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아지는 이야기를 만남
보이는 것 모두는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집착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진다고 해서 나의 소유가 되지 않는 것이 법칙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조차도 나의 소유가 아니다.
스스로 '나'라 하고 '나의 것'이라고 깊이 애착하여도, 이 몸뚱이는 날마다 시간마다 아니 그보다 짧은 순간 순간마다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갈 뿐이다.
나를 나의 것으로 삼아서 늙게 하고 싶지 않지만, 그 몸뚱이 스스로는 늙음의 길을 벗어남이 없이 그대로 가고 있을 뿐이다.
나의 것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부탁하고 소원하여 보지만 소용없다.
그렇다고 안 아파지며 병들지 않는가?
그 스스로 병드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죽어야 할 위험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고 발버둥친다고 어느 한 시간이라도 죽음의 왕이 내미는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불타오르는 집 안에서 불의 위험이 닥쳤을 때 아들과 딸이 부모를 구해 줄 수 있는가?
부모는 아들과 딸을 위험이 없는 곳으로 보내 줄 수 있는가?
눈물을 글썽이는 것밖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의 성품이 그대로 이어지며 생기고 사라지는 질서 위에 서서 '나'라고 집착하고 '나의 것'이라고 애착한다.
그리고 생기고 사라지는 법들에 의해 변하고 무너질때, 가슴이 터지도록 통곡한다.
'나'라고 하는 것과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운행 질서에 의해 변하고 사라지더라도 울고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움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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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친구와의 이야기가 계속 머리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날 조금 흥분하는 바람에 괜한 승부욕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핵심만 이야기했으면 될 것을 ...
오늘 눈이 밝아지는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습니다.
아프면 분명 죽지 않기 위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치료를 치료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몸에 병이 오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의 병을 완치하여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몸에 병이 오는 것은 일종의 신호입니다.
내가 살아왔던 방식에 대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하였던 모든 것들에 대한 신호입니다.
그것의 결과로 인해서 몸에 병이 오게 됩니다.
평소에 담배 즐겨 피우던 사람이 폐에 무리가 오고 나서도 담배를 피지는 않습니다.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던 사람이 고지혈증에 걸리면 기름진 음식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이 욕구가 샘 솟습니다.
딱 한 대만! 딱 한 입만!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느냐가 치료의 관건입니다.
양의학에서 하는 약물이나 수술에 의한 치료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과를 결과로만 상대하는 수준낮은 의술일 뿐입니다.
원래 히포크라테스 정신에 따르면 그런 의술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치료법과 예방법이 강조되었을 겁니다.
몸에 온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의 잘못으로 여실히 알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내 몸이 침투한 적으로 알고 싸우느냐...
이긴다는 것은 참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참고 용서할때 이루어집니다.
힘이나 여타의 다른 강압적인 방법은 그 순간일 뿐,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건강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 몸을 혹사하고 함부로 대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선을 찾아서 그에 머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조차 함부로 살기는 매한가지 입니다.
말처럼 살면 분명 성인의 반열에 오를터인데... ^^;
죽음을 받아들일때 '나'라는 집착을 갖고 있으면,
죽기 싫습니다.
죽는 것이 억울합니다.
왜 내가! 왜 이 나이에! 다른 사람은 다 멀쩡한데!
주변 사람도 당연히 미워집니다.
저 놈이 나를 괴롭혀서! 나를 잘 돌봐주지 않아서!
왜 이것밖에 못 해주는거야! 나 좀 살려내봐! 너는 내가 죽기를 바라지!
'나'라는 집착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죽음을 맞이하게 될 사람이 힘든만큼 주변사람도 힘들어집니다.
아무도 자신이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닥쳐온 순간에 비로소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가지 않습니다.
지금 아무리 잘 먹고 잘 놀고 즐겁게 산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순간의 쾌락으로 잊어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만큼은 죽는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고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까요.
그런 자세로 삶을 사는 것은, '내'가 지금처럼 즐겁게 영원히 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짜릿한 쾌감을 즐기는 것도 '나',
싫지만 죽어야 하는 것도 '나',
그것을 잊고 열심히 사는 것도 '나',
한순간도 '나'라는 집착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는다고 하면 '나'는 더 오래 머물고 싶어서 난리가 납니다.
겸허히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은 '나'라는 집착을 놓은 사람입니다.
남겨진 사람이 얻게 될 고통이란 것은 사실은 죽는 '나'의 핑계일 뿐입니다.
남겨진 사람의 고통도 사실은 남겨진 '나'의 핑계일 뿐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죽는 '나'는 죽음으로 얻을 고통이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 뿐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남겨진 '나'는 내가 받게 될 고통이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 뿐입니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고통은 내가 감당해야할 몫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겨지기에, 아니면 죽어서 떠나기에 괴롭다는 것은
사실 '나'는 고통받기 싫은데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어서 싫다라는 표현입니다.
'나'에 집착하면 이렇습니다.
보내야 할 사람을 보내지 못합니다.
가야 할 사람이 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고통받고 싫기 때문입니다.
'나'를 강하게 집착하면 집착할 수록 떠나지도 남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모르죠, 그런 사람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는 것일지도...
'나'를 버린다는 것이 육신의 일은 별 것 아니니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사람은 '나'를 버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집착하는 마음, '나의 것'을 집착하는 마음, '내가 옳다'를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바로 그 때 세상을 편안히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준비해야지 하고 있다가는 언제 그런 상황이 닥쳐올지 모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역시 '내'가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나'를 버리는 일은 어렵고도 쉬운 길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깨어있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