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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전통농법 - 카멜로네스




홍수에도 왜인지 피해를 받지 않는 전통농법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해가 계속되면 빈곤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덧붙여 홍수와 가뭄 등의 이상기상은 기후변동으로 더욱 그 빈도를 더하고 강도도 세질 것이다. 아마존의 중심부에 있는 볼리비아 베니Beni군郡의 군도 트리니다드Trinidad1)는 가뭄과 홍수가 되풀이되는 냉엄한 환경이다.2) 볼리비아는 2006~2008년 계속해서 홍수 피해를 입고 있다. 2007년에는 35만 명이 재해를 입고, 2008년에도 또 4만 명이 가옥을 잃었다. 2007년과 2008년 두 해의 사망자는 100명을 넘는다. 특히 2008년에는 최소한 과거 50년 동안 최악의 범람이 일어났다. 홍수는 베니의 인구 가운데 1/4, 약 12만 명에게 영향을 주고, 2억 달러(1.19억 파운드) 이상의 피해를 가져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후변동에 순응하고 있는 지역의 한 예인 것이다.

 

 

 

 

볼리비아에 있는 옥스팜3)의 재해 리스크 삭감·적합 조정자인 로저 퀼로가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장 처음 시험적인 카멜로네스camellones가 건설된 것은 2007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2008년의 홍수를 이겨낸 유일한 구축물이 되었습니다. 곧 카멜로네스 체계로 지역사회의 생활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케네스 리 재단(Kenneth Lee foundation)의 오스카 사베드라Oscar Saavedra 대표도 말한다.


“어떤 시기에도 홍수에 대응하려면 언제 우기가 올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곧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했듯이 엘니뇨와 라니냐의 주기가 힘과 빈도를 더한다고 해도, 홍수를 이겨내는 농법이 있다고 하면 극단적인 이상기상과 예측할 수 없는 호우에 가난한 사람들이 잘 대응하도록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하나의 해결책은 3000년 전 현지의 농민들이 썼던 오랫동안 잊힌 농법에서 오고 있다.


“우리의 카멜로네스 프로젝트가 보통은 어긋나 있는 것의 하나는, 지금 베니의 가난한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동일한 지역에서 프레콜롬비아 시대의 선주민 문화에서 개발된 기술과 똑같은 기술을 쓰고 있는 점입니다.”


사베드라 씨는 水文字의 복합된 체계를 개발하고자 6년 동안이나 자신의 밭에서 실험을 거듭해 왔다. 고대에도 지금도 지역사회는 가뭄과 그 뒤에 이어지는 정기적인 홍수라고 하는 똑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사베드라 씨는 이렇게 말한다.


“홍수는 훌륭한 문명의 개발과 번영의 기초였습니다. 베니의 고대 문화는 범람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장해가 아닌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건기와 우기 사이에 균형을 만들고, 자연에 도전하기보다 오히려 자연의 과정을 받아들여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홍수 지역의 해결책이 된다는 희망은 고고학 조사에서도 나왔다. 1960년대에 고고학자들은 범람과 가뭄 등에 대응할 수 있는 프레잉카문명에서 개발된 고대 농업 체계의 베일을 벗겼다.4) 고대 문명은 광대한 토지 변동을 행하여 땅심과 생산성을 개량하는 농업 체계를 개발했다. 그리고 3000년 뒤 케네스 리 재단은 옥스팜에서 자금을 받아 이 고대의 관개 체계를 되살렸다.

 

 



홍수에서 작물을 보호하고, 식량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고대 농법


베니의 토지 대부분은 우기에는 몇 개월이나 물에 잠긴다. 아마존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로 물이 흘러가면서 영양물을 가져가 버리고, 작물을 재배하기 어렵게 하는 모래흙을 남긴다.


“우리는 흙이 매우 척박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의 흙은 죽어 있어 농업에는 좋지 않은, 기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라파엘 크레스포 오르티스 씨는 말한다. 처음 현지 주민들은 의심했다.


“어떻게 실행하면 좋을지 농업기술자마저 모르는 기술을 실시하도록 참가자들에게 부탁했을 때, 불신의 분위기가 생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저 퀼로가 씨도 떠올린다. 이 카멜로네스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프로젝트가 직면한 최대의 난제였다. 하지만 결과를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여 지역 사회는 확신하게 되었다.


홍수 피해의 경감이 수많은 현재의 여성들이 카멜로네스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저는 저의 구획에 쌀, 옥수수, 바나나, 양파를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물이 몽땅 쓸어 갔습니다.” 트리니다드 근처의 푸에르토 알마센Puerto Almacen에서 세 아이의 어머니, 두니아 리베로 마야코Dunia Rivero Mayaco 씨(44세)는 설명한다.


“집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3개월이나 길거리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기에서 카멜로네스를 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두 번 다시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이 불었을 때 카멜로네스의 모습.


 

홍수가 지나간 뒤에도 운하는 완전한 채로 남아 있다.


2009년 7월 현재, 약 400가족이 트리니다드의 주변에 있는 다섯 지역에서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옥수수, 카사바, 쌀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아직 막 시작한 실험 단계이지만, 앞으로 전망이 있고 생산성도 높을 것이라 본다. 현지의 농민 예니 노자Yenny Noza 씨도 말한다.


“홍수가 나면 이전에는 대부분의 작물과 종자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심는데, 물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홍수가 나도 물에 잠기지 않습니다. 수확을 할 수 있고, 또 종자도 곧바로 심습니다.”


이바레Ibare 강을 배로 20분 정도 내려가는 코파카바나Copacabana 마을의 농민 마리아 살라스Maria Salas 씨도 말한다.


“홍수가 나도 카멜로네스가 우리를 구해 주겠지요. 홍수에 약한 바나나도 시들지 않을 수 있고, 레몬과 오렌지도 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확실히 우리의 선조가 어떻게 살았고, 세력을 뻗어 왔는지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카멜로네스를 구축하는 트렉터도 없었습니다만, 쭉 살아남았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카멜로네스 프로젝트가 행하고 있는 것은 프레콜롬비아 시대의 기원전 1000년~기원후 1400년이나 행해 왔던 전통농법의 모방이다. 이 프로젝트는 운하로 둘러싸 최고 2m나 되는 카멜로네스라는 둑을 구축하는 것에 바탕한다. 높은 두둑의 밭은 몇 사람인지의 채소 농사꾼이 건축한 높은 두둑과 비슷한데, 확실히 규모가 크다. 홍수의 물높이보다 높게 구축해서 카멜로네스는 종자와 작물이 쓸려 가는 것을 지킨다. 우기에 높은 두둑을 에워싼 둘레의 수로는 홍수가 난 물이 흘러들지만, 홍수가 지난 뒤의 갈수기에는 그 운하의 물이 관개용수가 되어 토양에 양분을 준다. 가난한 농민들은 홍수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혜라고 보도록 장려되고 있다. 요컨대 흘러넘치는 물을 이용하함으로써 홍수의 희생자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땅심을 지속하고, 물고기도 가져온 전통농법


하지만 전통농업이 뛰어난 점은 그것만이 아니라, 수확량도 높다는 점이다. 케네스 리 재단에 따르면, 베니에서 행하던 농법에서는 카사바를 약 15t/㏊만 수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멜로네스 농법에서는 1년에 최대 100t/㏊의 수확량이 달성되었다. 땅심이 개선되어 1년에 최대 세 작물을 재배할 수 있기에, 관행농업보다 훨씬 많은 수확량을 생산할 수 있다. 또 베니에서는 2~3년 뒤에는 토지가 척박해져 버렸기에,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려고 숲을 벌채하고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토지를 부대밭 방식 농업으로 개간했다. 그런데 전통농법은 가족의 식량 안전의 보장을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주변의 열대림을 벌채할 필요성도 줄인다.


그밖에도 전통농법에는 잠재적인 장점이 있다. 첫째는 높은 두둑을 둘러싼 주변은 수로이기에 물대기가 매우 쉽고, 한 번 체계가 구축되면 물 수요가 적다.

 

둘째는 운하에서 급성장한 타로페tarope라고 불리는 수생 식물이 물을 정화하고, 흙 위에 퍼지면 거름으로도 된다. 현지의 농민 오스카 페나란다Oscar Penaranda는 말한다.


“흙 위에 타로페를 퍼뜨리면 흙의 수분을 유지하고, 양분도 됩니다. 타로페는 거름이 되는 훌륭한 식물입니다.”


타로페는 6개월 뒤에는 10㎝의 비옥토를 만드는 것을 돕는다. 게다가 가축 먹이로도 쓰인다. 수로에서는 물고기도 풍부하게 자란다. 라파엘 크레스포 오르티스 씨는 말한다.

 

 

물에서 자라고 있는 타로페. 

 

“수로에는 갈수기에도 진흙 속에서 사는 물고기가 있기에, 지역사회는 또 물고기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곧 세련된 고대 농법은 현명한 물 관리와 유기물의 재활용을 통하여, 비옥한 흙과 관개용수, 가축 먹이, 물고기를 가져오고, 그것은 또 먹을거리와 수입원이 되고 있다.



콜롬비아, 브라질로 퍼진 고대 농법


선조들이 쓰던 지속가능한 식량 생산 방법은 기후변동의 방패가 되어 열대림의 벌채를 막고, 주민들의 식량 안전 보장을 높이며, 또한 좋은 식사마저 제공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딘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들 안에서는 더욱 세찬 범람과 가문일 때 정말 성과가 있는지 시험 받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2008년의 홍수는 최악이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큰 도전이 아직 남아 있다. 토마토와 채소밭의 생산물로 수입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일과 비교하여 카멜로네스에 시간과 땀을 흘리는 것으로 현지 사람들의 의문을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볼리비아의 카멜로네스 프로젝트에서 얻은 교훈은, 그곳 이외의 재해를 입기 쉬운 지역에서도 큰 마중물이 되겠지요.”


퀼로가 씨는 믿고 있다. 그리고 사베드라 씨도 카멜로네스 프로젝트는 다른 나라에까지 퍼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등 베니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세계 각지에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계 기아를 줄이고, 기후변동과 싸우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여러 장해에도 불구하고, 카멜로네스는 콜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1) James Painter, Bolivians look to ancient farming, BBC News,18 Aug,2009.

2) Bolivia: Reviving ancient indigenous knowledge 

3) 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 제2차 세계대전이었던 1942년, 영국 옥스퍼드의 주민들이 나치스 치하에서 고생하는 그리스 사람들을 구호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이후 활동 폭을 넓혀 전쟁이 끝난 뒤 벨기에 등에서 전쟁 난민 구호에 앞장서면서 국제적인 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4) New Agriculturist Reviving an ancient irrigation system in Boli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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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의 전통농법 - 퀘숭얼Quesungual




가뭄과 허리케인에도 왜인지 피해를 받지 않는 전통농법


1998년 허리케인 밋치Mitch는 중남미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마을과 도로와 다리가 파괴되고, 몇 천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온두라스에서는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과 100만 곳 이상의 산사태로 농작물이 거의 괴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FAO의 이안 쉐리트Ian Sherrit 씨는 허리케인 밋치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이 관여된 재해입니다. 온두라스에서는 많은 숲이 계속하여 파괴되어 왔습니다. 국토의 80%가 언덕땅이기에, 토양이 나빠져 호우에 취약해졌습니다.”

 

 

 

 

온두라스의 수도 교외의 언덕땅에는 나무가 없는 산사태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저쪽에서는 농민들이 옥수수를 심으려고 숲을 불태우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허리케인의 피해가 컸던 까닭이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허리케인의 직격을 받았으면서도 예외적으로 수확이 줄지 않은 지역이 있다는 점이다. 온두라스 서부의 오지 렘피라Lempira주州가 바로 그곳이다. 이 땅에 사는 선주민 렌카Lenca족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으로 알려진 부족인데, 거기에서는 고대부터 전통농법이 계승되어 1990년대 전반에 FAO가 시작한 프로젝트로 이 농법이 촉진되어 있었다. 렘피라주의 풍부한 수확은 이미 자취를 감춘 고대 농법의 가호로 산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농법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허리케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전통농법을 부활시킨 지역은 1997년 엘니뇨의 심각한 가뭄에도 손실이 훨씬 적었다.


“가뭄을 일으키는 엘니뇨나 밋치와 같은 이상 기후는, 오히려 우리에게는 최고의 동료입니다. 전통농법을 하지 않던 사람은 생산물을 잃었지만, 실천한 사람은 많은 농산물을 손에 넣은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농업 전문가인 카를로스 제라야Carlos Zelaya 씨는 말한다. 전통농법을 받아들이는 지역이 엘니뇨를 겪은 뒤에 급증하고, 허리케인 밋치에도 토양침식과 작물 피해가 적다는 사실이 농민들에게서 보고되었기에, 허리케인의 해결책으로도 전통농법은 계속 퍼지고 있다.



생명이 되살아난 온두라스의 언덕


그런데 20년 전에는 부대밭 방식의 농업(slash-and-burn)으로 토양이 약해져 농민들은 물 부족과 수확량 감소로 고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비르힐리오 리스Virgilio Reyes 씨는 이렇게 떠올린다.


“이전에는 이 지역 전체가 희망을 잃고 있었습니다. 수확하기 전 몇 개월은 식량이 모자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녔습니다. 언덕의 숲을 불태우면 처음 몇 년은 농사가 잘 됩니다만, 결국 모든 흙이 개울로 쓸려 내려가 버립니다. 그렇지만 이제 신기술로 땅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비르힐리오 씨는 FAO가 프로젝트를 시작하자마다 0.8ha 정도의 농지에 1993년 전통농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용 식량과 땔감, 가축의 먹이를 자급하는 것뿐만 아니라 농사땅으로 수익도 올리고 있다.


그럼 생태농업의 측면에서 전통농법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첫째는 생산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부대밭 농업에서는 생산력이 겨우 몇 년밖에 지속되지 않고 그 뒤 밭은 방치된다. 하지만 전통농법에서는 10~12년이나 생산이 지속된다. 흙의 질도 지속되는 바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좋아진다.

 

둘째는 전통적인 부대밭 농업과 비교하여 수확량이 많다는 점이다. 전통농법을 받아들인 농민들은 과거 10년 옥수수는 1200~2500㎏/㏊, 콩은 325~800㎏/㏊으로 수확이 배 이상 늘었다. 그 결과 자가 소비의 수요가 채워지고, 잉여 농산물을 판매할 여유도 생겼다. 농민들은 채소와 과실과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고, 닭과 돼지도 샀다. 그리고 비료와 그밖에 투입 자재를 구입하는 조직도 결성하고, 지방 시장과 좋은 관계를 확립하며, 채소 텃밭을 시작하여 식생활도 개선되고 있다.


셋째는 토양과 수자원이 보전되는 것뿐만 아니라, 농촌의 삶도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심각하게 물이 부족한 계절을 고민하던 일도 줄고, 음용수의 수질도 좋아졌다. 전통농법의 면적은 7000㏊ 이상 되는데, 6000명의 농민이 전통농법을 받아들여 약 6만㏊의 2차림이 자연히 갱신되어 새, 곤충, 야생화도 나무와 함께 돌아왔다.


콜롬비아에 있는 국제 열대농업 센터(CIAT=Centro Internacional de Agricultura Tropical)에서 전통농법을 연구하는 아라셀리 카스트로Aracely Castro 씨는 폭넓은 이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만약 농민들에게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으면, 여러 가지를 언급하겠지요. 더욱 많은 물, 개선된 식량 안전 보장, 그들은 더 건강해지고, 아이들은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또 그들은 그 천연자원을 특별히 관리하는 일조차 유의하고 있습니다.”

 

 

 

 

숲속에서 작물을 기르는 렌카족


이 전통농법은 퀘숭얼의 식물을 베어 덮는 혼농임업 체계(Quesungual Slash and Mulch Agroforestry System)로 유명하다. 퀘숭얼은 선주민의 말로서, 토양·식물·흐름을 뜻하며, 온두라스 남서부에 있는 선주민의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이 농법이 가장 처음에 특정된 마을의 이름을 존중하여 농법에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생태적으로도 효율적인 농법에는 주요한 네 가지 원칙이 있다. 부대밭을 하지 않는다. 겉흙을 쭉 덮는다. 갈아엎지 않고 농사짓는다. 효율적인 거름을 쓴다.


예를 들면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생활도 좋아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비르힐리오 리스 씨는 해마다 햇빛이 비치도록 나뭇가지를 친다. 그리고 잎과 가지와 오래된 옥수수의 부산물은 흙을 덮는 데 쓴다. 그리고 쟁기질도 하지 않으며 불도 지르지 않는다. 곧, 중앙아메리카의 고지대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부대밭 방식의 이동 농업과는 대조적으로 농사땅을 준비하려고 언덕의 나무를 태우지 않고, 식용작물과 사료작물의 양분 경쟁을 막으며, 흙을 덮는 데 쓰려고 신중히 나뭇가지를 친다. 목재로 쓰면서 나온 부산물은 흙을 덮는 데 쓰인다. 그리고 첫해에는 개척하는 작물로 수수와 콩이 그 멀칭 안에서 자라도록 심어지고, 그 뒤에는 주작물로 옥수수 등을 기른다. 그 뒤에는 그늘이 지지 않도록 1년에 2~3번 나무나 떨기나무를 솎아베어 웃거름이 되는데, 거기에도 리타와 작물 부산물이 멀칭의 비료로 더해진다. 이는 곡식류를 숲속에서 재배해 온 렌카족의 노하우를 활용한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섞어짓기이다. 천연의 나무를 남기면서 콩, 옥수수, 수수, 조, 꼴, 부가가치가 있는 과실과 채소도 함께 심는다.

 

 

 

 

세 번째 특징은 갈아엎지 않고 재배하는 점이다. 변함없이 토양을 덮으면서 갈아엎지 않고, 거기에 작물을 곧뿌림(직파)하여 부대밭을 하지 않기에 2차림도 재생시켜 나간다. 마을을 둘러싼 밭은 급경사에 위치하여 있으며, 심각한 토양침식과 산사태를 가져오는 호우와 이따금 가뭄도 찾아오는데, 이 농법에서는 흙을 보호하여 보수력도 높고 토양도 개선시켜 나간다. 게다가 농민들이 농법을 확립·유지하는 데에 부대밭보다도 적은 노동력만 든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국제 열대농업 센터를 포함한 아홉 개 단체의 협회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이후, 지금 세계은행과 온두라스 정부는 유럽에서 건너온 침략자들이 가져온 몇 세기에 걸친 부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이 농법을 프로젝트 지역 이외에도 널리 퍼뜨리고 싶어 한다.



온두라스부터 니카라과, 아시아·아프리카로


국제 열대농업 센터는 퀘숭얼 농법이 온두라스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부터 비슷한 영역에서도 이 농법이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물과 식량 도전 프로그램(Challenge Program on Water and Food)’을 통하여 니카라과 북서부에도 2005년 이 체계를 시험적으로 도입해 보았다. 결과는 최고였다. 전통농법은 농민들에게 환영받아 실증 지역을 뛰어넘어 퍼져 부대밭 농법은 꽤 사라졌다. 그리고 콜롬비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제 열대농업 센터, 열대 토양의 생태와 지력(TSBF= Tropical Soil Biology and Fertility), 중미의 토양을 통합 경영하기 위한 협회(MIS= Consortium for the Integrated Management of Soils for Central America) 등의 연구자들은 ‘물·식량 도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이 신비한 전통농법의 비밀을 풀고자 연구를 시작했는데, 최소한으로만 토양을 교란하는 점, 작물을 심은 부분만 웃거름을 주는 방식의 효율이 좋은 점 등 성공의 열쇠를 특정·정량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평가를 바탕으로 국제 열대농업 센터와 FAO의 과학자들은 가뭄이 잘 드는 이외의 지역인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고지대에서도 이 농법을 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CPWF 프로젝트는 이 심플하지만 유효한 체계를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고지대에 퍼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아라셀리 카스트로 씨도 라오스와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고지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본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와 안데스의 열대 지역에서도 시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농민들이 기후변동에 대응하는 동시에 더 생태 효율적인 체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 농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동과 물 부족의 고통을 아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한단 말입니까.”

 

 

 

 

개혁은 지역 사회에서부터


물론 도입할 때 배려해야 할 요소가 많다. 옳은 나무를 고르고, 옳은 방식으로 그것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극복해야 할 문화적인 장벽도 있다. 예를 들면 밭을 덮어 놓는 것은 농사땅을 깔끔하지 않게 보이도록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화적으로 어려운 농민도 있을 것이다. 또 연구자들은 프로젝트를 보급하는 데에는 융자 등 지속가능한 개발을 향한 정부의 지원 정책에 더해, 사회 조직도 중요하다고도 강조한다.


온두라스에서 전통농법은 외부에서 지도를 받아서가 아니라, 농민들이 주변의 방식을 모방하면서 급속히 퍼졌다. 예를 들면 니콜라스 메히자Nicolas Mejilla 씨는 기술적인 조언은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에게서 영감을 얻고, 나머지는 자기 스스로 해결했다.


렘피라 프로젝트의 기술 조언자로 있는 이안 쉐리트 씨는 개혁은 외부의 기술자가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 내부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떠올린다.


“당시 이러한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면, 공산주의자가 광신적인 생태주의자가 되었다는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그렇지만 냉전 이후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도 이런 생각을 제도화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om Gibb, Saving Honduras after Mitch, BBC News, 09Mar, 1999

 (2) Luis Alvarez Welchez,et.al,Unravelling the Mysteries of the Quesungual Slash and Mulch Agroforestry, 18th World Congress of Soil Science July 9-15, 2006.

 (3) Indigenous agroforestry: A bright spot in land management,Aug12, 2006. 

 (4) Ancient lesson in agroforestry - slash but don't burn,Nov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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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전통농업  ― 치남파Chinampa1)




도시를 먹이는 물위의 채소밭


인구 2000만의 거대도시 멕시코시티는 고대 아즈텍제국의 수도 테노크치틀란Tenochtitlan과 주변에 세워져 있다.) 테스코코Texcoco 호수의 섬 위에 테노치틀란이 세워진 것은 1325년인데, 그곳은 인구 20만이 사는 기술적으로 고도의 도시였다.


1521년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 건너왔는데, 그 나라의 탐험가 베르날 디아즈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는 도시의 시장인 틀라텔로코Tlatelolco가 세비야의 2배나 되고, 6만 명 이상의 소비자와 상인이 흘러넘쳤다고 기록했다. 게다가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왔던 시점에 대부분의 도시민은 농민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멕시코 분지는 강우도 불규칙하고, 서리 피해도 발생하며, 땅심도 부족하여 농사짓는 데에는 제약도 많다. 고대 아즈텍제국은 어떻게 늘어나는 도시민을 먹여 이만큼 번영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치남파라고 불리는 인공의 ‘물위 채소밭’에 있다. 미시간대학의 제프리 파슨스Jeffrey Parsons에 따르면, 이 복잡하고 효율적으로 물을 대는 ‘도시농업’이 1년에 3모작으로 작물을 생산하여 도시가 소비하는 식량의 절반에서 2/3를 생산했다고 한다.


치남파는 멕시코 분지 안의 강을 수원으로 하는 남쪽의 담수호 소치밀코Xochimilco와 찰코Chalco 호수, 중앙부에 있는 테스코코 호수, 염분을 함유한 북쪽의 줌판고Zumpango와 살토칸Xaltocan 호수 등의 얕은 소택지에서 행해지던 고대 농법이다. 치남파의 생산성 수준은 아즈텍족이 소부족에서 강대한 부족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아르밀라Armillas(1971)는 치남파가 10만 명을 부양했다고 평가한다.

 

  

현재 이러한 호수나 소택지는 거의 물을 빼서 도시화가 진행되어, 치남파는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소치밀코의 물위 채소밭’ 등 약 2300ha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고고학 조사를 통해 스페인 사람들이 아즈텍을 찾았을 당시에는 멕시코 분지 안에 얕은 호수가 드넓게 있어, 그 광대한 2곳의 남쪽 호수 둘레의 2만ha가 치남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치남파 농업이 언제 탄생하여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거의 알 수 없다. 아즈텍 전기(1150~1350) 이전에는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즈텍의 농업이 기원전 14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1세기의 고대 도시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은 25만 명의 인구를 품고 있었는데 그 식량을 제공한 것이 치남파였고, 똑같은 농법이 유카탄반도의 저지대, 수리남의 습지대, 페루와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에서도 발견되고 있기에 그 기원이 아즈텍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어쨌든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오기 이전까지 멕시코에서는 소농들이 지속가능한 농업을 널리 행하고 있었다.



지속가능한 고등 집약농업으로 도시가 필요한 물자를 제공


치남파는 둘레의 습지와 얕은 호수에서 진흙을 퍼서 둘레의 물높이보다 0.5~0.7m 높이고, 너비 2.5~10m, 길이 20~40m, 가장 길게는 100m의 ‘인공 섬’을 쌓아 올려, 그 위에 섞어짓기를 행한 농법이다. 그리고 토루의 옆쪽에는 나뭇가지와 버드나무(아후에조테스)를 심어서 강하게 만들었다. 고고학과 민족지학의 자료를 통해, 치남파에서 어떠한 건설 기술이 쓰이고, 어떠한 농법이 이루어지며, 어떤 작물이 재배되었는지도 안다. 그럼 치남파 농법은 생태농업의 관점으로 보아 어떤 우수한 점이 있을까?

 

 

 

 

첫째는 높은 생산성이다. 평지에서 감자 수확량은 1~4t/ha, 옥수수는 2.6~4.0t/ha인데, 치남파에서는 8~14t/ha, 3.5~6.0t/ha로 수확량이 많아 15~20명/ha을 먹일 수 있었다. 높은 두둑 위에서는 옥수수·콩·호박·고추와 카사바·옥수수·콩·색비름을 섞어서 재배하는 동시에, 다양한 지피작물이나 과실나무(파파야, 멕시코 체리, 선인장)도 심고, 그린 토마토, 치아chia, 색비름, 차요티chayote, 칠라카요티chilacayote, 식용 허브(uauhzontli、quiltonil、quelite cenizo) 등 다양한 식물도 심었다. 소쿠리나 직물용으로 다양한 풀도 재배했다.


이러한 집약 재배를 가능하게 한 체계의 하나는 모판에 있었다. 농민은 미리 준비한 모판에 씨를 뿌리고, 그 뒤에 모종을 다른 밭으로 옮겨 심었다. 차피네스chapines라고 불린 뿌리내림이 좋아 선택된 건강한 모종을 아주심기하여, 앞그루 작물을 수확하기 전에 다음 작물을 준비하여 한 해 동안 경작할 수 있었다.


둘째는 연속하여 농업을 행했지만 많은 양의 유기비료를 주어 땅심이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은 둘레의 얕은 호수와 습지대의 수면보다 농지를 높이려고 식물이나 진흙층을 쌓아 올려 두터운 겉흙의 높은 두둑(amellones)을 구축했는데, 그 농지 위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부산물을 먹이로 돼지, 닭, 집오리 등의 가축을 울타리 안에서 기르고, 그 외양간두엄으로는 높은 두둑에 거름으로 주었다. 그리고 유출된 가축 폐기물도 운하에서 붙들어 놓았다. 잔하스zanjas라고 불리는 운하와 둘레의 호수는 거대한 양분의 저수지로 기능하며, 호수에서 자란 수생 식물이 물속의 양분을 흡수·농축했다. 예를 들면, 물옥잠은 말린 것으로 최대 900㎏/ha·日이나 자랐다. 이러한 식물에 더해 운하나 호수 바닥에 고인 양분으로 비옥한 토양, 동식물의 분해물, 유기 부산물을 양분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순환시키거나 흙탕물을 관개용수로 써서 비교적 소량의 외양간두엄만으로도 땅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 트락스칼라Tlaxcala주州에서 치남파로 조직된 농민들은 1~4년마다 1m 깊이의 운하를 파내고 있는데, 대략 질소가 1000㎏/ha, 인이 10㎏/ha, 칼륨이 120㎏/ha인 양분을 얻는다. 또 현재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자주개자리를 2~5년 재배하고 그 뒤에 옥수수를 재배하는데, 자주개자리는 1년에 30~300㎏/ha의 질소를 고정한다. 또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섬의 둘레에는 버드나무와 오리나무 등의 질소 고정 방사균과 Actinorhizae와 공생하는 나무도 심어서 그것까지 양분을 공급한다.


나무는 그늘을 만들고, 물고기와 물새의 생식 환경도 제공한다. 운하에는 양식(물고기, 아홀로틀)도 하고, 물새도 사육했다.


또한 아즈텍 시대에는 사람의 똥오줌도 활용했다. 도시에서 발생한 똥오줌을 순환시켜 테노크티틀란은 건강한 도시환경을 유지해 나아가고, 농민은 기본적인 식량을 끊임없이 자급할 수 있었다(Gliessman, 1998).


셋째는 병해가 적은 점이다. Lumsden et al.(1987)은 치남파의 토양과 차핑고Chapingo 근교에서 근대농업을 행하는 토양에서 기른 모종으로, 피시움속Pythium屬 균의 뿌리썩음병 발생 정도를 비교했다. 그런데 피시움 부패균(Pythium aphanidermatum <Edson> Fitzpatrick)을 접종했어도 치남파의 토양에서는 피해가 억제되었다. 유기물과 칼슘, 칼륨 외에 미네랄을 많이 함유한 치남파의 토양에서는 트리코델마균Trichoderma spp, 슈더머너스균Pseudomonas spp, 푸사리움균Fusarium spp 등의 저항균이 활발히 활동하여, 청경채 입고병균 등, 피시움속 균의 토양 전염성 병균이 억제된다.


치남파 토양의 기생 선충을 조사한 멕시코와 미국의 협동 연구도 있다(Zuckerman et al.). 치남파에서는 선충 피해가 적기 때문에 온실과 생육 상자에서 시험(growth chamber trials)해 차핑고의 토양과 비교한 바 역시 피해가 적었다. 그리고 선충 대항성이 있는 9종류의 유기체가 분리되었다. 높은 두둑의 병해 방제 효과를 보고한 사례는 적지만, 치남파는 병을 막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넷째는 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물이 넉넉하단 점이다. 치남파의 높은 두둑은 너비가 좁다. 또 지하수의 높이와 표층이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운하의 물이 모세관 현상으로 확실하게 침투되고, 뿌리 근처의 수분이 늘 유지된다. 또 가령 갈수기에 뿌리의 훨씬 밑으로 물높이가 낮아지더라도 카누로 수로를 이동하여 운하에서 물을 댈 수 있다.


다섯째는 운하가 지표 부근의 미세한 기후를 조정하여, 밤에 기온이 떨어지고 서리가 발생하는 가능성을 낮춘다.


여섯째는 운하가 교통기관으로도 기능했다는 점이다. 생산물의 대부분을 운하를 통해 시장으로 쉽게 낼 수 있다.


이러한 치남파는 태양력의 계절과 아즈텍의 물의 신인 틀랄록Tlaloc이 결합된 양식으로 유지되었다.



근대농업에서 위기에 직면한 치남파 농법


지금도 치남파 농법은 멕시코시티 관엽식물의 45%를 생산하고 있다. 전통농법은 생산만이 아니라 관광산업의 기회도 창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치남파 농법은 근대화에 따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소농들은 교육을 받지 않아 질이 낮다는 좋지 않은 인식이 퍼져, 소농들이 신기술이나 기계화를 바라고, 전통농업을 계속해야 할 요인이 부족한 점, 그 복잡한 영농 방식이 시장 논리에서는 평가되지 않으며, 농업 정책과 보조금이 대규모·자본집약적인 단작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농법의 부활과 지역 재생


하지만 치남파 농법은 위험 요인을 줄이고, 높은 생산성으로 지속가능하게 많은 인구를 먹이는 소농들의 식량과 삶을 보장하며, 그 결과 빈곤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최근은 최소량의 투입 자재로 생산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치남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멕시코시티는 치남파 농법에서 활용된 것과 같은 방식의 배수 처리 체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침수지와 호수에 인접한 소택지를 활용한 치남파와 같은 방식의 높은 두둑 농업은 중국과 타이, 자바, 인도와 그밖에 온 세계의 전통농법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후 변동과 관련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고 농업 생물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면에서도 그 생태적 가치를 경제적으로 정확히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1) 치남파는 고대 중앙아메리카 농업의 소농이 쓰던 방법으로, 멕시코 벨리(Valley of Mexico)에서 작물을 기를 수 있는 얕은 호수 바닥 위 긴네모꼴 지역의 비옥한 농지이다.

 

 

인용문헌

 (1) Chinampa Agricultural System (Mexico), GIAHS, FAO.

 (2) Virginia Popper, Investigating Chinampa Farming, Cotsen Institute of Archaeology, Fall/Winter 2000.

 (3) Chinampas of Tenochtitlan,History of Urban Agriculture

 (4) Miguel A Altieri and Parviz Koohafkan, Enduring Farms: Climate Change, Smallholders and Traditional Farming Communities, Third World Network, 2008.

 (5) Thurston, H. David, Plant disease management practices of traditional farmers, Plant Disease 74:96-102, 1990.

 (6) International Ag-Sieve, Elevating Agriculture to Old Heights, Rodale Institute, Ancient Farming, Volume V, Number 3,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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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의 한 농가 텃밭.

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텃밭은, 햇빛을 가리지 않는 가장 끝에 키가 큰 옥수수를 심고...

그 앞에는 팥과 콩, 옆에는 파와 호박 같은 작물을 심었다.

한곳에서 다양한 작물이 자라는 모습. 전형적인 우리네 텃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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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전통농법 밀파Milpa1)·솔라solar 농법




세계에서 가장 앞선 농업 체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농업 체계’라고 FAO가 절찬한 것이 바로 밀파Milpa라는 농법이다. 아마도 밀파는 지금까지 인류가 창조한 것 가운데에서도 가장 성공한 발명품의 하나일 것이다.2)


스페인 사람이 라틴아메리카에 새로운 식물이나 닭고기, 돼지, 양, 소 등의 가축을 들여왔는데, 밀파는 그 이전부터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에서 행하던 전통농법이다. 캠퍼시노Campesino란 라틴아메리카의 자원이 모자란 농민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그 문화나 농업의 특성은 다양한 가축과 채소를 솔라solar라 불리는 텃밭과 함께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3)


지금도 마야족의 농민은 좁은 밭에서 부대밭 농업을 행하면서, 이 밀파 농법으로 필요한 식량을 자급한다.4) 높은이랑이나 둑 위에서 사이짓기하는 작물의 김매기나 수확을 손으로 하기에 그런 면만 보면 원시적이다. 하지만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도 수확량이 높다. 밀파의 옥수수밭에 필적할 만큼 생산적이고, 또 지속가능한 유기농업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거의 볼 수 없다.



지속가능한 생태계 관리로 농촌이 필요한 물자를 제공


그럼 밀파는 생태농업적으로 보아 어떤 점이 우수할까?


첫째는 옥수수의 단작 재배와 비교하여 2ha 이하의 좁은 면적으로도 다양한 식용작물을 재배하여 전체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밀파는 ‘세 자매’라고도 불리는 옥수수·리마콩·호박을 사이짓기하는 특징이 있다. 리마콩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흰 강낭콩이다.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나 색비름(amaranth), 약초, 퀘리테스(명아주과)라고 불리는 식용 풀을 함께 기른다.


옥수수, 콩, 호박을 사이짓기하여 콩과 식물의 질소 고정 능력으로 자연히 땅심이 개선되기에 화학비료는 넣지 않는다. 게다가 부대밭 농법의 돌려짓기는 식생이 자연스레 갱신되듯이, 2년 재배에 8년을 묵히는 기간이나 식생의 2차 재생을 고려한다. 묵히는 기간을 짧게 줄이지 않고 이 돌려짓기가 이어지는 한, 이 체계는 꾸준히 지속될 수 있다.


둘째는 병충해에 강한 점이다. 다양한 작물을 사이짓기하는 것으로 병충해의 생물적 방제력을 높여, 농약은 최저한도만 쓴다.


셋째는 지구온난화의 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밀파에서 생산된 옥수수의 부산물이나 풀을 가금류나 소에게 먹이는데, 이를 사료로 주기에 제초제가 쓸데없다. 그런데 근대적인 사육우에서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되는 이산화탄소나 메탄가스가 발생한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Drymaria laxiflora Benth와 같은 풀은 소의 세포내강 안에서 사료의 발효 효율을 높여 이산화탄소나 메탄가스의 발생을 줄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넷째는 양질의 식재료를 자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축류는 싼값으로 고품질의 단백질인 달걀이나 우유를 제공하고, 밀파로 재배한 작물은 영양학으로 보아도 균형 잡힌 좋은 음식이다. 단백질이나 니아신을 합성하는 데에는 아미노산의 리신이나 트로톱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옥수수는 이를 결핍하고 있다. 그런데 콩에는 리신이나 트로톱판이 함유되어 있고, 호박은 비타민을 제공한다.


다섯째는 밀파가 자급용 식량이나 사료작물만이 아니라, 건설자재, 땔감, 양봉용 2차 식생이나 수렵하는 동물과, 농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재를 종합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이다. 밀파에서는 긴 휴한기가 있는데, 그 휴한지가 들새나 작은 포유류의 서식지가 되어 생물다양성을 보전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숲 관리와 함께 자급용 수렵에 좋은 생태계를 만든다.



2만 종의 옥수수를 보전


생태계만이 아니다. 밀파 농법은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에서도 농약이나 화학비료, 개량 품종을 쓰는 근대농업의 농지와 비교하여 매우 풍부하다. 예를 들면, 대개 옥수수는 15품종, 콩은 5품종, 호박은 3품종, 그리고 피망도 6품종 이상을 재배한다.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의 품종이 2만 이상이며, 멕시코 남부와 중앙부에서만도 약 5000종이 특정되어 있다. 오악사카Oaxaca의 어느 마을에서 연구자들은 17개의 다른 미환경微環境을 특정했는데, 거기에서는 26종의 옥수수가 재배되고 있었다.


캠퍼시노는 그 텃밭인 밀파·솔라가 자신의 생활을 성립시키는 자원이며, 민족의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신에게 기원하며 감사해 왔다. 하지만 솔라는 생활의 장인 동시에 재미와 품종의 원산지, 실험의 장이었다. 캠퍼시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종자 선발이나 교환을 통해 고원의 저온 조건에서도 농업이 행해지는 품종을 포함하여, 고도나 토양 유형과 강우와 같은 환경의 차이에 대응하고자 근대적인 하이브리드 품종이나 GMO보다도 훨씬 건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다양한 토종을 육종해 왔다.


옥수수의 고대 원종이라 하는 것은 멕시코부터 과테말라에 걸쳐서 자생하던 테오신트Teosinte인데, 이것도 몇 세기나 밀파를 통하여 캠퍼시노가 보전하여 왔다. 근대농업에서는 유전자원의 다양성을 잃어버렸지만, 밀파에서는 그것을 지키고 있다. 곧 멕시코는 인종에서도, 식물 유전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보고인데, 밀파는 세계에서 귀중한 유전자원을 보존하여 온 농법임을 알 수 있다.



근대농업으로 위기에 직면한 밀파 농법


하지만 지금 밀파 농법은 위기에 방치되어 있다. 멕시코 정부는 과거 30년에 걸쳐 화학비료나 농약, 개량 품종 등 녹색혁명 기술에 따른 옥수수의 단작과 푸에블라 계획(Plan Puebla)을 추진했다. 멕시코 정부의 농업보조금(PROCAMPO)은 충분하지 않지만, 그것조차도 옥수수를 단작으로 재배하는 농민에게만 준다. 그뿐만 아니라 멕시코에 도입된 근대농업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하다.


화학비료를 지나치게 주어 토양이 산성화되고, 지하수가 오염되었다. 제초제를 뿌려 콩이나 호박이 영향을 받고, 식용 풀도 말라 버렸다. 농약의 뿌려서 이전에는 풍부했던 매쿼이maguey 벌레, 물고기나 민물새우 등의 식용 곤충도 죽어 버렸다. 그리고 부시, 클린턴, 오바마 정권이 몬산토 사의 유전자조작 옥수수를 멕시코가 활용하도록 압력을 넣어, 토종 옥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현지의 환경 조건에 맞지 않는 다수확 옥수수 품종의 단작이 진행된 결과, 작물의 수확량이 떨어져 생산비가 폭등하여 수입이 줄었다. 그리고 지구화에 따른 옥수수 값의 하락이나 보조금 삭감도 농민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지금 멕시코의 농촌에 사는 1200만의 선주민들의 93%가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남성은 농가외소득을 구하러 돈을 벌러 나가야만 하여 몇 백 만의 멕시코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농촌에 남은 사람은 여성이나 아이, 노인뿐이고, 지금은 그들이 농사짓고 있다. 하지만 노동력이 줄면 전통 기술도 유지할 수 없다. 밀파 농법과 관련한 식물 품종의 지식도 잃어 가고 있다. 지금 멕시코는 옥수수를 자급할 수 없어 때로는 대량의 옥수수를 필요 이상으로 미국에서 수입해야만 한다. 밀파의 다양함으로 풍족하면서 영양적으로도 균형 잡힌 식사를 하던 것도 수입 옥수수나 정크푸드를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변했다.



전통농법의 부활과 지역 재생


그러나 밀파 농법을 다시 도입하여 옥수수의 단작으로 고갈된 토양을 수복하고, 더욱이 지속가능하게 환경에 우수한 농업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밀파에서는 홍수의 위험을 줄이고, 수질을 개선하며, 토양침식을 막고, 기후를 제어하는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똑같은 상황에 놓인 세계의 다른 지역의 사례도 된다. 그리고 밀파 농법으로 얻은 교훈은 현지의 입지조건에 알맞은 기술이 개발될 경우에만 캠퍼시노가 농업을 계속할 유인책을 갖고, 토종의 유전적인 다양성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지의 전통적인 지혜를 보전하고, 캠퍼시노가 자신의 유전자원을 관리하고, 지역 자급을 해 나가기 위해서도 전통적인 밀파를 부활시키는 데에 희망이 있다.

 

 

written by Yoshida Taro, translated by 김서방

 


1) 중앙아메리카에서 쓰던 작부체계. 유카탄반도 지역의 멕시코에서 가장 널리 형성되었다. 그 단어 밀파milpa는 멕시코어로 ‘들판’이란 뜻이고, 나와틀어의 ‘들판으로(milli<field>+pa<towards>)’라는 구에서 유래했다. 고대 마야인과 중앙아메리카인들의 경작 방법에 기반한 밀파 농사는 옥수수, 콩, 리마콩, 호박(squash)을 생산했다. 밀파의 주기는 농사를 짓는 2년과 묵히는 8년이다.

2)  Alexis Baden-Mayer & Ronnie Cummins, Thank Indigenous People for the Food We Eat, The Milpa Agroecosystem and Its 20,000 Varieties of Corn, Organic Consumers Association, Nov26, 2009.

3) Milpa-Solar Systems (Mexico), GIAHS, FAO.

4) "Milpa" Agroecosystems in Yucatan, Mexico, Agroe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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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의 효율성



효율적이지 않은 미국의 바이오에탄올 생산


복잡한 농업경제도 에너지 측면에서 보면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온난화 대책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 바이오에탄올을 예로 보자.


미국의 농지에서는 3000평에서 약 6톤의 옥수수를 수확하고, 이를 가공하여 처리하면 1240ℓ의 에탄올을 얻는다. 하지만 원료인 옥수수를 심어 재배·수확하는 데에는 3000평에 약 1325ℓ의 화석연료가 들어간다. 옥수수를 부수고 가공·처리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든다. 92%의 물과 8%의 에탄올을 분리하는 데에는 최대 3단계의 증류 과정이 필요하고, 가솔린과 혼합하고자 99.8%의 순수한 에탄올을 제조하는 데에도 더욱 많은 처리나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에탄올을 제조하는 데에는 실제로 에탄올에 포함된 것보다도 약 70%나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왜 에탄올을 제조하면서 에탄올이 아니라 화석연료가 쓰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코넬대학 농업생명과학부의 데이비드 피멘텔David Pimentel은 말한다. 에탄올을 제조하고자 미국은 대기업에게 연간 약 10억 달러의 보조금을 주는데, 그것만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에탄올 생산의 경제 분석에서는 환경에 악영향을 끼는 점도 간과하기 일쑤다. 


“미국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곳에서는 잘 관리된 농지라도 12배나 빠르게 토양침식이 진행되고, 관개용 지하수도 자연히 함양되는 양보다 25%나 빠르게 퍼 올리고 있습니다. 옥수수를 재배하는 환경은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옥수수의 약 70%가 가축이나 가금류의 사료가 되고 있기에, 옥수수가 에탄올 제조에 쓰인다면 옥수수 값이 오르고, 그에 따라서 고기·우유·달걀의 값도 오른다.


“에탄올 제조용 보조금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에 더해, 소비자는 시장에서도 꽤 비싼 식품비를 지불하게 됩니다.”


미국인들의 자동차는 평균 연간 1,6000km나 달린다. 가솔린과 섞지 않고, 순수하게 옥수수로 만든 에탄올만으로 달리게 하는 데에는 약 3220ℓ의 연료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7명의 미국인을 먹일 수 있는 4.4ha(13200평)의 농지가 요구된다. 미국에 있는 자동차 모두를 100% 에탄올 연료로 움직이는 데에는 미국 땅의 97%에 원료가 되는 옥수수를 재배해야 한다. “결국 옥수수는 에탄올 생산을 위해 재생가능한 원료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놓친 절호의 기회


‘추출하기 위한 에너지’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보다 커져 버렸고, 자원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 이를 EROI(Energy Return on Investment)라고 부른다. 그리고 농업의 생산성을 에너지 측면에서 분석한 시초는 피멘텔 교수의 1973년 논문인 “식량 생산과 에너지 위기(Food Production and the Energy Crisis)”일 것이다.


그럼 농업 생산을 에너지 측면에서 처음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누구일까? 세르게이 포돌린스키Sergei Podolinsky(1850~1891)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의사가 그다. 당시 포돌린스키는 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 살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농업 통계를 가지고 삼림·자연 목초지·인공 목초지·밀밭의 생산성을 비교했다. 포돌린스키는 사료나 짚의 에너지를 3750㎉/㎏, 밀을 2550㎉/㎏이라 하고, 노동력도 말 645㎉/時, 인간 65㎉/時라고 ㎉로 환산하여 1880년 에너지의 입력/출력비를 계산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서는 인력이나 축력이 농업에 투하되는 만큼 면적당 수확량도 늘어나고 있다. 이를 통해 포돌린스키는 노동력에 따라서 ‘지구의 에너지 축적량’이 늘어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논문은 잘못되었다. 포돌린스키는 탈곡에서 소비하는 증기기관의 에너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구아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볼리비아·페루 동맹군과 칠레 사이에서 벌어진 초석 전쟁(1879~1884)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비료를 에너지로 환산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돌린스키는 그 뒤에 확립된 농업 에너지 수지와 기본적으로 같은 방법론을 이미 이용하고 있었다.


그럼 포돌린스키는 왜 농업 생산을 에너지란 측면에서 분석하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포돌린스키가 열역학의 관점에서 경제 법칙을 밝히려고 최초로 시도한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1881년에 발표한 기사에서 포돌린스키는 노동가치설을 자연과 에너지, 그리고 경제의 순환과 통합하려고 했다. 노동가치설(labour theory of value)이란 인간의 노동이 가치를 만들고,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한쪽에서 열역학도 발표했다. 프랑스의 니콜라스 레오나르도 사디 카르노Nicolas Leonard Sadi Carnot(1796~1832)가 열이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할 때 일이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한 것은 1824년이었고, 이 이론을 발전시킨 폴란드 출신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시스(1822~1888)는 1850년에 열역학 제1법칙, 1865년에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정식화하고, 엔트로피란 개념도 확립했다. 포돌린스키는 자신이 카르노나 클라우시스의 뒤를 좇고 있는 것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포돌린스키는 태양에너지의 흐름과 석탄 형태로 저장된 에너지를 쓰는 것의 차이에서도 언급했는데, 노동이 중요한 것은 땅속에 축적된 기존 에너지를 전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너지의 축적량을 늘리는 데 있다고 했다.


“탄광 노동자들의 에너지 생산성은 농민들의 그것보다는 많다. 하지만 석탄의 에너지는 일시적이다. 석탄으로 만든 일은 열에너지의 형태로 반드시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포돌린스키는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모든 천연자원의 부족을 극복해 무제한적인 물질적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 모델은 실패하고 있다.”


포돌린스키는 경제 성장을 발목 잡는 것은 생산 관계가 아니라, 물리학과 생태학 법칙의 한계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열역학 법칙을 조건으로 더욱 큰 체계에 묻혀 있는 하위체계인 경제를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엥겔스에게 전했다.


하지만 포돌린스키에 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반응은 차가웠다.


“해머, 나사 또는 바늘의 에너지 가치를 생산비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 관계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엥겔스는 포돌린스키의 시도를 마르크스와도 논의했는데, 마르크스도 열역학 제2법칙에는 비판적이라 침묵했다. 이리하여 가장 빨리 농업을 에너지 측면에서 분석한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생태학적 사회주의를 구축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통농업의 에너지 효율


1940년대 이후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생태학자들이었다. 이 일은 피멘텔에게도 전승되었다. 한편에서 인류학자들도 전통농업의 에너지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로이 라파포트Roy Rappaport의 연구(Pigs for the Ancestors, 1967)는 뉴기니의 에너지 생산성을 밝혔다. 그러면 피멘텔의 연구 성과를 아래에 정리하자.



부대밭(火田) 농업 체계  2ha/人  8:1


초기 부대밭 농업 체계는 20년 간격으로 농업을 행했다. 양분을 다 쓸 때까지 약 2년 정도 농사를 짓고, 그 뒤에는 묵은 땅으로 되돌린다. 20년 이상 묵히고 갈지 않으면 양분과 생산성이 회복되기에 지속가능하다. 부대밭 농업에서는 도끼나 괭이 같은 농기구를 제조하는 데에만 화석에너지가 쓰이는데, 이것들은 숯으로도 만들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는 태양에너지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밖에 필요한 투입 자재는 10.4㎏/ha의 옥수수 종자뿐이다. 약 1944㎏/ha의 옥수수 생산에 드는 노동력은 약 1144시간이고, 이는 연간에 성인이 일하는 전체 노동시간의 약 60%에 해당한다. 농민은 약 3000㎉/日의 식량을 소비하고, 식량을 요리하는 데에는 약 6000㎉/日의 땔감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체계의 입력/출력비는 8.4:1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옥수수 생산에 필요한 약 1200시간/ha의 노동력은 다른 지역의 작물, 그중에서도 곡류라도 전형적으로, 현재 중국에서는 미국의 집약적인 곡물 생산보다 면적에 비하여 더 많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약 1200시간/ha의 노동력이 곡물 생산에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한 사람을 먹이는 데에는 최저 2ha, 5인 가족이면 10ha의 농지가 드는데, 이 체계는 1ha의 농지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데에 10ha의 토지가 필요하다. 현재 세계의 인구를 약 60억으로 환산하면, 지구에는 0.25ha/人 이상의 농지밖에 없다. 부대밭 농업은 지속가능하지만, 거기에 필요한 토지의 1/8밖에 없다. 결국 농지의 부족이 이 기술의 제약으로, 현재나 미래의 농업으로 유용하게 퍼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유기 가축 농업  4ha/人  4:1


그럼 부대밭 농업에서 쓰는 1144시간의 인력을 소의 힘으로 치환해 보자. 소를 약 200시간/ha 부리면 인력은 380시간/ha까지 줄고, 인력 에너지는 20,1000㎉가 된다. 소를 약 200시간 일하게 하는 데에는 150㎏의 옥수수와 300㎏의 사료가 든다. 사료는 한계경작지 2ha의 목초에서 얻을 수 있는데, 옥수수는 1944㎏/ha의 수확량에서 차감하게 된다. 또한 소똥의 약 20%(2000㎏)는 목초지나 옥수수밭에 거름으로 주고, 5인 가족의 배설물도 옥수수밭에 거름으로 준다. 또 옥수수는 토끼풀이나 살갈퀴 등과 같은 콩과의 풋거름작물과 돌려짓기하고자 필요한 토지가 1ha 늘어나지만, 옥수수 재배에 필요한 최소한의 질소(60㎏/ha)가 공급되어 토양침식을 줄이고, 토양의 유기물도 늘어난다. 이 체계에서 옥수수 생산에 필요한 총 투입 에너지는 170만㎉/ha이기에, 1944㎏/ha의 수확에서 입력/출력비는 4.1:1이 된다. 에너지에서는 부대밭 농업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데, 이 체계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면적은 약 4ha가 된다.



혼농임업 체계  3ha/人  4:1


다음으로 유기 가축 농업에 질소고정 수목을 조합한 혼농임업 체계를 생각해 보자. 1ha의 토지 가운데 0.5ha에 옥수수, 0.5ha에 콩과의 수목 레우카에나Leucaena를 심는다. 옥수수는 상술한 유기 가축 체계보다 배의 밀도로 심는데, 같은 수확량 1944㎏/ha를 얻을 수 있다. 레우카에나와 옥수수의 경쟁은 옥수수를 심기 전에 레우카에나를 베고, 8cm의 그루터기로 되돌려 잡아 놓는다. 레우카에나는 해마다 4500㎏/ha의 부산물을 생산하고, 그 가운데 잎과 잔가지가 2500㎏/ha이고 이 안에 질소가 약 2/3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토양에 돌려주면 유기 가축 체계와 같은 양의 질소 약 60㎏/ha를 거름으로 줄 수 있다. 이 체계에 쓰이는 총 에너지는 약 170만㎉이고, 입력/출력비는 4.1:1과 같다. 다만 이 체계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면적은 3ha가 된다. 더욱이 잎과 잔가지는 질소 이외의 양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토양 유기물이 되어 보수력을 높인다. 또 등고선 모양으로 레우카에나를 심어 잎과 잔가지로 멀칭을 하면 토양침식이 1년에 1t/ha로 억제된다. 나머지 2000㎏은 땔감으로 수확하는데, 이는 1세대의 땔감 수요의 약 80%를 해결한다.



집약형 기계화 체계  3:1


미국 이외의 선진국에서 행해지는 트렉터 동력을 쓰는 농업에서는 상술한 인력이나 축력의 체계와 비교해, 노동 투입량이 불과 10시간까지 줄어든다. 그렇지만 이 적은 투입 노동력을 보조하고자 농기계와 화학비료와 농약이 쓰인다. 미국에서 옥수수를 생산하는 데에는 평균 약 1000만㎉/ha, 1000ℓ/ha의 석유가 필요하다. 옥수수 수확은 8000㎏/ha로 늘어나는데, 입력/출력비는 2.8:1로 떨어진다.



집약형 기계 생산을 더욱 지속가능하게 전환


그러면 옥수수를 더 지속가능하게 생산하는 것으로, 생태적으로 더욱 건전한 기존 기술을 쓴 체계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콩 등의 적절한 작물을 옥수수와 돌려짓기한다. 이것으로 선충이나 옥수수의 병, 잡초 문제를 줄인다. 집약적인 옥수수 생산에서의 평균적인 해충 피해 손실은 12%인데, 돌려짓기하면 3.5%까지 준다. 농약도 필요하지 않고, 수확량은 약 8% 늘어난다. 둘째로 가축과 지피작물을 더한다. 수확한 뒤에 살갈퀴(겨울남) 등의 콩과 작물을 도입하면, 토양침식이나 잡초 문제가 줄고, 토양 양분도 유지된다. 외양간두엄의 활용이나 지피작물을 갈아엎고, 노동 투입량은 10~12시간/ha 늘어나는데, 수확량이 8000㎏/ha에서 8640㎏/ha로 늘고, 총 에너지의 양도 집약형 체계의 1000만㎉/ha보다도 꽤 줄어 370만㎉로 해결된다. 또 집약 체계에서는 약 17t/ha나 있는 토양침식을 1t/ha 이하까지 줄인다. 1t/ha 토양침식율은 대부분의 농업 조건에서는 토양의 재생율과 비슷하다. 이 개선된 체계에서는 집약형 기계 체계보다도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1) 토양침식을 억제한다.

2) 소형 트렉터를 쓰는 것으로 연료 소비를 줄인다.

3) 돌려짓기로 무농약 재배를 할 수 있다.

4) 가축의 거름으로 질소 비료 모두 해결한다.

5) 칼륨 양분의 대부분을 대체한다.

6) 지피작물로 재배하지 않는 동안의 손실을 억제한다.



저에너지 투입으로 고에너지 수확량


면적당 수확량만 보자면 전통농업은 근대농업만큼 생산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는 무엇을 비교의 기준으로 평가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노동에 따른 생산성으로 보면, 트렉터로 작업하는 대규모 농장만큼 유리하다. 하지만 트렉터나 화학비료에 쓰이는 화석연료를 생각하면, 투입 에너지에 따른 수확량은 전통농업 쪽이 뚜렷하게 높다. 피멘텔이 계산했듯이 에너지 효율에서는 전통적인 부대밭 농업보다도 낮다. 근대농업은 생산물 이상으로 대량으로 에너지를 소비한다.


서양의 농민들은 생산성을 중시해 주로 많은 수확량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농민들의 목표는 다르다. 전통적인 농민들은 생산성보다도 안정성이나 지속성을 중시했다. 작물도 어느 한 작물을 중시하기보다도, 작물 사이의 균형을 취하여 택했다. 그리고 낮은 투입 자재로 체계의 높은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해 나아가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수확량을 얻는다는, 저마다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다. 전통농업은 서양의 분석에서 중시되는 기준만이 아니라, 체계의 안정성이나 지속성과 관련된 생산성이라는 전통적인 농민들 자신만의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전통농법을 다시 평가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국제적인 농민과 소농의 운동, 비아 깜페시나이다. 비아 깜페시나에는 라파엘 알제리아Rafael Alegría, 조제 보베José Bové, 조아오 페드로 스테딜Joao Pedro Stedile 등의 유명한 활동가가 있는데, 4월 17일을 ‘소농의 날’로 정했다. 그리고 피크 오일만이 아니라, ‘피크 인산燐酸’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비아 깜페시나는 근대농업의 EROI가 낮고, 농업이 에너지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직면한 가운데 단작으로 농업연료(agrofuels)를 생산하는 등, 잘못된 해결책이 추진되고 있다. 그것은 식량 주권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업형 농업이 기후변동의 주요한 원인이고, 세계의 식량을 수송하며, 기계화·집약화·농약 사용·단작과 공업형 농업을 하게 만드는 것으로 종의 다양성이나 농업의 탄소저장력을 파괴하고, 농업을 에너지의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변하게 한다.”


그런데 이 과격한 주장은 뜻밖의 장소에서 평가받고 있다.



 

written by 요시다 타로, translated by 김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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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 선생님이 번역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의 저자 요시다 타로 선생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재밌는 글을 보고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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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운동이 되어 가는 생태농업



아시아·생태농업 국제회의


2010년 5월 18~22일.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토지와 농업의 개혁운동(MONLAR. Movement for Land and Agricultural Reform)의 초빙을 받아 비아 깜페시나La Via Campesina는 제2회 생태농업 모임을 개최했다.


제1회는 2009년 8월 베네수엘라의 바리나스Barinas에서 개최되었던 라틴아메리카 모임이었다. 종자나 지식의 독점·민영화, 화학비료나 농약 사용의 촉진에 대해 온 세계 소농의 커뮤니티에 생생한 주체성을 가져오고, 저항·투쟁과 자치 문화의 확립을 강화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제2회는 농민 사이의 교류나 연대를 강화하고, 저마다 지닌 지속가능한 농법의 장단점을 밝히며, 빚과 독이 없는 세계를 향하여 아시아에서 생태농업 운동을 전개하고 식량 주권의 원칙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8개국의 비아 깜페시나 참가 단체에서 지속적 농업에 착수한 농민, 발기인, 지도자가 참가했다. 비아 깜페시나의 주장은 과격했다.


“농민이나 그 가족에게 정직한 노동조건을 창출하고, 환경적·경제적으로도 지속가능하며, 사회적으로도 공정하고 문화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농업 체계를 다시 구축하려면 우리는 생태농업밖에 없다고 믿는다.”


제2회 모임에서는 기업 집단이 아니라 반드시 농민을 위한 농업 개혁과 식량 주권이 각국 정부에서 추진되도록 ‘생태농업을 위한 정책 창안의 틀’도 원안으로 제창하였다.



생태농업을 평가하는 국제연합 식량 고문


그러나 비아 깜페시나와 마찬가지로 생태농업을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 또 있다. 설마 비아 깜페시나 회의와 조정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치 보조를 맞춘 듯이, 한 달 뒤인 6월 21~22일 브뤼셀에서 국제회의 ‘2050년 세계 식량 수요의 충족을 위한 생태농업적 접근의 기여(The contribution of agroecological approaches to meet 2050 global food needs)’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최선의 선택 사항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여유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주장하고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국제연합 인권위원회에 ‘식량에 대한 권리’를 특별 보고한 올리비에 드 슈터Olivier De Schutter 박사이다.


일본에서는 저작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것은 왜(한국에서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유명한 장 지글러Jean Ziegler가 있다. 드 슈터는 그의 직위를 계승했는데, 2008년에는 일을 맞자마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식량 위기는 과거 20여 대국의 잘못된 정책으로 일어났다”고 단언하였다. 식량 위기에 대해 “이것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어서、싼 값의 식량이 넘치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 농업 자금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IMF에 대해 “부채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식량 자급을 희생시킴으로써 돈벌이작물의 생산이나 수출을 요구했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드 슈터는 벨기에 사람으로 지금은 프랑스의 인권 교수인데, 도대체 어떠한 사상의 소유자일까? IPS가 회의에 앞서 행한 인터뷰의 일부를 발췌해 보자.


당신의 전임자인 장 지글러 씨는 일찍이 아이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때에 "그 아이는 살해된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해마다 300만 명의 아이가 영양불량으로 죽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에서는 3명 가운데 1명의 아이가 빈혈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의 원인을 따라가면, 결국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잘못된 결정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EU의 바이오연료 정책도 문제입니다.


“바이오연료가 가져온 큰 영향은 토지를 집중시켜, 토지의 불안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과거 2~3년 동안 제가 방문한 꽤 많은 발전도상국에서, 농민들의 불평은 어디나 똑같았습니다. 자신들이 토지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선주민이나 소농들의 생활에 빠질 수 없는 토지의 소유권이 반드시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EU는 바이오연료가 지속가능하게 생산되도록 최근 인증평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EU의 인증 기준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바이오연료의 생산이 농촌 지역에 가져온 격차의 영향입니다. 모두는 아니라고 해도, 바이오연료는 넉넉한 사람에게는 메리트가 있지만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드 슈터는 화학비료는 악령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고, 흙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인산염과 같은 외부 투입 자재도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에 대해서는 꽤 비판적이다.


“생태농업은 작물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생태계에 있는 식물에 초점을 맞춰 식물을 훨씬 큰 체계의 일부라고 간주합니다. 그렇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은 기본적으로 식물을 환경과 분리시킵니다. 게다가 유전자 조작 기술은 극소수의 기업이 손에 넣고서 지적소유권으로 보호받는 종자에 농민들이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실 유전자 조작 종자는 어느 단 하나의 회사가 명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몬산토입니다. 그 가격이 너무 비싸 농민들을 빚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생태농업은 근대 기술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땅심을 높이고, 작물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투입 자재를 현지에서 생산하며, 농민들이 개발한 최선의 기술을 채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기술의 모두가 꽤 생산성을 높인다고 입증되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과학적으로 개발하고, 그러고 나서 이 과학을 농민들의 견해나 실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위에서부터 내려주는 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더 투명하고 민주적·공개적으로 의사를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공의 의사 형성도 기업의 이익에 영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투의 개막


드 슈터는 국제회의에서 말한다.


“현재 식량 증산을 위한 토지 파악의 많은 예나 개량 품종, 화학비료와 농기계와 녹색혁명 모델을 위해 대규모 투자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토양이나 물, 기후를 보호해 나아가고, 식량 생산과 농민 소득을 개선하는 것이 보이고 있는 생태농업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혹성에서 10억 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고 기후 분열이 눈앞인 상황에서, 우리는 빨리 이런 지속가능한 기술을 퍼트려야 합니다. 세계 규모의 굶주림, 기후변동, 그리고 천연자원의 고갈에 한번에 대처하는 방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빠진 것은 헛수고로 끝나겠지요.”


드 슈터가 생태농업을 평가하는 배경에는 영국 에식스essex대학의 줄스 프리티Jules Pretty가 행한 개발도상 지역의 57개국에서 3700만ha에 달하는 286프로젝트의 조사가 있다.


“에식스대학의 줄스 프리티가 행한 연구에서는, 생태농업적 접근으로 전환하면 평균 79% 수확량이 증가했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드 슈터는 생태농업의 성공의 구체적 예는 아프리카에 많다고 하며 그 사례를 들었다. 탄자니아에서 신양가Shinyanga주州의 서부와 타보라Tabora는 ‘탄자니아의 사막’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그로포레스리라고 참가 모델의 공정을 써서, 약 35만ha의 토지가 20년 걸려 부활했다. 1세대에 수익은 연간 500달러나 올랐다. 같은 기술은 말라위Malaw에서도 쓰여, 2005년에는 약 10만의 소농이 비료를 가져오는 수목의 은혜를 얻고 있다고 한다.


자, 마찬가지로 생태농업을 높이 평가하고 유전자 조작 기술에 의문을 던진 "농업과학기술 국제 평가"에 대해 하버드대학의 농업정책 전문가 로버트 팔버그Robert Paarlberg 교수가 ‘아시아에서 수억 명이나 공복과 기아에서 해방시킨 녹색혁명을, 승리가 아니라 마치 비극이었단 듯이 믿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져 있는 것처럼 읽을 수 있다’라고 불평하며, 아프리카의 빈곤과 기아는 생명공학을 활용하지 않은 결과라고 주장한 것은 나의 책 "지구를 구할 신세기 농업"에서도 썼다(158쪽).


도대체 드 슈터 박사와 팔버그 교수 가운데 누구의 견해가 옳을까? 거기에는 개발도상국의 정보가 유용하다. 예를 들면 「제3세계의 저항」이란 잡지를 인터넷에서 읽으면 같은 교수가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빌&메린다 게이츠 재단은, 아프리카에서 유전자 작물의 연구 개발에 많은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인 정치 상황을 만들고자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팔버그 교수를 고용하였다.”


미국 같은 위대한 민주주의 선진국이 사용한 언어다. 이러한 교수의 행동을 잘 형용하는 영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같은 후진국에는 딱 알맞은 말이 있다. ‘어용학자’이다.


한편 드 슈터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25명의 생태농업 전문가를 브뤼셀에 모았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2050년에 세계를 기르는 데 필요한 생태농업적 접근의 정책을 특정했다. 잘도 모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근거로 했던 프로젝트의 이름을 들으면, 빌 게이츠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까?


생태농업 정책을 지닌 쿠바, 그리고 생태농업 훈련 계획을 운영하는 국제 소농 운동, 비아 깜페시나의 일이다.


드 슈터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속가능한 농업 모델을 확대하고, 가장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확실하게 기능하도록 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공한 파일럿 프로젝트를 국가 정책에까지 움직이는 정치적 의사입니다.”


쿠바, 비아 깜페시나, 줄스 프리티. 모두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주제뿐이다. 생태농업은 어디까지나 ‘학學’이다. 하지만 생태가 ‘학學’에서 떨어져 정치운동이 된 것처럼, 생태농업도 국제회의의 장에서 불꽃을 터트리고 있다. 빌 게이츠와 미국 VS 비아 깜페시나와 쿠바 연합군. 여기에 국제연합 고문도 연결되어 얽히어 셋 사이의 사투가 펼쳐진다면, 싸움의 귀추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구경꾼 근성으로는 이후의 전개가 즐길 만한 일임이 틀림없다.

 

 

 

written by 요시다 타로, translated by 김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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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후 농부학교 강의 때문에 자료를 준비하다가 논과 관련한 옛날 사진들이 있어 올립니다.

쭉 보시면 농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논을 준비하는 쟁기질입니다. 쟁기의 모양이 보은에서 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요.

보은의 쟁기는 아마도 밭에서만 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도 다르지요. 이놈은 수소입니다. 배 부분에 거시기가 보이죠!

쟁기질하는 뒤편으로 푸릇푸릇한 곳이 보입니다.

그곳은 못자리를 하고 있는 곳이겠고, 이미 모를 낸 곳도 있네요. 

논두렁의 모습도 잘 뜯어보세요.

 

 

두세 번의 쟁기질이 끝나면 써레질로 들어갑니다. 군포 일대에서는 써레를 쓰레라고 불렀습니다.

정용수 본부장 님의 발음을 잘 들어보면 그러십니다.

이렇게 논을 삶는 것을 '써린다' 또는 '쓰린다'라고 합니다.

참, 위와 아래의 사진은 닐 마샬로프라는 주한미군이 1968년 안양에 주둔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혹시 위와 아래의 소가 같은 소가 아닐까 해서입니다.

고추의 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하하, 고추는 그만 보시고... 아저씨가 똑같은 사람 같지요.

애벌갈이가 생땅을 뒤집는 일이라 가장 힘들고 오래 걸린다 하고, 두벌, 세벌은 상대적으로 쉽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대놓고 하는 써레질은 더 쉽구요. 하지만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고도의 경험으로 논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맞춰야 하거든요.

지난 토요일 볍씨를 심은 곳은 트렉터로 로타리를 친 곳인데, 그 상태를 굳이 이 과정으로 비유하자면.

물을 대지 않고 써레질을 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흙의 고운 정도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쟁기질에는 아래와 같은 쟁기질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인데, 이렇게 소 2마리로 쟁기질하는 것을 '겨리'라고 합니다.

제가 번역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취재에 따르면 '결의結義'에서 온 말이 아닌가 하더군요.

결의가 겨리로 되었다... 나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현재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쟁기질은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주로 썼다고 합니다.

 

 

같은 겨리질이지만 사진으로도 한 번 보지요. 소가 1마리일 때와 비교하여 그 위용이 대단하지요.  

논두렁 옆으로는 쟁기질을 할 수 가 없어 사람이 쇠스랑 등으로 뒤집어엎습니다.

 

 

본논이 준비가 되면 얼른 모를 내야지요. 모를 내려면 먼저 못자리에서 모를 쪄야 합니다.

지금처럼 모판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 물 대기 좋고 기름진 곳을 골라 바로 논에다 못자리를 만들었지요.

모를 찌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귀의 힘이 많이 들지요.

그도 그럴 것이 외떡잎식물인 벼가 뿌리를 깊이 내렸을 테니까요.

아래 사진을 보시면서 모가 얼마나 큰지 유심히 보세요.

요즘 기계로 모를 내는 것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납니다.

 

 

가끔은 못자리의 병충해를 없애고자 약을 치기도 합니다.

이 당시 농약과 비료는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본부장 님께 물어야 합니다. 걸어다니는 영상실록이란 별명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못자리에서 모를 찌고 나면 바로 모내기로 들어갑니다.

황소의 뒤쪽에 서 있는 지게에 모를 쪄서 지고 나릅니다.

이 논에서는 부부가 함께 일하고 있네요. 이때만 해도 이농 현상이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논이 많은 곳에서는 마을마다 두레패가 조직이 됩니다. 함께 일하는 조직이지요.

그래서 공동 못자리를 만들어서 관리하는 경우도 있고, 보통 모내기며 김매기, 수확까지 함께하지요.

그런데 이곳은 어찌된 연유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부부가 함께하네요.

사진을 보니 모는 한 그루에 2~3포기 정도 심는 듯합니다.

볍씨를 곧뿌림하며 말씀드렸듯, 늦게 모내기하는 것을 한자로는 '만이앙晩移秧'이라 합니다.

여기서 만이앙 - 마니앙 - 마냥이란 단어가 탄생했습니다!

우리말을 자세히 보면 농사일과 관계된 말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잘 찾아보세요.

 

 

아버지가 홀로 마지막 부분에 모를 심고 있는 뒤로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레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웠을 겁니다.

텃밭을 처음 시작하는 분이라 해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집에서 자랐다면, 농사일을 많이 하지 않았더라도 금방 일에 익숙해집니다. 바로 어깨 너머 교육의 효과가 아닐까요.

요즘은 교육을 교육기관에서 교육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집안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이 더 많고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를 내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김매기로 들어갑니다.

김은 보통 2~3번 맵니다. 일찍 심은 논은 세벌까지 매고, 늦게 심은 논은 두벌만 매도 되는 이치입니다.

처음 김을 매는 걸 아이맨다, 아시맨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두벌, 세벌 이렇게 세고, 마지막을 만물이라 합니다. 만물 다음에는 한두 번 정도 피사리를 합니다.

논의 김매기는 한두 번은 논호미로 벼 사이의 흙덩이를 떠서 뒤집어엎는데, 아래 사진이 그 모습입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허리는 계속 굽혀야 하고 흙은 찐덕거려서 잘 떠지지도 않고...

그래서일까요? 두레패에 여자는 끼워주지 않는답니다. 논일도 시키지 않구요. 이건 남녀를 차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논일에는 맞지 않으니 밭으로 보낸 것이겠지요.

쩝, 뭐 그래도 여자가 일을 더 많이 했겠지만 말입니다.

 

 

논호미는 밭호미와 다르게 생겼습니다. 흙을 많이 잘 뜨기 위해서 호미날과 자루 사이를 이어주는 부분인 슴베가 더 굽어 있고, 날도 밭호미에 비해 훨씬 큽니다. 아래 사진에 슴베 부분은 나오는데 날이 안 나오네요. 그건 숙제입니다. 스스로 찾아보세요.

 

 

아래는 논 제초기의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량생산기지로 만들려고 했지요. 그래서 발달한 일본의 농업을 조선에 심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합니다. 모범이란 이름에서도 그 뜻이 잘 엿보입니다.

아무튼 그것이 1920년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지며 농사시험장으로 바뀌고, 해방이 된 뒤에는 중앙농업기술원이 되었다가 현재의 농촌진흥청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6년 농촌진흥청에서는 개청 100주년 기념 행사를 했더군요. 이게 참 씁쓸합니다.

100년 전인 1906년은 일제가 권업모범장을 설치한 해인데, 앞뒤 사정도 안 따지고 그때는 대한제국이 살아 있을 때이니 그때부터 계산하면 100년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래저래 정신 없는 농촌진흥청입니다. 아무튼 다시 농사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모내기하는 모습이 있었지요. 그걸 다시 한 번 보세요. 어떻게 모를 내는지...

아마 못줄이 없을 겁니다. 그런 방식을 '막모'라고 합니다.

그리고 못줄을 띄우고 심는 걸 줄모라고 하고요. 어느 시골에 가면 가끔 판때기나 자 같은 도구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판모, 잣모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막모, 즉 사람의 경험과 눈대중과 감으로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걸 일본놈들이 보고 경악을 했지요. '아니, 이렇게 미개할 수가! 벼 수확량을 늘리려면 똑바르게 심어야 한다. 어서 조선에 줄모를 보급하라.'

그 결과 줄모를 내게 되었답니다. 이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막모를 낸 데에는 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비가 와야만 모를 낼 수 있는 천둥지기가 대부분이었던 우리의 논은, 비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모내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줄이나 판, 자를 쓰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리지요. 그래서 막모가 중심이었던 겁니다.

그러던 것을 일본놈들이 강제적으로 줄모를 내게 하니 여기저기서는 몰래몰래 그냥 하던 대로 막모를 냈습니다.

그러면 관청에서 나와 모를 뽑아버리거나 그냥 밟아버렸다고 합니다.

이 행태는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녹색혁명을 이루자며 통일벼가 보급이 되지요.

그런데 통일벼가 맛도 없을 뿐더러 추위에 약해 모를 키우기도 어려워 심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몰래몰래 토종벼를 심으면, 농촌지도소나 관청에서 사람이 나와 못자리를 전부 밟아버렸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일제에 많이 배우긴 했나 봅니다. 하는 짓까지 똑같은 걸 보면요.

줄모를 내면 벼가 똑바르게 서 있지요. 아래의 제초기로 그 사이를 쓱쓱 밀고 지나는 겁니다.

이 사진은 일본에 가서 찍은 것인데, 우리나라에도 아직 논이 넓은 곳에는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는 1935년도 사진입니다. 당시 일본놈들은 중국을 집어 삼키고자 작당을 하고 있을 때이지요. 세계공황도 찾아오고 이래저래 어지러운 시국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충남 서산의 한 마을에서는 두레패가 떴습니다. 농사꾼은 죽는 한이 있어도 농사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일꾼들이 잠시 앉아 쉬는 사이, 풍물 치는 사람은 악기를 잡고 한판 놀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구경거리가 생겨 자리하고 있네요. 저 멀리 논둑길로는 한 아낙네가 참을 들고 오는지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벼의 자람새로 보아 한여름 김을 매는 철인가 봅니다.

 

 

교육을 받아 아시다시피 논은 계속 물을 담아 놓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를 박으라고 할 때는 한 번씩 물을 떼줘야 합니다. 그렇게 물을 뗐다가 다시 물을 대려고 할 때 천둥지기인 논에서는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논 한쪽에 준비하는 것이 둠벙이라는 작은 연못입니다.

아래 사진은 그 둠벙에 맞두레로 물을 퍼올리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되게 힘들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만 맞으면 엄청 쉬운 일이라네요. 전천후 농부학교의 분들이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일만이 아니라 가래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1+1=2가 아니라 3이 될 수도 5가 될 수도 -1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봅니다. 특히나 농사에서는 어떤 사람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구요.

아래처럼 물을 퍼올리는 도구로는 사진에 보이는 맞두레가 있고, 또 용두레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화도에 무한도전 팀이 논농사를 지어 유명해진 용두레마을이란 곳이 있지요. 그곳은 개막은땅인데 땅이 넓어 용두레를 자주 썼나 봅니다. 한번 검색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무자위라는 것도 있습니다. 물레방아처럼 생겨 사람이 올라가 발로 밟는 그것입니다.

 

 

아래는 살포라는 농기구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새벽 같이 일어나시면 이거 하나 들고 뒷짐지고서 슬슬 논밭에 나갔다 오십니다.

논을 쓱 둘러보다가 여기는 물꼬 좀 터야겠다 싶으면 이걸로 툭툭 쳐서 물꼬를 틉니다. 거기에 쓰는 농기구입니다.

 

 

아래는 1968년 8월의 모습입니다. 아름답지요. 그림 같은 모습입니다.

논두렁에 풀을 깎아 놓았습니다. 저 길을 천천히 걸어보고 싶네요.

 

 

 

이제 수확철로 들어갑니다. 아래의 모습을 보세요.

본부장님의 말씀처럼 논둑을 이용해 벼를 말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둥지기라서 논을 바짝 말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벼를 베면 논둑으로 옮겨 말렸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보실 것은 논둑에 있는 볏단의 이삭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는 겁니다. 본부장 님이 늘 강조하시죠.

 

 

다행히 비가 오지 않고 해가 쨍쨍하다면 일주일에서 열흘 뒤에는  마당질에 들어갑니다.

옛날 농가에는 꼭 안마당과 앞마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안마당은 생활하는 곳이요, 앞마당은 여러 농작물을 갈무리하는 곳이었지요.

이렇게 마당질을 하려면 여름에 일이 없을 때는 산에서 부지런히 흙을 져다 날라야 했습니다.

흙을 져다 잘 밟고 골라 판판하게 만들어 놓아야 가을에 쉽게 일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아래 사진은 마당질을 끝낸 볏단을 다시 묶어서 한곳에 모아 놓는 과정인 듯합니다.

 

 

아래처럼 했겠지요. 이 도구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도구입니다. 처음에는 회전식 도급기라 불리다가 둥근 통이 돌아간다고 궁글통, 발로 밟는다고 족답식 탈곡기, 돌아갈 때 소리가 난다고 와릉 탈곡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아마 지역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부를 겁니다.

이 일도 두 사람의 호흡이 무지 중요합니다. 발로 밟는 박자와 벼를 건네는 순간이며 나중에 해보시면 알 겁니다.

 

 

탈곡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래처럼 낟알을 떨었습니다. 이걸 개상질이라 하지요.

나무 절구통이나 통나무를 가져다 거기에 단을 후려치는 겁니다. 이게 참 힘든 일이라 합니다.

저는 해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잘못하면 골병든다고 하네요.

 

 

이제 마지막 사진입니다. 2008년 12월 초에 강화도로 토종 종자 수집을 나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불은면의 어느 집에 갔는데 벽에 벼 이삭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걸 보고 신주단지의 변형인가?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인가?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 물으니 해마다 가장 잘된 벼를 골라 그 이삭을 매달아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다섯 개니까 5년 동안 벼농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큰 걸 보니 그해에 농사가 아주 잘 되었나 봅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건 볼품이 없네요.

농사짓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농사는 징글맞은 일이 될 수도, 정말 재밌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농사를 따라올 수 있는 일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듯합니다.

벼이삭과 함께 찍은 감과 커피는 아주머니의 대접입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 없다면 자꾸 뭔가 주십니다.

이런 집에 가면 기분도 좋아질 뿐더러, 토종도 많습니다. 토종이 살아 있는 집은 그런 마음씨의 분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이상 지루하게 긴 글을 다 읽으시느라 욕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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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벼농사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동기시대 이래 농경사회에서 물을 이용하는 기술의 필요성이 불가피하였으며, 수전경작 이후 필연적으로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수리관개(水利灌漑)시설을 촉진시켰다.


 오늘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양수 시설로는 맞두레, 용두레, 수차(무자위), 물풍구 등이다. 이러한 도구의 제원을 살펴보면, 먼저 맞두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새끼줄에 매단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을 퍼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고 힘도 많이 든다. 그래서 혼자서도 쉽게 물을 퍼올릴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용두레이다.


 용두레는 긴 장대를 삼각뿔 모습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나무를 파서 만든 기다랗게 생긴 두레박을 새끼줄로 매달고 지렛대 원리를 활용하여 혼자서도 힘들이지 않고 물을 퍼올리는 장치이다. 이 삼각뿔 장대는 요즈음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자유자재로 그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삼각구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발달되어 발로 밟아 물을 퍼올리는 수레바퀴 모양의 무자위를 만들어 내었다.


 무자위는 무넘이가 아주 얕은 곳에서 대량으로 물을 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물을 자아올린다 하여 '무자위'라고 부른다. 지방에 따라 '무자새'(경남)·'물자새'·'자새'(전라남북도)·'수리차'(충남)·'수차(水車)'·'수룡(水龍)'·'답차(踏車)'라고도 불린다. 문헌에 보이는 무자새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물자새'(훈몽자회)·'무자애'(재물보·사류박해)·'자애'(농가월령가)등을 들 수 있다.


 무자위는 수레나 물레의 바퀴모양으로 한 개의 축을 중심으로 주위에 많은 나무판(발판) 날개를 나선형(螺旋形)으로 붙이고, 중간 가장자리 부분에 물길을 내었다. 사용방법은 먼저 발판이 물에 잠기도록 설치한 뒤 받침대 끝에 설치되어 있는 긴 작대기 2개를 잡고 올라서서 발로 나무판을 밟고 걸으면, 바퀴가 돌면서 물을 퍼 올리게 되는데, 퍼 올려진 물은 물길을 통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에 끌어 올린다.


 이 무자위는 물레방아의 원리와 비슷하지만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동력을 얻는 대신에 거꾸로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물의 위치를 바꿔주는 것이 다르다. 특히 무자위는 논이나 밭의 높이가 물의 높이보다 더 높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너른 들이나 평야지대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염전에서는 바닷물을 퍼 올리는 데 사용하고 있다.


 무자위는 무넘이의 높이가 1m인 경우, 200여 평의 논에 물을 대는 데 약 두 시간 정도 걸리며, 무넘이의 높이가 30㎝인 곳에서는 1시간에 50~60t의 물을 댈 수 있다.


 이러한 무자위와 함께 풀무의 원리를 이용하여 통 안에 장치된 피스톤을 왕복시켜서 물을 품어내도록 한 물풍구가 사용되었다. 이 물풍구는 굵은 대나무의 속을 파내거나 판자로 통(실린더)을 만들고, 그 속에 활대(피스톤)를 끼워 사용하였는데, 시간당 10~20t의 물대기를 할 수 있었다. 요즈음의 양수기도 전기모터를 이용한 고속회전으로 많은 물을 쉽게 퍼 올릴 뿐 그 기본원리는 옛 도구들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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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는 흙을 뜨고 파는데 쓰는 연장으로 '훈몽자회', '과농소초', '훈민정음해례'에는 '가래(佳래)'로,'천일록'에는 '가레'로 표기했다. 한자음으로는 가내(천일록)로 썼고, 한문으로는 험(훈몽자회), 철험(역어류해)으로 적었다. 또한 끝에 쇠날이 달려 있어 '감(堪)가래', 넓적하다 하여 '넙가래'라고도 했다.


 가래는 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진흙 밭과 물이 많이 나는 논을 갈거나, 밭이랑을 일구는데 사용되는 농기구로 도랑을 치고 밭둑이나 논둑을 쌓거나 깎을 때에도 사용한다.


 흙을 떠서 옮기는 일을 '가래질'이라고 하고, 가래로 떠낸 흙덩이를 '가랫밥'이라고 한다. 또한 가래를 세워 흙을 깎는 일을 '칼가래질', 논둑이나 밭둑을 깎는 일을 '후릿가래질'이라고 한다.


 모양은 긴 나무자루인 손잡이와 가래바닥을 한 몸으로 만들고, 넓적한 가래바닥의 끝에 말굽쇠 모양의 쇠날을 끼웠다. 쇠날과 가래바닥은 꺾쇠로 고정하고 가랫바닥 양쪽의 군두구멍에 동아줄로 엮은 가랫줄을 매어 사람이 잡아당길 수 있도록 했다.


 가래질은 셋·다섯·일곱 등 홀수의 사람이, 한사람은 가운데서 손잡이인 장부를 잡고 나머지는 반으로 나누어 양쪽에서 가랫줄을 당기면서 흙을 떠서 던지는데, 세 사람이 한조가 되어 사용하는 '외가래 또는 세목가래'와, 일곱 사람이 한조가 되는 '칠목가래', 그리고 두 개의 가래를 잇댄 뒤 두 사람이 장부를 잡고 양쪽에 네 사람씩 가랫줄을 잡고 하는 가래질은 모두 열 사람이 가래질을 하는 '열목가래' 등이 있다.
 혼자서 삽질을 하면 매우 힘들 뿐 아니라 진흙 밭이나 논에서는 진흙의 점성 때문에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가래는 삼각 구도의 원리에 의하여 힘을 분산시키고 적어도 3명이 협동해 힘을 모아 이용하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일의 능률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가래는 뒤에서 삽자루를 잡는 사람이 삽날에 흙을 파서 밀면 양편에 선 사람이 삽날에 연결되어 있는 끈을 동시에 잡아 당겨서 흙을 퍼낸다. 여러 명이 함께 작업을 하기 때문에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만 작업도 쉽고 능률도 오른다.


 특히 가랫줄을 잡는 사람들의 각도가 매우 중요한데 각이 너무 크면 힘이 적게 들지만 가래의 이동거리가 짧아진다.


 그러나 각이 나무 작으면 힘은 많이 들고 가래의 이동거리가 길어지지만 가래 장부를 잡은 사람이 가래의 힘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작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래질의 목적과 주변 여건을 감안해 적당한 각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힘과 운동의 원리 가운데 하나인 벡터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래로 세 사람이 하루 600여 평의 무논을 가래로 고를 수 있다. 이렇듯 가래는 우리 선조들의 공동체 삶을 이끌어 온 벼리인 동시에 작업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삼각구도를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과학 슬기가 돋보이는 농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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