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을 사막에서 살아남은 방법
북미에는 지금도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파파고족Papago族과 피마족Pima族이 사막에 찾아오기 전, ‘떠나간 사람들’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들의 선조 호호캄족Hohokum族이 있었다.
호호캄족은 서기 1450년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최근의 고고학 자료에서 그들의 삶을 추적하여 어떻게 건조 지대에서 지속가능하게 살았는지를 밝혔다.
힐러 벨리에 호호캄족이 세운 구조물 유적.
고대의 거대한 관개수로
솔트 벨리Salt Valley와 힐러 벨리Gila Valley에서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와 비슷한 때부터다. 솔트강(Salt River) 기슭의 계단식 지형에 최초로 작은 마을을 이룬 사람들의 일은 조금밖에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들의 농업은 홍수에 의존했을 것이다. 초봄에 물이 불어 범람원이 된 뒤 거기에 작물을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 50년 호호캄족은 신기술인 관개 수로를 받아들인다. 관개농업은 멕시코의 하천 주변에서 사는 선주민들도 이미 쓰고 있었는데, 호호캄족의 관개는 규모나 기술적인 면에서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가장 초기의 관개 수로는 하천 근처에 설치된 소규모의 것이라 하천이 범람하며 파괴되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호호캄족이 만든 수로.
하지만 서기 600~700년에 호호캄족의 기술자는 최초로 대규모 수로를 설계하고, 서기 700~900년에 걸쳐서는 대량의 물을 솔트강의 비탈진 농사땅까지 끌어오는 두 번째 수로를 건설했다. 초봄의 강물을 완전히 끌어와 농사땅까지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로 아리조나주의 챈들러Chandler 부근 힐러강(Gila River)을 따라 솔트강부터 템피Tempe, 피닉스까지 꿰맨 듯한 거미줄 같은 관개망의 존재가 밝혀져 나아갔다.
힐러 벨리에 호호캄족이 구축한 관개수로망.
이러한 수로의 건설은 몇 세기에 걸쳐서 사람의 어깨에 가죽이나 바구니로 진흙을 실어 날라서 이루어졌는데, 공업화 이전의 기술을 쓴 것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또 정교한 체계의 하나였다.
호호캄족의 기술자는 지형과 비탈, 배수성, 토양의 성질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수로의 흐름에 가장 맞는 지식을 찾아 밭에 물을 보내는 일련의 기술을 개발했다. 평탄한 강기슭의 계단식 지형과 비탈면 등 특정한 지형에 대응하는 각각의 기술이 있어, 필요와 환경 특성을 배려해 수로를 건설했다. 예를 들면 하천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입구는 우두머리 기술자가 구축했는데, 웅덩이는 하천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 하천의 수위를 올려 수로에 물을 흘려 넣었다. 수로 안에는 수량을 조정하기 위하여 수문도 구축되었다. 또 중심 수로의 취수구는 종말점으로 향할수록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는 것도 연구로 판명되었다. 수로를 흐르는 수량이 지하 침투나 증발 등으로 줄어들었다. 유속이 떨어지면 흙 알갱이가 수로에 고이고, 용수로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흐름이 너무 빠르면 흙으로 만든 수로는 침식된다. 이 균형을 고려해 수로를 작게 하여 운하를 흐르는 유속을 일정하게 유지한 것이다.
거대한 수로망은 하천의 남북 양쪽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와 범위는 터무니없이 거대했다. 수로의 대부분은 길이가 20㎞ 이상이고, 가장 긴 것은 32㎞나 되었다. 수로의 너비도 18~26m, 깊이는 약 6.1m나 되었다. 거대한 솔트강에 있는 체계 2는 아마 4000㏊ 이상을 관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수에 따라온 양분이 풍부한 침전물은 양분을 더하는 것만이 아니라, 토양의 보수력과 양분을 붙드는 능력도 높였다. 침전물은 관개용수와 함께 밭에 흩뿌리고, 용수로를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사이에 손으로 밭에 펼 수 있었다.
야생의 땅과 공생하는 생활 방식
하지만 관개농업은 호호캄족의 복잡한 농업 체계의 일부일 뿐이다. 호호캄족은 증가하는 인구를 먹이고, 식량·섬유·땔감·건축 자재를 얻고자, 자신들의 환경 조건에 그 토지이용이나 물을 사용하는 전략을 알맞게 짰다. 예를 들면 옥수수, 목화, 덩굴강낭콩(tepary bean)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것에 더해, 주변의 사막에서 다양한 식물을 모았다. 작물과 야생 식물의 경계는 애매모호했다. 명아주chenopod, 아마란스를 포함한 풀들도 농지에 무성히 있었다. 농지의 토양수분 상태가 개량되었기 때문인데, 아마 호호캄족이 그것을 보호하여 씨를 심거나 옮겨심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물이나 그 씨앗은 다른 작물을 수확할 수 없을 때 대체 식량원이 되었다. 관개농업에서 야생 재래종 식물을 재배·보호하는 것은 주변의 야생 영역에서 그것을 수확해야 하는 수고를 줄이고 그것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덩굴강낭콩.
다양한 덩굴강낭콩 씨앗.
호호캄족은 밭의 경계나 휴한지, 주변 농지에 출야cholla이나 가시배선인장(prickly pear cacti)도 옮겨심었다. 거의 물이 없는 농지에는 가뭄에 강한 용설란(agave)을 재배했다. 그것은 야생의 사막 식물로 식량, 섬유, 건축 자재가 되었다. 호호캄족은 가축을 기르지 않고, 대신 밭에서 소형 포유류를 사냥했다. 그것이 방목으로부터 야생지를 보호하도록 했다. 또 호호캄족은 나무의 가치도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농지의 나무를 보호하고, 관개지에서는 생울타리가 자라도록 했다. 그리고 위를 막은 구덩이 안에서 돌을 가열해 그 돌을 나누어 가져가 조리하는 데에 써서 땔감의 소비량을 줄여 나무를 보호했다.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 출야.
지금도 요리 재료로 쓰이는 가시배선인장.
곧 호호캄족은 농민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자급 전략을 특정 환경 조건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식물 자원을 보호하고, 미묘한 환경에 대응해 파괴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는 농법을 써서 그들이 의존하는 생태계에 대한 충격을 최소로 만들었다.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여 다양한 작물을 생산하고 수확하는 전략이 예측할 수 없는 환경 변화에 맞서 살아 나아가며 위험을 줄이는 기초가 되었다. 범람으로 밭이 파괴된다거나 가뭄으로 작물이 결실을 맺지 않아도 호호캄족은 다른 것을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땅심을 유지하는 체계를 지켜서 천 년 이상이나 변경에서 그들의 문명을 유지했다.
그런데 지속가능하게 살아오던 호호캄족도 어느 시기엔가 자신들이 큰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챘다. 그들이 구축했던 집약적인 관개가 표토에 염분을 축적시켜 관개가 미치는 장소에 있는 농지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호캄족은 어느 날, 그 농업을 완전히 멈추었다. 사막에서 자연에 부담을 주지 않고 또 어떻게 지낼지를 배워야 했던 것은 그들의 자손이었다.
인용문헌
(3) Jerry B. Howard, Hohokam Legacy: Desert Canals Pueblo Grande Museum Profiles No.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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