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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2부 영농실태조사 충청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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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2부 영농실태조사 경상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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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2부 영농실태조사 제주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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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2부 영농실태조사 전라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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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1부 총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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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농업과학도서관에 가서 귀중한 자료를 직접 보고 돌아왔다.

고문서 자료실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육필 자료가 그것이다.

한번 펼쳐 보았는데, 음... 빠르게 휘갈겨 쓴 글씨라 해독하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리겠더라.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이란 책이 정말 어렵게 나왔겠다는 걸 실감하고 돌아왔다.

오늘 이런 귀중한 자료를 볼 수 있게 도와준 유정상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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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3월 4일. 오늘은 일본에서 이하라 히로미츠井原宏光(75) 씨가 선감도에 가려고 한국을 방문한 날이다. 이하라 씨는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난 재한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선감학원이란 곳에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 왔는데, 그때 그의 나이 8살, 우리 나이로 9살이었다.

 

이하라 씨를 만나는 길에 중앙역 옆 안산천 위로 지나는 전철로.  

 

 

선감도는 조선시대에는 국유 목장으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그곳의 원주민들은 반농반어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을 게다. 이러한 곳이 변모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조선감화령이 발표된 다음부터였다. 조선총독부는 1923년 최초로 원주에 영흥학교라는 감화원을 세우고, 1938년에는 전남 무안군 고하도에 목포학원을 세웠다. 이곳의 목적은 8~18세의 부랑아, 고아, 넝마주이, 불량해질 우려가 있는 청소년들을 수용하고자 해서였다. 그렇게 선감도에 선감학원이 세워진 것은 1942년 5월 19일이었다. 이하라 씨는 원산 원흥학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이곳 선감학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국민학교를 오사카의 한곳에서 다니다 그를 따라왔다.

 

조선감화령의 의도와 목적은 어찌되었든, 결과만 놓고 보면 이렇다. 사회복지란 개념조차 없었을 당시 거리의 부랑아나 고아는 총독부 당국의 골칫거리였을지 모른다. 당시는 군軍 체제. 지금도 군대는 그때 배워서 깔끔하게 잘.. 이란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시대, 일제도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한다. 흠집은 없어야 하는 것, 그런 것은 없애야 하는 것. 자연스레 지우고자 했을 테다. 조선감화령이란 법령 자체가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테고...

 

그래서 선감학원 개발이 시작되었다. 당시 90가구 정도가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집마다 농지의 크기에 따라 보상금의 액수는 달랐다고 한다. 아무튼 평균으로 따지면 한 집에 3만원, 당시 땅값으로 따지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멀찍감치 떨어진 곳에 2000평 정도의 땅에 집을 구하는 값. 그런데 수치로  따져 그게 다일까? 

액수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용산참사가 돈 때문에 일어났을까?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결과만 놓고 볼 수밖에... 보상금이, 보상금으로 사람의 삶을 계산할 수 있는 경우가 있었던가?

더구나 그 당시는 돈으로 평생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라고 받는 게 지금보다 더 쉽진 않았을 게다.

 

선감학원에 부랑아라는 청소년들이 들어왔단다. 그 아이들을 이곳으로 모은 이유는 떠도는,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들을 자급자족시키려고 해서였단다. 그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농사 교사가 있어도, 지금도 그렇지만 청소년들 교육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명목이 좋아 부랑아들을 교육시킨다는 목적이었지, 난 그게 아니라고 본다. 이곳은 수용소였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다. 아이들을 모아다가 두드려 잡으려는 목적. 왜, 김춘삼이 이런 곳에 잡혀올까 걱정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역사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이라 해야 할지도... 그런데 묻고 싶은 건 그럼 역사는 무엇인가? 사료와 자료와 문서로 확립할 수 있는 무엇? 웃긴 소리일지 모른다.

 

일대에 선감학원에서 죽은 청소년들의 무덤이라고 설명하시는 홍 할아버지. 

 

 

함께 돌아보시는 이하라 상과 홍 할아버지. 이 일대에 대략 400여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단다. 그 가운데 이 분이 기억하시는 조선인 아이의 무덤은 50기 정도.

 

 

난 무덤을 보고 놀랐다. 이런 곳이 있다니. 아무도 무덤을 그 뒤에 수습하지 않았다. 물론 모두 고아에 넝마주이니 누가 수습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조선시대에 고아는 그래도 동네에서 책임지게 했다. 고아만이 아니라 과부, 노인 등을 책임지게 했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으로 보면 복지국가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오히려 미친 나라가 되었다.  

 

 

 

무덤마다 나무가 자란다. 나무는 사람이 죽으면 한 그루씩 자라게 하는 것인가? 나도 죽으면 나무 한 그루가 될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알아보니 볼록한 곳이 자라기 좋아서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사죄하러 왔다고 하는 이하라 씨.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사죄하는가? 이런 한 분이 사죄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 거시기... 그것만큼 바보 같은 협정이 어디 있는지... 철두철미한 군바리정신에서 가능했을까? 박정희의 빛이 큰 만큼 그늘도 그렇다. 그건 경중으로 따질 수 없는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지만 기억하는 듯하다. 그게 중요할지도 모른다. 국민성이니 뭐니 하건, 배를 곯지 않는다는 논리. 그게 중요했을지도... 더 창피한 일은 해방이 된 이후 이곳이 전쟁고아로 다시 채워졌다는 이야기. 배운 대로 한다는 그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이어졌으니...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보다, 그들이 제대로 사죄하는 일. 물론 용서가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럼 성인이 될지도... 아무튼 이하라 씨가 일본인의 사죄에 앞장선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마 괜시리 자기 어렸을 적 마음에 쌓은 죄책감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애초에 그만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떤 마음이셨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또 만나 뵙고 얘기할 수밖에.

 

 

잡목이 무성한 곳. 이곳에 빽빽하게 무덤이 자리하고 있단다. 나무 하나에 사람 하나, 그렇게 따지면... 눈물이 난다. 

 

일대를 대략 둘러본 다음 질문 시간을 가졌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하여 시간을 지냈다.

그런데 일본인 이하리 씨는 사죄를 위해 왔다. 그런데 조선인 홍 할아버지는 당시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왔다. 아버지를 부정하면 본인의 삶 자체도 무너지기 때문일까? 당시 선감학원 학생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대부분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로 도망가다가 죽었지, 세간의 소문처럼 맞아 죽거나 한 사람은 별로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과연 없었을까? 군사정권 시대를 지나면서 하나둘 밝혀지는, 소문으로 전해지던 일들이 사실로 밝혀지는 역사를 보낸 나로서는 믿을 수 없다. 그런 말씀조차 역사의 하나겠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없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삶의 한 단면이지 않을까? 아무튼 지주보다 마름이 더 그렇다는 말이 실감이 된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악랄했다는 모씨의 소설 구절이 다가오고, 조선인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 더 가슴 아프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게 가슴 아프고...더럽다.

 

간담회 시간에 질문을 주고받았다. 어느 분이 선감학원과 교관 자제들의 학교를 하나로 보았다. 난 그게 아니란 걸 알려야겠기에 질문을 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선감학원 원생과 학교를 같이 다니신 건가요? 또 일본인 선생님께서는 산해진미와 낙원이라고 선감도를 표현하셨는데 어떤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요?

 

그래서 얻은 답. 선감학원과 대부국민학교 선감도 분교장은 다른 학교다. 자세히 말은 안 해 주셨지만, 선감학원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그 내용이 계속 언급되는 것, 힘들게 하여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 이런 사실을 입에 올리시기 꺼려하셨다. 그 말씀 중간 중간에 있는 내용으로 이런 걸 상상할 뿐.

 

더군다나. 일본인 그분과 함께 당시에 1942~1945년 이 당시 하루에 세 끼를 꼬박꼬박 흰쌀밥을 먹었다는 것.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무리 선감도에 농지가 넓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분이 함께였다면 좋겠다.

 

일본인의 사죄는 받자. 우리가 왜 사죄를 받아야하는지 잘 알자. 그리고 제대로 사죄를 하라고 하자. 헌데 아직 일본인은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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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서 본 우리의 전통농업


 

들어가며


본론에 앞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조선반도)은 어떤 책이고,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먼저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던 다카하시 노보루가 조선 팔도를 다니며 농민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한 농사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놓은 자료이다. 그는 주로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 땅값이나 농산물·농기구의 값은 얼마인지 등을 조사했다. 직접 조사한 내용인 만큼 당시 실정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초고를 정리하여 1991년 일본에서 출판한 것으로서, 저자가 직접 정리하지 못한 만큼 체계나 완결성은 좀 떨어진다. 또한 주로 식량 작물에 초점을 맞추어, 푸성귀 등은 다루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다. 몇 가지 한계는 있지만 당시 농업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틀림없다. 조선총독부의 주관으로 조사된 다양한 내용들이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했다. 후쿠오카는 일본에서도 농법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19세기 후반에는 정부 차원에서 그곳의 농법을 정리해 전국에 보급할 정도였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조선에 첫 발을 내딛어, 그곳에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통합하면서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되어,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둔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반도의 농법을 조사한 가장 큰 목적은 식량 증산에 있었다. 아마도 세계적인 경제 공황과 함께 찾아온 식량 위기가 그 동기였을 것이다. 그는 1937년 7월 6일 경상도로 출장을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이때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어 놓았을 뿐이고 이후 더 자세하게 조사하려고 길을 나서는데,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9월 1일 이후 황해도→9월 6~7일 경상도→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4월 30일~5월 6일 황해도→5월 20일~6월 3일 제주도→7월 2~8일 강원도→10월 12~13일 충청도→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3월 4~9일 황해도→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처럼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쉴 틈 없이 다니느라, 아들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를 볼 새도 없었다고 한다.



전통농업과 현대농업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전통농업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결론부터 말하면, 전통농업이란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종 전통의 범위를 좁혀서 우리의 옛 농사만 전통농업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유럽도 산업화 이전의 농업, 곧 전통농업에서는 삼포제와 콩을 이용한 농법 등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은 노동자로, 자급 중심의 농사는 상품 생산을 위한 농업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부터 그러한 경향을 보이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뚜렷하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조선반도란 책의 내용을 보면, 조금씩 금비金肥를 쓰는 모습에서 그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농업의 특성은 현대농업의 특성을 살펴보면 저절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전통농업을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했는데, 현대농업은 그와 달리 산업화 이후 상품 판매를 위주로 하는 개인 단위의 대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농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맞춰, 넓은 땅에서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가장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는 일부 상업적 유기농업에서도 추구하는 바로서, 어떨 때는 관행농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농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바로 ‘석유’이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이 진행되고 발전함에 따라 이제 석유는 일상생활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농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업화에 따라 도시로 떠난 일손을 석유가 대신하고 있다. 각종 농기계부터 비닐, 농약, 화학비료 같은 석유화학제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이들 없이는 농사짓고 살 수 없을 정도다.

또 ‘시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생활에서 시장 거래를 통해 얻는 돈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돈에 의존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농업에서는 한정된 땅에서 많은 수확을 얻고자 홑짓기, 석유화학제품과 지하수의 남용 등으로 땅은 물론 사람과 자연까지 병들고 있다. 물론 이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이 몇 배는 더 지나치다. 심지어 요즘 도시 사람들은 이게 콩인지 보리인지도 모르는 숙맥들뿐이다.

지금까지 현대농업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전통농업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조선반도란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작부 체계 ― 사이짓기, 섞어짓기, 그루갈이, 돌려짓기


현대농업과 전통농업의 가장 큰 차이는 작부 체계일 것이다. 작부 체계란 한정된 땅에 몇 가지 작물을 조합하여 순서대로 재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넓게는 작물을 생산할 때 필요한 자원 관리, 자재 투입, 재배 기술 등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농업의 작부 체계가 갖는 특징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확량만 늘리고자 홑짓기와 석유화학제품을 쓴다는 데 있다. 이러한 방법이 처음에는 비약적으로 생산량을 늘려 녹색혁명이라고까지 찬양을 받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켜 메말리고, 익충까지 죽여 오히려 더 많은 병해충을 불러오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까지 불러왔다. 이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해 적정량만 쓰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 폐단은 고스란히 우리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자급 위주의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에서는 상품성보다는 먹는 데 초점을 맞춰, 작물들의 다양한 특성을 파악해 한정된 땅에서 서로 어울리게 길렀다. 또한 석유화학제품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람과 살아 있는 것들 ―소, 미생물 등― 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실제로 어떤 작부 체계를 운영하였는지 조선반도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논벼 그루갈이 보리 ― 순천, 광주, 남원, 보성, 벌교, 통영, 익산, 옥구, 나주, 남지, 영덕, 봉화-밀, 아산.

2) 삼(3월 중·하순 심어 7월 중순 수확) 그루갈이 논벼 ― 경북, 특히 안동.

3) 마늘 또는 감자 그루갈이 논벼 ― 경북.

4) 논에는 거의 논두렁콩을 심는다 ―남조선 전반.


위에서 보듯이 그루갈이를 할 수 있는 남부 지방에서는 대부분 뒷그루로 보리를 심었다. 밀은 보리보다 수확이 늦어 모내기에 영향을 주고 지금처럼 많이 먹지도 않았기에, 논에는 별로 심지 않았다. 삼베는 지금도 안동의 유명한 특산물로서, 당시에도 상품성 때문에 논벼의 앞그루로 심었을 것이다. 삼베 말고도 왕골이나 골풀 같은 작물을 논의 일부에 심어 자리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 썼다. 마지막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처럼 논에 그루갈이를 함에 따라 지금과 못자리와 모내기철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겠다.


못자리에 볍씨뿌리기 : 음력 3월 초(교동도), 4월 17일(수원), 4월 20일(개성), 음력 3월 중순(영흥도), 음력 3월 중순(보성), 5월 초(원주), 5월 10일(제주), 음력 3월 말~4월 말(통영), 음력 2월 초(익산-불이흥업농장)

모내기 : 6월 말~7월 말(제주), 음력 5월 8~20일까지(순천), 음력 5월 10~20일(익산), 6월 15일(옥구), 하지 중심(남원), 음력 5월 22일(보성), 음력 5월 말~6월 10일(통영), 6월 20~30일(나주), 음력 4월 29일~5월 10일(수원), 음력 5월 초~말(교동도), 음력 4월 말~6월 초(영흥도-물이 부족해서), 6월 중·하순(원주), 5월 말~6월 20일(개성), 음력 4월 중순(홍천)


이를 통해 대부분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쯤 못자리를 만드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모내기는 지금보다 늦은 하지 무렵이었다. 지금처럼 모내기가 빨라진 데에는 안정적으로 수확량을 늘리는 데 목적이 있다. 벼뿐만 아니라 참외와 딸기 같은 작물을 보면 요즘은 한겨울이 제철인 양 시장에 쏟아진다. 이처럼 현대농업에서는 상품성을 목표로 작물들을 제철이 아닌 때 심고 거둔다. 덕분에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보기 힘들어졌다.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상품성이 높을 정도이다. 작물이 제철을 잃어버린 것과 함께 사람도 철을 모르고 산다. 한겨울에는 반팔, 한여름에는 긴팔을 입는 사람들까지 있다. 농업을 통해 이런 철부지들이 철 좀 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밭의 작부 체계를 살펴보자. 예상하듯 논보다 훨씬 다양하게 이용했다.


1) 보리 그루갈이 조에 섞어짓기 콩 또는 팥 : 제주, 순천, 안동, 괴산, 수원, 양주, 금곡, 강릉.

2) 보리 그루갈이 콩→보리 사이짓기 목화→보리 그루갈이 콩 : 순천, 광주, 남원, 남지, 나주, 안동, 청주, 대전, 아산, 수원, 원주.

3) 보리 그루갈이 콩에 섞어짓기 수수 : 수원, 양주, 덕적도-메밀, 금촌, 가평, 강릉.

4) 보리 사이짓기 콩 : 의성, 안동, 대전, 개성-수수·녹두, 평창, 강릉.

5) 조 섞어짓기 팥 또는 수수 : 경북, 영덕, 개성, 철원, 신막.

6) 밀 사이짓기 콩에 수수 섞어짓기 : 연천, 원주, 평창, 김화.

7) 보리 사이짓기 조 : 안동, 가평, 강릉, 김화.

8) 콩 섞어짓기 수수 : 나주, 충북, 수원, 금곡.

9) 조나 콩 둘레에 섞어짓기 들깨, 참깨, 아주까리 : 경북, 수원, 양주.

10) 보리 그루갈이 밭벼 : 경북, 청주, 대전.

11) 감자 그루갈이 무·배추 : 남원, 대전, 나주.

12) 콩 또는 팥 섞어짓기 옥수수 : 철원, 세포, 평창.

13) 콩에 들깨 섞어짓기 : 충북, 금촌-수수.

14) 가을보리 줄뿌림에 사이짓기 콩 점뿌림 : 경북, 충북.

15) 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수원, 양주.

16) 보리→조→보리→콩 : 영덕, 괴산.

17) 귀리 사이짓기 콩 : 연천, 세표.

18) 보리 그루갈이 고구마 : 제주, 대전.

19) 감자(겨울) 그루갈이 메밀(여름)→피(여름)→감자 그루갈이 메밀 : 제주.

20) 감자 그루갈이 무→조 섞어짓기 콩 : 제주.

21) 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 : 제주.

22) 고구마→밭벼→보리 그루갈이 고구마→밭벼 : 제주.

23) 감자 사이짓기 콩·옥수수·팥 : 평창.

24) 감자 사이짓기 콩→가을보리 그루갈이 조 : 강릉.

25) 밭벼 섞어짓기 수수 : 남원.

26) 보리→조→밀→콩 : 괴산.

27) 조 섞어짓기 콩, 수수, 녹두 : 금곡.

28) 봄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홍천.

29) 보리→콩→보리→조·수수 : 울진.

30) 밀 사이짓기 조 : 홍천.

31) 콩 섞어짓기 옥수수 : 평창.

32) 감자 그루갈이 조 : 강원.

33) 가을보리(겉보리) 또는 봄보리(쌀보리)→콩→가을보리→조 : 봉화.

34) 오이 그루갈이 무·배추에 섞어짓기 파 : 수원.

35) 마늘 섞어짓기 상추 : 개성.


밭 작부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이다. 한마디로 사이짓기는 수확기가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고, 섞어짓기는 특성이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기계에 의존하여 대규모로 농사짓는 현대농업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 콩이면 콩 하나만 심어서 비행기로 관리하면 되는데, 여러 작물이 섞여 있으면 하나하나 손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은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의 핵심이다.

또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는 지금과 달리 식량 생산이 주된 목적이어서 보리나 조 같은 작물이 중심이었다. 당시는 대부분이 농민이며 아직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반도를 보면 푸성귀 종류는 대부분 집 근처 채마밭에서 해결했다. 물론 경성 같은 큰 도시 근처에서는 많이 지었지만, 지금처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서 도시에서도 채마밭 정도는 일구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농업의 활성화가 농촌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물론 수도권 과밀화와 같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전통농업의 작부 체계에서 핵심 작물은 바로 콩이다. 우리의 식생활과 밀접하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알려진 대로 콩과 작물은 땅힘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전통농업에서도 이를 이용하고자 작부 체계에 꼭 콩을 넣었다고 한다. 다음 자료는 콩을 심었을 때의 효과를 기록한 책의 내용이다. 이는 수원 지방에서 수수와 콩·조·들깨를 심었을 때의 수확량을 비교한 결과이다.


1) 수수와 콩일 경우 : 수수 4~5말, 콩 6말 정도.

2) 수수와 조일 경우 : 수수 2~3말, 조 1말~1말 5되.

3) 수수와 들깨일 경우 : 수수 2~3말, 들깨 5~6말 정도.


이를 통해서도 콩의 효과를 알 수 있다. 지금처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대신, 작부 체계를 짤 때 사이짓기·섞어짓기·그루갈이에 콩을 이용하는 방법을 도입하면 좋겠다. 아래의 기록은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사항으로서, 당시 세포농사시험장의 시험 재배 결과이다. 여기서도 작부 체계에 콩과 작물을 넣으면 홑짓기할 때보다는 콩과 작물의 수확량이 떨어지지만, 대신 다른 작물들의 수확량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험 넓이

150평 1구역

시험 작물

첫 번째 방식 : 감자, 콩, 옥수수

두 번째 방식 : 팥, 옥수수, 팥

거름 준 양

(300평에)

관습처럼 준 양 : 두엄 100貫, 황산암모늄 1.5貫, 과인산석회 1.5貫, 나뭇재 5貫

표시하고 준 양 : 두엄 200貫, 황산암모늄 3貫, 과인산석회 3貫, 나뭇재 10貫

비고

첫 번째 방식 : 감자 4, 콩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두 번째 방식 : 팥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수확량(300평에) 

섞어짓기(그루 수)

홑짓기(넓이)

첫 번째 방식

표시 : 감자 212.4貫, 콩 0.227섬, 옥수수 0.749섬. 조수입 계 33원 31전

관습 : 감자 160.5貫, 콩 0.284섬, 옥수수 0.663섬. 조수입 계 30원 64전

표시 : 감자 154.8貫, 콩 0.449섬, 옥수수 0.210원. 조수입 계 26원 54전

관습 : 감자 128貫, 콩 0.416섬, 옥수수 0.242섬. 조수입 계 24원 48전

두 번째 방식

표시 : 옥수수 1.113섬, 팥 0.448섬. 조수입 계 27원 41전

관습 : 옥수수 1.191섬, 팥 0.414섬. 조수입 계 29원 49전

표시 : 옥수수 0.386섬, 팥 0.564섬. 조수입 계 18원 96전

관습 : 옥수수 0.364섬, 팥 0.567섬. 조수입 계 18원 85전

 

마지막으로 감자와 옥수수를 보면, 대부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땅에는 그런 작물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품성을 따라서 작물을 선택하여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재배하기보다는, 그 땅에 어울리는 작물을 선택해 농사를 지었다. 앞에서 “제철”을 말했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전통농업의 핵심이 바로 “제땅”이다.



그밖에 ― 씨앗, 거름, 쟁기질


당시 볍씨의 경우 농사시험장에서 보급한 다마금, 은방주, 영광, 애국, 적신력 같은 보급종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밭 작물은 대부분 토종을 이용했다. 이 책의 기록을 보면, 농민들에게 품종을 묻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그럴 때면 농민들은 ‘흰콩’이니 ‘왕콩’, ‘붉은팥’, ‘울산녹두’ 등이라고 대답했다. 그저 수확도 괜찮고 다른 것보다 맛이 좋다거나 하는 이유로 씨를 받아 썼다. 별다른 이름이 없는 그 품종들이 바로 토종이다.

안완식 박사님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의 토종은 산업화 이후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산업화 이후 다수확의 방향으로 방향을 설정한 결과이다. 현대농업이 추구하는 바대로 나아간 결과, 이름 없던 토종은 거의 멸종 상태이다. 이제는 다국적 종자회사가 씨앗을 독점하여 지적재산권을 행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문제가 이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예측만 할 뿐 아무도 알 수 없다. 배고픔은 해결했으니 토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종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전통농업의 핵심인 제철에 제땅에서 작물을 키우기에는 토종이 더 알맞다. 유전자를 조작한 작물에는 그 회사의 농약만 쓸 수 있는 것처럼.

현대농업에서 편리하게 쓰는 화학비료는 그 편리함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화학제품을 쓰지는 않지만 요즘의 상업적인 유기농업도 문제가 많다. 이런 상태로 나아가면 지속가능한 농업은 없을 것이다. 거름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전통농업에서 활용한 다양한 거름 재료들을 볼 수 있다. 못자리나 논에는 개자리(순천), 자운영(광주, 익산, 보성), 말린풀·토끼풀(제주), 털갈퀴덩굴(남지, 청주), 풋베기콩(제주) 같은 풋거름작물부터 풀(나주), 깻묵(옥구), 나뭇재·똥재(괴산), 해초(영흥도), 콩 삶은 것이나 갈잎(황해도) 등을 넣었다. 또 주요한 밑거름인 두엄의 재료로는 왕겨, 볏짚, 풀, 보릿짚, 소·돼지의 똥, 생선거름(덕적도), 태풍에 밀려온 해초(제주) 등 다양한 유기물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썼다. 웃거름으로는 주로 똥오줌, 돼지 오줌, 설거지물 등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쟁기질이 있다. 한쪽에서는 쟁기질이 흙의 떼알 구조와 보이지 않는 흙속의 다양한 생태계를 망친다고 무경운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입장에서 말하는 쟁기질은 현대의 트렉터 같은 기계를 이용한 로터리 같은 방식의 쟁기질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방식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소를 이용한 쟁기질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했지만, 소쟁기질은 지금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산업화 이후 석유에 기반한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났다.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인간은 물론 자연도 소외되었다.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소쟁기질한 뒤 곰방매를 이용해 덩어리를 깨거나 써레질하고, 아니면 그냥 발로 쓱 문질러 구멍을 내고 콩을 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떼알 구조가 이루어진 흙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오랫동안 유기농사를 지어 흙이 살아 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를 근거로 쟁기질의 목적이 단지 양분을 섞고 흙속에 공기와 물이 통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닌, 다른 것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쟁기질은 사이짓기나 섞어짓기 같은 작부 체계에 맞춰 밭을 꾸미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책의 기록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고, 동네 어르신께도 들었다. 두 거웃 갈이의 경우 목화, 고구마, 보리 줄뿌림, 제충국, 보리·밀(수원)을 심기 위한 쟁기질이고, 세 거웃 갈이는 보리 흩뿌림, 조, 밀, 콩, 팥을 심으려고, 네 거웃 갈이는 팥, 메밀, 보리 등을 심으려는 쟁기질이란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얼마 전 단양에 취재를 가니, 그곳에서는 이런 기능 말고도 비탈이 심한 밭의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이짓기를 쉽게 하도록 하는 역할도 있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골 사이에 새로 작물을 심을 골을 내는 건 사람이나 소입니다. 요즘 폭이 좁은 관리기도 나왔다고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또한 사이갈이를 통해 김매기는 물론 북주기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적당한 쟁기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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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씨의 조선 농업 연구에 대하여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1


내가 처음으로 다카하시 노보루 씨의 이름을 안 것은 농림성 열대농업 연구센터에서 낸 "옛 조선에서 일본의 농업 시험 연구의 성과"(1976년, 농림통계협회 간행)을 통해서였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오치아이 히데오落合秀男 씨의 특별 기고 「조선총독부 농시農試 서선지장장西鮮支場長 ‘다카하시 노보루’」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과 함께, 오치아이 씨의 옆에 다카하시 씨가 남긴 방대한 필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꼭 그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토대학의 동양사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중국 농서 연구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각종 중국 농서의 윤독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조선 농업사에 관심이 있어 그 연구회에 참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는데, 마침 그러한 때에 위에 적은 "성과"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총론(아라시 가이치嵐嘉一 씨 집필)이나 인용된 다케다 소우시치로武田總七郞 씨의 저서·논문을 통하여 조선의 고농서를 이해하기 위한 귀띔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농사직설"이나 "산림경제" 등의 고농서를 혼자서 읽고 있었던 당시로부터 20년, 지금 여기서 다카하시 씨의 유고가 공개적으로 간행된 마당에 그 해설의 짐이 나에게 돌아온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1990년 가을에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郞 선생에게 연락을 받아, 다카하시 씨의 유고가 아드님인 고시로 씨의 곁에 보관되고, 이이누마 선생 본인께서 실현하시려는 것, 미라이샤에서 출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1991년 1월 초순에 고시로 씨 댁에 찾아갔는데, 그로부터 7년, 이번에 출판에 이르기까지 이이누마 선생, 다카하시 고시로 씨, 미라이샤의 다구치 에이지 씨가 치른 노력에는 참으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나 자신은 1991년 4월부터 1년 반에 걸쳐서 한국에 머물고 있어 어떤 안부도 전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해설의 책임을 맡아서 다카하시 씨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카하시 노보루 씨의 경력이나 인품, 조선 농업 연구에 대처한 자세에 대해서는 위에 적은 오치아이 씨의 회상문에 상세하다. 여기에서는 오치아이 씨의 문장에도 바탕을 두면서, 약간의 사견도 섞어서 이 책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 씨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다카하시 씨는 1918년에 동경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 니시가하라西ケ原의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년 동안 대기 생활을 보낸 뒤, 1919년 6월에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에 기수로서 부임했다. 이 수원 시대에는 유전·육종 분야의 연구에 종사,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서 미국, 독일에 유학을 했다. 수원 시대의 연구는 뒤에 학위논문으로 정리하여 공표했다.

‘Studies on the Linkage Relation between the Factors for Endosperm Characters and Sterility in Rice Plant with Special Reference to Fertilization(「벼에서 배유질胚乳質 인자와 불임성不稔性 인자와의 연쇄 관계, 특히 선택 수정에 대한 연구」)’,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구문歐文 보고 3권 1호, 1934년 10월)

귀국한 뒤는 권업모범장의 서선지장(황해도 사리원, 덧붙여 지장의 호칭은 당시의 것에 따랐음)에서 근무, 몇 개월 지나 서선지장장이 되었다. 이후 1944년에 다시 수원에서 근무하기까지 10년 이상에 걸쳐서 사리원에서 연구에 종사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실태 조사는 모두 이 사리원 시대의 것이다.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에 관한 조사·연구는 사리원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동안 총독부의 권업모범장은 1929년에 농사시험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으로 일본의 전국이 악화되는 속에서, 조선에서 농업 시험 연구 체제의 총합화란 움직임이 나왔다. 다카하시 씨는 이 총합화의 중심적 추진자였던 것 같은데, 1944년 새로운 체제가 발족함에 따라서 다카하시 씨는 농업시험장의 총무부장이라는 요직에 취임, 수원에서 일본의 패전=조선의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뒤, 1946년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기간, 다카하시 씨의 조선에서 구체적인 행적은 잘 모른다. 아드님인 고시로 씨의 말에 따르면, 우장춘 씨의 간청을 받아서 수원에 머물며 후진의 지도를 맡았던 듯하다고 한다. 이 책의 모두冒頭에 수록된 「이후의 조선 농업에 대하여」는 해방 이후 수원에서 집필한 것이라고 보인다. 더욱 우장춘 씨는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후배로서, 한국에서는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이것은 속설)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 생애에 대해서는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씨의 「나의 조국 ― 우 박사의 운명의 씨」(新潮文庫)에 상세하다.

이상이 다카하시 씨의 간단한 경력인데, 그의 연구 궤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오치아이 씨의 문장이 간단히 요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여 인용했다.


다카하시 씨가 조선에서 먼저 손을 댄 품종 특성 조사는, 말하자면 형태학적인 연구로서 작물을 하나의 정지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뒤이어 작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 생활 현상을 밝히려고 한 것이 생리학적인 연구이고, 또 작물을 무리로서 파악하고 환경과의 관련을 추급했다. 2년 3작, 사이짓기·섞어짓기를 연구한 시기다. 여기까지는 자연과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인간의 요소가 더해졌다. 다카하시 씨가 자주 했던 말에 “작물은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인간이 관여하여 비로소 작물이 있다. 당연히 작물과 인간을 결부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실태 조사였다. 최후에 거기까지 풍부한 경험을 살찌우고, 조선 농업의 전체를 재편하는 데 노력한 것이다. 그가 걸었던 길은 필연이었다.

형태학形態學 → 생리학生理學 → 생태학生態學 → 인간학人間學의 길이다(앞에서 게재한 특별기고 810~811쪽).


다카하시 씨의 연구가 발전하여 나아간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한 문장이다. 여기에 또 하나를 더한다면, 역사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오치아이 씨는 이 점에 대해서도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다카하시 씨가 중국, 조선, 일본의 고농서를 사 모은 것은단순한 역사적 흥미 때문이 아니다. "제민요술"부터 시작한 아시아의 농서들 가운데 중국, 조선, 일본으로 흐르고 있는 아시아 농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조선 농업의 발전 방향을 찾으려던 것이다.

“농업 연구자는 문헌이라고 하면 가로쓰기로 쓴 것1)만 생각하는데, 인식 부족이 심하다. 더욱 바로 곁에 있는 아시아의 농서를 왜 공부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개탄했다(같은 책 787쪽).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유고의 대부분은 오치아이 씨가 말한 인간학 단계의 것으로,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의 백미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것만으로 이 책을 간행한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말해야 한다.



3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작부방식의 연구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주요 농작물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이야말로 다카하시 씨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방대한 영농 실태 조사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도, 조선의 각지와 각 농가에서 행하고 있는 작부방식에 관한 조사였다. 그럼 왜 다카하시 씨가 작부방식에 주목했던 것일까?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씨는 위에 적은 논문에서 먼저 종래의 작부방식에 간한 서양과 일본의 여러 견해를 검토한다. 그때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서양의 작부방식이 1년 경지이용률 100%를 넘지 않는 토지이용 방식을 전제하는 것임에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경지이용률이 100%를 넘는 토지이용이 널리 보인다는 것, 따라서 서양의 작부방식 이론과는 다른 이론이 요구된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서양과는 다른 동아시아의 작부방식의 독자성을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다케다 소우시치로 씨의 견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다카하시 씨는 조선의 작부방식에 관한 독자의 분류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조선의 작부방식 분류에 맞춰서 (1) 농사땅 이용 방식에 따른 분류, (2) 토지이용의 정도에 따른 분류의 두 가지 분류 방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자에 따른 분류로는 논농사법, 밭농사법, 논밭 번갈아 짓는 법의 세 가지를 지적하는데, 여기에서 논농사란 무논, 밭농사란 밭이다. 후자에 따른 분류로는 휴한식, 연작식, 윤재식, 조합식의 네 종류를 들고 있다. 조합식(또는 조합한 식)이란 “같은 밭에 1년에 1작 이상의 농사를 짓는 작부 순서를 정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이 책 25쪽...나중에 확인).” 이 조합식 작부방익이 널리 보이는 것이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농업의 특징이고, 매우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조합식 작부방식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데에 다카하시 씨가 한 작부방식 연구의 첫 번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다카하시 씨가 조선의 작부방식으로 주목한 것이 사이짓기·섞어짓기의 문제다. 사이짓기·섞어짓기의 정의에 대하여 다카하시 씨는 은사라고 할 수 있는 다케다 소우시치로 씨의 것에 따르고 있다. 곧 다케다 씨에 따르면 “사이짓기란 생활 시기를 달리하는 작물을 어떤 기간 같은 곳에 생육하게 하는 것으로, 곧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을 조합한 경우”이며, “섞어짓기란 생활 기간을 같이하는 2종 이상의 작물을 같은 곳에 재배하는 것”(33쪽... 나중에 확인)이다. 조선에서는 이 사이짓기, 섞어짓기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뒤쳐진 농법이라는 인식이 농학자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에 대하여 다카하시 씨는 밭농사의 조합식에 널리 보이는 섞어짓기와 밭농사의 섞어짓기 실태를 조선 팔도를 조사하고, 거기에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다카하시 씨는 밭농사의 작부방식을 분류하기 위하여, 밭농사 작물을 벼과에 속하는 것 (A), 콩과에 속하는 것 (B), 벼과·콩과 이외에 속하는 것 (C)로 나누고, 다음처럼 결론지었다.


곧, 조사 면적 62억 7000만 평 가운데 AB의 형식 27억 평에 달한다. 다음으로 큰 것은 A(AA인 것 ―미야지마)이 17억 4000만 평, B(똑같이 BB인 것)이 9억 9000만 평으로서, 여기에 다음 ABC가 1억 7400만 평이다.

벼과와 콩과를 번갈이 기르는 넓이가 두드러지게 넓어서, 조사한 넓이의 약 43%에 달하고, 다음으로 AA의 형식을 가진 곳 28%, CC의 형식인 곳 4.5%, ABC 2.8%이다. 적은 것처럼 조금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 농민이 몇 천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경험에 경험을 쌓아 도달한 것으로서, 뜻밖에 조선의 작부방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합리적으로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90쪽... 나중에 확인).


섞어짓기에 대해서도 똑같은 합리성이 발견된다. 곧 섞어짓기의 경우 주작물을 A·B·C, 섞어짓기 작물을 a·b·c로 표시하면, Ab, Ba의 조합을 하는 면적이 높은 비중을 점하고, 여기에서도 벼과와 콩과의 조합이 우원하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카하시 씨는 조선의 작부방식에 대하여 다음처럼 총괄한다.


이상에 따라 보면 현재 조선의 주요 작물의 작부방식은 뚜렷하게 다종다양하고, 대부분 마음대로, 멋대로 어떠한 계획도 없듯이 작물을 심고 있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토지이용에서 적지 않게 고심한 것을 엿볼 수 있어, 서양의 윤재식에 비하여 토지이용률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작부방식의 지역적 분포도 또한 두드러지게 지역적인 특징이 있다.

다음으로 벼과, 콩과의 전화도 또한 농가가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별개하고, 서양 학자가 말하는 원리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놀랄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중략…

또 이 섞어짓기 작물을 분석한 결과,  Ab, Ba의 형식이 단연코 큰 넓이를 점하는 것도 또한 작부방식의 경우처럼 콩과 작물이 땅심 유지에 매우 중요한 것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96쪽,,, 나중에 확인).


조선의 작부방식이 지닌 합리성의 발견, 게다가 그것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이며, 또한 그 최대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농민에게 배운다는 태도로 일관한 실태 조사에 바친 열정도 이에 원천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씨의 작부방식 연구의 세 번째 목적은 당시의 작부방식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조선 작부방식의 역사적 변천을 다룬 두 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의 기술은 현재의 농업사 연구의 수준에 비추어도 역시 참조할 만한 것이다. 작부방식의 역사를 총괄하고, 다카하시 씨는 다음처럼 기술한다.


조선에서 농작물의 작부방식은 그 토지이용의 정도로 보면 이미 500년 전부터 오늘날 보이는 서양의 윤재식에 비교하여 훨씬 고도화되었다. 과거 몇 천 년 동안 휴한식에서 연작식, 윤재식으로 차츰 집약된 단계를 거쳐 오늘날 보이듯이 집약적 조합식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한데, 이것을 지역적으로 볼 때는 그 작부방식의 분포에 두드러진 특이성이 있다(55쪽).


다카하시 씨의 작부 연구의 네 번째 목적은 당시의 작부방식의 이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작부방식의 개량을 위해서는 단순히 농업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농업·농가를 둘러싼 경제적·사회적 여러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 책의 대부분을 점하는 개별 농가의 영농 실태 조사는 이러한 개량의 방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카하시 씨가 실태 조사를 한 방법에 대하여 오치아이 씨는 다음처럼 소개한다.


다카하시 씨는 절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조사표는 만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조사표를 가지고 가면 조사 항목의 칸만 채우면 그걸로 안심해 버리기도 하고, 역으로 조사표에 얽매여서 조사 항목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이다. 그리고 언제나 갱지로 된 잡기雜記 수첩 몇 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때로는 소주 한 되를 들고서 농가의 침침한 온돌방에 앉아 아저씨와 잔을 주고받고, 흥이 나면 몇 시간이나 이야기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조사라는 명목으로 나가지 않아도 회의·강연 등으로 출장을 갔을 때에도 조금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바로 마을로 간 것이다. 이런 일로 도청道廳의 담당 공무원도 적잖게 곤란해 한 적도 있는 듯하다(앞에 말한 특별 기고 802쪽).


이렇게 해서 조선의 농업, 농가의 실태에 정통했던 것이 해방 이후에도 수원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받은 까닭일 것이다.



4


이상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작부방식에 관한 의미에 대해서 적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논고의 의의는 물론 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하 조금 마음 내키는 대로지만, 이후의 연구에 대해서 이 책이 지니는 의의를 기술하고 싶다.

먼저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농촌 경제 연구의 발전을 위해 이 책이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농촌 경제의 실태에 대해서는 수는 적지만 총독부나 조선농회에서 행한 조사 자료가 몇 가지 공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영농 실태 조사와 같이 개별 농가를 상세하고 종합적으로, 게다가 조선 전국에 걸쳐서 조사한 것은 아예 없다.

다카하시 씨의 조사는 표본 조사라 그 점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각 농가의 1년 동안의 노동력 배분과 영농비가 조사되어 있어 이를 통해 해당 농가의 농업수지를 추정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당시의 농가가 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해서도 행간에서 읽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의 농촌 경제 연구에 바탕이 되는 바, 참으로 크다고 생각한다. 또 고용 노동력의 광범위한 존재나 품삯의 실태 등에 대해서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두 번째로 농촌 사회의 연구에도 이 책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 가운데도 특히 주목할 것은, 우결의牛結義(쪽 확인....)나 결우結耦(쪽 확인), 계契(쪽 확인) 등의 농촌 공동체에 관한 조사다. 또 특별한 이름은 없지만 품앗이, 두레 등에 관한 언급을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농촌에서 서로 돕는 조직이 가진 의미를 해명해 가는 것도 이후의 연구 과제일 것이다.

세 번째로 이것은 나의 전문 분야 밖이지만, 민속학이나 언어학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귀중한 자료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서로 돕는 조직은 민속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마을은 연중행사에 관한 취재 조사(쪽 확인) 등도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또 농작업이나 농기구의 이름에 대한 조사는 사투리 연구의 자료로도 귀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 번째로 좁은 의미에서 농업 연구란 측면에서도 이 책은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가운데도 특기할 만한 것은 각종 농기구에 관한 조사로서, 그 이름, 구조, 각 부분의 이름 등 매우 상세하게 조사했다. 또 우리들 연구자를 자주 괴롭히는 마지기(斗落), 하루갈이(日耕)라고 하는 조선의 독특한 넓이 단위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는 각지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마지기란 씨를 뿌리는 양에 따른 넓이 단위이고, 하루갈이란 소가 하루에 가는 넓이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그 넓이는 다양하다. 이 책에 소개된 전국 각지의 사례에서 마지기·하루갈이라고 하는 넓이 단위의 의미를 다시금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재 북조선(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이 책의 서술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다카하시 씨가 오랫동안 황해도의 사리원에서 있었던 관계도 있겠지만, 이 책의 영농 실태 조사에서는 북부 지역이 점하는 비중이 높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의 조선 농업에 대한 관심은 쌀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조사·연구도 벼농사에 중심이 놓였다. 그 때문에 밭농사의 비중이 높은 북부 지역의 조사는 허술했는데,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 보도되듯이 요즘 북조선의 농업 사정은 좋지 않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일 테지만, 자연 조건을 무시한 수리개발이나 옥수수 재배를 강행한 것이 그 큰 원인의 하나란 사실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이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북부 지역의 예전 농업의 모습이 북조선의 농업 부흥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5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는 이상 적은 바와 같이 큰 의의를 가진 것으로, 이후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활용되길 기대하지만, 그의 연구에 여러 제약이나 약점이 있었던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영농 실태 조사의 대상이 된 농가의 대개는 중농 이상에 속한 사람으로, 하층 농가의 조사가 허술하단 것은 큰 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 편중이 생겼는지 여러 원인을 생각할 수 있지만, 역시 다카하시 씨가 총독부 농사시험장이란 식민지배 기관의 일원이었다는 데에 따르는 제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부방식의 연구에서 농학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조건도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조선 농업을 규정하고 있던 식민지라는 정치적 조건에 대해서는 다카하시 씨라고 해도 정면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카하시 씨의 연구도 큰 제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또 한 가지, 그의 연구에서 안타까운 점은 언어의 제약이다. 다카하시 씨는 한글은 이해한 듯하나, 조사는 모두 통역을 데리고 했다. 사투리 문제를 생각하면 통역이 없는 조사는 불가능했다는 것도 모르진 않지만, 기초적인 조선말의 회화 능력이 있었다면 조사 기록의 내용은 한층 충실해졌을 것이다. 10년 이상에 걸쳐서 전국을 샅샅이 조사했던 만큼, 이 점이 더욱더 안타깝다.


1) 서양의 필법. 곧 서양의 농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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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을 너무 거하게 먹은지라 아침 7시에 일어났어도 아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길을 나서 가는 길에 식당이 보이면 먹기로 하고 모텔을 나섰다.

모텔 바로 뒤에는 오래된 지금은 텅 빈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흔적을 보니 농협으로 쓰던 건물인데 혹시 이 건물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건물은  1980년대에는 건강보험공단으로 쓰고, 그 뒤 농협으로 쓰다가 지금은 개인소유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건물을 활용하여 영산포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쓰면 좋겠다.

 

 

어제 미리 동네를 산책하며 알아본 장군의 아들 촬영 거리와 동산농장의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을 찾아나섰다. 장군의 아들 촬영지는 일제강점기 원정통이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시절의 건물이 엄청나게 남아 있다. 어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본 바에 따르면, 도정업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곳이라 하니 영산포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분주히 돌아가던 정미기 소리와 쌀겨 냄새는 사라졌지만, 거의 100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남아 있는 건물들을 보면서 저절로 그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산포 원정통의 현재 모습. 일본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그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많이 낡아서 문화와 관광을 생각한다면 시에서 수리비를 지원해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새로 시원하게 뚫린 영산대교를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나주 제일의 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을 찾을 수 있다. 구로즈미가 떠난 뒤 개인이 소유했던 것을 현재 시에서 매입하여 새로 단장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 덕에 집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멀리 담장 너머로 쳐다볼 수는 있었다.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 일본 1873년 후쿠야마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5월 30일 영산포에 들어온다.    

손수레를 밀며 장사를 시작했다는 그는, 경성과 나주를 오가며 눈치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경성에서 영산강 둘레에 제방을 쌓을 것이라는 정보를 발빠르게 입수한 뒤 일대의 땅을 대량으로 매입하며 농토를 개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주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은 그는 일본에서 모든 자재를 들여와 1935년쯤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는 이곳에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조선농회의 이사는 물론 조선가마니회사와 금융회사, 전남전기주식회사, 조선식산주식회사, 목영 창고운수회사 등 각종 회사를 설립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다. 그 결과 1930년대 1100정보, 330만 평이 넘는 토지를 가진 대지주의 자리에 오르고 동산농장을 운영한다.

 

 구로즈미 이타로의 저택. 현재도 주변에는 이에 맞먹는 건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당시 이 일대에서 단연 우뚝 솟은 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영광은 쇠락하여 마당에는 잡풀만 가득하다.

 

 

그가 설립한 동산농장이 바로 1939년 다카하시 노보루가 광주를 거쳐 제주로 가는 길에 나주로 와서 들른 곳이다. 이 농장의 장원과 함께 나주 금천면 월산리로 농가 조사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산농장 사무실은 어디였을까? 이른 아침이라 어디 물어볼 곳이 없어 일단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아갔던 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월산리로 향하는 길에서 본 드넓은 논. 이 모두가 구로즈미 이타로의 동산농장이 소유한 땅이었다. 여기 살던 사람은 모두 소작인 신세였을 뿐...

 

 

미리 지도를 확인했을 때 월산리는 전남혁신도시인가 하는 곳으로 지정되어 개발되고 있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운기와 트렉터나 지나다녔을 법한, 잘해야 1톤 트럭이나 지나다녔을 법한 길에는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시로 지나다니고 있었다. 산은 파헤쳐지고, 농토는 갈아엎어져 앙상한 흙만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월산리를 찾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가게에서. 이제 농사를 못 지으니 대신 공사장에서 일하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이걸 보고 씁쓸해지는 건 나뿐일까? 

 

 

한참을 달리다 허기지고 목이 말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가게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발견한 가게는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얼른 가게로 들어가 월산리로 가는 길도 묻고, 혹시나 하여 월산리에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사는지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전화번호부를 가져와 펼치는데, 순간 심봉사 눈 뜨듯이 눈이 번쩍 뜨였다. 월산리에는 모두 2명의 강씨가 살고 있었다. '강춘자'와 '강환주'. 그 가운데 '강환주'라는 이름이 이상하게 끌렸다. 내가 찾아가는 곳에서 다카하시 노보루가 만난 사람은 강신성.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얼른 볼펜을 꺼내 들고 급한 대로 손바닥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베껴 적었다. 그리고 사전 정보를 얻을 겸 이 분이 어떤 분인지 물었다. 그러니 지금은 집이 수용되어 살기는 금천면의 아파트에 살면서 농사만 여기서 짓는다고 하며,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다. 얼른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금천남초등학교와 그 인근 민가는 이제 철거가 한창이다. 이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교는 본관은 철거되고 별관만 아직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받았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내 학교가 사라지는 그 느낌은? 

 

 

월산리로 오니 마을 표지석이 길을 인도한다. 그걸 따라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한참을 달리는데 맑은 물이 흘렀을 농수로에는 현실을 반영하는 듯 붉은 흙탕물이 가득했다. 옆으로 펼쳐져 있는 논의 푸르름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어 인상적이었다. 마치 피를 흘리듯 농수로에는 붉은 흙탕물만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마을에 다 들어왔다. 어디가 가게 아저씨가 설명해준 곳일지 가늠하면서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마을로 들어선 순간 한쪽에서 어르신 내외가 수박 줄기를 처리하느라 바쁘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 강환주 어르신이 어디 계시지 아시는지 여쭈었다.

그 순간, "우리가 긴데 왜 그런다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찾았다. 이 분이시구나.

 

 강환주 어르신의 하우스 농사. 수박을 다 걷어내고 이제 고추를 심을 거라고 하신다. 부여에서는 벼를 심었는데 여기서는 고추가 일반적이다.

 

 

먼저 예의를 차려 인사를 드리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명 드렸다. 

"어르신 혹시 강신성 어르신을 모르시나요?"

"우리 조부님이신데..."

"아, 그러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옛날 책이 있는데, 거기에 어르신의 할아버님께서 나오셔서 그 자료를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며 저기 농막에 시원한 데 가서 이야기하자며 그쪽으로 이끄신다. 함께 농막에 자리하고 앉으니 할머니께서는 하우스에서 다 걷고 남은 수박을 한통 가져오셔 쪼개 주셨다.

 

 강환주 어르신과 할머니. 할머니 성함은 따로 여쭈어 보지 않았다.

 

 

어느신 제가 1937년인가 38년쯤에 그 일본 사람이 여기 와서 어르신 할아버님이 농사짓는 걸 조사해 갔더라구요. 그래서 혹시 여기에 오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혹시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환주 할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 강신성 씨는 한마디로 근면성실한 분이셨다고 한다. 동산농장 사무소가 여기 들어오면서 지난 전남외국어고등학교 있는 데에 있었다면서, 그 농장에서 소작을 하셨는데 농사를 잘 지어서 상도 타고 부상으로는 명주베를 받았다고 하신다. 남들 논에는 비료를 많이 줘서 죄 쓰러지는데 할아버지는 부지런하게 풀 베다가 두엄 만들고, 외양간에서 밟혀서 꺼내 써서 그런 피해는 한 번도 없었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다 동산농장의 소작인이었는데, 그나마 소작도 못 얻은 사람은 쫓겨나다시피 만주로 갔단다. 그렇게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져 고생고생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소작이나마 부치던 사람은 고향땅은 떠나지 않아도 됐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이 많았단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일본놈들이 90%나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히 먹을 게 없었다고. 농사를 잘 지어도 소작료에 비료값에 물값 등등을 떼면 내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 없는 참혹한 현실을 보며 어린 시절을 지내신 것이다. 오죽하면 측간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벼를 묻고는 위에다 흙하고 재를 덮어놓았을까 하시며 그때 일을 회상하신다. 그렇게까지 해서 뺏기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귀신같이 찾아가곤 했단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어찌나 성실하신지, 요즘처럼 더울 때는 아침에 시원할 적에 풀 베다가 두엄도 만들고 외양간에도 넣어 두엄을 만들었다며, 비료만 쓰면 논이 박해진다고 금비는 적게 퇴비는 많이 써야 한다며 한소리하신다. 어릴 적에는 마을에 서당도 있어서 바쁠 때는 엄두도 못내고 농한기에 두 달 정도 서당에 다녔다고 하신다. 그래서인지 촌에서 농사만 지으신 어르신치고 말씀하시는 것이 정연하다.

 

강환주 할아버지의 집. 200년도 더 된 터에 80년대 집만 고쳐 지었다고 하신다.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곳을 찾아왔을 게다. 

 

 

혹시 실례일지 몰라 조심스럽게, 옛날 기록을 보니 할아버지께서 묘지기도 하셨다는데 사실인지 여쭈었다. 그랬더니 허!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획 쳐다보시더니, 여기 뒷산이 원래 주인이 자기 선산을 못 찾고 있는 걸 광주까지 찾아가서 할아버지께서 찾아주고 이걸 관리하셨단다. 못된 사람이었으면 주인이 없는 산이라고 함부로 했을 텐데, 그걸 끝까지 수소문해 찾아가 주인을 찾아주고 한 걸 보아도 강신성이란 분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럼 어르신의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셨냐고 묻게 되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시면서, 일제시대에 징용에 끌려가 탄광인가에서 일하고 돌아온 뒤로는 시름시름 앓다가 본인이 19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신다. 그걸 본 식구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뼈골 빠지게 농사지으면 먹을 것도 없이 쓸어가, 사람은 데려다가 진빠지게 일을 시켜 시름시름 죽게 만들진 않나... 이래도 일제시대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인들을 월남에 보내 그 돈으로 경제 성장을 시킨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그 논리대로라면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지.

  

 

위 두 문서는 일제강점기 강신성 씨의 서명이 들어 있는 문서다. 위는 금융조합에 돈을 잘 갚겠다고 서약서를 쓴 것이고, 아래는 대출금을 갚았다는 영수증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경제 제도가 들어온 일제강점기 현금이 없는 농민은 금용기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 이후 미군정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똑같다. 요즘도 농협만 제대로 해도 농민이 덜 힘들 것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현재는 5000평의 농사땅에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어떻게 소작을 하다가 땅을 가지게 되셨는지, 부지런하셔서 돈을 많이 모으신 것인지 여쭈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그 땅을 농사짓던 소작인에게 10~20년 상환제로 자기가 농사짓던 땅에서 계속 농사짓게 해주었단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던 사람은 그나마 자기가 소작하던 땅에서도 쫓겨났다고 한다. 이게 그 유명한 이승만 정권의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흔적인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전쟁 시절의 인민군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당시 다도면은 모두 산인지라 인민군들의 본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밥이며 소며 먹을거리를 가져갔다고. 그러고 낮이 되면 경찰이 나타나 누가 인민군 도와줬냐며 마을 사람들을 족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민군은 경찰 간부나 앞잡이 아니면 사람은 해하지 않았는데, 경찰은 사람들을 엄청 괴롭혔다고 회상하신다. 낮에 나타나 마을사람들 괴롭힐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인민군 소굴에 가서 걔네를 족쳐야지 애꿎은 사람들만 괴롭혔다며 당시 경찰의 무능력함을 꾸짖으셨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거라며 전쟁은 다시는 있으면 안 되는 일인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정말 힘들 거라고 하신다. 꼭 짚어 세계평화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힘든 기억으로 저절로 반전주의자가 되셨나 보다.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걸 내 관점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시작하면 싸움이 끝도 없을 것이다. 서로 남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강환주 어르신 댁을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 바로 옆에서는 혁신도시 개발구역에 들어가 공사가 한창이다. 혁신도시가 들어서면 이 주변 땅들은 어떻게 될까?  

 

강환주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이 산을 배매기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배를 맸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이곳도 인간의 끝없는 노동으로 만든 땅인가 보다. 

 

 

혁신도시로 월산리 바로 옆에는 한전이 들어온다는데, 원래 있던 산을 깎아서 새로운 산을 만들어 조경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큰 도로가 뚫리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붉은 속살은 드러낸 땅이 안쓰러웠다. 이곳에 어떤 도시가 들어설까? 나중에 개발이 끝나고 나면 그때도 다시 한 번 와야겠다. 물론 강환주 어르신도 만나고 말이다.

 

혁신도시로 개발하고 있는 곳을 빙 돌아 광주로 가는 길에. 아내는 이런 여행이 처음인지라 너무 힘이 들다고 하여 원래 계획했던 일정의 반만 소화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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