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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제주도의 호미입니다. 할망(할머니)이 우녕(텃밭)에서 감자(고구마)를 캐다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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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 소쟁기질 취재를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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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부터 쭉 다랑이가 이어진다.

그렇게 하여 논이 모두 2500평이라고 한다.

참나 요즘 누가 이렇게 농사를 짓겠는가!

전부 기계로 지으니 기계 부리기 쉽게 경지 정리하는 판에.

선생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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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랭클린 히람 킹(미국 농림부 토양 관리 국장) 그는 왜 1909년 동북아시아를 찾아왔는가?

☞ 아무 목적 없이 또는 동북아시아를 동경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는 농림부 토양 관리 국장을 지낸 만큼 동북아시아의 농업, 특히 토양 관리의 실태를 조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 이유는 당시 미국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1830년~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력 고갈이 심각해졌다. 이는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으로 시작된 농업의 현대화‧자본화와 맞물리는데, 그것을 통해 사람은 물론 지력 수탈이라는 현상이 생겼다. 고정된 땅에서 최대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 그동안 해오던 휴경이라든지 하는 농법은 무시되고, 잠시도 쉬지 않고 지력을 소비한 결과 지력을 모두 써 버리게 되었다. 1841년 독일의 리비히가 최초의 화학비료를 만들기는 했지만, 1909년까지 화학비료는 아직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통로를 통해 알게 된 동북아시아의 농법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농사를 지어왔는데도 지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조사하려고 온 것이다. 곳곳에서 서양인의 시선이 보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고, 아무튼 동북아시아에 직접 찾아와서 보고 들으며 그가 보여준 태도는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주로 중국과 일본의 농사법을 조사했고, 한국은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본 풍경이 전부라서 우리의 전통 농법을 엿보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 여행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 책의 내용으로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애틀(2월2일 출발)→요코하마(2월19일 도착)→고베(2월24일)→모지(3월25일)→나가사키→우쑹, 상하이(3월1일)→홍콩(3월7일)→광둥성→광시성 우저우(3월10일)→광둥성→홍콩(3월15일)→상하이(3월16일)→?→상하이(3월20일)→장쑤성→상하이→쑤저우→쿤산(3월31일)→항저우→산둥성 칭타오(5월15일)→자오저우(5월22일)→상하이→텐진→산해관→만주 지역→단동, 신의주→부산, 시모노세키(6월23일)→규슈→나가사키(6월25일)→후쿠오카→혼슈섬(6월29일)→도쿄로 가면서 주변 지역을 보며(7월10일)→ 그 이후는 ?

이것을 보면, 대략 6개월 정도 있다가 가지 않았을까 한다.



◎ 그는 무엇을 보고 배웠나?

☞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작물 재배 방식 - 당시 미국과 유럽의 작물 재배는 이윤이라는 목적 때문에 주로 단일 작물 위주로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동북아시아의 사이짓기와 돌려짓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도 않고 어떤 체계가 세워져 있지도 않지만 놀라운 과학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가 설명하고 있는 밭과 논으로 나누어 작물 재배 방식을 보자.


1) 밭

① 일본에서는 밭과 과수원에 짚을 흙덮개로 많이 활용한다.

② 항상 작물을 줄지어 심고, 그 사이에는 다른 작물을 심는다(사이짓기). 그것을 통해 북주기 괭이질과 웃거름을 준다. 두둑은 120cm 정도다.

③ 괭이질은 항상 비가 온 뒤 이른 봄에 시작한다. 쟁기질하기 전에 거름을 뿌린다.

한 두둑에 밀은 20~100개 심음.

④ 밀이나 보리 재배

- 목화 사이짓기 : 밀을 추수하기 보름 전 사이사이에 씨앗을 뿌린다. 그 뒤 고랑의 흙을 곱게 만들어 5cm 정도 덮는다. 밀을 추수할 때 흙이 흔들릴 정도로 뿌리를 당긴다. 목화 싹이 어느 정도 자란 뒤 30cm에 하나씩 남게 괭이로 솎는다.

- 잠두콩, 목화 사이짓기 : 밀이 익을 무렵 잠두콩은 2/3 정도 자라고, 목화는 막 심은 상태다. 두둑은 150cm, 고랑은 30cm다. 밀 간격은 20cm, 다른 줄과는 60cm, 양옆으로 40cm 정도 여유가 있다. 밀을 추수하기 전 목화를 심는데, 콩은 고랑 옆으로 심었다. 콩은 밀을 추수하고 목화가 다 자라기 전에 수확하고,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작물을 재배한다. 이렇게 1년에 4번 농사를 짓는다.

⑤ 밀과 보리는 자운영과 함께 짓기도 한다. 보리를 추수한 뒤, 땅을 갈아 거름을 뿌리고 목화가 다 익을 때쯤 유채를 재배한다.

⑥ 돌려짓기는 밀‧옥수수‧기장‧ 콩 등이 대표적이다.

⑦ 옥수수 두 줄에 콩 한 줄을 45cm도 안 되는 간격으로 심는데, 잡초로 흙덮개를 한다.

⑧ 고량수수나 기장을 콩과 번갈아 가며 70cm 정도로 심음. 이때 두둑을 높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⑨ 광둥성에서는 겨울에 지주를 세워 콩을 기른다. 두 번째 벼를 거두고 난 뒤 밑둥 사이에 심는다(광둥성은 1년 평균기온 21.8℃, 1월 평균기온 13.3℃, 7월 평균기온 28.4℃. 1년 평균 강수량 1,694mm). 중국 남부 지방은 두 번째 벼 수확이 끝난 뒤, 곡물과 양배추‧유채‧완두‧강낭콩‧부추‧생강 등을 네 번째 작물로 기른다.

⑩ 노는 땅을 남김없이 활용하여 비료도 많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하고 또한 인내심도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륜 있는 농부의 경험이 필요하다. 무덤도 활용하여 주변의 무성히 자라는 풀은 여러 가축을 방목하거나 음식‧연료‧풋거름이나 퇴비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⑪ 논이나 밭이나 연작을 할 때는 항상 녹비작물로 자운영 같은 콩과식물을 이용한다.

⑫ 땅을 갈 때 지렁이를 보호하며 일한다.


2) 논

① 논은 대부분 300평 정도의 크기고, 벼 이랑 사이는 30cm다. 논은 계단식 논배미로 되어 있는데, 이는 물을 잘 이용할 수 있고, 거름을 뿌리기 쉬워 수확량을 늘리는 장점이 있다.

② 암거배수를 통해 물은 작물을 적시고 빠져나가거나 표면에서 기화된다. 보통 거름을 준 뒤에야 물이 한 논에서 다른 논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땅과 작물 모두 물에 녹아 있는 거름을 흡수할 시간이 충분하다. 또 모를 옮겨 심은 뒤에야 논에 물을 넣기 때문에 이미 자랄 만큼 자란 뿌리가 물속에 녹아 있는 양분을 효과적으로 흡수한다.

③ 모내기는 노동생산성은 떨어지지만 작물이 잘 자라는 효과가 있다.

④ 벼농사의 실례 (4월 19일 중국 저장성 자싱 근처)

- 모판 준비 : 재를 모판의 표토에 뿌리고 흙으로 살짝 덮은 뒤 평평한 바구니로 살짝살짝 눌러준다. 온도가 떨어지는 밤에는 모판 위에 물을 뿌린다. 검은 표면 때문에 햇빛 흡수를 잘 해 온기가 생기고, 신성한 공기가 흙속에 공급된다.

모를 기르는 것이 직접 뿌리는 것보다 훨씬 튼튼하고 고른 작물을 얻을 수 있다. 잡초 제거 같은 작업이 더 쉽고, 직접 뿌릴 때보다 더 빠른 시기에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모판에서 모가 자라는 동안 자운영이 자랄 충분한 시간을 주게 된다.

- 논 준비 : 논에 자란 자운영을 쟁기질로 갈아 놓는다. 모를 옮겨심기 전에 미리 퇴비를 만들어 놓고, 밀‧유채‧콩 등을 거둔 뒤 퇴비를 뿌리고 물을 채워 쟁기질 하고 써레질 한다.

- 모내기 : 모가 20cm 정도면 옮겨 심는다. 논 준비가 끝나면 모판에서 모를 뽑아 적당하게 묶은 뒤 논에 던져 놓고 모내기할 준비를 한다. 모내기는 1명이 앞뒤 30cm로 6포기씩 심는데, 모는 한 포기에 6~8개씩이고 사이 간격은 20cm 정도다.

- 제초 : 제초한 풀은 그대로 논바닥에 발로 쑥 밟아 넣는다. 일본에서는 모낸 뒤 첫 작업으로 4발 괭이로 두둑 사이의 흙을 긁어서 공기와 접촉하게 한다. 중간에 녹비를 넣어 준다.

- 수확 : 벼를 거두기 전 물을 빼서 땅을 말린다. 벼를 베서 낫가리 등을 만들어 말린 뒤, 홀태로 타작해 조제하고 방아를 찧는다. 일본에서는 현대식 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 볏짚 : 볏짚은 다양하게 사용된다. 연료‧흙덮개‧사료‧깃‧건축자재‧거름‧생활용품.

※ 후쿠오카 실험소 - 논 쟁기질은 보통 10cm로 하는데, 깊이 갈수록 생산량이 많다고 한다.

※ 논의 연작 : 겨울 밀‧보리→여름 벼→겨울 자운영→여름 벼‧유채→겨울 강낭콩‧잠두콩→여름 벼 순의 식.

※ 일본에서는 두 종류의 자운영을 하나는 가을에 1200평당 16톤, 하나는 5월15일쯤 7톤을 뿌린다.

                                            

2. 거름 만들기 - 그의 기록을 보면, 작물 재배 방식보다 거름을 만들고 활용하는 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분뇨를 이용하는 방법과 중국의 경우 운하의 개흙을 이용하는 방법을 보면서, 서양의 현대적 하수처리 시스템이 얼마나 낭비적인 것인지, 수로와 운하가 얼마나 중요한지 힘주어 강조한다.


1. 거름의 종류

① 액비

② 가축과 사람의 분뇨

③ 운하와 수로의 바닥에 쌓인 개흙

④ 풀‧작물의 줄기 등


2. 거름 만들기와 사용

① 각종 유기물과 흙을 번갈아 한 층씩 쌓아 퇴비를 만들고, 개흙을 그 겉에 바른다. 곡물의 씨앗도 개흙과 섞어서 뿌린다.

② 개흙을 퍼 놨다가 마르면 잘 부수어 이랑 사이에 뿌린다. 특히 농촌보다 도시의 운하에서 푼 것이 더 거름기가 많다. 개흙에는 달팽이 껍질 같은 것 때문에 석회 성분이 많다.

③ 각종 깻묵을 거름이나 사료로 사용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유채를 많이 재배한다.

④ 콩을 수확하고 녹색기가 남은 줄기는 개흙과 섞어 거름을 만들거나, 연료로 사용한 뒤 재를 거름으로 쓴다.

⑤ 뽕나무 밭과 논의 흙을 주기적으로 바꿔서 부족한 성분을 보충한다.

⑥ 한국에서는 새순이 달린 떡갈나무 가지를 논에 풋거름으로 사용한다.

⑦ 일본의 퇴비 만드는 법 : 퇴비 한 무더기에 풀을 1.5m까지 쌓는데, 30cm마다 3cm정도 개흙을 바른다. 그 뒤 물을 충분히 부으면서 발효시키는데, 여름에는 5주, 겨울에는 7주 동안 두었다 잘 섞어서 다른 곳에 옮긴다. 중국에서도 퇴비는 물을 충분히 주고, 발효 기간은 될 수 있으면 길게 하여 여러 번 뒤집는다. 쓸 때는 맷돌 같은 것으로 잘게 부순다.


3. 대표적인 녹비작물

① 자주개자리(알팔파) -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 여러해살이

서남아시아 원산. 옛날부터 사료작물로 재배. 유럽에서는 루선(lucern), 미국에서는 아랍어로 '가장 좋은 사료'라는 뜻으로 알팔파라고 한다.

② 자운영 -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 두해살이

연화초(蓮花草)·홍화채(紅花菜)·쇄미제(碎米濟)·야화생이라고도 한다. 중국 원산으로 논·밭·풀밭 등에서 자란다. 꽃은 4∼5월에 피는데 홍색빛을 띤 자주색이다. 어린 순을 나물로 하며, 풀 전체를 해열·해독·종기·이뇨에 약용한다. 뿌리에 뿌리혹박테리아가 붙어서 공기의 질소를 고정시킨다. 꽃은 중요한 밀원식물이고, 남쪽에서 녹비로 재배한다.



◎ 그밖에

- 부랑자나 파리가 없다.

- 모두 담배를 피운다.

- “미국은 국민 1인당 20에이커에 달하는 땅이 사람조차 살지 않는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반면, 앞으로 이 책에 나올 사람들은 1인당 경작지가 2에이커에 불과한데다 그나마도 절반은 농사짓기 힘든 산악지대에서 3천년 동안이나 땅을 일구어 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 “땅은 먹을거리와 연료, 옷감을 생산하는 데 남김없이 쓰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람과 가축의 입으로 들어간다. 먹거나 입을 수 없는 모든 것은 연료로 쓰인다. 사람의 몸과 연료, 옷감에서 나온 배설물과 쓰레기는 모두 땅으로 되돌아간다.”

- 채소를 완전히 익혀 먹으면 소화력이 높아져 배설이 쉽다. 질소 함량이 높아 육류의 부족분을 보충할 수 있다. 동물을 안 먹고 그 배설물을 이용한다 등

- “체온 유지 위해 연료를 쓰지 않아도 되게 따뜻하게 입고, 작물의 쓸모없는 부분은 동물의 먹이나 연료로 사용한다.”

- 나무를 이용하거나 그것으로 숯을 만든다. 소금을 만드는 데 화석연료를 이용한다. 석탄은 난방용 연탄으로 만든다. 집은 흙과 짚을 이용한다. 중국은 침대식 구들을 만들어 난방을 하는데, 거기에 사용한 벽돌은 나중에 부수어 거름으로 사용한다.

-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와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

- “절약‧검소‧근면 정신은 수십 세기 동안 내려왔다. 기계문명의 눈부신 업적에 의해 겉만 번지르르 하면서 미덕으로 칭송되는 낭비 일변도의 서구 문화와 만나 생명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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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작물의 성장과 환경' 이라는 주제로 이완주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 방식대로 땅 갈고, 파서 심으면 된다'는 주먹구구식이 아닌 과학적으로 식물은 이렇기 때문에 이러이렇게 해야한다는 설명을 참 재미나게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함을 들어왔던지라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는데, 잠바를 걸치고 오신 모습이나 지하철 타고 오셨다는 말씀이나 그냥 옆 집 아저씨나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셨습니다.

모습은 그러하셨지만 역시나 강의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 있는 주제의 강의를 어찌나 재미나게 말씀하시는지 강의 중간중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식물의 기본 구조가 어떻고 그렇기에 농사는 어떤 원리로 짓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중간에 말씀해주신 오십견 방지 체조와 감기 예방법도 확실하게 배웠으니 박사님 말씀처럼 이번 강의로 얻은 바도 큽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로 저는 무엇보다 제 좁은 소견이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강의 마지막에 '유기농업만이 해답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기농업만이 답이다' 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저에게 그 질문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박사님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유기질 퇴비를 통해 농사를 짓는 것이 유기농업이라고 정의하시면서 관행농의 문제점을 짚으셨습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10을 넣어야 적당한 양인데 그 2배, 3배로 투여하는 오남용이야 말로 문제가 되고 환경을 파괴하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유기질 퇴비를 넣어준다고 해도 어차피 식물이 먹는 것은 그 하나하나의 성분이기에 유기질 퇴비를 넣어주나 화학비료 적당량을 투입하나 별 차이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 무릎을 탁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떤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유기질 퇴비는 300kg 넣어주어야 하는데 화학비료는 1kg만 넣어도 된다는 점을 말씀하시며 이런 것이 과학의 힘이라고 하시는 부분에서는 과학을 우습게 보거나 도외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식물이 먹는 영양분은 정해져 있기에 유기질 퇴비를 주나 화학비료를 주나 마찬가지라는 점과, 유기질 퇴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화학비료는 과학의 힘으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작물이 제 맛을 갖기 위해서는 미량 원소들이 필요한데 현재 행하고 있는 수경재배가 깨끗할지는 모르지만 작물의 제 맛을 낼 수는 없다고 하시는 말씀 또한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미량 원소는 굳이 유기질 비료가 아니라도 식물이 알아서 흡수한다고 하셨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넓은 안목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개별 식물과 그 식물이 생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이라는 것만을 따로 분리해서 보면 적정량의 화학비료나 농약을 주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말 박사님 말씀처럼 그런 것들이야 말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이 이룩한 놀라운 과학의 업적이고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한 녹색혁명의 전도사 입니다.


분명 작물은 인간이 먹기 위해서 재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보다 쉽고 편하게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농약이나 화학비료, 각종 농기계의 사용과 같은 과학적 영농이 강조되는 것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엮여 있지 않은가 합니다.

현대는 예전과는 달리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져야 하는 실정입니다.

이농 현상이 활발해지고 그래서 적은 노동력으로 최대의 생산을 얻어야 하는 이런 현실은 산업화, 자본주의화 라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아파트와 공장을 부수고 싹 걷어낸 후 농사를 지어라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겠지만, 여하튼 바로 이 부분이 도시농업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또, 아무리 적당한 량의 농약과 화학비료가 자연적으로 분해가 되고 피해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작물의 관계만을 따로 분리하여 바라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자연생태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그래서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도 무궁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생태계라는 것은 태어나 자라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순환 속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환의 핵심은 바로 공생공존일 것입니다.

제가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아니고 하니 적정량의 농약과 화학비료는 자연분해 되어 다른 식물과 동물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무언가 아직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신비주의나 허황된 망상으로 빠질지 모르지만 저는 올 해 제가 일궈야할 땅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올 해 제가 경작해야 하는 땅은 작년 가을에 복토한 곳으로 아무런 생물도 살지 않을 것 같은 황토밭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잡초라도 좋으니 무언가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라도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무엇이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내린 해답은 역시 땅의 건강함이 아닐까 합니다.

땅이 비옥하다 라든지 땅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마을에 심보 고약한 사람도 있고 미친 사람도 있고 거지도 있지만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이 해답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을에 착한 사람들만,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사람들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합니다.

짧은 생각이지만 도시농부학교에서 이야기하고자 것이 이러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박사님이 강조하신 과학의 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학은 실로 대단하고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과학의 힘을 우리는 오남용을 하게 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읽고 있는 맹자라는 곳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仁義는 사람 마음의 고유함에 근거하니 天理의 公이요. 利心은 나와 남을 서로 드러냄에서 생기니 人欲의 私이다. 仁義, 根於人心之固有, 天理之公也. 利心, 生於物我之相形, 人欲之私也.'


이 말에 나오는 것처럼 오남용하게 되는 것은 주변을 생각하지 않는 사사로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무지함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또 그로 인한 습관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무지가 문제라면 교육과 홍보를 해야하고 습관이 문제라면 고쳐야 할 바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내가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가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남을 가르고 남은 나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만 생각하여 내 욕심만 채우려는 데에서 오남용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과학과 과학자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학 그 자체로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닌 그저 과학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학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인슈타인이나 노벨이 그러한 경우겠지요.

과학 그 자체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해서 과학자도 그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을 사용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통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얻게 된 힘을 잘 사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잘 사용함에는 바로 가치의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도시농업을 이야기 하는 우리에게 그 가치는 앞에서 이야기한 공생공존이라는 관점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곳곳에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유기농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는 외람되지만 너무 원리원칙만을 강조하는 분들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완주 박사님이 말씀하신 과학의 힘을 너무 맹신하고 오남용 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 반대로 그 과학의 힘을 너무 불신하고 배척하는 자세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학의 힘은 부정하기 보다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힘을 인정하고 적절히 사용하는데에는 무엇보다도 앞서 말한 가치기준에 대한 고민과 나눔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가 적당한 선이냐 하는 것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기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파시즘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농사만 해도 맨 손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작은 밭에서 트랙터를 몰고 다닐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적당한 도구가 없다면 새로 고안하고 만들어서 이용할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하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농법도 필요합니다.

그러한 고민과 기술이 축적되었을 때 우리의 현재 상황에 맞는 새로운 농법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학의 힘이란 이런 측면에서 유의미 할 것입니다.

아무리 옛 것이 좋고 도구는 사사로운 마음을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입장만 고수한다면 그저 고집불통 독불장군 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이 또한 도시농업을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이론 수업이 끝나려면 얼마 남지 않습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도 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족한 용량으로 많은 것을 담게 되니 머리 속도 그만큼 복잡해집니다.

오늘은 어제 이완주 박사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 드는 생각을 근질근질해서 쭉 적어보았습니다.

한참을 써내려가다 보니 똥오줌도 못 가리는 놈이 주절주절 떠든 꼴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슬슬 서울 올라가는 일이 귀찮아지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11월 모두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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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봄에 들어섰건만 동장군은 쉽사리 물러가지 않고 변덕을 부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엄청나게 많은 눈이 왔다고 하는데 집에서 칩거 중인 저는 그 눈도 오늘에서야 볼 수 있었습니다. 길가에 쌓여있는 눈을 보니 많이 오기는 왔나 봅니다. 어느 정도 녹았을 텐데도 공원에는 하얀 솜이불을 펼쳐놓은 것처럼 푹신해 보입니다. 그래도 목련은 다가올 봄을 준비하느라 솜털 보송한 꽃눈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집에서 콕 박혀 지내면서 지나온 동서양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동양의 춘추 전국 시대와 서양의 로마 시대가 그것인데, 시기가 비슷해서 그런지 생활 모습도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 형태에서는 도시 국가의 모습을 지나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도 그렇고, 법률을 집행하는 모습도 그렇고, 정치인 개인 개인의 모습도 서로 겹쳐 보입니다. 특히 일상 생활하는 모습도 서로 많이 비슷해서 참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하나하나 열거하면 밤이 새도 모자라니 농사와 관련 있는 이야기 하나만 하겠습니다.


작년 언젠가 이런 생각이 떠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들은 얘기 때문에 갖게 된 것인데, “건강한 여성의 경우 월경주기가 달의 모습이 변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건강한 여성이라면 상현달이 떠오를 무렵부터 조금씩 월경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보름달과 비슷한 시기에 월경을 하고, 하현달이 지나면서 그친다는 것입니다. 제가 남자인 관계로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직접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주변을 가만히 보자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특정 방송을 선전하려는 것은 아닌데 텔레비전에서 하는 로마라는 연속극에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상황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 친누나가 접근하여 시저의 비밀을 캐내려던 때였습니다. 놀랍게도 육체를 이용하여 친동생을 유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 근친상간이 비일비재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강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는, 아니 우리나라 사람 누구에게나 그 장면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순순히 그 유혹에 넘어가 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근친상간을 하면 제대로 된 아이가 잘 태어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야.”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하지만 오늘은 보름이 지났으니 임신할 염려는 없어.”라면서 간통을 합니다.

보름이 지났으니 임신할 염려가 없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심이 순간 뭔가 단서를 잡은 듯했습니다. ‘그렇군, 예전에 들었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 그 시대에는 지금처럼 산업화된 문명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았던 시대였을 것이니 사람들의 몸도 지금에 비해서 더 정직했을 것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아무리 밝힌다고 해도 지금처럼 대낮같이 환하지도 않았을 테고, 귀족이나 이런 사람들이나 밤에 연회를 즐기지 대부분의 사람은 해떨어지면 대부분 잠을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도 더 민감했을 것이고요. 요즈음은 겨울에도 집안에서는 덥다고 반팔을 입고 다니고, 여름에는 춥다고 긴팔을 입고 다니는 판이니 계절이 지나는지, 시계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인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요즈음은 월경 주기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월경과 달의 변화를 서로 연관 짓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건강한 여성의 경우 월경은 달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 지도 모릅니다. 뭐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월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 이야기 중에서 무엇이 옳고 틀린지 주장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여성의 월경 주기가 달의 위상변화와 맞아떨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만약 여성의 월경 주기가 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사람마다 주기가 다른 것이 요 근래 인간에게 생기게 된 변화라면, 참 재미있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월경 주기가 각자 다르다는 이야기는 사람은 동물과 달리 따로 발정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렇지 않아 월경주기가 달의 변화와 맞아 떨어진다면 사람에게도 발정기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이 애써 의무 방어전이다 뭐다 하면서 고생할 필요도 없겠지요. 발정기에만 신경 좀 쓰면 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천천히 게으르게 살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씻는 소리만 나도 밤이 무섭다는 말도 종종 듣게 됩니다. 아무튼 발정기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잠시 얘기가 샜습니다. 그냥 안주거리 삼아 듣고 넘기십시오.


위에서 얘기한 로마 시대의 모습처럼 원래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그 순환 주기에 맞춰서 살았을 겁니다. 현대 사회처럼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지 않았던 그때에는 우리 몸의 반응도 자연히 그 흐름이 맞춰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흐름이 철저히 파괴되다 보니 심심치 않게 불임 부부의 이야기도 자주 듣게 됩니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따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자연의 흐름과 어긋나는 삶도 그에 한 몫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산업화 이전의 농경 사회에서는 출생한 날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농번기에는 바빠서 미처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집안의 형제들이 태어난 달은 다르지만 생일은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 어머니의 월경 주기가 일정하고 또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다달이 하는 일이라서 월경月經이 아니라, 달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라서 월경月經이라면, 보름달이 떴을 때 음기가 가장 강하다고 하는 우리 조상들의 미신 같은 이야기도 그 근거가 충분히 생깁니다. 음기는 모으고 저장하는 기운인지라 생명의 에너지를 응축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좋은 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음양오행이라는 철학관 같은 이야기도 그 근거가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옛날 우리네 농서를 보면 흔히 “파종은 보름달이 뜨기 전에 하라.” 하고, “수확은 보름달이 지나고 난 후에 하라.”고 합니다. 요즈음의 서구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얼토당토하지 않은 근거 없는 미신이겠지만, 앞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면 그저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는 양기가 점점 누그러지는 동시에 음기가 강해지는 시기이고, 보름달부터 그믐달까지는 음기가 점점 누그러지는 동시에 양기가 강해지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태극기의 태극이 바로 이러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태극이나 음양오행은 모두 자연을 관찰하여 얻어낸 산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연의 흐름이 그러하다면 인간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이기에 그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월경 주기가 달의 변화와 맞아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무언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신은 배란기인 월경 2주 전부터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기간을 앞서 말한 달의 변화에 맞추어 추정해보면, 초승달부터 월경이 시작되는 보름달까지의 기간과 꼭 맞습니다. 또한 그 기간은 바로 옛 농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씨뿌리기 좋은 기간과 일치합니다. 그럼 왜 옛날 사람들이 씨를 보름달이 뜨기 전에 뿌려야 한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될 법도 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면 수확하기 좋은 기간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이해가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의 몸을 통해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편하고, 또한 가장 확실합니다. 그렇기에 만약 월경 주기가 그러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쭉 밀고나가서 옛사람들의 미신 같은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마다 다르고 끝도 없이 변하기에 이것이 원칙이라거나 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옛날 사람들의 말이 그저 미신이라며 애써 무시하거나 관심을 끊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야기를 했을 테니, 그 근거가 무엇일까 궁리하고 찾아서 요즘 시대에 맞게 이용하는 자세가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이겠지요. 무슨 농사건 새로운 일을 벌이고자 하시는 분들은 그믐에서 보름 사이에, 그것도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인 봄에, 계획하고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시작이 반이다, 첫 단추부터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의 핵심이 바로 이맘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목련을 위시하여 온갖 꽃들이 피어날 것이고, 녹음방초가 우거질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조금 부지런을 떨면 한 해를 보람차게 보내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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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다녀오다



녹색연합과 교보생명에서 공동주최한 '음식이 세상을 바꾼다' 강좌의 마지막 대미인 생산지 방문 행사에 다녀왔다. 이번 행사는 교보생명에서 후원해서 모든 것이 무료라는 점이 아주 좋았다.


생산지는 충청남도 홍성에 있는 문당리라는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일꾼들을 배출해 온 풀무농업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있는 곳으로, 그 학교 출신자들은 현재 전국 각지에서 뜻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귀농학교 강의해 주신 정경식 선생님도 이 학교출신이라고 들었다.) 문당리 마을의 이장인 주형로 선생님도 바로 그 풀무농업고등학교 출신이라고 하신다. 그 분은 학교 졸업 후 25년간 유기농을 고집해오며 마을을 살리기 위해서 아직도 하나씩 하나씩 일궈가시는 중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재 문당리 마을 살리기 100년 계획을 세운 후 생태적이며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차근차근 단계를 밝아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마을은 현재 정부로부터 친환경농업지구로 지정될 정도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마을의 주민은 총 90여 가구쯤인데 놀라운 것은 다른 지역의 마을과 달리 연령대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10대부터 60대까지 건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귀농자를 위한 자리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계속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마을의 주 소득원은 역시 오리농법으로 생산되는 쌀이다. 마을 주민분들 대부분이 현재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그 규모는 1,350,000 평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전량 계약판매제로 수확이 되기 전에 이미 다 팔리며 엄청난 양이 생산되는데도 도시 사람들의 보신주의로 매해 부족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이런 부분은 진정 고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유기농을 하는 이유는 단지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함이 아닐진데, 그렇다고 경제적 이득을 아예 무시할 수 없는 딜레마...그러다보면 진정 생명과 농촌을 생각하는 사람보다 자기의 건강과 개인상의 이유만으로 유기농산물을 활용하려고만 하는 도시민들이 더 많아지고...결국 경쟁에서 밀린 돈없는 사람은 또 한번 소외를 당하고 마는...


마을에 대한 소개는 대략 이 정도로 마치고 떠남에서 돌아옴까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토요일 오후,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귀농학교 동기분들을 만났다.

문용성 형님, 최동주 선생님, 김재성 선생님, 양해동 선생님과 그 가족, 육경영 선생님, 안성호 선생님, 태석이, 최순복 선생님, 진주하 선생님 내외분. 귀농학교 동기들이 정말 많이 갔다. 다들 이런 모임이나 행사에 목말라 하고 있었나 보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도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반가움의 감정을 밖으로 선뜻 드러내서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웃음으로 나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잠시 후 우리는 한 차에 우루루 몰려 타 앉은 후 홍성으로 출발!


진행자의 말에 따르면 홍성 문당리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두시간 반쯤 가면 도착한다고 한다. 전에 안성호 선생님의 말씀처럼 홍성이 기차나 도로 다 잘 뚫려있어 접근이 용이했다.


드디어 홍성에 도착하였다. 중심부는 여느 지방도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관공서와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상권... 조금 더 달리니 넓디 넓은 논이 탁 펼쳐진다. 충청남도에다 조금만 가면 나오는 바닷가, 그래서 그런지 높은 산은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낮고 두루뭉실한 산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그 산들 사이로는 넓은 들판이고...


그런데 논이 여태껏 보았던 논과는 조금 달랐다. 논에는 그물망이 쭉 둘러서 펼쳐져 있고, 조그만 창고 같은 것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이곳이 문당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리농법을 하니 오리가 도망 못 가도록 그물을 쳐 놓고 오리집을 지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역시 오리 숙소에는 오리들이 옹기종기 서 있다.

차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잽싸게 도망다닌다. 나중에 들었는데 오리들이 올라오는 풀을 먹는게 아니라 흘탕물을 일으키며 다녀서 싹이 트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효과를 갖느다고 한다. 또 벼에 달라붙어 있는 벌레도 어느 정도 먹어치운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사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사료를 어디서 구하는지는 모르겠다. 아직 완전한 자급체계가 완성되어 있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벼가 어린 것처럼 오리도 어린 놈들을 넣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 그러면 덩치 큰 오리의 몸짓에 벼가 다 쓰러져 버린다고 한다.



우리는 홍성친환경농업 교육관에 여장을 풀었다. 국가, 군청, 농업기술센터, 즉 나라에서 전부 4억 1천만원을 내놓아 건물을 건립했다고 한다. 물론 짓는데 주민들이 손 놓고 구경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손수 나서서 황토벽돌도 만들고 여러가지 일도 하고 ...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마을회관 겸 교육관 건립을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그 결과, 80평 2층 건물 하나와 숙소인 90평 건물 하나와 농업유물박물관이 건설되었다. 모두 황토로 지은 건물인데 실상사 귀농전문학교에서 본 건물과 비슷하게 생겼다.(용성 형님이 찍어서 올려놓으신 사진을 보세요) 그렇게 짓는 것이 유행인가? 아님 같은 사람이 설계하고 지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나서 여기 저기 둘러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교육관 뒷편에 있던 소나무 숲, 바람골을 정확히 짚어서 세워놓은 풍력발전기, 오리들이 놀고 있던 논, 건물 안에 꾸며져 있는 기구들...모든 것을 머리 속에 집어 넣느라 바빴다.


저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식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도 식사는 이 마을에서 나온 유기농산물로 만든 채식만 나온다. 잡채가 반찬으로 나왔었는데 돼지고기가 한덩이라도 있을까 유심히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고기 없이도 맛있긴 한데 입이 그렇게 길들여져서인지 뭔가 아쉽고 서운한 감을 숨길 수 없었다.(그래서 올라온 날 저녁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그리고 유기농산물이라고 하지만 실상사에서 먹었던 것과는 또 다르다. 실상사에서의 농작물은 전문적인 사람들의 작품이고 이곳은 일반 농민들이라서 그랬을까?

맛이 조금 달랐다. 실상사에서 먹은 것이 더 자연의 맛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둘 다 지금 내가 돌보고 있는 놈들보다는 모두 덜하다.


그 날 저녁 행사에서는 마임을 배웠다. 서로 어색한 기운이 많았는데, 서로의 동작 따라하기 라든가 마임배워서 강사 따라하기 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친밀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서로 어색함을 없애는 것에는 함께 몸으로 하는 놀이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그 날의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남자들은 따로 숙소로 이동을 했다.

그곳은 나중에 한우를 기르려고 준비하고 있는 축사 옆 숙소였다. 어찌나 잘 지어놨던지 크기도 무지 크다. 아직 소는 기르지 않는데, 그 이유가 자급 체계가 구축되지 않아서 라고 한다. 소가 지금 사상 최고로 비싼 이유도 있지만 그 소를 먹일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어서 계속 준비 중인 상태라고 한다. 이제 소까지 키우게 되면 퇴비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려고 하는 것 같다. 유기농이라고 하지만 퇴비나 환경자재를 외부에서 사다쓰면 그것도 또 다른 형태일 뿐이지 농약, 비료 주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지나가랴... 우리는 홍동 막걸리 20통을 사다가 마셨다. 홍동 막걸리는 맛이 기막혔다. 달달한 맛이 강했는데 서울 막걸리의 탄산같은 톡 쏨도 없고, 포천 막걸리의 시금털털한 맛도 없이, 부드럽게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맛이다. 처음엔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지 몰라 귀농학교 사람들만 갹출해서 10통을 샀다가 냄새를 맡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몰려 오는 통에 10통이 추가되었다. 역시 이런 일의 추진에는 최동주 선생님이 계셨다.


주형로 선생님이 무지 신경을 써주셔서 안주도 맛나게 먹었다. 특히 술자리에서 해주신 주형로 선생님의 말씀에 정말 많이 배웠다.


"농촌에 농부만 있어서는 안된다."

"귀농하려면 자기가 가진 전문기술을 살릴 수 있도록 해라."

"마을에는 미술가도 필요하고 이발사도 필요하고 교수도 공무원도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곳이 살아있는 마을이다."

"귀농한다면 가장 처음 할 일은 마을 어르신들 대접하는 일이다."

"처음엔 남들 하는데로 해보아라. 농사는 독불장군처럼 혼자 튀게 지으면 안된다. 그럼 왕따 된다."


이런 귀농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과 의견과 특히 자식을 두고 있는 아버지들이 가장 궁금해 했던 교육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자식을 어떻게 키워내고 교육시키고 했는지의 과정들에 대한 이야기. 풀무농업고등학교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옆에서 바라본 홍순명 선생님과 풀무학교에 대한 이야기. 많은 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머리가 조금 더 좋고, 술을 좀 자제했으면 더 많은 이야기가 생각날텐데 이 정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요청만 한다면 나중에 서울로 오셔서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했으니 나중에 꼭 모셔봐야겠다.


그렇게 치열한 밤을 보내고 모두 피곤에 지쳐서 잠이 들었지만, 최동주 선생님과 안성호 선생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을까? 새벽까지 자지 않고 있다가 농부들이 논에 나올 무렵 걸어서 교육관까지 이동하셨다 한다. 그렇게 지나오면서 농민들을 만나 여러가지 묻고 듣고 하셨나보다. 역시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는다.'


다음날 행사는 주형로 선생님의 강의와 유기농체험(수확), 그렇게 수확한 것을 사는 일, 황토염색, 제기만들기, 등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녹색연합을 칭찬하고 싶은 것이 그런 행사를 최대한 느슨하게 해놔서 편안하게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내가 무슨 행사를 진행한다면 그렇게 느긋하고 느슨하게 진행시키고 싶다. 황토염색은 우리가 지리산에서 했던 것과 좀 달랐다. 그때는 거의 2시간 동안 주물럭 했는데 여기는 한시간 정도 주물럭 댔을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직접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염색은 비슷하게 되는 것 같던데...어떤 비법이 있는지 모르겠네...


행사를 겪으며 술에 찌들어 피곤한 몸이 되었지만 너무 좋았다.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마을을 살린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그 결과물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지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 깊이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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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고추를 어떻게 키웠나요?

다 직파를 했지. 그냥 밭에다 씨를 뿌렸어. 그럼 한 달 가야 나와. 솎아주고 세 번 네 번 내야 고추 따먹어. 그 다음에는 온상을 해서 그냥 퇴비하고 흙하고 섞어서 깔고 심다가. 그렇게 하다가 포트가 나와서 거기에 심은 거야.

그땐 지주는 뭘, 그냥 북이나 주고 말았지. 키도 안 크고, 집에서 먹을 거나 하니까.


고추씨는 언제쯤 넣었나요?

옛날에는 3월 초에, 일찍 하면은 추우니까. 그러구 대개 5월 말일쯤 나가. 지금은 뭐 4월 20일서부터 나가지. 그전에는 7, 80일 정도 걸린 거지.


다른 작물들은 어떻게 했나요?

벼는 물못자리로 했고.

그 전에 목화 할 때 보면, 목화씨가 털이 숭숭해서 잘 안 떨어진다고. 그래 똥재를 만들어가지고 요렇게 묻혀서 심었지.

고추하고 배추 무. 배추 무는 그때만 해도 모종 할 줄 모르고 씨를 갖다 심었지.


똥재를 묻힌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옛날에 거름을 준다는 걸 보면은, 재를 매일 치잖아. 그걸 가만히 내버려뒀다가 인분하고 섞어. 그걸 퇴비로 많이 줬어. 재에다 그냥 똥을 퍼다 붓고 말리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어. 가루니까 무게도 가볍고.

똥도 퍼다 쫙 뿌리는 거야. 그러면 무 같은 것도 잘 돼요. 생똥은 독헌데, 똥통에서 45일만 지나면 그 이상 좋은 게 없어.

그거 말고는 산에서 갈잎을 모아다가 물을 흠뻑 주고, 막 지지 밟고 그래. 그때는 그것도 없었어. 그것도 나무가 많이 있는 데나 있지 아무데나 없잖아. 솔잎은 독해서 쓰지 않았어. 그건 썩지를 않아. 볏짚이 많은 집에서는 그걸 좀 넣는데, 볏짚도 뭘 많기나 해. 이엉 엮고 소죽 쑤고 하면 볏짚도 없어서 낙엽 갖다 했지. 갈잎에는 똥물 섞으면 안 돼. 너무 독하니까. 저거, 고구마는 돼. 그건 갈잎에 똥물 섞고 쌀겨 이런 걸 막 넣어.


옛날에 못자리는 어떤 식으로 했나요?

논 삶아 가지고 물 대놓고, 볍씨 건져서 하룻밤 재워서 물에다 뿌리는 거야. 그냥 물이 보온이야. 물로 하는 거야.


볍씨를 언제쯤 넣나요?

곡우 때 담그니까 곡우 지나서지. 하지 정도에 모내기를 했어.

그러니까 논에다 갈잎을 많이 넣고, 두 번씩 세 번씩 갈아가지고 논 삶는 거야. 옛말에 한 번 갈면 거름 한 번 주는 식이라고 했어. 모 심을려고 물을 대면 비비 소리가 났다고. 물이 들어가느라고. 여러 번 간 사람은 벼가 더 잘되고, 한 번 갈고 심으면 벼가 안 돼. 그렇잖아 이치가. 땅이 물렁해야 뿌리가 잘 들어가지.

그때는 물관리를 얼마나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물관리를 안 해. 그때 뭐 장화나 있어 그냥 맨발로 가래질 하느라고 발이 새빨갛게 됐어, 추우니까.


그때가 언제쯤인데요?

3월 10일 전후. 이제 가래질 안 한지 꽤 됐어.


못자리 할 때 볍씨를 뿌리면 물은 어느 정도나 받나요?

처음에는 깊게 대. 한 10에서 15센치. 그러니까 물결이 찰랑찰랑 하지. 모가 커갈수록 물은 줄어들게 하는 거지.


그렇게 물이 깊은데 발아가 돼나요?

다 돼. 하여간 물로 온도를 잡기 때문에 깊게 해. 낮에는 물을 좀 낮췄다가 밤에는 깊게 하고 그랬어.

물못자리 말고 보온전추 못자리라고 있어. 하우스 터널식으로 해서 볍씨를 뿌려놓고 흙을 덮고 겉도랑만 파놓는 거야. 여기서 지온이 올라가면 도랑에 있는 물을 빨아들여.


모내기 할 때는 못줄을 띄우고 했나요?

우리 마을은 판때기라고. 두어 사람이 못줄을 가지고선 요 안에 네 포기씩 들어가게 판을 만들어놔. 열 명이 일하면 열 판을 만들어 놓고선, 한사람씩 싹 나가는 거야. 안 해본 사람은 더 늦어도 해본 사람은 빨러. 그 못줄 놓고 맞춰서 나가려면 얼마나 더뎌. 잘 심는 사람은 손이 물을 가른다고 그랬어.

보통 그때는 저기 심는 게 모와 모 사이가 일곱치(21cm) 정도 했어. 시방보다 드물지. 지금은 네 치 다섯 치 해요.


밀이나 보리는 어떻게 직파했나요?

보리는 가을에 소로 골을 파서 쭉 심는 거지. 논에는 덩어리가 있으니까, 그 도구가 곰배라고 하는데 그걸로 덩어리를 깨는 거야. 밭은 부드러우니까 고무래로 하고.

첫서리 올 때 보리싹이 올라와야 돼. 가을에 일단 자리를 잡고 눈이 폭 쌓이면 그게 이불이여. 봄에 가서는 보리가 뜨잖아, 그럼 막 보리를 밟는 거여. 우리가 어릴 땐 그거 했거든.


배추는 결구되는 배추가 있었나요?

옛날에는 왜 밭 같은 거 다 있고 그랬는데 그런 것도 그렇고 양념류도 먹을 줄을 모르고 그랬나 몰라. 포기 짠지라고 그러잖아, 고갱이 찬 거. 귀한 손님만 오면 그게 나오는데, 참 그게 어떻게 먹고 싶은지. 조선 배추는 고갱이가 안 앉아, 그나마 나은 걸로 하는 거지. 벌어지기만 하지. 무수도 그런데 뭘.


배추는 채종을 어떻게 했어요?

노지에 놔두면 지가 알아서 잘 커. 봄에 그걸 따 먹는 게 봄동 배추고. 계속 놔두면 4월에 꽃이 피고 5월 달에 여물고, 6월 달에 터지기 전에 따서 매달아 놓고 그 씨를 받는 거야.

무 씨도 다 그렇게 받았어. 무는 봄에 파종하면 올라온 거 가지고 씨받는 거야. 그걸 장아리라고 해. 장다리만 크게 올라온다 이거야. 집마다 울타리 앞에 무수 세 개만 묻어두고. 4월 달에 싹 틀 때 캐다가 묻어 그럼 자연히 꽃이 펴. 그럼 벌나비가 날아들어 수정이 되어. 그러면 씨가 터지기 전에 두루룩 잘라서 매달아놓으면 안 벌어지거든, 그걸 그냥 쓰는겨.


그렇게 늦게 해요?

옛날에는 다 그려. 지금은 이런 땐 아직도 농한기여. 나무나 하러 다니고. 옛날에는 일이 다 늦었어. 그게 정상이었어. 지금 이건 하우스 때문에 그렇지. 지금은 조기 재배를 하니까 그 기간만큼 수확기도 빨라졌어.


마늘 채종은?

그늘에 매달아 놨다가 가을에 심는 거지. 쫑 올라오는 걸 받아서 심는 것도 있는데, 그건 심으면 통마늘이 돼.


이 지역에서는 환금작물로 무엇을 했나요?

담배 했지. 옛날에는 담배에 벌레도 별로 없었지. 진딧물도 그래 없었어. 요즘에 와서 그렇게 많은 거지. 벌레는 담배나방이 있는데, 아이고 우리 어릴 때 그냥 손으로 잡았어.

옛날에는 곁순 나오는 것도 다 사람이 땄다고. 그런데 지금 담배는 약을 한 번 딱 치면 여기 순이 안 나와. 그리고 진딧물 약도 치지. 그래서 내가 지금 담배는 나쁘다고 생각해. 화학원료도 많이 들어가고.


담배도 육묘를 하나요?

왜 육묘하지. 가랑잎을 갖다 묻고 물 넣고 싹 지지 밟아. 그 위에 흙 덮고 고운 퇴비 좀 뿌리고 담배씨 좀 촉 틔워서 뿌려. 옛날에는 그 위에, 그게 뭐지, 망사! 그걸 덮었다고.


그게 보온이 돼나요?

그러니까 이게 짚을 덮는데, 뺑 둘러서 바람을 막으라고 울타리를 치는 거야. 수수깡이던지 뭐든 높이 해서 쫙 막아. 그래 겨울에 어른들은 짚꺼치를 짜는 거야 이엉 엮듯이.

이게 한 사오 미터 돼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방풍림을 세워서 그 밑에다 판을 짜요. 판을 쭉 짠다고 이 안에다. 그럼 이 판 안에다 가랑잎을 넣고 물을 넣고 밟어. 그 다음 흙을 덮고. 씨뿌리고 덮고. 여기를 짚꺼치로 덮는다고. 그래서 밤에는 덮고 낮에는 열고. 밭에 나갈 때까지 계속.


옛날에도 온실 같은 것이 있었나 봐요?

예전에는 양열 온상이라고 해서, 땅을 팔 때 이렇게 판단 말이야. 남쪽은 깊게 파는겨. 왠 줄 알아? 북쪽은 햇볕이 잘 들어오니까.

이렇게 파서 여기다가 낙엽을 넣고 물을 넣고 장화로 지지지지 밟으면, 찍찍찍찍 물이 올라올 때까지 밟어. 이렇게 해놓고, 다시 상토를 지금처럼 장에서 사다 쓰는 게 아니라, 집에서 만든 소똥 섞고 해서 그 이듬해부터 곱게 만들어서 80센치 딱 이렇게 넣는겨. 이렇게 해서 고구마는 호비호비 파고서 등이 보일락말락하게 넣는겨. 이러다가 싹이 올라오면 잘라다가 밭에다 심는겨.

비닐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문창호지를 기름을 먹여가지고 문살마냥 짜서. 기름먹인 창호지는 비가 와도 또로록 흘러. 북쪽은 높게 남쪽은 낮게 하고, 대신 남쪽을 깊게 파서 기름 먹인 문창호지로 보온을 하고, 밤에는 또 꺼치 이엉을 덮는겨. 낮에는 열어놓고 밤에는 덮고. 이렇게 했지.

고추는 여기다 파종을 한 게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여. 그래서 고추 모종을 해서 밭에 내면 5월 10일 이후여. 그 전에는 서리가 와서 얼어 죽으니께. 이게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하던 농업이여.


그 크기가 얼만했나요?

내가 기억이 나는 게 남쪽은 1미터 정도 팠을 거고, 북쪽은 50센치 정도 팠을 거여. 조상들이 얼마나 머리가 좋으냐면, 남쪽에는 낙엽이 들어가서 열이 올라오니까, 남쪽은 낮게 하고, 북쪽은 햇빛 들어오는 것 때문에 높게 하는겨.

그런데 여기 들어간 놈이나, 저기 들어간 놈이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클까. 이게 여기는 지열이 올라오는 대신 낮고, 저기는 지열이 안 올라오는 대신 높고 하니까 똑같이 커서 잘라.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제일로 억울한 게 전통농업이 사라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자연의 순환 법칙까지도 파괴한다는 게 억울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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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동광원


저희는 ‘전통농법에서 배우자.’ 라는 취지로 취재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는 무척 넓어 보이는데 지금 농사짓는 평수가 얼마나 되나요?

처음에는 저 위하고 여기하고 8천 평 됐어요. 그러다 저 위 4천 평은 나라 땅이라고 해서 다 나무 심어서 돌려주고, 몇 년 전에 1500평 팔고 지금은 한 3000평 될라나.


아직 토종종자가 많이 있나요?

-옛날에는 다 있었는데 지금은 힘에 부쳐서 많이 못 가지고 있어요.


지난 번 이곳에서 우엉을 얻었는데 토종인가요?

-아니요. 그건 사다 했지요. 옛날 우엉은 참 맛있었는데, 잎도 먹으면 맛있어요, 먹는 뿌리가 색깔이 새카매요. 속은 별로 안 검은데 겉이 까맣고, 키도 더 작아요. 지금 심는 건 샀어요. 전에는 자꾸 받아서 했는데 지금은 씨를 못 받아요. 그래서 씨를 잊어버리고. 그런데 보리, 밀은 씨나 안 잊어버리려고 조금씩 심어요. 점점 힘에 부쳐서 하지를 못해요.

옛날에는 씨앗가게를 가도 태백이라는 토종무가 있었어요. 무씨도 옛날에는 우리가 다 받아서 심었지. 무를 가을에 추수해서 대가리를 잘라서 묻어두면 싹이 나잖아요. 그걸 봄에 다시 통째로 밭에다 심으면 무장다리가 나와요. 거기서 꼬투리가 맺으면 그걸 비벼서 심어먹어요. 그렇게 받아서 쓰다가 80년도부터는 그냥 사다가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봉지를 보니까 전부 이태리 어디서 오고, 내가 기막혀 죽겠네. 이제 씨앗까지 남의 나라 것을 쓰니 우리나라 토종은 다 없어지네. 그런데 그 무를 심어서 김치를 담아 먹어보니 맛이 없어요.


총각무도 씨를 받으셨나요?

-총각무는 내가 안 해봤는데, 아마 총각무도 무니까 그렇게 받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배추씨도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요.


배추는 어떻게 하나요?

-배추씨는 옛날에 내가 전라도에 많이 살았는데, 겨우살이를 놔두면 봄에 꽃이 피잖아요. 전라도는 따뜻해서 안 죽으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죠.


고추는 어떻게 농사지으셨나요?

-고추는 재래종 씨를 내 받아서 심다가 아마 80년대부터는 안 한 것 같아. 씨를 받아서 그냥 밭에다 뿌리면 한 달 만에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고추씨가 맵잖아. 땅에 들어가서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그렇게 직파해서 먹고 살았어요.


직파를 언제 하셨나요?

-고추씨는 한 3월말 경에 한 것 같아요. 얼음 녹고 싹이 나도 안 죽을 만하면 뿌렸어요.


직파할 때 수확량은 얼마나 됐나요?

-몇 백 평 심으면 그때 여기에 한 4~50명이 살았는데 그 식구가 다 먹고 살았죠. 지금하고 비교하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직파할 때 어떤 식으로 뿌리나요?

-밭에다 할 때 고랑치고 뿌렸죠. 뿌렸다가 배면 솎아야지. 그때는 간격이 지금처럼 드물게 안 하고 한 뼘 정도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작게 기르면 지주는 안 해도 괜찮아요. 어쩌다 쓰러지면 산에서 막가지 해다가 해줘요. 요즘은 일만 많아지고 공이 얼마나 많이 들어요.


고추에 병은 없었나요?

-네, 직파할 때는 병을 몰랐어요. 연작해도 병을 몰랐어요.


그럼 그때 배추도 병이 없었나요?

-배추가 하도 커서 한 포기 뽑아 저울에 달면 3Kg에요. 그때는 병도 없고, 벌레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벌레 때문에 못해요. 우리 배추가 지금 엉망이에요. 커피찌꺼기가 좋다고 해서 해보니 조금 효과는 있대요.


고추를 직파할 때 거름을 지금처럼 많이 줬나요?

-퇴비만 했죠. 옛날에는 돈이 없으니까 비료도 못 사고 순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거름을 만들었어요. 7~8월 되면 풀을 베어서, 식구가 많으니까 지게로 져다가, 작두로 두 치 정도로 썰어서, 인분 받아서, 재면 퇴비가 아주 시커멓게 잘 되죠. 일주일에 한 번, 많이 뒤집으면 일주일에 한 네 번씩 퇴비를 뒤집어요. 그러면 아주 거름이 몽글몽글해요. 어쩌다가 비료를 좀 구하면 약이라고 조금씩 줬는데, 지금은 유기농한다고 아무것도 안 써요.


산에서 어떤 풀을 해오나요?

-갈잎이나 풀은 무슨 풀이든지 다 베지. 저런 논둑, 밭도 다 베요. 요즘 같은 때는 잘잘하게 썰어야 완숙퇴비가 되죠. 그럼 몽글몽글해서 헛칠 정도예요. 인분이 적으면 물을 뿌리고, 몇 번 뒤집어서 새카맣게 썩으면 쟁여놨다가 가을추수하고 보리 갈 때 써요. 그렇게 해두면 내년 봄에 고추, 감자 심을 때도 전부 쓰죠.


퇴비는 그냥 노지에 만드셨나요?

-옛날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냥 노지에다 했지요.

그리고 논거름도 갈잎으로 했어요. 4월에 갈잎이 부드럽게 나오잖아요. 옛날에는 나무가 크지 않았어요. 그럼 봄에 못자리 해놓고는 갈잎을 갖다가 논에 깔아요. 그래가지고 쟁기질 한 번 해놨다가 심으려고 할 때 쟁기질해서 써레질 한 다음 심어요. 논 거름은 그것만 했는데 그게 무척 걸어서 그것만 해도 잘 돼요.


지금은 거름을 사다가 쓰시나요?

-지금도 만들어서 써요.

작년에 저기 만들어 놓았는데 마늘 심을 것까지는 있어요. 마늘 심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약 뿌리고 비료 주는데, 마늘은 비료주면 보관할 때 잘 썩어요. 우리 마늘은 내년까지 먹어도 안 썩어요. 우리는 마늘밭에 퇴비를 땅이 안 보이게 두둑하게 깔고 갈아서 마늘을 심는데 마늘이 단단해요.

마늘도 재래종이에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육쪽마늘이라고 쭉 심어요.


지금 농사짓는 것 중에서 채종하는 씨앗은 얼마나 되나요?

-이제는 별로 없어요. 보리, 밀은 씨앗 보존한다고 해서 문경에 좀 보냈어요.

밭벼도 오래 됐는데, 60년도에 농촌지도소 작물계장이 귀한 씨라고 심어보라고 요만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계속 심어서 내려왔어요. 이게 찰벼인데, 아무리 다른 데서 찰벼를 가져와도 그렇게 찰지지 않아요. 그걸 안 잃어버리려고 올해도 좀 심었어요.

그러고 들깨도 쭉 심고 조, 수수도 그런데, 기장만 내가 잃어버렸어요. 지난 98년에 수해가 나서 전부 떠내려갔어요. 창고가 여기 크게 있었는데 홀랑 가버렸어요.


콩 종류는 없나요?

-콩은 옛날에 옥광을 많이 심었는데, 그것도 지도소에서 갖다 줘서 심었어요. 옥광을 계속 심다가 어디 가고 지금은 어디서 들어오는 걸 심어요.

그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벌레도 잘 안 먹고 잘 됐어요. 옛날에는 콩을 25가마니를 했는데 콩이 얼마나 좋은지 벌레 먹은 것도 없어요. 요즘도 콩은 받아서 하는데 그게 재래종인지는 몰라요.


그럼 콩은 몇 종류나 되나요?

-지금은 힘들어서 다 없애고 메주콩만 해요. 그런데 벌레가 얼마나 먹는지 몰라. 작년에도 한 2가마니 나왔는데 겨우 서 말만 메주해서 장 담갔죠.

옛날에는 콩나물콩, 서리태 같은 것도 다 심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메주콩만 간장, 된장은 먹어야 하니까 해요.


쟁기질은 어떻게 하셨나요?

-소 기르기 전에는 손으로 하다가, 한 60년도부터 93년도까지는 소로 했어요. 저 위에 4천평, 아래도 4천평을 다 손으로 파다가 소를 기르고 나서는 남반들이 와서 쟁기질을 했어요.


지금은 그냥 기계로 하시나요?

-90년도부터는 남원에서 불러다 쟁기질을 하다가 식구들도 점점 줄고, 일도 힘이 없으니 못해서 자꾸 부르려니 번거로워서 끊고, 그냥 풀밭에서 야채만 길러서 심어먹자고 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말 농장을 하게 되면서 관리기 작은 걸 하나 샀어요.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다 갈아주죠.


소쟁기와 관리기를 비교하면 농사짓기가 어떤가요?

-쟁기질 할 때는 힘든데, 관리기로 하니까 일하기는 쉽죠. 그래도 쟁기질을 할 때가 더 좋기는 한 것 같아요. 관리기는 대신 곱게 되니까 심기는 수월해요.


탈곡은 다 손으로 하시나요?

-손으로 할 것은 손으로 하고, 밭벼는 탈곡기계가 있어요. 옛날에는 발로 돌렸는데 지금은  발로 하던 거에 모터를 달았어요.


여기서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올 해로 만 48년이네요. 여기서 처음에는 초대 원장님하고 기관 어머님하고, 산속에 셋이 들어가서 풀막을 지어놓고 살았어요.


동광원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왜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나요?

-수도정신을 가지려면 첫째, 자기가 자립정신을 가져야 해요. 자기 먹을 것, 입을 것을 남한테 미루지 말고 자기가 해야죠. 종교는 희생의 종교잖아요. 자기희생이 없이는 이렇게 살 수가 없어요. 또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라고 했는데, 일평생을 살아도 힘들어요.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고, 남을 섬기라고 했는데 인간이라 그러지를 못하고 살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현필 선생님이, 당신이 못 먹고 못 입어도 다른 사람은 먹게 하셨어요. 그런 선생님 밑에서 살았는데 사람이 못 되서 부끄럽죠. 그런 정신으로 이곳을 세웠어요. 가난하고 남만 사랑하고 남을 위해서 사셨어요.

농사는 자립정신을 세워주시려고 하신 거죠. 선생님은 항상 씨앗 하나라도 아끼고, 연장을 쓰고 아무데나 던지는 건 자기를 던지는 것하고 같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농사지으면서 다 던지고 다니는데 그런 것부터 정리를 해야 돼요. 그런 걸 내 몸같이 아끼는 정신이 작은 것부터 실천을 해야 해요. 작은 걸 실천하기가 더 어려워요. 그런 걸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산다는 것이 보통 정신이 아니에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칠십 다섯이요. 옛날 같으면 저 세상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실 것은 없나요?

-글쎄요. 사람이 전통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정신이 똑바로 서야 해요. 식물도 사랑으로 가꿔야지 그냥 하면 뭐가 됩니까. 못 지어도 꾸준하게 사랑으로 가꿔야지.

우리 선생님이 농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땅 한 평이라도 내가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해야지, 뭐든 내가 못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나아요.




안산 부곡동


‘전통농업에서 배우자’고 해서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옛날 농사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농사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먼저 채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채종을 하기는 했는데, 그랬다고 해서 집에서 다 종자를 받은 건 아니야. 더러 사서 하는 경우도 있고, 김장 같은 건 받는 사람만 받고 대부분 사서 해요.

무하고 배추는 씨를 받으려면 가을에 심은 것을 뿌리 채로 놔둬. 배추 같은 경우는 바싹 끊지 말고 잎만 따. 어느 정도 순이 남도록 해야 싹이 나니까. 그럼 위는 먹고 나머지 뿌리는 땅에 박힌 채로 놔뒀다가 보온을 해줘. 짚 같은 걸 덮어서 얼지 않게 해놨다가 봄에 날이 따뜻해지면 벗겨줘요. 그럼 제일 먼저 움이 나와.


짚 대신 요즘 쓰는 비닐을 덮어도 되나요?

-옛날에는 비닐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 비닐을 덮으면 더 빨리 싹이 나지. 그런데 싹이 날 때 짚을 너무 수북하게 덮어두면 싹이 부러질 수 있어. 그 싹을 장다리라고 해요. 거기서 꽃이 피어서 씨가 맺는 거야. 그것을 5월초 정도에 완전히 베어서 털면 씨가 나와.

이건 어느 배추든지 다 되는 거야. 조선배추도 되고, 호배추도 되는 거야. 결구되는 걸 옛날에는 호배추라고 했지. 조선배추는 통이 작아.


무는 어떻게 채종하나요?

-똑같은 방법으로 해요. 무는 자를 필요 없이 놔두면 되지. 그것도 짚을 푹 덮어주니까. 그런데 무가 추위에 약해서 더 까다롭지. 그런데 무는 봄에 일찍 심어도 여름에 씨가 생겨요. 배추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겨울을 안 넘기면 잘 안 크더라고. 무는 괜찮아요.


고추는 씨를 어떻게 받나요?

-고추는 그냥 심은 걸로 받는데, 보통 끝물은 씨로 사용하지 않고 처음에 맏물 좋은 것 중에 가장 잘 생긴 놈을 골라서 받고, 그게 없을 경우에는 중간물까지도 씨를 받아요. 끝물은 절대 안 써.


고추 심을 때 직파는 어떻게 하셨나요?

-지금은 온상에서 키우니 키가 크고 한 자 이상 벌려 심어서 바람에 잘 넘어가고 하는데, 지금처럼 비닐을 쓴다거나 하지도 않고 옛날에는 간격이 더 좁았어요. 대신 지주가 없어.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자랐지. 그냥 나무도 크지 않으니까 바람에 넘어가지도 않고. 수확량은 더 적었지.


수확량은 얼마나 적었나요?

-지금보다 한 6~70%정도 밖에 안 나는 것 같아.


그럼 심을 때는 줄뿌림을 했나요?

-뿌릴 때 고추를 심을 수 있는 간격 정도로 골을 타고, 골에다가 심는 경우보다 두둑에다 많이 심었는데 그거야 밭에 따라서 밭이 습하면 두둑에 심고 건하면 골에다 심는 거지. 골에다 심을 때는 골을 판판하게 고르고 재를 뿌린 다음 씨를 흩뿌려.


재는 왜 뿌렸나요?

-감자 심을 때도 재를 많이 쓰고, 고추에도 많이 쓰지. 그런데 그냥 재가 아니라 오줌하고 섞은 재야. 옛날에는 오줌독에다 인분하고 같이 썩혀서 재에다가 재면 거름이 기가 막히게 좋아요. 오줌이 있다고 해서 푹 젖지 않아요. 그렇게 질은 게 아니야. 수분은 증발하고 거름 성분만 남아. 그렇게 하면 아주 농사가 잘 되지.


병해충은 없었나요?

-벌레가 더러 먹는 건 있는데 지금마냥 이런 건 없었어. 그때는 농약도 없으니까 뿌리지도 않았는데도 고추는 괜찮았어. 더러 이상한 게 나오긴 하지만 지금처럼 버릴 정도는 아니야. 탄저병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희나리 진다는 것은 어떤 걸 말하나요?

희나리라는 것은 고추가 자라다가 벌레가 구멍을 뚫어놓으면 대부분 희나리가 되고, 그리고 보통 붉다가 말은 것, 병이 없더라도 제대로 여물어서 붉은 것이 아니라 약간 붉으려고 할 때 서리가 온다던지 하면 대를 뽑아놨다가 따는 걸 몰아서 희나리라고 그래. 그래도 귀하니까 그걸 모아서 빻아서 썼지. 그걸 찌개 하는데 넣어먹거나 아니면 뒀다가 봄에 들에 나는 나물 종류를 뜯어서 물김치 담글 때 넣으면, 그 고추가 맵긴 또 맵더라고 그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나요. 그래서 노인네들이 하나 안 버려요.


고추에 거름은 얼마나 했나요?

-그렇게 엄청 집어넣지 않더라고.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이 주는 것 같아. 소똥도 뭐 옛날은 풀 먹고 싼 똥이지만 지금은 사료를 먹어서 그런지 더 독해. 옛날에는 소똥거름이 그다지 거름이 되거나 독하지 않아요. 오히려 돼지거름이 좋았어요.


옛날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요?

-아니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거의 있던 것이 돼지야. 일부러 거름도 밟히고 설이나 명절 되면 잡아서 먹는 거야. 소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집은 돼지고기라도 먹었지. 그리고 먹는 것보다 기르면 목외돈 쓰는 맛에 키우지. 시골에 뭐 돈이 있어.


그럼 돼지 먹이는 무엇을 줬나요?

-먹이는 쌀뜨물을 받아서 겨를 한 움큼 같이 던져주면 그거 먹고 사는 거야. 그래도 살찌고 자라는 거 보면 우습지. 어렸을 때 ‘저 큰 돼지가 어떻게 저런 겨 한 움큼만 먹고 사나?’ 했지. 쌀겨도 있고, 밀기울도 주고, 또 호박․고구마 같은 건 속은 사람이 먹고 돼지는 그 껍질 같은 것, 참외껍질, 오이껍질 같은 걸 하나도 안 버리고 줘요.

돼지가 풀도 먹어요. 아주 풀만 먹는 건 아니지만 풀도 좋아해. 그리고 돼지한테 일부러 흙도 먹이고, 숯가루도 먹이고 또 해변에 가면 굴, 조개껍질을 주워서 빻아 먹이고 했어. 그래야 뼈가 튼튼해서 새끼도 잘 낳고, 새끼를 낳으면 돼지는 뼈가 잘 부러져요.

돼지가 둔해서 새끼를 잘 깔아 죽여서 처음에는 사람이 새끼를 관리해야 돼. 어미돼지는 좁은 공간에서 깔아 죽이는 것도 몰라. 그러니까 아주 어려서 한 일주일 동안은 젖먹일 때만 새끼를 들여보내 주는 거야. 어미가 젖을 먹이려면 드러눕는데, 그럴 때 새끼를 좁은 구멍으로 넣어줬다가 다 먹으면 다시 몰아내. 처음에는 그렇게 줬다 뺐었다 하는 거야. 그래서 새끼 소리가 밖에서 나면 성질 급한 돼지는 뛰어오르다가 다리가 잘 부러져. 그래서 굴껍질을 먹이는 거야.


돼지는 청소용이면서 거름용이네요.

-그래서 돼지는 일부러 거름도 밟고 목외돈 쓰고 그러는 맛에 키우는 거야. 돼지새끼가 옛날에 2~3천원 하면, 송아지는 보통 5만원 했지.


돼지로 거름 만드는 것은 어떻게 하나요?

-돼지한테 깃을 넣어주잖아. 그럼 거기서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밟는다고, 자꾸 그러니까 거름이 떠요. 그렇게 깃을 넣어 주다보면 자꾸 높아지잖아. 그러면 돼지를 몰아내놓고 싹 치운 다음 또 깔아주는 거야. 그럼 자연히 거름이 생기지. 또 깃이 없으면 풀을 베다 주기도 해. 그런데 긴 볏짚을 넣으면 호구로 뜰 때 볏짚이 삭지 않았으면 뜨기 힘들잖아. 그래서 썰어 넣어주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넣어주면 더 좋지.

그래서 집집마다 농사는 다 하니까 돼지를 키웠어. 소농, 중농, 대농이라면 대농인 사람들은 농사가 많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잘 사니까 소가 한 마리씩 다 있어요. 그런데 5마지기 정도 하는 사람들도 볏짚은 있으니까 돼지는 다 키웠어.

 

소 없는 사람들은 쟁기질을 빌려서 했나요?

-그렇지. 소 한 마리 얻어오면 일로 갚아주지. 그런데 소 한 마리가 일해주면 친한 사이에는 하루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둘이 가서 일해 줬어. 거저 해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소 쟁기질은 어떻게 하나요?

-쟁기질은 먼저 소에다 쟁기를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무나 못 걸지. 그걸 걸려면 먼저 목에 멍에를 걸고, 꽉 조이는 게 있어요. 그걸 매야 멍에가 안 빠져. 그리고 뒤로 줄이 있는데 그걸 매서 쟁기에 걸어.

쟁기가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었지. 지금은 쇠로 만든 쟁기가 나왔지만 똑같은 방법이지. 다만 다른 건, 나무로 깎아서 보습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끼워서 쓰는 거야. 그러다 날이 다 닳으면 새로 갈아 끼고.

그런데 쟁기질은 조정을 잘 해야 해. 쟁기를 눌러주면 얕게 갈리고, 들면 깊이 갈리는 거야. 그걸로 조정하는 거야. 돌 때는 소를 ‘워’ 하면 서, 그때 쟁기날을 살짝 얕게 갈다가 들면 빠진다고. 그럼 다시 소를 모는데 끈이 달려 있어. 그걸로 그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쟁기밥은 한쪽으로 넘어가지요?

-그렇지. 쟁기밥은 왼쪽으로 넘어가지. 흙밥을 떠서 넘어가도록 볏을 만들어 놨지. 그 자체가 흙을 감아서 넘어가게 만들어진 거야.


경사진 곳을 쟁기질 할 때는 쟁기밥이 낮은 쪽으로 넘어가게 한다고 하던데요?

-그건 상관없어요. 이런 경우는 있어. 논이고 밭이고 가운데를 째서(나눠서) 이쪽은 여기서부터 갈고, 저쪽은 반대편에서부터 가는 방법도 있어.

그리고 경사진 곳에서는 올라갈 때는 자연스럽게 잘 갈리는데, 내려올 때는 잘 안 갈려. 내려올 때는 쟁기를 꼽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올라갈 때는 그대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빙 돌아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 어쨌든 소 모는 사람은 밭을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다 알아서 해요.

길게 심는 보리 같은 경우는 한 번씩만 갈고, 밭을 다 가는 것은 싹 간다고 해. 두둑을 넓게 만들려면 서너 번 넘기면 될거야. 수수나 콩을 그루갈 때는 보통 양쪽에서 한번 씩만 넘기면 한 두둑은 나와.


소 모는 방법은 어떤가요?

-지역마다 다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설 때는 ‘워’, 방향 바꿀 때는 툭툭 치면서 ‘어뎌어뎌어뎌’, 소는 말하고 달리 끌어서 조정하지 않고 끈이 오른쪽에 있어서 보통 왼쪽으로만 돌아. 곧장 갈 때는 ‘이랴’.


소한테 쟁기질 훈련은 어떻게 시키나요?

-일은 보통 코뚜레를 뚫은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는데 끌개라고 있어요. 보통 썰매 모양으로 만들어. 잘 안 닳는 통나무를 썰매발처럼 놓고, 못 같은 걸로 단단하게 한 다음에 돌 같은 무거운 걸 올려놔. 그 다음 소에다가 멍에를 걸머지고 맨 다음 그걸 끌고 다니게 하지. 이건 힘만 기르는 게 아니라 말귀를 듣게 하는 거야.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려니까 이게 말을 잘 안 듣고 왜머리 친다 이거야. 그러니까 천방지축이지.

그렇게 일을 가르쳐서 말을 잘 듣는 놈은 쟁기를 한 번 매서 시범적으로 빈 밭에 들어가서 갈아본다고. 몇 번 해봐서 쓸 만하면 어설퍼도 자꾸 쓰다보면 일을 배우지. 그런데 수소보다 암소가 일을 더 잘해. 수소는 잘못하면 받아버려서 부려먹기가 힘들어. 사람도 눈이 작으면 독하다고 하듯이 눈이 작은 소가 독해. 눈이 큰 소는 안 받아. 그래서 수소는 잘 안 쓰고, 보통 새끼 낳더라도 암소를 쓰지.


소먹이는 무엇을 주나요?

-풀도 먹이고, 볏짚도 넣어주지. 그냥 먹이는 것을 생식이라고 하고, 불 때서 쑤어주는 걸 화식이라고 하지 아마. 쒀줄 때 쌀겨를 물바가지로 큰 소는 하나, 작은 소는 반 정도 넣어서 쇠물주걱으로 막 휘젓고 뒤집다보면 짚이 여물이 완전히 익은 게 나와. 그때 콩깍지를 넣어줘. 그걸 소가 잘 먹어. 또 그걸 먹어야 소가 살이 찐다는 거야. 그거 먹는 소는 아주 잘 먹는 소야. 또 벌레 먹은 콩 같은 것도 하나 안 버리고 같이 넣어줘. 콩대는 지가 먹을 때도 골라내지만 사람이 골라줘.


아이들한테 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풀을 먹이게 하는 건 왜 그런가요?

-농촌은 바쁘니까 매일 꼴지게만 매고 다닐 수 없잖아. 소를 풀밭에 메어두면 지가 알아서 뜯어먹어요. 줄이 있으면 빙 돌면서 거기 풀을 다 뜯어먹어. 그러면 다른데다 메어두면 또 뜯어먹어요. 하루에 그 정도만 먹이면 돼.

암소 같은 경우는 젖먹이가 옆에 앉아 놀아도 절대 밟지를 않아. 순한 소는 애들이 끌고 다녀도 말을 들어요. 그리고 혼자 집에 찾아오는 소들도 있어요. 소낙비가 가끔 올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못 참으면 알아서 줄을 끊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소로는 거름을 어떻게 만드나요?

-외양간에도 깃을 넣어주지. 소가 돼지보다 더 보송보송해야 돼. 그래서 소가 더 신사라고. 돼지는 깃이 모자라서 질척질척하게 키우는 집도 있어.


소나 돼지 말고 닭은 어떤 목적으로 키웠나요?

-닭은 보통 계란을 먹으려고 키웠지. 그리고 나중에 고기도 먹고. 지금은 닭을 기계로 부화시키는데 옛날에는 자연부화를 시켜서 닭이 더 건강하고 맛도 좋았어. 또 놓아서 먹이니까 풀도 먹고 돌도 먹어서 더 건강했지. 그렇게 키우니까 알도 껍질이 더 단단한데 지금 양계닭 계란은 툭하면 깨지잖아.


그럼 닭은 집마다 몇 마리나 키웠나요?

-아무리 없어도 대여섯 마리는 있었지. 그래서 옛날에는 배추 심으면 각자 울타리를 쳤어요. 집집마다 닭이 있으니 먹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잖아.

울타리는 산에 있는 싸리 말고 왜싸리라고 그걸 베다가 울타리를 쳤지. 옛날에는 뭐든지 귀해서 그물도 없어서 수수단으로 치는 경우도 있고, 닭장도 특별히 집을 지어주는 것보다 외양간 위에다가 횃대만 두 줄 내지 세 줄만 놔주는 거야. 그러면 거기서 닭이 잔다고. 둥우리도 그 위에다 놔두면 지가 올라가서 알 낳고 신호를 해주고 내려가. 알을 낳으면 꼬꼬댁 꼭꼭꼬 몇 번 외친다고. 알 낳았을 때는 암탉이 울고, 날이 밝을 때는 수탉이 울어.


알은 보통 얼마에 한 번씩 낳나요?

-닭이 7~8개월 정도 지나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잘 낳는 닭은 매일 낳다가 사흘 정도에 한 번씩 거르고, 보통은 이틀에 한 번은 낳아. 그런데 알은 이틀에 한 번 낳는 게 더 맛있지.


토끼도 키우셨다고 들었는데 토끼는 어떻게 키우나요?

-토끼는 습하면 잘 죽어요. 그래서 토끼장은 보통 1m이상 올라가야 좋지. 토끼를 풀어놓으면 돌아다니다가 마루 구멍에 들어가서 죽어요. 거기가 습하거든.

토끼는 씀바귀를 좋아하는데 그걸 먹이면 눈이 더 새빨개져요. 독초는 자기가 알아서 안 먹어요.


겨울에는 뭘 먹이나요?

-겨울에 지금은 사료가 있으니까 먹이지만 옛날에는 콩깍지, 엿밥 그런 걸 먹여요. 시래기가 많으면 그걸 주는 사람도 있고. 쇠죽 쑬 때 여물을 좀 주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경우는 산에 가면 자귀나무라고 있어요. 그걸 토끼가 좋아해서 나무도 갉아먹는데 그걸 잘라다가 넣어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옛날에 귀마개를 토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드나요?

-그걸 토끼 가죽으로 만드는 법이 있어요. 토끼 가죽을 벗겨서 그냥 말리면 단단해서 못 써요. 그 속에 기름이 굳어버려서 단단해져요.

그래서 가죽을 벗기면 그 안에 쌀겨를 하나 가득 채워서 묶어서 몇 개월 매달아둬요. 그러면 기름이 쏙 빠져. 그럼 가죽이 그대로 남으면서 부들부들해서 좋아요. 그럼 그걸로 귀마개도 만들고, 토시도 만들고, 목도리도 하고, 발에다 넣으면 따뜻하고 좋지.


옛날 농사방법 중에서 되살려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농약 안 쓰고, 비료 덜 쓰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 같이 농약을 안 써야 하는데 일부는 쓰고, 일부는 안 쓰고 하는 게 문제지요. 다 같이 농약을 안 쓰면 몇 년간은 피해를 보더라도 되살아나겠지요.

또 농약을 안 쓰고 농사짓는 방법을 자연에서 방법을 찾는 걸 사람이 연구해야 돼요. 내가 생각할 때는 나뭇잎 중에서 벌레가 안 먹는 것이 있어요. 그걸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벌레가 안 먹는 나뭇잎 중에 중풍에도 쓰는 약인데 두충나무가 있어요. 또 소태나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과수원 중간에 소태나무를 심어서 벌레가 덜 붙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이용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봐요.

또 밤나무는 보를 만들 때 쓰면 그곳을 거쳐 내려오는 물은 논에 좋다고 했어요. 벌레가 덜 생기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밤나무는 숯은 화롯불에는 담지 않았어요. 또 옛날에 못자리를 하면 이끼 같은 게 생겨서 벼 싹이 자라는 걸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옛날 어른들이 밤나무 회초리를 꽂았는데 그러면 그게 싹없어져요. 이런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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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한중리에 사시는 이철희(68) 선생님을 만났다. 개랑 소랑 어느 것이 더 영리하냐는 우문에 짐승은 모두 영리하다는 현답을 해주신 선생님은, 지난 16년 동안 자연 축산을 하시며 거기서 나오는 거름을 이용하여 4000평을 유기농으로 지어 오셨다. 지금은 집 한쪽에 축사를 마련하여 7마리의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고 계신다.


소는 언제부터 키우게 되셨나요?

내가 75년도인가, 저기 경기도에 가서 공사를 좀 하다가 왔어요. 그런데 동생이 황송아지(수송아지) 한 마리를 외상으로 사다 놓고 나갔더라구요. 그래서 그 황송아지 하나 빚을 갚아 주고, 1년을 먹이니까 큰 소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인공수정을 안했거든요.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전부 우리 집으로 암소를 몰고 씨를 받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렇게 한 번할 때마다 그때 돈으로 3천 원씩 받았어요. 그게 송아지 낳기보다 낫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2년 정도 했는데, 하루는 그 소가 나를 받아요. 그런데 소가 사람을 한 번 받으면 그 소는 못 먹이는 거예요. 이게 사람을 얕보기 시작해서 못 먹여요. 잘못하면 아주 사람을 죽여요.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면, 암소는 안 그런데 거세한 소도 안 그래요. 사람을 받아서 붕 뜨면 그대로 또 받고 또 받고 그래요. 사람이 쭉 뻗으면 막 짓이겨요. 그러니 안 죽을 수가 없지. 큰일나요.

그렇게 한 번 받쳤는데, 내가 떨어지면서 고삐를 단단히 잡고서 나무에 묶고 일을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며칠 있다가 바로 장에 갖다 팔았어요. 그걸로 송아지 2마리를 샀지요. 그걸 또 1년을 먹이니 중소가 됐어요. 그걸 또 갖다 팔아 가지고 3마리를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늘어나게 됐지요.


오늘 송아지를 사다 넣으셨는데, 아직 어린놈을 왜 묶어 두신 건가요?

짐승 중에 텃세가 가장 심한 것이 소예요. 큰 소를 새로 사다가 놓아먹이면, 아무리 큰 소라도 송아지 등살에 못 견뎌요. 전에 한번 큰 소를 데려다 풀어놓았는데 송아지들이 괴롭혀서 다 죽어 가는 걸 살린 적도 있어요.

그래서 축사에서 놓아먹일 때는 팔 때 한 번에 다 팔고 새로 싹 들여야 해요. 안 그러면 못 버텨요. 달구가 텃세가 심하다고 하는데, 달구 새끼보다 텃세가 심해요.


자연 축산하셨을 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내가 전에 자연 축산을 16년 동안 했어요. 118정보(354,000평) 되는 국유지에, 세 골창에 축사 하나를 지어 놓고 했어요. 그때는 아침마다 가서 놓아주면 저녁에 배가 빵빵해서 축사로 돌아와요. 그렇게 키우면 저녁에 축사에 몰아넣는 것이 힘들어요. 처음에는 한참을 찾아 돌아다니고 했어요. 그래서 논두렁에 풀을 깎아다가 날마다 제 시간에 주면서 훈련을 시켰더니 자기들이 그 시간만 되면 돌아와 있어요. 시간만 되면 한 마리가 먼저 내려가서 고함을 질러요. 그럼 다 내려와요. 전부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서 들어가요. 그럼 그걸 매 놓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공간이 좁으니까 지들끼리 받아요.

그런데 밤에 올라가면 소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아요. 그럼 달랑달랑 소리가 나게끔 방울을 달아 놔요. 대장 한 마리만 달아 놓으면 다른 건 달 필요가 없어요.

한번은 밤에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소들이 전체가 한데 모여 있어요. 꼬리는 다 뒤로 하고 머리는 바깥쪽으로 향하게 빙 둘러서서 서 있어요. 송아지를 옆에다 끼고서.


저녁에 소들을 끌고 내려오는 이유는 뭔가요?

퇴비 만들려고 그렇죠. 안 그러면 그냥 놔두죠. 똥을 여기저기 싸기는 하는데 축사에 와서 제일 많이 싸요.

방목해서 키우는 건요, 새끼가 하나도 틀림없어요. 암소 10마리에 황소 1마리만 있으면 돼요. 그러면 발정기에만 교미를 해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별놈이 다 나와요. 장애 있는 소 천지예요.


그게 무엇 때문인가요?

사료에 있고, 활동 못하는 데도 있어요. 첫째는 활동을 못하는 데 있지요. 요즘은 좁은 데다 여러 마리를 놓아기르니 활동도 못하고 사료만 먹잖아요. 지금 뭐 항생제다 골분이다 이런 걸 섞는다면서요.

예전에는 가마솥에다 볏짚 썰어 넣고 그냥 쌀뜨물 갖다 붓고 쇠죽을 쑤어서 줬어요. 거기에 있는 집에서는 등겨를 살살 조금 뿌려 주면 아주 잘 먹어요. 그리고 어디 갖다가 매어 놓고 풀 먹일 때는 줄을 길게 해주니까 얼마든지 활동했잖아요.


산에 풀어 키우면 울타리는 어떻게 하나요?

가시철사만 있으면 돼요. 평지에는 4줄을 쳐야 되고, 비탈에는 2줄만 쳐도 못 올라가요. 몇 십만 원이면 몇 골짜기를 할 수 있어요. 짐승 피해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자연 축산은 왜 그만두신 건가요?

그렇게 16년을 했는데 수질 오염된다고 민원이 들어와서 그만 두게 됐어요. 품질관리위원에 아는 분이 그러는데, 그런 식으로는 하나 오염이 안 된대요. 오히려 축사에서 기르는 것이 더 심하고, 외국서 수입하는 사료를 안 먹이니 애국이라고 하던데요.

그때는 그걸로 농사를 지었으니 진짜 유기농이었죠. 1년에 거름이 70경운기가 나왔어요.


그럼 자연 축산을 하실 때 겨울에는 무엇을 먹였나요?

겨울에 볏짚을 구하기 힘들 때는 산에 가랑잎이 많잖아요. 그걸 긁어다 먹였는데, 볏짚보다 그걸 더 잘 먹어요. 그렇게 먹이면 똥을 싸서 쌓아 두면 발효가 잘 돼서 겨울에도 김이 풀풀 나요. 볏짚 먹은 똥은 놔두면 다 얼어붙어도 그건 절대 안 얼어요. 그걸 한쪽에 쌓아 두면 겨울에는 뜨끈뜨끈해서 난방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축사에 돈이 들어가면 키울 수가 없지요. 그냥 산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가 막 박고서 위에는 슬레트 이고, 밑에는 공구리를 쳐요. 약간 경사를 지게 해서 똥오줌이 흐르게 만들어요. 그러면 슬레트하고 공구리만 돈이 들어가요. 그 뭐하러 돈 들여서 쇠파이프 사다 박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소를 기르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내가 소를 몇 번 죽였어요. 한번은 짚을 잘라 먹이다가 철사를 먹인 거예요. 철사를 먹은 건 걷게 해보면 알아요. 오르막길은 당연히 힘들어하는데 내리막길에서도 끙끙 힘들어하면 그건 철사를 먹은 거예요. 올라갈 때는 괜찮아도 내려올 때 끙끙 해요. 그건 그냥 잡아야 해요. 잘 먹지 못해서 두면 둘수록 마르기 때문에 손해예요.

또 한번은 발정난 암소를 교미시키려고 데려갔는데, 그걸 그냥 나무에 묶어 놓고 어디 다녀온 사이에 다른 암소들이 전부 다 올라타고 받고 해서 죽어 있더라구요. 발정나면 암소들끼리도 가만히 두질 않아요.

그리고 종우를 기를 때였는데, 발정난 암소가 씨를 받으러 왔어요. 그런데 그걸 잠시 묶어 놓고 갔더니 발정난 암소 때문에 날뛰다가 목에 줄이 감겨 죽었어요.


지금 키우시는 것처럼 가둬 놓고 키울 때 요령이나 조심할 일은 무언가요?

송아지를 낳으면 송아지가 설사를 해요. 그럼 주사 맞히고 그래야 돼요.

기본적인 것은 바닥을 할 때 약간 경사를 져야 해요. 너무 경사지면 소가 넘어져서 안 되고, 약간 경사가 져서 똥오줌이 빠지게끔 해야 돼요. 소는 밑바닥이 젖어 있으면 살이 덜 쪄요. 그리고 송아지 같은 것도 낳으면 바닥이 뽀송뽀송할 때 병이 적고, 질퍽질퍽하면 병이 더 나요. 그걸 유념해서 해야 돼요.

나는 밑바닥에 벽돌을 2줄로 쌓고 방수제를 발라서 소 오줌을 다 받아요. 그걸 큰 통에다 받아서 1년에 한 번씩 푸는 거니까, 1년 삭혔다가 거름으로 써요. 1년에 50드럼통씩 나와요.


그건 희석하지 않고 쓰나요?

그냥 갖다 뿌려요. 그냥 갖다 뿌리면, 시게(많이) 뿌리면 죽어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대단히 좋아요. 작물에 좀 안 닿게 뿌려야 되고, 벼에도 웃거름으로 많이 뿌리면 죽어요. 그건 농약 뿌리는 기계 있잖아요, 고압 분무기로 뿌려요. 희석 안 하고 그냥 뿌려요.

봄에도 뭐 고추 골 같은 데도 고추 심기 전에 뿌리고 말려서 비닐 덮고 그래요. 밑거름을 적게 뿌리고 오줌을 뿌리고 덮으면 더 좋죠. 여름에 모든 곡식이 거름이 적어서 덜 자라잖아요. 그럼 분무기 끝에 대궁을 달아서 뿌리 옆에 꾹 찔러서 주면 잘되죠.

유기농 하는 사람이라면 한 개 버릴 사람이 없어요. 축분도 뚜껑을 해서 비가 안 맞아야 좋아요.


축분에 왕겨나 볏짚은 얼마나 섞어야 하나요?

많이 섞을수록 좋아요. 그거보다 더 좋은 것은, 겨울에 가랑잎 가져다가 소 밟히면 최고 좋아요.

저는 겸업농을 하는 것을 추천해요. 저는 항시 권장하는 것이 유기 축산을 하면서 유기농을 해야 자연농이 된다는 것, 산이 얼마나 있든지 소를 놔서 기르면서 농사를 지으면 자연농이 되는 것이죠. 또 돈이 안 들어가고도 돈이 나온다는 것, 저는 빚은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빚지고는 안 해봤어요.


골짜기에 다랑논이 모두 2천 평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서 나오는 짚으로 소를 다 키울 수 있나요?

그거 가지고 안 돼요. 1마리에 사료 주고 그래도 논이 600~700평 있어야 돼요. 짚으로만 먹이면 1마리에 2천 평 있어야 돼요.


소 쟁기질도 아직 하시나요?

지금은 부리는 소가 없어요. 다 늙어서 팔았어요. 이제 길들여야 하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못하고 있죠.

경운기가 있는데 그걸로 일하기가 소보다 힘들어요. 망(두둑) 짓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얼마나 힘든지. 논은 평평해서 경운기가 힘도 좋고 해서 더 좋은데, 여기 밭은 비탈이 져서 경운기로 아주 힘들어요. 그래서 밭은 오히려 소가 2배나 더 일해요. 경운기로 500평하면 소로는 1000평 할 수 있어요. 소를 길들이기만 하면 아주 좋아요. 골타는 것도 마찬가지고.

소로 쟁기질하면 삭갈이해도 하루에 1000평은 할 수 있어요.


소는 어떻게 길들이나요?

송아지 때부터 코뚜레를 꿴 다음에, 한명이 앞에서 끌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쟁기를 잡고 훈련하면 돼요. 처음 쟁기를 메우면 이리저리 막 지멋대로 가요. 그래서 코뚜레를 앞에서 당겨서 따라가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훈련하다가 어느 정도 길이 들면 이번에는 옆에서 끌고 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놔주면 돼요. 길들이는 기간은 구분이 없어요. 많이 갈면 금방 배우고, 적게 하면 오래 걸리고. 그래서 장정이 해야 돼요. 누가 끌어만 주면 지금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통나무를 메우고 동네를 빙빙 돌아다니기도 해요.

그래도 경운기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기계는 사는 날부터 돈을 들여야 돼요. 소는 새끼 낳고 일시키고 거름 나오고 일거양득이에요. 과학은 편한 것뿐이지 하나도 나은 게 없어요.


그렇게 길들인 소는 몇 년 동안 일을 시킬 수 있나요?

일을 시키는 소는 내가 송아지를 24마리나 낳아 봤어요. 1년에 한 마리씩. 새끼를 배도 일을 시켰는데 그래도 송아지가 틀림없어요. 오히려 일을 안 시키면 송아지가 병 걸리고 불구되고 그래요.


좋은 소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일단 배가 통통해야 돼요. 너무 홀쭉하면 안 좋아요. 그리고 너무 키가 크면 안 좋아요. 키가 큰 놈은 배가 통통해도 자라면 말라요. 엉덩이는 투실한 것이 좋아요. 또 턱이 각이 지고 튼튼해야 먹이를 잘 먹어요.

소장에는 많이 가 봐야 돼요. 옛말에 소장사는 아버지도 믿지 말라고 했어요. 부자 사이라도 서로 속이는 것이 소장사예요. 소장이 가까우면 차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꾸 다녀 봐야 해요. 차비 만원 이만 원은 아까운 게 아니에요. 소 잘못 사고팔면 몇 십만 원 손해 보는 일은 우스워요. 소는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봐서 알려주는 건 가격이 아니에요. 그냥 옆에서 얼마에 팔리는지 지켜보는 게 그게 시세예요. 그런 걸 알려면 자꾸 다녀보는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우리도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해요. 귀농하신 분들은 솔직히 농사일은 못 배우잖아요. 솔직히 그분들이 일한다고 달라붙으면 우리도 좀 힘이 나요. 아주 정말 귀농하는 분들이 아무도 없다면 아주 맥 풀리는 일이예요. 그리고 앞으로 누가 이 땅을 살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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