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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農法に学んだ農学者、高橋昇の生涯

『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が発行されました

2007년 6월,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한국에서 숨겨진 공로가 알려진 일본인」이란 기사로 소개된 카와다 히로시河田宏 씨의 책이, 2007년 12월 20일에 발행되었다.高橋昇~韓国で顕彰されている日本人
 

 

 

『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 농학자農学者・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高橋昇の生涯』(日本評論社)입니다。

 

오랜 세월 치밀한 취재와 한일 근대사연구에 따라서, 다카하시 노보루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훌륭히 그렸다.

 

「일본과는 다른 문화, 습관, 생활 형태를 내려다보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나와 있다. 점령한 일본인의 의식도 같은 것으로, 세계의 1등국이 되었단 사치로만 조선을 보았다. 이것으로는 무엇도 알 리 없다.」

 

책 속에서는, 먼저 그러한 일이 써 있었습니다。

 

구미에게는 비굴함、아시아에서는 오만함 欧米への卑屈さ、アジアへの傲慢さ
 

1919년 다카하시 노보루 씨는 조선총독부 농업시험장 기수技手로, 3・1 독립운동 직후의 조선에 건너왔다. 그래서 다카하시 노보루가 보고 들은 것을 축으로, 러일전쟁부터 경술국치 이후 10년쯤까지에 발행된 책에 나타난 조선인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뒤 다카하시 노보루는 2년 동안 구미欧米를 시찰하러 갔다. 거기서 적은 수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기에는 미국의 장점을 말하면서, 「모두 일본이 미치지 못한다. 나(高橋昇)도 지식을 계발하고, 일본을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장점에는 반드시 단점이 있다. 공덕심公徳心이 있어서 배일排日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도 재미 일본인은 미국의 장점만 말한다. 비굴하다」라고 써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15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탈아입구脱亜入欧=후진 지역인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열강의 하나가 되자는 소리가 커지고 나서, 50년 이상 지났습니다. 구미에게는 비굴한 속내에, 아시아에서는 오만합니다.

조선에 돌아와 마침내 다카하시 노보루의 「업적業績」이 쌓였습니다. 북으로는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함경북도부터 남으로는 제주도에 이르는, 조선 전역에 걸쳐서 200 남짓 농가를 찾아서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그 조사는 농법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조사 대상 가족의 아침저녁밥 등 생활전반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재삼姜在彦 교수도「잘도 이만큼 조사했다」라고 절찬 姜在彦教授も「よくこれだけ調べたものだ」と絶賛
 

지금까지 2년 3작이라는 조선의 독특한 작부방식을 명문화明文化한 것은, 다카하시 노보루 씨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종대왕 시대인 1429년에 공포한『농사직설農事直説』에 이미 써 있었다는 것을, 카와다 히로시河田宏 씨의 책에서 알았습니다.

일본보다 두드러지게 강수량이 적은 조선에는 조선에 맞는 작부방법이 있습니다. 여름작물의 두둑 사이(고랑)에 가을뿌림秋播해 보리를 기르는 등의 「사이짓기間作」와 자라는 시기가 같은 조粟와 피稗 등 2종 이상의 작물을 같은 땅에 기르는「섞어짓기混作」입니다.

「사이짓기間作」의 2년 3작 방법에서는 벼과 작물과 콩과 작물의 조합이 가장 많습니다. 자운영을 심는것은 콩과 식물이 거름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섞어짓기混作」의 장점은 가뭄이 일어나면 가뭄 피해에 강한 조를 남기고 피를 뽑고, 강수량이 많은 해에는 반대로 할 수 있단 점에 있습니다.

이러한 조사기록은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를 중심으로, 飯沼二郎 도켜대 명예교수, 노보루 씨의 부하였던 落合秀男 씨 들의 노력 덕에,『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으로 미래사未来社에서 199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292쪽, 무게 약 3kg의 큰 책입니다. 수원의 농촌진흥청에서 실물을 보았는데, 약 10만 엔이라고 합니다.

 

 
廣寒楼の玩月亭から戻る河田宏さん(撮影:塩川慶子)


 

출판까지의 경위는『아버지의 유고父の遺稿』(海鳥社・高橋甲四郎著)에 자세하게 써 있습니다.

이『아버지의 유고』의 책머리「출판에 부쳐出版に寄せて」에서, 飯沼二郎 씨가「『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출판을 추천한 분들 가운데, 특히 조선 근대사의 세계적 권위자 花園大学 文学部 객원교수 강재삼姜在彦 씨가 이 출판에 요즘 드문 효자의 뜻을 느꼈다고 쓴 데 감동했다」라고 써 있습니다.


그 강재삼 씨와 이전에 만났습니다만, 카와다 히로시 씨의『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을 읽고서 잘 이만큼 조사한 것이다와 매우 절찬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를 이끈 선배와 협력자의 존재도 써 있습니다. 큰일은 혼자서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한 당연한 일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카와다 씨의 노력과 재능의 결정은 인정되어「재단법인 한철문화재단韓哲文化財団」의 2007년의 조성기금수여자에 뽑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김용권 씨의 번역으로, 한국 동아일보사에서 한글판이 출판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더욱 다카하시 노보루의 일이 한국에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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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に残る農学者

「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
「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
は八女市立図書館にあります
지난해 끝무렵에 야메시八女市 출신의 농학자(고인)을 주인공으로한 기록문학이 출판되었다. 카와다 히로시河田宏가 지은 "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農学者 高橋昇の生涯"(이하 "다사하시 노보루의 생애")로서, 기록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西日本新聞1월 20일자). 이 책의 내용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 농업 개발에 생애를 바쳐 역사적인 대저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을 지은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 선생님의 평전입니다.

먼저 선생님의 약력을 간단히 적음.
1892년(明治 25) 12월, 야메군八女郡 上妻村 津江(현 야메시八女市)에서 아버지父 가케하시 이와지로梯岩次郎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上妻 소학교, 明善 중학교, 第七 고등학교(가고시마鹿児島), 東京帝大 농학부農学部 졸업(이 사이에 구로키마치黒木町의 다카하시高橋 집안의 양가가 됨). 1919년(大正 8)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에 기수技手로서 부임,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 미국, 독일에 유학, 귀국한 뒤 총독부 농사시험장 서선지장장(황해도 사리원) 1934년(昭和 9) 농학박사에, 1944년(昭和 19) 수원 본장 총무부장, 1945년(昭和 20) 패전, 한국 쪽의 간청을 받아 후진 지도를 위해 머물다 이듬해 5월에 귀국, 같은 해 7월 20일 후쿠시마마치福島町 혼마치本町의 친척 집에서 급사, 55세.
선생님이 조선에 머물 때 사진이 여러 장 남아 있습니다. 땅딸막한 체격에 ギョロ 눈、턱수염을 기른 위엄 안에도 어딘지 온정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천성은 조선시대의 부하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선생님은 스스로가 계획한 것은 철저히 이루려는 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저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농법과 농민")은 야메시립도서관에 있었습니다. B5쇄, 크기는 가로 27.5cm, 너비 20.5cm, 두께 7cm, 1292쪽으로 무게는 3kg, 출판사 미래사未来社, 가격 10만 엔의 두꺼운 책입니다. 저는 농학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책의 학술 가치를 도쿄대 명예교수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씨의 같은 책 '서문序文' 과 신문기사에서 찾아 발췌합니다.
"식민지란 상황의 조선에서는 일본의 뛰어난 농업기술을 위에서 농민에게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시험장의 기사技師 다카하시 노보루는 총독부의 지시와 다르게, 조선 농민이 예부터 해왔던 농법에 기반하여, 농업 지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시험장에서 일하던 26년 동안 짬을 내 조선인 농가를 한 집 한 집 찾아가서 농업 조사를 했다. 그 발자국은 조선의 온 땅에 나고, 그 조사 자료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원고지로 약 1,3000장, 사진 1500장, 지도류 260장 등) 패전하고 그 자료는 다카하시와 그 부하들이 고향인 야메시八女市에 가지고 돌아왔지만, 다카하시는 갑자기 죽는다. 그로부터 50년,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高橋甲四郎(야메시 津江)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출판된 것이 ?�농법과 농민?�이다. 그 논고는 지금에서는 매우 얻기 힘든 자료이고, 지금부터 이후의 한국 및 조선 농업의 진정한 근대화의 기초를 뚜렷하게 할 것이다”라고 영구적인 이 책의 가치를 적고 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 씨와 북조선 국방위원장 김정일 씨에게 기증했고, 뒷날 두 나라에서 정중한 사례 편지가 도착했다.



‘삶의 방식’에 감명 「生き方」に感銘

 

다카하시 노보루 선생님의 서선지장장西鮮支場長 시대의 ‘삶의 방식’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에 따르면, 선생님이 서선지장장이 되었던 소화昭和 전기 무렵의 농사시험장 안에 젊은 기수들은 날마다 실험실 안의 일과 장의 시험試験에만 매달리고, 조선인 농가의 실태 조사 등은 “진흙 냄새가 나는 과학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카하시 선생님은 “조선의 농민들은 몇 백 년에 걸쳐서 고유한 환경 안에서 공부에 공부를 거듭하여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농법을 이룩해 왔습니다. 먼저 조선인 농가에 뛰어들어 그들에게서 농법을 겸허하게 배우는 것이 일의 첫 걸음입니다”라고 농학자로서 처음으로 현장 활동을 중시한 지도를 하도록 하고, 선생님 스스로도 실천했다. 선생님의 행동의 바탕에는,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인을 멸시하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하다”라는 강한 인도주의가 깔려 있었다.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에는 여러 군데에 서선지장西鮮支場 시대 부하들의 추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췌합니다.

“다카하시 지장장은 실험이든지 기획이든지가 생각나면, 낮이든 밤이든 갑자기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밤새 논의한다. 배가 고프면 감자에 버터를 발라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다카하시 선생님은 생활 속에서 부하들에게 ‘업무’란 어떠한 일인가, ‘먹고 자는 걸 잊을 정도로 몰입하는 업무가 멋있다’ 등을 가르쳤습니다.

같은 지장 출신의 부하들은 일본의 패전 후에 농림성으로 돌아와 중견간부로, 또 같은 지장에 있던 조선인 기사들은技師 독립한 한국에서 농정 관료의 중추를 점하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추기 “농법과 농민”이 간행되기까지 50년을 지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효심과 노력에 머리를 숙입니다. 자세히는 이 분의 저서 ?�아버지의 유고父の遺稿?�(海鳥社)에 나옵니다.

일본日本 민예협단民芸協団 야메시지부八女支部  고문顧問/ 마츠다 쿠니히코松田久彦



2008年 9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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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년 되었나,

내가 읽으며 번역하고 있는 책이다.

아무도 번역하지 않았기에 내가 해서 남들과 나눠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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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갔다. 다행히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난 맑게 갠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림 1 아무 기술이 없어도 좋은 사진이 나오는 하늘 아래 벌교역. 새삼 10년 전 기차를 타고 이 역을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만큼 주먹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주먹들이 모이는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벌교는 지금과는 달리 예전에는 돈냄새가 폴폴 풍기는 곳이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 기차역까지 있다면 말 다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신작로인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는 1번 국도도 그렇고 경인선도 그렇고, 일제는 돈이 되는 곳이라면 길을 뚫고, 기차를 놓았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경제가 잘 굴러가도록 잘 쓰는 길을 놔두고 쓸데없이 산을 깎고 길을 뚫는다는 것. 자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야 한다. 농사와는 어울리기 힘든 흐름을 가진다.

간밤 후배와 술 한 잔 나누어 눈이 퉁퉁 부었다. 속을 풀 만한 먹을거리를 찾아 장을 헤맸다. 마침 장날이라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국밥집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거기에는 입 짧은 후배도 한몫했다. 찾다 찾다 찾은 곳이 허름한 밥집이었다. 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백반이었다. 아마 장날에만 여는 집 같았다. 시원한 콩나물국에 가짓수도 엄청 많은 반찬들, 밥은 또 얼마나 꾹꾹 눌러서 주시는지. 일단 콩나물국부터 시원하게 마시고 속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도 알아서 한 대접 또 주신다. 정신없이 참 맛있게 먹었다. 이 맛을 어떤 말로 표현할지 도대체 떠오르지 않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밥값을 계산하려고 1,0000원을 건넸다. 그런데 돌아오는 돈이 6000원! 이 어찌된 일인가? 1인분에 2000원. 이렇게 싼 값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다니. 이거 기분 째진다.


 

 그림 2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 겉에 양철을 덧댔다. 양철이 살짝 벗겨진 곳을 자세히 보면 나무가 보인다. 개발이 안 된 덕에 근대문화유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벌교.

그림 3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낡고 초라한 건물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버스마저 왜 이리 추레한 것인지.


다카하시 노보루가 벌교에 온 것은 1939년 10월 18일. 난 2007년 7월 13일에 왔으니 한 70년쯤 차이가 난다. 그는 벌교에 도착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오후 4시 6분 보성을 출발하여, 시마자키島崎 기수와 최崔 기수(보성군 농회 기수)의 안내를 받으며 벌교로 향했다. 오후 5시 도착했다.
벌교읍에서 으뜸인 조선 여관, ‘보성관寶城館’에 들어갔다. 일본인도 묵는 사람이 많았고, 시설이 괜찮은 편이었다.


보성관이란 여관 이름이 눈에 띈다. 여기 오기 전 조사를 통해 아직 이 여관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번 벌교 여행은 이 여관을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이 건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 더듬더듬 찾아갔다. 조금 지나자 일제강점기 냄새가 물큰하게 풍기는 거리에 들어섰다. 순간 이곳 어딘가에 ‘보성관’이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림 4 보성관이 자리한 거리는 옛날에 벌교의 중심지, 곧 본정통이었다. 지금은 이 거리가 본정통이지만...


그림 5 보성관 입구.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작은 입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크린에이드’라는 간판의 오른쪽이 입구. 2층은 여관 건물.


드디어 여관을 찾아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이때 시간은 거꾸로 흘러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왔던 그때로 돌아갔다. 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여관. 댓돌에는 손님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저 방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앉아 있을까?

그림 6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이 여관은 현재 보성관이라는 이름보다 ‘남도여관’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가 조정래 씨가 쓴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빨치산 토벌대가 이 여관에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지금 1층은 가게와 살림집으로 쓰고, 2층은 비어 있다고 한다. 1층에는 방이 열 개, 2층은 좀 더 큰 다다미방이 네 개다. 이 정도 규모면 엄청 좋은 호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림 7 지금은 텅 빈 2층 다다미방. 사진은 퍼옴.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화단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 2층을 올렸다.

그림 8 보성관의 모습. 70년 전에도 이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그분은 남도초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교사를 하다가 퇴직하고 금은방을 냈는데, 이 건물이 매물로 나와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게 1979년의 일이다. 그러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여관 간판을 내렸다.

이 분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이렇게 살아남았다. 언제 개발이란 광풍이 불어 닥칠지 모르는 곳에 사는 건물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에 비하면, 참 행복한 집이다. 어디 건물뿐이랴 소, 닭, 돼지들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고 내 뱃속으로 들어온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보성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런 밥상을 받아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상차림을 보자.



반찬은 바닷가답게 비린 것들이 많다. 국도 멸치인지 생선인지를 넣고 끓였고, 전어 내장으로 만든 돔배젓에 굴젓까지 나왔다. 여기에 벌교의 자랑 꼬막이 어찌 빠질 수 있으랴! 여자만에서 캔 꼬막은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쫀닥쫀닥하고 쫄깃쫄깃한 것이, 짭짤하니 따로 장을 찍을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속이 얼콰하니 든든하다. 꼬막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인다. 저런 밥상이면 속이 부대끼지도 않게 밥 한 공기 뚝딱 맛있게 먹겠다.

여관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정통답게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으로 썼다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잘 지은 건물이란 느낌이다. 1919년에 건립했다고 하니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금융조합은 1907년 생겨 1956년 7월까지 있던 서민들의 신용 금융기관이었다. 지금의 신용협동조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해체되면서 생긴 것이 바로 농업협동조합이다. 그러니 농협의 전신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기관이 농민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그저 합법적으로 돈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지금 농협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림 10 르네상스식을 바탕으로 여러 양식을 절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으로,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쓴다.


그림 11 보성관 주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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