정일에게 보낸다. 


그런데 1996년쯤 출판된 이 책은 너무 비싼 가격(한화로 100만원 남짓)으로 인해 이를 필요로 하는 학자와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대신 우리가 늘 그랬듯이 제본 등의 어둠의 방법을 통해 관련 공부를 하는 학생과 연구자, 교수들 사이에 퍼진다. 가난한 연구자들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문제는 이게 다카하시 고시로 씨에게 걸린 사실이다. 그는 한국에서 암암리에 나도는 이 책의 복사판을 구하고서 큰 실망에 빠진다. 


그걸 직접 찾아가 달래고 설득해 자료의 기증을 받은 것이 농진청의 성종환 씨이다. 당시 농진청은 농진청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다카하시 노보루의 자료를 돌려받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 3~4년 전 다카하시 고시로 씨에게 모든 자료를 기증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해마다 한 번씩 그 아들은 야메시 역사연구회의 사람들과 한국에 찾아와 자료를 열람하는 행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점점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건강도 안 좋아지는 등의 사정으로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난 아마 2006년 봄인가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을 처음 발견했다. 당시 우리 전통농업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뒤지다가 이런 책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렇지만 일본어도 모르고 이런 건 공부하는 분들이 번역하지 않을까 하여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고... 아이씨 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런 좋은 자료를 번역도 해놓지 않은 것인지... 도대체 저 책 안에는 무슨 내용이 실려 있는 건지 궁금해서 참지 못했다. 


결국 어느 날 학교 복사실에서 자료를 복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분량이 1300페이지에 달하는지라 한번에 복사하지는 못하고 열댓번을 오가며 띄엄띄엄 복사하여 집으로 날랐다. 그리고 모르는 일본어를 더듬더듬 더듬으며 번역을 시작했다. 그때 느낀 그 흥분과 새로운 앎으로 인한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여름에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겨울에는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그렇게 1년, 2년, 3년이 지나갔다. 가끔은 너무 좋아 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으며 아내가 미쳤다는 듯이 쳐다보기도 했다. 책에 나오는 그림을 마우스를 이용해 그림판에서 똑같이 그리고 나면, 나 자신이 너무 대견하여 으쓱하기도 했다.


일은 일대로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자료를 들여다보며 번역하고... 결국 5년 가까이 걸려 1300쪽을 모두 번역했다. 그 결과 원고지 7000매, 그림과 표 2700개라는 엄청난 결과물이 생겼다. 그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료를 보면서 실제로 농사를 지을 때 적용하여 실험하고, 농촌으로 찾아다니며 어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과정이 나에게 아주 큰 공부가 되었다. 그 자료를 번역하며 난 어느새 부쩍 자라 있었다. 


번역을 모두 마친 뒤, 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2009년 10월 직접 일본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 아들인 다카하시 고시로 씨를 만나 내 뜻을 전하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무덤과 납골당에 참배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를 더욱 깔끔히 정리하여 책을 내려고 한다. 저작권이 앞으로 2~3년이면 소멸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공부를 돕고 이를 번역하는 데 힘이 된 분들을 위해서라도 결과물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아들이 살아있을 때 책을 만들어 다시 찾아가고 싶다. 나의 공부는 이것이다. 학교를 찾아가 학위가 있으면 도움이 될까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이런 쪽으로는 찾기가 힘들었다. 한군데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그렇지도 않았고... 아무튼 이제 다시 나의 공부는 시작되었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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