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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기, 최옥금, 김재성, 양재동, 권수정, 최성숙 6인이
동서울 터미널을 출발하여 수안보에서 시골농부님과 만나 지프로 석장골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도 보고 길 찾기했다간 분명 저 깊은 산골에서 길을 잃고 엉엉 울었을 겁니다.
인적도 없고 가는 길이 꼬불꼬불 산 속입니다. 게다가 갈래길도 있습니다.

도착해 보니, 이것이 집인가, 싶더군요.
그래도 석기 군은 제 사는 집이라고 방문 열고 향 피우고 주인 왔노라 신고식을 치릅니다.
금세 어두워진 골짜기에서 초를 켜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낯설은 살림을 뒤져 고기 구울 준비를 합니다.
이럴 때의 삼겹살은 먹을 것으로서보다 여러 사람이 무언가 주섬주섬 일을
하게 만든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 일행에게 새로운 얼굴은 시골농부님 한 분뿐인데
수안보 터미널에서 수인사하실 때부터 친근한 인상이시더니
풍성한 농사 이력으로 이야기를 세 보따리쯤 풀어 놓으셨습니다.
물론 양해동 님께서 구수하게 추임새를 곁들이셨음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시겠지요.

별 보며 술 먹다 방이 뜨끈하니 들어가서 마시기로 했지요.
안주도 삼겹살에서 오징어로 술도 막걸리에서 매실주로 바뀌었습니다.
(매실 효소에 소주를 탄 칵테일, 맛 좋습니다!)
어두컴컴한, 초배지 바른 방이 참 아늑합니다.
방 아랫목은 절절 끓고 술꾼들의 목청도 높아집니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침, 방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어제 낯설어 제대로 보지 못한 석장골 호텔 화장실도 가보고,
산골이라 늦게 솟는 해님에게 평소에 잊었던 고마움도 새삼 느끼며
시골농부 님 차에 짐을 맡기고 수안보로 걸어나옵니다.
시골농부 님은 다음 행선지로 차를 모시고, 나머지 일행은 온천으로 향합니다.
모처럼 온 온천이니 온탕 냉탕 맥반석탕 골고루 들어가보고 노곤해진 몸으로 차에 오릅니다.
문용성 님, 연락 끝에 접속 실패, 일행은 중국집에서 다시 배불리 먹고 헤어졌습니다.
(모두 신발끈 매느라 정신없는(?) 틈에 양해동 님께서 계산하셨습니다. 감사!!)

***
출발 전에 동서울터미널로 나와 주신 석민, 정희 님 넘 감사하구요.
(고구마 꿀칡차 넘 맛있게 먹었어요! )
시골농부 님께서 궤짝으로 가져오신 배는 한 이삼일은 먹을 것 같네요.
덕분에 석장골 잘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흠, 시월의 마지막 밤은 정작 이제부터네요. 이용의 쓸쓸한 밤은 묻어 두고
석장골의 휘영청한 달밤을 떠올리렵니다.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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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앓은 날

 

 

서른이 넘기 전엔 몰랐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앞만 보고 달리면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질주하고 때로는 폭주하며

팽팽히 당긴 시위에 매긴 살처럼

돌아볼 것도 쉴 곳도 없이 내쏘았다.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심한 몸앓이 끝에 일어난 날.

불현듯 죽음이 고만큼 더 가까워졌음을 보았다.

늘어나는 흰머리에도 별 느낌 없더니

몸살 한 번에 인생을 반이나 살았다고 깨달았다.

어느새 나에겐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과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사라졌다.

대신 어느덧 손을 맞잡고 함께 걷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맞춰 발걸음은 느려졌고, 어깨는 좀 무거워졌다.


우린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

언제 죽음이 다가오는지, 아니면 지금도 함께 하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순간과 찰나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할 뿐,

그러나 아무도 최선을 다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대의 숨결을 느끼며 서로 발걸음 맞춰 그곳으로 걸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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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땅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을 말한다. 물이 솟듯이 힘이 솟는 것도 ‘샘솟다’라고 표현한다.

샘이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땅이다. 그래서 샘과 관련된 땅이름도 매우 많다.

다만 ‘샘’은 솟아오르는 물이 적으며, 모여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에 행정 지역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큰 고을 이름은 ‘샘’에 해당하는 한자어 ‘천泉'이나 ‘정井'이 붙는다.

예를 들어 ‘뒷샘골’을 북천동北泉洞으로 맞옮겼으니 ‘북’은 방향으로 볼 때 뒤쪽에 해당하며, ‘천’은 ‘샘’을 뜻한다.

‘샘’은 지역 따라 발음 차이가 심하다. ‘시암’이라고 일컫는 지방이 많은데, 전북에서는 ‘통시암[桶井]', ‘시암내[元泉里]', ‘참시암골[寒泉]'은 익산이나 정읍 지역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땅이름이다. ‘참시암골’에서 ‘참’은 ‘차다’의 ‘찬’이 바뀐 것이다.

또한 ‘시암’은 ‘시양’으로 바뀔 수도 있다. ‘시양골’도 전북 지역에서 비교적 자주 찾을 수 있는 땅이름이다.

‘샘’에 ‘골’(고을)이 붙으면 ‘샘골’을 이루며, 이때의 ‘샘’은 ‘골’에 있는 여린입천장소리 기역을 닮아 ‘이응’으로 바뀌면서 발음이 ‘생골’로 된다.

 이렇게 바뀐 ‘생골’은 ‘생사 관념’을 만들어내며, 관련된 전설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죽음에 다다른 사람이 살고 싶어 한 마을’, 또는 ‘괴로운 삶을 벗어나고자 한 사람이 꿈속에서 다녀왔던 마을’이라는 이야기는 이름에서 우물이 사라진 생골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이야기 형태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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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배.

전날 집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차도 오래 타야 하고, 거기에 배까지 타야 하니 ... 귀 밑에 붙이는 멀미약이라도 사서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타 보니 별 거 아니었다.  

한 40분쯤 걸리는데다가 파도도 심하지 않아 정말 편안하게 건너갔다.

이거 섬 같지도 않잖아. 다음에는 제주도나 울릉도 아니면 일본까지 도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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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서 완도항을 보았다.

항구를 보면 늘 이런 곳에 생길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완도항도 꼭 그런 느낌이다.

사진을 찍는데 안철환 선생님이 오셔서 그대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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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외양간거름. 그대로 퍼담아서 가져왔으면 좋겠다. 

석종욱 선생님께서 깔짚으로는 산의 유기물 다음으로 좋다고 하신 갈대를 쓴다.

거름 문제 때문인지 소를 키우는 곳이 참 많다.

경운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까지 도맡아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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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뒷간.

차마 문까지 열어보지는 않았다.

이동범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부춧돌 뒷간일까?

문의 반대편에는 재와 버무린 똥이 쌓여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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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완식 박사님께서 토종을 얻어오신 청산도의 아주머니. 성함까지 알려주셨는데 까먹었다.

이 집에서 까만 강낭콩, 까만 동부, 녹두, 벼, 홍화 등을 얻고, 내 주머니에도 조금씩 챙겼다. 

이걸로 늘리고 늘려서 먹어보고 괜찮으면 또 심어야지.

여기서 얻어 마신 송화주와 홍화주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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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부엌. 상서마을은 90가구가 살다가 이제는 30가구로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군데군데 빈집이 많이 보였다. 이 집도 빈집이다.

그런데 이 마을의 부엌은 그리 깊지 않다. 겨울에도 따뜻한 남쪽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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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을 성심성의껏 이끌며 설명해주신 청산도 상서마을 청년회장님. 지금은 마늘을 설명하시는 모습.

전날 밤의 피로가 쌓여 모두들 피곤하신 듯 ... 일정이 빡빡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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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논두렁. 거의 직각으로 돌을 쌓았다.

참말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이 섬의 사람들 옛날에는 성벽을 쌓는 데 부역을 나가야 하지는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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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의 주아柱芽. 기둥에서 나오는 싹이란다.

꼭 엄마 옆구리 뚫고 나왔다는 싯달타 같다.

마늘쫑으로 올라오는 놈은 보았어도, 이런 놈은 또 처음이다.

이놈을 갖다 심으면 하나의 통마늘이 되고, 그걸 또 심으면 쪽쪽이 갈라진단다.

참 많은 걸 배운 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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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핵심은 바로 배수로다.

사진은 동굴이나 무덤이 아닌 배수로를 쌓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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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논의 배수로 모습. 위에 보이는 사진의 입구로 조금 기어들어가서 찍었다.

꼭 아궁이에서 바라본 모습과 비슷하다. 그래서 구들장논인가 보구나.

얕은 겉흙 밑으로는 모두 돌. 물이라도 많이 빠르게 들이치면 그나마 있는 흙도 쓸려 내려갈 판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런 구들장논이란다.

먹고 사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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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농의 한영미 선생님. 혼자 보리밭을 즐기시는 모습을 찰칵.

앞으로도 우리 씨앗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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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하시는 청산도 어머니들.

찍지 말라고 하실 줄 알고, 그 소리 하시기 전에 얼른 찍었다.

덕분에 괜찮은 사진이 나왔다. 주소를 알면 보내드리면 좋겠구만.

사람들 나온 사진 뽑아서 "상서마을 청년회장 앞"으로 보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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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옆에서 본 애벌레. 너희는 자라서 무엇이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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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연예인이 작년 한 대선후보의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라는 말을 유행시켰습니다. 그런데 행복과 살림살이는 어떤 관계일까요.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진정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과거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행복해질거라 믿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는 나아졌습니다. 기술의 혜택으로 물질적인 풍요는 엄청난 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은 또 그 자식인 우리들은 과연 행복합니까?


  지금도 우리는 '못 살겠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열심히 살아도 모자를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되었지만 행복하기는커녕 비극적인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로가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문제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죽고 죽이는 역사였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나의 경쟁상대였고 내가 극복하고 이겨야만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이렇게 나와 남을 가로고 구분 짓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지금 우리는 나와 남을 가르고 구분 짓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이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무수히 많은 타인과 함께 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장해보면 세상 만물이 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금 이곳에 내가 있을 수 있을까요? 물이 없다면 공기가 없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물과 공기를 만들어내는 나무와 풀 같은 자연이 없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세상 만물이 있기에 거기에 의지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돈, 명예, 출세, 사랑보다도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무엇일까요? 목숨,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 명예, 출세, 사랑도 다 나의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숨 쉬는 행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먹는 것에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 안 어딘가에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의미의 생명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명이란 가치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 만물에 의지해서만 있을 수 있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의지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만 빠지더라도 나의 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코와 입을 막고 10분만 있으면 나의 생명은 죽습니다. 만약 생명이라는 가치가 내 몸 안 어느 곳에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숨을 쉬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요?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다른 모든 것들에 의지하였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나와 남을 가르고 나와 자연을 가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았기에 우리는 이기적인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과는 180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지금의 세상은 전쟁, 환경파괴, 오염, 자원고갈, 식량부족 등의 문제로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이 곧 내 생명이라는 세계관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활은 곧 다른 것들을 죽이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위한다면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뿌리부터 바꾸는 전환이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지금 우리는 동반자살로 가는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한 길은 귀농 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보낸 저에게 농사일은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농사를 얼마나 잘 짓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듯이 또 다른 내 생명인 이웃과 자연을 아끼고 보살핀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면 안 됩니다. 서울은 지금 파괴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사람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농부가 먹거리를 제공해주고 시골의 자연이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마실 물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서울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 마당에 서울이라는 도시는 점차 다른 지역을 파괴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 이외의 지역은 사람조차 살지 않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서울을 떠나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 살더라도 나의 생명이 다른 것에 의지해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자각한다면 다른 지역의 사람과 또한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들어가 내가 사는 마을을, 지역을 살리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또한, 내 생명처럼 다른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자 농사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은 파괴의 도시고 악이기 때문에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모두 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내 생명이기에 모두가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이외의 모두가 나와는 아무 상관없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 하겠습니다. 또 한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꿈이나 이상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국 곳곳에는 이런 생각으로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씨앗들이 뿌려져 있습니다. 저는 직접 그 희망을 보고 왔습니다. 그 길에 희망은 꼭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빠른 때'인 것처럼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찾기 위한 길은 제가 사는 모습과 다른 많은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서로 서로가 의지해 있기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전환 없이 더불어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나누며 사는 고마움, 그 길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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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덕(1858-1932)     신천 농민학교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천

 

왕재덕(王在德)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청상과부가 된 후 혼자서 3남매를 키우면서 굉장한 치재(治財)를 하여, 황해도 신천에 농민학교를 설립한 일제하 민족교육의 실천가이다. 또한 그의 아들과 사위는 항일민족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고, 왕재덕 자신도 적지 않은 군자금을 마련해주었던 한민족의 의로운 어머니였다.

왕재덕


1910년 12월 일제는 전국의 민족운동자를 체포하고자 소위 안악(安岳)사건을 꾸몄다. 이때 그의 아들 이승조도 안명근(安明根: 安重根 義士 四寸), 김구(金九) 등과 더불어 옥고를 치르고 울분으로 병사하였다. 또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은 그의 사위가 된다. 이처럼 항일민족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진 그는 1858년 6월 18일(陰)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부농인 왕시권(王時權)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나 언니가 죽어 실제로는 무남독녀였다. 18세에 같은 신천의 이영식(李永植)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남매와 유복자를 가진 채 과부가 되었다. 그는 그의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3남매의 교육과 치산(治産)에 남다른 힘을 썼다.

♠ 치산에 힘써 대지주로 성장
그가 과부가 되었을 때 그는 3백석을 추수하는 토지(약 3만원의 가치)를 유산으로 받았으므로, 한평생을 능히 편안하게 살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몸소 팔을 거두고 농사일을 비롯하여 돈이 되는 일에 머리를 쓰고 노력을 하여, 만년에는 만석지기 대지주가 되었다. 그가 여자의 몸으로 이처럼 큰 재산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우수한 농업경영 능력을 들 수 있다. 둘째는 몸을 돌보지 않는 자신의 노력이다. 셋째는 반드시 해내겠다는 투철한 투지와 근검절약의 생활이라 하겠다.

그가 7일경(耕)의 면화농사를 몸소 지을 때 일년이면 약 9천근(50포)의 면화송이를 따야 했다.
서양에서도 면화는 흔히 흑인 노예로 하여금 따게 하는 중노동이다. 그런데 부자집 마님이나 다름없는 그가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면화송이를 땄다. 어떤 때는 몸이 너무 피곤하여 흰 돌조각이나 사금파리를 땅에 떨어진 면화인 줄 알고 주운 일이 있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였다. 면화 농사는 노력한 만큼의 높은 이익이 나지 않음을 알고 그는 다시 좁쌀 농사에 착수하였다. 좁쌀은 평안도 일대에서 많이 소비되는 곡식이며, 면화에 비하여 농사손이 덜 가면서도 이익이 좋아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신천 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을 때도 추수한 벼를 그대로 파는 일이 없었다. 벼를 배에 실어 진남포의 정미소로 운반해 도정한 후 백미를 다시 평양(平壤) 등의 도회지에 내다 판다. 이처럼 산지(産地)에서의 산출로부터 대도회지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의 이윤을 수입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늘어나는 이윤으로는 값싼 황무지를 사서 개간하여 옥토(沃土)를 만들곤 하여 마침내 대지주로 성장한 것이다. 그가 토지를 매입할 때는 절대로 옥토를 사지 않고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초지(草地)와 같은 값싼 땅을 사서 그것을 개간하면 값비싼 땅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농지경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원래 황무지 개간은 너무도 힘드는 일이므로 옛날에도 권세가가 아니면 엄두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과부의 몸으로 해냈다는 것은 그가 가히 장부로서의 기개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토지를 생명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토지에 관한 일이면 그 상대가 누가 되건 결코 양보하는 일이 없다. 그는 무학이었지만 머리가 명석하여 자신의 토지 평수와 추수기와 현금출납에 환하여 장부책보다도 더 정확하였다. 또한 사리가 분명하고 교제에도 능하였으며, 후리후리한 키에 다소 억세게 생겼으되 깔끔하게 다듬어 쪽찐 머리 등 외모는 가히 남을 위압할 만한 풍모까지를 지녀 그는 한눈에 보아도 투지가 강한 여성으로 보였다.

한번은 토지 소유문제로 인하여 서울의 유력자와 소송이 붙었다. 상대방은 변호사까지 대고 소송을 하였으나 왕재덕은

‘법이 따로 있나, 경우가 법이지!’
하고 조리있게 항변하여 승소하였던 일이 있다. 또 군청에 제출한 토지증서가 몇 번씩 퇴각을 당하자 감농(監農)할 때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타고 관청에 들어가 담당직원 앞에 서류를 내놓고

‘여기 틀린 데만 골라서 기입해주시오.’
하고는 준비해간 담배를 군 서기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아무 말없이 끈질기게 앉아 기다려 서류를 완비해온 일이 있었다.
신천 온천 일대에는 왕재덕의 땅이 적지 아니 있었다. 그런데 구한 말 이래의 매국노의 한 사람인 세도 당당한 송병준이 신천 온천에 있는 초생지를 논으로 개간하는 데 왕재덕의 전답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여러 해 소송 끝에 승소하여 오히려 그 땅을 매입하고 말았다. 토지에 대한 그의 투지력은 세도 당당한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까지도 굴복시켰다. 조선철도회사에서 사리원 신천간에 철도를 놓고 철도 호텔을 신축하고 육군전지요양소를 설치할 때였다. 어느 일본인이 여관을 지으려고 대지를 샀는데 그 대지 한가운데에 왕재덕의 땅 99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본인은 그녀를 우습게 보았던지 그 땅을 정식으로 매입하지도 않고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강한 항의로 공사는 중단되고 싯가 50전의 땅값을 올려 10원까지 갔으나 결코 팔지 아니하여 일본인은 크게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철도회사에서 신천온천 역사를 지을 때도 역을 지을 땅을 팔라는 교섭을 받았으나 끝까지 버티다가 관청의 설득으로 싯가의 6배가 되는 값을 받고야 팔았던 것이다.

♠ 생활개선운동 펴고,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 제공
만석군으로서의 그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평상의 삶을 살펴보면 검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의복은 항상 목면으로 깨끗하게 입었고 평생 군것질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무엇이나 비합리적인 것은 개선, 개혁하여야 한다는 진보적 의식을 가졌으며 이를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실천가이기도 하였다. 생활개선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27년 그녀는 부인생활개선을 주장하였다.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는 큰머리를 올리느라 월자(月子)를 값비싸게 구입하여 썼다. 왕재덕은 이것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낭비라고 주장한 끝에 서울에서 비녀 80개를 사다가 부인 80명을 자기 집에 불러 모두 나누어 주었다.

농촌 부녀자들의 목화 고르기 작업 장면


또한 자신의 소작인들에게 금주ㆍ금연을 권고하여 새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또 흉년이 들 때면 소작료를 감해주고 극빈자에게는 곡식을 풀어 끼니를 잇게 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배려를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군자금을 건네주고 국내외의 비밀연락도 하였던 장부였다.

♠ 농업학교 설립, 전재산 헌납
왕재덕이 한평생을 토지로써 치부(致富)한 것은 일신의 영화나 자손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농업으로 성공한 그녀는 농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농촌을 구제하려면 농민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농촌계몽운동이 크게 일고 있었으며, 또 덴마아크가 고등농민학교를 세워 세계의 모범적인 농업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재덕은 농민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29년 그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신천 북부면 서호리에 있는 10만 평의 토지와 현금 1만 원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25평의 교실 2개와 직원실을 짓고 방 24개의 기숙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수원농민고등학교 출신을 교사로 초빙하여 40명의 학생을 입학시켜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 12일에 신천농민학교 인가를 정식으로 받았다. 이에 학생 수도 증가되었다. 다시 학교를 증축하도록 6만 원의 거액을 희사하였다. 그러자 교사의 수도 늘고 농사실험장도 만들었다. 이제 농민학교의 틀이 잡혀가 농민학교를 농업학교로 개칭하게 되었고 20만원의 재단법인도 설립하여 성공적인 농업학교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그는 자녀가 있는 분이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 남기지 아니하고 2천만 민족에게 남기었다는 것은 실로 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2년 5월 8일 그녀는 74세를 일기로 위대한 한 생을 이민족의 핍박으로 신음하는 한민족의 큰 별이 되어 이승을 떠났다.

글:박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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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울음소리, 음메~.

소를 아는가?

인류의 동반자.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서 도움을 요청해 함께 살았던 짐승.

그만큼 인간과 가까워 여러 문명에서 함께 했던 짐승.

그 짐승이 이제는 돈이다.

고깃덩어리로 팔리는 신세.

고깃덩어리를 키우고자 사료를 먹이고,

사람이 보기에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그 결과 남는 것은 고깃덩이로 바꾸는 돈.

 

솔직히 소는 이제 고깃덩어리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누가 소의 숨소리, 몸짓, 눈망울을 기억하는가?

이제 고깃집에 가서 돈을 주고 시킨 소고기나 먹거나,

아니면 마트에 가서 소고기를 구경하고 사거나,

어떤 사료를 먹여야 마블링이 지느냐.

아무튼 이러한 생각으로 소를 바라볼 것이다.

 

선언하자. 이제 소는 먹을거리다!

그것도 값비싼 고급 먹을거리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음 소가 나오는 기록은 이렇다.

삼국사기 지증 마립간 3년(502)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소로 밭을 갈게 한 기록이 보인다.

 

아무튼 소로 밭을 갈면서 엄청나게 생산력이 높아졌다.

농사를 짓겠다고 몸을 놀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가 소의 힘을 당할 수 있는가?

경운기나 트렉터 같은 기계뿐, 절대로 사람은 소의 힘을 당할 수 없다.

당한다면 사람 몇 명이 모여야 가능하다.

그거 참 우습고, 비참하고, 경이롭다.

 

하지만 이제 소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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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관寶城館에 가다


1939년 10월 18일. 하늘은 가을답게 높고 푸르다. 다카하시 노보루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8시 반쯤 보성관을 나서 농가 조사에 나섰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42호 맨 끝머리에 보성관이란 조선인 여관의 상차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난해 7월 중순 수소문 끝에 직접 보성관에 다녀올 기회를 얻어 실제로 눈앞에 보성관을 맞닥뜨리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눈은 물론 땀구멍 하나하나에 건물의 숨결이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림 1) 아직도 벌교읍에 가면 볼 수 있는 보성관. ?��태백산맥?��의 유명세에 덩달아 남도여관이 되었다. 이 건물이 있는 거리, 옛 본정통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이 거리를 중심으로 나왔다.

현재 보성관은 소설 ?��태백산맥?��의 후광을 입어,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 가운데, 빨치산 토벌대가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이 기억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바로 그 주요 무대가 보성관이다. 우리네와 함께 숨을 쉬며 사람들의 피땀이 고스란히 밴 그 건물은,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놓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제도를 만들어 참 다행이다. 그동안 개발이란 이름으로 쓰러져 간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제 보성관은 여관으로는 쓰지 않는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간판을 내렸기 때문이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참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다. 학교 정화 구역이란 법도 그런 영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 험한 파도를 헤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모든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올해도 큰 파도가 밀려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1월 중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농촌진흥청을 폐지하고 민간으로 위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물론 민영화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민간에 넘길 것은 넘기고, 정부에서는 그 관리와 감독 등에 더 힘쓰는 것이 좋은 분야도 있다. 하지만 나라의 뿌리가 되는 것들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요즘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농업을 포기하겠다는 상징이어서 몹시 씁쓸하다. 농업과 관련된 단체나 개인 말고 농촌진흥청 폐지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제 우리 시대는 농업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이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무튼 현재 건물의 1층은 가게들과 살림집으로 쓰고, 사진에서 보이는 2층은 텅 비어 있다. 1층에는 방이 모두 10개이고, 지금은 비어 있는 2층에는 큰 다다미방이 4개가 있다. 이 정도 규모였으니,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이 여관에서 묵으며 벌교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건물은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다 2층을 올렸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이 분께서 1979년에 이 건물을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살아남았다.


그림 2) 건물 마당은 일본식 정원이다. 저 방 어디에선가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묵었을 것이다.


벌교읍 회정리廻亭里의 박응렬朴應烈 씨


그는 회정리에 사는 박응렬이란 분을 찾아간다. 그곳에 가려면 지금은 부용교라고 부르는 ‘소화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소화 6년)에 놓았다고 그렇게 불렀다. 원래 다리에는 난간이 없어서, 한창 빨치산을 토벌할 때 다리에 무릎 꿇린 다음 그대로 처형하면 바로 강바닥에 떨어져 강물이 시뻘겋게 되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만요.” 물론 이 일은 다카하시 노보루 씨와는 크게 상관없는 훨씬 이후의 일이다.


박응렬 씨의 식구는 모두 8명이었다. 본인(40), 아내(35), 어머니(60), 학교 다니는 맏아들(15), 둘째아들(10), 셋째아들(7)과 4살·3살짜리. 소도 1마리 있고 닭은 10마리라고 하니, 웬만큼 살았을 것이다. 논은 1마지기에 250평인데 모두 15마지기를 짓고, 밭은 800평 있다. 거기에 대숲 900평을 관리한다.

이렇게 조사하던 1939년에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가뭄이 있었다. 그 까닭은 지나치게 발달한 북태평양고기압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 내내 뙤약볕만 내리쬘 뿐 비 한 톨 내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1년 평균 강수량이 보통 1250㎜ 정도 되는데, 그때는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적은 양인 754㎜의 비만 왔다. 이 때문에 박응렬 씨도 올해는 모내기를 아예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조사 내용은 자연히 지난해의 것으로 채웠다. 그 내용 가운데 뒷갈이로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자. 이곳은 남도답게 한 논에서 두그루부치기를 할 수 있다. 보리를 심는 곳은 정확히 나오지 않는데, 기록의 행간으로 유추하면 아마도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8배미 200평짜리 땅의 일부에 심는 것 같다.



뒷갈이 보리 기르기


먼저 벼를 거둔 다음 20일 뒤에 자신이 쟁기질을 한다. 싹갈이를 하는데, 저녁까지 끝낸다. 싹갈이는 두둑을 짓거나 하지 않고 밭 전체를 그냥 다 갈아엎는 방법이다. 지난해에는 벼를 9월 말에 거뒀으니, 아마 10월 중순쯤 싹갈이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5일 뒤에 써레질을 한다. 논 써레와는 달리 그림처럼 소나무로 짠 것이다. 이걸 소에 달고 다니며 땅을 고르게 만든다. 써레질은 오전 한나절에 끝내고, 오후에는 땅을 말려 그 다음날(11월 10일쯤) 두둑을 짓고 보리씨를 뿌린다.

그림 3) 소나무로 짠 써레

보리를 심는 날에는 자신이 소를 부려 두둑을 짓고, 그밖에 아내와 머슴, 남자 일꾼 4명과 여자 일꾼 3명이 함께 일한다. 이 마을에서는 머슴에게 1년에 나락 3섬과 두세 벌의 옷을 주는데, 50원 정도 된다. 그리고 놉의 품삯은 남자 80전(밥 없이), 여자 50전이다.

가장 먼저 물 빠짐 고랑을 낸다. 논의 둘레와 한가운데를 소로 2번 갈아서 24㎝(8寸) 너비의 고랑을 낸 뒤, 삽으로 고랑을 다듬는다. 이 일에 자기와 소, 놉 1명이 한나절 걸린다. 다음으로 씨를 뿌릴 골을 탄다. 먼저 쟁기로 2번 갈아서 대충 골을 타고, 그 다음 쇠스랑이나 괭이로 골을 깔끔하게 친다. 이 일은 자기 혼자 한나절 걸린다. 골을 탄 뒤에는 따로 써레질을 하지 않는다. 쟁기질 할 수 없는 논의 양쪽 끝부분은 괭이로 골을 탄다. 그런 다음 그 다음날 보리씨를 뿌린다. 씨를 뿌리는 날에는 소를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씨를 다 뿌리고 난 뒤에는 둘레의 물 빠짐 고랑을 가장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다듬는다.

그림 4 점선이 물 빠짐 고랑

두둑 너비는 45㎝(1尺5寸)이고, 쌀보리인 죽하종竹下種이란 이름의 보리를 1말 5되 심는다.

씨뿌리기는 자기 혼자 바가지에 담아 두둑 위로 걸어가면서 고랑에 손으로 뿌린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보리씨 한 움큼으로 1.8m(1間)를 심는다. 보리는 18㎝(6寸) 너비에, 간격은 3㎝(1寸) 정도 되게 뿌린다. 이를 보아 점뿌림이나 줄뿌림이 아니라 흩뿌림에 가깝다. 그 뒤를 따라 1명이 소쿠리에 유조硫曹 8호라는 화학비료(1가마니 3원, 37.5㎏<10貫>)를 담아 보리씨 위에 뿌린다. 다시 그 뒤에 남자 3명이 소쿠리에 똥재를 담아 한 번에 12m(5尋)씩 15지게 분량을 준다. 거름을 다 준 다음에는 남녀가 함께 쇠스랑이나 괭이로 흙을 덮고, 따로 밟아 주지는 않는다. 특히 이듬해 여기에 목화를 사이짓기하려고 한다면, 보리 두둑의 너비를 81~84㎝(2尺7~8寸)로 넓게 만든다. 이렇듯 작부 체계에 따라서 쟁기질이나 두둑을 짓는 방법부터 씨를 심는 방법까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농사는 봄에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씨뿌리기를 마치고 10일 뒤에는 처음으로 웃거름을 준다. 이때 사람 오줌을 15장군 주는데. 장군 하나 분량으로 90m(50間)를 줄 수 있다. 원래 오줌만 4장군인데, 여기에 개숫물을 섞어 15장군을 만들었다. 오줌을 줄 때는 그림과 같은 ‘구뎅이’라는 것을 쓴다. 대부분 나무로 만드는데, 오지그릇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이건 당시 1개에 80전이고, 1년에 수선비로 20전을 들여 3~4년을 썼다. 구뎅이 5개가 장군 1개의 양과 맞먹는다. 박응렬 씨의 식구 8명이 오줌을 누면 4일에 1장군을 채운다. 그래서 오줌 4장군이 되는 보름마다, 15장군으로 만들어 웃거름을 준다. 이렇게 음력 정월 전에 다섯 번쯤 웃거름을 준다.

다음으로 웃거름을 줄 때는 음력 3월 초쯤인데, 이때는 배합비료를 장군 1개에 5홉 정도 넣고 물에 섞어서 준다. 이 무렵 보리는 9~12㎝(3~4寸) 정도 자라, 3포기쯤 새끼를 쳤다. 배합비료 1가마니로는 50장군 정도 웃거름을 만들 수 있다.


그림 4) 다른 말로 구댕이, 구대동이, 귀때동이라고도 한다. 주로 논밭에 져다 놓은 오줌이나 똥, 재 같은 거름을 거름통에서 덜어 여기저기 뿌리는 데 쓴다. 한쪽에 귀때를 붙여 액체를 따르는 데 편리하다.

김매기는 음력 정월까지는 따로 하지 않고, 두 번째 웃거름을 주기 20일 전에 애벌매기를 한다. 여자 6~7명과 자신이 하루에 끝낸다. 그때 나오는 풀의 양은 10지게인데, 이 풀들은 모두 두엄을 만들려고 집으로 나른다. 품삯은 여자 1명에 하루 20전과 두 끼를 준다. 호미는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알아서 가지고 온다. 다음으로 보리가 15㎝(5寸) 정도로 자라면 두벌매기를 한다.

그뒤 음력 3월 말(양력 5월 상순)이면 이삭이 팬다. 그러고 음력 5월에 보리를 거둔다. 자신과 머슴 1명, 놉 남자 1명이 하루 걸려 다 베고, 그 뒤 3일 동안 말린 다음 자신과 머슴이 지게로 20지게를 져서 집으로 나른다. 집으로 나른 그날 탈곡기(打麥機)로 마당질을 끝낸다. 탈곡기를 빌리는 값은 보리 1가마니(5말들이)를 떠는 데 보리 2되이다. 이걸로 하루 30가마니 정도는 떨 수 있다. 이렇게 마당질하여 보리는 1섬 5말, 보릿짚은 5지게가 얻었다. 보리는 1섬에 30원, 보릿짚은 1지게에 10전 정도 한다.



벌교를 떠나며


지금까지 벌교의 보성관과 그곳에 살던 박응렬 씨의 농사를 들여다보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말은 참 살기 힘든 때였다. 밖으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사회는 전시체제로 들어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머나먼 간도로 떠나 힘겹게 새로 땅을 일구었다. 그렇다고 남은 사람들도 편하게 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 반도를 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정된 식량 생산으로 제국에 충성하고자 했을지, 아니면 조선인들이 불쌍하다고 여겼을지, 솔직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08년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를 짚어 볼 뿐이다. 끝으로 유승규 씨가 1957년에 쓴 ?��빈농?��에 나오는 보리 탈곡기와 관련한 이야기로 마치고자 한다.


“아버지 저희 생각 같아서는 타맥기 사 놓으신다는 거 구만두시넌 게 좋을 것 같어유.”

삼형제 중에서 중학교라도 다닌 가운데 정현이가 형제간의 의사를 대표해서 말하자, “이놈들아 네놈들이 뭘 안다구 얘기여. 애비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바 …… 너희들은 농촌 기계화돼 가는 것을 통 모르는 얘기구나. 벌써 딴 동네서는 몇 년 전부터 보리타작하는데 도리깨나 자리개질을 안 한단 말여.…. 다 너희들 편하게 살라고 사 놓자넌 게다. 그라구 건넌말 송서방, 양지말 박서방들은 벌써 작년 저작년부터 타맥기를 사놔서 상당히 수지를 맞춰 사는데, 그래 우리 한가들이 그자들한테 뒤져서야 되겠냔 말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구 선각을 해서, 과감하게 박력있게 밀고 나가야지. 농공병진 시대여던 에헴.”

“허지만 우리 형편으론 불가능하단 말에요. 그네들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기계화를 하지만 남의 빚을 얻어 한다는 것은 거 아무래도.”

… 중략 …. 그렇게 큰소리 삥삥 쳐가며 고집부려 사들인 타맥기 운영이 어찌 되었느냔 말이다. 결국 2년간 건넌말 송씨네와 양지말 박씨네 세 집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보았지만,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냐. 보리 한 가마 타맥해 주는 데 한 말씩 받던 삯을 아홉 되, 여덟 되, 일곱 되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결국 송씨 박씨네는 닷 되씩을 받고, 타작을 해 주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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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마른 늦겨울과 초봄을 보며




지난 섣달부터 정월까지, 온통 아주 바싹 말라 있습니다. 뻥 좀 보태면, 길을 걷다가 버석거리는 소리에 놀랄 정도입니다. 집안도 너무 말라, 빨래를 널면 금세 마르니, 그거 하나는 좋습니다. 이런 때는 작은 불씨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행히 올해는 아직 큰불이 났다는 소식은 없네요. 작은 불은 몇 번 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건조한지 피부로 다가오지 않으시나요? 요즘 평균 상대습도가 30~50% 안팎입니다. 사람이 가장 기분 좋다고 느끼는 상대습도가 60% 안팎이라고 합니다. 상대습도가 80%를 넘으면 슬슬 짜증이 나죠. 그러면 옆에 사람이 붙는 것도 싫습니다. 심지어 남편이 은밀한 눈길을 주며 찰싹 들러붙어도 발길질로 밀어낼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조한 날씨가 왜 그럴까요? ‘겨울은 으레 그러니까’라고만 생각하시나요? 뭐, 그게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거기에 더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재밌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길 바라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우리 가끔 하늘을 보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시구를 아실 겁니다. 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즘 하늘을 올려다보신 적이 있나요? 90년대에는 ‘그래 우리 가끔 하늘을 보자’라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지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자는 말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나 자신을 돌이켜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네 전통과 관련이 깊습니다. 예부터 우리에게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에서도 하늘은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가장 어여삐 여기시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의 중심, 아니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지동설을 주장했지요. 지금은 초등학생도 웃을 일입니다.

우리도 사정은 그네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세운 동양에서, 하늘은 왕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마 하늘에서 무언가 읽고 전하는 무속이 그런 형태로 발전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하늘을 보는 일은 천자의 일,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하늘을 보고 한 일은, 바로 ‘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때’를 찾는 일이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때를 제대로 찾지 못하면, 큰일이 났지요. 농업이 나라의 주요 근간이어서 제때 농사짓지 못하면 어마어마한 재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핸드폰만 열어도 날짜와 시간을 바로 알 수 있지만, 그때는 어디 그런 것이 있었나요. 우리는 정말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음에 고마울 뿐입니다.

옛사람들은 하늘에서 ‘때’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자꾸 때 때 거리니 때밀이가 생각나네요. 그럼 때 말고 무엇을 보았느냐. 바로 하늘의 움직임에서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읽었습니다. 이 전통은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먹고 자고 싸는 인간이라면, 어디에 살든지 다 똑같았습니다. 우리는 내 앞날이 어떨지 한치 앞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는, 내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무섭고, 어떨 때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평소에는 별로 자각하지 못하고 살다가, 나를 돌아볼 일이 생기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럴 땐 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무언가 의지할 곳을 찾습니다. 교회에 나가거나 산을 찾거나 술을 마시거나 점을 보러 갑니다.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늘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하늘에 불이 났다?


그럼 그들은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네, 별입니다. 인간은 예부터 밤하늘의 별을 보고 거기에서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읽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넘기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과 연관된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 밤하늘의 별이 어떤데 그걸 건조한 날씨와 연결시키려는지, 얼토당토않은 소리겠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십시오.

그럼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시길 바랍니다. 어떤 별이 보이나요? 별자리를 잘 모르신다고요. 저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별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군포에서 농사지으시는 우리의 별 선생님께 “별바라기”라는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받아 그걸로 보았습니다.

요즘 밤하늘에는 벌건 별 하나가 엄청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성입니다. 처음 하늘에 관심을 가진 뒤 화성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가득합니다.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가운데 움직이는 건 떠돌이별, 그 자리에 늘 있는 건 붙박이별이라는 걸 학교에서 배워 아실 겁니다. 특히 붙밭이별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만든 것이 바로 별자리입니다.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는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요.

그리고 떠돌이별 가운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수성, 금성, 화성, 토성, 목성입니다. 이렇게 다섯에서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목, 화, 토, 금, 수라는 오행이 나왔습니다. 또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해와 달에서는 바로 음과 양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음양오행이란, 하늘의 법칙에서 온 우리식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뭐 별 건가요. 복잡한 공식, 수학 풀이, 딴 나라 이야기 같은 것만 과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들에서 규칙과 법칙을 찾아 정리하면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밤이면 우리의 머리 위에서 시뻘겋게 빛나는 화성이 요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아시나요? 바로 미리내(은하수)에 푹 빠져 있습니다. 지난해 동짓달부터 미리내에 빠져, 지금도 미리내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강물에 뜨거운 불이 빠졌으니 어떻겠습니까? 물론 불이 꺼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물이 마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인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상대습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자료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표에 나오는 날짜는 양력 기준입니다. 그리고 상대습도의 단위는 %이고, 수원에서 관측한 기록입니다.

먼저 동짓달인 양력 12월 10일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0일

70

20일

79.3

30일

53.1

11일

80.9

21일

80.4

31일

54

12일

79.6

22일

64

1일

51.8

13일

65

23일

73.8

2일

62.1

14일

61.4

24일

73.1

3일

65

15일

72.9

25일

75

4일

64.4

16일

72

26일

69.5

5일

75.6

17일

73.8

27일

83.1

6일

86.9

18일

82.5

28일

90.6

7일

93.4

19일

74.6

29일

72

 

 

동짓달에는 화성이 미리내에 빠졌다고 해서 그렇게 건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반적으로 습했습니다. 이거 알다가도 모를 노릇입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섣달은 어떤지 보겠습니다.

8일

79.6

18일

42.1

28일

54.3

9일

57.1

19일

45.1

29일

57.1

10일

54.4

20일

53.8

30일

52.1

11일

80.1

21일

75.1

31일

49.1

12일

69.5

22일

89.6

1일

52.9

13일

46.4

23일

65.9

2일

60.1

14일

50.9

24일

40.8

3일

68.6

15일

38.6

25일

48.1

4일

59.4

16일

37.1

26일

52.6

5일

50.9

17일

40.5

27일

57

6일

54.9

섣달에 들어오면서 동짓달보다는 더 건조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중순을 지나면서부터는 확실히 습도가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설날부터 오늘까지의 습도를 살펴보고, 무엇 때문인지 따져 보겠습니다.

7일

54.9

12일

31.4

17일

42.4

8일

61.6

13일

40.4

18일

52

9일

65.8

14일

56.6

19일

68

10일

66.4

15일

38.1

20일

57.3

11일

63

16일

42.5

 

 

정월은 지난 섣달보다 더 건조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뭔가 감이 오지 않으신가요?



화성이 미리내에 빠진 날


동지섣달과 정월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요? 바로 년年입니다. 동지섣달은 아직 정해년이었고, 정월이 되면서 무자년으로 넘어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쓴 「무자년을 꼽으며」라는 글을 보셨으면 기억하실 텐데, 거기에서 무자년은 불 기운이 강한 해라고 했습니다. 무자년에는 은은하고 뜨끈한 불이 아닌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불 기운이 가득합니다. 화성이 바로 그런 불 기운의 상징이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더 활활 타겠지요. 무자년으로 들어서며 이런 불 기운을 받아, 마침내 미리내의 물 기운을 누르고 물을 말리고 있다고 해석하면 재미있지 않나요.

미리내 근처에는 물과 관련한 우리 별자리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하늘나라의 우물인 정수井宿(서양의 쌍둥이)가 있고,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물이 샘솟는다는 옥으로 된 우물인 옥정玉井(서양의 오리온)이 있습니다. 또 나라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어 고대에는 해마다 제사를 지낸 강의 발원지 사독四瀆(서양의 외뿔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한강, 낙동강, 대동강, 용흥강이 이에 해당됩니다. 물과 불을 상징하는 남하南河(서양의 작은개)와 북하北河(서양의 쌍둥이)도 있습니다. 북하는 물이 어떻게 될지 그 조짐을 살피던 별자리이고, 남하는 불의 조짐을 살피던 별자리였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별자리는 우리네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별과 우리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의 나라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이 우리 인간의 세상에도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별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예측한 것이지요. 미신이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별의 세세함 움직임이 어떻게든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요? 너무나 적고 무시할 만한 크기라서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달이 바닷물을 끌었다 놨다 하는 것도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입춘이 지나면 개들이 털갈이를 하듯이 사람도 털갈이를 한다는 작은 사실도 놓치기 일쑤입니다. 요즘 머리칼이며 거웃이 얼마나 많이 빠지는지 모릅니다. 궁금하시다면 슬그머니 거시기에 손을 넣어 보세요.

올해 초는 그렇게 불 기운이 드세서 그런지, 안팎으로 들고일어나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쨍쨍쨍쨍 귀가 아플 정도입니다. 누구나 다 아실 테지만, 불 기운이 드센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 서울을 지키고 섰던 것이 바로 숭례문이었습니다. 그런 유적이 올해 정월 초에 불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한 줌 재로 변했습니다. 그 불씨는 한 사람의 이기심이었다지만, 그건 그 사람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기회의 불평등과 체계 없는 행정,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관행, 눈앞에 성과만 낳으려는 조급증 등이 낳은 결과입니다. 이것들을 계속 무시한다면, 이보다 더한 엄청난 불기둥이 솟구칠 겁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프로그램으로 확인하니 4월이 되면 화성이 미리내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렇다고 그 여파가 다 물러나지는 않겠지만,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연둣빛이 세상을 가득 채울 때면 때에 맞춰 비가 내릴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곡우에 비가 와서 한 해 동안 곡식을 잘 키워 주시고, 우리를 배부르게 할 겁니다.




☯ 도움 주신 분과 참고한 자료들

좋은 프로그램을 알려주신 군포의 김지현 별 선생님

늘 재밌게 글을 읽고 꼬집는 아내와 털갈이를 보여준 연풍

기상청 http://www.kma.go.kr/gw.jsp?to=/weather_main.jsp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 안상현,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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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갔다.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난 맑게 갠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림 1 아무 기술이 없어도 좋은 사진이 나오는 하늘 아래 벌교역. 새삼 10년 전 기차를 타고 이 역을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만큼 주먹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주먹들이 모이는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벌교는 지금과는 달리 예전에는 돈냄새가 폴폴 풍기는 곳이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 기차역까지 있다면 말 다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신작로인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1번 국도도 그렇고 경인선도 그렇고, 일제는 돈이 되는 곳이라면 길을 뚫고, 기차를 놓았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경제가 잘 굴러가도록 잘 쓰는 길을 놔두고 쓸데없이 산을 깎고 길을 뚫는다는 것. 자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야 한다. 농사와는 어울리기 힘든 흐름을 가진다.

간밤 후배와 술 한 잔 나누어 눈이 퉁퉁 부었다. 속을 풀 만한 먹을거리를 찾아 장을 헤맸다. 마침 장날이라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밥집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거기에는 입 짧은 후배도 한몫했다. 찾다 찾다 찾은 곳이 허름한 밥집이었다. 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백반이었다. 아마 장날에만 여는 집 같았다. 시원한 콩나물국에 가짓수도 엄청 많은 반찬들, 밥은 또 얼마나 꾹꾹 눌러서 주시는지. 일단 콩나물국부터 시원하게 마시고 속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도 알아서 한 대접 또 주신다. 정신없이 참 맛있게 먹었다. 이 맛을 어떤 말로 표현할지 도대체 떠오르지 않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밥값을 계산하려고 1,0000원을 건넸다. 그런데 돌아오는 돈이 6000원! 이 어찌된 일인가? 1인분에 2000원. 이렇게 싼 값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다니. 이거 기분 째진다.


 

 그림 2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 겉에 양철을 덧댔다. 양철이 살짝 벗겨진 곳을 자세히 보면 나무가 보인다. 개발이 안 된 덕에 근대문화유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벌교.

그림 3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낡고 초라한 건물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버스마저 왜 이리 추레한 것인지.


다카하시 노보루가 벌교에 온 것은 1939년 10월 18일. 난 2007년 7월 13일에 왔으니 한 70년쯤 차이가 난다. 그는 벌교에 도착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오후 4시 6분 보성을 출발하여, 시마자키島崎 기수와 최崔 기수(보성군 농회 기수)의 안내를 받으며 벌교로 향했다. 오후 5시 도착했다.
벌교읍에서 으뜸인 조선 여관, ‘보성관寶城館’에 들어갔다. 일본인도 묵는 사람이 많았고, 시설이 괜찮은 편이었다.


보성관이란 여관 이름이 눈에 띈다. 여기 오기 전 조사를 통해 아직 이 여관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번 벌교 여행은 이 여관을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이 건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 더듬더듬 찾아갔다. 조금 지나자 일제강점기 냄새가 물큰하게 풍기는 거리에 들어섰다. 순간 이곳 어딘가에 ‘보성관’이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림 4 보성관이 자리한 거리는 옛날에 벌교의 중심지, 곧 본정통이었다. 지금은 이 거리가 본정통이지만...


그림 5 보성관 입구.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작은 입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크린에이드’라는 간판의 오른쪽이 입구. 2층은 여관 건물.


드디어 여관을 찾아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이때 시간은 거꾸로 흘러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왔던 그때로 돌아갔다. 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여관. 댓돌에는 손님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저 방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앉아 있을까?

그림 6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이 여관은 현재 보성관이라는 이름보다 ‘남도여관’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가 조정래 씨가 쓴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빨치산 토벌대가 이 여관에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지금 1층은 가게와 살림집으로 쓰고, 2층은 비어 있다고 한다. 1층에는 방이 열 개, 2층은 좀 더 큰 다다미방이 네 개다. 이 정도 규모면 엄청 좋은 호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림 7 지금은 텅 빈 2층 다다미방. 사진은 퍼옴.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화단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 2층을 올렸다.

그림 8 보성관의 모습. 70년 전에도 이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그분은 남도초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교사를 하다가 퇴직하고 금은방을 냈는데, 이 건물이 매물로 나와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게 1979년의 일이다. 그러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여관 간판을 내렸다.

이 분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이렇게 살아남았다. 언제 개발이란 광풍이 불어 닥칠지 모르는 곳에 사는 건물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에 비하면, 참 행복한 집이다. 어디 건물뿐이랴 소, 닭, 돼지들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고 내 뱃속으로 들어온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보성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런 밥상을 받아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상차림을 보자.



반찬은 바닷가답게 비린 것들이 많다. 국도 멸치인지 생선인지를 넣고 끓였고, 전어 내장으로 만든 돔배젓에 굴젓까지 나왔다. 여기에 벌교의 자랑 꼬막이 어찌 빠질 수 있으랴! 여자만에서 캔 꼬막은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쫀닥쫀닥하고 쫄깃쫄깃한 것이, 짭짤하니 따로 장을 찍을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속이 얼콰하니 든든하다. 꼬막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인다. 저런 밥상이면 속이 부대끼지도 않게 밥 한 공기 뚝딱 맛있게 먹겠다.

여관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정통답게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으로 썼다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잘 지은 건물이란 느낌이다. 1919년에 건립했다고 하니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금융조합은 1907년 생겨 1956년 7월까지 있던 서민들의 신용 금융기관이었다. 지금의 신용협동조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해체되면서 생긴 것이 바로 농업협동조합이다. 그러니 농협의 전신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기관이 농민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그저 합법적으로 돈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지금 농협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림 10 르네상스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을 절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으로,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쓴다.


그림 11 보성관 주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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