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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3년 이내로 짧은 단명종자 : 메밀, 고추, 양파, 뽕나무, 토당귀
일반적으로 저장하면 수명이 2-3년인 상명종자 : 벼, 보리, 밀, 옥수수, 쌀보리 같은 벼과작물, 완두, 강낭콩, 토마토, 목화
수명이 4-6년 이상인 장명종자 : 콩, 팥, 녹두, 오이, 가지, 담배, 무, 배추, 아욱, 연, 티머시


밤의 길이가 일정 시간 이상 길어지면 꽃이 피는 단일식물 : 콩, 옥수수, 만생종 벼, 담배, 참깨, 대마, 기장, 코스모스, 나팔꽃, 조
밤의 길이가 일정 시간 이상 짧아지면 꽃이 피는 장일식물 : 보리, 밀, 귀리, 시금치, 무, 양파, 상추, 양배추, 감자, 완두, 박하, 해바라기, 아마, 티머시
일조시간에 관계없이 꽃눈이 생기는 중성식물 : 토마토, 고추, 가지, 오이, 조생종며, 메밀, 조생종콩, 조생종 담배

밤이 길어지면서 비대해지는 작물 : 고구마의 덩이뿌리, 뚱딴지의 덩이줄기, 달리아 알뿌리
온도 변화가 발아를 촉진하는 종자 : 샐러리, 호박, 목화, 담배, 가지, 토마토, 고추, 오이, 캔터키 블루그래스

물속에서는 발아를 못하는 종자 : 귀리, 밀, 무, 양배추, 코스모스, 과꽃, 후추, 가지, 파, 메밀, 콩, 루핀, 알팔파
물속에서 발아력이 약해지는 종자 : 담배, 토마토, 석죽, 미모사
물속에서도 발아하는 종자 : 벼, 상추, 당근, 샐러리, 티머시, 캔터키블루그래스

씨앗담그기를 할 때 산소가 부족하면 발아가 잘 안 되는 씨앗 : 강낭콩, 완두, 콩, 목화, 수수

빛을 받아야 싹이 잘 트는 광발아성 종자 : 담배, 상추, 뽕나무, 차조기, 우엉, 샐러리, 캔터키블루그래스, 피튜니아
빛을 받으면 싹이 잘 안 트는 암발아성 종자 : 파, 양파, 가지, 수박, 호박, 수세미, 오이, 참외, 토마토
빛과 상관없이 싹이 트는 광불감수성 종자 : 벼과작물, 옥수수, 대부분의 콩과작물
광포화점(광합성 속도가 더 이상 증가하지 않을 때의 빛의 세기)에 따라 양지와 음지 식물로 구분 됨(음지식물 : 인삼, 구약감자). 쉽게 이야기해서 양지를 좋아하느냐, 음지를 좋아하느냐의 차이. 수박, 토마토 등은 광포화점이 높고, 오이와 호박, 양배추, 강낭콩, 완두콩은 중간 정도이며, 상추, 양상추, 피망, 머위 등은 상대적으로 낮음.

영양생장과 생식생장이 분리되는 벼, 밀, 보리 같은 벼과작물
영양생장과 생식생장이 오랜기간 병행되는 완두, 녹두 같은 콩과작물과 토마토, 오이 같은 열매채소
수확하는 부위가 영양기관인 배추, 상추 같은 잎채소와 무, 당근, 고구마, 감자 같은 뿌리채소

수확 이후 호흡이 증가하는 아스파라거스, 완두, 브로콜리
수확 이후 호흡이 감소하는 사과, 배, 양파, 마늘 
성숙 과정에서 갑자기 호흡이 증가하는 클라이맥트릭형 : 사과, 배, 복숭아, 살구, 수박, 바나나, 토마토
그 반대의 비클라이맥트릭형 : 감귤, 오렌지, 포도, 레몬, 파인애플, 딸기, 버찌

남의꽃가루받이(타식성. 자가수분이 5% 이하) 식물 : 오이, 수박, 딸기, 무, 배추, 시금치, 아스파라거스, 양파, 밤, 사과, 배, 호두 등
자기꽃가루받이(자식성. 자연교잡률이 4% 이하) 식물 : 벼, 보리, 밀, 조, 수수 같은 벼과작물, 대두, 땅콩, 완두, 팥 같은 콩과작물,  복숭아, 포도, 살구, 감귤, 토마토, 가지, 피망, 갓, 담배, 아마, 목화, 참깨, 유채 등

원뿌리가 비대하여 저장뿌리로 변화 : 무, 당근, 순무, 우엉 (당근은 바깥쪽의 껍질이나 둘레가 비대하는 사부비대형)
곁뿌리이 비대하는 고구마, 다알리아
땅속줄기로 번식 : 나리, 아마릴리스, 수선화
마늘, 양파의 땅속줄기는 일정기간 저온과정을 거친 뒤 고온과 장일이 주어지면 형성됨.

고온이 되면 꽃대가 올라오는 상추, 시금치, 배추
고온에 휴면에서 깨는 백합, 튜립, 아이리스 등 알뿌리 화초
고온일 때 휴면하는 상추, 마늘, 양파

저온일 때 휴면하는 딸기, 포도, 사과, 배

서늘한 기온을 좋아하는 식물 : 잎줄기 채소의 대부분, 딸기, 완두
따뜻한 기온을 좋아하는 식물 : 대부분의 과채류, 고구마, 생강, 마, 토란, 들깨, 차조기

C형 웅성불임 : 토마토, 가지, 고추, 호박, 배추, 멜론, 양배추
       웅성불임 : 옥수수, 수수, 양파

자가불화합성 : 과수, 십자화과채소, 목초
이형예현상 : 메밀, 아마, 앵초


녹식물 춘화형 : 양파, 양배추, 히요스, 당근, 우엉, 국화, 스톡

         └  적색광이 가장 효과                     └ 저온에서 1주일 이상 경과되면 꽃눈이 분화

  종자춘화형 : 무, 배추, 완구, 잠두, 봄무, 추파맥류

암수꽃이 따로 피는 호박, 수박, 참외, 오이, 멜론
암그루 수그루가 따로 있는 시금치

지하 발아: 배젖부분과 떡잎이 지하에 남음 (완두, 벼, 옥수수)
지상 발아 : 떡잎과 어린잎이 지상에 나옴 (콩과작물 대부분)


광합성 작용에 효과 : 청색광, 적색광 (광합성 작용과 일장반응)
굴광현상은 청색광에 반응
엽록소의 형성은 청색광, 적색광으로
꽃눈의 형성은 적색광, 자색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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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에게 씨앗이 공급되는 두 가지 체계(출처; Almekinders와 Louwaars, 1999).


농민에게 씨앗이 공급되는 체계에는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존재한다.
하나는 지역 안에서 공급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식적 체계를 통한 것이다.
지역 체계에서는 지역 안에서 농민이 직접 재배하고 수확한 작물의 씨앗을 갈무리해서 다시 씨앗으로 활용하든지, 다른 농민과 씨앗을 나누거나 교환하여 재배하든지, 아니면 종묘상 등을 통해 씨앗을 구입하여 사용하는 방식으로 씨앗이 유통된다.
한편 공식적 체계에서는 종자은행에서 보관중인 유전자원을 육종가가 받아서, 그걸로 증식을 하거나 새로운 품종을 육종해 품질 검정을 거친 뒤 농민에게 공급되는 식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두 가지 경로가 모두 작동하고 있다. 토종씨드림이나 여타 토종 씨앗 동호회 등의 활동을 통해 씨앗 나눔이나 교환이 일어나고 있고, 직접 씨앗을 받아서 쓰는 소수의 농민과 시장을 통해 구매하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존재한다. 또한 종자은행 등에서 토종 씨앗을 받아 증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거나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으며, 기존 개인육종가들은 여전히 공식적 체계를 통해 종자의 판매까지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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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남아프리카에서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는 이 아주머니 좀 보세요.
한국의 농촌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모습 아닙니까?

농사는 만국공통어입니다.

아무튼지간에, 남아프리카에서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1. 토종 씨앗은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다. 또 가뭄 같은 거에도 잘 견디어 수확량도 괜찮다. /한국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2. 씨앗 나눔으로 지역사회를 결속시킨다. /아쉽지만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 이후 농촌 사회의 결속력이 약해지면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지요.

3. 토종 씨앗을 재배하는 농민의 자부심이 강하고, 그를 통해 문화의 온전함도 지킨다.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잘 짓는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기품이 비슷한가 봅니다. 씨앗을 지킨다는 건 단순히 씨앗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연계된 문화를 보전한다는 맥락이 있지요. 씨앗을 보전함으로써 지키게 되는 농법, 식문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4. 토종 씨앗은 위협을 받고 있다. /이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정부에서는 토종 씨앗을 지키는 소농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정책적 지원을 하라고 권합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소농과 그들의 토종 씨앗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활동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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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의 3요소; 사회적으로 공정할 것. 경제적으로 돈벌이가 될 것.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토종 씨앗을 여기에 대입해 생각하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농법으로 토종 씨앗을 농사짓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누구나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일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 경제적으로 돈벌이가 되느냐로 가면 쉽게 수긍할 수 없다.

토종 씨앗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선 이걸로 생계를 해결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생계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업농인 사람들은 누구나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나쁘지 않다. 사회적, 환경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걸 지킴과 동시에 그걸도 생계도 해결하면 얼마나 이상적이고 좋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아직 녹록치 않다. 그걸 사먹을 소비자들의 인식도 아직은 낮은 수준이고, 그 말은 곧 토종 농산물을 사먹기 위해 선뜻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정부 차원에서 이를 보전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정책적, 제도적,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건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저 종자산업을 위해 토종종자를 찾아다 종자은행에 저장해놓고 그걸 연구자나 기업이 이용하도록 하는 일만 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부 뜻이 있는 개개인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모임을 꾸려서 토종 씨앗을 지속가능하게 보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노력하며 현실 속에서 답을 만들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사람들의 노력이 잘 결실을 맺으면 좋겠다. 토종 씨앗도 박물관의 먼지 쌓인 하나도 쓸모없는 그런 전시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실생활에서 소비되고 유통되고 팔려야 한다. 요즘은 기업들이 앞장 서서 그짓을 하고 있어 아주 눈꼴이 시더라. 풀00에서 토종 오리알태 콩나물을 판매하고 있고, 이00에서는 아예 국산의 힘이라는 마케팅을 펼치고 있고, C0에서는 종자부터 식품까지 아주 휘어잡고 있더라. 그렇게 가면, 토종을 지키는 개인은 그저 하청을 받은 계약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셈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다. 그래도 그들이 끼면 판로도 확실히 보장되고, 그건 즉 생계를 유지하기에 참 좋은 수단이 되니 그걸 함부로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약삭빠른 기업 말고 누가 그들의 그간의 노력에 대해 제대로 대우해주고 인정해주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만 나아가다간 그냥 상품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말 위험은 늘 존재한다. 상품은 시장의 외면을 받으면 소멸되어도 상관없다. 기업이 토종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있어서 그 사업을 하겠는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좋은 상품을 만들었을 뿐이지.

주절주절 중구난방 잡설이 길어졌다. 토종을 지키는 사람들의 노력이 제대로 대우를 받고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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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조선시대까지는 채소 종자의 생산, 유통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약간의 기록이 나타나지만, 역시나 곡물 생산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에 채소 종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채소보다는 곡물이 위주였고, 또 채소의 생산주체가 대농이 아닌 소농이 중심이었으며, 저장시설이나 운송수단의 부족으로 도시에 가까운 근교에서만 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산의 열무라든지, 뚝섬의 배추 등이 유명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종자회사로는 1916년 일본인이 세운 부국원을 시작으로, 이에 자극을 받은 조선인들이 1920년대 세운 조선농원, 경성채포원, 우리상회 등이 있다. 부국원에서 일하던 요시자와는 1928년 현재의 명동에 경성종묘원을 세우고, 1937년 일본의 다키이 종묘가 조선 다키이 종묘를 설립해 영업을 시작한다. 일본인 종자회사의 경우 전남과 경남, 제주도 일원에서 채종한 무(주로 궁중 무) 종자를 전국 각지의 소매상에게 판매했고, 이것이 지방의 오일장 난전에서도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인 종자회사는 주로 농가에서 직접 채종한 종자를 수집하여 판매하는 형태를 취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로 판매되는 채소 종자는 김장거리인 무와 배추였다. 개성배추, 서울배추, 일본에서 수입한 궁중 무는 물론, 중국에서 수입한 포두련, 지부 같은 결구배추와 직예와 화심, 산동 같은 반결구배추가 주로 판매되었다. 인기는 단연 결구배추였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일본에서 종자를 수송하기 어려워지자 국내에서 채종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소유의 종자회사는 한국인에게 불하가 되는데, 다키이 종묘의 경우 多起李 종묘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북쪽에서 종묘업을 하던 정순보와 이춘섭, 최덕환이 남으로 넘어와, 각각 서천과 부산(흥농종묘사), 서울에서 종묘업을 이어간다. 1954년 진주 농업시험장에서 근무하던 김원덕은 한국 최초의 1대잡종(F1)인 진주교배1호 오이 품종을 발표하고, 이후 1961년 제일종묘를 설립한다. 한편 이 시기에 활동한 우장춘 박사는 한국 채소 종자산업에 한 획을 긋는다. 한국의 채소 종자산업은 우장춘 박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우장춘 박사로 인하여 채소의 육종과 종자 생산의 기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 채소 종자 관계법령인 '농산종묘법'이 발효됨에 따라 종묘업자들이 본격적으로 종자 사업에 임하게 된다. 각 종자회사의 육종 연구농장에서 1대잡종 품종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여 보급함에 따라 농민들도 점차 그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신품종을 선택하게 된다. 이에 종자회사들은 우수한 품종의 고품질 종자를 생산하는 데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

1965년에는 한국 종묘생산협회가 발족되면서 국가에서 관리하던 채소 종자의 수급과 수입종의 수급을 협회가 관할하게 된다. 당시 한국에서 개발된 1대잡종 품종은 아직 많지 않아 주로 일본에서 수입한 품종을 재배하는 농가는 높은 소득을 올렸다. 이에 일본에서 종자가 밀수입되기까지 하여 경남 일대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수입을 통제하고 협회의 회원에게만 종자 수입권을 부여하여 여러 종자회사들이 협회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농림부에서는 채소종자 수급계획에 따라 수입물량을 확정하고, 이를 놓고 협회가 회원들의 등급에 따라 수입량을 할당해주었다. 각 종자회사는 서로 더 많은 물량을 할당받기 위해 사활을 걸고 경쟁을 하며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갈등은 1991년 종자의 수입이 자유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0년대는 종자업계에 지각변동이 심하게 일어난 시기이다. 1973년 '종묘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종자의 관리규정이 강화되어 이를 따르지 못하는 종자회사는 자연도태되며 종묘상으로 전락했다. 한편 규정된 시설을 구비하고 규정된 수의 기술자를 확보한 새로운 종자회사들이 탄생하는데, 이때 업계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출신과 뜻을 지닌 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1976년 신동식이 동아종묘를 인수하며 설립한 서울종묘가 있다. 1981년에는 국내 농약회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한농이 종자업계 3위인 제일종묘를 인수하면서 종묘업을 시작하고, 수원에서 흥농종묘의 총판을 하던 고희선은 채소종자의 생산과 육종 사업에 뜻을 두고 농우종묘를 창업한다. 한농은 이후 1995년 동부그룹에 인수된다. 

1985년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종묘업계는 다시 변화를 겪고, 2000년대에는 기존 종자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새롭게 창업을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90년대 말 다국적 농기업이 국내 종자회사들을 앞다투어 인수합병하게 된다. 1996년 스위스의 노바티스는 농진종묘를 인수하고, 이듬해 서울종묘를 인수하게 된다. 이후 1998년 한국 신젠타 종묘로 이르을 바꾸어 지금이 이르고 있다. 또 멕시코의 세미니스는 1997년 중앙종묘와 흥농종묘를 동시에 인수하며 한국 채소종자 시장의 50% 가까이를 점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미니스도 2008년 몬산토코리아에 인수되게 된다. 일본의 사카타 종묘는 예전부터 한국의 청원농상종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1999년 이를 인수하며 사카타 코리아로 새롭게 출범한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조선과 관련이 있던 다키이 종묘는 농민들에게 종자에 대한 평이 좋았는데, 1991년 종자 수입이 개방되자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여 활동하다가 2002년 여주에 연구농장을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상 [한국채소종자산업발달사] 2장 채소종자 산업의 발달 과정에서 요약 발췌.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채소 종자도 60년대 이전에는 주로 집에서 채종을 하는 관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종자회사들은 새로운 품종을 육종하여 개발하는 일보다 농가에서 그렇게 자가채종한 종자를 수집하여 판매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후 60년대는 한국전쟁의 여파 등으로 아직 종자의 생산기반이 빈약하여 주로 예전부터 재배하던 일본의 수입 품종을 들여와 판매하는 일에 치중하다가, 70년대를 거치며 점차 생산기반을 마련하며 80년대에 들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집집마다 여러 토종 채소들을 재배하여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이후 80년대 산업화가 완성되는 시기와 맞물려 더욱 심해진 이농현상과 도시와 노동자 계층의 성장 및 소득 증가에 따른 채소 수요의 증가, 고속도로의 개통 등 운송 및 저장시설의 발달 등이 농촌에서 토종 채소들을 밀어내고 신품종들이 자리를 잡게 하는 데 한몫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또 모르죠. 시장에 내다 팔 것들은 신품종으로 심되, 집에서 먹을거리로 이용할 채소들은 예전부터 심어오던 것이 계속 남아 있었는지도 말이죠. 실제로 토종 씨앗을 수집하러 나가보면 노농들의 경우 아직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곤 하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채소종자산업발달사를 들여다보니 한국에서 신품종 채소들이 널리 퍼진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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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식량작물(벼, 콩, 보리, 옥수수, 감자)의 경우 한국 종자시장의 규모는 2005년 기준으로 연간 약 500억 원으로 전체 종자시장의 9%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채소는 시장 규모가 1150억 원으로 전체 시장규모를 5811억 원으로 보았을 때 약 26%를 차지한다.

식량작물의 종자시장 규모가 그 재배면적(전체의 61.8%)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낮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첫째, 식량작물의 종자는 갱신, 즉 매년 새로운 씨앗으로 바꾸는 일이 20~30%에 불과하다. 이는 이들 작물 대부분이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까닭이다. 둘째, 정부에서 종자의 생산비를 일부 지원함으로써 단가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자산업법 개정으로 민간의 종자회사에서 식량작물의 종자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해외의 다국적 종자회사들이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유전자변형 작물을 개발한 데에는 종자시장에서 수익을 올려야 한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막대한 연구비를 투자해 품종보호법 또는 지적재산권으로 강력하게 보호받는 신품종 -이라 쓰고 유전자변형 작물이라 읽는다- 을 개발하여도 그것을 팔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면 주주와 기업의 이익에 반하여 그러한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시장이 뒷받침된다면, 용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아닌가?

한국 농촌경제연구원의 [종자산업의 동향과 국내 종자기업 육성 방안]이란 보고서를 보면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민간기업 육성을 통해 종자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첫째, 식량작물의 민간이양을 통해 종자시장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공급가격 현실화로 종자가격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으며, 민간부문이 참여하기 위한 기반 구축이 미흡한 실정이므로 점진적 참여를 유도하는 단계별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개인 육종가 활용과 인력양성으로 민간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 셋째, 국내 종자생산 기반을 조성하고 이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종자기업의 국내채종 전환에 대해 단기성이 아닌 지속 지원이 필요하며, 간척지 등을 활용한 대규모 종자생산기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넷째, 수출 활성화를 통해 종자기업의 규모화를 유도하도록 한다. 다섯째, 품종보호제도의 실효성을 제고시켜 개발자 보호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의 종자산업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림짐작을 할 수 있다. 앞으로 식량작물의 종자시장도 민간에 개방하고, 이에 기업들은 수익을 위해 연구개발비를 투자하여 첨단 기술을 적용한 -유전자변형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 신품종을 개발하여 시장에 출시할 수 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대학과 연구기관에 예산을 투자하여 인력을 육성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은 민간기업과 적극적인 산학협력으로 기술의 개발과 활용에 몰두하며, 민간기업은 시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연구개발비에 의해 첨단 기술을 적용한 곡식 종자의 가격이 기존 정부의 지원금을 받던 시절보다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생산비 증가로 이어지고, 가뜩이나 지금도 수익성이 떨어지는 벼를 중심으로 한 식량작물의 농사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무언가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겠지만, 현재의 쌀 시장을 지켜볼 때 그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종자산업 활성화를 위한 종자시장의 규모 확대, 이를 위한 식량작물 종자시장의 개방 등의 수순이 한국 농업의 앞길에 놓인 일이라면, 앞으로 이것이 농민의 삶에는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그닥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농민이 더욱더 단순생산자의 지위로 전락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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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토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8년이다. 나는 2002년 무렵부터 귀농에 관심이 있어 농사 경험이라도 쌓자는 생각으로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당연히 농사는 유기농업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농사를 짓다가 나의 눈은 자연스레 전통농업으로 향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농약과 화학비료 같은 농자재 없이도 어떻게 농사를 지었을까 하는 점이 너무 궁금했고, 당시의 좋은 기술이 있으면 지금 되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흙살림에서 조직한 ‘전통농업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우리 위원들은 노농들의 경험을 살피고자 전국 곳곳을 다니며 그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했다. 그렇게 몇 년을 다니면서 살펴보니 옛날 농사법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노농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러한 농법은 희미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의 흔적도 없이 말만 남아 있었다. 물론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로 쟁기질을 하는 단양의 할아버지는 여전히 예전의 방법을 활용해 두둑을 지어 농사를 짓고 있었고, 풀을 매는 방법이나 작물을 돌보는 방법 곳곳에 예전 농법들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온전한 모습 그대로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너무 파편화되어 그걸 온전한 형태로 간추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딱 하나, 옛날의 것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씨앗이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스마트폰이 그런 위치이겠지만, 농부에겐 씨앗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요즘 농부들은 그러한 씨앗조차 제 손으로 받지 않는 농사를 짓고 있다. 농약방에 가면 수확량이 좋다는 씨앗들이 무수하게 널려 있으니 굳이 애써 씨앗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노농들에게는 적어도 한두 가지의 토종 씨앗이 존재했다. 그렇게 취재와 조사를 마치면 남는 것은 녹음기에 녹음된 노농의 목소리와 봉다리에 담긴 씨앗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돌아와 농지에 심고 가꾸며 씨앗의 숫자를 늘렸다. 그 일의 화룡점정은 농촌진흥청의 의뢰로 2008년에 있었던 “토종 유전자원 수집단”이었다. 안완식 박사를 단장으로 박문웅, 한영미, 안철환 선생과 함께 두 달 여 동안 강화도와 울릉도, 제주도 전역의 마을을 모두 돌아다니며 토종 씨앗을 수집했다. 당시 450여 점의 토종 씨앗을 수집할 수 있었고, 제주에서 수집한 토종 씨앗은 제주 여성농민회총연합에 인도하여, 현재 토종 씨앗 보전운동을 펼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토종 씨앗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토종 씨드림’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나도 그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토종 씨앗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토종은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토종 씨앗이 중요한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농업생물다양성의 교두보’라고 이야기하겠다. 토종과 관련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마치 토종 씨앗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오해이다. 토종만 있으면 농약과 비료가 없어도 유기농업이 가능하고, 토종 씨앗이 신품종보다 훨씬 우수하고 뛰어나며, 토종을 먹으면 없는 병도 고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토종교’는 위태롭다. 믿음의 영역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토종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왜 우리의 농업에서 토종이 사라지게 되었고, 토종에는 어떤 특성이 있으며, 이러한 토종을 왜, 어떻게 보전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고민 없는 맹목적인 믿음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위험하다. 거기에 빠지면 자신만 옳고 다른 건 그르다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러한 태도는 상대를 죽여 없애려 하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그러한 태도로 인해 수많은 토종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우리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 일을 멈추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토종 씨앗이 지닌 함의도 ‘다양성의 공존’에 있다. 


농사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이루어진다. 요즘 식물공장이니 수경재배시설이니 하는 기술들이 개발되면서 마치 사람이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서 생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물론 그렇게 하여 작물을 재배하면 그 기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외부의 오염원으로부터 안전하고, 여러 요소들을 통제하여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겠다. 그러나 거기에는 ‘관계들의 상호작용’이 빠져 있다. 그저 양분만 주입하고, 햇빛을 쪼이든 LED 광원으로 그를 대신하든지 하여 겉모습만 농산물을 생산할 뿐이다. 농사는 일종의 교향곡이다. 햇빛과 바람과 물을 바탕으로 하여 작물을 중심으로 흙과 그속의 다양한 미생물과 지렁이, 땅강아지, 두더지 같은 생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연주를 한다. 농부는 그 교향곡의 지휘자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방향을 지시하며 서로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 도움을 줄 뿐 그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한두 명의 결원은 보충할 수 있겠지만, 전체를 다 담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기농업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유기농업의 ‘유기(有機)’라는 단어는 생물체처럼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음이란 뜻이다. 즉, 농업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물에 이로운 상호작용을 하도록 농사짓는 것이 바로 유기농업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유기농업이 그저 농약과 화학비료 같은 화학 농자재만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인 양 호도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유기농가에서도 비료만 쓰지 않을 뿐 과다한 퇴비를 사용하여 땅을 망가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유기농업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 화학 농자재만 쓰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발생하는 안타까운 일이다. 


유기농업에서는 참가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물론 작물에 해를 끼치는 요소는 달가운 존재들이 아니다. 당장 유기농업을 실천하여 농약을 치지 않으면 병충해가 늘어난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깨어진 균형을 다시 이루기까지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매우 어려워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많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러니 일반적인 농사에 비해 할 일도 많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농업생태계에 참여한 여러 요소들이 다양해지려면 논밭의 주연인 작물도 다양해져야 한다. 수만 평의 논밭에 똑같은 품종의 한 가지 작물만 재배되는 모습에 어떤 사람은 장관이라 여기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겠지만, 어찌 보면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경관이 획일화된 논밭에는 병충해가 찾아오기도 쉽고, 그 작물이 요구하는 양분도 모두 같기에 땅이 혹사를 당하기도 쉽고, 그에 찾아오는 미생물이나 곤충도 다양하지 않을 수 있다. 말 그대로 획일성이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말 실수 가운데 ‘틀리다’는 표현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를 보면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표현하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왜 다른 게 틀린 것이 되었을까 하는 건 나의 오래된 의문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우리 사회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과거 모두가 하나 되어 경제발전을 이룩하자며 온 국민의 군인화가 이루어지고 일반 사회는 군대의 연장선이 되었다.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몰려 처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몇 십 년 동안 이어졌으니 우리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받아들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다양성들을 무시하고 짓밟아 왔다. 성소수자, 병역거부자, 장애인, 여성주의자 등등 이 사회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사람들의 인권은 무시되고 짓밟혔다. 그 모습이 우리의 논밭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것이다. 수확량(경제성장)이 떨어지는 토종 씨앗(다양성)은 빨갱이로 내몰리며 논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농민들 역시 사회적 존재가 아닌가? 사회에서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심지어 신품종 통일벼를 보급하는 초창기에는 통일벼 이외의 다른 품종의 토종 벼로 못자리를 만들면 관련기관의 관리들이 나와 못자리를 밟아 망쳐 버리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에서 토종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최선이라고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토종은 토종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토종 씨앗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어떠한 토종들이 있는지 이야기하겠다.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토종 씨앗에 대한 이해가 넓어져 토종 씨앗이 농업생태계에 비집고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한 일이 농업은 물론, 우리 사회에 다양성이 확산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토종 씨앗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자.



후기...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한번 구매해서 읽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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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싸이클론 아일라Aila가 인도 동부를 파괴했다. 시속 120km의 속도를 기록한 아일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망그로브 숲이 끊임없이 이어진  순다르반스Sundarbans를 강타했다. 이곳은 벵갈만의 강가Ganga-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삼각주에 위치해 있다.

그 태풍은 수백 명의 사람과 가축들을 죽이고, 수백만 채의 가옥을 부수고, 도로를 끊어 놓았다. 강풍과 높은 파도가 섬을 보호하는 진흙의 제방을 뛰어넘었다. 이로 인해 벵갈만의 바닷물이 넘쳐 마을들이 물에 잠기고, 음용수를 못 마시게 만들며, 약12만5천 헥타르의 농경지에 영향을 미쳤다.


서벵갈 Vrihi 종자은행의 설립자 Debal Deb 씨. 2009년의 태풍으로 농지가 바닷물에 잠긴 뒤 순다르반스에 염분 저항성 토종 벼라는 희망을 가져왔다. Photo by Jason Taylor.



태풍으로 인한 홍수가 가라앉자, 토양에 허연 소금의 선들이 나타났다. 예전에 재배하던 현대의 다수확 벼 품종은 염분이 있는 토양에서 재배할 수 없다. 벼농사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삼각주 거주민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재앙이 있고 한 달 뒤, 민간의 벼 종자은행 브리히Vrihi의 설립자이자 식물학자 Debal Deb 씨가 아일라에 피해를 입은 순다르반스의 세 마을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종자은행에서 토종 벼 네 품종 —Talmugur, Lal Getu, Sada Getu, Nona Khirish—을 가져왔다. 그 토종 벼들은 토양에 염분 농도가 높아도 견딜 수 있는 품종들이다. 

Deb 씨는 이 염분 저항성 품종들을 1997년 순다르반의 농민들에게서 수집했다. 그의 채종포에서 그는 세심한 선발육종을 통하여 두 가지 품종 —Lal Getu, Sada Getu— 의 염분 저항성 한계를 2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그날 Deb 씨가 가져온 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토종 벼 품종은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한 것들이다. 그러나 현대의 다수확 벼 품종이 들어오면서 지역의 품종들은 쓸모없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인도의 극소수 벼 보존가들이 그 가운데 일부를 관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Deb 씨의 종자은행은 1000종 이상의 토종 벼를 보유하며, 2800평의 농장에서 재배하여 농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다.  그가 다시 순다르반 지역에 가져온 것과 같은 이러한 품종의 일부는 염분 저항성이 있다. 다른 품종들은 가뭄이나 홍수에 더 잘 견딜 수 있기도 하다.

Deb 씨가 네 가지 염분 저항성 품종을 2009년 6월에 순다르반스 지역에 가져왔을 때, 단 한 품종만 여전히 그 지역 농민들이 재배하고 있었다. 나머지 세 품종은 그들의 기억 속에나 존재하던 것이었다.

처음에 농민들은 염분 저항성 품종을 의심했다. Deb 씨는 “그들은 정부에게 여러 종자를 받았지만, 그중 아무것도 아일라 이후 그들의 염분기 많은 토양에서 자라지 않았다. 내가 가져다 준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을 보자 매우 행복해 했다.”

그해, Deb 씨는 11명의 희망자에게 네 가지 품종을 나누어주었다. 


염분 저항성 벼는 열대성 태풍 아일라로 인해 농지에 바닷물이 침투된 순다르반스 지역의 농민들을 돕는다. Photo courtesy of ENDEV.


이듬해 그는 ENDEV –A Society for Environment and Development라고 불리는 콜카타에 위치한 단체와 함께 돌아왔다. ENDEV의 대표 Asish Ghosh 씨는 다른 출처를 통해 더 많은 염분 저항성 종자를 수소문해서 구했다.2010년과 2011년에 ENDEV는 Deb 씨와 지역의 다섯 단체와 함께 협력하여 순다르반 지역의 농민들에게 이 종자들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품종들은 재정적으로도 유리하다”고 Ghosh 씨는 설명한다. “그 종자들은 비료나 농약 같은 값비싼 투입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소를 먹이고 지붕을 이을 더 좋은 품질의 볏짚을 생산한다.”

2013년, Deb 씨는 추가로 Matla와 Hamilton이란 두 가지 벼 품종을 다시 도입했다. 이는 서벵갈의 다른 식물학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WWF-India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 품종들은 농민들이 어떤 제방도 없는 지역에서 재배했을 정도로 높은 염분 저항성을 갖는다. 

2014년 현재, 70명 이상의 순다르반스 지역의 농민들이 여섯 가지 염분 저항성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고 Deb 씨는 말한다. 

순다르반스에 있는 Jhupkhali 마을에 사는 52세의 농부 Radheshyam Das 씨는 비그하bigha라는 400평의 토지 단위로 측정했는데, 벼농사가 잘 되어 행복하다. “아일라 이후 다수확 벼 품종의 수확량은 1비그하에 2가마로 떨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해, 염분 저항성 품종으로 1비그하에 7가마의 수확을 올렸다.”

순다르반스에 있는 Mousuni 섬의 또 다른 마을에 사는  농부 Sindhupada Middya 씨는 염분 저항성 품종과 현대의 품종으로 실험을 했다. 그가 그 품종들을 재배한 논은 제방 근처에 있어 만조일 때 자주 바닷물이 넘어오곤 한다. 염분 저항성 품종이 300평 미만의 농지에서 240kg을 수확한 데 반하여, 다수확 품종은 전혀 수확이 없었다.


순다르반스의 농민들은 토종 염분 저항성 벼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토종 벼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그들의 탄력성을 증대시켰다.  Photo courtesy of ENDEV.



그의 성공에 섬의 다른 40명의 농민들이 고무되어 이 염분 저항성 품종을 채택했다. WWF-India팀의 일원인 Soma Saha 씨에 의하면, 기후변화 적응전략의 일환으로 이러한 벼 품종들을 다시 도입하고 있다고 한다.

순다르반스의 다른 지역의 농민단체는 토종 씨앗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었다. 노랫말에서는 그 씨앗의 탄력성고 그것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행복과 왜 그 씨앗을 활용해야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앞으로 기후는 온난해지고, 해수면은 상승하며, 강우 패턴은 변화하고, 아일라 같은 태풍은 점점 빈번해짐에 따라 순다르반스의 섬들은 침식되고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현대의 벼 품종들은 계속해서 농경지에 부적합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Ghosh 씨는 과학과 전통지식을 결합함으로써 농민들이 자신과 지역공동체를 위해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우리가 이런 품종들을 개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Ghosh 씨는 말한다.  “오랜 옛날부터 농민들이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단순히 그들의 오랜 전통지식과 씨앗이 있는 곳을 재발견하여 농민들이 그걸 다시 활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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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품종을 육종할 때 토종 종자가 가진 특성이 얼마나 소중하게 쓰이는지 보여주는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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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책을 발견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지역사회 종자은행은 1980년대 말쯤 처음 나타나 국내외 비정부조직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이 책은 그들의 발달에 대한 세계적 검토를 제공하기 위한 첫 걸음이자, 폭넓은 사례를 포함한다.

다양한 유형의 지역사회 종자은행을 개척한 국가는 방글라데시, 브라질, 에티오피아, 인도, 네팔, 니카라과, 필리핀, 짐바브웨 등이다. 북반구에서 특별한 유형의 지역사회 종자은행은 종자 지킴이 네트워크로 알려지며 나타났다. 그러한 네트워크는 여러 나라로 퍼지기 전에 호주, 캐나다, 영국,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ㅇ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자은행의 숫자와 다양성이 성장했다. 예를 들어, 네팔에서는 100개 이상의 자체적으로 설립된 지역사회 종자은행이 있다. 순수하게 종자를 보존하는 곳부터 상업적 종자를 생산하는 곳도 있다. 브라질에서는 지역사회 종자은행이 다양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놀랍게도 25년의 역사에도 지역사회 종자은행은 그 숫자와 조직적 다양성, 지리적 범위에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 역할과 기여에 대한 인식은 빈약한 상태이다. 이 책은 그들의 역사와 진화, 경험, 성공과 실패(그리고 그 이유), 과제와 가능성을 검토한다. 그것이 농업생물다양성과 보존,그리고 그들의 식량주권과 식량안보에 대한 기여라는 측면의 중요한 간극을 메울 것이다."



Community_Seed_Bank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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