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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0)-권유옥 선생(김포)


임금에게 진상하던 자광미, 맛은 최고예요







 

너른 김포 들판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하성면 석탄리에 사시는 권유옥(67)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나 지금까지 사는 ‘토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도 삼형제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며 모두 5만7천 평의 논을 경작하고 계신답니다. 그 가운데 본인은 1만2천 평 농사를 짓는데, 자광미는 500평 정도만 심으셨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평을 지었는데, 올해는 판로 문제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500평만 짓는다고 하십니다. 동네에서도 혼자만 자광미 농사를 짓는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논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한쪽에 몰아서 환지를 받아 1만평 정도는 한곳에 있고, 자광미는 따로 500평 되는 논에다 심었다고 하십니다. 이 논에 4월 26일에 모내기를 했는데, 그보다 일찍 모를 낸 논은 서리를 맞아 싹 죽어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 선생님 논의 모는 벌써 위로 쭉쭉 자라서 다른 논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광미(紫光米)는 말 그대로 자줏빛 쌀입니다. 쌀이 허옇거나 누렇지 어떻게 자줏빛이냐고 생각하신다면, 이 쌀을 한 번 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이 벼는 250~300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벼슬아치가 자줏빛 밥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돌아올 때 가져온 씨를 김포에 심어 임금님께 진상한 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유래라고 합니다.


- 선생님께 자광미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광미에 대한 이야기 좀 부탁드립니다.

= 자광미는 옛날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입니다. 그만큼 밥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배하기 아주 까다로워서, 그전에는 양반 집안에서나 자기들 먹으려고 재배했습니다. 재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쓰러지기 쉬워서 많이 심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먹고 자라면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그러니 태풍만 왔다하면 죄 쓰러져 버리지요. 이걸 쓰러지지 말라고 규산액을 때려 부어야 그나마 괜찮습니다. 비료는 아예 줄 생각도 못하지요. 비료만 줬다하면 엄청나게 자라서 쓰러질까 봐 그렇습니다.

거름으로는 영양제만 줍니다. 밑거름을 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지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지 뿌리에서 자기가 먹을 영양은 다 나옵니다.


-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수확량은 좀 많은가요?

= 수확은 잘나면 양석(兩石) 납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200평에 2가마 정도 나요. 알이 좀 갸름한 모양인데, 다른 벼에 비해서 잘고 달리는 양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이걸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잖아요. 그럼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핑 돕니다. 백미로 깎으면 아주 맛이 좋은데, 그럼 색이 없어져서 소비자가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7분도 정도로 깎습니다. 백미로 깎는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어쩝니까. 집에서 먹을 때는 아예 백미로 깎아 버립니다.

요즘 시중에 빨간 쌀이 나오는데 그건 수원에서 연구원들이 육종한 홍미가 대부분입니다. 색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걸로 내가 밥을 해 먹어보니 맛은 아주 떨어져요. 그건 대도 짧아서 도복이 안 됩니다. 수확도 아주 많이 나는데 맛이 없어요. 이제 FTA하는데 수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맛으로 이겨야 해요.


- 그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수확도 적은 것을 왜 심으시나요?

= 첫째는 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심던 것이라 그렇지요. 저 김포 들미라고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은 밀다리라고 하는 들미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가 처음으로 그 옆에다 심었다고 해요. 이걸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진상했습니다. 유신 때도 경기도 지사가 선물하려고 해마다 꼭 대여섯 가마씩 가져가곤 했습니다.

키우기도 힘들고 까다롭고, 또 판로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딱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 언제는 이걸 그만 두려고 했는데 김포 농정과에서 이게 김포 명물인데 어떻게 없애냐고 하면서 보조금을 조금 줍니다.


-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 예전에는 16㎏들이 가마니를 한 장에 2만원 주고 사다 썼습니다. 그걸 일 년에 60장 정도 쓰거든요. 그것만 해도 120만원이라 이제는 아예 가마니틀을 만들어서 겨울에 집에서 짭니다. 이렇게 직접 안하면 다 농협 가서 대출받아 빚지고 살아야 해요.

그럼 거기에 쌀을 담아서 도에 한 20~30가마, 여의도에 20가마, 강남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 가끔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양재동으로 나갑니다.


-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보존 차원에서 씨앗을 몇 알씩 얻어다가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자광미도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

= 예전에 아랫녘에서 농진청 통해서 소개받고 와서 하도 졸라서 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김포 농정과에서 경을 쳤습니다. 우리 김포 명물을 타지로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은 고향에서 아예 상표로 만들려고 유출을 못하게 합니다. 쌀로는 어디든지 나가지만.


- 모는 언제 내고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 여기는 4월 26일에 모를 냈어요. 이게 모일 때부터 정신없이 올라와서 다른 것보다 키가 커요. 요즘 상토가 나오잖아요. 거기 거름이 들어 있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건 거름을 주지 않아도 워낙 키가 큰데, 파는 상토에다 넣으니 다른 벼는 작아도 이건 정신없이 자라요. 너무 길어서 기계로 심기 힘들어 가위로 자른 다음 심은 겁니다.

이 동네에 늦서리가 한 번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찍 심어서 다 죽었어요. 이건 물이 있으니까 서리가 와도 녹아 버린 거야. 지금 다른 논보다 제일 볼 만해요. 일찍도 심었지만 자광은 비료를 안줘도 신나게 자라요. 그것만 봐도 아주 재밌죠. 주변과 비교해도 따라올 놈이 없잖아요.


- 언제쯤 수확하나요?

= 이건 추석 무렵이면 바로 벱니다. 중만생종쯤 될 거야. 그때도 막 자라요. 가지도 곧잘 치죠.


- 분얼도 많이 하는데 수확량은 왜 적지요?

= 도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규산질을 많이 줘요. 다른 비료는 영양제 빼고는 안 줍니다. 그랬다가는 너무 커서 싹 쓰러져 버려요. 약도 치지 않아요. 고품질로 파는데 약을 치면 내가 거짓뿌렁하는 나쁜 놈이지. 나는 여기 토백인데, 딴 사람한테 거짓뿌렁 못하고 죽으나 사나 내 땅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이렇게 사는 거지.

딱 하나. 제초제는 칩니다. 이제 논에 들어가 김을 맬 수 있는 힘도 없고, 일이 많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합니다.


- 씨 할 것은 따로 심으시나요?

= 그렇지는 않고, 이걸 수확해서 종자로 씁니다. 베기 전에 콤바인을 싹 청소해서 거두는데, 그래도 기계가 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조금 끼기는 합니다. 그러고 15일쯤 햇볕에다 말립니다. 수분측정기가 있어서 수분 15% 될 때까지 말려서 보관해 놓습니다.


-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자광미 농사를 지었나요?

= 옛날에 어른들은 2알 넣어야지 3알만 들어가도 뽑으라고 했어요. 많이 넣어 봐야 이삭이 잘아지니까. 손으로 내고, 낫으로 베고, 발틀 밟아서 떨고. 볏단이 조금만 축축하면 거기 잘 앵기는 거야. 통일벼는 귀가 여리잖아(이삭이 잘 떨어진다는 뜻), 자광미도 귀가 여려요. 이상기온이 와서 우박이라도 오면 1/5은 떨어져 버려서 날짐승들이 다 주워 먹지. 지금 그렇게 손으로 하라면 나부텀도 못해요.


- 이건 몇 포기씩 심으신 건가요?

= 이앙기로 해서 4~5대씩 꽂았어요. 가장 좋은 건 2대씩 꽂는 겁니다. 이앙기로 하려니 그런 거지. 그렇게 꽂아 놓으면 15~17대로 분얼해요. 물을 말리면 분얼을 멈추죠. 분얼이 다 됐다 싶으면 그냥 내 맘대로 말리는 거예요. 이 논은 한 6월 10일쯤 물을 뗍니다. 계속 물을 대 놓으면 키만 커요. 그렇게 보름쯤 말렸다가, 물을 안 주면 말라죽으니까 다시 열흘은 물을 대주고, 또 보름쯤 말렸다가 대주고를 반복해요. 여기 물을 말리면 갯논이라 운동화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정도로 마릅니다. 일주일쯤 지나면 티도 안 나게 말라요.


- 병충해나 피 같은 건 어떤가요?

= 여기는 들판이라 피가 많아요. 도아리(까마중)하고. 그리고 중국에서 혹명나방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래서 약을 쳐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 한 4년 전쯤에는 잎을 죄 먹어서 다 쭉정이만 나왔어요. 그해는 농민도 그렇고 농협도 무지 피해를 봤지. 중국하고 가까워서 혹명나방이 해마다 있어요. 자광미는 다른 벼보다 혹명나방이나 병충해에 좀 강합니다.


- 자제분에게 농사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모두 4남매인데 도시에 나가 살아요. 각자 자기 자리 잡고 사니까 땅 준다고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죠. 힘들어서 싫대요. 우리는 삼형제가 다 농사지으며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서로 일을 나눠 맡아요. 바로 위에 형님은 이앙만 하시고, 큰 형님은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모판 껍데기만 모아 놓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젊은 내가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일이 많고 뭐하고 해도 불평불만이 안 나오는 거야.

처음 1,800평으로 시작해서 부지런히 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는데, 깜깜해서 못 나가는 것이지 훤해지면 바로 나가서 일합니다. 그래도 새벽부터 집 가까이서 장비 쓰면 동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봐 멀리 방죽 있는 데부터 가서 일합니다. 이 일은 정년퇴임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뭐 땅속에 들어가면 그때가 퇴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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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권업모범장은 조선에 일본 품종의 벼를 보급하고자 했다. 그래서 1906년 4월 경기도 수원군 서둔전에서 농사짓는 사람 28명에게 일본 벼인 조신력, 近江, 信州, 都를 배부해 기른 결과, 조신력이 토종에 비해 24%, 근강은 9.4%, 신주는 7.5%, 도는 자연도태되었다. 그 결과 일본 품종에서는 조신력, 토종에서는 조동지가 가장 좋다고 선정했다.

하지만 조선 농민들은 일본 품종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은 일본종은 늦게 익어 곤란하니 토종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일제는 일본종인 다마금과 조신력은 모두 일찍 익으니 조금도 염려할 필요 없다고 강조했지만, 농민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토종을 심었다. 이에 권업모범장과 원예모범장에서는 조선의 토종을 조사하는 한편 일본종을 보급해 통일시키고자 했다.

1908년 농상공부 식산국의 조사에 따르면 다른 이름의 품종은 토종 464점, 찰벼 149점으로 모두 513점이었다. 1914년 조선에 있는 토종은 모두 2,500종이었다. 그리고 1928년 조사에 따르면 조선에 다른 이름 품종은 토종 464점, 일본종 139점으로 모두 603점이었다. 이들 토종은 까락 있는 종이 많고, 큰 알갱이가 적고 한 이삭의 알수가 많고, 새끼치기를 적게 하고, 짚이 길어 쓰러지기 쉽고, 도열병에 잘 걸리고, 가뭄에 강하고, 물기가 없는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대개 일찍 익는 특징이 있다고 파악했다. 곧 토종은 수확량이 적지만 가뭄이나 추위에 잘 견디는 점에서는 안정성이 높다.

점점 일본종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해 1918년 조선에 보급된 일본종을 보면 조신력 25,3000정보, 곡량도穀良都 20,1000정보, 일출日出 11,1000정보, 석백石白 1,6000정보, 금錦 2,6000정보로 모두 64,2000정보에 이르렀다. 그 뒤 1921년 조선에 보급된 일본종은 조신력, 다마금, 곡량도, 금, 석백, 고천수高千穗, 일출, 웅정雄町, 관산關山, 귀미龜尾, 소전대小田代, 적모赤毛 등이다. 이들의 특징은 조신력은 물을 안정적으로 댈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다마금은 땅이 험한 데가 적어야 하고, 곡량도는 초비梢肥한 곳이 알맞아야 한다. 이 점에서 조신력은 도열병에 약하고, 다마금은 가뭄에 강하고, 곡량도는 수해에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량품종 보급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했는데, 본장이 있는 경기도의 경우 조신력, 곡량도, 다마금, 석백, 일출을 장려종으로 선정했다. 황해도는 일출을 장려종으로, 함경도는 조와 콩 위주로 하고 논벼는 거의 재배하지 않다가 1925년 우량품종으로 소전대와 정월조생井越早生 을 장려했다. 강원도는 1913년 일출관 관산을 장려하다가 1916년 귀미와 다마금을 추가했다. 1차 보급계획을 시작한 1921년에 다시 금과 이세진자伊勢珍子를 더해 6종을 장려종으로 정했다. 경상남도는 도, 곡량도, 조신력(1929년부터 산구중신력山口中神力으로 바꿈), 다마금을 장려종으로 정했다.

 

이러한 우량품종들은 때마다 성쇄도 격심하여 1915년 가장 많이 심던 조신력은 10년 뒤인 1925년 곡량도에 그 자리를 물려준다. 그러고 한 10년 뒤인 1937년에는 은방주, 곡량도, 육우 132호 세 종류가 논벼를 기르는 논의 62.6%를 차지한다. 그러면 이를 통해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달성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품종 개량과 함께 수리시설이나 비료가 늘어야 수확량이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여러 여건은 품종 개량을 따르지 못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우량품종과 토종의 수확량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년도  우량종  토종  차이

1912  1.267   0.754  0.513

1913  1.348   0.792  0.556

1914  1.354   0.900  0.454

1915  1.214   0.765  0.449

1916  1.220   0.773  0.447

1917  1.181   0.717  0.464

1918  1.164   0.833  0.331

1919  1.004   0.641  0.363

1920  1.091   0.783  0.308

1921  1.059   0.747  0.312

1922  1.074   0.781  0.293

1923  1.070   0.770  0.329

단위 섬

 

처음에는 꽤 차이가 났지만 점차 줄어들고 있다. 우량품종이 열성으로 퇴행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여러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음 점, 특히 일본농법이 조선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량종은 토종에 비해 지력을 많이 쓰기 때문에 거름을 더 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다 보니 우량종을 심는 농민들은 판매 비료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고 그럴수록 가계는 자본에 압박을 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전북 지역에서 비료를 사는 데 쓴 돈만 들어보자.

1915년 7,2002원,

1920년 33,4015원,

1925년 82,3598원,

1929년 439,2837원,

1934년 574,0329원,

1935년 728,7516원,

1936년 1050,5385원.

이것만 봐도 거의 150배가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농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 농가에 평균 경영비는 337.070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비료값이 65.565원으로 약 21.56%를 차지했다. 농가조사개황조사라는 자료를 보면, 자소작농은 1932년 비료값으로 13.5원을 쓰다가 1937년에는 38.2원을 쓰고, 소작농은 1932년 8.7원을 쓰다가 1937년 28.7원을 쓰고 있다. 이를 통해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비료를 많이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료의 소비 증가와 함께 직접적으로 지주제를 강화하는 것은 비료값의 부담 관계이다. 비료값의 부담비율은 일반적으로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법과 공과금을 부담하는 방법, 볏짚을 나누는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정조의 경우 소작인이 모두 부담하고, 타조나 집조의 경우 수확물의 분배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소작료 지불 방법은 대개 타조가 일반적이었다. 그 경우 관례는 지주와 소작인이 반씩 부담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주는 사용할 비료의 종류와 양도 정하여 소작인에게 지시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당시 비료값 부담 관계에서 지주가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전액부담을 회피하고 소작인과 반씩 나누었고, 경우에 따라서 전액을 부담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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