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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

 

 

눈물일랑 거두오

서러운 마음은 사랑으로 품으오

침통한 얼굴일랑 관두오

그대신 미소를 보내주오

 

그냥 빈손으로 찾으오

지고 가야 무거울 짐이오

모든 건 내가 주겠오

그대신 자리에 앉아주오

 

서로 술잔을 나누오

그게 싫으면 이야기를 나누오

나 돌아가는 날

한바탕 잔치를 열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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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 값 안 들지, 맛 좋지, 값 좋지, 토종보다 좋은게 있남”

전통농업에서 배우자(36)-영양, 청송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서 농사짓고 있는 이유복 선생님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칠성리의 김일락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이유복 선생님은 모두 1만5,000평 밭 가운데 5,000평에 귀족서리태라는 토종 콩을 2년째 심으셨다고 합니다. 이 콩은 맛이나 수확량에서 모두 뛰어난 품종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십니다. 김일락 선생님 댁에서는 칠성초(붕어초)라는 토종 고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껍질이 두껍고 색이 고우며 맛이 으뜸인 고추라고 합니다. 


지난 2005년 7월 강원도 평창을 시작으로 전국에 걸쳐 토종을 지키고 계신 분들을 발굴하는 구술취재가 드디어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관심 있게 지켜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귀족서리태(청송 이유복 선생님)




- 귀족서리태가 무엇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귀족서리태는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보통 서리태와 달리 알이 굵고 납작한 편입니다. 중요한 특징은 하얀 점이 있다는 겁니다. 옛날 어른들께서도 하얀 점이 있는 콩을 맛있다고 했습니다. 이 콩도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아, 한 번 맛보면 다른 콩은 못 먹습니다. 그만큼 이 콩이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부를 해도 맛있고, 장을 만들어도 맛있고, 저는 일 년 열두 달 이 콩을 넣어 밥을 지어 먹습니다. 밥을 해서 한 입 넣으면, 입안에 구수하면서 단맛이 확 퍼집니다.
그리고 특히 귀족서리태는 익어도 탈립이 거의 안 됩니다. 노루나 산돼지가 문대면 모를까, 그냥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리태치고는 수확량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저도 30년 넘게 농사지으며 좋다는 콩은 다 구해서 심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수지가 맞지 않아 포기하려다가 농민신문에서 이 콩을 보았습니다. 전화해서 강원도 어디에서 구해다 지금 2년째 심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앞으로는 수확량이 떨어져서 토종이 다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 기르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 보통은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심습니다. 이곳은 그런데,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니 그거에 따라 심어야겠지요. 이번에는 다른 농사일로 바빠서 조금 늦었습니다. 저는 하우스에서 포트 한 구멍에 2알씩 넣어 모종을 키웁니다. 그럼 손가락만큼 커서 본잎이 4잎 정도일 때 옮겨 심는데, 올해는 늦어서 꽤 큰 다음 심었습니다. 모종을 내지 않으면 비둘기 때문에 하나도 건질 수 없습니다.
이 밭은 6월 28일에 심은 것인데, 심으면서도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심어도 이렇게 잘 됐습니다. 제가 보니 숙기가 다른 것보다 한 보름 빠릅니다. 그래서 후작에도 가능하단 것이지요. 감자나 옥수수를 심어서 거둔 다음 이걸 심어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농가 소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 심는 간격은 어떻게 합니까?
= 두둑은 관리기로 짓는데, 너무 높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서 메주콩보다 더 벌리고, 한 구멍에 두 개씩 해서 엇갈려 심습니다.
이 자리는 지난해 고추를 심었던 곳이라 거름이 많아 따로 거름을 넣지는 않았습니다. 해마다 이렇게 고추와 콩을 번갈아 심습니다.


그림 콩을 베고 난 자리를 손으로 잼

 

- 서리태는 덩굴이 무성하던데 순지르기는 언제 하시나요?
= 콩을 늦게 심으면 순을 치면 안 됩니다. 특히 올해는 콩이 자랄 때 이틀 건너 한 번씩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꽃이 달려 있는 기간이 그만큼 짧았으니까,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 콩은 암만 놔둬도 이쯤 크고는 더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덩굴도 지지 않습니다. 만약 제때 심어 순을 치더라도 많이 치면 안 됩니다. 한 1/3 정도만 쳐야 합니다. 무성하지 않으면 아예 치지 말거나, 넘어지지 않을 정도만 쳐주는 게 좋습니다.


- 5,000평이면 수확량이 얼마나 나오나요?
= 올해는 농사일이 바빠서 잎이 떨어지기 전에 거두어야 하는데 좀 늦었습니다. 또 노린재 방제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보통 1,000평에 100~150㎏쯤 수확합니다. 이렇게 다수확 품종이라, 노린재 같은 피해를 어느 정도 입어도 다른 콩보다는 수확이 많습니다.
탈곡은 그냥 탈곡기로 거둡니다. 종자로 쓸 것도 따로 도리깨로 떨거나 하지 않고, 그냥 이걸 그대로 씁니다. 그래도 발아율이 떨어진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저는 올해는 소독도 하지 않고 그냥 심었습니다.
콩은 낫으로 베어 습기를 막으려고 밑에 비닐을 깔고 낟가리를 쌓습니다. 처음에 단을 묶을 때 반씩 엇갈려 묶은 다음, 그냥 막 쌓아 놓습니다. 그리고 위에 갑바 하나만 덮어두면, 그대로 뒀다가 아무 때나 떨고 싶을 때 떨면 됩니다.





칠성초(영양 김일락 선생님)




- 아직도 칠성초를 기르신다고 하던데요?
= 여기에서는 칠성초를 붕어초라고도 하고, 배불래기라고도 합니다. 이 고추는 가죽이 두껍고, 근량도 많이 납니다. 또 고춧가루를 내서 김치를 하면 시간이 지나도 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특히 키가 많이 큽니다. 지금 40년째 심고 있는데, 옛날에는 그리 안 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키가 커요. 병에 약한 편이라 죽어 버리면 손해가 커서 많이는 못합니다. 또 어수리 나물도 많이 하고, 다른 농사일도 바빠 고추에만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많이 하지는 못하고 1,000평쯤 짓습니다.


- 40년이라면 원래 칠성초가 이곳에서 계속 심던 것인가요?
= 친정에서도 하긴 했는데, 잘은 몰라도 충청도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원래 칠성초가 이렇게 크진 않았습니다. 시커멓게 좀 뭉툭하고 두툼한 편이었어요. 이 고장에는 수비초를 심었는데, 그것과 함께 심다 보니 둘이 조금씩 섞였습니다. 인물 좋은 걸 골라서 계속 심다 보니까 이렇게 인물이 좋아졌습니다.
수비초는 맛은 좋은데, 길고 쭈글쭈글한 게 인물이 별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물 좋은 것만 찾다 보니, 집에서 먹을 것만 조금하다가 이제는 말았습니다.


- 칠성초의 특성이나 주의할 점은 어떤 건가요?
= 이 고추는 물빠짐이 중요해서 배얄진 곳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키가 커서 줄도 4~5번 쳐줘야 합니다. 수비초만큼 큽니다. 동네에 어떤 분은 하우스에 이 고추를 키우면서 위에 오이망 같은 걸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주는 보통 4포기에 하나씩 꽂습니다. 키가 별로 안 크면 5포기에 하나를 꽂을 때도 있습니다.
또 봄에 비가 자주 오면 수북하게 잘 자라 키가 별로 안 크는데, 가물면 메아리가 많이 빠지면서 자꾸 키가 큽니다. 곁순이 나도 다른 농사일이 바쁘니까 칠 여유도 없어요.
고추가 달리기 시작하면 한 번 따서 이제 없지 싶은데, 조금 지나면 또 늘어져라 달립니다. 그렇게 잘하면 800평에 1200~1300근 정도 합니다. 따는 건 1년에 보통 5번쯤 땁니다. 다른 새로운 품종은 첫물에 30개 정도 따는데, 이건 첫물에 4~5개 땁니다. 위로 키가 크려고 힘을 쓰다 보니 밑에 것이 빠져버리는 것 같아요.
수확한 고추는 맛이 좋고 해서 팔 때 다른 것보다 값이 더 낫습니다. 꼭지 부분은 매워 못 먹을 정도인데, 전체적으로는 단맛이 납니다. 샛거리(풋고추)를 찍어 먹으면 엄청 맛있습니다. 물김치를 담그면 벌겋게 불어 나와 벌건 게 퉁퉁하니 보기가 참 좋습니다.
양건은 잘되는 편인데, 양건하려면 일주일 동안은 음지에 뒀다가 말려야 합니다. 그런데 딸 때 일이 바쁘니까 까만 거 말고 벌건 것까지 따서 희나리가 옵니다.
종자 값 안 들지, 맛을 아는 사람들이 맛있다고 찾지, 값 좋지 여러모로 괜찮습니다. 옛날에는 일본으로도 많이 갔습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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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농사 짓던 나라에서는 왕을 바랐다.

그때는 강력한 사람이 온 나라를 쥐고 흔드는 것이 곧 편한 삶이었다.

괜히 장사꾼이 끼어들면 괜히 사람들이 농사는 안 짓고 딴 데 정신이 팔렸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농사꾼보다는 장사꾼이 더 나은 시대다.

그만큼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대통령도 다르다.

 

옛날에는 그래도 농사 짓던 풍습이 남아서 그것과 가까운 사람이 통했다.

그리고 사람들도 왠만하면 봉건적인 사람, 봉건 전제적인 사람을 원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이끌고, 우리를 이끌어야 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나한테, 특히 우리한테 밉보이면 그대로 끝이다.

옛날처럼 그 사람을 건드리리 수도 없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그 시절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참 슬퍼한다.

 

지금 이회창 밑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하지만 시대는 그런 사람들을 쳐다 보지도 않는다.

혹시 멀리 내다보려고 생각했다면 이회창 아저씨 밑에 있는 사람들은 포기해야지.

바보들... 시대를 보지 못한 꼴통 보수들...

 

지금 한나라당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뭐랄까... 복잡하다.

이건 뭐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재밌게 볼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꼴통 보수는 아니다.

되려 이회창 �문에 도움을 받았다.

더군다나 이 모호한 성격... 최고다.

정치는 모호함이다.

뚜렷하게 드러내면 그 순간 생명을 잃는다.

웃기지. 사람 사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좀비처럼 구나보다.

 

참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지.

이제는 상업 국가다.

상업 국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흐흐... 그렇게 사는 것이지.

그래서 이제 명분이나 명예, 도리, 도덕은 필요없다.

사는 데 쓸모 없는 모든 것은 부질 없을 뿐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뿅 가는 것은...

그저 누가 더 내 욕구를 만족시켜주는가 하는 날카로운 아니 뭐랄까 거시기다.

제길...

술 마시자.

그럴수록 더 마시고 마셔,

사회가 나아가는 곳과 비례하여 술을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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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꽁꽁 얼었던 시내가,

간질간질 꿈틀꿈틀 뒹구는 소리.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도 꼭 그렇다.

봄볕에 얼음 녹듯이,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내 맘이 녹는다.

 

아~! 봄은 사랑의 계절이런가.

새들의 지저귐도,

꽃망울의 부끄럼도,

여린 싹들의 몸부림도,

모두들 사랑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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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기, 최옥금, 김재성, 양재동, 권수정, 최성숙 6인이
동서울 터미널을 출발하여 수안보에서 시골농부님과 만나 지프로 석장골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도 보고 길 찾기했다간 분명 저 깊은 산골에서 길을 잃고 엉엉 울었을 겁니다.
인적도 없고 가는 길이 꼬불꼬불 산 속입니다. 게다가 갈래길도 있습니다.

도착해 보니, 이것이 집인가, 싶더군요.
그래도 석기 군은 제 사는 집이라고 방문 열고 향 피우고 주인 왔노라 신고식을 치릅니다.
금세 어두워진 골짜기에서 초를 켜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낯설은 살림을 뒤져 고기 구울 준비를 합니다.
이럴 때의 삼겹살은 먹을 것으로서보다 여러 사람이 무언가 주섬주섬 일을
하게 만든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 일행에게 새로운 얼굴은 시골농부님 한 분뿐인데
수안보 터미널에서 수인사하실 때부터 친근한 인상이시더니
풍성한 농사 이력으로 이야기를 세 보따리쯤 풀어 놓으셨습니다.
물론 양해동 님께서 구수하게 추임새를 곁들이셨음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시겠지요.

별 보며 술 먹다 방이 뜨끈하니 들어가서 마시기로 했지요.
안주도 삼겹살에서 오징어로 술도 막걸리에서 매실주로 바뀌었습니다.
(매실 효소에 소주를 탄 칵테일, 맛 좋습니다!)
어두컴컴한, 초배지 바른 방이 참 아늑합니다.
방 아랫목은 절절 끓고 술꾼들의 목청도 높아집니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침, 방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어제 낯설어 제대로 보지 못한 석장골 호텔 화장실도 가보고,
산골이라 늦게 솟는 해님에게 평소에 잊었던 고마움도 새삼 느끼며
시골농부 님 차에 짐을 맡기고 수안보로 걸어나옵니다.
시골농부 님은 다음 행선지로 차를 모시고, 나머지 일행은 온천으로 향합니다.
모처럼 온 온천이니 온탕 냉탕 맥반석탕 골고루 들어가보고 노곤해진 몸으로 차에 오릅니다.
문용성 님, 연락 끝에 접속 실패, 일행은 중국집에서 다시 배불리 먹고 헤어졌습니다.
(모두 신발끈 매느라 정신없는(?) 틈에 양해동 님께서 계산하셨습니다. 감사!!)

***
출발 전에 동서울터미널로 나와 주신 석민, 정희 님 넘 감사하구요.
(고구마 꿀칡차 넘 맛있게 먹었어요! )
시골농부 님께서 궤짝으로 가져오신 배는 한 이삼일은 먹을 것 같네요.
덕분에 석장골 잘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흠, 시월의 마지막 밤은 정작 이제부터네요. 이용의 쓸쓸한 밤은 묻어 두고
석장골의 휘영청한 달밤을 떠올리렵니다.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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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앓은 날

 

 

서른이 넘기 전엔 몰랐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앞만 보고 달리면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질주하고 때로는 폭주하며

팽팽히 당긴 시위에 매긴 살처럼

돌아볼 것도 쉴 곳도 없이 내쏘았다.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심한 몸앓이 끝에 일어난 날.

불현듯 죽음이 고만큼 더 가까워졌음을 보았다.

늘어나는 흰머리에도 별 느낌 없더니

몸살 한 번에 인생을 반이나 살았다고 깨달았다.

어느새 나에겐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과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사라졌다.

대신 어느덧 손을 맞잡고 함께 걷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맞춰 발걸음은 느려졌고, 어깨는 좀 무거워졌다.


우린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

언제 죽음이 다가오는지, 아니면 지금도 함께 하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순간과 찰나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할 뿐,

그러나 아무도 최선을 다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대의 숨결을 느끼며 서로 발걸음 맞춰 그곳으로 걸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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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배.

전날 집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차도 오래 타야 하고, 거기에 배까지 타야 하니 ... 귀 밑에 붙이는 멀미약이라도 사서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타 보니 별 거 아니었다.  

한 40분쯤 걸리는데다가 파도도 심하지 않아 정말 편안하게 건너갔다.

이거 섬 같지도 않잖아. 다음에는 제주도나 울릉도 아니면 일본까지 도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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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서 완도항을 보았다.

항구를 보면 늘 이런 곳에 생길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완도항도 꼭 그런 느낌이다.

사진을 찍는데 안철환 선생님이 오셔서 그대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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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외양간거름. 그대로 퍼담아서 가져왔으면 좋겠다. 

석종욱 선생님께서 깔짚으로는 산의 유기물 다음으로 좋다고 하신 갈대를 쓴다.

거름 문제 때문인지 소를 키우는 곳이 참 많다.

경운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까지 도맡아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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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뒷간.

차마 문까지 열어보지는 않았다.

이동범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부춧돌 뒷간일까?

문의 반대편에는 재와 버무린 똥이 쌓여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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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완식 박사님께서 토종을 얻어오신 청산도의 아주머니. 성함까지 알려주셨는데 까먹었다.

이 집에서 까만 강낭콩, 까만 동부, 녹두, 벼, 홍화 등을 얻고, 내 주머니에도 조금씩 챙겼다. 

이걸로 늘리고 늘려서 먹어보고 괜찮으면 또 심어야지.

여기서 얻어 마신 송화주와 홍화주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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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부엌. 상서마을은 90가구가 살다가 이제는 30가구로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군데군데 빈집이 많이 보였다. 이 집도 빈집이다.

그런데 이 마을의 부엌은 그리 깊지 않다. 겨울에도 따뜻한 남쪽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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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을 성심성의껏 이끌며 설명해주신 청산도 상서마을 청년회장님. 지금은 마늘을 설명하시는 모습.

전날 밤의 피로가 쌓여 모두들 피곤하신 듯 ... 일정이 빡빡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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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논두렁. 거의 직각으로 돌을 쌓았다.

참말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이 섬의 사람들 옛날에는 성벽을 쌓는 데 부역을 나가야 하지는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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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의 주아柱芽. 기둥에서 나오는 싹이란다.

꼭 엄마 옆구리 뚫고 나왔다는 싯달타 같다.

마늘쫑으로 올라오는 놈은 보았어도, 이런 놈은 또 처음이다.

이놈을 갖다 심으면 하나의 통마늘이 되고, 그걸 또 심으면 쪽쪽이 갈라진단다.

참 많은 걸 배운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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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핵심은 바로 배수로다.

사진은 동굴이나 무덤이 아닌 배수로를 쌓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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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배수로 모습. 위에 보이는 사진의 입구로 조금 기어들어가서 찍었다.

꼭 아궁이에서 바라본 모습과 비슷하다. 그래서 구들장논인가 보구나.

얕은 겉흙 밑으로는 모두 돌. 물이라도 많이 빠르게 들이치면 그나마 있는 흙도 쓸려 내려갈 판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런 구들장논이란다.

먹고 사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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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농의 한영미 선생님. 혼자 보리밭을 즐기시는 모습을 찰칵.

앞으로도 우리 씨앗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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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하시는 청산도 어머니들.

찍지 말라고 하실 줄 알고, 그 소리 하시기 전에 얼른 찍었다.

덕분에 괜찮은 사진이 나왔다. 주소를 알면 보내드리면 좋겠구만.

사람들 나온 사진 뽑아서 "상서마을 청년회장 앞"으로 보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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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옆에서 본 애벌레. 너희는 자라서 무엇이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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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연예인이 작년 한 대선후보의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라는 말을 유행시켰습니다. 그런데 행복과 살림살이는 어떤 관계일까요.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진정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과거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행복해질거라 믿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는 나아졌습니다. 기술의 혜택으로 물질적인 풍요는 엄청난 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은 또 그 자식인 우리들은 과연 행복합니까?


  지금도 우리는 '못 살겠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열심히 살아도 모자를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되었지만 행복하기는커녕 비극적인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로가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문제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죽고 죽이는 역사였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나의 경쟁상대였고 내가 극복하고 이겨야만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이렇게 나와 남을 가로고 구분 짓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지금 우리는 나와 남을 가르고 구분 짓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이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무수히 많은 타인과 함께 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장해보면 세상 만물이 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금 이곳에 내가 있을 수 있을까요? 물이 없다면 공기가 없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물과 공기를 만들어내는 나무와 풀 같은 자연이 없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세상 만물이 있기에 거기에 의지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돈, 명예, 출세, 사랑보다도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무엇일까요? 목숨,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 명예, 출세, 사랑도 다 나의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숨 쉬는 행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먹는 것에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 안 어딘가에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의미의 생명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명이란 가치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 만물에 의지해서만 있을 수 있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의지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만 빠지더라도 나의 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코와 입을 막고 10분만 있으면 나의 생명은 죽습니다. 만약 생명이라는 가치가 내 몸 안 어느 곳에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숨을 쉬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요?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다른 모든 것들에 의지하였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나와 남을 가르고 나와 자연을 가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았기에 우리는 이기적인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과는 180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지금의 세상은 전쟁, 환경파괴, 오염, 자원고갈, 식량부족 등의 문제로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이 곧 내 생명이라는 세계관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활은 곧 다른 것들을 죽이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위한다면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뿌리부터 바꾸는 전환이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지금 우리는 동반자살로 가는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한 길은 귀농 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보낸 저에게 농사일은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농사를 얼마나 잘 짓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듯이 또 다른 내 생명인 이웃과 자연을 아끼고 보살핀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면 안 됩니다. 서울은 지금 파괴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사람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농부가 먹거리를 제공해주고 시골의 자연이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마실 물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서울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 마당에 서울이라는 도시는 점차 다른 지역을 파괴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 이외의 지역은 사람조차 살지 않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서울을 떠나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 살더라도 나의 생명이 다른 것에 의지해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자각한다면 다른 지역의 사람과 또한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들어가 내가 사는 마을을, 지역을 살리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또한, 내 생명처럼 다른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자 농사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은 파괴의 도시고 악이기 때문에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모두 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내 생명이기에 모두가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이외의 모두가 나와는 아무 상관없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 하겠습니다. 또 한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꿈이나 이상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국 곳곳에는 이런 생각으로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씨앗들이 뿌려져 있습니다. 저는 직접 그 희망을 보고 왔습니다. 그 길에 희망은 꼭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빠른 때'인 것처럼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찾기 위한 길은 제가 사는 모습과 다른 많은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서로 서로가 의지해 있기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전환 없이 더불어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나누며 사는 고마움, 그 길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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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울음소리, 음메~.

소를 아는가?

인류의 동반자.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서 도움을 요청해 함께 살았던 짐승.

그만큼 인간과 가까워 여러 문명에서 함께 했던 짐승.

그 짐승이 이제는 돈이다.

고깃덩어리로 팔리는 신세.

고깃덩어리를 키우고자 사료를 먹이고,

사람이 보기에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그 결과 남는 것은 고깃덩이로 바꾸는 돈.

 

솔직히 소는 이제 고깃덩어리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누가 소의 숨소리, 몸짓, 눈망울을 기억하는가?

이제 고깃집에 가서 돈을 주고 시킨 소고기나 먹거나,

아니면 마트에 가서 소고기를 구경하고 사거나,

어떤 사료를 먹여야 마블링이 지느냐.

아무튼 이러한 생각으로 소를 바라볼 것이다.

 

선언하자. 이제 소는 먹을거리다!

그것도 값비싼 고급 먹을거리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음 소가 나오는 기록은 이렇다.

삼국사기 지증 마립간 3년(502)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소로 밭을 갈게 한 기록이 보인다.

 

아무튼 소로 밭을 갈면서 엄청나게 생산력이 높아졌다.

농사를 짓겠다고 몸을 놀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가 소의 힘을 당할 수 있는가?

경운기나 트렉터 같은 기계뿐, 절대로 사람은 소의 힘을 당할 수 없다.

당한다면 사람 몇 명이 모여야 가능하다.

그거 참 우습고, 비참하고, 경이롭다.

 

하지만 이제 소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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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관寶城館에 가다


1939년 10월 18일. 하늘은 가을답게 높고 푸르다. 다카하시 노보루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8시 반쯤 보성관을 나서 농가 조사에 나섰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42호 맨 끝머리에 보성관이란 조선인 여관의 상차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난해 7월 중순 수소문 끝에 직접 보성관에 다녀올 기회를 얻어 실제로 눈앞에 보성관을 맞닥뜨리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눈은 물론 땀구멍 하나하나에 건물의 숨결이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림 1) 아직도 벌교읍에 가면 볼 수 있는 보성관. ?��태백산맥?��의 유명세에 덩달아 남도여관이 되었다. 이 건물이 있는 거리, 옛 본정통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이 거리를 중심으로 나왔다.

현재 보성관은 소설 ?��태백산맥?��의 후광을 입어,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 가운데, 빨치산 토벌대가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이 기억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바로 그 주요 무대가 보성관이다. 우리네와 함께 숨을 쉬며 사람들의 피땀이 고스란히 밴 그 건물은,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놓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제도를 만들어 참 다행이다. 그동안 개발이란 이름으로 쓰러져 간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제 보성관은 여관으로는 쓰지 않는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간판을 내렸기 때문이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참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다. 학교 정화 구역이란 법도 그런 영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 험한 파도를 헤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모든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올해도 큰 파도가 밀려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1월 중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농촌진흥청을 폐지하고 민간으로 위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물론 민영화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민간에 넘길 것은 넘기고, 정부에서는 그 관리와 감독 등에 더 힘쓰는 것이 좋은 분야도 있다. 하지만 나라의 뿌리가 되는 것들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요즘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농업을 포기하겠다는 상징이어서 몹시 씁쓸하다. 농업과 관련된 단체나 개인 말고 농촌진흥청 폐지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제 우리 시대는 농업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이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무튼 현재 건물의 1층은 가게들과 살림집으로 쓰고, 사진에서 보이는 2층은 텅 비어 있다. 1층에는 방이 모두 10개이고, 지금은 비어 있는 2층에는 큰 다다미방이 4개가 있다. 이 정도 규모였으니,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이 여관에서 묵으며 벌교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건물은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다 2층을 올렸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이 분께서 1979년에 이 건물을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살아남았다.


그림 2) 건물 마당은 일본식 정원이다. 저 방 어디에선가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묵었을 것이다.


벌교읍 회정리廻亭里의 박응렬朴應烈 씨


그는 회정리에 사는 박응렬이란 분을 찾아간다. 그곳에 가려면 지금은 부용교라고 부르는 ‘소화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소화 6년)에 놓았다고 그렇게 불렀다. 원래 다리에는 난간이 없어서, 한창 빨치산을 토벌할 때 다리에 무릎 꿇린 다음 그대로 처형하면 바로 강바닥에 떨어져 강물이 시뻘겋게 되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만요.” 물론 이 일은 다카하시 노보루 씨와는 크게 상관없는 훨씬 이후의 일이다.


박응렬 씨의 식구는 모두 8명이었다. 본인(40), 아내(35), 어머니(60), 학교 다니는 맏아들(15), 둘째아들(10), 셋째아들(7)과 4살·3살짜리. 소도 1마리 있고 닭은 10마리라고 하니, 웬만큼 살았을 것이다. 논은 1마지기에 250평인데 모두 15마지기를 짓고, 밭은 800평 있다. 거기에 대숲 900평을 관리한다.

이렇게 조사하던 1939년에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가뭄이 있었다. 그 까닭은 지나치게 발달한 북태평양고기압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 내내 뙤약볕만 내리쬘 뿐 비 한 톨 내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1년 평균 강수량이 보통 1250㎜ 정도 되는데, 그때는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적은 양인 754㎜의 비만 왔다. 이 때문에 박응렬 씨도 올해는 모내기를 아예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조사 내용은 자연히 지난해의 것으로 채웠다. 그 내용 가운데 뒷갈이로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자. 이곳은 남도답게 한 논에서 두그루부치기를 할 수 있다. 보리를 심는 곳은 정확히 나오지 않는데, 기록의 행간으로 유추하면 아마도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8배미 200평짜리 땅의 일부에 심는 것 같다.



뒷갈이 보리 기르기


먼저 벼를 거둔 다음 20일 뒤에 자신이 쟁기질을 한다. 싹갈이를 하는데, 저녁까지 끝낸다. 싹갈이는 두둑을 짓거나 하지 않고 밭 전체를 그냥 다 갈아엎는 방법이다. 지난해에는 벼를 9월 말에 거뒀으니, 아마 10월 중순쯤 싹갈이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5일 뒤에 써레질을 한다. 논 써레와는 달리 그림처럼 소나무로 짠 것이다. 이걸 소에 달고 다니며 땅을 고르게 만든다. 써레질은 오전 한나절에 끝내고, 오후에는 땅을 말려 그 다음날(11월 10일쯤) 두둑을 짓고 보리씨를 뿌린다.

그림 3) 소나무로 짠 써레

보리를 심는 날에는 자신이 소를 부려 두둑을 짓고, 그밖에 아내와 머슴, 남자 일꾼 4명과 여자 일꾼 3명이 함께 일한다. 이 마을에서는 머슴에게 1년에 나락 3섬과 두세 벌의 옷을 주는데, 50원 정도 된다. 그리고 놉의 품삯은 남자 80전(밥 없이), 여자 50전이다.

가장 먼저 물 빠짐 고랑을 낸다. 논의 둘레와 한가운데를 소로 2번 갈아서 24㎝(8寸) 너비의 고랑을 낸 뒤, 삽으로 고랑을 다듬는다. 이 일에 자기와 소, 놉 1명이 한나절 걸린다. 다음으로 씨를 뿌릴 골을 탄다. 먼저 쟁기로 2번 갈아서 대충 골을 타고, 그 다음 쇠스랑이나 괭이로 골을 깔끔하게 친다. 이 일은 자기 혼자 한나절 걸린다. 골을 탄 뒤에는 따로 써레질을 하지 않는다. 쟁기질 할 수 없는 논의 양쪽 끝부분은 괭이로 골을 탄다. 그런 다음 그 다음날 보리씨를 뿌린다. 씨를 뿌리는 날에는 소를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씨를 다 뿌리고 난 뒤에는 둘레의 물 빠짐 고랑을 가장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다듬는다.

그림 4 점선이 물 빠짐 고랑

두둑 너비는 45㎝(1尺5寸)이고, 쌀보리인 죽하종竹下種이란 이름의 보리를 1말 5되 심는다.

씨뿌리기는 자기 혼자 바가지에 담아 두둑 위로 걸어가면서 고랑에 손으로 뿌린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보리씨 한 움큼으로 1.8m(1間)를 심는다. 보리는 18㎝(6寸) 너비에, 간격은 3㎝(1寸) 정도 되게 뿌린다. 이를 보아 점뿌림이나 줄뿌림이 아니라 흩뿌림에 가깝다. 그 뒤를 따라 1명이 소쿠리에 유조硫曹 8호라는 화학비료(1가마니 3원, 37.5㎏<10貫>)를 담아 보리씨 위에 뿌린다. 다시 그 뒤에 남자 3명이 소쿠리에 똥재를 담아 한 번에 12m(5尋)씩 15지게 분량을 준다. 거름을 다 준 다음에는 남녀가 함께 쇠스랑이나 괭이로 흙을 덮고, 따로 밟아 주지는 않는다. 특히 이듬해 여기에 목화를 사이짓기하려고 한다면, 보리 두둑의 너비를 81~84㎝(2尺7~8寸)로 넓게 만든다. 이렇듯 작부 체계에 따라서 쟁기질이나 두둑을 짓는 방법부터 씨를 심는 방법까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농사는 봄에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씨뿌리기를 마치고 10일 뒤에는 처음으로 웃거름을 준다. 이때 사람 오줌을 15장군 주는데. 장군 하나 분량으로 90m(50間)를 줄 수 있다. 원래 오줌만 4장군인데, 여기에 개숫물을 섞어 15장군을 만들었다. 오줌을 줄 때는 그림과 같은 ‘구뎅이’라는 것을 쓴다. 대부분 나무로 만드는데, 오지그릇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이건 당시 1개에 80전이고, 1년에 수선비로 20전을 들여 3~4년을 썼다. 구뎅이 5개가 장군 1개의 양과 맞먹는다. 박응렬 씨의 식구 8명이 오줌을 누면 4일에 1장군을 채운다. 그래서 오줌 4장군이 되는 보름마다, 15장군으로 만들어 웃거름을 준다. 이렇게 음력 정월 전에 다섯 번쯤 웃거름을 준다.

다음으로 웃거름을 줄 때는 음력 3월 초쯤인데, 이때는 배합비료를 장군 1개에 5홉 정도 넣고 물에 섞어서 준다. 이 무렵 보리는 9~12㎝(3~4寸) 정도 자라, 3포기쯤 새끼를 쳤다. 배합비료 1가마니로는 50장군 정도 웃거름을 만들 수 있다.


그림 4) 다른 말로 구댕이, 구대동이, 귀때동이라고도 한다. 주로 논밭에 져다 놓은 오줌이나 똥, 재 같은 거름을 거름통에서 덜어 여기저기 뿌리는 데 쓴다. 한쪽에 귀때를 붙여 액체를 따르는 데 편리하다.

김매기는 음력 정월까지는 따로 하지 않고, 두 번째 웃거름을 주기 20일 전에 애벌매기를 한다. 여자 6~7명과 자신이 하루에 끝낸다. 그때 나오는 풀의 양은 10지게인데, 이 풀들은 모두 두엄을 만들려고 집으로 나른다. 품삯은 여자 1명에 하루 20전과 두 끼를 준다. 호미는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알아서 가지고 온다. 다음으로 보리가 15㎝(5寸) 정도로 자라면 두벌매기를 한다.

그뒤 음력 3월 말(양력 5월 상순)이면 이삭이 팬다. 그러고 음력 5월에 보리를 거둔다. 자신과 머슴 1명, 놉 남자 1명이 하루 걸려 다 베고, 그 뒤 3일 동안 말린 다음 자신과 머슴이 지게로 20지게를 져서 집으로 나른다. 집으로 나른 그날 탈곡기(打麥機)로 마당질을 끝낸다. 탈곡기를 빌리는 값은 보리 1가마니(5말들이)를 떠는 데 보리 2되이다. 이걸로 하루 30가마니 정도는 떨 수 있다. 이렇게 마당질하여 보리는 1섬 5말, 보릿짚은 5지게가 얻었다. 보리는 1섬에 30원, 보릿짚은 1지게에 10전 정도 한다.



벌교를 떠나며


지금까지 벌교의 보성관과 그곳에 살던 박응렬 씨의 농사를 들여다보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말은 참 살기 힘든 때였다. 밖으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사회는 전시체제로 들어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머나먼 간도로 떠나 힘겹게 새로 땅을 일구었다. 그렇다고 남은 사람들도 편하게 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 반도를 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정된 식량 생산으로 제국에 충성하고자 했을지, 아니면 조선인들이 불쌍하다고 여겼을지, 솔직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08년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를 짚어 볼 뿐이다. 끝으로 유승규 씨가 1957년에 쓴 ?��빈농?��에 나오는 보리 탈곡기와 관련한 이야기로 마치고자 한다.


“아버지 저희 생각 같아서는 타맥기 사 놓으신다는 거 구만두시넌 게 좋을 것 같어유.”

삼형제 중에서 중학교라도 다닌 가운데 정현이가 형제간의 의사를 대표해서 말하자, “이놈들아 네놈들이 뭘 안다구 얘기여. 애비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바 …… 너희들은 농촌 기계화돼 가는 것을 통 모르는 얘기구나. 벌써 딴 동네서는 몇 년 전부터 보리타작하는데 도리깨나 자리개질을 안 한단 말여.…. 다 너희들 편하게 살라고 사 놓자넌 게다. 그라구 건넌말 송서방, 양지말 박서방들은 벌써 작년 저작년부터 타맥기를 사놔서 상당히 수지를 맞춰 사는데, 그래 우리 한가들이 그자들한테 뒤져서야 되겠냔 말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구 선각을 해서, 과감하게 박력있게 밀고 나가야지. 농공병진 시대여던 에헴.”

“허지만 우리 형편으론 불가능하단 말에요. 그네들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기계화를 하지만 남의 빚을 얻어 한다는 것은 거 아무래도.”

… 중략 …. 그렇게 큰소리 삥삥 쳐가며 고집부려 사들인 타맥기 운영이 어찌 되었느냔 말이다. 결국 2년간 건넌말 송씨네와 양지말 박씨네 세 집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보았지만,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냐. 보리 한 가마 타맥해 주는 데 한 말씩 받던 삯을 아홉 되, 여덟 되, 일곱 되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결국 송씨 박씨네는 닷 되씩을 받고, 타작을 해 주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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