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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된 정자나무.

여기에는 두 그루가 서 있는데 남자들의 휴식 장소이다.

저쪽에 일곱 그루가 있는 곳은 여자들의 휴식 장소라고 한다.

이 마을은 쉬는 곳도 남녀가 유별하네.

엄청 시원하다.

에어컨이 필요없는 천연 냉방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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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년째 고추를 곧뿌림하고 있습니다. 처음 고추를 씨로 심으려고 생각한 것은 귀찮아서 그렇습니다. 모종을 가져다 심기도 그렇고, 나중에 버팀대를 꽂고 줄을 매는 것이 너무너무 귀찮아서, 한 마리도 게을러서 그렇지요. 굳이 더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면, 버팀대도 그렇고 줄도 그렇고 이건 썩는 것이 아니니, 나중에 처리하는 문제가 골치 아팠습니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곧뿌림은 처음에만 신경 써서 김을 매주면 나중에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작은 규모에서나 추천할 만하지, 돈벌이로 많이 짓는다면 힘들 겁니다. 그래도 수확량을 따지지 않는다면, 투입하는 기운이나 비용에 비해서 괜찮은 방법입니다. 특히 작물 고유의 힘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지요.


먼저 심는 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해나 올해나 곡우 무렵에 심었습니다. 고추는 더운 나라가 고향이라 서리를 맞으면 그대로 죽기에 늦서리를 피하려고 그때를 택했습니다. 그때 심으면 보통 스무날에서 한 달쯤 지나야 싹이 나니, 양력으로 5월 중순 이후라서 서리 맞아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고추는 달이 한 바퀴쯤 돌아야 합니다. 이걸 동광원 원장님은 “고추는 매운물이 빠져야 싹이 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참 감칠맛나지요.

지난해에는 씨를 얻어 심어서, 싹이 나는 문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기다렸지요. 그런데 올해는 손수 받은 씨를 심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처음 받아보느지라 제대로 씨를 받았는지 미심쩍었습니다. 특히 이게 심은 지가 언제인데 한참이나 소식이 없어,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못 참고 살살 파 보기도 했습니다. 몇 번을 그러다 포기를 할 때쯤, 씨에서 삐죽 싹이 나온 걸 봤습니다. 그때의 기분이란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거 안 파봤으면 다 났을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이밀더군요.


잠깐 딴 길로 새서, 고추씨를 받으려면 보통 맏물 바로 그 다음 것이 좋습니다. 형만한 아우가 없는 것일까요? 맏물도 괜찮기는 한데, 그 다음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고추씨를 받으시려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피해야 할 것은 끝물입니다. 끝물은 어떠한 작물이든지, 씨로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늦둥이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말과 통하지 않을까 합니다.


심는 방법은 처음에는 줄뿌림을 했습니다. 그런데 관리하기가 참 힘들더군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곧뿌림할 때는 처음 풀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나 5월이면 온갖 풀들이 싹을 내서 자랄 때이니 더 그렇습니다. 그때 제대로 풀을 잡지 않으면, 고추가 힘을 받아 팍팍 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올해 선택한 방법은 점뿌림입니다. 점뿌림할 때는 그 부분의 흙을 살짝 걷어냅니다. 그리고 한 번에 팍 넣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두께 하나 정도 간격으로 띄엄띄엄 뿌립니다. 저는 그렇게 한 구멍에 10알씩 넣었습니다. 그리고 흙을 살살 겉에만 슬쩍 덮습니다. 더 좋은 것은 잘 삭은 두엄을 살짝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씨를 제대로 받았다면 모두 싹이 날 겁니다. 올해 제가 받은 씨는 좀 시원치 않아서 그런지 6~7개 정도만 싹이 텄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대가 끊기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습니다.


관리는 처음에 풀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때만 잘 돌보면 이후에는 별 걱정 없습니다. 태풍이 몰아치지 않는 이상 잘 쓰러지지도 않고, 바람이 특히 세게 분다고 해도 주렁주렁 고추를 달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버팁니다. 대신 비가 많이 오면 걱정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땅이 물렁거리면 스르륵 기울어지기는 합니다. 그러면 그냥 제대로 세운 다음, 발로 꾹 밟아주면 다시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풋마름병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땅이 무르고, 더구나 바람이 불어 기울어지면 그 틈새로 뿌리에 세균이 들어가는지, 지난해도 그렇고 올해도 풋마름병이 꽤 왔습니다. 풋마름병을 찾아보니, 계속 고추만 심는 하우스나 질소질이 많으면 발생한다고 하네요. 노지에서도 드문드문 걸리구요. 제가 거름을 별로 쓰지 않으니 질소질 때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같은 땅에 이어짓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풋마름병에 잘 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추측하기로는 앞의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흙이 아직 좋지 않아서 비만 오면 질척거리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물이 잘 빠지는 살아있는 좋은 흙이라면, 풋마름병도 걱정할 것이 아닐 겁니다.


풋마름병 말고 세균성점무늬병이 올해 처음 생겼습니다. 아마 올 여름이 뜨겁고 습기도 많아서 그럴 겁니다. 다음에는 잘 삭혀놓은 2년 묵은 두엄을 넣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다면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일 겁니다.

그밖에 고추에 많은 탄저병, 돌림병, 흰가루병, 입고병, 모자이크병, 겹둥근무늬병, 젖곰팡이병, 무름병은 아직 한 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고추에는 뭔 병이 이렇게 많은 걸까요. 쭉 늘어놓고 보니 징그럽게 많네요. 아마 이거 말고도 더 있을 겁니다.


벌레는 진딧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뭐 고추만 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다른 작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으니 그럴 겁니다. 아, 담배나방이 파먹는 것은 조금 있습니다. 그네들이 먹는다는 게 속상하기 것보다, 이 매운 걸 어떻게 그리 잘 먹는지 그게 더 신기합니다. 그래서 그건 너희들 먹으라고 놔둡니다. 그럼 알아서 떨어지지요. 그렇게 떨어진 놈들 가운데 씨가 여문 것이 있어서 그런지, 지난해 고추를 심었던 밭에서 저절로 고추가 자란 것을 보고 참 신기했습니다. 안철환 선생님은 올해 초겨울에 고추를 심는 걸 실험하신다고 하는데, 이걸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 관리 가운데 가장 귀찮은 버팀대 박기와 줄매기에서는 완전히 해방입니다. 순지르기도 거의 손보지 않아도 됩니다. 씨가 그래서 그런지 모종으로 심는 것보다 곁순도 별로 나지 않습니다. 매끈하지요.


자람새는 모종으로 심은 것보다 좀 느립니다. 그것들은 비닐집에서 어느 정도 자란 뒤 5월 초에 옮겨 심어서, 곧뿌림한 것이 막 싹이 날 무렵 모종들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입니다. 씨로 심은 것들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자라면, 오히려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무섭게 자랍니다. 그럴 때 비라도 한 번 내려 주시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 정도 자라면 1차로 솎아줍니다. 잘 자란 것들 3~4개만 남기고 솎아줍니다. 그렇게 솎은 것은 그냥 나물로 먹으면 됩니다.

다음에는 한 뼘 정도 자라면 한 그루에 한 포기만 남기고 솎으면 됩니다. 그때 솎은 것들을 보면, 곧뿌리가 쭉 뻗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모종한 것과 비교하려고 뽑아보니, 모종은 옆으로 잔뿌리만 뻗었더군요. 반면 씨로 심은 것들은 길쭉한 뿌리가 쭉쭉 뻗어 있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이 뿌리의 차이가 자라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이 조금은 작물 관리에 서툴고 소홀하신 주말 텃밭 회원분들의 고추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그분들 고추보다 씨로 심은 제 고추가 더 튼튼하고 기세가 좋았습니다. 뭐 관리를 잘하시는 분들이 웃거름주고 목초액이다 뭐다 주고 하시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죠. 그런 고추들이 붉게 변할 때 이제 풋고추가 달리기 시작하니 말 다했지요. 그러니 수확량에서는 큰 차이가 날 겁니다. 하지만 투입과 수확이란 면에서 보면,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둘이 먹고 냉장고에 꽉꽉 재워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추와는 키에서도, 열매가 달리는 것에서도 차이가 많이 납니다. 제가 심은 건 한 50~60cm정도 자라나? 거름도 밑거름 말고 안 주고, 다른 관리도 안 해서 그런지 거기서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아마 자기가 자랄 수 있는 만큼만 알아서 크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만큼 깊이 뿌리를 내렸으니, 위로는 어느 정도 자라면 되겠다 계산하는 것이 아닐까요? 열매도 그렇습니다. 지가 버티고 서 있을 정도만 달립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늦게까지 꽃이 피고 달리는 건 아닙니다. 알맞은 때 꽃도 더 이상 피지 않고, 매달린 것들이나 붉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니 수확량에서는 반이나 될까요? 엄청 차이가 납니다.


모종과 곧뿌림의 가장 큰 차이는 뿌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쭉 뻗은 곧뿌리를 내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위로 얼마나 자라는지 얼마나 열매가 많이 달리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곧뿌리를 내린 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알아서 자라고, 알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모종으로 심은 것은 거름을 주는 대로 잔뿌리로 쪽쪽 빨아먹고, 위로 쑥쑥 자랍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은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막 자라고 봅니다. 모종을 옮겨심으려고 몇 번 옮기면서 곧뿌리를 끊는 것이, 거름을 쪽쪽 빨아 먹는 잔뿌리만 무성하게 합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버팀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위로 자라는 것에 맞춰 줄도 매줘야 합니다. 이래저래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고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살지 못하겠다고 느껴서 그럴까요? 오염된 곳에서는 소나무도 솔방울을 많이 맺듯이, 고추도 열매를 많이 맺는 것 같습니다. 농사는 적당히 죽지 않게 식물을 괴롭혀서 수확을 많이 얻는다는 말이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씨로 심는 것은 곧뿌리가 자기 몸을 지탱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알맞은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가 살아 있느냐 아니냐가 이런 차이를 만드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추측하고 상상할 뿐입니다. 그러니 믿지도 마시고, 너무 부정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제가 선택한 고추 농사 방법입니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키우느냐에 따라, 그것들도 그 사람을 따라갑니다. 제가 심은 것들은 저를 닮아서 늦게 싹이 나고, 더디게 자랍니다. 지난해 가을 충북 보은에서 발바리 한 마리를 얻어다 키우고 있습니다. 이놈이 타고난 성질이 그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버릇을 잘 들이고 길을 잘 들여서 지금은 함께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낑낑대고 아무 데나 똥오줌을 싸고, 아무튼 같이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열 받고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방식대로 이놈을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이놈의 생리와 습성을 파악해서 살살 몰고 가야겠다. “주는 나를 키우시는 목자”라는 말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개는 어떤 동물인지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아 이놈이 그래서 이랬구나’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습성을 이용해서 나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할지 고민하고, 생활 속에서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차츰 서로 적응하고,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자연히 속 썩고 열 받는 일도 사라지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타협하여 어울려 살게 되었습니다. 개를 키워보니 식물을 키울 때와는 참 달랐습니다.

그러다 식물을 키우는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식물도 그렇겠구나. 동물이나 인간처럼 우리와 직접적으로 감정을 나누고 소통할 수 없어서 그렇지, 이놈들도 동물이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뭐 고추를 씨로 심으려고 한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저 어떻게 하면 손 좀 덜 가고, 거름 좀 덜 주고 귀찮지 않게 키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선택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니들도 니들이 자라고 싶은 방향이 있고, 나도 니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서로 적당히 타협하자. 니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나도 맛있게 잘 먹으며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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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풍덕동, 아니 풍덕리는 어떤 모습일까? 처음 답사를 다니기로 생각했을 때 예전 그곳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고 싶었다. 지난번 송정리나 광주도 그랬고, 풍덕리도 어떻게 변했는지 보려고 순천역에서 내려 머릿속에 넣은 지도를 따라 걸었다. 지방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역 주변은 쉽게 변하지 않나 보다. 이곳도 역 주변은 낡고 오래된 집들이 서 있다. 동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니 순천종합어시장이 나온다. 이곳도 원래는 드넓은 논밭이었으리라.


그림 1 풍덕동에 들어선 종합어시장.


그러려니 하며 걷는데 눈길을 끄는 간판이 보였다. “사단법인 여순사건 순천유족회”가 그것이다. 여순사건이라고 하면 책에서나 배웠지 별 느낌이 없었다. 허나 이곳에서 이 간판을 보니 ‘아직 여순사건은 끝나지 않았구나’ 실감한다. 빨갱이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곳의 들이 넓었기 때문이리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넓은 들을 지주들이 틀어쥐고 있으니 소작농들은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주고 소작농이고 할 것 없이 다들 잘 살아보자는 붉은 물이 들기 더 쉬웠으리라. 그 세력이 강하니만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남아 있었을 것이고, 군대가 들어오면서 그곳에 들어가 세력을 잡고 한 번 들고 일어섰겠지. 박정희도 봉기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재밌다. 봉기군에 가담했다가 나중에는 핵심 인물들을 불고 살아남아 더 높이 올라갔다고 하니, 기회주의자 권력주의자 박정희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씁쓸한 웃음이 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밝혀진 것만 5500명 정도 죽었다니, 엄청난 사건이다. 그 가운데는 틀림없이 무고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홱가닥 미치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거슬리는 놈은 다 쓸어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 아니었던가.


그림 2 이 간판을 보고 기분이 참 거시기했다.


조금 걷다 보니 풍덕동사무소가 나오고 도무지 논밭은 보이지 않는다. 동사무소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송정리에서 당한 수모가 생각나서 참았다. 공무원들은 그럴싸한 명함을 들고 가야 반응을 보인다. 공무원만 그럴까?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 종이 조각에 적힌 글씨를 보고 쳐다보는 눈동자가 달라진다. 그냥 이 길로 가면 무엇인가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내 육감을 믿고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가니 민속품 판매점이 나왔다. 이제 우리네 농사 연장은 이런 곳에나 와야 볼 수 있구나. 세월이 가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림 3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벼나 보리를 떨던 홀태 또는 그네, 클이라는 농기구. 여기저기서 수집해 왔는지 꽤 많았다.



그림 4 탈곡기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대표적인 농기구다. 이것은 60~70년대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한일식韓一式 탈곡기脫穀機”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탈곡기가 밟고 선 것은 돌절구들.



그림 5 엄청 큰 연자매. 이 동네가 벼가 많이 나긴 했나 보다.


조금 더 걸으니 이곳에서도 도시농업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옥상으로 뻗어 오른 저 줄기는 수세미 아니던가! 땅에는 어디서 욕조를 구해다가 흙을 담아 고추를 키우고 있었다. 위로는 수세미와 아래로는 고추, 둘이 어울려 참 보기 좋다. 도대체 뭐하는 집인데 저러고 사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가면서 보니 매운탕 집이었다. 그럼 식당인가? ‘손님들이 참 좋겠네’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알아보니 식당이 아니라 설비 공사를 하는 집이었다. 그래서 욕조로 텃밭을 만들었구나.


그림 6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수세미와 고추. 실제로 보면 세력이 더 대단하다. 욕조를 재활용하는 모습. 욕조 정도 깊이면 별 걸 다 심을 수 있겠다.


그렇게 넋을 잃고 한참을 쳐다보는데 웬 할머니 한 분이 옆에 우산을 받쳐 들고 서 계신다. 혹시 이 작물을 심으신 분이 아닐까 해서 꾸벅 인사드린 뒤 여쭈니 맞다고 하신다. 이 분은 원래 목포에서 태어나셨는데, 젊어서는 부천에서 30년 살다가 순천에 오신 지 한 5년 됐다고 하신다.
어찌 이리도 잘 키우시는지 물으니, 올해 두 번째 농사짓는데 처음에는 거름으로 개똥 썩힌 것에 비료를 조금 줬다고 한다. 그렇게 고추 80그루에서 수확해 고추가루 5근 내고, 수세미는 12그루에서 50개를 땄다고 하시네. 올해는 조금 더 신경 써서 키토그린이라는 영양제까지 사다가 줬다고 하시니 엄청 정성스럽게 키우시는 걸 알 수 있다. 이야기하시는 내내 싱글벙글 얼마나 뿌듯해 하고 자랑스러워하시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사진이란 것이 참 그렇다. 사진기로 남기면 남과 함께 볼 수 있어 좋지만, 사진기를 드는 순간 나와 대상이란 거리감이 생긴다. 그 거리감은 어색함으로 번지고, 그러다 보면 그 순간, 분위기, 느낌, 공감을 얻기 힘들다. 잘 이야기하던 사람도 사진기를 보면 얼굴과 혀가 굳어 전과 같이 신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사진기에 익숙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구나 다 그렇다. 또 찍는 사람은 찍는 사람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요물은 요물이다. 사진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옛사람들의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이런 일만 아니면 사진기를 들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음식이 나와도 먼저 사진부터 찍고 본다. 먼저 냄새를 맡고 맛을 봐야지 그게 뭐하는 꼴이람.


그림 7 욕조 말고 스티로폼 상자도 쓰고 있다. 거름을 잘해서 그런지 유치원 텃밭의 비실거리는 고추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지역은 대나무가 많은지 고추 버팀대로 대나무를 썼다. 물어보니 일부러 차로 싣고 와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에 순천에 와서 박을 먹은 기억이 있어 혹시 수세미도 먹느냐고 할머니께 여쭈었다. 그랬더니 수세미를 활용하는 많은 방법을 알려주신다. 할머니는 수세미 덜 익은 것을 따면, 껍질을 벗기고 속을 설탕에 1주일쯤 재 놨다가 먹는다고 한다. 무슨 맛일까? 미처 묻지 못했다. 또 천식 있는 사람이나 기관지가 안 좋은 사람은 수세미를 푹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좋다고 한다. 목을 많이 쓰는 사람이나 약한 사람은 꼭 해볼 일이다. 추석쯤에는 꼬랑지를 자르는데 그럼 거기서 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 물이 진짜라고 하시며 그건 꼭 해보라고 적극 추천하신다. 지난해 수세미를 잘 먹고 잘 봤는데, 너무 많이 나와서 힘들었다고 올해는 지난해보다 적은 9그루만 심었다고 하신다. 참 행복하게 사신다.


그림 8 수세미가 탈 구조물도 대나무로 만드셨다.


갈 길이 멀다. 이제 가야겠다고 인사드린 뒤 뒤돌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집들뿐이다. 풍덕동도 지난번 광주처럼 다 개발된 것일까? 더 이상 논밭은 찾아볼 수 없을까? 일단 한 번 가 보자. 저쪽으로 순천남중학교가 보인다. 그 옆으로는 횅하니 빈터인 것 같은데 혹시? 발걸음이 빨라졌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곳에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그림 9 순천남중학교 옆. 태풍 마니의 영향으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 하지만 벼들은 푸릇푸릇 예쁘게 자라고 있다. 드디어 찾았다. 풍덕동에 남아 있는 논밭.


특별한 농법은 없을까 밭에 심어 놓은 작물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벼는 어떻게 심었는지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별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논밭을 찾은 게 어디냐.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또 기쁘다. 이 기쁨으로 가득한 맘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따라 걷는다. 어 그런데 제비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제비가 있다.
제비야, 우리집에도 와 줬으면 좋으련만. 어릴 때 해마다 집에 찾아오던 제비가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난 제비만 보면 반갑고 좋다. 새끼를 까면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지저귀던 모습, 새끼들 똥을 입으로 물어다 버리던 모습…. 옛날에는 먹을 것을 달라고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지저귀는 제비에 어린아이들을 비유했다. 먹을 것만 보면 환장하고 달려들어 해치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비 새끼와 서로 닮아서 그랬을 것이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그런지 벌레를 잡아먹느라 제비들이 낮게 날아다닌다. 물을 받아 놓은 곳에서는 말 그대로 물 찬 제비가 되어 날아다닌다. 제비가 낮게 날아다니는 날은 벌레도 낮게 나는데, 벌레가 낮게 나는 것은 기압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 으레 ‘오늘은 비가 오겠구나’ 했다고 한다. 그것 말고도 개미가 집 입구 주변으로 제방을 쌓으면 비가 온다. 개미도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라서 자주 지켜보는데, 그 말이 틀림없다.
제비를 보니 오늘은 틀림없이 비가 오겠구나. 오늘은 비옷을 챙겨 왔으니 아무 걱정 없다.


그림 10 물 찬 제비, 너무 잽싸서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다. 오른쪽 하늘에 떠 있는 놈이 제비. 이걸로 만족하자.


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그냥 터덜터덜 걷는다. 논둑에 심어 놓은 논두렁콩이 너무 예쁘다. 간척해서 너른 논이 생긴 곳에서는 기계로 농사짓느라 이런 건 심을 생각도 하지 않을 거다. 논둑도 놔두지 않고 무언가를 심는 마음, 가난해서 무엇이라도 길러서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러한 자세야말로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농심이 아닐까?


그림 11 논두렁콩. 저 멀리 아파트가 보인다. 다른 곳은 모두 개발되었는데, 이곳만 섬처럼 홀로 남았다.


조금 가다 보니 아기자기한 텃밭이 보인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무엇을 어떻게 심었는지 살펴보았다. 먼저 밭의 가장자리를 둘러서 도라지, 참깨, 파, 토란, 들깨, 상추를 심었다. 가운데에는 두둑을 만들어 콩 3두둑에 수수 1두둑을 심었다. 수수가 거름을 많이 먹으니 콩 사이에 심으셨나 보다.


그림 12 왼쪽에 보라와 흰꽃이 도라지. 가장 앞에 보이는 것이 참깨. 파, 들깨, 상추는 오른쪽 끝에 있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 수수 1줄에 콩 3줄씩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13 토란은 벽에 붙여서 심었다. 토란은 음습한 것을 좋아하는 성질이니, 벽 쪽은 그림자도 지고하여 심었나 보다.


참 예쁜 텃밭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림길에 서서 여기까지가 현재 남아 있는 논밭의 끝임을 보았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갈까?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쳐볼까? 그냥 순천역 쪽이라고 생각되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밭에서 일하시는 분을! 이번에도 뭐 씨앗을 좀 얻을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지고 인사를 드렸다. 웬 젊은 총각이 쉬는 날도 아니고 가방 하나 메고 다니는 모습을 보시고는 적잖이 놀라신 것도 같다. 밭이 예쁘다고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주저앉아 말을 건넸다.
이 밭은 200평이 조금 넘는데, 2년 전에 1억 가까이 주고 사셨다고 한다. 기특하게도 31살 먹은 딸이 돈 좀 보태고, 두 분이서 모아 놓은 돈으로 사셨다. 몇 년 뒤에 아저씨가 퇴직하시면 두 분이서 농사지을 생각에 이렇게 사서 연습 삼아, 운동 삼아 농사짓는다고 하신다. 집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데, 두 분이 운동 삼아 나와서 여기까지 걸어와 일하다 집에 가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입꼬리가 귀까지 벌어지시는데 정말 좋아 보이신다.
아주머니의 원래 고향은 박치기왕 김일이 태어난 녹도라고 하신다. 녹도라는 지명을 처음 들어서 도대체 어딘가 한참 생각했다. 그런 건 일단은 어물쩡 넘어가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꾸 멈추게 하면 흐름이 끊어져 더 들을 얘기도 못 듣는다. 일단 그러려니 하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따로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녹도도 그렇게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뭐라도 먹으라면서 농막을 뒤지신다. 농막도 컨테이너 작은 걸로 잘 해 놓으셨다. 그렇게 뒤지시더니 인삼맛 사탕을 꺼내서 손에 쥐어 주신다. 받았으니 먹어야지, 바로 하나 까서 날름 입에 넣었다. 아주머니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얼마 전에 내 또래의 아들을 가슴에 묻으셨다고 한다. 어째쓰까나, 다 키워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나.


그림 14 한창 일하고 계시다 놀라신 아주머니.


밭에는 주로 참깨를 많이 심으셨다. 그래도 아직은 초보인지라 너무 배게 심어서 참깨가 웃자랐다. 오늘 태풍이 올라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다 넘어갈 기세다. 옛날에 어른들이 태풍처럼 날씨가 궂을 수도 있으니 늦게도 심으라고 하신 말이 기억나, 나중에 드물게 심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알맞게 잘 자랐다고 한다. 이 밭에는 거름을 액비를 만들어서 주고, 밑거름은 퇴비를 사다 준다고 한다. 참깨 말고는 둘레에 팥과 호박을 심고, 잎채소들을 조금 따로 밭에 심으셨다. 밭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는 매실나무인데, 처음 밭을 살 때 묘목을 심어 엄청 많이 컸다고 한다.
처음에는 농사지을 줄 몰라서 좌충우돌 실수도 많이 하고 동네분들한테 좋은 밭 사서 농사도 못 짓는다고 핀잔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네분들이 살뜰하게 이것저것 씨도 챙겨 주시고 농사짓는 법도 일러주셔서 참 고맙게 잘 짓고 있다고 하시니, 동네분들이 병도 주고 약도 주시는 분들이다.
이 동네를 좀 아시냐고 물으니, 원래 10년 전만 해도 일대가 모두 논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개발되면서 아파트도 들어서고, 이것저것 갈아엎어서 많이 도시가 되었다. 지금 농사짓는 이곳만은 땅값이 비싸서 업자들이 함부로 매입을 못해서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주변에 땅값 싼 곳은 이미 다 사들여서 아파트 지어 남은 것이 없다고. 슬쩍 땅값이 얼마나 되는데 그러냐고 물으니, 여기는 1평에 50~60만원이나 한다고 한다. 안산보다도 비싸다!


그림 15 아주머니의 밭 전경. 웃자란 참깨들. 군데군데 있는 나무가 바로 매실. 가운데 왼쪽에 빨간 다라이통이 액비를 만드는 통.



그림 16 도시의 상징 아파트. 너에게 흐린 구름이 짙게 낄 것이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이 여기 살기 싫다고 다 뛰쳐나오면 안 될까? 아파트, 골프장, 스키장.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



그림 17 시간이 더 흐르면 그나마 여기 남은 논밭도 모두 아파트가 들어설까? 아니 순천의 인구가 늘어날 일이 거의 없으니 그저 꿈일 수도 있다. 순천 풍덕 지구 도시개발 사업조합 앞.


슬슬 후배가 도착할 시간이 다 돼 간다. 나도 순천역으로 가서 마중을 해야지. 아주머니께 인사드리고 난 순천역으로 향했다. 순천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 입구에 할머니들이 가판을 벌였다. 자주 여기에 자리를 펴시는 듯하다. 혹시 감자 나올 때가 됐으니 토종 감자가 없을까 하여 슥 쳐다보며 지나는데, 이상한 감자가 눈에 띈다. 발걸음을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 할머니께 여쭈었다.
“이게 뭐예요?”
붉은 감자라고 하시며 아주 맛있다고 사다 먹어보라고 하신다. 먹을 건 아니고 씨감자로 쓰려고 하는데 괜찮냐고 물으니, 자기도 사오는 거라서 장담할 수 없으니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럼 사진이라도 찍어 가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몇 장 찍는데 사투리로, “왜 작을 놈으로 찍어 기왕 찍으려면 이 큰 놈으로 찍지.” 아 사투리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순천 사투리를 알면 그대로 적을 텐데. 녹음한 것도 아니고 이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럼 이 감자는 어떻게 구할 수 있냐고 하니, 붉은 감자라고 농협에서 종자를 보급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두불감자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시는 걸 보니 이곳은 감자도 두 번 심나 보다. 남도가 다르긴 다르구만. 아쉽지만 나중에 농협을 통해 알아보든지 하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림 18 일반 감자(오른쪽)와 붉은 감자(왼쪽). 껍데기만 붉고 속은 하얗다. 찌면 분이 풀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고 하신다. 조금 사올 거 그랬나?


순천역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대합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니 드디어 후배가 도착했다. 여기서 어물쩍거리지 말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벌교로 넘어가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30~40분 정도면 간다고 한다. 생각보다 무지 가깝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는 넘어가 깜깜한 밤. 우리는 벌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얘기가 길어져서 황귀연 씨가 논농사 짓는 방법 조사한 것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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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농법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지․인 삼재에 따른 농사라고 할 수 있다. 삼재에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먼저 천시天時, 하늘의 때를 알아야 한다. 하늘의 때를 살펴, 제때 제대로 농사일을 해야 한다. 다음으로 지리地利, 땅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알맞은 작물은 무엇이고, 물길은 어떠하며, 무엇이 모자라고 넘치는지 살펴, 땅의 성질에 따라 그를 이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사人事, 앞의 두 가지를 알았으면 몸소 힘써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여건이더라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사람이 애써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거나 합리적으로 이용하며, 제때 알맞은 작물로 땀 흘려 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전통 농법이다.

이러한 농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경험이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어르신들이 존중받고, 옛사람들의 지혜가 빛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의 경험이 농축되어 있는 속담이 어떠한 기술지도서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 농업은 개화기를 맞이하며 바뀌기 시작한다. 경험을 중시하는 농업에서 실험과 실습을 중시하는 농업으로 바뀐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도 1884~1894년까지 있던 농무목축시험장, 1900년에 개설한 잠업시험장, 1902년에 설립한 모범목장, 1905년에 설립한 농사시험장, 1906년에 설립한 원예모범장 들이 생긴다. 이러한 기관들은 1906년에 설립한 권업모범장으로 통합된다.

이처럼 농업관이 바뀌면서 우리도 농업을 자연 안에서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해야 한다고 보게 되었다. 동식물을 자연 안에 사는 우리와 같은 생물로 보지 않고, 해부하고 분석해 우리의 삶에 이득이 되도록 이용하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조건에 동식물을 넣어 실험과 실습을 해서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수확량을 증대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두 가지 태도 가운데 어느 것이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둘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잘 뒤섞을 수는 없을까? 그 길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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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추

 

 

 

삶은 시계추처럼 움직인다.

 

똑딱거리는 시계추처럼 똑딱똑딱.

 

가슴 아플 땐 그만큼 똑딱똑딱.

 

평화로울 땐 그만큼 똑딱똑딱.

 

분침을 맞추고,

 

태엽을 감아도,

 

시계추의 흔들림대로 똑딱똑딱.

 

한순간 모든 걸 잊어도 똑딱똑딱.

 

모두와 함께 지나는 시간, 똑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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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濱田秀男에 따르면, 1910년 이전 조선의 토종벼는 논벼 991품종, 밭벼 167품종, 합계 1158품종이 있었다고 한다.

1913년 권업모범장에서 발간한 [조선도품종일람]이라는 책에는 논벼 1258품종(메벼 876, 찰벼 386), 밭벼 192품종(메벼 117, 찰벼 75), 합계 1450품종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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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밭에 다녀오다가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 남매를 보았다.

누나는 울퉁불퉁해 속도가 잘 나지 않는 인도로 자전거를 몰았고,

동생은 자꾸만 차도르 오르려는 것뿐만 아니라 길까지 막 건너려고 했다.

그걸 보고 누나가 그러지 말라고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동생은 누나의 말을 듣고, 더구나 인도로 오르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남자와 여자는 어렸을 �부터 그렇다는 걸 느꼈다.

남자는 자기 마음대로 이게 위험하든 어떻든 막 다니려고 한다.

그러나 여자는 안정적으로 가고자 한다.

그 힘이 남자에게까지 미쳐 남자는 결국 여자에게 맞춘다.

물론 남자가 여자를 생각하는 만큼.

어릴 때부터 이런 특성이 드러나는 것, 참 신기하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라 여러 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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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성포도서관에서 빌려온 주강현 씨의 <관해기>라는 책을 보다가 재미난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조선지지자료략>이라는 책에 나온 지도를 찍어서 참고사진으로 올린 것입니다. 안 그래도 지난해부터 일본자료를 보고 있어서 더 관심 있게 꼼꼼히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옛날 땅이름을 일본식으로 표기하는 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일본자료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우리나라 땅이름이나 농기구 이름을 일본식으로 적어 놓은 것을 다시 우리말로 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지요. 한 예로 신기新基라는 땅이름이 나옵니다. 이걸 セット샛터라고 했더군요. 이러한 것이 몇 가지 더 나오지만, 이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더 찾아보려고, <조선지지자료>라는 책이 없나 이곳저곳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출판된 책을 살피니, <강원도의 땅이름>이라는 책은 있는데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대학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는 일본책을 볼 수 있었지만, 제가 원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회과부도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뒤졌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자료가 있더군요.

제가 보고 있는 자료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료는 아니지만, 제가 살고 있는 곳을 더 잘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였습니다. 그럼 이제 입은 그만 놀리고 그 자료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목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입니다. 언제인지, 누가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저 대략 1910년 무렵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땅이름을 조사한 것입니다. 산, 들, 강, 마을, 역, 유적, 특산물 등을 ‘한자/우리말/비고’의 형식으로 꼼꼼히 조사했습니다. 이런 것까지 조사해 놓았나 싶어서 참 기가 찹니다. 덕분에 재밌게 보기는 하지만 씁쓸하네요.


그러면 제가 사는 안산, 성호 이익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이곳의 지명을 소개하겠습니다.


고종 33년(1896) 경기도는 크게 3부 36군의 행정조직이었습니다. 일등부윤은 3곳으로 경성, 개성, 강화입니다. 일등군수는 1곳으로 양주입니다. 이등군수도 1곳으로 수원입니다. 나머지 30곳은 사등군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안산시는 이 당시 “안산군安山郡”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산 이름이 나옵니다. 안산의 산이라 하면 당연히 수리산이죠. 안산과 붙은 수리산은 바로 “수암봉秀岩峰”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수암리秀岩里 뒷산으로 수리산 서쪽 맥脈이다.” 다음은 “응봉鷹峰”입니다. 이곳에는 “l봉ㅣ” 곧 매봉재라는 우리말 땅이름이 나옵니다. 설명은 “서정리西亭里 뒷산, 곧 수암봉 서쪽 맥이다.” 그런데 저는 서정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은 하천입니다. 하천은 “판천板川”이라는 곳만 나옵니다. 한글 이름은 없고, “동곡리東谷里 앞에 있다”라는 설명만 나옵니다. 동곡리는 뒤에 나오겠지만, 동막골을 말합니다.

다음은 가장 많은 동네 이름, 마을 이름입니다. 번호를 붙이며 소개하겠습니다.

1. 수암리秀岩里. 별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2. 서정리西亭里. “독슈리”, 곧 독수리라는 우리말 이름이 있습니다.

3. 장상리章上里. 지금의 장상동이겠죠. 우리말 이름은 “노리울”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장章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고구려와 신라 때 안산의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와 장구獐口였다고 합니다. 장章은 장獐을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옛 이름에는 모두 ‘노루 장獐’이 들어가지요. 그래서 ‘노루→노리’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4. 장하리章下里. 우리말 이름은 “벗말”입니다.

5. 동곡東谷. 우리말 이름은 “동막골”이라고 합니다. 안산 텃밭에서 산 하나 넘으면 나오지요.

6. 신리新里. 우리말 이름이 “시랑골”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시랑 초등학교’가 있는 걸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거 관공서에서 표지판에 잘못 표기해 놓았습니다. 아마 이런 저런 유래는 모르고 로마자 표기만 따르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나다니면서 눈 여겨보셨다면 아실 텐데, ‘시낭’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거 더 이상 굳어지기 전에 고쳐야 하는데 어디에 신고하면 되는지 몰라서 그냥 있습니다. 누가 대신 신고 좀 해주세요. 시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 출신인 진주 유씨의 한 분이 이부시랑이라는 벼슬을 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7. 점성리占星里. 제가 가장 관심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안산을 계속 ‘일리, 이리, 사리’가 기원이라 ‘일동, 이동, 사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얼마나 재미없고 멋없는 이름입니까. 저는 그게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익 선생님이 살다 가신 마을 이름이 ‘첨성리’ 아니면 ‘점성리’인데, 이곳이 어떻게 일동이겠습니까. 그래서 전부터 일동에 강한 의구심을 품고, 점성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진짜 이 자료에 점성리라는 이름이 나오는군요. 제가 필명으로 쓰는 ‘점성골 김서방’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곳의 한글 이름은 “졈셩”이라고 합니다.

8. 성포리聲浦里. 안산에서 이름을 잘 지은 곳 가운데 한 곳입니다. 옛 숨결이 살아 있는 ‘성포동’입니다. 한글 이름은 “셩머리”라고 합니다.

9. 양상리揚上里. 지금의 양상동입니다. 우리말 이름은 “윗버l” 곧 “윗버들”입니다. 양상보다 참 예쁩니다. 일본이 자기네 식으로 만든 이름 대신 이런 이름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 이제 전산화도 됐고 그리 힘들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 있는 지도자가 나오길 기다립니다. 그때까지 이런 걸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꼭 붙들고 있어야지요.

10. 양하리揚下里. 이 이름은 지금의 양하동이지요. 한글 이름은 “아ㅣ버l" 곧 ”아랫버들“입니다.


다음은 역 이름입니다. 당시 지하철이나 기차는 없었고, 말 타고 달려와 쉬던 곳이었겠지요. 안산에는 “석곡역石谷驛”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글 이름은 “버l역말” 곧 “버들역말”입니다. 설명에 “양상, 양하의 서쪽이고, 예전에 대월면大月面 석곡리에서 부르는 옛 역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다음은 원院입니다. “쌍록원雙鹿院”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청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을 보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하리에 있다. 고려시대에 송도로 가는 길이 그곳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터도 알 수 없다.” 장하리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지금은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옛날부터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길은 이렇게 사람이 잘 다니는 곳, 사람은 다니기 쉬운 곳이 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길은 그걸 뛰어넘었지요. 하늘 높이 길을 뚫지 않나, 산에 구멍을 뻥 뚫지 않나.


다음은 장입니다. 안산의 장은 “수암시장”이라고 합니다. 텃밭의 어르신 말씀을 들어보아도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수암장이 가장 크고, 다들 거기서 장을 보았다고 하십니다. 이곳의 한글 이름은 “읍ㅣ장” 곧 “읍내장”입니다. 설명은 “수암리에서 상인이 출시하지 않고, 지금은 폐장되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포구입니다. “성포聲浦”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글로는 “셩머리”라는데, ‘소리곶’으로도 유명하지요. “성포리 앞에 있다.”

다음은 산봉우리입니다. 산봉우리라고 해도 안산에는 험한 곳이 없지요. 수리산만 해도 600m가 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산봉우리 이름도 “소기小崎”입니다. 한글로는 “작은ㅣ” 곧 “작은재”라고 합니다. 설명은 “수암리의 뒷산에서 과천으로 가는 길이다.”


다음은 고개입니다. “장명현長命峴”입니다. 아쉽게도 한글 이름은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설명은 “점성리 뒷산에서 광주로 가는 길이다”라고 합니다. 저희 집 뒷산이지요. 요즘 하루에 한두 번씩 꼭 산책을 다니는 길이기도 합니다.

또 “풍현風峴”이 있습니다. 얼마 전 지하철 역에 붙어 있는 지도를 살펴보다 재미난 걸 보았습니다. 수암봉에서 텃밭으로 오는 능선에 ‘바람고개’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여기가 예전부터 바람이 많이 불던 곳이라 그런지 이름도 바람고개라고 한다며 재밌어 했지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정용수 선생님께 했더니, 예전부터 그곳을 ‘바람개비고개’라고 했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걸어다니는 영상실록이십니다. 이 기록에도 한글로는 “바람ㅣ비고ㅣ”라고 합니다. 설명은 “동막골 뒷산으로서 북쪽으로 향하는 통로이다.”

그리고 “항현缸峴”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항아리고ㅣ”라고 합니다. “양상리 뒤쪽에 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절 이름도 나옵니다. 먼저 “원당사元堂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암리 뒷산에 아직도 흔적이 있다.” 또 ”수암사秀岩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수암리 뒷산에 아직 흔적이 있다.“


다음 명승고적입니다. 앞서 말했던 “장항獐項”이 명승고적이라고 합니다. 경치가 좋다는 말이겠지요. 지금도 산에 올라 보면, 너른 들에 멀리 물결치는 산이 펼쳐져 보기 좋습니다. 몇 개는 못 본 척 눈을 감으면요. 한글 이름은 “노리울”입니다. 설명은 “장상, 장하, 동막 모두를 말한다. 고구려와 신라시대의 읍터였다. 그 시절 읍 이름이다.”

“망해정望海亭”이라는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서정리의 뒤이다. 옛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의 루樓인데, 겨우 터만 남아 있다.” 김정경(1345~1419)은 안산 김씨로 조선 전기의 무신입니다. 태조 5년(1396) 전라도와 충청도 각지에 성을 쌓고, 군비를 점검하며, 병선을 살폈다고 합니다.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월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오르고, 연성군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태종 6년(1406)에는 명나라에도 다녀오고, 삼군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가 된 인물이라는군요. 안산이 연으로 유명하긴 했나 봅니다. 강희맹이 중국에 다녀와 가져온 연을 심은 곳도 이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안산 김씨 가운데 호에 연蓮을 쓴 인물들이 꽤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산의 특산물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가장 솔깃해 할 순서입니다. 번호를 세며 소개하겠습니다.

1. “미米”. “쌀”입니다. “군의 모든 곳에서 산출한다”고 합니다.

2. “맥麥”. “볼이” 곧 “보리”입니다.

3. “대두大豆”. “콩”.

4. “시柿”. “감”.

5. “율栗”. “밤”.

6. “梨”. “ㅣ” 곧 “배”입니다.

7. “행杏”. “살구”. 안철환 선생님 댁에 멋진 살구나무가 있지요. 그것이 괜히 잘 되는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어떻게 알고 심으셨는지 선견지명이시네요.

8. “철정鐵鼎”. “솟졍” 곧 가마솥이지요.


지금까지 1910년대 안산을 살펴보았습니다. 꽤 기네요. 길지만 재미있으셨길 바랍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졸립니다. 오늘은 이만 자려고 합니다. 다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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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心

 

대야 속에 떠오른 달을 건지려

아이는 물장구 치고

마음 속에 떠오른 달을 찾다

나는 그믐밤 기다리며

한 숨,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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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어지러웠던 시절.

진달래문학회를 가입해 활동하면서 내 안의 고름을 쏟아 부었다.

이것이 바로 내 첫 글이었다.

 

그런데 사실 난 안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머무를 곳 없고,

난 술로, 파멸로, 극단으로 날 몰고 갔다.

그 순간, 그걸 꿰뚫어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날 바라보고, 날 기다리고, 날 안아주었다.

난 지금 그 사람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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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달이 지구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문이다.

지구가 태양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린 어린 해바라기 �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에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를 그리는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에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에게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를 그리는 내 그리움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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