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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동광원


저희는 ‘전통농법에서 배우자.’ 라는 취지로 취재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는 무척 넓어 보이는데 지금 농사짓는 평수가 얼마나 되나요?

처음에는 저 위하고 여기하고 8천 평 됐어요. 그러다 저 위 4천 평은 나라 땅이라고 해서 다 나무 심어서 돌려주고, 몇 년 전에 1500평 팔고 지금은 한 3000평 될라나.


아직 토종종자가 많이 있나요?

-옛날에는 다 있었는데 지금은 힘에 부쳐서 많이 못 가지고 있어요.


지난 번 이곳에서 우엉을 얻었는데 토종인가요?

-아니요. 그건 사다 했지요. 옛날 우엉은 참 맛있었는데, 잎도 먹으면 맛있어요, 먹는 뿌리가 색깔이 새카매요. 속은 별로 안 검은데 겉이 까맣고, 키도 더 작아요. 지금 심는 건 샀어요. 전에는 자꾸 받아서 했는데 지금은 씨를 못 받아요. 그래서 씨를 잊어버리고. 그런데 보리, 밀은 씨나 안 잊어버리려고 조금씩 심어요. 점점 힘에 부쳐서 하지를 못해요.

옛날에는 씨앗가게를 가도 태백이라는 토종무가 있었어요. 무씨도 옛날에는 우리가 다 받아서 심었지. 무를 가을에 추수해서 대가리를 잘라서 묻어두면 싹이 나잖아요. 그걸 봄에 다시 통째로 밭에다 심으면 무장다리가 나와요. 거기서 꼬투리가 맺으면 그걸 비벼서 심어먹어요. 그렇게 받아서 쓰다가 80년도부터는 그냥 사다가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봉지를 보니까 전부 이태리 어디서 오고, 내가 기막혀 죽겠네. 이제 씨앗까지 남의 나라 것을 쓰니 우리나라 토종은 다 없어지네. 그런데 그 무를 심어서 김치를 담아 먹어보니 맛이 없어요.


총각무도 씨를 받으셨나요?

-총각무는 내가 안 해봤는데, 아마 총각무도 무니까 그렇게 받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배추씨도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요.


배추는 어떻게 하나요?

-배추씨는 옛날에 내가 전라도에 많이 살았는데, 겨우살이를 놔두면 봄에 꽃이 피잖아요. 전라도는 따뜻해서 안 죽으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죠.


고추는 어떻게 농사지으셨나요?

-고추는 재래종 씨를 내 받아서 심다가 아마 80년대부터는 안 한 것 같아. 씨를 받아서 그냥 밭에다 뿌리면 한 달 만에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고추씨가 맵잖아. 땅에 들어가서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그렇게 직파해서 먹고 살았어요.


직파를 언제 하셨나요?

-고추씨는 한 3월말 경에 한 것 같아요. 얼음 녹고 싹이 나도 안 죽을 만하면 뿌렸어요.


직파할 때 수확량은 얼마나 됐나요?

-몇 백 평 심으면 그때 여기에 한 4~50명이 살았는데 그 식구가 다 먹고 살았죠. 지금하고 비교하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직파할 때 어떤 식으로 뿌리나요?

-밭에다 할 때 고랑치고 뿌렸죠. 뿌렸다가 배면 솎아야지. 그때는 간격이 지금처럼 드물게 안 하고 한 뼘 정도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작게 기르면 지주는 안 해도 괜찮아요. 어쩌다 쓰러지면 산에서 막가지 해다가 해줘요. 요즘은 일만 많아지고 공이 얼마나 많이 들어요.


고추에 병은 없었나요?

-네, 직파할 때는 병을 몰랐어요. 연작해도 병을 몰랐어요.


그럼 그때 배추도 병이 없었나요?

-배추가 하도 커서 한 포기 뽑아 저울에 달면 3Kg에요. 그때는 병도 없고, 벌레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벌레 때문에 못해요. 우리 배추가 지금 엉망이에요. 커피찌꺼기가 좋다고 해서 해보니 조금 효과는 있대요.


고추를 직파할 때 거름을 지금처럼 많이 줬나요?

-퇴비만 했죠. 옛날에는 돈이 없으니까 비료도 못 사고 순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거름을 만들었어요. 7~8월 되면 풀을 베어서, 식구가 많으니까 지게로 져다가, 작두로 두 치 정도로 썰어서, 인분 받아서, 재면 퇴비가 아주 시커멓게 잘 되죠. 일주일에 한 번, 많이 뒤집으면 일주일에 한 네 번씩 퇴비를 뒤집어요. 그러면 아주 거름이 몽글몽글해요. 어쩌다가 비료를 좀 구하면 약이라고 조금씩 줬는데, 지금은 유기농한다고 아무것도 안 써요.


산에서 어떤 풀을 해오나요?

-갈잎이나 풀은 무슨 풀이든지 다 베지. 저런 논둑, 밭도 다 베요. 요즘 같은 때는 잘잘하게 썰어야 완숙퇴비가 되죠. 그럼 몽글몽글해서 헛칠 정도예요. 인분이 적으면 물을 뿌리고, 몇 번 뒤집어서 새카맣게 썩으면 쟁여놨다가 가을추수하고 보리 갈 때 써요. 그렇게 해두면 내년 봄에 고추, 감자 심을 때도 전부 쓰죠.


퇴비는 그냥 노지에 만드셨나요?

-옛날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냥 노지에다 했지요.

그리고 논거름도 갈잎으로 했어요. 4월에 갈잎이 부드럽게 나오잖아요. 옛날에는 나무가 크지 않았어요. 그럼 봄에 못자리 해놓고는 갈잎을 갖다가 논에 깔아요. 그래가지고 쟁기질 한 번 해놨다가 심으려고 할 때 쟁기질해서 써레질 한 다음 심어요. 논 거름은 그것만 했는데 그게 무척 걸어서 그것만 해도 잘 돼요.


지금은 거름을 사다가 쓰시나요?

-지금도 만들어서 써요.

작년에 저기 만들어 놓았는데 마늘 심을 것까지는 있어요. 마늘 심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약 뿌리고 비료 주는데, 마늘은 비료주면 보관할 때 잘 썩어요. 우리 마늘은 내년까지 먹어도 안 썩어요. 우리는 마늘밭에 퇴비를 땅이 안 보이게 두둑하게 깔고 갈아서 마늘을 심는데 마늘이 단단해요.

마늘도 재래종이에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육쪽마늘이라고 쭉 심어요.


지금 농사짓는 것 중에서 채종하는 씨앗은 얼마나 되나요?

-이제는 별로 없어요. 보리, 밀은 씨앗 보존한다고 해서 문경에 좀 보냈어요.

밭벼도 오래 됐는데, 60년도에 농촌지도소 작물계장이 귀한 씨라고 심어보라고 요만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계속 심어서 내려왔어요. 이게 찰벼인데, 아무리 다른 데서 찰벼를 가져와도 그렇게 찰지지 않아요. 그걸 안 잃어버리려고 올해도 좀 심었어요.

그러고 들깨도 쭉 심고 조, 수수도 그런데, 기장만 내가 잃어버렸어요. 지난 98년에 수해가 나서 전부 떠내려갔어요. 창고가 여기 크게 있었는데 홀랑 가버렸어요.


콩 종류는 없나요?

-콩은 옛날에 옥광을 많이 심었는데, 그것도 지도소에서 갖다 줘서 심었어요. 옥광을 계속 심다가 어디 가고 지금은 어디서 들어오는 걸 심어요.

그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벌레도 잘 안 먹고 잘 됐어요. 옛날에는 콩을 25가마니를 했는데 콩이 얼마나 좋은지 벌레 먹은 것도 없어요. 요즘도 콩은 받아서 하는데 그게 재래종인지는 몰라요.


그럼 콩은 몇 종류나 되나요?

-지금은 힘들어서 다 없애고 메주콩만 해요. 그런데 벌레가 얼마나 먹는지 몰라. 작년에도 한 2가마니 나왔는데 겨우 서 말만 메주해서 장 담갔죠.

옛날에는 콩나물콩, 서리태 같은 것도 다 심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메주콩만 간장, 된장은 먹어야 하니까 해요.


쟁기질은 어떻게 하셨나요?

-소 기르기 전에는 손으로 하다가, 한 60년도부터 93년도까지는 소로 했어요. 저 위에 4천평, 아래도 4천평을 다 손으로 파다가 소를 기르고 나서는 남반들이 와서 쟁기질을 했어요.


지금은 그냥 기계로 하시나요?

-90년도부터는 남원에서 불러다 쟁기질을 하다가 식구들도 점점 줄고, 일도 힘이 없으니 못해서 자꾸 부르려니 번거로워서 끊고, 그냥 풀밭에서 야채만 길러서 심어먹자고 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말 농장을 하게 되면서 관리기 작은 걸 하나 샀어요.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다 갈아주죠.


소쟁기와 관리기를 비교하면 농사짓기가 어떤가요?

-쟁기질 할 때는 힘든데, 관리기로 하니까 일하기는 쉽죠. 그래도 쟁기질을 할 때가 더 좋기는 한 것 같아요. 관리기는 대신 곱게 되니까 심기는 수월해요.


탈곡은 다 손으로 하시나요?

-손으로 할 것은 손으로 하고, 밭벼는 탈곡기계가 있어요. 옛날에는 발로 돌렸는데 지금은  발로 하던 거에 모터를 달았어요.


여기서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올 해로 만 48년이네요. 여기서 처음에는 초대 원장님하고 기관 어머님하고, 산속에 셋이 들어가서 풀막을 지어놓고 살았어요.


동광원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왜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나요?

-수도정신을 가지려면 첫째, 자기가 자립정신을 가져야 해요. 자기 먹을 것, 입을 것을 남한테 미루지 말고 자기가 해야죠. 종교는 희생의 종교잖아요. 자기희생이 없이는 이렇게 살 수가 없어요. 또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라고 했는데, 일평생을 살아도 힘들어요.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고, 남을 섬기라고 했는데 인간이라 그러지를 못하고 살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현필 선생님이, 당신이 못 먹고 못 입어도 다른 사람은 먹게 하셨어요. 그런 선생님 밑에서 살았는데 사람이 못 되서 부끄럽죠. 그런 정신으로 이곳을 세웠어요. 가난하고 남만 사랑하고 남을 위해서 사셨어요.

농사는 자립정신을 세워주시려고 하신 거죠. 선생님은 항상 씨앗 하나라도 아끼고, 연장을 쓰고 아무데나 던지는 건 자기를 던지는 것하고 같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농사지으면서 다 던지고 다니는데 그런 것부터 정리를 해야 돼요. 그런 걸 내 몸같이 아끼는 정신이 작은 것부터 실천을 해야 해요. 작은 걸 실천하기가 더 어려워요. 그런 걸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산다는 것이 보통 정신이 아니에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칠십 다섯이요. 옛날 같으면 저 세상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실 것은 없나요?

-글쎄요. 사람이 전통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정신이 똑바로 서야 해요. 식물도 사랑으로 가꿔야지 그냥 하면 뭐가 됩니까. 못 지어도 꾸준하게 사랑으로 가꿔야지.

우리 선생님이 농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땅 한 평이라도 내가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해야지, 뭐든 내가 못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나아요.




안산 부곡동


‘전통농업에서 배우자’고 해서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옛날 농사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농사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먼저 채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채종을 하기는 했는데, 그랬다고 해서 집에서 다 종자를 받은 건 아니야. 더러 사서 하는 경우도 있고, 김장 같은 건 받는 사람만 받고 대부분 사서 해요.

무하고 배추는 씨를 받으려면 가을에 심은 것을 뿌리 채로 놔둬. 배추 같은 경우는 바싹 끊지 말고 잎만 따. 어느 정도 순이 남도록 해야 싹이 나니까. 그럼 위는 먹고 나머지 뿌리는 땅에 박힌 채로 놔뒀다가 보온을 해줘. 짚 같은 걸 덮어서 얼지 않게 해놨다가 봄에 날이 따뜻해지면 벗겨줘요. 그럼 제일 먼저 움이 나와.


짚 대신 요즘 쓰는 비닐을 덮어도 되나요?

-옛날에는 비닐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 비닐을 덮으면 더 빨리 싹이 나지. 그런데 싹이 날 때 짚을 너무 수북하게 덮어두면 싹이 부러질 수 있어. 그 싹을 장다리라고 해요. 거기서 꽃이 피어서 씨가 맺는 거야. 그것을 5월초 정도에 완전히 베어서 털면 씨가 나와.

이건 어느 배추든지 다 되는 거야. 조선배추도 되고, 호배추도 되는 거야. 결구되는 걸 옛날에는 호배추라고 했지. 조선배추는 통이 작아.


무는 어떻게 채종하나요?

-똑같은 방법으로 해요. 무는 자를 필요 없이 놔두면 되지. 그것도 짚을 푹 덮어주니까. 그런데 무가 추위에 약해서 더 까다롭지. 그런데 무는 봄에 일찍 심어도 여름에 씨가 생겨요. 배추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겨울을 안 넘기면 잘 안 크더라고. 무는 괜찮아요.


고추는 씨를 어떻게 받나요?

-고추는 그냥 심은 걸로 받는데, 보통 끝물은 씨로 사용하지 않고 처음에 맏물 좋은 것 중에 가장 잘 생긴 놈을 골라서 받고, 그게 없을 경우에는 중간물까지도 씨를 받아요. 끝물은 절대 안 써.


고추 심을 때 직파는 어떻게 하셨나요?

-지금은 온상에서 키우니 키가 크고 한 자 이상 벌려 심어서 바람에 잘 넘어가고 하는데, 지금처럼 비닐을 쓴다거나 하지도 않고 옛날에는 간격이 더 좁았어요. 대신 지주가 없어.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자랐지. 그냥 나무도 크지 않으니까 바람에 넘어가지도 않고. 수확량은 더 적었지.


수확량은 얼마나 적었나요?

-지금보다 한 6~70%정도 밖에 안 나는 것 같아.


그럼 심을 때는 줄뿌림을 했나요?

-뿌릴 때 고추를 심을 수 있는 간격 정도로 골을 타고, 골에다가 심는 경우보다 두둑에다 많이 심었는데 그거야 밭에 따라서 밭이 습하면 두둑에 심고 건하면 골에다 심는 거지. 골에다 심을 때는 골을 판판하게 고르고 재를 뿌린 다음 씨를 흩뿌려.


재는 왜 뿌렸나요?

-감자 심을 때도 재를 많이 쓰고, 고추에도 많이 쓰지. 그런데 그냥 재가 아니라 오줌하고 섞은 재야. 옛날에는 오줌독에다 인분하고 같이 썩혀서 재에다가 재면 거름이 기가 막히게 좋아요. 오줌이 있다고 해서 푹 젖지 않아요. 그렇게 질은 게 아니야. 수분은 증발하고 거름 성분만 남아. 그렇게 하면 아주 농사가 잘 되지.


병해충은 없었나요?

-벌레가 더러 먹는 건 있는데 지금마냥 이런 건 없었어. 그때는 농약도 없으니까 뿌리지도 않았는데도 고추는 괜찮았어. 더러 이상한 게 나오긴 하지만 지금처럼 버릴 정도는 아니야. 탄저병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희나리 진다는 것은 어떤 걸 말하나요?

희나리라는 것은 고추가 자라다가 벌레가 구멍을 뚫어놓으면 대부분 희나리가 되고, 그리고 보통 붉다가 말은 것, 병이 없더라도 제대로 여물어서 붉은 것이 아니라 약간 붉으려고 할 때 서리가 온다던지 하면 대를 뽑아놨다가 따는 걸 몰아서 희나리라고 그래. 그래도 귀하니까 그걸 모아서 빻아서 썼지. 그걸 찌개 하는데 넣어먹거나 아니면 뒀다가 봄에 들에 나는 나물 종류를 뜯어서 물김치 담글 때 넣으면, 그 고추가 맵긴 또 맵더라고 그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나요. 그래서 노인네들이 하나 안 버려요.


고추에 거름은 얼마나 했나요?

-그렇게 엄청 집어넣지 않더라고.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이 주는 것 같아. 소똥도 뭐 옛날은 풀 먹고 싼 똥이지만 지금은 사료를 먹어서 그런지 더 독해. 옛날에는 소똥거름이 그다지 거름이 되거나 독하지 않아요. 오히려 돼지거름이 좋았어요.


옛날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요?

-아니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거의 있던 것이 돼지야. 일부러 거름도 밟히고 설이나 명절 되면 잡아서 먹는 거야. 소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집은 돼지고기라도 먹었지. 그리고 먹는 것보다 기르면 목외돈 쓰는 맛에 키우지. 시골에 뭐 돈이 있어.


그럼 돼지 먹이는 무엇을 줬나요?

-먹이는 쌀뜨물을 받아서 겨를 한 움큼 같이 던져주면 그거 먹고 사는 거야. 그래도 살찌고 자라는 거 보면 우습지. 어렸을 때 ‘저 큰 돼지가 어떻게 저런 겨 한 움큼만 먹고 사나?’ 했지. 쌀겨도 있고, 밀기울도 주고, 또 호박․고구마 같은 건 속은 사람이 먹고 돼지는 그 껍질 같은 것, 참외껍질, 오이껍질 같은 걸 하나도 안 버리고 줘요.

돼지가 풀도 먹어요. 아주 풀만 먹는 건 아니지만 풀도 좋아해. 그리고 돼지한테 일부러 흙도 먹이고, 숯가루도 먹이고 또 해변에 가면 굴, 조개껍질을 주워서 빻아 먹이고 했어. 그래야 뼈가 튼튼해서 새끼도 잘 낳고, 새끼를 낳으면 돼지는 뼈가 잘 부러져요.

돼지가 둔해서 새끼를 잘 깔아 죽여서 처음에는 사람이 새끼를 관리해야 돼. 어미돼지는 좁은 공간에서 깔아 죽이는 것도 몰라. 그러니까 아주 어려서 한 일주일 동안은 젖먹일 때만 새끼를 들여보내 주는 거야. 어미가 젖을 먹이려면 드러눕는데, 그럴 때 새끼를 좁은 구멍으로 넣어줬다가 다 먹으면 다시 몰아내. 처음에는 그렇게 줬다 뺐었다 하는 거야. 그래서 새끼 소리가 밖에서 나면 성질 급한 돼지는 뛰어오르다가 다리가 잘 부러져. 그래서 굴껍질을 먹이는 거야.


돼지는 청소용이면서 거름용이네요.

-그래서 돼지는 일부러 거름도 밟고 목외돈 쓰고 그러는 맛에 키우는 거야. 돼지새끼가 옛날에 2~3천원 하면, 송아지는 보통 5만원 했지.


돼지로 거름 만드는 것은 어떻게 하나요?

-돼지한테 깃을 넣어주잖아. 그럼 거기서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밟는다고, 자꾸 그러니까 거름이 떠요. 그렇게 깃을 넣어 주다보면 자꾸 높아지잖아. 그러면 돼지를 몰아내놓고 싹 치운 다음 또 깔아주는 거야. 그럼 자연히 거름이 생기지. 또 깃이 없으면 풀을 베다 주기도 해. 그런데 긴 볏짚을 넣으면 호구로 뜰 때 볏짚이 삭지 않았으면 뜨기 힘들잖아. 그래서 썰어 넣어주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넣어주면 더 좋지.

그래서 집집마다 농사는 다 하니까 돼지를 키웠어. 소농, 중농, 대농이라면 대농인 사람들은 농사가 많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잘 사니까 소가 한 마리씩 다 있어요. 그런데 5마지기 정도 하는 사람들도 볏짚은 있으니까 돼지는 다 키웠어.

 

소 없는 사람들은 쟁기질을 빌려서 했나요?

-그렇지. 소 한 마리 얻어오면 일로 갚아주지. 그런데 소 한 마리가 일해주면 친한 사이에는 하루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둘이 가서 일해 줬어. 거저 해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소 쟁기질은 어떻게 하나요?

-쟁기질은 먼저 소에다 쟁기를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무나 못 걸지. 그걸 걸려면 먼저 목에 멍에를 걸고, 꽉 조이는 게 있어요. 그걸 매야 멍에가 안 빠져. 그리고 뒤로 줄이 있는데 그걸 매서 쟁기에 걸어.

쟁기가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었지. 지금은 쇠로 만든 쟁기가 나왔지만 똑같은 방법이지. 다만 다른 건, 나무로 깎아서 보습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끼워서 쓰는 거야. 그러다 날이 다 닳으면 새로 갈아 끼고.

그런데 쟁기질은 조정을 잘 해야 해. 쟁기를 눌러주면 얕게 갈리고, 들면 깊이 갈리는 거야. 그걸로 조정하는 거야. 돌 때는 소를 ‘워’ 하면 서, 그때 쟁기날을 살짝 얕게 갈다가 들면 빠진다고. 그럼 다시 소를 모는데 끈이 달려 있어. 그걸로 그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쟁기밥은 한쪽으로 넘어가지요?

-그렇지. 쟁기밥은 왼쪽으로 넘어가지. 흙밥을 떠서 넘어가도록 볏을 만들어 놨지. 그 자체가 흙을 감아서 넘어가게 만들어진 거야.


경사진 곳을 쟁기질 할 때는 쟁기밥이 낮은 쪽으로 넘어가게 한다고 하던데요?

-그건 상관없어요. 이런 경우는 있어. 논이고 밭이고 가운데를 째서(나눠서) 이쪽은 여기서부터 갈고, 저쪽은 반대편에서부터 가는 방법도 있어.

그리고 경사진 곳에서는 올라갈 때는 자연스럽게 잘 갈리는데, 내려올 때는 잘 안 갈려. 내려올 때는 쟁기를 꼽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올라갈 때는 그대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빙 돌아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 어쨌든 소 모는 사람은 밭을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다 알아서 해요.

길게 심는 보리 같은 경우는 한 번씩만 갈고, 밭을 다 가는 것은 싹 간다고 해. 두둑을 넓게 만들려면 서너 번 넘기면 될거야. 수수나 콩을 그루갈 때는 보통 양쪽에서 한번 씩만 넘기면 한 두둑은 나와.


소 모는 방법은 어떤가요?

-지역마다 다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설 때는 ‘워’, 방향 바꿀 때는 툭툭 치면서 ‘어뎌어뎌어뎌’, 소는 말하고 달리 끌어서 조정하지 않고 끈이 오른쪽에 있어서 보통 왼쪽으로만 돌아. 곧장 갈 때는 ‘이랴’.


소한테 쟁기질 훈련은 어떻게 시키나요?

-일은 보통 코뚜레를 뚫은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는데 끌개라고 있어요. 보통 썰매 모양으로 만들어. 잘 안 닳는 통나무를 썰매발처럼 놓고, 못 같은 걸로 단단하게 한 다음에 돌 같은 무거운 걸 올려놔. 그 다음 소에다가 멍에를 걸머지고 맨 다음 그걸 끌고 다니게 하지. 이건 힘만 기르는 게 아니라 말귀를 듣게 하는 거야.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려니까 이게 말을 잘 안 듣고 왜머리 친다 이거야. 그러니까 천방지축이지.

그렇게 일을 가르쳐서 말을 잘 듣는 놈은 쟁기를 한 번 매서 시범적으로 빈 밭에 들어가서 갈아본다고. 몇 번 해봐서 쓸 만하면 어설퍼도 자꾸 쓰다보면 일을 배우지. 그런데 수소보다 암소가 일을 더 잘해. 수소는 잘못하면 받아버려서 부려먹기가 힘들어. 사람도 눈이 작으면 독하다고 하듯이 눈이 작은 소가 독해. 눈이 큰 소는 안 받아. 그래서 수소는 잘 안 쓰고, 보통 새끼 낳더라도 암소를 쓰지.


소먹이는 무엇을 주나요?

-풀도 먹이고, 볏짚도 넣어주지. 그냥 먹이는 것을 생식이라고 하고, 불 때서 쑤어주는 걸 화식이라고 하지 아마. 쒀줄 때 쌀겨를 물바가지로 큰 소는 하나, 작은 소는 반 정도 넣어서 쇠물주걱으로 막 휘젓고 뒤집다보면 짚이 여물이 완전히 익은 게 나와. 그때 콩깍지를 넣어줘. 그걸 소가 잘 먹어. 또 그걸 먹어야 소가 살이 찐다는 거야. 그거 먹는 소는 아주 잘 먹는 소야. 또 벌레 먹은 콩 같은 것도 하나 안 버리고 같이 넣어줘. 콩대는 지가 먹을 때도 골라내지만 사람이 골라줘.


아이들한테 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풀을 먹이게 하는 건 왜 그런가요?

-농촌은 바쁘니까 매일 꼴지게만 매고 다닐 수 없잖아. 소를 풀밭에 메어두면 지가 알아서 뜯어먹어요. 줄이 있으면 빙 돌면서 거기 풀을 다 뜯어먹어. 그러면 다른데다 메어두면 또 뜯어먹어요. 하루에 그 정도만 먹이면 돼.

암소 같은 경우는 젖먹이가 옆에 앉아 놀아도 절대 밟지를 않아. 순한 소는 애들이 끌고 다녀도 말을 들어요. 그리고 혼자 집에 찾아오는 소들도 있어요. 소낙비가 가끔 올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못 참으면 알아서 줄을 끊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소로는 거름을 어떻게 만드나요?

-외양간에도 깃을 넣어주지. 소가 돼지보다 더 보송보송해야 돼. 그래서 소가 더 신사라고. 돼지는 깃이 모자라서 질척질척하게 키우는 집도 있어.


소나 돼지 말고 닭은 어떤 목적으로 키웠나요?

-닭은 보통 계란을 먹으려고 키웠지. 그리고 나중에 고기도 먹고. 지금은 닭을 기계로 부화시키는데 옛날에는 자연부화를 시켜서 닭이 더 건강하고 맛도 좋았어. 또 놓아서 먹이니까 풀도 먹고 돌도 먹어서 더 건강했지. 그렇게 키우니까 알도 껍질이 더 단단한데 지금 양계닭 계란은 툭하면 깨지잖아.


그럼 닭은 집마다 몇 마리나 키웠나요?

-아무리 없어도 대여섯 마리는 있었지. 그래서 옛날에는 배추 심으면 각자 울타리를 쳤어요. 집집마다 닭이 있으니 먹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잖아.

울타리는 산에 있는 싸리 말고 왜싸리라고 그걸 베다가 울타리를 쳤지. 옛날에는 뭐든지 귀해서 그물도 없어서 수수단으로 치는 경우도 있고, 닭장도 특별히 집을 지어주는 것보다 외양간 위에다가 횃대만 두 줄 내지 세 줄만 놔주는 거야. 그러면 거기서 닭이 잔다고. 둥우리도 그 위에다 놔두면 지가 올라가서 알 낳고 신호를 해주고 내려가. 알을 낳으면 꼬꼬댁 꼭꼭꼬 몇 번 외친다고. 알 낳았을 때는 암탉이 울고, 날이 밝을 때는 수탉이 울어.


알은 보통 얼마에 한 번씩 낳나요?

-닭이 7~8개월 정도 지나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잘 낳는 닭은 매일 낳다가 사흘 정도에 한 번씩 거르고, 보통은 이틀에 한 번은 낳아. 그런데 알은 이틀에 한 번 낳는 게 더 맛있지.


토끼도 키우셨다고 들었는데 토끼는 어떻게 키우나요?

-토끼는 습하면 잘 죽어요. 그래서 토끼장은 보통 1m이상 올라가야 좋지. 토끼를 풀어놓으면 돌아다니다가 마루 구멍에 들어가서 죽어요. 거기가 습하거든.

토끼는 씀바귀를 좋아하는데 그걸 먹이면 눈이 더 새빨개져요. 독초는 자기가 알아서 안 먹어요.


겨울에는 뭘 먹이나요?

-겨울에 지금은 사료가 있으니까 먹이지만 옛날에는 콩깍지, 엿밥 그런 걸 먹여요. 시래기가 많으면 그걸 주는 사람도 있고. 쇠죽 쑬 때 여물을 좀 주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경우는 산에 가면 자귀나무라고 있어요. 그걸 토끼가 좋아해서 나무도 갉아먹는데 그걸 잘라다가 넣어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옛날에 귀마개를 토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드나요?

-그걸 토끼 가죽으로 만드는 법이 있어요. 토끼 가죽을 벗겨서 그냥 말리면 단단해서 못 써요. 그 속에 기름이 굳어버려서 단단해져요.

그래서 가죽을 벗기면 그 안에 쌀겨를 하나 가득 채워서 묶어서 몇 개월 매달아둬요. 그러면 기름이 쏙 빠져. 그럼 가죽이 그대로 남으면서 부들부들해서 좋아요. 그럼 그걸로 귀마개도 만들고, 토시도 만들고, 목도리도 하고, 발에다 넣으면 따뜻하고 좋지.


옛날 농사방법 중에서 되살려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농약 안 쓰고, 비료 덜 쓰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 같이 농약을 안 써야 하는데 일부는 쓰고, 일부는 안 쓰고 하는 게 문제지요. 다 같이 농약을 안 쓰면 몇 년간은 피해를 보더라도 되살아나겠지요.

또 농약을 안 쓰고 농사짓는 방법을 자연에서 방법을 찾는 걸 사람이 연구해야 돼요. 내가 생각할 때는 나뭇잎 중에서 벌레가 안 먹는 것이 있어요. 그걸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벌레가 안 먹는 나뭇잎 중에 중풍에도 쓰는 약인데 두충나무가 있어요. 또 소태나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과수원 중간에 소태나무를 심어서 벌레가 덜 붙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이용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봐요.

또 밤나무는 보를 만들 때 쓰면 그곳을 거쳐 내려오는 물은 논에 좋다고 했어요. 벌레가 덜 생기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밤나무는 숯은 화롯불에는 담지 않았어요. 또 옛날에 못자리를 하면 이끼 같은 게 생겨서 벼 싹이 자라는 걸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옛날 어른들이 밤나무 회초리를 꽂았는데 그러면 그게 싹없어져요. 이런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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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0)-권유옥 선생(김포)


임금에게 진상하던 자광미, 맛은 최고예요







 

너른 김포 들판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하성면 석탄리에 사시는 권유옥(67)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나 지금까지 사는 ‘토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도 삼형제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며 모두 5만7천 평의 논을 경작하고 계신답니다. 그 가운데 본인은 1만2천 평 농사를 짓는데, 자광미는 500평 정도만 심으셨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평을 지었는데, 올해는 판로 문제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500평만 짓는다고 하십니다. 동네에서도 혼자만 자광미 농사를 짓는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논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한쪽에 몰아서 환지를 받아 1만평 정도는 한곳에 있고, 자광미는 따로 500평 되는 논에다 심었다고 하십니다. 이 논에 4월 26일에 모내기를 했는데, 그보다 일찍 모를 낸 논은 서리를 맞아 싹 죽어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 선생님 논의 모는 벌써 위로 쭉쭉 자라서 다른 논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광미(紫光米)는 말 그대로 자줏빛 쌀입니다. 쌀이 허옇거나 누렇지 어떻게 자줏빛이냐고 생각하신다면, 이 쌀을 한 번 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이 벼는 250~300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벼슬아치가 자줏빛 밥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돌아올 때 가져온 씨를 김포에 심어 임금님께 진상한 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유래라고 합니다.


- 선생님께 자광미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광미에 대한 이야기 좀 부탁드립니다.

= 자광미는 옛날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입니다. 그만큼 밥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배하기 아주 까다로워서, 그전에는 양반 집안에서나 자기들 먹으려고 재배했습니다. 재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쓰러지기 쉬워서 많이 심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먹고 자라면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그러니 태풍만 왔다하면 죄 쓰러져 버리지요. 이걸 쓰러지지 말라고 규산액을 때려 부어야 그나마 괜찮습니다. 비료는 아예 줄 생각도 못하지요. 비료만 줬다하면 엄청나게 자라서 쓰러질까 봐 그렇습니다.

거름으로는 영양제만 줍니다. 밑거름을 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지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지 뿌리에서 자기가 먹을 영양은 다 나옵니다.


-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수확량은 좀 많은가요?

= 수확은 잘나면 양석(兩石) 납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200평에 2가마 정도 나요. 알이 좀 갸름한 모양인데, 다른 벼에 비해서 잘고 달리는 양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이걸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잖아요. 그럼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핑 돕니다. 백미로 깎으면 아주 맛이 좋은데, 그럼 색이 없어져서 소비자가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7분도 정도로 깎습니다. 백미로 깎는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어쩝니까. 집에서 먹을 때는 아예 백미로 깎아 버립니다.

요즘 시중에 빨간 쌀이 나오는데 그건 수원에서 연구원들이 육종한 홍미가 대부분입니다. 색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걸로 내가 밥을 해 먹어보니 맛은 아주 떨어져요. 그건 대도 짧아서 도복이 안 됩니다. 수확도 아주 많이 나는데 맛이 없어요. 이제 FTA하는데 수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맛으로 이겨야 해요.


- 그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수확도 적은 것을 왜 심으시나요?

= 첫째는 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심던 것이라 그렇지요. 저 김포 들미라고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은 밀다리라고 하는 들미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가 처음으로 그 옆에다 심었다고 해요. 이걸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진상했습니다. 유신 때도 경기도 지사가 선물하려고 해마다 꼭 대여섯 가마씩 가져가곤 했습니다.

키우기도 힘들고 까다롭고, 또 판로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딱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 언제는 이걸 그만 두려고 했는데 김포 농정과에서 이게 김포 명물인데 어떻게 없애냐고 하면서 보조금을 조금 줍니다.


-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 예전에는 16㎏들이 가마니를 한 장에 2만원 주고 사다 썼습니다. 그걸 일 년에 60장 정도 쓰거든요. 그것만 해도 120만원이라 이제는 아예 가마니틀을 만들어서 겨울에 집에서 짭니다. 이렇게 직접 안하면 다 농협 가서 대출받아 빚지고 살아야 해요.

그럼 거기에 쌀을 담아서 도에 한 20~30가마, 여의도에 20가마, 강남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 가끔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양재동으로 나갑니다.


-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보존 차원에서 씨앗을 몇 알씩 얻어다가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자광미도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

= 예전에 아랫녘에서 농진청 통해서 소개받고 와서 하도 졸라서 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김포 농정과에서 경을 쳤습니다. 우리 김포 명물을 타지로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은 고향에서 아예 상표로 만들려고 유출을 못하게 합니다. 쌀로는 어디든지 나가지만.


- 모는 언제 내고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 여기는 4월 26일에 모를 냈어요. 이게 모일 때부터 정신없이 올라와서 다른 것보다 키가 커요. 요즘 상토가 나오잖아요. 거기 거름이 들어 있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건 거름을 주지 않아도 워낙 키가 큰데, 파는 상토에다 넣으니 다른 벼는 작아도 이건 정신없이 자라요. 너무 길어서 기계로 심기 힘들어 가위로 자른 다음 심은 겁니다.

이 동네에 늦서리가 한 번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찍 심어서 다 죽었어요. 이건 물이 있으니까 서리가 와도 녹아 버린 거야. 지금 다른 논보다 제일 볼 만해요. 일찍도 심었지만 자광은 비료를 안줘도 신나게 자라요. 그것만 봐도 아주 재밌죠. 주변과 비교해도 따라올 놈이 없잖아요.


- 언제쯤 수확하나요?

= 이건 추석 무렵이면 바로 벱니다. 중만생종쯤 될 거야. 그때도 막 자라요. 가지도 곧잘 치죠.


- 분얼도 많이 하는데 수확량은 왜 적지요?

= 도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규산질을 많이 줘요. 다른 비료는 영양제 빼고는 안 줍니다. 그랬다가는 너무 커서 싹 쓰러져 버려요. 약도 치지 않아요. 고품질로 파는데 약을 치면 내가 거짓뿌렁하는 나쁜 놈이지. 나는 여기 토백인데, 딴 사람한테 거짓뿌렁 못하고 죽으나 사나 내 땅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이렇게 사는 거지.

딱 하나. 제초제는 칩니다. 이제 논에 들어가 김을 맬 수 있는 힘도 없고, 일이 많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합니다.


- 씨 할 것은 따로 심으시나요?

= 그렇지는 않고, 이걸 수확해서 종자로 씁니다. 베기 전에 콤바인을 싹 청소해서 거두는데, 그래도 기계가 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조금 끼기는 합니다. 그러고 15일쯤 햇볕에다 말립니다. 수분측정기가 있어서 수분 15% 될 때까지 말려서 보관해 놓습니다.


-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자광미 농사를 지었나요?

= 옛날에 어른들은 2알 넣어야지 3알만 들어가도 뽑으라고 했어요. 많이 넣어 봐야 이삭이 잘아지니까. 손으로 내고, 낫으로 베고, 발틀 밟아서 떨고. 볏단이 조금만 축축하면 거기 잘 앵기는 거야. 통일벼는 귀가 여리잖아(이삭이 잘 떨어진다는 뜻), 자광미도 귀가 여려요. 이상기온이 와서 우박이라도 오면 1/5은 떨어져 버려서 날짐승들이 다 주워 먹지. 지금 그렇게 손으로 하라면 나부텀도 못해요.


- 이건 몇 포기씩 심으신 건가요?

= 이앙기로 해서 4~5대씩 꽂았어요. 가장 좋은 건 2대씩 꽂는 겁니다. 이앙기로 하려니 그런 거지. 그렇게 꽂아 놓으면 15~17대로 분얼해요. 물을 말리면 분얼을 멈추죠. 분얼이 다 됐다 싶으면 그냥 내 맘대로 말리는 거예요. 이 논은 한 6월 10일쯤 물을 뗍니다. 계속 물을 대 놓으면 키만 커요. 그렇게 보름쯤 말렸다가, 물을 안 주면 말라죽으니까 다시 열흘은 물을 대주고, 또 보름쯤 말렸다가 대주고를 반복해요. 여기 물을 말리면 갯논이라 운동화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정도로 마릅니다. 일주일쯤 지나면 티도 안 나게 말라요.


- 병충해나 피 같은 건 어떤가요?

= 여기는 들판이라 피가 많아요. 도아리(까마중)하고. 그리고 중국에서 혹명나방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래서 약을 쳐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 한 4년 전쯤에는 잎을 죄 먹어서 다 쭉정이만 나왔어요. 그해는 농민도 그렇고 농협도 무지 피해를 봤지. 중국하고 가까워서 혹명나방이 해마다 있어요. 자광미는 다른 벼보다 혹명나방이나 병충해에 좀 강합니다.


- 자제분에게 농사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모두 4남매인데 도시에 나가 살아요. 각자 자기 자리 잡고 사니까 땅 준다고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죠. 힘들어서 싫대요. 우리는 삼형제가 다 농사지으며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서로 일을 나눠 맡아요. 바로 위에 형님은 이앙만 하시고, 큰 형님은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모판 껍데기만 모아 놓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젊은 내가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일이 많고 뭐하고 해도 불평불만이 안 나오는 거야.

처음 1,800평으로 시작해서 부지런히 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는데, 깜깜해서 못 나가는 것이지 훤해지면 바로 나가서 일합니다. 그래도 새벽부터 집 가까이서 장비 쓰면 동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봐 멀리 방죽 있는 데부터 가서 일합니다. 이 일은 정년퇴임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뭐 땅속에 들어가면 그때가 퇴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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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순천의 농업 경제


1.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


조선은 강화도조약(1873)으로 강제 개항되어, 각 항구를 통하여 침투한 외국 상품 경제는 봉건적 모순과 위기에 싸인 조선 경제를 급격히 붕괴시켰다. 그에 따라 식민지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1894)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으로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일제는 전형적인 부등가 교환 방식을 통해 조선에서 쌀, 콩, 소가죽 같은 원료를 값싸게 수입하고, 석유와 광목 같은 공산품을 비싸게 수출했다. 이처럼 조선 경제는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하지만 지배층은 권력 투쟁에 눈이 어두워 새로운 사회 개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농업 경제는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제1기는 조선에서 지배와 착취를 준비한 기초 공작 단계로, 1906년 통감부 개설부터 1918년 11월 토지조사사업 완료까지다.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 농민의 농토를 강탈하여 근대 무산자 계급을 창출하고, 그들의 손안에 토지를 집중한 시기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식량이 모자라 겪은 고통과 일본의 쌀 소동(1918)의 영향으로 식량 자원의 중요성을 깨달아, 조선총독부가 조선에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산미증산계획을 수행한 1919년에서 1929년까지의 시기다.

제3기는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온 자본주의 국가를 휩쓸어 일본의 상공업 자본주의는 물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조선의 농촌 경제가 파탄을 맞았던 시기다. 조선으로 파급된 경제 공황은 열악한 농촌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일본, 만주, 사할린 등으로 이주했고, 소작쟁의는 심각한 사회․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부족한 식량 해결, 춘궁 농가 퇴치 및 농가 수지 균형을 도모한 1932년부터 1939년까지를 제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4기는 가혹한 전쟁 부담 시기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다.



 

1) 토지조사사업의 전개와 내용


일본은 명치유신(1868)을 통하여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급격하게 받아들이고, 근대화와 군사 공업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여 신흥 자본주의를 형성했다. 일제는 신흥국가로서 그들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빈약한 자본축적을 촉진하기 위해서, 더 값싼 식량과 공업 원료를 확보해야 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봉건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길을 선택했다. 일제는 상품 시장 개척과 식민지 침략을 도모하고자 군사적․침략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결국 조선의 봉건적 경제 체제를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본은 이미 1905년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1910년까지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준비 공작을 마친 상태였다. 그들의 첫 번째 수탈 목표는 토지였으며,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토지에 근대적 사유 제도를 확립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상업 자본이 조선에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어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일본인의 토지 소유에 주된 장애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법률적으로 금지되었다. 둘째, 토지 사유권이 관습상 확립되어 있었으나, 법률로 보장된 일물일주一物一主의 배타적 사유권이 확립되지 않았다. 셋째, 토지의 상품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 일본인의 토지 매수에 대하여 조선 농민뿐만 아니라 봉건적 권력자와 양반까지 완강히 반항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 상업 자본의 토지 점유는 점차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조선의 법률을 어긴 것이라 법률적으로 보장받지 못하여, 토지 매매와 점유의 합법화가 강력히 요청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토지 소유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과 더불어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토지조사사업을 서두른 또 다른 이유는,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곧 일본은 조선총독부 특별 회계의 끊임없는 팽창을 충당하기 위하여 조세수입을 정비함으로써 총독부의 세원稅源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미곡의 일본 수출을 위해서는 토지개량 및 토지이용의 자유가 필요했다.

일본은 1906년에 조선정부를 강요하여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을 발포하게 하여, 일본 상업 고리대 자본에 종속된 부채 농민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토지조사사업은 호적 정비와 함께 토지 등기 제도를 도입하여, 토지의 소재, 지목, 지번, 지적, 소유자를 조사하고 지적도를 작성해 각 필지의 위치, 형상, 경계를 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가(임대가격), 지형, 지모地貌를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에 앞서 벌써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하여 7,745명의 일본인이 이미 토지를 소유했고, 그들의 토지 소유 면적은 7만6,935정보에 달했다. 결국 이때는 전 단계에서 강제 진출하여 조사한 토지를 총독부에 ‘신고’ 또는 ‘통지’하고 토지대장 등 각종 장부를 맞춰 소유권을 등기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면적

(1910. 6. 현재, 단위:명・정보)

항 목

택 지

산림・평야

소유자수

4,194

 1,141

 1,719

   691

7,745

소유면적

2,203

23,271

36,192

15,269

76,935

출전:권태섭, ������조선경제의 기본구조������, 1949, 62쪽.


그런데 1894년에 이미 조선 정부도 근대적 측량법에 따른 양전量田을 계획했으나 정변으로 중단된 사실이 있다. 또한 양전을 맡을 새로운 독립 기구로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을 1898년에 설치하고, 미국에서 근대적 측량 기사를 초빙하여 양전 기술을 습득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등기 작업을 겸행했으나,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이 심해지며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여 중단되었다.

일제가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의 내용은 토지소유권 조사, 토지 가격 조사, 지형과 지모의 조사 등으로 분류된다. 약육강식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신고주의申告主義에 따라 진행된 토지소유권 조사는 권세가의 단순한 토지 수조권을 근대적 소유권으로 확정하고, 실질적인 토지 보유자인 농민의 경작권을 박탈했다. 그밖에 많은 역둔토驛屯土, 궁장토宮庄土 등의 국유지가 총독부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 결과 봉건 계급 대 농민의 관계는 지주 대 소작농 관계로 급전했다. 이처럼 봉건적 소유 관계가 근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로 바뀌었으나, 그것은 종전의 수조권자가 수조하던 절반 공납을 절반 소작료로 재생시켰고, 이로써 반半봉건적 소작 관계를 창출했다.

다음 표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뒤의 소작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은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자작 겸 소작농의 감소(13.5%)가 뚜렷하다. 소작농화 추세는 1913~1917년에 연평균 39.5%이던 것이 1939년에는 55.7%로 16.2%나 급증했고, 여기에 자작 겸 소작농을 합하면 무려 81%에 이fms다.


일제시대 조선 농민의 소작화 경향 (단위:천호・%)

5개년 평균

자작농

자작 겸 소작농

소작농

1913~1917

555

(21.7)

991

(38.8)

1,008

(39.5)

2,554

(100.0)

1918~1922

529

(19.8)

1,051

(39.2)

1,098

(41.0)

2,678

(100.0)

1923~1927

529

(20.2)

920

(35.1)

1,172

(44.7)

2,621

(100.0)

1928~1932

497

(18.3)

853

(31.5)

1,362

(50.2)

2,712

(100.0)

1933~1937

547

(19.2)

732

(25.6)

1,577

(55.2)

2,856

(100.0)

1939

539

(19.0)

719

(25.3)

1,583

(55.7)

2,841

(100.0)

    비고:괄호 안은 비율임.  출전:鈴木武雄, ������朝鮮の經濟������, 조선총독부, 1944, 246쪽.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지주 상황을 보면 다음 표와 같으며, 조선인은 100정보 이상 규모와 200정보 이상 규모가 다 같이 줄어들고 있다. 특히 200정보 이상 규모에서 조선인은 26%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일본인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제시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지주 변화 추세 (단위:명)

연 도

  구 분

1919

1925

1931

1936

100정보 이상

조선인

360

290

319

336

일본인

321

561

361

370

200정보 이상

조선인

186

45

49

49

일본인

169

192

187

191

    출전:주봉규, ������한국농업경제사������, 선진문화사, 1992, 208쪽.


1928년도 순천군의 일본인 농업경영자 조사 실태를 보면, 서원행태랑栖原幸太郞은 1914년 3월에 농장을 설립했다. 그가 소유한 경지면적은 밭 70정보, 논 20정보였다. 업종은 보통 농사였으며, 영농 방법은 소작이었다. 자하선농사滋賀鮮農 주식회사는 주식회사 형태로 경영했고, 밭은 300정보, 논은 100정보로 전자보다 훨씬 많은 400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영농종별은 보통 농사였으며, 영농 방법은 소작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이들 말고도 순천에는 100정보 이상의 조선인과 일본인 지주가 46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유 면적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순천군 일본인의 대지주 현황 (단위:정보)

구 분

  지 주

소유지 면적

영농종별

영농방법

창립시기

서원행태랑

 70

 20

 90

보통농사

소 작

1914년 3월

자하선농주식회사

300

100

400

보통농사

소 작

불 명

출전:조선총독부, ������朝鮮の物産������, 1927, 272쪽.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농민을 과소농화하고, 반봉건적인 소작농으로 변화시켰으며, 고율의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조건 때문에 급격하게 이농이 늘고 농민층이 빠르게 양극으로 분해되었다. 당시 조선 농업의 실태는 수도작의 경우 단보당 수확량이 현미 1~1.5석, 대맥은 1.5석, 소맥은 1석, 대두는 1~1.5석 안팎으로 일본의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증산할 수 있는 조선 농업, 특히 전남 지역을 미곡과 면화의 생산 기지로 만들려는 일제에게 토지는 야욕의 주요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1904년 간행된 ������조선농업론������에는 전남의 경지면적이 14만7,342결로, 전국 총면적 100만4,066결의 14.7%를 차지하고, 국가 재정의 17.9%를 부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토 수탈로 시작된 일본의 침략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10년 6월 현재 일본인 토지 소유자 7,745명이 토지 7만6,935정보를 소유했다. 특히 1908년 자본금 1,000만 원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10년에 1만1,035.5정보, 1920년에 7만7,297.1정보, 1930년에 무려 10만5,336.8정보를 소유하게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의 증가 추이 (단위:정보)

연 도

기 타

합 계

1910

 8,643.8

 2,300.6

  91.1

 11,035.5

1920

51,149.7

19,405.1

6,743.0

 77,297.8

1930

46,682.5

16,994.4

41,709.1

105,386.0

1931

46,584.8

16,887.8

60,092.8

123,565.4

출전: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33.


토지조사사업은 신고주의라는 방법을 택하여 강력한 세력이었던 지주의 수조권을 사유권으로 신고케 하여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소작농의 도지권賭地權은 토지소유권에서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그 결과 지주가 공공연히 도지권의 존재를 부인하고 소작농의 관습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나타나, 소작인들은 도지권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지주에 대항했지만 대부분 도지권 존재의 증거불충분으로 패소했다.

도지권 소유자들은 소송으로는 도지권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는, 도지권을 가진 소작인들끼리 함께 모여서 지주가 도지권을 인정할 때까지 4년 동안 소작료를 불납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자 이제는 지주가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부는 도지권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4년 동안 불납한 그 자체가 도지권을 소멸하게 했다고 판결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도지조합을 조직하여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저항했다. 예를 들면 1917년 대동강 연안의 대동군 남곶면 대이도리와 소이도리 등에서 리별 도지조합이 조직되었고, 1923년에는 연합 도지조합이 조직되어 지주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 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1911년 무렵에는 진주와 고성 지방에서 소작 거부와 불경작동맹 및 농번기 노동력 판매 거부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30년 무렵에는 결의서 및 진정서 운동을 전개했다.

다음 표를 보면 논의 소작료율이 최고 75%에서 최저 30%에 이르고, 밭은 최고 75%에서 최저 20%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이와 같은 고율의 소작료가 가능했던 것은 소작료 구성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작료의 구성 내용이 단순히 지대로만 구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소작료율이 대개 50%이다. 그러나 지대에 토지개량비와 수리비水利費가 들어가고, 종자, 농기구, 비료, 농약 등을 선대하고 그 원리금을 소작료에 포함하면 60~70%로 상승한다. 여기에다 조세 공과금을 포함하면 정조법은 58~90%, 타조법은 50~79%, 집조법은 50~80%에 이른다.


전남의 소작료율 현황 (단위:%)

구 분

 징수방식

최 고

보 통

최 저

최 고

보 통

최 저

정 조

타 조

집 조

70

70

75

50

50

55

30

40

30

60

60

75

40

50

55

20

30

30

출전:조선총독부, ������朝鮮の小作慣行������ 상권, 238~239쪽.




2) 산미증식계획의 전개와 내용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 완수되자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로 확보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1944년까지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수립한 산미증식계획은 당시 일본 경제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농업은 본래 협소한 농지에서 이루어진 영세 소농 체제이고, 1850년대부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자체 농업 생산만으로는 도저히 자급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연평균 소비량은 6,500만 석이었으나 생산량은 5,800만 석이어서 700만 석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여기에다 1918년 8월에는 쌀이 모자라 전국 365곳에서 약탈과 폭동 등 이른바 ‘쌀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겪은 식량난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절실한 당면 과제라고 느끼게 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계획의 목표가, 첫째 조선의 쌀 수요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서고, 둘째 농가의 경제 성장을 통한 반도 경제의 향상에 있으며, 셋째 일본 제국의 식량문제 해결에 있다고 하여 그들의 야욕을 은폐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쌀 증산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한계였으나, 조선은 관개설비灌漑設備가 불안정하여 토지개량사업을 일으키는 데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미곡 주산지였다.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일본의 쌀 자급자족을 실현하는 데 그 주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산미증식계획을 전개한 또 하나의 배경은 일본 국내의 유휴자본을 산미증식계획에 투입함으로써 일본 산업이 직면하고 있던 불경기를 해소하려는 것이었다.

1920년에 수립한 제1차 산미증식계획의 구체적 내용은 단적으로 일본인 투자가들을 지원하되 두 가지 기술적 방법, 즉 경종耕種의 개선과 수리시설水利施設의 확장으로 향후 15년 동안 920만 석의 미곡을 증산한다는 것이었다.

경종 개선은 재배법을 말하며, 미곡 품종의 개량과 비료 증시를 골자로 했다. 그리고 수리시설의 확장은 수리조합의 설치를 통한 저수지의 축조를 뜻하는 내용이었다. 산미증식계획에서 중점을 둔 것은 수리시설 개선이었는데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에 천수답天水沓이 매우 많았던 미작 실태에서 식부 면적의 확보는 수리시설 없이는 곤란했다. 그리고 품종개량과 시비施肥의 효과 역시 수리시설의 개선을 떠나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토지개량사업의 계획안은 향후 30년 동안 총 80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목표로 하되, 우선 제1기(향후 15년)에는 약 42만 정보의 토지개량과 관개 개선을 실시하여 920만 석을 증산하려 했다. 그러나 당초의 기대에 반하여 1925년까지 6개년에 9만 정보를 실시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제1차 산미증식계획이 실패한 것은 공사비로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고, 자금의 이자가 고율이었던 데 원인이 있다. 자금의 이자는 연 9푼 5리이거나 1할 1푼이었다. 당국은 1926년을 기하여 토지개량사업의 축소와 더불어 좀 더 치밀한 갱신 계획을 세운다. 제2차 산미증식계획은 1926년 이후 15년 동안에 기성답旣成畓 19만5,000정보의 관개 개선, 밭을 논으로 만드는 지목변경地目變更 9만 정보, 개간 및 간척지 6만5,000정보, 합계 35만 정보의 토지를 개량하고, 이로써 합계 816만 석의 산미를 증식하려 했다. 이 계획에서는 자금 조달을 기업가에게 맡기지 않고 일본 정부의 알선자금斡旋資金 이른바, 저리 자금을 도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업 예정 자금을 보면 총액이 3억5,162만2,000원에 달하는 거액인데, 그 내역은 토지개량사업에 3억325만 원, 토지개량사업 시행에 따른 총독부 인건비 844만2,000원, 농사개량사업에 4,000만 원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과 농사 개선을 통한 증산 계획에 중점을 두었다. 농사 개선 계획은 품종개량, 퇴비 장려, 적기 파종, 제초, 병충해 방제 등을 전개함으로써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토지 개량 계획은 관개시설의 개선, 지목변경, 개간, 간척 등으로 농지를 확장하여 증산을 기하려는 것이었다. 토지개량사업에서 1925년 착수 예정 면적은 16만5,000정보였으나 완성을 본 면적은 61%인 7만1,000정보에 그쳤다. 그리고 수리시설의 개선과 그 운영을 위해 수리조합 설치에 주력했는데, 1925년까지 조합수 66개소, 몽리蒙利 면적은 7만8,200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농사 개선에서는 우량종자의 갱신과 보급을 위해 각 도청 소재지에 종묘장을 설치하고 채종자採種者에게 보조금을 주어 장려하였다.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여 조선 풍토에 맞는 신품종 개발을 담당토록 하고, 자급비료와 함께 화학비료의 사용도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은 처음부터 민간 자본에 기대했던 만큼 자본의 회임기간回姙期間이 길고, 고율의 소작료로 당초의 계획을 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 1912년 이후의 산미증식 기간에 이루어진 쌀의 생산량과 수출량의 상호관계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쌀 생산고와 수출고 (단위:천석)

구 분

 연 도

생산고

지 수

추출량

지 수

1인당 소비량(석)

1912~1916(평균)

12,302

100

1,056

100

0.7188

1917~1921( 〃 )

14,101

115

2,196

208

0.6860

1922~1926( 〃 )

14,501

118

4,342

411

0.5871

출전:조선총독부 농림국, ������朝鮮の農業������, 1936, 36~39쪽.


1912~1916년의 평균 생산량은 1,230만2,000석, 1922~1926년 평균 생산량은 1,450만1,000석으로 10년 동안 지수 18의 상승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수출은 같은 기간에 105만6,000석에서 434만2,000석으로 지수가 무려 411로 증가하고 있다. 더구나 1인당 쌀 소비량을 보면 1912~1916년 평균 0.7188석이던 것이 1922~1926년 사이에는 0.5871석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산미증식계획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으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 자료라 할 수 있다. 곧 그것이 조선 농민의 소비를 극도로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2차 산미증식계획도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세계 대공황을 고비로 토지개량사업은 정체 상태에 빠졌다. 1937년 말 달성률은 시행 면적 46%, 사업 자금 47%, 작부 면적 43%, 증수량 34%, 그리고 반당 수확량 79%로 부진했다. 미곡 생산은 1920년에는 1,430여 만 석, 1936년에는 1,940만 석, 1938년에는 2,410여 만 석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 기간에 중점적으로 추진된 수리조합 설치는 통감부 설치 뒤 1906년의 수리조합 조례에서 비롯된 것이나, 1934년 10월 말 현재 전국에 196개 조합이 조직되고 지구수 202개, 사업 면적 20만7,380정보에 달했다. 그런데 수리조합 설치에 따른 수리조합비는 수리조합 몽리 구역 안에 있는 경우 법규상 지주나 조합원이 부담해야 하나, 소작인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수리조합이 설치됨에 따라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잦은 충돌 요인으로 나타났다.

일제 식민지 경제에서 지주 경제의 강화는 지주의 농민 지배 강화로 나타났고, 구체적으로 농민 경작권의 불안정으로 드러났다. 또한 신흥 지주를 주축으로 하는 지주층이 조선의 식민지 종속 경제화를 강화하게 했다. 그리고 지주 경제의 강화는 농민층 분화의 촉구 과정에서 이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산미증식계획은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 농민의 토지 상실, 일본인과 지주의 토지 집중을 촉진했다. 그리고 1930년대의 소작료의 증가, 조합비 부담과 농업 공황으로 조선 농민에게는 하등의 이익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민 경제의 궁핍과 토지 방매 현상을 촉진하여 농민층 분해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농촌진흥운동의 전개와 내용


농촌진흥운동은 일제시대 조선 농업 발전의 제3단계 시기인, 농산물 가격의 대폭락과 쉐레schere 현상의 격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농업 공황과 깊은 관련을 갖는 운동이다. 1930년대는 세계공황의 여파가 농민 생활의 극단적 위기를 낳았고, 1930년대 대풍작은 쌀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의 중소지주와 자작농의 몰락, 소작농의 이농 등 사회적 모순이 심각하게 표출되었다.

조선의 농가 290여 만 호 가운데 약 8할인 230만 호가 소작, 자작 겸 소작 계급에 속하는 소작농으로서, 이들 농가의 대부분은 해마다 단경기에 식량이 모자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호구지책을 강구했다. 또한 부채액의 누증은 조선 농민의 파멸과 몰락을 더욱더 가혹하게 했다.

1926년에 현미 가격이 석당 15.01원 수준에서 1931년에는 무려 56%나 저락하여 6.61원으로 폭락했다. 일반 물가지수는 1925년에 237.8(1910년 100)에서 1931년 147.5로 38%가 저락하여, 곡가의 폭락 현상과 농산물 가격의 저락이 일반 물가의 저락 현상보다 낮은 쉐레 현상이 나타났다. 1930년 당시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전 농가 300만 호 가운데 차금借金을 갖고 있는 농가가 58%인 173만 호에 달하고, 1호당 평균액이 65원이고 최고액은 420원에 달했다. 조선 농민 경제의 양상은 1930년대의 관제 통계에도 전국 총 농가의 절반 이상이 춘궁 농가이며, 특히 소작농은 2/3 이상이 춘궁 농가였다고 한다(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小作に關する參考事項摘要������, 1932, 61쪽).

농업경영은 조선 농가의 투하 자본량이 일본 농가의 약 1/3에 지나지 않았으며, 농업 총수입은 일본 농가 총수입의 1/2 이하였고, 수지 부족액은 무려 5배에 달하여 조선 농촌 경제는 빈궁과 침체에 허덕이고 있었다. 위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일제는 1932년부터 조선 농민에 대한 구제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32년에 경제 갱생 계획과 자작농自作農 창정創定 계획을 수립했다. 농촌진흥운동의 중점은 바로 1932년부터 실시된 자작농 창정 계획에 있다.

농촌진흥운동의 제1기는 준비 공작기로,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 농촌진흥위원회를 설치하여 농촌진흥운동의 중추기관화中樞機關化하고 많은 운동 지침을 하달하는 시기다. 자작농 설정 실시 요령에 따르면 자작농업자는 농촌의 중견 인물로서 소질을 갖추어야 하고, 근로애호 정신에 불타 있으며, 소작농업자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작농가에 대한 자금 대부 조건은 1호당 논 4단보, 밭 1단보를 표준으로 하여 금액은 평균 660원으로 하는 것 등을 정하고 있다.

농촌진흥운동의 제2기는 전개시기로, 1933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경제 갱생 계획 시행의 근본적 취지는 물질에 편중하거나 형식에 흐르지 말고 정신의 진작, 농민의 자각과 자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계획의 목표는 부족한 식량의 충실을 기하여 춘궁을 없애고, 현금 수지 균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부채를 정리하고 상환하게 하여 그 중압에서 구출한다는 이른바 갱생 3대 목표를 전개한다.

일본의 침략 정책은 조선 없이는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농촌진흥운동은 조선민의 저항의 불길에 언제 휘말릴지 모르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위한 심전개발心田開發에 주안을 두고 진행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농촌진흥운동은 농본사상 개발에 중점을 두는데, 농촌과 농민은 ‘건전한 국방의 역군’이며 농본주의와 천황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국가 존폐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농촌진흥운동의 실적 개요를 보면 주요 목표였던 식량 확보 실적과 부채 농가 퇴치 실적에서 미미한 정도의 목표만 달성했다. 결국 농촌진흥운동은 농업 공황에 대한 극복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운동이었으나,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발생한 일본 자체의 문제를 조선에 전가하면서 가장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측면에서 전개된 침략 운동이었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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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농업에서 배우자(32)-의성 오세석 선생

“토종 종자 수집하려고 시골장이란 장은 다 뒤졌지요”


대서라는 절기답게 후덥지근한 날,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에 있는 경북농산물원종장 의성분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15년 이상 토종을 찾아 보존하며 경제성 있는 토종은 적극적으로 농가에 보급해 온 오세석(54) 분장장을 만났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내세울 것도 없다며 환히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분이다.


- 이곳 원종장이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세요?

= 원종장은 기본적으로 종자를 채종해서 농가에 보급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이런 원종장은 각 도마다 다 있습니다. 이곳 경북 원종장은 원래 경상북도에 소속된 기관이었는데, 5년 전부터 농업기술원 소속으로 이관됐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주로 보리, 콩, 참깨, 고구마 같은 식량작물을 채종해서 농가에 보급하는 것입니다. 특히 대구에 있는 원종장에서는 벼를 담당하고, 이곳 의성분장에서는 밭작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옥수수와 감자는 강원도에 있는 원종장에서 담당합니다. 여기 의성분장은 모두 10만 2천 평에 직원이 11명 있습니다. 보리, 콩, 팥, 녹두, 땅콩, 참깨, 들깨를 주로 심습니다. 이렇게 기른 작물에서 씨를 받아 경상북도 모든 농가에 보급하고, 농가에서는 보통 4년을 주기로 종자갱신을 합니다.

채소나 원예, 과수와 관련된 육종이나 채종은 모두 업자가 할 수 있게 관련법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종묘법에 따르면 채소, 원예, 과수와 관련한 종자는 종묘 회사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하면 품종 등록이 되지 않을 겁니다. 종묘 회사처럼 어디 팔고 그러면 소송을 당하겠죠. 엄격히 따지면 지금 여기 원종장에서 제가 토종을 심는 일도 걸릴 겁니다. 품종 이름도 내가 지었고, 몇 단계 검사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고, 법에 안 걸리려면 아마 품종 등록을 해야 할 겁니다.


- 토종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셨나요?

= 부모님은 영천에서 과수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젊어서부터 기술원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33년 동안 공무원을 하고 있는데, 농업 분야가 제 적성에 맞고 재밌습디다. 이곳 분장장에서 일한 지는 24년 됐습니다. 이곳에서 종자를 보급하는 일을 하면서 90년부터 토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종 종자를 수집하려고 시골 장이란 장은 다 다녔지요. 옛날 기록도 뒤져서 주산지가 어디라고 나오면 그곳까지 따라가서 뒤졌습니다.

그러다 십 몇 년 전에는 안동장에 갔다가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관광이나 하자고 해서 하회 마을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우연히 한 농가에 자주감자꽃이 핀 것을 보고는 주인한테 부탁해서 다섯 알을 얻어 왔지요. 그걸 심어서 첫해 10kg으로 늘리고, 이듬해에는 250kg까지 늘렸습니다. 98년에는 중국에도 한 일주일 가서 몇 가지 종자를 몰래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토종이 예전에는 300가지쯤 있었습니다. 헌데 이곳은 진흥청 산하 종자은행처럼 보관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계속 재배하기도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지금은 35가지만 심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원종장이라는 특성이 있는 만큼 농가에서 찾는 것을 중심으로 보존하는 현실입니다. 아니면 보기에 좋거나 특이한 것을 위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양은 아니고 15평, 30평씩 종자라도 보존하자는 생각으로 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심고 있는 35가지 토종 가운데 농가에는 15가지 정도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속청, 검정콩, 율무, 메밀은 농가에서 많이들 생산하고 있습니다. 다른 원종장에서는 주로 종자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토종을 찾아서 보존하고 농가에 보급하는 일은 여기서만 진행하는 일입니다.


- 자주감자는 어떤 건가요?

= 자주감자는 50~60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입니다. 이건 춘천 지역에서 많이 심었다고 해서 이름을 춘천재래라고 합니다. 자주감자는 겉은 자줏빛이 나고 속은 흰데, 이걸 날로 먹으면 맛이 아립니다. 북한에서 나온 동의보감을 찾아보니 자주감자는 간에 좋다고 나옵디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한방 쪽에서 찾는 전화가 옵니다. 이런 것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무는 이뇨 작용에 좋고, 목화는 변비에 좋고, 메밀은 동맥경화에 좋고 이런 것들을 자세하게 연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주감자 말고 붉은감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처음에 예천의 한 백화점에 가서 구했는데, 종자로는 못쓰게 했습니다. 자신들만의 특산물이라며 지키려고 그런 거죠. 지금 10년 넘게 심고 있는데 퇴화되지 않습니다. 퇴화되면 토종이 아니죠.

토종은 해마다 심어도 퇴화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또 토종은 극심한 가뭄에도 잘 견뎌서 수확량도 괜찮고, 병충해도 잘 타지 않고 적응력도 높아 산간지나 텃밭이나 어디에든 재배할 수 있습니다. 앞에도 말했듯이 몸에도 아주 좋지요. 그런데 보통 토종이라고 하면 몇 백 년 전 것만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어디서 왔든지 우리 땅에 토착화했으면 토종이라고 생각합니다.


- 씨감자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 감자는 일반 창고에 2~3℃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구마는 11℃를 유지해야 좋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감자를 보관하려고 땅속에 묻었는데, 봄에 싹이 많이 납디다. 지금은 종이상자에 넣고 신문지 같은 종이 뭉치를 넣어서 그냥 창고 구석에 보관합니다.


- 토종 감자는 수확량이 어떠나요?

= 올해는 봄에 많이 가물어서 좀 못합니다. 땅만 좋으면 한 포기에 대여섯 개도 더 달리지요. 열개까지도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첫째 퇴비를 많이 넣어야 합니다. 저는 퇴비는 많이 넣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땅은 검사하니 유기물 함량이 2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많이 좋아진 것이 그렇습니다. 95년도에 경지정리를 하면서 싹 뒤집어서 밑에 안 좋은 흙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처음 4~5년 동안은 농사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곳이 단북면인데 붉을 단자를 씁니다. 여기 말로는 쪼대흙이라고 하는데, 황토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질고, 마르면 돌덩이가 됩니다. 수평 배수는 어느 정도 되는데, 수직 배수가 잘 안 되지요. 모래와 퇴비를 넣어서 그나마 좋아졌습니다.


- 옥광을 심고 있는데, 맛은 좋지만 웃자라고 익으면 터집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 여기서 많이 보급하고 있는 토종 콩인 속청은 보통 5월 초에 심습니다. 지금 다 순지르기를 끝냈죠. 모든 콩이 보통 요즘이 개화기입니다. 이렇게 꽃이 필 때 순지르기를 하면 늦습니다. 웃자란다 싶으면 조금 일찍 심거나 순지르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콩은 처음에 웃자라면 수확량이 적습니다. 익으면 탈립하는 건 그 콩의 특성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경제성이 보장된다고 하여 여기서 재배해서 보급하는 콩은 5가지입니다. 그것은 대원콩, 태광콩, 장원콩처럼 굵은 건 메주콩으로 쓰고, 보석콩처럼 잘면 콩나물콩으로 씁니다. 또 청자콩 2호는 검정콩의 하나입니다.


- 콩에 질소질은 얼마나 주나요?

= 여기는 보통 4에 맞춥니다. 농고를 나오면 다 아는 얘기인데, 요소비료 같으면 질소비율이 46%입니다. 이걸 계산하면 300평에 8.7kg를 줘야 질소질 4kg을 주게 됩니다. 유안 같으면 질소비율이 20%이니 더 줘야 하지요.


- 붉은 찰벼라는 종자가 있던데 자광미와 다른 것인가요?

= 여기서 15년 넘게 심고 있는 찰벼입니다. 보통 벼보다는 분명히 수확량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먹어 본 분들은 자기가 먹어 본 찰벼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합니다. 자광미는 이야기만 듣고 직접 해보지는 않았는데, 이건 쌀이 아니라 잎이 붉은색입니다. 쌀은 일반 벼와 똑같이 현미는 누런색이고, 도정하면 흰색입니다. 그러니 붉은 찰벼라는 건 잎이 붉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올보리를 많이 심습니다. 이걸 찾는 이유는 알이 굵어서 그렇습니다. 알이 굵어서 농사만 잘 지으면 쉽게 1등급을 받습니다. 그 재미로 수확량은 조금 떨어지지만 농민들이 올보리를 많이 심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해주세요.

=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벼, 보리, 감자, 옥수수, 콩 이렇게 다섯 가지만 나라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점점 농업은 어려워지니까 정부에서는 그 다섯 가지 말고는 관리를 못하는 실정이지요. 막상 토종을 해보니 요즘은 괜히 힘만 들지 괜히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듭디다. 그래도 종자은행의 냉동고에 있는 것보다 살아 있는 싱싱한 종자를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먹을 정도면 몰라도 농민 입장에서 어디 내다 팔고 하려면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는데, 토종은 아직 그런 면에서 힘듭니다. 예전에 흑미가 값이 좋을 때는 한 가마에 40~50만원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농산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5%만 과잉 생산되면 폭락하고, 5%만 모자라면 폭등합니다. 요즘은 어떤 농산물 값이 비싸다고 하면 바로 수입해서 그 폭이 덜하긴 하지요. 채소는 생물이라서 그렇게까지는 못합니다만, 값이 떨어지면 외면을 받습니다.

저는 사택에 따로 30평쯤 텃밭을 하는데, 거기 케일을 심었습니다. 거름은 깻묵 썩은 걸 주고 벌레 때문에 모기장을 덮어 놓았지요. 하루는 백화점 가서 깨끗한 케일을 보면서 ‘이게 이렇게 깨끗하게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0년 이전 농업통계를 보면 쌀만 생산량이 2000만석 전후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웬만하면 4000만석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작률은 줄었지만 오히려 수확률은 늘었다는 건 다수확 품종을 심고, 비료를 많이 주고, 그러다 보니 병이 많아져 농약을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비료를 적게 주면 도열병이 오지도 않습니다. 비료를 많이 주면 대번 도열병에 다 걸리지요. 퇴비를 보약이라고 한다면 화학비료는 영양제입니다. 한약은 많이 먹어도 나쁘지 않고 좋은 것처럼 퇴비를 줘서 강하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땅이 좋아야 안 좋은 종자도 좋아집니다. 땅이 나쁘면 종자도 제대로 되기 어렵습니다. 종자가 좋으면 좋은데, 종자가 나쁘면 땅이라도 좋아야 합니다. 여기는 땅이 넓어 감당하기 어려워 퇴비를 많이 쓰지 못합니다. 그래도 생산량보다 종자로 쓰려고 하는 것이기에 될 수 있으면 비료를 적게 줍니다. 그래야 강한 종자를 받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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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준다.

 


동중서董仲叙가 상上(한무제漢武帝)을 설득하기를 “《춘추春秋》에 다른 곡식의 흉작凶作은 기록하지 않고 보리와 벼의 흉작만 기록했으니, 이로써 성인聖人(공자孔子)이 보리와 벼를 가장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관중關中의 풍속은 보리 갈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는 《춘추》에서 중히 여긴 것을 상실함이고, 백성의 생활을 손상함입니다. 원컨대 대사농大司農에게 조서를 내려 관중 백성에게 숙맥宿麥을 더 많이 갈도록 하여 시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대개 (오행五行으로 말하면) 벼는 목木이기 때문에, 목이 왕성旺盛하면 나고, 금金이 왕성하면 죽는다. 보리는 금金이기 때문에, 금이 왕성하면 나고, 화火가 왕성하면 죽는다. 그러므로 가을에 벼를 거두어 겨울과 봄에 먹고, 여름에 보리를 거두어 여름과 가을에 먹는다.

가난한 백성은 저축이 없으나, 식량이 떨어질 때가 되면 문득 새 곡식이 나서 호구糊口한다. 그래서 보리와 벼 농사 가운데 하나만 흉작이어도 백성은 굶주린다. 그러므로 성인이 보리와 벼를 중히 여긴 것이다.
보리에는 봄보리와 가을보리 두 종류가 있다. 그러나 당초에는 같은 종자였던 것을 사람들이 심는 시기를 달리하다 보니, 세월이 오래되며 두 종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봄에 심은 것도 여름이 되면 마르는 것은 가을보리와 같으니, 이는 본성이 금金이기 때문이다.
《맹자》에 "일지日至 때에는 익는다"라고 한 것을, 주註에서 ‘일지 때는 익을 때이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틀린 것 같다. 《맹자》에 일지를 말한 곳이 두 군데 있는데, "천세千歲의 일지"라 한 것은 동지冬至이고, 여기서 말한 일지는 하지夏至이다.

주나라가 동천東遷한 뒤 시월時月의 명칭이 바뀐 것은 《춘추》에서 상고할 수 있다. 지금의 11월은 주 나라의 봄 정월[春正月]이고, 지금의 5월은 주 나라의 가을 7월[秋七月]이므로 동지와 하지란 명칭이 드디어 없어졌으나, 춘지春至와 추지秋至라고는 할 수 없어 다만 일지라고 칭했을 뿐이다. 하지는 곧 보리가 익는 시기이다.
가을에 파종하는 것을 숙맥宿麥이라고 한다. 지금 경기京畿 백성 가운데 가을보리를 파종하는 자의 1/3은 그 밭이 메마르기 때문에 오줌을 주지 않으면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남쪽 지방에서도 다같이 가을보리를 파종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오줌 주는 걸 알지 못한다. 오줌은 보리를 더욱 무성하게 하므로, 오줌 주는 것은 이미 변할 수 없는 풍속이 되었다.

원나라 호안락전胡顔樂傳에 “백성들이 오줌 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준다”고 했으니, 이는 반드시 가을보리에 주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중국도 우리나라와 풍속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이학통록理學通錄》 외편外篇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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