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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고 싶은 책.

그러나 요즘 파는 곳도 없고, 더구나 값도 만만치 않다.

아래는 퍼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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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는 근대화 이전의 자연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에서 제작한 것으로서, 그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다. 이 지형도의 발행 연도를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인 1911년으로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1894년에서 1906년까지 일제의 군사정보기관인 참모본부가 한반도를 침략하려고 은밀히 제작한 군사지도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인공적인 변화를 겪지 않는 우리나라의 순수한 지형을 생각하는데 이 지형도가 해답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수백년의 자연적인 풍상을 겪으면서 형성된 우리 국토 고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미아동 구역에 해당하는 지형도는 4권 가운데 3권 2, 3, 14, 15에 걸쳐 나오는데, 각각의 면이 56*61cm에 이를 정도로 큰 지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진은 4개의 지도를 이어서 만든 것이다.

 

 이 지형도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이 사아리에서 미아리로 변화되는 혼란기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미아리의 지명이 미하리美下里와 미선리美仙里로 잘못되어 있다. 여기에는 1913년과 1930년에 설치된 '미아리 공동묘지'가 원래 전답田畓 부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현재의 미아4동과 미아9동 지역이 월곡천의 풍부한 수량을 이용하여 논밭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형도에는 당시의 주도로가 현재의 미아로가 아니라 종암로였고, 미아5.8동에 해당하는 구역에 10여호의 부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여기에서는 현재의 도봉로인 경흥대로慶興大路의 좌우에 펼쳐지는 강북구의 원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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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마당

 

 

어야! 어야! 어야디야!

가을 하늘 높이 오르게,

발맞춰 소리 높여 힘차게!

발을 굴러 탈곡기를 돌린다.

 

와릉! 와릉! 와르릉!

가을바람 뺨을 때리며,

벼 한 뭇 쥐고서 비빈다.

 

타닥! 타닥! 타다닥!

소나기 내리는 알곡.

함께 나선 강아지도 신나고,

소리만으로도 배부르다.

 

길가던 사람들도 힘을 보태고,

돌아가는 막걸리잔 흥을 돋운다.

낟알 떨군 볏짚도 함부로 하지 않고,

차곡차곡 단을 묶어 쌓는다.

 

이 볏짚들 이제,

겨울 나는 마늘의 이불이 되고,

소가 먹고 한겨울 난다.

어디 그뿐이랴!

사람은 새끼 꼬아 지붕에 이고,

신발, 멍석이며 온갖 것들 만들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 

 

타작마당은 신명마당.

늦가을 이곳은 죽음과 함께 살판이고,

뭇 생명을 울리는 놀이판이며,

신명나는 굿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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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났군요. 올해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어 농사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큰 피해는 보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은 현재 황해도 지역까지 보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뎌지고 있네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떠올리며, 한 걸음은 갔으니 앞으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충청도 지역을 소개하겠습니다.

청주에서 충주로

934년 6월 30일, 다카하시 노보루는 자동차로 청주에서 충주까지 달렸습니다. 그는 본분이 학자인지라 경치를 구경하기보다는 논밭이 먼저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본 논밭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1935년 자동차 사진. 농민들에게는 여전히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① 콩에 들깨를 군데군데 섞어짓기한다. 들깨는 옮겨 심은 것
콩밭에 빈자리를 두지 않으려고 군데군데 들깨를 심은 모습이다. 보통 들깨는 밭 둘레에 쭉 둘러 심는 일이 많은데, 특이한 모습이다.




② 콩과 수수 섞어짓기
콩과 수수는 자주 섞어짓는 작물이다. 수수는 거름을 많이 먹고, 콩은 거름을 만드는 성질을 활용한 모습이다. 몇 년째 콩과 수수를 섞어짓기하는데, 실제로 아주 궁합이 잘 맞는다.



③ 가을보리 사이짓기 콩
보리는 보통 밭을 싹갈이(또는 삭갈이, 밭 전체를 완전히 다 간다는 뜻)한 뒤, 고무래로 골을 타고 심는다. 거름이 많은 집은 밭에 거름을 쫙 뿌린 다음 소로 쟁기질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골을 타 보리를 심고 그 위에 흙 대신 두엄을 덮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보통 겨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기에 골에다 심는다. 그러니까 골에는 보리를 심고, 이듬해 봄이 오면 두둑에는 콩을 심는 형식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유럽은 오히려 여름에 비가 별로 오지 않고 겨울에 많이 와서, 여름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겨울에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아무튼 이때는 망종에서 스물 닷새나 지났으니 보리는 밑동만 남았을 것이다.



④ 가을보리 사이짓기 목화
콩 대신 목화를 심은 모습이다. 보리는 다 베었을 텐데, 목화는 싹이라서 그런지 보리보다 작다. 아니면 그림을 잘못 그렸을 것이다. 당시 목화는 중요한 돈벌이 작물이었다. 일제는 방직업 같은 공업 원료들을 조선에서 마음껏 긁어 갔다. 농민들이 물세에 여러 세금을 내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목화를 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⑤ 콩 홑짓기(줄지어 점뿌림)
두둑을 좁게 지어 한 두둑에 한 줄로 콩을 심은 모습이다.



⑥ 콩 홑짓기 가로로 점뿌림
위와 달리 두둑을 더 넓게 짓고, 콩을 더 배게 심었다.



⑦ 가을보리 60㎝(2尺)로 줄뿌림한 사이에 콩 1줄로 점뿌림
올해 안산 텃밭에서는 밀에 사이짓기로 콩을 심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밀이 버티고 서 있으니 차츰 극성스러워지는 새들에게서 콩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는 새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⑧ 일반적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다
전문적으로 논농사만 크게 짓는 곳이 아니라면 지금도 여느 농촌이나 다 논두렁콩을 심는다.

⑨ 가을밀 사이에 콩. 120㎝(4尺)로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콩을 2줄로 점뿌림
7번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대신 두둑을 더 넓게 지어 콩을 2줄로 심은 것이 차이일 뿐이다.

⑩ 가을보리 사이에 조 줄뿌림
보리의 두둑 사이는 약 90㎝(3尺), 대부분 펀펀한 두둑이다. 조 사이사이에 콩을 섞어 심었다.
보리는 수확했겠지만, 한 밭에서 3가지 작물을 볼 수 있다. 보통 2년 3작은 이렇게 돌린다. 봄에 조를 심어 가을에 거두고, 거기에 밀이나 보리를 심는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거둔 뒤, 다시 콩을 심어 가을에 거둔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봄까지 땅심을 찾도록 묵힌다.
하지만 이 밭에서는 특이하게도 콩과 조를 함께 심었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가 자란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여름에 심은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올해 밭에서 콩과 조를 함께 심어 본 결과,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2년 3작이 아니라, 그냥 보리를 거둔 뒤 콩에 띄엄띄엄 조를 심거나 그 반대의 경우일 것이다.



⑪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조를 줄뿌림한다. 보리도 이와 같다

⑫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콩을 줄지어 점뿌림한 곳이 많다

충북 청주군 사주면 복대리
먼저 복대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곳은 청주군 서주내면의 지역이었다. 여기에 짐대(솟대)가 서 있어 짐대마루라 하다가, 말이 변하여 진때마루 또는 복대(福臺=卜大)라 했다. 1914년에 실시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천리(竹川里)와 화진리(華辰里) 일부를 병합하여 복대리라 했다.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으로서, 중부고속도로와 충북대학교 사이에 낀 지역이다.
다카하시는 이곳에서 박인규(朴寅圭) 씨를 만났다. 그의 식구는 모두 여덟이다. 그들은 아버지(53), 자신(31), 아내(23), 딸(3)과 둘째 아들 내외(23, 22), 셋째 아들(18), 넷째 아들(11, 보통학교)이다. 그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3명이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시험장에서 일꾼으로 일한다고 한다. 현재 있는 '충청북도 농업기술원 종자생산시험장'이란 곳이 1957년 1월 1일 청원군 사주면 복대리에서 진천으로 이전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이 시험장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 가운데 갱빈밭(ケンビンパ)에서 보리 그루갈이 콩, 들깨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겠다.

먼저 이 밭은 집에서 327m(3町) 떨어진 곳으로서, 600평이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소작료는 정조로 나락 1섬 3말 5되를 낸다. 모두 600평이지만 콩과 들깨를 그루갈이하는 곳은 500평이다.
보리를 심으려고 거름을 내는데, 배합비료 18.75㎏과 두엄 50지게(1지게에 45~56㎏)을 혼자서 하루에 나른다. 그런 다음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 5일 전인 음력 9월 5일에 한다. 그리고 홑짓기하던 콩에 그루갈이로 보리를 심을 때 쟁기질하는 방법은 싹갈이다. 그런데 다카하시 노보루는 이 대목에서 이런 방법은 경기도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내가 밭에서 마을 어르신께 들은 이야기와도 똑같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기계가 밀려들기 전인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193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농사지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방법은 먼저 베어 낸 콩 그루를 중심으로 두 거웃 갈이 하여, 양쪽으로 째며 갈아엎어 땅을 펀펀하게 한다. 써레질은 나중에 한다. 그런 다음 쟁기질한 방향과 직각으로 보리씨 뿌릴 골을 낸다. 그러니 고랑이었던 곳이 이듬해에는 두둑이 되고, 그 다음해에는 다시 고랑으로 만들어 땅을 알맞게 돌아가며 활용할 수 있다. 골을 낼 때는 보습을 끼워서 한 거웃 갈이를 한다. 두둑과 두둑의 너비는 쟁기꾼이 알아서 알맞게 한다. 골을 탄 뒤에는 쇠스랑으로 긁는다. 아무래도 손으로 골을 깔끔하게 다듬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이듬해 사이짓기로 콩을 심는 것은 '골고리'라고 부른다. 그럴 경우에는 보릿골을 넓게 탄다. 보리는 동보리라는 품종을 심는데, 아마 동(冬)보리는 곧 겨울보리를 말하는 것 같다. 뿌리는 보리의 양은 모두 2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할 때에는 주인, 셋째 아들, 품앗이 남자(마을 사람) 4명, 품앗이 소 1마리(쟁기도 함께)가 함께 한다. 일하러 오는 마을 남자 4명은, 보리농사인 만큼 두레가 아니라 그냥 품앗이일 것이다.



그리고 소가 와서 일해 주면 남자 둘이 가서 그만큼 일해야 한다. 그리고 소가 일하러 오면 아침, 저녁에는 소 주인이 먹이를 책임지고, 점심만 빌린 사람이 책임진다고 한다. 이 집처럼 쟁기까지 빌려쓰면, 소 1마리+쟁기의 품삯으로 2원에다 쟁기꾼 품삯 1원까지 모두 3원을 줘야 한다. 논에서 일하건 밭에서 일하건 모두 똑같고, 모내기철처럼 아주 바쁠 때라고 특별히 더 비싸지도 않다. 다만 바쁠 때에는 일꾼에게 세 끼 밥을 챙겨 주고, 담배(3전)를 주면 하루 품삯은 60전이다.

이렇게 보리를 심을 때에는 농기구로 쟁기 1대, 쇠스랑 5자루, 삼태기 2개, 토입기(土入器) 1개, 씨앗 담는 바가지 1개를 쓴다. 이 사람들과 농기구를 가지고 한나절이면 500평에 보리 심기를 끝낸다.

이후 음력 9월 안에 보리 싹이 나오면, 곧바로 사람 똥오줌을 두 번 정도 준다. 약 100병 정도인데, 한 병에 약 37.5㎏ 들어간다. 웃거름을 한 번 줄 때마다 남자 두 사람이 함께 한다. 웃거름은 사람 똥오줌을 기본으로 주는데, 그것 말고도 돼지 오줌이나 부엌의 구정물 같은 것도 준다.
첫 번째 웃거름은 싹이 난 뒤 바로 준다. 두 번째 웃거름은 석 달 뒤인 초봄에, 그 동안 모아 둔 똥오줌을 내다가 준다. 또는 얼음이 풀릴 때 화학비료를 줄 때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배합비료 1가마니 37.5㎏을 가루로 만들어 준다. 이 배합비료 1가마니는 4원 36전이다. 앞에 쟁기꾼의 하루 품삯이 1원이었으니, 요즘처럼 사람 품삯이 비료값보다 더 비싼 것과 확실히 다르다.

음력 3월쯤에는 주인과 셋째 아들이 김을 맨다. 이 둘이 대략 이틀쯤 걸려 끝낸다. 김매고 5일 뒤에는 주인 혼자서 토입기로 흙을 넣는다. 하루면 충분히 마친다. 

음력 5월 중순, 양력으로 따지면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에 보리를 벤다. 품앗이 2명과 주인이 함께 낫 3자루를 들고 한나절 동안 보리를 베고, 이후 지게로 나른다. 집에 나른 다음에는 이 세 사람이 도리깨로 떠는 데 한나절 걸린다. 수확량은 3섬(최고는 4섬이었음), 보릿짚은 7지게가 나왔다. 이걸 내다 팔면 겉보리 1섬에 13원 50전을 받고, 보릿짚은 1지게에 60전을 받는다.

방아는 발동기로 찧는데, 그러면 원래 양에서 보리쌀 56~67%를 얻는다. 여기서 나오는 보리기울은 집에 가지고 간다. 2말 5되 정도의 보리기울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돼지에게 먹인다. 이 집은 소가 없었으니 돼지가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소가 없는 집에서는 거름도 밟히고 급할 때 돈으로 바꾸려고 돼지라도 한두 마리씩 꼭 키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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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다카하시 노보루가 1939년 5월 24일에 방문한 제주읍 이도리(二徒里) 구남동(九南洞)에 살던 김정용(金丁龍·43) 씨의 농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도리는 현재 제주시 이도1동과 도남동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제주도에 살아보지 않아 구남동이 정확히 어디인지 찾기 힘들지만 바닷가까지 약 2.2㎞라는 것을 단서로 지도에서 찾아보니 삼성혈 근처의 어느 곳일 겁니다. 이 글을 보신 제주도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마을은 바닷가에서 그렇게 가까운데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도 없고, 잠녀도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10호가 살고, 일본에 건너간 사람은 남자 5명, 여자 3명, 아이 6명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과 가까워서 그런지 많이들 건너갔습니다. 4.3항쟁 때도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더군요. 아픈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1930년대 제주도 잠녀의 물질하는 모습. 제주도 잠녀들은 철마다 전국은 물론 일본까지 출장을 다니며 끈질기게 살아왔다


정용 씨의 살림

이 분은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만 지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식구는 아내(41), 맏아들(21), 맏며느리(18), 둘째 아들(10), 맏딸(23, 일본 건너감), 둘째 딸(15), 셋째 딸(8)로 모두 8명이고, 그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 5명입니다. 땅은 제주도답게 논은 없고, 밭 4,800평을 농사짓습니다. 2,400평만 소작을 하고 나머지 2,400평은 자작을 하니, 당시로서는 꽤 유복한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요. 기르는 작물은 보리, 조, 콩, 밭벼, 고구마, 풋베기콩 등입니다. 집의 텃밭에는 고구마 모종을 키우고 마늘, 파, 상추, 배추, 호박, 옥수수, 사탕수수를 심어 먹는다고 합니다.
뭍과 다르게 소작 관행이 아주 재미있어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일종의 전세보증금처럼 땅을 빌리는 사람이 돈을 맡기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밭주인이 그 보증금을 돌려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약은 오로지 입으로만 이루어지고, 밭주인은 보통 1년에 20%의 이자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런 관행이 참 많은데 다카하시는 땅은 많은데 농사지을 사람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예상합니다.
또 특이한 것으로는 공동으로 관리하는 꼴밭이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제주도하면 들판에서 뛰노는 말과 소가 생각나지요. 이 사람의 꼴밭은 600m 떨어진 1,500평의 땅으로, 여기에는 소나 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둘렀습니다. 제주도에는 돌담을 두른 밭이 많은데 그 까닭은 놓아기르는 소나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꼴밭에는 자골(자귀풀)을 길러서 그걸 베어 겨울에 소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소를 기르는 방법도 재미있습니다. 소도 공동으로 놓아기르는데, 이 마을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어서 이웃마을 방목계에 들었다고 합니다. 보통 음력 6월 초부터 8월 말까지 거기에 데려다 놓는데, 비용은 늙거나 어리거나 구별 없이 소와 말 1마리에 40전입니다. 대신 막 태어난 놈은 공짜이고, 계원은 할인 혜택이 있어 한 사람에 20전이라고 합니다. 놓아기르는 소와 말은 주인들 가운데 1명씩 3~5월과 9~10월에 순번대로 돌아가며 산에 풀어놨다가 끌고 온다고 합니다. 곁다리는 그만 잡고 본격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와 말을 막기 위해 돌담을 두른 밭(좌)
자귀풀(우)
450평의 보리밭. 번호는 씨를 뿌리는 순서

먼저 450평의 밭에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이 밭에는 앞갈이로 밭벼를 기르는데 그걸 음력 10월 20일에 거둡니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정말 따뜻한가 봅니다. 그리고는 10월 말에 돝거름을 냅니다. 제주도는 소똥보다 돼지똥을 거름으로 더 많이 썼습니다. 주인 내외와 맏아들 내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동안 모두 100지게를 져 나른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내와 며느리가 거름을 다섯 두둑에 뿌리고, 주인은 한쪽부터 보리를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쟁기질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섯 두둑씩 거름을 주고 보리를 뿌리고 쟁기질합니다. 그러는 사이 맏아들은 돌담 둘레에 검질(김)을 매고 쟁기질하지 못하는 부분을 괭이로 갑니다. 보리는 모두 3말을 뿌리는데, 2말 5되는 쟁기질 전에 뿌리고, 쟁기질 한 뒤 남은 5되를 다시 뿌립니다.
밭 모양은 아래 그림처럼 돌담을 두르고 사람만 드나들 수 있게 입구를 냈습니다. 이걸 세 ‘파니’ 또는 ‘칭’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배미를 뜻합니다.
쟁기질은 두뱃때기를 합니다. 한 이랑을 왔다갔다 두 번 가는 것을 말합니다. 소로 한 번 갈아 놓으면 맏아들은 흙을 덮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은 섬비를 가지고 합니다. 섬비는 뭍의 끙게와 같은 것입니다. 소나무 가지나 떨기나무를 모아서 묶고 무게를 더하기 위해 그 위에 돌을 얹어서 끌고 다니면 보리가 흙에 덮이는 도구입니다.


 
흙을 덮으려고 섬비를 끄는 맏아들(좌) 쟁기질, 쟁기질 간격은 30cm(우)
 

눌의 모습

흙을 덮고 나서는 아내와 며느리가 곰베(곰방메)를 들고 다니며 부서지지 않은 흙덩어리를 부숩니다. 이렇게 하여 보리 뿌리는 일을 끝냅니다. 아침 7시부터 점심을 30분 먹고 거의 4시가 다 되어 끝냈다고 합니다.
보리를 다 뿌리면 이제 관리에 들어갑니다. 뿌리고 나서 바로인 음력 11월 초부터 3월 17일까지 아내와 며느리가 달마다 초하룻날에 오줌을 열두 허벅을 줍니다. 허벅 하나에 1말 정도 들어간다고 하니 모두 12말쯤 됩니다. 식구 8명이 한 달에 오줌을 열두 허벅을 누기 때문에 거름이 모자라서 다른 보리밭에는 오줌을 웃거름으로 주지 못하고, 대신 풋베기콩을 밑거름으로 줄 뿐이라고 합니다. 허벅은 제주도만의 독특한 농기구인데 요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하니 관심이 있으면 가 보시기 바랍니다.
김매기는 음력 2월 20일에 애벌매기를 합니다. 음력 10월 말쯤 뿌렸으니 4개월 지나 처음으로 김을 맵니다. 주인, 아내, 맏아들 부부, 둘째 딸 이렇게 5명이 아침 10시부터 점심시간 포함해 7시간 걸려서 끝낸다고 합니다. 이때 보리는 9㎝ 안팎으로 자라 있습니다. 드디어 딸이 나온 걸 보면 역시 며느리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딸은 애지중지 길렀나 봅니다. 김매기는 한번으로 끝내고, 음력 4월 초에 밭에서 저절로 나는 메귀리를 주인 혼자 뽑는 정도만 합니다.
음력 4월 하순에 보리가 다 익으면 거두어들입니다. 앞에 말한 다섯이 아침 5시부터 시작해 점심에 한 시간 쉬고 오후 4시에 끝냅니다. 한 사람이 세 두둑을 맡아서 베고, 두둑마다 한 움큼씩 땅에 눕혀 놓습니다. 그걸 2~4일 동안 말린 다음, 주인 혼자 단을 묶는 데 하루 걸립니다. 단은 15~20움큼으로 한 단을 만들어 모두 320단이 됩니다. 그걸 주인과 맏아들이 소와 말에 싣고 한나절 걸려 집으로 나릅니다. 한 바리에 20단을 나를 수 있어 8번을 오가야지 다 나르고, 집에다가 눌(가리)을 쌓습니다.

조와 콩 뿌리기
다음으로 콩과 조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콩이나 풋베기콩은 쟁기질하기 전에 뿌리기 때문에 늘 알씨가 되고, 조는 늘 쟁기질하고 나서 뿌리기에 웃씨가 됩니다. 알씨(下種)와 웃씨(上種)는 제주도의 특이한 농사법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보통 밭벼, 보리, 쌀보리, 밀은 씨를 뿌릴 때 두 번 뿌립니다. 앞서 보리를 뿌릴 때 얘기했듯이 쟁기질하기 전에 씨의 약 2/3를 흩뿌리고 나서 쟁기질을 합니다. 이때 뿌리는 씨를 알씨라고 하지요. 그 다음 다시 나머지 1/3을 뿌리는데 이를 웃씨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나눠서 뿌리는지는 아직 찾지 못해서 더 알아봐야 하는데, 참 신기한 농법입니다.



소와 말을 끄는 맏아들


2004년 8월 밭밟기를 재연한 모습. 제주도 사투리로 이를 밧발림이라고 한다


아무튼 먼저 주인이 골체(삼태기)로 재를 나르면 아내가 골체에 담아다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씨는 주인이 뿌립니다. 망태에 씨를 담아 왼쪽 어깨에 걸고 오른손으로 씨를 뿌립니다. 그 사이 맏아들은 곰베로 흙덩어리를 부수고, 며느리와 둘째 딸은 호미로 김을 맵니다. 주인이 씨를 뿌리고 쟁기질한 뒤, 다시 웃씨(5되)를 뿌리고 섬비를 끌어서 흙을 덮은 다음 소와 말을 데리고 밟게 합니다. 맏아들이 소와 말 한 마리씩을 끌고 가고, 며느리와 둘째딸이 이를 따라가면서 밭을 밟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씨를 심지 않고 뿌리기 소를 앞에 놓고 말을 그 뒤에 놓습니다. 소와 말을 함께 끌 경우에는 늘 소를 앞에 놓고 말은 이를 뒤따르게 합니다. 소로만 하는 경우 또는 말로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밭을 밟는 데는 보통 대여섯 마리의 소와 말을 쓰는데, 한 집에서 그 정도로 많이 키우지 못하기에 품앗이를 합니다.

들깨 뿌린 곳

콩은 웃씨를 뿌린 다음 곧바로 흩뿌립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는 콩도 심지 않고 뿌립니다. 아마 새 피해가 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까치만 해도 1963년에 처음으로 제주도에 방사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또 콩에 섬비를 끌어 흙을 덮기 전에 돌담 둘레에는 들깨를 한 줄 뿌립니다. 곧 이 밭에서는 조와 콩, 들깨가 함께 자랄 것입니다.

이상으로 1930년대 말 제주도에 살던 김정용 씨의 농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제주도는 뭍과 다르게 참 특이한 모습이 많았습니다. 제주도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논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를 조사한 다른 부분에서는 논이 나오기도 하는데 논벼보다는 밭벼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쌀도 주식이라기보다는 내다 팔거나 제사 때 조금 쓰는 것이 다였다고 합니다. 지난번 텔레비전을 보니 제주도에서는 국수에 돼지고기를 넣어 먹는다고 하더군요. 이것도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는 관습에서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말이나 소는 놓아기르고 주로 돼지를 이용해 똥도 처리하고 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제주도에서는 잔칫날 돼지고기가 나오지 않으면 전라도 사람이 홍어를 먹지 못한 것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직 제주도를 다녀오지 못해서 다음해에는 직접 갔다올 생각입니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오신 분들도 다시 한 번 꼼꼼히 제주도를 체험해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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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카하시가 경기도부터 조사했지만 책은 전라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순서에 따라 전라도 조사 기록을 보고, 앞으로 남은 두 번 동안은 경상도와 충청도, 제주도의 조사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니 잡다한 말은 줄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순천 사는 황귀연 씨

먼저 다카하시가 1939년 2월 26일에 방문한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풍덕리(豊德里)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지금은 순천시 풍덕동이 되었습니다. 순천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합니다. 예전에는 논밭이었을 곳이 지금은 도심지가 되었지요. 그때 당시 이 마을은 모두 61호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농업은 47호(자작 10호, 자소작 10호, 소작 27호), 날품 파는 가구 13호와 담배 말리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물이 네 군데 있고, 소는 11마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입니다. 농사짓는 규모는 대농은 논 37~40마지기와 밭 5마지기 정도, 소농은 논 2~3마지기만 지었다고 합니다.
다카하시가 방문하여 조사한 농민은 32살의 황귀연(黃貴連)이라는 사람입니다. 부모님과 아이들, 동생들 모두 10여명이 함께 사는 대가족입니다. 그래도 일본에 가서 돈을 버는 동생도 있고 역무원을 하는 동생도 있어 그리 형편이 어려운 집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보시겠지만 대부분의 조사 농가는 어느 정도 사는 집들입니다. 조사하기 편한 점도 있을 테고, 그 지역 공무원들이 섭외하기도 좋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은 모두 아홉 군데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두 배미짜리 800평 논입니다. 이곳의 소작료는 6/10이고, 볏짚은 소작인이 갖는다고 합니다. 수확량은 1936년도에 '은방주'(銀坊主)로 나락 10섬, 1937년에는 나락 6섬을 했습니다. 은방주라는 품종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에서 1922년에 들여온 품종으로 까락이 없고 수확량이 많으며, 적당한 크기라서 잘 쓰러지지 않고 병에 강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랐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 都摸떡不이라는 품종을 흔히 토종으로 아시지만 이것도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입니다. 아무튼 이 논에 모내기할 때는 1평에 18~21㎝ 사이로 모두 86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뒷갈이로는 쌀보리를 하고, 왕골도 1평 심어서 소의 고삐 29m 정도 만들고, 풋거름 작물로 자운영도 5평 심었다고 합니다.
다음 남지종 앞밭이라는 곳입니다. 남지종은 뭔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자기한테 들리는 소리를 일본어로 적어놓아서 그걸 다시 우리말로 푸는 작업이 가장 힘듭니다. 사투리도 많고 처음 듣는 낱말도 많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 밭은 280평으로 집에서 1308m 떨어져 있는데, 소작료로 정조(定租)1)

1) 소작 계약 때 미리 일정한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뒤 분배하는 소작 관행. 일제시대 소작료는 보통 40~60%였는데, 세금만은 지주와 소작인 혼자서 또는 둘이 함께 부담했다. 소작인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거두어들이고 가공할 수 있었지만 소작료는 지주가 지정한 장소까지 기일 안에 날라다 놔야 했다.

 나락  한 섬을 낸다고 합니다. 가을에 쌀보리를 심어 거두고 나서는 그루갈이로 콩 140평, 사이짓기로 목화 140평을 심고, 가을에는 집에서 먹을 김장거리로 무와 배추를 조금 심습니다. 보리 사이짓기 목화는 가을에 보리를 골에 뿌려서 기르다가 목화를 심을 때가 되면 비어 있는 두둑에다 목화씨를 심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콩을 심었던 곳에는 다음해에는 목화를 심고, 목화를 심었던 곳에는 콩을 돌려가며 심는다고 합니다.

 

황귀연 씨의 논농사

이 사람이 농사짓던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중오종이라는 440평의 논에 벼를 기르는 방법입니다. 앞갈이 쌀보리를 음력 5월 5일에 거두고 그 다음날 쟁기질합니다. 쟁기질은 자기가 한나절 걸려 하는데, 삽과 쇠스랑 한개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쟁기질한 뒤에는 써립니다. 쟁기질하는 방법은 두그루짓기하는 땅일 경우에는 '바타갈이(batagari)'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타리갈이(tarigari)', '익갈이(ikkari)'라고도 합니다. 아래 그림처럼 보리 두둑을 부수는 갈이법입니다.


음력 4월 15일부터는 혼자서 이틀에 걸쳐 거름 20지게를 날랐습니다. 음력 5월 8~9일쯤에는 놉을 한 명 사서 1시간 반에 걸쳐 거름을 뿌리고 나서 물을 대고, 3시간 동안 써레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논을 준비하고는 음력 5월 13일쯤에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내기를 보통 음력 5월 8일부터 시작하여 5월 20일쯤에 끝낸다고 합니다. 모내기를 하려면 모를 쪄야 하는데 이 일에는 아내와 제수씨가 아침 먹기 전에 못자리에 나가 4시간 걸려 끝내놓으면, 자기와 동생이 논까지 2시간 반 걸려서 옮겨 놓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1시간 정도 걸려서 논두렁에 풀도 싹 깎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들 둘이 못줄을 띄고, 일꾼 한 사람이 더 붙어서  점심 때 50분 쉬고 오후 5시에 모내기를 끝냅니다. 모는 한 그루에 6~7포기를 꽂고, 1평에 18~24㎝ 사이로 64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김매기에 들어갑니다. 애벌매기는 모내고 15일째이니 음력 5월 28일쯤 혼자서 손으로 한나절에 끝냅니다. 두벌매기는 5일 뒤인 음력 6월  3일쯤 자신과 남자 놉 한 명이 오전 오후에 3시간씩 하고, 세벌매기는 그 일주일 뒤에 자기 혼자서 손으로 하루 반 걸려 합니다. 보통은 세벌매기를 하는데, 일찍 심은 집은 네벌까지 매는 경우도 있고 늦게 심은 집은 두벌매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음력 8월 5일에 이삭이 누렇게 되기 시작할 때쯤에는 피사리를 시작해 자기 혼자서 3시간에 걸쳐 모두 두 번 정도 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23일에는 벼를 거둡니다. 보통은 음력 8월 25일에서 음력 9월 10일 사이에 거둔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놉이 아침 먹고 나서 오후 4시까지 벼베기를 한 뒤, 그대로 땅에다 펼쳐서 말립니다. 3일 뒤에는 작은 단으로 묶는데, 이 일은 아내와 제수씨가 이틀에 걸쳐 묶어서 쌓아 놓습니다. 이 마을에서 볏단을 쌓는 방법은 위의 그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쌓아 놓은 볏단은 자기하고 맏아들이 지게로 집에 날라다 쌓습니다. 한 지게에는 15단을 지는데, 55㎏정도 입니다. 지난 해에는 1단에서 나락 1되 5홉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걸 마당에다가 쌓습니다. 그것을 ‘비늘가리’라고 하는데, 비늘처럼 쌓는다는 뜻입니다. 보통은 그냥 줄여서 ‘비늘’이라고 합니다.

3일 뒤에는 마당질합니다. 이때는 온 가족이 모두 나와 일합니다. 아내, 어머니, 동생, 제수씨, 역무원 동생, 둘째 제수씨 여섯이 저녁까지 나락을 떱니다. 키로 날려 고르기는 자신과 남자 놉 두 사람이 3시간 걸려 마칩니다. 그 결과 나락 3섬 7말 5되에 쭉정이 3말을 얻었습니다. 이걸 방아 찧으려면 방앗간에 가서 값을 치르고 합니다. 나락 1섬을 찧으면 흰쌀 4말 5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1되 2홉 5작을 냅니다. 그리고 왕겨는 3말, 쌀겨는 1말 정도 나옵니다. 나락 1섬의 값은 16원이고, 거름을 만드는 왕겨는 5말들이 1가마니에 4~6전, 소에게 먹이는 쌀겨는 1말에 10전입니다. 흰쌀은 1말에 3원 20전합니다.

 

남원 사는 박학규 씨

다음은 39년 10월 16일에 방문한 남원군 왕치면 식정리에 사는 68살의 박학규(朴鶴奎)씨의 밭농사를 조금만 보겠습니다. 이 집은 마을에서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암소 1마리에 닭 6마리를 키우고, 겨울에 가마니 120장을 쳐서 30원의 수입을 냅니다. 집은 150평에 구들을 놓은 방이 있는 건물 3채(1채 2칸, 1채 1칸, 1채는 곳간 외양간)가 있고, 마당은 멍석 6장쯤 깔 수 있는 20평 정도라고 합니다.

길고평이라는 719평의 밭은 5년 전에 군에서 알선하여 금융조합에서 싼 이자로 돈을 빌려서 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주로 보리를 심는데, 여기에 사이짓기로 목화를 기릅니다. 당시에는 목화가 지금의 고추처럼 환금작물이라서 많이 지었다고 합니다.
보리는 1.2m 하는 ‘왕골’을 만들어서 심습니다. 넓은 두둑을 만드는 이유는 앞에서처럼 골에 보리를 뿌리고 두둑에 목화를 심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둑과 골을 만들어 심는 일을 ‘작골’이라 하고, 골에 자라는 보리를 ‘골보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밭에는 보리를 6되 뿌리는데, 최고 수확량은 1섬 2말이었고 올해는 최저라서 5말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목화는 1말 5되를 뿌려서 지난해에 최고 210㎏을, 올해는 최저 90㎏을 땄습니다.

다음은 중고평이라는 341평 밭입니다. 이 밭은 자작하는 곳이고, 토질은 중등이라고 합니다. 20년 전에 60원에 샀는데 지금은 100원 정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반은 뽕나무 200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머지 반에는 감자를 조금 심고, 남새와 삼을 기르다가 가을에는 무 2/3, 배추 1/3을 심습니다. 삼은 올해 가뭄이 심해서 거친 삼 30단을 거뒀는데, 좋을 때는 45단까지 거둡니다. 삼은 1단에 45~50전 합니다. 삼 껍질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껍질 벗기는 데에는 품삯이 들지 않습니다. 삼베 1필을 짜는 데 보통 5~6단의 거친 삼이 든다고 합니다. 삼베 1필은 상등품은 10~15원, 중등품은 6~7원, 하등품은 4원 정도입니다.

마늘은 논두렁 등에 조금 심고, 고추는 배추 무 밭에 한 두둑을 심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은 집에서 먹을 것만 저마다 심고, 주로 곡물을 심었습니다.  돈이 되는 작물은 담배나 목화 등이었습니다. 논두렁에는 콩을 1되 심어서 7되를 거둬 콩나물을 만들어 먹습니다.

10월 17일에 묵었다는 보성관(寶城館)의 상차림을 보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도 보성역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백반을 시키면 받아볼 수 있는 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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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라는 일본 사람이 일제시대에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면서 조선 팔도를 발로 뛰며 취재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이 책은 현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이라는 사진집만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주도 편만 번역해 놓은 자료집이 있지만 완역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사는지, 땅값은 얼마이며 농산물이나 생활 용품은 얼마인지 하는 것까지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의 어마어마한 열정에 질려 정신병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제목을 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가장 알맞게 농사짓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법’입니다. 그와 함께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민’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소개하는 글을 통해 저절로 알수 있을 겁니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는 누구인가?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합니다. 후쿠오카는 특히 농법이 뛰어난 곳이라 하여 19세기 후반 일본 전체에 그것을 정리해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농학부를 택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서선은 서쪽 조선이라는 말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일본은 크게 북선(함경도, 강원도), 남선(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우리 나라를 구분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 통합하여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됩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 나서인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직접 쓰지는 못했고,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여 199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군데군데 엉성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에 온 첫 해부터 이러한 조사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것은 1937년 7월 6일에서 8일까지 경상도에 출장을 가면서입니다. 그나마도 이때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 / 9월 1일 이후 황해도 / 9월 6~7일 경상도 /
          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 / 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 / 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 /
          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 / 4월 30일~5월 6일 황해도  
          5월 20일~6월 3일 제주도 / 7월 2~8일 강원도  
          10월 12~13일 충청도 / 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 / 3월 4~9일 황해도  
          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 / 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와 같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정말 쉴 틈 없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일제에게 봉사한 일본인이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이런 엄청난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 사람보다 꼼꼼하게 우리의 옛 농사 방식을 조사하고 연구 정리해서 직접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가

조사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지나가며 본 논밭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는 조사하기에 앞서 미리 책이나 관련된 사람을 만나 조사한 내용입니다.
셋째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을 만나 이것저것 묻고 눈으로 본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주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 놓았는지 꼼꼼하게 조사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어느 지역이나 농기구와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세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농사짓는 방법과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조사했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논밭의 이름, 집에서 떨어진 거리, 논밭의 넓이, 심은 품종, 수확량, 그루갈이, 돌려짓기, 이어짓기, 저장하는 방법, 그루 사이의 간격, 심는 포기 수, 거름, 집터, 집 구조, 가족, 품앗이와 놉 같은 노동력, 품삯, 명절, 민속, 농기구, 역사 유적, 밥상 차림, 방아 찧는 방법, 마을에 대한 이야기 등 백과사전 같은 자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에는 농사만이 아니라 민속, 사회, 경제, 역사, 지역, 생활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 사람들의 농사짓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와 지금은 생활 방식은 물론 농사짓는 방식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쟁기질 같은 경우만 봐도 그때는 소나 말을 쓰거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경운기나 트랙터로 혼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름도 그때는 화학비료를 금비(金肥)라고 부르면서 영양제 식으로 주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 쓰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① 쟁기질 방법
먼저 쟁기질 방법입니다. 그때 쟁기질은 아시다시피 소나 말로 했습니다. 어떤 작물을 심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두둑을 지어 땅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 두둑짓기를 쟁기로 한거웃갈이하느냐 두거웃갈이하느냐에 따라 두둑의 크기도 달라지고, 그에 알맞은 작물도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어떤 작물을 심을지 먼저 결정하겠지만 그것을 결정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쟁기질입니다.
요즘은 로터리라고 하는 방식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거 참 "거시기"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반대되는 무경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거시기"입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서 적당한 쟁기질이야말로 농사를 시작하는 첫 단추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아저씨께 어쩌다가 소 쟁기질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방법을 어떻게 되살릴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옛 방식을 발전한 기술력으로 적절히 잘 활용한다면 전통을 현대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② 돌려짓기, 사이짓기 - 한정된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이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앞에서 말한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 하는 내용에 들어갑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 해가 시작할 때 올해는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럼 그해 재배할 작물 목록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한정된 밭에다 아기자기하게 심어서 가꿀지는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홑짓기 방식을 쓰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돌려짓기나 사이짓기 같은 방식은 경제적인 이유로 뒤로 밀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작물을 대량으로 한곳에다 계속 짓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러저러한 이유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겼습니다.
물론 그때 사람들도 지금 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과학기술은 없었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혜롭게 잘 농사지으며 먹고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요즘에도 지혜롭게 이용하면 힘은 들지언정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가운데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는 시간과 공간 활용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려짓기는 한 작물을 거둔 뒤 바로 쟁기질하고 새로운 작물을 심는 방법입니다. 사이짓기는 한 작물을 심고 그 작물을 거두기 전에 새로운 작물을 심어서 끊이지 않게 밭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이짓기의 "사이"는 시간 공간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를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앞그루와 뒷그루가 겹치지 않도록 때를 잡는 것과 공간을 배치하는 것, 두둑을 만들거나 사이갈이를 하는 쟁기질입니다.

③ 갈무리, 그밖에
이 자료에는 저장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경우는 움을 어떻게 얼마 정도로 파서 저장하는지, 씨앗은 어떻게 관리하고 보관하는지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농사와 관련된 볼 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벼농사의 경우 볍씨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못자리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논의 물대기는 언제 어떻게 하는지, 또 여러 작물들을 어떻게 수확해서 낱알을 떠는지, 그때 노동력은 얼마나 드는지, 벼, 보리, 밀은 어떻게 방아를 찧어 먹는지, 볼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식량기지였던 조선반도

조선 반도의 농법이라고 하여 모든 농사를 다 조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농사의 중심은 곡식류였고, 채소류 같은 것들은 집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텃밭에서 조금씩 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 근교 농업에서, 우리의 식생활이 바뀌면서 사랑받고 있는 여러 야채니 채소니 하는 것들을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이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 상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조사 내용에서 그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이었다는 점,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소작료, 집집마다 젊은 남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량 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염전을 메우고 바다를 간척하여 논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비록 식량 생산 기지가 되고 사람들은 힘겹게 살았지만, 흔히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농사꾼이라고 합니다. 그 말처럼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해도 농사꾼들은 자신이 농사짓는 방법을 쉽게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지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때도 화학비료를 쓰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그에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두엄이고 똥이고 재였습니다. 기계도 많지 않아서 탈곡기나 방앗간 정도만 있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농사일을 소나 농기구로 직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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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5)-화순 김규환 님
산을 가꾸는 산채원지기, 백아산에서 보물을 만들다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의 해발 300m에 자리 잡은 산채원을 다녀왔습니다. 해발은 높지만 따뜻해서 이 동네를 양지라 한다고 합니다. 집 앞에는 백아산이 우뚝 서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산채원에서는 200가지 이상의 산나물이며 산야초, 산양삼 등 산과 관련된 먹을거리를 보존, 보급하고 있습니다.

 

- 정말 좋은 곳인데,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셨나요?
= 결혼하기 전에는 잠시 가평에서 민박집을 하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는 사회생활을 했지요. 제가 담양 창평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7년 전쯤 창평으로 내려왔다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003년부터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사회에 필요한 농사를 짓자고 마음먹었죠. 가만히 생각하니 유기농은 기본이겠고, 무엇보다 종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지런히 전국으로 산나물 씨앗을 모으러 다녔습니다. 솔직히 산에 다니면서 뿌리도 캐오고 했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안 다녀서 숲이 너무 많이 찼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산나물은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상태에 가장 가깝게 보존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은 씨앗이 한 200여 가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 본격적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 2006년 11월입니다. 내려와서 창고 같은 집을 조금 손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집을 지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럼 귀농을 하신 셈이네요?
= 저는 귀농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이나 고향 사람들에게 귀농이라고 하면 꼭 실패한 사람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저는 귀농이라는 말보다는 귀향이라고 합니다.
제가 내려오면서 세운 원칙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처음 1년 동안에 초기 자본을 많이 투자하면 대부분 금방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첫째, 집을 짓지 않는다. 둘째, 처음 1년 동안은 땅을 사지 않는다. 셋째,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면 이자도 싸고, 돈을 끌어다 쓰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금방 망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만 1년째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조합원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분들은 돈도 싸게 빌릴 수 있고 하니 얼른 가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다들 농협에서 쉽게 돈을 끌어다 썼다가 힘들어 하더군요.

 

- 산채원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 제가 80년대 말 대학을 다니며 생활도서관 운동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보 관련 운동을 해서 정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그래서 FTA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농사가 무엇일지 2003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축산, 원예, 주곡 같이 여러 농사가 있지만 그 시대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승부를 걸면 답이 안 나와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산과 관련된 이 분야만이 FTA와 상관이 없더군요. 아직 그네들이 산은 모르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무한한 자원이 널려 있다는 걸 그네도 모르고 우리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산에 FTA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어릴 때부터 나물을 잘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 나물을 먹고 싶으면 소죽 쒀 놓고 호미나 칼 들고 나물 뜯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배웠죠. 지금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풀이나 나무가 모두 나물이고 약입니다. 옛말에 소가 먹는 건 다 나물이라고 했지요.

 

- 산채원을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 고향에 내려와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습니다. 마을에서 호응도 안 해주고, 배운 놈이 여기서 뭐하냐고 형과도 사이가 틀어질 정도였습니다. 계속 노력해야 하는 문제지요. 저는 영농조합법인 사람들에게 소비자가의 95%를 책임져 주려고 합니다. 나머지 5%는 영농조합법인 운영비로 쓰고요. 그 정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절대 안 따라옵니다.
요즘 농촌은 저희 마을도 마을 분들 몇 분과 함께 같이 뭘 하려고 해도 모두 노인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세 마을 합쳐서 150호가 넘었습니다. 저쪽 송단 1리는 조릿대가 많아서 예전에 국내의 복조리를 모두 만들던 곳입니다. 저도 어릴 때 무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다 합쳐서 20호가 안 됩니다. 그나마 독거노인이 많아서 사람은 27명쯤 됩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골짜기마다 있던 논밭이 다 묵었어요. 그래서 이곳 산골은 25~30년은 다 묵은 논밭입니다. 하지만 그게 자원입니다. 그런 땅은 비닐도 쓰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청정 지역입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강원도처럼 골프장이니 스키장도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망쳐 놓습니까.
여기는 겹겹이 산이 둘러 있는데, 바로 옆은 곡성이고, 이쪽으로 넘어가면 담양, 저쪽으로 넘어가면 순천입니다. 이곳이 그 중간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여기는 종이 다양합니다. 옛날부터 백아산에는 없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살아 있는 동네입니다. 특히 이곳이 고려삼의 시배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곳에 산양삼(山養蔘)을 많이 심었습니다. 예전에 장뇌삼이라고 아시지요. 그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이제 공식 명칭으로 산양삼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삼씨가 1kg에 150만원입니다. 이걸 지금 이곳에 5ha를 심어 놓았습니다. 내년에는 정부 보조를 좀 받아서 20ha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 산나물은 어떻게 기르시나요?
= 저는 웬만한 씨앗이나 나무는 다 산에 심습니다. 저희 집 뒤를 ‘가는골’이라고 합니다. 골짜기가 가늘게 길다고 가는골이지요. 길이가 한 1km 이상 될 겁니다. 지금 이곳을 정리해서 구석구석에 그동안 모은 산나물이며 산양삼을 잔뜩 심어 놓았습니다.
보통 밭에 산나물을 심으면 퇴비도 주고 어떻게 해봐야 금방 쇠서 뻣뻣해집니다. 하지만 이걸 산에 넣으면 베고 또 베고, 어떤 것은 5~7번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설을 하건 어떻게 하건 이런 곳보다 산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산에는 굳이 퇴비를 안 줘도 그 자체로 영양이 많아서 걱정 없습니다. 산흙 자체가 부엽토 아닙니까. 오히려 산에서 그걸 긁어다 밭에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요즘 왕겨나 톱밥으로 퇴비를 만드는데, 저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왕겨는 다 농약치고, 톱밥에는 윤활유가 섞여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을 심으려고 나무를 벨 때도 기계톱은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직접 하는 게 좋습니다. 진짜배기로 농사지어서 대통령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명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요.

 

- 경운 같은 것도 필요 없나요?
= 경운은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번만 갈아주면 그대로 심고 끝입니다. 대신 풀을 매야 하니까 호미질은 해야지요. 사람들은 경운해야 하니 트랙터를 사라고 하지만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산이 우거지지 않도록 관리도 해줘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손대지 않으면 산이 우거져서 나물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솎아베기를 해서 자연스레 해결합니다. 이제 산도 우리가 가꿔 줘야 합니다.
중요한 건 나물의 특성을 알고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춰 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딱주라고 하는 잔대는 양지쪽에서 잘 자라서 정상 부분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나물은 황토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물빠짐이 좋은 사질양토가 가장 좋습니다.
풀이 많아 어떻게 하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걱정 없습니다. 오히려 밭보다 관리하기가 더 쉽습니다. 밭 같은 경우 10번이고 20번이고 매려고 맘먹으면 매 줘야 합니다. 하지만 산은 1~2번만 매면 끝납니다. 그러니 면적이 넓어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골짜기가 500ha 정도 되는데 그걸 제가 다 일구려고 합니다. 또 재 넘어 관음사 들어가는 곳의 땅은 절땅입니다. 그곳이 450ha인데, 그곳도 임대하려고 합니다. 그곳은 지금 우리 법인하고 다른 법인하고 함께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계획을 세워 놨습니다.
또 정선 쪽에 사는 사람과 얘기해서 그곳에 산사랑 산채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기후에 차이가 있으니 여기는 빨리 나와서 빨리 사라지지만, 강원도 쪽은 이곳과 다른 때 나오지 않습니까. 또 장흥 쪽에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겨울에 산채가 먹고 싶으면 장흥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1년 내내 도시 소비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원칙은 제철 음식입니다. 제철이 아닌 때 억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시기가 다른 곳을 확보해 제철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산채원은 도시 사람들도 이걸 먹을 수 있도록 규모를 늘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농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 텃밭에 배추가 잘 자랐던데 비법이 있으십니까?
= 옛날에 농사짓던 방법을 따랐습니다. 옛날에 배추에 벌레가 끼면 불 때고 나온 재를 물에 섞어서 재운 다음, 위에 뜬 맑은 물을 배추에 줬습니다. 우리 배추에는 그래서 벌레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벌레가 다 갉아먹었어도 이슬이 내렸을 때 재를 가지고 가 살살 뿌려 주면 한 일주일 정도면 다시 살아납니다. 지금은 일본이나 유럽에서 다 들여오지만, 이렇게 세계에서 유기농을 가장 잘한 것이 우리나라였습니다.
저는 고추를 기를 때 비닐을 치지 않습니다. 비닐을 치면 처음에는 잘 크지요. 수분도 잡아 주고, 햇볕을 받으면 더 따뜻해서 금방 크고 수확도 많습니다. 문제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생깁니다. 꽉 막힌 상태이니까 온갖 병균이 그곳에 생깁니다. 그것 말고 저는 일체 화학제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원칙을 지키면 우리 옛맛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때죽나무 열매를 찧어서 물에 뿌립니다. 그럼 고기가 기절해서 둥둥 뜨지요. 그만큼 때죽나무는 좋은 살충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걸로 천연살충제를 만들어 보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초피, 인진쑥, 때죽나무 열매, 소주를 섞으면 괜찮은 농약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이런 걸 개인이 아니라 흙살림 같은 곳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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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이면 어디에선지 모르게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안개,  뿌연 안개를 걷어내며 펌프로 물을 퍼 올려 쥐가 �은 비누를 찾아 들고 얼굴을 씻는다.

6시 뉴스가 흘러나오는 아침상을 앞에 두면 새벽부터 논에 나가셨던 고무부가 돌아오시고, 어른이 수절 들길 기다렸다가 밤새 허기진 뱃속에 밥을 넣는다. 서둘러 책가방을 챙긴 뒤 자욱한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려 등교길에 나선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굴러 질퍽해진 황토길을 걸어 걸어 걸어가며 이대로 안개에 묻혀 하늘로 떠오르진 않을까 걸어가며, 배 만드는 공장을 지날 때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안개를 가르며 두둥실 나아간다. 마을의 논 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걷노라면 후투티 날아와 뽀뽀 뽀뽀 우지짖고, 논두렁에 선 나무전봇대에는 오색딱따구리 다다다다 벌레를 잡는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던 학교 생활,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왠 오줌이 그리도 마렵던지 노루 오줌보처럼 한시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화장실 앞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는 하늘소가 자리해 삐삐삐삑, 나를 놓아 달라는 듯 삐삐삐삑.

쉬는 시간이면 삼팔선에 돼지부랄, 탈출이며 비석치기, 나이먹기는 왜그리도 재밌던지. 함께 놀면 후줄근한 옷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땀흘리며 발발거리길 옷속에 들어간 모래알처럼 놀았다.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 땅따먹기, 이만기와 함께 한 씨름, 프로레슬링이 없던 시절부터 가재는 힘겨루기에 바쁘다.

 

그래도 학교를 가면 놀거리가 있고, 함께 즐기던 친구들이 있고, 도시락이 있었다. 그런 것도 없는 집. 텅 빈 집엔 덜렁 밥상 하나 놓여 있고, 밥통에서 밥을 퍼 허기를 달랜다.

이제 해지기 전까지 누구와 무얼하며 놀까 고민하던 때 뒷산 비밀 기지에서 보이지 않는 동료들과 첩보 활동을 벌이고, 땅속 개미들은 무엇을 하는지 구멍을 들쑤시고, 야구 선수가 찾아온 듯 논을 향해 돌멩이를 날린다. 그것도 모자라면 산으로 들로 오디, 으름, 버찌, 마, 칡이며 먹으러 다니고, 작대기 치켜 들고 똥개 메리를 좇아 다니며, 제비 새끼 밥 먹고 똥 싸는 걸 치우는 어미를 쳐다본다.

 

그래도 평일에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심심치 않게 보냈다.

주말이면 찾아오시던 아버지.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때 마음은 설레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마루에 걸린 시계의 붕알처럼 내 마음은 똑딱똑딱. 집안에 앉았어도 귀는 저만치 들길에 내다 붙인 듯하다. 혹시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혹시 아버지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아버지가 오시면 그날은 시계가 사라지는 하루, 하지만 다음날은 억장이 무너진다.

그럴 때면 아무도 몰래 뒷산에 오르거나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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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3)-장흥 이영동 선생
토종 작물 육종하는 재미,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는 전남 장흥군 용산면 쇠똥구리마을에 사는 이영동(56) 선생을 찾아뵙고 왔다. 선생께서는 약다산 자락에 자리한 농장에서 토종을 보존하는 일은 물론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단체도 이끌고, 쇠똥구리마을 추진위원장도 맡으며 바쁘게 살고 있다. “농민이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말을 몸소 실천해 여러 가지 실험과 도전을 하며 열성적으로 토종을 보존하여 토종농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 토종 종자를 얼마나 보존하고 있으신가요?
= 모두 22작물 60여 품종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씨를 보존하려고 하는 정도라서 조금씩밖에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보탬은 안 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죠. 옛날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것만 봐도 맛이 좋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존하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어떤 모임인가요?
= 어릴 때부터 보던 논둑, 밭둑의 풀들이 없어지는 걸 보면서 이걸 재배해서 자원으로 이용할 수 없을까 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회원은 모두 16명이지요. 요즘 삭막해져 가는 정서를 야생화로 순화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매년 전시회도 하고, 취미 삼아 그냥 합니다. 또 야생화는 다 약초가 됩니다. 이걸 재배하는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는 난대 식물부터 냉대 식물도 있습니다. 지역은 남쪽이지만 산이 800고지가 넘어서 그렇습니다. 야생화가 있다고 함부로 채취하지 않고 씨를 받아서 증식시킵니다.

 

- 보존하고 있는 토종 종자 가운데 특이한 것 좀 소개해 주세요?
= 먼저 적토미가 있습니다. 일본에도 붉은쌀이 있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고려 때 우리나라에서 적미가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벼는 알이 작은데, 너무 끈적거리는 찰벼라서 꼭 다른 것과 섞어서 먹어야 합니다. 또 키가 아주 커서 가슴까지 자라서 잘 쓰러져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비료로 재배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맛이 아주 좋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성남 농협과 결연해서 모두 팔았는데, 일본에서 홍미가 들어오면서 올해는 취소됐습니다. 홍미보다 맛이 더 좋지만 홍미가 싸게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이 외면했지요. 이 일을 겪으면서 소비자에게 값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맛과 질로 홍보해야 팔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다마금이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부터 심던 것인데 아마 일본에서 왔을 겁니다. 상남 밭벼는 찰벼인데, 옛날에 결혼하는 날 이걸로 주먹밥을 해서 줬습니다. 이 쌀로 주먹밥을 하면 며칠 뒤에도 굳지 않습니다. 녹토미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극만생종이라 빨리 심어도 이모작보다 늦게 서리 맞고 벱니다. 껍질을 까면 쌀이 푸른색이지요. 흑미도 있는데 이 흑미는 일반 흑미보다 알이 작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까만깨인 줄 압니다. 이것도 아주 맛이 좋습니다. 속까지 다 검진 않지만 도정해도 조금 검은빛이 납니다. 이것 말고도 벼는 모두 10여 가지가 있고, 새로 육종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밖에 보리와 밀이 1종씩 있고, 콩 종류는 10가지 이상 있습니다. 콩 중에는 제비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한약재로도 쓰고, 옛날에는 주로 콩나물로 많이 먹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내려오는 노란 옥수수, 단단하고 바람이 잘 안 드는 조선무, 잘 타고 올라가 수확량도 많은 울타리콩 등도 있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팥이 많이 들어오는데, 여기 있는 우리 것은 좀 어두운 붉은 색이지만 중국 팥은 선명하게 빨갛습니다. 제가 재배하는 토종 감자는 맛은 좋은데 좀 씁니다.
고추도 옛날부터 심던 것을 그대로 심습니다. 껍질이 얇아서 햇볕에 조금만 내놔도 잘 마릅니다. 먹으면 처음에는 사근사근하다가 나중에는 좀 매운 맛이 납니다. 이조는 어디서든 잘 크고 재배하기도 쉽습니다. 보통 조의 반 정도 크기밖에 안 합니다. 이건 방아를 안 찧고 그냥 먹을 수 있습니다. 토종 가지도 있는데 가지가 굵고 크지만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개량종은 지금 그냥 먹으면 맛이 없지만 이건 지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개량종에 비해 토종이 줄기도 굵고 잎도 더 큰 편입니다.

 

- 특이한 벼가 많은데 논농사는 어떻게 짓나요?
= 요즘 벼는 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거름도 별로 없을 때라서 산풀을 베다가 넣었습니다. 그건 땅을 실하게 하지요. 봄에 모내기 전에 넣기도 하고, 보리를 베기 전에 그냥 갖다 놨다가 보리를 베고 물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갈잎도 넣고 여러 풀도 넣었는데, 거기에는 무수한 성분이 들어있지요.
지금은 로터리로 위만 부드럽게 하는데, 그러면 밑에는 딱딱한 형성층이 생깁니다. 지금 논들은 조금만 파면 아래에 딱딱한 형성층이 있습니다. 이 층을 깨야 산소와 뿌리가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논의 구조를 보면 거대한 화분처럼 밑이 막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에다가 키 큰 벼를 심으면 다 쓰러져 버리죠. 그러니까 옛날처럼 깊이 쟁기질하고, 넓게 심으면 되겠지요. 토종은 토종 농법으로 해야 합니다. 형성층이 생기지 않게 깊이 쟁기질하면 뿌리가 깊게 뻗을 수 있습니다. 또 요즘은 지나치게 배게 심습니다. 그래서 통풍도 안 되고, 웃자라다 보니 쓰러짐에 약합니다.
제가 처음 트랙터를 배웠을 때인데, 솜씨가 서툴다보니 쟁기가 깊이 들어가 갈았습니다. 그러니 키가 커도 잘 쓰러지지 않고 수확도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솜씨가 좋아지면서 얕게 갈다보니 오히려 잘 쓰러지더군요. 그걸 보고 맛 좋고 질 좋은 토종 종자와 그에 알맞은 농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온 신품종 농작물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논밭 구조도 현 신품종에 맞게 쭉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우리나라 농민들까지도 다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품종이 다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신품종도 많이 있습니다. 교배를 하면 할수록 야생성은 없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민도 거기 있고, 여러분의 고민도 거기 있는 것 아닙니까?

 

- 토종이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 앞에서 말한 것 말고도 토종은 키가 커서 자라기만 하면 얼른 주위를 장악해서 제초하는 노력이 덜 듭니다. 크게 잘 자라니 풀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멀리 심어야 합니다. 개량호박이나 오이를 보면 넝쿨이 많이 안 뻗지만 조선 호박이나 오이는 엄청 뻗습니다. 또 토종은 씨가 많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 종자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 냉동고에 보관해보니 4~5년이면 잘 나지 않습니다. 나더라도 발아율이 엄청 떨어집니다. 저 같은 개인은 종자은행도 없으니 해마다 재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는 못하고 조금조금씩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마다 심습니다. 예전에 잠깐 다른 데 나갔다 왔는데 철을 놓쳐서 한 20여 종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잃어버리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운한지 모릅니다. 진짜 맘이 아픕니다. 어디 가서 씨앗 하나만 구하면 참 재미가 있어요.
논을 다닐 때도 특이하게 자란 것이 있으면 눈여겨보며 지나다닙니다. 이것저것 가져다가 육종하면서 제가 생각한대로 나오면 참 재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냐고 해도 저는 너무 재밌어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걸 욕심 같아서는 다른 것도 더 많이 하고 싶지만 여건상 힘들어서 참습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 농촌 현실이 어려워 지금은 빚 없는 집이 없습니다. 기회만 되면 땅이라도 팔아서 빚 갚으려고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심은 어디 가고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농심이 변했지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토종이 아직은 현실에 맞지 않지만 이제부터는 슬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맛을 우선시하는데 토종의 맛은 신품종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저도 친구 따라서 서울에 갔지만 6개월 살고 내려와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옥수수, 고구마 맛 때문인 것 같아요.
토종 농작물은 우리 조상들과 함께 해온 식물이고,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아온 작물입니다. 그중에 희로애락도 있을 것이고, 많은 토종 농작물에 대한 사연도 있고, 문화도 농심도 있습니다. 몇 천 몇 백 년 내려온 씨앗들이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농사도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수확을 많게 개발하다 보니까 맛은 없어져 버리고, 땅은 땅대로 버렸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옛날 맛과 땅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종 농작물의 장점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 땅에 알맞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야생성이 강하고 원종에 가깝기 때문에 병충해에 강하고 어느 토양이나 기후에도 적응성이 강해서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필요 없습니다. 또 키가 크고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잡초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신품종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맛은 토종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단점은 현실 농업에 맞지 않습니다. 키가 크기 때문에 쓰러짐에 약합니다. 또 수확량이 적습니다. 수확량이 적고 현실 농업에 맞지 않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토종 농작물은 미래의 농업 유전자원으로 보존되어야 하고, 재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덧붙여 자연의 문제는 자연을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튼 흙살림에서 이런 운동을 한다니 정말 반갑고, 더운 날씨에 이곳 먼 구석까지 찾아 준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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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횡성 송래준 선생

 

“말로는 소용없어요. 직접 몸으로 깨우쳐야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강원도 횡성군 어답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토종왕국’의 송래준(84) 선생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서 토종종자를 가구며 보급하고 지금은 산을 일궈 나무와 산나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미래를 내다보며 정력적으로 농사지으며 살고 계십니다.


- 지난번 자운 스님을 통해 선생님께서 토종 종자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시나요?

= 지금 농촌 현실이 아주 어렵습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농협에 평균 4~5천만 원 정도 부채가 있지 않을까 해요. 사정이 어려워서 땅을 내놓고 싶어도 노 대통령이 거래를 막아서 팔려고 내놓아도 거래가 없어요. 이제 농촌에서 쌀이나 고추 농사지어서 빚을 탕감하기 힘들어요. 나는 그래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구멍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그런 것을 종종 자문해 주고 하지요.

지금 토종은 내가 나눠 준 곳이 전국에 100여 농가에서 그 이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라남북도부터 경상남북도까지 다 줬어요. 원래는 여기 밭이 다 곡식으로 꽉 찰 정도였지요. 지금은 다 나눠주고 나는 그걸 안 합니다. 내가 보급한 종자가 이미 나한테는 끝이 난 겁니다. 이제 그건 내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난 새로운 것을 찾아서 보급해야지요. 나는 항상 내가 안 하던 거, 새로운 거를 연구합니다.

내가 내일 죽더라도 몸을 움직여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내가 부지런만 떨면 열 명이 먹고 살 수 있는데 게을리 있을 수 없지요.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있어요. 여기에 연구소를 하나 만들려고 해요. 토종부터 산채까지 모든 것을 연구하는 거지요. 자연에서 나서 자연에서 큰 것을 가지고 사람이 식생하는 방법이며 모든 것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혼자 앉아 있으면 못할 일도 너댓만 앉아 있으면 호랑이 데리고 못된 놈들 다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면 못할 일이 없어요.


- 지금은 농사짓지 않으신다면 산나물 같은 것은 채집하시는 건가요?

= 아니지요, 농사를 짓습니다. 그걸 나는 산에다가 하는 거지요. 왜 농사지으면서 누구는 비료를 넣고, 누구는 퇴비를 넣고 그러잖아요. 나는 산에서 부엽토로 하면 돈분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산에다 장뇌삼도 하는데, 확실히 사람 손을 덜 탄 것이 맛이 달라요.

지금 산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30여 가지입니다. 엄나무, 오갈피, 오미자, 더덕, 헛개나무, 당귀, 산작약 같은 것이 있지요.


- 장뇌삼을 재배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가요?

=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합니다. 장뇌삼 씨를 바위 밑에도 뿌리고 나무 밑에도 뿌리고, 수분 있는 데에도 뿌리고 건조한 데에도 뿌려 봅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심어 놓고 관찰하는 거지요. 그래서 특별나게 잘 나는 곳에는 집중적으로 심고, 그런 곳이 아니면 그냥 더덕을 심던지 하지요. 더 자세한 것은 여기서 말로 설명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여기 저기 심어보고 1년 뒤에 뽑아서 살펴보고 잘되는 곳에다만 합니다. 덮어놓고 아무 데나 막 심으면 안돼요. 그렇게 하다가는 앞서 가는 사람한테 항상 떨어져요. 남보다 앞서는 것을 만드는 것이 농민이 할 일입니다.


- 여기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사신 건가요?

= 내가 열서너 살에 조실부모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요. 여기서 농사지은 것으로 누가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합니다.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애들이 빨리 개학해서 급식을 타 먹으면 좋겠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그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열 사람은 굶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여기서 농사지으며 산 지가 19년째입니다. 그전에는 남도 속여 먹기도 하고, 참 나쁜 짓도 많이 했지요.


- 입구에 벌통이 많던데 통마다 돌을 쌓아서 막아 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처음에 벌을 조금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게 늘어나서 지금은 한 250개 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벌을 키워 보니 그래요. 벌 한 통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돌을 쌓아 주며 애를 쓰니, 지들도 그걸 아는지 잘 자라요. 처음에는 그렇게 돌을 쌓아 준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바람도 막고 편안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디다. 또 이걸 저기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여기는 뭐 특별한 것이 있나 하면서 옵니다. 그렇게 와서 꿀도 많이들 사갑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그걸 보면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나무를 파서 옛날 재래통을 더 만들고, 위에는 짚으로 지붕을 씌우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대충 설계만 하는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제대로 들으려면 2주는 있어야 해요.


- 아까 산에 30여 가지를 한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소득이 되는 것이 있나요?

= 소득이란 것은 이렇습니다. 30여 가지를 하면 어디선 손해를 보는 때도 있고, 어디선 이득을 보는 때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요. 아무리 못하더라도 열이면 열 식구가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한 가지만 밀고 나가면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한 가지만 하면 안 되고 수십 종류를 하면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이런 곳에서 어디 기대지 않고 열심히 살면 올바른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살지요.


- 이제 토종 곡식은 가지고 계신 것이 하나도 없나요?

= 자주 감자가 있어요. 이건 내가 하동에서 장에 가니 하나에 200원에 쪄서 팔아요. 그걸 사서 먹어보니 팍신팍신한 것이 참 맛있어요. 그래서 이걸 5천원어치 샀어요. 올해 이걸로 농사지으면 내년에는 열 가구가 심을 수 있을 겁니다. 감자는 눈이 하나인 것만 골라서 하나를 서너 개로 잘라서 심고, 눈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건 파 버립니다.

다른 인상적인 것은 없어요. 이미 다 내 손에서 떠났어요. 나는 옛날 선조가 하던 건 무조건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존할 때는 절대 비료를 주던 곳에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런 곳이면 최소한 3~4년은 묵혀야 합니다. 비료, 농약기가 있으면 헛고생만 하는 겁니다.

토종은 산에서 3년만 지나면 토종이 됩니다. 나는 산에다가 퇴비도 안 주고 그대로 심어요. 이런저런 실험을 해서 작년에는 고추도 산에 심고, 그전에는 콩도 심어보고 이것저것 심어 봤습니다. 올해는 더덕을 한 자짜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한번은 산에 상자를 가져다가 박아 놓고 거기에 감자를 심으니 아주 좋아요. 그건 비가 와도 쓸려 내려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관리하기도 편하고.


- 하동이면 여기보다 남쪽인데 거기서 가져온 감자가 여기와 기후가 맞을까요?

= 기후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나는 장날 다니다가 특별한 것만 보이면 사다가 심어 봅니다.


- 산나물 가운데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으신가요?

= 열 손가락 가운데 버릴 것이 하나 없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로가 균형을 맞춥니다. 전체가 다 남으면 팔자 고치지요. 여러 가지를 하는 게 좋습니다. 나는 할 수 있으면 많은 면적에 다양하게 심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땅에는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가지 심을 수 있지요.

어떤 분이 나한테 취 씨를 보내주셨는데, 올해 이걸 심어서 3년 뒤에는 취 밭을 만들 겁니다. 이걸 3자 간격으로 심으면 3년이면 취 밭이 됩니다. 산에 가서 풀이 없는 곳에 뿌려 놓으면 2년이 지나면 씨가 앉아서 그게 떨어져 저절로 자랍니다. 그럼 밭이 되는 거지요.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남의 집 일하고 쌀 한 말 받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먼저 차가 있냐고 물어봐요. 돈은 얼마냐 6시 땡 치면 차로 집에 데려다 줄 수 있느냐. 그만큼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지요.

또 낙엽을 긁어내고 거기 더덕 씨를 넣어요. 이것도 3자 간격으로 또 낙엽을 긁어내고 심습니다. 그럼 낙엽을 모아 놓은 곳에도 더덕이 자라서 더덕 밭이 됩니다. 오히려 낙엽을 긁어모아 놓은 곳이 그것이 썩으면서 거름이 되어 더 잘되지요.

지난번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질경이 좀 없냐고 찾아서 내가 좋은 놈만 가져다가 쭉 심어 놨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거기는 아예 질경이 밭이 될 겁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 부모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식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자리를 잡으니 큰며느리가 아버님은 몇 십 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합디다. 자기들이 나를 챙겨야 하는데 거꾸로 내가 자식들 노후 대책을 만들어 줬다고요.

나는 어디에서 강의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합니다. 대신 경험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하지요. 강의는 교수님이나 전문가가 하는 것이고, 나는 내가 경험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책도 소용없고 내 말도 소용없어요. 직접 자기가 몸으로 해서 깨우쳐야 합니다. 말로 하면 없는 떡도 만들어서 전체가 먹고 살 수 있게요. 그러니까 직접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덮어 놓고 말로 벌을 이렇게 하쇼, 농사를 이렇게 하쇼 하는 건 다 소용없어요.

그동안 미친놈 소리도 들으며 참 외롭게 살았지요. 여러분처럼 주변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겁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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