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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는 논이나 밭의 김을 매는 데에 쓰는 우리 고유의 연장으로, 지방에 따라 호맹이, 호메이, 호마니, 호무 등으로 불린다.


 호미는 서유구(1764~1827)의  '임원경제지'에서 동서(東鋤, 동쪽나라의 호미)라고 했을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농기구 가운데 하나이다.


 부등변 삼각형인 날의 한쪽 모서리에 목을 이어대고 거기에 자루를 박은 독특한 형태의 연장인 호미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출토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호미도 오늘날의 호미와 똑같은 형태이다.


 호미는 날, 슴베, 자루의 3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날은 땅을 파고 뒤집을 수 있도록 만든 납작한 철판이며, 자루는 나무 손잡이이고, 슴베는 날과 자루를 연결해 주는 중간 부분이다.

 호미는 기능상의 필요성과 생태 환경에 따라서 이 3부분의 크기와 전체 모양을 달리함으로써 형태의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즉 날의 크기와 모양, 슴베와 자루의 길이, 날과 슴베가 만나는 각도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호미는 그 기능과 모양에 따라 논호미와 밭호미로 분류된다.


 논호미는 날 끝이 뾰족하며, 날의 위쪽 너비가 약 10㎝, 날 길이가 20~25㎝로 날이 크고 넓적한 형태이다. 또한 날의 중심이 불룩하여 날로 흙을 찍어 잡아당기면 흙밥이 잘 뒤집어져서 논매기와 골타기에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다. 때에 따라 젖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자루에 새끼를 감아 사용하기도 한다.


 밭호미는 논호미와 달리 형태가 매우 다양하여, 논호미와 같이 뾰족한 쪽이 날 끝이 되는 외귀호미와 삼각형의 한 변이 날 끝인 양귀호미 등이 있다. 외귀호미는 중부이남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며, 도서·해안 지방 일수록 날이 작고 뾰족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가 많은 지방일수록 두드러져서 낫이라고 불리는 제주도 호미는 마치 갈고리처럼 날이 예리하고 작은데, 많은 비로 잡초의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리기 때문이다.


 또한 호미는 그 지방 토양, 기후 등 자연환경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중부지방인 경기, 충청남·북도, 전라북도 등지에서 쓰이는 보습형, 경남, 제주도, 전남 도서 지방 및 산간 부락 등 낫형 그리고 황해, 평남·북, 경기도 등의 세모형 등으로 분류된다.


 우리 호미의 날은 쇠를 높은 온도(850℃ 이상)로 가열하여 메와 망치로 열간단조를 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강도가 높아 연장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호미의 모양은 날부분이 뾰족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역삼각형 형태로 호미를 내려 쳤을 때 모든 힘이 날의 끝에 집중되게 함으로써 적은 힘으로도 효율적으로 쉽게 땅을 팔 수 있도록 고안됐다. 또한 슴베와 호미날이 이루는 각도는 호미질을 할 때 어깨를 중심으로 호미날이 그리는 원과 같은 각도를 이루므로 직각보다 적은 각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호미는 닳아서 더 이상 못쓰게 되면 다른 쇠를 붙여 재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벼려쓴다'고 한다. 벼릴 때에는 진흙을 무딘날에 바르고 그곳에 다른 쇠를 대어 집게로 집은 뒤 풀무질로 불에 달궈 메로 치면 하나로 붙는다.


 호미의 크기, 모양, 쓰임새 등은 모두 그 지방의 토양 질에 따른 작업의 효율성을 고려한 과학슬기가 듬뿍 배어있으며, 이러한 호미로 하루 300여 평의 논을 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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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찾아온 기회


2010년 4월 10일, 전국귀농운동본부(이하 귀농본부)에서 새로 시작하는 소농학교의 교육 가운데 하나인 '일소 부리기'에 함께 참가했다. 그동안 쟁기질과 관련해 몇 번 취재를 나갔지만, 겨울이라 일할 수 없든지 일에 방해가 될까 멀찌감치 구경만 하던 처지였던지라 이번 '일소 부리기'에 거는 기대가 컸다. 드디어 나도 소로 쟁기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침 10시, 소농학교 교육생 19명과 귀농본부 간사 몇 분과 함께 "이웃집의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와 비슷한 25인승 노란 버스에 타고 보은으로 출발했다. 2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충청북도 보은의 백록동. 이곳은 나와도 인연이 꽤 깊은 곳이다. 지금 집에서 키우는 연풍이란 개를 얻어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은근히 그 어미는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던 차에 겸사겸사 잘되었다.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 같은 호랑이 버스. 


오늘 취재에 응해주신 분은 강창운(73) 어르신이다. 어르신께서는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경상북도 봉화에서 지내시며 살다가 이곳에 오신지는 4년쯤 되셨다고 한다. 주업은 토종벌을 치는 일이신데, 소 쟁기질은 이 마을에 귀농하여 살고 있는 이선신 씨의 밭일을 도우며 다시 시작하셨다. 어르신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일을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들어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며 살아오신 자신감이 말씀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논농사를 118섬까지 지어보셨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당시에는 생산왕도 몇 번 탄 적이 있다고 하신다.

 

군만와 밭으로 향하는 강창운 어르신.


일소가 되기 위해


짐만 부려놓고 바로 쟁기질 실습에 들어갔다. 외양간에서 군만두(소의 이름)를 데리고 나와 멍에를 메워 쟁기를 달았다. 이 소는 2008년 5월생으로 이제 2살 정도인 어린 소이다. 코뚜레는 9개월 된 2009년 2월에 꿰고, 상처가 다 아물 때쯤인 열흘 뒤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군만두는 조금 일찍 훈련을 시작한 편이긴 하다. 어르신께서는 15~18개월쯤 된 소가 훈련을 시작하기에 알맞다고 하신다.

훈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사람이 앞에서 소를 끌면서 따라오도록 하는 훈련을 먼저 한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런 훈련은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어미 옆에서 따라다니면 저절로 사람을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요즘은 코뚜레를 꿰고 일소로 부르는 소가 없으니 할 수 없이 이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단다. 하긴 요즘 축사에서 자라고 있는 소들에게 다가가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 경계하기만 할 뿐 사람을 따르는 소는 별로 없다. 소도 사람처럼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가 중요한가 보다.

 

군만두에게 멍에를 메우고 있다.

 

어느 정도 사람을 따르게 되면 다음부터는 소가 앞서고 사람이 뒤에서 따라가는 훈련이 시작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보름 남짓 걸린다. 이 과정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열흘 정도 뒤에 처음으로 멍에를 메우고 쟁기질을 시작한다. 하지만 쟁기질은 여간 힘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쉽사리 쟁기를 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도 앞에서 한 사람이 고삐를 잡는 일이 필요하다. 코가 아파서라도 앞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코뚜레를 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을 던지니 어르신은, 장정 네댓이 달라붙어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하신다. 소의 기운은 정말 엄청나다. 사람은 그 힘을 제어하고 조절하고자 코뚜레라는 걸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양 문자인 알파벳의 A는 황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황소가 얼마나 사람에게 절실하고 위대한 존재였는지 엿볼 수 있다.


혼자 쟁기를 끌기까지가 가장 지난한 과정이다. 여기에만 거의 한 달이 걸린다. 예전 아르바이트로 공사장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3일이 고비라더니 하루, 이틀은 죽겠더니 사흘이 지나니 그래도 버틸 만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 정도가 될 무렵 정말 그냥 끝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 한 달이 지나니 오히려 몸이 그 일에 적응해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다. 이런 경험은 군대 훈련소에 갔을 때 다시 한 번 겪었다. 그런데 소도 그런가?

 

잠시 쉬는 사이 넓적한 돌로 근육도 풀어주고 털도 골라주면 소가 사람을 더 친근히 여긴다고 한다. 

 

쟁기를 잡고서


이곳의 쟁기가 조금 이상하다. 당연히 땅을 갈아엎는 쟁기에는 흙밥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넘기는 볏이 달려 있어야 할 텐데 볏이 없다. 어르신께 여쭈니 조선쟁기에는 원래 볏이 없는 법이라며, 볏이 달린 쟁기는 양洋쟁기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느 책에서는 쟁기에는 당연히 볏이 달리고, 극젱이 종류에만 볏이 없다고 나와 있어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맞는지는 더 따져보아야 알겠지만, 그저 어르신께서 살아오신 곳이 태백, 봉화, 보은처럼 산간지역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양쟁기의 특징은 다루기 쉽고 일의 효율이 더 높다는 점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조선쟁기를 쓰는 이유는 조선쟁기로는 볏쟁기로는 할 수 없는 골을 타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논은 갈아엎는 데에 중점을 맞춘다면, 밭은 갈아엎는 일만이 아니라 골을 타는 일도 중요하기에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쟁기질하다 잠시 쉬는 사이 똥도 싸고 오줌도 싼다. 밭을 갈며 고스란히 흙속으로 들어가 거름이 된다.


 

이곳 쟁기는 손잡이도 특이하게 두 개가 있다. 직접 쟁기질을 하며 겪으니 위의 손잡이는 아래로, 곧 보습을 조절하여 골이나 고랑의 깊이를 조정한다. 그리고 아래의 손잡이는 보습이 나아가는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쟁기의 방향을 조절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자전거를 탈 때 한쪽으로 넘어지려 하면 반대쪽이 아니라 넘어지려는 바로 그쪽으로 손잡이를 돌려야 넘어지지 않듯이, 쟁기도 비뚤어 내가 나아가길 바라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울여야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보통은 진행방향의 아래쪽(이미 간 땅)으로 쟁깃술(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는 보습을 다는 나무)을 살짝 기울이면서 나아간다. 아무튼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억지로 힘으로 방향을 바로잡으며 쟁기까지 내가 들자니, 나도 무지하게 힘들고 소도 엄청 힘들어했다. 초짜가 쟁기를 잡으면 소가 더 힘들어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우리가 떼로 몰려와 소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소도 초짜인데다 사람도 초짜니 서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초짜와 초짜가 만나 서로 힘들었다.

 

소는 너댓 골을 타니까 벌써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그 거친 숨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옆에서 함께 걸어가면서 깜짝 놀란다. 흐~허억허억, 흐~허억허억 거리며 침까지 질질 흘러나왔다. 뒷다리 쪽에는 봇줄(멍에와 쟁기의 성에를 연결하는 줄)에 쓸려서 살갗이 다 까졌다. 상처가 났는데 괜찮은지 여쭈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진다면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제몫을 하는 거란다. 어찌 보면 잔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축사에서 먹을 것만 받아먹으며 자라다 고기소로 죽임을 당하느니 이런 팔자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배부른 돼지로 사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나 할까. 아무튼 고기소로 팔릴 때는 한우의 경우 비거세우는 18~24개월 정도에, 거세우(등급을 잘 받고자 불알을 깐 수소)는 30~33개월, 암소는 새끼를 2~3번 낳게 한 뒤 6~8개월 살을 찌우니 42~48개월 정도에 죽임을 당한다. 암소에게 새끼를 3마리까지 낳게 하는 이유는 재생산이라는 의미도 있고, 암소는 그때까지 자라기에 최대한 가치를 높이고자, 막말로 뽑아먹을 데까지 뽑아먹고자 해서이다. 홀스타인육우의 경우는 거세우가 22~24개월쯤 살 수 있다. 이런저런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고기를 먹을 수 없는데,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고기 앞에 서면 젓가락부터 들게 된다.

 

동네에서 만난 15년 된 일소. 이런 소도 봄철 첫 쟁기질에 살갗이 벗겨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축사 안에서 사람을 경계하는 배부른 소들.


일소 부리기


강창운 어르신께 본격적으로 일소를 부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르신께서는 밭 전체를 가는 삭갈이를 ‘도빈다’ ‘삭간다’ ‘되빈다’ ‘모조리 간다’라고 하신다. 그 넓이는 보통 1000~1200평쯤인데, 양쟁기는 1800평까지 가능하다. 일소가 그만큼 일하려면 3년은 부려야 마땅한데, 대략 1,5000평은 갈아야 ‘이제 일 좀 한다’고 할 수 있고, 이후 1,5000평을 또 갈아야 ‘제대로 된 일소다’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가 되면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예전에 소가 와서 하루 일해주면 사람이 똑같이 하루로 갚고, 소에다 쟁기꾼까지 따라와서 일하면 이틀을 가서 갚아야 했단다. 힘이 더 센 소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지 모르지만, 소도 사람과 동등한 입장으로 보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소가 가진 힘에 사람이 가진 기술이 결합된 형태가 바로 쟁기질이다. 옛날에 쟁기꾼의 기술을 얼마나 중요했냐면, 쟁기질부터 써레질까지 소로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쟁기꾼은 30가구가 되는 마을에 2~3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가구에 10명이라 치면 300명에 2~3명만 할 수 있는 일이 요즘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번 찾아볼 일이다.

 

 

기계로 로타리를 친 논(위)과 소로 쟁기질한 밭(아래) 

 

 

일소로 하는 농사일에서 논갈이를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에는 가을갈이를 할 수 있으면 꼭 했는데, 그럼 이듬해 수확이 더 많이 났다고 한다. 본격적인 논갈이는 해동만 되면 바로 시작하여 보통 세벌갈이까지 한다. 해동이 되고 하는 첫 쟁기질을 ‘아이갈이’라 하여 흙덩이를 넘겨 놓고, 다음 20일 뒤 두벌갈이를 하여 흙덩이를 깬다. 다음 세벌갈이는 하는 사람이 있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데, 한다면 모심기 직전에 한다. 세벌갈이할 때 물을 대기 어려운 논은 미리 물을 받아 놓고서 갈고, 물을 대기 쉬운 곳은 그냥 간다. 물을 대면 아무래도 질척거려 힘이 더 든다고. 그리고선 써레질로 넘어간다. 써레질은 수평을 잡아야 하기에 보통 기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써레질은 하루에 2500평까지 할 수 있다.


밭농사에서는 사이짓기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먼저 60cm 정도의 두둑을 지으면서 낸 골에다 가을에 보리를 심는다. 이곳을 보릿골이라 한다. 다음해가 되어 보리를 수확할 때쯤이 되면 두둑의 한가운데에 콩·팥·서숙 등을 심는다. 그리고 보리를 벨 때가 되면 콩·팥·서숙이 싹이 터너 조금 자란 상태가 된다. 보리를 다 베고 난 뒤에 보리 밑동이 있는 곳을 2번 갈게 되는데, 첫 번째를 ‘끌떠기’라 하고 두 번째를 ‘돌갈이’라 한다. 방법은 보릿골을 둘로 나눠 먼저 끌떠기로 보릿골의 반을 나머지에 넘겨 놓는다. 다음 20일 뒤에 그 넘겨 놓은 곳을 다시 콩·팥·서숙 쪽으로 다시 넘긴다. 그럼으로써 보리 밑동을 썩혀 거름도 만들고, 김을 매는 효과도 보는 한편, 북주기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것이다.



소와 함께하는 삶


일소는 더 이상 짐승이 아니라 식구나 마찬가지다. 식구로 들어온 순간, 일소는 수단의 대상이 아닌 생명의 존재가 된다. 일소는 길들이면서 절대 때리는 법이 없다. 속이 터져 한 대라도 때리는 순간, 그 소는 사람을 교감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하신다. 물론 멀쩡하게 일을 잘하던 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뜨는 경우도 있다. 그거야 어떻게 된 속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잘 길든 소는 애기가 옆에서 놀아도 밟지 않고 알아서 피한다고 한다.


먹을거리는 풀과 소죽이 있는데, 풀이 나는 철에는 풀을 주고 그렇지 않은 11~4월에는 소죽을 끓여 준다. 겨우내 큰 소를 먹이려면 350평 정도에서 나는 볏짚이면 충분하다. 그 볏짚은 가을걷이한 뒤 비가 맞지 않도록 잘 갈무리해 놓아야 한다. 소죽에는 볏짚 말고도 집에서 나오는 온갖 음식물을 넣어서 먹일 수 있다. 짠 음식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소도 가끔씩 짠 음식을 먹어줘야 건강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육류와 세제가 섞인 물 등은 절대로 먹여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4월 말쯤이면 풀도 조금씩 먹일 수 있게 된다. 소가 잘 먹는 풀은 여느 풀이라면 다 잘 먹는데, 독이 있는 풀과 망초는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해동이 되면서 일을 시작하면 고되기도 하여 살이 많이 빠지는데, 그때는 소죽에 콩을 2홉 정도 섞어서 5번을 주기도 한다.

 

고생한 군만두에게 두부를 만들며 나온 비지를 소죽에 섞어 주었다. 


이렇게 마음을 쓰며 일소로 부리면 30년 이상은 살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사정도 있고 하여 어느 정도 일소로 부리다가 판 다음 새로 소를 들여 다시 훈련을 시키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그냥 소가 400만 원 정도 한다면 길든 소는 600만 원은 받을 수 있단다. 소를 부릴 때는 발이 줄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여 엎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뚜레는 노간주나무로 만드는데, 보통 3년 정도 쓰면 삭기도 하고 부러지기도 하여 한 번씩 갈아줘야 한다. 쟁기의 경우 쟁깃술과 성에는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고, 힘을 받아야 하는 한마루는 부드러운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성에게 길수록 힘이 덜 든다고 하시는데 길이를 재니 2m 남짓 정도이다.


소를 부리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이 마을의 소 부리는 소리는 여느 곳처럼 네 가지가 있다. “이랴” “워” “어뎌뎌뎌” “이랴루”가 그것이다. 앞으로 가라는 이랴, 멈추라는 워, 방향을 제대로 잡거나 왼쪽으로 움직이게 할 때는 어뎌뎌뎌, 오른쪽으로 돌릴 때는 이랴루라고 한다. 소는 보통 오른쪽으로 돌아서 방향을 바꾼다. 쟁기질에 들어갔을 때 소는 이미 타 놓은 골을 따라 걸어가고, 사람은 쟁기 뒤에서 새로 만든 골을 따라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골을 탈 때 소는 골을 낼 바로 옆을 걸어가도록 한다.

 

 

같은 동네의 베테랑 일소. 멍에가 닿는 곳에 멍에살이 박혀 있다. 어릴 때부터 멍에를 메우지 않으면 절대로 멍에살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은 소에게 멍에를 메우면 그곳을 너무 아파해 일을 시킬 수 없다고. 이 소는 경력이 오래된 만큼 느긋하게 자기 발걸음에 맞게 주인과 호흡을 맞춰 쟁기를 끈다. 그러면서 잠시라도 틈이 나면 봄이 되어 새로 난 풀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에서 뭐랄까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 모든 이야기는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강창운 어르신은 몸으로 이 모든 걸 말씀하신다. 농사의 農 자를 '별의 노래'라고 해석하여 농부(農夫)를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農은 농기구를 콱 쥐고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힘차게 땅을 갈아엎고 김을 매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서양의 Agriculture도 또한 땅(Agri)을 갈아엎는다(Culture)라는 뜻이 아니던가! 농사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산꼭대기를 향해 돌을 굴리는 시지푸스와 같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 속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러니 쟁기질이 정 궁금하여 참지 못하시는 분은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 소 쟁기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잠시 차를 멈추고 걸어서 가까이 다가가 어르신과 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라. 그래도 우리는 잠자코 골똘히 어깨 너머 보는 광경에서 생각보다 많은 걸 배울 수 있기도 하다. 물론 거기에는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열린 마음자세가 기본이리라.

 

 

후기 : 안타깝게도 우리집 개 연풍이의 어미는 사냥개에게 물려 죽었단다. 얼마나 슬프던지 사냥을 취미로 즐기는 장인어른이 갑자기 미워졌다. 처음에는 바람들이 농장에서 키우려고 데려왔다가 잠시 우리집에 머무는 사이 정이 들어 눌러앉게 된 연풍이. 그래서 이름도 바람을 따른다는 뜻도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도 되는 연풍이라고 지었다. 이제 이놈이 씨를 퍼트리지 않으면 이런 모습의 개는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우리집 연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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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부모임에서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모를 찌는 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1968년 5월 닐 마샬로프라는 주한미군이 안양 인근에서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기계보다는 손모내기가 주요 방법이여서 모가 지금보다 훨씬 큽니다.

적어도 40~50cm는 되어 보이네요. 요즘은 이렇게 길게 키우면 기계에 걸리기 때문에 더 어릴 때 옮겨 심습니다. 왜 아이도 이사 다니면 적응하기까지 몸살을 좀 앓듯이 모도 그러지 않을까 합니다.

 

 

못자리도 지금은 그냥 모판에 씨를 붓고 비닐로 터널을 만들어 키우는 반면, 이때만 해도 그냥 못자리논에다 바로 키웠습니다. 그래서 모를 쪄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지요.

모를 쪄서는 모내기할 때 들기 쉬운 만큼의 분량씩 볏짚으로 묶어 놓습니다.

그럼 아래 사진에 있는 지게에다 이걸 실어서 본논에 옮기면 됩니다. 

 

이 사진을 통해 1968년까지만 해도, 그것도 서울 인근인 안양에서도 아직 논에다 못자리를 만들고, 모를 찌고, 손모내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귀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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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은 닐 마샬로프라는 사람이 1968년 안양의 미군기지에 전근을 와서 찍은 사진입니다. 1968년 6~7월 무렵에 찍었다고 하네요. 

사진을 보면 오늘 본부장 님이 하신 말씀이 더 머릿속에 잘 그려지겠다는 생각에 올립니다.  

 

 

 담벼락에 자라고 있는 저쪽의 옥수수와 토종 배추가 보이시나요? 이 배추는 통이 차지 않는 배추네요. 똥개 한 마리도 눈에 띕니다. 덩치가 엄청 크네요. 그래도 순한가 봅니다. 그나저나 그때만 해도 이런 초가집이, 그것도 안양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랬나 봅니다.

 

 

 

지금쯤 60대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한 아녀자입니다. 참 앳된 모습이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합니다. 혹시 모르죠, 그보다 더 어릴지도... 뒤에 업힌 아이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저 어릴 때도 저런 포대기로 업혀 다녔는데. 포대기 들고 엄마에게 가서 업어 달라고 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납니다. 아무튼 요점은 이 애엄나 뒤로 보이는 텃밭을 보시라고 올립니다. 초점이 안 맞아 무엇을 심었는지는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팥 같기도 하고, 배추나 무 종류 같기도 하고...

 

 

 다음 사진은 영등포역입니다. 오늘 이야기에 잠깐 나왔죠. 지금은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자리에 이렇게 역사만 있었네요. 꼭 예전 청량리역 앞을 보는 느낌입니다.

 

 

 다음은 놀라운 사진. 이때도 뽑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80년대 중후반까지 이걸 해 먹고 놀았으니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네요. 요즘도 간혹 눈에 띄기는 합디다. 이제는 한 50년은 된 아이들의 군것질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앞으로도 시청각자료가 필요할 때는 종종 이곳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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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첫 번째 인용은 여주 오금리 조사보고서에서 옮긴 내용입니다. 건모나 밭벼는 호미모, 말뚝모, 꼬챙이모, 주전자모 등 무논으로의 이앙을 염두에 두고 파종하여 못자리를 만들었지만 이앙기 가뭄으로 모내기를 못하게 되어 마른 논에 이앙하는 경우와 달리, 애초부터 밭에다 볍씨를 파종하는 방식이지요.

서해연안 및 서해도서지역의 건모는 이와 조금 다른 양상인 것도 같습니다. 즉 이앙조차도 건이앙으로 일단 해놓고 나중에 비가 오면 논에 물을 잡아넣고 비가 오지 않으면 건답 상태에서 그냥 키운다는 거지요. 그러나 원리는 같은 것으로 보이고, 단지 비가 주로 오는 시기가 경기남동부와 경기서부 사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이 서해지역의 건이앙의 의의에 대해서는 미야지마 히로시 선생의 이조후기 조선농업의 발달이라는 글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미야지마 선생이 이 농법을 몹시 상찬한데 반하여 토지농산조사보고의 저자인 일본인 농상무성 기수들은 굉장히 부정적으로 이를 평가하고 있는데요. 오금리 보고서를 인용한 뒤 토지농산조사보고에서 해당 부분을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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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에 대비해서 “처음부터 논 못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건못자리’ 또는 ‘밭벼 못자리’라는 것을 만들기도 하였다. 김종만씨는 이를 “두 가지 성격을 보고 마른 땅에서 모를 키우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즉, 비가 잘 오면 (무)논에 이앙을 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위의 방식으로 “건모를 붓는다”는 것이다. 이는 가뭄에 대한 대비책으로서는 유리하였지만 소출이 얼마 나지 않는 약점이 있었다. … 그 외에 밭에 아예 볍씨를 파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밭벼’라고 하는데 밭벼를 심는 시기는 음력 4월 초순으로 무논의 이앙시기보다 빨랐다. … 그리고 밭벼는 수확량도 적어서 무논에 심는 벼의 1/3정도밖에 수확이 나지 않았으므로 “다른 곡식은 심어먹지 못하는 밭”에 밭벼를 심어먹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밭벼를 심거나 건모를 붓는 면적은 전체 벼 재배면적의 2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김종만씨에 따르면, 건못자리를 만드는 것이나 밭벼를 심는 것이나 종자는 마찬가지였으며 ‘순벼’나 ‘옥구미’ 등이 오금리에서 이러한 농법에 사용되는 볍씨 품종이었다. 옥구미에 대해서는 “벼가 좋다. 벼가 수염이 있고 밥을 하면 맛이 제일 좋았다”고 하였다.
밭벼의 수확은 “150평에 잘 나면 벼 한 섬 나고, 보통 같으면 쌀 한 가마가 못났다”고 하였다. 일반 논보다 소출이 적은 것 같다고 하자 “여기 논 한 마지기에 150평인데 한 마지기에 그 때 쌀 한 가마가 났는지 원. 옛날에는 거름이 있어 뭐가 있어. 그 때 전부 벼를 베어서 집에 이엉 엮어서 얹고 그랬는데, 지금은 암만 마른 논이라도 (비료를 많이 주어서) 부글부글 끓어”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김종만씨가 본 한에서는 역시 물못자리가 많았으며 건못자리는 “못 부어먹는 것에 대비해서 약간씩 하는 사람이나 하는 것, 비가 와도 못 심는 곳에서나 밭벼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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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벼를 직파하는 방법은 각 도에 공히 왕왕 행해짐을 볼 수 있지만 비교적 강원도에 많은 것 같다. 대개 제초와 함께 솎아내기를 한다. 충청북도 진천군에서는 중종中種은 직파하고 만종晩種은 이앙한다.
한국의 벼농사 상 더욱 주목할 만한 한 사실이 있다. 논과 비슷한 밭에 직파하는 벼가 바로 그것이다. 수리가 곤란한 곳에 있어서 육도陸稻의 종자(교동도에 있어서는 육도 수도의 구별이 없으며 수도종을 건답에 파종한다)를 저평하고 마른 밭에 파종하여 7, 8, 9월 중으로 비가 충분하면 물을 담고 수도처럼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종 당시 가뭄이 심하여 발아가 적을 때는 결단하여 그 경작지를 너덧 치로 자란 모와 함께 갈아엎고, 7월 중에 오는 비를 요행하여 물모를 이앙하는 것이다. 불행히 호우가 오지 않으면 전혀 불모지가 되어 일 년 동안 휴한에 붙인다. 이 방법은 경기도 개성부․풍덕군․강화부․교동군․통진군․김포군에서 행해진다(육도의 부 참조). 충청남도 아산군에서는 한발에 취약한 논에서 이러한 방법을 행하는 곳이 많다.
논에서는 한발로 인하여 모내기를 할 수 없을 때는 갈아엎어서 콩, 메밀 등을 심는 일이 있다(충청남도 문의군․회덕군 및 북도 옥천군이 그러하다)(농상무성 1905a: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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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간에서 소를 끌고 나오는 정동영 어르신. 거름의 생산기지인 외양간부터 닭장과 뒷간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전형적인 우리의 옛 농가이다. 지게와 같은 농기구는 모두 손수 만들어 쓰신다.

 

한 해 농사의 첫 단추는 뭐니 뭐니 해도 땅을 갈아엎고 골을 타거나 두둑을 내는 일이다. 예전에는 소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던 일을, 이제는 편리하고 효율 좋은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비탈밭이 많아 기계가 들어가기 어려운 두메산골이나 기계에 익숙하지 않으신 어르신들이나 소를 부릴 뿐이다.

그 때문에 쟁기질을 취재하고자 일소를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물론 잘 몰라서 그렇지 지금도 곳곳에는 많이 있을 테지만, 접근하기 쉬운 가까운 거리로 범위를 좁히다 보니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 해마다 봄이면 신문이나 방송에 꼭 쟁기질하는 모습이 나온다는 것을 떠올렸다. 곧바로 신문을 뒤져 찾은 분이 홍성군 서부면 신리에 사시는 정동영(68) 어르신이다.

정동영 어르신은 14살부터 쟁기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동네 아저씨들이 쟁기질하고 있으면 그걸 어깨 너머 유심히 보다가 하루는 아저씨께 부탁하여 본인이 직접 하게 되었다. 15살 때부터는 논 10마지기씩 갈았다고 하시니, 경력 54년의 훌륭한 쟁기꾼이시다. 50년 남짓 일소를 길들이다 보니, 이제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처음 농우소(일소)를 사올 때부터 한눈에 이게 제대로 길이 들지 아닐지를 아신단다. 정동영 어르신만의 농우소 판별법은 이렇다.

첫째, 꼬랑지(꼬리)가 길 것. 왜 꼬랑지가 길어야 좋은지 여러 번 되물었지만, 그건 꼬랑지가 길어야 나중에 팔 때도 좋은 값을 받기 때문이라는 말씀만 들었다. 아마 꼬리가 길면 균형 감각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닐까?

둘째, 뱃대(가슴팍)가 벌어져 있을 것. 이런 소는 처음에 길을 잡기는 힘들어도, 일단 길만 잡히면 힘이 좋아 일을 잘한다고 한다.

셋째, 발굽이 좀 벌어지고 무뚝하며 곧을 것. 발굽이 벌어지지 않으면 쟁기질할 때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한다. 하긴 사람의 발만 생각해도 발가락이 하나라도 없으면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무뚝해야 하는 것은 논밭에서 일하며 돌 같은 것을 밟아도 발굽이 깨지거나 상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소도 사람처럼 성질이 제각각이라 애초에 성질 사나운 소는 사지를 말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냐고 여쭈니 소도 사람과 똑같다며 표정만 보면 사나운 소는 대번에 얼굴에 드러난다고 한다.

소를 사오면 길을 들이기 시작하는데, 지금 키우고 있는 소는 사온 것이 아니라 내가 본 사진에 있는 소가 낳은 새끼라고 한다. 4년 전 그때 사진에 나온 소는 이미 다른 사람한테 팔고, 지금 소는 한창 길들이고 있는지라 아직 쟁기질은 서툰 편이다. 일소는 주로 길을 잡기 어려운 외지의 노인네들이 와서 사는데, 처음 사온 값의 2배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장사꾼에게 넘기면 15~20%의 거간비를 뗀다고 하니, 가능하면 뭐든지 직거래가 서로에게 좋겠다.

 

발굽이 무뚝하고 벌어진 것이 좋은 일소의 조건이다. 

 

 

길들이기

 

소는 보통 어미젖 떼고 대여섯 달이면 코뚜레를 꿴다. 옛날에는 젖 떼고 석 달이면 코뚜레를 꿰는데 이제는 그때보다는 늦어졌다. 코뚜레를 만드는 나무는 전국 어디를 막론하고 노간주나무를 쓴다. 이곳에서는 노가지나무라고 부르는데, 이 나무만이 불에 살살 구우며 둥글게 말 수 있단다.

코뚜레를 꿰고 2~3년 지나면 본격적으로 일소로 길들이기 시작한다. 길을 잡을 때는 늘 사람과 함께 끄싱게를 끌며 길을 오간다. 소의 성질에 따라서 너덧 달 남짓 걸린다고 한다. 소가 끄싱게를 끌 때는 처음인지라 성질을 부리기 쉬운데 그럴 때면 살살 달래며 코뚜레를 잡고 따라다녀야 한다. 소를 길들이는 일은 일방적으로 소가 사람에 맞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 소에 맞춰 길들여지는 과정인 듯하다.

소가 끄싱게를 끄는 일에 익숙해지면 큰 돌을 얹고도 끌게 하여 점점 쟁기질에 알맞은 힘을 키운다. 그렇게 쟁기질을 하기까지 길들이는 공은 보통 2년 가까운 시간이 든다고 한다. 처음 아무것도 모를 때는 대충 몇 달만 길들이면 소로 쟁기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제대로 일소가 되는데 2년 남짓 걸린다는 말에 그 세월하며 돌보는 데 드는 공력이며 왜 사람들이 소를 버리고 농기계를 부리게 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럼 소는 몇 살까지 일할까? 얼마 전 엄청난 인기를 누린 ‘워낭소리’에 나오는 소는 무려 40살까지 할아버지와 함께했는데, 정동영 어르신의 사정은 어떨까? 보통은 12살까지 일을 시킨다고 하신다. 드물게 20살까지 부린 적도 있는데, 그렇게 나이가 들면 사람하고 똑같이 이도 빠져서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사람이나 동물이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슬픈 일일까, 아니면 자연스레 시드는 일일까? 아직은 문득문득 나이가 든다는 게 슬플 때도 있다. 속 깊은 울림을 내는 통이 되는 일, 곧 곱게 늙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어르신을 만날 때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 나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쟁기질의 실제

 

이제 본격적으로 쟁기질하는 일로 넘어가자. 먼저 소를 부리는 소리는 이렇다. 앞으로 가자고 할 때는 “이랴”, 제자리에 서라고 할 때는 “와”라고 외친다. 소가 똑바로 나아가지 않거나 오른쪽으로 돌 때는 오른손에 잡은 고삐줄로 툭툭 치며 “어뗘뗘뗘” 외치고, 특별히 왼쪽으로 방향을 바꿀 때는 “쩌쩌쩌쩌”라고 하며 고삐줄을 왼쪽으로 넘겨 톡톡 당겨 준다. 나중에 쟁기꾼과 눈빛만으로도 통하면 자기가 알아서 서야 할 때 서고 가야 할 때 간다고 하니 참 대견할 뿐이다.

하루에 쟁기질할 수 있는 넓이는 아침 6~7시쯤부터 오후 6~7시까지 점심에 1시간 정도 쉬면서 한다면, 논이 7~8마지기(1마지기 200평), 밭은 1700~1800평쯤이다. 그렇게까지 일하면 당연히 지치기 마련이라, 그럴 때는 미리 찹쌀을 물에 담갔다가 먹이면 힘을 냈다고 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소먹이로 넘어갔다. 예전에는 소에게 여름에는 깔(꼴)을 베다가 먹이고, 겨울에는 여물을 쑤어 줬다. 하지만 요즘에는 사료에 물과 짚을 섞어서 먹인다고 한다. 사료만 먹이면 소가 먹고 체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짚을 섞어 주는 것이 좋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사람이 밥은 굶을지언정 소는 꼭 먹였다고 하니 소가 얼마나 중요한 구성원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짚을 섞여 먹이는 건 소의 소화 기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병 때문이기도 하다. 사료만 먹이는 게 아니면 병에 걸리는 일도 없다는 말에 소 역시 먹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옛날처럼 짚으로만 소를 먹이려면 소 1마리에 적어도 논이 1200평은 있어야 한단다. 그러니 예전에는 논이 많은 집에서나 소를 길렀다는 말이 이해된다. 그렇게 소를 먹이지 못하는 집에서는 소를 빌려다 쓰고, 사람이 이틀 정도 가서 일해야 했다.

작물마다 쟁기질하는 방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여쭈니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다. “대중 있깐유.” 그렇다. 농사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그에 알맞게 방법을 달리할 뿐이다. 그건 이론으로 정립된 것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체득된 삶일 뿐이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어 끈질기게 어르신의 답을 듣고자 했다. 가을에 밀·보리를 심을 때는 쟁기질로 삭갈이(밭을 전체적으로 싹 가는 방법)하여 쇠스랑으로 골만 타서 심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외줄(쟁기질로 2번을 오가서 약 60㎝의 두둑을 짓는 방법. 두거웃지기라고 함)을 지어 심기도 한단다. 그리고 거기에 콩을 심을 때는 밀·보리 수확이 끝날 때쯤 자라도록 시기를 맞춰 심기도 하고, 밀·보리를 거둔 다음 그 자리에 콩을 뿌리고 쟁기질하여 흙을 덮기도 한다. 참깨나 들깨 같은 경우에는 보통 네거웃지기(쟁기질로 4번을 오가서 두둑 하나를 짓는 방법. 이럴 경우 1~1.2m의 두둑이 생김)로 두둑을 만들어 심는다고 한다.

밭을 쟁기질하는 일은 그래도 논을 가는 일보다는 쉬운 편이라고 한다. 논은 보통 깊이 20㎝ 정도는 갈아야 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양력 3월, 그러니까 얼음이 풀리면 무조건 아시갈이(초경初耕, 애벌갈이)를 시작하고, 그러고 나서 한 달 뒤에는 두벌갈이(재경再耕)에 들어간다. 두벌갈이할 때에는 물을 넣고 갈기 때문이기도 하여 더 쉽게 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써레질은 그보다도 훨씬 더 쉽고.

옛날에는 할 수 있으면 꼭 가을갈이를 했다고 한다. 가을갈이를 해 놓으면 땅이 썩으니까 다음해에 농사가 더 잘되기 때문이라 한다. 가을갈이를 하면 확실히 풀도 덜 나고, 비료도 더 적게 줘도 된다고 하니, 부지런한 농부는 가을갈이를 빼먹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건 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밭도 그렇단다.

 

 

외양간에서 흘러나오는 소의 오줌이 저절로 두엄자리로 흘러가게 설계하셨다. 두엄자리는 외양간 바로 앞에 두어 똥을 치우고 거름을 내기 쉽게 만들었다.

 

 

 

경제논리가 아닌 생명의 논리

 

정동영 어르신 댁의 소는 벌써 두 배나 새끼를 깠다고 한다. 요즘은 수의사가 인공수정을 시키지만, 15년 전만 해도 인근의 덕전리에 씨소가 있었다. 수의사가 인공수정을 시키는 데는 3만 5천 원의 비용이 드는데, 예전에 자연스럽게 짝짓기시킬 때는 지금보다 비용이 훨씬 쌌다고 한다. 소의 짝짓기는 수소가 암소에 올라타기만 하면 일이 끝난다고 한다. 덩치는 크지만 올라타자마자 짝짓기가 끝난다는 말에 재밌었다. 짝짓기의 성공 여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알 수 있는데, 새끼가 들어설라치면 암소가 짝짓기하자마자 풀썩 주저앉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새끼가 들어서지 않는다니 신기할 뿐이다. 인공수정으로 새끼를 넣으면 혈통도 좋고 더 잘 크지만, 예전의 소와 비교하면 일시키기는 훨씬 좋지 않다고 하신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는, 겨·풀 주며 관리를 더 세심하게 잘하고 주인과 정이 들어 그렇지 않겠냐고 하신다.

가끔 축사에서 살고 있는 소를 보면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닌 고깃덩어리로 보일 때가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이건 아니건 관심을 쏟고 정을 나누면 그만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쟁기질도 그런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경제가치와 효율 면에서 따지자면 쟁기질은 농기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굳이 쟁기질의 경제적 효율을 따지자면, 풀을 줄여서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와 땅을 기름지게 해 비료를 적게 써도 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그밖에 보이지 않는 효과와 장점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정동영 어르신께서 어째서 편리하다고 생각하시는 기계를 놔두고 굳이 소쟁기질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은근슬쩍 여쭈어 보았다.

“남한테 갈아 달라고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내 편리한 대로 할 수 있고, …….”

평생을 한눈팔지 않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성실하게 농사만 지으신 어르신, 그분의 입에서는 특별한 뜻이 담긴 말씀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와 함께 가족을 지키며 살아오신 우리의 평범한 이웃 어른이실 뿐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는 뜻이 거창한 사람이 지켜온 것이 아니다. 우리와 그 이웃, 이름 없는 그네들이 꿋꿋하게 지켜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동영 어르신 댁의 광. 한눈에 보아도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 놓인 씨앗도 토종일 법하다. 그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쟁기질하는 날 찾아뵙고 여쭈어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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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에스를 보는데 아마존 인디오가 나왔습니다.

그네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내용인데 농사짓는 법도 나와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에서 먹을 게 나오기는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기에 농사를 짓는다는데요.

덕분에 밀림이 불에 타고 있기는 합니다만,

 

벼농사 짓는 모습이 나와서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그냥 처마 밑에 달아놓았던 볍씨를 가지고 밭에 나와서,

손으로 쓱 훑어서 마른풀이 깔려 있는 밭에다 휙휙 흩뿌립니다.

어쩔 때는 꼬챙이로 구멍을 파고 점뿌림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흩뿌림을 한다네요.

 

그렇게 뿌려 놓으면 싹이 나서 자라고 있으면 우기에 들어가 아마존강이 넘친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밭이 논으로 바뀌고, 물이 심하게 넘치거나 모든 걸 삼켜버리진 않는 정도로 유지된다고 합니다.

간혹 물이 너무 많으면 물길을 내서 빼면 된다고 아주 간단히 말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꼭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모습을 보는 듯해 흥미롭습니다. 그들도 우기에 물이 넘치는 곳에서는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하니까요.

자연조건에 따라서 사람 사는 모습은 참 가지각색으로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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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30년대의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당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지요.

한자로는 탈곡脫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대개는 집의 앞마당에서 하지만, 이렇게 들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둘을 구분하여, 들에서 할 경우에는 이를 들마당질이라 했지요.

아무튼, 마당질과 관련하여 걸어다니는 영상실록이신 정용수 본부장 님은 이렇게 기억하십니다.

 

"마당질을 하려면 일단 마당질하기 전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지게로 산에서 고운 흙을 퍼다 나른다. 그걸 앞마당에 곱게 펴고, 고르고 판판하게 깐 다음 틈날 때마다 다지는 거야. 이게 보통 기술이 아니어서 실력 없는 사람은 하지도 못했지. 그렇게 꼼꼼히 준비한 다음 거기서 곡식을 떨면, 나중에 비로 쓸어도 흙이 쓸리지 않을 정도였지. ……."

 

이야기를 들은 지 하도 오래되어서 정확하지 않으니, 언제 만나면 다시 한 번 여쭈어 볼 일이다.

 

사진으로 들어가 보면, 먼저 벼를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이 벼를 떠는 방법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확연하게 다르지요.

이것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발로 밟는 탈곡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주 보편적으로 쓰던 방법으로서, 태질 또는 개상질이라고 합니다.

태질이란 말 그대로 후려친다는 뜻에서 온 말이고, 개상질은 사진처럼 통나무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거기에 치는 걸 말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태질에는 개상 말고도 지방에 따라 돌을 쓰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절구통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상질보다는 태질이 더 범위가 넓게 쓸 수 있지요.

 

앞에서는 둘이 태질로 낟알을 떨고, 뒤에는 볏단을 나르기도 하고 교대하기도 하는 사람이 한 명 서 있습니다.

태질은 보통 중노동이 아니라 탈곡기로 떠는 것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피곤한 일입니다.

그 뒤에서는 기다란 장대, 바로 갈퀴를 든 사람이 개깔을 고르고 있지요. 개깔만 잘 떨어도 쌀 몇 말이 나오는지 모른다고, 마당질할 때마다 안산의 이정욱 어르신은 강조하십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티끌 모아 태산이고, 남에게 줄 줄 알아야 오래간다는 교훈을 잊는다면 삼대가 지나지 않아 쪽박을 찰 겁니다.

갈퀴질을 하는 사람 바로 옆에는 낟알을 가마니에 담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렇게 다섯이 한 조가 되어 들마당질에 열심입니다.

 

이 많은 볏단을 보면서 얼마나 배가 불렀을까요?

그런데 달구지를 멘 수소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요? 뭐간디 일도 않고 멀뚱하니 서 있간?

아마 지주의 무엇쯤 되는 사람이 아닐까요?

옷 차림새부터 다른 사람과 다르니 말입니다.

머리도 당시에는 신식인 빡빡머리로 깎았겠다, 옷도 좋겠다, 일도 안 하고 서 있으니 그렇게 짐작해 보았습니다. 아님 말구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 이렇게 일해야 별로 건지는 것도 없겠습니다.

소작료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달랐지만, 이 시기에만 해도 거의 반씩 나눈다고 보면 됩니다.

거기에 소작인이 부담해야 하는 각종 세금까지 생각하면, 실제로는 일해서 20~30%나 건지면 다행이지요.

그래도 어쩐답니까, 먹고 살려면 일해야지. 진짜 죽지 못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지 모릅니다.

지금은 참말 편한 세상이 아닙니까. 세금 많이 뗀다고 투덜거려도 굶어 죽을 만큼 못 먹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세금을 안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심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에서 재밌게 볼 만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볏단을 널어 말리는 곳과 벼 그 자체입니다.

그냥 봐도 벼의 길이가 엄청 긴 것을 알 수 있지요.

토종 취재를 다니며 들은 바로는, 토종벼의 특징이 바로 큰 키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확량도 문제이지만, 화학비료를 주거나 거름을 많이 주면 쉽게 쓰러지는 단점이 있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진에서 보이는 벼는 그 토종벼의 하나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리고 볏단을 널어 말리는 곳에 즐비하게 자리한 무덤을 보십시오.

논 뒤로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덤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혹시 동네 사람들의 공동묘지였을지도 모르지요.

땀 흘리며 일하여 먹고 사는 사람과 후손에게 땅과 생명을 넘기고 죽은 사람이 공존하는 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없습니까!

등산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군인도 훈련을 나가서 쉴 때는 꼭 무덤을 애용합니다.

그 이유는 무덤의 대부분이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덤들도 그렇다면 남쪽을 향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럼 그 아래에 있는 논도 자연스레 볕이 좋은 곳에 자리했겠지요.

 

오늘도 사진 한 장을 꺼내 들고 천천히 감상해 보았습니다. 다음 사진은 또 어떤 것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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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찍었다는 사진. 아마 서울의 어디에서 외국인이 찍은 사진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바람에 쭉정이나 껍질을 날려 알곡만 고르는 일을 한자로는 풍선風選, 우리말로는 날려고르기라고 한다.

현재 날려고르는 곡식은 옷차림이나 낟알의 생김으로 볼 때, 벼보다는 밀이나 보리가 아닐까 한다.

오른쪽의 남자가 밟고 올라선 것은 매통이다.

매통은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벼의 겉겨를 벗기는 도구이다.

왼쪽의 남자가 바가지로 키에 낟알을 퍼 담으면 그걸 후두두둑 떨어뜨린다.

바닥에는 멍석을 깔았고, 뒤로는 달구지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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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들녘 쟁기질
경칩을 맞아 5일 전남 보성군 미력면 은곡마을 들녘에서 농부내외가 소로 쟁기질을 하고 있다. 농자재가 기계화된 농촌에서 옛 전통방식인 소 쟁기질도 점차 보기 드문 풍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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