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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용(1915년생), 평생을 강원도, 경기도로 화전을 부치다가 취재할 때는 강원도 진동리에서 살고 계심.

- 뿌리 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중에서 뽑은 내용입니다.




월별 농사일


정월달에는 짚을 꽈서.꽈 가지구서 인제 짚을 엮어서 삼태미(삼태기) 맨드는 거지. 그런거 맹길어. 봄이 농사 질 때는 재두 파다가 인제 거름 허구, 지즈분한 것두 담아서 내버리기두 하구 그렇지 뭐. 정월달에는 눈이 허옇니까 거름은 안 하구 인제 정월 지내서 이월달서부텀 밭에다 거름두 매구 그래야 소루다 갈구 뭘 심구구 그러잖아?

그해 가물구 비가 많이 온 건 정월 달불음(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콩 열두알로 열두달을 표시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지푸라기에 매달아 우물에 넣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꺼내어 어떤 콩이 물에 불었느냐에 따라 그 달의 가뭄과 장마 여부를 점치는 일)으루 대개 알겠데. 싸리깽이 수수당 있잖아? 수수당을 반으로 쪽 쪼개서 콩을 갖다가 -일테문 정월달서부텀 열두달을 지내니까 열두개지?- 그걸 맞대가서 실로 챙챙 감아서 물이다가 넣다가 아침에 나가서 건져서 풀어보무는 우떤 달은 바짝 마른 채 있구 우떤 달은 뿔었어. 그렇든데? 그러문 그 달에 가서는 비가 온다 이 뜻이라. 달불음이라 그래.

화전에는 똥오줌 그런 거름을 헐 수가 없었고. 거름이라야 그저 재. 그저 씨만 갖다가 넣으면 돼. 좁씨나 콩씨나 팥씨. 이런거. 거름이라는 건 없지. 오래뜰(대문 앞에 있는 뜰)이나 똥오줌을 씨는 거지.

이월달이면 감자밭에 비루(비료) 놓는 거지. 화장실에다가 재를 받아 가지구 그런 거 거름 허는 거야. 한번 그 재를 놓구 감자 심구문 그만이야. 소루다 갈구 뭘 심굴 적에 화장실에서 재를 파다가 놓구 소 매는 사람들은 풀 비다가 소를 멕이니까 소가 지지 밟구 헌 거 쳐내서 쌓눈 거 많잖아? 그런 거 내다가 놓으문서 심구 그르지 뭐. 그때는 뿌리는 거 없어. 화장실엔 불 땐 재를 모니까. 한꺼번에 똥허구 재와서 뫄놔야 곡석 심구는 데 비루를 해. 소루 갈구 고랑에다 뭘 심굴 적에 그러는 거야.

삼월쯤 되면 농사들 허는 거, 자꾸 일을 해야지. 논 있는 사램은 논두 가래질두 허구 무(모) 붓구 그르지 뭐. 무 붜야. 그게 커야 옮겨 심거덩. 논을 가래질을 해야 되거덩. 논을 갈구 가래질을 허구 벱씨를 담�다가 벱씨를 뿌래 놔야 돼.

사월달에는 그거 뽑아 가지구 심어야 돼. 논 부치는 사램들은 그렇게 논일 하지만 우리는 밭에다 콩두 심으구 옥수구(옥수수)두 심으구 조도 심으구 그래.

여름에는 메물(메밀), 메물 화전 허구 그러구 없지. 그러구 칠월달에 인제 갉 짐장(가을 김장) 있지. 배차(배추), 무, 그걸 인제 숨궜다가 저욹(겨울)에 그걸 먹구. 저욹에는 또 쇠 믹일거. 우리가 소를 키웠거든. 소를 키우문 쇠 믹일 거 해야 되잖어. 풀이든지 나락이든지 아무 그든지.


옥시기는 찰옥시기 있구. 메옥시기 있구. 돼지 옥시기라구 시커먼 옥시기두 있어. 차지니까 찰옥시기. 한 구녕에다가 두알이나 많아야 시알씩 넣어. 옥시기를 심으문 사이사이마둥 콩을 심구든지 뭘 심구든지 해. 한달쯤 지나문 딱 두 대씩만 놔놓구 아이벌 매문서 솎아내. 소 있는 사램은 보름쯤 있다가 호리(호치, 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루 갈아. 유월에는 옥시기 꽃이 나와. 그걸 또 옥시기 개꼬리 나온다 그러기도 해. 그때는 두벌 매기 하문서 옥시기 북을 줘. 시월에 다 한꺼번에 거둬. 제일 먼저 걷는게 없구. 곡석도 우추(빨리) 나서 우추 자라서 얼렁 되는 게 있어. 되지 않는 게 예중(나중) 돼. 메옥시기는 꺼매. 찰옥시기두 다 먹어. 찰옥시기는 말갛지 뭐. 삶아 놓문 하얀 게 돼지옥시기는 꺼멓구. 옥시기 알 껍디기 빛깔이 꺼멓다구 돼지옥시기야.

콩은 굵은콩, 강낭콩, 질겅콩, 활콩, 앉은콩, 피마자콩두 있어. 피마자콩은 피마자처럼 아롱아롱허데. 땅콩은 땅에서 피잖아. 그건 꽃이 피문 그 꽃을 자꾸 묻어줘야 땅속에서 커. 고투레가 손꾸락 두 마디만한 게 땅 속에 있어. 하얗다구 보까. 질겅콩은 꽃이 자주빛이던데. 피마자콩, 그것두 꽃이 벌겋게 피는 게 있구, 하얗게 피는 거 있구 그래. 강낭콩은 넙적넙적허잖아. 굵은콩은 동글동글헌 게 손꾸락 두 매디만하게 굵지. 맛이야 다 좋아. 땅콩은 좀 딱딱허지. 질 부드러운 콩은 강낭콩. 다 봄에 심어. 옥시기 옆에다 심을 때는 굵은콩 심어. 또 팥도 심어. 터는 건, 그것도 갉에 터는 건 도리깨라구 있잖아. 길다만(기다란) 걸루 허구.

거 다 곡석 심구는 것두 손앞손앞(손을 많이 들이는 일)이야. 옛날에는 괭이 같은 걸 � 쬐구선 좁씨를 심었잖아. 옛날 괘이를 가지구 고랑을 파. 좁씨만 뿌리기두 허구 땅이 마한(나쁜) 데는 재에다가 좁씨를 섞어 가지구 삼태미에다가 놓구 쫙 뿌려. 발루다가 이렁이렁 다 묻어줘. 한달쯤 있다가 아이밭 매구 보름쯤 후에 짐 매주구 팔월쯤에 거둬. 오월달엔 그거 나오니까 그거 짐을 매야지. 하짓감자는 오월달에 캐. 늦감자는 음력 팔월달이나 돼야 캐구. 오월달에 보리두 비구. 밀은 인제 보리 한 담에 비구.

유월에는 짐매기 또 허구. 중복쯤 되문 무 심그구 배추 심그구. 콩 심은 데 말구 다른 데다 심는 거구. 메물은 중복에 가서 심어. 팔월쯤에 가을걸이 해. 메물이란 건 늦게 심궈두 먼저 돼. 심궈 놓구 한 보름 있으문 꽃이 펴.

칠월 퇴비 장만하지. 퇴비는 풀을 베다가 퇴비장에다가, 퇴비장이라구 소똥 넓게 해놓구 쳐 내는 데에 풀을 비다가 자꾸 쌓 놓문 썩거덩. 밑으루 썩구 그래. 그럼 봄에 훌떡 벳기문 속으루 아주 썩었어. 그걸 밭에 내 가. 소루 갈문 인제 밭에 내다가 고랑에다가, 소루 가니까 우묵할 거 아냐. 거름을 늘에(늘려서 뿌려) 그 썩은 걸. 풀을 갖다 놓문 그냥 썩어. 착착 갖다 놓문 그냥 썩어. 공동으루 하는 게 아니야. 내 땅 있는 사램들 있잖아. 그런 사램들은 풀 비서 퇴비장에 쌓아 놔. 우린 땅이 없으니까 그런 것두 못 해봤지 뭐. 있는 사램들은 호미 씻기 라구 그런 것두 있어. 호미 씻기는 올 농사에 짐 매는 것은 다 했다 그 뜻이라. 그래서 술들 먹구 그랬어.

팔월 되문 걷어야지. 옥수수두 걷구. 소 매는 사램들은 풀 비어서 묶어서 착착 가레(가려) 놓문 파랗게 말르지. 그럼 저� 되두 작두루다 착착 썰어서 소 멕이구.

구월달이문 떨구 말리구 그거지 뭐. 그땐 찧진 못해. 밭곡 허는 사램들은 좀 늦거덩.

밀허구 보리는 심궈봤어. 언제 심구느냐 허문 갉에 심어. 그래서 내년 오월달에 비어. 인제 떨어서 해먹구. 보리는 떨며는 방애 가서 찧어야 해. 애벌을 찧어서 그걸 이림이(이름이) 옆친다(겉곡을 대강 찧는다) 그러는 거야. 그리게 해가지구 그담엔 먹구. 밀은 떨잖아. 돌이 있으니까 물에다 죄 씻어 일어서 햇빛에다 말려. 옛날에는 맷돌이야. 멧돌에다 갈아서, 있는 사람들은 잘 해먹을려면 고운 체로 흔들면 하얀 가루만 빠지거덩, 못 사는 집이는 그냥그냥 갈아서 해먹구 그랬지.

시월달에두 일이 많지. 시월달에는 방앨 찧야 되거덩. 그걸 말려 가지구 찧야 먹지. 무, 배추는 구월 그믐께면 뽑아서 옛날엔 짠지랑 해놓구 그래야지.

십일월엔 남자들은 땔나무 허구 여자들은 삼 삼구 물레질 허구 그거지 뭐.



가축 기르는 방법


옛날에 소 좀 길러 봤지. 두 마리두 길러 보고, 한 마리두 길러 보구. 산엽에 살지만 이렇게 평진헌 데서 사니까. 그래 인제 소를 매문 풀 비다가 멕이구 여름에는. 황소두 되구, 암소두 되구. 밭 가는 거는 다. 그땐 소가 시방부다 쌌지. 소아지 같은 거야 한 마리 천원이야.

“마라” 하문 어떻게 돼? 이쭉(오른쪽)으루 돌아서는 때야. “마라” 이러문 돌아서거덩. 돌아서서 또 인제 돌아오게 되거덩 소가. 고랑을 타서 “어어취”, “아 저 방딩이 지나가라” 이러문 나무 방딩이를 지나가는데, 방딩이는 나무 � 그루터기야. “어어취” 하문 그 나무 방딩이 돌아가. 그 경도가 뭣이냐문 괴삐를 잡아 채문 그 소가 돌아서게 되는 거구. 소를 내 몰 적에 안 소(왼쪽편 소)하고 바깥 소가 있어. “시방 짚이 게서라” 그러문 또 요렇게 돌아가지구 나가거든.

소 두 마리루 짚게 갈지. 겨리라 그래. 겨릿소라 그래. 한 마리는 호리. 아무래두 겨리가 낫지. 겨리가 짚게 갈리지. 바깥 소는 “마라”, 안 소는 “어어취” 그러문 돌아선다. 안 소는 그냥 따라가는 거지. 같이 따라 돌아서. 흙 파는 쟁기는 하나니까 그냥 같이 끌구만 나가문 되는 거야. 소가 얼매나 말을 잘 듣는다구. 제 구녕 찾아서 착착 들구(들어가고) 나가는데.

여름에는 소한테 풀 비어 먹이지 뭐. 저욹에는 콩 떨구 팥 떨구 이리잖아. 그럼 그 껍디기 그거 뫘다가 가마에다 끓여서 주지. 외양간 고치구 그럴 때는 손 없는 날 해야 소가 탈이 없어. 소가 새끼 낳문 금줄두 치구 이웃사램두 오면 안 되는 거야. 소나 개나 새끼를 낳무는 뭘 내가질 않아. 뉘기 뭘 주질 않아.

돼지두 질러 봤어. 돼지는 썩은 걸 잘 먹으니까. 뜨물두 육장(늘) 인제 받아서 놨다가 때 되문 데워서 주구. 비지, 왜 갉에 등게(등겨), 그런 것두 주구. 그거 하루 세 번을 줘야 되지만 두 번 줘두 좋구.

소 밥 주는 건 소 �이야. 낭구루 파 가지구. 지다막허게(길다랗게) 파가지구. 소죽 쑤어서 놓문 아무 거나 먹지. 아들메기, 갈꼴, 뽕나무순 이런 거 많이 먹지. 소 드래죽이라구 또 있어. 드래죽은 소가 너무 배래구(비루 먹고) 그러문 콩을 물에 담가 가지구 맷둘에 갈아 가지구 거기다가 쌀두 좀 �구 그래 갖구 가마에 넣구 끓여. 그걸 드래죽이라 그래. 소가 안 먹으문 낟알을 좀 넣서 먹도록 하지. 소가 체하문 것두 침 맞아야 해. 콧잔배기다 놓데. 한 사램이 사램 침두 놓구 소 침두 놓구 그래. 소가 잘 먹지 않구 그러문 소는 귀때길 만져 보문 알데. 귀가 차문 벵이 난 거래. 소 덕시기(덕석)라는 게 있는데 소 등어리 �이리만치 짚으로 엮어서 저욹에는 입헤 놓문 소가 훈훈허대는 거야. 발 지광 먹었다는 건 발이 짓물르문 그러는 거야. 털이 빠지문 들지름 발라줘. 봄에 들피 먹으문(굶주려 쇠약해지면) 침 놓구 그러구.

소가 막 새끼 낳고는 태를 다 낳잖아. 그럼 짚신으루 매 놨다가 다 멕여야 돼. 그래야 담에 또 놔. 안 먹을라 그러문 소금을 쳐서 주구 그러잖아. 소는 사램과 똑같애. 열달 돼야 놔. 새끼 못 낳는 소는 둘소라 그래. 코뚜레는 일 년 지나구 이 년이 돼야 코 꿰. 코뚤레 나무는 노가지나무나 느릅나무를 휘어서 놨다가 뚫어. 그것두 헐 줄 몰르는 사램은 피가 나는데 입씩헌 데(얇은 데) 허는 사램은 피가 안 나.

병작소란 게 있는데. 그건, 남의 소를 갖다가 매. 그랬다가 인제 열달을 멕이든가 그랬다가 새끼를 낳문 새끼를 기른 사람에게 주구. 새끼를 멕이는 사램이 매구. 큰소는 인제 소 쥔네를 주는 수두 있구. 일테문 맞매끼(맞바꿈)야. 삯소두 있어. 우리가 남의 소를 부리잖아. 갉에 낟알을 줘. 우리가 부렸으니까. 종무소는 우리가 암소를 맸잖아. 근데 새낄 가질려고 암내 내서 소릴 지르잖아. 그럼 종무소한테 가서 씨를 받는거야. 화소는 씨 받는 소구.

돼지가 새끼 날 때 되문 끙끙 거려. 가마니나 삼태미루 문을 가려. 누가 보까봐. 가만 둬야 돼. 사람이 들어가 객에지(방해하지) 말고 가만 둬.



장 담그기


장은 메주를 빻잖아. 메주를 빻가지고 물에 풍게(반죽해서) 가지고 인제 거기다가 소금 넣고 고춧가루 넣고 그렇게 해서 담궈서 먹고. 고춧가루 넣고 버무래. 그래서 인제 단지다가 담아 놔. 그렇게 허구 먹는 거야. 메주는 인제 콩농사를 했잖아. 콩을 심궈서 인제 코투래가 열잖아. 콩꽃이 피어 가지고 열잖아. 그러면 갉이면, 칠팔월 되면 그게 다 영글었지. 그걸 꺽어서 말려 가지고 인제 도리깨로 두들겨 떨어. 떨면 콩이 나오지. 그려면 치(키)를 가지고 까불러 가지고 인제 가매나 솥이나 이런 데다가 말짱 씻어서 돌이 있을까봐 일어 가지고 씻고 물 붓고서 끓여요. 끓여 가지고 그게 다 물렀잖아. 물르면 그걸 퍼가지고 물 없이, 물을 쪽 찌워(짜) 가지고 그 콩을 퍼가지구. 인제 절구라고 있어. 나무로 판 절구가 있어. 거기다 찧어. 찧어서 무슨 양재기도 좋고, 갖다 꼭꼭 담아서 눌러서 인제 보재기를 덮어.

그담에 빼면 똥그렇게 이쁘게 떡덩어리가 되잖아. 그렇게 해가지고 짚으로다가 떨어질까봐 엮어서 매달아요. 실겅(시렁)이라고 허는 데다가. 그래서 그런 데다가 매달잖아. 저욹이니까 방에다가 자꾸 불을 때구 그러면 이게 떠요. 그게 이를테면 어떻게 생각허자면 시방 음석 쉬는 거 모양으로 속으로 까맣게 떠. 썩는 거지 그게. 그래 가지고 봄에, 정월 이월달에는 그걸 인제 말짱 떼어 그걸 깨뜨린다. 망치로 뚜드리면 깨지지. 그러면 속은 새까맣게 떴을거 아냐. 그러면 인제 요 숟갈로다 새까맣게 뜬 걸 따로 발려서 담아요. 단지다가. 그래서 그걸 따로 말리고 겉껍데기도 다 씻어서 말려. 말려서 인제 새까맣게 뜬 거로 또 장물(간장 담그려고 소금을 탄 물)을 담가.

장물은 두자 가웃 되는 독에다가 물을 질어다가 붓고 소금을 넣고 그리고 그거를, 시방은 그런 보재기가 많지마는 옛날에는 그런 나이론 보재기도 없었거든. 인제 바짝 말려 가지고 물에다가 집어 넣어 담가. 메주 새까만 거를 바짝 말려 가지고. 이게 인제 해가 나고 물이 뜨뜻허구 그러니까 물이 우러날 거 아니나. 물이 새까맣게 우러나서 까맣게 된다. 까맣게 되면 그걸 인제 밭은다(체로 거른다). 체에다가 밭어 가지고 솥에다가 폭폭 대려. 그 물을 대려서 인제 독에다가 식혀서 독에다가 붓구 그 다음에 인제 그걸 떠다가 간장 양념도 해서 먹고 그래.

인제 겉껍데기 메주 있잖아. 그거는 인제 바짝 말려서 빻아. 빻서 인게 그걸 얼게미(어레미, 구멍이 굵은 체)로 흔들어서 갖다가 물을 풍겨(물을 뿌려). 풍겨 놨다가 거기다가 소금 넣고 고춧가루도 넣고 막 버무려 가지고 그 다음엔 단지에다가 부어. 부었다가 간이 들고 허문 그때는 떠다가 먹고 그렇게 세월 지낸 거야. 그게 고추장이야. 옛날엔 장물에서 뚱그런 건 된장이라고 허는 거야. 된장, 장물 두 가지 해서 그렇게 먹고 살아 나온 거지.

두부는 물에 불린 콩을 맷돌에다 갈아 가지고 담갔다가 인제 걸러 가지고 또 끓여 가지고 간수를 들여서 만들어. 두부를 허면 보에다 싸야지. 간수는 가게에 있잖아. 가게에서 산 간수는 마해. 집에서 간수 받는 게 좋아. 갉이면 소금을 받아다 먹잖아. 짐장 허구 봄에 장도 담그고 이럴라고 소금을 사오면 그 가마닐 지게에다 달아매 놓고는 그릇을 갖다 놓으면 거기 간수가 내려요. 그게 두부 허면 좋대는 거야. 하얗지. 그래 두부를 해서 칼루다 썰어서 자배기다 담가 놓고 저욹이면 담가 놓고 인제 반찬 해먹고, 겨욹이는 촌에서 여너 반찬 없어. 그저 무, 배추 심겄다가 그거 김치해 담그고. 가끔 두부는 해서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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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하나 있으면 좋다고 생각만 했지 만들 생각은 못했는데,
이미 만들어서 쓰는 분들도 계시군요.
역시 생각만 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위 사진은 평창 진부면에 사는 박홍래(53)라는 분이 만든 1인용 인력 쟁기입니다.
소 대신 바퀴를 달았습니다.
깊이갈이는 못해도 후치질은 충분할 것 같네요.
고랑에 풀을 잡고 북을 주는 데 아주 좋겠습니다.
농부 한 사람이 하루 8시간 일하면 200평을 김맨다고 하는데,
이걸 쓰면 그 10배인 2000평까지 김을 맬 수 있다고 합니다.
평창에서는 이걸 20여 친환경농가에 먼저 보급하고 다음해부터 더 늘릴 예정이라네요.

아래 사진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입니다.
입은 옷이나 나이로 봐서 귀농자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 분도 자전거 바퀴와 용접으로 인력 쟁기를 만들어서 쓰네요.
위의 분이 자기가 발명했다고 하는데 밑에 분도 만들어서 쓰니,
특허권 신청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만들어 쓸 수 있겠습니다.
지적재산권 싫어, 목축업 싫어!
지식 공유 괜찮아, 유목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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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0)-권유옥 선생(김포)


임금에게 진상하던 자광미, 맛은 최고예요







 

너른 김포 들판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하성면 석탄리에 사시는 권유옥(67)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나 지금까지 사는 ‘토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도 삼형제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며 모두 5만7천 평의 논을 경작하고 계신답니다. 그 가운데 본인은 1만2천 평 농사를 짓는데, 자광미는 500평 정도만 심으셨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평을 지었는데, 올해는 판로 문제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500평만 짓는다고 하십니다. 동네에서도 혼자만 자광미 농사를 짓는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논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한쪽에 몰아서 환지를 받아 1만평 정도는 한곳에 있고, 자광미는 따로 500평 되는 논에다 심었다고 하십니다. 이 논에 4월 26일에 모내기를 했는데, 그보다 일찍 모를 낸 논은 서리를 맞아 싹 죽어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 선생님 논의 모는 벌써 위로 쭉쭉 자라서 다른 논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광미(紫光米)는 말 그대로 자줏빛 쌀입니다. 쌀이 허옇거나 누렇지 어떻게 자줏빛이냐고 생각하신다면, 이 쌀을 한 번 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이 벼는 250~300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벼슬아치가 자줏빛 밥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돌아올 때 가져온 씨를 김포에 심어 임금님께 진상한 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유래라고 합니다.


- 선생님께 자광미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광미에 대한 이야기 좀 부탁드립니다.

= 자광미는 옛날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입니다. 그만큼 밥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배하기 아주 까다로워서, 그전에는 양반 집안에서나 자기들 먹으려고 재배했습니다. 재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쓰러지기 쉬워서 많이 심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먹고 자라면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그러니 태풍만 왔다하면 죄 쓰러져 버리지요. 이걸 쓰러지지 말라고 규산액을 때려 부어야 그나마 괜찮습니다. 비료는 아예 줄 생각도 못하지요. 비료만 줬다하면 엄청나게 자라서 쓰러질까 봐 그렇습니다.

거름으로는 영양제만 줍니다. 밑거름을 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지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지 뿌리에서 자기가 먹을 영양은 다 나옵니다.


-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수확량은 좀 많은가요?

= 수확은 잘나면 양석(兩石) 납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200평에 2가마 정도 나요. 알이 좀 갸름한 모양인데, 다른 벼에 비해서 잘고 달리는 양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이걸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잖아요. 그럼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핑 돕니다. 백미로 깎으면 아주 맛이 좋은데, 그럼 색이 없어져서 소비자가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7분도 정도로 깎습니다. 백미로 깎는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어쩝니까. 집에서 먹을 때는 아예 백미로 깎아 버립니다.

요즘 시중에 빨간 쌀이 나오는데 그건 수원에서 연구원들이 육종한 홍미가 대부분입니다. 색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걸로 내가 밥을 해 먹어보니 맛은 아주 떨어져요. 그건 대도 짧아서 도복이 안 됩니다. 수확도 아주 많이 나는데 맛이 없어요. 이제 FTA하는데 수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맛으로 이겨야 해요.


- 그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수확도 적은 것을 왜 심으시나요?

= 첫째는 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심던 것이라 그렇지요. 저 김포 들미라고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은 밀다리라고 하는 들미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가 처음으로 그 옆에다 심었다고 해요. 이걸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진상했습니다. 유신 때도 경기도 지사가 선물하려고 해마다 꼭 대여섯 가마씩 가져가곤 했습니다.

키우기도 힘들고 까다롭고, 또 판로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딱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 언제는 이걸 그만 두려고 했는데 김포 농정과에서 이게 김포 명물인데 어떻게 없애냐고 하면서 보조금을 조금 줍니다.


-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 예전에는 16㎏들이 가마니를 한 장에 2만원 주고 사다 썼습니다. 그걸 일 년에 60장 정도 쓰거든요. 그것만 해도 120만원이라 이제는 아예 가마니틀을 만들어서 겨울에 집에서 짭니다. 이렇게 직접 안하면 다 농협 가서 대출받아 빚지고 살아야 해요.

그럼 거기에 쌀을 담아서 도에 한 20~30가마, 여의도에 20가마, 강남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 가끔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양재동으로 나갑니다.


-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보존 차원에서 씨앗을 몇 알씩 얻어다가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자광미도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

= 예전에 아랫녘에서 농진청 통해서 소개받고 와서 하도 졸라서 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김포 농정과에서 경을 쳤습니다. 우리 김포 명물을 타지로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은 고향에서 아예 상표로 만들려고 유출을 못하게 합니다. 쌀로는 어디든지 나가지만.


- 모는 언제 내고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 여기는 4월 26일에 모를 냈어요. 이게 모일 때부터 정신없이 올라와서 다른 것보다 키가 커요. 요즘 상토가 나오잖아요. 거기 거름이 들어 있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건 거름을 주지 않아도 워낙 키가 큰데, 파는 상토에다 넣으니 다른 벼는 작아도 이건 정신없이 자라요. 너무 길어서 기계로 심기 힘들어 가위로 자른 다음 심은 겁니다.

이 동네에 늦서리가 한 번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찍 심어서 다 죽었어요. 이건 물이 있으니까 서리가 와도 녹아 버린 거야. 지금 다른 논보다 제일 볼 만해요. 일찍도 심었지만 자광은 비료를 안줘도 신나게 자라요. 그것만 봐도 아주 재밌죠. 주변과 비교해도 따라올 놈이 없잖아요.


- 언제쯤 수확하나요?

= 이건 추석 무렵이면 바로 벱니다. 중만생종쯤 될 거야. 그때도 막 자라요. 가지도 곧잘 치죠.


- 분얼도 많이 하는데 수확량은 왜 적지요?

= 도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규산질을 많이 줘요. 다른 비료는 영양제 빼고는 안 줍니다. 그랬다가는 너무 커서 싹 쓰러져 버려요. 약도 치지 않아요. 고품질로 파는데 약을 치면 내가 거짓뿌렁하는 나쁜 놈이지. 나는 여기 토백인데, 딴 사람한테 거짓뿌렁 못하고 죽으나 사나 내 땅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이렇게 사는 거지.

딱 하나. 제초제는 칩니다. 이제 논에 들어가 김을 맬 수 있는 힘도 없고, 일이 많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합니다.


- 씨 할 것은 따로 심으시나요?

= 그렇지는 않고, 이걸 수확해서 종자로 씁니다. 베기 전에 콤바인을 싹 청소해서 거두는데, 그래도 기계가 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조금 끼기는 합니다. 그러고 15일쯤 햇볕에다 말립니다. 수분측정기가 있어서 수분 15% 될 때까지 말려서 보관해 놓습니다.


-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자광미 농사를 지었나요?

= 옛날에 어른들은 2알 넣어야지 3알만 들어가도 뽑으라고 했어요. 많이 넣어 봐야 이삭이 잘아지니까. 손으로 내고, 낫으로 베고, 발틀 밟아서 떨고. 볏단이 조금만 축축하면 거기 잘 앵기는 거야. 통일벼는 귀가 여리잖아(이삭이 잘 떨어진다는 뜻), 자광미도 귀가 여려요. 이상기온이 와서 우박이라도 오면 1/5은 떨어져 버려서 날짐승들이 다 주워 먹지. 지금 그렇게 손으로 하라면 나부텀도 못해요.


- 이건 몇 포기씩 심으신 건가요?

= 이앙기로 해서 4~5대씩 꽂았어요. 가장 좋은 건 2대씩 꽂는 겁니다. 이앙기로 하려니 그런 거지. 그렇게 꽂아 놓으면 15~17대로 분얼해요. 물을 말리면 분얼을 멈추죠. 분얼이 다 됐다 싶으면 그냥 내 맘대로 말리는 거예요. 이 논은 한 6월 10일쯤 물을 뗍니다. 계속 물을 대 놓으면 키만 커요. 그렇게 보름쯤 말렸다가, 물을 안 주면 말라죽으니까 다시 열흘은 물을 대주고, 또 보름쯤 말렸다가 대주고를 반복해요. 여기 물을 말리면 갯논이라 운동화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정도로 마릅니다. 일주일쯤 지나면 티도 안 나게 말라요.


- 병충해나 피 같은 건 어떤가요?

= 여기는 들판이라 피가 많아요. 도아리(까마중)하고. 그리고 중국에서 혹명나방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래서 약을 쳐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 한 4년 전쯤에는 잎을 죄 먹어서 다 쭉정이만 나왔어요. 그해는 농민도 그렇고 농협도 무지 피해를 봤지. 중국하고 가까워서 혹명나방이 해마다 있어요. 자광미는 다른 벼보다 혹명나방이나 병충해에 좀 강합니다.


- 자제분에게 농사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모두 4남매인데 도시에 나가 살아요. 각자 자기 자리 잡고 사니까 땅 준다고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죠. 힘들어서 싫대요. 우리는 삼형제가 다 농사지으며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서로 일을 나눠 맡아요. 바로 위에 형님은 이앙만 하시고, 큰 형님은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모판 껍데기만 모아 놓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젊은 내가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일이 많고 뭐하고 해도 불평불만이 안 나오는 거야.

처음 1,800평으로 시작해서 부지런히 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는데, 깜깜해서 못 나가는 것이지 훤해지면 바로 나가서 일합니다. 그래도 새벽부터 집 가까이서 장비 쓰면 동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봐 멀리 방죽 있는 데부터 가서 일합니다. 이 일은 정년퇴임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뭐 땅속에 들어가면 그때가 퇴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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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배우고 싶은 소 쟁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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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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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을 문전옥답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고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전기부터 거름을 사용하는 시비법을 농업에 적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와 말의 분뇨 등을 사용하는 시비법이 적극 활용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조선전기에는 획기적으로 재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재와 분뇨 등을 섞은 구비 즉 두엄이 등장한다. 비로소 비료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중기이후에는 두엄의 등장으로 생산력이 증가하여 1년1작이 사라지고 2년 3모작이나 1년 2모작이 일반화 된다. 그리고 거의 전체 농지에 비료를 쓰는 등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17세기부터는 우리가 '칙간'이라고 부르는 화장실이 보편화되었다. 당시 농촌지식인 우하영은 그의 저서인 천일록에서 "다른 사람에게 한사발의 밥은 줄지언정 한 삼태기의 분(뇨)은 주지 말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제야 농사를 알 것 같다“고 하면서 비료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농사에서 비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분회 1두면 곡식 1승을 얻을 수 있으니 재를 버리면 곧 곡식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지방에서는 분뇨를 훔쳐가는 것을 일반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이 도둑으로 취급하여 곤장을 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진나라 재상 상앙은 재를 버리는 자를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비록 가혹하기는 하지만 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분뇨의 재활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간 통행금지와 운송수단때문이었다. 그래서 개혁을 주창한 박제가는 "중국에서는 거름을 금처럼 아낀다. 우리는 분뇨와 재를 도시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몇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며 적극 활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우리도 중국처럼 거름 활용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면 경제력 상승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농업서적에는 시비법에 대해 심도 깊게 언급되어 있어 이른바 "과학영농"이라 할 수 있었다. 18세기 농서인 산림경제에서는 처음으로 시비법을 추가 하였다. 이렇듯 얼마 전까지도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보는 생활양식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시비법등 자연친화 영농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농업기본정책은 화학비료사용을 고수하고 유기농업을 육성하는 것에는 별다를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질적인 환경농업예산은 전체 농업예산의 0.1%도 안된다. 이것은 원자력발전문제와 같은 논리처럼 산업문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 고육책일까? 아니면 혹시 실제 농업인구보다 더 많다는 농업관련업계(?)의 이해관계 때문은 아닌가? 그들에게 조상들이 가꾼 금수강산, 문전옥답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의지가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 더 알고 싶을 때 볼책

박지원, 2003, 『북학의』, 박정주 옮김, 서해문집

이영학, 1997, 『한국사 33, 조선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이완주, 2002, 『흙을 알아야 농사가 산다』, 들녘

홍만선, 1997, 『산림경제』, 유증림 옮김, 솔출판사

최홍규, 1995, 『우하영의 실학사상연구』, 일지사

손영배, 1997, 『한국의 쓰레기 2천년사』, 문지사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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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비옥한 세느강과 라인강 지역의 장원에서는 고기보다 오히려 밀과 보리 같은 곡물 농사에 힘을 쏟았다. 이용하는 땅의 비율도 곡물 경작지가 90% 이상이었고, 종교 생활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포도주를 만드는 원료인 포도밭이 조금, 가축을 방목하는 초지가 아주 조금이었다.

경작지를 이용하는 방식은 삼포제였다. 비옥하지 못하거나 기후 때문에 할 수 없는 곳은 이포제(2년에 밭을 1번 이용하는 방식. 밭을 둘로 나눠 반씩 이용하는 방법)를 유지했다. 삼포제는 밭을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겨울 곡식으로 밀 종류를 심고, 그를 이어 여름 곡식으로 보리나 콩 종류를 심으며, 마지막으로는 땅을 놀리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3년에 2번 농사를 지을 수 있어 이포제보다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보리나 콩을 심을 수 있어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밀에 비해 단백질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짚이나 부산물을 이용해서는 가축을 키울 수 있어 여러모로 유럽에 가장 알맞은 훌륭한 농사법이었다.

 

농기구는 철로 된 것을 썼고, 우리와 같은 쟁기와 극젱이도 있었다. 쟁기에는 물론 볏이 달렸다. 쟁기를 끄는 가축은 황소가 자주 이용되었고, 그것이 없으면 암소를 쓰거나 말을 이용하기도 했다. 말은 이후에 사료를 확보하면서 황소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밖에 괭이와 삽도 있었다. 수확은 짧은 낫으로 하고, 건초는 긴 낫으로 수확했다. 탈곡은 도리깨를 썼다고 한다.

 

거름은 주로 가축의 분뇨에 밟힌 풀과 짚을 썼다. 3000평에 수레 13대분 정도를 썼다고 한다. 그밖에 이회토泥灰土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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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농법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지․인 삼재에 따른 농사라고 할 수 있다. 삼재에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먼저 천시天時, 하늘의 때를 알아야 한다. 하늘의 때를 살펴, 제때 제대로 농사일을 해야 한다. 다음으로 지리地利, 땅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알맞은 작물은 무엇이고, 물길은 어떠하며, 무엇이 모자라고 넘치는지 살펴, 땅의 성질에 따라 그를 이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사人事, 앞의 두 가지를 알았으면 몸소 힘써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여건이더라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사람이 애써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거나 합리적으로 이용하며, 제때 알맞은 작물로 땀 흘려 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전통 농법이다.

이러한 농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경험이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어르신들이 존중받고, 옛사람들의 지혜가 빛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의 경험이 농축되어 있는 속담이 어떠한 기술지도서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 농업은 개화기를 맞이하며 바뀌기 시작한다. 경험을 중시하는 농업에서 실험과 실습을 중시하는 농업으로 바뀐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도 1884~1894년까지 있던 농무목축시험장, 1900년에 개설한 잠업시험장, 1902년에 설립한 모범목장, 1905년에 설립한 농사시험장, 1906년에 설립한 원예모범장 들이 생긴다. 이러한 기관들은 1906년에 설립한 권업모범장으로 통합된다.

이처럼 농업관이 바뀌면서 우리도 농업을 자연 안에서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해야 한다고 보게 되었다. 동식물을 자연 안에 사는 우리와 같은 생물로 보지 않고, 해부하고 분석해 우리의 삶에 이득이 되도록 이용하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조건에 동식물을 넣어 실험과 실습을 해서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수확량을 증대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두 가지 태도 가운데 어느 것이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둘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잘 뒤섞을 수는 없을까? 그 길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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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5)-화순 김규환 님
산을 가꾸는 산채원지기, 백아산에서 보물을 만들다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의 해발 300m에 자리 잡은 산채원을 다녀왔습니다. 해발은 높지만 따뜻해서 이 동네를 양지라 한다고 합니다. 집 앞에는 백아산이 우뚝 서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산채원에서는 200가지 이상의 산나물이며 산야초, 산양삼 등 산과 관련된 먹을거리를 보존, 보급하고 있습니다.

 

- 정말 좋은 곳인데,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셨나요?
= 결혼하기 전에는 잠시 가평에서 민박집을 하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는 사회생활을 했지요. 제가 담양 창평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7년 전쯤 창평으로 내려왔다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003년부터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사회에 필요한 농사를 짓자고 마음먹었죠. 가만히 생각하니 유기농은 기본이겠고, 무엇보다 종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지런히 전국으로 산나물 씨앗을 모으러 다녔습니다. 솔직히 산에 다니면서 뿌리도 캐오고 했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안 다녀서 숲이 너무 많이 찼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산나물은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상태에 가장 가깝게 보존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은 씨앗이 한 200여 가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 본격적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 2006년 11월입니다. 내려와서 창고 같은 집을 조금 손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집을 지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럼 귀농을 하신 셈이네요?
= 저는 귀농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이나 고향 사람들에게 귀농이라고 하면 꼭 실패한 사람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저는 귀농이라는 말보다는 귀향이라고 합니다.
제가 내려오면서 세운 원칙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처음 1년 동안에 초기 자본을 많이 투자하면 대부분 금방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첫째, 집을 짓지 않는다. 둘째, 처음 1년 동안은 땅을 사지 않는다. 셋째,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면 이자도 싸고, 돈을 끌어다 쓰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금방 망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만 1년째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조합원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분들은 돈도 싸게 빌릴 수 있고 하니 얼른 가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다들 농협에서 쉽게 돈을 끌어다 썼다가 힘들어 하더군요.

 

- 산채원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 제가 80년대 말 대학을 다니며 생활도서관 운동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보 관련 운동을 해서 정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그래서 FTA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농사가 무엇일지 2003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축산, 원예, 주곡 같이 여러 농사가 있지만 그 시대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승부를 걸면 답이 안 나와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산과 관련된 이 분야만이 FTA와 상관이 없더군요. 아직 그네들이 산은 모르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무한한 자원이 널려 있다는 걸 그네도 모르고 우리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산에 FTA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어릴 때부터 나물을 잘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 나물을 먹고 싶으면 소죽 쒀 놓고 호미나 칼 들고 나물 뜯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배웠죠. 지금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풀이나 나무가 모두 나물이고 약입니다. 옛말에 소가 먹는 건 다 나물이라고 했지요.

 

- 산채원을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 고향에 내려와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습니다. 마을에서 호응도 안 해주고, 배운 놈이 여기서 뭐하냐고 형과도 사이가 틀어질 정도였습니다. 계속 노력해야 하는 문제지요. 저는 영농조합법인 사람들에게 소비자가의 95%를 책임져 주려고 합니다. 나머지 5%는 영농조합법인 운영비로 쓰고요. 그 정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절대 안 따라옵니다.
요즘 농촌은 저희 마을도 마을 분들 몇 분과 함께 같이 뭘 하려고 해도 모두 노인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세 마을 합쳐서 150호가 넘었습니다. 저쪽 송단 1리는 조릿대가 많아서 예전에 국내의 복조리를 모두 만들던 곳입니다. 저도 어릴 때 무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다 합쳐서 20호가 안 됩니다. 그나마 독거노인이 많아서 사람은 27명쯤 됩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골짜기마다 있던 논밭이 다 묵었어요. 그래서 이곳 산골은 25~30년은 다 묵은 논밭입니다. 하지만 그게 자원입니다. 그런 땅은 비닐도 쓰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청정 지역입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강원도처럼 골프장이니 스키장도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망쳐 놓습니까.
여기는 겹겹이 산이 둘러 있는데, 바로 옆은 곡성이고, 이쪽으로 넘어가면 담양, 저쪽으로 넘어가면 순천입니다. 이곳이 그 중간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여기는 종이 다양합니다. 옛날부터 백아산에는 없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살아 있는 동네입니다. 특히 이곳이 고려삼의 시배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곳에 산양삼(山養蔘)을 많이 심었습니다. 예전에 장뇌삼이라고 아시지요. 그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이제 공식 명칭으로 산양삼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삼씨가 1kg에 150만원입니다. 이걸 지금 이곳에 5ha를 심어 놓았습니다. 내년에는 정부 보조를 좀 받아서 20ha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 산나물은 어떻게 기르시나요?
= 저는 웬만한 씨앗이나 나무는 다 산에 심습니다. 저희 집 뒤를 ‘가는골’이라고 합니다. 골짜기가 가늘게 길다고 가는골이지요. 길이가 한 1km 이상 될 겁니다. 지금 이곳을 정리해서 구석구석에 그동안 모은 산나물이며 산양삼을 잔뜩 심어 놓았습니다.
보통 밭에 산나물을 심으면 퇴비도 주고 어떻게 해봐야 금방 쇠서 뻣뻣해집니다. 하지만 이걸 산에 넣으면 베고 또 베고, 어떤 것은 5~7번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설을 하건 어떻게 하건 이런 곳보다 산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산에는 굳이 퇴비를 안 줘도 그 자체로 영양이 많아서 걱정 없습니다. 산흙 자체가 부엽토 아닙니까. 오히려 산에서 그걸 긁어다 밭에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요즘 왕겨나 톱밥으로 퇴비를 만드는데, 저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왕겨는 다 농약치고, 톱밥에는 윤활유가 섞여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을 심으려고 나무를 벨 때도 기계톱은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직접 하는 게 좋습니다. 진짜배기로 농사지어서 대통령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명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요.

 

- 경운 같은 것도 필요 없나요?
= 경운은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번만 갈아주면 그대로 심고 끝입니다. 대신 풀을 매야 하니까 호미질은 해야지요. 사람들은 경운해야 하니 트랙터를 사라고 하지만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산이 우거지지 않도록 관리도 해줘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손대지 않으면 산이 우거져서 나물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솎아베기를 해서 자연스레 해결합니다. 이제 산도 우리가 가꿔 줘야 합니다.
중요한 건 나물의 특성을 알고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춰 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딱주라고 하는 잔대는 양지쪽에서 잘 자라서 정상 부분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나물은 황토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물빠짐이 좋은 사질양토가 가장 좋습니다.
풀이 많아 어떻게 하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걱정 없습니다. 오히려 밭보다 관리하기가 더 쉽습니다. 밭 같은 경우 10번이고 20번이고 매려고 맘먹으면 매 줘야 합니다. 하지만 산은 1~2번만 매면 끝납니다. 그러니 면적이 넓어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골짜기가 500ha 정도 되는데 그걸 제가 다 일구려고 합니다. 또 재 넘어 관음사 들어가는 곳의 땅은 절땅입니다. 그곳이 450ha인데, 그곳도 임대하려고 합니다. 그곳은 지금 우리 법인하고 다른 법인하고 함께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계획을 세워 놨습니다.
또 정선 쪽에 사는 사람과 얘기해서 그곳에 산사랑 산채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기후에 차이가 있으니 여기는 빨리 나와서 빨리 사라지지만, 강원도 쪽은 이곳과 다른 때 나오지 않습니까. 또 장흥 쪽에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겨울에 산채가 먹고 싶으면 장흥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1년 내내 도시 소비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원칙은 제철 음식입니다. 제철이 아닌 때 억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시기가 다른 곳을 확보해 제철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산채원은 도시 사람들도 이걸 먹을 수 있도록 규모를 늘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농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 텃밭에 배추가 잘 자랐던데 비법이 있으십니까?
= 옛날에 농사짓던 방법을 따랐습니다. 옛날에 배추에 벌레가 끼면 불 때고 나온 재를 물에 섞어서 재운 다음, 위에 뜬 맑은 물을 배추에 줬습니다. 우리 배추에는 그래서 벌레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벌레가 다 갉아먹었어도 이슬이 내렸을 때 재를 가지고 가 살살 뿌려 주면 한 일주일 정도면 다시 살아납니다. 지금은 일본이나 유럽에서 다 들여오지만, 이렇게 세계에서 유기농을 가장 잘한 것이 우리나라였습니다.
저는 고추를 기를 때 비닐을 치지 않습니다. 비닐을 치면 처음에는 잘 크지요. 수분도 잡아 주고, 햇볕을 받으면 더 따뜻해서 금방 크고 수확도 많습니다. 문제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생깁니다. 꽉 막힌 상태이니까 온갖 병균이 그곳에 생깁니다. 그것 말고 저는 일체 화학제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원칙을 지키면 우리 옛맛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때죽나무 열매를 찧어서 물에 뿌립니다. 그럼 고기가 기절해서 둥둥 뜨지요. 그만큼 때죽나무는 좋은 살충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걸로 천연살충제를 만들어 보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초피, 인진쑥, 때죽나무 열매, 소주를 섞으면 괜찮은 농약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이런 걸 개인이 아니라 흙살림 같은 곳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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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3)-장흥 이영동 선생
토종 작물 육종하는 재미,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는 전남 장흥군 용산면 쇠똥구리마을에 사는 이영동(56) 선생을 찾아뵙고 왔다. 선생께서는 약다산 자락에 자리한 농장에서 토종을 보존하는 일은 물론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단체도 이끌고, 쇠똥구리마을 추진위원장도 맡으며 바쁘게 살고 있다. “농민이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말을 몸소 실천해 여러 가지 실험과 도전을 하며 열성적으로 토종을 보존하여 토종농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 토종 종자를 얼마나 보존하고 있으신가요?
= 모두 22작물 60여 품종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씨를 보존하려고 하는 정도라서 조금씩밖에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보탬은 안 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죠. 옛날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것만 봐도 맛이 좋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존하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어떤 모임인가요?
= 어릴 때부터 보던 논둑, 밭둑의 풀들이 없어지는 걸 보면서 이걸 재배해서 자원으로 이용할 수 없을까 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회원은 모두 16명이지요. 요즘 삭막해져 가는 정서를 야생화로 순화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매년 전시회도 하고, 취미 삼아 그냥 합니다. 또 야생화는 다 약초가 됩니다. 이걸 재배하는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는 난대 식물부터 냉대 식물도 있습니다. 지역은 남쪽이지만 산이 800고지가 넘어서 그렇습니다. 야생화가 있다고 함부로 채취하지 않고 씨를 받아서 증식시킵니다.

 

- 보존하고 있는 토종 종자 가운데 특이한 것 좀 소개해 주세요?
= 먼저 적토미가 있습니다. 일본에도 붉은쌀이 있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고려 때 우리나라에서 적미가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벼는 알이 작은데, 너무 끈적거리는 찰벼라서 꼭 다른 것과 섞어서 먹어야 합니다. 또 키가 아주 커서 가슴까지 자라서 잘 쓰러져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비료로 재배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맛이 아주 좋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성남 농협과 결연해서 모두 팔았는데, 일본에서 홍미가 들어오면서 올해는 취소됐습니다. 홍미보다 맛이 더 좋지만 홍미가 싸게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이 외면했지요. 이 일을 겪으면서 소비자에게 값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맛과 질로 홍보해야 팔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다마금이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부터 심던 것인데 아마 일본에서 왔을 겁니다. 상남 밭벼는 찰벼인데, 옛날에 결혼하는 날 이걸로 주먹밥을 해서 줬습니다. 이 쌀로 주먹밥을 하면 며칠 뒤에도 굳지 않습니다. 녹토미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극만생종이라 빨리 심어도 이모작보다 늦게 서리 맞고 벱니다. 껍질을 까면 쌀이 푸른색이지요. 흑미도 있는데 이 흑미는 일반 흑미보다 알이 작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까만깨인 줄 압니다. 이것도 아주 맛이 좋습니다. 속까지 다 검진 않지만 도정해도 조금 검은빛이 납니다. 이것 말고도 벼는 모두 10여 가지가 있고, 새로 육종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밖에 보리와 밀이 1종씩 있고, 콩 종류는 10가지 이상 있습니다. 콩 중에는 제비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한약재로도 쓰고, 옛날에는 주로 콩나물로 많이 먹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내려오는 노란 옥수수, 단단하고 바람이 잘 안 드는 조선무, 잘 타고 올라가 수확량도 많은 울타리콩 등도 있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팥이 많이 들어오는데, 여기 있는 우리 것은 좀 어두운 붉은 색이지만 중국 팥은 선명하게 빨갛습니다. 제가 재배하는 토종 감자는 맛은 좋은데 좀 씁니다.
고추도 옛날부터 심던 것을 그대로 심습니다. 껍질이 얇아서 햇볕에 조금만 내놔도 잘 마릅니다. 먹으면 처음에는 사근사근하다가 나중에는 좀 매운 맛이 납니다. 이조는 어디서든 잘 크고 재배하기도 쉽습니다. 보통 조의 반 정도 크기밖에 안 합니다. 이건 방아를 안 찧고 그냥 먹을 수 있습니다. 토종 가지도 있는데 가지가 굵고 크지만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개량종은 지금 그냥 먹으면 맛이 없지만 이건 지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개량종에 비해 토종이 줄기도 굵고 잎도 더 큰 편입니다.

 

- 특이한 벼가 많은데 논농사는 어떻게 짓나요?
= 요즘 벼는 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거름도 별로 없을 때라서 산풀을 베다가 넣었습니다. 그건 땅을 실하게 하지요. 봄에 모내기 전에 넣기도 하고, 보리를 베기 전에 그냥 갖다 놨다가 보리를 베고 물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갈잎도 넣고 여러 풀도 넣었는데, 거기에는 무수한 성분이 들어있지요.
지금은 로터리로 위만 부드럽게 하는데, 그러면 밑에는 딱딱한 형성층이 생깁니다. 지금 논들은 조금만 파면 아래에 딱딱한 형성층이 있습니다. 이 층을 깨야 산소와 뿌리가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논의 구조를 보면 거대한 화분처럼 밑이 막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에다가 키 큰 벼를 심으면 다 쓰러져 버리죠. 그러니까 옛날처럼 깊이 쟁기질하고, 넓게 심으면 되겠지요. 토종은 토종 농법으로 해야 합니다. 형성층이 생기지 않게 깊이 쟁기질하면 뿌리가 깊게 뻗을 수 있습니다. 또 요즘은 지나치게 배게 심습니다. 그래서 통풍도 안 되고, 웃자라다 보니 쓰러짐에 약합니다.
제가 처음 트랙터를 배웠을 때인데, 솜씨가 서툴다보니 쟁기가 깊이 들어가 갈았습니다. 그러니 키가 커도 잘 쓰러지지 않고 수확도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솜씨가 좋아지면서 얕게 갈다보니 오히려 잘 쓰러지더군요. 그걸 보고 맛 좋고 질 좋은 토종 종자와 그에 알맞은 농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온 신품종 농작물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논밭 구조도 현 신품종에 맞게 쭉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우리나라 농민들까지도 다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품종이 다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신품종도 많이 있습니다. 교배를 하면 할수록 야생성은 없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민도 거기 있고, 여러분의 고민도 거기 있는 것 아닙니까?

 

- 토종이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 앞에서 말한 것 말고도 토종은 키가 커서 자라기만 하면 얼른 주위를 장악해서 제초하는 노력이 덜 듭니다. 크게 잘 자라니 풀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멀리 심어야 합니다. 개량호박이나 오이를 보면 넝쿨이 많이 안 뻗지만 조선 호박이나 오이는 엄청 뻗습니다. 또 토종은 씨가 많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 종자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 냉동고에 보관해보니 4~5년이면 잘 나지 않습니다. 나더라도 발아율이 엄청 떨어집니다. 저 같은 개인은 종자은행도 없으니 해마다 재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는 못하고 조금조금씩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마다 심습니다. 예전에 잠깐 다른 데 나갔다 왔는데 철을 놓쳐서 한 20여 종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잃어버리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운한지 모릅니다. 진짜 맘이 아픕니다. 어디 가서 씨앗 하나만 구하면 참 재미가 있어요.
논을 다닐 때도 특이하게 자란 것이 있으면 눈여겨보며 지나다닙니다. 이것저것 가져다가 육종하면서 제가 생각한대로 나오면 참 재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냐고 해도 저는 너무 재밌어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걸 욕심 같아서는 다른 것도 더 많이 하고 싶지만 여건상 힘들어서 참습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 농촌 현실이 어려워 지금은 빚 없는 집이 없습니다. 기회만 되면 땅이라도 팔아서 빚 갚으려고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심은 어디 가고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농심이 변했지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토종이 아직은 현실에 맞지 않지만 이제부터는 슬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맛을 우선시하는데 토종의 맛은 신품종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저도 친구 따라서 서울에 갔지만 6개월 살고 내려와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옥수수, 고구마 맛 때문인 것 같아요.
토종 농작물은 우리 조상들과 함께 해온 식물이고,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아온 작물입니다. 그중에 희로애락도 있을 것이고, 많은 토종 농작물에 대한 사연도 있고, 문화도 농심도 있습니다. 몇 천 몇 백 년 내려온 씨앗들이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농사도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수확을 많게 개발하다 보니까 맛은 없어져 버리고, 땅은 땅대로 버렸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옛날 맛과 땅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종 농작물의 장점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 땅에 알맞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야생성이 강하고 원종에 가깝기 때문에 병충해에 강하고 어느 토양이나 기후에도 적응성이 강해서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필요 없습니다. 또 키가 크고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잡초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신품종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맛은 토종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단점은 현실 농업에 맞지 않습니다. 키가 크기 때문에 쓰러짐에 약합니다. 또 수확량이 적습니다. 수확량이 적고 현실 농업에 맞지 않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토종 농작물은 미래의 농업 유전자원으로 보존되어야 하고, 재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덧붙여 자연의 문제는 자연을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튼 흙살림에서 이런 운동을 한다니 정말 반갑고, 더운 날씨에 이곳 먼 구석까지 찾아 준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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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횡성 송래준 선생

 

“말로는 소용없어요. 직접 몸으로 깨우쳐야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강원도 횡성군 어답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토종왕국’의 송래준(84) 선생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서 토종종자를 가구며 보급하고 지금은 산을 일궈 나무와 산나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미래를 내다보며 정력적으로 농사지으며 살고 계십니다.


- 지난번 자운 스님을 통해 선생님께서 토종 종자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시나요?

= 지금 농촌 현실이 아주 어렵습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농협에 평균 4~5천만 원 정도 부채가 있지 않을까 해요. 사정이 어려워서 땅을 내놓고 싶어도 노 대통령이 거래를 막아서 팔려고 내놓아도 거래가 없어요. 이제 농촌에서 쌀이나 고추 농사지어서 빚을 탕감하기 힘들어요. 나는 그래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구멍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그런 것을 종종 자문해 주고 하지요.

지금 토종은 내가 나눠 준 곳이 전국에 100여 농가에서 그 이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라남북도부터 경상남북도까지 다 줬어요. 원래는 여기 밭이 다 곡식으로 꽉 찰 정도였지요. 지금은 다 나눠주고 나는 그걸 안 합니다. 내가 보급한 종자가 이미 나한테는 끝이 난 겁니다. 이제 그건 내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난 새로운 것을 찾아서 보급해야지요. 나는 항상 내가 안 하던 거, 새로운 거를 연구합니다.

내가 내일 죽더라도 몸을 움직여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내가 부지런만 떨면 열 명이 먹고 살 수 있는데 게을리 있을 수 없지요.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있어요. 여기에 연구소를 하나 만들려고 해요. 토종부터 산채까지 모든 것을 연구하는 거지요. 자연에서 나서 자연에서 큰 것을 가지고 사람이 식생하는 방법이며 모든 것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혼자 앉아 있으면 못할 일도 너댓만 앉아 있으면 호랑이 데리고 못된 놈들 다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면 못할 일이 없어요.


- 지금은 농사짓지 않으신다면 산나물 같은 것은 채집하시는 건가요?

= 아니지요, 농사를 짓습니다. 그걸 나는 산에다가 하는 거지요. 왜 농사지으면서 누구는 비료를 넣고, 누구는 퇴비를 넣고 그러잖아요. 나는 산에서 부엽토로 하면 돈분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산에다 장뇌삼도 하는데, 확실히 사람 손을 덜 탄 것이 맛이 달라요.

지금 산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30여 가지입니다. 엄나무, 오갈피, 오미자, 더덕, 헛개나무, 당귀, 산작약 같은 것이 있지요.


- 장뇌삼을 재배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가요?

=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합니다. 장뇌삼 씨를 바위 밑에도 뿌리고 나무 밑에도 뿌리고, 수분 있는 데에도 뿌리고 건조한 데에도 뿌려 봅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심어 놓고 관찰하는 거지요. 그래서 특별나게 잘 나는 곳에는 집중적으로 심고, 그런 곳이 아니면 그냥 더덕을 심던지 하지요. 더 자세한 것은 여기서 말로 설명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여기 저기 심어보고 1년 뒤에 뽑아서 살펴보고 잘되는 곳에다만 합니다. 덮어놓고 아무 데나 막 심으면 안돼요. 그렇게 하다가는 앞서 가는 사람한테 항상 떨어져요. 남보다 앞서는 것을 만드는 것이 농민이 할 일입니다.


- 여기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사신 건가요?

= 내가 열서너 살에 조실부모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요. 여기서 농사지은 것으로 누가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합니다.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애들이 빨리 개학해서 급식을 타 먹으면 좋겠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그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열 사람은 굶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여기서 농사지으며 산 지가 19년째입니다. 그전에는 남도 속여 먹기도 하고, 참 나쁜 짓도 많이 했지요.


- 입구에 벌통이 많던데 통마다 돌을 쌓아서 막아 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처음에 벌을 조금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게 늘어나서 지금은 한 250개 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벌을 키워 보니 그래요. 벌 한 통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돌을 쌓아 주며 애를 쓰니, 지들도 그걸 아는지 잘 자라요. 처음에는 그렇게 돌을 쌓아 준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바람도 막고 편안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디다. 또 이걸 저기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여기는 뭐 특별한 것이 있나 하면서 옵니다. 그렇게 와서 꿀도 많이들 사갑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그걸 보면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나무를 파서 옛날 재래통을 더 만들고, 위에는 짚으로 지붕을 씌우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대충 설계만 하는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제대로 들으려면 2주는 있어야 해요.


- 아까 산에 30여 가지를 한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소득이 되는 것이 있나요?

= 소득이란 것은 이렇습니다. 30여 가지를 하면 어디선 손해를 보는 때도 있고, 어디선 이득을 보는 때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요. 아무리 못하더라도 열이면 열 식구가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한 가지만 밀고 나가면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한 가지만 하면 안 되고 수십 종류를 하면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이런 곳에서 어디 기대지 않고 열심히 살면 올바른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살지요.


- 이제 토종 곡식은 가지고 계신 것이 하나도 없나요?

= 자주 감자가 있어요. 이건 내가 하동에서 장에 가니 하나에 200원에 쪄서 팔아요. 그걸 사서 먹어보니 팍신팍신한 것이 참 맛있어요. 그래서 이걸 5천원어치 샀어요. 올해 이걸로 농사지으면 내년에는 열 가구가 심을 수 있을 겁니다. 감자는 눈이 하나인 것만 골라서 하나를 서너 개로 잘라서 심고, 눈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건 파 버립니다.

다른 인상적인 것은 없어요. 이미 다 내 손에서 떠났어요. 나는 옛날 선조가 하던 건 무조건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존할 때는 절대 비료를 주던 곳에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런 곳이면 최소한 3~4년은 묵혀야 합니다. 비료, 농약기가 있으면 헛고생만 하는 겁니다.

토종은 산에서 3년만 지나면 토종이 됩니다. 나는 산에다가 퇴비도 안 주고 그대로 심어요. 이런저런 실험을 해서 작년에는 고추도 산에 심고, 그전에는 콩도 심어보고 이것저것 심어 봤습니다. 올해는 더덕을 한 자짜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한번은 산에 상자를 가져다가 박아 놓고 거기에 감자를 심으니 아주 좋아요. 그건 비가 와도 쓸려 내려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관리하기도 편하고.


- 하동이면 여기보다 남쪽인데 거기서 가져온 감자가 여기와 기후가 맞을까요?

= 기후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나는 장날 다니다가 특별한 것만 보이면 사다가 심어 봅니다.


- 산나물 가운데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으신가요?

= 열 손가락 가운데 버릴 것이 하나 없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로가 균형을 맞춥니다. 전체가 다 남으면 팔자 고치지요. 여러 가지를 하는 게 좋습니다. 나는 할 수 있으면 많은 면적에 다양하게 심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땅에는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가지 심을 수 있지요.

어떤 분이 나한테 취 씨를 보내주셨는데, 올해 이걸 심어서 3년 뒤에는 취 밭을 만들 겁니다. 이걸 3자 간격으로 심으면 3년이면 취 밭이 됩니다. 산에 가서 풀이 없는 곳에 뿌려 놓으면 2년이 지나면 씨가 앉아서 그게 떨어져 저절로 자랍니다. 그럼 밭이 되는 거지요.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남의 집 일하고 쌀 한 말 받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먼저 차가 있냐고 물어봐요. 돈은 얼마냐 6시 땡 치면 차로 집에 데려다 줄 수 있느냐. 그만큼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지요.

또 낙엽을 긁어내고 거기 더덕 씨를 넣어요. 이것도 3자 간격으로 또 낙엽을 긁어내고 심습니다. 그럼 낙엽을 모아 놓은 곳에도 더덕이 자라서 더덕 밭이 됩니다. 오히려 낙엽을 긁어모아 놓은 곳이 그것이 썩으면서 거름이 되어 더 잘되지요.

지난번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질경이 좀 없냐고 찾아서 내가 좋은 놈만 가져다가 쭉 심어 놨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거기는 아예 질경이 밭이 될 겁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 부모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식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자리를 잡으니 큰며느리가 아버님은 몇 십 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합디다. 자기들이 나를 챙겨야 하는데 거꾸로 내가 자식들 노후 대책을 만들어 줬다고요.

나는 어디에서 강의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합니다. 대신 경험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하지요. 강의는 교수님이나 전문가가 하는 것이고, 나는 내가 경험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책도 소용없고 내 말도 소용없어요. 직접 자기가 몸으로 해서 깨우쳐야 합니다. 말로 하면 없는 떡도 만들어서 전체가 먹고 살 수 있게요. 그러니까 직접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덮어 놓고 말로 벌을 이렇게 하쇼, 농사를 이렇게 하쇼 하는 건 다 소용없어요.

그동안 미친놈 소리도 들으며 참 외롭게 살았지요. 여러분처럼 주변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겁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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