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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서 본 우리의 전통농업


 

들어가며


본론에 앞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조선반도)은 어떤 책이고,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먼저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던 다카하시 노보루가 조선 팔도를 다니며 농민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한 농사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놓은 자료이다. 그는 주로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 땅값이나 농산물·농기구의 값은 얼마인지 등을 조사했다. 직접 조사한 내용인 만큼 당시 실정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초고를 정리하여 1991년 일본에서 출판한 것으로서, 저자가 직접 정리하지 못한 만큼 체계나 완결성은 좀 떨어진다. 또한 주로 식량 작물에 초점을 맞추어, 푸성귀 등은 다루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다. 몇 가지 한계는 있지만 당시 농업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틀림없다. 조선총독부의 주관으로 조사된 다양한 내용들이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했다. 후쿠오카는 일본에서도 농법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19세기 후반에는 정부 차원에서 그곳의 농법을 정리해 전국에 보급할 정도였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조선에 첫 발을 내딛어, 그곳에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통합하면서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되어,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둔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반도의 농법을 조사한 가장 큰 목적은 식량 증산에 있었다. 아마도 세계적인 경제 공황과 함께 찾아온 식량 위기가 그 동기였을 것이다. 그는 1937년 7월 6일 경상도로 출장을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이때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어 놓았을 뿐이고 이후 더 자세하게 조사하려고 길을 나서는데,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9월 1일 이후 황해도→9월 6~7일 경상도→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4월 30일~5월 6일 황해도→5월 20일~6월 3일 제주도→7월 2~8일 강원도→10월 12~13일 충청도→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3월 4~9일 황해도→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처럼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쉴 틈 없이 다니느라, 아들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를 볼 새도 없었다고 한다.



전통농업과 현대농업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전통농업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결론부터 말하면, 전통농업이란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종 전통의 범위를 좁혀서 우리의 옛 농사만 전통농업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유럽도 산업화 이전의 농업, 곧 전통농업에서는 삼포제와 콩을 이용한 농법 등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은 노동자로, 자급 중심의 농사는 상품 생산을 위한 농업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부터 그러한 경향을 보이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뚜렷하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조선반도란 책의 내용을 보면, 조금씩 금비金肥를 쓰는 모습에서 그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농업의 특성은 현대농업의 특성을 살펴보면 저절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전통농업을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했는데, 현대농업은 그와 달리 산업화 이후 상품 판매를 위주로 하는 개인 단위의 대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농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맞춰, 넓은 땅에서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가장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는 일부 상업적 유기농업에서도 추구하는 바로서, 어떨 때는 관행농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농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바로 ‘석유’이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이 진행되고 발전함에 따라 이제 석유는 일상생활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농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업화에 따라 도시로 떠난 일손을 석유가 대신하고 있다. 각종 농기계부터 비닐, 농약, 화학비료 같은 석유화학제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이들 없이는 농사짓고 살 수 없을 정도다.

또 ‘시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생활에서 시장 거래를 통해 얻는 돈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돈에 의존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농업에서는 한정된 땅에서 많은 수확을 얻고자 홑짓기, 석유화학제품과 지하수의 남용 등으로 땅은 물론 사람과 자연까지 병들고 있다. 물론 이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이 몇 배는 더 지나치다. 심지어 요즘 도시 사람들은 이게 콩인지 보리인지도 모르는 숙맥들뿐이다.

지금까지 현대농업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전통농업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조선반도란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작부 체계 ― 사이짓기, 섞어짓기, 그루갈이, 돌려짓기


현대농업과 전통농업의 가장 큰 차이는 작부 체계일 것이다. 작부 체계란 한정된 땅에 몇 가지 작물을 조합하여 순서대로 재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넓게는 작물을 생산할 때 필요한 자원 관리, 자재 투입, 재배 기술 등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농업의 작부 체계가 갖는 특징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확량만 늘리고자 홑짓기와 석유화학제품을 쓴다는 데 있다. 이러한 방법이 처음에는 비약적으로 생산량을 늘려 녹색혁명이라고까지 찬양을 받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켜 메말리고, 익충까지 죽여 오히려 더 많은 병해충을 불러오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까지 불러왔다. 이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해 적정량만 쓰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 폐단은 고스란히 우리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자급 위주의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에서는 상품성보다는 먹는 데 초점을 맞춰, 작물들의 다양한 특성을 파악해 한정된 땅에서 서로 어울리게 길렀다. 또한 석유화학제품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람과 살아 있는 것들 ―소, 미생물 등― 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실제로 어떤 작부 체계를 운영하였는지 조선반도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논벼 그루갈이 보리 ― 순천, 광주, 남원, 보성, 벌교, 통영, 익산, 옥구, 나주, 남지, 영덕, 봉화-밀, 아산.

2) 삼(3월 중·하순 심어 7월 중순 수확) 그루갈이 논벼 ― 경북, 특히 안동.

3) 마늘 또는 감자 그루갈이 논벼 ― 경북.

4) 논에는 거의 논두렁콩을 심는다 ―남조선 전반.


위에서 보듯이 그루갈이를 할 수 있는 남부 지방에서는 대부분 뒷그루로 보리를 심었다. 밀은 보리보다 수확이 늦어 모내기에 영향을 주고 지금처럼 많이 먹지도 않았기에, 논에는 별로 심지 않았다. 삼베는 지금도 안동의 유명한 특산물로서, 당시에도 상품성 때문에 논벼의 앞그루로 심었을 것이다. 삼베 말고도 왕골이나 골풀 같은 작물을 논의 일부에 심어 자리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 썼다. 마지막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처럼 논에 그루갈이를 함에 따라 지금과 못자리와 모내기철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겠다.


못자리에 볍씨뿌리기 : 음력 3월 초(교동도), 4월 17일(수원), 4월 20일(개성), 음력 3월 중순(영흥도), 음력 3월 중순(보성), 5월 초(원주), 5월 10일(제주), 음력 3월 말~4월 말(통영), 음력 2월 초(익산-불이흥업농장)

모내기 : 6월 말~7월 말(제주), 음력 5월 8~20일까지(순천), 음력 5월 10~20일(익산), 6월 15일(옥구), 하지 중심(남원), 음력 5월 22일(보성), 음력 5월 말~6월 10일(통영), 6월 20~30일(나주), 음력 4월 29일~5월 10일(수원), 음력 5월 초~말(교동도), 음력 4월 말~6월 초(영흥도-물이 부족해서), 6월 중·하순(원주), 5월 말~6월 20일(개성), 음력 4월 중순(홍천)


이를 통해 대부분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쯤 못자리를 만드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모내기는 지금보다 늦은 하지 무렵이었다. 지금처럼 모내기가 빨라진 데에는 안정적으로 수확량을 늘리는 데 목적이 있다. 벼뿐만 아니라 참외와 딸기 같은 작물을 보면 요즘은 한겨울이 제철인 양 시장에 쏟아진다. 이처럼 현대농업에서는 상품성을 목표로 작물들을 제철이 아닌 때 심고 거둔다. 덕분에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보기 힘들어졌다.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상품성이 높을 정도이다. 작물이 제철을 잃어버린 것과 함께 사람도 철을 모르고 산다. 한겨울에는 반팔, 한여름에는 긴팔을 입는 사람들까지 있다. 농업을 통해 이런 철부지들이 철 좀 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밭의 작부 체계를 살펴보자. 예상하듯 논보다 훨씬 다양하게 이용했다.


1) 보리 그루갈이 조에 섞어짓기 콩 또는 팥 : 제주, 순천, 안동, 괴산, 수원, 양주, 금곡, 강릉.

2) 보리 그루갈이 콩→보리 사이짓기 목화→보리 그루갈이 콩 : 순천, 광주, 남원, 남지, 나주, 안동, 청주, 대전, 아산, 수원, 원주.

3) 보리 그루갈이 콩에 섞어짓기 수수 : 수원, 양주, 덕적도-메밀, 금촌, 가평, 강릉.

4) 보리 사이짓기 콩 : 의성, 안동, 대전, 개성-수수·녹두, 평창, 강릉.

5) 조 섞어짓기 팥 또는 수수 : 경북, 영덕, 개성, 철원, 신막.

6) 밀 사이짓기 콩에 수수 섞어짓기 : 연천, 원주, 평창, 김화.

7) 보리 사이짓기 조 : 안동, 가평, 강릉, 김화.

8) 콩 섞어짓기 수수 : 나주, 충북, 수원, 금곡.

9) 조나 콩 둘레에 섞어짓기 들깨, 참깨, 아주까리 : 경북, 수원, 양주.

10) 보리 그루갈이 밭벼 : 경북, 청주, 대전.

11) 감자 그루갈이 무·배추 : 남원, 대전, 나주.

12) 콩 또는 팥 섞어짓기 옥수수 : 철원, 세포, 평창.

13) 콩에 들깨 섞어짓기 : 충북, 금촌-수수.

14) 가을보리 줄뿌림에 사이짓기 콩 점뿌림 : 경북, 충북.

15) 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수원, 양주.

16) 보리→조→보리→콩 : 영덕, 괴산.

17) 귀리 사이짓기 콩 : 연천, 세표.

18) 보리 그루갈이 고구마 : 제주, 대전.

19) 감자(겨울) 그루갈이 메밀(여름)→피(여름)→감자 그루갈이 메밀 : 제주.

20) 감자 그루갈이 무→조 섞어짓기 콩 : 제주.

21) 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 : 제주.

22) 고구마→밭벼→보리 그루갈이 고구마→밭벼 : 제주.

23) 감자 사이짓기 콩·옥수수·팥 : 평창.

24) 감자 사이짓기 콩→가을보리 그루갈이 조 : 강릉.

25) 밭벼 섞어짓기 수수 : 남원.

26) 보리→조→밀→콩 : 괴산.

27) 조 섞어짓기 콩, 수수, 녹두 : 금곡.

28) 봄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홍천.

29) 보리→콩→보리→조·수수 : 울진.

30) 밀 사이짓기 조 : 홍천.

31) 콩 섞어짓기 옥수수 : 평창.

32) 감자 그루갈이 조 : 강원.

33) 가을보리(겉보리) 또는 봄보리(쌀보리)→콩→가을보리→조 : 봉화.

34) 오이 그루갈이 무·배추에 섞어짓기 파 : 수원.

35) 마늘 섞어짓기 상추 : 개성.


밭 작부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이다. 한마디로 사이짓기는 수확기가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고, 섞어짓기는 특성이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기계에 의존하여 대규모로 농사짓는 현대농업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 콩이면 콩 하나만 심어서 비행기로 관리하면 되는데, 여러 작물이 섞여 있으면 하나하나 손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은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의 핵심이다.

또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는 지금과 달리 식량 생산이 주된 목적이어서 보리나 조 같은 작물이 중심이었다. 당시는 대부분이 농민이며 아직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반도를 보면 푸성귀 종류는 대부분 집 근처 채마밭에서 해결했다. 물론 경성 같은 큰 도시 근처에서는 많이 지었지만, 지금처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서 도시에서도 채마밭 정도는 일구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농업의 활성화가 농촌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물론 수도권 과밀화와 같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전통농업의 작부 체계에서 핵심 작물은 바로 콩이다. 우리의 식생활과 밀접하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알려진 대로 콩과 작물은 땅힘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전통농업에서도 이를 이용하고자 작부 체계에 꼭 콩을 넣었다고 한다. 다음 자료는 콩을 심었을 때의 효과를 기록한 책의 내용이다. 이는 수원 지방에서 수수와 콩·조·들깨를 심었을 때의 수확량을 비교한 결과이다.


1) 수수와 콩일 경우 : 수수 4~5말, 콩 6말 정도.

2) 수수와 조일 경우 : 수수 2~3말, 조 1말~1말 5되.

3) 수수와 들깨일 경우 : 수수 2~3말, 들깨 5~6말 정도.


이를 통해서도 콩의 효과를 알 수 있다. 지금처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대신, 작부 체계를 짤 때 사이짓기·섞어짓기·그루갈이에 콩을 이용하는 방법을 도입하면 좋겠다. 아래의 기록은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사항으로서, 당시 세포농사시험장의 시험 재배 결과이다. 여기서도 작부 체계에 콩과 작물을 넣으면 홑짓기할 때보다는 콩과 작물의 수확량이 떨어지지만, 대신 다른 작물들의 수확량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험 넓이

150평 1구역

시험 작물

첫 번째 방식 : 감자, 콩, 옥수수

두 번째 방식 : 팥, 옥수수, 팥

거름 준 양

(300평에)

관습처럼 준 양 : 두엄 100貫, 황산암모늄 1.5貫, 과인산석회 1.5貫, 나뭇재 5貫

표시하고 준 양 : 두엄 200貫, 황산암모늄 3貫, 과인산석회 3貫, 나뭇재 10貫

비고

첫 번째 방식 : 감자 4, 콩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두 번째 방식 : 팥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수확량(300평에) 

섞어짓기(그루 수)

홑짓기(넓이)

첫 번째 방식

표시 : 감자 212.4貫, 콩 0.227섬, 옥수수 0.749섬. 조수입 계 33원 31전

관습 : 감자 160.5貫, 콩 0.284섬, 옥수수 0.663섬. 조수입 계 30원 64전

표시 : 감자 154.8貫, 콩 0.449섬, 옥수수 0.210원. 조수입 계 26원 54전

관습 : 감자 128貫, 콩 0.416섬, 옥수수 0.242섬. 조수입 계 24원 48전

두 번째 방식

표시 : 옥수수 1.113섬, 팥 0.448섬. 조수입 계 27원 41전

관습 : 옥수수 1.191섬, 팥 0.414섬. 조수입 계 29원 49전

표시 : 옥수수 0.386섬, 팥 0.564섬. 조수입 계 18원 96전

관습 : 옥수수 0.364섬, 팥 0.567섬. 조수입 계 18원 85전

 

마지막으로 감자와 옥수수를 보면, 대부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땅에는 그런 작물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품성을 따라서 작물을 선택하여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재배하기보다는, 그 땅에 어울리는 작물을 선택해 농사를 지었다. 앞에서 “제철”을 말했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전통농업의 핵심이 바로 “제땅”이다.



그밖에 ― 씨앗, 거름, 쟁기질


당시 볍씨의 경우 농사시험장에서 보급한 다마금, 은방주, 영광, 애국, 적신력 같은 보급종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밭 작물은 대부분 토종을 이용했다. 이 책의 기록을 보면, 농민들에게 품종을 묻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그럴 때면 농민들은 ‘흰콩’이니 ‘왕콩’, ‘붉은팥’, ‘울산녹두’ 등이라고 대답했다. 그저 수확도 괜찮고 다른 것보다 맛이 좋다거나 하는 이유로 씨를 받아 썼다. 별다른 이름이 없는 그 품종들이 바로 토종이다.

안완식 박사님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의 토종은 산업화 이후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산업화 이후 다수확의 방향으로 방향을 설정한 결과이다. 현대농업이 추구하는 바대로 나아간 결과, 이름 없던 토종은 거의 멸종 상태이다. 이제는 다국적 종자회사가 씨앗을 독점하여 지적재산권을 행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문제가 이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예측만 할 뿐 아무도 알 수 없다. 배고픔은 해결했으니 토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종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전통농업의 핵심인 제철에 제땅에서 작물을 키우기에는 토종이 더 알맞다. 유전자를 조작한 작물에는 그 회사의 농약만 쓸 수 있는 것처럼.

현대농업에서 편리하게 쓰는 화학비료는 그 편리함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화학제품을 쓰지는 않지만 요즘의 상업적인 유기농업도 문제가 많다. 이런 상태로 나아가면 지속가능한 농업은 없을 것이다. 거름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전통농업에서 활용한 다양한 거름 재료들을 볼 수 있다. 못자리나 논에는 개자리(순천), 자운영(광주, 익산, 보성), 말린풀·토끼풀(제주), 털갈퀴덩굴(남지, 청주), 풋베기콩(제주) 같은 풋거름작물부터 풀(나주), 깻묵(옥구), 나뭇재·똥재(괴산), 해초(영흥도), 콩 삶은 것이나 갈잎(황해도) 등을 넣었다. 또 주요한 밑거름인 두엄의 재료로는 왕겨, 볏짚, 풀, 보릿짚, 소·돼지의 똥, 생선거름(덕적도), 태풍에 밀려온 해초(제주) 등 다양한 유기물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썼다. 웃거름으로는 주로 똥오줌, 돼지 오줌, 설거지물 등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쟁기질이 있다. 한쪽에서는 쟁기질이 흙의 떼알 구조와 보이지 않는 흙속의 다양한 생태계를 망친다고 무경운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입장에서 말하는 쟁기질은 현대의 트렉터 같은 기계를 이용한 로터리 같은 방식의 쟁기질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방식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소를 이용한 쟁기질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했지만, 소쟁기질은 지금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산업화 이후 석유에 기반한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났다.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인간은 물론 자연도 소외되었다.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소쟁기질한 뒤 곰방매를 이용해 덩어리를 깨거나 써레질하고, 아니면 그냥 발로 쓱 문질러 구멍을 내고 콩을 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떼알 구조가 이루어진 흙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오랫동안 유기농사를 지어 흙이 살아 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를 근거로 쟁기질의 목적이 단지 양분을 섞고 흙속에 공기와 물이 통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닌, 다른 것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쟁기질은 사이짓기나 섞어짓기 같은 작부 체계에 맞춰 밭을 꾸미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책의 기록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고, 동네 어르신께도 들었다. 두 거웃 갈이의 경우 목화, 고구마, 보리 줄뿌림, 제충국, 보리·밀(수원)을 심기 위한 쟁기질이고, 세 거웃 갈이는 보리 흩뿌림, 조, 밀, 콩, 팥을 심으려고, 네 거웃 갈이는 팥, 메밀, 보리 등을 심으려는 쟁기질이란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얼마 전 단양에 취재를 가니, 그곳에서는 이런 기능 말고도 비탈이 심한 밭의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이짓기를 쉽게 하도록 하는 역할도 있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골 사이에 새로 작물을 심을 골을 내는 건 사람이나 소입니다. 요즘 폭이 좁은 관리기도 나왔다고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또한 사이갈이를 통해 김매기는 물론 북주기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적당한 쟁기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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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씨의 조선 농업 연구에 대하여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1


내가 처음으로 다카하시 노보루 씨의 이름을 안 것은 농림성 열대농업 연구센터에서 낸 "옛 조선에서 일본의 농업 시험 연구의 성과"(1976년, 농림통계협회 간행)을 통해서였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오치아이 히데오落合秀男 씨의 특별 기고 「조선총독부 농시農試 서선지장장西鮮支場長 ‘다카하시 노보루’」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과 함께, 오치아이 씨의 옆에 다카하시 씨가 남긴 방대한 필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꼭 그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토대학의 동양사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중국 농서 연구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각종 중국 농서의 윤독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조선 농업사에 관심이 있어 그 연구회에 참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는데, 마침 그러한 때에 위에 적은 "성과"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총론(아라시 가이치嵐嘉一 씨 집필)이나 인용된 다케다 소우시치로武田總七郞 씨의 저서·논문을 통하여 조선의 고농서를 이해하기 위한 귀띔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농사직설"이나 "산림경제" 등의 고농서를 혼자서 읽고 있었던 당시로부터 20년, 지금 여기서 다카하시 씨의 유고가 공개적으로 간행된 마당에 그 해설의 짐이 나에게 돌아온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1990년 가을에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郞 선생에게 연락을 받아, 다카하시 씨의 유고가 아드님인 고시로 씨의 곁에 보관되고, 이이누마 선생 본인께서 실현하시려는 것, 미라이샤에서 출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1991년 1월 초순에 고시로 씨 댁에 찾아갔는데, 그로부터 7년, 이번에 출판에 이르기까지 이이누마 선생, 다카하시 고시로 씨, 미라이샤의 다구치 에이지 씨가 치른 노력에는 참으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나 자신은 1991년 4월부터 1년 반에 걸쳐서 한국에 머물고 있어 어떤 안부도 전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해설의 책임을 맡아서 다카하시 씨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카하시 노보루 씨의 경력이나 인품, 조선 농업 연구에 대처한 자세에 대해서는 위에 적은 오치아이 씨의 회상문에 상세하다. 여기에서는 오치아이 씨의 문장에도 바탕을 두면서, 약간의 사견도 섞어서 이 책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 씨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다카하시 씨는 1918년에 동경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 니시가하라西ケ原의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년 동안 대기 생활을 보낸 뒤, 1919년 6월에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에 기수로서 부임했다. 이 수원 시대에는 유전·육종 분야의 연구에 종사,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서 미국, 독일에 유학을 했다. 수원 시대의 연구는 뒤에 학위논문으로 정리하여 공표했다.

‘Studies on the Linkage Relation between the Factors for Endosperm Characters and Sterility in Rice Plant with Special Reference to Fertilization(「벼에서 배유질胚乳質 인자와 불임성不稔性 인자와의 연쇄 관계, 특히 선택 수정에 대한 연구」)’,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구문歐文 보고 3권 1호, 1934년 10월)

귀국한 뒤는 권업모범장의 서선지장(황해도 사리원, 덧붙여 지장의 호칭은 당시의 것에 따랐음)에서 근무, 몇 개월 지나 서선지장장이 되었다. 이후 1944년에 다시 수원에서 근무하기까지 10년 이상에 걸쳐서 사리원에서 연구에 종사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실태 조사는 모두 이 사리원 시대의 것이다.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에 관한 조사·연구는 사리원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동안 총독부의 권업모범장은 1929년에 농사시험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으로 일본의 전국이 악화되는 속에서, 조선에서 농업 시험 연구 체제의 총합화란 움직임이 나왔다. 다카하시 씨는 이 총합화의 중심적 추진자였던 것 같은데, 1944년 새로운 체제가 발족함에 따라서 다카하시 씨는 농업시험장의 총무부장이라는 요직에 취임, 수원에서 일본의 패전=조선의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뒤, 1946년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기간, 다카하시 씨의 조선에서 구체적인 행적은 잘 모른다. 아드님인 고시로 씨의 말에 따르면, 우장춘 씨의 간청을 받아서 수원에 머물며 후진의 지도를 맡았던 듯하다고 한다. 이 책의 모두冒頭에 수록된 「이후의 조선 농업에 대하여」는 해방 이후 수원에서 집필한 것이라고 보인다. 더욱 우장춘 씨는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후배로서, 한국에서는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이것은 속설)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 생애에 대해서는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씨의 「나의 조국 ― 우 박사의 운명의 씨」(新潮文庫)에 상세하다.

이상이 다카하시 씨의 간단한 경력인데, 그의 연구 궤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오치아이 씨의 문장이 간단히 요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여 인용했다.


다카하시 씨가 조선에서 먼저 손을 댄 품종 특성 조사는, 말하자면 형태학적인 연구로서 작물을 하나의 정지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뒤이어 작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 생활 현상을 밝히려고 한 것이 생리학적인 연구이고, 또 작물을 무리로서 파악하고 환경과의 관련을 추급했다. 2년 3작, 사이짓기·섞어짓기를 연구한 시기다. 여기까지는 자연과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인간의 요소가 더해졌다. 다카하시 씨가 자주 했던 말에 “작물은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인간이 관여하여 비로소 작물이 있다. 당연히 작물과 인간을 결부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실태 조사였다. 최후에 거기까지 풍부한 경험을 살찌우고, 조선 농업의 전체를 재편하는 데 노력한 것이다. 그가 걸었던 길은 필연이었다.

형태학形態學 → 생리학生理學 → 생태학生態學 → 인간학人間學의 길이다(앞에서 게재한 특별기고 810~811쪽).


다카하시 씨의 연구가 발전하여 나아간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한 문장이다. 여기에 또 하나를 더한다면, 역사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오치아이 씨는 이 점에 대해서도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다카하시 씨가 중국, 조선, 일본의 고농서를 사 모은 것은단순한 역사적 흥미 때문이 아니다. "제민요술"부터 시작한 아시아의 농서들 가운데 중국, 조선, 일본으로 흐르고 있는 아시아 농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조선 농업의 발전 방향을 찾으려던 것이다.

“농업 연구자는 문헌이라고 하면 가로쓰기로 쓴 것1)만 생각하는데, 인식 부족이 심하다. 더욱 바로 곁에 있는 아시아의 농서를 왜 공부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개탄했다(같은 책 787쪽).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유고의 대부분은 오치아이 씨가 말한 인간학 단계의 것으로,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의 백미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것만으로 이 책을 간행한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말해야 한다.



3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작부방식의 연구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주요 농작물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이야말로 다카하시 씨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방대한 영농 실태 조사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도, 조선의 각지와 각 농가에서 행하고 있는 작부방식에 관한 조사였다. 그럼 왜 다카하시 씨가 작부방식에 주목했던 것일까?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씨는 위에 적은 논문에서 먼저 종래의 작부방식에 간한 서양과 일본의 여러 견해를 검토한다. 그때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서양의 작부방식이 1년 경지이용률 100%를 넘지 않는 토지이용 방식을 전제하는 것임에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경지이용률이 100%를 넘는 토지이용이 널리 보인다는 것, 따라서 서양의 작부방식 이론과는 다른 이론이 요구된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서양과는 다른 동아시아의 작부방식의 독자성을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다케다 소우시치로 씨의 견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다카하시 씨는 조선의 작부방식에 관한 독자의 분류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조선의 작부방식 분류에 맞춰서 (1) 농사땅 이용 방식에 따른 분류, (2) 토지이용의 정도에 따른 분류의 두 가지 분류 방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자에 따른 분류로는 논농사법, 밭농사법, 논밭 번갈아 짓는 법의 세 가지를 지적하는데, 여기에서 논농사란 무논, 밭농사란 밭이다. 후자에 따른 분류로는 휴한식, 연작식, 윤재식, 조합식의 네 종류를 들고 있다. 조합식(또는 조합한 식)이란 “같은 밭에 1년에 1작 이상의 농사를 짓는 작부 순서를 정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이 책 25쪽...나중에 확인).” 이 조합식 작부방익이 널리 보이는 것이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농업의 특징이고, 매우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조합식 작부방식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데에 다카하시 씨가 한 작부방식 연구의 첫 번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다카하시 씨가 조선의 작부방식으로 주목한 것이 사이짓기·섞어짓기의 문제다. 사이짓기·섞어짓기의 정의에 대하여 다카하시 씨는 은사라고 할 수 있는 다케다 소우시치로 씨의 것에 따르고 있다. 곧 다케다 씨에 따르면 “사이짓기란 생활 시기를 달리하는 작물을 어떤 기간 같은 곳에 생육하게 하는 것으로, 곧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을 조합한 경우”이며, “섞어짓기란 생활 기간을 같이하는 2종 이상의 작물을 같은 곳에 재배하는 것”(33쪽... 나중에 확인)이다. 조선에서는 이 사이짓기, 섞어짓기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뒤쳐진 농법이라는 인식이 농학자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에 대하여 다카하시 씨는 밭농사의 조합식에 널리 보이는 섞어짓기와 밭농사의 섞어짓기 실태를 조선 팔도를 조사하고, 거기에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다카하시 씨는 밭농사의 작부방식을 분류하기 위하여, 밭농사 작물을 벼과에 속하는 것 (A), 콩과에 속하는 것 (B), 벼과·콩과 이외에 속하는 것 (C)로 나누고, 다음처럼 결론지었다.


곧, 조사 면적 62억 7000만 평 가운데 AB의 형식 27억 평에 달한다. 다음으로 큰 것은 A(AA인 것 ―미야지마)이 17억 4000만 평, B(똑같이 BB인 것)이 9억 9000만 평으로서, 여기에 다음 ABC가 1억 7400만 평이다.

벼과와 콩과를 번갈이 기르는 넓이가 두드러지게 넓어서, 조사한 넓이의 약 43%에 달하고, 다음으로 AA의 형식을 가진 곳 28%, CC의 형식인 곳 4.5%, ABC 2.8%이다. 적은 것처럼 조금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 농민이 몇 천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경험에 경험을 쌓아 도달한 것으로서, 뜻밖에 조선의 작부방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합리적으로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90쪽... 나중에 확인).


섞어짓기에 대해서도 똑같은 합리성이 발견된다. 곧 섞어짓기의 경우 주작물을 A·B·C, 섞어짓기 작물을 a·b·c로 표시하면, Ab, Ba의 조합을 하는 면적이 높은 비중을 점하고, 여기에서도 벼과와 콩과의 조합이 우원하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카하시 씨는 조선의 작부방식에 대하여 다음처럼 총괄한다.


이상에 따라 보면 현재 조선의 주요 작물의 작부방식은 뚜렷하게 다종다양하고, 대부분 마음대로, 멋대로 어떠한 계획도 없듯이 작물을 심고 있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토지이용에서 적지 않게 고심한 것을 엿볼 수 있어, 서양의 윤재식에 비하여 토지이용률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작부방식의 지역적 분포도 또한 두드러지게 지역적인 특징이 있다.

다음으로 벼과, 콩과의 전화도 또한 농가가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별개하고, 서양 학자가 말하는 원리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놀랄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중략…

또 이 섞어짓기 작물을 분석한 결과,  Ab, Ba의 형식이 단연코 큰 넓이를 점하는 것도 또한 작부방식의 경우처럼 콩과 작물이 땅심 유지에 매우 중요한 것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96쪽,,, 나중에 확인).


조선의 작부방식이 지닌 합리성의 발견, 게다가 그것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이며, 또한 그 최대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농민에게 배운다는 태도로 일관한 실태 조사에 바친 열정도 이에 원천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씨의 작부방식 연구의 세 번째 목적은 당시의 작부방식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조선 작부방식의 역사적 변천을 다룬 두 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의 기술은 현재의 농업사 연구의 수준에 비추어도 역시 참조할 만한 것이다. 작부방식의 역사를 총괄하고, 다카하시 씨는 다음처럼 기술한다.


조선에서 농작물의 작부방식은 그 토지이용의 정도로 보면 이미 500년 전부터 오늘날 보이는 서양의 윤재식에 비교하여 훨씬 고도화되었다. 과거 몇 천 년 동안 휴한식에서 연작식, 윤재식으로 차츰 집약된 단계를 거쳐 오늘날 보이듯이 집약적 조합식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한데, 이것을 지역적으로 볼 때는 그 작부방식의 분포에 두드러진 특이성이 있다(55쪽).


다카하시 씨의 작부 연구의 네 번째 목적은 당시의 작부방식의 이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작부방식의 개량을 위해서는 단순히 농업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농업·농가를 둘러싼 경제적·사회적 여러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 책의 대부분을 점하는 개별 농가의 영농 실태 조사는 이러한 개량의 방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카하시 씨가 실태 조사를 한 방법에 대하여 오치아이 씨는 다음처럼 소개한다.


다카하시 씨는 절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조사표는 만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조사표를 가지고 가면 조사 항목의 칸만 채우면 그걸로 안심해 버리기도 하고, 역으로 조사표에 얽매여서 조사 항목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이다. 그리고 언제나 갱지로 된 잡기雜記 수첩 몇 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때로는 소주 한 되를 들고서 농가의 침침한 온돌방에 앉아 아저씨와 잔을 주고받고, 흥이 나면 몇 시간이나 이야기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조사라는 명목으로 나가지 않아도 회의·강연 등으로 출장을 갔을 때에도 조금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바로 마을로 간 것이다. 이런 일로 도청道廳의 담당 공무원도 적잖게 곤란해 한 적도 있는 듯하다(앞에 말한 특별 기고 802쪽).


이렇게 해서 조선의 농업, 농가의 실태에 정통했던 것이 해방 이후에도 수원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받은 까닭일 것이다.



4


이상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작부방식에 관한 의미에 대해서 적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논고의 의의는 물론 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하 조금 마음 내키는 대로지만, 이후의 연구에 대해서 이 책이 지니는 의의를 기술하고 싶다.

먼저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농촌 경제 연구의 발전을 위해 이 책이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농촌 경제의 실태에 대해서는 수는 적지만 총독부나 조선농회에서 행한 조사 자료가 몇 가지 공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영농 실태 조사와 같이 개별 농가를 상세하고 종합적으로, 게다가 조선 전국에 걸쳐서 조사한 것은 아예 없다.

다카하시 씨의 조사는 표본 조사라 그 점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각 농가의 1년 동안의 노동력 배분과 영농비가 조사되어 있어 이를 통해 해당 농가의 농업수지를 추정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당시의 농가가 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해서도 행간에서 읽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의 농촌 경제 연구에 바탕이 되는 바, 참으로 크다고 생각한다. 또 고용 노동력의 광범위한 존재나 품삯의 실태 등에 대해서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두 번째로 농촌 사회의 연구에도 이 책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 가운데도 특히 주목할 것은, 우결의牛結義(쪽 확인....)나 결우結耦(쪽 확인), 계契(쪽 확인) 등의 농촌 공동체에 관한 조사다. 또 특별한 이름은 없지만 품앗이, 두레 등에 관한 언급을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농촌에서 서로 돕는 조직이 가진 의미를 해명해 가는 것도 이후의 연구 과제일 것이다.

세 번째로 이것은 나의 전문 분야 밖이지만, 민속학이나 언어학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귀중한 자료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서로 돕는 조직은 민속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마을은 연중행사에 관한 취재 조사(쪽 확인) 등도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또 농작업이나 농기구의 이름에 대한 조사는 사투리 연구의 자료로도 귀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 번째로 좁은 의미에서 농업 연구란 측면에서도 이 책은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가운데도 특기할 만한 것은 각종 농기구에 관한 조사로서, 그 이름, 구조, 각 부분의 이름 등 매우 상세하게 조사했다. 또 우리들 연구자를 자주 괴롭히는 마지기(斗落), 하루갈이(日耕)라고 하는 조선의 독특한 넓이 단위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는 각지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마지기란 씨를 뿌리는 양에 따른 넓이 단위이고, 하루갈이란 소가 하루에 가는 넓이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그 넓이는 다양하다. 이 책에 소개된 전국 각지의 사례에서 마지기·하루갈이라고 하는 넓이 단위의 의미를 다시금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재 북조선(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이 책의 서술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다카하시 씨가 오랫동안 황해도의 사리원에서 있었던 관계도 있겠지만, 이 책의 영농 실태 조사에서는 북부 지역이 점하는 비중이 높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의 조선 농업에 대한 관심은 쌀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조사·연구도 벼농사에 중심이 놓였다. 그 때문에 밭농사의 비중이 높은 북부 지역의 조사는 허술했는데,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 보도되듯이 요즘 북조선의 농업 사정은 좋지 않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일 테지만, 자연 조건을 무시한 수리개발이나 옥수수 재배를 강행한 것이 그 큰 원인의 하나란 사실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이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북부 지역의 예전 농업의 모습이 북조선의 농업 부흥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5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는 이상 적은 바와 같이 큰 의의를 가진 것으로, 이후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활용되길 기대하지만, 그의 연구에 여러 제약이나 약점이 있었던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영농 실태 조사의 대상이 된 농가의 대개는 중농 이상에 속한 사람으로, 하층 농가의 조사가 허술하단 것은 큰 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 편중이 생겼는지 여러 원인을 생각할 수 있지만, 역시 다카하시 씨가 총독부 농사시험장이란 식민지배 기관의 일원이었다는 데에 따르는 제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부방식의 연구에서 농학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조건도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조선 농업을 규정하고 있던 식민지라는 정치적 조건에 대해서는 다카하시 씨라고 해도 정면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카하시 씨의 연구도 큰 제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또 한 가지, 그의 연구에서 안타까운 점은 언어의 제약이다. 다카하시 씨는 한글은 이해한 듯하나, 조사는 모두 통역을 데리고 했다. 사투리 문제를 생각하면 통역이 없는 조사는 불가능했다는 것도 모르진 않지만, 기초적인 조선말의 회화 능력이 있었다면 조사 기록의 내용은 한층 충실해졌을 것이다. 10년 이상에 걸쳐서 전국을 샅샅이 조사했던 만큼, 이 점이 더욱더 안타깝다.


1) 서양의 필법. 곧 서양의 농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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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9시 농촌진흥청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얼마 전 번역을 마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가 단체로 관람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요. 그래서 함께 갈 분들을 모아 찾아갔습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도 함께 가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혼자 갔으면 할 말도 다 못하고 그냥 쭈볏거리다 돌아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미리 선물을 준비해서 저에게 주셔서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자신이 어떻게 농촌진흥청에 자기 아버지의 자료를 모두 기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정리된 짤막한 글을 넣어 놓았더군요. 그래서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 하여 집에 와서 차분히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나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귀한 자료를 기증받기까지의 일을 기증자의 입장에서 정리한 글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죽음'이란 것에 대하여 올해 4월에 저 세상으로 떠나간 아내의 일을 생각하면 결코 남의 일은 아니지만, 나의 몸에 바싹 다가왔다. 살아 있는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 이 평범한 사실에 깜짝 놀란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세상에 가서 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가장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나의 옆에 보관되어 있는, 아버지가 반평생을 걸려 조선 반도에서 조사·연구한 1,3000매나 되는 원고의 행방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아버지가 조선에서 귀국했을 때 온갖 수단을 써서 일본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곁에 차 상자 2개 안에 가득 차 있다. 만약 내가 사라지면 이 자료는 어떻게 될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것이다.

이런 일을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함께 조선 반도에서 옛 만주에 가까운 곳의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셨던 친구 분이 있었다. 그분은 북조선에 있는 백두산의 진귀한 풍물이나 그 지방의 귀중한 모습을 찍은 몇 백 장의 사진이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조선에서 귀국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일본에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나는 필요가 생겨 그분의 딸께 전화를 했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그러한 귀중한 사진들이 거치적거려서 자신이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귀국하여 2개월 뒤에 나의 눈앞에서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그때 죽음의 순간에 보였던 원통한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의 가슴에 캐물었다. '내가 사라진 뒤,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여 조사·기록한 이 방대한 유고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원고와 함께 들어 있던 200~300매 정도의 사진이 있었다. 아버지가 조선의 농민, 농기구, 농작물을 찍은 것이다. 6년 전 한국의 농촌진흥청에서 꼭 기증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기에, "사진은 아버지가 찍은 것이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조건으로 기증했다.

한국 최대의 대도시 서울에서 남동으로 자가용으로 약 1시간쯤 타고 가면, 수원시라고 하는 도시에 도착한다. 민속촌 등이 있어 관광 명소이기도 하고, 인구 120만의 도시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의 본장이 있어서, 조선 반도 전역의 농업을 총괄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국 농촌진흥청"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한국 전역의 농업을 총괄하고 있다.

4년 전인 2002년 11월에 이 한국 농촌진흥청의 부지 안에 2층 건물의 거대한 "농업과학관"이 건설되었다. 이 농업과학관의 내부는 최적의 습도와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근대적인 건축물이다. 내부는 "과거," "현재," "미래,"의 한국 농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정연하게 전시되어 있고, 한국 전역에서 견학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 농업과학관의 "과거"의 농업 전시물들 한 구석에 6년 전에 기증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인편으로 들은 것은, 건설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그것을 듣고 나서는 그 사진이 어떤 모습으로 전시되고 있을지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2~3년 동안은 집안 사정으로 집을 비울 수 없었다. 올해(2006년) 6월이 되어서, 외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 방한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6년 전 그 사진에 눈을 두었던 것은, 당시 한국 농촌진흥청의 공보관이었던 성종환이라는 사람이다. 그 성종환 씨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여, 6년 전 그 사진의 일로 우리집에 왔을 때도 일본어를 하는 이철희 씨를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이철희 씨는 농학박사의 신분으로 학회 때문에 때때로 일본에 와서 연구 발표를 해서 유창하게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에서도 드문 한국인 학자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철희 씨와 성종환 씨는 한국 농촌 진흥청의 내부에서는 부서가 달라서, 성종환 씨가 언제나 이철희 씨에게 통역을 부탁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내가 이번 한국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하여 성종환 씨를 만나서 이야기할 때도 한국어를 자유로이 말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라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내가 쿠루메久留米 시내에서 한국어를 반 년 동안 배운 M여사에게 상담한 바, 기분 좋게 맡아 주었다. M여사는 재일교포인데, 일본인을 남편으로 맞아 쿠루메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본어와 한국어 모두 유창하게 하는 베테랑 강사이다.

 

2006년 6월 29일 아시아나항공 790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와 M여사는, 거기에서 고속버스로 서울로 향하여 프레지던트호텔에 숙박했다. 다음날 아침,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남녀 2명의 직원이 마중을 왔다. 남성이 운전하는 차로 약 1시간 뒤 수원시의 농촌진흥청에 도착하여, 성종환 씨의 직무실에서 그와 만났다. M여사의 통역으로 잠깐 성종환 씨와 회담한 뒤, 성종환 씨의 안내로 농업과학관으로 갔다.

농업과학관은 그리 멀지 않아 성종환 씨의 집무실에서 걸어서 2~3분이었다. 농업과학관의 입구는 지붕은 둥그스름한 원통형의 아래쪽에 있고, 그 위쪽에는 벼의 무늬가 크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정확히 초여름의 햇살이 그 벼의 무늬에 반사되어 벼의 이삭이 살아 있는 듯이 빛났다. 과학관 안에 들어가서 농기구나 농작물, 농촌 생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는 긴 복도를 걸어갔다.

"여기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조용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전시장의 가장 구석에 이 방을 마련했습니다."

성종환 씨가 한국어로 나에게 말한 것을 옆의 M여사가 나에게 일본어로 곧바로 통역해 주었다.

 

그 방으로 한 걸음 들어갔는데, 바로 정면의 조금 높은 곳에 그리운 아버지의 사진이 '4절 와이드'로 커다랗게 확대되어 액자에 장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날아 들어왔다. 그것은 놀라움과 함께 감동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찍은 사진 안에 작은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었나 보다. 그것을 크게 확대하여 전시한 것이다.

"당신 아버지의 이 사진은 빛과 열에 변색되지 않도록 특수 처리를 해서 반영구적으로 그대로 보존됩니다."

이것도 성종환 씨의 설명이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의 내가 아버지의 사진을 응시하고 있는 나에게 속삭였다.

'여기는 일본국이 아니야. 괜찮을까? 이전에는 반일·항일을 부르짖으며 일본의 국기를 불태운 무리가 있는 한국이다. 그 한국의 목구멍 안에 일본인의 사진이 장식되었어. 그것을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방 안을 돌아보면 아버지가 이전에 조선 반도에서 재직했을 당시에 찍은 농민과 농기구, 농작물 등의 사진이 한 장 한 장 4절지 크기로 확대되어 저마다 액자에 담겨 간격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진의 아래에는 아버지가 찍은 사진이란 것이 한국어로 각각에 명기되어 있다는 것을 M여사의 설명으로 알았다. 더욱이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어, 개관 시간에는 그 텔레비전을 통하여 비디오에서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방영하고, 한국어로 사진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긴 의자가 있어 누구나 다리도 쉬며 거기에 앉아 방영 사진을 보면서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6년 전 한국 농촌진흥청의 요망에 따라서 '도움이 된다면'이란 가벼운 기분으로 아버지의 사진을 한국 농촌진흥청에 성종환 씨를 통하여 기증한 것인데, 이렇게 정중히 보존, 전시, 방영되고 있는 것에 감동한 것과 함께, 그것을 찍은 아버지의 사진까지도 화려하게 장식한 것에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의 둘레에는 전시용의 유리 진열장이 놓여 있어, 한국 농촌진흥청이 아버지의 사진으로 작성한 '사진첩'이 한 권 툭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을 내가 보고 있으니, 성종환 씨가 옆에 와서 통역의 M여사를 통하여 다음처럼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자택에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연구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해 주신다면, 그러한 자료는 모두 복사하여 원고는 이 진열장에 넣어 반영구적으로 보존 전시하고 한국 농업 관계자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복사한 것은 한국의 농학자가 연구하게 되어, 당신 아버지의 연구 자세나 한국 농업에 대한 방법을 많은 한국 농민에게 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견학이 끝난 뒤, 별관에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의 청장을 성종환 씨의 안내로 방문했다. 이 청장은 김인식이라고 하는데, 일본어를 할 수 없어서 M여사도 동행했다.

"당신 아버지 시대의 학술 관계 자료가 한국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한국에서 받은 것은 참으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기증하신다면 아버지의 공적으로서 농촌진흥청이 책임지고 영구히 보존 활용하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하는 청장에게 나는 답했다.

"그러나 13000매의 아버지의 유고 1/3은 모조리 일본어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나 <조선 반도의 쟁기>란 표제로 발간이 끝났습니다만……"

"모조리 발간이 끝난 원고도 혹시 기증하신다면, 귀중한 원고로서 영구히 보존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끙끙댈 것이 있을까? 그만큼 한국에서 희구하는 아버지의 유고 전부를 한국에 기증하면, 한국에서는 정중히 취급하여 건네받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의 농업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아버지의 원고를 2개의 차 상자 안에다 후세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그것보다도 이와 같이 열망하고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여 최대한 활용하게 하는 쪽이 얼마나 아버지의 희망에 따르는 것이 될까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성종환 씨의 직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성종환 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의 유고 모두를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겠소."

하니 성종환 씨는 큰 손을 내밀어서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다음과 같은 계획을 말했다.

"잘하면 8월 2일에 우리들이 댁에 방문하여 아버지의 유고를 받겠습니다. 왜 그렇게 급하냐고 말씀하시면, 실은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5일 동안 한국의 '농업 100주년 기념제 행사'가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개최됩니다. 그때는 농업에 관계있는 사람은 물론, 온갖 계층의 사람이 한국 전역에서 이 농촌진흥청에 모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 아버지의 자료를 널리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과 5일 동안의 전시로는 소개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시면 그전 2주일 동안, 곧 8월 16일부터 29일까지 이 '농업과학관' 안에 전시하여 가능하면 많은 견학자에게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마저 좋다면, 그렇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실현되면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나서 사라져도 아버지의 유고는 안전한 장소에서 보관·활용될 것이다. 그리된다면 아버지도 풀잎의 그늘에서 안심하실 것이 틀림없다.

다음날 6월 30일, 나는 유고의 행방에 밝은 앞길을 발견하고, 아시아나항공기로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2006년 8월 2일(수), 이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받으러 오기로 한 날이다. 그를 위하여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오기로 한 아래 적은 4명의 직원은 어젯밤부터 쿠루메시의 하이네스호텔에 숙박하고 있다.

단장 성종환, 통역 홍은희(농학박사), 전시 담당(박성일(전기주사), 사진 담당 박형근(시청각 기사)

이 가운데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홍은희 씨뿐이다.


이 사람들과 오전 8시 반에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오전 7시쯤 집을 나왔다. 아침 일찍이기 때문일까, 정체가 되어 오전 7시 반쯤 쿠루메의 니시테츠西鐵 전차역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이와타야岩田屋의 입체 주차장에 차를 넣고서, 이와타야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하이네스호텔에 걸어갔다.하이네스호텔은 2, 3, 4층이 없고, 5층에 접수 겸 로비가 있다. 그 로비에서 전화하여 홍은희 씨를 불렀다. 홍은희 씨는 곧 찾아왔다.

"어젯밤은 힘들었습니다."

홍은희 씨는 나를 보고 갑자기 이랬다.

"왜요?"

"통역하는 M여사가 '요미우리 신문사'의 쿠루메 지국장을 우리들의 방으로 불렀습니다. (쿠루메 지국장의 아내는 M여사의 한글 수강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국장이 성종환 씨에게 당신과의 지금까지의 경위를 밤 늦게까지 취재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M여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하이네스호텔의 아래에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M여사는 대형 검은 자가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입체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꺼내고, 하이네스호텔의 앞에 주차했다. 이윽고 전원 6명이 두 차에 나눠 타고 야메시八女市로 향했다. 야메의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반쯤이었다. 집 앞에는 '요미우리 신문사'의 젊은 여성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취재하려 왔을 것이다.

나의 집 응접실은 아침부터 에어콘을 틀어 놓아서 쾌적한 실온이 되어 있었다. 모두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성종환 단장이 현관 앞에 서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럴까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M여사가,

"돌아가신 부인께 예배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불단이 있는 다다미방의 맹장지를 열어서 모두를 불러들였다. 아내의 영정이 있는 불단 앞에 성종환 단장이 앉고, 양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종을 두드려 예불하고, 뒤에 모두도 똑같이 예배했다.

응접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사연구자료 약 13000매를 미리 테이블 위에, 번호 순으로 쌓아 두었다. 번호는 모두 하여 1부터 7까지이다. 그것을 박성일 씨와 박형근 씨 둘이 솜씨 좋게 묶어서 정리했다. 약 1시간 정도로 가지고 온 8개의 큰 통 안에 모두 넣었다. 그러고 나서 11시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사자료의 수집 작업은 끝났다.

이 뒤 M여사의 통역으로 성종환 단장이 다음과 같은 것을 나에게 전했다.

① 이 자료는 8월 16일부터 28일까지 한국 농촌진흥청의 농업과학관의 입구에서 특별전시를 한다.

② 그 뒤에는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한국 농업 창립 100주년 기념제'에 전시하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이름과 그 연구 자료를 한국 전역의 농민과 농업 연구자 등 전원에게 소개한다.

③ 그것이 끝나면 이 자료를 복사하고,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문은 '다카하시 코너'의 방에 있는 진열장에 넣어 영구히 전시한다.

④ 이미 일본어로 출판되어 있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저서는 도서관에 전시하고, 열람을 제공한다.

이상인데, 이것만 정중히 처우된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흡족하실 것이다.

우선 성종환 단장의 희망에 따라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 2책 및 그 해적판 1책은 기증하기로 했다. 해적판은 내가 어떤 루트로 손에 넣은 것으로서 주고 싶지 않았지만 성종환 단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해적판은 한국의 서점에서는 손에 넣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이 한국에서 출판된 것은 한국의 수치이고, 두 번 다시 이러한 해적판이 출판되지 않도록 보여주기 위하여 원본과 함께 나란히 전시해 놓고 싶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도 기증하기로 했다.

"다카하시 씨는 뭔가 할 말은 없습니까?"

성종환 단장이 M여사의 통역을 통하여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을 요망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조사한 연구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해서도 '이것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연구한 것이다'라는 것을 꼭 명기해 주십시오."

하니, 성종환 단장도 홍은기 씨도 소리를 모아 동시에 나를 부르듯이 답했ㄷ가.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거듭 나는 요망했다.

"전시가 끝나면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연구자료'에 관한 프로젝트팀을 조직하여 연구해 주십시오."

하니 성종환 단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국 농촌진흥청은 한 개의 조직체로 각각이 각자의 부서를 지키고 활동하고 있기에, 그 안에 새로운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노력할 것입니다. 만일 '프로젝트 팀'을 공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다카하시 노보루는 제가 존경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사적으로라도 그와 같은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종환 단장과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랬더니 옆에 자리하고 있던 '요미우리 신문사'의 젊은 여성 기자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이번은 제가 다카하시 씨에게 묻고 싶습니다. 다카하시 씨가 이렇게 방대한 아버지의 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자료 모두는 옛 조선 반도의 농업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는 당연히 한국 농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는 몇 년 동안 일본에서 보관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946년이니까, 그때부터 역산하면 정확히 60년 동안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20년 동안은 친척의 집에 맡겨 놓았는데, 그 뒤 저의 곁에서 떠나 곧바로 도쿄의 오치아이 히데오落合秀男 씨에게 보내 유고의 정리를 부탁했습니다. 그 뒤 1989년에 오치아이 씨가 돌아가셨기에 다시 저의 곁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곁에 보관한 것은 그 뒤 17년 동안인데, 일본국 안에 보관한 것은 앞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60년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보관하고 있던 유고를 이번에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기로 결심한 '동기'를 가르쳐주십시오."

"가장 강한 동기는 올해 6월 하순에 방한한 것입니다. 한국 농촌진흥청의 부지 안에 있는 '농업과학관'의 한 귀퉁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다카하시 노보루의 방이 마련되었는데, 여기를 견학한 것이죠. 몇 년 전에 한국 농촌진흥청의 요망에 따라, 저의 곁에 있던 수백 장의 사진을 기증했는데, 이것이 그 방에 돌아가신 아버지 다카하시 노보루의 이름으로 정중히 보존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는 상황을 보고서 감동한 것이 이번에 기증을 경심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뒤에도 자잘한 질문을 받고, 정확히 12시가 되어서 모두 식사하러 갔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여성 기자도 식사에 가자고 했으나 거절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넣은 8개의 짐은 집에 두고서 모두 빈손으로 나와 M여사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가까운 '릿카立花 초밥집'으로 향했다. 6명이 들어갈 수 있기 좋은 넓은 방이 비어 있었다. '니기리즈시握りずし'가 나오기 전에 박성일 씨와 M여사는 각각 꽃을 가까운 꽃집에서 사 왔다.

식사한 뒤는 모두 구로키마치黑木町에 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에 참배하고 싶다고 했지만, M여사는 한글 교실에 가르치러 가야해서 그녀가 사 온 참배용 꽃을 내가 맡았다. 박성일 씨는 멋진 호접란胡蝶蘭 꽃을 사 왔다. 이것은 뒤에 '한국 농촌진흥청 직원 일동'이라고 추도의 긴 띠를 묶어서, 우리집의 현관에 장식해 놓았다.

식사는 약 1시간 정도로 끝나고, 릿카스시 앞에서 M여사와 작별하고, 뒤의 4명은 나의 자동차로 구로키마치로 향했다. 구로키마치에 도착한 때는 오후 3시쯤으로 햇살이 강하고, 가장 더운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나를 포함한 5인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올라 '다카하시가 누대累代의 묘'라고 석탑에 조각된 묘의 앞에 도착했다. 나는 M여사가 부탁한 묘소용 꽃을 묘석의 양쪽에 꽂아 넣고, 양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묘 앞에 바치고 예배를 했다. 다른 4명도 나를 따라서 예배했다.

일행 5명은 다시 좁은 길을 땀을 흘리며 내려와서 자가용에 탔다. 차 안은 숨이 턱 막힐 듯한 열기가 가득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 안의 에어컨 스위치를 최대한으로 켰다. 그러자마자 차 안에는 무수한 냉기가 가는 실처럼 퍼졌다.

차는 약 20분 뒤에 나의 집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들어온 일행 4명에게 나는 각각 시원한 주스와 수건을 건네고, 모두는 땀을 닦고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쉬던 곳에서 집에 놓았던 유고가 들어 있는 짐을 하나하나 나의 자동차의 트렁크로 정리해 넣어, 8개의 짐은 어떻게든 트렁크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나의 운전으로 쿠루메의 니시테츠까지 배웅하고, 4명은 고속버스로 갈아탔다. 고속버스의 격납고에 8개의 짐을 수납하고, 4명은 후쿠오카공항으로 출발했다.

이것으로 내가 저승에 들어가도 아버지의 유고는 한국 농촌진흥청에 의해 정중히 보관되고 활용될 것이다. 나도 겨우 안심이 된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 하순,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나의 집에 A4판 크기의 책 하나가 왔다. 열어 보니 280쪽으로, 8월에 기증한 아버지의 육필 원고의 일부가 편집된 것이었다. 표지는 푸른색으로, 책으로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그 표지에는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표제 : 조선 반도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

저자 : 다카하시 노보루

저작년 : 1942년


내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휘갈겨 쓴 육필 원고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또 표지를 열어 보면 마주보는 두 면의 한 쪽에는 인쇄가 찍혀서, 그 판 안에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한일사전으로 찾은 바 다음과 같이 읽는다.


기증 도서

기증자 : 다카하시 고시로

소속 : 일본국

기증일 : 2006년 9월 4일


그리고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쓴 성종환 국장의 메모가 동봉되었다.

"기증해 주신 13000매의 유고의 육필 원고를 내년 1년 동안에 걸쳐 동봉한 책자처럼 항목별로 편집하여 완성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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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부방식 발달의 기술적 고찰


앞서 기술한 바는, 조선의 두세 문헌에서 각 시대의 토지이용이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면서 차츰 고도화된 흔적을 매우 개략적으로 요점만 기술했다. 이처럼 조방한 휴한식에서 연작식으로, 연작식에서 윤재식으로, 윤재식에서 조합식으로 진보한 발전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를 다시 여기에서 고찰하는 것도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하나는 현재 지역적으로 토지이용이 아직 진보하지 않은 지방 가운데 이후 집약화할 장소를 하나의 지표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두세 곳에 대해 고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고찰은 단순히 기술적인 입장에서만 논하는 것이고,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아니다.

먼저 자연적 조건의 차이가 나는 지역을 살펴보자.

1. 기후가 온난다습한 지방

이러한 지방에서 1/1작부터 3/2작이나 2/1작으로 진보하는 것은, 주작물이 빨리 익기 때문에 사이짓기 작물이 주작물의 그늘에 가리는 기간이 짧아서 사이짓기 또는 그루갈이를 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부방식은 남선 지방에서 가장 빨리 발생했을 것이다.

2. 기후가 한랭한 지방에서는 습기가 부족하지 않은 지방인 남선 지방에서 두둑 너비를 넓게 하여 목화를 길렀지만, 이것이 아마 목화가 전래된 뒤, 곧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아마도 밀·보리에 콩을 길렀을 것이다.

또 밀농사와 보리농사에 사이짓기 작물을 기르는 난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보리가 밀보다 사이짓기하기 쉽다는 점에서 먼저 보리의 사이짓기가 먼저이고 밀의 사이짓기는 그 이후일 것이다.

3. 작물 품종이 늘어난 것이 일면 작부방식의 진보에 공헌했음이 틀림없다. 조선의 토종은 그 수가 매우 많다. 이것도 농가가 의식적으로 했든지 무의식적으로 했든지 별도로 치고 주작물과 사이짓기 작물의 재배에 중요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옛날에는 현재만큼 여러 품종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시대를 지남에 따라 품종이 늘어나서 이것이 사이짓기를 쉽게 퍼지게 했음이 틀림없다.

4. 대륙성기후인 지방, 곧 겨울철 한랭하고 여름철 고온, 봄철 매우 건조한 서선 지방의 경우는 주작물의 익음때가 늦어서 사이짓기 작물을 심는 때가 늦고, 사이짓기 작물을 심는 때가 빨라지지 않으면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유약한 사이짓기 작물은 주작물의 그늘에 가리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자라는 데 큰 타격을 입어서, 이 폐해를 없애고자 주작물의 재배법을 한층 변경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두둑 너비를 넓히고 고랑을 깊게 하여 주작물은 고랑에 밭작물의 두둑 위에 길러서 그 쟁기질 방법도 예상 이상으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남선 지방의 2/1작보다도 서선의 3/2작 재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5. 농기구의 발달과 작부방식의 발전

농기구 특히 쟁기, 낫, 호미 등의 주요 농기구의 개량·발달이 직·간접적으로 작부방식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6. 토질의 비옥도와 작부방식

거름주기를 늘리거나 기름진 땅에서는 주작물의 두둑 너비를 충분히 넓힐 필요가 있고, 척박한 땅에서는 좁혀서라도 사이짓기 작물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꽤 경험을 쌓아서 오늘날 보듯이 사이짓기가 발달했을 것이다.

다음에 섞어짓기의 발생에 대해 조금 고찰하면,

(1) 봉건시대에는 전주田主과 전호佃戶가 있어, 전호는 실제 경작자이고 전주는 현재의 지주와 같다. 전호는 소작인 또는 농노여서, 일정한 생산물을 전주에게 바칠 의무가 있었다. 이에 대해 해에 따라 풍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주는 매우 가렴주구했을 것이기 때문에, 전호는 전주의 눈을 피해서 주작물의 사이에 여러 작물을 섞어짓기 했을 것이다. 이것이 섞어짓기가 발생한 동기가 아닐까?

(2) 농가의 식구 노동력을 다 쓰려고 주작물은 주인이 남자 손으로 기르고, 여자는 그 연약한 노동력으로 주작물의 사이에 섞어짓기 작물을 조금 기르는 것만을 재미로 삼았을 것이다. 특히 노인의 재미로서 처음에는 섞어짓기를 하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3) 기후가 불순하고, 재배법이 유치하여 자주 한 작물을 홑짓기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몇 종의 작물을 동시에 길러서 농업경영의 안정도를 높이고자 계획적으로 섞어짓기를 실행했을 것이다. ?농사직설? 안에도 섞어짓기가 작물 재배의 안정도를 높이는 한 수단으로서 섞어뿌림이란 방법이나 섞어짓기를 장려하고 있다.

(4) 중국 북부 또는 산동 지방의 섞어짓기가 수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한족이 많이 살았던 지방에서는, 예를 들면 간도間島에서는 중국 북부의 줄지어 섞어짓기와 비슷한 방식이 있다. 함경남도의 성천강城川江 지방에서도 자주 보인다. 중국인과 밀농사는 잘 어울린다.

(5) 자급자족 농업과 섞어짓기의 발생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농가는 자급자족해야 했다. 거기에는 일용의 주식 말고 등불 기름, 기름 짜는 작물, 약용작물 등의 작물을 한 집에서 조금씩이라도 길러야 해서 여러 작물을 길렀던 것이다. 지금 실제로 참깨, 아주까리, 들깨 등을 전국에 조금씩이라도 섞어짓기하고 있는 것은 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섞어짓기의 발생 및 섞어짓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의 폐지를 부르짖기 전에 섞어짓기를 한 원인을 잘 알고 이에 대한 대책을 궁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부방식의 실례

1. 옛 문헌에 보이는 작부방식

 

농사직설

산림경제

1

2

3

4

5

6

7

8

밭벼③, 피②, 팥① 섞어짓기

참깨③, 늦팥① 섞어짓기

녹두②, 참깨① 섞어짓기

메밀, 무 섞어짓기

팥(조③, 들깨①) 섞어짓기

팥(기장③, 들깨①) 섞어짓기

보리, 완두 섞어짓기

삼, 완두 섞어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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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짓기

9

목화에 참깨, 콩 등의 섞어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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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식

10

11

12

13

14

15

16

17

18

밀·보리에 콩 사이짓기

밀·보리에 팥 사이짓기

밀·보리에 조 사이짓기

밀·보리에 피 사이짓기

콩에 밀·보리 사이짓기

밀·보리 그루갈이 콩

밀·보리 그루갈이 팥

밀·보리 그루갈이 들깨

밀·보리 그루갈이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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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방식

17방식

조합식 1. 논벼 그루갈이 밀·보리 농사

당시의 논밭농사에는 휴한식, 연작식 또는 윤재식이 많이 행해졌다고 헤아릴 수 있고, 토지이용의 정도도 현재에 비교하여 훨씬 낮았음이 틀림없는데, 역시 조합식이 이처럼 거론되어 있는 것은 조선 초기에도 꽤 고도로 토지를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 500년 전의 작부방식

?농사직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관官에서 지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이다. 당시 주로 중남부 지방의 모범 농가를 모아서 그 의견을 듣고서 편찬한 것인데, 그 안에 당시의 작부방식이 명료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피면 당시에는 각종 작물을 활발하게 섞어뿌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섞어뿌림과 섞어짓기

1. 밭벼와 피와 팥의 섞어뿌림

밭벼 3, 피 2, 팥 1을 섞어서 뿌린다고 한다. 그 이유로 “대체로 섞어 심는 기술은 가문 해에 한다. 구곡九穀은 해에 따라서 마땅함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섞어 심으면 곧 완전히 잃는 데 이르지 않는다”라고 한다. 곧 당시의 농가라고 하더라도 작물의 종류에 따라 그해의 기후 상태 등에 대한 적응력이 서로 달랐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구나 당시에는 그 재배 방법도 현재에 비해 더욱 조방적이었기에, 홑짓기를 하면 해에 따라서 전혀 수확이 없을 우려가 있기에 섞어짓기를 장려한 것이다.

2. 팥, 들깨, 조의 섞어뿌림 또는 섞어짓기

3. 팥, 들깨

3월 서릿김이 없을 때(올기장·올조는 3월 상순, 늦기장·늦조는 3얼 중순부터 4월 상순에 이르고 심어야 함) 좋은 밭을 골라 먼저 팥을 군데군데 흩뿌린 뒤 이곳을 갈아 두둑을 만들과 두 발로 번갈아 밟고 들깨(水荏子)와 기장 또는 조와 섞어서(들깨 1에 기장 또는 조 3) 심는다(두 발로 번갈아서 흙을 덮음).

4. 참깨와 늦팥

5. 녹두와 참깨 섞어뿌림

“흰참깨 3에 늦팥 1을 섞어서 그것을 심거나 녹두 2d 참깨 1을 섞어서 심을 수도 있다.”

지금은 이와 같은 섞어뿌림을 볼 수 없다. 당시 농업이 지금과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조방한 재배법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목화밭의 섞어짓기 피해를 설명

다른 작물에 대해 당시 활발히 섞어짓기한 목화농사에 대해서도 섞어짓기를 했던 듯하다. 그렇지만 목화밭에는 특별히 섞어짓기를 경계하여 오늘날에 보면 참으로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곧 종목화법種木花法(초면草棉)의 항에 “속인俗人은 사이짓기하는 데에 참깨, 푸른콩을 쓰는데, 그러나 목화가 손해를 입는 것은 모른다. 목화솜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이짓기하지 말라(옥천沃川, 양산陽山의 사람이 그것을 함)”라고 기록되어 있다.


B. 그루갈이와 사이짓기를 앞에 기술했듯이 당시 섞어짓기와 섞어뿌림이 꽤 널리 행해진 듯한데, 또 한편 이미 사이짓기법을 행했던 것은 다음의 작부방식에서 보는 것과 같다.

7. 밀·보리 사이에 피 사이짓기

종직種稷(직稷은 피일 것임)의 항에 “피도 또한 늦게 심는다. 일찍 익는 것은 밀·보리의 사이에 6월 상순 심어야 한다”라고 한다. 현재 밀·보리에 피의 사이짓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8. 밀·보리 사이짓기 콩

9. 콩 사이짓기 밀·보리

10. 밀·보리 사이짓기 조

11. 밀·보리 사이짓기 팥

현재 2년 3작 지대와 1년 2작 지대에서는 일반적으로 밀·보리 사이에 콩이나 조를 심는데, 당시 벌써 이와 같은 방법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재 거의 보이지 않는 콩 사이에 밀·보리 짓기를 행했던 것은 신기하다. 곧 다음과 같다. “또 한 방법이 있다. 작은 밭은 밀·보리를 아직 심지 않았을 때, 두 두둑의 사이를 얕게 갈아서 콩을 심고 밀·보리를 거두고 나서 또 밀·보리 밑동을 갈아서 콩 뿌리를 덮는다. 콩밭 사이에 가을밀·보리를 심는다. 밀·보리의 사이에 조를 심는 것도 모두 이러한 방법과 같다”라고 한다. 또 “콩·팥 심기는 모두 이르고 늦음이 있다(일찍 심는 것의 향명鄕名은 춘경春耕, 늦게 심는 것의 향명은 근경根耕, 근경은 밀·보리의 사이를 간다는 데에서). 일찍 심는 것은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에 이르러 심어야 한다.”

12. 밀·보리 그루갈이 들깨

“참깨는 길을 따라 심거나 두둑에 심는 것이 마땅하고, 모과母科(그루임)는 30㎝(1尺) 떨어트린다(배면 가지가 적고 알이 잘다). 속방은 4월 상순 모를 심고, 밀·보리 그루갈이할 때 두 두둑 사이에 옮겨심는다. 서로 30㎝ 남짓 떨어트린다(비를 기다려 심음)”라고 한다. 지금도 경기 지방에서 자주 보인다.

13. 밀·보리 그루갈이 콩

14. 밀·보리 그루갈이 팥

“콩을 그루갈이(밀·보리를 베고 그 밑동을 갈아엎음) 쟁기질과 거두기는 모두 일찍 심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또 “팥의 그루갈이는 콩의 그루갈이와 같다. 그러나 밀·보리 밑동에 흩뿌리고 나서 그것을 갈아 호미질 한 번으로 끝낸다”고 한다. 분명히 밀·보리를 벤 뒤에 콩·팥을 기르는 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현재 경기 이남 또는 황해도 지방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이러한 작부방식이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 밀·보리 그루갈이 참깨

종호마부유마種胡麻附油麻 항에 “만약 길든밭이 있으면 곧 4월 상순 밀·보리를 베기를 기다려 그걸 베고 난 뒤 똥재에 섞어서 흩뿌린다”라고 한다. 밀·보리 밑동에 참깨를 심는 것은 현재 중부 이북에서 아직 보이는데 남선 지방에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볼 때는, 500년 동안 현재는 거의 볼 수 없는 여러 섞어짓기가 성행했던 듯하고, 또 지금 행해지는 사이짓기와 그루갈이도 이미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농사직설?을 편찬한 세종 시대의 옛 기록을 볼 때 당시 황해·평남·함경 지방에는 오늘날 보이는 섞어짓기가 매우 적다. 남선 지방에서는 섞어짓기나 섞어뿌림이 비교적 많이 행해진 듯한데, 북선 지방에는 남선 지방의 섞어짓기를 장려하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작부방식이 차츰 집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들깨와 참깨는 당시에는 식용, 등용燈用, 양념으로 쓸데가 현대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이들 작물의 재배도 활발하여 이에 관계있는 기록도 많은 것이다.



2. 250년 전의 작부방식

250년 전의 편저編著인 정약용의 ?박물지博物志?에 기재된 바를 보면, 당시의 작부방식을 헤아리기에 어렵지 않다. 앞에 기술한 ?농사직설?에 비해 더욱 여러 작부방식을 기재했는데 당시 여전히 섞어뿌림을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섞어뿌림·섞어짓기

1. 팥에 (조, 들깨)

2. 팥에 (기장, 들깨)

기장과 팥 또는 조와 팥은 씨앗의 크기가 매우 다르기 때문에, 심을 때 씨앗을 섞지 않고 먼저 팥을 드물게 심고서 그 위에 기장이나 조 2~3말씩 똥재와 섞은 것을 심는다. 곧 “기장, 조 2~3말씩에 똥재를 섞고, 1섬을 이룬다. 먼저 팥을 드물게 흩뿌리고, 나중에 그곳을 간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지금도 드물게 이러한 파종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들깨와 조 또는 기장의 씨앗은 양쪽이 다 작아서 심기 전에 알맞은 비율로 씨앗을 섞어서 섞어뿌린다. 곧 “들깨를 심는다면 기장이나 조와 섞는다(들깨 1에 조나 기장 3). 두둑을 따라 두 발로 번갈아 밟는다(두 발을 번갈아 놀리면 흙이 덮힌다). 모가 자라는 사이에 잡풀이 난다. 밴 곳은 호미질로 솎고, 흙으로 북을 돋는다. 호미질은 3번에 이를 수 있고, 풀이 없어도 호미질을 그치지 말라”라고 그 재배법도 상세히 지시하고 있다. 지금도 함경남도 지방에서는 조와 피, 황해도 지방의 밀 그루갈이에 팥, 녹두, 메밀 등을 섞어뿌리는 것이 보이지만, 필자는 아직 들깨와 조, 또는 들깨와 기장을 섞어뿌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3. 메밀과 무의 섞어뿌림

“메밀은 무에 섞어서 그것을 농사지으면 둘 모두 이득이다”라고 한다. 이 방식은 지금 황해도 지방에 밀·보리의 그루갈이로 자주 보인다.

4. 참깨와 늦밀 섞어뿌림

5. 참깨와 녹두 섞어뿌림

“다른 방법으로 흰참깨 3에 팥 1을 섞어서 그걸 심거나 녹두 2에 참깨 1을 섞어서 심을 수도 있다. 쟁기질하고 나면 두둑을 짓고 섞어 놓은 시를 고르게 흩뿌리고 흙을 덮는다”라고 한다. 이 방식 또한 필자는 아직 잘 모르겠다.

6. 보리에 완두 섞어짓기(겨울작물과 겨울작물임)

“완두는 가을 전에 보리의 뿌리 근처에 심고, 똥재를 고르게 덮고 자주 호미질한다. 5월에 이르러 그것을 거둔다. 여러 콩 가운데 완두는 꼬투리가 잘 터지지 않고 수확이 많고 빨리 익는다”라고 한다. 함경북도 지방에서는 봄보리와 완두를 섞어뿌린다.

7. 삼에 완두

“8월 안에 또는 삼에 끼워 같이 심고 함께 거둔다”라고 한다. 삼은 불명확하지만 현재 이러한 재배법은 없는 듯하다.

8. 밀·보리 사이짓기 콩

9. 밀·보리 사이짓기 팥

10. 밀·보리 그루갈이 콩

11. 밀·보리 그루갈이 팥

“콩·팥은 모두 올종과 늦종이 있다. 올종은 춘경春畊이라 부르고 늦종은 근경根畊이라 부른다. 근경은 밀·보리의 뿌리를 갈아엎는다. 콩 근경은 밀·보리를 베고 나서 그 뿌리를 갈아엎는다. 쟁기질 및 거두기는 모두 올종과 같다. 다만 심을 때 한 구멍에 4~5알을 넣는다. 대략 밀·보리 1말의 땅에 콩 3~4말을 심는다. 팥 근경은 콩 근경과 같다. 다만 씨를 밀·보리 뿌리에 흩뿌리고 나서 그것을 덮으려고 호미질 한 번에 그친다. 대략 밀·보리 1말의 땅에 팥 2말을 심는다.” 또한 “다른 방법으로 밭이 작은 사람은 밀·보리가 아직 이삭이 패지 않았을 때는 두 두둑 사이를 얕게 갈아서 콩을 심고 밀·보리를 거두고 나서 또 밀·보리 뿌리를 갈아 콩의 뿌리를 덮는다”라고 한다. 지금 행해지는 밀·보리 사이짓기 또는 그루갈이 콩·팥의 재배법과 그 방법이 거의 비슷하다.

12. 콩 사이짓기 밀·보리

13. 밀·보리 사이짓기 조

“콩밭 사이에 가을밀·보리를 심는다. 가을밀·보리밭 사이에 조를 심는 것도 모두 이 방법과 같다.”

보리 사이짓기·그루갈이 콩·팥을 심는 데 비하여 콩 사이짓기 밀·보리나 밀·보리 사이짓기 조의 작부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은 듯하나 500년 전부터 이 작부방식이 있던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사이짓기하는 조는 혹 줄기가 너무 무성하면 이삭이 나도 여물지 않으니 소 입에 망을 씌우고 두 두둑 사이를 갈아, 흙으로 줄기를 덮으면 다시 새로운 뿌리가 나와 이삭이 나오고 오래도록 여문다”라고 한다. 지금 강원·경북 지방의 보리 사이짓기 조 재배법과 비교할 때 매우 흥미롭다.

14. 밀·보리 그루갈이 참깨

“만약 길든밭이라면 4월 상순에 밀·보리 뿌리는 곧바로 뒤좇아 베고, 밀·보리 뒤에 똥재에 섞어서 드물게 심는다. 고무래를 써서 흙덩이를 부수고 흙을 덮는다.”

15. 보리 사이짓기·그루갈이 들깨 옮겨심기

“수소마水蘇麻. 향명 수임자水荏子, 또는 니유마伱油麻, 길가나 두둑에 심을 수 있다. 그루마다 서로 30㎝(1尺)를 띄운다. 배면 가지가 없고 알곡이 잘다. 다른 방법은 4월 상순에 모를 심고, 밀·보리를 그루갈이할 때를 기다려, 두 두둑 사이에 옮겨심고, 비가 내릴 때 그것을 꽂는다. 모를 심을 때를 지나쳐서 옮기지 않는다. 너무 자란 것은 머리를 잘라 나무로 구멍을 뚫어서 그것을 심으면 모는 곧 잘 자라서 알곡을 맺는다. 반드시 또한 비가 올 때 그것을 한다”라고 한다. 현재도 경기도 부근에서는 들깨를 옮겨심기하지만 간단히 밀·보리 사이짓기 또는 밀·보리 그루갈이로 들깨의 옮겨심는 일은 없고 거의 보리 그루갈이로 콩을 옮겨심는 것이 보통이다.

16. 목화의 섞어짓기 피해

“사람들 가운데 참깨, 푸른콩을 사이짓기하는 사람이 있다. 목화에 피해가 되는 것을 모른다. 오로지 목화를 거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이짓기하지 않는다. 또는 두둑 사이에 참외를 사이짓기하나 모든 것을 심지 않아야 한다”라고 당시에도 또 목화에 각종 작물을 섞어짓기하는 피해를 경고한다. 현재도 농가에서 활발히 섞어짓기를 하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보리 사이짓기 목화는 근대적일까?

이상 둘을 보면 목화를 밀·보리 사이에 기르는 방식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 목화는 남선 지방에서도 또 홑짓기할 것이다. 사이짓기 목화의 재배는 비교적 근대의 작부방식이지 않을까? 과연 언제쯤부터 생긴 것인지 이후 연구를 기다려야 한다.

밀·보리 사이짓기·그루갈이 팥·녹두·메밀 또는 콩·녹두·팥·메밀 등의 방식도 또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논 뒷갈이 밀·보리. ?농사직설? 안에는 논 뒷갈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당시는 거의 뒷갈이 밀·보리를 심지 않고 논벼는 한그루짓기만 했을까? ?산림경제?에서는 논 뒷갈이가 기재되어 있다. 곧 다음과 같다. “논 안에 보리를 심는 방법은 미리 두엄을 논에 주고 벼가 익기를 기다린 뒤 곧 벤다. 빙 돌아 갈고 보리씨를 두엄과 섞어서 깊게 심고, 흙으로 그것을 덮으면 곧 그 보리가 자라 또한 무성해진다. 봄에 여물면 따로 벼모를 물이 있는 논에 심고, 보리를 베기를 기다려, 물을 담고 그곳을 갈아 모내기하면 곧 벼가 매우 잘 자란다.”



3. 조선 말기의 작부방식

1904~1905년 무렵 혼다 코우스케本田幸介,1) 고바야시 후사지로小林房次郞, 나카무라 히코中村彦,2) 미츠나리 오야이치로三成文一郞,3) 우도 요시오有働良夫, 가모시타 마츠지로鴨下松次郞, 하라키原凞, 스즈키 쥬레이鈴木重禮4) 등 8명이 당시 한국의 농업 상황을 폭넓게 조사하여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로 출판되었다. 기타 경술국치 당시의 농업 조사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토지농산조사보고서?에 기재된 작부방식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이 보고서는 지방에 따라서 조사서를 달리 했기에 그 내용도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지역적으로 작부방식이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 경기도

고바야시 후사지로

나카무라 히코

경기

호서

관동

2. 충청도

3. 강원도

4. 경상도

미츠나리 오야이치로

우도 요시오

영남

호남

5. 전라도

6. 황해도

혼다 코우스케

해서

관서

7. 평안도

혼다 코우스케, 스즈키 쥬레이, 하라키

8. 함경도

혼다 코우스케, 가모시타 마츠지로, 하라키

관북

논 뒷갈이 밀·보리

①경기, 충청, 강원. “무논에서는 오직 벼 한그루짓기만 하고 겨우 마을 가까이 물이 잘 빠지고 거름주기 쉬운 곳에서 벼 뒷갈이로 밀·보리를 기르는 것이 보인다. …… 그렇기는 하나 무논의 두그루짓기는 전체에서 보면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기술하여, 당시 경기, 강원, 충청 지방에서는 논의 뒷갈이가 매우 적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②전라, 경상도에서는 “논에서는 돌려짓기를 하지 않는다. 곧 여름에는 벼만 기르고, 두그루짓기를 할 경우에는 거의 밀·보리를 기른다”고 기술하여, 이들 지방에서는 두그루짓기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한그루짓기한 것을 앞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③황해도에서는 “논은 수리水利가 충분하지 않아 비에 의존하는 곳이 많고, 또 두그루짓기를 볼 수 없다”라고 한다. 황해도에서는 당시 전혀 두그루짓기를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④평안도는 “농법이 조방한 황해도 이하 …… 논에는 두그루짓기를 하지 않고” 한다.

⑤함경도는 논의 뒷갈이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농법이 매우 조방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으로 보면, 무논 뒷갈이는 경기 이남 지방에서만 행해졌고, 황해도·함경도·평안도 지방에서는 전혀 행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넓이도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하다.

작부방식의 실례에도, 논벼를 뒷갈이할 경우는 겨우 경기도 안에 1. 벼, 2. 봄보리의 돌려짓기를 들고만 있다. 또 충청남도의 항에 “논벼. 가뭄 때문에 심을 수 없는 곳에서 콩, 팥 또는 메밀을 기른다”라고 한다. 충청북도의 항에 “무논의 가뭄 때문에 심을 수 없을 때는 주로 메밀을 심는다”라고 하여, 논과 밭을 번갈아 짓는 일을 기재했다.


밭의 작부방식

밭농사는 논농사에 비하여 그 작부방식이 매우 복잡하다.

①경기, 충청, 강원 안에, “돌려짓기, 사이짓기, 섞어짓기 등 다양한 형식이 있어서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렵다. 특히 섞어짓기가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기술하여, 중부지방에서 섞어짓기가 매우 많았음을 기술하고 있지만,

②전라·경상에서는 “밭에서도 겨울작물은 대부분 완전히 밀·보리를 심지만 여름작물로는 콩과 같은 것을 다른 작물과 번갈아 기르는 곳이 많다. 또 목화, 담배, 삼, 참외 등에 대해서 조사하여 돌려짓기를 거의 신경 쓰지 않고서 이어짓기하는 곳도 적지 않다”라고 한다. 그 작부방식이 중부지방에 비하여 비교적 단순하듯이,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에 관하여 어떠한 언급이 없는 것은 중부지방에서 보이듯이 조사자에게 특히 주의를 끌 만큼 복잡한 섞어짓기가 이들 지방에 적었기 때문일까?

③황해도의 항에서는 “밭은 여름·겨울 두그루짓기를 보통으로 하지만 북향인 땅에서는 여름작물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라고 한다. 돌려짓기에 대해서는 “곳에 따라서 다르지만 작물의 종류가 적고, 대체로 그 조합은 복잡하지 않다. 주로 2년 돌려짓기한다”라 하고, 작부방식의 실례 아홉 가지를 들고 있다. 모두 2년 3작식뿐이다. 또한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에 대해서는 “사이짓기는 주로 과채瓜菜를 기르고, 섞어짓기는 특히 여름에 보인다. 기르는 것은 맥류와 두류, 콩과 팥, 목화와 아주까리, 수수와 두류, 조와 목화 등 이런 두 작물을 섞어짓기하는 예를 기재하고 있는데, 두류와 수수 및 목화, 목화와 아주까리 및 콩과 같은 3작물을 섞어짓기한다. 황해도 지방은 중·남선에 비하여 섞어짓기 작물의 종류가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④평안도. “밭은 남부 평야에서는 가을보리를 볼 수 있지만, 대강 추리면 겨울작물은 드물고, 주로 여름작물에 의존한다”라고 하며,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의 항에는 “대체로 황해도와 같다. 목화 같은 것을 기르는 곳이 줄어서 한두 섞어짓기 작물의 종류가 줄었다”라고 한다. 북부로 가면서 섞어짓기 작물의 종류가 감소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⑤함경도. 농법은 매우 조방하고 작부방식도 중부지방에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단순한 것 같고,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에 대해서도 “이 도는 또한 사이짓기와 섞어짓기를 하는 것은 다른 도와 비슷하다. 그렇지만 섞어짓기하는 곳의 작물을 그 수가 적어 세 작물은 드물고 두 작물이 많다. 섞어짓기의 상황은 황해도의 조항에 기술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아주까리를 기르지 않는다. 요컨대 대동소이할 뿐이다”라고 한다. 곧 이에서 보면, 함경도의 작부방식은 중부지방에 비해서는 훨씬 간단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작부방식의 실례

그 보고서에 기재된 작부방식의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심는 순서 등 적당하지 않은 것을 좀 정리했음).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의 조사는 없다.

경기도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군 이름은 현재의 이름으로 고침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연작식(섞어짓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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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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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밭벼

수수

수수

녹두

아주까리

오이

참외

피 묵힘

목화 묵힘

수수, 들깨

메밀, 콩

수수, 조

수수, 들깨

들깨

순무

수수

 

 

 

 

 

 

 

 

 

 

 

옥수수

 

 

조, 피

 

 

 

 

 

 

 

 

 

 

 

강낭콩

 

 

 

 

 

 

 

 

 

 

 

 

 

 

 

 

 

 

 

 

 

 

 

 

 

 

 

 

 

 

 

 

 

장단

이천

광주

개성

시흥

개성

김포

김포

시흥

수원, 안성

진위振威

고양

시흥

시흥

고양

조합식

1

2

3

4

5

6

7

8

9

10

11

12

3/2

3/2

3/2

2/1

2/1

2/1

2/1

2/1

2/1

2/1

4/2

4/2

수수

밭벼

 

 

 

 

 

 

 

 

 

보리

보리

보리

봄보리

보리

보리

귀리

밀·보리

밀·보리

콩·팥

들깨

조, 콩·팥, 수수

조, 콩

콩·팥

묵힘

묵힘

묵힘

 

 

 

 

 

 

 

밀·보리

밀·보리

 

 

 

 

 

 

 

 

 

 

콩·팥

 

 

 

 

 

 

 

 

 

 

 

 

강화

김포

김포

김포

김포

포천

연천

김포

연천, 장단

연천, 장단

이천, 장단

이천, 장단


충북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연작식(섞어짓기)

1

2

3

4

5

1/1

1/1

1/1

1/1

1/1

목화

콩, 수수

수수

묵힘

묵힘

콩·팥

수수, 메밀

 

 

 

 

영동

영동

보은

보은

충주

조합식

1

2

3

4

5

6

4/3

3/2

2/1

2/1

2/1

2/1

담배

조, 수수

 

 

 

 

밀·보리

 

 

 

 

목화

밀·보리

밀·보리

밀·보리

밀·보리

묵힘

묵힘

콩, 들깨

담배

 

 

 

 

 

묵힘

 

 

 

 

 

괴산

충주

옥천, 충주, 영일

충주

옥천

옥천, 영일

충남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연작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1/1

밀·보리

목화

목화, 콩

목화, 참깨

목화, 콩

목화

목화

목화

목화

목화

담배

담배

고추

참외

묵힘

묵힘

묵힘

묵힘

수수, 오이

메밀, 수수

고추

참깨, 조

수수, 콩

묵힘

수수

들깨

아주까리

 

 

 

 

 

참깨

 

 

 

 

 

 

 

 

 

 

 

 

 

 

 

조, 콩

 

 

 

 

 

 

 

 

 

 

 

 

 

서산, 태산

예산

예산

예산

연기

보령

보령

보령

공주

연기

당진

청양, 보령

보령

청양

공주

서산

서산舒山

윤재식

1

2/2

묵힘

목화

묵힘

 

 

예산

조합식

1

2

3

4

5

6

7

3/2

3/2

2/1

2/1

2/1

2/1

2/1

목화

콩·팥

 

 

삼, 무

밀·보리

밀·보리

밀·보리

밀·보리

묵힘

목화

담배

 

 

 

묵힘

묵힘

 

 

 

 

 

 

 

예산

청양

예산, 서산, 청양, 아산

당진

당진

연기

당진


강원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휴한식

 

1/2~

1/5

2~5년 사이에 1번 농사짓는다.

 

 

철원, 평원, 伊川

연작식(섞어짓기)

1

2

3

1/1

1/1

1/1

담배

참깨

참외

묵힘

아주까리, 콩

아주까리, 콩

 

 

 

 

김화

이천

이천

조합식

1

2

3

4

5

6

7

8

9

10

2/1

2/1

2/1

2/1

2/1

2/1

2/1

2/1

4/2

6/3

 

 

 

 

 

 

 

삼, 남새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보리

귀리

묵힘

보리

보리

수수

조, 콩

콩, 아주까리

 

콩·팥

 

 

 

 

 

 

 

 

보리

보리

 

 

 

 

 

 

 

 

수수

 

 

 

 

 

 

 

 

 

보리, 조

김화, 이천

김화

이천

이천

이천

김화

김화

김화

이천

고성, 양양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에 대해서는 특별히 작부방식을 들지 않았지만, 윤재의 항에서 “논에서는 윤재를 행하지 않는다. 곧 여름은 벼만 기르고, 두그루짓기를 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밀·보리를 기른다. 또 밭에서도 겨울작물은 거의 모두 밀·보리를 연재하지만 여름작물로는 콩과 같은 다른 작물과 번갈아 기르는 곳이 많다. 또 목화, 담배, 삼, 참외 등에 대해 조사하면 윤재에 대해서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연재하는 곳도 적지 않다”라고 기술한다.


황해도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조합식

1

2

3

4

5

3/2

3/2

3/2

3/2

3/2

조, 콩

조, 콩

조, 수수

밀·보리

봄보리

콩·팥

콩·팥

콩·팥

콩·팥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해주, 금천

재령, 봉산, 遂安, 곡산

평산

서흥

황주

평안남도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윤재식

1

2

2/2

3/3

묵힘

묵힘

콩·팥

묵힘

묵힘

보리

 

 

묵힘

평원, 성천

안주

조합식

1

3/2

조, 콩

콩·팥

묵힘

 

 

평원, 성천

평안북도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윤재식

1

2

3

4

2/2

2/2

2/2

3/3

묵힘

묵힘

묵힘

묵힘

콩·팥

콩·팥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보리

정주

의주

의주

영변


함경남도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윤재식

1

2

3

4

2/2

3/3

4/3

4/3

조나 수수

조, 콩

묵힘

묵힘

묵힘

묵힘

수수나 피

수수, 콩

묵힘

밀·보리

보리

 

묵힘

피(조)

 

묵힘

묵힘

묵힘

단천(축축한 밭)

단천(마른 밭)

함흥

안변

함경북도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여름

겨울

 

윤재식

1

2/2

묵힘

묵힘

 

 

경성

조합식

1

2

4/3

3/2

묵힘

봄보리

수수(피)

봄보리

묵힘

묵힘

길주

회령


이상을 가지고 볼 때는, 조선 반도에서 주요 농작물의 작부방식은 매우 복잡다단하다. 이것을 지역적으로 보면 논 뒷갈이 밀·보리의 한계는 북으로는 경기도 부근인데, 중부 지대에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넓이에 지나지 않는다. 논에서도 가문 해에는 밭농사로 메밀 등을 기르는 일이 있어, 매우 조방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밭농사의 작부방식에 대해서 보면, 지역적으로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중부지방은 가장 복잡하다. 그 섞어짓기를 보아도 남부지방은 섞어짓기가 조금 적고 중부가 가장 많으며, 더욱이 북선 지방은 비교적 섞어짓기가 적으며 단순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경남도에 들어가면 겨울작물로서 겨우 봄보리만 있고, 여름작물로는 작물의 종류가 감소하여 섞어짓기도 적어지고 있다.



5. 현재의 작부방식

조선에서 농작물의 작부방식은 그 토지이용의 정도에서 보면 이미 500년 전부터 오늘날 보이는 서양의 윤재식에 비교하여 훨씬 고도화된 것이다. 과거 몇 천 년 동안에 휴한식에서 연작식·윤재식으로 차츰 집약되는 단계를 거쳐 오늘날 보듯이 집약적인 조합식으로 진화한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이것을 지역적으로 볼 때는 그 작부방식의 분포에서 뚜렷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에서 정무를 시작한 이래 각지의 작부방식에 대해서는 수없이 조사가 행해졌고, 특히 은사인 다케다 소우시치로武田總七郞 씨는 조선 작부방식의 지역적 분포나 그 의의에 대해서 저서인 ?맥작신설麥作新說?, ?전신설畑新說?, ?재배범론栽培汎論?에서 그의 오랜 연구로 쌓은 학식을 얻을 수 있고, 특히 2년 3작에 관한 그의 연구는 오늘날 조선 농업 지도자에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준 것이다.

또 각 도농사시험장(충남, 평북, 경기, 강원, 황해) 등에서도 각각 그 지방의 작부방식을 조사했다. 또 의욕적 연구로는 윤재 시험이나 경종 조직이란 이름으로 작부방식의 시험이 반복해서 실시되고 있다.

지금까지 작부방식의 의의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신규 작부방식을 장려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기의 보리 그루갈이 콩을 보리 사이짓기 콩 또는 목화 농사에서 두둑 너비를 넓혀 밀·보리를 넓게 뿌리는 일이나 황해, 평안남도에서 밀 사이짓기 목화를 장려하는 일이나, 중남선 지방의 논벼 뒷갈이 밀·보리를 장려하는 일 등이다.

필자는 지난 1917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각 도에 명하여 각 지방의 작부방식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한 원부를 볼 기회를 얻어서 이 원부에 따라 작부방식을 정리·분류했다.

이 조사는 1923년에 일단 본부에서 정리한 것이 ?조선휘보지朝鮮彙報誌?에 공개되었는데, 그 정리는

1. 같은 작물을 해마다 홑짓기하는 곳

2. 1년에 한 작물을 길러 해를 걸러 또는 몇 년마다 그 작물을 바꾸는 곳

3. 일정 순서에 2종 이상의 작물을 심는 곳

으로 크게 셋으로 구별하고만 있어서, 자세히 그것을 검토하면 조금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분류에서는 토지이용 정도 등은 알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원부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입장에서 이것을 정리·분류했다.

1917년에 논밭 넓이 116억 4000만 평(388萬町步), 논 144만 町步, 밭 244만 町步이었다. 당시의 작부방식별 넓이를 집계한 결과는 합계 334만 町步, 논 125만 町步, 밭 209만 町步이 되어, 조선의 농사땅에서 행해지는 거의 대부분의 작부방식을 조사할 수 있기에 지금까지 없던 대규모 조사였음을 알 수 있다.



작물의 종류와 심는 비율

조선 반도에서 작물의 종류에 관해서는 아직 상세하게 조사된 것이 없는 듯하지만, 아키미네明峰 박사가 일본의 작물 종류(조선을 포함. 1929년)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357종이고, 종 또는 변종의 수에서는 375종이라고 한다. 그 내역을 보면,


식용작물 208

사료작물 40

양념작물 29

약용작물 49

섬유작물 12

비료작물 18

기타 70

합계 426


이 안에는 같은 작물로서 양쪽에 편입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한 결과가 357이나 375종이 된다. 곧 대개는 식용작물이고, 사료작물은 겨우 40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하게 일본 농업이 갈이농사(경종농업)이란 증거로서, 우리 조선 반도의 작물 종류도 또한 이 작물의 종류와 대략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일본 작물이라고 하면 타이완 등도 여기에 포함되기에 이 수보다도 적을 것이지만, 어쨌든 꽤 많은 작물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선의 농업통계서에 기재되어 있는 작물의 종류를 알아보면, 다음 53종이 있다. 이것을 주요 작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논작물 : (1)논벼  (2)왕골  (3)미나리

밭작물 : (4)밭벼  (5)조  (6)피  (7)기장  (8)수수  (9)옥수수  (10)메밀  (11)콩  (12)팥  (13)녹두  (14)땅콩  (15)강낭콩  (16)육지면  (17)재래면  (18)삼  (19)어저귀5)  (20)모시  (21)황마6)  (22)양삼  (23)닥나무  (24)고리버들  (25)참깨  (26)들깨  (27)아주까리  (28)양삼씨  (29)제충국  (30)수하壽荷  (31)인삼  (32)담배  (33)고구마  (34)감자  (35)무  (36)배추  (37)양배추  (38)가지  (39)오이  (40)호박  (41)수박  (42)마늘  (43)구약나물  (44)고추  (45)자주개자리  (46)풋베기콩  (47)귀리  (48)완두  (49)보리  (50)밀  (51)파  (52)자운영  (53)털갈퀴덩굴



심는 비율

이러한 작물을 심는 비율을 나타내면, 논 48억 평(160萬町步)에는 주로 논벼이고, 왕골과 미나리 등은 매우 적다.

밀·보리, 털갈퀴덩굴, 풋베기콩, 삼 등은 논의 뒷갈이로 기르는 것인데, 그 비율도 또한 밀·보리를 빼고서는 매우 적다.

밭작물에 대해서 보면(1934년), 밭 넓이 84억 3000만 평(281萬町步)에 대해서 심는 총넓이는 107억 4000만 평(358萬町步)에 토지이용률 127%이고, 이밖에 뒷갈이 밀·보리가 약 9억 평(30萬町步)이다. 그래서 밭작물 총계는 116억 4000만 평(388萬町步)을 심는 것이 된다.

밀·보리·쌀보리를 심는 넓이, 40억 6200만 평(135萬4千町步), 수확량 1111만 섬

잡곡 총계, 39억 6000만 평(132萬町步), 수확량 800만 섬(그 가운데 조는 가장 주요한 것으로 500만 섬을 생산)

콩과식물은 32억 7000만 평(109萬町步), 550만 섬(그 가운데 콩은 150만 섬 수출함)

덩이식물(薯類), 3억 6000만 평(12萬町步)

지금 정리한 작부방식의 종류와 실례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라 보면,

 

 

작부방식

종류 수

논농사

휴한식

4

4

연작식

1

7

윤재식

4

28

조합식

1

1

소계

10

40

논밭 번갈아 짓기

휴한식 

3

3

윤재식

4

23

조합식

14

76

소계

21

102

밭농사

휴한식

10

47

연작식(섞어짓기 포함)

1

276

윤재식

4

320

조합식

14

379

소계

29

1022

총계

60

1164

곧 작부방식의 총계는 60이다. 그 종류 수는 1164였다. 이들 가운데 밭농사에서 그 작부방식은 뚜렷하게 종류가 많고, 논밭 번갈아 짓기 또는 논농사에서는 그 작물의 종류가 적기 때문에 작부방식의 종류도 뚜렷하게 적다.



작부방식별 넓이

2년 3작식과 1년 2작식의 종류와 넓이, 이상에서 보며, 천 몇 백 종류에 이른다. 각종 방식은 그 기본식으로, 0/1, 1/1, 3/2, 2/1의 네 종류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 가운데 0/1은 묵히는 것이고 1/1은 1년 1작이라서 앞·뒷그루를 기르는 데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단순히 서양의 Rotation처럼 이른바 돌려짓기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앞·뒷그루의 관계는 서양의 Rotation 이론을 곧바로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은 여기에서 생략한다.



2년 3작식과 1년 2작식의 종류

앞에 기술했듯이 토지이용률 100% 이상 150%에 이르는 작부방식은 3/2를 그 기본식으로 하는 것으로서, 이들 작부방식 가운데 그 기본식만 꺼내 그 기본식이 재배되는 넓이의 집계를 했다.

예를 들면,

 

1

2

3

4

5

6/5식

조, 봄보리

콩, 묵힘

피, 묵힘

조, 묵힘

조, 묵힘

3300만 평(1,1000町步)이라 하면 “3/2식; 조, 봄콩 ― 콩, 묵힘”이 점하는 넓이는 11000×2/5=1320만 평(4400町步)이 된다. 곧 5년 동안 2년은 2년 3작식으로 토지를 이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방법에 따라서 각종 작부방식을 2년 3작식의 기본식과 그 넓이로 계산하여 얻은 것은 다음 표와 같다.

 

 

방식 수

총넓이

1

가을보리를 가지고 하는 곳

44식

1,3715,7000평

2

봄보리를 가지고 하는 곳

41식

2,3226,6000평

3

가을밀을 가지고 하는 곳

42식

4,9206,6000평

4

봄밀을 가지고 하는 곳

1식

51,3000평

 

합계

128식

8,6200,2000평

[1] 가을보리를 겨울작물로 하는 곳 1,3715,7000평

이들 가운데, 앞그루와 뒷그루에 대하여 보면,

앞그루의 종류

넓이(평)

뒷그루의 종류

넓이(평)

밭벼

△조 및 콩·팥 섞어짓기

△수수 및 피

메밀

△콩

감자

△목화

참외, 무

217,5000

8820,3000

1805,1000

349,5000

350,1000

249,3000

1584,0000

50,1000

290,4000

녹두

메밀

고구마

감자

목화

담배

무, 배추, 참외

△7570,5000

△4009,2000

200,1000

△648,3000

2,7000

55,2000

△1088,7000

7,8000

134,1000

합계

1,3716,3000

합계

1,3716,6000

(주) 앞그루는, 그루갈이 작물이 혼작식을 취한 것이어서, 그 주작물을 취한다.


곧 가을보리를 가지고 하는 경우에는, 앞그루로 가장 많이 채용되는 것은 조로서 조사한 넓이 1억 3500만 평 가운데 그 2/3인 8700만 평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수수, 피가 1805,1000평, 목화가 1584만 평이고, 그 다음은 메밀 및 콩이 349,5000평과 350,1000평이고, 참외와 무 또는 밭벼, 감자, 삼이 앞그루인 경우는 300만 평에 미치지 못한다.

다음으로 뒷그루에 대해 보면, 콩이 가장 많아 7570,5000평, 그 다음 팥이 4009,2000평이라 콩·팥 합계 1,1579,7000평으로서 총넓이의 80% 이상을 점한다. 그 다음은 메밀 648,3000평, 목화 1088,7000평이고, 녹두와 무, 배추 등의 남새가 있지만 그 넓이는 넓지 않다.



앞그루와 뒷그루의 관계

따라서 조를 앞그루로 하고 콩·팥을 뒷그루로 하는 형식이 가장 많아, 7500만 평에 달한다. 그 다음은 수수―보리·콩과식물이 약 1800만 평이다. 목화―보리―콩과식물이 다음으로, 곧 다음과 같다.

 

첫해

둘째 해

지역

1

조 ― 보리 ―

콩과식물 ― 묵힘

평남, 황해, 전남

2

수수 ― 보리 ―

콩과식물 ― 묵힘

평남, 황해

3

목화 ― 보리 ―

콩과식물 ― 묵힘

전남, 경남, 충남



[Ⅱ] 봄보리를 가지고 하는 2년 3작

봄보리를 가지고 하는 2년 3작식은 총넓이 2,3226,6000평으로서, 그 지역은 대개 황해도 이북의 서북선 지방으로 한정되고, 남선 지방에도 드물게 보인다. 그 넓이를 들면 다음과 같다.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남, 함북

앞그루

넓이(평)

뒷그루

넓이(평)

옥수수

수수

메밀

기장

콩·팥·강낭콩

감자

담배

들깨

참외·남새

△1,7997,9000

88,2000

△405,3000

△2022,0000

130,8000

35,4000

△863,7000

△1404,9000

139,5000

43,2000

53,7000

42,0000

녹두

강낭콩

메밀

감자

기장

남새·배추·무

△2,1584,4000

△245,1000

110,7000

60,0000

△508,5000

180,0000

42,0000

△445,2000

합계

2,3226,6000

합계

2,3325,9000

곧 앞작물로 조가 가장 많고, 피·감자가 그 다음이며, 나머지는 언급하기에 충분치 않다. 뒷그루로는 콩이 가장 많고, 팥·녹두·강낭콩 등의 공과식물의 총계는 조사한 총넓이의 90% 이상에 달하고, 다음으로 메밀과 남새 종류의 뒷그루가 있지만 그 넓이가 적다. 감자와 기장도 있지만 언급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러므로 그 주요 형식은 다음과 같다.

 

첫해

둘째 해

1

조 ― 봄보리

콩과식물 ― 묵힘

2

피 ― 봄보리

콩과식물 ― 묵힘

3

감자 ― 봄보리

콩과식물 ― 묵힘


[Ⅲ] 가을밀을 가지고 하는 2년 3작

앞그루

넓이(평)

뒷그루

넓이(평)

밭벼

옥수수

수수

목화

감자

무·배추

참외·남새

169,5000

△4,4053,5000

234,0000

△1522,8000

△2331,0000

△597,0000

15,9000

98,1000

39,0000

143,7000

메밀

목화

무·배추

2,0094,0000

2,8243,8000

388,8000

366,3000

18,6000

95,1000

합계

4,9204,5000

합계

4,9206,6000

주요 작부방식

 

첫해

둘째 해

1

2

3

4

5

6

수수

수수

밀 ― 콩

밀 ― 콩

밀 ― 콩

밀 ― 콩

밀 ― 콩

밀 ― 콩


[Ⅵ] 봄밀을 가지고 하는 2년 3작

겨우 한 형식이다.

조 ― 봄밀 ― 팥 ― 묵힘  51,3000평  함경남도

봄밀이 아니면 가을밀이 아닐까?

그러나 이후 함남에 봄밀을 장려한 결과 반드시 이러한 형식이 많아질 것이다.


1년 2작식

 

작부방식

넓이(평)

1. 가을보리를 가지고 하는 곳

2. 봄보리를 가지고 하는 곳

3. 가을밀을 가지고 하는 곳

4. 봄밀을 가지고 하는 곳

48

13

35

1

11,4770,1000

7140,3000

2,3053,2000

1,5000

[Ⅰ]가을보리를 가지고 하는 곳의 뒷그루 종류

1. 밭벼

2. 조

3. 수수

4. 피

5. 기장

6. 메밀

7. 콩

8. 팥·완두·강낭콩

9. 고구마

10. 감자

11. 목화

12. 담배

13. 삼, 들깨, 참깨, 고추

14. 참외, 고추, 열매채소

15. 남새 종류

458,1000

△1,4936,4000

397,5000

118,5000

66,0000

△929,7000

△8,2288,8000

191,4000

448,2000

140,1000

△1,0148,7000

△1168,5000

216,9000

825,6000

△2435,7000

합계

11,4770,1000



[Ⅱ]봄보리를 가지고 하는 곳

이 방식은 주로 평북, 강원, 함남, 함북의 서북선 지방과 전남, 경남·북 지방에 있다. 앞의 지역에서는 아마 그 앞그루로 조 또는 피 등과 2년 3작식을 하는 곳인 듯하다. 그렇기는 하나 뒤의 지방에서는 1년 2작도 가능하기에 이와 같은 1년 2작식도 현존하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이후의 연구를 기다리고 여기에서는 조사 결과 그대로 1년 2작을 들겠다.

뒷그루의 종류

넓이(평)

1. 조

2. 피

3. 콩

4. 팥

5. 녹두·강낭콩·완두

6. 감자

7. 목화

8. 담배

9. 참외·남새

△1843,2000

107,7000

△4283,7000

236,7000

8,4000

△513,6000

99,6000

6,3000

41,1000

합계

7140,3000


[Ⅲ]가을밀을 가지고 하는 곳

뒷그루

넓이(평)

1. 조

2. 옥수수

3. 수수

4. 피

5. 강낭콩

6. 메밀

7. 콩

8. 팥

9. 녹두

10. 고구마

11. 목화

12. 담배

13. 들깨

14. 삼

15. 고추

16. 참외

17. 남새·무·배추

△3366,3000

187,8000

36,9000

39,6000

11,1000

△881,1000

△1,5806,1000

△2016,0000

54,6000

21,0000

115,5000

36,9000

105,6000

30,6000

6,0000

38,7000

△299,4000

합계

2,3053,2000



[Ⅵ] 봄밀을 가지고 하는 곳

한 형식이다.

봄밀 ― 목화이다. 그건 아마 가을밀의 실수일까?



 

 

 

밭농사 조사 넓이

논농사

논밭 번갈아 짓기

합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남

함북

4,6833,0000

1,2265,8000

2,0108,7000

1,7936,7000

3,2474,1900

9,5388,6000

2,2086,6000

6,0698,7000

6,9143,7000

8,0052,9000

4,4434,8000

9,1096,5000

3,6522,6000

5,8857,6000

1,2894,9000

3,9827,4000

3,4032,3000

3,3395,4000

3,4201,8000

2,3955,0000

2,7233,7000

1,4703,0000

1,5821,4000

1,5314,7000

9792,3000

1441,2000

201,0000

3286,8000

3163,2000

3042,0000

7826,1000

2,2790,1000

1,2017,7000

74,4000

25,2000

8,1000

213,9000

50,4000

1234,2000

10,5891,6000

2,8447,5000

6,3099,3000

5,5011,0000

7,3695,6900

15,2380,5000

5,8059,3000

8,8026,6000

8,3871,9000

9,5882,4000

5,9963,4000

10,0939,2000

3,9198,0000

합계

62,9062,5900

32,1470,7000

5,3933,1000

100,4466,3900

 

62,9062,5900

37,5403,8000

 

1912~1916년 조사

총계 넓이

      73,2000,0000평         43,2000,0000평     116,4000,0000평



작부방식의 실례와 종류(1912~1916년 조사)

(A)논농사

작부

방식

토지

이용률

첫해

여름 겨울

둘째 해

여름 겨울

셋째 해

여름 겨울

넷째 해

여름 겨울

다섯째 해

여름 겨울

작부방식

의 종류

1.휴한식

1/2

2/4

3/5

4/5

50

50

60

80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묵힘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묵힘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논벼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1

1

1

1

2.연작식

1/1

100

논벼 묵힘

 

 

 

 

7

3.윤재식

2/2

3/3

4/4

5/5

100

100

100

100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왕골 묵힘

왕골 묵힘

왕골 묵힘

왕골 묵힘

 

소귀나물 묵힘

왕골 묵힘

왕골 묵힘

 

 

왕골 묵힘

묵힘 물미나리

 

 

 

묵힘 물미나리

6

7

8

7

4.조합식

3/1

200

논벼 칠도린七島藺1)

 

 

 

 

1

 

 

 

 

 

 

 

 

40

(B)논밭 번갈아 짓기

작부

방식

토지

이용률

첫해

여름 겨울

둘째 해

여름 겨울

셋째 해

여름 겨울

넷째 해

여름 겨울

다섯째 해

여름 겨울

작부방식

의 종류

1.휴한식

3/5

3/4

4/5

60

75

80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봄보리

묵힘 봄보리

묵힘 봄보리

묵힘 봄보리

콩 묵힘

묵힘 봄보리

 

묵힘 봄보리

묵힘 묵힘

 

묵힘 묵힘

1

1

1

2.윤재식

2/2

3/3

4/4

5/5

100

100

100

100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조 묵힘

피 묵힘

논벼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조 묵힘

6

4

4

9

3.조합식

6/5

5/4

4/3

7/5

3/2

6/4

8/5

5/3

7/4

2/1

4/2

6/3

8/4

10/5

120

125

133

140

150

150

160

167

175

200

200

200

200

200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묵힘

논벼 보리

논벼 보리

논벼 봄보리

논벼 묵힘

논벼 보리

논벼 쌀보리

논벼 보리

논벼 보리

논벼 보리

논벼 보리

논벼 보리

논벼 묵힘

논벼 묵힘

수수 봄보리

논벼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논벼 봄보리

논벼 보리

논벼 보리

 

논벼 밀

논벼 밀

논벼 보리

풋베기보리·논벼 보리

논벼 묵힘

논벼 봄보리

콩 묵힘

풋베기보리·논벼 보리

 

조 봄보리

조·수수 봄보리

논벼 묵힘

풋베기콩·논벼 쌀보리

 

 

논벼 밀

논벼 밀

논벼 보리

조·팥 봄보리

콩 묵힘

 

논벼 묵힘

 

보리 묵힘

콩·조 봄보리

 

풋베기콩·논벼 묵힘

 

 

 

논벼 밀

풋베기보리·논벼 보리

콩 묵힘

 

 

논벼 묵힘

 

 

콩·조 묵힘

 

 

 

 

 

 

논벼 보리

3

4

12

1

7

7

2

7

4

10

3

4

6

3

 

 

 

 

 

 

 

 

99

(C)밭농사

작부

방식

토지

이용률

첫해

여름 겨울

둘째 해

여름 겨울

셋째 해

여름 겨울

넷째 해

여름 겨울

다섯째 해

여름 겨울

작부방식

의 종류

1.휴한식

1/5

1/4

1/3

2/5

1/2

2/4

3/5

2/3

3/4

4/5

20

25

33

40

50

50

60

67

75

80

밭벼 묵힘

감자 묵힘

조 묵힘

조 묵힘

메밀 묵힘

조 묵힘

조 묵힘

조 묵힘콩 묵힘

조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콩 묵힘

묵힘 묵힘

조 묵힘

옥수수 묵힘

묵힘 묵힘

담배 묵힘

팥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팥 묵힘

콩 묵힘

밀 묵힘

조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묵힘

 

 

콩 묵힘

5

1

1

10

1

1

10

5

1

12

2.연작식(섞어짓기·이어짓기)

1/1

1/1

100

100

밭벼 묵힘

밭벼·조 묵힘

 

 

 

 

 

29

247

3.윤재식

2/2

3/3

4/4

5/5

100

100

100

100

조 묵힘

조 묵힘

조 묵힘

조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팥 묵힘

 

메밀 묵힘

조 묵힘

조 묵힘

 

 

팥 묵힘

팥 묵힘

 

 

 

콩 묵힘

116

122

68

15

4.조합식

6/5

5/4

4/3

7/5

3/2

6/4

5/3

7/4

9/5

2/1

4/2

6/3

8/4

10/5

120

125

133

140

150

150

167

175

180

200

200

200

200

200

조 묵힘

조 묵힘

조·콩 밀

조·팥 밀

조 밀

조 보리

조 보리

고구마 쌀보리

콩 밀

   보리

   보리

   보리

   보리

밭벼 보리

콩 보리

콩 묵힘

팥·녹두·메밀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콩 보리

고구마 묵힘

팥 보리

조 보리

콩 보리

콩 보리

콩 밀

조 묵힘

조 밀

수수 묵힘

수수·콩 밀

 

조 밀

들깨 묵힘

목화 쌀보리

콩 묵힘

 

목화 보리

콩 보리

콩 밀

피 묵힘

팥 묵힘

 

콩 묵힘

 

콩 묵힘

 

목화 쌀보리

메밀 보리

 

 

목화

담배 보리

콩 보리

조 묵힘

 

 

콩 묵힘

 

 

 

 

팥 밀

 

 

 

담배

팥 보리

3

17

62

4

86

18

13

3

2

76

50

27

14

1

 

 

 

 

 

 

 

 

1020



 

방식 수

종류 수

(A)논농사

10

40

(B)논밭 번갈아 짓기

21

99

(C)밭농사

30

1020

합계

61

1159


1) 농학박사. 1906년 설치된 권업모범장의 초대 장장.


2) 손종 황제 때 농무국장.


3) 일본 농상무 기사.


4) 농사시험장 기사. 저서에 ?토양생성론?(1921)이 있다.


5) 아욱과의 한해살이풀. 줄기는 높이가 1.5m 정도이며, 잎은 어긋나고 둥근 모양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8~9월에 노란 오판화가 줄기 끝의 잎겨드랑이에서 피고, 열매는 삭과蒴果를 맺는다. 줄기로 끈과 마대를 만들고, 씨는 한약재로 쓴다. 인도가 원산지로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6) 피나뭇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1m 정도이며, 잎은 어긋나고 긴 달걀 모양이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노란 꽃이 5~6개씩 모여 피고, 열매는 삭과로 10월에 익는다. 줄기는 황저포를 만드는 데 쓴다. 한국의 경상북도 안동, 열대 지방 등지에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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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의 작부방식 발달사


조선의 작물 작부방식의 발달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려면, 농업이나 농업경영 방식이 발달한 자취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농업경영 방식의 발달을 보려면, 그 배경이 되는 조선 민족의 구성이나 지역적 분포 또는 조선 사회 발달의 단계까지 탐구하여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문제를 간단하게라도 설명하는 것이 필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두세 문헌을 인용해 조선 사회 또는 조선의 농업 변천의 개요를 기술하고, 각 시대의 농업경영 방식이나 작부방식의 발달 상태를 고찰하고, 이것이 현대에 이르는 연혁을 매우 대략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조선에서는 석기시대 때부터 인류가 생활한 것이 확실하여, 각지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당시 인류가 과연 농업을 영위했는지, 만약 농경을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작물을 길렀는지는 지금까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석기시대에는 아마 수렵을 주로 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며, 만약 농업을 했더라도 매우 유치했을 것이다.

최근 함경북도 회령 부근이나 평양 부근에서 맷돌(摺石)이라고 하는 것이 석기시대의 유물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조나 피 등과 같은 작은 알의 곡물 종류를 찧거나 팥을 가루 내는 등에 썼을 것이다. 평양박물관에도 있지만, 이집트의 밀을 찧고 가루 내는 도구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석기시대의 인류가 이들 작물을 먹었음이 분명하고, 또는 이들 작물을 어느 정도 심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석기시대의 인류는 그 뒤 몽고 서쪽 지방에서 이동해 온 우랄알타이족에게 쫓겨났고, 현재의 조선 민족은 아마 이들 종족의 혼혈을 주체로 해, 그 뒤 몇 번에 걸쳐 대륙에서 이동해 온 한족漢族이나 바다를 건너서 일본 민족과 왕래하며 혼혈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는 대체로 수렵시대부터 방목시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농경시대로 들어갔거나, 또는 어떤 특수한 관계에 따라 돌발적으로 농업시대가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또 농업의 기원과 발달도, 그 지리적 관계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고, 긴 교통로와 교통의 불편함을 떠올릴 때 이들 근접한 민족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족이 황하 유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여러 학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황하의 유역을 형성하는 황산黃山은 산해관에서 요동 반도를 지나서 북으로는 봉천奉天에서 철령鐵嶺의 북방까지 이어지고, 동으로는 조선의 서해안에 맞닿아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당초 황하 지역에 거주하던 원시민족이 인구의 증가나 다른 이유로 이주를 시작하여, 성질이 같은 땅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천 년 뒤, 마침내 우리 조선 반도에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우리 일본 민족도 또 신라시대 이전에 이미 남선 지방에 왕래하고 교통하며 반도의 농업을 발달시키는 데 공헌한 점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단군시대는 전설시대라고 하지만, 이 시대에 이미 당시의 민족은 쑥과 마늘(또는 산달래)를 알았고, 나라의 사람들은 조를 먹고 삼베를 입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단군이 상상의 인물이란 건 부정할 필요도 없지만, 옛적에 이미 일부는 농경시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뒤 기자가 기원전 1122년(지금에서 3000년 전) 한 무제武帝 시대에 조선에 봉해졌을 때, 그 민족에게 예의禮儀, 전잠田蠶, 직작織作을 가르치고, 또 그 국민은 음식에 변두籩豆를 먹었다는 것이 ?한서漢書?에 보이기 때문에, 조선 반도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됐을 때 이미 농경시대에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조선 기자 시대(기원전 1122~195) 927년 동안. 다음에 이른바 위만시대가 되어, 기원전 194~109년에 잠시 위만의 조선시대가 출현했다. 하지만 겨우 3세대 85년으로서, 한漢나라는 위만의 조선을 멸하여 한의 식민지로 만들어 낙랑樂浪, 현토玄兎, 진번眞蕃, 임둔臨屯의 4군을 설치했다. 오늘날 보는 평양 부근의 이른바 낙랑의 유적은 당시 낙랑시대의 유물이다. 그 뒤 여러 변동이 있었고, 이윽고 기원전 82년에 한나라는 임둔, 진번 두 군을 퍠하고 현토군을 요동으로 옮겨서 조선에는 낙랑 한 군만 남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935년까지 약 1000년 동안 우리 서선 지방은 한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본국인 한나라에서는 이미 철제 쟁기를 쓰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당시 작물을 기르는 방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로 후위後魏 고양高陽태수 가사협賈思勰의 저서 ?제민요술齊民要術?(1300년 전의 책) 안에 한나라 때의 농학자 범승지氾勝之의 농사에서 인용한 부분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그 경작법은 상상 이상으로 집약적이어서 당시의 농업 문화가 얼마나 고도했는지 판명된다. 이러한 고도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 그 식민지였던 낙랑 부근의 농업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아마 쟁기도 수입했을 것이고 그밖에 철제 낫 등도 썼을 테고, 농업은 급속하게 발전했으리라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낙랑의 농업 문화는 한나라의 농업 문화와 비슷하게 밭농사를 주체로 하는 문화였음이 분명한데, 최근 낙랑의 유적에서 볍씨가 출토되었지만 과연 벼농사가 논벼인지 밭벼인지도 의문이다. 가령 논벼라 해도, 그 재배는 일반적이지 않고 주로 밭농사를 지었을 것이 틀림없다. 한편 남선 지방을 보면, 이른바 삼한시대에는 중남부 조선에 마한馬韓(경기, 충청, 황해), 변한弁韓(전라), 진한辰韓(경상)이 있었다. 강원도에는 예맥족濊貊族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당시 이들 나라의 농업 사정은 ?후한서後漢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보면

마한의 항에는, 마한은 “마소를 탈 줄 모른다. 5월 밭을 마치고, 귀신을 제사하고, 10월 농사일을 마치고, 또한 뒤에도 이와 같다”라고 한다.

변한(전라)은 “토지가 비옥하고 좋아서 오곡과 벼의 옮겨심기에 마땅하고, 누에와 뽕이 풍부하다”라고 한다.

진한(경상)은 “누에와 뽕을 알고 비단을 짠다. 마소에 멍에를 메운다”라고 한다.

예맥족(강원도)는 “삼을 심을 줄 알고 누에를 길러 무명을 만든다. 과하마가 있다”라 한다.

당시 이미 집짐승으로 마소가 있고, 논농사나 밭작물을 활발히 농사지어 오곡을 기르고, 누에치기와 길쌈도 행해졌음이 분명하다.


삼국시대

이리하여 다음에 나타난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이른바 삼국시대에는 농업이 더욱더 진보하여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삼국 각각의 연대 구분(오오하라 도시타케大原利武,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1929년>)을 들면,

신라(경주慶州) 기원전 59년~935년  994년

고구려(동명왕東明王) 기원전 37년~668년  705년

백제(온조왕溫祚王) 기원전 18년~663년  681년

(후백제) 900~936년  36년

이들 시대는 전설시대에서 이른바 역사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 등의 문헌이 있어 당시의 상황이 명료하다. 이들 문헌에서 농업에 관계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조금 설명을 덧붙이려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구수왕 9년(222년) 조에 “봄 3월, 남택南澤에서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했다.” 또 「신라본기」 일성왕逸聖王 11년(144년)에 “봄 2월,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을거리는 백성의 하늘이다. 모든 주군의 제방을 수리하고, 논밭을 널리 개간하라고 영을 내렸다.” 또한 「신라본기」 눌지왕訥祗王 13년(429년)에는 “새로 시제矢堤를 쌓았는데, 길이가 2170보步이다.” 법흥왕法興王 18년(501년) “봄 3월, 유사에게 영을 내려 제방을 수리했다”라고 한다. 당시 남선 지방의 농업 생산이 주로 벼농사였음이 분명하다. (맥류, 곧 밀의 기록도 여러 곳에 나옴). 낙랑 지방이 한나라 문화라 밭농사 문화였던 것과 대조하면 흥미롭다. 낙랑 시대에는 이미 소를 농경에 썼다고 추정되는데, 남선 지방에서는 신라의 임금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이 처음으로 마소 부리는 법을 가르치고,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1400년 전)이 처음으로 소갈이를 썼다고 한다.

또한 200~300년 무렵 백제에서 처음으로 호미를 썼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백남운白南雲1)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이상의 단편적인 기록으로 상상하면, 신라 초기까지는 농경 방법도 차츰 소갈이를 시작할 정도로 일반적으로는 경작 기술이 매우 낮은 수준이고, 단위면적의 수익 같은 경우도 오늘날에 비교하여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그 작부방식은 지금의 화전민의 경작법처럼 휴한식을 주로 하여 집터 부근을 겨우 파헤쳐 여기에 씨앗을 심고, 1~2년 뒤에 땅이 척박해지고 잡풀이 무성해지면 다른 곳에서 농사짓는 형태였을 것인데, 철기의 사용과 소갈이 법의 수입은 농경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매우 적어서 그 토지이용은 뚜렷하게 낮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벼농사에 대해서 보아도 물잡이논에 흩뿌리는 식이라 뒷그루 맥류 등은 아마 아직 심지 않았을 것이고, 거름도 아직 주지 않았을 것이나, 밭에는 틀림없이 맥류를 심었으나 지금처럼 1년 2작이나 2년 3작식의 작부방식은 그다지 많지 았았을 것이다. 그 경종법도 현재에 비하여 매우 조방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흥성했을 때부터 말기에 걸쳐서 토지이용은 꽤 진보하여, 휴한식에서 윤재식으로 나아가고, 조합식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이리하여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토지이용은 급격하게 진전되어 버려 놓은 밭도 경작하도록 장려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광종光宗 24년(973년) 12월 무렵에 “묵정밭을 일군 사람은, 사전私田은 그에게 첫해 거둔 것을 모두 주고 다음해 처음으로 밭주인과 반씩 나누게 하고, 공전公田은 3년에 한하여 모두 주고 4년째에 처음으로 법에 따라 조세를 거두라”고 했다. 묵정밭이란 한 번 일궜던 밭이고 그 뒤 버려진 이른바 폐경지廢耕地이다. 이처럼 버려진 밭이 일반에 존재했다는 것은 작부방식에서 볼 때는 휴한식이 여전히 많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문종文宗 8년(1054년) 3월 무렵에, “무릇 그 밭의 품등은 묵히지 않은 밭(不易田)을 상上으로 치고, 한 번 묵힌 밭(一易田)을 중中으로 치고, 두 번 묵힌 밭(兩易田)을 하下로 친다. 묵히지 않은 산밭 1결은 평전平田 1결에 준하고, 한 번 묵힌 밭 2결은 평전 1결에 준하고, 두 번 묵힌 밭 3결은 평전 1결에 준한다.” 곧 당시 묵히지 않은 밭은 1/1작 이상의 농사땅이고, 한 번 묵힌 밭은 1/2, 두 번 묵힌 밭은 2/3작식 작부방식일 것이다. 이처럼 휴한식이 꽤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경작을 장려한 이유임을 알 수 있다.

또 백남운 씨(p.147)에 의하면, 성종成宗 11년(992년) 공전의 조세에 관한 판정에 논과 밭을 명확하게 구별하며, 각각 상중하의 3등급제에 따라 징세액이 명기되어 있다. (주. ?고려사高麗史? 권2, 태조太祖 26년 4월 조) 백남운 씨에 따르면, “판범전품判凡田品” 운운한 것은 결코 일반적인 토지 등급제를 처음으로 정한 것이 아니고, 비탈밭, 곧 산밭에 신규 등급제를 적용하겠다고 법적으로 확인한 일이다. 그래서 그 산밭을 2등급으로 규정한 것은 그 경작도耕作度에 기초한 것이다. 곧 해마다 경작하는 묵히지 않는 상전上田, 1년 묵해야 하는 중전中田, 2년 묵혀야 하는 하전下田 등이다. 그 휴경은 물론 폐경지의 땅심을 회복시키려는 자연적 시비법일 테지만, 이런 휴경에 따라 전품을 구별하는 것은 ?전한서前漢書?에 있는 “해마다 경종하는 곳은 묵히지 않는 상전이 되고, 1년 묵히는 곳은 한 번 묵히는 중전이 되고, 2년 묵히는 곳은 두 번 묵히는 하전이 된다”는 구절을 재현한 듯한데, 또한 그 대비의 표준이 되는 평전이란 길든밭을 말한다. “요컨대 산밭과 평전의 대비를 두고서 전품을 통일하고자 한 것은, 산밭에 새로이 전품제를 규정함과 함께, 공전제의 발전을 계획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백남운, p.148)

이상에 따라서 명확해졌듯이, 당시 윤재식 또는 휴한식이 많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서양의 이포식, 삼포식 등의 방식은 우리 조선에서는 이미 고려 초기, 곧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벌써 시험이 끝났다. 고려조는 이 휴한식을 할 수 있는 한 연작식이나 윤재식으로 진보시키려고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곧 농민은 조세의 중압이나 인구의 증가나 생활 정도의 향상, 당시 정부가 개간을 장려하여 논밭과 들을 개간하는 동시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묵히지 않는 밭이 늘어나도록 꾀하여 묵정밭의 방지책을 세웠음을 다음 인용으로도 알 수 있다.

예종睿宗 6년(1111년) 8월 조에, “3년 이상된 묵정밭을 일구면 2년 동안 거둔 것은 전호佃戶(농사지은 사람)에게 모두 주고 셋째 해는 땅주인과 반씩 나누고, 2년의 묵정밭은 4등분하여 1/4은 땅주인, 3/4은 전호가 갖는다. 1년 묵힌 밭은 3등분하여 1/3은 땅주인이 2/3는 전호가 갖는다”라고 했다. 곧 묵힌 밭을 농사지으면, 묵힌 햇수가 긴 밭일수록 조세 부담을 줄여서 최대한 토지를 이용하게 기하는 것이 명료하게 판명된다. 이렇게 밭을 묵히지 않도록 장려하여 이윽고 길든밭이 늘어나고 2년 2작, 3년 3작 등의 윤재식에서 차츰 2년 3작이나 1년 2작의 조합식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고려시대에는 새로운 각종 농작물의 수입과 더불어 새로운 작부방식이 고안되어 토지이용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곧 ?고려도경高麗圖經?(1124년)에 따르면, “나라의 땅이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가파르고 험하며 평지가 적다. 그러므로 농토가 산간에 많은데, 그 지형이 울퉁불퉁하여 갈고 일구기 힘들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층계 같다. 고려에서는 감히 사전私田을 가질 수 없다”라고 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은 송나라의 선화宣和 원년(고려 인종 2년)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는 고려가 융성할 때 농사짓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산간지대의 밭농사 형태로서 그 지형에 따라 밭을 일구는 사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조 충선왕忠宣王 2년 11월 조(약 600년 전)에는, “재추宰樞2)에서 의논해 탐방사探訪使를 모든 도에 보내 세법을 다시 정해야 한다. 혹 말하길, 지금 군현의 논밭은 많이 일구었기에, 마땅히 밭을 헤아려 부세를 늘려서 나라 살림에 덧붙여야 한다고 운운했다”고 나온다. 당시 이미 묵히는 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음을 이로써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고려 말기 공양왕恭讓王(527년 전) 시대의 농사땅 넓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실전實田

황원전荒遠田

황원전 %

경기

16,1755결

8387결

5

6도 합계

49,1342결

16,6645결

25

총계

65,3097결

17,5020결

21

포에서 실전의 1결은 황원전의 1결에 비하여 적은 넓이이기에 황원전의 비율은 그 퍼센트보다 커야 하지만, 지금 실전을 묵히지 않는 밭이라 보고 황원전을 묵히는 밭이라 보면, 당시 이미 경기 지역에서는 20뙈기의 밭에서 겨우 1뙈기만 묵혔다. 곧 토지이용율은 95%가 되고, 6도 합계에서는 황원전은 1/4이고 토지이용율은 75%에 해당한다. 이리하여 전국적으로 보면 토지이용율은 79%다.

이 토지이용율의 계산은 실전의 토지이용율을 100%라 간주하는데, 실제로는 당시 이미 2년 3작이나 1년 2작이 성행했다는 것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設?의 작부방식을 보아도 명확하기 때문에 토지이용율도 아마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100% 이상에 도달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구가 더욱더 늘고 농사땅이 차츰 개간되어 여러 새로운 작물, 예를 들면 목화, 담배, 고구마, 고추 등 여러 작물이 새로이 조선 반도에 수입되거나 또는 고려시대에 들어왔던 것이 급격하게 각지로 전파되어 농민이 이것을 채용해 그들이 기르는 작물에 편입하는데 이르러서, 작부방식은 복잡해지고, 집약도는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조선 태종太宗 원년(지금으로부터 515년 전) 조에 “근래 사람들이 모여서 논밭을 일군다. 마땅히 타량打量을 더하여 공부貢賦를 정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고려시대의 한 번 묵히는 밭 또는 두 번 묵히는 밭이 대부분 남지 않아 1년 1작이나 묵히지 않는 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시 주요 작물은 무엇이었는지는 조선 태종의 친경전親耕田에 심었던 작물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 곧 조선 초기에 수도는 지금의 개성이었는데, 당시 개성에서 20리里(지금의 8㎞) 떨어진 곳에 서적전西籍田3)을 두고, 동쪽으로 10리(지금의 4㎞) 떨어진 곳에 동적전東籍田4)을 설치하고서 이것을 공전公田으로 하고, 따로 임금이 스스로 농사지을 수 있는 이른바 친경전을 설치하여 해마다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고 친경하는 의식을 행했는데, 그때 이러한 적전과 친경전에서 기른 작물을 들면 다음과 같다.

동·서적전 : 논벼, 기장, 수수, 차조, 보리, 밀, 콩, 팥, 녹두, 옥수수, 가시연(董茨), 봄보리

친경전은 여드레갈이이고, 여기에는 이른바 구곡九穀을 길렀다. 당시 구곡은 논벼, 조, 기장, 피, 옥수수, 콩, 팥, 보리, 밀이다.

이로써 볼 때, 당시의 주요 식량작물이 대략 지금의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활발히 맥류 농사를 장려한 것은 태종 9년 조에 “동북면의 기아에 왕이 말하길, 동북의 백성은 밀·보리를 심지 아니하니, 비록 보리가 익을 때가 되어도 반드시 진대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이제부터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절기에 따라 밀·보리를 심도록 권장케 하라”고 나온다. 당시 동북면, 곧 현재의 함경도에는 보리를 심지 않아서 봄보리와 가을보리를 기르도록 장려하고 흉작에 대비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밀·보리농사를 장려한 것은 곧 토지이용을 한층 증진하여 작부방식이 1년 1작에서 2년 3작으로 나아간 것을 뜻한다. 현재, 함경남북도의 바닷가 지방에서 봄보리를 편입해 일반적으로 2년 3작식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매우 흥미롭다.

다음에 세종(499년 전) 7년 조에 “임금이 홍제원洪濟院·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들(加乙頭)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는 길에 밀·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임금이 흔연히 기쁜 빛을 띠었다”라고 나온다. 이 세종 임금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걸출한 임금이다. 임금이 교회에 살찐 말을 타고 밀·보리가 왕성하게 자라는 5~6월의 맑은 날에 천천히 가며 말고삐를 잡고서 기분이 좋아 기쁜 빛을 띠었다는 참으로 세종 임금의 기분을 잘 표현한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이다.

이 세종 임금은 수없이 많은 사적을 남겼는데, 특히 농업 방면에서 빠트릴 수 없는 농서를 편찬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한 것이다. 곧 세종 11년에 각지의 모범 농가를 모아서 ?농사직설?이란 농서를 편찬해 안팎에 배포했다.

이 ?농사직설?에서는 씨를 고르는 법부터 농사땅의 이용, 곧 밭, 척박한 밭, 풀밭의 이용과 그 방법을 설명하고, 또 황무지를 변별해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작물에는 삼, 벼, 조, 피, 콩, 팥, 녹두, 밀·보리, 참깨, 메밀 등을 기르는 법, 거두기 등과 다른 작업까지 상세히 기술한다. 그 기술에서 보면, 지금의 농사법과 거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집약된 작부방식을 거론하고 있다. 그 작부방식은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주) 목화를 기르는 법을 거론하는 ?농사직설?이 있는데, 당시 아직 목화는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농사직설?을 다시 찍을 때 덧붙인 것이다.

성종成宗 원년(446년 전) 조에는 “밀·보리 씨앗은 미리 비축하고, 메밀은 때에 따라 농사짓도록 권해 구황에 대비하라고 하셨다”라고 한다. 또 24년 조에 “늘 농사짓는 곳을 정전正田이라 부르고, 혹은 농사짓고 혹은 묵히는 곳을 속전續田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 정전이라 부르는 곳에서 지품地品이 척박한데 곡식 농사짓는 곳, 또 속전이 기름져 배가 나면 수령은 척박함을 기준으로 관찰사에게 보고해 개정하라”고 한다. 여기에서 늘 농사짓는 밭은 정전이고, 토지이용도에서 보면 1년 1작 이상이다. 속전이란 혹은 묵히고 혹은 농사짓는 곳으로 휴한식에 따르고 토지이용은 1년 1작 이하다. 곧 당시 아직 휴한식의 작부방식이 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후대인 인조仁祖(292년) 시대가 되면 속전, 곧 묵히는 밭이란 말을 쓰지 않고, 황무전荒蕪田과 기경전起耕田을 구별도 않으며 보통의 밭 종류에는 무논, 밭, 습한 밭, 텃밭, 부대밭으로 구별한다. 이 당시 부대밭에는 휴한식이 행해졌겠지만, 일반 농사땅은 이미 1년 1작 이상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는 불역전不易田, 일역전一易田, 양역전兩易田이라든지 진전, 속전, 정전 등의 용어가 확 줄어들었다.


논벼 모내기 금지령

한편 인구가 더욱 늘어났는데, 이에 비해 농사땅의 생산물이 그와 비례하여 늘지 않았기 때문인지 농민은 이전의 논벼를 곧뿌림해 기르다가 활발히 모내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논벼의 모내기는 세종 시대(500년 전)에도 이미 경상도의 매우 일부 지방에서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대부분 곧뿌림했다고 생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 곧 임진왜란 등으로 눈에 띄게 혼란해진 동시에 농업에서도 변화가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농가에서는 이전의 물잡이논에 곧뿌림하는 방법에서 천둥지기에 모내기하는 방법을 활발히 시도했지만 수리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기에, 이 논벼 모내기는 매우 위험스러웠다. 숙종肅宗 24년(241년 전) 조에는 “논벼 모내기의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헌종憲宗 4년(81년 전)에도 다시 벼 모내기의 금령을 내린다.

현재 벼농사, 특히 시정始政 이후 벼농사의 모내기가 가장 안전하고 다수확을 올리는 재배법이 되어 있는 현재로부터 당시 벼농사의 상태를 상상하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1) 백남운(1895~1974)은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수원 고등농업학교을 거쳐 일본의 동경대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25∼1938년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며 1933년 한국의 원시·고대 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사회경제사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발간하고, 1937년에는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을 발간했다.


2) 고려 시대에 둔 재부宰府와 중추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3) 본래 고려시대에 설치된 교채공전郊采公田으로, 개성의 동남문인 보정문保定門 밖 20리에 있으며 땅이 기름지기로 이름났다. 규모는 태종 때 약 300결이었으나, 20여 년 뒤인 세종 때는 70결만 남았다가, 조선 후기의 어느 시기에는 66결 정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수확한 곡식은 종묘사직 등의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종묘의 천신薦新에 쓰이다가, 정조 때부터 호조에 회부하여 적전을 유지 관리하는 비용으로 썼다.


4) 도성 10리 밖에 있었고, 개성 교외에 설치한 서적전西籍田에 대칭하여 부른 이름이다. 규모는 100결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필분각苾芬閣이라는 관아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국왕이 직접 농사짓는 땅인 친경전親耕田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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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 이 책 덕분에 공부도 많이 했고, 고생도 참 많이 했다.

일단 오늘로서 초벌 번역을 마쳤는데, 기분이 찜찜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이걸 이대로 묵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이걸 보려고 지나온 시간을 따지니, 어느 덧 5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난 솔직히 4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한 것까지 따지니 훨씬 오래되었더라. 10년은 가까이된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처음 아무 생각 없이 한글 파일을 만들어 놓은 시점까지 따지면 말이다.

그걸 오늘에서야 일부라도 마쳤다.

너무 기분이 좋고, 너무 기쁘다.

아... 시간은 이렇게 지나는구나.

이렇게 한 점을 찍기까지 함께 있어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

한때는 여기에 미쳐서 독수공방하게까지 만들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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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농장의 주인 시마타니 야소야는 원래 주조업자였다.

조선에는 청주의 원료인 값싼 쌀을 찾아 1903년 발산리 인근의 땅을 사들이며 들어왔다.

이 농장 사무소가 현재 개정동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 자리이다.

초등학교의 넓은 운동장은 당시 벼를 말리던 곳으로, 지금도 운동장의 흙을 파면 바닥에서 콘크리트가 나온다.

교사는 벼를 넣는 창고였고, 학교 건물 자리에는 농장 사무실과 살림집이 있었다.

 

학교 뒤편으로 가면 조선의 예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시마타니가 모아 놓은 석탑과 부도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귀중한 작품을 보관하려고 지은 콘크리트 금고가 있다.

이 금고에 달려 있는 두터운 철문은 미국에서 주문제작해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흉측한 모습이다.

남북 전쟁 때는 이 금고가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발산초등학교 전경. 이 운동장이 벼를 말리던 곳이었다.

 

 시마타니의 개인 금고. 한여름인데도 등골이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시마타니가 모아 놓은 석탑과 부도들. 여기에는 보물급 유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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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지장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주로 볍씨 육종을 위해 전라북도 이리(현 전라북도 익산시)에 설립된 농사시험장 분장이다.

1930년 1월 18일 총독부 훈령 제7호로 관제가 공포되고, 건설비 10만 6천여 원과 부지 4천여 평을 전라북도의 지주와 농업관계자, 유지 들의 기부로 마련해 1930년 2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7월 완공했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호남평야로 유명했는데, 일본인 지주들이 진출하면서 거기에다 개막은땅(간척지)이 급증한다. 이에 따라 소금기에 강한 품종을 육종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그와 더불어 생산량을 늘리고자 비료를 많이 줘도 쓰러지지 않고 병에 강한 품종을 육종해 산미증식이란 일제의 밑그림을 완성하고자 했다. 

 

 

 초창기 남선지장의 모습

 

특성 검사 및 품종을 보존하던 건물 

 

남선지장 앞에 설치한 기상관측시설 

 

 다카하시 노보루가 만난 남선지장 장 사토 겐길 씨. 일제 패망 때까지 남선지장에서 근무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아키타 농업단기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남선지장 건립비 (왼쪽부터 농사시험장 남선지장 간척출장소 건립기념비)

 

 남선지장의 후신 호남농업연구소의 모습. 저 너머 보이는 아파트 공사 현장이 우리 농업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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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지장南鮮支場 장長 사토 켄길佐藤健吉 씨와 옥구군 시마타니島谷 농장1)을 방문했다. 시마타니島谷 농장은 전북에서도 이름난 농장이다. 농장장이 없어서 사무원 이토伊藤 씨에게 들었다.

 

올해는 수확이 전혀 없다고 한다.

농장의 경영면적은 약 300만 평(1000町步)으로, 여느 해라면 소작료로 약 2만 섬의 수입을 얻는다. 나락 1섬에 18원이라면 36만 원의 수입이다. 그러나 올해는 30% 이하의 수확에 대해서는 소작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1%의 수입도 없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농장에서 소작인에게 빌려준 비료 값과 농업 자금을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화학비료 7~8만 원, 농업 자금 10만 원. 합계 17~18만 원.

이밖에 예탁 소가 100마리라고 한다.

 

이상으로 볼 때 여느 해의 소작 수입 36만 원은 300만 평의 땅값에 대해 10% 안팎의 이윤이지만, 비료 값과 농업 자금으로 농장에서 소작인에게 빌려준 17~18만 원의 금리는 아마 20~30%에 맞먹을 것이다. 농장에서는 혹시 이런 고리대 자본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 아닐까? 소작인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런 고리 자본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남선지장 장은 그러한 농장을 전북의 모범 농장이라고 부르니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자세한 것은 조사할 필요도 없다. 곧바로 소작인 1명에게 논농사에 대하여 들었다. 사무소 근처다.

 



옥구군 개정면開井面 여산리餘山里 이동부李東芙

 

이 소작인은 1904년 무렵부터 이 농장에 전속된 소작인이다.

농사땅은 논 9000평(3町步), 밭 300평(1反步, 집터)이다.

논벼의 됨새 : 1920년의 가뭄에는 25% 정도 거두어 한 단에 5~6홉(1평 5홉)을 거두었다고 한다. 1936년에는 도열병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1938년에는 후년에 보지 못할  최고 수확량을 보여 총 수확량이 120섬에 달했다고 한다. 올해는 가뭄으로 수확량이 전체 수확량으로 1가마니 정도일 것이라고 한다.

1920년, 1921년 무렵에 품종은 곡량도穀良都2)를 주로 하고, 화학비료‧콩깻묵을 300평에 2~3포 뿌려서 그때 수확량은 1평에 2~2.5되 정도였다고 한다. 지난해 풍년일 때는 1섬에 102㎏(170斤, 나락)으로써 1평에 1.8㎏(3斤) 정도를 얻었다. 품종은 은방주였고, 화학비료로는 300평에 8원(질소 9㎏<2.4貫>, 인산 3.75㎏<1貫>, 칼륨 3.75㎏<1貫>, 두엄 750㎏<200貫>).

 


 

논벼 기르는 방법

 

신작논シンヂャンノン, 3배미, 3750평, 상등, 집에서 지게 지고 한 번만 쉬는 거리에 있음.

마른논, 수확량(최고) 지난해 1평에 1.8㎏(3斤), 볏짚 1050단(1지게=15단), 최저는 40섬 정도(도열병 때문).

못자리 : 440평. 뿌리는 양 84㎏(140斤)

거름 : 1평에 과인산석회 33.75g(9匁), 황산암모늄과 깻묵의 배합비료 37.5g(10匁), 나뭇재 15지게, 두엄 40지게.

나뭇재와 두엄을 나르는 데 주인과 머슴, 놉 세 사람이 하루 걸린다. 머슴은 철머슴으로 100원을 준다. 놉은 하루 50전+세 끼+담배+술.

쟁기질 : 440평에 가을갈이 한 번과 봄갈이 두 번(도급). 한 번 쟁기질하는 데 한나절 걸린다. 쟁기질 값은 2원 20전.

벌레꾀임등 : 2주일, 등 하나를 하룻밤 켜는 데 석유 9㎖(5勺)를 쓴다. 석유는 농회農會3)에서 나눠준다. 산다면 1되(1.8ℓ)에 35전이다.

피사리 : 두 번으로 8명(놉 여자 30전+점심 한 끼) 포이드ポイド‧보르드ボルド액4)을 뿌린다. 보통 두 번(한 번에 300평의 못자리에 5전 정도 들고, 뿌리는 데는 약 30분 정도).

못자리 관리 : 날마다 2~3번 정도 돌아본다.

싹 말리기 : 씨뿌리고 싹이 난지 10일째에 한다. 모가 여느 해에 비해 잘 자랐다.

 

모내기철 : 6월 15일쯤

애벌갈이(옮겨 심을 논) : 모내기 40일 전에 쟁기질 도급을 준다. 애벌갈이에 3일 걸린다. 도급 품삯은 1평에 3리로서 쟁기질 깊이는 15㎝(5寸)다.

두벌갈이 : 1평에 4리로서 깊이 15㎝(5寸)다. 모내기 20일 전에 한다. 소

세벌갈이 : 1평에 1리. 이것은 농장에서 보조한다.

써레질 : 자기와 놉 남자 세 사람이 하루에 끝낸다. 놉 품삯은 60전+세 끼+담배. 하루에 하는 일은 일소로 900평(3段步).

거름주기 : 애벌갈이 전에 200지게의 두엄을 자신이 달구지로 나르는 데 이틀 걸린다. 화학비료는 모내기 전날, 배합비료 9가마니를 날라다 자기 혼자서 다 뿌리기까지 이틀 걸린다.

모찌기 : 모내기는 부녀단婦女團에서 모찌기부터 심는 것까지 여자 25명과 남자 3명이 하루 걸린다. 모를 나르는 데 놉 남자 두 사람과 자기. 모찌기부터 모내기까지는 1평에 4리다. 밥은 안 준다. 한 그루의 포기 수는 4~5포기, 그루 사이는 22.5×25.5㎝(7.5×8.5寸).

올해는 그때 논에 물대기가 어려워서 석유 발동기와 모터로 900평(3段步)에 물을 댔다. 경비는 농장에서 빌려줬는데 1원 50전(300평에)이다.

물을 댄 기간은 하루 밤낮으로, 자기가 그것을 감독했다. 여느 해라면 못자리부터 논에 물을 댈 때까지 물대기 비용으로 300평에 70전 정도 든다.

 

부녀단婦女團의 모내기

여자 25명, 남자 2명이 한 조가 되고. 남자는 여자 품삯보다 20% 더 받는다. 여자 한 사람이 하루에 보통 40~45전이다. 이 품삯은 농장에서 보증을 서 준다. 모내기철에 보통 여자 한 사람이 12~13일 정도 일한다.

소갈이 : 1마리에 2,4000평(8町步) 정도(두 거웃 갈이 넓이). 소갈이하는 양은 보통 하루에 900평(3段步)이다. 그래서 일 소 한 마리를 모내기철에 부리는 기간은 약 한 달 정도다.

나르기 : 거둘 때 달구지로 1080평(3反6畝)의 수확물을 나르는 데 소 1마리와 남자 2명이 끝낸다. 달구지의 품삯은 하루 3원이다. 수확철에 나르기 때문에 소를 부리는 기간은 대체로 10일 정도일 것 같다. 이 부근은 군산과 가까워서 달구지를 부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다.

보습을 쓰는 넓이 : 1개로 보통 3900평(1頂3反步) 정도는 쓴다.

소갈이 일꾼이 보통 농사땅을 가지고 있지 않는 고용된 사람이라면 농장에서 먹이와 보습을 빌려준다.

 

애벌매기 : 모내고 17일째, 남자 12명(고지대雇只隊5)만)이 한다. 한 사람에 85전(밥 안줌).

두벌매기 : 8일째, 남자 11명(고지대雇只隊), 한 사람에 85전.

세벌매기 : 15일째, 한 사람에 85전 고지대雇只隊.

올해의 강수량 : 7월 25일에 적은 양인 34㎜의 비가 왔다. 그 뒤 비가 오지 않다가 8월 25일에 16㎜가 왔다. 9월 8, 9, 10일에 10㎜, 8㎜, 6㎜의 비만 내린 것으로 보아 한 번도 없었던 가뭄과 만났다.

모 길이 : 현재 3.9~4.5㎝(1.3~1.5寸)다. 절반은 베다가 두엄을 만들었다. 절반을 베는 이 일에 남자 10명이 이틀 걸렸다. 베는 것이 오히려 보통 때보다 수고스럽다.

 

뒷갈이 보리 : 10월 8일, 쌀보리 4말

쟁기질 : 씨뿌리기 전날, 남자와 소, 2일 동안

도급을 주어 1평에 5리(싹갈이함)

남자 13명이 이틀 걸린다(고지대雇只隊 ?)

놉 남자, 1명에 85전(밥 안줌)

두엄 100지게, 나르는 품삯은 1원 50전.

뿌리는 데 남자 2명이 하루 걸린다.

화학비료 : 배합비료 300평(1反步)에 암모니아 26.25㎏(7貫)쯤, 과인산석회 22.5㎏(6貫), 칼륨 2.625㎏(700匁).

농장에서 빌려준다(합계 5원 정도임). 웃거름으로 황산암모늄 18.75㎏(5貫)쯤.

사이갈이‧김매기 : 한 번에 여자 20명 정도 있어야 한다.

거두는 때 : 6월 5일에서 10일쯤이다.

수확량(예상) : 12~13섬, 보릿짚 50지게. 1지게는 37.5~56.25㎏(10~15貫).


1) 지금은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자리.


2) 곡량도穀良都는 1925년 이전에 권업모범장에서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수입하여 대구 중원 농장에서 처음 기른 품종이다. 까락이 없고 중생종이다. 명충 피해가 많고, 키가 커서 쓰러지기 쉽다. 수확량이 매우 많고 적응 지역이 넓으며 재해 저항성이 높아서 60년대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기른 품종이다.


3) 조선농회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비영리단체였으나 1926년 각종 단체를 통합한 뒤 농사개량 지도사업을 추진했다. 초창기인 1910~1919년에는 권농모범장과 도 종묘장을 비롯하여 지주회‧권농회‧농우회‧권업회 등 관제 단체만 있었고, 이들 단체는 일본인 관리와 대지주가 주축이었다. 1920년대 산미증산계획과 조선농촌진흥운동의 실질적인 수행기관이었다. 주요 사업은 작물 적지 재배, 자급비료 증산, 농기구 개량, 유축농업 촉진, 농업에 관한 조사 및 연구, 소작쟁의 조정 및 중재, 농산가공 기술지도, 공동구입‧판매 사업 등이었으며, 이런 사업은 일제의 농업정책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1952년에 민간 조직체인 농업협동조합으로 바뀌었다.


4) 보르도액은 생석회에 황산구리 용액을 섞어 만든 액체 살균체.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포도의 병충해를 방제할 때 처음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5) 고지대雇只隊는 두레와 대조되는 집단 노동 형태로 히사마 겐이치久間健一의 보고(1935)에 보인다. 그는 전북 옥구를 비롯한 우리나라 농촌의 여러 곳에서 고지雇只 노동이 여러 농민들이 결집한 고지대雇只隊의 집단 노동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이 집단 노동 형태는 전통적 두레의 원리가 변형된 것으로 보았다.

고지雇只는 가난한 농민이 논 1마지기에 일정한 값을 정해 모내기부터 김매기까지 또는 수확까지 일 해주기로 하고 미리 받아쓰는 품삯이나 그 일을 말한다. 가난한 농민은 농번기가 되기 전에 식량이 떨어지면 자기의 노동력을 담보로 식량을 구할 수 있고, 부유한 농민은 농번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미리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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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군산 곡물검사소의 모습.

 

일본으로 수출하는 미곡을 검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1910년 이전부터 제기되어, 1909년 목포상업회의소가 독자적으로 수출하는 매조미쌀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총독부도 미곡을 검사해야 한다고 인정하여, 1913년 6월 각 도의 장관에게 통첩하여 지방행정기관이 감독하여 상업회의소 또는 곡물동업조합이 수이출 미곡을 검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부산, 진남포의 3개 상업회의소와 평택, 대구, 김천, 왜관, 경산, 청도의 곡물동업조합이 매조미쌀 검사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총독부의 미곡검사는 대일 미곡 수출의 확대와 더불어 계속 강화되었다.

그러나 검사가 통일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사가 끝난 미곡을 가지고 부정행위를 하거나 수송하다가 미곡이 손상되는 일이 발생되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시장에서 조선 쌀의 상품 가치가 떨어져, 조선총독부는 1932년 9월 24일 「조선곡물검사령」을 제정하여  1932년 10월부터 국영검사를 실시하였다. 새로 시작된 국영검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종전에 도지사의 권한에 따라 지방비로 실시하던 곡물 검사를 총독의 권한에 따라 전국 통일적인 검사로 전환하였다. 이를 위해 총독부는 1932년 9월 29일 「조선총독부 곡물검사소 관제」를 공포하고 서울에 곡물검사소 본소를 설치하고 인천, 군산, 목포, 부산, 진남포, 원산의 6개 항구에 지소를, 그리고 그 외 지역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② 종전에는 매조미쌀 또는 흰쌀을 도내에서 이동할 경우 검사가 필요 없었는데, 새로운 검사령에서는 총독이 지정하는 곳에서, 또는 지정하는 곳을 거쳐 반출할 경우 반드시 곡물검사소의 검사를 받도록 규정하였다.
  ③ 검사관할구역을 종전에는 행정구역에 따라 구분하여 총 12개 도명道名 기호를 사용하였으나, 국영검사제도에서는 쌀의 생산 상태, 거래상권지역 등을 고려하여 진남포, 인천, 군산, 목포, 부산, 원산의 각 항을 중심으로 전국을 6개 경제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검사미에는 각각 정해진 검사소 기호를 표기하도록 하였다.
  ④ 품질, 건조가 불량한 미곡, 생산연도가 다른 쌀을 혼합한 미곡, 또는 적미·돌·흙·피粺·청미靑米·사미死米 등이 규정을 초과한 미곡, 그 외 용량, 중량, 포장 등 기준 조건에 미달하는 미곡은 수이출을 금지하였다.
  ⑤ 종전에는 돌을 제거한 미곡에는 돌이 없다는 표시를 하여 그렇지 않은 미곡과 구별하였는데, 새로운 검사령에서는 이에 대해 더욱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여 돌이 섞여 있을 경우 수이출을 절대 금지하였다.
  ⑥ 매조미쌀은 1, 2, 3, 4, 5등급, 흰쌀은 1, 2등급으로 구분하고, 그 이하의 등급은 불합격으로 규정하여 불합격품의 수이출은 금지하였다.
  ⑦ 검사에 합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검사 후 일정 기간이 경과한 것, 또는 병충해, 기타 피해에 의한 손상·변질한 것, 포장이 손상된 것, 포장을 바꾼 것, 검사 증명 도장·검사기호 등이 없는 것 등은 다시 검사를 받도록 하였다.
  ⑧ 같은 지소, 같은 등급품이라도 종종 가격이 다른 것이 있어 검사등급, 검사소 기호 이외에 품종에 따른 특별표기를 더욱 확고히 실시하였다.


  한편 1934년 10월에는 「조선 인籾 검사규칙」을 제정하여 벼의 희망검사를 실시하였다. 벼 검사는 먼저 1년 동안의 희망검사로 벼 약 400만 가마에 대해 실시된 후, 1935년 8월 6일자로 「곡물검사령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강제검사로 전환되어 매조미쌀, 흰쌀과 마찬가지로 지정 지역을 통과하는 반출 벼를 검사하고, 그와 함께 두메에서는 지주의 벼 또는 소농의 공동 판매 벼 등에 대해서도 희망검사를 병행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미곡검사 강화로 품질, 조제, 포장 등이 크게 향상되어, 일본 시장에서 조선 쌀의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곡물검사의 강화로 인한 이익이 지주와 곡물상, 중매인 등에게 집중되고, 소작인에게는 오히려 미곡검사 규격에 적합한 소작미 요구 등의 부담만 전가되어 새로운 소작문제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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