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날씨는 흐리고 바람에는 물기가 물씬 묻어 있다. 그러나 날은 따뜻하다. 간밤에 잔 모텔에서 나와 아침을 먹었다. 제주도에는 모텔이 여관 수준인 것에 놀랐다. 다니면서 알았는데 여기는 관광지라서 그런지 극과 극이다. 좀 괜찮아 보인다 싶은 곳은 어김없이 관광단지이며 값이 무척 비싸다. 그렇지 않은 곳은 시골 같은 분위기... 제주도라고 하면 신혼여행 같은 것만 떠올라서 그런지 시설이 좋을지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아침을 먹고 제주도 이틀째 조사에 나섰다. 여기는 밭도 참 다르다. 밭마다 돌담을 낮게나마 둘러친 모습이 이색적이다. 이것도 다 바람 때문일까?

 

 제주도의 마늘밭. 스프링쿨러로 마늘에 아침밥을 주고 있다.

 

 

차를 타고 지나다 큰 창고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보았다. 이야기를 나누니 이곳이 바로 대정읍 친환경농업연구회라고 한다. 헌데 친환경농업연구회라고 이름을 걸었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분들이 그동안 고민한 문제가 양파, 마늘, 감자의 무름병이었는데, 광어 양식장에서 항생제로 쓰는 Dapsone이란 약이 거기에 잘 듣는다며 이게 어떤 효과와 부작용이 있는지 연구 좀 해달라고 부탁하신다. 그러면서 토종만 찾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재배해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걸 꼭 찾아달라고 거듭 당부하신다. 이야기를 들으며 맞는 말이긴 한데 웬지 씁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기왕 찾아온 곳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왜 제주도의 무덤에는 돌을 둘러 놓았는지... 대답은 이러했다. 무덤을 쓰려고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또 마소를 놓아기르다 보니 무덤을 해할 수도 있어 일부러 돌을 둘러 놓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어제 조사를 하던 곳으로 차를 향했다. 동네를 돌다가 사람이 있다고 표시된 대문을 찾아들어갔다.

 

대문이 이러면 멀리 나갔으니 다음에 오라는 뜻. 참 편하다. 도둑이 없어서 이런 것도 가능했겠지.

 

 

들어가 누가 계신지 소리 높여 불렀다. 인기척이 들리더니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그러고는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할머니가 한 분 나오셨다. 올해 87살이 되셨다는 할머니는 틀니가 아니면 말도 제대로 못한다며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겨워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식을 11명이나 나으셨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낳아도 폭삭 늙는 것이 느껴질 텐데 이 척박한 곳에서 자식을 건사하려고 얼마나 뼛골 빠지게 일하셨을지 생각만 해도 대단하시다. 할머니는 귀도 좀 어두우셔서 말소리를 잘 못 알아들으셨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귀가 어두우신 만큼 표준어에 오염이 덜 되셔서 도무지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냥 인사만 드리고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거동도 불편하신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 뒤로 보이는 반들반들한 마루바닥이며 깔끔히 정리된 집 안에서 할머니가 살아오신 삶을 짐작할 수 있다. 묵호가 외가였던 내 기억 속의 할머니도 이러하셨다.

 

 

다시 다음 집을 찾아나섰다. 입구부터 예쁘게 정리된 집을 찾아서 무턱대고 들어갔다. 그동안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런 곳이 뭐가 있어도 있다. 무턱대고 들어가 사람부터 찾았다. "할머니~. 누구 계세요~" 그렇게 이곳에서 이인옥(70)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여기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으로 시집을 와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집도 많이 손을 보았지만 그거야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런 것. 옛날 방식대로 고집하며 사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핸드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없으면 난 편하지만 다른 사람이 불편해 한다는 사실.

 

이인옥 할머니. 첫 집에서 생각치도 않은 성과에 안완식 박사님은 정말 좋아하셨다. 정말 이럴지는 몰랐다.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리고 대뜸 텃밭에 보이는 배추부터 여쭈었다. "할머니 텃밭에 배추는 옛날부터 심던 게 아닌가요?" 역시나 그건 통이 앉는 토종이란다. 어제 나쁜 걸 뿌렸다며 그래도 잘 자라 다행이란다. 여기서는 5월에 씨를 걷는다고 하신다.

 

 이인옥 할머니 댁의 토종 배추. 이것들도 크게 두세 가지 종류로 갈리었다. 할머니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씨를 받아 그대로 뿌려 걷어 먹는다고 하신다.

 

 

배추 말고도 30대부터 심으셨다는 팥도 얻었다. 이건 알이 굵고, 6월에 심어 10월에 거두는 중생종이다. 또 늦깨(참깨)도 있었는데, 키가 크고 10월에 거둔단다. 드물면 가지가 많이 뻗고, 너무 배면 바짝 올라간다. 6개씩 달리는 육모깨라 수확이 많다. 원래 제때 심으면 흰색인데 늦게 갈아서 연갈색으로 보인다.

 

 이인옥 할머니 댁 마당에 자라던 동백의 하나. 안완식 박사님께서 제주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알려주셨지만 까먹었다.

 

 

 동네 말미에서 우영을 둘러보는 할망을 보았다. 보리콩이 자라고 있어 씨 남은 거 없냐고 여쭈니 씨가 왜 남냐며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신다. 제주는 날씨가 따뜻해서 그럴까? 씨를 남겨 놓지 않는다. 갓 같은 건 그냥 한 번 뿌리면 그 자리에서 계속 자라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씨를 받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니 씨를 받는 일도, 씨를 남겨 놓지도 않는가 보다. 남으면 남 주거나 버린다는 여든넷 되신 할망의 말에 그런 걸 느꼈다. 이건 토종과 상관 없지만 제주도에서는 진자리콩 깍(꼬투리)이나 쫄멩이(쭉정이)는 멀먹이(말)라고 하신다. 제주에서는 말이 밭갈이, 물건 나르기, 밭 밟기에 중요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심고 남으면 남 주거나 버린다는 할망.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부지런히 밭을 돌보신다. 보리콩 밭에 깔아 놓은 짚풀이 눈에 띈다. 왜 이렇게 깔아 놓으셨는지 묻는 걸 씨에 정신이 팔려 놓쳤다는 걸 다시 사진을 보니 알겠다. 

 

 

제주의 특산 콩 준지리(준자리, 진자리)콩. 이 콩의 이름은 알이 잘다는 뜻인 듯하다. 제주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그 긴 세월을 함께 해 왔다.

 

동네를 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다 어지간한 집이 보이면 무조건 내려서 하나하나 찾아갔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다니면서 보니 한 나무 종류가 유난히 눈에 띈다. 무슨 나무일까? 지나가는 할망에게 물었다.

"할머니, 저게 무슨 나무예요?"

"잉?"

"저 나무요, 나무 이름이요."

"저기 폭낭이지."

아, 저 나무가 바로 제주도의 정자수 폭낭이구나. 뭍의 말로 옮기면 팽나무다. 제주도에는 뭍의 느티나무만큼 팽나무가 많다. 오히려 느티나무는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팽나무가 따뜻한 곳에서 더 잘 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폭낭, 곧 팽나무의 존재를 처음으로 깨닫게 한 나무. 여름에 얼마나 시원할까? 이번 여름에 다시 제주도에 가 팽나무의 그늘에서 시원하게 바람을 쐬고 싶다. 

 

제주의 겨울이 얼마나 따뜻한지 여기서는 10도 이하로만 떨어지면 춥다고 난리가 난단다. 영하로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만 되어도 내복을 입고 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열대 지방에서는 그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면 얼어죽는 사람도 있다니, 인간의 기온적응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은가 보다. 아무튼 따뜻한 날씨 덕에 예쁜 수선화 한송이를 보았다. 이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다는 데, 또 수선화의 예쁜 모습에 '이야~'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 겨울에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무슨 조화일까? 제주 사람은 사시사철 꽃을 보고 산다. 그래서 도둑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제주는 식수 때문에 바닷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연못이나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땅은 넓지만 마을은 드문드문하다. 처음 제주도 지도를 펼쳐보고는 이 넓은 땅을 2주 만에 돌아다닐 수나 있을까 막막했는데, 막상 와서 하루 지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 쪽으로는 한 작물만 싸그리 심는 농사가 대부분이니 빼고, 중산간이라는 곳으로 다녀야 하는데 이곳에는 마을이 드문드문 모여 있으니 찾아갈 곳도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거기만 가면 쉽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음으로 찾은 마을은 한경면의 조수리라는 곳이다. 특히 불그못이라 부른다는 동네다. 불그못, '불그'가 붉다는 뜻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못'은 확실히 물이 있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제주의 마을이니 옛날부터 심던 무엇인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을을 한참 뒤지고 다니다가 가장 안쪽에 있는 집을 찾았다. 이계욱(80), 강정팔(81) 어르신께서 사시는 집이다. 할머니는 성함만큼 성격이 할아버지보다 괄괄하시다. 집안의 주도권을 할머니가 쥐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우리를 영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할아버지께서 꼼꼼하고 세심하게 우리를 맞아주신다. 남녀의 역할이 바뀐 듯한 모습 또한 새롭다. 이것도 제주도의 특징일까?

 

이계욱 할아버지. 집 구석구석에서 씨를 꺼내와 하나하나 보여주시며 나눠주기까지 하셨다.

 

 

들깨는 5월쯤 심는다는데, 오래 한 80년 됐단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계속 심는 것이다. 너물이라 부르는 배추는 20년이나 되었고, 참깨도 80년 넘어 90년이나 되어 간다고 한다. 그 순간 우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던 할망이 한마디를 날리신다. "새로 나온 씨가 좋은 거지." 케케 묵은 걸 뭐하러 찾아다니는지 이상하신가 보다. 또 까망콩과 팥도 얻었다.

무 씨는 없냐는 물음에 할아버지께서는 "봄 나면 무, 배추 씨 세워야지"라고 답하셨다. 다음에 와서 또 씨를 얻을 수 있도록 두 분께서 건강히 잘 계셨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 차에 올라 다음 마을로 향했다. 이번에 갈 곳은 낙천리다. 낙천리의 중심부, 관청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여기는 널찍한 못이 하나 있었다. 제주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하겠다. "물이 있는 곳 = 사람이 모이는 곳 = 짐승도 모이는 곳" 연못 주변에는 멧돼지 석상을 가져다 놓았다. 연못 옆에 있는 설명문을 읽어보니 멧돼지들도 와서 물을 먹고 돌아가던 곳이란다. 지금은 상수도 시설이 놓여 별 쓸모가 없지만, 그렇지 않던 시절에는 정말 뭇 생명을 떠받쳐주는 생명수였으리라. 요즘은 정말 물 귀한 줄 모르고 펑펑 쓰는 경향이 있다. 특히 위생 관념이 철저해질수록 더욱 그렇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줄 아는데, "물 귀한 줄 알아 이것들아!"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멧돼지의 모습이, 뭇 생명을 품에 안고 길렀을 이 연못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저 왼쪽 뒤로는 마을 나무로 서 있는 폭낭이 보인다.

 

 

이곳 낙천리 1805번지 사시는 문대숙(87) 할머니 댁에 들렀다. 연세가 있으신 만큼 뒤란에 조그만 우영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옛날부터 심던 콩 같은 거 없는지 여쭈었다. 그러니 약콩이라며 콩 봉지를 하나 가지고 나오신다. 큰 알고 작은 알 두 가지가 섞인 듯했는데, 오라방 네에서 얻어온 것으로 속이 누렇다고 한다. 오라방 네에서는 20년 이상 심던 것이라니 일단 조금이지만 얻었다. 다른 건 별 거 없으니 여기 아랫집에 가보라고, 거기도 내가 나눠줘서 있을 테니 한 번 가보라고 하신다. 얼른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콩을 설명해 주고 계신 문대숙 할머니. 

 

 

아랫집에는 김을선(76) 할머니가 한창 메주를 쑤려고 콩을 삶고 계셨다. 콩 삶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지만 염치없이 얻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을선 할머니에게 콩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의 며느리는 충북 음성 사람인데, 한번은 사돈댁에 가니 검은콩이 비싼 걸 보고 1홉 1만 원이나 주고 사왔다고 하신다. 그 콩은 뭍에서도 구할 수 있으니 일단 지나가고, 다른 콩이 더 있는지 여쭈었다.

윗집 할머니 말씀처럼 역시 이 집에도 약콩이 있었다. 작은 알은 아주 빠르다는 특징이 있고, 큰 알은 또 동그란 것이 있고 납짝한 게 있다. 동그란 건 속이 파랗고 늦은 반면, 납짝한 건 속이 노랗고 한 10일 빠르단다. 콩만 보고도 쪽집게처럼 딱딱 알아내시며 그 특성을 읊으시는데, 농민에게 묻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이것 말고도 중간 크기의 참팥을 얻고, 마당에서는 요즘 제초제 때문에 보기 힘들다는 댑싸리도 씨를 받았다.  

 

김을선 할머니. 우리를 상대하랴 메주에 신경을 쓰랴 정신없이 바쁘셨다. 귀한 시간을 쪼개 주셔서 참 고맙다. 

 

 

아, 배가 고프다. 밥 때를 놓치면 한도 끝도 없기에 어디 마땅한 식당이 있으면 들어가기로 했다. 여기서는 밥집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관광지에 가면 음식점이 끝도 없지만 관광지만 벗어나면 어쩌다 하나씩 볼 수 있을 뿐이다. 어찌어찌 뱅뱅 돌다가 저청초등학교 앞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맛나게 먹었다.

배를 불리니 나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잠시 소화도 시킬 겸 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입구 쪽에서는 연자방아를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것만 보고 무엇인지 알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런 걸 가져다 놓은 게 어디랴. 혹시 원래 여기가 방앗간 자리인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칠까봐 그랬겠지만 시멘트로 움직이지 않게 꽁꽁 발라 놓은 모습이 꼭 우리 옛 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는 듯하다. 박물관이나 체험학습에서 겪는 우리 문화는 모두 죽어 있다.

 

 저청초등학교의 연자방아. 이 앞에는 역대 교장선생님 공덕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제주도는 기념비가 참 많다.

 

 

차에 올라 한참을 다녔지만 별 성과가 없다. 몸은 나른하고, 성과는 없어 기운 빠지고, 중간에 조수교회에 들러 마당에서 부용 씨를 채집한 것이 다다. 그리고 조수1리의 어느 길가에서 까만동부,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물으니 깜장돔비콩이라 부른다는 동부를 채집했다. 이건 알이 아주 작았다. 그리고 한림읍 동명리 202번지에 사시는 오씨 할머니(94) 댁 담장에서 자라고 있던 부추의 씨를 채집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만나도 씨가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채집에 나섰다. 이거 토종 수집단이 아니라 토종 채집단으로 이름을 바꿔야겠다.

 

계속

 

 

 지나는 길에 어느 밭에서 찍은 브로콜리 꽃. 제주도가 따뜻하기에 볼 수 있는 귀한 모습이다.

 

 

 

 

 

 

728x90
728x90

낯선 이국의 땅, 제주도 

 

 

2008년 12월 19일, 이틀의 휴식 뒤에 다시 제주도를 향하다. 8시 30분 공항으로 출발하여 9시 5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11시 30분이 이륙할 예정이다. 김포공항은 태어나서 세 번째 와 보았다. 비행기는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지 경이롭다.

 

간단하게 제주에 도착해 렌트카를 알아보았다. 비용은 어디나 정가제라 더 깎거나 할 수 없다. 유명한 관광지답다. 에누리가 없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가제가 더 편할 수도 있다. 최소한 바가지 썼다는 후회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렌트카를 타고 먼저 대정읍으로 이동해 대정 여성농민회 분들을 만나기로 했다. 조사에 앞서 제주도의 사정을 미리 파악하고자 해서이다. 도로를 타고 달리는 데 기분이 이상하다. 늘 보던 풍경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 때문이다. 제주도는 참으로 다르다. 이 묘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성농민회에서 두 분이 나오셨다. 김정임, 원정순 선생님이 그분들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제주도의 농업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듣고, 어떻게 다니는 것이 좋을지 상의했다. 그분들의 말에 따르면, 제주도는 해안으로는 대부분 돈벌이를 위해 홑짓기를 한다고 한다. 토종은 아마 중산간에 아직 살고 계신 할머니들에게 있을 것이란다.

대정읍은 주로 감자와 마늘, 조생 양파가 많고, 안덕면은 감자, 서귀포시 중문에서는 지난 여름에 독새기콩을 찾았다고 한다. 남원읍과 효선면, 성산읍은 밀감 과수원이 많고, 구좌읍은 당근과 만생 양파, 조천읍은 감자와 마늘이 많다. 제주시와 애월읍, 한림읍은 양파와 양배추, 마지막으로 한경면. 이러한 식으로 다니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계획은 이렇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다음으로 그럼 어느 지역의 어느 곳을 볼지 대충 정했다.

한경면 - 청수, 저지, 낙천, 산양, 조수

한림읍 - 상명, 명월, 상대, 동명

애월읍 - 낙읍, 상가, 어음, 장전, 고성

조천읍 - 와음, 선흘

성산읍 - 수산, 난산

효선면 - 가시, 성읍

남원읍 - 수망, 의귀, 한남

구좌읍 - 덕천 송당

 

이렇게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로 향했다.

 

김정임 선생님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무릉2리 좌기동이라는 곳이다. 햇살이 따땃하니 참 좋다. 겨울에도 이렇게 춥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바닷가니 추울 거라 생각하며 내복까지 껴 입었는데 오늘 일정이 끝나면 당장 벗어야겠다.

 

 

좌기동에서 본 제주도의 전통 대문. 빗장을 다 열어 놓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말로만 듣던 대문을 보고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이런 대문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의 말도 점차 사라지고 있듯이 문화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이곳에 사시는 박성은(70) 할머니를 가장 먼저 만났다. 이제 몸이 불편해서 농사고 물질이고 암것도 못하고 집에 드러누워 있으시단다. 그래도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분이라 따로 적어 놓았다. 부추를 '세우리', 앵두를 '은냉', 메밀을 '모물', 서로는 '삼촌'이라고 부른다.

 

 

박성은 할머니. 지금은 지팡이에 의존하며 다니시지만, 젊은 시절에는 누구 못지않는 한 집의 기둥이셨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동네에 있는 정미소를 찾았다. 이 정미소는 서귀포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를 자부하며 벽에는 현판까지 내걸어 놓았다. 산남이라고 하는 말이 서귀포 지역을 뜻하고, 제남은 제주도 남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정미소를 운영한 지는 50년 이상 되었는데, 이 근방의 다른 정미소는 대부분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인근에서 온갖 종류의 곡식류가 모이는 곳. 덕분에 헤매지 않고 다양한 곡식을 보고 수집할 수 있었다.

 

 

정미소는 좌기동 1156-3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인 할아버지는 마침 외출중이셔서 김기선(75) 할머니를 만났다. 

 

정미소 안의 김기선 할머니. 아직도 건강하시다. 정미소 곳곳에 쌓여 있는 곡식 먼지와 그 특유의 눅은내가 이곳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모두 여섯 가지를 수집했다. 덕수에서 사왔다는 메밀, 영락리에서 온 차지고 맛있다는 검은흐린조(검은 개발시리), 이것을 옛날에는 육지조라고 불렀다고 한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는데, 낭댕이(줄기)가 벌겋고 끝에 가닥이 세 개란다. 이 의문은 이후의 조사 과정에서 확실하게 풀린다.

다음은 주냉이(지네) 보리(두줄보리, 호주맥), 이건 낭댕이가 빨갛고 이삭이 길딱한데, 수확이 적다. 키가 커서 박한 데 심는다고 한다. 보성, 서광, 신평에서 사온다고 한다. 또 신도에서 사온 굵은 메주콩, 조수에서 사온 된장 담그는 푸린독새기콩과 원래 제주도 것인 노란 개발시리조를 구했다. 이 노란 개발시리조는 키가 크고 가닥이 세 개가 아니라고 한다. 낭댕이도 노랗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 마구 튀어나온다. 들리는 대로 받아서 적기는 적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김정임 선생님이 옆에서 열심히 통역(?)을 해주신 덕분에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들었지, 내일부터는 우리만 다녀야 하는데 걱정이다. 제주말은 외국어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미소 안에 걸린 칠판. 거래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다. 주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개성 있는 칠판.

 

푸린독새기콩. 달걀처럼 생긴 푸른 콩이란 뜻이다. 제주도에서는 이걸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맛있나? 아니면 다른 콩이 없어서?

 

이건 굵은 메주콩이다. 하지만 육지의 그것에 비하면 그리 굵은 편은 아니다.

 

 

이제 수고하신 김정임 선생님과 헤어져 우리끼리만 제주도를 돌아다닐 시간이 되었다. 바쁜 농사일로 함께하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하시는 걸 보내드리고 차에 올랐다. 멀리 가지는 않고 일단 좌기동 일대를 다 돌아볼 참이다.

한참을 다녀도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도 사람 만나기가 귀한 일이로구나.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는 아직 날이 따뜻해서 날만 좋으면 지금도 밭으로 일을 나가거나 남의 밭에 놉으로 나간다니 더 그렇다. 따뜻한 것도 이럴 때는 좋지 않구나.

 

한참을 다니다가 어느 집의 마당에서 만난 고구마 절간. 다카하시 노보루의 기록에도 제주도와 관련하여 이 고구마 절간이 많이 나온다.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나중에 꼭 확인해 봐야지. 처음 기록에서 이걸 보고 고구마 잘라 말린 것이라 번역을 했는데, 더 적당한 말이 있을 것이다. 

 

 

겨우 한 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만났다. 좌기동 변정자(67) 할머니 댁에 들어가 토종을 찾는다고 설명을 드리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이제 그런 건 없다고 하신다. 마당 한쪽에 놓여 있던 호박만 하나 얻어서 나왔다. 할머니 얘기를 들으니 예전에는 밀감 한 그루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한다. 참 귀한 과일이었는데 이제는 겨울이면 지천에 널린 것이 밀감이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변정자 할머니 댁에서 얻은 호박. 제주도의 호박은 대체로 납짝하고 골이 깊은 것이 특징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5시를 훌쩍 넘었다. 5시를 넘으면서부터는 날이 많이 쌀쌀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남쪽이라고 해도 해가 넘어가면 추워지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오늘은 제주도의 이색적인 풍광에 얼떨떨하다. 현대를 사는 내가 이 정도인데,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살던 사람들은 오죽했으랴. 제주도가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던 까닭을 알겠다. 요즘은 다들 외국으로 나가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참 신기했을 거다.

 

이렇게 하루를 끝마치나 했는데 좌기동 임춘후(69) 할머니 댁에서 많은 걸 얻었다. 검은 덩굴콩, 검은 돔비(동부), 준저리콩, 제비콩, 까만콩, 기침에 좋고 씨를 갈아 막걸리에 타 먹으면 관절에도 좋다는 하늘타리, 결명자, 유채를 얻었다. 날도 춥고 낯선 풍광과 말씨와 사람에 얼이 빠져 있어 제대로 기록을 하지 못했다. 물론 날이 어두워져 사진도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다. 아쉬울 뿐이다. 내일은 좀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제주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5시 40분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728x90
728x90

 울릉도여 안녕~

 

 

 

울릉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리며 오랫만에 술자리를 만들었다. 원래 이런 성격의 출장은 일만 잔뜩 하다가 가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아무튼 이번에 다니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쉴 틈도 없이 열심히 했다. 그거 하나만이라도 어디에 가서라도 자부할 수 있다.

어제 마지막 저녁 자리는 그냥 노는 자리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한 아저씨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들었고, 그 내용에서 토종과 관련한 뭔가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그리로 가서 이것저것 물었다. 뭔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눈 결과, 저 위에 안평전이라는 곳에서 농사짓는 분이라는 걸 알았다. 연락처와 함께 내일 꼭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나누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오늘은 그곳에 찾아가려고 한다. 어차피 가려고 했던 곳인데 겸사겸사 어떻게 운이 좋았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주워들으면 좋다. 눈은 한 순간도 쉬지 말고 여기저기 살펴야 하는 건 물론이다. 정말 무언가를 얻으러 떠나는 길은 참 피곤하고 어려운 길이다. 나야 이번이 처음이고 잠깐이지만 이 일을 꾸준히 해오신 안완식 박사님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렇다고 누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외롭고 험한 길을 홀로 헤쳐 오셨을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 어제 발견한 식당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저동항에 있는 곳인데 아침식사를 한다.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어디서 아침을 먹을지도 참 중요한 일이다. 아침을 먹지 않고 움직이면 배고파서 금방 지친다. 역시 몸을 쓰는 일에는 제때 밥을 먹는 게 중요하다. 머리를 쓰는 일은 하루에 한두 끼만 먹어도 괜찮지만, 몸을 쓰는 일에는 하루 세 끼를 잘 챙겨 먹는 게 중요하다. 그냥 몸으로 느끼는 바이니, 체질에 따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

 

아침을 먹으러 간 저동항에서. 저동의 저는 모시라는 뜻이다. 옛날 이곳에 모시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옷을 사 입을 수 없던 시절에 모시는 참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저동이란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아침을 먹고 나오니 항에는 새벽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어선에서 오징어를 내리느라 바쁘다. 한쪽에서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경매가 이루어지고, 한편에서는 부지런히 오징어를 나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쉴 틈 없이 오징어의 배를 가르는 칼질이 슥슥슥슥....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부지런히 오징어 배를 가르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  파란 상자 하나를 채우면 얼마라고 들었는데 까먹었다. 아무튼 저 파란 상자에 몇 마리가 들어가는데, 하루에 2천 마리 이상 배를 따는데 그러면 한 5만 원 정도 번다고 들은 것 같다. 잘 적어 놓을 걸 후회막심이다.

 

얼마나 칼질을 해야 이렇게 많은 오징어 눈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는가? 참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는데 순식간에 뚝딱 지나갔다. 그나마 상품은 다 나가고 마무리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만 남았다. 울릉도 마른 오징어의 명성은 이러한 어머니들이 지켜나가고 있다. 이 분들이 한 분 한 분 사라지시면 울릉도 오징어도 어디 공장에서 찍혀 나오듯 나올 것이다. 참, 뭍에 돌아다니는 울릉도 오징어는 믿지 못하겠으나 이곳에서는 믿고 샀다. 뭍에서 배로 들여오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 남을 테니 속이는 일이 없을 것 아닌가? 요즘은 어디 관광지에 가면 다 똑같은 중국산을 가져다 파는 통에 무엇도 사기가 싫지만 이곳에서는 아니다.

 

 오징어 부산물을 먹으려고 갈매기들이 항구에 모였다. 이 사진은 그나마 한산한 곳을 찍은 것인데, 빽빽한 곳에는 히치콕의 '새'라는 영화가 무색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새 떼가 모여서 무서웠다.

 

 

 

저동항에서 마지막 추억을 쌓고 바로 안평전으로 향했다. 안평전은 한자로 安平이라고 쓴다. 편안하게 펀펀한 곳이라는 뜻이니 예부터 살기 좋았던 곳일까? 아무리 살기 좋았어도 지금만큼은 아니겠지. 요즘은 배도 자주 뜨고, 나물 농사지어서 거두면 거의 대부분 뭍으로 나가 돈도 만지니 참 살기 좋아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던 시절에 여기서 사는 일이란... 감옥이 따로 없지 않았을까? 솔직히 울릉도에 오기 전에 울릉도라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외로운 섬, 누구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섬, 태어나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는 섬... 이란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어디나 이제는 다 똑같구나. 교통과 통신의 혜택이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평전을 찾아가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눈이 쌓여 있어 긴장했는데 다행히 얼지는 않아 올라갈 수 있었다. 여기마저 얼어 있었다면 나리분지에 가기를 포기했듯 여기도 그만 포기했을 것이다. 나리분지는 눈이 내려 끝내 가보지는 못해 아쉽긴 하지만, 갔더라도 뭐 특별한 건 없었을 듯해 쉽게 잊어버렸다. 거기는 관광지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에서 관광지가 되면 볼 만한 것이 사라진다. 이상한 법칙이지만 사실이니 어쩌랴. 그래서 난 관광지에는 왠만하면 잘 가지 않는다.

안평전에 오르니 어제 만난 김열수 선생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겨울은 보시다시피 눈이 쌓여 농사지을 수 없고 3월부터 시작한단다.

 

김열수 선생님은 안평전에서 농사지으시고, 아내는 그걸고 도동항에서 음식점을 하신다. 부창부수. 그 집이 유명한 것은 재료의 일부가 이렇게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김열수 선생님은 이곳 안평전에서 5천 평의 농사를 지으신다. 주로 고급 산채를 위주로 농사지으시는데, 나물 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결국 농민을 좀 먹는 건 농민 자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나물 같은 경우 한 달 반을 일하면 쇠기 때문에 더 이상 거둘 것이 없단다. 그럼 정확히 그 시기를 지키면서 좋은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걸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쇠고 나서도 수확하면서 울릉도 나물의 명성이 떨어졌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욕심 때문에 농민들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 아니겠냐는 말을 하신다.

참 어려운 문제다. 돈으로 뭐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세상에서 돈을 생각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은가! 물론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어느 만큼이 필요한 만큼인지 그 기준이 서로 다르니 어렵다. 백만원이? 아니면 천만원이? 참 어려운 문제다. 그 기준은 솔직한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히 알리라. 누구에게는 백만원이, 누구에게는 일억원이 필요한 만큼이겠지.

 

 김열수 선생님 집에서.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으셨는지 모른다. 울릉도 꼭대기에 이런 집이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더구나 고드름을 녹이는 따뜻한 햇살에 그동안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는 듯하여 졸음이 밀려오는 창가였다.

 

 

 

안평전에서 내려오면서 중간 중간 자리하고 있는 집에 들렀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아쉽게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나오지는 않았지 사진은 남겼다. 멋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안철환 선생님의 웃음을 남겼다.

 

 

또 한 집에서는 장독대 사진을 남겼다. 울릉도는 바람이 많은 곳. 방풍림 대신 슬레이트도 아니고 뭐더라... 이름을 까먹었다. 양철판을 대서 바람을 막으면서 햇볕이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만들었다. 돌을 깔지는 못했지만 스티로폼에 장판을 깔아 습기를 막았다. 이곳의 장맛은 어떨까?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울릉도에 사는 분들을 만나보고자 했다. 그렇게 뒤지고 뒤져 사동2리 변봉희(81) 할머니를 찾았다.

 

김치를 담으시다 우리의 방문을 받은 변봉희 할머니. 너무 환한 웃음과 넉넉한 인심으로 맞아주셔서 몸둘 바를 몰랐다. "아이고 육지 사람들이 별 걸 다 꺼내라고 하네" 라는 말씀으로 웃었지만, 어렵게 지나온 삶의 이야기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참말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꾼이고 광대가 아닐까?

 

 

이제 집에 갈 시간도 다 되었고 긴장이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순간까지도 우리를 독려하신 분이 안완식 박사님이다. 나는 참말 그런 것에 약하다. 긴장이 늦춰지면 한없이 늦춰진다. 한 번도 긴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러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긴장한다. 특히 시험 때 같은. 뭐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인생을 산 듯하지만, 시험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 앞으로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때는 어떨까? 그래도 아직은 잘 살았으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변봉희 할머니는 사다 심는 걸 모르신단다. 개울 건너 비알빈 밭에 지금도 할아범이 나가서 일하고 있다는 데 젊었을 때부터 거기서 농사지으며 자식들 키우고 가르칠 것 다 시켰단다. 지금 집은 새로 짓느라 아직 빚이 남아 있지만 자식들한테 떠넘기지 않고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갚고 가실 거라면서 든든한 모습을 보이신다. 물론 자식에게 기대고 싶은 맘이야 없지는 않으시겠지만, 그 떳떳한 모습에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다...

 

변봉희 할머니 댁에서는 처음으로 냉동실에 씨를 보관하는 모습을 보았다. 꺼내 놓으면 오래 보관이 안 되더라며 자신의 노하우라고 냉동실에 보관하던 씨를 꺼내오셨다. 그걸 본 안완식 박사님은 정말 대단하시다며 다시 없는 칭찬을 하셨다. 역시 몇 번이 되지 않는 칭찬의 한 집. 할머니는 우습다며 뭐 이런 걸 찾냐며 웃으신다. 그 웃음이 할머니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 명약이 아니었을까 한다.

 

 

변봉희 할머니 댁에서 만난 꽃. 채송화 같은데, 난 채송화가 좋다. 잘 모르겠지만 되게 닮았는데 모르겠다. 이것도 토종이라고 하셔서 사진에 남겼다. 정말 예쁘지 않나!

 

 변봉희 할머니 댁의 상추. 선별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토종이 틀림없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아 나도 농사를 지으면서 분류건 뭐건 그냥 받아서 심는 모습이 떠올랐다. 순수함이 아니라, 이 땅에 잘 적응한 잘 어울리는 것이야말로 토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제 도동항으로 돌아와 배를 기다린다. 울릉도는 이렇게 안녕~. 외딴 섬일 것이라는 생각은 싹 사라졌다. 아니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외딴 섬이 되겠지. 그럼 그때 이 섬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예전에 어업항구가 되기 전에 울릉도에서는 보리와 밀을 주식으로 했단다. 군데군데 벼도 심고 말이다. 그러다 지금처럼 어업항이 되고 물고기, 특히 오징어가 유명해지면서는 농사는 점점 밀려났단다. 지금은 벼농사는 물론 보리며 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외부와의 교통이 끊긴다면...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 섬이란 극단적인 상황이 그렇지만, 만약 이게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일어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

 

 도동항에서 기다리는 배를 타기 전에. 어찌나 바람이 심하던지 오는 날도 가는 날도 바람에 날렸다.

 

 

울릉도여 안녕~. 이제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다시 오기 전에 또 오겠다는 말은 빈말일 뿐이란 걸 안다. 난 그런 약속은 안 한다. 다시 찾으면 또 보는 것이고 아니면 그대로 좋은 추억으로 남길 뿐. 하지만 한마디 하자면... 울릉도는 언젠가 꼭 기회가 되면 또 오고 싶은 곳이다. 안녕 울릉도 잘 있어, 안녕 울릉도 또 왔네...

728x90
728x90

 

내려오는 길에 집도 몇 채 없고, 얻은 것도 얼마 없어 어지간한 집이 보이면 무조건 내려서 찾아갔다. 그러나 위에 있는 대부분의 집은 농가로만 쓰고, 사는 건 바닷가 동네에서 산다. 그렇게 찾아간 어느 집은 완전히 동물농장이었다. 이놈들이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는지 내가 들어가니 누군냐며 쳐다보고 좇아다니느라 바쁘다. 동물들 틈바구니에 나 혼자 끼어 있으니 은근히 공포스럽다. 

 

 동물농장의 알을 품는 암닭. 거푸집 아래로 오묘하게 닭둥우리가 생겼다.

 

어찌나 좇아오던지 어이 하고 쫓으니 닭들은 뒤돌아섰지만, 흑염소는 덩치값하려는지 노려보고만 있다. 내가 밥이라도 주러온 줄 아는가보다.

 

 

 

동물농장을 떠나 다시 아래로 아래로, 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저쪽 개울 건너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저기는 가면 무엇이 있겠다 싶어 징검다리를 건너 부지런히 올랐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 집도 버려진 채였다. 그런데 할아버지 두 분이 일하다 잠시 쉬고 계시는 듯 담배를 태우고 계셨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라도 붙이자. 뭔가 건질 게 나올지도 모르겠다 싶어 인사부터 하고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토종이 뭐 없을까요?" 돌아오는 답은 이제는 나물이나 하지 그런 건 잘 없다는 말. 그래도 혹시나 하며, "울릉도에서 옛날부터 먹는 감자는 이제 아예 없나요?"

 

울릉감자의 소재를 알려주신 그 집. 정말 소중한 말씀 덕에 울릉감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저 구암에 서동댁이란 할머니가 토종 감자, 분홍색을 한 번씩 남양리에 사는 정수아라는 분에게 팔러 온다는 것이 아닌가! 이게 왠 횡재인가. 이렇게 귀한 정보를 얻었으니, 서둘러 가보자.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한다. 나날이 동지가 가까워지면서 저녁해는 엄청 짧아지고 있다. 그러려면 일단 남양리에 가서 정수아라는 분부터 찾아서 어찌된 사연인지 물어야겠다.

남양리 동네에 내려오자마자 난 정수아라는 분부터 찾으러 나섰다. 한참을 헤매다 동네 슈퍼에서 물어보니 할머니라고 하네. 이름이 예뻐서 요즘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참 이름도 가지각색이구나. 그런데 왜 할머니는 간난이니 예분이니 그런 이름이 많을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부르는 대로 막 갖다 붙여서 그런가? 그때는 여자는 사람도 아니었나보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건 차차 좋아지겠지.

 

 정수아 할머니를 찾으러 동네를 헤매다가 만난 동백나무. 이런 좋지 않은 곳에서 참 크게도 컸다. 울릉도 사람들도 이렇게 살기 어려운 곳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다. "울릉도 사람들 비탈에 서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참, 동네 슈퍼에서 물으니 저 아래로 가면 옛날 교회 건물이 있는데 그 집에 살고 있으니 그리로 가라신다. 얼른 빠른 발걸음으로 집을 찾아 나섰다. 드디어 찾았다. 교회로 쓰던 건물은 현재 창고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아까 할아버지들의 말씀을 들으니 이 할머니가 중간수집상 정도의 일을 하시는 듯하다. 그래서 분홍감자도 여기에 왔을 게다. 하지만 집에 아무도 없으니 뭐 물어보고 할 것도 없다. 얼마나 실망스럽던지 서둘러 걸어오느라 흘린 땀이 아까울 정도다. 앉아서 넋두리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그새 어디 갔냐며 안완식 박사님이 채근하신다. 다시 황급히 길을 거슬러 올랐다.

 

정수아 할머니 댁. 교회도 선교사업이 어려워 나갔을까? 우리나라에는 참 교회가 많기도 하다. 절반 이상이 교회에 다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며칠 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카톨릭은 자생적으로 자라서 우리 것을 많이 수용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기독교는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퍼져서 우리 것보다 그네 것이 더 좋고 훌륭하다며 따라가지는 않았을까? 장승이나 무당, 굿 등 원래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떠들며 살던 것들을 미신이니 우상숭배라며 내쫓은 걸 보면 말이다.

 

 

헐레벌떡 오니 안완식 박사님께서 토종을 수집하고 계셨다. 늦게 온 관계로 여기의 주소도 할머니 이름도 모르겠다. 하긴 할머니가 이름 밝히기를 극구 꺼리셔서 결국 몰랐지만 말이다. 이 집에는 사람도 없는 듯하고 토종도 없을 것 같고 정수아 할머니를 찾는 일에 정신이 팔려 그냥 지나쳤는데, 안완식 박사님의 레이더에 딱 걸렸다. 여기서 수집하신 걸 보니 울릉강냉이, 메주콩, 참깨를 구하셨다. 무슨 쓰레그물도 아니시고 어떻게 박박 긁어내시는지 참 대단하시다.

 

 이름 모를 할머니. 마침 친구 분과 놀고 계셨다. 매실주를 담가 놓았다며 한 잔씩 주셨는데, 사진은 그 매실주에 담근 매실을 꺼내 자세를 잡으실 때 찍었다.

 

 

이제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구암이란 곳에 가서 분홍감자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 사실까? 침을 잘 튀겨야 빨리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찾을 길이 막막하다.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구암이란 곳까지는 쉽게 왔다. 여기부터 어디를 들쑤실 것인지가 문제다. 먼저 분홍감자를 재배하실 정도면 남들과 동떨어져 사시지 않을까 하여 쭉 위로 올라가 거기부터 뒤지며 내려오기로 했다. 조금 가다보니 두 갈래길이 나온다. 어디를 택할 것인가? 인생극장의 배경음악이 흐르고, ........

"그래 결심했어!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요!"

그런데 이게 왠일?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길로 한참을 오르다 보니 길이 깨져서 지날 수 없다. 이걸 어쩌나? 길이 좁아 차도 돌릴 수 없고, 천상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조심조심 미끄러지지 않게, 깨진 길에 빠지지도 않고 불쑥 튀어나온 공구리에도 걸리지 않고 지나야 한다. 일단, 조마조마 올라오느라 힘들었으니 잠시 차에서 내려 경치나 감상하고 마음 좀 돌리기로 했다. 

 

걸어서 꼭대기에 오르니 다름아닌 헬기장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는 참 끝내주는데, 차가 딱 걸려 있으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겠네. 갈 길은 멀고 맘은 바쁘고, 그래도 일단 한 숨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도 저도 쉽지 않아 그대로 올라온 길을, 100m도 더 되는 길을 후진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옆으로는 구르면 즉사할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고,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길로 후진을 해야 한다니... 이러다 감자도 못 찾고, 감자가 뭐야 목숨 걸고 내려가야 하는 마당에.

차에서 내려 뒤를 봐주며 뒷걸음질쳤다. 뒷걸음질치면서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은데 차로 뒷걸음질치려면 얼마나 힘들까? 이런 길을 거침없이 다니는 건 안완식 박사님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 덕분이다. 어떻게 어떻게 다 내려와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신다.

 

그럼 다시 위로 올라가보자. 지체한 시간만큼 더 속력을 내신다. 쭉 오르니 서달령으로 넘어가는 옛 길임을 깨달았다. 옛날에 일주도로가 뚫리지 않았을 때는 이 길로 다녔다는데, 눈이라도 오면 꼼짝을 못하고 남과 북이 저절로 갈려서 살았겠다. 오줌이나 싸며 쉬자고 잠시 차에 내리니 대나무 밭이 조그맣게 있다. 재미 삼아 하나 꺾어 들고 푸닥거리라도 해서 감자를 찾을 수 있도록 빌었다.

그러고 다시 차에 올라 오르니 집은 하나도 없고 울릉도에 하나 있는 화장장이 나온다. 귀신이 사는 동네에서 푸닥거리 하나는 제대로 한 셈이다. 이제 잡귀도 물렀고 운이 트이려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서부터 물어가며 찾기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내려와서 찾아간 첫 집의 할머니가 바로 서동댁이셨다. 웃음이 참 익살스러우신 할머니인 서동댁, 곧 김종수(84) 할머니가 바로 그분이다.

 

천신만고 끝에 찾은 김종수 할머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울릉감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토종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남서2리 구암마을. 거북바위가 있어 자연스레 구암이라 부르는 이 마을에서 한 60년을 사셨다는 김종수 할머니. 씨 안 떨구려고 밭도 없는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감자를 심었다고 하신다. 옛날에는 주식으로 먹었다는 이 감자는, 여름이면 쌀을 조금 앉히고 그 위에는 감자를 앉혀서 배를 채웠다. 이게 겉은 그래도 껍데기를 까 밥을 하면 파그럽고 뽀얀기 맛있단다.

다니며 만난 토종이 있는 집에서는 어떻게든 씨를 떨구지 않으려고 애쓴 집뿐이다. 그 마음 덕에 토종이 가늘게나마 여지껏 살아왔다.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은 책에서나 보거나 이야기로나 전해질 수밖에 없었을 운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민이 살아 있는 토종일지도 모르겠다.

울릉감자 말고도 진한 자주빛의 줄콩(덩굴 강낭콩), 6~8cm 정도 하지만 아주 맵다는 고추, 어릴 때부터 심으셨다는 오이를 얻었다. 이제 몸도 많이 불편하고 땅도 없어 농사는 많이 짓지 못하신다는 말에 맘이 찡하다. 건강하시라고, 건강하게 이것저것 심으시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저 손이라도 한 번 꼭 쥐고 인사드리는 것밖에...

 

 김종수 할머니의 이웃. 할머니는 올해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오시느라 씨를 놓쳤다고 하신다. 대신 옆집 할머니한테 준 것이 있으니 그거를 가지고 가라며 집에서 쉬고 계시는 할머니를 데리고 오셨다. 옆집 할머니는 땅에 감자를 잘 묻어 놓으셨다. 그 움에서 감자를 꺼내주시는 모습.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올해는 몸이 아파 감자를 심지 못했다고 하신다. 그럼 어디서 구하나? 그냥 말만 듣고 이대로 끝인 것인가? 따라오라고 하셔 부지런히 따르니 옆집에 건너가 할머니를 데리고 오신다. 이 할머니도 나한테 감자를 받아서 심었으니 그거라도 가져 가라고 하신다. 참 고맙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또 다른 말을 하신다. 저기 중용이란 곳에 가면 나 말고 분홍감자를 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농사를 많이 지으니 거기에는 더 많을 거라고 하신다. 그분의 성함은 백무암. 잘 적어 놓고 꼭 들르겠다고 했다.

 

 김종수 할머니의 곡간에 갈무리되어 있는 여러 씨앗들. 올해는 할 수 없이 묵혔지만 이제 병원에도 다녀왔으니 다시 심을 거라고 하신다.

 

 구암마을에서 만난 지게 재료. 이렇듯 농민은 길을 오가며 절대 허투루 다니는 법이 없다. 개똥이라도 주워 오지.

 

 

이제 다음 마을로 넘어가야 한다. 지도에는 지통골이라고 나온다. 여기는 또 얼마나 가파른 길을 올라야 도착할까? 다행히 막상 가니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 한 집에 사람이 있었지만, 이제 나이가 많아 몸도 가눌 수 없는 할머니셨다. 손자가 포항에서 건너와 할머니한테 오다가 그 집에서 서성거리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의 상태며 주변 상황을 대강 일러주어 이 마을은 그냥 포기하고 지나기로 했다.

 

지통골에서 만난 서낭당.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지금도 누군가 관리하는 흔적인데 도무지 근처에서 사람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제는 저 세상으로 건너갈 날만 기다리고 계신 한 할머니의 집과 그 집 옆으로 사료용 수수를 기르는 밭의 모습. 돌을 잘 쌓아서 만든 것을 보니 옛날에는 논으로 쓰던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구에게 확인할 수 없었다. 산골에 가면 논을 이렇게 만들어 놓던데 여기도 그렇지 않을까?

 

 

이제 오늘 목표로 잡았던 곳을 얼추 다 돌았다. 시간도 벌써 해가 넘어갈 때가 다 되었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서두르자. 퉁구미라는 곳만 가면 다 끝난다. 퉁구미는 지도에서 확인하니 웃퉁구미와 아랫퉁구미로 나뉘어 있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살던 동네라는 것이겠지.

그래도 잘 닦아 놓은 길로 한참을 오르니 남양2리 218번지 이 집 할아버지는 골개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아직도 두 내외 분이 농사지으며 살고 계시다. 이현우(69) 할아버지와 심외분(65) 할머니가 그분이다. 지도로는 웃퉁구미에 해당하는 곳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여느 분처럼 지도소에서 나왔다며 엄청 공손하게 우리를 대하신다. 할머니가 뭐라도 말할라치면 이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다고 막 나무라시면서 말이다. 여러 번 본 모습이기에 이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바뀌지 않았는가. 예전에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그 앞에서 움츠러들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촌에서는 아직 그런 모습이 남아 있겠지? 도시 사람은 이해 못할 그런 모습. 아무튼 할아버지께서 질문에 너무 성실히 답해 주셔서, 오늘 또 갈 곳이 있는데 시간이 없기에 가봐야 한다면 유월두(올콩)를 하나 얻어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어떤 옥수수냐는 물음에 친절히 답해 주시던 이현우 할아버지. 천천히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이현우, 심외분 어르신 댁. 전형적인 울릉도 식 집의 모습이다.

 

 유월두로 쑨 메주. 처마 밑에 선반을 달아 올려 놓은 것도 그렇지만, 받침으로 고인 옥수수 자루가 참 재밌다.

 

 

웃퉁구미를 거쳐 이 마을을 품고 있는 언덕의 정상에 올랐다. 저쪽 편으로는 아랫퉁구미가 자리하고 있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 붉게 물들고 날은 쌀쌀해지니 뜨끈한 아랫목에 마누라 생각이 절로 난다. 마을로 내려가 몇 집을 뒤졌지만, 소만 키우는 집이거나 다른 곳에서 본 씨앗만 있어 별 수확은 없었다.

 

 고개 정상에서 바라본 아랫퉁구미. 빠듯한 시간을 쪼개 이 마을도 들렀지만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보이는 길은 그래도 양반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몇 번을 얘기해서 번듯하게 놓은 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그래도 차도 서로 엇갈려 지날 수 있고 반반한 것이 참 좋다. 대부분의 길은 가서 보지 못했으면 정말 말을 말아야 한다.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이제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백무암이란 분을 만나야 한다. 이 분이 사시는 곳이 다행히 도동항으로 가는 쪽이라 가는 길에 들르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보이지도 않고 처음 와보는 길을, 그것도 차 한 대만 지날 수 있는 동네길을 가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동네 개들은 낯선 차에 짖어대고, 어렵사리 찾은 사동3리 636번지 백무암(67) 어르신 댁. 분홍감자의 내력을 물으니 사연은 이랬다.

원래 자신도 잃어버렸던 것이 어느 날인가 우연히 밭에서 한 개씩 싹이 나더란다. 아, 이거 분홍감자구나 싶어 하나둘씩 모아 모아, 3년을 그렇게 받아서 증식을 했다고 한다. 가을에 종자를 받아 봄에 심는데, 이거 참 맛있다고 지금은 육지에서 다들 사간단다. 맛이 좋아서 시장에 내놓아도 금방 팔리고, 옛날 노인들은 울릉도 지역방송에서 광고를 보고 찾아와서 사가는 정도란다. 백무암 어르신의 표현에 따르면,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좋다고 한다.

씨감자는 20kg 상자로 10상자를 놔두는데, 그걸로 1000평을 심을 수 있다. 지금은 땅에 묻어 저장하고 있어 꺼내기 힘들어 줄 수 없으니 나중에 봄에 심을 때 연락하면 보내주겠다며 전화번호를 주셨다. 토종으로 판로도 확보하며 농사짓는 백무암 어르신은 첫눈에도 무사 같은 풍모를 풍기셨는데, 말씀도 그렇게 하셨다. 칼을 뽑으면 무라도 베어야 도로 집어 넣으실 분이다. 그분의 집중력과 끈기로 분홍감자가 울릉도에서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니 참 다행이다.

 

이렇게 13일째의 밤이 깊었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 돌아갈 준비를 하고 울릉도에서 보낼 마지막 밤을 즐겨야지.

728x90
728x90

 2008년 12월 15일. 다행히 날이 푹해 눈이 녹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더 편하게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침은 저동항으로 넘어가서 먹었다. 도동항에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그리 없다. 현지인도 도동보다는 저동이 아침을 먹기에는 낫다며 그곳을 소개하여 저동으로 넘어가서 먹었다. 무슨 공사가 있는지 몰라도 인부들도 함께 먹었는데 정말 괜찮았다. 어디 타지에 가면 아침 먹는 일이 걱정이다. 놀러갔다면 늦으막히 일어나니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일하는 사람은 다르다. 토종 수집을 나간 내내 걱정한 것은 어디서 아침을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계획한 태하 쪽으로 넘어갔다. 가면서 보니 어제처럼 낙석도 없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쌓여 있던 눈도 많이 사라졌다. 달팽이관 같은 일주도로를 지나 마침내 목표로 한 서면 태하에 도착했다.

 

서면 태하에 도착해 만난 울릉도의 자랑 반건조 오징어. 울릉도에서는 피때기(?)라고 한다. 나중에 보니 이렇게 직거래로 사면 더 싼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배가 뜨기 전 오징어를 사면서 그때 살 걸 많이 후회했다.

 

 

여기에서 볼 마을은 태하라는 곳이다. 그런데 막상 오니 그냥 평범한 어촌이다. 여기 농사짓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일단 가장 확실한 관공서에 들렀다. 여기는 보건소. 들어가니 누군가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고 계신다.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렇게 여기를 찾아가려고 한다 하니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그런데 말을 들으니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하신다. 어허... 생전 처음 케이블카를 여기서 타는 것인가?

그런데 이 아주머니 뭔가 다르다. 알고 보니 보건소장이시다. 원하셨든 원하지 않으셨든 동네 아주머니 같아 보이신다. 이렇게까지 동네 사람과 하나가 되셨나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뒤늦게 퍼뜩 들었다. 나중에 또 간다면 다시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무튼 알려주신 대로 케이블카를 타러 정거장에 갔다. 헌데 불행하게도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울릉도는 정말 걷잡을 수 없구나. 강화도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었다. 강화도는 이제 섬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울릉도 만큼 뭍에서 떨어지지도 않았으니 그렇겠지. 자연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사람보다는 신에게 기대게 마련이겠다. 울릉도에 와서 보니 그렇다. 바람만 불어도 배도 안 뜨고, 케이블카도 다니지 않으니 하늘만 쳐다봐야지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제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일은 포기하고 그냥 서달령이라는 곳에 가자고 했다. 그래도 예까지 왔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를 수 있는 곳은 들르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대로 언제 여기를 또 올지 모르고, 있든 없든 들렀다는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네를 뒤지다 첫 집에 들어섰다. 허나 아무도 없었다. 무슨 장날인가? 왜 사람이 없을까?

 

 서면 태하에서 들른 첫 집.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옆집에나 들어가자. 그렇게 들른 옆집은 막 외출을 하려고 차에 타고 있었다. 이 집은 소를 많이 키우고 있었다. 종자는 별로 없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시커먼 소와 칡소가 함께 있어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이놈들이 카메라를 싫어하는지 계속 움직이고 어둡기까지 해서 이런 사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돌다 서면 태하1리 528버지 박경화(78) 할머니 댁에 들렀다. 마침 할머니도 어디 나가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전에 들러 이것저것 물을 수 있었다. 좀 건성건성 말씀해 주셨지만, 그래도 일단 검은 수수 하나는 얻었다.

 

박경화 할머니 댁의 검은 수수. 종자로 달아 놓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제 바닷가를 지나 중리라고 하는 마을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이보다 더 위로는 눈이 쌓여 있는 모습에 어떨지 조마조마.... 다행히 서달령까지도 괜찮았다. 거기를 지나 옛 길로 지나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는데, 서달령까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겨우 태화리 694번지에 사시는 신계개(79) 할머니께 미역취 씨앗을 얻고 사진을 한 방 찍으려 하니, "귀신 같이 나오니 내 찍지 마소"라는 핀잔만 들었다.

 

 그래도 눈이 많이 녹아 다행이다. 오늘도 저기 같았으면 그냥 놀아야겠지.

 

 

서달령을 돌고 다시 내려왔다. 예전에 일주도로가 뚫리지 않았을 때는 여기로 넘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일주도로 덕에 편하게 왔다. 일주도로가 아니었다면 어제 같은 날이 지나 오늘은 여기에 오지도 못했을 거다. 이게 참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슬픈 일이기도 하다. 어디까지 고마워하고 어디부터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삶이 다 그런 걸까?

다시 태하터널이라는 곳을 지나 학포동이란 마을에 들어섰다. 말이 쉽지 꼬불꼬불 급경사의 길에 들어섰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지, 더군다나 안완식 박사님은 이런 길을 어떻게 그리 잘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돌고 돌아 내려가니 바닷가 절벽에 선 몇몇 집과 교회가 보인다. 그러나 토종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다시 차를 돌려 나갔다.

대신 그렇게 나와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 들렀다. 여기도 여전히 태하리였는데, 원래 살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여기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태하2리 383번지의 김목호(83) 할아버지. 오래 간만에 온 손님에 참 반가워하셨다.

 

알고 보니 예전에는 농사 잘 짓는다고 표창까지 받은 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증표를 되게 중요시한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옆집에 몇 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없기에 솔직히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계셔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하며 집을 둘러보았는데, 참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이건 농촌의 집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어촌의 집도 아니고, 정말 섬 마을의 외딴 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울릉도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강한 해풍을 막고자 겉은 다 둘러 막고, 속에 집을 지었지만 방도 두 칸뿐. 시부모님과 함께였다면 참말 답답했겠다. 가부장제가 굳건하던 시절에 이런 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면 밤이 새도록 들어도 시간이 모자르겠다. 요즘 사람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편하게 사는 것인지 모른다.

 

 

 박연조(77) 할머니의 부엌. 부엌이라지만 따로 분리된 공간도 아니고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그나마도 외벽이 둘러쳐진 곳이라 독립된 공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곳. 이런 곳에서 남자들 등살을 이기며 사셨을 생각을 하니, 벽에 들러붙은 그을음만큼 고단하셨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씨앗을 들고 나와 말씀해 주시는 박연조 할머니. 참말 이렇게 살아왔으니 살았지 요즘 사람들 누가 이렇게 살겠는가?

 

 

할머니를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많은 씨앗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예전만큼 힘이 없으셨다. 동물원의 기운 빠진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할머니의 까랑까랑한 기상에 비하면 할아버지는 예전 기세로 사시는 듯했다. 기세 등등한 할머니께 받은 씨앗은 이렇다. 빨간 걸 이웃 젊은 사람이 줬는데 그건 맛이 없어 자기의 담배잎파리 닮았다는 청상추와 아주 아주 오래됐다는 보통 12줄이 생기는 찰강냉이. 그리고 똠방하니 익으면 노랗게 되고 퍼뜩 크는 토종외(청오이), 이건 시장에 나온 오이를 사다 먹어봐도 이런 맛은 없다고 한다. 또 희고 검은 덩굴콩, 또 털이 없는 엉걱꾸(엉겅퀴)를 얻었다.

더 재밌고 더 맛깔난 말이 많았는데, 테이프에 녹음한 듯 기억이 따르지 못해 아쉽다. 대신 그 집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더 올리려고 한다. 그 어르신들의 집 앞에는 바다가 팍 트여 있다. 바다가 바라보이니 그것 땜에 우울하지 않냐고, 바다가 보이면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던지라 그런 질문을 했다.

 

 김목호,박연조 할머니 댁에서 바라본 울릉도의 바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바다가 있어 속이 시원하다는 이야기. 여기 저기 다니면서 여러 어르신께 물었다. 바다가 보여서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바다가 있어서 속이 시원하고 뻥 뚫리며 먹을거리도 많고 좋다는 답. 그런데 왜? 난, 바다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까? 바다를 접해 보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다라는 걸 생각해 보지도 못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렸을 때 외가가 묵호인 덕에 그나마 바다를 자주 접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안에 있는 바다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

 

 

 박연조 할머니 댁 옆에 늘씬하게 자란 나무. 무슨 나무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구 아시나요?

 

 박연조 할머니 댁에 들어서는 길에 버려져 있는 말. 나 어릴 때 타던 말은 누런 말이었는데, 이제는 백마인가? 아이도, 사람도 없어지는 시골 마을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것도 박연조 할머니 댁 옆에 있던 떼배의 모습. 울릉도 사람은 이런 뗏목 같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미역도 따고 해산물을 채취하여 먹고 살았다. 지금은 울릉도에 가보니 나물을 많이 재배하거나 어업에 종사했는데, 예전에는 이런 배를 타고 식구의 입을 책임졌을 것이다.

 

 

다시 차를 타고 길을 나서 바로 윗비탈에 자리한 집까지 올라갔다. 집을 예쁘게 꾸미고 사셨지만, 씨앗은 없다고 하셨다. 이 집 빨랫줄을 보니 빨래집게가 재밌게 걸려 있다.

 

 

 

 

이제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 서면까지 나가야 식당이라도 있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지도에 표기된 마을에 들르며 나아갔다. 삼막, 말바위, 수충동.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버려진 집만 간신히 버티고 서 있고, 멀쩡해 보이는 집은 그냥 농막 식으로만 쓰이는 상태였다.

서면까지 나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서면 남서리 나발등이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지나는 길에 남서고분군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들를 수 없을 것이다. 이 고분들은 옛날 옛적 삼국시대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아쉽지만 그냥 지나쳐 나발등에 오른다. 여기도 길이 만만치 않다. 꼬불꼬불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설설 기어서 올랐다.

 

나발등의 밭과 집. 밭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이 밭을 일구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을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행히 할머니가 사시는 집을 바로 찾았다. 그런데 나물 농사만 지어서 그런 건 없다고 하시니 헛걸음인가? 경치 하나는 끝내준다. 저쪽에 아까 우리 앞을 유유히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신 분이 계신다. 거기라도 가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설 수는 없지 않은가.

 

울릉도의 전형적인 민가. 집에 외벽으로 나무판을 덧대고, 둘레에는 밭에서 나왔음직한 돌로 담도 두르고 축대도 쌓았다. 인고의 세월을 쌓아놓은 모습에 사람의 삶과 끈기를 엿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분은 아주머니였다. 마침 잘 됐다. 서둘러 찾아가 넙죽 인사부터 드렸다. 먼저 낮추고 들어가면 경계심과 의심도 풀리는 법이다. 이곳은 서면 남서1리 196 오재식(56) 아주머니의 농막이었다. 옛날에는 여기서 살았지만 이제는 농사지으러 와서나 쓰고 살기는 아랫동네에 산다고 하신다. 지나면서 본 집들 가운데 그런 집이 꽤 있는 듯하다. 오늘은 마침 배추를 절여 김치를 담그려고 올라오셨다고 하신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 이어지나보다. 

 

울릉도 나발등 오재식 아주머니 농막 앞의 나무전봇대. 국민학교 다닐 때 보고 처음이다. 아직도 이걸 쓰는 데가 있구나.

 

 

텃밭을 보니 채소가 많이 띈다. 먼저 채소 종류부터 여쭈어보니, 몇 가지가 있다며 찾으러 들어가신다. 가지고 오신 통에는 열무, 청상추, 삼나물 등이 들어 있었다. 상추는 같은 동네에 사는 분한테 얻어다 계속 씨를 받아서 심는다고 하신다. 잎이 크고 고르다고 하시는 걸로 보아서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열무는 7월 초에 심어 9월 초까지 키워 먹는다. 그런데 안 뽑아 먹고 몇 포기를 놔두면 가을 10월쯤에 씨를 받을 수 있단다. 그렇게 처음에는 사온 씨앗인데 몇 년 계속해서 씨를 받아 심어 먹는다고 하신다. 이건 여름에 물김치용으로 주로 먹는다. 마지막으로 삼나물은 봄에 빨간 게 올라와 한 뼘쯤 되면 그걸 잘라 삶아 말려서 나물이나 국으로 먹는다. 초즙(초장)에 무쳐 먹어도 맛있단다. 이밖에 호콩을 한 가지 더 얻었다. 날은 맑아도 좀 쌀쌀한 편인데 찬물을 만져야 하시니 얼마나 시려울까. 어머니들은 참 대단하셨다. 추우면 찬물로 세수도 하기 싫은데.

 

나발등의 한 밭. 사료용 수수를 걷어 낟가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하얀 곳이 바로 콘크리트로 포장한 길이다. 여기까지는 평평하지만 곧바로 45도 비탈로 곤두박질친다. 이 길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 깔려 있던 모래에 미끄러져 계곡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아찔한 일이 벌어진 장소다. 

 

 

이제 나발등과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참고로 나발등이라는 이름은 나발처럼 동그랗게 하늘만 보이는 곳에 그래도 판판한 터가 있어서 나발등이란다. 울릉도는 비탈이 많지만 그래도 그 가파른 틈 사이에 이런 곳이 있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교통수단도 좋지 않았을 옛날에는 장에 나가는 일도 힘들었을 게다.

728x90
728x90

 

아슬했던 눈길을 헤치고

 

 

 

 

2008년 12월 14일 일요일. 아침까지 눈비가 내린다. 어제 저녁 괜히 모텔 컴퓨터를 건드렸다가 돈만 물어주게 생겼다. 이 정도면 병이다. 가끔은 나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벽癖이 보인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그런 상황이 오면 또다시 슬그머니 치밀어오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벽.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8시 30분 아침을 다 먹은 뒤, 안완식 박사님이 울릉도에 매화나무가 있다며 그쪽으로 이동하자고 하신다. 몇 번의 통화 끝에 더듬더듬 찾아갔다. 어제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갈 때 어설피 짐작은 했지만 이건 뭐 바닷가를 벗어나려면 무조건 비탈을 올라야 한다. 도착한 곳은 도동항인데 이곳에서 벗어나려 해도 비탈을 올라야 한다. 도대체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눈이 와 미끌미끌한 길을, 운전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바퀴가 미끄덩거리지 않았을까 싶다. 기어 올라가 저동항 쪽으로 내려갔다. 저동항에서 쭉 가다가 가게를 끼고 좌회전해서 쭉 올라가면 된다는 설명만 듣고 무작정 찾아나섰다. 과연 그대로 가니 가게가 나와 그쪽으로 꺾어져 오르다 보니, 마을 사람인데도 이 눈길에 미끄러져 쩔쩔 매고 있다. 차 안에서 잠시 지켜보다 갈 길이 바쁜데 지체할 수 없어 차에서 내려 돌을 날라다 괴어 주고 밀어 주고 힘을 써 차를 뺐다. 그리고 그 차가 빠져 있던 곳을 지나 더 위로 위로...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건가? 울릉도는 뭐 이래... 길에 보호장치도 없고 울릉도 사람이 아니면 운전하기 참 어려운 길이다. 그런 길을 안완식 박사님은 웅웅 잘만 가신다. 옆에 앉아 맘이 조마조마할 뿐이다.

길을 오르니, 그 집으로 의심이 가는 집 몇 채가 눈에 띈다. 부지런히 가서 사람을 찾으니 아무도 없다. 첫 집부터 망치나? 비까지 오는데? 안완식 박사님이 다시 한 번 전화를 거셨다. 다행이다. 바로 아래쪽에 있는 집이란다. 살살 차를 돌려서 그 집 앞에 차를 댔다.

 

처음부터 고생하며 찾았다. 울릉도는 비탈이다. 항구는 바닷길이 열린 얼마 안 된 그때부터 사람이 있었을 뿐. 옛날에는 모두 비탈에 기대어 사람이 살았다. 

 

간신히 찾아온 저동2리 148번지 작은모시개의 배흥식(73) 할아버지 댁. 처음보는 울릉도의 독특한 집 구조에 눈이 먼저 간다. 매화나무는 뒷전이고 집 구석구석을 구경하기에 더 바빴다. 울릉도는 섬이라 그런지 집이 안에 있고 그 겉을 나무를 이용해서 덧대어 바람을 막고 있다. 무엇이든지 안에 들어가 있다. 요즘이야 함석도 나오고 그래서 조금 편해졌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면 바람을 막는 일이 참 힘들고 큰일이었겠다. 그래도 그다지 춥지 않으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다. 우리나라의 남해와 서남해에는 섬이 참 많다. 그런데 북쪽으로는 섬이 별로 없지 않은가? 동해는 한류가 흐르는 곳이 많은데, 그곳은 또 어김없이 바다뿐이지 않은가? 그런게 다 자연의 섭리인가 보다.

할아버지 댁에서 울릉도의 첫 맛을 보았다. 내가 여기에 관광을 왔다면 여기까지 와 볼 수 있었을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가는 여행의 참맛을 본 듯하여 기뻤다. 관광을 생각하면 참 그렇다. 놀고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관광이라 싫다. 신혼여행은 푹 쉬는 게 좋다며 다들 관광지에 가서 놀다 오라고 추천했다. 그렇지만 그건 돈도 시간도 아까운 것 같아, 아무튼 전라도 맛기행으로 주제를 잡고 전라도를 돌았다. 결론은 참 좋았다. 푸켓이 어떻고, 거시기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좋았다.

배흥식 할아버지 댁에서 매화나무 사진도 찍고, 노란옥수수와 마늘을 얻고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배흥식 할아버지 댁 쥐덫. 울릉도에도 쥐는 많은가?

 

 

배흥식 할아버지 댁을 나와 오늘의 첫 목적지로 잡은 천부동으로 향했다. 

비탈을 조심히 내려와 가는 길에, 저동항을 못 미쳐 옥수수를 걸어 놓은 집을 발견했다. 비가 오지만 그 집을 한 번 들르자고 차를 세웠다. 얼른 뛰어가 사람을 찾으니, 할머니가 나오신다. 저동 91번지 이정숙(70) 할머니 댁이다. 콩대도 발견했는데, 그건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노란옥수수만 얻었다. 할머니는 농사보다 바다일에 더 잔뼈가 굵으신 분이셨다. 이제는 몸이 많이 불편하셨는데, 혹시 모르겠다. 예전 젊었을 때는 물질도 하신 그런 분이시지 않을까? 추측만 하며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어르신들은 누가 찾아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신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서 눌러 앉아 듣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다. 적당히 이야기를 듣다가 끊고 나오는 것도 일이다.

이제 다시 저동항을 지나 울릉군청을 밑에 두고 본격적으로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여전히 빗줄기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좀 달리다 보니 이거 어제 농업기술센터에 올라간 길 부근에서 사고가 났다.

울릉도의 바위는 비에 깎이길 잘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의 눈비와 바람으로 길이 막혔다. 두둥!!!

굴삭기가 굴러 떨어진 바위를 치우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런 길로 다닐 수 없었겠지. 언제 돌이 떨어져 깔릴지 모르는데 누가 이런 길로 다녔겠는가. 지금이야 찻길이 뚫리고 중장비가 있으니 다니지, 아니면 산길로 하루 걸려 넘어 다녔을 게다.

 

돌이 굴러와 그걸 치우느라 한창이다. 울릉도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해안도로가 아니라면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일이 있었을까 모르겠다. 이런 것이 아니면, 물론 다니기에는 힘들었겠지만 토종은 더 많지 않았을까? 개발되지 않았을 때 다녔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제 지나다가 돌이 굴러 떨어져도 모른다. 돌에 부딪치면 운명이려니 생각해야지. 차를 타고 달리는데 이건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이런 절경을 본 댓가로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으려나?

척박한 환경이 그런 절경을 만드나 보다. 사람이 다가가기 힘들었을 때의 울릉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뭇 궁금하다.

뱅글뱅글 돌아 오르는 길을 만났다. 이야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네. 자동차를 타고 롤러코스터처럼 길을 오르고 오르니 눈이 살짝 덮인 길... 난감하다. 이거 그냥 돌아가야 하나? 인간 네비게이션을 찾으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데, 등에서는 땀이 쭉... 난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돌아갈까, 아니면 그대로 직진? 난감하다. 주어진 시간도 있고,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도를 보니 오르막길이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죽으면 다 함께 죽는다. 가자!

살살살살살살살살살살...... 기어서 오른다. 기어서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다, 천천히 기어서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린다. 어느 정도 안전한 곳까지 와서는, 휴~... 살았다. 이런 차로, 바퀴가 다 닳아 미끄러지는 이런 차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다행이다. 이제는 한 숨을 내쉬고 해안도로를 따라 목적지로 가자. 

울릉도의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이곳도 물론 말이 나오지 않는 절경이다. 눈길을 벗어나니 모두들 '이야~'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천부동에 올라가는 입구에 도달했다.

 

천부동 입구에서 본 깍새섬.

 

이제 깍새섬이 보이는 천부동 입구까지 도달했다. 여기서 더 들어가야 유람선 선착장밖에 없다. 깍새섬은 깍새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깍새는 뭐랄까, 우리나라의 날지 못하는 새라고 할까? 오스트레일리아인가 뉴질랜드에 그런 새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도 그런 새가 있었는데, 단백질을 보충하려고 배를 타고 건너가 몽둥이로 퍽퍽 잡아다 먹었단다. 깍새는 척박한 울릉도에서 유일한 단백질 보충원이라고 한다. 하여간 그런 사연 때문에 이제는 깍새가 없다고 한다. 깍새는 깍~깍 울어댄다고 깍새라는데, 그런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천부동을 오르는 길에서 차를 세우고 깍새섬을 구경한 다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를 차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안 그래도 여기까지 오려고 고개 하나를 넘으며 목숨을 걸고 왔는데 여기에 올라가다가 이도저도 못할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 네비게이션으로서 책임이 있지 먼저 앞에 뛰어가서 길이 어떤지 보겠다고 자청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먼저 본 배흥식 할아버지 댁과 같은 구조의 집. 울릉도의 집은 원래 이런 구조라는 걸 알게 해 준 집. 사람들은 이 집을 비우고 바로 옆에 신식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먼저 올라가 보니 차가 오를 수도 있겠다. 소리 쳐 천천히 오르라고 인도했다. 그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 조심조심 비탈을, 눈이 살짝 깔린 길을 올랐다. 이런 길을 오른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물론 신발에 의존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운전하는 분들은 이런 길을 오른다는 걸 엄청 대단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조심하여 오르고 나니 바닥에는 기온이 오르며 녹은 눈길이 질척거린다. 잠깐 내려서 이런 길을 올랐다는 걸 사진으로 남겼다.

 

 바닥에 난 바퀴자국, 눈비에 젖지 않으려 카메라를 감싼 검은비닐봉지. 이건 사진으로 봐선 모른다. 그날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들 놀랐다.

 

눈이 살짝 쌓인 길을 올라 바라본 바다. 찌뿌둥한 하늘에서는 여전히 가벼운 비를 뿌렸다.

 

 

이제 다시 차에 올라 본격적으로 마을로 들어섰다. 산꼭대기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차들은 교회 주차장에 몰려 있다. 강화도에서도 그랬지만 일요일과 장날은 피해야 마을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겠다. 특히 울릉도는 이제 산에서는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비탈길을 기어올라 둘러보면 빈 집이 눈에 많이 띈다.

 

울릉도에 가면 모노레일이 많이 보인다. 이제 울릉도 농사는 나물. 비탈인 지형을 고려하여 모노레일을 깔아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한다. 몇 년 전 유럽의 유기농을 보며 자동화 시스템으로 한다는 걸 봤는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빠지는 만큼 몰인간성의 댓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역시나 기본은 사람이고, 짐승이며, 생명이다.

 

 

그렇게 이 집 저 집 들락거리다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하나 발견했다. 차로 들어가기는 어려워 길 중간에 세워놓고 걸어서 찾아갔다. 찾은 곳은 북면 천부4리 석포동 2번지, 김원길(72) 김필귀(67) 어르신 댁이다. 눈길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일단 들어오라신다. 몇 번을 아니라고 했으나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온몸에 퍼지는 그 짜르르한 온기... 너무 좋다. 들어가니 커피부터 타 오신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토종 이야기가 나오자, 이제 울릉도도 육지 것과 똑같고, 토종은 개량되어서 거의 없다고 하신다. 육지에서 들어온 옥수수가 울릉도의 강한 바람과 만나 거의 섞여 버렸다고 하신다.  그래도 내년에 심으려고 놔두신 것 좀 보자고 하여 함께 광으로 갔다.

 

광 입구에는 옥수수를 매달아 놓으셨다. 울릉도에서는 옥수수를 이렇게 보관하나 보다. 신기한 모습에 사진부터 한 장 찍어 놓았다.

 

 

울릉도의 옥수수 보관 방법. 다른 집에서도 거의 이런 식으로 옥수수를 보관하고 있었다.

 

 

역시 할머니. 할머니는 꼭 뭔가를 꽁꽁 동여매서 한구석에 꿍쳐 놓으신다. 어릴 적 다락문이 열리면 나오던 군것질거리를 보며 할머니는 마술사인 줄 알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밥에 넣어 먹는다는 울콩과 떡고물 하면 참 맛있다는 홑콩과 광 입구의 메와 찰이 섞인 강냉이를 얻었다. 좋은 거 주셔서 고맙고 차도 잘 마셨다고 인사를 드리고 이만 집을 나섰다.

 

다시 차에 올라 이번에는 곡예를 하듯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어제 모텔 주인 아줌마가 현지 사람 아니면 운전하기 힘들 거라는 말을 이제야 실감했다. 이건 가드레일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안 되나? 게다가 차까지 그리 좋지 않으니 더 위험하다.

 

이 바위들을 몇 번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헌데 이제와 돌이키니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여러 각도에서 보면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던 재미가 있었다. 혹시 이 바위가 무슨 바위인지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좋겠다.

 

 

다음 목적지는 현포리 옥녀봉이라는 곳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온이 올라 눈도 녹았고, 지도를 보니 등고선도 그리 좁지 않으니 더 수월하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정도 오르자 여전히 눈이 쌓여 있다. 토종다운 집이 있어 먼저 그 집부터 들렀다.

문이 꼭 닫혀 있는 게 아무도 없는 듯하다. 허나 울타리부터 눈길을 잡아 끈다. 이 울타리는 거센 바닷바람을 막으려고 옥수숫대로 엮어 만든 것이 아닌가! 울릉도 사람들은 옛날에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집이다. 나리 분지에 울릉도 전통 가옥을 지어 놓았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이다. 이 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집, 그렇지만 관광지로 개발하자고 달려들면 큰일날 일이다. 관광 자가 붙자마자 곧 망가지는 걸 수도 없이 보았다. 아직은 관광=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이다.

 

 

 바닷바람을 막으려는 옥수숫대 울타리 너머로 눈 덮인 송곳산이 보인다. 다시 봐도 절경. 감탄만 나온다. 슥- 구경은 참 잘했다.

 

 

혹시나 하여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할머니~." 할머니가 나와야지 할아버지가 나오면 꽝이다. 잠시 뒤 부스스한 머리의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시간으로는 딱 나른한 시간을 즐길 때이다. "할머니 옛날부터 심는 씨앗, 토종 있어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물끄러미 보며 생각하신다. 이때다. 있다. 다시 한 번 강하게 묻는다.

"왜, 옥수수 있잖아요?"

"있지."

됐다. 이제 됐다. 이곳은 북면 현포2리 92번지 김용호(75), 김만복(70) 어르신 댁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여기가 토종의 집합소임을.

 

하나하나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김만복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토종을 지키고 이어왔다. 할머니도 그러한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시다.

 

 

먼저 다 두드려 뿌렸다는 옥수수를 시작으로, 메주콩 두 종류, 검정콩, 콩나물콩이 줄줄이 나왔다. 거기에 돌아서다 본 호박에 밭에 심은 부지깽이 나물까지... 또 고추는 없냐는 물음에, "고추 있지" 하며 보여주신 광에서는 할머니의 종자 보관법까지 배울 수 있었다. 

 

김만복 할머니의 종자 보관법. 

1. 먼저 할아버지가 드신 소주 댓병을 버리지 않는다. 

2. 잘 씻어서 물기가 없도록 싹 말린다.

3. 종류별로 씨앗을 담아 서늘하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걸어 놓는다. 이때 입구는 막지 않는다.(다음해 곧장 심을 테니)

 

 

돌아서려 했지만 돌아설 수 없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집에서 풍기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촬영에 열중이실 때, 난 여기저기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소를 키운 흔적이며, 소에 메웠던 것이 틀림 없는 후치(여기서는 훌찌라고 한다), 외양간이며, 울타리를 엮은 칡덩굴.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배울거리였다. 아, 시간이여. 언제 다시 여기를 올 수 없을까? 울릉도를 드나들기에는 너무 멀고, 여기서 살자니 집에서 쫓겨날 테다. 누가 나에게 돈을 달라! 그러면 먼저 마누라를 꼬시고, 함께 이곳에서 살며 울릉도 사람의 하루하루를 기록으로 남기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창출하겠으니! ㅋㅋ

 

 

 

외양간의 모습. 구유와 바닥은 신식으로 세멘으로 발랐다. 하지만 소는 보이지 않는 까닭은? 추워서 뒤란에 추위를 피하는 전용 공간에 모시고 있었다. 아직도 소를 고기가 아닌 식구로 대하며 함께 살고 계셨다.

 

집을 들쑤셔 놓고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오는 할머니. 할머니에게는 어쩌다 생긴 재밌는 일이시지 않을까? 언제 다시 찾아가 '저 또 왔어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문득 안완식 박사님께서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신 분홍감자 할머니가 생각났다. 

 

 

옥녀봉까지는 힘들어도 내려오면서 다른 집을 들렀다. 현포2리 258번지 최분삼(78) 어르신 댁이다. 솔직히 많이 기억나지 않는다. 배가 고팠나? 밥 먹을 생각밖에 없었나? 그냥 사진에 옥수수만 매달려 있다. 너무 죄송스럽다. 김만복 할머니 댁에서 겪은 일이 너무 강했을까? 이렇게 정리하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그렇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아 본다.

 

최분삼 할머니 댁 옥수수. 노인네가 참말 대단하다.

 

마찬가지.

 

 

안 그래도 점심을 먹어야지. 매번 끼니 때를 놓치기 일수다. 하지만 덕분에 난 하루 세 끼를 먹고 다닌다. 원래는 하루 두 끼를 먹는데 이번 조사 때문에 세 끼를 먹고 있다. 그래서인지 몸이 불고 있다는 걸 느낀다. 원래 이맘때에는 먹은 만큼 안 먹어서 푹 삭히는 시기인데, 그게 되지 않고 있다. 이상하게 농사를 짓고 나서부터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지면 자고, 가을에는 먹고 봄에는 안 먹는 그런 삶을 산다. 이번해에 겨울잠은 글렀다.

 

 

점심을 먹은 곳에서 한 장. 날씨가 안 좋아서 그런가 쉬는 배들이 많다. 어릴 때 묵호항에서 본 바에 따르면, 쉬는 배가 있는 건 바다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날에 나간 배는 뭐야?? ^^

 

점심을 먹고 다시 토종을 찾아 나섰다. 지도에 표기된 곳은 거의 다 찾아가서 표시표시하고,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돌아다녔다.

역시나 농사지을 만한 곳을 빼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이 문장은 한 줄 띄기이지만, 여기에 담긴 큰 의미는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토종과 관련해서...

헤매고 헤매다 마지막으로 잡은 현포항을 조금 지나 다시 도동항으로 가는 길에, 한 집에 등불이 보였다. 경험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깜깜한 어둠에 집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있읍면 켜 놓는 백열등 불빛.

그 불빛을 보고 감히 찾아갔다. 가니 할머니 두 분이 재밌게 부엌일을 하고 계셨다. 

예의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 씨앗을 얻었다. 김순남(80) 할머니. 호박하고 보리하고 참팥하고 들깨.

 

 

 너희들 왔으면 이거 맛보라면서 주시는 김순남 할머니.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은데...

 

 

울릉도를 다니며 남긴 기록이다.

울릉도는 구나 웃으며 반기는 분위기. 추운데 들어오라는 말은 가장 많이 들은 말. 이방인에게 경계를 품지 않는 건 왜일까? 개마저 사람을 보면 반가워 꼬리치며 좋아한다. 여기에서 사납게 짓는 개는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제 나이보다 적어도 열 살은 어려 보인다. 왜일까?

열린 마음, 따뜻한 시선, 긍정적인 사고의 힘일까? 울릉도 사람의 밝음, 환대는 확실히 도시의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

728x90
728x90

 울릉도를 향하여

 

 

 

2008년 12월 13일 토요일 새벽 2시, 알람 소리에 맞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 속에서 뭉기적거리고 싶은 맘을 꾹 누르고 세수를 하고 가방을 꾸렸다.

새벽 3시, 안철환 선생님을 집 앞에서 만나 화성 봉담의 안완식 박사님 댁으로 출발했다. 안완식 박사님 댁에서 이러저러한 짐을 챙기고, 다시 병점 근처의 박문웅 선생님 댁에 들렀다. 이제 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서 한영미 선생님만 만나면 울릉도에 함께 갈 일행이 모두 모인다.

대전 톨게이트롤 나와 얼마 헤매지 않고 금방 한영미 선생님을 만났다. 그럼 울릉도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포항으로 Go! Go! GO!

 

울릉도에 들어가는 배는 묵호항과 포항항 두 곳에 있다. 그런데 묵호항은 여름 성수기에만 운행을 한다기에 할 수 없이 포항까지 가야 한다. 아무래도 묵호가 더 가깝고 배를 타고 가는 길도 그렇지만, 배가 뜨지 않는다니 할 수 없지 않은가?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아침도 먹고, 안철환 선생님에서 한영미 선생님으로 운전사가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인간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수행하고...

아침 9시 10분 포항에 도착했다. 포항을 둘러볼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어 그대로 포항항으로 직행.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다 냄새나 비린내에 민감한 나, 배멀미를 이길 자신이 없어 집에서 출발할 때 이미 멀미약을 귀 밑에 붙였다.

미리 예약했지만 돈을 지불한 것도 아니고 좀 어설프다. 안철환 선생님은 자신의 차를 가지고 울릉도에 가고자 했으나, 며칠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배가 뜨지 못한 상태이기에 이미 차량 예약을 꽉 차서 어쩔 수 없단다. 할 수 없이 울릉도에 건너가 차를 빌려야 한다. 매표소에서 예약 사항을 확인하고 할인을 받았다. 한영미 선생님만 빼고는 경로우대와 복지할인 혜택을 받는다. 5명 가운데 4명이 할인이라 어디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에 가면 그대로 공짜 통과이다.

 

드디어 배에 올라탔다. 날씨가 흐리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울릉도도 처음이고, 섬에 가려고 배를 타는 것도 처음이라 속이 더 울렁거린다. 멀미약을 붙이길 참 잘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타고 갈수록 날은 더 흐려지고 바람까지 불어 배가 출렁인다. 한영미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셨다. 후~ 올 때도 잊지 말고 멀미약을 챙겨야지.

오후 13시 30분, 울릉도에 내리니 갈매가와 거센 바람이 맞아준다. 오늘은 웬지 꼭 비가 오겠다. 내리자마자 항구 근처의 성인봉 모텔을 잡아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차를 빌리러 도동항에 나갔다. OK렌트카라는 곳에서 투싼이란 차를 빌리고 꼼꼼히 구석구석 점검했다. 타이어가 심하게 닳은 것 말고는 겉보기에 큰 이상은 없었다. 바로 계약이 성사되고 바로 옆 식당에 들어가 울릉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난 오징어 내장탕. 어릴 때 외가가 묵호라서 한두 번씩 먹던 그런 국이다. 별 새로울 것이 없군.

 

오늘부터 조사에 나설 수는 없었다. 시간도 어중띠고, 긴 이동 거리에 피곤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울릉도를 돌기 전에 미리 울릉도의 사정을 알아야 하기에 더 그랬다. 안완식 박사님의 인도로 16시 울릉군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했다. 그러나 토요일이라 대부분의 직원은 출근하지 않고 당직을 서는 사람 몇 명만 출근했다. 아쉬운 대로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을 붙들고 울릉도의 농업 사정을 들었다.

 

울릉도에서는 70년대까지 옥수수와 감자가 주식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배도 다니고 특산품도 많아져서 다들 쌀을 먹고 산단다. 하지만 옛날에는 논이 적어 보리나 조금 농사지어 먹었다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짐작이 간다. 울릉도 사람들의 질긴 생존력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버텨 왔으리라.

요즘 울릉도에서는 호박과 더덕의 재배가 늘고 있다고 한다. 호박은 호박엿 덕에 그렇겠고, 더덕은 울릉도만의 독특한 맛과 향이 있다니 한 번 더덕구이라도 먹어볼 일이다. 그밖에 명이와 고추냉이는 울릉도만의 특산이고, 요즘은 산채가 특히 많이 늘었다고 한다. 실제로 울릉도를 다니면서 강원도에서 고냉지 채소를 재배하듯 산채를 재배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일천궁과 섬바디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일천궁은 자생은 아니고 육지에서 가져다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토질을 악화시키고 연작 피해로 이제는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섬바디는 워낙 섬에서 많이 자라 그냥 사료로 쓴단다.

울릉도는 다들 알다시피 화산암 토양이다. 그래서 물이 잘 빠지고, 공기도 잘 통한다. 일조량만 적당하다면 기온과 습도도 높아 별 어려움 없이 여러 작물이 잘 자란다. 작은 섬이고 어업이 발달한 곳이기에 농사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어업은 요즘 들어서 활발해졌고 농사짓기 좋다니 놀랄 일이다. 이제 세상이 좋아져서 교통과 통신 수단만 받쳐주면 이런 곳에 사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울릉도의 생태계에는 뱀과 개구리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요 근래 누군가 개구리를 사육할 목적으로 가지고 들어와 생태계 교란이 일어나고 있단다. 개구리만이 아니라 꿩과 다람쥐도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아주 걱정이 많다. 꿩도 사육 목적으로 들여온 것이 태풍에 사육장이 망가지며 탈출해 이렇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그런 생물이 하나둘이랴? 황소개구리가 그렇고, 베스나 블루길도 그렇고, 흰민들레도 그렇고,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고 서로 전혀 교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인위적으로 들어와 천적도 없이 다른 생물에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이 문제이다. 요즘 날이 따뜻해지고 있는데, 친환경농업에서 많이 쓰고 있는 왕우렁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대부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경험한 것이 있어 영 마음이 놓이진 않는다.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울릉도에 토종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물어보았다. 그 답은? 이제 곡류는 거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에는 자급을 할 때라 많았겠는데, 이제는 산에나 올라가야 있을까 잘 모르겠다고 한다. 토종의 가치는 아직 울릉도에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뭐 종자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다 그렇게 답할 것이지만 말이다.

 

숙소로 돌아오려고 농업기술센터를 나섰다. 맛있다고 소개해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걱정하던 대로 과연 밤이 되자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설상가상 밤이 깊어지자 비는 눈발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일 조사를 다닐 일이 걱정이다. 울릉도는 비탈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떨지?

 

농업기술센터에 들렀다가 내려와 잠시 바다를 구경했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을 넘으면 도동항이 나온다.

728x90
728x90

황천길로 갈 뻔하다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어제 씨드림의 첫 모임이 있던 날이지만, 난 친구 결혼식에 가느라 함께하지 못했다. 아쉽지만 어쩌랴, 친구놈이 전화해서 꼭 가야 하냐고 물으니 말이다. 그 자식 결혼해서 6개월 동안 뉴욕에 간단다. 시기가 좋지 않아 걱정이지만, 갔다가 돌아오면 되는 일이니 어찌 되겠지.

 

일요일이라 거리는 한산하다. 거기에 대설주의보까지 내려 더욱 그렇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8시 30분 집 앞에 있는 식물원 앞에서 안완식 박사님의 차를 타고 강화도로 떠났다. 처음 눈발은 그리 세지 않았는데, 고속도로를 타러 갈수록, 그러니까 바다 쪽으로 갈수록 더 거세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르는 길에서 옆으로 발랑 자빠진 차가 있지 않나, 고속도로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사고가 났다. 그렇게 본 것만 모두 4건. 그래서 차들도 거북이 걸음이다. 일찍 가면 갈수록 시간을 아끼는 일이건만, 그래도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안전운전, 조심 또 조심 엉금엉금 강화도로 향했다.

 

집 앞에서 안완식 박사님을 만나기 전에 찍은 사진. 이때만 해도 괜찮았다.

 

 

오늘은 진정한 한 팀인 안완식 박사님, 한영미 위원장님, 나. 이렇게 셋이서 조사에 나서는 날이다. 강화로 갈수록 날은 개고 눈이 덜 와서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 한영미 위원장님은 강화터미널에서 10시 조금 넘어 만나, 먼저 하점면으로 점심부터 먹으러 갔다.

 

11시 점심을 먹으며 일정을 잡고, 계획을 짰다. 그래서 오늘은 하점면을 돌기로 했다.

그런데 도무지 어찌된 일인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지난번의 기억이 떠올랐다. 또 모두 교회라도 가신 것인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심을 정도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얼른 집으로 문자를 보내 강화도 장날이 며칠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뿔싸! 강화도는 2, 7장이 아닌가! 이거 저녁 무렵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 구경하기는 틀렸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관광한다는 기분으로 다니자고 하신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멋진 집 한 채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집인데 뭐가 있을까 대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 사람을 찾았다. 마침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시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가운지, 안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곳은 하점면 부근리 513번지인데, 아저씨는 사업을 하셔서 농사는 그리 많이 짓지 않고, 노는 땅은 다 남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텃밭에 조금 심는다는 수세미오이와 메옥수수(흰색, 10줄) 몇 자루를 얻었다. 

 

 

 

 

하점면 부근리 류광희(44) 아주머니 댁. 정말 여기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정도로 좋은 집이다. 

 

 옛날에 쓰던 농기구. 조 같은 곡식을 심고 이걸 굴려서 밟는다. 그렇게 밟는 것과 밟지 않는 씨가 따로 있다. 이 집에서는 아주머니가 농사는 잘 모른다고 하셔서 어떤 작물을 심을 때 쓰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논 제초기. 당시 줄모를 내도록 권장하며 노동력을 줄이고자 이러한 기계를 들여왔다. 발로 밟는 탈곡기도 그 하나이다.

 

 

다시 한참을 헛탕만 쳤다. 그러다 간신히 하점면 상거리 54번지 소동말에 사시는 문순임(70)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집을 잘 고치셨는데, 생각하지도 않게 청서리를 얻었다. 새로 고친 집은,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새로 짓거나 고치면서 옛날 것을 싹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집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청서리는 서리태처럼 밥밑콩으로 쓰는데, 까맣지 않고 푸르다. 물론 서리를 맞아야 거두고, 동글납작하고 눈이 까맣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바로 옆집에도 뭐가 있겠다며 거기에 가보라고 하신다. 인적이 없는 듯한 집에 가서 사람을 찾았다. 아무리 불러도 사람이 나오지 않아 돌아서서 가려는데 하우스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상거리 52번지 사시는 윤인예(79) 할머니가 그분이다. 할머니는 마침 하우스에서 콩을 고르고 계셨다.

 

콩을 고르고 있던 윤인예 할머니.

 

 

텃밭에 배추를 엄청 심었는데 값이 나가지 않아 그대로 썩히고 계셨다. 1000통도 더 되는 것 같았는데... 언제나 농민이 제값 받고 농산물을 낼 수 있을까? 거간꾼을 끼면 편하기는 하지만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졌으니 문제다. 가장 좋은 건 자기가 농사지으며 모자란 걸 서로 거래하는 것일 텐데, 현실적으로 아직 어렵다.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으니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 희망한다. 꿈과 희망은 사람을 일어서게 한다. 절망적인 사고의 현장에서도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아 구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윤인혜 할머니 댁의 이팥.

 

 

계속 헛탕만 치다가 그래도 할머니 댁에서 많은 걸 얻었다. 천식환자가 약으로 쓰면 좋다는 이팥. 이건 창원에서 15년 전에 구해오셨단다. 밥에 앉혀 먹거나, 삶아 걸러서 물을 약으로 마신단다. 나물태는 물론 오라됐단다. 나물이 잘 되는데, 이거보다 알이 잘면 줄기도 가늘어 별로라고 하신다. 눈이 갈색이다. 또 울타리콩은 연보라에 보라색 줄무늬가 인상적이다. 강낭콩은 5~6년밖에 안 되었다고 하시는데, 옛날 것보다 맛있단다. 땅콩은 20년 전 보름도에서 아들이 가져온 걸 계속 심으신단다.

 

 나물태

 

 강낭콩

 

 

연세도 많으신데 혼자 사시면서 농사도 엄청 많이 지으신다. 집 옆으로 오줌을 누러 돌아가니 닭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좁은 동굴처럼 닭장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닭이 참 예뻐 이것도 토종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신다. 양계장 같은 곳은 생산성과 효율을 따져야 하니 이런 닭은 키우지 못하겠지. 결국 대규모, 대량 생산보다 소규모, 소량 생산에 희망이 있고, 그래야 토종이며 전통농업이 살아 남지 않을까 한다. 그럴려면 사회 체제가 바꿔야 하니 큰 진통이 있겠지. 하지만 위기가 닥쳐서 바꾸려고 하면 진통이 크겠지만, 미리미리 대비해 조금씩 바꿔 나가면 덜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는 지도층 인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핸드폰하고 자동차, 컴퓨터 같은 걸 팔아서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선진국이란 나라들은 벌써 석유 시대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데, 왜 그리 뒷꽁무니만 좇아가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께는 이번에 맞춰서 가지고 온 수건을 2장 드렸다. 사람이 그리웠던 것도 있고, 이렇게 많이 얻었으니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이다. 수건이라도 드리니 참 마음이 한결 가뿐하다. 이제 좀 떳떳하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는 것이 인지상정. 공짜로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은 상거리 천촌마을이란 곳으로 갔다. 뭐 역시나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간신히 만난 분은 의심이 많으신지 여간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신다. 씨앗 몇 가지를 얻었으나 이름도 주소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파란콩, 동부, 덩굴콩만 적고 나왔다.

 

다음은 상거리 764번지의 최희숙(45) 아주머니 댁을 찾았다. 조금 몸이 좋지 않은 분이셨다. 집이 너무 낡아 더 마음이 짠했다. 15년 이상 심은 메수수가 있다고 하기에 얻었는데 잘 모르겠다. 다니면서 보니 찰수수에 입맛을 빼앗겨 이제 거의 아무도 메수수는 심지 않던데 이 집에는 어찌된 연유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이 집을 나와 들어간 샘골 752번지의 정순덕(76)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 집 사람 보고도 믿냐고 뭐라고 하신다. 좀 거시기해서 업수이 여김을 당하나 보다. 뭐 그런 것이 인지상정이니 어쩌랴. 요즘 취직하려고 취업성형도 한다는데, 다 그 때문일 것이다. 첫인상이 좋으면 반은 넘게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정순덕 할머니는 집에서 친구 분과 수다를 떨고 계셨나 보다. 건너방에서 할아버지는 축구를 보고 계시고, 다른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셨다. 할머니께 사정을 설명하고 찰옥수수와 둥근호박을 얻었다.

 

정순덕 할머니의 장독대.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정렬해 있는 장독에서 할머니의 살림솜씨를 엿보았다. 

 

 

15시쯤, 안완식 박사님 댁에서 긴급호출이 왔다. 날씨가 추워 하우스의 수도관이 얼어 터졌다고 하신다. 차를 세워 놓고 한참을 전화 통화하시며 일처리를 하고 계셨다. 그 사이 난 잠깐 나왔다. 밖은 시커멓고, 눈발은 눈보라치듯 날리고, 천둥까지 우르릉 쾅, 난리가 아니다.

잠시 차를 세워 놓은 집에서 웬 차가 서 있나 아주머니께서 나와 보셨다. 얼른 달려가 이런 사람들임을 밝히고 종자가 있는지 물었다. 논농사를 크게 지어서 별 게 없으시단다. 그래도 콩이라도 있으면 보여달라고 졸라 광까지 들어갔다. 집을 1층은 주차장에 2층 건물로 잘 올려 집이 참 좋다고 하니, 집을 잘 지었어도 농민이라며 별볼일 없다고 하신다. 토종 씨앗은 진짜 별로 없었다. 메주콩이 조금 특이해 이걸 하나 수집했다.

 

15시 30분. 일단 조사를 완료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더 이상 조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대신 1차 조사 때 숙제로 남겨 놓은 망월3리를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눈길을 조심조심 달려 망월리 노인정에 도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봉현 할아버지는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집이 어딘지 여쭈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집에도 계시지 않았다. 어디 자제분들 집에 놀러 가셨나 보다.

 

유봉현 할아버지 댁이 있는 망월3리. 그러나 끝내 할아버지를 만나지는 못했다. 눈이 어찌나 오든지...

 

 

지도로 확인한 길을 따라 숙소를 잡으러 이동했다. 내가면사무소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바닷가라 그런지 그곳에 숙소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엉금엉금 기듯이 고개 입구에 도착하니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체인이 없는 차, 체인이 있어도 위험하다고 넘을 생각을 하지 말란다. 할 수 없이 고갯길이 아니라 들어온 길로 되돌아나가 평지를 빙 둘러서 가는 수밖에 없다. 

차를 돌리고, 네비게이션을 조정했다. 쭉 길을 따라 달리는데, 16시 48분 갑자기 네비게이션이 외친다.

"200m 전방에서 황천길 방면으로 좌회전입니다."

뭐야, 죽으라는 건가? 이 네비게이션이 눈이 오니 미쳤나? 지도를 펴서 확인하니 우리가 지나야 하는 곳이 황청리란다. 차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황천길이 어딘지 한 번 가보자.

 

안완식 박사님의 빼어난 운전 솜씨 덕에 무사히 한도모텔이란 곳에 도착해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길은 얼지 않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황청길로 달려가던 차 안에서. 밤이 되면서 조금씩 잦아들었다.

728x90
728x90

마지막 날, 오리무중

 

 

 

 2008년 12월 10일. 강화도 조사의 마지막날. 어제 잠을 잔 모텔에서 나와 아침은 선착장 옆 식당에서 해결했다. 비린내에 예민한 나에게 그 집의 주 요리인 회가 물잔에 남아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왜 횟집의 물에서는 비릿한 맛이 날까?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도 밖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이렇게 안개가 하루 종일 가지는 않겠지. 차에 올라 내가면 외포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전원주택인 듯한 집과 원래 마을 주민의 집이 섞여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그 가운데 가장 그럴싸한 집, 내가면 외포리 442번지의 강동월(73)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9시도 되지 않은 너무 아침 이른 시간이라 좀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동월 할머니. 아침부터 뭐하냐고 잔소리하셧다. 죄송합니다.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리고 좀 도와달라고 하니, 그대로 본인이 가지신 걸 이것저것 내보여주신다. 두 가지 종류의 들깨가 있었는데, 하나는 올들깨이고, 다른 하나는 늦들깨이다. 올들깨는 물론 한 보름이 이르고, 벼깔 하기 전인 추석 무렵에 거둔다. 다른 하나인 늦들깨는 회백색이고, 기름이 더 많이 난다고 한다. 올들깨는 시간이 없을 때 후딱 해치우는 데 특징이 있고, 늦들깨는 충분히 키워 더 통통하다는 데 특징이 있겠다. 다음으로는 흰찰옥수수와 감자 심을 때 심는다는 강낭콩, 메물(메밀)을 얻었다.

 

 강동월 할머니의 씨앗 보관 장소는, 안마당에 있는 버린 씽크대였다. 이것저것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이미 수집한 것과 겹치는 것도 있어 이 정도만 얻었다.

 

 

강동월 할머니께 참 여러 가지를 심으신다고 하니, 이 정도도 이제 이것 저것 심기 귀찮아서 줄인 거라고 하신다. 그럼 예전에는 얼마나 다양하게 심으셨다는 소릴까? 웬만한 것은 다 집에서 해결하셨나 보다. 손이 엄청 야무지신 느낌의 할머니, 언제 그 살아오신 이야기 좀 듣고 싶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그냥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강동월 할머니 댁 메주. 허연 곰팡이가 가득한 것이 아주 잘 떴다. 이거 하나만 봐도 할머니의 야무진 손맛을 느낄 수 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하여 잠깐 안개가 걷히길 기다릴 겸, 동네 앞에서 안개가 잔뜩 낀 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난 내 사진기로는 한계가 있어 안완식 박사님께서 찍으시는 모습을 열심히 머리에 찍었다. 인간의 기억은 왜 이리 불완전할까? 세포의 죽음과 함께 내가 가진 기억도 날아간다. 한 세포가 죽으며 새로운 세포에게 서로 전달해주지는 못하나? 인수인계는 참 어려운 일이다. 공자 님도 인수인계를 잘하는 걸 어진 일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안개는 걷힐 생각을 안 한다. 그냥 이대로 강행이다. 차를 달리다 오래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에는 다락말이라고 한다. 다락논, 다랭이논 하듯이 주변보다 좀 높은 곳에 안으로 쑥 들어간 마을이다. 이런 곳에는 뭔가 있겠다 싶었다. 마을로 차를 돌려 들어가는데 경로당 앞에 웬 버스 한 대가 서 있다. 방송에서는 시끄럽게 빨리들 모이라고 난리다. 뭐지? 느낌이 별로다. 한 집을 찾아 들어가 곶감을 얻어 먹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니 할머니들이 단체로 놀러 가는 날이란다. 에이, 날을 잘못 잡았다. 이 마을에서는 뭐 나올 게 하나도 없겠다 싶어 그 길로 차에 올라 다음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더 들렀지만 아무 성과가 없다가, 외포리 389번지의 구정태(76)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집 앞에 콩을 턴 콩대가 쌓여 있어 무언가 있겠다 싶어 찾아 들어갔다. 전형적인 강화도의 ㅁ자 집인 이곳에서 들깨와 검은콩에 섞여서 오라(오래) 받기 시작했다는 나물콩, 연두색에 눈이 갈색이 나물대콩, 더덕, 도라지 씨앗을 얻었다. 얻긴 얻었지만 뭔가 흥이 덜하다. 안개도 잔뜩 낀데다가 뭔가 오늘은 일진이 영 아니다.

 

 구정태 할머니. 몸이 불편해지시는 듯한 모습이어서 걱정이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내가면 외포리를 벗어나 양도면 인산리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인산리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몇 집을 들렀지만 요즘 그런 게 어딨냐는 반응이다. 큰 길이 뚫려서 그런가 진짜 없다. 교통의 발달이 그다지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큰 길 옆에 있는 집치고 토종이 있는 집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음 행선지인 양도면 건평리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이곳도 논이 넓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건평리에 도착해 가장 구석에 있는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건평리 560번지 김인순(66) 할머니 댁이다.

 

 큰박을 부수어 씨를 받고 할머니께 수건을 전달하는 모습.

한가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다 나오시는 모습이다. 이 때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졸음이 오는 시간이기는 하다. 할머니는 돼지를 여러 마리 키우고 계셨다. 다른 일로 바쁘실 만큼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우리가 찾아온 목적이며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넝쿨강낭콩과 큰박을 얻었다.

 

 큰박과 그걸 부순 낫.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강아지가 내다본다. 뭐든지 새끼 때는 왜 이리 귀여울까? 전에 EBS에서 왜 동물의 새끼들이 귀여운지 방송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귀엽다는 건 보는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공통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1. 몸통보다 훨씬 큰 머리, 2. 머리보다 훨씬 큰 눈, 3. 짧은 사지와 두루뭉술한 몸매, 4. 서툰 몸짓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면 귀엽다고 느끼고 보호하고 돌봐주고 싶은 욕망이 든단다. 그것은 바로 새끼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기에 귀여운 외모를 선택해 부모의 양육본능을 자극하여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하긴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영악한지는 부모가 아니면 다 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예뻐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옆에서 보면 '야, 저 놈 참 약았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김인순 할머니 댁 강아지. 마침 개가 새끼를 낳았다.

 

김인순 할머니 댁을 나와 바로 옆집으로 갔다. 안완식 박사님이 지금 사시는 곳이 택지 개발지역으로 묶이면서 앞으로 언젠가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신다. 그런데 옆집이 그럴 듯하게 집을 짓고 사는 걸 보고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잠깐 구경하자고 하셔서 찾았다.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니 선뜻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이 집은 인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아들이 지었다고 한다. 집 안 한켠에 아들이 학교 다닐 때 받은 상패 같은 것을 늘어놓은 걸로 봐서 무척 자랑스러워하시나 보다.

시어머니이신 김영례(82) 할머니께서는 호박의 속을 파고 계셨다. 옆에 앉아 호박을 반으로 갈라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혹시 이 마을에는 일본놈들이 들어오지 않았나요? 아유 말도 말라고. 산에 쇳물 들이붓고, 공출로 싹 가져가서 먹을거리도 없었단다. 여기까지도 들어와서 활개를 쳤다고 하신다. 아주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계신 듯하다. 전에 나의 할머니께 물었을 때는, 어린 시절이었는데 일본인 아이랑 놀이도 같이 많이 했다고 한다. 경북 풍기 분이신데, 이렇게 지역마다 차이가 있나 보다. 어떤 사람이 들어왔느냐에 따라 그 기억도 다를 것이다.

 

 호박 속을 파내고 있는 김영례 할머니. 시골 사시며 생활도 여유가 있고 계속 일을 하셔서 그런지 건강하시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대번에 모습에서 표가 난다. 여유는 어떻게 구하는 걸까?

 

 

집구경을 하러 왔지만 본분을 잊을 수 없다. 이 집의 안주인이신 전애님(60) 아주머니에게 토종이 있냐고 물었다. 이제 많지 않지만 예전부터 심는 걸로는 완두가 있다고 한다. 깔끔하게 보관해 놓은 완두를 좀 얻고, 호박도 이전에 보던 것과 좀 다른 듯해 얻었다.

 

이제 건평리를 벗어나 삼흥리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으니 바로 집들이 보인다. 가장 처음 나오는 집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들어갔다. 이곳은 삼흥리 1327번지 배은순(67) 할머니 댁이다. 농산물을 꾸려서 어디 나가시려던 중이라 정신 없이 바쁘시다. 그래도 똥파리처럼 계속 들러붙으며 토종을 물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와도 끈질기게 들러붙는 게 중요하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별 좋은 답은 없었고, 대신 벽에 씨로 쓰려고 받아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내력을 묻고 두 가지를 얻었다. 바로 차조와 메옥수수이다.

 

 배은순 할머니가 매달아 놓은 조와 옥수수. 얼른 주변 상황을 파악해 그걸 가지고 묻는 것도 수집할 때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 토종에는 별 관심이 없으셔서 뭐가 토종인지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짐을 꾸리느라 바쁘신 할머니를 뒤로 하고 옆집으로 건너갔다. 옆집은 깔끔하니 뭐가 나올 듯하다. 이곳은삼흥리 1325번지 남궁태종(69) 할아버지 댁이다. 할머니는 마침 집을 비우셨는데, 할아버지가 그렇게 깔끔하실 수 없었다. 손재주도 좋으셔서 여기저기 할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남궁태종 할아버지 댁의 씨앗 보관 장소.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그 내력을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안완식 박사님께서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것만 골라서 수집하였다. 할머니가 계셨으면 더 많은 것이 나올 법한 집이다.

 

 

할머니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지만, 안완식 박사님의 경험과 노하우가 빛을 발해 그 공백을 어느 정도 메웠다. 남자가 씨앗은 알지 못한다는 할아버지에게 양해를 얻어 할머니의 씨앗 보관 장소를 찾아 뒤적였다. 그렇게 네모깨와 육모깨를 얻고, 앞마당에 있는 창고에서 댑싸리를 찾아 씨를 받고, 옥수수도 얻었다. 어느 집이든 안완식 박사님께 한 번 걸리면 뭐 하나라도 내놓게 마련이다. 참 대단하시다.

 

 남궁태종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달걀꾸러미. 이것 말고도 요즘 보기 어려운 옛 물건을 손수 만들어 놓으셨다. 기술이 필요한 사람은 여기에 가서 묻고 배우는 것도 좋겠다.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께서 물건을 옮겨야 하니 얼른 차 좀 빼라고 성화이시다. 잠시 꾸물거리는 사이 어느 새 짐을 다 옮기시고 사라지셨다. 엄청 억척스러우시다.

남궁태종 할아버지 댁의 앞마당에는 닭장이 있는데, 모두 토종닭이라고 자랑하신다. 모두들 닭장에 있지만 암탉 한 마리와 그 병아리들은 마당을 한가로이 노닐고 있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참 잘 생겼다. 깨끗하고 잘 생긴 것이 이런 닭은 또 처음 봤다. 토종닭이 필요한 분이 있으면 여기서 몇 마리 얻어 가면 좋겠다.

 

남궁태종 할아버지의 귀염둥이 토종닭. 다시 봐도 잘 생겼다.

 

 

다시 차에 올랐다. 양도면사무소를 지나 길상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 달렸다. 양도면사무소 인근으로는 아무것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딱 하나 진틀이란 마을에 들어갔다가 동네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다. 그거 말고는 정말 없었다.

조산리까지 지나 도장리 대흥마을이란 곳의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도장리 82번지 이을님(84) 할머니 댁이다. 몇 달 전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해 고생하다 가신 때문인지 그래도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적어도 60년을 함께 사셨을 텐데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좋던 싫던 내 영감이었을 게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할머니가 쓸쓸해 보인다. 사람이 찾아오니 반가움에 눈물이 글썽이시는 것도 같다. 그런 마음에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토종 이야기를 하니 자신의 아버지도 농업과 관련한 일을 하셨단다. 순간 눈이 번쩍 하며 혹시 성함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시냐고 여쭈었다. 혹시 모르지 다카하시가 왔을 때 만난 사이일 수도 있다. 그분의 성함은 이동팔이고 농사시험장 직원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집에 와서 자료를 확인해 보니 아쉽게도 그런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 할머니 댁의 토종을 찾았다. 할아버지 병구완으로 농사를 거의 못 짓다시피 했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를 얻었다. 할아버지까지 건강하게 함께 계셨다면 두 분이 부지런히 농사지으시며 잘 사셨을 텐데, 새삼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할머니에게 쇠똥동부, 빨간동부, 메밀, 댑싸리를 얻었다.

 

댑싸리를 두드려 받은 씨를 키질로 깔끔하게 골라주시는 모습. 홀로 남은 인생을 잘 사시길 바랍니다.  

 

 

양도면 도장리에서 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바로 화도면 문산리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만 간다. 멀리는 보이지 않고 몇 십 미터 주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문산리의 덕달마을이라는 곳을 찾았다. 어느 정도 농사를 지을 법한 집을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어서 그냥 나오고, 그 윗집을 찾아 들어갔다. 아무리 소리치고 두드려도 사람이 없는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기웃거리니 씨앗 보관 장소가 눈에 띈다. 안완식 박사님이 이것저것 살펴보시더니 이 집 주인을 꼭 찾아서 만나봤으면 하신다. 강화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디에 가서 어떻게 찾을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 이장님 댁에 가서 방송이라도 할까? 일단 그냥 수집봉투에 조금 담았다. 씨 도둑질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러고 집을 나오는데 아래에서 사람이 한 명 올라온다. 아, 집 주인이신 이혜숙(72) 할머니였다.

집이 참 깔끔하고 예쁘다고 말을 건네며 우리가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이곳에 온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하신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 쓰러지면서 손주들을 돌보며 살고 계신다는데, 생활이 그리 녹록치 않다며 걱정이시다. 그러면서 씨앗의 내력을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얻은 것이 개골팥과 쥐눈이콩이다. 강화도 사람들이 보통 개골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재팥이고, 진짜 개골팥은 이 집에서 얻은 것이 개골팥이라는 안완식 박사님의 설명. 확연하게 다르게 생겼다. 재팥과 개골팥, 두 가지는 내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왔다.

 

 잘 가라며 환히 웃으시는 이혜숙 할머니. 뭔가 세련되고 기품이 엿보이시는데 인생의 굴곡은 왜 그리 구비구비이신지. 그런 속에서도 저렇게 웃으실 줄 아니 할머니는 괜찮으실 거다.

 

 

덕달을 나와 길을 건너 바로 건너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은 양지촌. 안개가 자욱해 사람들도 마음을 닫아 걸었다. 어둠만 사람을 그리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햇님의 큰 존재감, 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해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마실 나오신 양지촌 덕포리 1954번지의 서상례 할머니를 만나 집까지 함께 가 강낭콩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가다 화도면 상방리 308번지의 노순덕(80) 할머니 댁에서 유월두를 얻었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동촌이란 곳인데, 여기는 이제 축사밖에 없다. 그나마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이 마을을 지키고 계셨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 하지만 안개 때문에 뭐 보이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첩첩산중에 오리무중이다. 한 버려진 집인지 주인이 비운 집인지의 텃밭에서 아욱을 채집하고, 조금 더 가다가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이다.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우리나라에 이렇게 살고 있는 외국인이 얼마나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 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도시보다 시골에 와서 더 실감한다. 내가 사는 안산은 인구 70만 가운데 4만이 외국인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4만이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아무튼 시골은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외국인 한 명만 있어도 엄청 많아 보인다. 이번에 강화도를 조사하면서 외국인을 솔찮이 많이 만났다. 물론 대부분 국제결혼을 한 여성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단 한국인이겠지만, 어머니가 외국인인 데에서 오는 거리감이나 따돌림 등이 있을 테고,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하다. 과연 시골은, 농촌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우리가 버린 농촌을 이제는 외국인이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버린 3D 업종의 일을 외국인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갈 날이 올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의 일을 알 수 없는 법 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를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밥을 먹고 다시 차에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고갯길을 넘어가다 무당집을 발견했다. 무당도 마을에서 쫓겨난 지 오래되었다. 점이나 굿이 과학적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걸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사람에게 어떤 걸 해주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접근해야 한다. 시대가 불안해질수록 무당과 점집이 호황을 누리는 건 왜일까?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종교나 무당과 점집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이론적인 틀을 갖춘 종교보다는 못해도, 무당과 점집이 상업주의에만 휩쓸리지 않는다면 더 가까이에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다.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쫓아내기만 했으니, 그런 대접을 받은 아이가 맘이 비뚤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자식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편협한 이상한 기독교가 득세를 하고 있는 우리의 실정이니 그건 언제가 될지 어려워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무당만큼 사라들 가까이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대소사를 같이 한 종교가 있을까? 지금은 미아리나 어디 후미진 곳 구석구석에 숨어 있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의 농업처럼 말이다.

 

 

이 고갯길을 넘어 주회명(60), 한경숙(59) 내외의 농막을 찾았다. 은퇴한 뒤에는 이곳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데, 강원도에서 얻어왔다는 주먹찰옥수수 몇 개를 얻었다. 언덕에서 내려가 들어간 동산촌이라는 마을의 조경숙(71) 할머니 댁에서는 흰콩을 얻었다.

이후의 여정에는 안개가 더 바싹 우리 곁에 들러붙었다. 이제는 몇 십 미터도 아니라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화도면 내리부터 시작해 장화리, 여차리, 흥왕리, 동막리, 사기리를 지나 길상면 선두리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화도면의 바닷가 쪽에는 주로 관광지만 흥하고 있어 더 그랬다. 틈틈이 내려서 확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지나친 집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말 보이는 건 차 앞의 몇 미터뿐. 옆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이로써 2차, 열흘에 걸친 강화도 조사를 모두 끝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이틀 쉬고 다시 울릉도로 출발이다. 머리털 나고 배를 타는 건 물론이거니와 울릉도라는 곳은 처음이다. 그만큼 기대가 되고 설레인다. 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 그리운 얼굴들을 보자.

728x90
728x90

생명과 맞닿은, 생명을 잇는 본능, 농사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오늘은 석모도로 건너가는 날이다. 안완식 박사님과 둘이 아침 일찍 일어나 8시 배로 석모도로 건너가 8시 10분 도착했다. 교동도보다 더 가까운 곳이다.

 

강화에서 석모로 건너가면서 ... 해돋이와 함께

 

 

선착장에 도착하니, 마침 강화로 나가는 분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 저 분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찾을 곳에 사는 분이 계시면 어쩌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본격적으로 석모도 조사를 시작하려고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공사가 한창이다. 도로를 넓히고 있었다. 당장은 어떤 이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이렇게 큰 도로를 뚫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왜 경기 남부 지역에 연쇄살이이 잦은 것도 그런 요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고개를 넘자마자 왼쪽으로 논과 집 몇 채가 보인다. 일단 시작은 여기부터이다. 도착한 곳은 삼산면 석포리 공개마을 558번지이다. 집 앞에는 반어반농을 하시는지 어구가 잔뜩이고, 집 안에 들어서니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바닷가에서 살지 않아 그런지 비린내는 언제 맡아도 거부감이 든다. 오죽하면 집에서 생선 굽는 것도 싫어한다. 물론 먹을 땐 맛있지만 굽고 나서 그 냄새가 빠지길 기다리려면 그 시간이 더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조림, 그것도 아주 가끔 먹고 만다.

 

공개마을 문순옥(67) 할머니 댁. 할아버지는 작은 고기잡이 배를 가지고 계시단다.

 

 

너무 아침 일찍이라 실례인지 알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창 아침을 먹고 치우고 있으셨는데, 방문 목적을 설명드리고 협조를 부탁하니 선뜻 이런저런 씨앗을 보여주신다. 그 가운데 20년 이상 재배했다는 마늘을 얻었다. 그래도 첫 집인데 무언가를 얻었으니 시작이 좋다. 그동안 공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좋은 기분을 안고 이웃집으로 차를 돌렸다. 말이 이웃집이지 걸어서는 3~4분 걸리는 길이다. 그렇게 찾은 곳은 공개마을 석포리 555 고영자(66) 할머니 댁이다. 할머니에게 공개마을의 유래를 들었다. 마늘을 심으면 마늘이 공처럼 동그랗다고 공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참 재미있는 설명이다. 이 할머니는 농사에 더 전념하시는지 씨앗 종류도 훨씬 많고, 꼼꼼하게 잘 갈무리해 놓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잘 갈무리해 놓은 씨앗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시는 고영자 할머니. 뒤에 보이는 찬장과 씽크대에 씨앗을 모아 두셨다.

 

 

이르고 다닥다닥하지 않으며 느리게 달리고 네모에 가지를 좀 친다는 늘참깨, 이건 시어머니 적부터 물려 내려온단다. 진액이 많고 가운데는 좀 푸르고 빨가며 꽃이 그다지 빨리 피지 않는다는 적치마상추. 3가지가 섞인 덩굴콩, 머리는 동그랗고 꼭지는 길쭉하고 잘록하며 작다는 조선오이, 집 안 한쪽에 던져 놓은 멧짝호박을 얻었다.

 

 고영자 할머니의 보물창고 찬장 서랍. 혹시 뒤섞일까 봐 씨앗을 담은 봉지에는 하나하나 이름을 적어 놓으셨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두 번 세 번 참 씨앗을 잘 정리해 놓으셨다며 칭찬이시다. 함께 다니면서 뵈니 이렇게 칭찬하는 집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이 집은 정말 잘하는 집인 것이다. 역시나 아침부터 출발이 좋다. 석모도에서는 기분 좋게 일하다 갈 수 있겠다. 하긴 나도 기대를 하고 왔다.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발길이 닿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지 궁금하다.

 

공개를 한 바퀴 돌아나오니 다시 석포 선착장이다. 다시 고갯길을 넘어 이번에는 앞으로 쭉 내달렸다. 한 번씩 세게 밟으시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쭉쭉 나간다. 아직 운전면허도 없지만, 내가 보기에 운전 실력도 수준급이지 않으실까?

 

한참 달리다 바닷가 옆으로 한 집이 보여 찾아 들어갔다. 사람을 찾아 소리쳐 불렀지만 묵묵부답.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더듬더듬 찾아 들어가니 할아버지 한 분이 일하고 계셨다. 이곳은 안나루뿌리라는 곳인데, 유재익(87) 할아버지는 이제 귀가 어두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어르신의 말도 우리가 알아 듣지 못하겠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말도 잃어버리는 법, 더군다나 새로운 말을 배우지 못하셨는지 엄청 사투리가 심해서 더더욱 알아 듣기 힘들었다. 아무튼 할머니께서는 배 타고 강화에 나가셨다는 건 알아 들었다. 뭔가 있어 보였지만 지체할 수 없어 옥수수 하나만 얻어서 그대로 나와 차에 올랐다.

 

무슨 수련원을 지나 왼쪽으로 움푹하게 들어간 논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지께서 지팡이에 의지해 어렵게 어렵게 한걸음씩 떼고 계셨다. 그 집에 따라 들어가 토종이 있는지 여쭈었다. 안에는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어렵지 않았다. 손순덕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비해 훨씬 건강하고 정신이 또렷하셨다. 기억력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직도 자식들에게 농사지어 먹을거리를 보내주신다고 한다. 자식은 늙어도 자식이다. 아직 자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왜 그럴까? 다른 생각할 틈도 없다. 이것저것 보여주셨는데 그 가운데 피마자, 땅콩, 늦들깨를 얻고 이렇게 찾아온 것도 기념인데 두 분의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고 하여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는 100살이 가까워 자식들한테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치신다. 그나마 할머니가 있어서 먹고 산다며 또 눈물을 훔치신다.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는지 자꾸 미안하다는 말씀만 되뇌이신다. 남자는 나이 들면 비참해지는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차에 올라타 강행군의 시작이다. 오늘 하루 안에 석모도를 다 돌아봐야 하기에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동촌이란 곳을 지날 무렵 김준식(72) 할아버지가 길가에 나와 계셨다. 몸도 정신도 건강하시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니 차에서 내려 얼른 다가가 토종을 물었다. 그런 건 저 건너편에 할머니한테 물어보라고 하셔 그 집에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찾아가니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할머니가 어디 나갔다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수수, 찰옥수수만 일러주신다. 안완식 박사님이 신발장 안에서 꽁꽁 싸 놓은 씨앗들을 찾았지만, 유래도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어 아쉽지만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긴 있는 집인데, 아침에 할머니들이 우루루 강화로 나가는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삼산면사무소 앞을 지나 간척이라도 했는지 널찍한 논 사이로 난 곧은 길을 따라 달렸다. 이런 곳에는 뭐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중얼거림. 역시나 이 근처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하도 아무것도 없어 농기구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흙덩이를 깨부수는 곰방메에 이를 달아 써레처럼 만들어 놓은 농기구이다.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는데, 이곳의 흙은 이걸로 툭툭 치면 잘 부수어진단다. 그곳의 환경은 사람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도록 한다. 필요에 따라 다양한 농기구가 지역마다 특색 있게 쓰인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음식도 지역의 특색이 담긴 것이 거의 사라졌지 않은가. 이제는 어딜 가나 똑같은 상차림에 똑같은 맛이다. 그만큼 표준화되고 계량화되었다는, 곧 문명화되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난 씁쓸하다.

 

농기구는 만들어 쓰셨지만, 토종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 논농사를 크게 짓고 밭은 먹을 것만 조금 사다가 심는 게 다이다. 여느 집도 대부분 이와 마찬가지였다.

 

 

 

자, 오전 안에 이 일대는 다 둘러보고 가자. 다시 저 끝까지 가보자며 차에 올랐다. 다행히 상리 1구 302번지에서 많은 토종을 발견했다. 여기 사시는 김정순(77) 할머니는 그 맛이 좋아 집에서 먹으려고 토종으로 농사짓고 계셨다. 조선시금치라고 부르는 동그란 시금치. 이건 색시 때부터 심던 것인데, 봄에 심는다. 가을에는 여기 논농사가 바빠서 못 심었는데, 그럼 겨울을 난다며 자랑하신다. 다음 완두, 또 콩나물이 잘 되고 잘 무른다는 나물대콩, 키가 작은 건 맛이 없는데 이건 키가 크고 맛있다는 수수, 적팥, 녹두, 흰밥밑콩, 들깨를 얻었다.

 

흰밥밑콩을 두 손 가득 퍼 담아 주시는 김정순 할머니. 메주콩과 같은 모습인데 밥밑콩으로 쓴단다. 비리지 않고 맛있다니 그 맛이 궁금할 뿐이다.

 

빛깔이 참 예쁜 나물대콩. 농사를 깔끔하게 잘 지으신단 느낌이 집 안 구석구석에서 풍겨온다. 마당에는 어디서 잔디를 떠다가 심어 놓으셨다. 역시 정갈한 느낌의 집에서 뭐가 나와도 나온다.

 

키가 크다는 수수. 껍질이 검은색이었다. 까치수수가 아닌가 몰라?

 

 

이 집을 나와 조금 더 가니 길이 끝난다. 석모도의 한쪽 끝까지 다 돌았다. 지도를 확인하니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마을이 하나 더 있다고 나온다. 거기까지 다 돌아보고 점심을 먹어도 먹자.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차 한 대만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고 오른다. 그렇게 힘겹게 오르다 한마디 툭 던지신다. "이거 안철환이 차로 왔으면 오지도 못할 뻔했다." 그만큼 길은 험했다. 이렇게 험하게 들어가니 꼭 뭐 하나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지도의 마을 표시가 있는 곳까지 가니 과연 집이 몇 채 있다. 아니,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전에 교동도 갔을 때 저 바다 건너 보이던 집이 아닌가. 집의 입구에는 야생동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망으로 문을 달아 놓았다.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며 문을 열고 집에 다가갔다.

에이, 헛거다. 사람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냥 농막으로나 이용하는 걸까? 저쪽에도 이런 집이 하나 있었지만 그곳도 헛거가 분명하다며 그냥 나가자고 하신다. 헛걸음했다. 아니, 헛걸음은 아니다. 안완식 박사님은 틈틈이 이렇게 하나하나 내 발로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라고 힘주어 강조하셨다. 그 말씀이 옳다. 확인 안 하고 갔다간 똥 누고 밑 안 닦은 것마냥 얼마나 찜찜할지, 자다가도 생각나 벌떡 일어나겠다.

 

점심을 먹으러 이제 삼산면 소재지로 나갔다. 여기 말고는 별달리 먹을 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식당이라곤 다섯 개쯤. 별로 먹을 것도 없고 할 수 없이 국밥집에 들어가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난 서둘러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아까 눈여겨 보았던 집에 가보려고 어디즘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얼른 나와 뛰듯이 찾아간 곳, 일본식 가옥의 구조를 하고 있는 식당이다.

이곳 삼산면은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았던 곳. 그래서 이 근처를 한 번 둘러보고 싶었다. 이렇게 기회가 생겼으니 충분한 시간은 없어도 대충이라도 파악이나마 하고 돌아가고 싶다.

 

꼭 일본식 건물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뛰듯이 한걸음에 달려간 곳.

 

 

식당에 들어서니 할머니가 주인이시다. 인사를 드리고 이 건물의 유래를 여쭈었다. "건물이 예쁜데 이게 혹시 언제 지은 건가요?" "이거 70 몇 년에 지은 건데 왜 그러슈?" 아, 실망... 일정 때 지은 거라고 말씀해주셨으면 정말 좋을 텐데, 해방이 되고 지었다니 잘 모르겠다. 그럼 다른 건 없을까 하고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경찰이 뭐 하는 놈인지 슬쩍 묻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이 근처에 일정 때 지은 건물이 없는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잘 모르겠다는 말. 우리는 자기가 사는 곳에 참 무심하다. 이건 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잘 관심을 주지 않는다. 저 먼 유럽이나 미국을 동경하기 전에 나와 내 주변을 먼저 돌아보는 일이 먼저가 아닐까? 물론 큰 나라 다른 나라에 다녀오면서 느끼는 점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동네를 도는데 한 돈가스 집이 나왔다. 이 집도 아까 그 집처럼 일본식이다. 일본식 건물에 일본식 음식을 파니 혹시 여기가? 얼른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여기도 아니란다. 여기도 해방되고 지었단다. 그래서 나름 추리를 해 보았다. 여기도 일본사람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곳이니, 해방이 되고 나서도 일본사람들이 남기고 간 일본식이 좋은 거라는 인식이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건물을 이렇게 지은 건 아닐까?

터덜터덜 나와 동네를 더 살피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잘 됐다. 얼른 다가가서 할아버지께 이런저런 걸 여쭈었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임채윤인데, 올해 87세라고 하신다. 해방되고 개성에서 피난을 나와 여기에 정착하셨다. 먹을 게 없어서 지츠래기(찌끄러기)를 가져다 먹으며 참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상하신다. 자신이 여기 정착할 때쯤 있던 건물은 저기 학교 건물이라고 일러주셨다. 두 번 세 번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얼른 다가가서 살폈다.

 

 임채윤 할아버지. 나중에 석모도에 다시 가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할아버지 한 인물 하신다.

 

 

과연 학교 건물은 오래되어 보였다. 예전 익산대학교에 찾아가 보았던 이리농림의 건물이 떠올랐다. 그것과 똑같은 양식은 아니지만, 보통 이런 건물은 60년대에나 지었을 법하다. 그럼 할 수 없지만, 그저 속으로 이 건물이 일정 때부터 있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만 남겼다. 나중에 찾아가 학교에 들어가서 관계자와 이야기해 봐야겠다.

 

 언젠가 꼭 찾아가 봐야 할 곳. 삼산면의 초등학교 건물.

 

 

 밥을 먹고 났더니 피곤이 몰려온다. 둘이 다녀서 더 그렇다. 안완식 박사님도 피곤하신지 차에서 잠시 쉬며 일정을 조정하고, 회계 처리를 하시느라 바쁘시다. 신경 쓰랴 운전하시랴 정말 피곤하실 거다. 더구나 연세도 적지 않으시니 더 걱정이다. 무리하시다가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이번 프로젝트는 거기서 멈춰야 하니 별 탈이 없으셔야 한다. 젊은 사람도 힘든 일을 정말 지치지도 않고 하신다. 안철환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Sun Power! 이시다.

 

오후는 삼산면 옆동네부터 살피면서 시작했다. 석모 3리 구리안마을의 최주숙(60) 아주머니 댁에서 까만동부를 발견했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걸 대단하다며 쳐다보고 사진 찍고 조금 얻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신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 가치를 생각할 이유도 없으셨을 거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다 그렇다. 가까운 것에서부터 의미 부여와 가치 찾기, 그 작업이 끝나야 남의 것, 멀리 있는 것도 잘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까만동부가 담겨 있던 통. 허리에 차고 비료 등을 주는 데 쓰는 농기구이다. 예전 같으면 짚으로 짰을 텐데 이제는 프라스틱으로 나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전인지.

 

 

다시 차를 타고 좀 더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도 한창 공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왜 이리 추울 때, 특히 연말에 공사를 하느라 애쓸까? 그런 눈 먼 돈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만큼만 쓸 수 없는 체계가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지금은 하나의 관습처럼 굳었으니, 이에 걸맞는 용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연말공사 ; 남는 예산을 소모해 내년도 예산 배정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공사.' 식으로 말이다.

 

구리안마을 석모3리 744번지의 양곡례(81)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이제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고 하신다. 농사는 그저 습관처럼, 집에서 먹을 거라도 좀 하려고 하신다는 할머니.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였다. 농민에게 농사는 습관,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인 움직임. 봄이 오면 씨 뿌리고 가꿔서 거둬 먹는 행위이다. 생명을 이어가려는 본능이 농민을 움직이게 한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생명과 맞닿은 행위인 만큼 귀하디 귀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본능이다.

 

 양곡례 할머니 댁의 대문에는 가시나무를 해다가 달아 놓으셨다. 이 의미를 자세히 묻지 못했다. 그저 잡귀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 아닐까 추축해 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다 외지에 나가 있어 이 큰 집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사신다. 가슴이 짠하다. 가족 관계를 자꾸 깨부수는 이 사회가 걱정이다. 가족의 파괴, 파괴까지는 아니어도 핵가족사회로 가면 갈수록 인간은 고독하고 외로워 그 허전함을 무언가로 대신하려 한다. 든든한 관계망 안에 있을 때 인간은 편안함을 느끼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법인데, 자꾸 핵가족으로 쪼갠 뒤 그 허전함을 사회복지나 그런 걸로 메꾸려고 하니 왜 그렇게 쓸데없이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양곡례 할머니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진을 찍을 틈도 없이 생각이 막 샘솟아 오른다. 아픈 몸으로 농사지어 갈무리해 놓으신 검정동부, 검은팥, 적상추, 완두를 얻고 건강하시라는 말을 건네고 나왔다.

 

이후 석모도의 서쪽은 모두 펜션 단지가 차지하고 있었다. 강화도의 서남부가 그런 것처럼 석모도도 다르지 않았다. 동해안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관광단지인 것처럼, 서해안에서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그런가 보다. my car 시대는 관광의 일상화를 가져왔다. 이제 차만 있으면, 차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렇게 찾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업자들이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찾아 들어온다. 그럼 그 결과는? 입 아프게 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보문사나 보고 가자며 차를 세우신다. 보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토종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보문사에 꼭 보고 가야 하는 나무가 있으니 예외적으로 차를 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매표원은 끝끝내 거부했다. 원칙에 충실한 자세이니 그걸 뭐라고 탓할 수 없다. 대통령이 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보문사까지 가려면 먼 줄 아시고 차를 타고 가고자 하셨던 것인데, 걸어서 몇 분이면 간다는 말에 그럼 얼른 다녀오자고 재촉하신다.

 

 낙가산 보문사. 내심 보문사에 들렀으면 했다.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가 방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보문사 뒷산을 넘어서 왔다. 길이 뚫리지 않았을 당시에는 보문사까지 그렇게 오는 길이 가장 빨랐다고 한다.

 

 보문사의 멧돌. 이건 다카하시 노보루가 직접 그림까지 그려 남겨 놓은 그것과 똑같다. 70년의 시공을 넘어 그의 발자취를 느낀다.

 

 산에 가면 돌탑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걸 쌓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소원을 비는 건가? 여러 사람의 행위가 쌓이고 쌓이면 사회적 관습이 되고, 관습은 하나의 문화로 정착한다. 신이 많은 곳일수록, 소원을 많이 빈 곳일수록 그만큼 살기 팍팍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보문사를 나와 일주문 앞에 장사진을 이룬 할머니들의 좌판을 둘러보았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어 그냥 둘러보기만 하고 말았다. 장사로 잔뼈가 굵은 할머니들의 잇셈을 뿌리치느라 혼났다.

나머지 마을을 돌아보려고 차에 다시 올랐다. 오늘 안에 석모도를 다 돌 수 있겠다. 별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한 마을에 들어섰다. 삼산면 매음2리 519번지, 웃물이라고 하는 곳이다. 한자로는 상동이니 윗마을을 사투리로 웃물이라 하는 것이겠지. 내가 키우는 개와 비슷하게 생긴 개가 있는 집, 바로 박상덕(80) 할아버지 댁이다. 텃밭에 황차조가 보여 그 유래를 여쭈었다. 그랬더니 이건 본인이 심은 게 아니라 이 마을에 귀농한 젊은 사람이 지난해부터 심은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백경식인데 저쪽 집에 사니 가보라신다. 그 말씀대로 갔지만 아무도 없어 발길을 돌렸다.

 

마을에서 나오다가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마침 잘 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할머니께 토종이 있는지 물었다. 고순영(80) 할머니는 나이대답지 않게 키가 훤칠하게 크시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돌아나오시며 저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잘생겼겠다는 말을 하신다. 키가 크시다고 말씀드리니, 크면 뭐 하냐고 젊었을 때는 키가 커서 구박을 많이 당했다고 하신다.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오셨나 보다. 이 어르신 나이대의 분 가운데 살아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면 사나흘 밤새야 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할머니 집에서 퍼런콩과 텃밭에 서 있던 옥수수대에서 메옥수수를 챙겨서 나왔다.

 

차를 타고 가다가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다~! 할머니한테 가면 뭐라도 떡고물이 떨어진다. 가까이 다가가니 호박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할머니는 아까 보문사 앞에서 보았던 좌판 할머니들처럼 그곳에 나가 장사를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토종을 찾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좀 보자고 했는데 자꾸 사갈 거냐고 몇 번을 되물으신다. 연구하려고 그러니 조금만 얻자고 해도 장사셈을 먼저 하셔서 혼났다. 그렇게 할머니께 약콩과 선비콩을 얻어 나왔다.

 

호박꼬지를 만들어 내다 팔려고 준비하시던 유분남(79) 할머니. 장사로 잔뼈가 굵으셔서 그런지 혼났다.

 

 

이제 해가 간당간당 거린다. 아직 두세 마을쯤 남았는데 큰일이네. 해가 지면 문도 닫히고, 덩달아 사람의 마음도 닫힌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다. 서둘러 매음리 인내라는 곳을 둘러보았다. 이곳 101번지에서 노영조(67) 아저씨와 이옥련(61) 아주머니를 만났다. 두 분은 원래 이곳이 고향인데, 나가서 생활하다가 다시 돌아온 지 몇 년 되었다고 하신다. 외지에서 살다 오셔서 그런지 그냥 농사만 지으며 산 분들과 확실히 다르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

아주머니께서는 한창 농사에 재미를 붙이고 계신지, 농사 자랑이며 씨앗 자랑이 대단하시다. 이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알콩달콩 재밌게 농사지으시는 분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많았으면 좋겠다. 부엌 찬장에 얼마나 씨앗을 잘 보관하고 계신지, 안완식 박사님의 칭찬이 이어진다. 이렇게 안완식 박사님의 칭찬을 받은 집만 골라서 나중에 다시 찾아가 봐도 재밌겠다. 씨앗 전문가에게 칭창까지 받을 정도니 더 말이 필요 없겠다. 안완식 박사님은 칭창만이 아니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그동안 다니면서 하나둘씩 챙겨 놓았던 씨를 챙겨서, 여기 없는 것 가운데 심고 싶은 걸로 골라서 가지라며 씨를 퍼뜨리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이제 그 씨들은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겠지. 이옥련 아주머니께서는 시어머니에게 대물림했다는 완두를 내주셨다. 신품종은 비릿내가 나지만 이건 그렇지 않고 고소하고 맛있단다. 말려도 쭈글거리지 않고, 이른 품종이다. 완두는 벌레가 잘 생긴다면서 일부러 페티병에 넣고 마개를 아주 꽉 막아 놓았다고 한다. 참 괜찮은 보관법이다. 완두, 녹두, 팥은 보관할 때 벌레 때문에 걱정인데 이 방법을 한 번 써 봐야겠다. 또 무주에서 사왔다는 홍화를 조금 얻고, 강낭콩을 좀 얻었다.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마지막 장식했다.

 

 이옥련 아주머니의 보물창고. 아주머니에겐 더없이 예쁘고 소중한 씨앗들일 터이다.

 

 이옥련 아주머니 댁의 앞 들. 해가 넘어가고 논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다. 이제 석모도를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 선착장으로 다시 나가 강화로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차에 올라 좋은 기분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두 군데에 마을이 더 있었는데, 한 군데는 들렀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한 군데는 이미 어두컴컴해져서 보지 못했다. 사실 먼저 들른 곳에도 뭔가 캐면 나올 법했지만, 어둠이 깔리고 있던 만큼 할머니께서 맘을 딱 닫아 걸으셔서 더 머뭇거리면 폐가 되겠다 싶어 눈치봐서 나왔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완전한 어둠이다. 그래도 석모도에서 꽤 성과가 있었다. 시작과 끝이 좋으니 중간에 허탈하고 힘들었던 순간은 싹 잊혀진다. 내일 하루도 오늘만 같아라. 특히나 내일은 강화도 조사를 끝내는 마지막 날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면 좋겠다.

728x90

+ Recent posts