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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과식물은 그 뿌리에 뿌리혹박테리아라는 공생균이 있어 대기에 있는 질소 성분을 식물이 흡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효과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전통농업에서도 콩과식물을 다양하게 활용해 왔다. 하지만 근래 화학비료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콩과식물의 활용도가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땅심은 오히려 나빠지게 되었고, 지금은 다시 콩과식물의 기능과 역할에 다시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휴경기 콩과식물 재배해 땅심 높여


돌려짓기는 농작물의 친환경적 병해충 관리와 토양관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돌려짓기에는 판매용 재배작물의 종류를 매년 다르게 하는 방식과 중간에 풋거름작물을 기르는 방식이 있다. 농가가 수익성이 높은 작물의 연속재배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고 신기술을 익히기에는 부담이 되므로, 작물 재배가 없는 휴경기에 풋거름작물을 이용해 돌려짓기를 실천하면 된다.

풋거름작물 돌려짓기는 토양에 질소 등의 양분을 공급하고 흙의 입단화(흙 입자가 분비물과 미생물의 활동으로 자연 결합돼 중간중간 뭉쳐 있는 것. 흙 안 공기와 수분의 밀도)를 촉진한다. 이는 이어짓기에서 비롯되는 병원균의 순환을 끊어 뒷그루 작물의 병해를 막는다. 또 다른 풀이 나지 못하게 하고 땅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겨울철 휴한기에는 콩과와 화본과 식물을 재배할 수 있다. 콩과 식물에는 헤어리베치(털갈퀴덩굴)·자운영·토끼풀 등이 있다. 이들 식물에 기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는 공기의 질소를 양분으로 바꿔 주는 고정 효과가 있다. 털갈퀴덩굴의 경우 10a(300평)당 20㎏까지 질소 공급이 가능하다.

보리·호밀·수단그래스 등은 대표적인 화본과 식물이다. 염분이 많은 토양에서 이들을 재배하면 염분은 흡수하고 양분은 조절해 토양의 유기물 함량을 높여 준다. 이들은 또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려 아랫부분의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고 흙에 공기가 잘 통하도록 만든다.

전문가들은 콩과와 화본과 식물을 함께 재배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콩과 식물은 분해가 빨리 이뤄지므로 생육기간이 긴 작물은 후기에 다시 한번 비료를 줘야 하는 반면, 화본과 식물은 분해 속도가 느려 후기 양분 공급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 화본과 식물만 키웠을 경우 생기는 질소 부족 현상도 콩과 식물이 보완할 수 있다. 여름에는 하우스에 작물이 없는 2~3개월 동안 네마장황 등을 풋거름으로 재배하면 선충 억제, 염류 제거, 질소 고정, 유기물 공급 등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선충을 없애는 효과가 탁월하다.

풋거름작물은 위치와 시기·목적에 따라 선택하고 파종과 수확을 적기에 해야 한다〈표 참조〉. 풋거름작물 종자는 일반 종자판매상을 통해서도 구할 수 있지만, 주요 풋거름작물인 헤어리베치(털갈퀴덩굴)·자운영·호밀·청보리는 연초에 미리 관할 읍·면·동 주민센터에 신청하면 가을에 무료로 받을 수 있다. 

◇ 도움말=이연 농촌진흥청 유기농업과 연구관 ☎ 031-290-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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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s.worldwatch.org/nourishingtheplanet/food-fight-global-crop-diversity-trust-crop-topics-hunger-agriculture-la-tomatina-science-nyu-stanford-harvard-berkeley-africa-hunger-general-anthony-zinni-cary-fowler-climate-change-egypt-tunisia-env/


해마다 1940년대에 만들어진 기념일에 스페인의 Buñol이란 마을에 수천 명이 모여 라 토마티나La Tomatina라고 하는 "먹을거리 싸움"에 참가해 엄청 더러워지도록 신나게 서로를 향해 토마토를 던진다. 거리는 피로 물든 것 같지만 사실은 토마토이다. 


그러나 이름 난 잡지인 Science와 the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먹을거리 싸움을 매우 어렵고 더욱 치명적인 형태로 겪을 것이다.


한 무리의 연구자들이 아시아와 유럽에서 기후변화와 전쟁 사이의 역사적 고리를 조사했다.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들은 온도 변화와 전쟁의 횟수 사이의 눈에 띄게 높은 상관성을 밝혔다. 그들의 설명? 기후변화는 "토지의 수용력에 중요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와 결국 "1인당 식량 공급에 영향을 준다." 그들의 말에서 "그러한 재난으로 가는 길은 농업 생산량 감소를 통해 이루어진다." 추측한다면, 중국, 미국, 영국의 기관에서 일하는 이 연구자들은 건조지역에서 기후변화와 전쟁 발생 사이의 가장 높은 상관성을 발견했다. 바로 그 지역의 식량공급은 기후의 변동에 취약할 것이다.


버클리대, 뉴욕대, 하바드대, 스탠포드대에 기반을 둔 다른 연구자 무리는 아프리카에 초점을 둔다. 그들도 "더 따뜻한 해는 전쟁이 일어날 공산을 매우 높게 만드는 것과 함께 .... 내전과 온도 사이의 강한 역사적 관련"을 발견했다. 우리는 앞으로 아프리카에서 무슨 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가?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미래 온도 경향의 기후 모델 예상과 결합될 때, 이는 온도에 대한 역사적 반응에서 2030년까지 군사적 충돌이 약 54% 증가하거나, 만약 미래의 전쟁이 최근의 전쟁처럼 치명적이라면 추가로 39만 3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2030년에 예상된 온도 증가는 세기말에 예측된 일부임을 명심하자. 하나가 어떻게 세계 평화와 안보에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도 몸서리난다.


그 점은 군사 지도자들에 대해서 잃지 않았다.


식량 폭동이 인도의 서부 벵갈의 주에서 일어나고, 멕시코에서 또르띠야 가격이 오르고, 11명이 미국 삼사성 장군이 은퇴한 2007년은 기후변화가 세계의 가장 불안한 일부 지역에서 불안을 상승시킬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보고서가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정적인 지역조차 긴장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이런 군사 지도자들은 기후변화가 사회갈등과 종족할살 및 테러리즘 육성의 인큐베이터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중동에서 그들은 "긴장의 증가, 경제적 붕괴, 군사적 충돌을 위한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시아가 가장 어려운 지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후변화는 경제적 어려움, 기아, 불안정과 심지어 전쟁이란 농업 문제의 원인이 된다. 좋은 그림이 아니다.


우리는 식량과 정치적 불안 사이의 고리를 입증한 학술지에 실린 통계적 상관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는 없다. 쌀값이 200%나 급등하고 밀과 옥수수는 100% 이상 올랐을 때인 2007~2008년만 돌아봐도 그렇다. 온 세계에서 폭동은 일어났고, 적어도 한 정부는 그 결과 무너졌다. 올해 식량 가격은 기록적인 수준으로 돌아왔다. 튀니지 정부는 무너졌고, 이집트는 벼랑에 서 있다. 두 사례에 식량 문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에 섞여 있다.


현재 두 영국 정부 기관이 세계의 온난화가 인도의 농장의 생산량을 1/4로 줄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주요 산물의 생산량에 비슷한 감소는 사이언스에 아프리카에 대해 예견되어있다.


명백한 기후변화와 안보는 식량 생산량에 대한 기후변화의 충격에 의해 서로 결합된다. 이런 고리가 앞으로 세계 평화와 안보를 약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진니 장군이 말했듯이, 우리는 지금 행동할 수 있거나 "우리는 군사 비용으로 나중에 지불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삶을  포함할 것이다. 인간 통행료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기후변화에 대한 농업을 준비하는 것이 군사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아직 이것은 개발이 우선되는 순간에만 등록이 시작될 것이다. 국가 뒤의 국가와 작물 뒤의 작물,  농부는 농지에 높아진 온도에 적합하고 새로운 병해충에 적합한 새로운 품종이 필요해질 것이다. 


새로운 품종은 작물다양성 없이는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만약 과거가 도입부라면, 우리는 식량 생산량의 증가, 특히 기후가 변하는 세계를 위해 필요한 작물다양성의 보존이란 사실을 손에 쥐어야 한다. 



칼을 버리고 보습을?


본질적으로 친니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좋은 군사적 판단으로 미래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적어도 칼을 버리고 보습으로 전환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그러한 단호한 현대의 적인 기후변화에 맞서 그들은 2500년 전 손자가 손자병법에서 말한 가장 훌륭한 군사적 업적은 싸워서가 아니라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것이란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좋은 소식은 군비가 모든 나라 사이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은 드물다. 2008~2009년 세계 군비 소모 증가분의 1%의 반이라도 작물다양성의 보존과 효용을 영원히 확실하게 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기부에 투자하는 것은 우리의 기후변화-작물다양성에 대한 농업의 싸움에 가장 잠재적 무기를 유지하기 위한 수입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방법을 생각하라. 기후변화와 전쟁 사이의 고리를 자르는 데 실패하는 것은 안보의 위반과 전쟁에 대한 위협으로 대표된다. 기후변화에 대한 농업을 채택하기 위한 쉬운 단계를 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피할 수 있는 위협을 일으키는 실패이다. 잊을 수 없는 메시지는 우리의 초기 경보 체계로부터 온다. 만약 우리가 먹을거리 싸움을 멈추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작물다양성을 보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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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의 계단논으로 유명한 자인마을. 이곳에선 숲의 나무를 해가는 걸 마을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바로 연중 수시로 내리는 비로 인한 토양침식을 막고, 숲에서 발원하는 수원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해서이다. 산에서 땔감을 못하는 대신 자인마을에서 택한 방법: 1) 계단논 주변 비탈 등에 나무를 심는다. 2) 돼지똥을 활용해 메탄가스를 발생시킨다. 3) 계단논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장에다 팔고 땔감을 산다. 이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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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수

(주) 이장 대표이사


들어가며

나는 한 달에 5-6회 정도, 지역의 농업기술센터나 농촌마을로 농촌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러 다닌다. 이 자리에서 나 스스로를 바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내가 살아온 궤적을 더듬다 보면 이건 영락없는 바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학자처럼 한 가지 연구만 하고 한 분야에서 일했다면 아마 바보소리도 안 들었을 것이고 내 스스로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학에서 환경학으로, 환경학에서 농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이제는 학술연구는 뒷전에 둔채, 농업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뒹굴다 보니 지난 세월이 바보같기만 하다.


공학에서 환경학으로, 그리고 유기농업으로

80년대 초반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웃 활동을 했던 나는 산에서 쓰레기 비닐봉투 줏는 일이 싫어 자연적으로 분해되는 비닐봉투를 만들면 좋겠다 싶어 공업화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대학은 환경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경찰들이 학교를 들어와 진을 치기 일수였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감옥에 가거나 생명을 맞바꾸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였다.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그래서 나도 주로 대학본부 잔디밭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써클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저 그렇게 대학 4년이 지나갔다. 사명감이 투철한 이는 노동현장으로 갔고 어떤 이는 취직을 했고 어떤 이는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나는 노동현장에 갈 만한 자신도 없었고 취직하기도 싫었으며 대학원에 진학해서 다이어트용 감미료, 자외선 차단섬유를 만드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 꿈을 다시 떠올렸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는 환경공부를 하는 전문적인 대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대학원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지겹기만 하던 공학책과 달리 환경에 관련된 책은 재미있었고 실험실을 떠나 산으로 들로 나가서 하는 일이 신나기만 했다. 대기오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던 날, 갑자기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목표가 달성된 탓이라 생각했다. 그 허무감이 오래가면서 내가 공부한 것이 허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 공부는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기오염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사후약방문적인 처방을 할 뿐이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환경교육에 집중했다. 환경문제라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이 바뀐다면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까 해서였다. 환경교육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가 농촌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에게 똑같은 환경교육을 하게 하면 그 차이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물음을 내 스스로 만들어놓고 내게 놀라고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20년이 넘게 농업이나 농촌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나를 그 물음이 농업과 농촌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가 손쉽게 농업과 농촌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책이었다. 서점에서 농업과 농촌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내게 주는 메시지는 온통 ‘절망’뿐이었다. 그 동안 농업정책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고 농촌은 피폐되어 있었으며 농심은 이미 농촌에 없었다. 더구나 농산물 개방이라는 암초가 놓여있었다. 몇몇 학자들이 주장한 농업의 회생방법은 그다지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 즈음 내가 활동하고 있던 환경동아리 ‘초록바람’에서 여름캠프를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농촌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동아리 회원들과 농촌의 중요성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나 자신도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원 중에 한 명이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유기농업....3박4일의 초록바람 유기농업 캠프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환경과 사람을 살리겠다고 묵묵히 유기농업을 고집하고 노력하고 있는 유기농 생산자들을 만나면서 농업과 농촌을 살리고 더 나아가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았다.  


유기물 농업이 아닌 유기적인 농업으로

유기농업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환경과 관련하여 유기농업에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농대에 새로 진학하기보다는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대학원 입학 후 유기농업을 공부하겠다고 하니 지도교수, 선후배 할 것 없이 뜯어말렸다. 하지만 이미 대기오염과 관련한 책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나는 유기농업에 관한 책은 한번 잡으면 밤새워 읽어야 하는 중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유기농업의 개념과 역사를 더듬기 시작했다. 1700년대 후반,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체계이며 농부는 그 체계를 진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던 Thomas Jefferson, 토양중의 박테리아에 관심을 가지고 ‘흙은 살아있다’고 주장하던 Rodale, 독일의 철학자인 Rolf Steiner(1861-1925)의 생명동태 농업(Bio-Dyanamic Agriculture), 영국의  Albert G. Howard (1873-1947)의 『농업성전(Agricultural Testament, 1940)』, 일본의 후쿠오까 마사노부의 사무농법(四無農法, 혹은 자연농법), 고다니 준이치의 애농회(愛農會), 우리나라의 정농회와 한 살림 등에 관한 책과 자료를 보았다.

 

기본적으로 유기농업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영향이 최소화된다. 하지만 생태계는 보호되고 안정한 농산물을 만들 수는 있어도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대안도 유기농업일 수 있을까. 이는 유기농업을 유기물질을 사용하는 농업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유기적이라는 말을 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구성요소가 잘 조직되어 있어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둘 이상이 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둘이 아니라 둘 이상이 된다. 즉 우리 몸을 나누면 여러 가지 장기로 나눌 수 있지만 우리 몸은 장기의 단순한 집합을 넘어서 생명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개념에서 볼 때 유기농업은 우선 땅을 유기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땅에는 흙, 수분, 영양분, 미생물, 곤충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한 생명체처럼 활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유기농업이다. 그러면 조금만 토양을 헤치면 각종 곰팡이들로 구수한 냄새가 나고 개미, 굴파리, 응애 등이 분주하게 기어다닐 것이다. 여기서 개념을 조금 더 넓혀보자. 땅을 벗어난다면 농장을 유기체처럼 만들 수 있다. 축사에서는 거름이 만들어지고 그 거름이 논과 밭에 들어가고 그러한 과정에서 농부는 충분한 보상으로 보람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농장을  흐르는 개울 속에는 고기들이 헤엄치고 조그만 뒷산에는 작은 새가 지저귀며 자연의 풍성함을 나눠준다. 마지막으로 이제 유기농산물을 먹는 소비자가 농장을 찾아온다. 생산자와 눈인사를 나누고 팔을 걷어붙이고 논으로 들어가 피를 뽑는다. 저녁이면 모깃불이 피어나는 마당에서 농부와 함께 막걸리를 먹으며 이런 저런 세상이야기를 나눌 때 아이들이 요란을 떠며 모깃불가에서 뛰어논다. 그렇다. 진정한 유기농업은 흙과 농장, 주변환경뿐만 아니라 소비자까지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농업인 것이다. 

 

그 개념에 실마리가 있었다. 유기농업이 단순히 유기물질을 사용하면서 식품의 안정성만 높이려는  농업이 아니라 농업과 농촌을 되살리고 더 나아가 환경과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사회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방법은 도시와 농촌이 하나가 되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


유기농업에서 생태마을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충북의 유기농가들을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여 농부들과 인터뷰를 하고 논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 그 때까지 나는 누구나 하기 쉬운 유기농업 기술을 개발하면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었다.  더욱이 농업기술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술이라기 보다 토착적이고 지역적인 기술이다. 이러한 농업기술의 특수성을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사학위는 받았지만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론은 유기농산물을 팔리게 하는 것이었다. 유기농산물이 잘 팔리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업으로 전환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더 나은 농산물을 더 쉽게 생산하기 위한 기술도 개발될 것이었다. 증산정책에 혈안이 된 정부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인건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종교, 가치관에 따라 묵묵히 유기농업을 지켜온 생산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줄 수만 있다면 소비자들이 유기농산물을 사줄 것이라 생각했다. 인터넷을 활용하기로 했다. 환경사업 공모에 당선되어 비용도 마련했다. 일년동안 전국의 100여명의 유기농 생산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싸이트도 만들었다. 그 이름이 인터넷 이장이었다. 사이버 공간에 가상 유기농 마을을 만들고 생산자들을 소비자와 연결하는 마을이장의 역할을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홈페이지는 구축되었지만 생각만큼 유기농산물이 잘 팔리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농산물을 판매에 있어서 농산물을 품질과 정보도 중요하지만 물류가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기농산물의 경우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 각기 공간적으로 흩어져 있어 물류를 효율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인터넷 이장에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유기농산물을 구입하고 싶어도 전라도에서 한 물건, 경상도에서 한 물건 구입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농산물 가격보다 유통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다수의 생산자들이 다양한 생산물을 모아 소비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든다면 해결 가능성이 보였다. 생산자들을 모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공간이 어디일까 고민하였다. 내가 찾아낸 것은 바로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주민들이 함께 다양한 작물을 유기농업으로 전환하고 소비자들은 한 마을을 고향 삼아 농산물도 사먹고 주말이나 휴가철에 찾아갈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바라던, 진정한 유기농업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호주로 갔다. 호주에는 퍼머컬쳐(Permaculture)라는 생태마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육과정이 있었다. 두 주간의 교육과정을 포함하여 한 달간의 호주 체류었지만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호주에서 돌아와 지금은 우리나라 농촌마을을 생태마을로 발전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로,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하였다. 이제는 대학원 후배들과 환경동아리 초록바람 친구들을 중심으로 모인 직원 30명이 우리나라 농업과 농촌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우리보다는 우리의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는 회사가 되어 있다.


끝내며... 지역운동으로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했듯이 나는 바보같이 살아왔다. 일관된 한 가지 분야에서만 일을 하지 못했다. 이제 마을일에서 한계를 느낀다. 한 마을이 잘 가꾸어진다고 해서 생태마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을을 넘어서 지역 내의 인적, 물적 자원이 있어야 하고 이 자원을 잘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호주를 방문했을 때 크리스탈 워터즈라는 생태마을 인근 도시에 각종 협동조합과 지역화폐 등 다양한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이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지역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작년 8월 충남 서천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좌충우돌 생활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바보 짓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또 다시 저지를지 모르는  바보 짓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




<참고> 크리스탈워터즈와 퍼머컬처


1. 크리스탈 워터즈 생태마을


    크리스탈 워터즈는 1965년 일단의 전문가들이 259ha(약 80만평)에 조성한 생태마을이다. 이 지역은 목축을 위해 삼림을 베고 초지를 조성했다가 생태계가 파괴된 광활한 구릉지였다. 땅을 구입한 후 적절한 토지이용계획을 구상하였는데 0.5ha(약 1500평, 전체면적의 14%) 규모의 83개로 나누어진 대지와 회합, 교육, 생태관광 사업, , 방문자 숙소, 가내수공업 등에 이용하는 공동체 공간 15ha(4만5천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토지를 농경지, 삼림, 소하천으로 보전하거나 새롭게 조성하게 된다. 이러한 전체 토지이용계획 과정에 깊게 참여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태설계자인 맥스(Max O Lindegger)인데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이 곳에는 호주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이주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곳을 설계한 맥스, 생태전문교육기관인 SEED(Sustainability education and ecological Design)에서 일하는 모랙과 이반(Morag Gamble, Evan Raymond)를 비롯하여 전업농, 재택근무자, 농자재 판매업자, 예술가 등이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에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자신의 주거환경을 퍼머컬쳐에 의거하여 조성해야 하고 마을내의 야생동물과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주거형태와 공동체적 생활양식이 전 지구적인 생태환경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대안으로서 자리잡게 했다는 선구자적 업적으로 인해 1995년 UN에서 세계주거단지상(World Habitat Award)를 받기도 했다.


2. 퍼머컬쳐 디자인


    퍼머컬쳐는 permanent(영구적인)와 cultivation(경작) 혹은 culture(문화)의 합성어로  호주의 빌 모리슨이 보다 생태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농장을 경영하며 더 나아가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생활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영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인류문화를 만들고자 시도하고 있는 방법론을 일컫는 말이다. 퍼머컬쳐에 대해 크리스탈 워터 공동체에서 펴낸 교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퍼머걸쳐는 작은 발코니에서 농장에 이르기까지, 도시에서 야생지에 이르기까지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개념이다. 퍼머컬쳐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해주는 식량, 에너지, 집, 물질, 서비스 생산할 수 있는 환경과 제반 기반구조를 만들 수 있다.  퍼머컬쳐는 우리 주변의 환경과 자원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고 어떻게 우리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퍼머컬쳐의 목적은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퍼머컬쳐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세심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즉 닭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닭의 습성, 닭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닭이 생산하는 것 등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해두어야 한다. 그래서 닭의 습성에 알맞고 가급적 농장에서 나오는 것으로 닭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닭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농장에서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요소가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연결될 수 있게 설계하고 관리하는 것이 퍼머컬쳐의 핵심이다. 즉 닭장은 집과 가까워야 사람이 먹은 음식쓰레기를 닭에게 먹일 수 있고 채소 밭과 가까우면 닭이 채소밭의 곤충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한편 닭똥을 이용하기 위해 퇴비장과 닭장이 가까운 것이 좋고 닭장과 온실을 붙여 짓게 되면 겨울철 온실 난방비를 닭의 체온 덕분으로 절약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계획과정은 구역계획(Zonning)으로 체계화된다. 집과 가까운 쪽에 관리를 많이 해야 하는 축사, 퇴비장, 텃밭 등을 위치시켜 상호관련성을 증대하고 먼 지역일수록 관리가 덜한 과수, 조림지 등을 위치시키는 방법이 바로 구역계획이다.

 

    퍼머컬쳐가 농장설계와 운영에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구역계획, 토양관리, 작물관리 등 농장과 연관되는 분야가 많기는 하지만 건축, 수자원 관리, 도시 공동체 운영, 지역경제의 활성화, 공동체 복원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다양한 개념들과 방법을 퍼머컬쳐라는 개념하에 통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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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이란 처참한 일을 겪은 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하나의 유령이 남북한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흰쌀밥에 고깃국"이란 이름의 신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도록 노력하자고 경주했고, 사람들은 평생 소원이 고깃국에 흰쌀밥을 말아 배터지게 먹는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북한이 앞서는 듯했다. 누구는 일제강점기 남쪽은 식량생산기지였지만 북한은 공업지대라서 그런다고 한 듯하다. 누가 그랬는지는 기억나제 않는다. 내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후회할 뿐. 아무튼 그런 헛소리가 어떻게 나왔나 모르겠다. 북한에다 2차 유럽전쟁과 미일전쟁 때 남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건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걸 세워 착실히 공업화의 길을 밟아 나아간 결과일 뿐이다. 그에 자극 받은 장면 정부에서도 카톨릭인가 개신교인가 쪽의 연줄을 통해 미국에서 지원을 받아 경제개발을 추진하려 했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우리의 박 장군! 소시적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는 데에는 도가 텄으니, 난 그가 여순 사건에서도 활약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라웠다. 역시나 그 탁월한 능력으로 4.19혁명 이후 아직은 어수선한 정국을 놓치지 않고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다. 아, 아직도 그 한 장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멋진 검은 색안경을 끼신 땅땅한 그 자태, 그리고 그 옆을 듬직하게 지키던 영화배우 김원희인가와 똑같이 생긴 차씨 아저씨의 모습을... 사진이 있나 찾아봤더니 여자배우 김원희만 잔뜩 나온다. 우씨. 참 이게 김원희 씨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름름한 자태를 보라!



이제 본격적으로 가난하고 배고픈 조국을 새롭게 바꾸기 위하여 특유의 군바리 정신, 대일본 관동군 방식으로 국민을 몰아치기 시작한다. 먼저 국내 정치 기반을 잘 닦는 한편, 1960년대에 있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유명한 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2년 5개월만에 역사하신 경부고속도로.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하면 빨갱이~


나를 파라!



어째 사진에서 보이는 구호가 4대강 뚫는다는 요즘 모습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씁쓸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쥐박이 대통령께옵서도 색안경 끼고 나오면 이상하게 비슷하더군. 하지만 길은 뚫린다. 길이 뚫리고 심장부터 발끝까지 혈관이 새로 뚫린 듯 자동차가 화물이 무섭게 하나둘 달리기 시작한다. 

새것과 헌것의 공존.




이제 슬슬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 쉬발~ 길도 뚫고, 일본한테 빌어서 돈도 구해오고 공장도 짓고 하는데, 일할 새끼들이 안 보이네?' 지금 같으면 외국사람들 데려다 시키겠지만, 거기도 지금처럼 이렇게 일하러 올 사정은 되지 않고... '아! 농사꾼들이 있었지. 일단 값싸게 그놈들 먼저 데려오자.' 이렇게 하나하나 옆집 철수 형, 우리 영희 누나가 도시로 도시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오는 도시의 신기한 물건들은 아이들에게 '도시에 나가면 흰쌀밥에 고깃국도 실컷 먹고, 테레비에서 재미난 것도 많이 보고...' 하는 엄청난 환상을 심어준다.




그때 시작된 새마을운동. 아직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건 미신 타파! 새로운 마을 조성! 을 외치며 중국의 문화혁명 못지 않게 농촌 마을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친다. 그것이 결국 이농과 공업화, 농촌의 식량 생산기지화와 맞물려 있는 건 아닌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정부는 후쿠오카의 발달한 논농사 방법을 온 일본으로 퍼뜨리기 시작한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성.장! 이다. 그때는 흰쌀밥에 고깃국! 이라는 구호가 그것을 대변하고, 지금은 국민소득 2만 딸라 이상의 선.진.국! 일본의 메이지정부도 그걸 놓치지 않고 우리가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세운 이유는 여러분에게 흰쌀밥을 실컷 먹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해야 했기에, 후쿠오카의 농법에 기반하고 서양의 발달한 농법을 접목- 줄모, 긴네모꼴 못자리, 말 쟁기질, 소금물 가리기, 화학비료, 품종개량 등등 -하여 생산량 증대와 경작지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 

 

사실 일본도 그 이전에는 강 하구의 평야지대에서나 논농사를 지었지 대부분은 밭농사나 산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농지 정리나 관개법 등은 중국이나 서양을 시찰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들여오지 않았을까 하는데, 밭농사 중심의 생활이다 보니 바닷가의 수산물과 산간 지방의 농림산물을 서로 교환하는 형태로 먹고 살았다. 더구나 평야에서 논농사를 짓는다는 건 자기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하는 일... 전란이 많았던 일본에선 전시가 되면 농민이 군인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목숨 걸고 논농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산으로 다니며 화전이나 부쳐 먹는 게 더 속이 편했을 게다. 그래서인지 일본 박물관이나 자료를 뒤지면 화전에 대한 기록이 참 많이 나온다. 그 나라의 자연조건이 또 거기에 알맞기도 하고... 그래서 일본 한자에서 밭은 우리의 田이 아니라 畑이지 않은가? 밭에다 불을 놓은 형상이 밭이고, 우리의 밭 전 자가 논두렁으로 구획이 나누어지는 논이다.

 

일본의 메이지정부가 야심차게 쌀 생산량 증대를 꾀하면서 쌀까지 배급해 주기에 이르니, 이런저런 걸 통해 쌀맛을 본 사람들이 이거 쌀 아니면 못 먹겠다며 쌀에 환장해 버린다. 그러니 자연히 생산량이 새로운 농법의 도입으로 늘었다지만 그 수요를 다 맞출 수 없게 된다. 거기다가 전쟁까지 벌이러 꿍꿍이를 세우니 군량미 등으로 얼마나 많은 쌀이 필요하겠는가.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용할 양식이니 말이다. 결국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식량 생산기지로 전락한다. 일본이 권업모범장-농사시험장을 세워 조선의 농업을 발전시킨(?) 이유는 다 그런 꿍꿍이에서 나왔을 게다. 조선의 근대화? 그것도 더 말하면 잔소리!

 

쌀맛은 참 기가 막히다. 요즘도 현미잡곡밥을 먹다가 어디 식당에 가서 흰쌀밥,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쌀밥을 먹으면 그냥 밥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진짜 꿀떡이 따로 없다. 몇 숟가락 안 떠 먹었는데 밥은 어디로 다 사라지고 없다. 당시 일본도 그러지 않았을까? 잡곡밥 위주로 먹던 사람들에게 메이지정부는 흰쌀밥의 맛을 일깨워준다. 조국의 근대화란 이런 것이다! 보아라, 그리고 먹어라~! 너희를 구원하는 건 이 메이지 정부다!

 

그리고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일본을 통해서 흰쌀밥을 접하게 된다.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어르신들 만나 일정 때 이야기라도 꺼낼라 치면, 대뜸 그놈들이 얼마나 독한지 땅 파고 묻어 놓은 것까지 다 뺏어 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야 다들 잡곡밥을 주로 먹었을 테고, 나랏님이나 양반님네들이나 그런 높고 귀하신 분들이나 흰쌀밥을 먹겠거니 했다. 그리고 논농사도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넓지 않았을 테고, 넓었다고 한들 내가 부쳐먹을 땅이 있으니 소작을 해서 양반님네한테 바친다손 쳐도 내 식구 먹을 떼거리는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 판에, 나라의 마마까지 일본놈들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나, 나랏님도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지를 않나 흉흉한 소문에 팍팍한 세상살이가 되었겠지. 그런 판국에 이놈들이 뭐 빠지게 일해서 농사지어놨더니 이런 도둑놈들도 도둑놈이 없지, 농사지은 거에 비료값이다, 종자값이다, 무슨 값이다 하면서 다 제하면 30% 떨어지면 잘 떨어지는 것이니 열받지. 그래도 꾹꾹 참으며 농사꾼이 땅파먹지 않으면 뭐해 먹겠냐, 다른 걸로도 끼니나 때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농사만 지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이 벌어지고,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미일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생활은 참담해진다. 그러면서 뼛속 깊이 새겨진다. 내 꼭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세상을 한번이라도 봤으면 좋겄네! 그리고 그게 그 뒷세대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박정희는 그 민심을 읽고, 내가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마! 나를 따르라~ 대신 조용히 해. 아무것도 묻지도 말고 따지지 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까라면 까고, 맞으라면 맞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 그런데 어디 사람이 그런 존재인가. 모두 자신의 자유의사가 있고, 누구나 자유롭다는 헌법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참 어두운 시대였다. 

 

박정희는 결국 1977년 식량자급율 100% 달성이라는 발표를 하고 조국의 녹색혁명을 완수한다. 하지만 그의 공업화와 녹색혁명으로 잃은 것들...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정치와 문화생활, 작물다양성을 비롯한 생물다양성, 지속가능성, 지역 균형발전, 고르고 균등한 분배, 동등한 출발선,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기본권 등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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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전통농업 - 테라 프레타Terra Preta

 

 

 

환상의 엘도라도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는 수많은 탐험가와 정복자 들이 스페인에서 라틴아메리카로 건너갔다. 그들 가운데 아마존을 탐색한 프란치스코 드 오렐라나Francisco de Orellana가 있다. 큰 강의 일대를 항해하고 아마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때이고, 용감한 여전사에게서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중에 아마조네스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1542년에 아마존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리오 네그로Rio Negro 유역을 탐험했을 때는 농장과 마을 및 거대한 성벽을 두른 도시까지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그 100년 뒤. 황금에 매료된 사람들이 숨겨진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선교사를 포함해 누구 한 명 오렐라나가 보았던 도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다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며 수렵채집을 하던 사람들뿐이었다.

 

 

오렐라나의 두상. 탐험가라기보다 애꾸눈 해적의 느낌이다.

 

 

가운데를 관통하는 강이 리오 네그로.

 

 

과학자들도 오렐라나가 허풍을 떨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까닭은 농업에 있다. 어떠한 문명이든 그 탄생의 핵심에는 농업이 있다. 생산성이 높은 농업이 없으면 많은 인구를 먹이지 못한다. 열대우림은 언뜻 보면 생산적인 듯하지만, 그 흙은 농업에 알맞지 않다. 현대의 화학 자재를 쓰더라도 아마존의 척박한 흙에서는 지속적으로 식량을 생산할 수 없다.

 

“아마존에서 지속가능한 농업을 개발하려는 온갖 노력은 실패하고 있다.”

 

스미소니언 학술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의 베티 메거스Betty Meggers 교수도 이렇게 기술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선주민들이 번영한 도시문명을 이룩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 과학자 대부분의 합의였다.

 

 

고대 볼리비아 문명의 발견

 

하지만 1960년대에 고고학자 빌 데네반Bill Denevan은 모호스 평원(Llanos de Mojos)에서 기묘한 직선의 줄무늬 도안이 있다고 지적한다. 모호스 평원은 오렐라나가 항해한 아마존 하류를 2000㎞나 거슬러 올라가 볼리비아에 있는 사바나 초원이다. 홍수와 건조한 날씨가 번갈아드는 극단적인 기후 조건이라, 작물도 재배하기 어렵고 사람도 조금밖에 살지 않는다.

 

 

모호스 평원.

 

 

그런데 펜실베니아대학교 박물관의 고고학자 클락 에릭슨Clark Erickson은 이 데네반의 발견을 더욱 탐구한다. 에릭슨 박사가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드넓은 사바나 평원 군데군데 수많은 숲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오아시스에서는 명확히 인류가 주거했다고 보이는 흔적이나 기원전의 토기 파편이 발굴되었다. 도기의 수는 수렵채집인이 썼다고 보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너무 많았고, 높이 18m의 제방까지 있었다. 1617년 스페인 사람들이 행한 원정에서도, 마을마다 이어지는 높은 제방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항구적인 주거지,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문명이 일찍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시리오노족Siriono族이 쓰는 말도 과거의 단서가 된다. 옥수수나 면, 염료식물에 대한 단어가 있는 것은, 이전에는 수많은 작물이 재배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툴레인Tulane대학의 윌리엄 발리William Balée 교수는 2000년 전에 재배되었던 식물의 단어까지 있다고 기술한다.

 

인류학자 마이클 헤켄버거Michael Heckenberger도 중앙 아마존에서 쿠이쿠루족Kuikuru族과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 그 복잡한 사회구조에 놀랐다. 아마존의 수렵채집 부족은 소규모에 평등한 구조라는 것이 그때까지의 견해였다. 하지만 헤켄버거에 따르면, 쿠이쿠루족의 계층구조는 아무리 보아도 300명의 규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쿠이쿠루족은 인류학자가 말하는 수렵채집인이 아니라, 옛날에는 지금보다 몇 배의 규모인 복잡한 사회, 오렐라나가 말한 ‘선진사회’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쿠이쿠르족의 부족민 그림.

 

 

에릭슨 박사와 발리 교수는 평원에 남은 쭉 뻗은 제방이 홍수를 막으려고 인공적으로 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것과 나란히 뻗은 운하도 옛날에는 사람이 관리하며 물을 댔던 자취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평원을 보면 보이는 줄무늬 도안도 높은 두둑의 밭 체계에서 나온 유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넓이는 몇 천 평방킬로미터에 미친다.

 

“이는 이집트 사람들이 했던 일에 필적합니다.”

 

에릭슨 박사는 말한다. 곧 일찍이 볼리비아에는 거대한 문명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관개나 밭의 유적이 있다고 해도, 농업에 알맞지 않은 열대에서 어떻게 옛날에는 몇 십만의 사람을 먹였을까?

 

 

기적의 흙 테라 프레타

 

숲을 베고서 모조리 태운다. 이른바 부대밭 농업은 지속가능한 농법이 아니다. 열대우림의 토양은 위약하고 척박하여, 숲을 베어 없애면 강한 햇빛이나 호우에 드러난 토양에서 양분과 미네랄 성분이 곧바로 용탈된다. 그 결과 나중에는 사막이 된 불모의 땅밖에 남지 않는다. 아마존 토양의 대부분에서는 1모작 이상 할 수 없다. 화학비료를 써도 같은 곳에서 3모작의 수확까지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요컨대 대규모 농업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생태주의자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에 먼저, 신출내기 연구자였던 네덜란드의 토양학자 빔 솜브로크Wim Sombroek는 아마존의 땅을 여행하다가 놀랄 만큼 풍요롭고 비옥한 토양을 발견한다. 솜브로크는 나중에 국제 토양 조회·정보 센터(International Soil Reference and Information Centre)의 소장, 국제 토양과학 학회(International Society of Soil Science), 현재 국제 토양과학 연합(International Union of Soil Sciences)의 사무국장이 된 인물인데, 그의 1966년 저작 “아마존의 흙”은 브라질 사람들이 테라 프레타Terra Preta라고 부르는(지금은 아마존의 검은 흙Amazonian Dark Earth) 기묘한 흙을 처음으로 보고한 연구 보고서가 되었다.

 

 

검은흙, 테라 프레타.

 

 

이 검은흙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열대에서도 풍부한 수확을 보장한다. 예를 들면 브라질의 아마존 중부 아쿠투바Açutuba에서는 40년이나 거름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박사논문을 위한 연구를 한 이후 테라 프레타에 매료된 바이로이트대학University of Bayreuth의 브루느 글라서 박사는, 그 땅심은 지구에서 가장 비옥하다고 하는 연토양(Mollisols)이나 체르노젬 토양(Chernozems)에 필적한다고 했다.

 

 

연토양

 

 

체르노젬. 

 

“인접한 척박한 땅에서는 타피오카밖에 재배할 수 없는데, 테라 프레타에서는 파파야나 망고 등 수많은 돈벌이 작물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콩이나 곡류의 수확도 비옥한 토지의 배나 됩니다. 게다가 테라 프레타에서는 둘레의 흙보다 약 3배나 많은 유기물, 질소, 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보통을 넘는 바이오숯(biochar)이 있습니다. 다른 토양에서보다 70배나 많은 평균 50t/㏊의 바이오숯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브라질 농업연구공사(Embrapa)의 토양연구자 벤세슬라우 텍세이라Wenceslau Teixeira도 열대 토양에는 일반적으로 모자란 인, 칼슘, 아연, 망간 등의 원소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보통의 열대 토양과 달리, 강한 햇빛이나 호우에 몇 백 년이나 드러나 있어도 땅심이 떨어지지 않는다. 텍세이라 씨는 마나우스Manaus에 있는 농업공사의 시설에 테라 프레타로 밭을 만들고 시험을 행해 그 땅심의 회복력에 놀랐다.

 

“1년생 작물을 재배하여 강한 햇빛이나 비에 드러나는 것은 흙을 망치는 일로서 열대에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40년이나 벼, 옥수수, 타피오카, 콩 등 온갖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습니다.”

 

텍세이라 씨는 지금 바나나와 다른 열대작물도 시험하고 있다.

 

 

 

바이오숯

 

 

 

선주민들의 숯 굽기가 만들어낸 인공 토양

 

이 경이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흙이 어째서 아마존에 있을까? 그것은 어떤 유래가 있을까? 그 정체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토양이 아마존에 사는 선주민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예를 들면 고고학자 빌 우즈Bill Woods는 브라질의 타파호스강Tapajos川을 따라서 수많은 2000년 전의 유적을 발굴했는데, 사람들이 살던 곳의 흙은 어째서인지 인근 열대우림의 그것보다 훨씬 검었다. 엄밀하게 연구한 결과, 색깔 차이는 있어도 둘레에 있는 흙과 같은 것이며 단지 바이오숯이 더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테라 프레타에는 선사시대의 도기 파편이 묻혀 있어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는 곳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곧, 테라 프레타는 인공 토양으로서, 고대의 유적인 셈이다. 글라서 박사는 말한다.

 

“지금은 테라 프레타가 사람이 만들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충분합니다. 우리는 테라 프레타에서 도기의 파편, 인간의 뼈와 배설물, 짐승의 뼈, 거북의 등딱지 조각 등을 찾았습니다.”

 

아마존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테라 프레타는 지금으로부터 500~2500년, 또는 더 이전부터 만들어졌다. 글라서 박사는 말한다.

 

“선주민들은 기원전 4000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서기 1492년에 걸쳐서 테라 프레타를 만들었습니다. 가뭄이나 강우, 그리고 열대의 뜨거움을 2000년이나 견디고, 지금도 땅심을 유지하며 부식을 유지한다는 데에 놀랄 뿐입니다.”

 

유사 이전부터 아마존의 선주민들은 대지를 바꾸고, 그 테라 프레타가 영구적인 농업을 받쳐 왔다. 그리고 그 범위도 놀라울 만큼 넓다. 고고학자들은 테라 프레타의 분포 상황을 조사하여, 오렐라나가 보고했던 곳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찾아냈다. 그 지역은 영국의 배나 될 정도로 드넓다. 캔사스대학의 지리학자로 토양학자인 윌리엄 우즈William I. Woods 교수는 “최대한 아마존의 10%가 테라 프레타이다”라고 기술했다.

글라서 박사는 그 범위는 아무도 모르나 더 넓다고 지적한다.

 

“최근 아마존 중부에 400㎞의 송유관을 부설하는 조사를 하면서 새로운 테라 프레타가 송유관을 따라 10~20㎞마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아마존의 모든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버몬트대학University of Vermont의 고고학자 빌 피터센Bill Petersen은 지금은 오렐라나의 지적이 사실이었다고 본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오렐라나가 진실을 말했다면, 그가 설명했던 주민들은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비참한 일이지만, 유럽인은 선주민이 저항력을 갖지 못했던 병인 천연두, 독감, 홍역을 가져왔다. 곧 오렐라나는 아마존 고대 문명을 직접 눈으로 본 최초이자 최후의 유럽인이 되었다.

 

 

살아 있는 흙

 

하지만 아마존의 선주민이 남긴 유산은 지금도 계속 살아 있다. 테라 프레타를 분석한 토양학자는 그 경이적인 특성, 특히 몇 백 년이나 그 양분의 수준을 유지하는 성능에 놀랐다. 게다가 테라 프레타에는 다른 두드러진 능력이 있다. 마치 살아 있는 듯이 해마다 비옥한 땅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테라 프레타는 그 높은 생산성 때문에 현지에서는 파내서 판매하고 있다. 운동장의 잔디밭에 쓰려고 약 600달러/톤, 인터넷에서는 250g/44유로에 팔린다. 하지만 브루노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판매 목적으로 파내서 약간의 층밖에 남지 않으면, 그것은 재생되지 않습니다. 투입된 이하로 양분을 꺼내도 영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후 조건이 존재하는 곳에서 양분이 투입되는 것보다 적은 범위에서 추출한다면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빌 우즈도 상업적으로 흙을 파내고 있는 현지의 농민을 만났는데, 20㎝의 테라 프레타를 흩뜨리지 않은 채 남겨 두면 약 20년에 걸쳐서 재생된다고 한다. 우즈는 박테리아와 균류의 조합이 이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실은 테라 프레타가 지닌 능력의 열쇠를 쥔 것은, 저온에서 연소된 식물과 부산물로 만든 숯이다. 글라서 박사에 따르면, 테라 프레타는 숯과 불완전 연소된 나무 조각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그것이 흙속에 양분을 유지하며 해마다 땅심을 유지시키고 있다.

 

2006년에 미국과 브라질의 연구팀이 행한 시험에서도 알았듯이, 테라 프레타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보통의 열대 토양보다 훨씬 미생물의 수와 종류도 많다. 열대 토양은 농사땅으로 전환하면 미생물이 급속히 사라지지만, 숯이 있다면 양분이 흡착되어 유실되지 않고 토양 안에 세균이 서식하여 공간도 공급된다. 2007년 3월, 독일 바이로이트대학의 크리스토프 슈타이너Christoph Steiner가 이끄는 연구팀은 보통의 나빠진 열대 토양에 숯가루와 목초액을 더한 것만으로 미생물이 비약적으로 증식하여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생태계가 시작된다고 보고했다. 거름만으로 농사지은 곳과 비교하여 토양에 숯과 거름을 조합한 시험 구역에서는 수확량이 880%나 늘었다.

 

오렐라나는 선주민들이 농사땅을 만들려고 불을 쓴다고 보고했다. 그것이 숯의 기능을 알고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글라서 박사는 말한다.

 

“아마 최초의 테라 프레타는 뼈나 음식 찌꺼기 등을 우연히 더한 것으로 생겼겠지요. 그리고 대량의 숯은 요리나 영적인 목적 때문에 저온의 불꽃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브라질 상파울로대학의 고고학자 에두아르도 고에스 네베스Eduardo Göes Neves도 선주민들이 의식하고 토양에 숯을 넣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가정 쓰레기를 처분하면서 우연히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농업 생산을 받치는 자원이 되었다.

 

 

세계가 주목한 테라 프레타

 

중국과 사헬Sahel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토양 회복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현재 많은 프로젝트는 다만 나빠진 흙을 이전 수준까지 되돌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열대 지역의 흙 대부분은 원래 생산성이 낮은 자연 상태에서는 척박하여, 그것이 빈곤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곧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테라 프레타를 발견한 솜브로크는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꾸는 비밀이 테라 프레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착안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어 테라 프레타를 현대에 되살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녹색혁명이 개발도상 지역에서 작물의 수확량을 극적으로 개선했듯이, ‘테라 프레타 노바Terra Preta Nova’란 새로운 테라 프레타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자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솜브로크는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2003년에 죽었다. 하지만 테라 프레타의 기원과 기능을 조사한 국제적인 공동 연구를 발족시키는 일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루노 박사는 지금 테라 프레타가 부활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과학적인 홍보도 있어서 지금 아마존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유산을 자각하고 새롭게 테라 프레타 노바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1996년에 아마존에서 일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일부의 사람들, 일본계 이민자 정도밖에 테라 프레타의 높은 생산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마존만이 아닌 온 세계가 테라 프레타에 주목하고 그것을 모방하려 하고 있습니다.”

 

테라 프레타는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는 일에도 도움이 된다. 현재 농업은 인위적인 지구온난화 가스의 1/8 이상을 발생시키고 있다. 깊이갈이 때문에 토양에 함유되어 있던 유기물이 땅거죽에 드러나면 이산화탄소가 방출된다. 하지만 솜브로크는 세계 각지에서 테라 프레타를 만들면, 그것이 토양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암 I. 우즈에 따르면 숯을 풍부히 함유한 테라 프레타는 전형적인 열대의 흙보다 탄소가 10~20배나 많다. 그리고 2007년 코넬대학의 토양학자 요하네스 레만Johannes Lehmann은 과학지 ‘네이처Nature’에서, 임업과 묵히는 밭, 1년생 작물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숯으로 만드는 것만으로 미국이 화석연료로 방출하는 탄소의 약 1/3을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라 프레타 노바에 탄소를 격리하는 것으로 온 세계의 화석연료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테라 프레타는 온난화에 대한 내성도 있다. 브루노 박사는 테라 프레타에 거는 기대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항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토양침식과 관련하여 지구에서 가장 극단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의 전형적인 토양 페랄솔ferralsol이 지상에서 가장 척박한 흙이라는 점이 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후의 농업은 극단적인 기후변동, 가뭄, 호우, 고온 등의 과제에 대처해야만 합니다. 인구 증가와 사막화로 농지에 대한 압력도 높아질 겁니다. 테라 프레타는 이러한 과제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테라 프레타는 지속적 농업의 전형입니다. 사막화된 토지의 농지 이용과 탄소 격리 및 땅심의 유지와 증가를 통해 기후변동 완화 등 수많은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테라 프레타는 다른 지역에서도 쓸 수 있다고 기술한다.

 

“지금 우리는 독일에서 테라 프레타 노바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설립하고 있습니다. 또 그 보수력을 지닌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예를 들면 에너지 식물인 자트로파속Jatropha屬을 재배하고자 아프리카의 건조 지대에서 테라 프레타 노바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온갖 분야의 연구자들이 지금 세계적으로 보전해야 할 세계유산으로 테라 프레타에 주목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볼 수 있는 풍화가 진행된 토양과 열대의 기후 조건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 있으며, 테라 프레타에서 찾을 수 있는 토양 유형은 최대 90%가 모래, 최대 90%가 진흙인 온갖 토양을 함유하고 있다. 테라 프레타의 재생에 성공할 수 있다면, 정복자들이 찾던 금보다 귀중한 유산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개발도상 지역의 사람들을 먹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존에는 역시 환상의 엘도라도가 잠들어 있다.

 

 

바이오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자트로파(과테말라대황 또는 산호유동)

 

 

자토로파의 씨. 

 

 

 자트로파의 열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erra Preta –Amazonian Dark Earths (Brazil), GIAHS, FAO.

 (2) Terra Preta - Amazonian Earth

 (3) The Secret of El Dorado - programme summary,BBC,2002.

 (4) Charles C. Mann,Our Good Earth, The future rests on the soil beneath our feet, National Geographic magazine,Sep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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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의 효율성



효율적이지 않은 미국의 바이오에탄올 생산


복잡한 농업경제도 에너지 측면에서 보면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온난화 대책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 바이오에탄올을 예로 보자.


미국의 농지에서는 3000평에서 약 6톤의 옥수수를 수확하고, 이를 가공하여 처리하면 1240ℓ의 에탄올을 얻는다. 하지만 원료인 옥수수를 심어 재배·수확하는 데에는 3000평에 약 1325ℓ의 화석연료가 들어간다. 옥수수를 부수고 가공·처리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든다. 92%의 물과 8%의 에탄올을 분리하는 데에는 최대 3단계의 증류 과정이 필요하고, 가솔린과 혼합하고자 99.8%의 순수한 에탄올을 제조하는 데에도 더욱 많은 처리나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에탄올을 제조하는 데에는 실제로 에탄올에 포함된 것보다도 약 70%나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왜 에탄올을 제조하면서 에탄올이 아니라 화석연료가 쓰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코넬대학 농업생명과학부의 데이비드 피멘텔David Pimentel은 말한다. 에탄올을 제조하고자 미국은 대기업에게 연간 약 10억 달러의 보조금을 주는데, 그것만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에탄올 생산의 경제 분석에서는 환경에 악영향을 끼는 점도 간과하기 일쑤다. 


“미국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곳에서는 잘 관리된 농지라도 12배나 빠르게 토양침식이 진행되고, 관개용 지하수도 자연히 함양되는 양보다 25%나 빠르게 퍼 올리고 있습니다. 옥수수를 재배하는 환경은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옥수수의 약 70%가 가축이나 가금류의 사료가 되고 있기에, 옥수수가 에탄올 제조에 쓰인다면 옥수수 값이 오르고, 그에 따라서 고기·우유·달걀의 값도 오른다.


“에탄올 제조용 보조금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에 더해, 소비자는 시장에서도 꽤 비싼 식품비를 지불하게 됩니다.”


미국인들의 자동차는 평균 연간 1,6000km나 달린다. 가솔린과 섞지 않고, 순수하게 옥수수로 만든 에탄올만으로 달리게 하는 데에는 약 3220ℓ의 연료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7명의 미국인을 먹일 수 있는 4.4ha(13200평)의 농지가 요구된다. 미국에 있는 자동차 모두를 100% 에탄올 연료로 움직이는 데에는 미국 땅의 97%에 원료가 되는 옥수수를 재배해야 한다. “결국 옥수수는 에탄올 생산을 위해 재생가능한 원료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놓친 절호의 기회


‘추출하기 위한 에너지’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보다 커져 버렸고, 자원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 이를 EROI(Energy Return on Investment)라고 부른다. 그리고 농업의 생산성을 에너지 측면에서 분석한 시초는 피멘텔 교수의 1973년 논문인 “식량 생산과 에너지 위기(Food Production and the Energy Crisis)”일 것이다.


그럼 농업 생산을 에너지 측면에서 처음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누구일까? 세르게이 포돌린스키Sergei Podolinsky(1850~1891)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의사가 그다. 당시 포돌린스키는 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 살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농업 통계를 가지고 삼림·자연 목초지·인공 목초지·밀밭의 생산성을 비교했다. 포돌린스키는 사료나 짚의 에너지를 3750㎉/㎏, 밀을 2550㎉/㎏이라 하고, 노동력도 말 645㎉/時, 인간 65㎉/時라고 ㎉로 환산하여 1880년 에너지의 입력/출력비를 계산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서는 인력이나 축력이 농업에 투하되는 만큼 면적당 수확량도 늘어나고 있다. 이를 통해 포돌린스키는 노동력에 따라서 ‘지구의 에너지 축적량’이 늘어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논문은 잘못되었다. 포돌린스키는 탈곡에서 소비하는 증기기관의 에너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구아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볼리비아·페루 동맹군과 칠레 사이에서 벌어진 초석 전쟁(1879~1884)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비료를 에너지로 환산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돌린스키는 그 뒤에 확립된 농업 에너지 수지와 기본적으로 같은 방법론을 이미 이용하고 있었다.


그럼 포돌린스키는 왜 농업 생산을 에너지란 측면에서 분석하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포돌린스키가 열역학의 관점에서 경제 법칙을 밝히려고 최초로 시도한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1881년에 발표한 기사에서 포돌린스키는 노동가치설을 자연과 에너지, 그리고 경제의 순환과 통합하려고 했다. 노동가치설(labour theory of value)이란 인간의 노동이 가치를 만들고,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한쪽에서 열역학도 발표했다. 프랑스의 니콜라스 레오나르도 사디 카르노Nicolas Leonard Sadi Carnot(1796~1832)가 열이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할 때 일이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한 것은 1824년이었고, 이 이론을 발전시킨 폴란드 출신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시스(1822~1888)는 1850년에 열역학 제1법칙, 1865년에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정식화하고, 엔트로피란 개념도 확립했다. 포돌린스키는 자신이 카르노나 클라우시스의 뒤를 좇고 있는 것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포돌린스키는 태양에너지의 흐름과 석탄 형태로 저장된 에너지를 쓰는 것의 차이에서도 언급했는데, 노동이 중요한 것은 땅속에 축적된 기존 에너지를 전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너지의 축적량을 늘리는 데 있다고 했다.


“탄광 노동자들의 에너지 생산성은 농민들의 그것보다는 많다. 하지만 석탄의 에너지는 일시적이다. 석탄으로 만든 일은 열에너지의 형태로 반드시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포돌린스키는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모든 천연자원의 부족을 극복해 무제한적인 물질적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 모델은 실패하고 있다.”


포돌린스키는 경제 성장을 발목 잡는 것은 생산 관계가 아니라, 물리학과 생태학 법칙의 한계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열역학 법칙을 조건으로 더욱 큰 체계에 묻혀 있는 하위체계인 경제를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엥겔스에게 전했다.


하지만 포돌린스키에 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반응은 차가웠다.


“해머, 나사 또는 바늘의 에너지 가치를 생산비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 관계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엥겔스는 포돌린스키의 시도를 마르크스와도 논의했는데, 마르크스도 열역학 제2법칙에는 비판적이라 침묵했다. 이리하여 가장 빨리 농업을 에너지 측면에서 분석한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생태학적 사회주의를 구축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통농업의 에너지 효율


1940년대 이후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생태학자들이었다. 이 일은 피멘텔에게도 전승되었다. 한편에서 인류학자들도 전통농업의 에너지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로이 라파포트Roy Rappaport의 연구(Pigs for the Ancestors, 1967)는 뉴기니의 에너지 생산성을 밝혔다. 그러면 피멘텔의 연구 성과를 아래에 정리하자.



부대밭(火田) 농업 체계  2ha/人  8:1


초기 부대밭 농업 체계는 20년 간격으로 농업을 행했다. 양분을 다 쓸 때까지 약 2년 정도 농사를 짓고, 그 뒤에는 묵은 땅으로 되돌린다. 20년 이상 묵히고 갈지 않으면 양분과 생산성이 회복되기에 지속가능하다. 부대밭 농업에서는 도끼나 괭이 같은 농기구를 제조하는 데에만 화석에너지가 쓰이는데, 이것들은 숯으로도 만들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는 태양에너지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밖에 필요한 투입 자재는 10.4㎏/ha의 옥수수 종자뿐이다. 약 1944㎏/ha의 옥수수 생산에 드는 노동력은 약 1144시간이고, 이는 연간에 성인이 일하는 전체 노동시간의 약 60%에 해당한다. 농민은 약 3000㎉/日의 식량을 소비하고, 식량을 요리하는 데에는 약 6000㎉/日의 땔감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체계의 입력/출력비는 8.4:1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옥수수 생산에 필요한 약 1200시간/ha의 노동력은 다른 지역의 작물, 그중에서도 곡류라도 전형적으로, 현재 중국에서는 미국의 집약적인 곡물 생산보다 면적에 비하여 더 많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약 1200시간/ha의 노동력이 곡물 생산에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한 사람을 먹이는 데에는 최저 2ha, 5인 가족이면 10ha의 농지가 드는데, 이 체계는 1ha의 농지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데에 10ha의 토지가 필요하다. 현재 세계의 인구를 약 60억으로 환산하면, 지구에는 0.25ha/人 이상의 농지밖에 없다. 부대밭 농업은 지속가능하지만, 거기에 필요한 토지의 1/8밖에 없다. 결국 농지의 부족이 이 기술의 제약으로, 현재나 미래의 농업으로 유용하게 퍼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유기 가축 농업  4ha/人  4:1


그럼 부대밭 농업에서 쓰는 1144시간의 인력을 소의 힘으로 치환해 보자. 소를 약 200시간/ha 부리면 인력은 380시간/ha까지 줄고, 인력 에너지는 20,1000㎉가 된다. 소를 약 200시간 일하게 하는 데에는 150㎏의 옥수수와 300㎏의 사료가 든다. 사료는 한계경작지 2ha의 목초에서 얻을 수 있는데, 옥수수는 1944㎏/ha의 수확량에서 차감하게 된다. 또한 소똥의 약 20%(2000㎏)는 목초지나 옥수수밭에 거름으로 주고, 5인 가족의 배설물도 옥수수밭에 거름으로 준다. 또 옥수수는 토끼풀이나 살갈퀴 등과 같은 콩과의 풋거름작물과 돌려짓기하고자 필요한 토지가 1ha 늘어나지만, 옥수수 재배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소(60㎏/ha)가 공급되어 토양침식을 줄이고, 토양의 유기물도 늘어난다. 이 체계에서 옥수수 생산에 필요한 총 투입 에너지는 170만㎉/ha이기에, 1944㎏/ha의 수확에서 입력/출력비는 4.1:1이 된다. 에너지에서는 부대밭 농업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데, 이 체계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면적은 약 4ha가 된다.



혼농임업 체계  3ha/人  4:1


다음으로 유기 가축 농업에 질소고정 수목을 조합한 혼농임업 체계를 생각해 보자. 1ha의 토지 가운데 0.5ha에 옥수수, 0.5ha에 콩과의 수목 레우카에나Leucaena를 심는다. 옥수수는 상술한 유기 가축 체계보다 배의 밀도로 심는데, 같은 수확량 1944㎏/ha를 얻을 수 있다. 레우카에나와 옥수수의 경쟁은 옥수수를 심기 전에 레우카에나를 베고, 8cm의 그루터기로 되돌려 잡아 놓는다. 레우카에나는 해마다 4500㎏/ha의 부산물을 생산하고, 그 가운데 잎과 잔가지가 2500㎏/ha이고 이 안에 질소가 약 2/3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토양에 돌려주면 유기 가축 체계와 같은 양의 질소 약 60㎏/ha를 거름으로 줄 수 있다. 이 체계에 쓰이는 총 에너지는 약 170만㎉이고, 입력/출력비는 4.1:1과 같다. 다만 이 체계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면적은 3ha가 된다. 더욱이 잎과 잔가지는 질소 이외의 양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토양 유기물이 되어 보수력을 높인다. 또 등고선 모양으로 레우카에나를 심어 잎과 잔가지로 멀칭을 하면 토양침식이 1년에 1t/ha로 억제된다. 나머지 2000㎏은 땔감으로 수확하는데, 이는 1세대의 땔감 수요의 약 80%를 해결한다.



집약형 기계화 체계  3:1


미국 이외의 선진국에서 행해지는 트렉터 동력을 쓰는 농업에서는 상술한 인력이나 축력의 체계와 비교해, 노동 투입량이 불과 10시간까지 줄어든다. 그렇지만 이 적은 투입 노동력을 보조하고자 농기계와 화학비료와 농약이 쓰인다. 미국에서 옥수수를 생산하는 데에는 평균 약 1000만㎉/ha, 1000ℓ/ha의 석유가 필요하다. 옥수수 수확은 8000㎏/ha로 늘어나는데, 입력/출력비는 2.8:1로 떨어진다.



집약형 기계 생산을 더욱 지속가능하게 전환


그러면 옥수수를 더 지속가능하게 생산하는 것으로, 생태적으로 더욱 건전한 기존 기술을 쓴 체계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콩 등의 적절한 작물을 옥수수와 돌려짓기한다. 이것으로 선충이나 옥수수의 병, 잡초 문제를 줄인다. 집약적인 옥수수 생산에서의 평균적인 해충 피해 손실은 12%인데, 돌려짓기하면 3.5%까지 준다. 농약도 필요하지 않고, 수확량은 약 8% 늘어난다. 둘째로 가축과 지피작물을 더한다. 수확한 뒤에 살갈퀴(겨울남) 등의 콩과 작물을 도입하면, 토양침식이나 잡초 문제가 줄고, 토양 양분도 유지된다. 외양간두엄의 활용이나 지피작물을 갈아엎고, 노동 투입량은 10~12시간/ha 늘어나는데, 수확량이 8000㎏/ha에서 8640㎏/ha로 늘고, 총 에너지의 양도 집약형 체계의 1000만㎉/ha보다도 꽤 줄어 370만㎉로 해결된다. 또 집약 체계에서는 약 17t/ha나 있는 토양침식을 1t/ha 이하까지 줄인다. 1t/ha 토양침식율은 대부분의 농업 조건에서는 토양의 재생율과 비슷하다. 이 개선된 체계에서는 집약형 기계 체계보다도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1) 토양침식을 억제한다.

2) 소형 트렉터를 쓰는 것으로 연료 소비를 줄인다.

3) 돌려짓기로 무농약 재배를 할 수 있다.

4) 가축의 거름으로 질소 비료 모두 해결한다.

5) 칼륨 양분의 대부분을 대체한다.

6) 지피작물로 재배하지 않는 동안의 손실을 억제한다.



저에너지 투입으로 고에너지 수확량


면적당 수확량만 보자면 전통농업은 근대농업만큼 생산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는 무엇을 비교의 기준으로 평가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노동에 따른 생산성으로 보면, 트렉터로 작업하는 대규모 농장만큼 유리하다. 하지만 트렉터나 화학비료에 쓰이는 화석연료를 생각하면, 투입 에너지에 따른 수확량은 전통농업 쪽이 뚜렷하게 높다. 피멘텔이 계산했듯이 에너지 효율에서는 전통적인 부대밭 농업보다도 낮다. 근대농업은 생산물 이상으로 대량으로 에너지를 소비한다.


서양의 농민들은 생산성을 중시해 주로 많은 수확량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농민들의 목표는 다르다. 전통적인 농민들은 생산성보다도 안정성이나 지속성을 중시했다. 작물도 어느 한 작물을 중시하기보다도, 작물 사이의 균형을 취하여 택했다. 그리고 낮은 투입 자재로 체계의 높은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해 나아가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수확량을 얻는다는, 저마다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다. 전통농업은 서양의 분석에서 중시되는 기준만이 아니라, 체계의 안정성이나 지속성과 관련된 생산성이라는 전통적인 농민들 자신만의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전통농법을 다시 평가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국제적인 농민과 소농의 운동, 비아 깜페시나이다. 비아 깜페시나에는 라파엘 알제리아Rafael Alegría, 조제 보베José Bové, 조아오 페드로 스테딜Joao Pedro Stedile 등의 유명한 활동가가 있는데, 4월 17일을 ‘소농의 날’로 정했다. 그리고 피크 오일만이 아니라, ‘피크 인산燐酸’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비아 깜페시나는 근대농업의 EROI가 낮고, 농업이 에너지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직면한 가운데 단작으로 농업연료(agrofuels)를 생산하는 등, 잘못된 해결책이 추진되고 있다. 그것은 식량 주권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업형 농업이 기후변동의 주요한 원인이고, 세계의 식량을 수송하며, 기계화·집약화·농약 사용·단작과 공업형 농업을 하게 만드는 것으로 종의 다양성이나 농업의 탄소저장력을 파괴하고, 농업을 에너지의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변하게 한다.”


그런데 이 과격한 주장은 뜻밖의 장소에서 평가받고 있다.



 

written by 요시다 타로, translated by 김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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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농촌에서는 공동작업을 행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고 농악을 두드리며 능률의 증진을 도모하는 일이 있다. 그 해 6월까지 강우가 많아 벼의 삽앙이 일제히 끝나면, 7월에 들어서부터 각 부락에서 활발히 논의 제초가 행해진다. 그때 논의 한 구석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적은 커다란 기를 세우고, 때로 “창가라 창가라” 하고 농악을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즉 두레패(두)이다.

두레패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60여 년 전, 당시 섭정 대원군이 조선 미증유의 대공사인 경복궁을 중건하였을 때 각 지방에서 다량의 목재를 운반시키고 또 다수의 인민을 모아 노역에 복역시켰는데, 각 지방인 중에 1명을 지정하여 감독의 일을 맡게 하고 그 감독자는 자기의 단체의 능률을 올리고 작업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농악을 이용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관한 (89)문헌은 불가증(不可證)으로 근거하는 바가 없지만, 수원군내에 있어서 두레패 창립의 최고(最古)는 경복궁중수의 해, 즉 갑자, 을축의 해이다. 이 구비에 의하면 가령 그 즈음 이전에 있었다고 해도, 이때 이후로 성행하게 된 것으로 상상된다.

지금 이 두레패의 조직을 보면, 일개 부락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서로 모여 하나의 계를 조직하고, 그리고 금전 혹은 곡물을 거출하여 농악을 구입하며, 잔여의 금곡(金穀)은 계의 재산으로 이식(利殖)하는 곳도 있다. 또 혹은 부락에서는 계 설립자 중 유력자가 금전을 내서 농악을 구입토록 하고, 그 돈은 계원의 공동작업에 의한 수입으로부터 반환하게끔 하는 곳도 있다. 두레패의계원은 부락의 장년자(壯年者)이므로, 청년으로 한 사람 몫의 어른이 된 자를 가입시키고, 또는 사정에 따라 계를 탈퇴하는 것도 임의(任意)이다. 따라서 해마다 그 인원에는 다소의 이동(異動)이 있다. 두레패계의 장(長)은 이를 좌상(座上)이라고 하여 계원 중의 최연장자가 되며, 또 영좌(領座)라고 칭하는 것도 한 명 있어서 두레패에 관한 사무를 처리한다.
두레패에 속한 악기는 농기 하나, 징 하나, 꽹과리(갱가리) 둘, 북 하나, 호적 하나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두레패는 그 계를 중심으로 하여 해마다 희망자를 모아 공동작업에 의해 논의 제초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인원이 20인이라고 하면, 각인은 자기의 경작면적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공동작업에 부치며, 그 전체 논 면적을 공동의 인원으로 며칠간에 공동제초한다. 매일의 식사는 공동인원 중 재산가에게 의뢰하여 순번으로 하루씩 술과 밥을 내게 한다. 그리고 제초가 끝나면 두레패원 중 최소면적을 표준으로 하여, 그 이상의 면적을 가진 사람은 1반보에 대해 대략 40전의 비율로 금전을 내게 하고, 작업 중의 음식값으로서 한 사람 앞에 하루 쌀 1승 대금과 술값을 그 중에서 제하며, 잔금을 공동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이 방식을 두렁넘이(두렁늠이)라고 칭하여 보통은 이에 의한다. 곳에 따라서는 공동작업에 부치는 면적을 평등으로 하여 식사는 각호 순번으로 제공하는 곳도 있다.
제초공동작업의 순서는 모내기의 전후, 논물의 심천(深淺), 기타 사정을 보아 영좌가 정한다. 공동작업이 끝나고 여력이 있을 때는 서로의 상담에 의해 계원 외에 타인의 논의 제초를 청부하고, 얻은 임금을 분배한다든지 혹은 계의 경비에 충용(充用)하는 일이 있다.

두레패는 원래 제초를 공동작업으로 하기 위해 조직되는 것이므로, 그만큼 상당한 이익이 있다. 먼저 노동시간에 대(90)해 보면, 보통 농가의 경우에는 오전 7시에 시업(始業)하여 식사 또는 새참(中休)을 위해 세 번 10분간 휴게하고 오후 7시 30분에 종업(終業)하여 하루 노역시간이 9시간 20분이지만, 두레패의 경우에는 6시에 일을 시작하여 휴게ㆍ종업은 대체로 위와 같아 하루 노동시간은 10시간 20분이 되는 것이다. 작업의 능률도 공동으로 하는 고로 일이 빨라 보통의 경우 하루 1반보임에 비하여, 하루 1반 3무보에 달한다. 기타 두레패의 이익 되는 바는, 세농자(細農者)도 농번기에 있어서 용이하게 제초를 마칠 수 있는 점, 시간의 여행(勵行)이 가능하여 작업이 민속(敏速)한 점, 작업장에 나올 때, 그것을 옮길 때, 가로(家路)에 오를 때에 모두 농악을 연주하여 행진하므로 저도 모르게 흥미를 일으키는 점이다. 그 불리한 점으로는 작업이 까딱하면 지나치게 조방(粗放)해진다는 점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두레패는 농촌에 있어서 일종의 단체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농악을 갖춘 점은 농촌오락적인 기분이 있다. 그러나 이에 따라 악습관도 생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농기창립의 신고(新古)에 의한 다툼이다. 농기는 창립의 전후에 의해 앞선 것을 선생이라고 칭하고 뒤의 것을 제자라고 하여 뒤인 것은 앞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 뒤에 창립한 두레패를 발견하면 군례(軍禮)를 받기 위해 농악을 울리고, 저쪽도 이에 응해 농악을 연주하며, 농기에 대해 농기로써 세 번 예를 행하고, 하나가 되어 유쾌하게 놀며 즐기는 것이다. 만일 이 예의를 행하지 않는 두레패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이러한 싸움은 오랜 동안의 관습이 되고 하나의 연중행사가 되어, 심할 때는 죽는 자가 나오는 일조차 있었다. 금일에는 경찰의 단속이 엄하므로 이러한 일도 없다.

두레패는 전술한 바와 같이 제초의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모내기가 일제히 끝난 해가 아니면 성행하지 않는다. 즉 해에 따라 소장(消長)이 있음은 당연한데, 대체의 경향으로는 십년 전 정도부터 점차 감소의 경향이 있다.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수원군 21면에 걸쳐 321의 두레패계가 있어 그 인원도 5,752인에 달하였는데, 지난 소화 4년에는 241계로 감소하여 인원도 3,859인으로 감소하였다(?). 즉 십년 전에 비해 수에 있어서 약 3할 3푼, 인원에 있어서 약 4할 9푼을 감소한 것이다.

두레패 감소의 이유는 농악에 의해 작업을 행하므로 일이 조방해져서 도리어 불리를 일으키는 바가 있는 점과, 농가에 빈부가 생겨서 공동작업에 불편을 초래한 점, 아울러 농촌도 종전에 비해 점점 복잡화하여 단결력이 약해지는 경향 있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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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론


1. 농업의 현재와 미래:

 

神은 망했다

神은 시골을 만들었고

人間은 도회를 건설했다.

神은 망했다

- 이갑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농업은 전환기에 처해 있다. 최근 20여 년 동안 한국은 국민소득이 거의 15배가 늘었고, 후미진 후진국이었던 이 나라는 중진의 대열을 추월하여 선진국 그룹에 들어갈 단계에 놓였으며 국부는 세계 13위권으로 올랐다. 반이 넘던 농촌 인구는 이제 국민의 10%을 겨우 넘게 되고, 시골은 노인들만 남고 거의 모두가 도시로, 아파트로 몰려들었다. 우리 농촌 어디든지 60대 노인들만 들판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 풍경은 이제 보통이 되었다. 최근 들어 우리 농업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땅에 농업이 살아 남을 수 있느냐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도 혹자는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채산을 맞출 수 없는 농업은 '사양 산업'이다. 농업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개선책은 오직 농민의 소득만을 개선하면 된다. 그러려면 농민의 수를 줄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도시 사람의 생각이다. 자연과 인연을 끊고, 자신들의 가치 척도에 맞는 일 외에는 아무 여유가 없는 타산적인 도시민(都市民)의 사상이다. 모든 것은 경제 계산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것은 피할 수없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계 혹은 농업에서 숭고한 정신(精神)의 장(場)이 사라지고 대신 저열한 동기가 파고들었다. 경제 계산이라는 형태로 합리화되어 있는 비열하고 타산적인 생활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슈마허,1973). 이러한 사고(思考)의 천편일률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 현재의 우리 한국 농업을 생각하면, 예로부터 우리 농민들은 부지런하여 어려울 때마다 지혜를 발휘했으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새로운 농사 기술을 많이 개발하였고, 자동화된 유리 온실 시설 내에서 일년 내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채소나 과일의 소비 형태가 달라졌으며 더 많은 농산물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하여 새로운 수요를 창조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농업은 자연에 의존한 단순한 농산물 생산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자재와 시설을 동원하여 상품성이 높은 농산물을 최대한으로 많이 생산하며, 판매와 유통 전략까지 계산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어느 면에서는 현재의 우리 농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활기 찬 변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농업을 보는 눈에 따라서, 또는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서, 우리는 희망과 도전의 자신감에서부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짐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인 것이다.


 

 이러한 농업에 대한 사고의 혼란과 현재의 산업적 변환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농업 자체가 전환기의 시점에서 극심하게 변화되고 있다. 먼저 구미 지역의 선진국에 있어서는, 1975년 이후 세계적인 식량 공급의 과잉과 인구 증가율의 감소로 인해서, 1980년 이후의 농업 연구 분야가 먼저 상당히 침체된 분위기이다. 그것은 연구비 감소, 연구원 감원 등으로 나타났다. 농업이란 인간이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자연 생태계에 조화롭게 작용을 가하면서, 인간과 다른 동, 식물이나 미생물이 공존(共存), 공서(共棲)할 수 있는 생태계를 유지하고, 환경을 보존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행위이다. 농업은 근본적으로 땅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생산하는 지속적인 산업이므로 현재 식으로 당년에 큰 수확을 얻기 위하여 무리하게 많은 것을 투여하거나 흙의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생산만을 내세우게 되면 장기적으로 볼 때 많은 문제를 낳게 된다. 농학에 부여된 역할이 인류 생존을 위한 생물 자원의 개발과 생산, 그리고 그것들의 생존 환경의 창조에 있으며, (이러한 농학의 한 분과로서의 농생물학<작물보호학>은 다시 식물 병리학, 응용 곤충학, 잡초학 등으로 세분될 수 있는데,) 종래의 세분화되어 단면적이며, 파편적인 분석 위주로 파고드는 것을 지양하고, 식물 병원체나 해충, 잡초 등 작물 유해 생물의 환경 시스템을 농업 생태계 및 전체 생태계로 확대하여, 전체를 볼 수 있는 전일적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농업과 병해충을 다루는 어푸로우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기술주의, 관주도형 연구와 기술 지도로 밀어 붙였던, 지난 60-70년대의 녹색 혁명적 다수확 생산 주의에서, 근년의 환경 보전형 농업의 생각을 학계에서도 점차로 조금씩이나마 수용하는 추세인데, 이제까지 우리가 해 온 과거의 농업을 겸허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농업이 지향해야 할 길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을 단지 기술적(응용과학적)인 차원에서보다는 인간의 삶 전체적인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농사를 짓는다는 것의 의미는 과거의 생산 위주, 배고픔의 영역을 극복하고자 했던 때와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이제, 인간의 이기적 목적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아닌, 생태계 보호 혹은 보전의 차원에서 가꾸고, 거두며, 조심스럽게 관리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화석 연료 사용 증가에 의한 지구의 온실효과는 바로 눈앞의 현실 문제로 다가와 있다. 온실효과에 의한 전반적인 온도 상승에 의한 기후 변화, 산성비, 삼림 황폐와 토양 유실, 지하수 오염, 대기 성층권의 오존층 감소 현상 등등, 농업에 미치는 인간이 만든 나쁜 환경의 영향이 점점 더 가시화 되고 있다. 그리고 작물 생산 농업에 있어서 전반적인 유해 유기화합물(농약과 합성 비료 등)의 사용 규제는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며, 사용 농약의 수가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농업 현실은 식물병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보면, 전세계적으로 식물병의 생물적 방제에 대한 관심을 더욱 유발하고 있으며, 그 방제 효과를 높히기위해 생물적 방제균의 균주개량, 생물 전달 체계( biological delivery system )강화, 유용길항미생물의 생태학에 보다 많은 연구가 요청되었었고, 현재 그 연구 결과들이 소규모나마 실용화되기 시작하여, 무농약재배, 무경운재배, 유기농법, 혹은 환경 보존형 농업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유전 공학 기술에 의한 인위적인 유용 형질 유전자의 조작과 형질 변환된 생물체들의 실용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윤리적 관심이 또한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식물 병리학에 있어서의 이러한 첨단 생물공학기술의 응용은 주요작물의 병저항성의 유전과 그 생화학적 규명을 실현케 했으며, 식물병의 발병생태, 병발생의 생화학적 메커니즘 규명의 설명 단서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첨단 분자생물학 기술은 생물적 방제에 이용되는 미생물의 균주개량, 해충 및 식물병저항성의 식물체도입 등을 가능케 하고 있다. 그리고 기주-기생체 특이성에 대한 유전학 및 생화학은 특정 병원균에 대한 보다 빠른 포착과 진단에 응용되고있다. 이러한 분자생물학 및 유전공학기술이 식물병리학 분야에도 활용되어 수많은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있으며, 유관 타분야와의 협력, 공동연구가 컴퓨터 네트워크의 확립과 퍼스널 컴퓨터의 대량보급에 의해 보다 원활하게 실시되고있다. 또한 농가에서도 컴퓨터가 하나의 농기구처럼 된 세상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농업의 정보혁명을 위한 여러 가지 관리 시스템과 시뮬레이션 모형들이 농민들에게, (미국에서는) 보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식물병리학의 협소한 전공분야 뿐만 아니라, 기존의 다른 분야의 농학을 배우고 연구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와 생각을 보다 환경 친화적으로 바꾸어 나간다면, 그리고 이들이 농업의 가치를 보다 성실하게 다가오는 세대에게 교육과 연구, 실천으로 보여주고 깨우쳐 준다면, 우리 농업의 환경보전적 전망과 최적규모화, 미래지향적인 농업인의 희망가꾸기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어려워도 가지 않을수 없다. 또 실패하거나 오류에 휩싸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후세들이 희망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견지하도록, 엄밀한 추론, 관찰, 시험을 수행하고, 결과에 대한 세심한 논의를 거처 실행에 옮겨야 한다. 농업계인사(교육원,연구원,기술보급지도원,농민,농업행정가,농산물가공 유통업자,농학계대학 및 전문대 학생 등)뿐만 아니라 환경생태에관심이 있거나 환경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 정책 입안자, 정치가 등 비농업계인사들, 모두 이러한 문제의식을 회피하고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식량 자원 문제 세계 식량문제 해결은 인구 조절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루 성인이 필요한 습취량 2600 Kcal(남자 3000Kcal,여자 2200 Kcal)에 미달할 때에 영양실조(undernourished)라 한다. 불균형 영양 상태(malnourished)는 단백질 혹은 비타민 등의 필수 영양소가 결핍된 영양 섭취를 말하며, 저개발 국가에서 흔히 볼 수있는 어린이의 Marasmus병과 Kwashiorkor병을 들 수 있다. 이디오피아와 수단을 덮친 1983-1985년의 최악의 기근은 장기간 넓은 지역에 덮친 가뭄에 의한 것으로 150만이 굶어 죽었다. 전세계 인구 57억중 15억 이상은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다. 절대 빈곤은 일년 개인소득이 370달러미만, 즉 하루 의식주를 1달러가 채 안되는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생활수준을 뜻한다. 절대빈곤 인구 외에 또다른 30억명도 극빈상태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매년 1800만명이 기아나 그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한다. 시간당 28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중 1300만이 5세 이하의 어린이다. 그리고 전세계 8억인구가 영양실조에 신음하고 있으며 그중 2억명은 어린이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과잉영양장애(overnutrition: 비만, 고혈압, 당뇨병과 심장병의 증가)가 문제되는 세계의 모습은 빈곤과 굶주림에서부터 풍요와 방만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다.







한국의 과거 식량 문제

壬寅年) 六月作

年來夏旱又秋霜 

禾枯苗傷害轉深

三萬卷書無用處 

白頭空負愛民心

陳元旦(Tran Nguyen Dan,1320-1390)

몇해 동안 여름은 가물고 가을에 서리 내려 

벼가 마르고 싹이 상해, 피해가 심해지는데

삼만권이나 되는 책 아무 쓸모 없어

백발 늙은이가, 백성 사랑하는 마음 탓에 헛되이 근심한다. 

월남 선비 '탄 응우엔 단'(1362년 6월)


 

 한반도는 여름철에 고온다우와 일조시간이 긴 것이 벼 재배의 적절한 조건이 되었으며 밥맛과 쌀의 경제적(수확량,미곡가 등) 이유에서 쌀의 주곡 위치는 오늘날까지 부동이다. 그러나 한국의 연 강수량은 700-1,500 mm 정도로 오히려 소우(少雨)에 속하는데 그나마도 그 50-60 %가 7,8월에 집중하여 때때로 수해를 일으키고 봄철에는 건조가 심하다. 이러한 계절적 분포도 가끔 어긋나 6,7,8월에 한발이 오는 수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자연재해(한해,수해)에다 풍해, 충해, 병해까지 곁들인 천재(天災)와 싸워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시대 382년간 한해(旱害)가 89회, 492년간 수해가 역시 89회가 있었다 하나 2,3년에 한번씩은 가뭄 또는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보태어 풍해가 339년간에 20회, 상해(霜害)가 474년간 18회였다 하니 통산하여 492년 사이에 238회의 자연 재해를 만난 셈이 되는데 이것에 병충해까지 보태면 2년에 평균 1회의 재해를 입었던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천재지변 이외에 인구 증가(1462년에 400만, 1910년 1,300만,1995년 현재 남북 합쳐 7,000만), 외국의 침략, 내란, 질병 등의 요인도 부각되어 절대적인 자급자족에 의존하여 온 한민족의 식량 특히 미곡(米穀)의 수급사정은 실로 다난한 길을 걸어왔다고 볼 수 있다.

식량 확보를 위한 중농정책은 조선 시대 초기부터 강력히 추진되어 수리 시설의 증설보강, 경지확대(개간,간척), 경작기술 향상(농서 간행,기술 보급), 평안도 북변에서의 논벼(水稻) 경작 전파 노력, 중부, 북부지대에서의 올벼(早生種) 재배 장려 등 힘찬 시도가 많았다. 그러면서 일방으로 번번히 엄습하는 흉작에 대비하여 각지에 곡식창고를 세워 쌀, 콩 등을 저장하고, <구황벽곡방(救荒僻穀方)>이라는 비상시의 대용식에 관한 책자를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생식(生食)경험을 설명하여 간행한 서적인데 후에는 <구황촬요>라 하여 구황 식물의 이용에 관한 설명서를 민간에 배포하였다. 기아민(飢餓民)의 치료법을 위시하여 솔잎, 느릅나무 껍질, 볏짚, 모밀꽃, 콩잎 등을 가루로 하여, 쌀가루와 죽을 쑤는 법, 칡뿌리, 도라지, 마, 황납(黃蠟) 등을 이용하는 법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일단 흉년을 당하여 국민의 기아가 심하게 되면 각처에 진제장(賑濟場,구호소)을 세워 죽과 쌀을 난민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의창(義倉: 흉년에 빈민을 구제코자 평시에 곡식을 저장하였던 기관), 군자창(軍資倉), 상평창(常平倉:곡가 조절을 위해 쌀을 저축한 기관) 등에 저장하였던 미곡을 풀었다. 또 한편으로 다른 지방의 양곡을 이송 하여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진휼(賑恤:흉년에 빈민을 구원하는 것)사업은 구황청(救荒廳), 진휼청(賑恤廳,인조 이후)이 관장하고 진휼 어사를 각지에 보내 감독케 하고 정부에 품의함 없이 재빨리 구휼 사업을 시행케 했다. 이 일은 겨울 늦게나 이른봄에 시작하여 보리 수확 때 보통 끝내었는데 먼 곳에서온 구호 대상자에게는 열흘 분 안팎의 마른 양곡(乾穀)을 급여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일부 유민(流民)은 잔류시키기도 하였다. 숙종 때에는 유별나게 흉년이 오래 계속되어 도처에 아사자가 나고 굶주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상경하나 구호의 길이 별로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잇따른 재앙과 기근에 대처하여 갖가지 구휼책과 더불어 대동미(大同米:조선 시대 후기부터 실시한 세법으로 지방에 바치는 공물을 미곡으로 통일한 것임)의 반감, 황폐한 방죽(하천, 저수지 제방)의 수리, 술 빚는 것의 금지 등 여러 가지 시책을 펴냈다.

이러한 구황대책과 대조적으로 식량 대책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 들어 왔다고 여겨지는 호박, 1700년대에 전파되었으리라고 보는 옥수수와 고구마, 그리고 1800년대 초에 함경도를 통하여 들어온 감자인데 그후로 이 작물들은 전국에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들 비곡식류 작물의 보급과 그 재배법, 가뭄 때 대체 작물의 파종(특히 메밀), 구황식물의 이용 등은 지방 위정자들과 실학자들의 꾸준한 연구와 장려에 힘입은 바 크다.

 

 조선 시대 후기의 서적에도 하루 두 끼가 서민의 식사 횟수였다는 언급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조반석죽(朝飯夕粥, 아침에 밥먹고 저녁에 죽먹기)으로 지냈다. 민속에도 첫 서린 내린 날을 기점으로 해서 다섯 달 동안은 점심을 거르고 두 끼 만으로 겨울을 난다고 하였다. 세 끼를 먹는 때나 또 세 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낮 끼니는 간단한 간식(점심의 원 뜻)으로 치렀다. 지금은 점심이라 하면 낮에 드는 정식 식사를 뜻하나, 겨울 동안의 하루 두 끼 식사는 약 100년전인 구한말 때도 대부분 국민의 상례였다고 한다.

주곡인 쌀의 흉년은 여러 가지 재해 즉 한발, 병충해, 풍해, 수해 등에 의하여 만나게 되지만 특히 한해(旱害,가뭄)에 말미암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흉년이 아닌데도 매년 겪어야하는 쌀 부족의 고비가 있었다.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보릿고개(麥嶺)가 흔히 있었는데,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생기는 이러한 농가의 궁핍을 춘궁(春窮)이라고도 하며, 양식 떨어진 농가(絶糧農家)의 비참한 모습은 우리 나라 농촌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예로부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떼운다." 하였지만, 들나물, 산나물, 도토리는 물론 심지어는 소나무 껍질까지도 이용하였다. 이러한 구황식(救荒食)은 흉년에는 의례히 유행하였던 요기 방식이어서 부황증 같은 영양부족증이 많이 생기곤 하였다. 그리고 장리(長利)쌀이라 해서 쌀이나 보리를 고리(高利)로 꾸어 먹는 것인데 가을 추수 때 가서 50 % 이상의 이자를 붙여 갚는 식이다. 흉년이 들면 이로 인해 패가(敗家)하는 수가 많았다. 토지의 매매가격의 1/3을 미리 받고 2년의 토지경작권을 넘겨주는 소위 '두렁쇠' 또는 '삯토지'(경남, 전라도)라는 방법도 있고, '자리품'이라 해서 수리서업공사, 논두렁 사역, 거름 내는 일, 모심기 등 일품(勞役)으로 양식 떨어짐(絶糧)을 극복하는 수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논밭을 팔아 소작을 짓는 '뭇갈림', 또는 '알갈림'이라는 조건이 있었는데 '뭇갈림'은 벼를 베고 난 논바닥에 지주 몫으로 한 단, 소작인 몫으로 한 단으로 갈라 먹는 것이고, '알갈림'은 탈곡한 알곡을 반분하는 것이다. 춘궁기에는 정부에서 절량농가를 구제하는 한 방법으로 구휼곡의 방출이 있기도 했으며, 1960년대에는 보리와 밀가루 등을 대여하기도 했다. "'두렁쇠' 삼년(三年)에 논밭 뺏긴다."는 말은 그렇게 해서 생긴 1960년대의 슬픈 우리 농촌의 은어(隱語)이다. 일반서민이 흰쌀밥을 먹는 기회는 생일, 잔치 때 이외는 드물고 대부분 식사는 쌀과 보리의 혼식으로 쌀 부족(식량부족)을 극복해왔다.

 한국의 근대-현대 농학은 식량(쌀)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 근대 과학의 조명을 받은 재배 기술의 도입으로부터 출발한다. 서양 농법의 도입과 근대식 농서 출판도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됨에 따라 일본의 개화 농법이 지배적으로 도입되었다. 농학 교육기관과 권업모범장 설치로 시작되어, 한일합방 이후 일본 지배하에서 한국의 농업은 많이 변모하여 가던 중, 그들의 농업정책은 특히 미곡 증산 계획에 집중되어, 1차(1918-1926)와 2차(1926-1933), 3차(1940-?)로 실시되어 수리 시설 개선, 간척, 벼 품종 개량, 재배법 개선 등 경지 확장과 단위면적당 수확량 증대로 힘을 썼으나, 연 생산의 1/3(600-1,000만석)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대신 만주에서 값싼 잡곡을 들여왔다. 단보당 수확량은 0.77석(1910)에서 1.5석으로 증가하였다.

 

 해방 후 한국은 국토 양분이라는 또 다른 괴로운 정세 하에 놓였고, 남쪽은 대한민국 수립(1948)을 보게 되었다. 농업증산 3개년 계획(1949-1951) 등 의욕적인 농업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다가 6.25로 완전히 좌절당하여 감수(減收)를 면치 못한데다 흉작까지 겹쳤다. 휴전을 전후하여 농업정책은 농업 증산에 집중되어 미맥(米麥)증산 5개년 계획(1953-1957)의 실시가 이루어지고 1958년에는 다시 식량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소기의 실적을 올려 갔다. 1962년을 기점으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농업정책의 기본 목표는 농업근대화와 농업소득의 향상 및 식량 증산을 통한 자급자족의 확립에 두었다. 중농 또는 농공병진의 정책하에서 농업증상과 영농기계화의 기반 조성, 비료자급(비료공장 증설), 농약 및 농기구,기계의 원활한 공급 등이 이루어졌고, 농촌진흥청 및 산하기관 및 각 농과대학의 연구, 지도 활동도 활발히 움직여 갔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2차(1967-1971), 3차(1972-1976)로 이어져 농정에서도 여전히 주곡 증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특히 세계 식량파동을 계기로 식량 자급을 위한 인식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다. 1970년대의 획기적인 성과는 통일계 벼 품종의 개발육성과 신속한 보급, 지도 그리고 이를 뒤삳침하는 재배 기술과 재배관리에 의한 경이적인 미곡 증산이었다. 이는 전세계에서도 가장 경이적인 녹색혁명을 국가적으로 수행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농업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

 

지구상에 인류가 생성된 이래 농업이 수행해 온 기본적인 역할과 공익적 기능은 다양하다. 식량의 안정적인 생산, 안전한 식료품의 공급, 자연 환경의 보전,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전통의 유지 발전 등이 그 대표적인 공익적 가치이다. 전체 경제 및 인구 비중 면에서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농업, 농민에 대하여 선진국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막대한 정책(예산)지원을 퍼붓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농업의 다양한 비교역적 기능, 즉 공익적 가치 때문인 것이다. 이제 식량 자급률이 28%선인 우리 나라의 농수산물 수입자율화율은 94년의 95%선에서 1997년이면 거의 완전 개방된다. 1980년대에 연평균 40만 명의 이농 행렬은 실질적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그로 인한 도시투자비의 증가는 농민을 지금대로 농업에 붙들어 놓은 대가(현행 수준의 농업 예산)보다 1인당 7배 이상이 소요되고 있다. 거시적 국민경제 손익을 따져 보아도 이제는 농업에 대한 정책 지원이 더 경제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하여 WTO체제하의 새 농정은 1)농업을 단순히 교역 대상의 상품만을 생산, 공급하는 상업 개념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2)농업의 비교역적 공익 기능을 중시하는 환경 보존적 입장을 취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국제경쟁력 강화 문제도 단순히 가격 및 생산비를 낮추는 정책에 치중할 것인지, 또는 한국 특유의 품질, 안전성 그리고 유통 및 가공 조건의 특수화에 주력할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이는 구태여 정책 당국에 해답을 구할 사안이 아니다. 농업이란 예나 지금이나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間)이 한데 어울려 살려가야할 생명 산업이기 때문이다. 농업의 기능은 비단 생명을 창조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자원을 재생하고 재활용하는 자연 생태계의 순환 유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농업, 농촌이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는 <보이지 않는 혜택>은 이외에 마음적, 정서적인 기여에도 있다. 아름다운 강산과 경관, 그리고 산하(山河)에 그윽한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산천초목이 우려내는 향기는 저절로 인심을 순화시키고 고향을 사랑하게 만들며 나라와 겨레를 떠받들게 한다. 진정한 애국심은 고향(농촌)사랑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정설이다. 지난 5천여년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울 때마다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일어선 사람들은 다름 아닌 민초 농민들이었다. 이렇듯 농업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조화시키며, 여러 가지 공익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농업은 국토의 정원사로서, 문화 전통 지역사회의 보존자로서, 그리고 환경생태계의 파수꾼으로서 그 본질적 가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할 수 없는 것이다.


 

WTO체제 출범과 새로운 농업정책

 

주지하듯 1993년 12월 15일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과 1995년 1월 1일의 세계무역기구(WTO)체제의 출범은 이제까지 가트(GATT)체제하에서 예외적 취급을 받아 오던 농업정책 및 농산물 교역의 국가별 특수성이 배제되고 문자 그대로 세계 농업이 국경이 없는 무한 경쟁 체제로 진입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 각국의 농업정책은 개방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국제 경쟁력>강화 문제가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국제경쟁력은 가격 경쟁력과 비가격경쟁력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가격 경쟁력은 규모화와 생산 기반 확충, 구조개선, 그리고 과학기술, 경영 혁신에 의해 성취된다. 이 점에 있어 우리 나라와 같이 인구가 조밀하고 경지 면적이 적은 개발도상국가는 대단히 불리하다. 선진국에 비해 물리적인 비용과 발전수준 면에서 태생적으로 큰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격경쟁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잠시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긴박한 국제경쟁의 냉엄한 현실이다. 다른 한편, 비가격 경쟁력은 품질, 안전성, 유통조건 그리고 환경에의 영향 등을 고려한 비가격 측면의 차별화에 의해 진작된다. 이미 앨빈 토플러가 그의 명저, ≪제 3의 물결≫에서 강조한 바 있듯이 산업사회에 있어서 개성적인 수요 특성을 반영한 다품종 소량생산-수요체계는 바로 비가격경쟁력의 중요성을 간접으로 시사하는 말이다. 맛도 좋고, 향기도 뛰어나며, 모양 색깔도 아름다우며, 신체와 사회에 안전한 식품의 소비시대가 바야흐로 우리 지구촌에 활짝 열리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 지구상 수많은 나라가,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대부분이 수천년 동안 협소한 경지 면적의 전통 농업을 가지고 과다한 인구를 포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WTO체제하에서 이들 나라의 전통 농업은 가격 경쟁력의 불리성으로 인해 시장생산체제에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개방화 국제화시대에 이들 전통농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내외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용해야 하며 어떤 형태로든 경쟁력을 높여야 <해볼 만한 농업>과 쾌적한 삶의 터를 가꿀 수 있다. 이같은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 우리는 국내외 경제사회 여건의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농업관과 새로운 농정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ⅰ)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과 ⅱ) 가족농 중심의 환경친화형 지속가능한 농업의 육성, ⅲ) 고부가가치 농업의 실현 ⅳ) 지방자치단체의 자율농업전개, 그리고 ⅴ) 통일에 대비한 농업 등이다.


 

2. 농업의 기원과 그 시작.

 

농업은 자연의 혜택을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기술적 영위이다. 추위가 심한 한대에서 아한대, 아한대에서 몹시 더운 열대, 바가 많고 습한 몬순, 아시아지대, 비가 적고 건조한 중근동, 아프리카의 사막 지대 등 천차만별인 환경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종류와 형태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농업양식이야말로 각 나라마다 주어진 서로 다른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서 풍토(어떤 지역의 기후, 지형, 지질, 토양, 경관 등을 총칭)와 작물의 조화를 창출해 낸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값지고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200만년전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 오랫동안 수렵, 어획 등 자연 채취를 통해 식량을 획득함으로써 자연 생태계의 일원으로 생활해 왔으나, 약 1만년전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선사 시대 어떤 시기에서의 지역적 적응의 미미한 차이가 있지만), 비로소 식량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농경은 처음에 채집해 온 야생 식물의 낟알이 우연히 땅에 떨어져 싹트는 것을 보고 인간들이 이를 흉내냄으로써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우연히 씨앗이 뿌려졌으나, 점차 인간이 계획적으로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초기의 농경은 피를 비롯한 몇 가지 밭곡식을 재배하였다. 이러한 초기 농경 단계에서는 남자는 아직 힘든 수렵에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수놈은 혼자 집을 떠나 사냥을 하고, 암놈과 새끼는 식물을 채집하는 분업 생활이 시작되면서 농업도 시작된다)가 농사일을 맡았다. 그런데 농업은 점차 수렵이나 채취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수렵이나 채취에 의한 획득물의 량은 매우 불규칙적이었고, 이에 따른 생활도 불안정하였지만 농경은 이와 달랐기 때문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에 어김없이 몇 십 배의 수확물을 가져다 주는 것이 농사였다. 그리하여 농업은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는 갈이농사가 발전되어 갔고, 이에따라 농업에서 남자의 역할이 커져갔다. 이제 남녀 모두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고 수렵은 농한기에 행해졌다. 농업은 '신석기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여러 가지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우선 농업은 인간이 한 곳에 머물러 사는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하였다. 인간은 이제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러 살면서 광대한 지구를 한 쪼가리식 농토로 일구어 나갔다. 농토를 가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무를 베어버리고 뿌리를 뽑고 잡초를 없앤 다음 땅을 고그르고 흙을 부드럽게 해야했다. 그들은 길고도 힘든 노동의 산물인 농토를 떠나려 하지 않았고 그것을 점유하였다. 이러한 장기간의 점유로부터 점차 토지에 대한 소유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개인과 가족의 소유는 없고 모든 것이 씨족으로 귀속되었던 공동체는 스스로를 균열시킬 싹을 배태하게 되었다. 농경이 시작될 즈음에 가축도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사냥꾼들은 처음에 사냥에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여 먹고남는 산짐승을 울타리에 가두어 두는데 그쳤지만 이것이 점차 가축의 사육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이제 산 짐승을 오늘 내일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르기 위해서 울타리에 가두었다. 몇 해를 기르면 더욱 살진 고기와 많은 새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축의 사육이 일보 진전되어 가축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유목집단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목집단의 발생은 최초로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분업을 발생시켰다. 수렵은 공동체 안에서 성별 분업을 가져왔고, 농업과 목축의 진전은 공동체간의 사회적 분업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업은 공동체 간의 접촉, 즉 교환을 발생시켰다. 이리하여 이전까지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였던 완전한 소우주이던 씨족공동체에 조그만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리고 씨족사회의 운영원리는 점차 모계에서 부계로 전환되었고 씨족공동체 내부에 그것을 해체시킬 가족을 성장시켰다.


농업의 3기원지:

중동 중심(near east center):이란 이락 시리아 터키 지방 1만년전 밀 등 곡물이 작물화

되었다.

중남미 중심(central/south America center):옥수수, 고추, squah, bean, guards등이

7천년전 멕시코 고원지대에서 재배되었다. 페루의 고원지대에서는 그 이전부터

감자 등을 재배했다.

극동 중심(far east center):벼, peas, bean의 어떤 종류 등 재배, 주로 논(습지)에서

재배했기 때문에 유기물분해로 인해 고고학적 증빙이 매우 어렵다.

밀, 옥수수, 벼는 종자로 증식,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어려운 영농체계를 이루었으며,

바나나, yams,감자는 영양번식으로 상대적으로 더 쉬운 농사를 행할 수 있었다.

초기농업의 발전의 또다른 면모:

관개이용:7000년전 중동, 획기적인 수량증대를 가져왔다.

동물의 가축화:석기시대부터 가축화 시작, 양(염소gouts)이 최초의 가축이었다.

축력이 경작에 이용되어 생산량이 급증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는 가축화가

거의 안되었고, 또 축력 이용도 적었다.

작물화(domestication):야생식물이 수천년동안 인위적인 선발에 의해 작물로서 재배되는

과정 동안 유전형질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옥수수 야생종은 다년생식물

이며 탈립성이 매우 크다. 작물의 야생종들은 일반적으로 탈립성이 재배종보다 크다.

 

N.I.Vavilov의 농업 기원지

식물의 종과 품종의 다양성이 가장 큰 곳이며, 종과 품종의 다양성이 크다는 것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 식물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시사한다.

1)멕시코-중앙 아메리카, 카리브 연안:옥수수, 호박, 채두(菜豆),마니혹

2)남미의 안데스 高原 :potato-oca-quino복합형

3)갠지스 河谷에서 버어마,인도차이나에 이르는 동남아시아:벼,타로, 얌

4)인더스 河谷에서 북인도,소아시아에 이르는 서남아시아:밀, 보리, 피, 기장, 조

5)아프리카의 아비시니아 高原,이디오피아 일대:수수

6)지중해 지역:포도












 

농업의 기원과 전파:

새로운 생존양식으로서의 식량생산의 기원은 인간의 특유한 제도와 행위로의 전환을 내포하는, 오직 인간의 경력에만 있는 에피소드다. 영국의 고고학자 G.Childe(1936)는 농업의 발명을 신석기 혁명이라 했다. 그것은 인간생활에 있어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생활의 문호를 개방하고 또 새로운 인간생활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수렵, 어로, 채집 생활은 주로 이 먹이를 찾아서 이동하는 생활이었는데 농업을 하게 되면서 부터 안정된 정착생활(定着生活)을 하게된다. 또 토기(土器)도 발명이 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저장용기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잉여농산물이 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농업생산은 역활 분담과 잉여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자연히 그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만 식량획득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결국 다른 일에 종사하게되면서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따라 교육도 이루어지며, 도시까지도 나타나게 되어 오늘날의 인류문명의 모체가 되었다.

 

C.Sauer의 농업 기원지: 식물의 작물화(作物化)와 동물의 가축화(家畜化)의 기원지는 식물과 동물이 다양하고 풍부한 곳이어야 한다. 1)식물과 동물의 다양성은 수직적인 변화가 있고, 습지와 건조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하곡(河谷)일 것이며, 2)정주민(定住民)에 의해 작물화와 가축화가 이뤄졌다. 왜냐하면 야생식물을 자기가 살고 있는 거주지 부근에 심고, 그것을 가꾸고, 다른 동물로부터 지키려면 이동 생활을 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3)식량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작물화와 가축화가 이루어졌다. 즉 먹을 것을 찾기에 바쁜 사람들은 새로운 변종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보호하고 재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4)작물화와 가축화는 어떤 필요 또는 경제적인 목적에서보다도 인간의 호기심과 여가의 이용에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다양한 자연 조건을 갖춘 이상적인 곳은 건계(乾季)와 우계(雨季)가 되풀이되고, 연중 기온(年中 氣溫)이 높은 동남 아시아라고 생각되며, 이곳에 살고 있던 정주 어민(定住 漁民)에 의해 최초의 작물화와 가축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히 동남아의 인도차이나 반도는 하곡(河谷)과 산지(山地)가 교차하는 다양한 지형과 각종 동식물이 살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 곳은 민족적으로 매우 복잡하며, 취락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문화 인류학적 민속학적 보고(寶庫)라 할 수 있고, 언어학적으로 지옥이라고 한다.

 

 야생식물의 작물화는 영양체 번식하는 타로, 바나나, 얌 등이 먼저 이루어지고, 종자 번식하는 밀, 보리, 벼 등은 그 후에 이루어졌다. 즉 열대 및 아열대 지방에서 재배기술이 온대 및 건조 지대에 속하는 서남 아시아에 전파됨에 따라 종자 번식 작물인 밀, 보리, 조 등이 작물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열대지방의 영양체 번식작물인 타로, 바나나, 사탕수수 등의 식물의 싹(苗)을 심는 농업을 식묘농업(植苗農業이란다면, 이 식묘농업은 대체로 굴봉(掘棒:digging stick)과 괭이(金鎚)를 주 농구로 하고 쟁기의 발달은 곡물농업(밀,보리,벼,조)과 같이 발달된 농업과 같이 한다. 곡물농업에서도 쟁기의 사용은 구대륙에 한정되고 신대륙에서는 그 발달을 볼 수 없다.

잡곡(雜穀)(: 피, 기장, 조, 수수)은 초기 문명시대로부터 몇천년동안 주요곡물로 재배되어 왔던 것이다. '낱'이라는 말은 바로 이들 잡곡을 말한다. 소립곡물(小粒穀物),즉 알갱이가 작은 곡식들의 원산지는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1년생 夏期 作物이고 寒地農業에 맞는 밭작물이다.: 잡곡(수수, 조, 피, 기장)

농업의 발달은 어떤 단일 작물 또는 단일 가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작물이 결합되고 가축이 그것에 겻들어져 하나의 문화 복합을 이루고 있다. 가장 오래되었다고 여겨지는 동남아의 식묘농업은 타로, 얌, 바나나, 사탕수수의 경작과 개, 돼지, 닭, 물소 등의 가축 사양을 겸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벼농사는 영양체 작물보다 뒤에 발달된 것이다. 서남 아시아와 아비시니아 고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농업은 종자번식을 하는 조, 수수, 피, 밀, 보리 드의 경작이고, 소, 낙타, 말, 양, 산양 등의 사육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남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 사하라에 연속되는 건조지대에서 이뤄지는 유목(遊牧)은 가축 사양을 겸하는 곡물농업에서 가축사양이 전문화된 것에 불과하다. 서남아시아에서는 곡물농업과 더불어 쟁기를 발명하여 농업기술 발달에 박차를 가하였다. 남부 아시아의 농업은 동남아시아에서 북상(北上)해 온 식묘농업과 벼농사, 그리고 서남아시아에서 발달한 경종(耕種)농업이 겹쳐 있는 곳이다. 같은 동남 아시아에서도 중국의 진령(秦嶺)이북의 화북(華北), 만주, 우리나라 북부지역은 서남아시아에서 연결되는 건조지역의 작물과 가축의 결합이 강하다. 즉 밀, 보리, 조, 수수, 콩(콩은 만주, 한국 등 동북아가 그 원산지임)이 주작물이고 소, 양, 말 등의 가축이 사육된다. 화남(華南)지방, 일본, 우리나라 남부지역은 동남아시아의 식묘농업이 바닥에 깔려있고 그위에 도묘농업(稻苗農業)이 발달하였다.

 

 농업에 관한 문화복합의 전파도 다른 문화전파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는 곳의 자연환경의 차이, 그리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서 선택적인 도입이 이루어졌다. 곡물농업과 같이 도입된 소는 동양에 와서는 사역(使役)에만 이용되는 '일소'일 뿐이고, 우유의 이용은 보급되지 않았다. 동양에서 우유를 마시는 습관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구대륙의 밀, 보리, 벼 등이 신대륙에 전파된 것은 컬럼버스이후의 일이고, 동시에 옥수수, 감자, 코코아, 담배 고추 등이 구대륙으로 전파되었다.







3.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농업의 시작과 문명의 발생

 

인간은 열심히 자기성찰을 하는 동물이며,

인간의 복합성뿐 아니라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문화의 복합성까지도 설명하려고 애쓴다.

과거에 대한 완벽한 지식만이 비로소 오늘의

우리가 처한 조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찰스 레드만(1978, 문명의 발생)

근동지방에 농업이 시작되고 도시가 들어서는 기원전 8,000년에서 2,000년까지의 기간은 격렬한 창조와 변화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근동지방의 발달과정이 서구문명의 모체가 되었다. 근동 지방은 세계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초기 문명의 1차지역(pristine region)은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중남미, 중앙 안데스 지역에 국한된다.

인류는 인간생활 조건에서 4번에 걸친 근본적인 변혁(transformation)을 걸친다. 하나의 변혁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사회구성원들의 상호 관계뿐만 아니라 그들과 자연 환경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다른 인간집단과의 관계까지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비록 변혁이 새로운 발명에 자극을 받거나 한 두 가지 행위요소의 변동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움직이는 사회 안에서는 모든 요소들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다른 요소나 행위에도 변화를 낳게 된다.


 

인간 문화의 생태학적, 체계적 관점(ecological approach and system theory)

 

문화는 인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생태계의 아체계(아체계,subsystem)로 인식된다. 문화는 기술, 조직, 이념 등의 형태로 인간과 환경 사이의 완충역할을 한다. 문화 체계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 생태계 안에서의 상호 작용 관계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환경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 침투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환경의 복잡한 상황과 그에 대응한 사회의 세세한 적응성, 및 생계 영위 방식이나 적응 체계의 역동성에도 주의해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생태적 접근방식은 환경이 인류생활에 강한 영향을 끼쳐 왔다는 생각을 밝히는데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택한다. 문화란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이러한 여러 가지 아체계(subsystem)들의 상호관련으로 구성된다. 이 아체계들은 변화속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시기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아체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전체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종합하면 변화율에 따라 연속궤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문화변동의 양상은 점진적인 과정(지수곡선 모델)과 급격한 혁신과정(계단식 모델)로 나타낼 수 있는데(그림5), 이것은 아주 단순화한 것이며, 실제 과정은 이 두 가지 모델의 혼합형으로 나타나며, 변혁 과정에서 아체계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계단식 모델은 농업사회로의 전이와 도시화 과정을 전체로 살펴 볼 때 매우 중요하다. 인류가 200만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에 수렵 채취 단계에서 살았던 것에 비한다면 2천년 동안에 근동지방에서 일어났던 농경문화 단계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체계적 관계란 전혀 다른 생물들 혹은 그것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무기적인 환경 사이에도 존재할 정도로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체계란 부분들 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하여 처음부터 전체적인 입장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그래서 되먹이 관계(feed-back relationship)로서 문화의 다양성과 상호관련성을 보다 생산적으로 유추할 수 있으며, 다량의 자료를 취합하여 변이 요소들 간에 나타나는 상호관련성이 논리적으로 완전한지의 여부를 검정하고 시뮬레이션(simulation)을 사용해 어떤 조건에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결정할 수 있게도 되었다. 하나의 공동체와 주변환경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는 생태학 개념인 '생태 지위'(地位, 適所,ecological niche)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문화변동의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인간의 행위에는 적응성이 있다. 둘째, 공동체의 형태는 문화와 전통에 따라 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적응행위는 부분적으로 문화행위에 의해 좌우되는데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문화 가치 체계에 의해 영향받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환경에서 허락된 행위를 하게되고 궤도를 벗어난 문화와 주민들은 보통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적응과 연속성에 의해 다양성의 창출과 선택이 주어진다. 다양성은 계속해서 인간 집단에 의해 창출된다. 그리고 선택은 사회구성원들이 여러 가지 가능한 변이 형태 가운데서 제한된 것들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 집단이 행위 양식을 선택하는데에는 환경, 이용가능한 기술, 믿음체계 등의 요소에 영향받는다. 선택된 것이 생산성이 높을 때는 기꺼이 받아들여지지만, 그렇지않을 경우에는 도태되고 만다. 안정된 환경(사회환경과 자연환경을 포함하여)에서는 다양성의 창출과 선택의 결과로 같은 문화 지역 안에서는 안정상태를 공고히 만든다. 변화하는 환경에서는 다양성의 창출과 그 선택과정이 문화의 진화론적 변동과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근동지방의 농경 도입과 도시사회 성립에 대한 자연환경 생태학적 배경:

 

근동지방은 북쪽으로는 구릉과 산맥, 남쪽으로는 반건조지역과 사막 지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한 곳이다. 기온과 강수량으로 보아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 그 특색은 겨울의 강우와 여름의 가뭄으로 대표된다. 식물군(식생,植生)의 분포로 환경지대를 8개소로 나눌 수 있는데 해안평야(coastal plains), 충적평야(alluvial plains), 산록지대(piedmont), 반건조 고원지대(semiarid highland), 구릉과 계곡(foothills and intermontane valleys), 산악지대(mountain ranges), 저지대(depressions), 그리고 사막(deserts)이다. 근동지방의 초기 농경인은 겨울에만 해발 고도가 중간쯤 되는 지역의 토지에서 경작했을 것이다. 보리, 밀, 완두, 편두콩, 아마, 병아리콩, 야생 완두와 같은 작물은 처음에는 겨울 성장철에만 재배되었으나, 때로는 지역에 따라서 정확한 날짜는 다르지만 10-11월에 심어져, 4-6월에 수확되었다. 또 늦은 여름과 초가을의 나일강의 범람(홍수)은 가을철에 재배되는 곡물에는 좋을 것이나, 늦은 봄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홍수는 오히려 조절이 되어야만 했다. 자연적인 식생의 분포는 인간거주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왜냐하면 모든 식량(동물성과 식물성을 다 포함해서)은 결국 식물에서 온다(1차생산자)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충적평야: 건조한 기후와 높은 점토함량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의 토양은 거의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딱 딱하다. 강의 제방을 홍수가 나서 범람하게되면 물은 땅에 흡수되지 않고 흘러나가기 쉽다. 이것이 홍수로 인한 피해를 증가시키고 농업적인 가치를 떨어뜨린다. 토양의 염화는 현재 메소포타미아의 농경을 가장 압박하는 문제이다.

 

 

 

 

 

 

 

 

 

중동지방의 문화적 배경: 인류는 근동지방에서 50만년이상 살아왔다. 인류의 역사상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지층인 홍적세(Pleistocene)의 동물, 식물과 자연환경이 초기 농경인들의 출현 배경이 되었다. 초기 농경인들의 직계조상은 비전문적인 수렵 채취인(hunters and scavengers)에서 집약적인 식량채집자(intensive hunter and gatherers)로 발전한 사람들이며, 이들은 농경과 마을 생활에 어느 정도 사전적응(preadaptation)을 해온 것이다. 그들이 최초로 살던 곳은 레반트와 자그로스 산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사한 발달을 보이면서도 뚜렷한 문화의 차이도 가지고 있었다. 레반트 지역이 영구적인 주거지였다면 자그로스 지역은 계절적 주거지였다. 레반트 지역에서는 나투피안과 이를 잇는 나할오렌과 예리코 유적 등이 유명하다. 자그로스 지역에서는 자위헤미 샤니다르를 비롯해 테페아시아브 유적 등이 유명하다.

 

 

초기농경에 대한 식물학적 증거,

밀은 하나의 마디에 3개의 낟알이 있다.

야생 아이콘은 야생보리에 비해 추위에 내성이 강함.

아이콘 밀 Triticum monococum

에머 밀 Triticum dicoccum

일부 학자들은 이중구조의 아이콘과 이중구조의 Aegilops speltoides 을 교배해서 사중구조의 에머 밀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밀은 땅의 지력을 금방 소진시키기 때문에 질산염이 풍부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Harlan and Zohary,1966에 의하면 에머는 요르단 강 유역에서, 아이콘은 남동부 터어키에서, 보리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최초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두줄 보리: 중간 낟알에만 꽃피고 나머지 곁가지는 불임

Hordeum spontaneum에서 유래, 환경조건 내성이 강함.

여섯줄보리

콩과 식물

완두(Pisum sativum)의 야생종은 P.elatius:지중해연안 습윤지역에 서식하고,키크고 보라색꽃이 핀다. P.humile: 근동에만 서식하고, 키작음, 스텝에 적응

강남콩(편두콩,Lens culinaris)의 야생종은 L.orientalis

비터베치콩(Vicia ervilia) , 병아리콩(Cicer arietimum).

견과:참나무(Quercus robur)(도토리), 피스타치오(Pistacia atlantica)

아몬드(Prunus amygdalus)

과수:올리브, 포도, 대추야자, 무화과 등,先 適應的 식물

식량가치와 전략

곡물과 콩의 혼합재배가 성행했고, 대체 자원식물도 이용했다.

초기 복합 농경(the early farming complex)은 압도적으로 성공적이어서 여러곳으로 급속하 게 전파된다.


 

최초의 마을 농경민/ 조용한 혁명: 마을 경제의 발전/ 돌이킬 수 없는 과정: 발전한 농경촌락으로 가는 도정으로, 농경의 채택으로 인한 정착된 농경촌락의 발전은 수천년 동안 지속된 성공적인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 사육, 식량생산의 기술 그리고 공동체 크기와 조직에 대한 적응은 식량자원의 증가, 생산경제의 용이와 공동체의 영속이라는 결과를 가져와, 다시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사유재산 개념의 발달은 초기 문명에서 근본적 요소다. 홍적세의 수렵채취인들은 영토와 그들 자신의 무기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적 소유의 기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착 농경공동체의 출현에 따라 물질적 대상에 대한 투자가 증가했고, 시간을 소비하는 가옥 건축과 많은 량의 식량을 저장하기 위한 필요성은 사유재산 개념을 불러 일으켰다. 평등 사회 촌락에서 많은 땅과 도구는 전체 공동체의 재산과 경계가 잘 규정 될 때만 공동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사적 소유권의 성장은 아마도 계급 혹은 계층사회의 성장과 나란히 하면서 점차로 성장해 갔을 것이다. 사적 소유가 필수적인 통제기구가 되며 제도의 하나로서 자리잡은 것은 관개, 기술 전문화 및 사회 계층화에 따른 추후의 공동체에서만 가능하였다. 생산 자원의 사적 소유권과 그들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은 계층화된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소유권(물품에 대한 접근의 방해)이 최초의 도시에서 공식적 지위를 얻었지만, 간단한 소유형태는 6천년기 동안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도시사회의 기원/ 이상향을 찾아서: 근동지방에서 문명발전의 초점은 도시이다. 도시의 특징으로는 밀집된 대규모의 인구, 복잡성과 상호 관련성, 형식적이고 비개인적인 조직, 상당수의 비농업 활동 인구와, 주민과 주변지역에 있는 소규모 공동체를 위한 다양한 서비스 등을 들 수 있다. 문명에는 도시, 직업의 전문화, 계급 구조, 국가 조직, 기념물을 포함한 공공 시설, 장거리 무역, 표준화된 도량형, 기념비적인 예술, 문자, 산수, 기하와 천문학 등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도시화 사회의 기원에 대한 가설로서 관개(수력)시설의 관리 가설, 인구압, 교역, 전쟁(갈등)설 등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생태학이나 체계이론(표본추출과 공간분석 등의 통계기법을 활용한)을 수용하여 중요한 원동력(prime mover)에 입각한 <다원적 요소의 결과, end product of multiple effect>라는 가설이 이들 도시의 기원에 대한 해석에 유리하다.


 

도시화로의 첫걸음/ 도시의 발생: 기원전 5-4천년기 무렵, 남부 메소포타미아, 즉 근동지방에서 세계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다. 문명에는 도시와 문자가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는 합법적인 무력의 사용과 중앙관료 체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국가는 <중앙집권화 되고, 전문화된 정부체제를 지닌 사회>로 정의된다. 그래서 문명의 발생에는 도시와 국가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마을(촌락)과 읍을 지난 최후의 단계가 도시이다.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 주는 곳이 중동이다. 세계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에서 잘 발달된 사원, 문자와 도시가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단계부터 문자에 의한 기록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생계 전략: 기원전 6천년에 충적평야 주변에서 소규모로 관개농업이 시작되었고, 기원전 4천년경에는 처음으로 쟁기가 사용되었으며 또 바퀴가 달린 짐수레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초기 메소포타미아시기에 가장 중요한 점은 토지이용의 측면이다. 관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땅만이 집약적으로 이용되어 토양 염류농도 축적을 유도했으며, 그리고 콩과 작물과 혼작하지 않아 비옥도는 매우 감소되는 경향이었다. 이것이 점차 문명의 발전에 큰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작지의 염화를 일시적인 임시방편으로 방지하려고, 그 지역에만 과도한 관배수를 더욱 많이한 결과 오히려, 장기간에 걸친 염류축적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염화방지를 위해 대규모 사업은 중앙집권화에 의한 계획농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요수로에 근접한 농지를 가지지 못한 농가는 경작농업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항상 가축을 사용하였다. 충분한 량의 물(수자원)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 가축과 함께 유목생활도 영위했던 것이다. 흉년에 대비해서 양곡저장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수확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재분배 경제도 촉진하는 것이 되었다.

 

 식량의 변화: 중요한 곡물은 에머 밀, 빵 밀, 보리, 아마 등이었다. 보리는 밀에 비해 염화에 견디는 힘이 강하므로 염화문제가 증가함에 따라 보리 경작도 증가하였다. 염화 문제가 없었던 기원전 3,500년경에는 보리와 밀이 거의 같은 비율로 재배되었으나, 역사기록에 의하면 이보다 1,000년이 흐른 뒤인 초기 역사시대에는 밀 재배면적의 6배나 많은 보리를 재배하게되고, 역사시대의 후기가 되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토양 비옥도는 더욱 낮아져서 밀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기원전 3,000년이 되기 바로 직전 무렵부터 대추야자(메소포타미아), 무화과(고원지대), 올리브(레반트 지역) 등 과수재배가 시작된다. 대추야자는 넓은경작면적이 필요하지 않고 또 염류농도에 상당히 내성이 있어 곧 전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근동에서의 식량생산의 효율성 증대는 사회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잉여식량을 생산하고 채집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진 것은 복합사회로의 이정표가 되었는데,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식량생산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개량된 식물(작물)과가축, 새로운 기술, 재분배 경제의 효율성과 이에 대한 통제 등의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잉여 량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생산된 식량의 절대적 량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된 열량과 식량을 생산하는데 소비된 열량의 균형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주민들은 진보된 기술과 전문화, 교역, 그리고 정착 생활의 증가 등에 힘입어 생산된 식량보다 적은 량을 소비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잉여가 창출되었다. 풍부한 식량과 신뢰할 수 있는 식량으로 인해 나타나는 극단적인 효과는 유아 출생율의 증가로서, 이는 곧 인구 증가의 지표가 된다. 정착생활로 인해 출산의 간격이 줄어들었으며, 좋아진 영양상태로 여자가 출산한 후 다시 임신하기까지 필요한 기간이 줄어 들었다. 그런데 월경의 시작과 유지는 충분한 몸무게와 체내에서 단백질이 차지하는 비율(약20%) 등과 관계가 깊다. 영양은 효과적인 생산고 재분배 경제 구조의 확립에 의해 충분히 제고되었으며, 따라서 여성의 출산 능력이 일찍 확보되었고, 좀 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곡물이 모유와 함께 유아의 음식이 되면서 임신의 터울은 점점 더 줄어 들었다.

 

 

정치와 국가사회의 발생/ 사방의 왕 : 수메르와 아카드, 기원전3,000년경에 도시국가, 도시연맹체, 강력한 군사통치자의 지배 아래 민족국가로 발전했다.

나일 강 유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그러나 스스로의 고유한 형태와 내용을 지닌 국가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 초기 농경에서 도시들로 발전해 가는데 4천년이 걸렸던 메소포타미아와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에서 문명의 발생은 더 빨리 이룩되었다. 이집트에서는 농경에서 국가의 확립이 약 2,500년 걸렸다. 농경은 기원전 5,500년경 이후에 도입되었다.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걸었던 길과는 다소 다른 길을 따라 발전하였다. 늦게 출현한 농경촌락들은 재빨리 읍으로 바뀌었고 성공적인 농업기반을 마련하였다. 교역과 관개는 처음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소포타미아 초기 왕조의 물질 문화: 수메르 문화의 광휘뒤에는 전문 장인을 부양하고 장거리 무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잉여농산물을 생산하였던 효율적인 경제체제가 존재하였다. 관개 공사는 크기와 용수 면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먼저, 신전, 그리고 나서 왕의 신생 중앙집권력은 각 지역의 용수조달과 할당, 토지이용 등에 필요한 조직과 기획을 더욱 개선하기에 이르렀다. 관개농지의 염분 축적은 겨우 인지되기 시작하는 정도의 수준이었고, 경작 가능지 전부를 차지하고 살 정도로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비옥한 농토와 소출이 많은 곡류, 소, 양을 가졌던 수메르의 농부들은 아주 번영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초기 왕조의 사회조직상 변화

계층화

수메르의 도시들에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결코 노예에 의존하여 전체 공동체가 유지되지는 않았다. 노예의 수는 적었으며 대부분 전쟁포로로 이루어졌다. 여자노예를 가리키는 문자부호는 기본적으로 <산(山)여자>라고 되어 있어 대부분의 노예들이 산악지대에 대한 침략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려준다. 노예들은 돈으로 다시 자유를 살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다수의 노예는 여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주로 사원이 경영하는 직물 방직 공장에서 주로 노동했다.

문명 발생의 일반적 과정

근동지역에서의 문명의 성장 핵심에는 농경의 도입과 도시의 성장이라는 주요 변환이 있었다. 민족 국가(위계적 복합조직)로의 주된 통합요인은

 

1) 인구변동

 

2) 식량생산 기술: 식량생산 기술은 어떤 문명이든지 기반으로 해야하는 기본자원이다. 효율적인 곡물재배와 가축사양은 식량자원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해 준다. 근도의 초기 촌락민들은 이정의 수렵 채취민보다 반듯이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생활을 아주 다르게 조직화할 수 있었다. 농경과 식량저장은 1년내내 정착된 공동체가 있을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활동의 계회도 전전으로 소모적인 것은 아니지만, 항상적인 식량자원 추구활동으로부터 주기적이고 집약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활동으로 변화하였다. 농경민들은 단기간 동안 고되게 일해야 하였지만, 그것은 농업활동 주기상 집약 농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으로 보상받았다. 농경민들은 처음에는 그런 시간을 야생자원을 계속 채집하는데 이용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공예와 건설 활동에 쓰게 되었다. 식량생산과 함께 재화의 양은 극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자본재에 대한 이러한 투자는 더 높은 생산성과 더 많은 재화의 생산을 가져왔다. 또 식량생산 전략 자체도 변화하기가 용이하였다. 새로운 가축 품종들과 곡물 변종들이 생산성을 더 높였고, 당시까지 경작이 불가능했던 지역을 경작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단순 관개 농법이 도입됨에 따라 생산성과 농지가 늘어났다. 초기의 관개 노력은 비가 충분하지 못한 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지역을 경작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관개 기술이 개선되었을 때 그 효력은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관개와 여타 집약농법은 부의 차별화와 생산자원의 통제를 촉진시켰다. 이것은 계층화한 사회가 성장하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 관개와 여타 계획적인 집약농법 등의 잠재적인 이점은 농업생산의 중앙집권적 통제라는 적응전략을 낳게 했다. 중앙집권화한 행정조직이 없어도 공동체들은 살아 남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구성된 공동체들은 더 잘 영위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계급-계층화된 사회와 중앙집권적 행정조직을 선호하게 만든 제2의 요인이었다.

 

3) 무역

 

4) 전쟁: 조직화한 군사 중심 정책의 영향은 매우 커서, 인구 변동을 가져와 결국 핵화하고 방어가 용이한 단위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 자체가 또한 잠재 적군에게 아주 매력적이기도 하였다. 상비군과 지휘관의 탄생은 초기 도시들에서의 주된 권력이 종교 지도자로부터 군 지휘관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정치상의 이러한 변화는 그 이후로도 완전히 역전된 바는 결코 없는 사실이 되었다.

 

5) 여성의 지위: 여성의 지위는 보합사회의 출현과 함께 상당히 변하였다. 농경과 정주 촌락 생활의 등장이 남성과 여성의 지위 불균형의 증가를 촉진하였는데, 이 지위상 변화의 기본적인 원인들로서는 다음의 3가지 상호연관된 요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첫째, 정주 촌락의 확립은 거주 구역과 노동 구역의 분할을 촉진하였다. 둘째, 농경의 발달은 여성의 음식 가공 책임을 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 활동은 대체로 집 근처로 한정되었다. 셋째, 남성들은 커져가는 상품 교환 체계와 지식 전달 체계(의례 및 상징기호에 따른 의사 소통 포함)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경제 활동과 집의 물리적 공간배치 상의 변화는 양자 모두 남성과 여성이 사회의 생산과 행정면에서 행하는 역할의 차이를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농경의 집약화와 도시화의 진전과 더불어 이러한 차이는 여러가지 믿음(신앙, 종교), 관습과 그리고 심지어는 법을 통해 제도화되었다.

 

6) 활동의 전문화와 부의 분배: 대부분의 농경 이전 사회들은 연령이나 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을 빼고는 대체로 전문화란 거의 없는 평등사회였다. 반면에 도시사회들은 직무에 대한 극도의 전문화와 부(富)의 분포가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발전하였다. 이 두 과정에 바탕이 된 것은 전문화한 활동에 투자될 수 있고 부유한 계급을 부양할 수 있는 잉여가치(富)였다. 그러한 잉여물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자들이 상당한 잉여물을 생산하도록 유도되어야 하고, 중앙 집권력은 그 축적을 감독해야하며, 공동체의 규범이 바뀌어 잉여생산물의 재분배에 의한 평등주의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하였다. 고고학 자료와 문자 기록으로 추론될 수 있는 것은 신전 위계조직이 신념체계의 형성, 정보의 관리. 그리고 재분배경제 등을 통해 이러한 변화들을 달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복합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활동의 전문화와 부의 차별화가 제도화되어야만 했다. 문명은 안정과 질서 위에서 번영한다. 따라서 계급차이와 전문화한 경제방식들이 공식화되어야 한다. 근동지방의 종교운영자들은 이러한 점에 대해 신화로 정당화시켰고, 당시 발전하고 있었던 문명질서의 의례적 재확인을 통해 기여해왔다. 새 질서 공식화의 마지막 단계는 초기 세속 통치자들에 의해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달성되었다. 첫째, 특히 권력 이양기에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 종교상의 신들에게 승인을 청하였다. 둘째, 법전을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약하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세속 통치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집단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친 통제력을 유지하도록 해주었다. 이상의 과정들은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며, 모든 상황에서 똑같은 결과를 낳은 것도 아니었다. 사회조직의 복합도가 증가하고 상호작용의 범위가 증가하는 쪽으로 향하였다. 이 확연한 추세는 일시적인 역행도 가끔 있었지만, 선사시대, 역사시대 초기,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강렬한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4, 농업의 역사

천재는 그 개인에만 보이는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뻔히 보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기존의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천재다.

鹽野七生,<로마인 이야기>에서

인간은 발명적인 면보다는 어떤 발명을 발전시키고,

전파시키는 능력이 더 탁월하다.

Carl Sauer [농업의 기원과 전파]


농업은 일반적으로 처음에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화전농업으로 시작했으며, 점차 동물사육(목축), 식물재배(농경)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수렵채취시대와는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다량의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고, 인구도 400만에서 8,500만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농경법은 경운(耕耘)만하고 시비를 하지 않으므로 지력을 감퇴시켜, 매년 수확이 감소되고 수년 후에는 새로운 경지로 이동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화전(火田)농업을 일명 shifting cultivation(이동 경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며, 약탈농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토지의 영양분을 약탈한다는 의미이다. 수렵-채취시대는 자연생태계에 투사되는 태양광선에 의해 생성된 것을 식량으로 하였으나, 화전시대를 접어들면서 인간이 식량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이용하여 경작지를 만들고 작물을 재배함으로써 작물의 에너지고정 효율을 높였다. 유축-농경시대에는 목초와 같이 경작지가 아닌 곳에서 고정된 태양에너지가 가축을 통해 경지에 투입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생산자 1인당의 식량생산량이 증가되고, 개인소비량 이상의 생산이 가능해져 비생산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고대문명의 꽃피움이 가능하였다. 큰 강 유역 등 비교적 비옥한 토지에 정착한 인류는 농업생산성이 높아 잉여농산물과 더불어, 비생산계층이 생겼으며 이들이 번영하여 고대문명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농업은 인구증가, 도시화로 점점 줄어드는 경지면적 등의 요인으로 농업생산성이 하락했으며, 이로 인해 주변 유목민족과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밀(小麥)을 주식으로했던 고대문명권들(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갠지스 등)은 그 토지생산성의 감퇴와 더불어 주변 유목민족에의해 그 문명자취만 남긴채 완전히 그들의 종족과 문화는 멸망했다. 인간은 개화되어 있든 야만상태에 있든 자연계의 지배자는 아니다. 인간이 자연환경을 지배하려면, 그 행동을 일정한 자연법칙에 순응시켜야한다. 자연법칙을 벗어나려고하면 언제나 자기를 양육해 주는 자연환경을 파괴하게 된다.그리고 그환경이 급속히 악화되면 그문명은 쇠망한다. 고대문명인은 그들이 오랫 동안 살아왔던 토지를 수탈했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인 문명이 사방으로 이동한 주요 이유였다. 그들이 만든 제국(帝國)이나 문명의 숙명이 거의 모두 토지의 이용방식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고대문명인은 대체로 천연자원을 고갈시키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연환경을 수탈하였다. 수목이 밀생한 산록이나 강유역으로부터 유익한 삼림을 수없이 베어내고 불태웠으며, 가축을 초원에 너무 많이 방목하여 사막화시켰고, 야생동물과 물고기 기타 수서동물을 함부로 죽이곤했다. 경작에 적합한 생산성 높은 표토(表土)가 토양침식에 의해 박탈당한대로 방치하고, 침식에 의해 하류에 충적된 토양은 강의 흐름을 막거나 바꾸었으며,저수지,관개 운하,항구 등이 막히는 것을 방치하였다. 따라서 그 문명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약탈하여 쇠망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땅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쌀을 주식했던 중국은 현재까지도 그들 선조들의 고대문명과 문화를 계승하여 왔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에 살고있다. 이것은 밭조건과 다른 수도작 중심의 논농사로써 농업생산성을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유지했고, 고대 중국의 전설적 제왕들(神農氏 등)이 治山治水로서 농업생태게보호에 진력하였다는 것과, 두엄 등 자연의 유기물을 모아 비료로 논과 밭에 시용하는 것을 권장함으로써 수도작 농업의 지속을 가능하게했던 것이다.


 

농업과 환경 파괴

 인류 최초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던 수메르문명을 비롯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어찌하여 황량한 사막 위에 일부 유적만 남기고 홀연히 멸망해 버렸는가? 인류역사에서 지금까지 출현한 문명의 흥망 원인을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삶의 기반 붕괴로 말미암아 생존의 위기에서 찾고 있다.

 

 남태평양 이스터 섬(Easter Island)의 비극이 상징하는 것은 환경 파괴로 인한 출구가 없는 현재의 지구 모습과 다가 올 그 미래를 나타낸다. 즉 현재의 이스터 섬의 그 누추함과 야만스러움 속에 남아있는 한때는 번성했던 진보된 사회의 흔적각 600여개가 흩어져 있다, 이 섬에 일찍이 거주하던 주민들 사이에서는 부족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거석 조상 세우기 경쟁이 벌어졌으며 이와 연관되어 초래된 삼림 파괴[섬에는 대가축이 없어 통나무 받침대를 이용해서 거석을 옮겼다]로, 마침내 그들이 건설한 문명 전체가 서서히 파괴되었고 섬 전체가 거주 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을 보면, 자연 생태계(이 경우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상징을 위한 투쟁에서 초래된 산림의 벌채)를 파괴한 것이 곧 그 문ꅱ을 건설했던 인간의 파멸을 가져 온다는 무서운 암시를 보여준다. 서기 1600년 이후 이스터 섬 사회는 스스로 자초한 환경파괴의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삼림벌채의 사회적, 문화적 충격은 신앙체계와 사회 조직에도 파괴적 영향을 끼쳤고 복잡한 사회가 세워진 기반 그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줄어드는 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심화되어 마침내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구할 수있는 단백질이 부족해 짐에 따라 식인 풍습까지 생겨났다.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는 산업화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신석기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농경의 시작이래 계속되어온 과정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살면서 자연에 극소한 영향을 미치는 수렵채취 활동과는 달리, 농업은 인간이 자연조건에 인위적으로 변경을 가해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면서 자연에 <부담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관계로 탈바꿈한다. 시대별, 사회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대립적인 관계로 인해 자연이 지게된 부담이 사회존속의 한계를 넘을 정도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문명의 흥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경제 행위와 생태계의 부양능력 사이의 조화 혹은 모순 관계에 바탕을 둔다. 양자 사이의 모순은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약 200만년전이다. 구석기 및 신석기를 사용하며, 거의 200만년동안 수렵, 채취 어로 생활을 영위해오다가 8,000-10,000년전에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혁명을 겪으면서 비로소 집단 취락을 형성하고 그 문명의 여명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오랫동안(20만년) 수렵 및 채취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 혹은 그 무의식의 세계는 현재도 사냥꾼의 버릇이 남아 있다. 집요하게 목적을 추구하며, 긴박감과 쓰릴 속에서 희열을 맛보는 인간 본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약 1만년 전(마지막 빙하기가 지나 기후, 식생, 동물 등이 현재와 유사한 상태로 나타나게 된 후빙기(1-2만년전)의 전후)부터 간 석기(磨製 石器)를 이용하여 농경을 시작하고 이와 함께 목축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 식량을 얻는 대신 자연을 이용하여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시대를 신석기 시대라 하며, 이러한 변화를 신석기 혁명 혹은 제1차 농업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농경 문화가 먼저 발달한 곳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나일 강변의 이집트,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역이었다. 그 후 이것은 동서로 퍼져 기원전 3,000년경에는 구대륙 각지에 농경 문화가 성립하였으며, 뒤이어 아메리카 대륙에 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간 석기와 칠무늬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농경 문화 이외에 중앙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를 걸치는 초원지대에 잔석기를 사용한 유목민의 문화가 발달한 한편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 삼림 지대에는 골각기와 빗살 무늬 토기를 사용한 수렵 어로민의 문화가 발달하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초기의 촌락은 대체로 씨족 단위의 공동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씨족들이 합쳐 부족이 생기고, 촌락들이 자라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고 문명이 발생하였다. 도시가 발달한 곳은 흔히 관개 농업이 행해진 큰 강 유역이었다. 그것은 강의 치수 사업이 넓은 지역 주민들의 협동을 필요로 하여 촌락들을 뭉치게 하고, 또 관개 농업으로 생산이 늘어나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은 일찍부터 관개 농업이 발달한 곳인데 여기서는 기원전 3,500 년경부터 각지에 큰 촌락들이 형성되었다.


 

 그 씨가 문명의 기반이 된 중요한 벼과식물(禾本科 작물)은 수수, 벼, 밀,보리,귀리, 옥수수, 호밀이다. 오늘날 곡류는 지구상의 경지면적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벼, 밀, 옥수수는 현재에도 가장 중요한 곡물이며, 벼는 식용곡물로서 최대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식량이 되어 있다. 원시적인 외알밀과 '엠마'밀의 기원은 '자르모'에서 약 1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5천년에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 발효빵은 이집트에서 기원전 2500년에 만들어졌다(경질 밀: 돌절구로 빻기 어려운 종류의 밀로 13-16%의 단백질을 가지고 있으며, 연질 밀은 절구로 빻기 쉽고 8-10%의 단백질을 가진다) 경질밀은 분명히 양분이 많아서 양질의 빵이나, 지중해연안 주민의 주요식품인 '파스타'(마카로니 등)를 만드는데 쓰인다. 오랜 옛날부터 이 곡물들은 인간의 주식이며 또 특히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회 통치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pharaoh)는 토지와 관개시설 양쪽을 다갖고 있었다. 왕의 측량관(관료)들은 홍수로 덮힌 토지의 면적에서 그 해의 수확량을 셈할 수 있었다(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주민의 대부분은 부자유 농민으로서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지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탈곡했다. 한편 서기(書記)는 곡물을 저장소에 넣기 전에 나무통으로 그것을 셈하였다. 오늘의 부셸(bushel)이란 곡식의 중량 단위는 이 방법에서 온 것이다. 이 면밀한 방법에 의한 기록에 따라서 이 나라 주민 각자가 받는 곡식의 량이 결정되었다. 나라의 가장 고귀한 사람은 가장 많은 량을, 그리고 농민은 물론 가장 적은 량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파라오의 손에 달려 있었고 또 개인의 자유 따위는 아무런 뜻도 없었다. 파라오의 주된 관심은 나라의 정치 기구를 통어하는데 쏠려 있었으며 이것을 방대한 관료조직을 통해 실시하였다. 서기들은 신관(神官)에 이어 가장 권력층을 이루었다. 식량을 생산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예도 주어지지 않고 매년 보고서를 제출하는 서기의 수장이 풍작에 의한 사회적 영예를 받았다. 농민에 대한 이 경멸의 풍조는 4천년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생물권 내에서의 인간의 위치 및 생태권의 일부로서의 토양의 소중한 기능에 대한 무관심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무관심의 결과로서 농업 및 토양은 제조업에 있어서의 원료 정도로밖에는 취급되지 않았다. 그런 취급은 과거, 제국(帝國)이나 문명의 몰락 원인이 되었는데 오늘에 있어서도 이런 풍조는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서양 역사에서 등장하는 농민들은 가장 비천한 계급의 인간(노예, 농노 등)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역사 시대 이후 줄곧 노예와 마소 같은 가축과 동일시된 취급을 받아 온 것처럼 보이나, 동양 역사에서의 농민은 서양에서처럼 그렇게 비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삼황)의 하나였던 복희씨시는 바로 실지로 농사 경험이 있는 농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중국이나 베트남,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농민의 자존심을 상징하며, 오랫동안 이 말이 쓰여 내려온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초기 농경 사회의 작물보호와 그 기록

 10,000년전 신석기 혁명과 더불어 중동의 이른바 '풍요의 반달지역'에서 농업이 시작된 이래 넓은 의미의 식물병의 생물적 방제도 시작되었다. 이락, 이란의 산악지역에서 처음으로 원시적인 밭작물농사를 지었던 슈메르인들(10,000년전)은 작물에 소요되는 물 부족과 과중되는 토양전염성 식물병으로 인한 연작 장해 혹은 수량 감소를 겪었기 때문에, 이들은 점차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 옮겨와서 관개 농업을 시작했다(8,000년전). 해마다 범람하는 강물에 의해 쌓여지는 비옥한 충적토는 작물에 충분한 양분을 공급해 주었고 또 비교적 토양전염성 병원균도 적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농업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한 잉여농산물로써 인류 최초의 고대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건전한 곡식 종자에서 발아가 잘된다는 것과 작물 생육과 수량성이 많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았다. 또 그런 종자를 계속 선택적으로 선발해서 채종해왔으며, 재배 적합지역에 알맞는 농사도 알고 있었다. 나일강이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범람에의해 조성된 비옥한 토지에서 정착 농업이 이루어졌고, 강물과 오아시스 물을 관개수로 이용하여 작물 수량성을 더 높일 수 있었다.이런 지역에서도 작믈의 단작재배(monoculture)가 성행하자 식물병의 피해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연작을 오래동안 하면 토양이 쇠퇴된다는 것도 알았다. 신개간지나 미답지로 옮겨다니는 이동농업이나 화전농업도 작물의 연작장애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작물윤작에 의해서 다시 지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물의 혼작(intermixed planting of crops)은 고대로 부터 내려온 것일 것이다.이것은 간작(intermixed double cropping)과 마찬가지로 토양병원균의 활성을 제지시키는 좋은 방책이다. 기원전 5,000년전에 나일강 하구에서 관개 농사를 지었던 이짚트인들도 간작을 했다. 이짚트의 여름철 휴경기간은 토양 10 Cm에도 40-50°C 온도가 되고, 토양전염성 식물병원균은 이 온도 조건에서 29-34 일 정도 지나면 거의 대부분 사멸하므로 이지역과 슈메르(지금의 이란)지역의 여름철 휴경은 토양병 관리에 매우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제한된 의미의 윤작(crop rotation), 혼작(mixed-cropping) 및 간작(inter-cropping), 휴경(fallow), 유기물 시용 등이 기원전 3-4천년전 중동과 중국에서 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5,000년전에 작물윤작과 퇴비시용이 일상적으로 시행되었고, 3,000년전에 관개에 의한 벼농사(답작)가 보편화되었다. 일부 산간지역에서는 화전농업이 성행했다. 기원전 300년경의 문헌에 작물병 방제법이 기술되어 있으며, 기원전 1세기에는 "작물재배 이듬해에 밭의 수확이 떨어지면, 그 다음 해는 휴경하라"는 말이 나온다. 남아메리카의 잉카문명을 건설했던 사람들은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을 받기 수백년 전에 고도로 발달된 관개 농업을 고원의 산록 계단식 경작지에서 행해 왔다. 그들은 구아노 새똥과 가축으로 키웠던 라마와 사람의 분뇨, 그리고 생선 대가리로 만든 퇴비를 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옥수수와 아마란트(amaranth)를 혼작 재배하고 있었다.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메뚜기떼, 쥐떼의 피해는 일찍부터 눈에 띄었지만, 미생물에 의한 작물병이나 그로 인한 수량감소 혹은 수확불능, 그리고 연작장해는 자연현상으로 수용하기 매우 어려워 초자연적인 신의 분노로 인식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에는 맥류의 붉은곰팡이병이 있으며, 다른 식물병의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고대 유럽사회에서 농업에 대한 기록은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헤시오도스(Hesiod:기원전 7둁둁년경)의 '나날과 일들'(Tage und Werke), 크세노폰(Xenophon:기원전 430-354년)의 Ökonomie이다. 식물병에 대한 기록은 Theophrastus of Lesbos의 '식물지'(Historia plantarum, De causis plantarum)에서 볼 수 있다. 맥류 녹병은 높은 온도와 달빛에 의해 일어난다고 했으며, 고온기가 지나면 잎에 검은 점들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야생식물에서는 이 병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맥류의 녹병은 저습한 평원지대에 많고 습도가 낮고 바람이 많은 언덕에서는 적다고 했고, 녹병은 주로 곡류(맥류)에 많고 콩과 식물에는 없다고 했으며, 밀 보다 보리가 더 녹병에 잘 걸린다고 했다. 그후 약 300년후 로마 시대(50 B.C.- 476 A.D.)에 들어 Plinius(Pliny AD 23-79)는 자연지(Historia naturalis)를 저술하여, 당시의 식물병과 농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Vergils(기원전 70-19년)의 'Georgica'나 Cato dem Älteren(기원전 234-149년)의 "De Agricultura"에서 읽을 수 있다. 농작물에 대한 기술과 수량증가를 기하기 위해 작물윤작(Fruchtfolgen), 녹비시용(Gründüngung)을 한다고 했다. 휴경과 곡류재배와 완두, 강남콩, 배취(vetches), 루핀(lupines) 등의 콩과식물재배의 윤작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퇴비시용, 관개농업 및 토양의 석회시용, 녹비시용, 부숙퇴비(composting)시용도 있었다. 일부 산간지역의 화전농업에서 유래한 초목회(나무재)의 토양 시용도 있었다. 바서스(Basus)의 'Geoponica'(서기 약 949-956년경 재서술)을 보면, "흙에서 버섯을 많이 거두려면, 갈대가 무성한 비교적 연한 산 흙을 취한다. 그기에 나뭇가지들과 다른 불에 태울 수 있는 것들을 한군데 모아, 비오기 바로 전에 불에 태운다. 그러면 거기서 많은 버섯을 채취할 수 있다." 이것은 토양을 의도적으로 열처리한 것으로서 최초의 문헌이 될 것이며, 최초의 성공적인 토양 균류 관리 방법이 될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로마 제국의 쇠망

 고대 그리스는 주로 해양무역, 상업, 그리고 해외 식민지에 의존해서 높은 문화와 문명을 건설했지만 결국 농업을 돌보지 않고 토양을 쇠망시켜 멸망하고 만 것이다. 사람이 딛고 있는 땅을 경멸하고 그 흙을 바탕으로 양식을 생산하는 농부에게 아무른 사회적 동기 부여를 주지 않은 문명은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공동체를 언제가 이합집산으로 무너뜨리게 마련이다.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던 왕정시대에 비해 공업과 상업 및 해운업에까지 손을 뻗친 덕분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에 따라 인구도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귀족정치의 숙명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람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도 계속 증가했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그리스에서 이런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는 것밖에는 살아 갈 길이 없었다. 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다. 그들의 특징인 진취적 정신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스인의 식민지 건설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골고루 미쳤다. 동쪽으로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의 말라가와 프랑스의 마르세유도 이 시기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도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기원전 300년경의 플라톤의 말은 다음과 같다. " 아티카에는 지금 꿀 벌통밖에는 아무 것도 기를 수 없는 산들이 있다. 옛날에는 이들 산에도 수목으로 울창해서 지금도 그 나무로 지은 집이 남아 있다. 또 이 나라에는 이런 키 큰 나무들뿐만 아니라 끝없이 넓은 초원도 있어 가축을 방목할 수 있었다. 해마다 오는 비는 지금처럼 벌거벗은 땅표면을 아무 쓸모없이 흘러서 바다로 가는 일이 없었고, 넉넉히 나라안 깊이 받아졌었다. 보수력이 높은 진흙에 의해 저장된 다음, 샘이나 냇물이 되었고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골 골이 풍부한 물을 흘러보내 나라 안에 널리 퍼진 것이다. 수리시설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 신전(神殿)에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작은 여러 개의 도시국가 형태를 띤 정치체제를 가지고, 토지에 대한 아무런 애착이 없는 노예의 노동에 의한 농업, 공업, 광산업과 해양 통상 무역을 근간으로 살아갔는데(덕분에 시민들은 자유를 누리고 높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비해 로마는 본질적으로 자영농민이 주축이 된 농업국가에서 출발해서 대제국을 건설했다.

 

 로마도 그와 비슷한 쇠망의 길을 걸었다. 기원전 800년경의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역사에 오른 것은 농민으로서이다. 그들은 도시 주변의 숲을 개간하고 농작물을 재배했다. 에트루리아는 테베레강과 피사(아르노강)사이의 지역에 있었다. 농업기술이 높은 수준까지 발달한 것은 이 지역과 로마의 바로 남방지역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처음에는 청동기의, 그리고 나중에는 쇠의 쟁기날을 쓰고 또 2-3종의 농작물을 돌려짓는(윤작) 농지보전 방법을 썼는데, 이것을 공화정치 초기의 로마인도 쓰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의 마레마는 기름진 곡식 수출지역이어서 당시 부족국가 연맹은 해적으로부터 강탈을 막기 위해 해군을 갖고있었다. 로마의 농지는 도시 근교의 기름진 땅의 약 2.4 ha에서 방목지의 120 ha까지의 대면적이 있었고, 로마 공화정부의 농업최성기에는 최고의 기술과 영농관리의 손길이 미쳐 있었다. 보통, 경작과 휴경을 되풀이했으며, 때로는 3년 돌려짓기(輪作)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다른 농작물이 항시 재배되었다. 그 당시에도 단작(單作)이 토양의 비옥도를 낮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축과 사람의 분뇨는 짚과 함께 퇴비로 부숙되어 비료로서 토양에 처리하였다.

 

 본래 전쟁은 시민군에 의한 방위적인 성격이 있었으나 뒤에 군사적 정복이 늘어감에 따라서 상황은 변해 갔다. 원정은 약탈품과 노예, 그리고 정복된 부족으로부터 공세(貢稅)를 로마로 가져왔다. 공세는 원로원 의원의 재산을 늘렸다. 약탈품은 군인, 특히 장군들의 보수가 되고 노예는 전반적으로 농기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젊은이의 수가 줄어들고 농지가 부유한 원로원 의원이나 전시 부당이득자에게 팔린 후에는 그 경향은 특히 심해졌다. 부유계급의 대소유지(라티푼티움)는 감시인의 매 밑에서 일하는, 사슬에 매인 노예의 노동에 의하여 가꾸어지고 , 퇴비넣기, 밭놀리기(휴경), 돌려짓기(윤작) 등의 농지관리나 배수로의 유지, 가축 돌보기 같은 힘든 일은 점차 천시되어 갔다. 해마다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평민들은 그들의 직장인 농토나 공사현장이나 가게에서 오랫동안 떠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평민들의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 반면에 귀족 계급은 넓은 농토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일하지 않으면 당장 경제력이 떨어지는 형편은 아니다. 로마 귀족에 대한 평민들의 항쟁도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이런 경제적 불만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 어느날 병역 상한선인 예순 살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한 평민의 비참한 모습이 '포로 로마노' 광장(Forum romanum, 로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있는 광장)에 모여 있는 군중의 눈길을 끌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다 찢어지고 몹시 초췌해 보였지만, 제멋대로 자란 머리와 수염에 반쯤 뒤덮인 얼굴은 거지 같지도 않고 노예 같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던지는 질문에 노인의 굳었던 입도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조국 로마를 지켰다. 한때는 백인대장까지 지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농토가 있는 지역이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농토도 집도 불타 바리고, 불타지 않은 가축은 도둑 맞았소. 그 재산을 다시 일구기 위해서는 빚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이자는 비싸고, 수확은 예상 밖으로 적어서 빚을 갚을 수 없었소. 그래서 나는 법에 정해진 대로 채권자의 소유물이 되어, 로마 시민이면서도 노예보다 더 혹사당하는 농노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오." 이렇게 말한 노인은 누더기를 벗어 제 몸뚱이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가 전사였음을 보여주는 칼자국 외에 채찍에 맞은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군단의 기록에 의한 로마 병사의 하루 식량을 보면, 1일분의 곡식(밀)은 852 g이었다. 이것에서 먹지 못하는 부분을 빼면 약 2,700 칼로리의 열량이다. 이 양식은 격심한 전투 후에는 보수로서 2배로 늘어났다. 로마군 병사에게 지급한 한 달치 지급량은 다음과 같다. 로마 시민 보병/ 밀 6 모디우스, 로마 시민 기병/ 밀 18모디우스와 말 사료용으로 보리 63 모디우스, 동맹국 보병/ 밀 6모디우스, 동맹국 기병/ 밀 16 모디우스와 말 사료용으로 보리 45 모디우스. 1 모디우스는 약 9리터에 해당한다. 기병에게 밀을 많이 지급한 것은 하인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군단은 휴대용 절구로 밀을 거칠게 빻아 납작빵을 만들었다 그리고 입수할 수만 있다면 기름, 양파, 소금, 마늘 ,터어닢 무, 포도주를 마련했다. 10명의 병사로 된 각 조는 각각 한개 씩의 절구와 15-30일분의 양식을 휴대하고, 또 각 병사는 약 3.6Kg의 곡식과 각각 하나씩의 냄비와 컵을 휴대하고 있었다. 고기는 식량에 들어 있지 않았고, 일정한 축제일에 소량을 의식적으로 먹을 따름이었다. 밀은 대개 경질 밀이었다. 로마 농민의 식사내용도, 일반 민중이나 병사의 그것처럼 극히 검소한 것이었다. 빻지 않은 밀의 온알빵과 죽, 그리고 올리브 기름이 주된 식사내용이었다. 로마인은 육식인종이 아니었다. 생선은 좋아했지만, 고기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전투의 연속으로 밀 보급이 끊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 로마인의 주식은 밀가루를 이용한 빵이나 밀가루를 주로한 죽이었다. 야채나 과일은 좋아했다. 치즈나 우유, 양젖도 좋아했는데, 이것들과 생선이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모양이다.

 

 기원전 197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때, 로마군에게 완패당하고, 승자가 제시한 조건대로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자립한 시민의 수가 많을 수록 그 나라는 강하고, 농경지 손질도 구석구석 잘되어 있어서 풍요로워진다. 그리스의 현재 상황(그리스에서는 자유가 없는 노예노동에 의한 농업을 영위했음)은 이와 동떨어져 있다. 반대로 자유로운 사회 방식을 추진하고 있는 로마를 보라. 그 나라에서는 노예조차도 사회의 구성원이다. 기회만 있으면 노예한테도 시민권을 준다. 시민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공직에 앉히기까지 한다. 휼륭한 로마 시민이라고 생각하여 대하다 보면, 선대에는 노예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결과, 우리는 땅에서 솟아나는가 하고 여겨질 만큼 언제나 새로운 로마인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렇게 강대해진 로마인에게 과연 누가 이길 수있단 말인가 ?"

 

 로마제국의 군단이 팽창함에 따라서 당연히 가족노동력은 줄어들고, 적은 가족의 농지는 차례로 도시의 부자에게 매수되어 감독의 통제하에서 일하는 노예노동에 의해서 유지되는 대농원(라티푼티움)에 흡수되어 갔다. 이리하여 관개와 배수, 경작, 작물윤작, 기후변화 등 그 지역의 문제에 대한 개인의 직접적인 관심은 없어지게 되었다. 곡식의 생산은 줄어들고 농지는 원예작물이나 포도 재배지로 바뀌었다. 싼 곡식은 해외의 식민지에서 수입되고, 땅을 잃고 로마 시내로 흘러 들어와서 떠돌이가 된 소농민에게 무료로 배급되었다. 한편 북아프리카의 밀산지(옛 카르타고 지역, 지금의 튀니지)는 이 팽대한 인구를 먹이기 위해 계속해서 연작하여 불모지로 변했다. 한때 높은 수준의 농업지식이 있었으나, 帝王제 혹은 元首제(Princeps) 시대로 들어가서는 그것을 이미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비옥한 농경지는 토양 침식을 겪고, 하천이나 배수로의 진흙퇴적, 말라리아(학질)의 원인이 되는 늪지대로 되고 말았다. 그후 정복한 해외 영토에 병사를 식민(植民)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것도 같은 사회적 압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로마가 식민지의 총독에게 부과한 강제 납세는 식민지로 이민 갔던 사람들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이 때문에 이주자들은 윤작의 원리를 적용하는 대신 토지를 착취하고 토양을 소모하여 결국은 경작지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기원 60년 콜메라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 만일 곡식이 수입되지 않았더라면 로마인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포기된 로마의 넓은 농지와 해안 습지는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대가 되었다. 로마인들의 곡창지역이었던 살디니아, 시실리, 스페인, 북아프리카의 비옥한 땅은 마침내 소모되어 버렸다. 산은 벌거벗고 따뜻하고 습한 기후는 건조지의 사막 기후로 변했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 카르타고는 성벽도, 신전도, 집도, 시장 건물도 모조리 파괴되었다. 로마군은 돌과 흙밖에 남지 않은 지표면을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렸다. 신들의 저주를 받은 땅에는 소금을 뿌리는 것이 로마인의 방식이다. 불모지로 단죄된 이 카르타고에 사람이 다시 살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였다. 율리어스 카이사르가 이곳에 식민지 건설을 명령했지만 그의 암살로 중단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것을 실현했다. 따라서 오늘날 남아있는 카르타고 유적은 로마 시대의 것이고, 카르타고인이 만든 것은 거의 없다. 로마인이 카르타고를 다시 재건하기 위한 '사회간접자본'투자에 그토록 힘을 쏟았기에, 로마가 존속하는 동안 줄곧 재건된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도시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기원전 146년에 소멸한 카르타고 영토는, 멸망한 이후 25년 동안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멸망 직후에는 그래도 경작지가 있고 수목도 무성했지만, 몇 년 뒤에 발생한 메뚜기떼의 내습으로 허허벌판이 되었으며, 그후로 그곳 인근 도시에 주재하는 총독이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 지방은 이제 더 이상 카르타고라고 불리지 않고, 그 호칭은 '속주(屬州)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지방은 과도한 약탈식 농경에 의해 지력이 점차 떨어져 갔고, 계속해서 토양관리를 소홀히 했기에 토양침식과 유실을 겪었으며, 그기에 덧붙여, 부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바르베리인들에 의한, 과도한 가축 방목으로 결국은 사막이 되고 만다.

 

 기원전 137년 에스파냐 파견 군단의 회계감사관으로 선임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임지인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게 되는데, 황폐하고 인적이 없는 마레마의 모습과 넓은 농원에 자작농은 보이지 않고, 온통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는 농촌 풍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그와 그의 동생은 이를 개혁하려고 했다. 로마의 군단은 자립 농민들만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이들이 쇠퇴하면 결국 로마가 쇠퇴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사회의 중추적 계층인 자영 농민이 오랜 전쟁으로 피폐한 반면, 유력자들이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사용하여 이른바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는 대농장을 경영하였다. 더욱이 속주(屬州 province, 이태리 반도 이외의 로마의 정복지)에서 들어온 값싼 곡물이 농민의 이농을 촉진하고, 많은 농민들이 로마 시내에 흘러 들어와 빈민화하여, 공화정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제 1차 포에니 전쟁후인 기원전 241년에 소유재산으로 5 등급까지 나누고 있는 로마시민의 제 1계급과 제 5계급의 재산 차이는 약 10배였으나, 제3차 포에니 전쟁후인 기원전 146년에는 거의 500배 이상 그 차이가 벌어졌다. 제 5계급 아래로는 무산자계급(proletaria:'재산이라고는 지식밖에 없는 자'라는 의미)이 있는데, 이들은 면세 계급으로 병역도 면제된다. 병역이 직접세와 동일시되고 있던 시대였다. 병역 면제는 곧 세금 면제였다.

 

 로마인은 원래 농경 민족이었다. 농민으로서는 근면하고 진취성도 풍부하여 로마농민의 생산성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갈리아인 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또한 농업은 시민의 직업으로도 훌륭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이야기지만, 독재관에 추대된 킨킨나투스는 괭이를 버리고 지휘봉을 잡았다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뒤에는 다시 괭이를 들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당시 로마의 농업은 가족 규모의 자작농이고, 노예가 있다 해도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후 농경지도 노예도 조금씩 늘어났지만, 자작농이 주류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들 소규모 자작농들은 제4계급과 제5계급에 속하는 자산가로서 직접세 대신인 병역에 종사하여 로마의 패권 확립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 선비와 농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만 제외하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말은 당시의 로마인에도 해당될 것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40년부터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에서 직접세로 들어오는 다량의 밀이 이미 소규모 자작농의 밀 생산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가격 경쟁력에서 패배한 밀 대신, 로마 농민들은 목축업과 올리브유 및 포도주 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소규모 자작농이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시대에는 그래도 농가가 존립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로마의 힘이 강해 질 수록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도 충실해지고, 그에 따라 동맹시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져 올리브유나 포도주 수요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목축업이나 올리브 또는 포도 재배는 몇 년 뒤에나 회수를 기대할 수 있는 선행 투자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사용할 수 있는 토지가 넓을 수록 수익률도 높아지지만, 미리 투자해야 할 액수도 그만큼 많아진다. 기원전 2세기 전반을 특징짓는 연전연승으로, 로마에는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져 노예가격이 내려간데다, 로마시민인 농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이 아닌 노예에게는 병역 의무가 없다는 점도 노동력으로서 노예가 가진 매력이다. 농민들이 병역에 종사한 뒤 귀향해 보면, 그가 없는 동안 가족 노동으로 얻은 수확물은 노예를 부리는 대규모 농장의 수확물에 밀려 팔리지 않거나 가격이 폭락하여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곤경을 타개하려고 빚을 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다. 문제는 로마 농민들의 근로 의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 농업의 구조 변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병역에 징집될 염려가 없는 안정된 노동력인 노예를 이용하여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 수익이 늘어날 건 뻔한 일이다. 아마도 로마 전체로 보면 농업생산은 증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좋은 것이 사회적으로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자작농들이 부채 때문에 땅을 빼앗기거나 가격경쟁에 패하여 땅를 헐값으로 내놓은 결과, 실업자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부(富)가 집중되는 수도 로마로 흘러들었다. 연구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이런 이농민(離農民)이 로마 인구의 7 %에 이르렀다니까,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문제는 복지를 확충한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이들 실업자는 단순히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생활수단을 잃은 자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온종일 통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 같은 인물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하다. 많은 보통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해 간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존심은 복지로는 절대로 회복할 수없다.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되찾아 주는 것뿐이다.

 

 기원전 134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때 그의 원로원에서의 연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들을 달리는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새도 돌아가면 마음껏 쉴 수 있는 굴집이나 숨을 곳을 가지고 있으나, 로마를 위하여 싸우고 죽어 가는 로마 시민들은 다만 햇빛과 공기를 누리는데 그치고, 집도 없고 땅도 없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헤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가족과 조상의 묘, 그리고 신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라고 독려하나, 그 말은 헛되고도 속임수에 가득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병사들에게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제단(祭壇)도 없고 조상의 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용감하게 죽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남의 재산과 행운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시민은 이제 승리자이고. 세계의 패권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들 로마 시민들은 이제 자기 것이라고는 흙 한 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력자들의 토지 점유를 제한하여 토지의 재분배를 꾀하였으나(농지개혁법:Rex Agraria), 대토지 소유자들의 반대로 실패(그의 개혁 의도는 결국 그의 피살과 함께 실패)했다. 그리고 기원전 124년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자, 그는 자작농 장려 책만이 아니라 복지정책도 생각했다. '곡물법'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그것을 시가보다 싼값으로 빈민들에게 공급하는 법안이었다. 그리고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공공사업법', 및 해외에서 경제적 기반을 개발할 수 있는 '식민법'을 제시했다. 형 티베리우스의 자작농 장려책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가이우스가 생각하는 로마 사회는 더 이상 농업국가가 아니었다. 식민시(植民市)로 이주하는 사람으로는 자기 땅을 갖고 싶어하는 농민들, 즉 유사시에는 병사로 탈바꿈하는 농민뿐만 아니라,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선발되었다. 그러나 주로 벌족파들의 기득권을 고수하며, 공화정의 집단지도체제를 옹호하려는 원로원 측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이러한 개혁들은 결국 무산되어 버리고, 원로원에 의해 동원된 비상 계엄군에 의해 그도 역시 피살되고 만다. 이들 두 형제, 즉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고귀하지도 유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려다가 잇따라 죽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실패는 결국 농민의 궁핍화[프로레타리아(무산자)화]. 및 농토의 황폐화를 더욱 가중시켰을 뿐이다. 이후 로마는 내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유력자들은 벌족파(원로원파)와 평민파(민중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거기에 이태리 동맹 도시들의 반항과 노예의 반란까지 겹쳐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로마 제국은 기원후 2세기 말경부터 쇠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5현재 시대가 끝나면서 국정이 문란해지고, 군대에 의하여 황제가 폐립된 군인 황제 시대가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속주에서는 반란이 빈발하고, 변방의 이민족까지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전란과 약탈로 도시와 농촌이 피폐하고, 상공업도 쇠퇴하여 중산층 시민이 몰락함으로써 나라의 경제적 기반도 흔들렸다. 자유 시민의 몰락과 노예의 지위 향상으로 대토지 소유자는 노예 노동에 의한 라티푼디움 대신 콜로누스(colonus)라 불린 부자유 소작인에게 토지를 경작케하는 제도를 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콜로누스는 중세 농노의 선구라 할 수 있다. 3 세기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 황제는 제국을 4 분하고, 오리엔트식의 전제 군주 체제를 채택함으로써 제국을 재건하려 하였다. 이어 4 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Constatinus: 재위 306-337) 황제가 관료제와 신분제를 정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는 등, 다시 전제군주 체제를 굳힘으로써 제국의 중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도 제국의 해체를 막을 수는 없어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재위 379-396) 황제의 치세 때 제국은 동서로 갈라지고 말았다(395). 비잔틴(동로마)제국은 그후 약 1,000년동안 계속되었으나,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이동의 물결 속에서 멸망하고 말았다(476). 로마 제국의 분열과 멸망, 그리고 그후의 이태리 역사가 말해주듯, 19세기말 가르발디와 카부르가 이태리를 재통일하기까지 거의 20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에 국가적 분열, 쇠퇴, 그리고 가난의 역사를 남겨준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마야 문명, 그리고 고대 로마 문명 또한 지배계급의 사치성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생태계의 조화를 파괴한 결과, 야기된 식량부족과 군사력 약화라는 연쇄적 현상들로 인해 몰락한 경우이다. 다만 이같은 거듭되는 생태계 파괴 속에서도 떠날 수 있는 출구가 남겨져 있는 한,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경제적) 삶의 공간을 확대하거나 혹은 다른 삶의 영역으로 떠나 옮겨가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고 살 수 없게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땅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변치 않는 현상이다. 이런 종류의 민족 이동을 고대에는 야만족의 침입이라고 불렀고, 근대에는 식민지 이민, 현대에는 난민 발생이라고 한다. 생존이 어려워진 사람들의 이동은 평화적으로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든 별 차이가 없다. 아무리 평화적으로 이동해 온다 해도 기존사회를 뒤흔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민족 이동은 다소간에 폭력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같은 출구를 찾아내지 못하는 개별적 공동체의 운명일 뿐이다. 유럽인들에 의한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지배는 바로 그같은 출구를 찾기 위한 시도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인류는 이스터 섬의 주민들과 같이, 출구가 없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 세계의 식민지 침탈이래 전세계가 유럽인들의 경제적 수요 충족을 위해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었고, 이로 인해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 생태계 파괴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일부 유럽인들은 이를 (문명의 총체적 관점에서건 혹은 단순히 기술적인 의미에서이건) 보다 우월한 문명의 전파과정이자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다소 변명적으로 파악하는, 자기본위의 서구 중심주의적 틀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농업과 인간의 환경 적인 면에서 역사를 조망해 보면, 결국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의 파괴적 행위들로 인해 신음하는 자연, 고통받고 죽어 가는 동 식물과 썩어가는 물과 공기이고 또한 이로 인해 스스로도 더불어 생존의 위기를 겪어온 인간들과 그들의 문명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동양적 생각과는 달리,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서양의 고전,고대(그리스,로마)적 사상과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은 더욱 더 이에 대해 책임이 있다. 지금껏 서구 정신사에서 문명과 진보라고 여겨져 왔던 것은 곧 자연의 효과적이면서도 무자비한 착취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라도 자연에 대해 친화적인 관점에 서서 생태계의 고리 가운데 인간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과 동아시아의 농업

동아시아 지역은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몬순기후조건으로 자연 생태적으로 벼농사에 매우 적합하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서반구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에 알맞은 수도재배를 근간으로 독특한 농경문화를 발달시켜왔으며, 하나의 지속적이며 순환적인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벼는 밀보다 단위면적당 수량이 더 많고, 영양분도 더 많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옛날부터 많은 인구를 부양시킬 수 있었다.

중국의 농업역사

대체로 구미 학자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충적(沖積)평야를 문명 발상의 땅이라고 하는 생각이 강하다. 중국의 어머니인 강, 황하와 그 수계(水系)옆에서 그녀의 아들과 딸들은 자랐다. 주류에 하계(夏系)의 사람들, 하류에 은계(殷系)의 사람들, 그리고 상류에 주계(周系)의 사람들이 교대로 하여 문명의 일꾼이 되었다. 이 3개의 큰 계열이 다시 여러 가지 요소가 가미되어서 끊임없이 종합하려고 하는 의사로 움직이고 있었다(陳舜臣,1995).


 

황하(黃河)문명의 형성: 중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문화는 중원(中原)에서 발생하였던 앙소문화(仰韶文化)와 용산 문화(龍山文化), 그리고 양쯔강(長江)유역에서 발달하였던 여러 종류의 신석기 문화(예를 들어 호북성의 굴가령문화 등) 들 수 있다. 장강 유역의 여러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稻作(벼농사)농경이다. 앙소문화는 기원전 5천년경에 시작되어 2,500년경에 종식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황하의 중류지역(중국 서북편)에 위치하며, 채도가 많이 발굴되어 이를 채도문화(彩陶文化,The Red Pottery Culture)라고도 한다. 유물과 출토품으로 유추해서보면 앙소인들은 신석기문화의 특징이었던 농경생활, 토기제작, 가축사양, 정착생활을 이미 향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농경생활을 살펴보면, 신석기 시대 화북(華北)지역의 기후는 지금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수수(기장,黍,millet), 조(栗), 그리고 배추 같은 채소를 재배하였고, 농경방식은 화전경작(火田耕作,the burn and slash system)이었다. 또 앙소 유적지에서 벼(왕겨 흔적)가 토기파편에서 검출되었는데 이것은 앙소문화기에 저지대 혹은 일부지역에서 자연 관개수에 의지하여 벼농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앙소시대의 주된 경제는 농업이었으며, 수렵과 채집은 부수적이었다.

 

 용산 문화(龍山文化)는 황하의 중하류(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해안선과 황하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역)에 걸쳐 분포하는데,흑색 토기가 많이 발굴되어 이를 흑도문화(黑陶文化)라고도 한다. 대개 기원전 2,300년경에서 1,800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산문화는 앙소시대의 농경을 이어받은 농경문화였다. 용산시대의 주곡은 수수(黍)와 조(栗)였으며,이시대는 분명히 벼농사가 광범히 행해졌다. 농작물의 재배 방법은 앙소시대와 마찬가지로 화전경작 내지는 서경농법(鋤耕農法,호미로 흙을 뒤엎어 파종, 혹은 김매기)을 했다. 농기구는 앙소시대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돌도끼, 돌호미, 돌괭이, 돌삽 등이었으며, 뼈삽, 조개껍질 낫, 나무보습 등이 앙소시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대체로 앙소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주로 밭농사(旱地農耕)를 행하였다.

 

 용산 문화는 앙소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문화의 기반이 같았기 때문에 '기술 혁명'같은 발전적인 계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소문화권에서 전설상의 하(夏)왕조가 출현하여 채도문화를 대표하였고, 은(殷)왕조는 용산 문화권에서 흥기하여 흑도 문화를 대표한 것으로 생각된다. 농경을 바탕으로한 잉여생산물은 생활의 윤택과 더불어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인구밀집지역은 후대에 방(邦), 읍(邑), 국(國)으로 불리었던 성읍도시로 발전하며, 전 중원으로 이러한 작은 성읍도시들이 확산되었다. 중원에 무수히 산재된 성읍도시의 형성은 중국에서 최초의 고대국가였던 은, 주 왕조 출현의 기틀이 되었다. 소둔(小屯,하남성 안양)문화 유적지[殷墟]는 앙소문화층 위에 용산 문화층이 있고, 또 그 위에 소둔 문화층이 있었다.

 

 인간의 이상적 사회로 그려지고 있는, 삼황오제(三皇 五帝)시대는 씨족 공동체의 좋은 시대였다. "그때는 평등사회이며, 사유재산이 없는(天下爲公)의 대동(大同)의 세상이었지만, 그 이후는 천하위가(天下爲家)의 소강(小康)의 세상이다"라고 중국인들은 기록(禮記)하고 있다. 삼황오제(三皇 五帝)의 전설은 황하 유역에서 수해(水害)와 싸우면서 농업을 발전시켜 간 고대인의 발자취이다.


 

夏나라: 기원전 2050-1550년으로 추정

우(禹)에서 걸(桀)까지 14世17王이 470여 년 간 전설적 왕조

용산 문화가 시기적으로 하왕조에 해당한다.

殷나라(BC 1751-1050): 湯에서 19대 盤庚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분명치 않다. 은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난 시대는 반경이 부족을 이끌고 殷墟[河南省 安陽]으로 천도한(BC 1384) 이후의 역사, 즉 반경에서 주왕(紂王)에 이르는 약 273년간의 역사이다. 농경시대가 되어도 화전농업 단계에서는 땅을 자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천도할 때마다 부족 서원의 숫자가 늘었을 것이다. 탕의 시대에는 이미 대부족이 되어 중원정권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殷族의 東夷(퉁구스 계)說은 갑골문자의 언어체계로 부정되고 있다. 농경에 기반한 계급사회,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다. 농작물은 수수(黍), 고량(稷), 벼(稻), 밀(麥), 조(栗) 등이었으며, 수수와 벼가 가장 많이 재배된 것 같다. 대개 집단 농경방식으로서, 시비법의 발명, 관개수로를 사용하였다. 지배, 피지배의 계급사회였다/ 노예가 사회의 주된 생산력이었다(노예제 사회). 은나라는 무슨 일이든지 미신적이었으나 주나라는 매우 현실주의적 정체(政體)의 나라였다.


 

주(周)나라(기원전 12세기-249년)

주나라는 순 시대의 후직(后稷)이 시조[ 后稷은 농업장관의 뜻, 농업입국의 나라]인 오래된 나라였으나. 천명(天命)을 받아서 천자가 된 것은 문왕 때부터이다. 은주 혁명은 기술의 혁명이 아니라 의식의 혁명이었다. 周는 노예제사회가 미처 발달하지 못한 채, 봉건제 사회가 강대해졌다. 토지는 수장의 것이고 주민이 수장을 대신해서 그 토지를 경작했다. 이른바 공전제(公田制, 맹자는 이를 井田이라고 했음)였다. 포로를 붙잡아서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전(公田)을 늘리고 그것을 경작시켰다. 농경지는 대개 성읍 주변에 위치했고 이를 전(田)이라 불렀고, 농경지를 경작한 계층은 피지배계층의 일부였던 토착민이었다. 이들 농민을 일명 서민(庶民)이라고 불렀다.

 

춘추시대

농업생산력의 중핵(中核)이었던 개별 소농민층의 형성은 서주(西周)말기부터 시작된 씨족공동체의 해체과정을 통해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고대중국의 산업혁명이라는 우경(牛耕)의 발명과 철기 농기구의 사용은 춘추 중기 이후에 출현하여 농업혁명을 일으킨다.

 

전국시대

율(栗), 맥(麥), 량(粱), 직(稷), 숙(菽) 등의 농작물 재배, 우경(牛耕)의 확대, 철제농구의 일반적 보급, 국가에 의한 방대한 관개 수리, 치수 사업이 전개되고, 황무지 개간 등 농경기술의 혁신과 진보로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중국에서 관개수리(灌漑水利)사업은 춘추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그것이 더 많이 활성화된다. 각국에 있어서 제방수축, 관개수리사업의 진행에 따라 종래에는 강우에만 의존하던 천수답이 옥토로 변모하고, 또 불모지, 황무지였던 지역이 농토로 변하였다. 실제로 화북평원이 농경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철제의 보습(犁)과 관개수리사업으로 인해 물 공급이 가능해진 연후의 일이다. 관개수리사업의 발전으로 홍수와 가뭄이 조절되고, 또한 적시에 농경지에 물을 댈 수 있어 안정적인 농작물 생산을 기하고, 또 토양의 산성화를 방지하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들어, 농학이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한서예문지에 의하면, 전국시대와 전한 시대 사이에 농서로 9 家 114 편의 서명을 싣고 있다. '盡地力之敎"를 실시, 기타 여씨 춘추에 잘 나타나 있다. 


 

 남송 시대부터 강남은 농업 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경지의 확대, 작물의 다양화로 농업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벼의 2기작(이모작)이 일반화되고 삼, 생사, 차의 생산도 늘어 무역의 주요 품목이 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농업은 대지주가 소작인(전호 佃戶)을 시켜 경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송이 사대부 사회였다면 명/청은 신사층(紳士層)이 이끄는 사회였다. 명 대 이후 곡창지대는 양쯔 강 중류로 옮겨지고, 하류의 델타 지역 농민은 주로 수익성이 좋은 상품 작물의 재배나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작물의 상품화 경향에 힘입어 목화, 생사, 차의 생산이 급증하였는데, 특히 차는 청대에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또한,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 외래작물이 재배되어 구황에 한 몫을 하였다.

명말청초(明末淸初)시기인 1647년에 宋應星(Soong Ying-Shin)이 저술한 천공개물(天工開物: Utilization of Natural Resources)은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기술을 등한시한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당시의 농업기술내용을 백과사전 식으로 상세히 적어놓았다. 벼의 도열병(稻熱病)도 이 책에 처음으로 기술되어있다. 그리고 중국적 동양적인 농업에 대한 사고방식을 천착해 놓았는데, '자연의 작용이 근본적으로 크게 작용하는 것'(天工)이 농업이라 했으며, 농업의 소중함을 오곡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금옥을 천하게 생각한다'으로써 나타내었다. '天에 때(時)가 있고, 地에 氣가 있고, 材에 美가 있고, 工에 巧가 있다. 이 네 가지가 합친 다음에 良을 얻을 수 있다'(考工記)는 자연에 순응하는 환경친화적, 보전적 농업과 농경기술관이 잘 표현되어있다. 하늘과 땅이 물과 흙과 공기와 불로 이루어졌다는 고대 희랍의 <4원소 생명론>도 다분히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던 농경사회의 문명관이었다. 특히 동양의 치산치수와 정수(淨水)사상은 강과 하천과 바람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도록 세속에 더럽혀진 인간의 심신을 먼저 깨끗이 하는 의식(儀式)을 강조하였다. 자연을 다스리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오염됨을 다스리는 보상과 희생의 원칙이 보편화된 문화였다. 조선조 태종이 혹심한 가뭄을 맞아 목욕재계하고 머리풀고 몇날몇밤을 찌는 듯한 하늘을 향해 참회하고 읍소한 끝에 얻어낸 태종우(太宗雨, 음 5월10일)의 고사는 단적으로 자연(하늘)과 인간 사이의 희생과 보상의 관계를 증거한다. <제가 삼가 상제(上帝)님께 간청하오니 우리 백성을 위해 비를 한번 내려 주십시오.> 태종의 울음은 곧 자기희생의 받침이었다. 그 죽음에 대한 심오한 보상이 바로 太宗雨였던 것이다.


 

 중국문화의 특징은 자기 발생적이며, 중단없이 지속적인데 있다. 민족중심의 정복주의를 지양하고 문화중심의 천하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적 특성도 이러한 벼농사의 생각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하-은-주(夏,殷,周) 삼대시대를 중국문명의 시작으로 보면, 고고 인류학적으로 모계중심사회였던 앙소(仰韶)문화(殷나라로 추정)는 주로 유목을 근간으로 살았던 문화로, 그 다음에 오는 부계중심사회이며 농경생활을 주로 한 용산(龍山)문화(夏나라로 추정)로 공존, 병합되어 발전하였다. 夏시대 혹은 나라는 농경생활을 영위해서 소박하고 생기적인 자연사상이 발달하였고(自然주의), 殷시대는 유목생활을 주로 하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신귀(神鬼)관념이 대두했으며, 周시대는 인지의 발달과 도덕적 자각으로 어느 정도 자연을 지배하고 미신종교로부터 해방되어 인문(人文)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하, 은, 주 삼대는 비록 전설적이나 인류의 문명의 발단점에서 다분히 농경과 목축, 그리고 집단(공동체)간의 헤게머니 투쟁과 협동, 분업화 등으로 서로 간에 겹치고 점철되었던 시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춘추(春秋)시대말 어지러운 혼란시대에 증국사상의 대표적인 세 철인(哲人)이 나타났다. 주(周)를 이상으로 보았던 공자(孔子)는 인간중심의 세계관 안에서 도덕문화를 건설하는 인본적 현세주의, 도덕적 문화주의를 표방하여 유학(儒學)및 유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요(堯), 순(舜), 문(文), 무(武), 주공(周公)에게서 인간상의 모범을 구했다. 하(夏)를 이상으로 여겼던 노자(老子)는 인간자신이 순진한 마음과 소박한 삶을 상실한 데서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가 기인한다고 보았다. 인간지식이 발달하고 문화가 생성되어 인간과 자연 사이를 가로막아 거짓과 교사, 욕망이 동요된다고 했다. 정치적 불간섭, 사회조직의 해체를 주장하고, 문화창조 및 문화생활을 거부하며, 원시적이고 소박한 자연적 농경환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중되는 문제의 수렁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누릴 수있다. 그는 夏의 소박한 자연주의를 표방했으며, 삼황(三皇:복희,신농,황제)시대의 문화가 없는 상태를 동경하였다. 반문화, 반사회, 반정치, 무정부, 무교화를 표방하고, 타고난 생존능력에 따라 개별적으로 자연 속에서 살아 갈 것을 주장하며, 인간세의 건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묵자(墨子)는 처음에 공자노선을 따랐으나, 유가의 예(禮)가 낭비적이고 비경제적이며 생산경제에 힘쓰지 않음을 비판하며, 절약과 근면을 강조하고, 당시 팽배했던 전쟁을 반대했던 반전운동가였다. 그는 은(殷)의 종교문화에 귀의하여, 夏나라의 우(禹)를 내세우며, 징벌의 힘을 갖춘 종교적 신귀(神鬼)관념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인류의 종교문화를 이런 맥락에서 추찰해보면 너그럽고, 부드러운 자애의 포용성으로 둥근 원 혹은 연꽃을 상징하는 종교(불교)는 벼농사문화권에서, 다신적이며 풍요로움을 의식하는 종교(힌두교 및 애니미즘)는 농경문화권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의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거나 결단을 요구하며, 유일신의 징벌 등 십자가를 상징하는 종교(기독교, 이슬람교)는 사막의 유목민족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밭농사 중심의 서구문화권에서 주로 기독교, 이슬람교가 정착했고, 논농사 중심의 동아시아지역은 주로 불교, 유교 문화권이 되었다. 최근의 환경운동의 정신적 뿌리는 구미지역에서는 19세기 전반기 미국 매샤츄새츠에서 은거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헨리 데이빗 쏘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저술인 월든(Walden)에서 찾고있으며(그는 그 책에서 단순소박함, 자유로움, 자연애호 및 보호, 검박한 생활영위를 예찬했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주로 노자(老子)의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에서 철학적 기반을 두고있다.

중세 유럽의 농업

11-13세기: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이민족의 침입이 10세기말을 고비로 줄어들면서 유럽사회는 안정을 되찾게 되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수레 달린 쟁기나 말의 사용, 3포 제도의 실시 등 새로운 농업 기술과 영농방식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력이 늘어나고, 이와 더불어 인구도 늘어났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계속된 인구 증가는 새로운 농장의 개척을 필요하게 만들어, 유럽 각지에 대대적인 개간 사업과 간척 사업이 일어나 수많은 새로운 농장과 마을들이 형성되는가 하면, 엘베 강 동쪽지방에 대한 식민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렇게 새로 건설된 농장이나 마을에서는 농민의 지위가 종래의 장원 농노에 비해서 좀 더 자유로운 편이었다. 농업생산력이 늘어나자 잉여생산물이 생기게 되고, 이 잉여물을 교환하기 위하여 각지에 시장이 서고, 상인이 여기에 모여 살게되어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도시는 대개 봉건 제후의 성곽 밖이나, 큰 교회 또는 수도원이 있는 고대 도시의 주변이나, 수륙 교통의 요지 등에 자리잡았다. 서양 역사에서 중세에 접어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인 타키투스(Tacitus,55-116)의 'Germania'에서는 二圃式경작(Zweifelderwirtschaft, two-field system)(겨울동안 맥류 등 동작물재배-휴경)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휴경때는 야생 콩과 식물이 자라 토양에 유기물과 질소를 공급하고 토양의 병원균에 대한 항균력(antiphytopathogene Potential des Boden)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또한 밀마름병 병원균(Gaeumannomyces graminis)같은 토양서식병원균의 병환을 차단해주는 등 토양병(Bodenbürtige Krankheiten)에 대한 포장위생효과까지 있는 것이다. 칼 대제(Kals des Großen 768-814) 시대에는 이것이 더 개량되어 三圃式경작(Dreifelderwirtschaft, three-field system)(Winterung-Sommerung-Brache:겨울작물재배-여름작물재배-휴경, 혹은 겨울작물재배-여름작물재배-목초재배)이 성행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부터 주로 말의 힘(馬力)을 이용해서 깊이갈이(중경)가 이루어지면서 삼포농법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 경우, 휴경은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윤작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밖에도 중세에는 거름(가축분뇨)에 나무 태운 재(초목회)를 넣어서 토양 속에 길항미생물상이 잘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17-18세기에 특기할만한 것은 수목이나 과수의 나무둥치 상처나 줄기마름병(동고병, 부란병,목재부휴병 따위)을 치유하는 여러 가지 도포제가 나온 것이다. 오스틴(Austin,1657)은 사과나무 부란병을 방제하기 위해서는 병환부를 칼로 잘 도려낸후 쇠똥과 소오줌을 그기 발라주면 된다고 했다. 포르사이트(Forsyth,1791)는 신선한 소똥과 석회, 초목회와 흙을 잘 엉겨서 발라준다고 했으며, 또 어떤이는 병원균의 침입을 막기위해 신선한 진흙을 발라주면 된다고 했다. Grosclaude(1970)에 의하면, 목재부휴균인 Chondrostereum purpureum은 진흙을 발라주면 100% 내지 30 %정도 방제가 가능한데, 이는 토양미생물상을 병원균의 길항균으로 이용하여 식믈병을 방제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또 밤나무 동고병(Endothia parasitica)의 병환부에 토양을 처리해도 같은 효과가 있는데 이경우에는 Trichoderma균이 길항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18세기에는 중상주의를 비판하는 경제 사상이 등장하였다. 프랑스의 케네(Quesnay,1694-1774) 등이 주장한 중농주의는 금, 은을 국부의 원천으로 보는 중상주의와는 달리 토지와 농업을 중요시하고, 농산물의 자유로운 매매를 비롯하여 자유방임(레세페르, Laissez-faire)정책을 주장하였다. 한편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중상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유주의 경제를 제창하였다. 그는 국부의 원천을 국민의 생산 노동에 두고,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으며, 국가의 기능과 간섭을 최대 한도로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

근대 서구의 농업혁명

원시시대의 농업혁명에서 비롯된 농작물의 경작은 기술분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세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9세기-12세기) 북유럽에서의 농업기술혁신(십자쟁기,삼포농법, 마력(馬力)이용, 및 수차와 풍차사용에 의한 자연동력 이용)은 농작물 생산의 증가, 새로운 경작지 개척과 더불어 많은 잉여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인구의 급증을 가져왔다. 그리고 농촌의 유휴 노동력이 다시 도시로 옮아가 상공업을 일으키게 되었다. 농업기술을 비롯한 중세 말의 기술 혁신을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던 지역은 북유럽이었고, 이로써 서양문명의 중심은 지중해 연안을 떠나는 변화까지 일어났다. 유럽 근대문명의 발달과 함께, 산업혁명이 농업혁명을 유발시켜 기계화 농경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대형기계에 의한 대면적 농경지를 개척하고, 관개,배수에의한 농지의 개량과 확대가 촉진되었다. 이러한 기계화 농경시대에는 태양에너지와 인간의 식량에너지 외에도 저장된 태양에너지인 석탄, 석유에너지 등이 경지에 투입되어 식량의 생산량이 더욱 증대되어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아무튼 이즈음 유럽에서 근대과학문명 시발과 함께,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의거한 근대적인 농학(農業科學)이 태동될 수 있었다.

 

 농업혁명은 제도적 및 기술적 변혁을 통한 농업 관련분야의 근대적 변혁과 농업생산성의 증대가 그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영국 농업의 제도적 변혁은 16세기의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근대적 토지제도가 확립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의 제 2차 엔클로저 운동부터였다. 이 시기의 엔클로저 운동은 경지확대와 경지의 효율적 이용을 목적으로 수행되었고, 그 결과로서 중소농(中小農)이 몰락하고, 대토지 소유제와 대농장 체계가 확립되는 변화를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영국에서의 엔클로저 운동이 진전된 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영국의 농업혁명의 4가지 특징

 

1)중세의 개방경지에서의 분산된 지조(地條)형태의 경작 대신 대규모로 통합된 단위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게되었다.

 

2)가경농지(可耕農地)가 황무지와 공동지까지 확장되었다.

 

3)자급자족적인 소농민 촌락공동체는 자기의 생활 수준이 기후조건보다는 국내 및

국제시장의 조건에 따라 변하게되는 농업노동자의 공동체로 변질되었다.

 

4)농업생산성, 즉 노동력 한 단위가 생산하는 산출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영국의 농업혁명은 (1)새로운 생산기술의 채용, (2)인클로저 및 (3)기업가적 태도의

변화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지제도의 변혁과 함께 영국의 농업은 새로운 작물의 도입과 휴한제(休閑制)의 폐지라는 기술적 혁신을 통해 농업의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중세이래 지력(地力)의 쇠퇴와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휴한제는 경지이용에 커다란 제약조건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생산성을 낮춤으로써 농업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순무(turnip, Turnip Townshend의 노력으로 보급되기 시작)와 클로버 같은 새로운 사료작물의 도입에 의한 휴한제의 폐지(종래의 윤작방법을 버리고 그 대신 두과작물을 윤작시키고 목초를 재배함에 따라 유효경작면적은 늘어나고, 가축의 겨울사료가 확보되었다)와 가축사육규모의 확대에 힘입어 농업의 생산성은 증가를 보이게 되었다. 휴한지였던 땅에 사료작물을 재배하므로 써 지력회복(순무와 감자는 토양을 청결시키고, 목초는 지력을 증진시킴을 당시에 경험적으로 알게되었다)의 효과와 더불어 '사료증대 → 가축 증대 → 비료증가 → 곡물증산'이라는 최종 효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續耕,constant tillage 및 새로운 경작-축산 복합농법). 18세기 초 말이 끄는 목제 쟁기(馬力中耕機)가 제조된 이후 1830년대까지 쟁기질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쟁기의 개량작업이 이루어졌다. 쟁기가 개량되자 그사이 목제 쟁기로는 10cm 정도밖에 갈 수 없었던 것을 30-40cm까지 한층 더 깊게 갈고 흙을 훨씬 잘 뒤집어 부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18세기초부터 영국은 경작용(쟁기, 가래), 파종용(파종기), 곡물수확용(낫기계), 곡물처리용(탈곡기, 정선기) 등의 용도별로 농기계를 제조하는 기계공업이 성립됨으로써 농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까지 손으로 파종하던 방식은 1730년대 영국의 J. 털(Jethro Tull)에 의해 개량된 파종기가 출현함(直線條播法)으로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널리 사용된 것은 1785년 영국의 쿡이 발명한 파종기였다.


 

 농업은 (1)증가하는 인구, 특히 공업중심지의 인구를 먹여 살렸고, (2)영국공업제품에 대한 구매력을 증가시켰고, (3)공업화를 위해 소요되는 자본의 상당부분을 마련해주었으며, (4)공업부문의 고용 인력(잉여노동력)을 배출해 주었다. 1750년-1850년을 산업혁명기라하면 농업혁명은 이보다 약 2배의 긴 기간동안 일어났다. 농업관행의 실질적인 개선은 1650-1750년의 기간동안 널리 보급되었고, 기계기술, 인조비료, 자본집약적인 배수 및 관개 시설 사업을 통한 농업의 근대화는 1850년이 후에 큰 박차를 가해 진전되었다.


 

 농업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사회 상층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지3세(George III)는 '농업가 조지'라는 칭호를 좋아했고, Arther Young을 시켜 農業年報(The Annals of Agriculture)를 저술하게 했으며, 여행 중에도 항상 그 책을 애독했다고 한다. 윈저의 왕실 영지에는 모범농장이 있어, 그곳에 처음으로 메리노 양을 스페인으로부터 도입하게 주선했다. 런든 교외의 큐 식물원도 그의 부지 희사와 관심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공업화 이전의 과거와 가장 중요한 결별의 사건은 1846년의 곡물법(Corn Law)의 폐지였다. 이로써 외국의 값싼 농산물이 들어와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을 해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지만, 농업은 이후 지배적 산업에서 부차적 위치로 떨어졌다.

곡물 수확기인 기계낫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18세기말 미국에서였고, 이후 많은 개량이 이루어짐으로써 1826년 스코틀랜드의 벨이 발명한 기계낫이 19세기말까지는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두루 사용되었다. 탈곡장치를 만들려는 시도도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져, 1785년 스코틀랜드인 A. 미클에 의해 실용적인 탈곡기가 개발되었다. 미국에서도 1791년에서 1794년 사이에 탈곡기가 발명되었다. 또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쟁기가 만들어짐으로써 단위시간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소맥, 대맥 등의 평균수확량이 20-30% 정도 늘어났다. 이와 같은 경지의 확대, 과학적 농법의 이용과 함께 농업 기계화의 발전으로 인해 전세계적인 농업생산은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미국의 예를 보면 1860-1910년 동안에 경작지 면적은 2배, 밀 생산은 4배, 옥수수 생산은 3.5배, 면화생산은 3배 증가하였다.







농학의 출발점

19세기 생물학의 발전과 병행해서 농학(Agrawissenshaft)도 비상하게 발흥하였다. 1845/1846년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을 일으키고 전유럽에서 발생하였던 감자 역병이 Anton De Bary에 의해 Phytophthora infestans 라는 곰팡이에 의한 식물병이라는 것(植物病原眞菌說)이 처음으 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1850년이 후에는 미생물의 실내 순수 분리,배양이 가능해졌으며, 1881년에는 미생물의 고체 평판배양(agar 이용)도 가능해졌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19세기말 까지의 동안에 토양 미생물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많이 밝혀졌는데, 윤작을 하는 동안 미생물상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과 토양전염성 식물병원균의 생활사가 중단 혹은 차단됨을 알았다. 또 토양의 건강성이라는 개념이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제 토양이 가지고 있는 토양병원균에 대한 항균력(antiphytopathogene Potential)을 말한다.

 근대농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어(Albrecht Thomas Thaer 1752-1828)는 합리적농업의원리(Grundsatze der rationellen Landwirtschaft 1809-1812)라는 저서에서 "가장 완전한 농업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지속적 이윤을 자금력, 능력, 외적 사정에 따라 만들어내는 경영이다."라고 했다. 이는 바로 근대적, 합리적 정신으로 영국식의 자본주의적 영리추구의 농업을 주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래의 삼포식농법을 비판하고 돌려짓기농사(輪作 農法)를 권장하였다. 그는또 농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 경제 법률 등 모든 분야의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전체적이며 보편타당한 근거에서 단순하며 파편적인 경험적이고 특수한 개인적 지방적 견해를 비판하였다. 당시 엘베강 동쪽의 농업국인 프로이센이 나폴레온 전쟁에서 패배하여 새로운 개혁의 분위기로써 당시까지의 영주제농장경영을 청산하고, 농민들의 지위를 개선,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근대적 소지주 자유농민(Junker)의 농장경영방식으로 전환(농업개혁1807-1822)하는데 그의 농경제학 이론이 큰 기여를 하였다. 그와 그의 제자 튀넨의 작물영양학적 이론은 토양 유기물, 특히 부식질(humus)설로 유명하다. 자본주의적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농산물은 시장상품으로 발전하는 한편 토양의 양분은 점점 쇠퇴하여 본래의 토질로 회복시킬 수 없게 되었다. 테어의 합리적 농업은 식물영양이론으로 유기물설을 고집하여, 지력(地力)에 관여하는 물질은 토양 속에 있는 동식물의 부패에 의한 부식물질 즉 유기물이라 했다. 사료작물과 녹비(綠肥)재배에 의해 토양의 양분(肥力)자급을 도모하는 돌려짓기(輪作)방법이 토양 중의 유기물함양을 풍부하게 한다고 했다.

 

 근대적인 농화학을 성립시켰던 리비히(Justus Liebig 1803-1873)는 1840년 출간된 '농업 및 생리학에 응용하는 유기화학'이란 저서에서 "식물의 질소함유물은 식물 조직구성물이 되고, 비질소함유물은 호흡, 에너지원(源)이 된다"라고 하면서 근대적인 질소시비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는 또 유기물설과 반대로 작물영양의 무기물설을 제창하였다. 즉 녹색식물의 영양수단은 무기물질 또는 광물질일 뿐이라 했다.

 

 식물은 탄산가스, 암모니아, 물, 인산, 황산, 규산, 석회, 마그네슘, 칼륨, 철, 그리고 소금 등 무기광물질만 있어도 생존, 성장할 수 있다. 또 이들 무기염류 중 가장 적은 성분에 의해 작물성장이 지배된다(최소율의 법칙). 동식물의 생존에 있어 토양, 물, 공기는 모든 구성부분과 일부분 사이에 하나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더욱이 유기적 활동에 매개하는 인자의 모든 연쇄 중에서 어느 한가지만 결여되어도 식물이나 동물은 생존할 수 없다. 퇴비와 인축의 분뇨는 그것들의 유기적 요소에 의해 식물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부패와 사멸과정에서 생성된 물질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식물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식물 및 동물의 일부분 혹은 그 잔재물로 이루어진 유기물이 토양 속에서 분해되어 생성된 무기물이 바로 작물의 양분이 될 수있다고 주창했다. 당시까지의 유기물설은 설명하기 어려운 식물의 생리현상을 <생명력 vital force>적인 신비사상으로 합리화했다고 하면서 생명과정을 어디까지나 화학과정으로 파악하고 그 성과를 농업생산에 도입하려 했다. 작물윤작의 작부체계는 당시 생산성의 급속한 발전에 합당하지 않았다. 그는 윤작을 오히려 '약탈농업'으로 혹평하였다. 농업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은 두엄에 의한 지력의 자급이 아니라 약탈된 영양분을 무기광물질로 충분히 보충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무기물설의 제창에 의해, 농업은 두엄, 퇴비 등의 유기물비료 대신, 무기광물질비료 연구로 향하였다. 그후에 칠레 초석, 칼리 염 등의 대규모 광상(鑛床)이 발굴되고, 골분(骨粉)을 황산처리한 과린산석회, 제철 폐기물인 광재(鑛滓) 등을 이용하여 인공비료제조가 보급되었고, 이것은 더욱 확대되어, 19세기중후반 이후의 구아노무역의 성행과 함께, 무기질소화합물을 중심으로한 인공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농작물 생산성을 현저하게 향상시켰다.

 농업분야에서는 지력수탈이 점차 높아 가는 한편 공업분야에서는 지력회복을 약속하는 화학비료의 생산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자본재 생산양식에서는 농공의 사회적 분업이 현실적으로 의식적인 계획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화학비료의 사용은 독점자본과 농촌의 대결이라는 문제를 불러왔으며, 점차 농민의 피탈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농업을 비롯한 지금현실 문명전체에의 위기는, 도시의 주민이 농업에 공업의 원리를 적용하려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생겨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농업의 기본'원리'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생명을 다룬다는 것인 반면 현대공업의 기본'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과정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 과정은 생명이 없는 인조(人造)재료를 사용했을 때에만 신뢰할 수 있다. 공업의 이상(理想)은 생명이 있는 것을 배제하는 일이고, 생산과정을 기계에 맡겨 버리는 일이다. 농업과 공업의 기본원리는 양립되지 않고 서로 대립되기만 한다(슈마허).






20세기의 농업

유축-농경시대와 기계화 농경시대를 거쳐 최근 1960년경부터 시작된 근대화농업(현대농업)은 화학농업(化學農業)이라고도 불리는데 인공 비료뿐만 아니라, 병-해충-잡초 방제를 위해 농약을 사용함으로써 화학적-생물학적 환경개선을 도모하여 생산성을 높이고있다. 녹색혁명이라 일컬어지는 20세기 후반기의 농작물의 증산은 화학비료, 살충제, 제초제 등에 의존해 왔으며, 그것들에 의한 갖가지 부작용은 환경오염의 주요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전공학 등 첨단생물과학의 발전을 농업에 이용하는 것도 현대농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농업기술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혁명적인 농업기술개발에 의한 식량생산량이 포화점에 달한 다음은, 또 다른 새로운 농경기술이 개발되어 식량증산을 가능케 했고 이로써 인류를 기근으로부터 구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8>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세계 인구증가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인구가 급작히 증가하는 시기는 새로운 농경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그것을 다시 에너지 측면에서 고찰하면 일관된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다량의 에너지를 농지에 투입할 것이냐라는 점이다. 에너지 투입형태의 변화는 바로 농업기술의 변화-발달과 병행하여 왔으며, 고투입(high input)에 의한 생산성증가(high production)의 방향이다. 투입에너지는 경운, 관개, 배수, 시비, 약제처리 등 토지와 작물 환경조건을 조절하기 위해서 소비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러한 투입에너지는 자연생태계로부터 새로운 농업생태계 내지는 경지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자연생태계로부터 보다 멀리 이탈하는 것이 식량증산에 더욱 기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생태학자 E.P.Odum은 현재의 근대화농업은 경지에 다량의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으며 식량생산량은 포화상태에 달했다고 말하고있다. 식량을 보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투입형태의 농업기술을 창조해내지않으면 안되는데 특히 자동화시스템과 전자공학 및 컴퓨터의 급속한 발달과 보급에 편승한 농업시설환경조절공학의 발전에 의해 노지재배의 한계성을 극복, 유리온실, 양액재배, 컴퓨터와 연결된 정보에 의한 전자기계자동화환경컨트롤시스템으로 작물을 공업적으로 생산하여 이의 가능성을 찾고있다.

농업과 정보혁명

농업생산이 어떤 사회발전의 꼭 필요한 전제조건은 이니지만, 그 사회의 발전은 사회구성원의 일부라도 배고픔이 있을 시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풍족한 식량은 발전의 척도가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항상 발전에 수반된다(Hundgate & Sherman,1979). 어떤 사회가 발전하려면 농업이 먼저 고도로 개발되어 있어야한다(이것을 우리는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경험할 수 있다). 풍족한 식량사정은 또한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산업체의 풍부함과 같이 한다. 산업혁명은 효율적인 농업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농작업이 보다 성력화되어야 도시로 인구이동, 그리고 산업노동력의 공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농업의 기본적인 것은 인류가 처음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작물을 돌보고, 거두며, 그것을 소비하는 것으로 농업을 시작했을 때와 똑 같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농업은 농작물의 생산활동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가공 및 유통활동까지 포함한다. 또 농업은 여기에 농약 제조, 판매, 비료. 농기구, 농기계, 농장소요장치 등의 생산, 소비, 유통활동을 포함한다. 또 농업은 농가구성가족의 삶과 농촌마을주민집단(이런 사회구조가 없으면 농업자체가 불가능함)을 생각해야하며, 식품제조, 식품영양, 의류가공, 가정관리 등의 영역이 농업에 포함되며, 정부의 농정활동, 규제 및 서비스 활동, 농업연구 개발, 지도, 교육, 그리고 상업농을 위한 시장 정보 공급 활동 등도 일종의 농업행위로 보아야한다.

19세기초기 농민 1인이 4인 몫의 식량생산

20세기초 1인이 8인 몫

20세기 중반 1인이 16인 몫

1980년대 들어 1인이 60인 몫의 식량생산

상업농(1만 달러 이상의 조수익 )의 경우 1인이 200명분의 식량생산

표 . 농업 생산기술 진보에 따른 식량생산력의 증가(AID 1986 독일의 경우)

1개 단위농장( 약 10-12 dt/ha에서 50 dt/ha 면적크기) 식량 생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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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1개 단위 농장이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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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4개 농장에서 1인 식량 생산

1968 25 명

1982 45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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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경우, 이러한 고도의 농업 노동생산성은 관개이용, 종자개량(hybrid corn), 농업의 기계화 및 농업 생산 수확물의 급속한 수송(냉동차,기차,항공기 이용)과 저장, 유통구조로 인해 가능할 수 있다. 미국 인구의 2-3%가 농업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서유럽 등 선진국의 식량자급은 1975년경에야 겨우 가능해진 것이다. 인간의 육체노동력과 가축의 축력에 의존하는 농업은 그 생산량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1980년중반에 들어 농업도 미국에서는 정보혁명에 돌입했다. 그 중심은 microprocessor와 microcomputer에 있다. 그리고, 병해충방제에 있어 농약 의존형 영농체계에서 정보의존형 영농체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다. 이는 보다 균형 있는 작물보호와 농작물의 안정 생산에 기여한다. 1985년까지 개발된 작물 재배에 활용하고 있는 전문가 시스템(소프트웨어)은 환경 보전형 농업 생산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농업 역사의 의미:

농업의 기원과 그 발달 진화과정,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논하면서 Rindos(1984)는 원시사회 및 수렵채취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은 자연에 적응할 줄 알았으며, 자연생태게에는 어떤 균형이 있음을 농업을 통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adaptation-equilibrum and system theory). 그후 인류는 농업을 통해 고도의 문명과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culture and evolution). 인간존재는 농업을 통해 비로소 자연과의 교감을 이룰 수 있으며(naturalness of human-plant relationship), 인간이 여러 가지 자연의 야생동식물을 순화시켜 작물 혹은 가축으로 만든 것(evolution of domestication)이 바로 농업을 통해서 였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농업을 통해 먹거리(食糧)를 장만했으며 여러가지로 식문화의 변천을 겪어왔던 것(feeding behavior and change diet )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있는 각 민족 고유의 문화,풍속의 다양성과 고유성은 결국 농업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인류가 점차 산업사회에 접어듬에 따라 이것이 흔들리고 파괴되고 있는 것(instability,cultured fecundity and dispersal )이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진보론자인 S.P.잘리긴은 인간과 자연과의 진화관계를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하여 미래의 신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1)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 원시사회(수렵채취시대)

2)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시대: 농경시대

3)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시대: 문명시대(근-현대 과학기술시대)

4) 인간과 자연이 공영하는 시대: 미래 신세계시대

인간이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자 인간은 <市場과 戰場>을 통해 자연의 약탈과 파괴행위를 가속적으로 추진했다. 개발, 무역 그리고 전쟁은 그것을 주도한 자에게 부가가치와 불로소득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자연과 인류사회에 대하여 價値差減(value subtracted) 현상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이같은 역설적 개발효과를 사회전체가 깨달을 때는 이미 <자연>이 더이상 자유재(自由財)가 아니다. 잘못 길을 잡은 <개발>이란 이름의 문명화과정이란 그 자체가 자연생태계에 대한 반복적이며 <구조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전쟁은 환경생태계와 인류사회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피해을 가져다주나, 다른 한편 문명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은 환경과 사회를 서서히 죽여간다. 그와 함께 그 문명사회의 구성원들도 서서히 죽어간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탈공업화를 위시해서 정보통신, 개방사회를 지향하는 과도기에 접어들고 있다. 농업이 다시 지난날의 농경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몇몇 그러한 시대 역행적 사고 혹은 근본환원주의에 의한, 작금의 소위 유기농업현상은 이 시대가 빚고있는 희한한 역설일 지도 모른다. 과학기술 문명은 결코 함꺼번에 사라지지 않고, 다가오는 미래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 인류의 삶의 형태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경제 원리만을 추구해 나갈 때, 빚어지는 환경 파괴 양상과 인간성 상실은 우리들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이 비관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는데 비해 자연과학, 기술주의자들은 미래를 더 진보적, 낙관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어쩌면 고도의 첨단과학 기술적 농업형태는 인간생존을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생존을 더 풍요하고 편리하며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환경친화적인 생명산업인 농업은 현재보다 더 많이 인간생활 영역과 의식활동을 지배할 것이며, 그 중요성을 견지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같이하는 농업은 여전히 산업적으로 융성하여, 인류가 현재 혹은 미래에 보유하고있는 모든 가용한 최첨단 과학기술방법으로 인간의 식량을 제공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배고픈 자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도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5. 한국 농업의 최근 역사: 사회경제적 위상과 환경 보존적 가치.

故 鄕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 지 용

한국 근대-현대 농업,농학

 한국의 근대-현대 농학은 식량(쌀)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 근대과학의 조명을 받은 재배 기술의 도입으로부터 출발한다. 서양 농법의 도입과 근대식 농서 출판도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됨에 따라 일본의 개화 농법이 지배적으로 도입되었다. 농학 교육기관과 권업모범장 설치로 시작되어, 한일합방 이후 일본 지배하에서 한국의 농업은 많이 변모하여 가던 중, 그들의 농업정책은 특히 미곡증산계획에 집중되어, 1차(1918-1926)와 2차(1926-1933), 3차(1940-?)로 실시되어 수리시설 개선, 간척, 벼 품종 개량, 재배법 개선 등 경지 확장과 단위면적당 수확량 증대로 힘을 썼으나, 연생산의 1/3(600-1,000만석)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대신 만주에서 값싼 잡곡을 들여왔다. 단보당 수확량은 0.77석(1910)에서 1.5석으로 증가하였다.

 해방 후 한국은 국토 양분이라는 또 다른 괴로운 정세하에 놓였고, 남쪽은 대한민국 수립(1948)을 보게 되었다. 농업증산 3개년계획(1949-1951) 등 의욕적인 농업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다가 6.25로 완전히 좌절당하여 감수(減收)를 면치 못한데다 흉작까지 겹쳤다. 휴전을 전후하여 농업정책은 농업증산에 집중되어 미맥(米麥)증산 5개년 계획(1953-1957)의 실시가 이루어지고 1958년에는 다시 식량증산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소기의 실적을 올려 갔다. 1962년을 기점으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농업정책의 기본 목표는 농업근대화와 농업소득의 향상 및 식량 증산을 통한 자급자족의 확립에 두었다. 중농 또는 농공병진의 정책하에서 농업증상과 영농기계화의 기반 조성, 비료자급(비료공장 증설), 농약 및 농기구,기계의 원활한 공급 등이 이루어졌고, 농촌진흥청 및 산하기관 및 각 농과대학의 연구, 지도 활동도 활발히 움직여 갔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2차(1967-1971), 3차(1972-1976)로 이어져 농정에서도 여전히 주곡 증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특히 세계 식량파동을 계기로 식량 자급을 위한 인식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다. 1970년대의 획기적인 성과는 통일계 벼 품종의 개발육성과 신속한 보급, 지도 그리고 이를 뒤삳침하는 재배 기술과 재배관리에 의한 경이적인 미곡 증산이었다. 이는 전세계에서도 가장 경이적인 녹색혁명을 국가적으로 수행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남한의 근대화과정은 1950년대 초기 한국전쟁에 의한 전면적 파괴이후'기적적인' 경제적 업적은 제3세계의 근대화에 하나의 모델로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남한에서 우리는 아직도 식민통치 기간에 쓰였던 여러 억압적 제도들과 관행들 및 가치들을 볼 수 있다. 국가와 자본이 함께 이런 것들을 유지시키고 강화시켜온 것이다. 외면적인 경제적 성공 뒤에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무거운 의존, 외채 위기, 부실화된 기업들, 부(富)의 중앙집중, 황폐화된 농업 및 생태적 위기와 같은 많은 구조적 문제들이 있다. 소득의 분배가 상대적으로 공평하다고는 하지만, 독립이래 사회집단의 격차가 커진 정도는 놀랄 만한 것이다. 남한의 근대화는 단지 서구적 틀 속에서만 '성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의 농업정책: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정식으로 합병하면서, 일본의 산업자본은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를 확대하였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이 이 과정의 첫단계였다. 식민지정부에 의하면 이 사업의 목적은 토지세제(土地稅制)를 확립하고, 사유토지를 보호하며, 농업의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기에 두 가지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한국을 일본에 대한 쌀의 공급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일본에서 <저미가 저임금>정책을 견지하려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한국의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몰아냄으로써 성장하는 일본인 주도의 제조업을 위해 값싼 노동을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와 더불어 그때까지 이천여년 면면이 내려왔던 전통적인 공동체구조인 마을단위의 '두레'조직이 와해되었다. 시장경제가 농촌지역에까지 침투함에 따라 협동정신이 없어져갔다. 생산은 점점 공동체의 필요로부터 개인적 이윤에로 이끌려갔다. 정치권력이 중앙에 집중되고 경찰력과 관료제가 확산됨에 따라 공동체의 자율은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강요된 근대화는 농업의 파괴를 가져왔다. 1930년대에는 공업제품이 대일 수출의 36.3%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산업부문별 구성비는 또한 같은 추세를 나타낸다. 1920년에만 해도 농업부문은 총생산액의 80%이상이었던 것이, 1940년에는 공업부문이 농업보다 더 큰 몫의 생산을 하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 공장수는 13배, 자본금은 16배, 종업원수는 6배, 총생산액은 24배로 각기 증가하였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의 사이에 자본은 1.3배 늘어남에 그쳤으나 공장수는 4배로 늘었다. 1930년대에 일본은 한국에서 중공업과 군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 초기에는 발전산업(發電産業)을 시작하였으며, 그 끝에 가서는 전기화학공업에 착수했다. 1938년에 제조업체의 수는 2,278개에 이르렀는데, 이는 1923년에 있었던 수 보다 10배 이상 더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공업화는 일본의 자본과 일본의 기술로 일본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운영되는 주변부적(周邊部的) 발전에 지나지 않았다.

 식민지시대의 공업화는 한국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임금노동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들 임금노동자들의 대부분이 매일 12시간 내지 16시간의 육체노동을 견뎌내면서 일본인 평균임금의 반을 받았다. 식민지시대의 공업화는 1920년의 성인 남자 인구의 10분의 1인 50만 명에 이르는 실업이농민(失業離農民)을 또한 냈다. 1938년까지 임금노동자의 수는 150만 명이 되었다. 노동이 농촌지역으로부터 도시로 유입됨에 따라 도시 실업이 심화되고 빈민가가 생겨났다. 식민지시대의 공업화는 또한 한국사회에 분열을 가져왔다. 즉 식민당국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자는 번영한 반면, 그러한 보호를 받지 못한 자는 가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존재했던 미묘한 협동정신을 파괴하면서 권력구조의 중앙집권화를 가져 왔다.

 

신식민주의적 발전:

 식민지시대의 저개발 패턴은 미국의 점령하에서도 계속되었다. 일본의 통치가 끝났을 당시, 전 농민의 70%가 소작농이었으며, 총경지의 반 이상을 소수의 대지주가소유하고 있었다. 자유시장의 기능은 쌀의 교역을 통해 강화되었으며, 그것은 쌀에 대한 매점(買占)을 확대하였다. 이것은 토지대금고 그 이자의 상환 및 세금의 납부를 증대시켰으며, 이로 인해 영세농민들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1946년 변경되어 쌀의 수매(收買)가격이 고정되었으나, 그것은 1948년의 경우 생산원가의 6분의 1 내지 7분의 1 밖에 되지 않아, 더 많은 수의 농민들이 농지를 떠나게 되었다. 한때 쌀의 수출국이었던 남한이 미국이 점령한 지 3년 뒤부터는 쌀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경제의 붕괴는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에 대한 근본적 이유가 되었으며,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더욱 확장했다. 3년의 점령기간 중, 미국의 경제원조는 주로 식료, 의류, 의약품 및 육류와 같은 일상의 필수품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도에 수입(輸入)총액의 90%에 달한 미국원조는 대미의존도가 높은 새로운 욕구구조를 창출하였다. 원료의 형태를 취한 원조는 미국에 대한 남한의 의존도를 심화시켰으며, 1962년에만 해도 남한는 원료의 거의 60% 이상을 수입해야만 했고, 직물 원료의 경우 거의 80%나 되었다. 잉여농산물 형태의 원조는 이러한 물자들의 국내가격을 떨어뜨렸으며, 농업의 침체와 특히 영세규모 농업의 와해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목화밭은 1945년의 26만정보로부터 1968년에는 16,443정보로 줄었다. 농업생산과 제조업 사이에 국내적 균형이 유지될 수가 없었으며, 도시지역과 농촌지역 사이의 불균형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수출주도형 공업화:

박 대통령 치하의 한국경제는, 강력히 중앙집권화된 국가에 의한 개발계획과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결합한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총생산에 대한 수출의 비율은, 1950년대에는 5%도 채 안되었던 것이 1980년대에는 약 35%로 올라갔다. 1960년대에는 주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의 수출이 강조되었고, 1970년대에는 주로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강조되었다. 이 20년동안 한국은 높은 경제성장률, 가속된 자본축적 및 빠른 공업화를 이룩하였다. 한일간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약이 1965년에 조인되었으며,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배상과 차관으로 8억달러를 제공하였다. 뒤이어 박정권은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를 확보하였다. 이 돈은 잘 돌아가지 않는 남한의 수출산업을 강화하는 데 불가결한 자본을 제공하였다. 제조업은 확장되었고 수출은 늘어났으며 국민총생산은 증가하였는데, 이 속도는 모두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국가 개입은 지속적인 급속한 공업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더 미묘하고 파괴적인 많은 다른 결과들이 있었다. 작업수행 기준과 수출목표는 노동착취를 심화시키고 작업장에서의 가부장적(家父長的) 위계질서를 강화하였다. 그것들은 또한 더 많은 보호와 보조를 받기 위한 대기업간의 과다한 경쟁을 촉진시켰고, 결과적으로 중화학공업의 무모한 확장을 초래하였으며, 이것은 제2차 석유파동이 왔을 때 경제의 파탄을 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환경의 파괴에도 큰 몫을 하였다.

공업화를 위한 국가 개입의 전개는 국민국가 자체의 형성에도 기여했음을 또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할 때, 남한의 국가는 지금 그것이 가지는 바와 같은 힘을 모두 갖지는 못했다. 오히려 국가가 추진한 공업화의 과정이 국가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위한 물질적, 이념적 및 법적인 기초를 확장하는 것을 도왔던 것이다.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에 의한 충성과 효도가 국가의 공업화를 위해 조작되고 조정되었다. 박대통령의 사상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시골 마을의 <게으름>과 <후진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공업화된 국가는 생겨날 수가 없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의 시각으로는 시골의 공동체도 시장경제 즉 소비경제시장의 사이클에 흡수되어야만 하면 전통적인 <농업>은 자본투자에 기초를 둔 근대적 <농기업>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었다.

새마을 정신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였다. 즉 그것은 마을 공동체적 정신을 파괴하고 도시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채택하는 데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 기간동안 농부들은 단지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 - 그들의 의지와 신체 - 에 대한 통제까지도 잃고 말았다. 노동은 소외되고, <경제적> 가치가 공동체적 가치를 대체했다. 실업과 농부의 전출은 시골에서 확대되었고, 생태적 위기의 바탕이 농촌지역에 펼쳐졌다.

 

남한 근대화의 구조적 문제와 생태위기 :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수출주도 공업화는 근년에 와서 더 명백하게 드러난 몇 가지 구조적인 문제점을 경제에 가져왔다. 첫째로는, 중화학공업의 급격한 건설이 남한의 공업에 균형 잡힌 전체적 발전을 가져오게 하지 못한 점이다. 중화학공업 제품을 재료로 하는 다른 국내산업을 지원해주는 효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소비 지향적인 중화학공업 그 자체가 수입된 원재료에 의존을 계속했으며 따라서 중화학 공업을 지원하는 산업의 발달을 자극하지 못했다. 더 명백한 문제는 외국의 자본과 시장에 대한 남한의 의존성이다. 불안정한 외국시장에 대한 심화된 의존성은, 특히 미국과 일본에 대한 남한의 경제를 극히 취약하게 만들었다. 1984년에 남한의 수출액의 50.2%가 일본 또는 미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며, 수입의 47.3%가 이들 두 나라로부터 들어왔다. 외국자본은 수출주도형 공업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예컨대, 남한에서 외국인 자본에 대한 의존률은 1974년 75%에서 1980년에는 83.5%로 늘어났다. 외국인의 직접 투자가 집중되었던 중화학공업의 경우 의존률은 더 높았다.

 남한의 근대화는 생태적 위기에 직결되어 있다. 공업화의 직접적 결과인 남한의 산업공해는 지금 일상생활 속의 어디에든지 퍼져있는 정도에 와 있다.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동안, 정부는 조세의 감면과 그 밖의 유인책을 써가면서 외국으로부터 공해가 심한 산업들을 활발히 유치하였다. 재야(在野) 단체들이 공해를 감시하기 위한 조직을 결성한 1980년대 중간까지만 해도 단 하나의 환경문제를 다루는 기관도 존재하지를 않았다. 그 뒤에서야 정부는 환경청을 설립했는데, 그 주된 역할은 환경공해를 덮어 감추고, 자료를 조작하며, 정부의 정잭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생태적 위기>란 물질적인 환경의 파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하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조직과 가치의 파괴를 또한 말하는 것이다. 생태적으로 건전한 사회제도들의 파괴가 자연환경의 파괴 뒤에 내재해 있음을 인식하여야만 한다. <국민경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지역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생산자들을 생산과정으로부터 떼어놓았다. 마을공동체가 그 자체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로, 마을공동체에는 결속력이 없어졌으며, 공동체의 자율과 지속(持續)에 관한 감각 또한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자본주의와 상품화는 생산에 있어서의 호혜적 인간관계를 고립된 개인 사이의 금전적 관계로 전환시켰다. 개인의 생계는 공동생활체적 기반의 상실로 인해 위협을 받았고, 농민들은 생태적으로 해로운 생존방법을 채택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자연, 예컨대 토지는 <자연자원>으로서 대상화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자연에 대한 균형과 책임의 감각은 물질의 생산과 소비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생태적 균형은, 녹색혁명, <집약적인> 단일 작물 및 집중적인 기계화와 농약에 의존한 화학적농업체계 등의 사업 계획을 통해, <농촌의 빈곤 문제(그 자체를 국가가 만들어낸)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에 의해 더욱 파괴되었다. 이러한 개입조치는 농촌에서 더 큰 의존과 빈곤을 일으키면서, 주기적인 병충해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러한 빈곤은 농촌인구를 도시지역으로 대량 이주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또한 심각한 도시의 환경문제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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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섞어짓기나 사이짓기를 하면 해충 발생을 줄여주는 식물

 

 

        * 감자 ;      강낭콩, 양배추, 옥수수, 금잔화

        * 강낭콩 ;   당근, 샐러리, 오이, 꽃양배추, 감자, 옥수수, 딸기

        * 당근 ;      파, 상추, 양파, 완두콩, 로즈메리, 부추, 토마토

        * 딸기 ;      강낭콩, 상추, 시금치, 백리향

        * 무 ;         오이, 상추, 한련화, 완두콩

        * 상추 ;      당근, 무, 딸기, 양파

        * 시금치 ;   딸기

        * 양배추 ;   샐러리, 토마토, 양파

        * 양파 ;      상추, 딸기, 토마토

        * 오이 ;      강낭콩, 완두콩, 무, 해바라기

        * 완두콩 ;   당근, 강낭콩, 오이, 순무

        * 토마토 ;   당근, 파

 

2. 해충을 물리치는 혼작, 간작 작물

 

식물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식물체나 뿌리로부터 분비물을 내어, 나쁨 균이 붙지 못 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강력한 작물의 힘을 빌려 채소의 몸을 지키게하는 것이 혼작, 또는 간작 작물이다.

 

1) 배추흰나비 유충

 

* 고추 ;  배추과의 양배추나 배추를 아주 좋아하는 배추흰나비 유충에는 고추를 혼작하면 좋다. 고추를 혼작하면 배추흰나비 유충의 어미인 배추흰나비가 붙지 못 한다. 또 응애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진딧물을 업어서 옮기는 개미에게는 고추씨를 개미구멍에 넣어주면 호과가 있다. 고추는 자연 농약이 되므로, 혼작하면 좋다. 단, 간작으로 심을 때는 키가 너무 크지 못 하게 순을 잘라 주어야 한다.

 

2) 청고병, 입고병, 만할병, 위황병

 

* 파 ;  토마토와 가지에 많은 청고병, 입고병, 수박이나 오이류에 많은 만할병, 딸기에 많은 위황병 등에는 파, 부추, 양파, 마늘 등 파 종류를 간작하거나 혼작하면 병이 예방된다. 포기 가깝게 심어 놓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아울러 파류의 간작은 다른 채소 잎에 붙어 가해하는 응애의 발생도 억제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3) 해충

 

* 마늘 ; 마늘을 주 작물로 하여 다른 작물을 심으면 작은 풍뎅이나 여러 가지 해충이 마늘 냄새가 싫어서 붙지 않는다.  

 

4) 선충

 

* 결명자 ;  토양 선충은 토마토, 오이, 당근, 우엉, 배추를 좋아해서 뿌리에 혹을 만들어 영양을 가로채곤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결명자와 매리골드, 달리아, 화본과 식물(벼, 보리, 옥수수)등을 상추, 쑥갓, 부추, 무 등의 채소와 함께 심으면 선충을 예방할 수 있다. 이 때 콩류와 가까이는 심지 않는다. 콩류와 사이가 좋은 근류 박테리아도 결명자를 싫어한다.

 

5) 단옥수수와 콩과(科) 작물

 

단옥수수 뿌리에서는 페니실리움 곰팡이라는 유익한 미생물이 잘 자라고, 뒷그루로 배추 재배가 잘 된다. 또 콩, 팥, 자운영 등의 콩과(科)는 긴날개노린재가 달라붙지 못 한다. 또, 콩과(科)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아주 좋아해서 공기 중의 질소를 흙 속에 끌어들여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녹비에도 좋다.

 

6) 방울 토마토

 

 여름의 인기 식품인 방울 토마토는 무농약으로 재배할 수 있는 건강한 우량 작물이다. 이것도 혼식하면 고자리파리나 풍뎅이, 그리고 아스파라거스에 잘 붙는 잎벌레도 예방된다.

 

7) 참깨

 

* 토란과 호박 ;  호박은 작물에 이로운 익충을 불러 모은다. 긴다리벌, 노랑말벌 등 벌이 호박꽃의 꿀을 얻으면서 해충인 각시나방 유충을 포식해준다. 여러 가지 해충을 포식해주는 개구리의 은신처를 호박이 제공한다.

 

8) 허브 ;

 

* 청벌레, 진딧물;  유기농업에서는 경험적인 많은 사례가 발굴되고 있다. 매리골드, 로즈매리, 라벤더, 바질, 애플민트 등은 청벌레와 진딧물의 발생을 크게 억제한다.

 

9) 마늘과 상추 ;  마늘과 상추를 같이 심으면 잡초 발생이 억제되고 병해충 발생도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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