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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군光州郡



전남 광주군 극락면極樂面 화정리花亭里 정길채鄭吉采

가족 : 자기(34), 아내(35), 맏아들(11), 둘째 아들(8), 셋째 아들(2), 머슴(25).

농사짓는 사람은 자신‧아내‧머슴으로 3명.


농사땅

 

1. 종장평(チョンヂャンピョン), 집터 앞, 1580평, 3배미, 20년 전부터 자작.

수확량 : 최저‧최고 17~22섬

화학비료는 7~8년 전부터 5가마니(암모니아)를 뿌리고, 두엄 70지게를 준다. 화학비료를 쓰기 전에는 두엄으로만 19섬 정도를 거두어들였다.

품종 : 5년 전부터 은방주, 그전에는 왜종倭種을 심었다.

보통 수확량은 나락 20섬, 볏짚 80지게(1지게 10단).

쌀보리 뒷갈이는 5~6년 전부터 했는데, 한 해씩 거르며 한다.

수확량 : 쌀보리 1마지기에 1섬(이 논은 7마지기), 보릿짚은 쌀보리 1섬에 4지게.

거름은 배합 8호(1마지기에 1가마니, 두엄 10지게)

웃거름으로 암모니아 1가마니를 1말5되지기(250평)에 물 20장군에 녹여서 7~8년 전부터 뿌리고 있다.

자운영 : 4년 전까지는 2~3년 동안 자운영을 길렀다.

수확량 : 1마지기에 40지게 정도 되는데, 논에 뿌린다.

뿌리는 양 : 쌀보리 ― 1마지기에 6되, 자운영 ― 1마지기에 3되.

 

 

 

2. 위 배안골(上のペアンコル), 오가는 데 곰방대 한 대 피울 약 1308m(12町) 거리로 지게로 1번 쉼, 900평, 자작(그러께부터), 600원에 사들임. 상등

올해

이듬해

쌀보리 사이짓기 목화

쌀보리 그루갈이 고구마

쌀보리 그루갈이 콩

쌀보리 그루갈이 콩

수확량 : 쌀보리 5섬, 보릿짚 40지게

        콩 1섬, 콩대 6~7지게

        목화(600평) 270㎏(450斤)(제철목화 210㎏<350斤>, 철늦은목화 60㎏<100斤>), 목화대 20지게.

3. 아래 배안골(下のペアンコル), 1308m(12町), 5년 전 사들임, 중등, 1000평.

고추 ― 고추 ― 고추 20평

쌀보리‧목화 ― 쌀보리‧콩, 수수 ― 쌀보리‧목화 680평

쌀보리‧콩(수수) ― 쌀보리‧목화 ― 쌀보리‧콩(수수) 300평

수확량 : 고추 8말, 목화 680평 ― 240㎏(400斤)(제철목화 180㎏<300斤>, 철늦은목화 60㎏<100斤>) 목화대 40지게, 콩 300평 ― 5말 콩대 4지게, 수수 ― 5말 수숫대 3지게, 쌀보리 ― 6섬(5~7섬) 보릿짚 60지게.

 

4. 남새밭 50평 : 마늘 10평, 파 5평, 시금치 15평, 상추 20평, 호박 2그루 그루갈이 배추 20평, 무 30평.

 

집짐승 : 돼지 1마리(2살), 닭 10마리

머슴 남자 한 사람(25), 한 해 40원.

놉 남자 한 해 20명, 여자 한 해 100명 정도.

놉 : 남자는 6월에 보리 벨 때와 모내기철, 여자는 7월에 밭에 김맬 때.

품삯 : 남자의 품삯(모내기철이나 다른 때도 같음) 30전+세 끼+담배 3전, 여자의 품삯 20전.

놉은 모두 마을 사람이다.

소갈이 품삯(도급)은 논 1마지기를 세 번 갈고 1.2원(쟁기는 가지고 옴). 밭은 1마지기를 한 번 갈고 70전. 밭갈이는 보리를 뿌릴 때만 하고, 목화와 콩은 쟁기질하지 않고 괭이로만 한다.

 

집터 150평, 그 가운데 마당 100평.

구들방

마루방1)

마루방

부엌

 

밤에는 광주에서 묵었다(26일 밤).

1939년 2월 27일 정오, 광주를 출발해 송정리松汀里를 떠나서 이리에 도착했다. 오후 3시(노구치 유우野口淸雄 씨와 함께) 도道 농사시험장(전북 농시)을 방문했다. 노사와野澤 농무과장, 나가이도모永友 기사를 만났다. 밤에는 이리농림의 사메지마鮫島 교장, 야마자키 카나메조山崎要助 씨, 리츠키栗木, 안동직安東直, 하찌原, 고구레木暮, 도무라戶村, 사토 켄길佐藤健吉 씨들과 회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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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실태 조사 장소와 날짜

(1939년 2월 26~28일)

순천 2월 26일 → 광주 2월 26~27일 → 이리 2월 27일 →익산 2월 28일

 

 

전남 순천군順天郡 (1939년 2월 26~28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풍덕리豊德里

이 마을은 61호. 농업 47호(자작 10호, 자소작 10호, 소작 27호), 날품 13호. 따로 담배 말리는 곳 1호가 있다.

우물 네 군데.

순천읍에서 약 1.09㎞(10町), 순천역까지 1.09㎞(10町)

이동 노동력 : 모내기철 이 마을에 오는 다른 마을 사람은 5명, 20일 정도. 곧 총인원 100명 정도 된다.

소는 11마리 정도.

농사짓는 규모 : 대농은 논 37~40마지기(2.7町) 밭 5마지기(1反7畝). 소농은 논 2~3마지기 밭 없음. 아예 농사짓지 않는 집도 10~15호 있다.

 

 

조사 농가 ― 황귀연黃貴連

가족 12명 : 아버지(61), 어머니(56), 자기(32), 아내(32), 맏아들(9), 둘째 아들(4), 맏딸(1), 동생(25, 일본에 있음), 제수씨(22), 둘째 동생(19, 역무원), 둘째 제수씨(19), 셋째 동생(16)


농사땅

1. 집앞논(チバムノン), 집터 옆, 800평, 2배미, 소작료 6/10 볏짚은 소작인 것.

수확량 : 1936년 나락 10섬, 볏짚, 품종 은방주銀坊主.

        1937년 나락 6섬

모내기 그루 수 : 18×21㎝(6×7寸) = 86그루

뒷갈이 : 쌀보리 2섬(뿌리는 양 1말 7되 5홉)

왕골 1평(소의 고삐 28.8m<12尋>를 만듦), 자운영 5평(뿌리는 양 5홉, 씨앗 값은 1섬에 85원)

보리 밑거름 : 과인산석회 1가마니, 두엄 40지게

웃거름 : 사람 똥오줌 60장군

2. 강신량(カンシンリャン), 654m(6町), 6마지기(1마지기 200평), 소작, 1배미.

한머리닥(ハンモリタク―지게 다리) : 지게에 한가득 싣고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

축축한 땅이기 때문에 뒷갈이를 하지 않는다. 그루 사이 21×24㎝(7×8寸)=64그루

못자리 150평, 뿌리는 양 3.5말(그 가운데 변경弁慶 2말, 은방주 1말 5되)

3. 오종평(オ―チョンピョン), 654m(6町), 500평, 자작, 1배미, 4년 전 430원에 사들임.

벼 뒷갈이 보리 400평‧자운영 100평.

4. 중오종(チュンオ―チョン), 1308m(12町), 440평, 자작, 1배미

논벼 은방주, 21×24㎝(7×8寸)=64그루

보리는 쌀보리.

5. 하오종(ハオチョン), 1962m(18町), 400평, 자작, 1배미, 품종 은방주, 21×24㎝(7×8寸).

쌀보리 뒷갈이.

6. 산배니(サンペニイ), 1962m(18町), 1200평, 소작, 1배미

앞갈이 벼, 뒷갈이 보리 500평, 못자리 300평(볍씨 5되).

7. 샛들(セッツル), 1962m(18町), 600평, 소작

벼 한그루짓기, 축축한 땅, 물잡이논.

8. 남지종 앞밭(ナムヂヂョンアッパ), 1308m(12町), 소작, 3마지기, 280평

정조定租 나락 1섬.

쌀보리 ― 콩(그루갈이) 140평

쌀보리 ― 목화(사이짓기) 140평. 280평에 배추‧무를 조금 짓는다.

쌀보리 ― 조, 들깨, 팥, 고추, 마늘, 녹두

농사짓는 방식

쌀보리‧콩 ― 쌀보리‧목화, 쌀보리‧목화 ― 쌀보리‧콩을 돌아가며 한다.


남새밭 : 집터 앞 약 40평, 소작료 나락 2말 5되

20일, 무 10평 가을배추 3평

봄배추 28평, 무 2평 ― 가을무 30평

상추, 시금치 7평

산림 : 3210평(1町7畝), 4㎞(1里) 남짓

작은 소나무 1.5m(5尺), 대나무 숲 없음.

소 1마리, 다른 집짐승 없음.

부업으로 무명, 집에서 쓰려고 한 해 5필을 짠다. 1필은 6m(20尺)다.

노동력 : 머슴, 계절머슴 없음.

한 해 놉 150명을 쓴다(모내기철 50~60일, 김매기철 50일, 벼베기철 3일).

모내기 품삯 : 남자 20명×세 끼+막걸리 20전+담배 5전

세 끼 ― 다섯 주발로 1되 5홉, 흰쌀 1되 32전(2주발은 놉이 집에 가지고 감).

때문에 남자의 품삯은 하루 93전 정도일 것 같다.

여자 30명×세 끼(5주발)…78전 정도 된다.

김매기철 품삯

남자 20명×한 끼+담배 5전+술 일정하지 않음

여자 김매기는 하지 않는다.

벼베기 품삯 : 남녀 모두 모내기철과 같다.

 

 

중오종논(チュンオ―チョン畓) 440평의 논벼 기르는 방법

 

앞갈이 쌀보리는 음력 5월 5일에 베어 거두고, 이튿날 쟁기질한다.

쟁기질은 자기가 한나절 걸려 하는데, 쟁기 말고도 삽 1개와 쇠스랑 1개를 쓴다. 쟁기질한 뒤 써린다.

쟁기질 방법 : 두그루짓기 하는 땅일 경우에는 ‘바타갈이(batagari)’를 한다. 바타갈이는 다른 이름으로 ‘타리갈이(tarigari)’ ‘익갈이(ikkari)’라고도 한다. 아래 그림처럼 보리의 두둑을 부순다.

 

 

 

한그루짓기 하는 땅을 쟁기질할 때는 아래와 같은 4가지 방법이 있다.

(1) 두둑갈이 ― 두둑 지으며 갈기 

(2) 게갈이(kekari) ― 째고 엎기

 

(3) 게갈이 ― 세 거웃 갈이     

(4) 네 거웃 갈이(펀펀하게 갈기)


거름내기 : 음력 4월 15일. 자기 혼자서 20지게를 나른다. 하루에 12번 나른다. 곧 나르는 데 약 이틀 걸린다.

땅고르기 : 쟁기질한 이삼 일 뒤, 물을 넣고서 써레를 끌어 삶는다. 자신과 소가 3시간.

두엄 뿌리기 : 땅고르기 전에 자기와 놉이 1시간 반에 뿌린다.

모내기철 : 음력 5월 13일쯤(자신은 음력 5월 8일부터 5월 20일쯤까지 끝냄).

모찌기 : 산배니논(サンペニイ畓) 못자리에서 8지게를 나른다. 모를 찌는 데 여자 두 사람(아내와 제수씨)이 아침 먹기 전에 4시간 걸리고, 남자 두 사람(자신과 동생)이 나르는 데 2시간 반 걸린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16세, 12세)이 못줄을 띄우고, 모내기 일꾼 한 사람이 붙어서 오후 5시에 모내기를 끝낸다(점심 때 50분 쉼).

그루 수 : 18×24㎝(6×8寸)=64그루, 모는 6~7포기.

화학비료(밑거름) : 개자리 바로 다음에 황산암모늄(硫安) 1/3가마니를 자기가 20분 정도에 뿌리기를 마친다.

논두렁은 지나다니지 않아도 낫으로 풀을 베어서 정리한다. 모내는 날 아침에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애벌매기 : 모내고 15일째 손으로, 자기 혼자서 한나절에 끝낸다.

두벌매기 : 5일 뒤, 자신과 놉 남자 한 사람이 오전에 3시간, 오후에 3시간 한다.

세벌매기 : 1주일 뒤, 자기 혼자서 손으로, 하루 반 걸린다(14시간).

네 번째 김매기 : 1주일 뒤, 자신이 손으로(13시간).

다섯 번째 김매기 : 10일 뒤, 자신이 손으로(13시간).

음력 8월 5일 피사리(이삭은 누렇게 되기 시작) 자기 혼자서 2번 한다. 3시간(피는 2단이고, 지름 15~18㎝<5~6寸>)

거두는 때 : 음력 8월 23일(음력 8월 25일~음력 9월 10일) 자신과 놉이 아침을 먹고 오후 4시까지 베기를 끝낸다. 땅에다 말리고 3일 뒤 작은 단으로 묶는다. 단 묶기는 아내와 제수씨가 이틀에, 한나절 걸려 단을 묶어서 쌓는다.

 쌓는 방법 : 이 마을은 아래 그림과 같다

 

 

 

자신과 맏아들 두 사람이 지게로 날라다 쌓기를 마친다.

1지게는 15단(1단 3.75㎏<1貫>쯤). 지난해는 1단에서 1되 5홉의 나락을 얻었다. 마당에 가지고 와서 쌓는다. 이것을 ‘비늘가리’라고 한다. 그 뜻은 비늘처럼 쌓는다는 뜻인데, 아래 그림과 같다. 보통은 ‘비늘가리’를 줄여서 ‘비늘’이라고 한다.

 

 

마당질 : 3일 뒤 나락을 떤다.

노동력 ― 아내‧어머니‧동생‧제수씨‧둘째 동생‧둘째 제수씨 6명이 저녁까지 떨기를 마치고 키 1개로 날려고르기를 하는데, 자신과 남자 놉 두 사람이 3시간 정도에 끝낸다.

나락 3섬 7말 5되, 쭉정이 3말.

삯방아 : 돈을 내고 발동기로 한다. 값은 나락 1섬을 찧는 데 흰쌀 1되 2홉 5작이다. 곧 흰쌀 4말 5되가 나오는 양에서 흰쌀 1되 2홉 5작을 낸다.

왕겨 3말, 쌀겨 1말 정도

나락 1섬 ― 16원, 왕겨 1가마니(5말들이) 4~6전(거름을 만듦), 쌀겨 1말 ― 10전(소 먹이).

흰쌀 1말 ― 3원 20전.

밥 : 하루에 흰쌀 5되다. 섞어 먹는 경우 흰쌀 2되 5홉, 보리쌀 2되 5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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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農法に学んだ農学者、高橋昇の生涯

『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が発行されました

2007년 6월,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한국에서 숨겨진 공로가 알려진 일본인」이란 기사로 소개된 카와다 히로시河田宏 씨의 책이, 2007년 12월 20일에 발행되었다.高橋昇~韓国で顕彰されている日本人
 

 

 

『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 농학자農学者・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高橋昇の生涯』(日本評論社)입니다。

 

오랜 세월 치밀한 취재와 한일 근대사연구에 따라서, 다카하시 노보루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훌륭히 그렸다.

 

「일본과는 다른 문화, 습관, 생활 형태를 내려다보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나와 있다. 점령한 일본인의 의식도 같은 것으로, 세계의 1등국이 되었단 사치로만 조선을 보았다. 이것으로는 무엇도 알 리 없다.」

 

책 속에서는, 먼저 그러한 일이 써 있었습니다。

 

구미에게는 비굴함、아시아에서는 오만함 欧米への卑屈さ、アジアへの傲慢さ
 

1919년 다카하시 노보루 씨는 조선총독부 농업시험장 기수技手로, 3・1 독립운동 직후의 조선에 건너왔다. 그래서 다카하시 노보루가 보고 들은 것을 축으로, 러일전쟁부터 경술국치 이후 10년쯤까지에 발행된 책에 나타난 조선인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뒤 다카하시 노보루는 2년 동안 구미欧米를 시찰하러 갔다. 거기서 적은 수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기에는 미국의 장점을 말하면서, 「모두 일본이 미치지 못한다. 나(高橋昇)도 지식을 계발하고, 일본을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장점에는 반드시 단점이 있다. 공덕심公徳心이 있어서 배일排日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도 재미 일본인은 미국의 장점만 말한다. 비굴하다」라고 써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15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탈아입구脱亜入欧=후진 지역인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열강의 하나가 되자는 소리가 커지고 나서, 50년 이상 지났습니다. 구미에게는 비굴한 속내에, 아시아에서는 오만합니다.

조선에 돌아와 마침내 다카하시 노보루의 「업적業績」이 쌓였습니다. 북으로는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함경북도부터 남으로는 제주도에 이르는, 조선 전역에 걸쳐서 200 남짓 농가를 찾아서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그 조사는 농법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조사 대상 가족의 아침저녁밥 등 생활전반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재삼姜在彦 교수도「잘도 이만큼 조사했다」라고 절찬 姜在彦教授も「よくこれだけ調べたものだ」と絶賛
 

지금까지 2년 3작이라는 조선의 독특한 작부방식을 명문화明文化한 것은, 다카하시 노보루 씨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종대왕 시대인 1429년에 공포한『농사직설農事直説』에 이미 써 있었다는 것을, 카와다 히로시河田宏 씨의 책에서 알았습니다.

일본보다 두드러지게 강수량이 적은 조선에는 조선에 맞는 작부방법이 있습니다. 여름작물의 두둑 사이(고랑)에 가을뿌림秋播해 보리를 기르는 등의 「사이짓기間作」와 자라는 시기가 같은 조粟와 피稗 등 2종 이상의 작물을 같은 땅에 기르는「섞어짓기混作」입니다.

「사이짓기間作」의 2년 3작 방법에서는 벼과 작물과 콩과 작물의 조합이 가장 많습니다. 자운영을 심는것은 콩과 식물이 거름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섞어짓기混作」의 장점은 가뭄이 일어나면 가뭄 피해에 강한 조를 남기고 피를 뽑고, 강수량이 많은 해에는 반대로 할 수 있단 점에 있습니다.

이러한 조사기록은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를 중심으로, 飯沼二郎 도켜대 명예교수, 노보루 씨의 부하였던 落合秀男 씨 들의 노력 덕에,『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으로 미래사未来社에서 199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292쪽, 무게 약 3kg의 큰 책입니다. 수원의 농촌진흥청에서 실물을 보았는데, 약 10만 엔이라고 합니다.

 

 
廣寒楼の玩月亭から戻る河田宏さん(撮影:塩川慶子)


 

출판까지의 경위는『아버지의 유고父の遺稿』(海鳥社・高橋甲四郎著)에 자세하게 써 있습니다.

이『아버지의 유고』의 책머리「출판에 부쳐出版に寄せて」에서, 飯沼二郎 씨가「『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출판을 추천한 분들 가운데, 특히 조선 근대사의 세계적 권위자 花園大学 文学部 객원교수 강재삼姜在彦 씨가 이 출판에 요즘 드문 효자의 뜻을 느꼈다고 쓴 데 감동했다」라고 써 있습니다.


그 강재삼 씨와 이전에 만났습니다만, 카와다 히로시 씨의『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을 읽고서 잘 이만큼 조사한 것이다와 매우 절찬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를 이끈 선배와 협력자의 존재도 써 있습니다. 큰일은 혼자서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한 당연한 일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카와다 씨의 노력과 재능의 결정은 인정되어「재단법인 한철문화재단韓哲文化財団」의 2007년의 조성기금수여자에 뽑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김용권 씨의 번역으로, 한국 동아일보사에서 한글판이 출판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더욱 다카하시 노보루의 일이 한국에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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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に残る農学者

「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
「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
は八女市立図書館にあります
지난해 끝무렵에 야메시八女市 출신의 농학자(고인)을 주인공으로한 기록문학이 출판되었다. 카와다 히로시河田宏가 지은 "조선의 온 땅을 걸었던 일본인朝鮮全土を歩いた日本人・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農学者 高橋昇の生涯"(이하 "다사하시 노보루의 생애")로서, 기록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西日本新聞1월 20일자). 이 책의 내용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 농업 개발에 생애를 바쳐 역사적인 대저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朝鮮半島の農法と農民"을 지은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 선생님의 평전입니다.

먼저 선생님의 약력을 간단히 적음.
1892년(明治 25) 12월, 야메군八女郡 上妻村 津江(현 야메시八女市)에서 아버지父 가케하시 이와지로梯岩次郎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上妻 소학교, 明善 중학교, 第七 고등학교(가고시마鹿児島), 東京帝大 농학부農学部 졸업(이 사이에 구로키마치黒木町의 다카하시高橋 집안의 양가가 됨). 1919년(大正 8)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에 기수技手로서 부임,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 미국, 독일에 유학, 귀국한 뒤 총독부 농사시험장 서선지장장(황해도 사리원) 1934년(昭和 9) 농학박사에, 1944년(昭和 19) 수원 본장 총무부장, 1945년(昭和 20) 패전, 한국 쪽의 간청을 받아 후진 지도를 위해 머물다 이듬해 5월에 귀국, 같은 해 7월 20일 후쿠시마마치福島町 혼마치本町의 친척 집에서 급사, 55세.
선생님이 조선에 머물 때 사진이 여러 장 남아 있습니다. 땅딸막한 체격에 ギョロ 눈、턱수염을 기른 위엄 안에도 어딘지 온정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천성은 조선시대의 부하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선생님은 스스로가 계획한 것은 철저히 이루려는 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저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농법과 농민")은 야메시립도서관에 있었습니다. B5쇄, 크기는 가로 27.5cm, 너비 20.5cm, 두께 7cm, 1292쪽으로 무게는 3kg, 출판사 미래사未来社, 가격 10만 엔의 두꺼운 책입니다. 저는 농학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책의 학술 가치를 도쿄대 명예교수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씨의 같은 책 '서문序文' 과 신문기사에서 찾아 발췌합니다.
"식민지란 상황의 조선에서는 일본의 뛰어난 농업기술을 위에서 농민에게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시험장의 기사技師 다카하시 노보루는 총독부의 지시와 다르게, 조선 농민이 예부터 해왔던 농법에 기반하여, 농업 지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시험장에서 일하던 26년 동안 짬을 내 조선인 농가를 한 집 한 집 찾아가서 농업 조사를 했다. 그 발자국은 조선의 온 땅에 나고, 그 조사 자료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원고지로 약 1,3000장, 사진 1500장, 지도류 260장 등) 패전하고 그 자료는 다카하시와 그 부하들이 고향인 야메시八女市에 가지고 돌아왔지만, 다카하시는 갑자기 죽는다. 그로부터 50년,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高橋甲四郎(야메시 津江)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출판된 것이 ?�농법과 농민?�이다. 그 논고는 지금에서는 매우 얻기 힘든 자료이고, 지금부터 이후의 한국 및 조선 농업의 진정한 근대화의 기초를 뚜렷하게 할 것이다”라고 영구적인 이 책의 가치를 적고 있다. 이 책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 김대중 씨와 북조선 국방위원장 김정일 씨에게 기증했고, 뒷날 두 나라에서 정중한 사례 편지가 도착했다.



‘삶의 방식’에 감명 「生き方」に感銘

 

다카하시 노보루 선생님의 서선지장장西鮮支場長 시대의 ‘삶의 방식’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에 따르면, 선생님이 서선지장장이 되었던 소화昭和 전기 무렵의 농사시험장 안에 젊은 기수들은 날마다 실험실 안의 일과 장의 시험試験에만 매달리고, 조선인 농가의 실태 조사 등은 “진흙 냄새가 나는 과학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카하시 선생님은 “조선의 농민들은 몇 백 년에 걸쳐서 고유한 환경 안에서 공부에 공부를 거듭하여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농법을 이룩해 왔습니다. 먼저 조선인 농가에 뛰어들어 그들에게서 농법을 겸허하게 배우는 것이 일의 첫 걸음입니다”라고 농학자로서 처음으로 현장 활동을 중시한 지도를 하도록 하고, 선생님 스스로도 실천했다. 선생님의 행동의 바탕에는,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인을 멸시하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하다”라는 강한 인도주의가 깔려 있었다. ?�다카하시 노보루의 생애?�에는 여러 군데에 서선지장西鮮支場 시대 부하들의 추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췌합니다.

“다카하시 지장장은 실험이든지 기획이든지가 생각나면, 낮이든 밤이든 갑자기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밤새 논의한다. 배가 고프면 감자에 버터를 발라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다카하시 선생님은 생활 속에서 부하들에게 ‘업무’란 어떠한 일인가, ‘먹고 자는 걸 잊을 정도로 몰입하는 업무가 멋있다’ 등을 가르쳤습니다.

같은 지장 출신의 부하들은 일본의 패전 후에 농림성으로 돌아와 중견간부로, 또 같은 지장에 있던 조선인 기사들은技師 독립한 한국에서 농정 관료의 중추를 점하는 인재가 되었습니다.


추기 “농법과 농민”이 간행되기까지 50년을 지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효심과 노력에 머리를 숙입니다. 자세히는 이 분의 저서 ?�아버지의 유고父の遺稿?�(海鳥社)에 나옵니다.

일본日本 민예협단民芸協団 야메시지부八女支部  고문顧問/ 마츠다 쿠니히코松田久彦



2008年 9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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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년 되었나,

내가 읽으며 번역하고 있는 책이다.

아무도 번역하지 않았기에 내가 해서 남들과 나눠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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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2007년 5월 30일, 경기도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는 매우 뜻 깊은 감사패 증정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가 발로 뛰며 조사한 우리나라 1930∼1940년대의 농업과 농촌에 관한 사진, 필름, 육필 원고, 책자, 인쇄물 등 소중한 자료 1만 6000여 점을 그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高橋甲四郞(82) 씨가 기증한 일입니다. 그 자료 가운데 일부는 1991년 일본의 미래사라는 출판사에서 1300쪽에 달하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으로 발간했습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것만 해도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번부터 올릴 글은 바로 그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 바탕하여 그와 관련한 해설과 더불어, 그때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가 다닌 곳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답사한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그 두께의 압박.





본격적인 소개에 앞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은 어떤 책이고, 다카하시 노보루는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죠. 먼저 이 책은 사진집이 따로 있는데, 그것은 현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이라는 사진집으로 대원사에서 출간한 상태입니다. 또 제주도 부분만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번역한 자료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역한 사람은 없습니다. 농촌진흥청에서 자료를 기증받은 만큼 앞으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책의 주요 내용은 다카하시 노보루라는 일본사람이 일제시대에 농사시험장이란 기관에서 일하면서 조선 팔도를 발로 뛰며 취재한 것입니다. 농사시험장은 1907년 5월에 설치한 권업모범장이 그 전신으로, 1922년에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을 바꾼 기관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일하면서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사는지, 땅값은 얼마이며 농산물이나 생활용품은 얼마인지, 품삯은 얼마나 받는지 하는 것까지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책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지나친 꼼꼼함에 질려, 혹시 정신병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기가 차서 저도 혼자 미친놈처럼 실실 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조선 부분은 대충 번역을 끝냈고 북조선의 황해도 부분을 번역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왜 제목을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반도의 농법’이라고 한 까닭은, 조선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알맞은 농사법을 찾아서 농사짓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그와 함께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민’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글을 보면 저절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는 누구인가?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합니다. 후쿠오카는 일본에서도 특히 농법이 발달한 곳이어서, 19세기 후반에는 그곳의 농법을 정리해 일본 전체에 보급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농대는 정원 미달이거나 성적 맞춰서 가는 실정이지만, 당시 그가 농학부를 택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졸업한 뒤 잠시 일본에서 일하던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 발령을 받습니다. 거기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에는 1918년에 설치된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서선은 서쪽 조선이라는 뜻으로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크게 북선北鮮(함경도, 강원도), 남선南鮮(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구획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 통합하면서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습니다. 그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미국과 독일에 유학까지 갔다 왔다는 점입니다. 서양의 최신 이론으로 무장한 그가 왜 조선 반도를 이 잡듯 뒤졌는지 더 궁금해집니다. 아무튼 해방 이후인 1946년 5월까지 수원에서 살며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이란 어찌 보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둡니다. 그가 해방 이후에도 조선에 남은 까닭으로는 우장춘 박사가 후진 양성을 위해 붙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 책은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그의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의 자료를 정리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군데군데 틀리거나 엉성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언젠가 그의 육필 원고와 사진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날이 오겠지요.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는 조선에 온 첫 해부터 이런 조사를 실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조금씩 조사를 했겠지만, 체계를 갖추며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때는 책에 따르면 1937년 7월 6~8일 경상도에 출장을 가면서부터입니다. 그나마도 이때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을 기록하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조선의 농법과 농민을 조사하여 세계 대공황과 만주 침략으로 어려운 식량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농업의 판을 새로 짜 수확량도 늘리고 일제에 이바지하려고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다닌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 ― 9월 1일 이후 황해도 ― 9월 6~7일 경상도 ― 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 ― 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 ― 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 ― 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 ― 4월 30일~5월 6일 황해도 ― 5월 20일~6월 3일 제주도 ― 7월 2~8일 강원도 ― 10월 12~13일 충청도 ― 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 ― 3월 4~9일 황해도 ― 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 ― 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와 같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정말 쉴 틈 없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일제에게 봉사한 일본인이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이런 엄청난 자료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역사의 모순을 느낍니다. 아무튼 그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보다 더 꼼꼼하게 우리의 전통 농법을 조사하고 연구ㆍ?정리해서 현실에 직접 적용하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가?

조사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동차나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타고서 지나가며 본 논밭의 모습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둘째는 조사하기에 앞서 미리 책이나 그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 조사한 내용입니다. 셋째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을 만나 이것저것 캐묻고 수치를 재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주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었는지 조사합니다. 두 번째 방식으로는 어느 지역에 관련된 지식이나 농기구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세 번째 방식으로는 구체적으로 농사짓는 방법과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조사합니다. 그 내용으로는 논밭의 이름, 집에서 떨어진 거리, 넓이, 심은 품종, 수확량, 농사짓는 방법 ― 그루갈이, 돌려짓기, 이어짓기 등 ―, 저장하는 방법, 그루 사이의 간격, 심는 포기 수, 거름, 집터, 집 구조, 가족, 품앗이와 놉 같은 노동력, 품삯, 명절, 민속, 농기구, 역사 유적, 밥상 차림, 방아 찧는 방법, 마을에 대한 이야기 등 완전 백과사전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에는 농사만이 아니라 민속, 사회, 경제, 역사, 지역, 생활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 사람들의 농사짓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와 지금은 생활 방식은 물론 농사짓는 방식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쟁기질 같은 경우만 봐도 그때는 소나 말을 쓰거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경운기나 트랙터로 혼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름도 그때는 화학비료를 금비金肥라고 부르면서 영양제 식으로 주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 쓰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시 농업은 규모가 작거나 생계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여유(?)가 있기에 오히려 그때의 농법을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저는 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① 농사의 첫걸음 ― 쟁기질


농사의 첫걸음, 소 쟁기질




먼저 쟁기질 방법입니다. 그때 쟁기질은 아시다시피 소나 말로 했습니다. 어떤 작물을 심으려면, 심으려는 작물이 결정되면 어떻게 두둑을 지어서 심을지 땅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 일을 쟁기로 한골 가느냐 두골 가느냐에 따라 두둑의 크기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알맞은 작물도 달라집니다. 요즘은 로타리라고 하는 방식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그때의 말로 옮긴다면 ‘갈며 써리기’ 정도일 겁니다. 편하기는 하지만 기계로 하는 일은 좀 거시기하지요.
제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생각은 적당한 쟁기질이야말로 농사를 시작하는 첫 단추라는 점입니다. 동네 아저씨께 어쩌다가 소 쟁기질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방법을 어떻게 되살릴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옛 방식을 발전한 기술력으로 적절히 잘 활용한다면 전통을 현대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인력 쟁기 소식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러한 방법의 하나입니다.

② 한정된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 돌려짓기, 사이짓기 등의 농법

이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앞에서 말한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 하는 내용에 들어갑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 해가 시작할 때 씨앗을 고르며 올해는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럼 그해 재배할 작물 목록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한정된 밭에다 아기자기하게 심어서 가꿀지는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홑짓기 방식을 쓰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돌려짓기나 사이짓기 같은 방식은 경제적인 이유로 뒤로 밀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작물을 대량으로 한곳에다 계속 짓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러저러 이유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때 사람들도 지금 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과학기술은 없었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혜롭게 농사지으며 먹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요즘에도 지혜롭게 이용하면 힘은 들지언정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가운데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는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려짓기는 한 작물을 거둔 뒤 바로 쟁기질하고 새로운 작물을 심는 방법입니다. 사이짓기는 한 작물을 심고 그 작물을 거두기 전에 새로운 작물을 심어서 끊이지 않게 밭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이짓기의 사이에는 시간적?공간적인 뜻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를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앞그루와 뒷그루가 겹치지 않도록 때를 잡는 것과 공간을 배치하는 것, 두둑을 만들거나 사이갈이를 하는 쟁기질입니다.

③ 이 농사지어서 누구랑 먹고 살지? ― 갈무리와 그밖에 모든 것

이 자료에는 갈무리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경우는 움을 어떻게 얼마 정도로 파서 저장하는지, 씨앗은 어떻게 관리하고 보관하는지 등이 그것입니다. 또 콩을 거두는 일은 ‘꺾는다’라고 하고, 조는 이삭을 ‘딴다’라고 하는 등 농사와 관련한 우리말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밖에 농사와 관련된 볼 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벼농사의 경우 볍씨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못자리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논의 물대기는 언제 어떻게 하는지. 또 여러 작물들을 어떻게 수확해서 낟알을 떠는지, 그때 노동력은 얼마나 드는지. 벼, 보리, 밀은 어떻게 방아를 찧어 먹는지. 세시풍속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아무튼 볼 만한 것들이 무지하게 널려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반도의 농법이라고 하여 모든 농사를 다 조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농사의 중심은 곡식류였고, 채소류 같은 것들은 집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텃밭에서 조금씩 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 근교 농업에서, 우리의 식생활이 바뀌면서 사랑받고 있는 여러 야채니 채소니 하는 것들을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식량 자원이 중요한 때였으니 만큼 곡류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혹시 육필 원고에는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농촌진흥청과 꼭 접촉해서 한쪽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또 그때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이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때 상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조사 내용에서 그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이었다는 점,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소작료에다가, 집집마다 젊은 남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량 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염전을 메우고 바다를 간척하여 논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비록 식량 생산 기지가 되고 사람들은 힘겹게 살았지만, 흔히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농사꾼이라고 합니다. 그 말처럼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해도 농사꾼들은 자신이 농사짓는 방법을 쉽게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지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때도 화학비료를 쓰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그에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두엄이고 똥이고 재였습니다. 기계도 많지 않아서 와릉와릉 탈곡기나 방앗간 정도만 있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농사일을 소나 농기구로 직접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요 내용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책의 첫 장이 전라도이고, 다음이 경상도입니다. 저도 그 순서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처음 갈 곳은 순천이지만, 에둘러서 광주부터 가려고 합니다. 그럼 광주에 다녀와서 다음에 뵙겠습니다.


가자! 광주로!




*이 글은 귀농통문 2007년 봄 47호에 실었던 글을 조금 손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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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방 광주에 가다


1939년 2월 26일, 증기를 내뿜는 기차에서 한 일본인 사내가 내린다. 그의 이름은 다카하시 노보루. 그는 전라도 실태 조사를 위하여 막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에 왔다. 그가 도착할 때의 날씨는 저마다 상상에 맡기겠다.

2007년 6월 5일, 그의 뒤를 따라 한 사내가 광주역에 내린다. 머리가 벗겨질 정도로 따가운 햇살이 비추는 날씨. 눈이 부셔 하늘을 쳐다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드디어 그를 따라 첫 걸음을 내딛었다. 본디 광주에 앞서 순천에 들러야 하지만, 굳이 똑같이 다닐 필요는 무엇이던가. 첫 단추부터 다른 구멍에 끼우지만 그것도 색다른 맛. 순천과 벌교는 다음으로 기약하고 오늘은 광주에 왔다.

광주로 도착하니 10년 전 처음 광주에 왔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버스 타고 단체로 다녔지만 오늘은 고속열차로 왔다. 이제 광주는 서울에서 고속열차만 타면 3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 되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만든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것만큼 피곤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교통만 놓고 보아도 몇 시간 안에 국토의 끝에서 끝까지 다닐 지경이 되니 괜히 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쫓아다니느라 예전보다 더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것이 뭐 이거 하나이랴! 전깃불 때문에 싫어도 밤늦도록 일하고,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러고 있으니.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으니 또 까먹고 그냥 사는 것이지. 10년의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풍경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세월이 바꾸어 놓은 것인지 내가 바꾼 것인지 모르지만.

아침 9시 지나 열차를 타니 12시 무렵 광주역에 도착한다. 광주역에 오기 바로 전에 아주 뜻 깊은 간이역을 지났다. 바로 ‘극락강역’이다.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이 역을 아마 그도 지났을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 것이 기차를 타고 광주에 들어오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니, 틀림없이 그도 그때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이런 것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돌멩이 하나, 흙 한 알갱이에 서려 있는 옛사람들과 앞으로 올 사람들의 숨결을 상상한다.



사진 1. 기차 안에서 찍은 극락강역. 그날도 이 자리에서 그의 눈동자에 들어갔겠지.

사전 조사에 따르면 광주는 일제시대에 들어오면서 성장한 도시라고 한다. 그전에는 나주가 광주보다 훨씬 커서 관청들도 다 나주에 있었고, 광주도 나주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살면서 점점 광주가 더 큰 도시가 되고, 나중에는 행정구역도 광주를 중심으로 개편하고 관청도 싹 옮겨왔다. 그 결과 지금 광주는 광역시이고 나주는 그냥 시이니, 시대에 따라 도시도 흥망성쇠를 달리 한다. 그게 어디 한둘이야, 사람도 그렇고, 작물도 그렇고, 뭐든 때에 따라 변하지. 나 잘났다고 떠들어야 그때뿐이다.


그건 그렇고 그는 광주군에 내려서 거기에서 좀 떨어진 극락면極樂面 화정리花亭里에 사는 정길채鄭吉采 씨를 방문한다. 집에서 화정리가 어디인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에서 찾으니 전국에 있는 화정리가 수도 없이 뜬다. 광주, 극락, 화정이란 세 단어로 범위를 좁혀 다시 검색,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나 광주시 서구 화정동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화자! ‘여기구나’라는 느낌이 팍 온다. 그럼 거기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또 열심히 인터넷을 뒤진다. ‘어라, 광주에도 지하철이 있잖아.’ 새로운 사실에 깜짝 놀란다. 더군다나 지하철을 타면 내가 가려는 화정동의 화정역에서 내리면 됐다.



사진 2. 광주의 지하철. 통로가 좁고, 전체적으로 작으며 4량밖에 안 된다.

광주역에서 물어물어 양동시장을 향해 걸었다. 지방 도시는 이런 것이 참 좋다. 어느 정도 걸으면 끝에서 끝까지 다 갈 수 있다. 양동시장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화정역으로 향한다. 싱겁게 세 정거장 만에 다 왔다. 이건 또 무슨 행운인지! 역에서는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고 있었다. 신분증과 전화번호만 확인하고 바로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를 엘리베이터에 싣고 오르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관심을 보이신다. 그 짧은 순간 이러저러한 일로 왔다고 하니 나를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사진 3. 자전거 무료 대여. 덕분에 화정동을 샅샅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광주도 여느 도시처럼 주변의 논밭을 흡수하며 도시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한 25~30년 전만 해도 이곳이 다 논밭이었다고 하신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는 엄청나게 덩치가 커졌다. 수도권은 이제 기형일 정도로 너무 커서 온갖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줄여도 모자랄 판에 천안이며 양평에다 전철까지 놓았으니 당분간 수도권의 군살이 빠지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아무튼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여기가 옛날에 극락면 화정리가 맞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렇지, 여기가 광산군 극락면 화정리였지”라고 하신다. 제대로 찾아왔다.



사진 4. 2007년 화정동 사거리. 여기서 할아버지께 옛이야기를 들었다. 왼쪽 할인매장 간판 위로 화정1동사무소 표지판이 보인다.



사진 5. 1966년에 찍은 화정동 일대의 모습. 지금과는 딴판으로 지천이 죄다 논밭이다.



사진 6. 논밭을 밀어내고 자리 잡은 아파트 모델하우스. 도시가 커 갈수록 논밭은 밀려난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있는 시흥동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곳은 옛날에 시흥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울이 커지면서 편입되어 지금은 금천구 시흥동이 되었다. “걸어 다니는 영상실록”이신 정용수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옛날에는 시흥군청이 영등포에 있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영등포도 시흥군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아마 여기 광주의 화정동도 그런 과정을 겪으며 광주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다시 그가 지난 길을 더듬어 가자. 그는 이곳 화정리에서 정길채(34살)라는 분을 만났다. 그 분의 식구는 아내(35)와 맏아들(11), 둘째아들(8), 셋째아들(2), 이렇게 다섯이다. 거기에 머슴(25)까지 있었다. 1939년에서 이미 6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정길채라는 분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아들들은 여기 어디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의 뒷조사를 할 수는 없고, 경찰에 줄을 놔서 알아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식구들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몇이냐 되냐는 물음에 자기와 아내, 머슴이라고 답했다. 머슴을 둘 정도였으니, 꽤 사는 집이 아니었을까? 다음에도 나오겠지만 그가 조사한 사람은 이렇듯 대부분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공무원이 조사하러 나온다고 하면 나라도 웬만큼 사는 사람을 소개하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복지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진 7. 극락면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흐르고 있는 극락강에서 따왔다. 극락강역도 마찬가지이다.

정길채 씨가 가진 농사땅은 논밭을 합쳐 모두 3530평이라고 한다. 요즘 평이라는 단위를 공식적으로 쓰면 불법이라고 하는데, 이 글에서 쓴다고 벌금을 내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 농사땅 3530평에는 논이 한 군데, 밭이 세 군데 들어 있다.

그는 먼저 논농사에 대해서 조사했다. 논의 이름은 정장평チョンヂャンピョン이라고 하는 집 앞의 이른바 문전옥답이다. 여기서도 드러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 점이 어려웠다. 그때 사람들이 부르던 땅이름이나 농기구 이름 등을 지금 우리가 쓰는 말로 푸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던 말 ―사투리를 포함― 을 그대로 얘기했는데, 일본사람이 받아 적은 것인 만큼 아무래도 정확하지 않다. 다행히 한글로 표기한 것도 있어 그걸로 이리저리 비교하며 짜 맞추기는 했지만, 그러한 시대와 언어의 간극에서 오는 차이가 너무 크다. 앞으로도 이런 것이 자주 나오는데, 이보다 더 알맞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받아들이려 한다.

정장평은 1580평의 넓이로 모두 3배미이다. 배미는 한자로 표기하면 야미夜味인데, 국어사전을 찾으면 “그 뜻과는 상관없이 새김과 음을 따서 적은 것”이라고 나온다. 한 마디로 그냥 우리말로 야미라 부르던 것을 한자식으로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만든 말이다. 가까운 예로 우리 동네에서 고개 하나 넘어가면 있는 대야미大夜味가 있다. 그곳은 수리산 밑자락에 넓은 들이 있는 곳인데, 그래서 널배미라고 부르던 걸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 대야미라고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요즘 외왕義旺이라는 지명도 일본이 고쳤다고 하며 다시 의왕義王으로 바로잡았는데, 대야미도 널배미라고 고치면 안 될까? 그럼 그 지역 사람들이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지나는 평촌平村은 본디 벌말이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촌스러운 이름에 집값이 떨어진다며 평촌으로 바꿨다고 한다. 나는 벌말이 더 좋은데 참 이상하다. 뭐 그렇게 따지면 고칠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국민학교가 금세 초등학교로 바뀐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다.



사진 8. 대야미역. 한자를 보시라.

정장평은 20년 전부터 자작自作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자작은 자기가 땅주인이라는 말로서, 소작小作에 반대말이다. 보통 200평을 한 마지기로 보는데, 이 사람은 자기 땅 1580평이 7마지기라고 한다. 이를 보아 이 동네는 225평 정도가 한 마지기였나 보다. 이만한 논을 가졌으니 자기 먹을거리도 해결하고 머슴도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논에서 얻는 수확량은 최저 17섬, 최고 22섬이었다고 한다. 그럼 계산하면 한 마지기에 대략 3섬 정도 수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한 마지기에 보통 나락으로 7~8가마니를 거둔다고 하니, 이와 비교하면 수확량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이후의 엄청난 생산력 폭발은 농민들이 모여 살던 농촌 마을을 해체하고, 농민을 도시로 밀어 올려 공장에 다니게 만들었다. 반대로 생산력이 떨어지면 거꾸로 된 상황이 발생할까?

그의 조사를 보면, 예전에 이 논에서 농사를 지을 때는 두엄만 썼다고 한다. 그러다가 7~8년 전인 그러니까 1931년 무렵부터 화학비료를 쓰기 시작하여, 지난해에는 암모니아를 5가마니 쓰고, 그걸로 모자라 따로 두엄도 70지게를 져다 줬다. 하지만 두엄만 쓰던 때에도 19섬을 거두었고 지금도 보통 나락 20섬을 수확한다고 하니, 천재지변만 없으면 화학비료나 두엄이나 좀 더 힘들 뿐 수확량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아마 화학비료를 대량으로 쓰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화학비료를 주기에 두엄 만드는 수고는 덜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꾸 그렇게 화학비료에 의존하다 보면 경제적으로도 예속되어, 나중에는 땅마저 잃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나면 볏짚은 80지게가 나온다. 한 지게에는 10단을 질 수 있다고 하니 모두 800단의 볏짚이다.

이 논에는 5년 전부터 은방주를 심었다고 한다. 은방주는 익산군 오산면에 있던 불이흥업농장에서 1922년 토야마현富山縣에서 원종을 가져와 기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 품종은 까락이 없고 중간 크기여서 쓰러짐이 적고, 병에 강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그전에는 왜종倭種을 심었다고 하는데, 이 품종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지난해 화순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동광원에 계신 한 장로님께서 옛날에는 은방조를 라는 벼를 많이 심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디에서 왔건 우리네 역사와 함께 살았으니 이 벼도 이제는 토종이지 않을까? 순수, 단일, 혈통 이런 걸 따지는 게 좀 우습지 않은가.



사진 9. 은방주. 까락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에서 자라고 있는 사진은 찾지 못했다.

화학비료와 벼 품종이 바뀐 것 말고도 또 다른 변화가 있다. 5~6년 전부터 이 논에서 쌀보리를 그루갈이한다는 말이다. 계속 짓는 건 아니라 한 해씩 거른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루갈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똑같은 땅에서 한 해에 두 번 농사짓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그루뜨기, 근경根耕, 근종根種이라고도 한다.
그루갈이로 짓는 쌀보리의 수확량은 한 마지기에 한 섬 정도라고 한다. 이 논은 7마지기이니, 모두 7섬을 수확한다. 보릿짚은 쌀보리 한 섬에서 4지게가 나온다고 하니, 모두 28지게. 볏단과 비슷한 크기라고 하면 모두 280단이다.

잠깐 쌀보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보리는 껍질을 쉽게 벗길 수 있냐 아니냐에 따라 겉보리와 쌀보리로 구분한다. 보리의 꽃은 속껍질과 겉껍질에 싸여 있으며, 꽃이 수정되면 씨방이 자라 씨알이 된다. 이 씨방이 자랄 때 씨방벽에서 점착 물질을 분비해 속껍질과 겉껍질을 씨알에 딱 달라붙게 하는 특성을 가진 보리가 겉보리이고, 점착 물질을 분비하지 않아서 씨알이 익어도 속껍질과 겉껍질이 잘 떨어지는 특성을 가진 보리가 쌀보리이다. 1ℓ의 무게를 비교하면 겉보리 600~700g, 쌀보리 800g쯤 된다.
쌀보리는 일반적으로 겉보리보다 추위에 약해서 대전 이남의 남부 지방에서 기른다. 호남 지역에서는 논에 그루갈이로 기르면 빨리 익기에 쌀보리만 기르는데, 영남 지방에서는 쌀보리보다 겉보리를 많이 기른다. 여기는 광주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쌀보리를 심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세계대공황과 만주사변 이후이니 일제는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이다. 이 사람이 두엄만 쓰다가 화학비료를 쓰기 시작한 것도, 품종을 바꾼 것도, 쌀보리를 심기 시작한 것도 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사진 10. 겉보리사진(좌)  사진11. 쌀보리(우)

쌀보리에 밑거름은 배합비료 8호를 한 마지기에 한 가마니씩 모두 7가마니를 주고, 또 두엄 10지게를 준다. 웃거름으로는 오줌 대신 암모니아 한 가마니를 한말닷되지기(250평)에 20장군의 물에 녹여서 7~8년 전부터 준다고 한다.



사진 12. 나무로 만든 장군. 물이나 오줌 등을 밭에 낼 때 쓴다.

또 4년 전까지는 2~3년 동안 논에 자운영을 길렀다고 한다. 한 마지기에 40지게 정도 수확해서, 거름으로 논에 흩뿌렸다고 한다. 경지 정리가 된 논이면 그대로 갈아엎었을 텐데, 3배미로 나뉘어 있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씨를 뿌리는 양을 비교하면 쌀보리는 한 마지기에 6되를, 자운영은 한 마지기에 3되를 뿌린다고 한다.



사진 13. 자운영. 일제시대에 식량 증산을 위해 이를 풋거름작물로 보급하려고 애썼다.


광주 야그 안 끝났응께 쪼개 지둘리시요잉. 소피가 급해서 치깐 댕겨 올랑께.

* 여기 올린 사진은 광주시청,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박물관, 기타 여러 개인 블로그와 제가 찍은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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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를 둘러보고 송정리로



이제 밭농사를 살펴보자. 정길채 씨의 밭은 모두 세 군데이다. 배안골이라는 곳에 두 군데, 텃밭이 나머지 하나다. 배안골 위아래에 밭이 있었는지 하나의 이름은 위 배안골(上のペアンコル)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배안골(下のペアンコル)이다. 먼저 위 배안골을 보자. 집에서 이곳까지 오가는 데에는 곰방대 한 대 피우는 시간이 걸리는데, 거리로는 약 1.4㎞쯤 된다고 한다. 지게에 짐을 지고 간다면 한 번 쉬었다 가는 정도이다.



곰방대. 긴 것은 높으신 양반들이, 짧은 것은 아랫사람들이 피웠다고 한다. 곰방대가 길면 길수록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분을 나타냈다.



넓이는 900평이고, 그러께부터 600원에 사들여서 자작을 하는 곳이며, 흙은 상등급에 속한다. 900평에 600원이면 그때에도 꽤 비싼 편에 속한다. 그 까닭은 땅이 정말 좋은 곳이라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가치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물가가 50년 전보다 11만 배 올랐다고 하니 대략 6600만 원 이상이다. 부동산을 잘 몰라서 땅값에 어두운데, 액수만 놓고 보면 나한테는 참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땅에 올해는 두 종류의 농사를 짓는다. 600평에는 쌀보리에 사이짓기로 목화를 기르고, 나머지 300평에는 쌀보리에 그루갈이로 고구마를 심는다. 가을에는 밭 전체에 쌀보리를 심고 이듬해 그루갈이로 콩을 기를 생각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 농법이 나온다. 사이짓기와 그루갈이가 그것이다. 그루갈이는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했으니 여기서는 사이짓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이짓기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한 종류의 작물이 생육하고 있는 이랑 사이 또는 포기 사이에다 한정된 기간 다른 작물을 심는 것.”


쌀보리밭.



밀과 보리는 수염(까락)으로 구별하면 쉽다. 뭐라고 할까? 보리가 장비의 수염 같다면 밀은 관우와 같다고 할까?



누렇게 익고 있는 쌀보리.



그루갈이와 사이짓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 여기 있다. 그루갈이는 일 년 동안 어느 밭에서 한 작물을 심어 완전히 거둔 뒤 다른 작물을 심는 방법이고, 사이짓기는 아직 거두기 전에 다른 작물을 심어서 한 작물을 거둔 뒤에도 계속 작물을 기르는 방법이다. 자라는 시기가 다른 작물을 어느 기간 동안 같은 땅에서 기르므로 보통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을 조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먼저 심어 거두는 것을 앞그루, 나중에 심어 거두는 것을 뒷그루라고 부른다.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 2년에 3번까지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다카하시 노보루나 다른 일본 농학자들이 우리나라의 농법 가운데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 바로 2년3작식 농법이다. 일제강점기 초대 서선지장의 장을 지낸 다케다 소우시치로(武田總七郞)는 조선의 농법 가운데 세 가지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은근슬쩍 자기들의 전통 농법인 양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세 가지로 “서선 지방의 2년3작식 밭농사 방법”과 “마른논 곧뿌림 재배”와 “개성과 경성의 배추 씨받이”를 들었다. 이러한 내용이 그가 쓴『도작신설稻作新說』이라는 책에 나온다는데,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청계천 어느 헌책방에 있다고 하는데 조만간 구해 봐야겠다.



“도작신설”이란 제목의 책. 일본인들은 얼마나 철저히 조선을 조사한 것일까?



조선의 큰 임금이었던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농사직설』에서는 사이짓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밭이 적은 사람은 보리나 밀이 패기 전에 두 이랑 사이를 얕게 갈고 콩을 심되, 보리나 밀을 거둔 뒤 다시 보리 그루를 갈아서 콩에 북을 준다(田少兩麥未穗時 淺耕兩畝間種以大豆, 收兩麥訖 又耕麥根 以覆豆根).”이를 통해 아주 옛날부터 사이짓기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점점 한 작물을 대량으로 홑짓기하는 경향이 있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서 먹을 거 정도나 이렇게 할까? 사이짓기는 보통 노동력보다 땅이 적은 사람이 하던 방식이다. 잠시도 땅을 놀릴 세 없이 농사짓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땅이 남아도는 시대에 사이짓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사이짓기가 어느 정도 유효할지도 모른다. 작물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일종의 궁합이 있다. 자기 스스로 거름을 만드는 콩을 심으면 그 뒤에 심는 작물은 다른 때보다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든지, 앞그루가 자라고 있기에 뒷그루를 심을 때까지 다른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라든지, 앞그루와 뒷그루의 특성에 따라 서로 필요한 양분이 다른 점을 이용한다든지. 이렇게 사이짓기가 가진 여러 이점을 머리만 좀 쓰면 현대에 되살려 충분히 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의 한 분은 밀을 거두기 전에 사이사이에 콩을 심어서 요즘 극성을 부리는 새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하기에 따라 무수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 900평의 밭에서 쌀보리를 5섬 거두고, 보릿짚은 40지게를 얻는다고 한다. 목화는 600평에서 270㎏을 얻었는데, 제철목화가 210㎏, 철늦은목화가 60㎏이었다. 목화대는 20지게가 나왔다. 제철목화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제때 거둔 목화를 말하고, 철늦은목화는 된서리를 맞고 죽은 목화에서 딴 채 여물지 않은 목화로서 품질이 떨어진다.



목화꽃 1.



목화꽃 2.



목화꽃 3. 이 꽃들을 보니 퍼뜩 멘델의 유전법칙이 생각나네.



다음으로 아래 배안골로 넘어가자. 아래 배안골이란 밭은 당연히 위 배안골과 같은 곳에 있는 밭이다. 이 밭은 1000평으로 5년 전에 사들인 중등급의 밭이다. 여기에는 3년 동안 고추를 20평씩 심어 왔다. 하지만 조사하는 사람도 그렇고 농사짓는 사람도 고추에 크게 관심이 있던 때가 아니라 고추 농사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없어 아쉽다. 고추 말고는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 → 다시 쌀보리에 목화 농사를 680평 지었다. 그리고 나머지 300평에는 680평과 엇갈리게 쌀보리에 콩과 수수 →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를 심었다. 이는 아마 이어짓기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농법인 듯하다. 그렇게 보면 고추도 한곳에서만 이어짓기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다른 곳에다 심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좀 보기 쉽게 표현하면,

고추 → 고추 → 고추 20평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 → 쌀보리에 목화 680평
쌀보리에 콩과 수수 →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 300평

이 밭의 수확량은 고추는 8말이고, 목화는 680평에서 240㎏(제철목화 180㎏, 철늦은목화 60㎏)에 목화대 40지게를 거두었다. 또 콩은 300평에서 5말에 콩대 4지게, 수수는 5말에 수숫대 3지게, 쌀보리는 6섬(최저 5섬에서 최고 7섬)에 보릿짚 60지게를 얻었다. 앞에서 본 위 배안골보다 수확량이 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확실히 땅의 차이에서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새밭이 50평 있다. 여기에는 마늘 10평, 파 5평, 시금치 15평, 상추 20평, 호박 2그루를 심고, 가을에 김장에 쓰려고 그루갈이로 배추 20평과 무 30평을 심는다고 한다.
집짐승도 키우는데 2년 된 돼지 한 마리와 닭 10마리가 있다. 이 정도면 집에서 달걀도 먹거나 내다 팔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거다.

앞서 말한 머슴은 25살 먹은 남자인데, 이 사람에게 한 해에 40원을 준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이제 신분제는 완전히 무너져서 영원히 예속된 노비나 종 같은 신분은 이미 사라지고, 계약에 따른 노동자-고용인 관계가 형성된 때이다. 머슴은 보통 계절별로 바쁜 철에만 사와서 먹이고 재우며 일을 시키든지, 일 년 단위로 계약했다. 이밖에 놉을 사서 일할 때도 있었다. 한 해에 남자는 스무 명 정도, 여자는 100명 정도 사다 쓴다고 한다. 이들을 사다 쓰는 때는 남자의 경우 6월에 보리 벨 때와 모내기철에, 여자는 7월에 밭에 김맬 때이다. 이렇게 놉을 사오면 품삯은 남녀별로 준다. 이런 관행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에게는 30전에 밥 세 끼와 담배 3전어치를 주고, 여자에게는 20전만 준다고 한다. 놉은 다른 데서 따로 사오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사서 쓴다.
이 집에는 소가 없어서 쟁기질하려면 소를 빌려 와야 한다. 그래서 소갈이 품삯을 주는데, 논은 한 마지기를 세 번 갈고서 1.2원을 내고, 밭은 한 마지기를 한 번 갈고서 70전을 낸다. 밭갈이는 보리를 심을 때만 하고, 목화와 콩을 심을 때는 쟁기질하지 않고 괭이로만 한다. 그래서 극젱이나 쟁기도 집에 없고, 쟁기질하는 사람이 그때그때 가지고 온다.

집은 터가 150평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마당이 100평이고, 건물은 50평으로 두 채가 있다.



이와 같이 조사를 마무리하고 다카하시 노보루는 짧은 여행기를 기록한다.

밤에는 광주에서 묵었다(26일 밤).
1939년 2월 27일 정오, 광주를 출발해 송정리松汀里를 떠나서 이리에 도착했다.

광주 어디에서 묵은 것일까?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충장로 어디가 아니었을까? 충장로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으로, 일본사람들도 많이 살고 상업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1935년 광주 충장로의 모습. 일본어 간판과 당시 첨단 교통수단인 자전거가 눈에 띈다.



2007년의 광주 충장로. 세월이 흘렀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간판의 한글과 자동차가 변했을 뿐.



나도 송정리역으로 가려고 송정동으로 향한다. 송정 29라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극락교를 지나자마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본 뒤 송정리까지 쭉 걷는다. 길을 가며 보니 어떤 아주머니께서 논두렁에 뭔가를 심고 계셨다. 혹시나 해서 가까이 다가가 넙죽 인사하고 말을 붙여 보았다.

“안녕하세요, 뭐 심으세요?”
“학생인가? 나 콩 심제.”
“그게 무슨 콩인가요?”
“이거이 메주콩이여.”

같이 앉아서 아저씨가 송정 사람인데 자기는 담양서 일루 시집와서 평생을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듣고, 아들이 서울서 법대를 나와 직장 다니고 있다는 얘기이며, 여기는 비행장 때문에 시끄러워서 크게 말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콩을 심는다고 하시기에 혹시 새 피해는 없을까 했는데, 비행기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우니 어디 새들이 와서 먹을 생각이나 할까. 진짜 하늘이 쫙 째지는 듯한 굉음을 내며 비행기들이 날아다닌다. 이런 상황에 새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풀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아주머니께 여쭈었다.

“풀은 어떻게 하세요?”

그랬더니 잘 모르냐는 듯 약방에 가면 ‘그○○’라고 하는 좋은 풀약이 있으니, 가서 물어보면 쓰는 법도 잘 알려줄 테니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신다. 논에는 나락이 있응께 나락이나 콩에 닿지 않게 풀에다만 살살 뿌리면 두 번 세 번 매지 않아도 돼서 참 편하다고 하신다.
이번에는 이걸 어떻게 심냐고 여쭈니, 한 구녕에 2~3알썩 호미 한 자루 되게 심는데, 땅이 걸면 더 벌리고 메마르면 좀 배게 심으라고 일러 주신다. 그러면서 이 콩은 메주 쒀 먹어도 되고, 콩고물 내서 떡을 하면 맛이 기가 막힌다면서 장에 가서 사려면 한 됫박에 1만2천 원이나 줘야 한다고 하신다.



콩을 어떻게 심는지 몸으로 일러주시는 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타고 오신 자전거. 여느 농부가 그렇듯이 뒤에 삽 한 자루 달고 오셨다.



아주머니께 얻은 푸르대콩. 이 분은 이걸로 메주를 쑨다고 하신다.

안산에서 농사짓는데 조금만 얻어 가자고 하니 두 손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멈출 생각을 안 하시길래,

“이제 됐어요. 그만 주세요.”
“이것 가지고 될랑가? 씨할 놈이라 더 못주는 게 서운하네.”

그 마음에 얼마나 찡하던지. 참 거시기했다. 저 멀리서는 한 아저씨가 모를 깁고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한참을 걷다 보니 이런 표지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음주 운전을 하지 맙시다.” “우리 종자 지킵시다.” 이런 작은 표지판에도 우리 종자를 지키자는 문구가 있다니!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에는 밀을 거두고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여기는 또 뭐가 있을까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할머니는 얼마나 일을 하셨는지 허리가 다 굽으셨다. 지금은 나이도 많고 힘도 딸려서 집 앞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만 하시는데, 거기에 밀을 심으신 것이다. 그걸 오늘 거두는데, 도리깨질할 것도 없이 자동차로 밟으면 된다고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니 밀 말고도 무 비스무레한 것이 있지 않은가. 할머니께 이게 무가 맞냐고 물으니 맞다고 하신다. 그 내력을 물으니 그냥 시집와서 계속 심어서 씨를 받는 거라며 뭐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투다. 어렵게 입을 떼서 조금만 얻어 가자고 하니 슥슥 긁어모아 검불을 대충 날리고는 건네주신다. 확실히 종묘상에서 파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뜻밖에 수확에 이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집 앞 텃밭에서 농사지으시는 할머니. 집도 예사롭지 않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이라 경계하시는지 개가 사나워서 안 된다고 하셨다.



동네 사람이 밀과 무를 차로 밟아 주고 있다.



뜻밖에 횡재! 무씨도 얻었다.



이 무슨 우연인지 송정동에 장이 섰다. 오늘이 장날인가? 장터를 한 바퀴 돌까 하다가 다리도 피곤하고 저녁도 얼마 안 남아 서둘러야 했기에 그냥 입구만 조금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팥과 메밀을 발견하고 안 그래도 팥이 없었는데 잘 됐다 싶어서 작은 됫박으로 한 되씩 3000원 주고 샀다. 가방에 든든히 챙겨 넣고 돌아서니 씨고구마를 팔고 있네. 지금까지 고구마순을 사다가 심었는데 씨고구마를 파는 모습에 쭈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물었다. 밤고구마인지 호박고구마인지, 어떻게 심는지, 얼마인지. 이건 밤고구마고, 이걸 갖다가 땅에 묻어 두면 순이 올라오는 걸 똑똑 끊어다 숨구면 되고, 한 바구니 3000원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살 거야 안 살 거야 하시는데 안 산다니 팩 돌아서 버리신다. 그 기세에 놀라며 황급히 일어나 내 갈 길을 갔다.



씨고구마



송정리역은 이 바로 옆에 있었다. 어떤 역인지 궁금했는데 고속열차가 여기를 지나 목포로 가면서 역을 싹 뜯어고쳤다. 꼭 성형 미인을 마주한 것 같은 난감함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1951년 송정리역의 모습.



2007년 확 뜯어고친 송정리역.



역은 볼 것이 없어 들어가서 마른 목이나 축이고, 바로 나와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무슨 뒷골목이 있길래 들어가 걸으니 한 30~40m 여인숙들이 쭉 늘어서 있다. 별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골목에 나와 앉은 할머니가 “놀다 갈 거야” 하시는 바람에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어느 역이나 역 근처에는 다 있는 그곳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대로 눈길 돌리지 않고 쭉 걸어갔다. 그러자 이거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발견했다!
다카하시 노보루가 기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았을 법한 때 지은 집이 그것이다. 벌써 몇 십 년이 흘렀는데 이런 건물이 아직도 있는 것이지? 그것도 돌이나 콘크리트로 지은 것도 아니라 나무로 지은 집이. 그것도 한 채가 아니라 꽤 여러 채의 건물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집의 뒤란. 이런 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벽과 기둥은 그대로 두고 지붕만 수리하면서 스레트로 바꾼 것 같다.



안에서 주인이 TV를 보고 있어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뜰에 있는 종려나무라든지 멀리서 보이는 지붕의 모습, 약간 튀어나온 현관 들이 확실히 일본풍이다.


송정리역에 대한 좀 더 많은 자료가 있을까 해서 광산구청 문화관광과도 들어가 묻고, 광산문화원에도 가보고 송정도서관에도 가 봤지만 다들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송정도서관은 참고자료실 문이 굳게 닫혀 있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런 도서관도 있구나 새삼 느끼며 씁쓸하게 나온다. 아무리 지방 한적한 곳이라지만 관공서들이 다들 너무하다. 그래도 늘 일이 많고 바쁘다고 하겠지. 아무래도 시스템은 영 내 체질이 아니다.

다카하시는 기차를 타고 이곳 송정리를 거쳐 이 철길을 따라 쭉 이리로, 곧 지금의 익산시로 향했다. 나도 곧 뒤를 밟아 줘야지.



송정리역에서 익산 쪽으로 난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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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으로 가는 길

2007년 7월 13일 10시, 수원에서 출발하는 여수행 열차를 탔다. 함께 가기로 한 후배가 있는데, 왜인지 열차에 없다. 혹시 숨바꼭질하려고 숨었나? 열차가 출발하고도 한 10분 짐짓 모른 척하고 기다렸다. 어라, 그러나 이 자식 어떻게 된 건지 나타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한 낌새에 서둘러 전화를 건다. 이 바보 같은 놈 저녁 10시 차라고 착각했단다. 할 수 없이 이렇게 된 거 일단 나 혼자 출발이다. 후배는 이따 오후 차를 타고 내려오기로 했다.

열차 안에서는 예전보다 못하지만 곳곳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린다. 아, 이렇게 듣는 것도 참 정겹고 좋다. 전라도로 가는 느낌이 팍팍 난다. 지난번 광주 가면서 KTX를 탔을 때랑은 참으로 다르다. 열차를 타면 두 가지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어르신들이 입석으로 타시면 ‘이거 일어나야 하나 마나, 연세도 있으신대 좀 좌석으로 끊으시지’ 하는 생각이 하나. 그렇지만 그런 분들이 없으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또 하나. 참 간사하다. 그래도 요즘은 그런 분들이 거의 없으시다. 세월이 지난 탓이겠지. 옛날 기차는 화장실에도 사람이 꽉 차서 열차가 설 때마다 내려서 볼 일을 봤다고 하던데 말이다. 아직 무궁화호에는 그런 맛이 남았다. 뭐니 뭐니 해도 무궁화를 타야 기차 타는 맛이 난다. KTX, 새마을은 빠르긴 하지만 별 맛이 없다.

맥주를 시켜 놓고 집에서 싸온 쥐포를 뜯는다. 같이 먹으려고 가지고 왔는데 영 별로네. 그러고는 그냥 잠이 들었다. 자다 깨다 하기를 몇 시간 드디어 순천역에 도착했다. 7년 전 처음 왔을 때랑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2년 전 선배를 만나러 왔을 때와도 똑같다. 그런 면에서 전라도는 잘 바뀌지 않는 면이 있다. 여기 사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정겨운지도 모르겠다.



그림 1 1960년대 순천역.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반공,”“통일”이라는 구호를 걸었다.



그림 2 2007년 순천역. 위 사진과 비교하면 건물은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다. 창문의 모양을 보라.



순천역은 60년대 사진에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역 앞의 길이 찻길로 바뀐 정도일 뿐이다. 버스가 서 있는 곳은 택시 정거장이 들어서 있다. 옛날 사진의 구도를 보고 갔으면 그와 똑같은 구도로 찍었을 텐데 아쉽다. 언제 순천에 갈 일이 있는 분은 꼭 가셔서 확인해 보시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다카하시 노보루는 이곳 전남 순천군에 1939년 2월 26일에 왔다고 기록을 남겼다. 그때가 언제인지 달력을 뒤지니 음력 1월 8일이다. 설도 지났고, 남쪽이니 슬슬 거름을 내거나 농사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전라남도 순천군에 와 순천읍 풍덕리豊德里를 방문한다. 순천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으니 풍덕리는 순천시 풍덕동으로 바뀐 것을 확인했다. 나의 첫 번째 답사지는 풍덕동으로 결정했다.

잠시 그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이 마을에는 모두 61호가 살았다고 한다. 그럼 지금은 얼마나 살까? 통계자료를 보니 2005년 풍덕동에는 3561세대 1,0846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무려 3500호가 늘었다. 한 집에 사는 식구도 줄었지만 사람도 팍팍 늘어서 그럴 것이다. 당시에는 61호 가운데 농사짓는 집이 47호였다. 그 가운데 자작이 10호, 자소작이 10호, 나머지는 27호는 소작농이다. 그리고 남는 13호는 날품을 팔아 사는 사람들과 담배 말리는 곳 1호이다. 또 친절하게도 마을에 우물이 네 군데 있다고 적어 놓았다. 자작농과 자소작농이 20호 정도였으니 마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심한 곳은 마을 사람 모두가 소작농인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순천은 들이 넓어서 그런지 옛날부터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1927년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의 조사를 보면 순천에서 100정보 이상, 그러니까 30만 평의 농사땅을 가진 사람이 조선사람과 일본사람 모두 합쳐 46명이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땅이지만, 아무튼 조선 지주들도 꽤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농사가 잘되는 좋은 땅은 이미 조선 지주들 것이어서 새로운 일본 지주들이 들어오기 힘들었다. 나중에 또 얘기가 나오겠지만, 일본 지주들은 수리시설 따위가 좋지 않은 농사짓기 힘든 곳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수리조합을 만들고, 개막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답사에서 찾으려는 벌교에 있는 중도 방죽, 곧 나카시마 방죽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림 3 1930년대 순천의 풍경. 너른 들을 볼 수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농사 규모도 조사한 점이 흥미롭다. 이 마을에서 보통 대농은 논 37~40마지기(2.7町, 8100평)에 밭 5마지기(1反7畝, 510평), 소농은 논 2~3마지기에 밭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 아예 밭농사를 짓지 않는 집도 10~15호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논농사만 짓고 밭은 푸성귀나 뜯어 먹을 정도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 마을에 소는 11마리 있고, 모내기철 이 마을에 일하러 오는 다른 마을 사람이 5명인데 한 번 오면 20일쯤 일했다고 한다. 그걸 따지면 100명이 일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방문한 풍덕리의 집은 순천읍에서 약 1.09㎞(10町), 순천역까지 1.09㎞(10町)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걸 감사히 여겨야겠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볼 수 있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순천역에서 반경 1㎞인 풍덕동을 찾았다. 미리 머릿속에 확실한 정보를 넣고 와서 그리 헤매지 않고 잘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림 4 빨간 원이 순천역에서 1km 안에 있는 지역. 이번에 답사한 곳이다.



그림 5 동천을 끼고 자리 잡은 순천 시가지의 모습. 지도의 강이 바로 동천이다.



그가 그렇게 찾은 곳은 바로 풍덕리에 살던 황귀연黃貴連 씨라는 분의 집이다. 그 분은 식구가 모두 12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61), 어머니(56), 자기(32), 아내(32), 맏아들(9), 둘째 아들(4), 맏딸(1), 동생(25, 일본에 있음), 제수씨(22), 둘째 동생(19, 역무원), 둘째 제수씨(19), 셋째 동생(16)이 그들이다. 아들이 9살인 것으로 봐서 그때는 다들 그랬겠지만 요즘과 달리 결혼을 무척 일찍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동생들이 딸려 있는 걸 보면 전형적인 우리네 옛 식구의 모습이다. 그래도 동생이 역무원이었으니 그렇게 힘든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림 6 풍덕동에 있던 오래된 집. 황귀연 씨네도 이랬을까?



이 사람이 짓던 농사는 모두 5140평에, 밭 320평이었다.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먼저 집 앞 논(チバムノン)이다. 이 논은 집터 옆에 있는 800평짜리 논이다. 흔히 말하는 문전옥답이다. 두 배미로 나뉘어 있고, 소작료는 60%에 볏짚은 소작인이 가졌다고 한다. 이때는 볏짚도 소에 밟혀 거름으로 쓰던지 가마니를 치던지 하는 중요한 자원이어서 누가 볏짚을 갖느냐가 관심거리였다. 수확량은 1936년에 은방주를 심어 나락 10섬을 거두고, 1937년에는 나락 6섬을 거뒀다. 모내기는 18×21㎝(6×7寸)로 해서 1평에 모두 86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또 이 논에는 남부 지방답게 뒷갈이로 쌀보리를 1말7되5홉을 심어 2섬을 거뒀다. 왕골도 자투리에 1평을 길러 고삐 28.8m(12尋)를 꼬고, 자운영 5홉을 5평에 심었다. 자운영의 씨앗 값은 1섬에 85원이었다고 한다. 1섬은 1000홉이니 5홉이면 2원쯤이다. 이는 사람을 하루 데려다 쓰는 돈보다 더 비싸다. 농사에 자운영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다. 그들이 운영한 권업모범장에서 정책적으로 자운영을 심으라고 권고했으니 비싸도 울며 겨자 먹기로 심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튼 쌀보리에 밑거름으로는 두엄 40지게와 과인산석회 1가마니를 쓰고, 웃거름은 사람 똥오줌 60장군을 준다고 한다.

다음은 강실랑(カンシンリャン)이라는 논이다. 강실랑이 아마 사투리 같은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논은 집에서 654m(6町)떨어진 6마지기(1마지기 200평)의 논으로서 한 배미라고 한다. 1200평이 한 배미였으니 꽤 넓었을 것이다. 이를 봐도 순천은 예로부터 들이 넓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논도 물론 소작이었다.
이 땅은 축축해서 뒷갈이는 하지 못하고 벼만 심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모를 21×24㎝(7×8寸) 간격으로 심어 1평에 64그루를 심는다. 또 축축한 땅이고 넓은 만큼 가뭄을 덜 타기 때문인지 여기에 못자리 150평을 만든다. 볍씨 3.5말을 뿌리는데, 변경弁慶이라는 품종 2말과 은방주 1말5되를 뿌린다고 한다. 변경이라는 품종은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또 언제 전라도 어르신에게 확인해야 하는데, 이 부분의 기록에 “한모리닥(ハンモリタク)”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모리닥”이란 말은 지게 다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한머리닥이라고 하면 지게에 짐을 한가득 지고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이건 앞으로 검증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림 7 지게와 그 부분의 이름



오종(オ―チョン)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논들이 쭉 나온다. 먼저 오종평(オ―チョンピョン)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집에서 654m(6町) 떨어진 500평의 논이다. 한 배미인데 4년 전에 430원 주고 산 자작 논이다. 벼를 심은 뒤 뒷갈이로 보리 400평과 자운영 100평을 심는다.
그 다음 중오종(チュンオ―チョン)이라는 곳은 집에서 1308m(12町) 떨어진 440평의 논이다. 이곳도 자작이고 한 배미라고 한다. 은방주를 21×24㎝(7×8寸) 간격으로 1평에 64그루를 심고, 뒷갈이로는 쌀보리를 심는다.
마지막으로 하오종(ハオチョン)은 1962m(18町) 떨어진 400평의 논인데, 이곳도 자작이고 한 배미이다. 마찬가지로 은방주를 21×24㎝(7×8寸) 간격으로 심고, 뒷갈이는 쌀보리를 심는다.
여기서 나오는 오종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오종, 중오종, 하오종이라는 것으로 봐서는 집을 기준으로 순서대로 부른 것이 아닐까?

다음은 산배니(サンペニイ)와 샛들(セッツル)이라는 논이 있다. 이곳들은 똑같이 집에서 1962m(18町) 떨어진 곳인데, 각각 1200평과 600평 되는 논이다. 산배니는 1200평 1배미인 넓은 논으로 벼를 심은 뒤 뒷갈이로 보리 500평을 심고 못자리 300평(볍씨 5되 뿌림)을 만드는 곳이고, 샛들은 600평인데 축축해서 벼만 심는데 수리시설인 둠벙이 있는 물잡이논이다. 둘 다 소작하는 곳이다.

이제 밭인데, 밭은 모두 두 군데이다. 먼저 남지종 앞밭(ナムヂヂョンアッパ)이라고 집에서 1308m(12町) 떨어진 3마지기 280평하는 밭이다. 이곳은 소작을 하는데, 정조定租로 나락 1섬을 낸다. 정조는 소작을 계약할 때 미리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다음 지주가 정한 날까지 소작료를 내는 소작 관행이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보통 40~60%를 냈는데, 세금은 지주와 나눠서 내거나 함께 부담했다. 거의 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거기에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다면 농사지을 맛 안 났을 것이다. 그저 배운 게 도둑질이고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지 않았을까? 요즘 이렇게 내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이 밭에는 쌀보리에 그루갈이로 콩을 140평, 쌀보리에 사이짓기로 목화 140평을 지은 뒤에 가을에는 김장거리로 무와 배추를 심는다고 한다. 그걸 거두면 다시 쌀보리를 심고, 140평씩 한 번은 이쪽에 콩, 다음번에는 저쪽에 콩을 심는 식으로 돌아가며 콩과 목화를 심었다. 콩과 목화를 거두고 난 뒤에는 다시 김장거리를 심는 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땅을 한시도 가만히 놀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밭은 텃밭이다. 집터 앞에 약 40평 되는 남새밭으로서, 소작료로 나락 2말5되를 냈다고 한다. 다카하시가 찾은 날이 26일인데, “20일 무 10평 가을배추 3평”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봄동으로 먹거나 씨를 받으려고 지난해 놔둔 것일까? 그렇다면 배추 3평은 이해가 가지만 무 10평은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봄배추로 28평, 무 2평을 심고, 가을에는 무만 30평 심는다고 한다. 거기에 나머지는 상추와 시금치 같은 잎채소를 7평 심는다.



그림 8 풍덕동에서 본 텃밭. 푸성귀를 심으려는 텃밭은 아니고, 이제는 농사짓는 텃밭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둘레에 도라지와 참깨, 들깨, 옥수수를 심고, 수수 한 두둑에 콩 세 두둑을 심는 식으로 기른다. 참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이 집에는 농사 말고도 산이 3210평(1町7畝) 있다고 한다. 산까지 있을 정도니 살 만한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글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람이 조사한 농가는 좀 살 만한 집이 주요 취재 대상이었다. 이 산은 집에서 4㎞(1里) 남짓 거리라고 한다. 그곳에는 1.5m(5尺)쯤 되는 작은 소나무들이 있고, 대나무 숲은 없다고 한다. 남쪽인 만큼 대나무가 잘 자라서 대나무를 물어봤을 것이다.

또 소 한 마리가 있고, 개나 닭, 돼지는 없다고 한다. 부업으로는 집에서 쓰려고 한 해에 무명 5필을 짠다. 앞에서 목화 농사를 짓는다고 했으니 거기서 수확한 목화솜으로 짰을 것이다. 무명 한 필은 6m(20尺)라고 한다.
이 집에서는 계절머슴은 쓰지 않고, 머슴을 한 명 들였다고 한다. 머슴은 다들 아는 것처럼 주인집에 살면서 새경私耕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업 임금 노동자이다. 다른 말로는 고공雇工, 고용雇傭, 용인傭人 들로도 불렸다. 머슴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부터 많아졌다. 그를 통해 노비들도 머슴으로 많이 바뀌고, 호칭도 머슴으로 굳었다. 머슴은 고용되는 기간에 따라 일 년 단위로 고용되던 머슴이 있고, 몇 달 또는 바쁜 계절 단위로 고용되던 달머슴(月傭)과 반머슴(季節傭)이 있었다. 고지雇只 머슴이라는 특수한 형태도 있었는데, 땅이나 집 또는 식량을 빌리고 고용주를 위하여 일정 날짜 동안 일하거나 정해진 작업량을 해주었다. 또 노동력과 농사 경험에 따라 상머슴과 중머슴, 꼴담살이, 애기머슴 따위가 있었다.
머슴은 농사일 말고도 가사 노동에도 썼다.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잡으면 머슴은 한 해 평균 225일을 일하고, 고용주와 그 가족은 139일을 일했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 일했기에 ‘머슴밥’이라는 엄청난 양의 밥을 하루에 대여섯 번 먹었다. 농한기에는 한가한 편이지만, 거름과 땔나무를 하고 가마니를 치고 새끼를 꼬아야 했다. 머슴의 새경은 보통 현물로 줬는데 대개 벼 1섬에서 1섬 반이었고, 1930년대 초반에는 돈으로 30~40원부터 160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농번기에만 고용되면 약 3개월에 60~70원을 받고 옷과 밥은 자기가 해결하기도 했다.
이러한 머슴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땅을 뺏기고 인구가 늘면서 더 많아졌다. 1930년의 통계로 보면 고용주 44,2908명에게 머슴 53,7432명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머슴은 1940년쯤까지 계속 늘어나다가 그 이후 징병과 지원병으로 노동력이 차출되고, 공장이 들어서고 만주로 이주함에 따라 특히 서북 지방에서는 머슴을 고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졌다.

그밖에 한 해 놉을 150명 쓴다. 놉을 쓰는 기간은 모내기철에 50~60일, 김매기철에 50일, 벼베기철에 3일이다. 놉은 밥과 술을 먹이고 날삯을 주어 일을 시키는 일꾼을 말한다. 식구들이나 품앗이로도 일을 다 할 수 없을 때 품을 산다. 품을 파는 사람들은 주로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자기 농사땅이 적은 영세농이나 소농들이다. ‘날품팔이’는 계약을 맺은 완전한 임금노동자를 말하는데, 놉은 보수를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얼굴 보고 사는 가까운 집단 안의 사람들이 서로 협동한다는 생각으로 주고받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놉을 산 집에서는 보수 말고도 술, 담배, 참 따위를 공짜로 주고, 보수도 꼭 돈 말고 필요한 현물로 주기도 하며, 지급하는 시기도 일정하지 않다. 특히 보수를 마음대로 정한 뒤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고용자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놉은 품앗이 같은 협동 노동 형태가 머슴 같은 임금노동의 형태로 바뀌는 중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놉에게 주는 품삯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내기 때의 품삯은 남자는 20명을 쓰는데, 그들에게 세 끼+막걸리 20전+담배 5전을 준다. 밥은 모두 다섯 주발로서 쌀로 치면 1되5홉의 양이다. 당시 흰쌀은 1되에 32전이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다섯 주발 가운데 두 주발 분량의 쌀은 놉이 집에 가지고 간다는 점이다. 그렇게 따지면 남자의 품삯은 하루 93전 정도라고 한다. 여자는 30명을 쓰는데, 세 끼(5주발)를 주고 품삯은 78전 정도다.
김매기철에는 남자 20명에게 한 끼+담배 5전+술은 양껏 주고, 여자는 김매기에 데려오지 않는다. 이 모습만 보면 이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놉이라기보다는 두레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논 김매기는 힘이 많이 들기도 하고 이러저러 이유로 여자는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따로 돈은 주지 않고, 밥 한 끼에 담배와 술을 마음껏 먹도록 하는 모습이 두레패일 것 같다. 그렇게 일하고 나면 다른 집에 가서 똑같이 대접받고 일하고 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벼베기 때의 품삯은 남녀 모두 모내기철과 같다고 한다.



그림 9 1935년 8월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언암리의 두레패 모습.



지금까지 순천 사시던 황귀연 씨의 농사 규모를 대충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그분이 짓던 논농사를 자세히 알아보고, 내가 다닌 순천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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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풍덕동, 아니 풍덕리는 어떤 모습일까? 처음 답사를 다니기로 생각했을 때 예전 그곳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고 싶었다. 지난번 송정리나 광주도 그랬고, 풍덕리도 어떻게 변했는지 보려고 순천역에서 내려 머릿속에 넣은 지도를 따라 걸었다. 지방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역 주변은 쉽게 변하지 않나 보다. 이곳도 역 주변은 낡고 오래된 집들이 서 있다. 동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니 순천종합어시장이 나온다. 이곳도 원래는 드넓은 논밭이었으리라.


그림 1 풍덕동에 들어선 종합어시장.


그러려니 하며 걷는데 눈길을 끄는 간판이 보였다. “사단법인 여순사건 순천유족회”가 그것이다. 여순사건이라고 하면 책에서나 배웠지 별 느낌이 없었다. 허나 이곳에서 이 간판을 보니 ‘아직 여순사건은 끝나지 않았구나’ 실감한다. 빨갱이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곳의 들이 넓었기 때문이리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넓은 들을 지주들이 틀어쥐고 있으니 소작농들은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주고 소작농이고 할 것 없이 다들 잘 살아보자는 붉은 물이 들기 더 쉬웠으리라. 그 세력이 강하니만큼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남아 있었을 것이고, 군대가 들어오면서 그곳에 들어가 세력을 잡고 한 번 들고 일어섰겠지. 박정희도 봉기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재밌다. 봉기군에 가담했다가 나중에는 핵심 인물들을 불고 살아남아 더 높이 올라갔다고 하니, 기회주의자 권력주의자 박정희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씁쓸한 웃음이 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밝혀진 것만 5500명 정도 죽었다니, 엄청난 사건이다. 그 가운데는 틀림없이 무고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홱가닥 미치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거슬리는 놈은 다 쓸어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 아니었던가.


그림 2 이 간판을 보고 기분이 참 거시기했다.


조금 걷다 보니 풍덕동사무소가 나오고 도무지 논밭은 보이지 않는다. 동사무소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송정리에서 당한 수모가 생각나서 참았다. 공무원들은 그럴싸한 명함을 들고 가야 반응을 보인다. 공무원만 그럴까?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 종이 조각에 적힌 글씨를 보고 쳐다보는 눈동자가 달라진다. 그냥 이 길로 가면 무엇인가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내 육감을 믿고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가니 민속품 판매점이 나왔다. 이제 우리네 농사 연장은 이런 곳에나 와야 볼 수 있구나. 세월이 가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림 3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벼나 보리를 떨던 홀태 또는 그네, 클이라는 농기구. 여기저기서 수집해 왔는지 꽤 많았다.



그림 4 탈곡기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대표적인 농기구다. 이것은 60~70년대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한일식韓一式 탈곡기脫穀機”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탈곡기가 밟고 선 것은 돌절구들.



그림 5 엄청 큰 연자매. 이 동네가 벼가 많이 나긴 했나 보다.


조금 더 걸으니 이곳에서도 도시농업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옥상으로 뻗어 오른 저 줄기는 수세미 아니던가! 땅에는 어디서 욕조를 구해다가 흙을 담아 고추를 키우고 있었다. 위로는 수세미와 아래로는 고추, 둘이 어울려 참 보기 좋다. 도대체 뭐하는 집인데 저러고 사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가면서 보니 매운탕 집이었다. 그럼 식당인가? ‘손님들이 참 좋겠네’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알아보니 식당이 아니라 설비 공사를 하는 집이었다. 그래서 욕조로 텃밭을 만들었구나.


그림 6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수세미와 고추. 실제로 보면 세력이 더 대단하다. 욕조를 재활용하는 모습. 욕조 정도 깊이면 별 걸 다 심을 수 있겠다.


그렇게 넋을 잃고 한참을 쳐다보는데 웬 할머니 한 분이 옆에 우산을 받쳐 들고 서 계신다. 혹시 이 작물을 심으신 분이 아닐까 해서 꾸벅 인사드린 뒤 여쭈니 맞다고 하신다. 이 분은 원래 목포에서 태어나셨는데, 젊어서는 부천에서 30년 살다가 순천에 오신 지 한 5년 됐다고 하신다.
어찌 이리도 잘 키우시는지 물으니, 올해 두 번째 농사짓는데 처음에는 거름으로 개똥 썩힌 것에 비료를 조금 줬다고 한다. 그렇게 고추 80그루에서 수확해 고추가루 5근 내고, 수세미는 12그루에서 50개를 땄다고 하시네. 올해는 조금 더 신경 써서 키토그린이라는 영양제까지 사다가 줬다고 하시니 엄청 정성스럽게 키우시는 걸 알 수 있다. 이야기하시는 내내 싱글벙글 얼마나 뿌듯해 하고 자랑스러워하시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사진이란 것이 참 그렇다. 사진기로 남기면 남과 함께 볼 수 있어 좋지만, 사진기를 드는 순간 나와 대상이란 거리감이 생긴다. 그 거리감은 어색함으로 번지고, 그러다 보면 그 순간, 분위기, 느낌, 공감을 얻기 힘들다. 잘 이야기하던 사람도 사진기를 보면 얼굴과 혀가 굳어 전과 같이 신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사진기에 익숙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구나 다 그렇다. 또 찍는 사람은 찍는 사람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요물은 요물이다. 사진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옛사람들의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이런 일만 아니면 사진기를 들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음식이 나와도 먼저 사진부터 찍고 본다. 먼저 냄새를 맡고 맛을 봐야지 그게 뭐하는 꼴이람.


그림 7 욕조 말고 스티로폼 상자도 쓰고 있다. 거름을 잘해서 그런지 유치원 텃밭의 비실거리는 고추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지역은 대나무가 많은지 고추 버팀대로 대나무를 썼다. 물어보니 일부러 차로 싣고 와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에 순천에 와서 박을 먹은 기억이 있어 혹시 수세미도 먹느냐고 할머니께 여쭈었다. 그랬더니 수세미를 활용하는 많은 방법을 알려주신다. 할머니는 수세미 덜 익은 것을 따면, 껍질을 벗기고 속을 설탕에 1주일쯤 재 놨다가 먹는다고 한다. 무슨 맛일까? 미처 묻지 못했다. 또 천식 있는 사람이나 기관지가 안 좋은 사람은 수세미를 푹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좋다고 한다. 목을 많이 쓰는 사람이나 약한 사람은 꼭 해볼 일이다. 추석쯤에는 꼬랑지를 자르는데 그럼 거기서 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 물이 진짜라고 하시며 그건 꼭 해보라고 적극 추천하신다. 지난해 수세미를 잘 먹고 잘 봤는데, 너무 많이 나와서 힘들었다고 올해는 지난해보다 적은 9그루만 심었다고 하신다. 참 행복하게 사신다.


그림 8 수세미가 탈 구조물도 대나무로 만드셨다.


갈 길이 멀다. 이제 가야겠다고 인사드린 뒤 뒤돌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집들뿐이다. 풍덕동도 지난번 광주처럼 다 개발된 것일까? 더 이상 논밭은 찾아볼 수 없을까? 일단 한 번 가 보자. 저쪽으로 순천남중학교가 보인다. 그 옆으로는 횅하니 빈터인 것 같은데 혹시? 발걸음이 빨라졌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곳에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그림 9 순천남중학교 옆. 태풍 마니의 영향으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 하지만 벼들은 푸릇푸릇 예쁘게 자라고 있다. 드디어 찾았다. 풍덕동에 남아 있는 논밭.


특별한 농법은 없을까 밭에 심어 놓은 작물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벼는 어떻게 심었는지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별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논밭을 찾은 게 어디냐.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또 기쁘다. 이 기쁨으로 가득한 맘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따라 걷는다. 어 그런데 제비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제비가 있다.
제비야, 우리집에도 와 줬으면 좋으련만. 어릴 때 해마다 집에 찾아오던 제비가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난 제비만 보면 반갑고 좋다. 새끼를 까면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지저귀던 모습, 새끼들 똥을 입으로 물어다 버리던 모습…. 옛날에는 먹을 것을 달라고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지저귀는 제비에 어린아이들을 비유했다. 먹을 것만 보면 환장하고 달려들어 해치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비 새끼와 서로 닮아서 그랬을 것이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그런지 벌레를 잡아먹느라 제비들이 낮게 날아다닌다. 물을 받아 놓은 곳에서는 말 그대로 물 찬 제비가 되어 날아다닌다. 제비가 낮게 날아다니는 날은 벌레도 낮게 나는데, 벌레가 낮게 나는 것은 기압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 으레 ‘오늘은 비가 오겠구나’ 했다고 한다. 그것 말고도 개미가 집 입구 주변으로 제방을 쌓으면 비가 온다. 개미도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라서 자주 지켜보는데, 그 말이 틀림없다.
제비를 보니 오늘은 틀림없이 비가 오겠구나. 오늘은 비옷을 챙겨 왔으니 아무 걱정 없다.


그림 10 물 찬 제비, 너무 잽싸서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다. 오른쪽 하늘에 떠 있는 놈이 제비. 이걸로 만족하자.


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그냥 터덜터덜 걷는다. 논둑에 심어 놓은 논두렁콩이 너무 예쁘다. 간척해서 너른 논이 생긴 곳에서는 기계로 농사짓느라 이런 건 심을 생각도 하지 않을 거다. 논둑도 놔두지 않고 무언가를 심는 마음, 가난해서 무엇이라도 길러서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그렇지 않은가? 그러한 자세야말로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농심이 아닐까?


그림 11 논두렁콩. 저 멀리 아파트가 보인다. 다른 곳은 모두 개발되었는데, 이곳만 섬처럼 홀로 남았다.


조금 가다 보니 아기자기한 텃밭이 보인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무엇을 어떻게 심었는지 살펴보았다. 먼저 밭의 가장자리를 둘러서 도라지, 참깨, 파, 토란, 들깨, 상추를 심었다. 가운데에는 두둑을 만들어 콩 3두둑에 수수 1두둑을 심었다. 수수가 거름을 많이 먹으니 콩 사이에 심으셨나 보다.


그림 12 왼쪽에 보라와 흰꽃이 도라지. 가장 앞에 보이는 것이 참깨. 파, 들깨, 상추는 오른쪽 끝에 있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 수수 1줄에 콩 3줄씩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13 토란은 벽에 붙여서 심었다. 토란은 음습한 것을 좋아하는 성질이니, 벽 쪽은 그림자도 지고하여 심었나 보다.


참 예쁜 텃밭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림길에 서서 여기까지가 현재 남아 있는 논밭의 끝임을 보았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갈까?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쳐볼까? 그냥 순천역 쪽이라고 생각되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밭에서 일하시는 분을! 이번에도 뭐 씨앗을 좀 얻을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지고 인사를 드렸다. 웬 젊은 총각이 쉬는 날도 아니고 가방 하나 메고 다니는 모습을 보시고는 적잖이 놀라신 것도 같다. 밭이 예쁘다고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주저앉아 말을 건넸다.
이 밭은 200평이 조금 넘는데, 2년 전에 1억 가까이 주고 사셨다고 한다. 기특하게도 31살 먹은 딸이 돈 좀 보태고, 두 분이서 모아 놓은 돈으로 사셨다. 몇 년 뒤에 아저씨가 퇴직하시면 두 분이서 농사지을 생각에 이렇게 사서 연습 삼아, 운동 삼아 농사짓는다고 하신다. 집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데, 두 분이 운동 삼아 나와서 여기까지 걸어와 일하다 집에 가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입꼬리가 귀까지 벌어지시는데 정말 좋아 보이신다.
아주머니의 원래 고향은 박치기왕 김일이 태어난 녹도라고 하신다. 녹도라는 지명을 처음 들어서 도대체 어딘가 한참 생각했다. 그런 건 일단은 어물쩡 넘어가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꾸 멈추게 하면 흐름이 끊어져 더 들을 얘기도 못 듣는다. 일단 그러려니 하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따로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녹도도 그렇게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찾아보고 알았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뭐라도 먹으라면서 농막을 뒤지신다. 농막도 컨테이너 작은 걸로 잘 해 놓으셨다. 그렇게 뒤지시더니 인삼맛 사탕을 꺼내서 손에 쥐어 주신다. 받았으니 먹어야지, 바로 하나 까서 날름 입에 넣었다. 아주머니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얼마 전에 내 또래의 아들을 가슴에 묻으셨다고 한다. 어째쓰까나, 다 키워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나.


그림 14 한창 일하고 계시다 놀라신 아주머니.


밭에는 주로 참깨를 많이 심으셨다. 그래도 아직은 초보인지라 너무 배게 심어서 참깨가 웃자랐다. 오늘 태풍이 올라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다 넘어갈 기세다. 옛날에 어른들이 태풍처럼 날씨가 궂을 수도 있으니 늦게도 심으라고 하신 말이 기억나, 나중에 드물게 심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알맞게 잘 자랐다고 한다. 이 밭에는 거름을 액비를 만들어서 주고, 밑거름은 퇴비를 사다 준다고 한다. 참깨 말고는 둘레에 팥과 호박을 심고, 잎채소들을 조금 따로 밭에 심으셨다. 밭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는 매실나무인데, 처음 밭을 살 때 묘목을 심어 엄청 많이 컸다고 한다.
처음에는 농사지을 줄 몰라서 좌충우돌 실수도 많이 하고 동네분들한테 좋은 밭 사서 농사도 못 짓는다고 핀잔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네분들이 살뜰하게 이것저것 씨도 챙겨 주시고 농사짓는 법도 일러주셔서 참 고맙게 잘 짓고 있다고 하시니, 동네분들이 병도 주고 약도 주시는 분들이다.
이 동네를 좀 아시냐고 물으니, 원래 10년 전만 해도 일대가 모두 논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개발되면서 아파트도 들어서고, 이것저것 갈아엎어서 많이 도시가 되었다. 지금 농사짓는 이곳만은 땅값이 비싸서 업자들이 함부로 매입을 못해서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주변에 땅값 싼 곳은 이미 다 사들여서 아파트 지어 남은 것이 없다고. 슬쩍 땅값이 얼마나 되는데 그러냐고 물으니, 여기는 1평에 50~60만원이나 한다고 한다. 안산보다도 비싸다!


그림 15 아주머니의 밭 전경. 웃자란 참깨들. 군데군데 있는 나무가 바로 매실. 가운데 왼쪽에 빨간 다라이통이 액비를 만드는 통.



그림 16 도시의 상징 아파트. 너에게 흐린 구름이 짙게 낄 것이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이 여기 살기 싫다고 다 뛰쳐나오면 안 될까? 아파트, 골프장, 스키장.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



그림 17 시간이 더 흐르면 그나마 여기 남은 논밭도 모두 아파트가 들어설까? 아니 순천의 인구가 늘어날 일이 거의 없으니 그저 꿈일 수도 있다. 순천 풍덕 지구 도시개발 사업조합 앞.


슬슬 후배가 도착할 시간이 다 돼 간다. 나도 순천역으로 가서 마중을 해야지. 아주머니께 인사드리고 난 순천역으로 향했다. 순천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 입구에 할머니들이 가판을 벌였다. 자주 여기에 자리를 펴시는 듯하다. 혹시 감자 나올 때가 됐으니 토종 감자가 없을까 하여 슥 쳐다보며 지나는데, 이상한 감자가 눈에 띈다. 발걸음을 멈추고 쭈그리고 앉아 할머니께 여쭈었다.
“이게 뭐예요?”
붉은 감자라고 하시며 아주 맛있다고 사다 먹어보라고 하신다. 먹을 건 아니고 씨감자로 쓰려고 하는데 괜찮냐고 물으니, 자기도 사오는 거라서 장담할 수 없으니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럼 사진이라도 찍어 가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몇 장 찍는데 사투리로, “왜 작을 놈으로 찍어 기왕 찍으려면 이 큰 놈으로 찍지.” 아 사투리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순천 사투리를 알면 그대로 적을 텐데. 녹음한 것도 아니고 이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럼 이 감자는 어떻게 구할 수 있냐고 하니, 붉은 감자라고 농협에서 종자를 보급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두불감자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시는 걸 보니 이곳은 감자도 두 번 심나 보다. 남도가 다르긴 다르구만. 아쉽지만 나중에 농협을 통해 알아보든지 하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림 18 일반 감자(오른쪽)와 붉은 감자(왼쪽). 껍데기만 붉고 속은 하얗다. 찌면 분이 풀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고 하신다. 조금 사올 거 그랬나?


순천역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대합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니 드디어 후배가 도착했다. 여기서 어물쩍거리지 말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벌교로 넘어가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30~40분 정도면 간다고 한다. 생각보다 무지 가깝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는 넘어가 깜깜한 밤. 우리는 벌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얘기가 길어져서 황귀연 씨가 논농사 짓는 방법 조사한 것은 다음으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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