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내가 변변치 못하지만 만일 기후의 그 까닭을 논한다면, 《주역》건괘乾卦의 원元, 형亨, 이利, 정貞 네 글자와, 《서경》요전堯典의 희羲, 화和와 네 중仲을 명한 글에 이미 모두 설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만일 자세히 구분한다면, 대개 사철의 기운은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기生氣요, 입춘부터 춘분까지는 궐음풍목厥陰風木이 주관한다. 둘째는 서기叙氣며, 청명부터 소만小滿까지는 소음군화少陰君火가 주관한다. 셋째는 장기長氣요, 망종芒種부터 대서大暑까지는 소양상화少陽相火가 주관한다. 넷째는 화기化氣며, 입추부터 추분까지는 태음습토太陰濕土가 주관한다. 다섯째는 수기收氣요, 한로寒露부터 소설까지는 양명조금陽明燥金이 주관한다. 여섯째는 장기藏氣인데, 대설부터 대한까지는 태양한수太陽寒水가 주관한다. 이것들이 어우러져 한 해의 기운을 이루는 것이다.
이 여섯 기운은 72후候가 되는데, 두 기운이 각각 두 달씩을 맡는다. 주공周公의 시훈時訓에 보이는 것을 여불위呂不韋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기재하였고, 한유漢儒들은 《예기禮記》에 끼워 넣었으며, 월령은 후위後魏 이후로는 또한 역서曆書에도 기재하여 모두 《주역》의 궤범을 따랐다고 했다. 그러나 전해진 것이 경經의 뜻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금수와 초목이 북쪽에 많이 난다”는 것은, 아마 한나라 이전의 선비들이 다 양자강 북쪽에서 났기 때문인 듯하다. 후세의 강남에서 비록 거유巨儒로 불리던 이들도 그 이름을 다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청나라 강희황제의 《월령집요月令輯要》가 있는데, 오정정吳廷楨이 총괄해서 편수하였다.
그 한 달 6후候의 물건에 의심나는 것을 부송경傅松卿의 《하소정해夏小正解》를 참고로 대강 해석하여, 어린 학생들에게 분명히 구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1월의 6후

동풍이 언 것을 푼다
《하소정해》에 “때때로 준풍俊風이 부는데, 준俊이란 크다[大]는 것이며, 큰 바람이란 남풍南風을 말함이다. 어찌하여 남풍을 크다고 하는가 하면, 물이 어는 것도 반드시 남풍에서 얼고 얼음이 녹는 것도 반드시 남풍에서 녹으니, 반드시 남풍에서 나고 남풍에서 죽으므로 크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월령에는 “동풍에 언 것이 풀린다” 하고,《하소정해》에는 “남풍에 얼음이 풀린다” 했으니 어째서일까?
동풍이란 곧 《이아爾雅》의 ‘곡풍谷風'이란 것으로 《시경》에, “솔솔 부는 곡풍이 날을 흐리게도 하고 비를 내리게도 한다”고 했으니, 음우陰雨가 아니고서는 얼어붙은 것을 녹이기 어려우므로, 얼음이 녹는 데는 준풍을 말하였고, 언 것이 풀리는 데는 곡풍을 말한 것이 아닐까.
동풍이란 바로 명서풍明庶風이다.
또 《하소정해》에, “추운 날씨가 변하고 언 것이 풀린다[寒日滌凍塗]. 척滌이란 변한다는 것으로 날씨가 변하여 다사로워진다는 것이고, 언 것이 풀린다는 것은 밑은 얼었으나 위는 녹는다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얼음이 풀릴 때쯤 질척질척해짐을 말하는 것이다.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비로소 움직인다
《하소정해》에, “정월에 벌레가 겨울잠으로부터 깨어난다[正月啓蟄]는 것은, 겨울잠에 들어갔던 벌레들이 비로소 나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로소 움직인다[始振]는 것은, 바로 분발하여 나오는 것이다. 8월에 굴문을 좁히고, 9월에 겨울잠으로 들어가 모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벌레들이 이제 비로소 잠에서 깨어 나오는 것이다.

고기는 떠서 얼음을 등에 진다
《하소정해》에, “척陟은 오르는 것이고, 얼음을 진다고 이른 것은 겨울잠에서 풀려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고기는 양陽을 따라다니는 것이므로 봄ㆍ여름에는 떠서 놀고, 가을ㆍ겨울에는 잠겨서 가만히 있다.
정월에 삼양三陽이 생기면 그 양춘의 기운을 따라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얼음이 아직 다 녹지 않았으므로 등에 얼음 조각을 지고 다니는 것이다.

달獺이 고기로 제사를 지낸다
《하소정해》에, “달이 고기로 수제를 지낸다[獺獸祭魚]. 그 꼭 수獸자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같은 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많이 잡은 것을 말한 것이니, 그 제사를 지낸 다음 먹는 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 시월에 승냥이가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豺祭獸]은 제祭라 하고, 달이 고기로 제사지내는 것은 수제獸祭라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승냥이는 같은 유로 제사를 지내지만, 달의 제사는 같은 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獸라고 한 것은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 《물리소지物理小識》에, “달이 고기로 방方에 제사지내니 고기는 땅에 제사지내는 것이다” 했으니, 달이 고기로 제사지내는데 땅에 제사지내는 것이 아닐까.
달에는 산달山獺ㆍ수달水獺ㆍ해달海獺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여기 고기로 제사를 지낸다는 달은 마땅히 수달이 되어야 하겠다. 물속과 땅 위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아다가 땅에다 전奠을 드리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삼가 우리 할아버지가 찬撰한 《예기억禮記臆》 왕제王制 하下를 상고하건대, “달이 고기로 제사를 지낸 다음이어야 우인虞人이 못에 들어간다고 한다. 일찍이 달이 고기를 진열해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는데, ‘새끼 달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추더라’고 하니, 아마 팔일무八佾舞의 뜻일 것이다” 하였다. 《요사遼史》에, “숲속의 승냥이와 산기슭의 달이 교체(郊체(禘))의 시초가 되었다” 하였다.

기러기가 북쪽에서 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기러기가 북쪽에서 온다[候雁北]”는 것은 기후를 따라 오고 가는 기러기가 봄기운을 따라 북쪽에서 온다는 것이다.

초목의 싹이 움직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초목의 뿌리에 양기가 비로소 돌아 갈고리 같은 새싹이 되려고 생기生氣가 움직이는 것이다.


2월의 6후


복숭아꽃이 처음 핀다
《하소정해》에, “매화ㆍ살구ㆍ이도柂桃는 꽃이 피는데, 이도는 산복숭아[山挑]다” 하였다. 내가 청 고종淸高宗의 《어제집御製集》을 상고하건대, “북쪽 지방의 복숭아는 살구보다 먼저 꽃이 피고, 남쪽 지방의 살구는 복숭아보다 먼저 꽃이 핀다”고 하였으니, 2월에 복숭아꽃이 처음 핀다는 것은 혹시 북쪽 지방의 복숭아꽃이 먼저 핀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지금은 살구꽃이 먼저 피고 복숭아꽃이 뒤에 핀다.

꾀꼬리가 운다
《하소정해》에, “창경倉庚이란 상경商庚이고, 상경이란 장고長股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창경이란 속칭 아이새阿伊鳥라고 하는데 일명 규천자叫天子라고도 한다.
《시경》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꾀꼬리[倉庚]가 울면, 여자는 아름다운 광우리를 가진다”고 하였는데, 꾀꼬리가 우는 것은 누에치기를 시작하는 철이므로 특별히 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매가 변하여 뻐꾹새가 된다
《하소정해》에, “매가 뻐꾸기로 된다[鷹則爲鳩]. 매라고 한 것은 그 죽일 때를 말한 것이며, 뻐꾸기라 한 것은 그 죽이지 않을 때를 말한 것이다. 착하게 변하여 어진[仁] 데로 갔기 때문에 갖추어 말한 것이니, 곧 그 말을 극진히 한 것이다. 뻐꾸기가 매가 된다[鳩爲鷹]는 것은 변하여 어질지 못한[不仁] 데로 갔기 때문에 그 말을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으니, 말을 극진히 하고 극진히 하지 않는 사이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판명되는 것이다.

제비가 온다
《하소정해》에, “와서 내린 제비는 눈을 돌려 바라본다[來降燕乃睇]. 제비[燕]란 새이고, 강降이란 내려온다는 것인데, 와서[來]라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처음 나오는 것[始出]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강來降이라고 한 것이다. 바라본다[乃睇]는 것은 무엇인가. 체睇라는 것은 눈을 돌려 바라보는 것[眄]으로, 집 지을 만한 곳을 살펴보는 것이다. 모든 새들의 집을 다 둥우리[巢]라고 하는데, 유독 제비의 집[穴]만을 집[室]이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흙을 물고 인가人家로 와서 사람이 있는 곳까지 들어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제비가 처음 진흙을 물어 나를 때, 반드시 네 무더기를 쌓아 올리고는 한 오라기의 풀을 가로지른다.” 했으며, 《농서農書》에, “제비 둥우리가 깨끗지 못하면 논[田] 속에 풀이 많이 나며, 제비가 갑자기 떼를 짓는 것은 비바람[風雨]이 올 전조이다” 하였다.

천둥이 마침내 소리를 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우레[雷]는 2월에 땅속에서 나와 1백80일을 있다가, 8월이 되면 땅 속으로 들어가 1백80일을 있는다. 땅속으로 들어가서는 뿌리를 감싸 기르고[孕育], 겨울잠 자는 벌레들을 보호하며 성음盛陰의 해害를 막아 준다. 땅 위로 나와서는 꽃과 열매를 기르고, 숨어 있고 엎드려 있는 것들을 일으켜 세워[發揚] 주며, 성양盛陽의 덕을 드러내 준다. 들어가서는 능히 해를 제거해 주고 나와서는 이로움을 널리 확대시키니 임금의 상象이라 하는 것이다.

비로소 번개가 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비로소 번개가 친다.”는 것은, 번개가 치면 반드시 천둥[雷]이 있는데, 여기에 “비로소 번개가 친다.”는 것으로 한 후候를 삼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경방京房의 후괘候卦에, “해괘解卦의 초육효初六爻가 우레가 되니, 그것이 소리를 내는 한 후괘候卦이고, 대장괘大壯卦의 초구효初九爻가 비로소 번개를 치는 한 후괘가 된다” 했으니, 우레와 번개를 각각 나누어 한 후로 삼은 것은 혹 경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옛사람의 정미精微로운 견해를 함부로 고칠 수 없다.


3월의 6후

오동꽃이 피기 시작한다
《하소정해》에, “오동꽃이 핀다[拂桐芭]. 불拂이란 것은 오동꽃이 피는 철을 이름이며, 어떤 이는 오동꽃이 처음 피어나서 흐드러지게 야들거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오동꽃이 처음 피어날 때 붉은 빛이 짙으면 가뭄이 들고 흰 빛이 짙으면 장마가 진다”는 말이 있는데,《농가험막로결農家驗暯澇訣》을 보니 이것은 농사의 점험설占驗說에 불과했다.

들쥐가 변하여 메추리가 된다
《하소정해》에, “여鴽는 메추리[鵪]인데, 변하여 좋게 되었으므로 그 말을 극진히 한 것이며, 8월에 메추리가 쥐로 되는 것[鴽爲鼠]은 변하여 좋지 않게 되었으므로 그 말을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정석린程石麟의 《암순보鵪鶉譜》에, “월령月令의, ‘3월에 쥐가 변하여 메추리가 된다.’고 한 주注에, 「들쥐[田鼠]는 두꺼비[蟆]의 유이고, 여鴽는 메추리[鶉]이다」하였는데, 한겨울 두꺼비는 흙을 머금고 겨울잠을 자니, 토土가 그 성품이 되는 것이다. 봄이 와서 목기木氣가 왕성한 철이 되면 목기가 그 토기土氣를 이겨 깎으므로[剋殺] 기를 펴지 못하다가, 3월이 되어 토가 다시 생하여 토와 목이 서로 도와서 화火로 변하면 능히 깃을 세우고 나는 까닭에 메추리의 성품은 화火에 속한다. 그러므로 성질이 강하여 싸움질을 잘하며 여름이면 북쪽으로 가고 겨울에는 남쪽으로 향하여 추위를 피한다”고 하였다.
필만술畢萬術은, “두꺼비가 외[瓜]를 얻으면, 메추리[鶉]가 되는데, 메추리란 암鵪이다” 하였다.


무지개가 처음 나타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무지개란 것은 하늘과 땅의 사특한 기운이니, 사시四時를 막론하고 나타남이 마땅한데 3월에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이지만, 보이는 데가 없다. 삼가 우리 할아버지가 찬한 《예기억禮記臆》 월령해月令解를 상고해 보니, “무지개가 처음 나타난다[虹始見]”는 글귀 밑에, “무지개는 역시 벌레가 뿜어낸 입김이다. 홍虹ㆍ예蜺ㆍ체螮ㆍ동蝀자가 모두 벌레 충虫변에 썼으니 역시 겨울잠을 자는 것들이며, 무지개는 분홍빛과 초록빛이 고루 안배되어 둥글면서도 이지러진 데가 없이 마치 공인工人이 만들어 놓은 것 같으므로 홍虹자는 공工으로써 짝지은 것이다.
오균택伍均澤이 언덕을 지나다 비늘 달린 갑충甲虫의 서걱대는 소리를 듣고 자세히 보니, 두 마리의 벌레가 나무 밑에서 나오는데, 머리와 꼬리는 뱀 같고 배는 자라 같으며 네 발은 규룡[虯] 같았다. 두 마리가 나란히 나무 위로 올라가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려 김을 뿜어내는데, 입술 사이에서 한 마리는 분홍빛을, 한 마리는 초록빛을 토해 내니, 무지개가 되어 하늘에 뻗쳤다. 그런 다음 다시 나무를 타고 내려와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 말은 《객중한집(客中閒集)》에 나온다” 하였다.
내가 또 상고하건대, 우박[雹]은 도마뱀[蜥蜴]이 토해 내는 것이고, 벽력(霹靂) 가운데도 역시 물건이 있는데 그 모양은 원숭이 같되 작으며 주둥이는 빨고[尖嘴] 날개는 육질肉質로 되어 있는데, 우레소리가 그치면 들어가 칩거蟄居한다고 하며,《본초本草》에 “진육震肉은 독이 없고 어린아이들이 밤에 놀라는 것을 낫게 하며 어른들이 놀라서 생긴 실심증失心症에는 포脯로 만들어 먹거나 날것으로 먹는다”고 했는데, 이 말도《객중한집》에 보인다.
이조李肇는, “뇌주雷州에는 뇌자(雷子)가 많은데 가을이 되면 땅 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자므로 사람들이 파먹는다. 무지개에도 벌레가 있는데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고 봄에는 나온다.” 했으니, 이조의 말과 같다면, 무지개는 무지개를 뿜어내는 물건이 있다는 것이 황당한 말만은 아닌 성싶다.
부평(浮萍)이 비로소 생긴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능수버들 꽃솜[柳絮]과 갯버들 꽃[楊花]이 못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 화하여 부평(浮萍)이 되는 것이다.” 하니, 부평이 처음 생겨나는 철이 마침 능수버들과 갯버들의 꽃이 피었다가 지는 무렵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는 뻐꾹새는 그 날개를 떨친다
《하소정해》에, “뻐꾹새가 운다는 것은 서로 부르기 시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운다[鳴]는 것을 먼저 쓰고 뻐꾹새[鳩]라는 것을 뒤에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뻐꾹새란 것은 운 다음에야 뻐꾹새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월령(月令)의 “우는 뻐꾹새는 그 날개를 떨친다.[鳴鳩拂其羽]”라고 한 소(疏)에서 정강성(鄭康成)은, 뻐꾹새[鳲鳩]가 날 때 그 날개를 서로 치듯 하는 것은 농사를 재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송(宋) 나라 진조(陳造)의 포곡음서(布穀吟序)에는, “사람들이 뻐꾹새가 밭갈기를 재촉하는 것으로 여긴 것은 그 소리에 ‘탈료발고(脫了潑袴)’라 하는 것이 마치 해진 잠방이를 벗으라고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또《농서(農書)》를 상고해 보건대, “뻐꾹새 울음에 돌아오는 소리가 있는 것을 아내를 부르는 소리라고 하는데 날씨가 개고, 돌아오는 소리가 없는 것을 아내를 쫓는 소리라고 하는데 날씨가 궂는다.”고 하였다.
《시경(詩經)》 조풍(曹風) 시구장(鳲鳩章) 주(注)에, “시구는 길국(秸鞠)이고 일명 대승(戴勝)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포곡(布穀)이다.” 하였고,《이아(爾雅)》에는, “갈국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확곡(穫穀)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며, 육기(陸璣)는, “또 격곡(擊穀)이라 하기도 하고 상곡(桑穀)이라 하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견제(肩題)라고도 하며 제(齊) 나라 사람들은 격정(擊正)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본초》(本草)에는, “북쪽 사람들은 발곡(撥穀)이라 하는데, 새매[鷂]와 비슷하나 꼬리가 길다.” 하였다.
《시경》주자(朱子) 주(注)에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이는데, 아침나절에는 윗놈부터 순서대로 먹이고 저녁나절에는 끝의 놈부터 역순으로 먹이어 공평하기가 한결같다.” 하였고, 화곡 엄씨(華谷嚴氏)는, “섬자(剡子)가 이른바, ‘「시구씨(鳲鳩氏)는 사공(司空)이다.」한 것은 시구가 공평하기 때문에 사공이 되어서 수토(水土)를 평정하였다.’ 했다.”라고 하였다.
《본초(本草)》에, “뻐꾹새가 오디를 먹으면 취한다.” 하였다.
시구(鳲鳩)는 《양자방언(揚子方言)》의 주에 이른바 즉 포곡(布穀)인데, 《양자방언》에, “연(燕) 나라 동북쪽 조선 열수(洌水) 사이를 복비(鶝䲹) 음은 복비(福丕)이다.라 한다.” 하였다.
후투티가 뽕나무에 내린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양자방언》에는, 대승후투티를 연 나라 동북쪽 조선 열수 사이에서는 오디새[]라 한다.” 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금경(禽經)》에는, “후투티는 부리가 길고, 털에 무늬가 있으며 머리에는 벼슬이 있다.”고 했으며,《예기》에는, “후투티는 베 짜는 소리를 내는 새[織紝鳥]다.”라고 하였다.

4월의 6후
청개구리가 운다
《하소정해》에, “명역(鳴蜮)이다. 명역이란, 어떤 사람은 ‘두꺼비[屈造]따위다.’ 했다.”고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 누괵(螻蟈)이라 하지 않고 명역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누괵의 울음을 지칭한 것 같다.《예기》월령의, “4월에 청개구리가 운다.”고 한 데 대한 정강성(鄭康成)의 정의(正義)에는, ‘누괵은 청개구리[蝦蟆]이다.’ 하였고, 고씨(高氏)는, ‘누는 땅강아지[螻蛄]이고, 괵은 두꺼비이다.’ 하였다.
《본초》를 상고해 보니, “땅강아지[螻蛄]는 일명 천루(天螻)라 하고, 일명혹(豰)이라 한다.”하였다.《이아》소(疏)에는, “혹(豰)은 또 일명 호서(扈鼠)라 한다.” 하였고, 《광아(廣雅)》ㆍ《고금주(古今注)》에는 모두, “누고는 일명 땅강아지[石鼠]라 한다.” 하였다.
허신(許愼)은, “석(鼫)은 《자서(字書)》에, ‘다섯 가지 기술을 가진 쥐[五技鼠]이다.’ 하였는데, 날 수는 있으나 건물의 지붕[屋]을 지나가지 못하고 나무를 탈 수는 있으나 나무 끝까지는 못 올라가며, 헤엄을 칠 수는 있으나 골짜기를 건너지 못하고 굴을 팔 수는 있으나 제 몸도 가리지 못하며, 달릴 수는 있으나 사람보다 앞서지는 못한다. 구(齁)ㆍ준()ㆍ작서(雀鼠)는 모두 석서(鼫鼠)인데, 석서를 일명 오기서(五技鼠)라고 한다.” 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땅에 불을 놓아 벌겋게 탈 때, 땅강아지[螻蛄]를 그 속에 던져 마음대로 뛰다가 죽도록 버려두면 수놈은 엎어져 죽고 암놈은 자빠져 죽는다.” 하였다.
도홍경(陶弘景)은, “이 물건은 상당히 귀신과 친하므로, 요즘 사람들은 밤에 이것을 보기만 하면 ‘귀신의 사자’라고 하여 흔히 때려 죽인다.” 하였다.
그러나 육전(陸佃)의 《비아(埤雅)》에는, “빈대다.”라고 했으며, 《시경정의(詩經正義)》에는 모(蟊)를 누고(螻蛄)라 하여 문득 “취송(聚訟)이다.” 하였다.
《석상부담(席上腐談)》에는, “월령에, ‘누고(螻蛄)가 울고 지렁이가 나온다.’ 한 것은, 누괵(螻蟈)과 지렁이가 같은 곳에 살면서 함께 울기 때문이리라.” 하였다.
누고의 속명(俗名)은 땅강아지[土狗]라 하기도 하고 하늘강아지[天狗]라 하기도 하고 더러는, 강홍(江虹)이라 하고 납고(蠟蛄)라 하는데 모두 속훈(俗訓)으로 도르래[道兀乃]라 한다.
《이아》유방루(蝚蛖螻)에 대한 주소(注疏)에는 《방언(方言)》을 인용하여 “남초(南楚) 지방에서는 두구(杜狗)라 한다,” 하였다.
《본초》누고 조(條) 밑에 구충석(寇忠錫)의 연의(衍義)에는, “이 벌레는 입하(立夏)가 지난 뒤 밤에 처음 우는데, 소리는 흡사 지렁이 울음소리 같다. 이시진(李時珍) 의 《강목》에서는 누고를 인용하여 쇠를 간다 하였으니, 누고는 소종래가 있다. 최식(崔寔)의《사민월령(四民月令)》에는, “5월 단옷날, 동쪽으로 가는 놈을 잡으면 부인들의 난산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손염(孫炎)의《정의(正義)》에는, “그 모양이 머리는 쥐 같고, 네 다리는 길며, 넓적다리에 날개가 붙었는데, 역겨운 비린내가 나며 날고 뛰기를 잘하고 밤에만 운다.”고 하였다. 그러나 잘 표현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사투리에 땅강아지[土狗]를 하늘밥도둑놈[天飯賊]이라고 부르는데, 머리는 귀뚜라미[蟋蟀] 같고 허리는 가늘며, 옅은 황흑색(黃黑色)을 띠고 있다. 작은 가재[石蟹]처럼 기어다니며, 날개가 없어 날지도 못한다. 낮고 꿉꿉한 곳 돌 사이에 사는데, 우는 소리가 또르르[突兀五]하기 때문에 돌올내(突兀乃)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렁이가 나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이아정의(爾雅正義)》에, “근인(螼蚓)ㆍ원선(䖤蟺)은 대개 음기(陰氣) 때문에 생겨난다.” 하였다.
쥐참외가 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하소정소의(夏小正疏義)》에, “왕부(王萯)의 이삭이 나면 새꽤기[荼]를 채취하니 새꽤기를 채취하는 것은 임금의 자리를 짜려는 것이다.”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하소정해》에 왕과(王瓜)라 하지 않고 왕부(王萯)라고 한 것은 아마도 왕과를 가리킨 것 같다. 왕과의 일명을 서과(鼠瓜)라 하기도 하고 혹은 토과(土瓜)라 하기도 하며, 또《본초》에 자세히 보이는데, 들녘에 많이 나며, 그 뿌리는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자서(字書)》에는, “부(萯)는 풀인데 왕과이고, 요(葽)는 풀인데 왕부다.”라고 하였다.
씀바귀가 이삭이 나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시경》빈풍(豳風) 칠월장(七月章)의, “구월에 암삼을 줍고 씀바귀를 캐며 가시나무를 베어 땔감을 장만한다.” 한 주에, ‘도(荼)는 고채(苦菜)이다.’ 하였고, 또 칠월장의 “사월에 요(葽)가 팬다.”한 소주(小注)에, “여릉나씨(廬陵羅氏)는, ‘조씨(曹氏)는 「지금의 원지(遠志)인데, 그 윗부분을 소초(小草)라 한다」고 했고, 유향(劉向)은 「요는 맛이 쓰기 때문에 고초(苦草)라 한다」 하였다. 《본초》에는, 「원지에는 극울(棘菀)ㆍ요요(繞葽)ㆍ세초(細草) 세 가지 이름이 있는데, 4월에는 양기(陽氣)가 극상(極上)하지만 미음(微陰)이 그 밑에서 태동하므로 요(葽)가 그 음기를 받아 일찍 패는 것이다」 했다.’ 하였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월령에, “씀바귀가 팬다.”고 한 것은 아마도 요인 성싶다.
임천왕씨(臨川王氏)는, “양(陽)이 생기면 일(日)을 말하고, 음(陰)이 생기면 월(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4월은 정양(正陽)의 달로 요가 패는데 월(月)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요가 패는 것으로 음(陰)을 말한 것이다. 4월에 음이 생긴다는 것은, 음의 기운만 먼저 이른다는 것인데, 요는 그 음기를 받아 먼저 패고 매미[蜩]는 그 음기를 받아 먼저 우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에, “고채(苦菜)의 훈(訓)은 씀바귀[徐音朴塊]이다. 이 물건은 한 가지를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요즘 들녘[田野] 곳곳에 많다. 사람들은 그 이파리와 뿌리를 캐어 먹는다.”라고 하였다.
냉이 잎이 마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양신(楊愼)의 《단연총록(丹鉛總錄)》에, “옛날 후직(后稷)이 백성에게 심고 가꾸는 법을 가르쳤는데, 산 것을 보고는 산 것을 심고, 죽은 것을 보고는 죽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오곡(五穀)은 오목(五木)을 보고 심기 때문에 산 것을 보고는 산 것을 심는다 하고, 냉이 잎이 말라 죽으면 보리가을이 되고, 초목의 잎이 떨어지면 벼가 다 익으므로, 죽는 것을 보고는 죽은 것을 거둔다고 하는 것이다. 미초(靡草)는 곧 냉이[薺菜]와 황새냉이[葶藶] 따위인데 보리가을이 되면 잎이 말라 죽는다.” 하였다.
보리가을이 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보리는 가을에 심으므로 금(金)의 기운을 얻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여름이 되어 화기가 금기를 이기게 되면[火克金] 보리는 익는 것이다. 보리가 4월에 누렇게 익는 것이 마치 벼가 7월에 익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가을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양공(周亮工)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도, “보리는 4월로 가을을 삼고 대나무[竹]는 8월로 소춘(小春)을 삼는다.” 하였다.
《농서》에는, “보리는 흙에 들어간 지 1백 40일이면 이삭이 패고, 이삭이 팬 지 60일이면 다 익는다. 북쪽 지방의 보리는 한낮에 꽃이 피고 남쪽 지방의 보리는 밤중에 꽃이 핀다.”고 하였는데, 명(明) 나라 의종(毅宗) 숭정(崇禎) 말엽에 와서는 남쪽 지방의 보리도 한낮에 꽃이 피었다 하니, 이것은 땅의 기운이 서로 바뀌기 때문이다.

5월의 6후
버마재비가 나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당랑(螳螂)은 또한 당랑(螗螂)이라고도 하고 혹은 말똥구리[蜣螂]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마분곤(馬糞滾)을 말똥구리[馬通九乙伊]라고 새겨 읽는다.
《물리소지(物理小識)》와 양화제서(養花諸書)에, “5월 망종(芒種)날에 말똥구리가 일제히 나온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때까치가 비로소 운다.
《하소정해》에, “결(鴃)이 운다. 결이란 때까치[伯鷯]이고, 운다는 것은 서로 부르는 것이다.”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하소정해》에 결이라 한 것은 곧《시경》에 말한 격(鵙)
이란 것이다.《시경》 빈풍 칠월장의, “7월에 때까치가 운다[七月鳴鵙].”한 소주에, ‘공씨(孔氏)는「하지(夏至)가 오고 동지(冬至)가 가므로 음기(陰氣)가 움직임에 감응하여 그 소리가 깍깍[鵙鵙]하기 때문에, 소리로 얻은 이름이다」하였고, 신안 호씨(新安胡氏)는 보전(補傳)에서, 「5월[仲夏]에 울기 시작하여 7월이 되면 울음이 극에 달한다 했다」하였으며, 주자(朱子)는, 「7월에 때까치[鵙]가 울면 음기가 이르러 모든 향기로운 것[芳]들이 시든다. 결(鴃)과 격(鵙)은 음(音)이 비슷하다. 그러므로 복건(服虔)과 육전(陸佃)은 ‘접동새[題鴃]라고 하였으나 바로 때까치[鵙]다」 했다.’하였다.
상고하건대, 제결(題鴃)은 접동새다. 5월에는 음기가 생기므로 울기 시작하고 7월에는 음기가 극히 성하므로 또다시 우는 것이다. 7월에 격(鵙)이 운 뒤에는 삼[麻]이 익어서 길쌈철이 된다. 임천 왕씨(臨川王氏)는, “누에는 양기가 맑을 때 생기는 것이므로 꾀꼬리[倉庚]로써 후(候)를 삼았고, 삼은 음기가 막혔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때까치[鵙]로써 후를 삼은 것이다.”하였다.
《돈재한람(遯齋閒覽)》에는, “때까치[伯勞]의 일명은 올빼미[梟]이고, 일명은 격(鵙)인데, 제비나 참새 같은 모든 작은 새들을 잡아 먹으며 또한 뱀도 잡아 먹는다. 제 어미를 잡아 먹는 불효를 저지르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올빼미국[梟羹]을 먹이고, 그 목을 베어 나무에 달았으므로 후세에 도적의 목을 베어 나무에 달아 군중에게 보이는 것을 효수(梟首)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북아진(北阿鎭)에 있는 작은 절에 산 적이 있었는데, 절 뒤에는 교목(喬木)이 몇 그루 있었고 그 위에는 올빼미 둥우리가 있었다. 새끼를 여덟 마리나 쳤는데 새끼들은 자라서 날 수도 있고 어미만큼 컸는데도 어미에게만 먹이를 달라고 극성을 떨었다. 어미는 그 큰 새끼들을 배불리 먹일 수도 없고 그 극성을 견딜 수도 없어서 곧 달아나 가시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새끼들은 깩깩거리며 뒤쫓아 덤벼들었다. 어미는 도망할 길이 없음을 알고 날개를 펴고 누워 새끼들이 마음대로 쪼아 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새끼들은 그 어미를 다 먹은 다음 흩어져 갔다. 나아가 보니 오직 털과 부리만 남았을 뿐이었다.”고 하였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백로(伯勞)는 때까치[博勞]인데, 백기(伯奇)가 변하여 된 것이라고 전한다. 그것이 밟고 있던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어린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리면 말을 빨리 하는데, 남쪽 지방에서는 ‘아이 딸린 부인이 임신을 하여 그 아이가 파리해지는 데는 오직 때까치[鵙]의 털만이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하였으며,《이아익(爾雅翼)》에는, “때까치[伯勞]는 계속되는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효(梟)는 우리나라 말에, 올빼미[五乙囀伊]라 하는데, 낮에는 보지 못하지만 밤에는 보기 때문에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이 되면 날아다닌다.《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일명 효조(鴞鳥)라고 하는데, 모치(茅鴟)와 같다. 눈은 크고 몸뚱이는 작으며 낮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데, 울음소리도 매우 나쁘다. 잘 때는 반드시 나뭇가지에 머리를 걸고 자는데, 그 고기는 매우 맛이 좋아 귀신도 즐긴다. 그러므로 효(鴞)의 고기 굽는 냄새를 맡으면 귀신들이 모여든다 한다.”하였는데, 《맹자(孟子)》에는, “남쪽 오랑캐의 때까치 같은 소리다.”[南蠻鴃舌之聲]했으니, 그 소리가 좋지 못함을 알 만하다
《물리서(物理書)》에는, “금(金)에 때까치 [伯勞]의 피를 칠하면 빛을 잃는다.” 하였다.
때까치[鵙]는 백조(伯趙)라고도 하는데, 《이아정의(爾雅正義)》에는, “때까치[鵙]는 백로(伯勞)다.”하였고, 《광아정운(廣雅正韻)》에는, “일명은 박로(博勞)라 하고 일명은 때까치[伯趙]다.”하였으며, 《설문(說文)》에는, 올빼미[不孝鳥]다. 동지ㆍ하짓날 올빼미[梟]를 잡아서 찢어 죽인다.”하였고, 《영표록이(嶺表錄異)》에는, “계림(桂林)의 집에서는 올빼미[梟]를 길러서 쥐를 잡게 했더니 고양이보다 낫더라고 했다. 묘두조(猫頭鳥)란 것은 바로 올빼미인데, 민중(閩中 지금의 복건성(福建省)을 이름) 사람들은 무척 꺼려 ‘이것은 성황(城隍)의 혼이 씌운 사자(使者)로서 밤에 인가의 옥상에서 울면 반드시 그 집 주인이 죽는다. ’고 한다. 이 물건은 밤이면 벼룩이나 이[蝨] 같은 것들도 주워 먹으면서, 낮에는 언덕이나 산도 보지 못한다. 효효(梟鴞)ㆍ휴류(鵂鶹)ㆍ기기(鵋䳢)로 풀이한 것과 호묘두(狐猫頭)라는 것은 모두 한 가지 물건으로 이름만 다를 뿐이다. 종류가 무척 많은데 귀거구두조(鬼車九頭鳥)는 오직 초(楚) 나라 검(黔 지금의 귀주(貴州) 지방) 땅에서만 나므로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시경》진풍(陳風) 묘문장(墓門章)의, “올빼미가 모였다.[有鴞萃止]” 한 소주에, ‘육씨(陸氏)는 「효(鴞)의 크기는 산비둘기[斑鳩]만하고 녹색이며 인가에 들어오면 흉하다 한다. 가의(賈誼)의 복조부(鵩鳥賦)는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요즘 휴류(鵂鹠)라고 하는 것도 역시 괴치(怪鴟)이다」하였고, 복씨(濮氏)는, 《한서(漢書)》에, 곽산(霍山)의 집에 효(鴞)가 자주 울었다고 하였으며,《초사(楚詞)》 주에, 치효(鴟鴞)는 두 가지 물건이라 했고, 또 복(鵩)은 효(鴞)와 비슷하다 했으며,《본초》에는, 「실상은 같은 것이다. 그 고기는 매우 맛이 있어서 국을 끓일 수도 있고 구워 먹을 수도 있다. 장자(莊子)가 탄핵(彈劾)을 받으면서도 효구이[鴞炙]를 달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다.’ 하였으며, 주자의《시경집주(詩經集註)》에는, “효(鴞)는 못된 소리를 내는 새이다”라고 하였다.
결(鴃)은, 《홍무정운(洪武正韻)에는, “영결(鸋鴃)은 새의 이름이다.” 하였고 또“제결(題鴃)은 접동새[子規]인데 또한 계결(䳏鴃)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며,《광아정운(廣雅正韻)》에는, “춘분(春分)이 되어 이 새가 울면 모든 향기로운 것들이 피어나고, 추분(秋分)이 되어 이 새가 울면 모든 향기로운 것들이 시든다.”고 하였다. 격(鵙)은《정운(正韻)》에는, “백로(伯勞)다.” 하였으며,《좌전(左傳)》에는, “백조(伯趙)다.”라고 하였는데, 하지(夏至)부터 울기 시작하여 동지(冬至)에 그친다고 한다.
《시경》빈풍 칠월장의, “칠월에 때까치가 운다.[七月鳴鵙]”는 구절에는 역시 명격(鳴鵙)이라 하였고, 또 격(鴃)은《맹자》의 “남쪽 오랑캐의 때까치 같은 사람이다.[南蠻鴃舌之聲]”한 주에서 조기(趙岐)는, ‘박로(博勞)이고, 음은 고역 절(古亦切)이다.’ 하였다. 또 결(鴃)은 이소(離騷)에, “제결(鵜鴃)이 먼저 울까 두렵다.”고 한 데 대해, 복건(服虔)과 육전(陸佃)은, ‘때까치[鵙]인데, 일명은 백로(伯勞)며, 7월에 울면 음기(陰氣)가 이르러 모든 향기로운 것들이 시든다.’하였다.
개똥지빠귀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개똥지빠귀[反舌鳥]는 입이 노랗고 몸은 검으며 다리는 적흑(赤黑)색인데, 봄에는 온갖 새의 소리를 흉내내다가 음기가 이르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
《예기》소(疏)에 “반설(反舌)은 개똥지빠귀[百舌鳥]이다.” 하였고 《역통(易通)》 괘험(卦驗)에는, “그 혀를 뒤집으며 온갖 새의 소리를 따라 한다”고 했는데, 채옹(蔡邕)은 반설(反舌)을 청개구리[蝦蟆]로 여겼다.
사슴의 뿔이 빠진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5월에는 한 음[一陰]이 생(生)하기 때문에 사슴의 뿔이 빠지는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빠지는데, 새로 난 뿔의 속에 피가 있고 굳지 않은 것을 녹용(鹿茸)이라 하며, 보약(補藥) 중의 상품으로 친다.
매미가 비로소 운다
《하소정해》에, “양조(良蜩)가 운다. 양조라는 것은 다섯 가지 빛깔[五采]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언(匽)이 흥(興)한 지 5일이면 화합[翕]하고 보름[望]이면 숨[伏]는다. 난다[生]고 하지 않고, 흥한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 생겨나는 때를 알지 못하므로 흥한다 하였고, 흥한다 하였으므로 흥한 지 5일이면 화합한다 하였다. 보름[望]이란 달[月]의 망[望]을 가리키는 것인데, 숨는다고 말한 것은 죽는 때를 알 수 없으므로 숨는다[伏]고 한 것이다. 5일이라고 한 것은 15일이요, 화합한다[翕]한 것은 합치는 것[合]이며, 숨는다[伏] 한 것은 숨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고, 또 “당조(唐蜩)가 운다. 당조가 운다는 것은 언(匽)을 가리키는 것이다.”하였는데, 내가 상고하건대,《하소정해》에, 양조라 하고 당조라 한 것은 바로 월령(月令)에 말한 조(蜩)이며, 《시경》 빈풍 칠월장의 “5월에 조가 운다.[五月鳴蜩]”고 한 조가 바로 이것이다. 그 주(注)에 ‘조는 매미[蟬]의 총칭이다.’ 하였고 〈소주에서〉 임천 왕씨는 ‘조는 음기(陰氣)를 감응하여 먼저 운다.’고 하였는데, 《물리서(物理書)》에 “매미[蟬]는 마시기만 하고 먹지 않으며 30일이면 허물을 벗는다.”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닐까.
《감여서(堪輿書)》에는, “매미의 소리는 날개 밑 배에서 나는데, 양일(陽日)에는 왼쪽 날개쪽으로 울고 음일(陰日)에는 오른쪽 날개 쪽으로 운다.”고 하였다.
끼무릇이 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반하(半夏)란 우리나라 속훈(俗訓)으로 ‘끼무릇’[氣無老]이라는 것인데, 보리밭에 잘 난다. 5월에 채취하여 약으로 다듬는데, 5월에 나기 때문에 반하(半夏)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자세한 것은《본초》를 보면 상고할 수 있다.

6월의 6후
다스운 바람이 불어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온풍(溫風)이란 바로 훈훈한 바람[薰風]인데, 경풍(景風)이라고도 하고, 개풍(凱風) 이라고도 한다. 만물을 키워 주기 때문에 특별히 말한 것이다.
귀뚜라미가 벽에서 산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실솔(蟋蟀)은 귀뚜라미[蛬蛩]다. 《시경》빈풍 칠월장에, “5월에 쓰르라미[斯螽]가 다리를 움직이고, 6월에 베짱이[莎鷄]가 날개를 떨치며, 7월에는 들에 있고, 8월에는 처마 밑에 있으며, 9월에는 창문 밖에 있고 10월에는 귀뚜라미[蟋蟀]가 나의 침상 밑으로 들어온다.”고 한 주에 주자(朱子)는‘사종(斯螽)ㆍ사계(莎鷄)ㆍ(蟋蟀)은 한가지인데 철을 따라 변화하므로 그 이름이 다른 것이다.’ 하였고, 이경현(李敬玄)의 《연의(衍義)》에는, “사종은 누리[蝗]고, 사계는 철써기[促織]며, 실솔은 귀뚜라미[蛩]로 엄연히 세 가지인데, 어찌하여 ‘철을 따라 변화하므로 그 이름이 다른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하였다.
왕기(王圻)의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귀뚜라미[蟋蟀]는 누리[蝗]와 비슷하나 작으며, 옻칠을 한 듯 검고 빛이 나는데, 날개[翅]와 뿔이 있다. 하지(夏至)와 입추(立秋) 뒤에 흙더미나 돌 밑, 벽돌 틈에서 잘 운다. 걸핏하면 잘 싸우고 이기고 나면 뽐내는 듯 운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귀뚜라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등이 넓은 놈은 잘 울고, 등이 좁은 놈은 이에 침이 달렸으며, 울지 못한다.
우리나라 말로 귀뚜라미[貴突菴伊]인데, 더울 때는 들에 있다가 추워지면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다.
매가 비로소 새를 챈다
《하소정해》에, “매가 비로소 새를 챈다[鷹始摯]한 것의, 비로소 챈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죽인다[]는 것을 꺼려[諱] 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지(摯)는 새매[驇]로 지조(鷙鳥)의 지(摯)인 것이다.
청 고종(淸高宗)의 《어제집(御製集)》에, “매[鷹]가 야생할 경우에는 봄에 털갈이할 때 깃털 하나씩을 번갈아 갈고, 묵은 깃이 빠지자마자 새 깃이 바로 나므로 언제나 먹이를 채어 배를 채울 수 있지만, 사람의 손에서 길러질 경우에는 털[毛]이나 깃[羽]이 뭉턱뭉턱 빠지므로 전처럼 날아서 먹이를 챌 수가 없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집에서 기르는 매[鷹]가 6월이 되어 털과 깃이 완전히 어우러져 먹이를 채는 것이 아닐까.
월령(月令)의, “매가 배우고 익힌다.[鷹乃學習]”고 한 주에, ‘새끼가 날기를 익히느라고 자주 난다.’[雛學數飛]한 것은 틀린 해석인 성싶다
썩은 풀이 반딧불이 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본초》에는, “반딧불 [螢]에는 몇 종류가 있다.”고 하였는데, 풀이 썩어 된다는 형은 속훈(俗訓)에 개똥벌레[狗屎虫]라는 것으로, 한 종류는 크기가 저촉(蛆蠋)만하고 꼬리 끝에서 빛이 난다. 날개가 없는 것은, 일명 견(蠲)이라 하는데, 속훈(俗訓)에 반딧벌레[螢蛆]라는 것이며, 한 종류는 수형(水螢)인데 물 속에 살므로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물벌레[水虫]가 변하여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말에는 반딧불[盤大弗]이라 하는데, 《시경》빈풍 동산장(東山章)의 “빤짝빤짝하는 소행이다.[熠燿宵行]”한 것이 이것이다.
흙이 축축해지고 무덥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욕(溽)은 습열(濕熱)인데 더운 기운[暑氣]이 땅을 태우므로 습기가 생기는 것이다.
큰비가 때때로 내린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더운 기운이 차가운 곳을 태우므로 큰비가 때때로 내리는 것이다.

7월의 6후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무더운 열기[暑熱]가 물러가려 함에, 가을 기운이 바로 생겨나므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이다. 양풍(涼風)은 바로 금풍(金風)이다.
흰 이슬이 내린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천문서(天文書)에, “이슬이란 것은 음(陰)의 액(液)이며, 서리[霜]의 시작이다.” 하였고, 오내(吳萊)의 이십사기론(二十四氣論)에는, “빈풍(豳風)의 허두가 칠월(七月)인것은 더위의 끝이요, 추위[寒]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금(金)에 속하며, 금의 빛깔은 흰색인데, 흰 것은 이슬의 빛깔이다.” 하였으며, 관물(觀物)에서 장씨(張氏)는 “이슬은 토(土)의 기운이며, 응결되면 서리가 된다.”고 하였다.
쓰르라미가 운다
《하소정해》에는, “쓰르라미[寒蟬]가 운다. 매미[蟬]라는 것은 쓰르라미[蝭]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상고하건대, 바로 한장(寒螿)이며, 우리나라 말의 쓰르라미[瑟乙菴伊]이다. 농가에서는 가을을 재촉하는 물건이라고 한다.
매가 새로 제사지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달(獺)이 고기[魚]로 제사지내고, 승냥이[豺]가 짐승[獸]으로 제사지내는 것과 같이, 다 근본[本]에 보답하는 것이다. 월령 소(疏)에는, “오로지 매가 새로 제사지내는 것만이, 사람이 음식으로 제사지내는 제사와 같다,”고 하였다.
천지가 비로소 숙연해진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7월에는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서쪽으로 흘러가서 맑은 바람이 불고 싸늘해지기[戎寒] 때문에 더운 기운[暑氣]은 이미 물러가고 천지는 광원(廣遠)해지며, 맑고 밝을 뿐 아니라, 엄숙한 기운이 도는 것이다.
벼가 익는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농서(農書)》에, “벼는 심은 지 90일이면 패고, 팬 지 60일이면 익는다. 한낮에 꽃이 피는데 밤 이슬이 줄기를 타고 포기 속으로 들어가면 머금고서 여무니, 이 때에야 익는[登] 것이다. 벼꽃이 희고 화판(花瓣)이 작으면 쌀이 나쁘고[賤], 화판이 많고 누르면 쌀이 좋다.[貴]”고 하였다. 항간에서는 “은꽃[銀花]은 나쁘고 금꽃[金花]은 좋다.”고 한다.

8월의 6후
기러기들이 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월령에, “8월에 기러기들[鴻雁]이 온다.” 하고 9월에 또 “기러기들이 손님으로 온다.[鴻雁來賓]”고 한 것은 어째서일까.
8월에 먼저 온 것이 주인이 되고 9월이 지나 오는 것은 손님[賓]이 되기 때문이다.
제비가 돌아간다
《하소정해》에 “제비가 떠오르는 것은 겨울잠을 자기 위해서다.[陟玄鳥蟄] 척(陟)이란 떠오르는 것[升]이며, 현조(玄鳥)는 제비[燕]다. 떠오른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겨울잠을 잔다는 것을 뒤에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떠오른 다음에야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제비[玄鳥]는 바다 섬으로 돌아가 나무 구멍이나 토굴 속에서 겨울잠을 자다가, 봄이 되면 바로 겨울잠에서 깨어나 오는 것이다.
새들이 먹이를 갈무리한다
《하소정해》에는 “단조(丹鳥)는 백조(白鳥)를 먹이로 한다. 단조란 반딧불[丹良]이요, 백조란 모기[蚊蚋]를 이름이다. 조(鳥)라고 한 것은 먹이[養]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며, 날개가 달렸으므로 새라고 한 것이다. 수(羞)라는 것은 갈무리[進]하는 것으로 다 먹지 않은 것이다.”하였는데, 내가 상고하건대, 월령에, “뭇 새들이 먹이를 갈무리한다.[群鳥養羞]”한 것이《하소정해》에는 상당히 틀리다. 수(羞)라는 것은 먹이이고, 양수(養羞)라는 것은 갈무리했다가 겨울에 먹는 것이다.
둥이 비로소 소리를 거둔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천둥은 이때에 와서 땅 속으로 들어가 백 80일 동안 겨울잠을 잔 후에 다시 나오는 것이다. 2월에 천둥이 처음 소리를 내는 것으로 한 후(候)를 삼고, 비로소 번개를 치는 것으로 한 후를 삼았으며, 8월에 천둥이 비로소 소리를 거두는 것으로 한 후를 삼았다면, 천둥이 잠복[藏]하는 것으로도 한 후를 삼는 것이 마땅한데 번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옛사람들의 정미(精微)로운 견해를 이해할 수 없다.
울잠을 자려는 벌레들이 굴 문을 좁힌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배호(坯戶)라는 것은 모든 벌레들이 각각 그 굴의 입구를 손질하여 장차 들어가 겨울잠을 자려는 것이다.
이 비로소 마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학(涸)은 《장자(莊子)》에, “학철(涸轍)이다.” 한 학 자와 같은 것이며, 물이 비로소 마른다는 것은 바로 물이 줄어 바닥의 돌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당(唐) 나라 왕자안(王子安 이름은 발(發))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웅덩이 물은 다 마르고 서늘한 못은 맑다.[潦水盡而寒潭淸]”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물은 땅의 기운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것이므로, 8월이 되면 땅의 기운이 점점 내려가기 때문에 나무들 역시 마르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모든 물[萬水]이 근원[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9월의 6후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하소정해》에는, “기러기들이 간다[遰鴻雁]. 체(遰)라는 것은 가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8월에 온 것이 주인이 되고 9월에 온 것이 손이 되는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 “9월에 기러기들이 손으로 오고, 참새[雀]는 큰 물 속으로 들어가 조개[蛤]가 된다. 손으로 온다는 것은 8월[仲秋]에 먼저 온 것으로 주인을 삼고, 9월[季秋]에 뒤늦게 온 것으로 손을 삼은 때문이다.” 하였다.
허신 숙중(許愼叔重)은, “기러기가 온다.[雁來]”는 것으로 한 구(句)를 삼아 해석하고 말하기를, “빈작(賓雀)은 참새[老雀]인데, 사람의 집에 손님처럼 깃든다.”라고 하였으며,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는, “참새[雀]는 일명 가빈(嘉賓)이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근거한 데가 있었을 것이다.
참새가 큰 물로 들어가 조개가 된다
《하소정해》에는, “방성(房星)이 해[日]에 걸리고, 참새는 바다로 들어가서 조개가 된다. 혹 있는 일이지만 늘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육전(陸佃)은, “방합(蚌蛤)은 음양(陰陽)과 암수가 없다. 참새가 변하여 된 것이다. 진주[珠]를 낼 수 있는 것은 음정(陰精)에 전일(專一)하기 때문이다. 조개가 변하여 참새가 되기도 하는데, 서로 변하는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인 성싶다. 월령에 ‘참새가 큰 물로 들어가 조개가 된다.’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무늬가 있는 조개[文蛤]다. 그 빛깔은 자색인데 참새[雀]의 빛깔과 흡사하다.”고 하였는데, 그 무늬를 상고해 보니, 역시 참새의 무늬와 서로 같다.
국화는 노란 꽃이 된다

《하소정해》에, “영국(榮鞠)이니, 국(鞠)은 풀이다. 국화가 꽃이 피면 보리를 갈아야 하는데 시절이 바쁘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꽃잎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고 했는데, 국(菊)이란 것은 감국(甘菊)이니 9월이 되어서야 핀다. 속명으로 조개황(早開黃)이다. 꽃이 피지 않는 것은 수국화[牡菊]인데 《주례》에, “괵씨가 수국화를 태워서 개구리를 예방했다.[幗氏焚牡菊禁蛙]”고 했다.

승냥이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지낸다
《하소정해》에는, “10월에 승냥이는 짐승을 잡아 제사지낸다. 그 제사지낸 뒤에 그것을 먹는 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요사(遼史)》에, “숲의 승냥이와 어량(魚梁)의 달(獺)이 짐승과 물고기로 제사지내는 것으로부터 교체(郊禘)가 시작되었다.”고 했고, 《물리소지(物理小識)》에는, “승냥이가 짐승으로 원(圓)에 제사지내니 하늘에 제지내는 것이다.”고 했고, 청 고종(淸高宗)의 《어제집(御製集)》에는, “승냥이는 이리[狼]와 비슷하나 사람은 해치지 않으며, 범이 도리어 겁을 내어 승냥이가 오줌을 싼 곳도 감히 밟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냥꾼도 승냥이는 쏘지 않고 인수(仁獸)라 여긴다.”고 했으며, 《물리서(物理書)》에는 “승냥이와 개[狗]는 서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개가 승냥이를 만나면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했다.
우리나라 말로는 시(豺)의 훈(訓)은 ‘승냥이(昇良伊)’이다.

초목의 잎사귀가 누렇게 되어 떨어진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시경》소아(小雅) 사월장(四月章)에, “가을 날씨 스산한데 모든 풀이 시들었네.[秋日悽悽 百卉俱腓]”의 주에 ‘비(腓)는 병이다. 시들어 버린 모양이다.[腓病也 淍瘁貌]’라고 했고, 소아(小雅)의 “어느 풀인들 누렇게 되지 않으랴?[何草不黃]”의 주에, ‘풀이 쇠하면 노랗게 되고, 초목이 쇠하면 잎이 노랗게 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늙으면 머리카락이 세는 것과 같다.’고 했다.

빈풍(豳風) 칠월장(七月章)의, “10월에는 잎이 진다.[十月隕蘀]”와, 정풍(鄭風) 탁혜장(蘀兮章)의, “마른 잎 시든 잎.[蘀兮蘀兮]”의 그 주에는, ‘나뭇잎이 말라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인데, 곧 초목이 노랗게 되어 떨어진다는 뜻이다.’고 했다.
칩충(蟄虫)이 고개를 수그러뜨린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함부(咸俯)라는 것은 모든 벌레가 고개를 수그리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모양이니, 마치 잠잘 때에 머리를 움츠리고 죽은 듯이 숨을 죽이는 형상인 것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는, “형초(荊楚)의 10월은 날씨가 따뜻하여 소춘(小春)이라고 하고, 그때의 비는 액우(液雨)라고 하니, 온갖 벌레가 이것을 먹고 칩복(蟄伏)하기에 약수(藥水)라고 한다.”고 했다.

10월의 6후
물이 처음으로 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역(易)》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氷至]”라고 했으니, 이슬이 맺혀서 서리가 되고 서리가 얼어서 얼음이 되는 것이다. 얼음이란 태양의 정기(精氣)이니, 지극히 유(柔)하면서 강(剛)하다. 음(陰)이 극(極)하여 양(陽)이 생기는 것이니, 역시 지기(地氣)가 따뜻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땅이 얼기 시작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날씨가 한열(寒冽)해서 땅이 어는 것이다.
꿩이 큰 물에 들어가서 신(蜃)이 된다
《하소정해》에서는, “검은 꿩이 회수(淮水)에 들어가서 신(蜃)이 되는데, 신은 포로(蒲蘆)이다.”라고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 월령(月令)에, “꿩이 큰 물에 들어가면 신(蜃)이 된다.”의 주에, ‘대합(大蛤)이 신(蜃)이다.’라고 했고, 금주(今注)에는, 교속(蛟屬)이라고 했으니 두 가지 설이 서로 어긋난다.
《본초(本草)》에는, “신교(蜃蛟)의 족속은 그 모양이 뱀과 같으나 크고 뿔이 있으며, 용의 형상으로 붉은 갈기가 있다. 허리 밑으로는 비늘이 모두 위를 향해서 돋았다. 제비 알을 먹고 기(氣)를 잘 토하여 누대(樓臺)와 성곽(城郭)의 형상을 이루며, 비가 오려고 할 때에 바로 나타나는데 신루(蜃樓)라고 부른다.”고 하고 또, “해시(海市)는 그 기름과 밀[蠟]로 촉향(燭香)을 만드는데, 백 보(步)의 연기 속에서도 누대(樓臺)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조부께서 찬술하신 《예기억》 월령(月令)에, “꿩이 큰 물에 들어가서 신(蜃)이 된다[雉入大水爲蜃]의 그 주에, ‘꿩은 다섯 가지 빛깔이 있지만 대합(大蛤)의 무늬는 다섯 가지 빛깔이 없다.’ 하였으니, 그 주석은 잘못된 듯하다. 육전(陸佃)이, ‘정월에 뱀과 꿩이 교미하여 알을 낳는데, 우레 소리를 들으면 곧 흙 속에 두어 장(丈)이나 깊이 들어가서 뱀의 형상이 되는데, 2~3백 년이 지나서야 올라온다. 땅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만 꿩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설은 비록 잘못되었으나, 꿩이 화해서 신(蜃)이 되고, 꿩과 뱀이 교미해서 생겨나 오래 되어서 날아오른즉 이것은 분명히 교속(蛟屬)이다. 다른 짐승끼리 교미했으므로 꿩이 교미해서 교(蛟)를 낳았다고 한다면 꿩이 바로 교(蛟)가 됨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지개는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무지개[虹]에는 벌레가 있으니, 땅 밑에 칩복(蟄伏)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늘의 기(氣)는 위로 올라가고 땅의 기(氣)는 아래로 내려온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청하자(靑霞子) 권극중(權克中)의 《참동계주(參同契注)》에, “하늘과 땅은 거리가 8만 4천 리인데, 동지(冬至)에는 양기가 땅에서 올라가고, 음기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지(夏至)에는 음기가 땅에서 올라가고, 양기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오르고 내리는 데에 하루에 각각 4백 65리 2백 40보(步)씩이어서 90일이 지나면 음기와 양기가 하늘과 땅의 중간지점에서 만난다. 그러면, 염량(炎涼)이 고르게 되어 춘분과 추분이 되고, 또 90일이 되면 올라가던 것은 하늘에 가서 닿고, 내려가던 것은 땅에 이른다. 추위나 더위가 극도에 달해서 동지와 하지가 된다. 이와 같이 오르내림을 무한히 되풀이한다. 10월의 입동과 소설(小雪)에는 음기가 하늘에 이르고 양기는 땅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하늘의 기(氣)는 위로 올라가고 땅의 기(氣)는 아래로 내려와서 폐색(閉塞)하여 겨울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폐색(閉塞)하여 겨울철을 이룬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천지의 기(氣)가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 만물이 수장(收藏)되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폐색하여 겨울을 이룬다.”고 했다. 이것은 바로《역(易)》의, “한 번 닫히고 한 번 열리는 이치[一闔一闢之理]”인 것이다.

11월의 6후
갈단(鶡鴠)이 울지 않는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갈단(鶡鴠)은 월령(月令)의 주에, “밤에 울어 아침을 구한다.[夜鳴求朝]”라고 했고, 갈(鶡)은 자서(字書)에서, “음은 분(分), 속음은 갈(曷)이며, 청작(靑雀)은 분(鳻)과 같으며, 닭과 비슷하나 잘 싸운다.”고 했고, 갈단 새[鶡鴠之鳥]는 자서에, “아침을 구하는 새인데, 갈단(鶡鴠)은 닭과 비슷하나 주야로 항상 운다. 본래 합단(盍旦)이라고 썼다.”라고 하였다.
오령산(五靈山)에 벌레가 있는데 형상이 작은 닭과 같으나 네 발에 육시(肉翅)가 있으며, 여름에는 깃털이 오색(五色)이며 그 울음 소리가 마치 ‘봉황은 나만 못해[鳳凰不如我]’라고 하는 듯하나 동지(冬至)에는 털이 빠지고 앙상하여 겨울의 추위를 참고 견디면서 괴로워하며 울기를, ‘득과차과(得過且過)’라고 하는 듯하다. 그 똥은 쇠 모양으로 마치 기름기가 엉기는 것과 같이 항상 한 곳에 모인다. 의가(醫家)에서는 이것을 오령지(五靈脂)라고 부른다.
이 설(說)은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보인다.
갈단(鶡鴠)은 《물리서(物理書)》에는, “일명 합단(盍鴠)인데, 10월에 털이 빠지고 추워서 부르짖으며 겨울을 참고 견디는데, 잣나무 열매를 모아서 먹는다. 또 제가 눈 똥을 다시 먹기 때문에 그 기름[脂]을 오령지(五靈脂)라고 한다. 11월이 되어 한 양기를 얻으면 다시는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동벽(李東壁)이 잘 모르는 바로서, 이 새의 똥은 쥐똥이나 숙지황[熟芐]과 같아서 혈분(血糞)에 약이 되며, 《본초(本草)》 약성(藥性)에 자세하다.
범이 비로소 교미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속전(俗傳)을 상고하니, “호신(虎腎)은 허약하나 동지가 되어 양기가 회복되는 때에는 힘이 매우 세다. 그래서 비로소 교미한다.”고 했고, 《물리서》에는, “범이 교미할 때에 암놈이 몹시 아파서 두 번 다시 교미하지 않는다. 범이 교미하고 달무리가 생기는 것은 바람 따르는 이치이다.”라고 했다.
여정(荔挺)이 싹이 튼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여(荔)에는 목려(木荔)가 있는데 곧 여지(荔支)이다. 초려(草荔)는 사시 푸른데, 그것이 혹 동짓달에 곁순이나 움가지가 돋는 것이나 아닌가 한다.
여정(荔挺)을 월령의 주에서는, “향초(香草)이며 양기를 느끼고 돋는다.”고 했고, 《자서(字書)》에서는, “여(荔)는 향초인데 벽려(薜荔)이다.”고 했으며 양신(楊愼)의 《단연총록(丹鉛總錄)》에서는, 여정에 대한 논의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상고하건대, 지금 산중에 천마(天麻)가 있으니, 우리의 속어로는 ‘수자해신(水子海腎)’이며 적전(赤箭)은 바로 천마(天麻)이다. 싹은 녹아서 없고 그 옛이름이 여(荔)이어서 그 싹이 돋아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荔)는 역(力) 자가 셋이니, 풀 가운데서 힘이 센 풀이다.
지렁이가 땅 속에 칩거한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지렁이[蚯蚓]는 인(螾)이라고도 쓰는데, 속어로는 토룡(土龍)이며, 우리말로는 지룡(地龍)이다. 땅 속 구멍에서 살고 지표로 나와 마른 땅에서 먹이를 먹고, 지하의 샘[黃泉]에서 마신다. 머리는 양(陽)에 두고 사는데,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움직이면 머리는 쳐들고 몸은 움츠린다. 《농서(農書)》에, “길을 지나면 비가 오고, 아침에 나오면 개고, 저녁에 나오면 비가 온다. 날씨가 가물어 비가 오지 않을 때에 땅 위나 모래 위에 나오면 곧 소나기가 온다.”고 했다.
미(麋)는 뿔이 빠진다
《하소정해》에, “미의 뿔은 떨어진다[隕麋角] 운(隕)은 추(墜)이다. 동지일에 양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생기가 도는데 모든 것이 왕성하게 빛난다. 그러므로 사슴 뿔이 빠지는데 시기를 적는다.”라고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 청 고종(淸高宗)의 《어제집(御製集)》에, “월령(月令)을 살펴보니, ‘중하에는 녹각이 빠지고, 중동에는 미각이 빠진다.[仲夏鹿角解 仲冬麋角解]’고 하고, 공씨(孔氏)의 소(疏)에, ‘해설자가 여러 사람이나 다 명확한 근거가 없다. 웅씨(熊氏)는, 녹(鹿)은 산수(山獸)이니, 하지에 음기를 얻어서 뿔이 빠지고, 미(麋)는 택수(澤獸)이니 동지에 양기를 얻어서 뿔이 빠진다’고 한다.”고 했다. 공영달이 그 말을 인용하면서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으니 지금까지 정론이 없었다.
지금 상고하건대, 목란(木蘭) 땅에는 녹(鹿)이 많고, 남쪽과 북쪽에 간혹 미(麋)가 있다. 성경(盛京)ㆍ길림(吉林)ㆍ열하(熱河)에 이르러서는 미(麋)만 있고 녹(鹿)은 없다. 비록 녹(鹿)은 크고 미(麋)는 작고 털빛도 다르나 하지에 뿔이 빠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웅씨의 설이 잘못임을 알았다. 웅씨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소대기(小戴記)》에 실려 있는 여씨(呂氏)의 책이나 《대대기(大戴記)》에 채록된 《하소정(夏小正)》이란 책도 다 그릇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지에 뿔이 빠지는 것은 없을까. 그것도 있으니 그것은 곧 남원(南苑)의 주(麈)이다. 내가 이미 변정(辨正)하여 설을 만들었으니, 주각시(麈角詩) 뒤에 붙인 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임오년(건륭(乾隆) 27, 1762)에 내가 이미 녹(鹿)과 미(麋)는 다 여름에 뿔이 빠지는 것을 변명했으나, 월령에, ‘겨울에 뿔이 빠진다.’고 하였으니, 무엇인지 몰라서 5~6년 동안이나 의심을 품고 있다가, 정해년(건륭 32, 1767)에 문득 남원(南苑)에 주(麈)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속명은 장미록(長尾鹿)인데 혹 겨울에 뿔이 빠지는지도 몰라서 어전시위 오복(御前侍衛五福)에게 명하여 가서 보도록 했다. 절후가 마침 제때이어서, 이미 다 빠진 놈도 있고, 한 개만 겨우 빠진 놈도 있는데, 빠져 버린 뿔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제서야 동지에도 뿔이 빠지는 짐승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월령에서 한 말은 전부가 잘못은 아니고 주(麈)를 미(麋)로 쓴 것뿐이다. 대체로 녹(鹿)과 미(麋)는 북방 사람은 분간할 수 있으나 남방 사람은 분간하지 못한다. 주(麈)와 미(麋)도 분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주(注)와 소(疏)를 단 사람이 잘못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변증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니, 녹(鹿)을 산수(山獸)라 하고, 미(麋)를 택수(澤獸)라고 한 것이나 그 실상을 모르기는 일반이다.
그래서 《영대시헌(靈坮時憲)》을 고치도록 명했으나, 월령은 와전되어 행해짐이 이미 오래므로 꼭 고칠 필요는 없다. 아울러 설을 만들어 진실을 보이고 의혹을 푼다.”라고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 주(麈)는 음이 주이며, 《설문(說文)》에는, ‘미속(麋屬)’이라 했고, 《당본설문(唐本說文)》에는, “주(麈)는 힘이 세고 뿔이 한 개”라고 했고, 대동(戴侗)의 《육서고(六書故)》에는, “주(麈)는 녹(鹿)과 비슷하나 긴 꼬리는 먼지를 떨 만하다.”고 했고, 육전(陸佃)의 《비아(埤雅)》에는, “녹(鹿)의 큰 놈이 주(麈)인데, 녹(鹿)이 떼지어 따라가면서 주(麈)의 꼬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르며, 옛날의 청담하던 사람이 이것을 휘둘렀다.”고 했고, 《속박물지(續博物志)》에는, “주(麈)의 꼬리를 붉은 옷감속에 넣어 두면 오래도록 붉은 빛깔이 변하지 않고 보존되며, 전(氈)은 좀먹지 않는다.”고 했다.
《이아》에는, “구신균(麔麎麇)는 미속(麋屬)이고 가우미(麚麀麛)는 녹속(鹿屬)이다.”라고 했으나, 주(麈)는 실려 있지 않다.
우리나라 동북도(東北道)의 육진(六鎭)에 외뿔사슴[一角鹿]이 나는데, 속명으로는 독동관(獨童串)이며, 우리말로는 외동곶(外童串)이며, 관(串)의 속훈(俗訓)은 ‘곶’이니, 이것이 혹은 주(麈)가 아닌가 한다. 《자서(字書)》에는 따로 규()가 있는데, “자음은 규(圭)이며, 일반적으로 주(麈)인 줄로 안다.”고 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처현(郪縣) 선군산(宣君山)에서 주미(麈尾)가 생산되는데, 일명은 황록(荒鹿)이다.”고 했고, 청(淸)의 축지당 덕린(祝芷堂德麟)이 지은 《공령시부(功令詩賦)》는 《열친루갱시(悅親樓賡詩)》라고 하며, 그 초집(初集)에 의제주각해(擬題麈角解) 오언 십운 배율(五言十韻排律) 뒤에 다시, ‘신은 삼가 상고한다는 일설’을 지었는데, “고종(高宗) 건륭(乾隆) 32년 정해(丁亥) 동지에, 남원(南苑)의 주(麈)를 기르는 곳에서 주각(麈角)이 빠지는 것을 징험해 보고, 미각(麋角)이 빠진다는 설을 변파(辨破)하고는 《영대시헌(靈坮時憲)》을 고쳤다고 전한다…”라고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역(易)》ㆍ본명(本命)에서는 금록(禽鹿)을 주로 율언(律言)으로 표현하는데, 미록(麋鹿)은 뿔이 길고 짧고 크고 작고 하여 율(律)의 가락과 같으므로, 율(律)에 맞추어서 뿔을 풀이한 것이나 아닌가 한다.
샘물이 솟아 움직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물은 감괘(坎卦)에 속하는데, 웅덩이[坎] 속에서 다른 것과 구분되면 물은 음기 속에서 양(陽)이 된다. 《좌씨전》에는, ‘물은 불의 수컷[水火之牡]이라고 했으니 물은 양물(陽物)이다.
《겸명서(兼明書)》에서 구광정(丘光廷)은, “월령(月令) 11월은 육률(六律)의 황종(黃鐘)에 해당하며, 누른빛은 땅빛이고, 종(鐘)은 종(種)이니, 11월은 양기가 지하의 샘[黃泉]에 모인다. 그러므로 혼천(渾天)의 형상을 알겠다. 반은 항상 지하에 있고, 지하에는 물이 있고, 물 밑에는 기(氣)가 있고 기(氣) 밑에 하늘이 있다. 하늘의 원기는 물로부터 땅에 올라오며, 땅으로부터 하늘에 올라가고 하늘로부터 물 밑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은 무궁히 순환하는 것이다. 지금 양기는 땅 속에서 생기고 황혼이 움직여서 양기가 비로소 위로 오르니, 샘물이 솟아 움직이는 것이다.” 하였다.

12월의 6후
기러기가 북쪽으로 향한다
《하소정해》에는, “기러기는 북쪽을 향한다.[雁北鄕] 먼저 기러기를 말하고 뒤에 향(鄕)한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기러기를 본 뒤에 그 향(鄕)하는 것을 안 것이다. 향(鄕)은 무엇인가. 그 거처를 향하는 것이다. 기러기는 북방을 거처로 삼는 것이다. 무엇을 거처라고 하는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다. 9월에 기러기가 간다.[九月遰鴻雁] ‘遰’의 음은 체이다. 먼저 체(遰)를 말한 뒤에 홍안(鴻雁)을 말한 까닭은 무엇인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보니, 홍안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남쪽으로 향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거처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남쪽으로 향한다고 하지 않았다. 홍안이 날아간다고는 기록하면서 향하는 방향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기러기가 반드시 하소정(夏小正)에서 날아간다고 한 것에만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서경》우공(禹貢)에, “팽려가 넘쳐 흐르니 양조가 사는 곳이다.[彭蠡旣瀦 陽鳥所居]”라고 했으니, 거(居)는 항상 머무르는 곳이다.
《추봉오어(推篷窹語)》에는, “기러기가 북방으로 돌아갈 때에 반드시 갈대를 입에 물고 관문(關門)을 넘어서야 버린다.”고 했고, 《회남자(淮南子)》에는, “기러기가 기력을 얻기 위하여 갈대를 입에 물고 주살을 피한다.”고 했고, 항간에서는, “바다를 지날 때에 갈대를 던져서 때를 만들어서 쉰다.”고 하고, 혹은, “갈대를 보내서 세금을 바친다.”고도 하나, 세금을 바친다는 설은 터무니없는 소리고, 바다를 지날 때에 떼를 만든다는 설은 어찌하여 가을에 올 때에는 없다가 봄에 비로소 갈대가 필요할까.
주살을 피한다는 설은 날아올 때에는 무엇으로 피하는지를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상림원(上林苑)에서 기러기를 쏘게 하는데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상고하건대, 기러기는 바람을 이용하여서 날아가는 것인데, 봄과 여름에는 남풍이 불기 때문에 북쪽으로 날아가고, 겨울과 가을에는 삭풍(朔風)이 불기 때문에 남쪽으로 날아 오는 것 같다. 가을과 겨울은 남쪽에서 지내고, 먹이가 기름지고 몸이 살쪄서 갈대의 힘을 빌려 풍력을 도울 뿐이다. 새북(塞北) 지방은 바람이 높아서 무사하기 때문에 안문관(雁門關)에서 버리는 것이다.
고어(古語)에, “봄바람은 아래에서 치불고, 여름 바람은 공중을 수평으로 불며, 가을 바람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불고, 겨울 바람은 땅에 착 깔려서 분다.”고 했으니, 풍세(風勢) 때문에 갈대를 물고 가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배로 가는데 돛을 펴고 바람을 따라서 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갈대를 물고 가는 것이다.
까치가 비로소 집을 짓는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본초》ㆍ《금경(禽經)》ㆍ《물리(物理)》 등 여러 책에, “까치는 바람을 아는 영조(靈鳥)이다. 태세(太歲 목성)를 등질 줄 알기 때문에 태세를 등지고 태을(太乙 태을성(太乙星)임)을 향해서 집을 짓는다. 집이 높으면 건조하고 바람이 없으며, 낮으면 습기가 많고 땅에 가까워서 바람이 세다.” 하였다.
꿩이 운다
《하소정해》에는, “꿩이 운다.[雉震雊] 진(震)이란 명(鳴)이다. 구(雊)란 날개를 치는 것이다. 정월에는 반드시 천둥을 치는데 천둥 소리는 반드시 들리지 않으나, 꿩만은 반드시 듣는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천둥을 치면 꿩이 우니 천둥으로 서로 알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물리서》에, “꿩은 청각이 발달하여 천둥치는 곳을 안다. 꿩은 음(陰)에 속하고 있어서 먼저 운 다음에 날개를 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닭이 알을 깐다
《하소정해》에는, “닭이 알을 깐다.[鷄桴] 죽죽이라는 것은 서로 부를 때다.[粥粥也者 相粥之時也] 혹은 부(桴)는 구복(嫗伏)이며 죽(粥)은 양(養)이다.”라고 했다.
내가 상고하건대, 《시경》빈풍(豳風) 치효장(鴟鴞章)에, “자식을 기르자니 고달팠구나.[鬻子之閔斯]”의 주에, ‘육(鬻)은 양(養)이니, 죽(粥)과 육(鬻)은 통한다.’고 했다.
《연문석의(連文釋義)》에, “하늘은 기로 따뜻하게 하고, 땅은 그 몸으로 따뜻하게 한다.[天以氣煦 地以形嫗]”라고 하니, 구복(嫗伏)은 닭이 알을 품는 것이다.
《양자방언(揚子方言)》에, “북연(北燕)과 조선 열수(冽水) 사이에는 닭이 알을 품는 것을 ‘안는다[抱]’ 참새 새끼와 병아리를 모두 ‘곡(鷇)’, 알을 품어 부화되지 않다가 비로소 부화되는 것을 ‘날(涅)’이라고 하니, ‘날(涅)’은 화(化)의 뜻이다. ‘유(乳)’란 것은 ‘구복(嫗伏)’을 이르는 것이며 ‘계유(鷄乳)’는 곧 알을 부화하는 것이니 ‘유(乳)’라고 말한다.”고 했다.
정조(征鳥)는 사납고 빠르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정(征)은 매(邁)이며 행(行)이며 왕(往)이다. 여(厲)는 심(甚)이며, 질(疾)은 신(迅)이다. 한기(寒氣)가 몹시 맵고, 가는 새는 빨리 날아가니, 매우 급하여 천천히 날 수가 없다. 월령의 주는 상고할 만한데, 정조(征鳥)를 월령에서는, “새매의 일종[鷹隼之屬]으로 공격을 잘하기 때문에 정(征)이며, 여질(厲疾)은 사납고 재빠른 것이다.[鷹疾者 猛厲而迅疾也]”라고 했고, 《자서》에서는, “응(鷹)은 지조(摯鳥)이고, 또는 제견(題肩)ㆍ정조(征鳥)ㆍ상구(爽鳩)ㆍ각응(角鷹)이다.” 하고, 《자서》의 정(鴊)에 대한 주에, “정조(征鳥)ㆍ제견(題肩)이다.”고 했다.
수택(水澤)은 중복(中腹)이 단단하게 언다
《하소정해》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상고하건대, ‘수택복견(水澤腹堅)’의 ‘복(腹)’ 자는 아마도, ‘복(復)’자의 오기인 듯하다. 무엇으로 증거를 삼는가 하면 11월의 여섯째 기후의 ‘샘물이 솟아 움직인다.[水泉動]‘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전달에 샘물이 양기를 거슬러 움직이다가 이달에 어찌하여 수택의 중복이 얼어붙겠는가. 11월에는 해가 남쪽으로 하늘에 이르고, 양기가 처음으로 땅에 돌아오니, 얼음은 당연히 녹아야 하는데 찬바람이 부는 때라 녹일 수 없은즉 다만 샘물이 약간 움직여 양기가 생기는 기후에 응해서 땅 속에 숨어 움직인다고 말했을 뿐이다.
12월은 찬 기운이 극도로 높아지니 앞에 언 얼음으로서 아직 굳지 않은 것이 날로 더욱 두껍게 얼어서 다시 견고해진다. 혹은, “후세의 문자(文字)에 강심(江心)이니 수면(水面)이니 하는 말이 있으니 수택복(水澤腹)이란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라고도 한다.
이 72기후는 매달의 여섯 기후를 변증한 것이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복희씨(伏羲氏)가 처음으로 8괘를 그어 3획(畫)을 만들어서 24기(氣)를 상징했으며, 주공(周公)이 시훈(時訓)을 만들어서 24기(氣)와 72후(候)를 정했다.
대체로 하루는 12시(時)이고, 5일이면 60시(時)이니, 갑자(甲子)가 한바퀴 돌면 오행(五行)이 끝이 나고 기(氣)와 후(候)가 바뀐다. 그러므로 5일을 1후(候)라 이르니, 1년 3백 60일은 72후(候)를 이룬다. 3후(候)를 1기(氣)라고 이르니 대체로 15일 2시 6각(刻) 남짓하고, 6기(氣)가 이루어지면 시(時)라고 말하는데, 시(時)는 91일 남짓하며, 사시를 세(歲)라고 말하니 대체로 하늘이 3백 60도(度)를 운행한다.
한(漢)의 초연수(焦延壽)ㆍ경방(京房)ㆍ양웅(揚雄)의 괘기의 법[卦氣之法]과 《소문(素問)》의 운기론[運氣之論]과 일관(日官)의 택일하는 술법 [剋擇之術]과 단가(丹家)의 수련의 비결[修煉之訣]과 율력가(律曆家)의 기후의 차서[氣候之序]는 모두 이것을 본받은 것이다. 어찌 학식이 천박한 선비가 그 심오한 이치를 엿보아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내가 외람됨을 생각하지 않고 열두 벽괘(辟卦)로 열두 달을 변증한다.
곧 자(子)는 복괘(復卦), 축(丑)은 임괘(臨卦), 인(寅)은 태괘(泰卦), 묘(卯)는 대장괘(大壯卦), 진(辰)은 쾌괘(夬卦), 사(巳)는 건괘(乾卦), 오(午)는 구괘(姤卦), 미(未)는 돈괘(遯卦), 신(申)은 비괘(否卦), 유(酉)는 관괘(觀卦), 술(戌)은 박괘(剝卦), 해(亥)는 곤괘(坤卦)로 벽괘(辟卦)가 된다.
감ㆍ진ㆍ이ㆍ태(坎震離兌)의 4괘(卦)로 24절의 절괘(節卦)를 삼는다
감괘(坎卦)의 초효(初爻)는 동지, 이효(二爻)는 소한, 삼효(三爻)는 대한, 사효(四爻)는 입춘, 오효(五爻)는 우수, 상효(上爻)는 경칩에 해당하며, 진괘(震卦)의 초효는 춘분, 이효는 청명, 삼효는 곡우, 사효는 입하, 오효는 소만, 상효는 망종에 해당하며, 이괘(離卦)의 초효는 하지, 이효는 소서, 삼효는 대서, 사효는 입추, 오효는 처서, 상효는 백로에 해당하며, 태괘(兌卦)의 초효는 추분, 이효는 한로, 삼효는 상강, 사효는 입동, 오효는 소설, 상효는 대설에 해당한다.
모두 24절인데 절괘(節卦)는 한 괘마다 각각 90일을 관장하니, 초효로부터 상효에 이르기까지 한 효마다 각각 15일을 관장한다.
60괘로써 72후(候)의 후괘(候卦)로 삼는다
이괘(頤卦)의 육사효(六四爻)는 동지로부터 시작하여 구인결(蚯蚓結), 중부괘(中孚卦)의 초구(初九)는 미각해(糜角解), 복괘(復卦)의 초구는 수천동(水泉動), 둔괘(屯卦)의 초구는 소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안북향(雁北向)ㆍ작시소(鵲始巢), 겸괘(謙卦)의 초육은 치구(雉雊), 규괘(睽卦)의 초구는 대한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유(鷄乳), 승괘(升卦)의 초육(初六)은 정조여질(征鳥厲疾), 임괘(臨卦)의 초구는 수택복견(水澤腹堅), 소과괘(小過卦)의 초육은 입춘(立春)으로부터 시작하여 동풍해동(東風解凍)ㆍ칩충시진(蟄虫始振), 몽괘(蒙卦)의 초육은 어척부빙(魚陟負氷), 익괘(益卦)의 초구는 우수로부터 시작하여 달제어(獺祭魚), 점괘(漸卦)의 초육은 안북향(雁北鄕), 태괘(泰卦)의 초구는 초목맹동(草木萌動), 수괘(需卦)의 초구는 경칩(驚蟄)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시화(桃始華)ㆍ창경명(倉庚鳴), 수괘(隨卦)의 초구는 응화위구(鷹化爲鳩), 진괘(晉卦)의 초육은 춘분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조지(玄鳥至), 해괘(解卦)의 초육은 뇌내발성(雷乃發聲), 대장괘(大壯卦)의 초구는 시전(始電), 예괘(豫卦)의 초육은 청명(淸明)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시화(桐始華) ㆍ전서화위여(田鼠化爲鴽), 송괘(訟卦)의 초육은 홍시현(虹始見), 고괘(蠱卦)의 초육은 곡우(穀雨)로부터 시작하여 평시생(萍始生), 혁괘(革卦)의 초구는 명구불기우(鳴鳩拂其羽), 쾌괘(夬卦)의 초구는 대승강우상(戴勝降于桑), 여괘(旅卦)의 초육은 입하로부터 시작하여 누괵명(螻蟈鳴)ㆍ구인출(蚯蚓出), 사괘(師卦)의 초육은 왕과생(王瓜生), 비괘(比卦)의 초육은 소만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채수(苦菜秀), 소축괘(小畜卦)의 초구는 미초사(靡草死), 건괘(乾卦)의 초구는 맥추지(麥秋至), 대유괘(大有卦)의 초구는 망종으로부터 시작하여 당랑생(螳螂生)ㆍ격시명(鵙始鳴), 가인괘(家人卦)의 초구는 반설무성(反舌無聲), 정괘(井卦)의 초육은 하지(夏至)로부터 시작하여 녹각해(鹿角解), 함괘(咸卦)의 초육은 조시명(蜩始鳴), 구괘(姤卦)의 초육은 반하생(半夏生), 정괘(鼎卦)의 초육은 소서로부터 시작하여 온풍시지(溫風始至)ㆍ실솔거벽(蟋蟀居壁), 풍괘(豐卦)의 초구는 응시지(鷹始摯), 환괘(渙卦)의 초육은 대서로부터 시작하여 부초위형(腐草爲螢), 이괘(履卦)의 초구는 토윤욕서(土潤溽暑), 돈괘(遯卦)의 초육은 대우시행(大雨時行), 항괘(恒卦)의 초육은 입추로부터 시작하여 양풍지(涼風至)ㆍ백로강(白露降), 절괘(節卦)의 초구는 한선명(寒蟬鳴), 동인괘(同人卦)의 초구는 처서로부터 시작하여 응내제조(鷹乃祭鳥), 손괘(損卦)의 초구는 천지시숙(天地始肅), 비괘(否卦)의 초육은 화내등(禾乃登), 손괘(巽卦)의 초육은 백로로부터 시작하여 홍안래(鴻雁來)ㆍ현조귀(玄鳥歸), 췌괘(萃卦)의 초육은 군조양수(群鳥養羞), 대축괘(大畜卦)의 초구는 추분으로부터 시작하여 뇌시수성(雷始收聲), 비괘(賁卦)의 초구는 칩충배호(蟄虫坏戶), 관괘(觀卦)의 초육은 수시학(水始涸), 귀매괘(歸妹卦)의 초구는 한로로부터 시작하여 홍안내빈(鴻雁來賓)ㆍ작입대수위합(雀入大水爲蛤), 무망괘(无妄卦)의 초구는 국유황화(菊有黃華), 명이괘(明夷卦)의 초구는 상강으로부터 시작하여 시내제수(豺乃祭獸), 곤괘(困卦)의 초육은 초목황락(草木黃落), 박괘(剝卦)의 초육은 칩충함부(蟄虫咸俯), 간괘(艮卦)의 초육은 입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시빙(水始氷)ㆍ지시동(地始凍), 기제괘(旣濟卦)의 초육은 치입대수위신(雉入大水爲蜃), 서합괘(噬嗑卦)의 초구는 소설로부터 시작하여 홍장불견(虹藏不見), 대과괘(大過卦)의 초육은 천기상승 지기하강(天氣上升地氣下降)ㆍ폐색이성동(閉塞而成冬), 곤괘(坤卦)의 초육은 대설로부터 시작하여 갈단불명(鶡鴠不鳴), 미제괘(未濟卦)의 초육은 호시교(虎始交), 건괘(蹇卦)의 초육은 여정출(荔挺出)에 각각 해당한다.
모두 60괘이니 한 괘마다 각각 6일을 관장한다. 가령 동지가 20일이라면 이 날은 이괘(頤卦)의 사효이고, 21일은 이괘의 오효, 22일은 이괘의 상효, 23일은 이괘의 초효, 24일은 이괘의 이효, 25일은 이괘의 삼효에 해당한다. 이처럼 미루어 생각하면 된다.
이로써 우러러서는 천지와 음양의 승강(升降)을 보고, 굽어서는 세월과 절후의 유서(流序)를 살핀다면 부질없이 먹기만 하고 세월을 허송하여 부끄럽게 사는 인생보다는 현명한 일이다. 다만 이것뿐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옛날 성인이 비록 72후(候)를 정하였으나 매달 밑에 물적 증거가 없다면 그 후(候)가 왔는지 안 왔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월령에 열거된 물상을 따라 매후(每候) 아래에 배열하여, 그 후(候)를 당하면, 어떤 물상이 생기고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생겨나고 나타나는 것을 만나면 곧 어떤 후(候)임을 알게 한 것이다. 후기(候氣)의 법도 이와 마찬가지로서 72후는 오로지 농상(農桑)의 시기를 알리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역궤(曆軌)에 끼워 넣은 것은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물상을 보면 그 후(候)를 알아서,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성인의 백성을 위하여 크게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니겠는가.
고인(古人)들에게는 사시(四時)에 대한 글은 있으나 72후에 대한 시(詩)는 없었는데, 청 고종(淸高宗)《어제집(御製集)》 기해고(己亥稿)이다. 에, “관신(館臣)에 명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검토케 하니 당(唐)부터 명(明)에 이르기까지는 72후를 읊은 것이 없고 국초(國初) 고덕기(顧德基)의 《동해산인집(東海散人集)》에 이 시제(詩題)가 있었다. 다른 글은 본조를 훼방한 것이니 그 패류(悖謬)한 것은 응당 불태워 버려야 하나, 72후를 읊은 것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이 책에 실어 둔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인연으로 한 번 볼 수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내가 일찍이 72후에 대한 변증설을 한 적이 있으니, 이것과 서로 짝을 이루면 한 시(詩)와 한 문(文)은 좋은 배필[佳耦]이라고 할 만하다. 《동해집(東海集)》이 이미 불타버렸으나 남은 것은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속에 갇혀 있으니, 어찌 압록(鴨綠)을 건너 동쪽으로 올 수 있겠는가. 지금《건륭어집(乾隆御集)》으로 말미암아 다행히 명 나라 숭정(崇禎) 말년에 고덕기(顧德基)가 노연(魯連)의 도해의 뜻[蹈海之志]을 품어, ‘동해’로 그 문집 이름을 삼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뜻을 담았음을 알았으니 어찌 가상한 일이 아닌가.
문집이 마침내 임금의 뜻에 거슬려 불태워졌지마는 그러나 역시 영광스럽다고 말하겠다. 그 전말을 함께 기록하여 한 조각 해동(海東)의 깨끗한 땅에서 영원히 썩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을 보인다.
정미년 정월 보름, 오주거사(五洲居士)는 호서(湖西) 중주(中州)의 덕협경실촌중(德崃經室村中)에서 변설한다.

728x90
728x90

동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5리, 남쪽으로 남양부南陽府 경계까지 35리, 서쪽으로 인천부仁川府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금천현衿川縣 경계까지 14리이며, 서울까지는 5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쳤고, 다시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했다.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태어난 곳이므로 승격하여 군을 만들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장항구獐項口ㆍ장구獐口ㆍ연성蓮城.

【성씨】 본군本郡 김金ㆍ안安ㆍ임林ㆍ방方.

【형승】 땅이 큰 바다에 접했다.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땅은 큰 바다에 접했고 또 산에 의지하였는데, 고을 성에 사는 백성은 아득한 안개 사이로다”라고 하였다.

【산천】

수리산修理山, 군 동쪽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일명 견불산見佛山이라 한다.

취암鷲巖, 수리산에 있다.

오자산五子山, 군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마하산麻河山, 군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광덕산廣德山, 군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다.

바다, 군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오질이도五叱耳島, 군 서쪽 47리 되는 곳에 있다.

석을주도石乙注島, 군 서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소홀도召忽島, 군 서쪽 15리에 있으며 주위가 32리이고 목장이 있다. 본래 남양부南陽府에 예속하였는데 성종成宗 17년 본군에 옮겨 붙였다.

여월음양余月音洋, 오질이도 서쪽에 있으며 수로가 10리인데, 세곡을 수송하는 배가 지나는 곳이다.

개교천介橋川, 근원이 취암鷲巖 아래에서 나와서 객사 남쪽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포오천浦吾川, 군 북쪽 12리 되는 곳에 있다.

별사곶別士串, 군 서쪽 12리 되는 곳에 있다.

【토산】 소금ㆍ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참조기[黃石首魚]ㆍ뱅어[白魚]ㆍ은어[銀口魚]ㆍ병어兵魚ㆍ농어[鱸魚]ㆍ홍어ㆍ준치[眞魚]ㆍ민어民魚ㆍ전어錢魚ㆍ호독어好獨魚ㆍ오징어[烏賊魚]ㆍ낙지ㆍ해파리[海䑋]ㆍ조개ㆍ가무락조개[黃蛤]ㆍ맛조개[竹蛤]ㆍ굴[石花]ㆍ토화(土花)ㆍ소라(小螺)ㆍ게[蟹]ㆍ청해靑蟹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쌀새우[白鰕]ㆍ곤쟁이[紫蝦]ㆍ부레[魚鰾]ㆍ사자족애獅子足艾

【관방】 초지량영草芝梁營, 군 서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

【봉수】 오질이도 봉수烽燧, 남쪽으로 남양南陽 해운산海雲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仁川 성산城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군 동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역원】 석곡역石谷驛, 군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다. 쌍록원雙鹿院, 군 남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불우】 원당사元堂寺ㆍ정수암淨水庵, 모두 수리산에 있다. 수월암水月庵, 안양산安陽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사당이 둘 있는데 하나는 군 서쪽 21리 되는 곳에 있고, 하나는 군 서쪽 32리 되는 곳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강희맹묘姜希孟墓, 군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총묘】 장항폐현獐項廢縣, 군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古城, 군 서쪽 25리 되는 곳에 있으며,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5백 65척이다.

【명환】 본조 이숙번李叔蕃 지군知郡이 되었을 때 태종을 도와서 정도전鄭道傳의 난을 평정하였다.

조석문曹錫文 지군知郡이 되어서 행정 성적이 최고임으로 홍주洪州 목사牧使로 승진하였다.

【인물】 고려 김은부金殷傅,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목종穆宗 때 어주사御廚使가 되었으며, 현종顯宗이 거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니 은부殷傅가 그때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로 있으면서 마음껏 공궤하고, 그 딸을 바치었는데 곧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원혜元惠 원평元平 두 왕후도 그의 딸이다. 뒤에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제수하였으며, 죽은 뒤에 후后 해서 개부의 동삼사 수사공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侯를 증직하였다.

【제영】 해상부용기타산海上芙蓉幾朶山,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바다 위의 연꽃은 몇 떨기의 산인고. 개인 빛이 술잔 사이에 뚝뚝 떨어지려 한다. 누에 오르매 유월의 뜨거움이 변하니, 곧 바람을 타고 광한루(廣寒樓)에 들어가려 한다”라고 하였다.

일군소조사면산一郡蕭條四面山,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온 고을이 소조하니 사면이 산인데, 조망眺望 가운데의 절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이로다. 작은 마루에 해는 정오正午인데 봄 졸음을 이루니, 소매에 가득한 맑은 바람 뼈에 부딪쳐 차도다”라고 하였다.

선궁은약백운간禪宮隱約白雲間, 이원李原의 시에, “홀로 동헌東軒에 앉아 푸른 산 바라보니, 선궁禪宮이 흰 구름사이에 희미하게 보인다. 벼슬하는 몸을 빼어 어느 날에 중을 찾아 가서, 특별히 찬 소나무 바람을 누워서 들으리”라고 하였다.

지요갱도적삼오地饒秔稻敵三吳,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만리의 구름 산이 그림같은데, 처음으로 개인 풍경은 우유보다 윤택하다. 사일社日(봄가을 동네에서 제사지내고 모이는 날) 뒤에 새 술독을 여는 것이 사랑스럽다. 강동에만 반드시 아름다운 노어가 있지 않으리라. 바다가 가까우니 생선과 소금은 백월百粤(중국 광동 지방)과 같고, 땅이 비옥하니 메벼와 찰벼는 삼오三吳(중국 강동 지방)를 대적한다. 정녕 시험삼아 전옹田翁을 위하여 말한다. 동쪽 집을 사려고 묻고자 하노니 허락하려는지”라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혁폐 초지진草芝鎭, 서남쪽으로 30리인데 범리면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어, 효종孝宗 7년에 강화江華로 옮겼는데 성의 옛터가 남아 있다.

【방면】 용건龍巾, 동쪽으로 10리이다. 잉화곡仍火谷,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초산草山,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군내郡內, 남쪽으로 12리이다. 대월大月,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마유馬游,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범리凡里,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인데 본 군郡의 옛 소재지가 있다.

728x90
728x90

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났군요. 올해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어 농사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큰 피해는 보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은 현재 황해도 지역까지 보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뎌지고 있네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떠올리며, 한 걸음은 갔으니 앞으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충청도 지역을 소개하겠습니다.

청주에서 충주로

934년 6월 30일, 다카하시 노보루는 자동차로 청주에서 충주까지 달렸습니다. 그는 본분이 학자인지라 경치를 구경하기보다는 논밭이 먼저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본 논밭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1935년 자동차 사진. 농민들에게는 여전히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① 콩에 들깨를 군데군데 섞어짓기한다. 들깨는 옮겨 심은 것
콩밭에 빈자리를 두지 않으려고 군데군데 들깨를 심은 모습이다. 보통 들깨는 밭 둘레에 쭉 둘러 심는 일이 많은데, 특이한 모습이다.




② 콩과 수수 섞어짓기
콩과 수수는 자주 섞어짓는 작물이다. 수수는 거름을 많이 먹고, 콩은 거름을 만드는 성질을 활용한 모습이다. 몇 년째 콩과 수수를 섞어짓기하는데, 실제로 아주 궁합이 잘 맞는다.



③ 가을보리 사이짓기 콩
보리는 보통 밭을 싹갈이(또는 삭갈이, 밭 전체를 완전히 다 간다는 뜻)한 뒤, 고무래로 골을 타고 심는다. 거름이 많은 집은 밭에 거름을 쫙 뿌린 다음 소로 쟁기질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골을 타 보리를 심고 그 위에 흙 대신 두엄을 덮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보통 겨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기에 골에다 심는다. 그러니까 골에는 보리를 심고, 이듬해 봄이 오면 두둑에는 콩을 심는 형식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유럽은 오히려 여름에 비가 별로 오지 않고 겨울에 많이 와서, 여름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겨울에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아무튼 이때는 망종에서 스물 닷새나 지났으니 보리는 밑동만 남았을 것이다.



④ 가을보리 사이짓기 목화
콩 대신 목화를 심은 모습이다. 보리는 다 베었을 텐데, 목화는 싹이라서 그런지 보리보다 작다. 아니면 그림을 잘못 그렸을 것이다. 당시 목화는 중요한 돈벌이 작물이었다. 일제는 방직업 같은 공업 원료들을 조선에서 마음껏 긁어 갔다. 농민들이 물세에 여러 세금을 내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목화를 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⑤ 콩 홑짓기(줄지어 점뿌림)
두둑을 좁게 지어 한 두둑에 한 줄로 콩을 심은 모습이다.



⑥ 콩 홑짓기 가로로 점뿌림
위와 달리 두둑을 더 넓게 짓고, 콩을 더 배게 심었다.



⑦ 가을보리 60㎝(2尺)로 줄뿌림한 사이에 콩 1줄로 점뿌림
올해 안산 텃밭에서는 밀에 사이짓기로 콩을 심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밀이 버티고 서 있으니 차츰 극성스러워지는 새들에게서 콩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는 새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⑧ 일반적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다
전문적으로 논농사만 크게 짓는 곳이 아니라면 지금도 여느 농촌이나 다 논두렁콩을 심는다.

⑨ 가을밀 사이에 콩. 120㎝(4尺)로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콩을 2줄로 점뿌림
7번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대신 두둑을 더 넓게 지어 콩을 2줄로 심은 것이 차이일 뿐이다.

⑩ 가을보리 사이에 조 줄뿌림
보리의 두둑 사이는 약 90㎝(3尺), 대부분 펀펀한 두둑이다. 조 사이사이에 콩을 섞어 심었다.
보리는 수확했겠지만, 한 밭에서 3가지 작물을 볼 수 있다. 보통 2년 3작은 이렇게 돌린다. 봄에 조를 심어 가을에 거두고, 거기에 밀이나 보리를 심는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거둔 뒤, 다시 콩을 심어 가을에 거둔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봄까지 땅심을 찾도록 묵힌다.
하지만 이 밭에서는 특이하게도 콩과 조를 함께 심었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가 자란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여름에 심은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올해 밭에서 콩과 조를 함께 심어 본 결과,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2년 3작이 아니라, 그냥 보리를 거둔 뒤 콩에 띄엄띄엄 조를 심거나 그 반대의 경우일 것이다.



⑪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조를 줄뿌림한다. 보리도 이와 같다

⑫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콩을 줄지어 점뿌림한 곳이 많다

충북 청주군 사주면 복대리
먼저 복대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곳은 청주군 서주내면의 지역이었다. 여기에 짐대(솟대)가 서 있어 짐대마루라 하다가, 말이 변하여 진때마루 또는 복대(福臺=卜大)라 했다. 1914년에 실시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천리(竹川里)와 화진리(華辰里) 일부를 병합하여 복대리라 했다.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으로서, 중부고속도로와 충북대학교 사이에 낀 지역이다.
다카하시는 이곳에서 박인규(朴寅圭) 씨를 만났다. 그의 식구는 모두 여덟이다. 그들은 아버지(53), 자신(31), 아내(23), 딸(3)과 둘째 아들 내외(23, 22), 셋째 아들(18), 넷째 아들(11, 보통학교)이다. 그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3명이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시험장에서 일꾼으로 일한다고 한다. 현재 있는 '충청북도 농업기술원 종자생산시험장'이란 곳이 1957년 1월 1일 청원군 사주면 복대리에서 진천으로 이전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이 시험장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 가운데 갱빈밭(ケンビンパ)에서 보리 그루갈이 콩, 들깨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겠다.

먼저 이 밭은 집에서 327m(3町) 떨어진 곳으로서, 600평이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소작료는 정조로 나락 1섬 3말 5되를 낸다. 모두 600평이지만 콩과 들깨를 그루갈이하는 곳은 500평이다.
보리를 심으려고 거름을 내는데, 배합비료 18.75㎏과 두엄 50지게(1지게에 45~56㎏)을 혼자서 하루에 나른다. 그런 다음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 5일 전인 음력 9월 5일에 한다. 그리고 홑짓기하던 콩에 그루갈이로 보리를 심을 때 쟁기질하는 방법은 싹갈이다. 그런데 다카하시 노보루는 이 대목에서 이런 방법은 경기도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내가 밭에서 마을 어르신께 들은 이야기와도 똑같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기계가 밀려들기 전인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193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농사지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방법은 먼저 베어 낸 콩 그루를 중심으로 두 거웃 갈이 하여, 양쪽으로 째며 갈아엎어 땅을 펀펀하게 한다. 써레질은 나중에 한다. 그런 다음 쟁기질한 방향과 직각으로 보리씨 뿌릴 골을 낸다. 그러니 고랑이었던 곳이 이듬해에는 두둑이 되고, 그 다음해에는 다시 고랑으로 만들어 땅을 알맞게 돌아가며 활용할 수 있다. 골을 낼 때는 보습을 끼워서 한 거웃 갈이를 한다. 두둑과 두둑의 너비는 쟁기꾼이 알아서 알맞게 한다. 골을 탄 뒤에는 쇠스랑으로 긁는다. 아무래도 손으로 골을 깔끔하게 다듬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이듬해 사이짓기로 콩을 심는 것은 '골고리'라고 부른다. 그럴 경우에는 보릿골을 넓게 탄다. 보리는 동보리라는 품종을 심는데, 아마 동(冬)보리는 곧 겨울보리를 말하는 것 같다. 뿌리는 보리의 양은 모두 2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할 때에는 주인, 셋째 아들, 품앗이 남자(마을 사람) 4명, 품앗이 소 1마리(쟁기도 함께)가 함께 한다. 일하러 오는 마을 남자 4명은, 보리농사인 만큼 두레가 아니라 그냥 품앗이일 것이다.



그리고 소가 와서 일해 주면 남자 둘이 가서 그만큼 일해야 한다. 그리고 소가 일하러 오면 아침, 저녁에는 소 주인이 먹이를 책임지고, 점심만 빌린 사람이 책임진다고 한다. 이 집처럼 쟁기까지 빌려쓰면, 소 1마리+쟁기의 품삯으로 2원에다 쟁기꾼 품삯 1원까지 모두 3원을 줘야 한다. 논에서 일하건 밭에서 일하건 모두 똑같고, 모내기철처럼 아주 바쁠 때라고 특별히 더 비싸지도 않다. 다만 바쁠 때에는 일꾼에게 세 끼 밥을 챙겨 주고, 담배(3전)를 주면 하루 품삯은 60전이다.

이렇게 보리를 심을 때에는 농기구로 쟁기 1대, 쇠스랑 5자루, 삼태기 2개, 토입기(土入器) 1개, 씨앗 담는 바가지 1개를 쓴다. 이 사람들과 농기구를 가지고 한나절이면 500평에 보리 심기를 끝낸다.

이후 음력 9월 안에 보리 싹이 나오면, 곧바로 사람 똥오줌을 두 번 정도 준다. 약 100병 정도인데, 한 병에 약 37.5㎏ 들어간다. 웃거름을 한 번 줄 때마다 남자 두 사람이 함께 한다. 웃거름은 사람 똥오줌을 기본으로 주는데, 그것 말고도 돼지 오줌이나 부엌의 구정물 같은 것도 준다.
첫 번째 웃거름은 싹이 난 뒤 바로 준다. 두 번째 웃거름은 석 달 뒤인 초봄에, 그 동안 모아 둔 똥오줌을 내다가 준다. 또는 얼음이 풀릴 때 화학비료를 줄 때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배합비료 1가마니 37.5㎏을 가루로 만들어 준다. 이 배합비료 1가마니는 4원 36전이다. 앞에 쟁기꾼의 하루 품삯이 1원이었으니, 요즘처럼 사람 품삯이 비료값보다 더 비싼 것과 확실히 다르다.

음력 3월쯤에는 주인과 셋째 아들이 김을 맨다. 이 둘이 대략 이틀쯤 걸려 끝낸다. 김매고 5일 뒤에는 주인 혼자서 토입기로 흙을 넣는다. 하루면 충분히 마친다. 

음력 5월 중순, 양력으로 따지면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에 보리를 벤다. 품앗이 2명과 주인이 함께 낫 3자루를 들고 한나절 동안 보리를 베고, 이후 지게로 나른다. 집에 나른 다음에는 이 세 사람이 도리깨로 떠는 데 한나절 걸린다. 수확량은 3섬(최고는 4섬이었음), 보릿짚은 7지게가 나왔다. 이걸 내다 팔면 겉보리 1섬에 13원 50전을 받고, 보릿짚은 1지게에 60전을 받는다.

방아는 발동기로 찧는데, 그러면 원래 양에서 보리쌀 56~67%를 얻는다. 여기서 나오는 보리기울은 집에 가지고 간다. 2말 5되 정도의 보리기울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돼지에게 먹인다. 이 집은 소가 없었으니 돼지가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소가 없는 집에서는 거름도 밟히고 급할 때 돈으로 바꾸려고 돼지라도 한두 마리씩 꼭 키웠다고 한다. 
728x90
728x90
이번 호에서는 다카하시 노보루가 1939년 5월 24일에 방문한 제주읍 이도리(二徒里) 구남동(九南洞)에 살던 김정용(金丁龍·43) 씨의 농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도리는 현재 제주시 이도1동과 도남동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제주도에 살아보지 않아 구남동이 정확히 어디인지 찾기 힘들지만 바닷가까지 약 2.2㎞라는 것을 단서로 지도에서 찾아보니 삼성혈 근처의 어느 곳일 겁니다. 이 글을 보신 제주도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마을은 바닷가에서 그렇게 가까운데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도 없고, 잠녀도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10호가 살고, 일본에 건너간 사람은 남자 5명, 여자 3명, 아이 6명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과 가까워서 그런지 많이들 건너갔습니다. 4.3항쟁 때도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더군요. 아픈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1930년대 제주도 잠녀의 물질하는 모습. 제주도 잠녀들은 철마다 전국은 물론 일본까지 출장을 다니며 끈질기게 살아왔다


정용 씨의 살림

이 분은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만 지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식구는 아내(41), 맏아들(21), 맏며느리(18), 둘째 아들(10), 맏딸(23, 일본 건너감), 둘째 딸(15), 셋째 딸(8)로 모두 8명이고, 그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 5명입니다. 땅은 제주도답게 논은 없고, 밭 4,800평을 농사짓습니다. 2,400평만 소작을 하고 나머지 2,400평은 자작을 하니, 당시로서는 꽤 유복한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요. 기르는 작물은 보리, 조, 콩, 밭벼, 고구마, 풋베기콩 등입니다. 집의 텃밭에는 고구마 모종을 키우고 마늘, 파, 상추, 배추, 호박, 옥수수, 사탕수수를 심어 먹는다고 합니다.
뭍과 다르게 소작 관행이 아주 재미있어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일종의 전세보증금처럼 땅을 빌리는 사람이 돈을 맡기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밭주인이 그 보증금을 돌려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약은 오로지 입으로만 이루어지고, 밭주인은 보통 1년에 20%의 이자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런 관행이 참 많은데 다카하시는 땅은 많은데 농사지을 사람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예상합니다.
또 특이한 것으로는 공동으로 관리하는 꼴밭이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제주도하면 들판에서 뛰노는 말과 소가 생각나지요. 이 사람의 꼴밭은 600m 떨어진 1,500평의 땅으로, 여기에는 소나 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둘렀습니다. 제주도에는 돌담을 두른 밭이 많은데 그 까닭은 놓아기르는 소나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꼴밭에는 자골(자귀풀)을 길러서 그걸 베어 겨울에 소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소를 기르는 방법도 재미있습니다. 소도 공동으로 놓아기르는데, 이 마을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어서 이웃마을 방목계에 들었다고 합니다. 보통 음력 6월 초부터 8월 말까지 거기에 데려다 놓는데, 비용은 늙거나 어리거나 구별 없이 소와 말 1마리에 40전입니다. 대신 막 태어난 놈은 공짜이고, 계원은 할인 혜택이 있어 한 사람에 20전이라고 합니다. 놓아기르는 소와 말은 주인들 가운데 1명씩 3~5월과 9~10월에 순번대로 돌아가며 산에 풀어놨다가 끌고 온다고 합니다. 곁다리는 그만 잡고 본격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와 말을 막기 위해 돌담을 두른 밭(좌)
자귀풀(우)
450평의 보리밭. 번호는 씨를 뿌리는 순서

먼저 450평의 밭에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이 밭에는 앞갈이로 밭벼를 기르는데 그걸 음력 10월 20일에 거둡니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정말 따뜻한가 봅니다. 그리고는 10월 말에 돝거름을 냅니다. 제주도는 소똥보다 돼지똥을 거름으로 더 많이 썼습니다. 주인 내외와 맏아들 내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동안 모두 100지게를 져 나른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내와 며느리가 거름을 다섯 두둑에 뿌리고, 주인은 한쪽부터 보리를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쟁기질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섯 두둑씩 거름을 주고 보리를 뿌리고 쟁기질합니다. 그러는 사이 맏아들은 돌담 둘레에 검질(김)을 매고 쟁기질하지 못하는 부분을 괭이로 갑니다. 보리는 모두 3말을 뿌리는데, 2말 5되는 쟁기질 전에 뿌리고, 쟁기질 한 뒤 남은 5되를 다시 뿌립니다.
밭 모양은 아래 그림처럼 돌담을 두르고 사람만 드나들 수 있게 입구를 냈습니다. 이걸 세 ‘파니’ 또는 ‘칭’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배미를 뜻합니다.
쟁기질은 두뱃때기를 합니다. 한 이랑을 왔다갔다 두 번 가는 것을 말합니다. 소로 한 번 갈아 놓으면 맏아들은 흙을 덮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은 섬비를 가지고 합니다. 섬비는 뭍의 끙게와 같은 것입니다. 소나무 가지나 떨기나무를 모아서 묶고 무게를 더하기 위해 그 위에 돌을 얹어서 끌고 다니면 보리가 흙에 덮이는 도구입니다.


 
흙을 덮으려고 섬비를 끄는 맏아들(좌) 쟁기질, 쟁기질 간격은 30cm(우)
 

눌의 모습

흙을 덮고 나서는 아내와 며느리가 곰베(곰방메)를 들고 다니며 부서지지 않은 흙덩어리를 부숩니다. 이렇게 하여 보리 뿌리는 일을 끝냅니다. 아침 7시부터 점심을 30분 먹고 거의 4시가 다 되어 끝냈다고 합니다.
보리를 다 뿌리면 이제 관리에 들어갑니다. 뿌리고 나서 바로인 음력 11월 초부터 3월 17일까지 아내와 며느리가 달마다 초하룻날에 오줌을 열두 허벅을 줍니다. 허벅 하나에 1말 정도 들어간다고 하니 모두 12말쯤 됩니다. 식구 8명이 한 달에 오줌을 열두 허벅을 누기 때문에 거름이 모자라서 다른 보리밭에는 오줌을 웃거름으로 주지 못하고, 대신 풋베기콩을 밑거름으로 줄 뿐이라고 합니다. 허벅은 제주도만의 독특한 농기구인데 요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하니 관심이 있으면 가 보시기 바랍니다.
김매기는 음력 2월 20일에 애벌매기를 합니다. 음력 10월 말쯤 뿌렸으니 4개월 지나 처음으로 김을 맵니다. 주인, 아내, 맏아들 부부, 둘째 딸 이렇게 5명이 아침 10시부터 점심시간 포함해 7시간 걸려서 끝낸다고 합니다. 이때 보리는 9㎝ 안팎으로 자라 있습니다. 드디어 딸이 나온 걸 보면 역시 며느리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딸은 애지중지 길렀나 봅니다. 김매기는 한번으로 끝내고, 음력 4월 초에 밭에서 저절로 나는 메귀리를 주인 혼자 뽑는 정도만 합니다.
음력 4월 하순에 보리가 다 익으면 거두어들입니다. 앞에 말한 다섯이 아침 5시부터 시작해 점심에 한 시간 쉬고 오후 4시에 끝냅니다. 한 사람이 세 두둑을 맡아서 베고, 두둑마다 한 움큼씩 땅에 눕혀 놓습니다. 그걸 2~4일 동안 말린 다음, 주인 혼자 단을 묶는 데 하루 걸립니다. 단은 15~20움큼으로 한 단을 만들어 모두 320단이 됩니다. 그걸 주인과 맏아들이 소와 말에 싣고 한나절 걸려 집으로 나릅니다. 한 바리에 20단을 나를 수 있어 8번을 오가야지 다 나르고, 집에다가 눌(가리)을 쌓습니다.

조와 콩 뿌리기
다음으로 콩과 조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콩이나 풋베기콩은 쟁기질하기 전에 뿌리기 때문에 늘 알씨가 되고, 조는 늘 쟁기질하고 나서 뿌리기에 웃씨가 됩니다. 알씨(下種)와 웃씨(上種)는 제주도의 특이한 농사법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보통 밭벼, 보리, 쌀보리, 밀은 씨를 뿌릴 때 두 번 뿌립니다. 앞서 보리를 뿌릴 때 얘기했듯이 쟁기질하기 전에 씨의 약 2/3를 흩뿌리고 나서 쟁기질을 합니다. 이때 뿌리는 씨를 알씨라고 하지요. 그 다음 다시 나머지 1/3을 뿌리는데 이를 웃씨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나눠서 뿌리는지는 아직 찾지 못해서 더 알아봐야 하는데, 참 신기한 농법입니다.



소와 말을 끄는 맏아들


2004년 8월 밭밟기를 재연한 모습. 제주도 사투리로 이를 밧발림이라고 한다


아무튼 먼저 주인이 골체(삼태기)로 재를 나르면 아내가 골체에 담아다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씨는 주인이 뿌립니다. 망태에 씨를 담아 왼쪽 어깨에 걸고 오른손으로 씨를 뿌립니다. 그 사이 맏아들은 곰베로 흙덩어리를 부수고, 며느리와 둘째 딸은 호미로 김을 맵니다. 주인이 씨를 뿌리고 쟁기질한 뒤, 다시 웃씨(5되)를 뿌리고 섬비를 끌어서 흙을 덮은 다음 소와 말을 데리고 밟게 합니다. 맏아들이 소와 말 한 마리씩을 끌고 가고, 며느리와 둘째딸이 이를 따라가면서 밭을 밟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씨를 심지 않고 뿌리기 소를 앞에 놓고 말을 그 뒤에 놓습니다. 소와 말을 함께 끌 경우에는 늘 소를 앞에 놓고 말은 이를 뒤따르게 합니다. 소로만 하는 경우 또는 말로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밭을 밟는 데는 보통 대여섯 마리의 소와 말을 쓰는데, 한 집에서 그 정도로 많이 키우지 못하기에 품앗이를 합니다.

들깨 뿌린 곳

콩은 웃씨를 뿌린 다음 곧바로 흩뿌립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는 콩도 심지 않고 뿌립니다. 아마 새 피해가 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까치만 해도 1963년에 처음으로 제주도에 방사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또 콩에 섬비를 끌어 흙을 덮기 전에 돌담 둘레에는 들깨를 한 줄 뿌립니다. 곧 이 밭에서는 조와 콩, 들깨가 함께 자랄 것입니다.

이상으로 1930년대 말 제주도에 살던 김정용 씨의 농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제주도는 뭍과 다르게 참 특이한 모습이 많았습니다. 제주도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논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를 조사한 다른 부분에서는 논이 나오기도 하는데 논벼보다는 밭벼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쌀도 주식이라기보다는 내다 팔거나 제사 때 조금 쓰는 것이 다였다고 합니다. 지난번 텔레비전을 보니 제주도에서는 국수에 돼지고기를 넣어 먹는다고 하더군요. 이것도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는 관습에서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말이나 소는 놓아기르고 주로 돼지를 이용해 똥도 처리하고 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제주도에서는 잔칫날 돼지고기가 나오지 않으면 전라도 사람이 홍어를 먹지 못한 것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직 제주도를 다녀오지 못해서 다음해에는 직접 갔다올 생각입니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오신 분들도 다시 한 번 꼼꼼히 제주도를 체험해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728x90
728x90

지난 호에 이어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카하시가 경기도부터 조사했지만 책은 전라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순서에 따라 전라도 조사 기록을 보고, 앞으로 남은 두 번 동안은 경상도와 충청도, 제주도의 조사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니 잡다한 말은 줄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순천 사는 황귀연 씨

먼저 다카하시가 1939년 2월 26일에 방문한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풍덕리(豊德里)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지금은 순천시 풍덕동이 되었습니다. 순천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합니다. 예전에는 논밭이었을 곳이 지금은 도심지가 되었지요. 그때 당시 이 마을은 모두 61호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농업은 47호(자작 10호, 자소작 10호, 소작 27호), 날품 파는 가구 13호와 담배 말리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물이 네 군데 있고, 소는 11마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입니다. 농사짓는 규모는 대농은 논 37~40마지기와 밭 5마지기 정도, 소농은 논 2~3마지기만 지었다고 합니다.
다카하시가 방문하여 조사한 농민은 32살의 황귀연(黃貴連)이라는 사람입니다. 부모님과 아이들, 동생들 모두 10여명이 함께 사는 대가족입니다. 그래도 일본에 가서 돈을 버는 동생도 있고 역무원을 하는 동생도 있어 그리 형편이 어려운 집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보시겠지만 대부분의 조사 농가는 어느 정도 사는 집들입니다. 조사하기 편한 점도 있을 테고, 그 지역 공무원들이 섭외하기도 좋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은 모두 아홉 군데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두 배미짜리 800평 논입니다. 이곳의 소작료는 6/10이고, 볏짚은 소작인이 갖는다고 합니다. 수확량은 1936년도에 '은방주'(銀坊主)로 나락 10섬, 1937년에는 나락 6섬을 했습니다. 은방주라는 품종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에서 1922년에 들여온 품종으로 까락이 없고 수확량이 많으며, 적당한 크기라서 잘 쓰러지지 않고 병에 강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랐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 都摸떡不이라는 품종을 흔히 토종으로 아시지만 이것도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입니다. 아무튼 이 논에 모내기할 때는 1평에 18~21㎝ 사이로 모두 86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뒷갈이로는 쌀보리를 하고, 왕골도 1평 심어서 소의 고삐 29m 정도 만들고, 풋거름 작물로 자운영도 5평 심었다고 합니다.
다음 남지종 앞밭이라는 곳입니다. 남지종은 뭔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자기한테 들리는 소리를 일본어로 적어놓아서 그걸 다시 우리말로 푸는 작업이 가장 힘듭니다. 사투리도 많고 처음 듣는 낱말도 많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 밭은 280평으로 집에서 1308m 떨어져 있는데, 소작료로 정조(定租)1)

1) 소작 계약 때 미리 일정한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뒤 분배하는 소작 관행. 일제시대 소작료는 보통 40~60%였는데, 세금만은 지주와 소작인 혼자서 또는 둘이 함께 부담했다. 소작인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거두어들이고 가공할 수 있었지만 소작료는 지주가 지정한 장소까지 기일 안에 날라다 놔야 했다.

 나락  한 섬을 낸다고 합니다. 가을에 쌀보리를 심어 거두고 나서는 그루갈이로 콩 140평, 사이짓기로 목화 140평을 심고, 가을에는 집에서 먹을 김장거리로 무와 배추를 조금 심습니다. 보리 사이짓기 목화는 가을에 보리를 골에 뿌려서 기르다가 목화를 심을 때가 되면 비어 있는 두둑에다 목화씨를 심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콩을 심었던 곳에는 다음해에는 목화를 심고, 목화를 심었던 곳에는 콩을 돌려가며 심는다고 합니다.

 

황귀연 씨의 논농사

이 사람이 농사짓던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중오종이라는 440평의 논에 벼를 기르는 방법입니다. 앞갈이 쌀보리를 음력 5월 5일에 거두고 그 다음날 쟁기질합니다. 쟁기질은 자기가 한나절 걸려 하는데, 삽과 쇠스랑 한개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쟁기질한 뒤에는 써립니다. 쟁기질하는 방법은 두그루짓기하는 땅일 경우에는 '바타갈이(batagari)'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타리갈이(tarigari)', '익갈이(ikkari)'라고도 합니다. 아래 그림처럼 보리 두둑을 부수는 갈이법입니다.


음력 4월 15일부터는 혼자서 이틀에 걸쳐 거름 20지게를 날랐습니다. 음력 5월 8~9일쯤에는 놉을 한 명 사서 1시간 반에 걸쳐 거름을 뿌리고 나서 물을 대고, 3시간 동안 써레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논을 준비하고는 음력 5월 13일쯤에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내기를 보통 음력 5월 8일부터 시작하여 5월 20일쯤에 끝낸다고 합니다. 모내기를 하려면 모를 쪄야 하는데 이 일에는 아내와 제수씨가 아침 먹기 전에 못자리에 나가 4시간 걸려 끝내놓으면, 자기와 동생이 논까지 2시간 반 걸려서 옮겨 놓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1시간 정도 걸려서 논두렁에 풀도 싹 깎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들 둘이 못줄을 띄고, 일꾼 한 사람이 더 붙어서  점심 때 50분 쉬고 오후 5시에 모내기를 끝냅니다. 모는 한 그루에 6~7포기를 꽂고, 1평에 18~24㎝ 사이로 64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김매기에 들어갑니다. 애벌매기는 모내고 15일째이니 음력 5월 28일쯤 혼자서 손으로 한나절에 끝냅니다. 두벌매기는 5일 뒤인 음력 6월  3일쯤 자신과 남자 놉 한 명이 오전 오후에 3시간씩 하고, 세벌매기는 그 일주일 뒤에 자기 혼자서 손으로 하루 반 걸려 합니다. 보통은 세벌매기를 하는데, 일찍 심은 집은 네벌까지 매는 경우도 있고 늦게 심은 집은 두벌매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음력 8월 5일에 이삭이 누렇게 되기 시작할 때쯤에는 피사리를 시작해 자기 혼자서 3시간에 걸쳐 모두 두 번 정도 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23일에는 벼를 거둡니다. 보통은 음력 8월 25일에서 음력 9월 10일 사이에 거둔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놉이 아침 먹고 나서 오후 4시까지 벼베기를 한 뒤, 그대로 땅에다 펼쳐서 말립니다. 3일 뒤에는 작은 단으로 묶는데, 이 일은 아내와 제수씨가 이틀에 걸쳐 묶어서 쌓아 놓습니다. 이 마을에서 볏단을 쌓는 방법은 위의 그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쌓아 놓은 볏단은 자기하고 맏아들이 지게로 집에 날라다 쌓습니다. 한 지게에는 15단을 지는데, 55㎏정도 입니다. 지난 해에는 1단에서 나락 1되 5홉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걸 마당에다가 쌓습니다. 그것을 ‘비늘가리’라고 하는데, 비늘처럼 쌓는다는 뜻입니다. 보통은 그냥 줄여서 ‘비늘’이라고 합니다.

3일 뒤에는 마당질합니다. 이때는 온 가족이 모두 나와 일합니다. 아내, 어머니, 동생, 제수씨, 역무원 동생, 둘째 제수씨 여섯이 저녁까지 나락을 떱니다. 키로 날려 고르기는 자신과 남자 놉 두 사람이 3시간 걸려 마칩니다. 그 결과 나락 3섬 7말 5되에 쭉정이 3말을 얻었습니다. 이걸 방아 찧으려면 방앗간에 가서 값을 치르고 합니다. 나락 1섬을 찧으면 흰쌀 4말 5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1되 2홉 5작을 냅니다. 그리고 왕겨는 3말, 쌀겨는 1말 정도 나옵니다. 나락 1섬의 값은 16원이고, 거름을 만드는 왕겨는 5말들이 1가마니에 4~6전, 소에게 먹이는 쌀겨는 1말에 10전입니다. 흰쌀은 1말에 3원 20전합니다.

 

남원 사는 박학규 씨

다음은 39년 10월 16일에 방문한 남원군 왕치면 식정리에 사는 68살의 박학규(朴鶴奎)씨의 밭농사를 조금만 보겠습니다. 이 집은 마을에서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암소 1마리에 닭 6마리를 키우고, 겨울에 가마니 120장을 쳐서 30원의 수입을 냅니다. 집은 150평에 구들을 놓은 방이 있는 건물 3채(1채 2칸, 1채 1칸, 1채는 곳간 외양간)가 있고, 마당은 멍석 6장쯤 깔 수 있는 20평 정도라고 합니다.

길고평이라는 719평의 밭은 5년 전에 군에서 알선하여 금융조합에서 싼 이자로 돈을 빌려서 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주로 보리를 심는데, 여기에 사이짓기로 목화를 기릅니다. 당시에는 목화가 지금의 고추처럼 환금작물이라서 많이 지었다고 합니다.
보리는 1.2m 하는 ‘왕골’을 만들어서 심습니다. 넓은 두둑을 만드는 이유는 앞에서처럼 골에 보리를 뿌리고 두둑에 목화를 심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둑과 골을 만들어 심는 일을 ‘작골’이라 하고, 골에 자라는 보리를 ‘골보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밭에는 보리를 6되 뿌리는데, 최고 수확량은 1섬 2말이었고 올해는 최저라서 5말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목화는 1말 5되를 뿌려서 지난해에 최고 210㎏을, 올해는 최저 90㎏을 땄습니다.

다음은 중고평이라는 341평 밭입니다. 이 밭은 자작하는 곳이고, 토질은 중등이라고 합니다. 20년 전에 60원에 샀는데 지금은 100원 정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반은 뽕나무 200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머지 반에는 감자를 조금 심고, 남새와 삼을 기르다가 가을에는 무 2/3, 배추 1/3을 심습니다. 삼은 올해 가뭄이 심해서 거친 삼 30단을 거뒀는데, 좋을 때는 45단까지 거둡니다. 삼은 1단에 45~50전 합니다. 삼 껍질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껍질 벗기는 데에는 품삯이 들지 않습니다. 삼베 1필을 짜는 데 보통 5~6단의 거친 삼이 든다고 합니다. 삼베 1필은 상등품은 10~15원, 중등품은 6~7원, 하등품은 4원 정도입니다.

마늘은 논두렁 등에 조금 심고, 고추는 배추 무 밭에 한 두둑을 심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은 집에서 먹을 것만 저마다 심고, 주로 곡물을 심었습니다.  돈이 되는 작물은 담배나 목화 등이었습니다. 논두렁에는 콩을 1되 심어서 7되를 거둬 콩나물을 만들어 먹습니다.

10월 17일에 묵었다는 보성관(寶城館)의 상차림을 보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도 보성역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백반을 시키면 받아볼 수 있는 상입니다. 

728x90
728x90

이번 호부터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라는 일본 사람이 일제시대에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면서 조선 팔도를 발로 뛰며 취재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이 책은 현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이라는 사진집만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주도 편만 번역해 놓은 자료집이 있지만 완역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사는지, 땅값은 얼마이며 농산물이나 생활 용품은 얼마인지 하는 것까지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의 어마어마한 열정에 질려 정신병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제목을 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가장 알맞게 농사짓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법’입니다. 그와 함께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민’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소개하는 글을 통해 저절로 알수 있을 겁니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는 누구인가?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합니다. 후쿠오카는 특히 농법이 뛰어난 곳이라 하여 19세기 후반 일본 전체에 그것을 정리해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농학부를 택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서선은 서쪽 조선이라는 말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일본은 크게 북선(함경도, 강원도), 남선(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우리 나라를 구분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 통합하여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됩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 나서인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직접 쓰지는 못했고,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여 199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군데군데 엉성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에 온 첫 해부터 이러한 조사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것은 1937년 7월 6일에서 8일까지 경상도에 출장을 가면서입니다. 그나마도 이때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 / 9월 1일 이후 황해도 / 9월 6~7일 경상도 /
          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 / 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 / 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 /
          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 / 4월 30일~5월 6일 황해도  
          5월 20일~6월 3일 제주도 / 7월 2~8일 강원도  
          10월 12~13일 충청도 / 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 / 3월 4~9일 황해도  
          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 / 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와 같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정말 쉴 틈 없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일제에게 봉사한 일본인이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이런 엄청난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 사람보다 꼼꼼하게 우리의 옛 농사 방식을 조사하고 연구 정리해서 직접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가

조사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지나가며 본 논밭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는 조사하기에 앞서 미리 책이나 관련된 사람을 만나 조사한 내용입니다.
셋째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을 만나 이것저것 묻고 눈으로 본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주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 놓았는지 꼼꼼하게 조사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어느 지역이나 농기구와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세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농사짓는 방법과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조사했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논밭의 이름, 집에서 떨어진 거리, 논밭의 넓이, 심은 품종, 수확량, 그루갈이, 돌려짓기, 이어짓기, 저장하는 방법, 그루 사이의 간격, 심는 포기 수, 거름, 집터, 집 구조, 가족, 품앗이와 놉 같은 노동력, 품삯, 명절, 민속, 농기구, 역사 유적, 밥상 차림, 방아 찧는 방법, 마을에 대한 이야기 등 백과사전 같은 자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에는 농사만이 아니라 민속, 사회, 경제, 역사, 지역, 생활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 사람들의 농사짓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와 지금은 생활 방식은 물론 농사짓는 방식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쟁기질 같은 경우만 봐도 그때는 소나 말을 쓰거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경운기나 트랙터로 혼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름도 그때는 화학비료를 금비(金肥)라고 부르면서 영양제 식으로 주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 쓰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① 쟁기질 방법
먼저 쟁기질 방법입니다. 그때 쟁기질은 아시다시피 소나 말로 했습니다. 어떤 작물을 심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두둑을 지어 땅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 두둑짓기를 쟁기로 한거웃갈이하느냐 두거웃갈이하느냐에 따라 두둑의 크기도 달라지고, 그에 알맞은 작물도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어떤 작물을 심을지 먼저 결정하겠지만 그것을 결정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쟁기질입니다.
요즘은 로터리라고 하는 방식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거 참 "거시기"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반대되는 무경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거시기"입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서 적당한 쟁기질이야말로 농사를 시작하는 첫 단추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아저씨께 어쩌다가 소 쟁기질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방법을 어떻게 되살릴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옛 방식을 발전한 기술력으로 적절히 잘 활용한다면 전통을 현대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② 돌려짓기, 사이짓기 - 한정된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이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앞에서 말한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 하는 내용에 들어갑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 해가 시작할 때 올해는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럼 그해 재배할 작물 목록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한정된 밭에다 아기자기하게 심어서 가꿀지는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홑짓기 방식을 쓰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돌려짓기나 사이짓기 같은 방식은 경제적인 이유로 뒤로 밀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작물을 대량으로 한곳에다 계속 짓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러저러한 이유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겼습니다.
물론 그때 사람들도 지금 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과학기술은 없었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혜롭게 잘 농사지으며 먹고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요즘에도 지혜롭게 이용하면 힘은 들지언정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가운데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는 시간과 공간 활용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려짓기는 한 작물을 거둔 뒤 바로 쟁기질하고 새로운 작물을 심는 방법입니다. 사이짓기는 한 작물을 심고 그 작물을 거두기 전에 새로운 작물을 심어서 끊이지 않게 밭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이짓기의 "사이"는 시간 공간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를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앞그루와 뒷그루가 겹치지 않도록 때를 잡는 것과 공간을 배치하는 것, 두둑을 만들거나 사이갈이를 하는 쟁기질입니다.

③ 갈무리, 그밖에
이 자료에는 저장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경우는 움을 어떻게 얼마 정도로 파서 저장하는지, 씨앗은 어떻게 관리하고 보관하는지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농사와 관련된 볼 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벼농사의 경우 볍씨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못자리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논의 물대기는 언제 어떻게 하는지, 또 여러 작물들을 어떻게 수확해서 낱알을 떠는지, 그때 노동력은 얼마나 드는지, 벼, 보리, 밀은 어떻게 방아를 찧어 먹는지, 볼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식량기지였던 조선반도

조선 반도의 농법이라고 하여 모든 농사를 다 조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농사의 중심은 곡식류였고, 채소류 같은 것들은 집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텃밭에서 조금씩 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 근교 농업에서, 우리의 식생활이 바뀌면서 사랑받고 있는 여러 야채니 채소니 하는 것들을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이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 상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조사 내용에서 그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이었다는 점,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소작료, 집집마다 젊은 남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량 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염전을 메우고 바다를 간척하여 논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비록 식량 생산 기지가 되고 사람들은 힘겹게 살았지만, 흔히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농사꾼이라고 합니다. 그 말처럼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해도 농사꾼들은 자신이 농사짓는 방법을 쉽게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지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때도 화학비료를 쓰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그에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두엄이고 똥이고 재였습니다. 기계도 많지 않아서 탈곡기나 방앗간 정도만 있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농사일을 소나 농기구로 직접 했습니다. 

728x90
728x90

전통농업에서 배우자(35)-화순 김규환 님
산을 가꾸는 산채원지기, 백아산에서 보물을 만들다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의 해발 300m에 자리 잡은 산채원을 다녀왔습니다. 해발은 높지만 따뜻해서 이 동네를 양지라 한다고 합니다. 집 앞에는 백아산이 우뚝 서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산채원에서는 200가지 이상의 산나물이며 산야초, 산양삼 등 산과 관련된 먹을거리를 보존, 보급하고 있습니다.

 

- 정말 좋은 곳인데,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셨나요?
= 결혼하기 전에는 잠시 가평에서 민박집을 하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는 사회생활을 했지요. 제가 담양 창평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7년 전쯤 창평으로 내려왔다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003년부터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사회에 필요한 농사를 짓자고 마음먹었죠. 가만히 생각하니 유기농은 기본이겠고, 무엇보다 종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지런히 전국으로 산나물 씨앗을 모으러 다녔습니다. 솔직히 산에 다니면서 뿌리도 캐오고 했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안 다녀서 숲이 너무 많이 찼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산나물은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상태에 가장 가깝게 보존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은 씨앗이 한 200여 가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 본격적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 2006년 11월입니다. 내려와서 창고 같은 집을 조금 손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집을 지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럼 귀농을 하신 셈이네요?
= 저는 귀농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이나 고향 사람들에게 귀농이라고 하면 꼭 실패한 사람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저는 귀농이라는 말보다는 귀향이라고 합니다.
제가 내려오면서 세운 원칙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처음 1년 동안에 초기 자본을 많이 투자하면 대부분 금방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첫째, 집을 짓지 않는다. 둘째, 처음 1년 동안은 땅을 사지 않는다. 셋째,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면 이자도 싸고, 돈을 끌어다 쓰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금방 망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만 1년째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조합원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분들은 돈도 싸게 빌릴 수 있고 하니 얼른 가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다들 농협에서 쉽게 돈을 끌어다 썼다가 힘들어 하더군요.

 

- 산채원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 제가 80년대 말 대학을 다니며 생활도서관 운동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보 관련 운동을 해서 정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그래서 FTA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농사가 무엇일지 2003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축산, 원예, 주곡 같이 여러 농사가 있지만 그 시대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승부를 걸면 답이 안 나와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산과 관련된 이 분야만이 FTA와 상관이 없더군요. 아직 그네들이 산은 모르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무한한 자원이 널려 있다는 걸 그네도 모르고 우리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산에 FTA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어릴 때부터 나물을 잘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 나물을 먹고 싶으면 소죽 쒀 놓고 호미나 칼 들고 나물 뜯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배웠죠. 지금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풀이나 나무가 모두 나물이고 약입니다. 옛말에 소가 먹는 건 다 나물이라고 했지요.

 

- 산채원을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 고향에 내려와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습니다. 마을에서 호응도 안 해주고, 배운 놈이 여기서 뭐하냐고 형과도 사이가 틀어질 정도였습니다. 계속 노력해야 하는 문제지요. 저는 영농조합법인 사람들에게 소비자가의 95%를 책임져 주려고 합니다. 나머지 5%는 영농조합법인 운영비로 쓰고요. 그 정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절대 안 따라옵니다.
요즘 농촌은 저희 마을도 마을 분들 몇 분과 함께 같이 뭘 하려고 해도 모두 노인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세 마을 합쳐서 150호가 넘었습니다. 저쪽 송단 1리는 조릿대가 많아서 예전에 국내의 복조리를 모두 만들던 곳입니다. 저도 어릴 때 무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다 합쳐서 20호가 안 됩니다. 그나마 독거노인이 많아서 사람은 27명쯤 됩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골짜기마다 있던 논밭이 다 묵었어요. 그래서 이곳 산골은 25~30년은 다 묵은 논밭입니다. 하지만 그게 자원입니다. 그런 땅은 비닐도 쓰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청정 지역입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강원도처럼 골프장이니 스키장도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망쳐 놓습니까.
여기는 겹겹이 산이 둘러 있는데, 바로 옆은 곡성이고, 이쪽으로 넘어가면 담양, 저쪽으로 넘어가면 순천입니다. 이곳이 그 중간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여기는 종이 다양합니다. 옛날부터 백아산에는 없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살아 있는 동네입니다. 특히 이곳이 고려삼의 시배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곳에 산양삼(山養蔘)을 많이 심었습니다. 예전에 장뇌삼이라고 아시지요. 그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이제 공식 명칭으로 산양삼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삼씨가 1kg에 150만원입니다. 이걸 지금 이곳에 5ha를 심어 놓았습니다. 내년에는 정부 보조를 좀 받아서 20ha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 산나물은 어떻게 기르시나요?
= 저는 웬만한 씨앗이나 나무는 다 산에 심습니다. 저희 집 뒤를 ‘가는골’이라고 합니다. 골짜기가 가늘게 길다고 가는골이지요. 길이가 한 1km 이상 될 겁니다. 지금 이곳을 정리해서 구석구석에 그동안 모은 산나물이며 산양삼을 잔뜩 심어 놓았습니다.
보통 밭에 산나물을 심으면 퇴비도 주고 어떻게 해봐야 금방 쇠서 뻣뻣해집니다. 하지만 이걸 산에 넣으면 베고 또 베고, 어떤 것은 5~7번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설을 하건 어떻게 하건 이런 곳보다 산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산에는 굳이 퇴비를 안 줘도 그 자체로 영양이 많아서 걱정 없습니다. 산흙 자체가 부엽토 아닙니까. 오히려 산에서 그걸 긁어다 밭에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요즘 왕겨나 톱밥으로 퇴비를 만드는데, 저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왕겨는 다 농약치고, 톱밥에는 윤활유가 섞여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을 심으려고 나무를 벨 때도 기계톱은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직접 하는 게 좋습니다. 진짜배기로 농사지어서 대통령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명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요.

 

- 경운 같은 것도 필요 없나요?
= 경운은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번만 갈아주면 그대로 심고 끝입니다. 대신 풀을 매야 하니까 호미질은 해야지요. 사람들은 경운해야 하니 트랙터를 사라고 하지만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산이 우거지지 않도록 관리도 해줘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손대지 않으면 산이 우거져서 나물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솎아베기를 해서 자연스레 해결합니다. 이제 산도 우리가 가꿔 줘야 합니다.
중요한 건 나물의 특성을 알고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춰 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딱주라고 하는 잔대는 양지쪽에서 잘 자라서 정상 부분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나물은 황토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물빠짐이 좋은 사질양토가 가장 좋습니다.
풀이 많아 어떻게 하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걱정 없습니다. 오히려 밭보다 관리하기가 더 쉽습니다. 밭 같은 경우 10번이고 20번이고 매려고 맘먹으면 매 줘야 합니다. 하지만 산은 1~2번만 매면 끝납니다. 그러니 면적이 넓어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골짜기가 500ha 정도 되는데 그걸 제가 다 일구려고 합니다. 또 재 넘어 관음사 들어가는 곳의 땅은 절땅입니다. 그곳이 450ha인데, 그곳도 임대하려고 합니다. 그곳은 지금 우리 법인하고 다른 법인하고 함께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계획을 세워 놨습니다.
또 정선 쪽에 사는 사람과 얘기해서 그곳에 산사랑 산채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기후에 차이가 있으니 여기는 빨리 나와서 빨리 사라지지만, 강원도 쪽은 이곳과 다른 때 나오지 않습니까. 또 장흥 쪽에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겨울에 산채가 먹고 싶으면 장흥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1년 내내 도시 소비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원칙은 제철 음식입니다. 제철이 아닌 때 억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시기가 다른 곳을 확보해 제철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산채원은 도시 사람들도 이걸 먹을 수 있도록 규모를 늘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농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 텃밭에 배추가 잘 자랐던데 비법이 있으십니까?
= 옛날에 농사짓던 방법을 따랐습니다. 옛날에 배추에 벌레가 끼면 불 때고 나온 재를 물에 섞어서 재운 다음, 위에 뜬 맑은 물을 배추에 줬습니다. 우리 배추에는 그래서 벌레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벌레가 다 갉아먹었어도 이슬이 내렸을 때 재를 가지고 가 살살 뿌려 주면 한 일주일 정도면 다시 살아납니다. 지금은 일본이나 유럽에서 다 들여오지만, 이렇게 세계에서 유기농을 가장 잘한 것이 우리나라였습니다.
저는 고추를 기를 때 비닐을 치지 않습니다. 비닐을 치면 처음에는 잘 크지요. 수분도 잡아 주고, 햇볕을 받으면 더 따뜻해서 금방 크고 수확도 많습니다. 문제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생깁니다. 꽉 막힌 상태이니까 온갖 병균이 그곳에 생깁니다. 그것 말고 저는 일체 화학제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원칙을 지키면 우리 옛맛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때죽나무 열매를 찧어서 물에 뿌립니다. 그럼 고기가 기절해서 둥둥 뜨지요. 그만큼 때죽나무는 좋은 살충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걸로 천연살충제를 만들어 보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초피, 인진쑥, 때죽나무 열매, 소주를 섞으면 괜찮은 농약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이런 걸 개인이 아니라 흙살림 같은 곳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728x90
728x90

새벽녘이면 어디에선지 모르게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안개,  뿌연 안개를 걷어내며 펌프로 물을 퍼 올려 쥐가 �은 비누를 찾아 들고 얼굴을 씻는다.

6시 뉴스가 흘러나오는 아침상을 앞에 두면 새벽부터 논에 나가셨던 고무부가 돌아오시고, 어른이 수절 들길 기다렸다가 밤새 허기진 뱃속에 밥을 넣는다. 서둘러 책가방을 챙긴 뒤 자욱한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려 등교길에 나선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굴러 질퍽해진 황토길을 걸어 걸어 걸어가며 이대로 안개에 묻혀 하늘로 떠오르진 않을까 걸어가며, 배 만드는 공장을 지날 때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안개를 가르며 두둥실 나아간다. 마을의 논 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걷노라면 후투티 날아와 뽀뽀 뽀뽀 우지짖고, 논두렁에 선 나무전봇대에는 오색딱따구리 다다다다 벌레를 잡는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던 학교 생활,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왠 오줌이 그리도 마렵던지 노루 오줌보처럼 한시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화장실 앞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는 하늘소가 자리해 삐삐삐삑, 나를 놓아 달라는 듯 삐삐삐삑.

쉬는 시간이면 삼팔선에 돼지부랄, 탈출이며 비석치기, 나이먹기는 왜그리도 재밌던지. 함께 놀면 후줄근한 옷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땀흘리며 발발거리길 옷속에 들어간 모래알처럼 놀았다.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 땅따먹기, 이만기와 함께 한 씨름, 프로레슬링이 없던 시절부터 가재는 힘겨루기에 바쁘다.

 

그래도 학교를 가면 놀거리가 있고, 함께 즐기던 친구들이 있고, 도시락이 있었다. 그런 것도 없는 집. 텅 빈 집엔 덜렁 밥상 하나 놓여 있고, 밥통에서 밥을 퍼 허기를 달랜다.

이제 해지기 전까지 누구와 무얼하며 놀까 고민하던 때 뒷산 비밀 기지에서 보이지 않는 동료들과 첩보 활동을 벌이고, 땅속 개미들은 무엇을 하는지 구멍을 들쑤시고, 야구 선수가 찾아온 듯 논을 향해 돌멩이를 날린다. 그것도 모자라면 산으로 들로 오디, 으름, 버찌, 마, 칡이며 먹으러 다니고, 작대기 치켜 들고 똥개 메리를 좇아 다니며, 제비 새끼 밥 먹고 똥 싸는 걸 치우는 어미를 쳐다본다.

 

그래도 평일에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심심치 않게 보냈다.

주말이면 찾아오시던 아버지.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때 마음은 설레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마루에 걸린 시계의 붕알처럼 내 마음은 똑딱똑딱. 집안에 앉았어도 귀는 저만치 들길에 내다 붙인 듯하다. 혹시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혹시 아버지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아버지가 오시면 그날은 시계가 사라지는 하루, 하지만 다음날은 억장이 무너진다.

그럴 때면 아무도 몰래 뒷산에 오르거나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흘렸다.

728x90

'농담 > 雜다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0) 2008.05.16
타작마당  (0) 2008.05.15
당부  (0) 2008.05.15
2007년 선거  (0) 2008.05.15
봄날은 왔다  (0) 2008.05.15
728x90

전통농업에서 배우자(33)-장흥 이영동 선생
토종 작물 육종하는 재미,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는 전남 장흥군 용산면 쇠똥구리마을에 사는 이영동(56) 선생을 찾아뵙고 왔다. 선생께서는 약다산 자락에 자리한 농장에서 토종을 보존하는 일은 물론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단체도 이끌고, 쇠똥구리마을 추진위원장도 맡으며 바쁘게 살고 있다. “농민이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말을 몸소 실천해 여러 가지 실험과 도전을 하며 열성적으로 토종을 보존하여 토종농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 토종 종자를 얼마나 보존하고 있으신가요?
= 모두 22작물 60여 품종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씨를 보존하려고 하는 정도라서 조금씩밖에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보탬은 안 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죠. 옛날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것만 봐도 맛이 좋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존하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어떤 모임인가요?
= 어릴 때부터 보던 논둑, 밭둑의 풀들이 없어지는 걸 보면서 이걸 재배해서 자원으로 이용할 수 없을까 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회원은 모두 16명이지요. 요즘 삭막해져 가는 정서를 야생화로 순화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매년 전시회도 하고, 취미 삼아 그냥 합니다. 또 야생화는 다 약초가 됩니다. 이걸 재배하는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는 난대 식물부터 냉대 식물도 있습니다. 지역은 남쪽이지만 산이 800고지가 넘어서 그렇습니다. 야생화가 있다고 함부로 채취하지 않고 씨를 받아서 증식시킵니다.

 

- 보존하고 있는 토종 종자 가운데 특이한 것 좀 소개해 주세요?
= 먼저 적토미가 있습니다. 일본에도 붉은쌀이 있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고려 때 우리나라에서 적미가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벼는 알이 작은데, 너무 끈적거리는 찰벼라서 꼭 다른 것과 섞어서 먹어야 합니다. 또 키가 아주 커서 가슴까지 자라서 잘 쓰러져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비료로 재배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맛이 아주 좋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성남 농협과 결연해서 모두 팔았는데, 일본에서 홍미가 들어오면서 올해는 취소됐습니다. 홍미보다 맛이 더 좋지만 홍미가 싸게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이 외면했지요. 이 일을 겪으면서 소비자에게 값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맛과 질로 홍보해야 팔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다마금이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부터 심던 것인데 아마 일본에서 왔을 겁니다. 상남 밭벼는 찰벼인데, 옛날에 결혼하는 날 이걸로 주먹밥을 해서 줬습니다. 이 쌀로 주먹밥을 하면 며칠 뒤에도 굳지 않습니다. 녹토미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극만생종이라 빨리 심어도 이모작보다 늦게 서리 맞고 벱니다. 껍질을 까면 쌀이 푸른색이지요. 흑미도 있는데 이 흑미는 일반 흑미보다 알이 작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까만깨인 줄 압니다. 이것도 아주 맛이 좋습니다. 속까지 다 검진 않지만 도정해도 조금 검은빛이 납니다. 이것 말고도 벼는 모두 10여 가지가 있고, 새로 육종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밖에 보리와 밀이 1종씩 있고, 콩 종류는 10가지 이상 있습니다. 콩 중에는 제비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한약재로도 쓰고, 옛날에는 주로 콩나물로 많이 먹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내려오는 노란 옥수수, 단단하고 바람이 잘 안 드는 조선무, 잘 타고 올라가 수확량도 많은 울타리콩 등도 있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팥이 많이 들어오는데, 여기 있는 우리 것은 좀 어두운 붉은 색이지만 중국 팥은 선명하게 빨갛습니다. 제가 재배하는 토종 감자는 맛은 좋은데 좀 씁니다.
고추도 옛날부터 심던 것을 그대로 심습니다. 껍질이 얇아서 햇볕에 조금만 내놔도 잘 마릅니다. 먹으면 처음에는 사근사근하다가 나중에는 좀 매운 맛이 납니다. 이조는 어디서든 잘 크고 재배하기도 쉽습니다. 보통 조의 반 정도 크기밖에 안 합니다. 이건 방아를 안 찧고 그냥 먹을 수 있습니다. 토종 가지도 있는데 가지가 굵고 크지만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개량종은 지금 그냥 먹으면 맛이 없지만 이건 지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개량종에 비해 토종이 줄기도 굵고 잎도 더 큰 편입니다.

 

- 특이한 벼가 많은데 논농사는 어떻게 짓나요?
= 요즘 벼는 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거름도 별로 없을 때라서 산풀을 베다가 넣었습니다. 그건 땅을 실하게 하지요. 봄에 모내기 전에 넣기도 하고, 보리를 베기 전에 그냥 갖다 놨다가 보리를 베고 물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갈잎도 넣고 여러 풀도 넣었는데, 거기에는 무수한 성분이 들어있지요.
지금은 로터리로 위만 부드럽게 하는데, 그러면 밑에는 딱딱한 형성층이 생깁니다. 지금 논들은 조금만 파면 아래에 딱딱한 형성층이 있습니다. 이 층을 깨야 산소와 뿌리가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논의 구조를 보면 거대한 화분처럼 밑이 막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에다가 키 큰 벼를 심으면 다 쓰러져 버리죠. 그러니까 옛날처럼 깊이 쟁기질하고, 넓게 심으면 되겠지요. 토종은 토종 농법으로 해야 합니다. 형성층이 생기지 않게 깊이 쟁기질하면 뿌리가 깊게 뻗을 수 있습니다. 또 요즘은 지나치게 배게 심습니다. 그래서 통풍도 안 되고, 웃자라다 보니 쓰러짐에 약합니다.
제가 처음 트랙터를 배웠을 때인데, 솜씨가 서툴다보니 쟁기가 깊이 들어가 갈았습니다. 그러니 키가 커도 잘 쓰러지지 않고 수확도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솜씨가 좋아지면서 얕게 갈다보니 오히려 잘 쓰러지더군요. 그걸 보고 맛 좋고 질 좋은 토종 종자와 그에 알맞은 농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온 신품종 농작물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논밭 구조도 현 신품종에 맞게 쭉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우리나라 농민들까지도 다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품종이 다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신품종도 많이 있습니다. 교배를 하면 할수록 야생성은 없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민도 거기 있고, 여러분의 고민도 거기 있는 것 아닙니까?

 

- 토종이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 앞에서 말한 것 말고도 토종은 키가 커서 자라기만 하면 얼른 주위를 장악해서 제초하는 노력이 덜 듭니다. 크게 잘 자라니 풀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멀리 심어야 합니다. 개량호박이나 오이를 보면 넝쿨이 많이 안 뻗지만 조선 호박이나 오이는 엄청 뻗습니다. 또 토종은 씨가 많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 종자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 냉동고에 보관해보니 4~5년이면 잘 나지 않습니다. 나더라도 발아율이 엄청 떨어집니다. 저 같은 개인은 종자은행도 없으니 해마다 재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는 못하고 조금조금씩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마다 심습니다. 예전에 잠깐 다른 데 나갔다 왔는데 철을 놓쳐서 한 20여 종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잃어버리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운한지 모릅니다. 진짜 맘이 아픕니다. 어디 가서 씨앗 하나만 구하면 참 재미가 있어요.
논을 다닐 때도 특이하게 자란 것이 있으면 눈여겨보며 지나다닙니다. 이것저것 가져다가 육종하면서 제가 생각한대로 나오면 참 재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냐고 해도 저는 너무 재밌어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걸 욕심 같아서는 다른 것도 더 많이 하고 싶지만 여건상 힘들어서 참습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 농촌 현실이 어려워 지금은 빚 없는 집이 없습니다. 기회만 되면 땅이라도 팔아서 빚 갚으려고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심은 어디 가고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농심이 변했지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토종이 아직은 현실에 맞지 않지만 이제부터는 슬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맛을 우선시하는데 토종의 맛은 신품종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저도 친구 따라서 서울에 갔지만 6개월 살고 내려와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옥수수, 고구마 맛 때문인 것 같아요.
토종 농작물은 우리 조상들과 함께 해온 식물이고,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아온 작물입니다. 그중에 희로애락도 있을 것이고, 많은 토종 농작물에 대한 사연도 있고, 문화도 농심도 있습니다. 몇 천 몇 백 년 내려온 씨앗들이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농사도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수확을 많게 개발하다 보니까 맛은 없어져 버리고, 땅은 땅대로 버렸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옛날 맛과 땅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종 농작물의 장점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 땅에 알맞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야생성이 강하고 원종에 가깝기 때문에 병충해에 강하고 어느 토양이나 기후에도 적응성이 강해서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필요 없습니다. 또 키가 크고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잡초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신품종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맛은 토종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단점은 현실 농업에 맞지 않습니다. 키가 크기 때문에 쓰러짐에 약합니다. 또 수확량이 적습니다. 수확량이 적고 현실 농업에 맞지 않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토종 농작물은 미래의 농업 유전자원으로 보존되어야 하고, 재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덧붙여 자연의 문제는 자연을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튼 흙살림에서 이런 운동을 한다니 정말 반갑고, 더운 날씨에 이곳 먼 구석까지 찾아 준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728x90
728x90

전통농업에서 배우자-횡성 송래준 선생

 

“말로는 소용없어요. 직접 몸으로 깨우쳐야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강원도 횡성군 어답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토종왕국’의 송래준(84) 선생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서 토종종자를 가구며 보급하고 지금은 산을 일궈 나무와 산나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미래를 내다보며 정력적으로 농사지으며 살고 계십니다.


- 지난번 자운 스님을 통해 선생님께서 토종 종자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시나요?

= 지금 농촌 현실이 아주 어렵습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농협에 평균 4~5천만 원 정도 부채가 있지 않을까 해요. 사정이 어려워서 땅을 내놓고 싶어도 노 대통령이 거래를 막아서 팔려고 내놓아도 거래가 없어요. 이제 농촌에서 쌀이나 고추 농사지어서 빚을 탕감하기 힘들어요. 나는 그래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구멍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그런 것을 종종 자문해 주고 하지요.

지금 토종은 내가 나눠 준 곳이 전국에 100여 농가에서 그 이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라남북도부터 경상남북도까지 다 줬어요. 원래는 여기 밭이 다 곡식으로 꽉 찰 정도였지요. 지금은 다 나눠주고 나는 그걸 안 합니다. 내가 보급한 종자가 이미 나한테는 끝이 난 겁니다. 이제 그건 내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난 새로운 것을 찾아서 보급해야지요. 나는 항상 내가 안 하던 거, 새로운 거를 연구합니다.

내가 내일 죽더라도 몸을 움직여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내가 부지런만 떨면 열 명이 먹고 살 수 있는데 게을리 있을 수 없지요.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있어요. 여기에 연구소를 하나 만들려고 해요. 토종부터 산채까지 모든 것을 연구하는 거지요. 자연에서 나서 자연에서 큰 것을 가지고 사람이 식생하는 방법이며 모든 것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혼자 앉아 있으면 못할 일도 너댓만 앉아 있으면 호랑이 데리고 못된 놈들 다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면 못할 일이 없어요.


- 지금은 농사짓지 않으신다면 산나물 같은 것은 채집하시는 건가요?

= 아니지요, 농사를 짓습니다. 그걸 나는 산에다가 하는 거지요. 왜 농사지으면서 누구는 비료를 넣고, 누구는 퇴비를 넣고 그러잖아요. 나는 산에서 부엽토로 하면 돈분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산에다 장뇌삼도 하는데, 확실히 사람 손을 덜 탄 것이 맛이 달라요.

지금 산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30여 가지입니다. 엄나무, 오갈피, 오미자, 더덕, 헛개나무, 당귀, 산작약 같은 것이 있지요.


- 장뇌삼을 재배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가요?

=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합니다. 장뇌삼 씨를 바위 밑에도 뿌리고 나무 밑에도 뿌리고, 수분 있는 데에도 뿌리고 건조한 데에도 뿌려 봅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심어 놓고 관찰하는 거지요. 그래서 특별나게 잘 나는 곳에는 집중적으로 심고, 그런 곳이 아니면 그냥 더덕을 심던지 하지요. 더 자세한 것은 여기서 말로 설명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여기 저기 심어보고 1년 뒤에 뽑아서 살펴보고 잘되는 곳에다만 합니다. 덮어놓고 아무 데나 막 심으면 안돼요. 그렇게 하다가는 앞서 가는 사람한테 항상 떨어져요. 남보다 앞서는 것을 만드는 것이 농민이 할 일입니다.


- 여기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사신 건가요?

= 내가 열서너 살에 조실부모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요. 여기서 농사지은 것으로 누가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합니다.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애들이 빨리 개학해서 급식을 타 먹으면 좋겠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그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열 사람은 굶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여기서 농사지으며 산 지가 19년째입니다. 그전에는 남도 속여 먹기도 하고, 참 나쁜 짓도 많이 했지요.


- 입구에 벌통이 많던데 통마다 돌을 쌓아서 막아 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처음에 벌을 조금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게 늘어나서 지금은 한 250개 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벌을 키워 보니 그래요. 벌 한 통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돌을 쌓아 주며 애를 쓰니, 지들도 그걸 아는지 잘 자라요. 처음에는 그렇게 돌을 쌓아 준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바람도 막고 편안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디다. 또 이걸 저기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여기는 뭐 특별한 것이 있나 하면서 옵니다. 그렇게 와서 꿀도 많이들 사갑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그걸 보면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나무를 파서 옛날 재래통을 더 만들고, 위에는 짚으로 지붕을 씌우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대충 설계만 하는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제대로 들으려면 2주는 있어야 해요.


- 아까 산에 30여 가지를 한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소득이 되는 것이 있나요?

= 소득이란 것은 이렇습니다. 30여 가지를 하면 어디선 손해를 보는 때도 있고, 어디선 이득을 보는 때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요. 아무리 못하더라도 열이면 열 식구가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한 가지만 밀고 나가면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한 가지만 하면 안 되고 수십 종류를 하면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이런 곳에서 어디 기대지 않고 열심히 살면 올바른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살지요.


- 이제 토종 곡식은 가지고 계신 것이 하나도 없나요?

= 자주 감자가 있어요. 이건 내가 하동에서 장에 가니 하나에 200원에 쪄서 팔아요. 그걸 사서 먹어보니 팍신팍신한 것이 참 맛있어요. 그래서 이걸 5천원어치 샀어요. 올해 이걸로 농사지으면 내년에는 열 가구가 심을 수 있을 겁니다. 감자는 눈이 하나인 것만 골라서 하나를 서너 개로 잘라서 심고, 눈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건 파 버립니다.

다른 인상적인 것은 없어요. 이미 다 내 손에서 떠났어요. 나는 옛날 선조가 하던 건 무조건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존할 때는 절대 비료를 주던 곳에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런 곳이면 최소한 3~4년은 묵혀야 합니다. 비료, 농약기가 있으면 헛고생만 하는 겁니다.

토종은 산에서 3년만 지나면 토종이 됩니다. 나는 산에다가 퇴비도 안 주고 그대로 심어요. 이런저런 실험을 해서 작년에는 고추도 산에 심고, 그전에는 콩도 심어보고 이것저것 심어 봤습니다. 올해는 더덕을 한 자짜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한번은 산에 상자를 가져다가 박아 놓고 거기에 감자를 심으니 아주 좋아요. 그건 비가 와도 쓸려 내려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관리하기도 편하고.


- 하동이면 여기보다 남쪽인데 거기서 가져온 감자가 여기와 기후가 맞을까요?

= 기후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나는 장날 다니다가 특별한 것만 보이면 사다가 심어 봅니다.


- 산나물 가운데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으신가요?

= 열 손가락 가운데 버릴 것이 하나 없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로가 균형을 맞춥니다. 전체가 다 남으면 팔자 고치지요. 여러 가지를 하는 게 좋습니다. 나는 할 수 있으면 많은 면적에 다양하게 심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땅에는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가지 심을 수 있지요.

어떤 분이 나한테 취 씨를 보내주셨는데, 올해 이걸 심어서 3년 뒤에는 취 밭을 만들 겁니다. 이걸 3자 간격으로 심으면 3년이면 취 밭이 됩니다. 산에 가서 풀이 없는 곳에 뿌려 놓으면 2년이 지나면 씨가 앉아서 그게 떨어져 저절로 자랍니다. 그럼 밭이 되는 거지요.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남의 집 일하고 쌀 한 말 받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먼저 차가 있냐고 물어봐요. 돈은 얼마냐 6시 땡 치면 차로 집에 데려다 줄 수 있느냐. 그만큼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지요.

또 낙엽을 긁어내고 거기 더덕 씨를 넣어요. 이것도 3자 간격으로 또 낙엽을 긁어내고 심습니다. 그럼 낙엽을 모아 놓은 곳에도 더덕이 자라서 더덕 밭이 됩니다. 오히려 낙엽을 긁어모아 놓은 곳이 그것이 썩으면서 거름이 되어 더 잘되지요.

지난번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질경이 좀 없냐고 찾아서 내가 좋은 놈만 가져다가 쭉 심어 놨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거기는 아예 질경이 밭이 될 겁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 부모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식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자리를 잡으니 큰며느리가 아버님은 몇 십 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합디다. 자기들이 나를 챙겨야 하는데 거꾸로 내가 자식들 노후 대책을 만들어 줬다고요.

나는 어디에서 강의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합니다. 대신 경험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하지요. 강의는 교수님이나 전문가가 하는 것이고, 나는 내가 경험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책도 소용없고 내 말도 소용없어요. 직접 자기가 몸으로 해서 깨우쳐야 합니다. 말로 하면 없는 떡도 만들어서 전체가 먹고 살 수 있게요. 그러니까 직접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덮어 놓고 말로 벌을 이렇게 하쇼, 농사를 이렇게 하쇼 하는 건 다 소용없어요.

그동안 미친놈 소리도 들으며 참 외롭게 살았지요. 여러분처럼 주변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겁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